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주석, 사사기 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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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길르앗 사람. 길르앗 땅에 사는 거민을 가리키거나 아니면 므낫세 지파 중 길르앗 가문의 후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10:3 주석을 참조하라.

큰 용사. 이 말의 원어 ‘깁보르 하일’은 일반적으로 ‘전쟁에 능한 용사’를 의미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재산이 많고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사람(룻 2:1)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전쟁 영웅 입다에게 붙여진 호칭이므로 첫 번째 의미를 따라야 한다.

입다. 뜻은 ‘하나님이 열다’이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그의 앞길을 열어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게 하신 것과 관련된 것 같다. 히브리서 기자는 입다를 ‘믿음의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언급하였다(히 11:32).

기생이 … 낳은 아들. ‘기생’의 원어 ‘이샤 조나’는 돈을 벌기 위해 자리를 옮겨 가며 윤락 행위를 하는 창녀를 가리킨다. 이런 입다의 출신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심을 입었으며, 히브리서에 열거된 신앙인의 명단에 포함되었다(히 11:32). 이런 사실은 아무리 비천한 신분에 속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은총과 권능으로 말미암아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준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보시지 않으신다(삼상 16:7).

 

11:2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입다의 경우와 유사하게, 아브라함의 서자였던 이스마엘도 상속 문제로 집에서 쫓겨난 적이 있었다.

기업. 원어 ‘나할’은 일반적으로 ‘선대로부터 상속받은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문맥에 따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한편 구약 시대에는 기업의 상속에 관한 규례가 상당히 엄하였으며 그 권리는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 기업 상속에 관한 규례는 다소 불공평한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 이스라엘의 부권 중심주의적인 사상에서 비롯되었다. 그 불공평한 면 중의 하나가 바로 노예나 첩이 낳은 아들에 대한 상속권의 제한 조치였다. 이런 이유에서 입다는 아버지의 적자들에게 학대받으며 집에서 쫓겨난 것이다.

 

11:3 돕 땅. 이스라엘 지경의 바깥에 위치하며, 아람 사람들과 인접해서 살던 이방인 곧 돕 사람이 거주하던 지역이다(삼하 10:6). 이곳을 길르앗 라못에서 동북쪽으로 약 25 km 정도 떨어진 ‘엘타이베’와 동일시하는 학자도 있으나(Cundall)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잡류. 원어 ‘아나쉼 레킴’은 윤리적으로 ‘무가치한 사람들’이란 의미이다(B.D.B). 여기서는 일정한 직업도 없이 떠도는 무리들인 건달들을 가리킨다(9:4, 삼하 15:1, 대하 13:7).

함께 출입하였더라. 잡류가 입다를 추종했다는 의미이다(NIV). 아마 이들은 돕 땅에서 완전히 정착하기 위해서 입다를 중심으로 단합하여 주위에 있는 여러 종족들과 싸웠을 것이다. 그리하여 점차 이러한 소문은 길르앗 땅에까지 알려졌을 것이다(5-6절).

 

11:4 얼마 후에. 입다가 형제들에게 추방되어 돕 땅에 거한 지 어느 정도 시일이 경과한 때를 의미한다. 이때는 암몬이 이스라엘을 압제한 지 18년째 되는 해이기도 하다(10:8).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하니라. 암몬 사람이 길르앗에 진을 치고서 이스라엘을 대적하려 한 것(10:17)을 가리킨다.

 

11:5 입다를 데려오려고. 길르앗 장로들은 돕 땅에서 활약하던 입다의 명성과 세력에 대한 소문을 이미 듣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위기가 닥치자 체면 불구하고 입다에게 도움을 청하려 하였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은 변덕스럽고 간사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의 간사한 마음까지도 이용하셔서 입다를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우셨다.

 

11:6 장관. 원어 ‘카친’은 일반적으로 군대 장관을 의미한다(수 10:24, 단 11:18). 즉 길르앗 장로들은 암몬 족속의 침략에 맞서 싸우기 위해 입다를 자기들의 군사적 지도자로 삼으려 한 것이다.

 

11:7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실제적으로 입다를 미워했던 사람들은 장로들이 아니라 그의 형제들이었다(2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절에서 입다는 장로들도 자기를 미워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혹자는 그 장로들 가운데 입다를 쫓아낸 형제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Goslinga). 그러나 장로들은 단지 길르앗의 지도자로서 입다 형제들의 이기적인 행동에 대해 암묵적으로 동조했을 것이다. 따라서 입다는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장로들을 책망했을 것이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쫓아내다’의 원어 ‘가라쉬’는 ‘국외로 추방하다’, ‘생업의 터전으로부터 몰아내다’는 뜻이다. 이는 곧 입다의 형제들이 입다에게서 기본적인 생존권을 박탈했음을 의미한다.

 

11:8 머리가 되리라. ‘머리’의 원어 ‘로쉬’는 ‘지도자, 왕, 수령, 장관’ 등과 같이 ‘우두머리의 지위에 앉은 자’를 가리킨다. 길르앗 장로들은 입다가 군대 장관으로 출전하여 암몬 자손을 물리치게 되면 그를 길르앗의 최고 지도자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11:9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넘겨 주시면. 입다는 전쟁의 승패가 여호와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형제들에게 쫓겨 이방인의 땅 돕에 거했으나 여호와 하나님을 잊지 않고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Matthew Henry). 그는 기생의 아들로서(1절) 배다른 형제들에 의해 쫓겨나는 수모를 당했으며(2절) 이방인의 땅에서 잡류와 함께 지내면서도(3절) 여호와에 대한 신앙을 잃지 않았다. 여기에 입다의 위대한 신앙이 암시되어 있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 가운데 하나로 입다를 언급한 것이다(히 11:32).

내가 과연 너희의 머리가 되겠느냐. 이것은 형제들에 의해서 쫓겨났던 과거를 회상하면서 혹시라도 장로들이 약속을 번복할 것을 염려하여 던진 질문일 것이다. 즉 ‘너희는 나를 진실로 너희의 머리로 삼을 것이냐?’의 의미일 것이다.

 

11:10 여호와는 우리 사이의 증인이시니. 이 말은 히브리인들 사회에서 행해지는 맹세의 한 형태이다. 구약 시대에 대개 맹세할 때 ‘여호와의 사심으로’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8:19, 룻 3:13, 삼상 14:39, 삼하 4:9, 12:15, 왕하 2:2, 6, 렘 4:2, 5:2). 이처럼 히브리인들이 맹세할 때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한 것은 최고의 권위와 심판권을 하나님께 두는 데서 비롯되었다.

 

11:11 이에 입다가 … 함께 가니.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의 제안과 약속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동행한 것은 그 제안 자체에 흡족하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무엇보다도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그의 열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를 자기들의 머리와 장관을 삼은지라. 길르앗 백성들은 입다를 자기들의 군대 최고 지휘관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사사와 같은 최고 재판자로 삼았다. 백성들은 입다에게 이러한 지휘권을 줌으로써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구심점을 마련하게 되었다.

미스바. 베냐민 지파의 미스바(수 18:26)가 아닌 길르앗 지방의 미스바를 가리킨다. 10:17 주석 참조.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아뢰니라. ‘여호와 앞에’라는 표현으로 보아 길르앗 백성들은 입다를 사사로 세우는 어떤 의식을 행했던 것 같다(Cassel). 물론 본 절과 본문의 문맥 속에는 전혀 암시가 없지만, ‘여호와 앞에’란 말이 특별히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되어 있음을 생각해 볼 때(Hervey), 길르앗 백성들은 입다를 사사로 세우며, 전쟁을 시작하기에 앞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Goslinga).

 

11:12 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여기서 입다는 이스라엘의 대표자로서 암몬 왕과 협상하는 입장에 있으므로 ‘너’와 ‘나’라는 대표 단수를 사용하고 있다. 즉 이제 입다는 이스라엘의 대표자로서 암몬 족속의 대표자인 암몬 왕에게 이스라엘을 치게 된 근거를 묻고 있는 것이다(Keil & Delitzsch).

 

11:13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과 요단까지. 이스라엘과 암몬 간에 분쟁거리가 된 지역은 북으로 얍복 강, 남으로 아르논 강 그리고 서쪽으로 요단 강, 동쪽으로 시리아 광야(22절)로 둘러싸인 지역이었다. 이 중 얍복 상류의 서쪽 지역은 한때 암몬인들에게 속했으나 아모리 족속에게 정복당했으며 그 뒤 이스라엘 차지하여 갓 족속에게 분배되었다(수 13:25).

내 땅을 점령했기 때문이니.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요단 동편 지역을 점령할 때 암몬 자손의 땅을 빼앗은 적jd 없다(민 21:24). 그럼에도 암몬 왕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기들의 땅을 빼앗겼다고 말한 것은 자기들이 아모리인들에게 빼앗긴 ‘랍바 앞의 아로엘까지’(수 13:25)의 땅을 일컫는 것이다(23절). 그러므로 암몬 왕이 한 이 말은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암몬과 모압 사람들을 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 때문에(신 2:9, 19) 의도적으로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다(Masius).

 

11:14 14-15절. 입다는 암몬 왕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암몬 자손의 땅 뿐만 아니라 모압 땅도 취하지 않았다고 말함으로써 출애굽시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과 암몬 자손을 치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성실히 수행했던 점을 상기시켰다.

 

11:15 모압 땅. 요단 강 동쪽의 기복이 심한 고원 지대이다. 동으로는 아라비아 사막, 서로는 사해 그리고 남으로는 세렛 시내와 북으로는 아르논 강으로 둘러싸여 있는 지역이다.

 

11:16 가데스. 이스라엘 역사와 매우 밀접한 곳으로 성경에서 ‘가데스바네아’라는 이름으로 널리 불려졌다. 특히 이곳은 출애굽시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모리 족속에게 패하여 도피했던 장소였으며(민 13-14장),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쳐서 물이 솟아나게 했던 곳이다(민 20:1-11). 그리고 모세가 에돔 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이 에돔 땅을 통과하도록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곳이기도 하다(민 20:14-21). 오늘날 이곳은 ‘아인 케디스’(Ain Qudeis)로 불려지고 있는데, 시내 반도의 신 광야에 위한 곳이다.

 

11:17 그와 같이 사람을 모압 왕에게도 보냈으나. 민수기 20장에 모세가 에돔 왕에게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으나 모압에 보낸 기록은 없다. 그런데 입다는 모세가 가데스에서 모압 왕에게도 에돔 왕에게 보낸 것과 똑같은 요청을 했던 것처럼 설명하였다. 이것은 입다가 출애굽 당시의 역사를 잘못 안 것이 아니라, 성경에는 언급되지 않은 구전이나 여호와의 전쟁기(민 21:14)와 같은 기록에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Goslinga, Hervey).

 

11:18 아르논 저쪽. 아르논 강은 아라비아 산에서 발원하여 모압과 아모리의 경계를 이루며 사해로 흘러들어간다(민 21:13). 따라서 ‘아르논 저쪽’은 모압 북쪽, 곧 아모리 족속이 사는 땅을 가리킨다.

 

11:19 헤스본 왕 곧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 아모리 족속의 왕인 시혼이 헤스본 왕으로 불려진 것은 아모리 족속의 중심 도시가 헤스본이었기 때문이다. 헤스본은 요단 강이 사해로 흘러들어가는 지점의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아르논 강의 복쪽에 있는 도시이다. 이곳은 요단 동쪽에 있는 주요 도시 중 하나로서(사 15:4, 렘 48:2) 요단 동쪽에서 요단 서쪽의 여리고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한편 이곳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당시, 그들의 노정을 방해하다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점령되었다(민 21:24).

우리의 곳. 요단 서쪽 가나안 지역을 가리킨다. 본 절과 평행 구절인 신 2:29에는 보다 구체적으로 ‘요단을 건너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땅에’으로 언급되어 있다.

 

11:20 야하스. 헤스본 왕 시혼이 이스라엘 백성과 전쟁을 시도하다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패하고 만 곳이다(민 21:23, 신 2:32). 한편 이곳은 아르논 강과 헤스본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헤스본 남동쪽 11 km 지점에 있는 오늘날의 ‘길벳 엣 데임’(Khirbet et-Teim)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스라엘이 이곳을 점령한 뒤 처음에는 르우벤 지파에게 주어졌으나 후에 레위 지파인 ‘므라리 자손’에게 주어졌다(수 21:36).

 

11:21 여호와께서 … 넘겨 주시매. 과거 가나안 정복 사업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음을 특별히 강조함으로써, 성지 반환 거부의 입장을 천명하고 있다.

 

11:22 입다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모리 족속에게서 빼앗은 땅을 열거함으로써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던 길르앗 지방이 암몬 자손의 땅이 아님을 입증하고 있다.

광야. 모압 광야로서 모압 동편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아모리 족속의 땅으로 들어갔다(민 21:13, 신 2:8).

 

11:2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을 암몬 왕이 차지할 권한이 전혀 없다는 강한 어조의 말이다. 이는 곧 가나안 땅에 대한 이스라엘 소유권의 합법성을 주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11:24 네 신 그모스. ‘그모스’는 모압의 전쟁 신이자 국가 신이었으며(왕상 11:33, 왕하 23:13), 모압은 그모스의 백성으로 불려졌다(민 21:29, 렘 48:46). 그리고 암몬의 국가 신은 ‘밀곰’으로도 불려진 ‘몰렉’(말감)이었다. 10:6 주석 참조. 그런데 입다가 암몬의 신이 ‘그모스’인 것처럼 표현한 것은 당시 암몬 족속들도 모압의 신인 그모스를 섬기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아마 암몬 자손들에게는 전쟁 신이 특별히 없었으므로 모압의 전쟁 신인 그모스를 섬겼던 것 같다(Wycliffe).

 

11:25 네가 … 발락보다 더 나은 것이 있느냐. 여기서 ‘나은’의 원어 ‘토브’는 ‘더 선한, 더 부강한’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당시 모압 왕 발락은 발람을 통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여기서 입다가 발락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이스라엘을,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이스라엘의 땅을 암몬 왕이 어리석게 취하고자 한 사실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즉 입다는 발락보다 미약한 암몬 왕이 이스라엘을 대적하려고 하고 있는 점을 꾸짖고 있는 것이다.

 

11:26 아로엘. 민수기 21장에서는 이곳이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신명기 2:36과 여호수아 13:9에서는 같은 기사 가운데 언급되어 있다.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이곳은 아모리 사람들이 그들의 국경을 수비하기 위하여 아르논 강변 곧 아르논 골짜기의 언덕에 새로 지은 도시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개연성이 없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입다는 본 절에서 ‘아로엘과 그 향촌들’ 및 ‘아르논 연안에 있는 모든 성읍’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추측컨대 이곳은 아르논 강변 도시와 헤스본 가까이에 위치한 성읍이었을 것이다.

모든 성읍에 거주한지 삼백 년이거늘. 혹자는 ‘300년’이란 입다의 표현을 잘못된 것으로 단정한다(Hervey). 그러나 본장에서 입다가 암몬 왕과 대화한 역사적인 내용을 보면 결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입성한 후, 입다 당시에 이르기까지 정착한 연대를 입다가 잘못 알고 있었을 리 없다. 뿐만 아니라 입다는 정확히 300년이란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니라 근사치로 말한 것이 분명하다(Keil). 혹자는 입다 당시 그동안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기간을 301년간으로 보기도 한다(Cundall). 입다가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린 때가 B.C. 1100년 경이므로 그것에서 300년이란 기간을 빼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 연대는 B.C. 1400년 경이 된다. 그리고 광야에서의 40년간 방랑 생활을 빼면, 출애굽 연대는 B.C. 1440년 경이 된다. 이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연대를 B.C. 1446년 경으로 보는 전통적 견해와도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다.

 

11:27 심판하시는 여호와. 원문 ‘야훼 하쇼페트’를 직역하면 ‘사사(재판관)이신 여호와’란 의미이다. 입다가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재판관’으로 내세운 것은 공의의 하나님께서 불법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압제한 암몬 자손을 이스라엘 백성의 손에 넘겨 주실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암몬과 전쟁을 수행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때 정당 방위에 의한 것으로 판결날 것이라는 점 역시 확신했기 때문이다.

 

11:28 듣지 아니하였더라. 유혈 사태를 방지하고 평화적으로 분쟁을 해결하려 한 입다의 의도가 물거품이 되었다. 따라서 이스라엘과 암몬 간에는 전쟁이 벌어졌는데, 그 결과는 입다가 확신하였듯이 암몬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27, 32, 33절).

 

11:29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여호와의 영은 성령을 가리킨다. 3:10 주석 참조. 성령이 입다에게 임하였다는 것은 곧 다음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1) 다른 사사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사사로서의 확실한 증거를 보이셨던 것처럼(3:10, 6:34), 하나님께서는 입다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심으로써 그를 이스라엘을 다스릴 사사로 인정하셨다. (2) 입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재판관으로서 잘못을 저지른 암몬 자손을 징계하시기 위해 일어나실 것(27절)이라는 입다의 논증이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일반적으로 길르앗과 므낫세는 성경에서 곧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10:3 주석 참조. 그런데 본 절에서 이 두 곳이 각각 언급된 것은 입다가 길르앗 지역과 므낫세 북부 지역까지 백성들을 모집하기 위해 두루 다녔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길르앗 미스베. 암몬 자손에 대항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진을 쳤던 ‘미스바’(10:17)와 동일한 곳이다. 입다는 길르앗 전지역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백성을 모은 후 다시 백성이 진을 치고 있고 자신이 사사가 되었던(11절) 그 ‘미스베’로 돌아왔던 것이다. 10:17 주석 참조.

 

11:30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사모할 때 하나님께 서원을 했다(창 28:20, 민 21:2, 삼상 1:11). 입다도 아마 전쟁에 임하여 불안을 느껴 하나님께 서원했던 것 같다. 기드온이 하나님께 표적을 구했던 것처럼(6:36-40) 인간적인 불안감을 하나님께 대한 서원으로 극복하려한 것을 의미한다. 한편 사람이 하나님께 서원을 했으면, 그는 그 서원한 바를 반드시 지켜야 했다.

 

11:31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입다와 그의 딸에 대한 이야기는 역사를 내려오면서 많은 사람들의 의문과 궁금증을 자아냈다. 그 의문의 중심에는 입다의 딸이 과연 번제로 드려졌는가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성경 주석가들은 입다가 그의 딸을 실제로 죽여서 제물로 드렸다고 생각한다. 문자 그대로 그녀를 번제물로 드렸다는 것이다(Josephus, Augustine, Cundall).

하지만 소수의 학자들은 입다가 그의 딸을 죽인 것이 아니라 그녀의 여생을 격리된 상태에서 은거하면서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게 했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학자는 본 절의 ‘번제물’을 ‘성전 봉사하는 자’로 해석하여, 일평생 성전 봉사를 하는 자로 하나님께 바쳤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이유는 사람들이 그녀가 처녀인 것 때문에 애곡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녀가 죽었다면 처녀인 것을 해마다 나흘씩 애도할 필요가 없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으로는 중세의 성경학자 다윗 킴히(David Kimhi), 19세기의 카일(Karl F. Keil)과 델리취(Franz Delitzsch) 그리고 현대의 제임스 B. 조던(James B. Jordan) 등이다.

입다가 서원한 것이 과연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본 절에 나오는 그 서원의 문장을 히브리어 문법적으로 고찰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여기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라는 문장과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라는 문장은 히브리어 접속사 ‘וְ 와우’로 연결되어 있다. 히브리어 ‘와우’는 ‘그리고(and)’, ‘또는(or)’, ‘그러나(but)’ 등의 의미를 가진 단어인데, 입다의 서원에서 이 ‘와우’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는 보는 사람이나 문맥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이 ‘와우’를 ‘또는(or)’으로 해석한다면 입다의 서원은 다음과 같이 된다. “나를 영접하는 그를 여호와께 돌리거나 또는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이렇게 볼 경우 “여호와께 돌린다”는 말은 굳이 ‘죽여서 제물로 드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호와를 위하여 한평생 살게 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그렇게 되면 입다의 서원은 “그를 여호와를 위하여 구별해 놓든지 또는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라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입다가 이런 서약을 할 때에 짐승 제사를 생각했다고 주장한다(A. C. Hervey). 그는 입다가 실상 이렇게 말한 것으로 생각한다. “내가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것이 만일 사람이라면 전적으로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 바치겠으며, 혹 그것이 정결한 짐승이라면 그것을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해석자들은 입다를 영접하러 나온 것이 입다의 딸이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 바치겠다”는 약속이 이행되었다고 말한다.

이상의 논란은 하나님이 과연 인간을 번제로 드리는 것을 용납하시거나 허락하시는가 하는 문제 때문에 생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암몬인들의 행습을 따라 ‘몰렉’이라는 우상에게 어린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것을 여러 번 경계하거나 질책하셨다(레 18:21, 20:2-5, 사 57:9, 렘 32:35). 인간 제물을 바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성경의 대원칙에 비춰보면 입다가 그의 딸을 실제로 번제물로 드렸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비록 소수의 학자들의 의견이긴 하지만 입다의 딸을 평생 은거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봉사하게 했다는 설명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입다의 딸이 번제물로 바쳐졌다면, 그것은 입다가 돕 땅에 거하는 동안(3절) 이방인들의 인신 제사 풍속에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인간 제물을 드리는 것은 당시 근동의 제사에 있어서 가장 큰 제물에 해당되었기 때문이다(왕하 3:27). 이 문제는 어느 쪽이든 간에 확실하게 단정하기는 매우 어려운 난제들 중의 하나이다.

 

11:32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암몬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한 것이 입다의 용맹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한 것임을 새삼 강조하고 있다. 9절 주석 참조.

 

11:33 아로엘. 26절에 나오는 ‘아로엘’과는 다른 곳이다. 이곳은 에돔 지경 부근의 랍바 앞에 위치한 아로엘(수 13:25)이다(Pulpit Commentary, Wycliffe).

민닛. 이곳의 정확한 위치는 확실하지 않다. 혹자는 이곳을 유세비우스가 주장한 ‘마닛’과 동일한 곳으로 생각하여 암몬의 수도 랍바로 가는 노상에 있는 성읍이라고 주장한다(Keil & Delitzsch). 이것은 적들이 도망할 때 본국의 수도가 위치해 있는 곳으로 달아났을 것으로 가정해 볼 때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본 절에는 암몬 사람들이 도망한 곳으로 ‘민닛’ 뿐 아니라 ‘아벨 그라밈’도 언급되었으므로 반드시 유세비우스가 주장한 ‘마닛’과 동일시할 수 없다.

아벨 그라밈. 확실한 위치가 알려져 있지 않다. 루터는 이곳을 문자적으로 ‘포도원들’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유세비우스도 랍바에서 가까운 비옥한 포도원을 ‘아벨 그라밈’과 동일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역시 성경적인 뒷받침이 없고 단순한 추정에 불과하므로 확실치 않다. 한편 이상으로 입다와 암몬 간의 전투는 모두 끝이 난다.

 

11:34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미스바’는 길르앗 사람들이 암몬 자손을 대항하여 진 친 곳이다(10:17). 또한 이곳은 입다의 고향이기도 하다(9절). 한편 입다는 돕 땅에서 이곳으로 돌아올 때 자기 가족도 데리고 왔을 것이다(11절).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성경 가운데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에 승리했을 때 춤을 추며 노래했던 기록이 자주 나온다(5:1-31, 출 15:1-21, 삼상 18:6, 시 18편). 이는 개선하는 용사들을 맞을 때 흔히 행하던 환영 풍습이었다. 한편 ‘소고’는 대부분의 영역 성경에서 ‘탬버린’(timbrel, tambourine)으로 번역되었다. 이 악기는 타악기로서 흔들거나 두드려서 소리를 낸다.

무남독녀. 처음에는 ‘딸’이라고 하였다가 이제 다시 외동딸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점층법적 표현은 입다의 심리적 고충이 어떠하였는지를 잘 나타내 준다.

 

11:35 자기 옷을 찢으며. 히브리인들은 극한 슬픔이나 고통을 나타낼 때 옷을 찢는 습관이 있었다(창 37:29, 34, 44:13, 민 14:6, 삼하 1:11, 3:31, 욥 1:20).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문자적으로는 ‘너는 나를 낮아지게 하는 자로다’란 의미이다. 여기서 ‘낮아지게 한다’는 말은 비천하게 하거나 비참하게 하는 것을 나타내므로 ‘불행하게 한다’로 해석하는 것이 적당하다. 한편 입다가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그 딸이 무남독녀(34절)로 죽게 되어 이제 그의 기업을 이을 자가 없어지게 된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히브리인들은 자신의 기업을 이를 자녀가 없는 것을 매우 비참하게 생각했다(삼상 1:10-11).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 ‘괴롭게 하다’의 원어 ‘아카르’는 ‘휘젓다’, ‘교란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는 곧 입다가 자기 딸로 인해 아주 격심한 고통을 받아 정신을 능히 추스르지 못할 정도였음을 시사해 준다.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이 말은 그가 여호와께 서원했던 것을 가리킨다(30-31절).

능리 돌이키지 못하리라. 구약 시대에는 서원의 이행이 크게 강조되었으며,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신실성을 가리키는 중요한 표시로 여겨졌다(시 56:12, 사 19:21, 나 1:15). 따라서 경솔한 서원은 경고의 대상이었다. 그런데도 입다는 부질없는 서원으로 말미암아 진퇴양난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즉 그것을 어길 경우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은 것이 되며(출 20:17), 지킬 경우에는 사랑하는 외동딸을 죽여야만 했다. 결국 입다는 자식에 대한 사랑보다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우선적으로 택함으로써 나름대로 신앙의 용단을 내렸지만 그의 실책은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큰 경종으로 다가오고 있다.

 

11:36 나의 아버지여. 입다의 딸은 아버지의 서원 내용을 듣고서 자신의 운명을 깨달은 후 침착하게 아버지를 불렀다. 이 한 마디의 말에는 아버지와 그녀 자신에게 임한 재난을 슬기롭고 용기 있게 극복해 가려는 의지가 잘 담겨 있다.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그녀가 이처럼 자기 아버지의 서원에 의문이나 불만을 제기하지 않고 따를 수 있었던 것에 대하여 혹자는 당시에 인간 제물로 제사를 드리는 풍습이 보편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Hervey). 또한 어떤 학자는 입다의 딸이 지닌 철저한 자기 부인 정신과 복종의 정신을 근거로 이를 설명한다(Goslinga).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녀는 본 절에 언급되어 있는 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대적을 자기 아버지에게 넘겨주신 사실에 감사해서 스스로 인간 제물 되는 일에 순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이처럼 입다의 딸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입다가 암몬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에 크게 만족을 느끼고 입다를 위로하면서 기꺼이 죽음을 달게 받으려 하였다. 즉 그녀는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므로,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지키는 것은 아주 당연한 도리라는 자세를 취하였다.

 

11:37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일반적으로 고대의 여인들은 결혼하여 자녀를 낳는 것을 매우 귀하고 복된 일로 생각했다(창 19:31-32). 따라서 입다의 딸에게 있어서 결혼하지 못하여 자식을 낳아 보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은 저주를 받은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입다의 딸은 다만 이에 대하여 애곡함으로써 마음을 안돈시킨 후 결연히 죽음을 감내하였으니, 그녀의 이러한 신앙과 희생 정신은 아주 높이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11:38 산 위에서 … 애곡하고. 여기서 산은 아마 미스바 산이나 그 부변 골짜기를 가리킬 것이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입다의 딸은 이곳에 초막이나 장막을 치고 살면서 신변을 정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1:39 딸에게 행하니. 혹자는 이에 대하여 입다가 이교의 풍습을 따라 인신 제사를 행하지 않고, 그 딸을 성전에서 봉사하는 여자로 삼았다고 주장한다(Keil, Cassel, Lange). 그러나 본 장에는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없다. 비록 그들이 번제에 해당하는 원어 ‘올라’가 ‘성전에 올라가서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지만, 성경에서 ‘올라’가 그처럼 사용된 예가 없다. 입다는 분명이 인간 제물을 번제로 하나님께 바칠 것을 서원했으므로(31절), 그의 딸을 번제로 바쳤음에 틀림없다(Augustine, Luther, Origen). 한편 혹자는 사울이 하나님께 ‘맹세한 대로’ 그의 아들 요나단을 죽이고자 했을 때 백성들이 그것을 막았던 것처럼(삼상 14:45), 입다를 추종하는 사람들도 율법에 어긋난 행위를 하고자 하는 입다를 막았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 본문은 이스라엘 여인들이 해마다 입다 딸의 죽음을 애곡하였다는 부연 기사로 그 같은 추측을 무효화시키고 있다(40절).

 

11:40 이스라엘 백성들이 입다의 딸을 위하여 애곡하는 풍습이 본서의 저자가 살고 있던 당시까지 전해져 내려왔음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가서. 여기서 ‘딸들’은 모든 이스라엘 여자들이라기 보다는 길르앗 지방에 거하는 여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이들은 해마다 입다와 그의 딸의 고향인 미스바로 내려갔다. 34절 주석 참조.

애곡하더라. 원어 ‘탄노트’는 ‘애곡하다’란 의미보다 ‘이야기하다’, ‘기념하다’란 의미를 지닌다. 즉 이는 곧 이스라엘 여인들이 입다 딸의 희생 정신과 순종과 신앙을 회상하며 이야기 나눈 것을 가리킨다(N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