만나 주석, 사무엘상 0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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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사무엘상 서론

(1) 제목
유대인의 전통을 따른 히브리어 성경은 본래 사무엘서를 상하 구분 없이 한 권으로 취급하여 ‘사무엘’이라 불렀다.

(2) 저자
사무엘. 사무엘 사후의 이야기는 나단 혹은 갓이 기록한 것일 수 있다.

(3) 기록 연대
보수주의 학자들은 본서의 기록 시기를 분열 왕국 직후(B.C. 930년)로부터 사마리아 함락(B.C. 722년) 사이로 본다.

(4) 주제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삶 뿐만 아니라 민족 전체의 운명을 친히 섭리, 주관하신다는 사상과, 또한 하나님의 축복과 심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하에서 그 예정하신 뜻과 목적으로 귀결된다.


에브라임 산지. ‘에브라임 산지’는 팔레스타인 중안부에 위치한 구릉 지대로서, 이곳은 팔레스타인 남부에 위치한 유대 산지보다 훨씬 비옥하였으며, 특히 이곳의 서부지역은 더욱 그러하였다. 아울러 이곳은 가나안 정복 전쟁이 개시된 이후 이스라엘에 의해 제일 먼저 점령된 지역이었다. 또한 이 때문에 이 지역에 위치한 ‘실로’는 가나안 최초의 성지, 즉 여호와의 성막이 있는 장소가 되어 여호수아 시대와 사사 시대, 그리고 사무엘 시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정치 종교 사회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3절). 한편 이 지역이 에브라임 산지라고 불리게 된 이유는 에브라임 지파가 그 지역을 기업으로 분배받았기 때문이다(수 17:15). 그러나 에브라임 산지에 에브라임 지파만이 거주 한 것은 아니었다. 에브라임 산지의 남쪽은 베냐민 지파에게 기업으로 분배되었기 때문에 베냐민 지파 사람들도 역시 거주하고 있었다(수 18:11).

라마다임소빔. ‘라마다임소빔’은 ‘숩 족속의 두 고지(언덕)’ 또는 ‘숩 땅에 있는 고지들’이라는 의미로서, 사무엘 가문의 조상이었던 ‘숩’(혹은 ‘소배’, 대상 6:26)이라는 사람이 그곳에 정착함으로써 붙어진 지명이다(Keil, Fay, Smith, Driver). 아마도 두 개의 고지(언덕) 위에 세워진 듯한 이 ‘라마다임소빔’은 에브라임 산지 중 베냐민 지파 거주 지역에 위치하였다. 그리고 이곳은 예루살렘 북서쪽 약 8 km 지점에 위치하였으며, 단순히 ‘고지’(高地)라는 이름의 의미를 갖고 있는 ‘라마’와 동일한 지역이다(19절). 한편 ‘라마’는 사무엘이 태어난 고향이요, 그가 활동한 사역의 중심지이며, 또한 후일 사무엘이 죽어 장사된 곳으로, 사무엘 시대에 주요한 위치를 점하는 장소이다. 그런데 본 절에서 특별히 ‘라마다임소빔’ 이란 원지명을 사용한 이유는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많은 ‘라마’(언덕 마을, hilltown)가 있기 때문에, 그것들과 사무엘의 고향 ‘라마’와 서로 구별하기 위함이다(Keli, Smith). 그러나 이후의 상황에서는 ‘라마’라는 말로 간단히 표기하고 있다(2:11, 7:17, 8:4, 15:34, 16:13, 19:18, 25:1, 28:3). 한편 이 지역은 후일 신약 시대에 들어와서는 부자 요셉의 고향과 동일한 ‘아리마대’로 불려졌다(요 19:38).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 ‘엘가나’는 본문의 족보와 역대기의 복보(대상 6:1, 27-28)를 종합해 볼 때, 레위 지파의 후예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본문에서 그를 ‘에브라임 사람’ 이라 칭한 까닭은 그가 에브라임 지파의 후손이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그가 그 지역에 거주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레위 지파는 타지파처럼 일정한 기업을 받지 봇하고, 이스라엘 전국에 흩어져 살면서 그들의 종교 생활을 지도해야만 했었다(민 35:1-8 주석 참조). 또한 ‘라마’는 여호수아에 의해 정식으로 지정된 레위인의 성읍도 아니었다(수 21:17). 따라서 사무엘의 조상 ‘숩’은 자신의 조상에게 원래 할당된 지역을 떠나 바로 이곳으로 들어와 살게 된 듯하다(삿17:7-8).

여로함 … 엘리후 … 도후 … 숩. 이들은 사무엘의 부친 엘가나 가문의 조상들이다. 그런데 이들 조상들의 이름이 역대기의 족보에서는 약간 달리 나타나고 있다. 즉 대상 6:26-27에서는 ‘여로함-엘리압-나핫-소배’란 이름으로, 그리고 대상 6:34-35에서는 ‘여로함-엘리엘-도아-숩’이란 이름으로 각기 나타나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변화는 (1) 독법의 다양성과(Keil & Delitzsch Commentary) (2) 의도적인 개명, 그리고 (3) 시간의 흐름에 따른 철자의 변이 때문일 것이다(Pulpit Commentary). 여하튼 이와 같은 족보의 소개는 사무엘서의 역사성을 확증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이 성경은 대체로 어떤 주요 사건이나 인물을 소개할 때 그 사건이나 인물의 역사성부터 증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창 5:1, 10:1 11:27, 36:1 출 6:14-27, 대상 1-9장, 마 1:1-17, 눅 3:23-38).

 

1:2 두 아내가 있었으니. 어쩌면 후사를 얻기 위해서 였는지 모르겠지만, 당시 경건했던 엘가나가 중혼(重婚)했다는 사실은 사사 시대가 얼마나 영적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암울했던 시기였는지를 명백히 보여준다. 한편 신명기 21:15-17의 규레는 마치 일부다처제를 용인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신명기의 규레는 단지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아내를 여럿 둠으로써 부득이하게 야기될 수 있는 경우를 대비케 하는 성경적 해결책일 뿐이다.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고. ‘브닌나’는 ‘진주’, ‘보석’, ‘산호’ 등의 뜻을 지닌 이름이다. 이처럼 히브리 여성의 이름은 보석이나 꽃, 또는 동물의 이름과 관련된 것이 많이 나타난다. 한편 여기서 ‘자식’(히, 옐라딤)은 ‘어린이’ 혹은 ‘아들’의 복수형으로서, 이는 브닌나가 최소한 2명 이상의 자녀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한나는 자식이 없었더라. 한나는 ‘사랑스러움’ 또는 ‘은혜스러움’이란 의미를 지닌 이름으로, 히브리 사회에서 흔한 이름이다. 그러나 특별히 여기서 이 이름은 그녀가 자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많은 사랑을 받았고(5전), 또한 후일 하나님의 은혜까지도 많이 입었다는(2:21)실제적 사실과 잘 부합된다. 그러나 초기에 그녀는 아들을 낳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번민과 소외감에 휩싸일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특히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자녀의 출산을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증거로 삼은 반면(신 7:13-14, 시 107:13), 무자(無子)는 하나님의 징계나 저주의 결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창 20:18).

 

1:3 매년 … 예배하며. 경건한 레위인 엘가나는, 히브리 모든 남자는 매년 정한 기간에 중앙 성소로 올라가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율법규정(출 34:23, 신 12:5)에 따라 이 의무를 이행하였다. 물론 성경은 매년 세 차례씩 올라가야 한다고 말한다(출 23:17). 그러나 극히 타락했던 사사 시대의 정황 속에서 엘가나가 이 정도나마 신앙적 열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평가될 수 없는 것이다.

실로. 이곳은 당시 법궤가 보관된 곳, 곧 성소가 있는 지역이었다. 법궤(언약궤)는 처음에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 ‘길갈(수 4:19 주석 참조)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가나안 정복 후 땅을 분배할 동안에 ‘실로’(수 18:1 주석 참조)로 옮겨진 후 이때까지 이곳 살로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런 이유로 예루살렘 북쪽 약 32 km 지점에 위치한 ‘실로’는 여호수아 시대 말기로부터 사사 시대 및 사무엘 시대 초기까지 이스라엘의 종교적 중심지요, 정치적 주 무대이며,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다. 그러나 엘리 시대 말기에 블레셋 족속에게 법궤를 빼앗기고 실로가 파괴됨으로 말미암아 실로의 영광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5:1, 시 78:60-64).

만군의 여호와. [히, 여호와 체바오트] 이 명칭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축약어로서, 구약 성경에서 여기서 최초로 나온다. 이 명칭은 초기에는 이스라엘의 군대를 지휘하시는 하나님(삼상 17:45), 후에는 하늘의 천군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왕상 22:19)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명칭은 하나님게서는 하늘과 땅의 만물을 아울어 통치하는 분이심을 암시해 준다. 따라서 여기 이 명칭은 참된 경배와 제사의 대상이 되시는 분에게 적절히 적용되는 명칭이다(F.R. Fay, R. Payne Smith).

제사를 드렸는데. [히, 리즈보아흐] 제물과 감사의 현물, 그리고 기도가 포함된 광의적 의미의 제사를 말한다. 그러나 특히 여기서는 엘가나가 제사 완료 후 그 제물을 가족들에게 나눠주었고(4절) 또 그들이 그것을 함께 먹은 것(9절)을 볼 때, 여기서 엘가나가 드린 제사는 제사장의 몫 이외의 나머지 부분을 자신과 가족 또는 공동체 전체가 일정한 장소, 곳 성막의 뜰이나 성막의 별채(1:18)에서 함께 나누어 먹을 수 있었던 ‘화목제’를 가리키는 듯 하다(레 7:14, 30-36, 민 6:20, 신 18:1).

엘리. ‘엘리’는 제사장 가문 중 유력한 비느하스 가문의 후손이 아니고, 이다말(민 4:28, 33)의 후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혼란한 사사 시대 말기에 대제사장직과 사사직을 동시에 갖고 있었음을 볼 때, 그는 유명하면서도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Klein). 그러나 그는 자녀 교육 실패의 결과, 방탕한 두 아들로 인해 결국 불운한 말년을 맞게 된다(2:27-36, 3:11-14, 4:18). 자세한 내용은 2:36 주석을 참조하라.

홉니와 비느하스가 … 제사장으로 거기에 있었더라. 70인역(LXX)은 여기에 ‘엘리’도 삽입시켰으나 타당치 않다. 왜냐하면 당시 엘리는 노쇠한 관계로 제사장 업무를 감당치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추측컨데, 엘리는 제사장 업무를 자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사사의 직무만 감당한 것 같다(Keil & Delitzsch, R. Payne Smith). 그러나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불량자들로서 제사장의 소임을 감당하기에는 부적격자들이었고(2:12, 22), 이는 결굴 엘리 시대의 종말을 재촉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1:4 제사를 드리는 날. 모세 율법상 모든 히브리 남자가 일 년 3차씩 중앙 성소에 올라가 준수해야 할 절기는 무교절(유월절), 맥추절(오순절, 칠칠절), 수장절(장막절, 초막절)이었다(출 23:14-17). 그런데 이중 엘가나가 택하여 제사를 드린 날은 무교절(유월절)이었던 것 같다(Smith, Fay). 그 이유는 (1) 이 세 절기 가운데 유월절이 가장 큰 절기였고, (2) 또한 이 때는 전 가족이 함께 여호와 앞에 나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1년 1차 유월절에 중앙 성소로 올라가던 관습은 신약 시대에 이르러 보편화 된 것 같다(눅 2:41).

 

1:5 갑절. [히, 마나 아하트 아파임] 이 말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1) ‘아파임’을 ‘사람들’이란 의미로 이해하여 ‘사람들의 분깃’으로보는 견해(Gesenius), (2) ‘아파임’을 ‘분노’ 혹은 ‘슬픔’의 의미로 이해하여 ‘엘가나는 한나에게 분깃을 줄 때 슬퍼하였다’로 보는 견해(Vulgate), (3) ‘아파임’을 잘못 삽입된 단어로 이해하여 단순히 ‘한 분깃’으로 보는 견해(LXX), (4) 복수명사의 어미를 갖고 있는 ‘아파임’을 두 사람의 의미로 이해하여 ‘두 사람의 몫’으로 보는 견해(Keil, Delitzch) 등이다. 이와 같이 여러 해석이 나오는 것은 ‘아파임’이란 단어가 ‘콧구멍’(창 2:7, 애 4:20), ‘얼굴’(창 3:19, 사 49:23) ‘분노’, ‘슬픔’(11:6)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J.P Lange). 그러나 한나가 브닌나 보다 더욱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과, 여러 갑절을 줌으로써 자신의 호의를 표현했던 중근동 지방의 일반적인 관습(창 43:34)으로 미루어 보아 위의 견해 중 네 번째의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 일정기간 동안 한나가 아이를 임신하지 못한 것은 ‘사라’(창 11:30), ‘리브가’(창 25:21), ‘라헬’(창 29:31), ‘마노아의 아내’ 등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의 적극적인 섭리로 말미암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친히 모태(母胎)를 주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잉태하지 못하던 여인이 하나님의 능력이나 하나님의 경륜에 의해 자녀를 낳는 예가 많다(창 18:10-15, 21:1-4, 25:21, 30:22-24, 삿 13:3, 눅1:7, 57). 그러한 의미에서 여기 한나의 불임(不妊) 역시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로서, 곧 꺼져가는 이스라엘의 운명을 탄생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오묘하신 뜻과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한편, 이처럼 ‘육적인 출생’에 관한 하나님의 주관과 섭리는 역시 ‘영적인 출생’(중생)에 관한 영역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롬 11:36, 엡 4:6).

 

1:6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키 사가르 베아드 라흐마흐’를 직역하면, ‘그녀의 태를 닫으셨기 때문에’이다. 따라서 이 말은 ‘태의 문’을 열고 닫으시는 생명의 주관자가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보여준다.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 여기서 ‘격분하다’(히, 카이스)란 말은 ‘괴롭히다, 약올리다, 슬프게 하다, 충동질하다, 화나게 하다’ 등의 뜻이 있다. 그리고 ‘괴롭게 하다’(히, 라암)란 말 역시 ‘괴롭히다, 세게 뒤흔들다, 자극하여 분노케 하다’ 등의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브닌나가 무자(無子)한 한나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여자로 보고 온갖 방법으로 그녀를 괴롭혔음을 나타낸다(3절).

 

1:7 매년 … 그같이 하매. 이는 성소에 올라가 제사를 드린 후 화목제의 희생제물을 가족에게 나눠줄 때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는 일이 계속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하나를 향한 엘가나의 호의가 단순한 동정이 아닌 순수한 사랑에 근거했음을 깨닫게 되나, 바로 이 일로 인하여 브닌나는 시기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한나를 더욱 격분시키게 되었을 것이다(Keil).

 

1:8 어찌하여 울며 …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이 말은 엘가나가 한나가 우는 이유와 먹지 아니하는 이유를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니다. 이 말은 무자(無子)로 인해 겪는 그녀의 고통을 깊이 헤아리고 그녀의 슬픔에 동참하면서 진정으로 달래는 애정어린 위로의 말이다. 여하튼 본 절은 기쁨의 가족 잔치가 되어야 할 화목제사의 시간이 두 아내로 인하여 격분과 슬픔의 시간이 되고 말았음을 보여 준다. 이처럼 창조의 원리(창 2:21-25)에서 보여지는 아름다운 일부일처 제도가 아닌 일부다처의 가정 - 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가정, 야곱의 가정 등 - 에서는 항상 기쁨 보다는 슬픔이 도사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Matthew Henry).

 

1:9 그들이 … 먹고 마신 후에. 루터역은 엘가나의 위로를 받은 한나가 제사 음식을 먹었을 것이란 가정 하에 이 말을 ‘그녀(한나)가 … 먹고 마신 후에’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이말은 단순히 한나가 음식을 먹지는 않았으나(7절), 가족들이 먹고 마시는 잔치에 함께 참여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F.R. Fay, R. Payne Smith). 따라서 그녀는 공동 식사의 의식이 끝나자, 곧장 기도하러 가기 위해 일어났던 것 같다.

실로. 3절 주석 참조.

엘리는 … 앉아 있었더라. ‘앉아 있었더라’에 해당하는 원어(히, 야샤브)의 원뜻은 말 그대로 ‘거하다, 앉다’란 뜻이다. 그러나 성경 여러 곳에서 이 단어는 ‘직분을 수행하다’의 뜻으로도 사용되고 있다(신 17:18, 왕상 1:35, 46, 2:12). 이로 볼 때 당시 제사장 엘리가 문설주 옆에 앉은 것은 휴식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고유한 제사장 직분을 수행키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

여호와의 전. [히, 헤칼 여호와] 당시는 아직 ‘성전’이 건축되지 않아 ‘성막’에서 제사를 드렸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왕궁, 궁전’을 뜻하는 ‘헤칼’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은 대단히 의미 심장하다. 이는 그곳이 ‘만군(萬軍)의 여호와’께서 거처하시는 곳이기 때문이다(시5:7). 여기서 우리는 외형에 구애받음 없이 다만 만왕의 왕 되시는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곳이 곧 왕궁이요 궁전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문설주. [히, 메주자] 이는 성소의 회막 들에서 본당으로 통하는 입구에 세워진 문기둥이다. 아마도 성막이 실로에 오랫 동안(근 300년 이상) 머물게 되면서 성소로 통하는 휘장 입구 쪽에 이러한 문기등이 세워진 듯하다(Keil & Delitzsch). 그리고 그 문기둥(문설주) 옆에는 업무를 보기 위한 제사장의 고정된 자리가 마련된 것 같다(R. Payne Smith). 아무튼 이 ‘문설주’가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당시의 예배처소가 이동이 손쉬운 회막 내지 성막의 차원에서, 보다 견고하게 지어진 성소로 대체되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1:10 기도하고 통곡하며. 공동번역은 ‘흐느껴 울며 애원하였다’로 번역하여 그 의미를 생생하게 드러내었다. 진정 한나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모든 인간적 슬픔과 고통을 숨김없이 하나님 앞에 내놓고 애절한 심정으로 간구 기도를 드림으로써, 고통과 번민을 눈물의 기도로 승화시켰다.

 

1:11 서원하여 이르되 …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한나의 서원은 삭도를 머리에 대지 않겠다는 맹세가 수반됐다는 점에서 구약의 여러 곳에서 나오는 ‘나실인의 서원’과 맥을 같이 한다(민 6장, 삿 13:15). 그런데 이 나실인(Nazirite, 민 6:2 주석 참조)의 서원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자기 자식이 소명되었음(렘 1:5, 갈 1:15)을 확실히 인식한 어머니에 의하여(삿 13:12 이하), 태어날 자식의 평생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겠다는 신앙적 결단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서원은 전쟁과 관계되어 있으나, 사무엘의 경우는 성전 봉사와 관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 한편 나실인이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는 이유는 (1) 머리털을 보존함으로써 자신 위에 자신을 주장하는 자가 있음을 나타내며(고전 11:3-10), (2) 또한 머리를 기름으로서 자기 생명의 근원을 인식하고, 이울러 자기 위에 계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오직 그 분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고자 함이다. 민 6:5 주석 참조.

만군의 여호와. 하늘과 땅의 만유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잘 나타내주는 하나님의 명칭이다(3절). 한나는 바로 이같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의뢰하면서, 자신의 무자(無子)의 수치가 거두어질 것을 확실히 믿고, 소망 중에 그분께 간절히 호소하였다..

만일. [히, 임 라오] 여기서 이 말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나 의심 등을 표현한 말이 아니고, 성취를 거의 확신하는 간절한 믿음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F.R. Fay).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나실인으로서 자신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고자 할 때 서원자는 그 기간에 따라 (1) 일정 기간 동안, 또는 (2) 일평생 동안 그 서원 준수의 기간을 정할 수 있었다. 물론 여기서 한나는 아들을 낳을 경우, 그를 일평생 동안 하나님의 성소 봉사를 위한 나실인으로서 구별해 드릴 것을 서원한 것이다. 한편 이에 대하여 혹자는 주장하기를, 사무엘은 본래 레위 족속이기 때문에 한나의 이러한 헌신의 서원은 무의미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비록 레위인이라 할지라도 정식 성소 봉사는 30세 이상(민 4:3)으로 정해진 반차를 따라 일정기간 동안 행해졌기 때문에, 한나의 서원과 같이 아들을 어릴 때부터 성소에 거하도록 하면서 일평생 성소 봉사를 위해 구별하여 바치겠다는 서원은 분명 그 의미가 특별한 것이다(Keil). 아무튼 한나의 이 서원은 후일 그대로 지켜지게 되는데(27-28절),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사무엘)을 선지자로 소명함으로써(3:20) 더욱 고상한 형태로 한나의 서원을 승화시켜 주셨다(Lange).

 

1:12 12-14절. 일반적으로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것이 당연시 되던 당시의 상황에서 입술만 움직이며 기도하는 한나의 기도는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될 수 있었다(Bunsen). 그러므로 엘리 제사장은 그같은 한나의 모습을 보고 그녀가 잔치에서 포도주를 많이 먹고 취한 줄로 착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는 음주가 다양한 종교적 행사와 관련되었고, 따라서 엘리는 때로 사람들이 술에 취하여 성소를 소란스럽게 하는 광경을 목격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엘리는 바로 이같은 자신의 경험에 의거하여 슬픔이 많은 한 여인의 상처를 건드렸다.

 

1:13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당시 한나의 기도는 자신의 기도에 스스로 완전히 몰입하여 하나님 앞에 온 심령을 토로하는 깊고도 은밀한 내적 기도였다. 또한 실로 이런 기도는 간절한 소원과 깊은 신앙심 없이는 하기 힘든 차원 높은 고상한 기도였다(Pulpit Commentary).

엘리는 …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물론 엘리의 판단처럼 때로 술에 취한 상태로 성소의 규율을 어지럽힌 자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엘리는 이 말은 분명 이스라엘의 사사요 제사장으로서 엘리의 쇠퇴한 영향력과 감화력을 반영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만일 엘리 제사장 자신이 한나의 기도와 같은 영적이고도 내적인 조용한 기도의 경험을 많이 체험했더라면, 그는 한나의 기도 모습을 ‘주목하는 동안’ 충분히 그 진실을 파악했을 것이기 때문이다(F.R. Fay). 그러나 말년의 엘리 제사장은 그 어눌한 판단력으로 한나의 참된 기도의 모습을 단지 술 취한 자의 주정 쯤으로 생각하고 말았다.

 

1:14 없음.

 

1:15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한나의 눈 언저리가 붉게 물든 것은 결코 ‘포도주나 독주’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자(無子)한 여인으로서 겪는 모든 인간적인 고통과 수모를 하나님 앞에 모두 아뢰면서 흘린 그 ‘눈물’ 때문이었다(Matthew Henry).

포도주나 독주. ‘포도주’(히, 야인)는 발효된 포도즙을 가리키는 상용어이다. 그리고 ‘독주’(히, 쉐카르)는 ‘취하다’라는 뜻의 어근에서 파생된 말로서, 과실이나 곡류로 만든 취하게 하는 술이다. 이것은 넓은 의미로는 포도를 포함한 모든 재료로 빚어진 것을 가리키지만(민 28:7), 일반적으로는 곡류로 만들어진 것만을 뜻한다. 한편 이것들은 전적으로 헌신된 나실인들에게 금지된 것인 만큼(민 6:3 주석 참조), 헌신의 자세가 요구되는 한나와 같은 성막 출입자에게도 마땅히 금지되어야 했다.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문자적으로는 ‘내가 나의 심령을 쏟아 놓았다’란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서 ‘쏟아 놓았다’(히, 샤파크)라는 단어는 ‘부르짖다’의 의미로도 쓰인다(시 102:1). 아울러 ‘신뢰하다’라는 동사의 의미로서 사용되기도 했다(시 62:8). 따라서 ‘내가 나의 심령을 쏟아 놓았다’라는 말은 하나님께 자신의 어려움을 전적으로 의뢰하면서 그 문제의 해결을 부탁하는 온전한 신앙의 표현임을 알 수 있다(벧전 5:7).

 

1:16 악한 여자. [히, 바트 벨리야알] 문자적으로 ‘벨리알의 딸’이라는 뜻. 원래 ‘벨리알’은 ‘무가치람, 사악함’ 등의 뜻을 지닌 추상명사이나, 후에는 고유 명사화 되어(고후 6:15) (1) 혼돈이 세력(시 18:5), (2)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악행자(삿 19:22), (3) 하나님의 뜻과 상반되는 행동을 하는 자(10:27) 등에게 적용되었다. 따라서 여기서 ‘악한 여자’란 다른 사람에게 해나 끼치는 사악하고 전혀 무익한 여자를 뜻한다.

 

1:17 평안히 가라 … 원하노라. 한나의 겸손한 해명을 듣고, 제사장 엘리는 자신의 섣부른 꾸중(14절)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오히려 한나에게 축복을 빌어 주었다. 한편 여기 엘리의 이 말은 ‘예언’의 말이 아니라, 제사장으로서 빌어줄 수 있는 ‘축복’의 말이다(Keil).

 

1:18 당신의 여종이 … 원하나이다. 이것을 카일(Keil)의 견해처럼, 한나가 제사장 엘리에게 중보 기도를 요청한 말로 이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따라서 이 말은 지금 엘리가 한나 자신에 대한 오해를 풀고, 대신 복을 빌어주는 호의를 베풀어 주었듯이(17절), 앞으로도 그와 같은 혹은 그 이상의 호의를 계속적으로 베출어 주기를 바란다는 의미로 이해햐여야 한다.

가서 먹고. 심령의 모든 괴로움을 토로한 깊은 내적 기도를 통하여, 그리고 제사장의 축복을 통하여 모든 근심과 슬픔을 해소한 한나는 성소의 뜰을 떠나 성소에 딸린 여러 방 중의 하나, 곧 자신의 가족들이 제물을 나눠 먹고 있을 곳으로 가서 그들과 함께 진정 기쁜 마음으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1:19 라마. 1절의 ‘라마다임소빔’을 참조하라.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자식을 낳는 문제와 관련하여 이같은 표현이 야곱의 아내 라헬의 경우에 있어서도 사용되었다(창 30:22). 한편 성경에서는 한나 외에도 아들을 낳지 못하여 하나님께 간구한 여인들, 즉 이삭을 낳기까지의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창 15:1-21:7). 요셉과 베냐민을 낳기까지의 야곱의 아내 라헬(창 30:1-24), 삼손을 낳기까지의 마노아의 아내(삿 13:2-25), 그리고 세례 요한을 낳기까지의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가(눅 1:5-58)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은 (1) 기도의 응답으로 늦게 출생된 자식들은 모두 부모에게 하나님의 선물로 인정되었다는 점, (2) 또한 그 자식들은 모두 하나님께 특별히 헌신된 신앙의 인물들이 되었다는 점이다. 한편, 그런데 여기서 ‘생각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자카르’는 ‘표시하다, 기억하다’란 뜻으로서, 항상 마음속 깊이 새기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창 8:1, 느 5:19, 시 25:7). 이처럼 가난하고 슬픈 마음을 가진 자의 간절한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께 가납된다.

 

1:20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보통 아이의 탄생 과정에서 겪은 경험이나 특별한 사건, 또는 바라던 소망 등을 근거로 하여 어머니가 자식의 이름을 짓는 고대 중근동의 풍속에 따라(창 4:1, 29:32-35, 35:18, 눅 1:16), 한나는 지금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사무엘’로 지었다. 그런데 ‘사무엘’이란 이름의 의미에 대하여는 여러 견해가 있다. 즉 (1) ‘사무엘’을 ‘쉠’(‘이름’이란 뜻)과 ‘엘’(‘하나님’이란 뜻)의 합성어로 보고, 곧 ‘하나님의 이름’이란 의미를 지닌다고 보는 견해(Gesenius), (2) ‘사무엘’을 ‘구하다’(ask for)란 뜻의 ‘쇠알’과 ‘하나님께’란 뜻의 ‘메엘’의 합성어로 보고, 곧 ‘하나님께 구했다’란 의미를 지닌다고 보는 견해(B.D.B), (3) ‘사무엘’을 ‘듣다’란 뜻의 ‘샤마’와 ‘하나님’이란 뜻의 ‘엘’이 합성되고 여기서 ‘아인’이 탈락되어, 곧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란 의미를 지닌다고 보는 견해(Ewald)등 이다. 이러한 견해 중 그 어원학상 세 번째의 견해가 가장 타당한데, 두 번째의 견해는 단지 ‘사무엘’이란 이름을 짓게된 해석과 배경일 뿐이다(Keil & Delitzsch). 그러므로 ‘사무엘’이란 이름은 문자적으로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란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한나는 사무엘의 출생이 하나님의 기도 응답임을 확인하면서 그같은 이름을 지었음에 틀림없다. 한편 성경에서는 그와 같은 뜻의 이름을 또 발견할 수 있는데, 즉 ‘스므엘’(민 34:20, 대상 7:2), ‘이스마엘’(창 16:11) 등이 그러한 뜻의 이름이다.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이 말은 한나가 아들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라는 의미의 ‘사무엘’이라고 지은 중대한 배경을 알려준다. 왜냐하면 만일 한나가 하나님께 구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는 들으실 일도 없으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1:21 매년제와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에. ‘매년제’는 이스라엘 민족이 해마다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지킨 희생제사의 일종으로서, 가족 전부가 참여하는 제사였다(2:19, 20:6). 그러므로 이 때는 각종 화목제물들과 한 해의 소산물 중 가장 좋은 것들, 그리고 여호와의 성소에 바칠 십일조 등을 가지고 중앙 성소로 올라가야 했다(신 12:17-18, Hengstenberg). 그리고 ‘서원제’는 하나님 앞에 올린 서원(vow)을 효력이 있도록 확증키 위하여 드리는 제사이다. 한편 모세 율법에 따르면 비록 한나가 사무엘을 평생 하나님 전에 바치겠다고 서원하였다 할지라도(11절), 그녀의 남편 엘가나는 그 서원을 무효화 시킬 수도 있었다(민 30:6-8). 그러나 엘가나는 그 서원을 기꺼이 인정하였고, 그런 뜻에서 그는 하나님께 서원제를 드리기로 한 것이다.

 

1:22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서원한 한나는 그 서원을 성실히 지킬 생각으로, 하나님의 전에 올라가고 싶은 마음을 일단 자제하였다.

아이를 젖 떼거든 … 여호와 앞에 뵙게 하고. 아이가 하나님의 전에 평생 바쳐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양육이 된 후에야 가능했다. 대개 중근동 지역에서는 이유(離乳) 시기를 타지역 보다 훨씬 긴 약 3년 정도로 잡았다(참조, 마카비 2서 7:27). 그러므로 이 기간이 지나면 사무엘도 어느 정도 자라서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2:22)에게 맡겨져 육체적으로 양육될 수 있었고 또한 제사장에 의하여 영적으로도 훈련될 수 있었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슈미트(Schmidt) 같은 학자는 3년 정도 된 아이는 엘리 제사장에게 오히려 부담만 될 뿐이라는 가정하에서 아이가 젖뗀 후 13살까지는 어머니의 손에서 양육되었을 것이란 추측을 한다. 그러나 이는 벌로 타당성이 없는 견해이다(Keil, Fay). 왜냐하면 그처럼 서원하여 성소에 바쳐진 어린 아이는 제사장이 직접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에 의해 양육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Gerlach).

거기에 영원히 있게 하리이다. 사무엘은 레위인이므로 당연히 성소에서 봉사를 할 수 있었다(1절). 그렇지만 일반적 원리대로 한다면, 그의 봉사 가능 기간은 30세에서 50세까지이다(민 4:30). 그러나 어머니 한나의 서원에 따라 사무엘은 ‘평생’(11절) 하나님 앞에서 봉사할 수 있게 되었다. 11절 주석 참조.

 

1:23 젖 떼기까지. 일반적으로 히브리 어머니들이 자식의 젖을 떼는 시기는 아이가 3살되는 때이다(마카비 2서 7:27). 그러나 유대 학자들 중 라시(Rashi)는 22개월로, 그리고 킴치(Kimshi)는 24개월로 보기도 한다(J.P. Lange).

여호와께서 …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17절에서 엘리 제사장이 한나에게 한 말처럼, 엘가나의 이 말 또한 한나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남편 엘가나의 간절한 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혹자(Rabbins)의 생각처럼 엘가나의 이 말을, 그가 사무엘의 출생과 봉사에 관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직접적인 계시를 받고 한나에게 예언한 말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이다(Keil & Delitzsch).

 

1:24 수소 세 마리. 25절에는 ‘수소’(히, 파르)가 단수 형태로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에 근거하여 70인역(LXX)과 일부 역본들(Syriac, Arabic Version)은 여기 ‘수소 세 마리’를 ‘삼 년 된 수소’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옳지 못하다(Thenius). 왜냐하면 25절의 기록은 단순히 아이를 위하여 사용된 제물이 수소 한 마리 뿐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세 마리의 수소 중 한 마리는 아이를 주께 바쳐 평생 성전에서 봉사케 하는 의식과 관계된 특별 번제용이며, 또 하나는 엘가나의 가족이 매년 드리던 매년제의 제물이다. 그리고 나머지 한 마리는 서원을 이행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기 위한 감사의 제물이었음이 분명하다(Pulpit Commentary).

밀가루 한 에바. ‘에바’는 구약 시대에 고체의 부피를 측정하는 단위로서, 에바는 약 23리터 가량이다. 그런데 한 마리의 수소를 번제로 바칠 경우 밀가루 한 에바의 십분의 삼(3/10)이 필요하다는 민수기 15:8-10의 규정에 비추어 볼 때, 여기 ‘밀가루 한 에바’는 수소 세 마리를 제물로 바칠 때 소용되는 밀가루의 분량임이 분명하다(Keil, Smith).

 

1:25 없음.

 

1:26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이같은 표현은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에서 주로 발견되는 독특한 맹세의 방식이다(14:39, 삼하 14:19, 왕상 1:29, 왕하 2:2). 그런데 이러한 형식의 맹세는 자신이 지금 언급하는 말의 진실성을 강력히 호소하고, 또한 그 말이 상대에게 그대로 받아들여지기를 간절히 소원할 때 사용되었다.

서서 … 기도하던 여자라. 선 자세로 기도를 드리는 것은 그 당시의 보편적 습관이었다(창 18:22, 19:27). 그러나 헌신을 깊이 다짐할 때나 진실한 기도를 드릴 경우 종종 무릎을 꿇거나 몸을 땅에 엎드려 기도를 하기도 하였다(왕상 8:54, 대하 6:13, 스 9:5). 그런데 여기서 한나의 이 말은 반드시 그녀가 선 자세로 기도를 드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제사장이 보던 앞에서 열심히 기도를 드렸다는 사실, 그 자체를 언급하는 말이다.

 

1:27 여호와께서 … 허락하신지라. 여기서 한나는 사무엘의 출생이 전적으로 자신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요, 또한 은총의 선물임을 고백하고 있다. 사실 오랜 기간동안 무자(無子)로 인해 당한 온갖 고통과 수모를 생각할 때, 어렵게 얻은 자식을 여호와의 전에 바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나는 그 아들이 ‘하나님의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자신의 서원을 변치 않고 그 아들을 여호와께 도로 바칠 수 있었다. 결국 이러한 한나의 신앙을 귀하게 보신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그 정성과 신앙을 기억하시고, 그녀에게 사무엘 외에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허락해 주셨다(2:21).

 

1:28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한나의 이 말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복한 자만이 할 수 있는 결단이다. 여기서 한나가 하나님께 사무엘을 드리겠다고 한 것은 일시적인 위탁이 아닌 영원히 양도하겠다는 뜻이다. 실로 그녀는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고(욥 1:21), 아울러 하나님께 대한 서원의 존엄성을 깨닫고 있었으므로(시 15:4) 모성애를 초월한 헌신적 결단을 할 수 있었다. 한편, 여기서 ‘드리나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샤울’은 직역하면 ‘요구되다, 구하여지다’란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요구를 듣고 그 아이를 주셨으므로, 자신도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여 그 아이를 바친다’는 뜻이다(Fay, Calvin).

그가 … 경배하니라. 문자적으로는 ‘그가 경배했다’(히, 이쉬타후)란 뜻이고, ‘그 아이’(개역한글판)란 말은 없다. 그런데 여기서 ‘그’라는 3인칭 단수 대명사를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개역한글판 성경처럼 ‘그’를 ‘사무엘’로 볼 경우, 당시 3살짜리 사무엘이 경배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인 듯하다. 그래서 어떤 사본 및 역본들(벌겟역, 수리아역, 아랍역)은 이 말을 복수 형태의 ‘그들’(이쉬타하우)로 번역하여, 곧 ‘엘가나와 그의 가족이 경배했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이처럼 히브리 사본을 고치는 것 역시 무리이다. 그러므로 가장 타당한 해석은 ‘그’를 ‘엘가나’로 보는 것이다. 즉 한나가 제사장에게 아들을 바쳤을 때 남편 엘가나는 아직 성소에서 여호와께 경배하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기 때문에, ‘엘가나는 경배하니라’라고 번역함이 타당할 듯하다(Keil & Delitzsch). 더욱이 다음 장에서 곧이어 한나의 찬양(2:1-10)이 언급되는 것은 아직 엘가나와 한나가 모두 여호와의 성소를 떠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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