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 악을 행하매. 사사 시대의 일반적 사회 현상(2:19)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던 이스라엘(3:9)이 이처럼 또 다시 죄악의 길에 빠져 든 것은 마치 방금 목욕한 돼지가 다시 오물탕 속에서 뒹구는 것과 같이 어리석고 안타깝기 그지 없는 일이다. 어쨌든 이는 한 번 빠져 들면 헤어나기 어려운 죄의 속성을 여실히 증거해 준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삼가 자신을 살펴 무릇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살전 5:22).
한편 여호수아가 그곳을 점령할 때도 ‘야빈’이 왕으로 다스리고 있었으나(수 11:1), 본 절의 야빈은 그 당시의 왕과 동일 인물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지금은 그 때로부터 벌써 1세기가 훨씬 넘은 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하솔을 다스렸던 ‘야빈’이라는 칭호의 또 다른 왕으로 보아야 한다. 아마 ‘야빈’이란 말은 애굽 왕의 공식 칭호인 ‘바로’나 블레셋 왕의 공식 칭호인 ‘아비멜렉’처럼 하솔 왕을 가리키는 공식 칭호였던 것 같다. 한편 그가 여호수아 군대로부터 하솔 성을 어떻게 되찾아 세력을 키웠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납달리 지파의 지경에 남아 있던 벧세메스와 벧아낫 거민을(1:33) 중심으로 이스라엘에 대항했던 것 같다.
하로셋 학고임. ‘고임’은 ‘열국’(nations)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어떤 백성이나 지명에 대한 고유 명사인지, 아니면 여러 족속의 집단을 의미하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개역 성경 창 14:1과 수 12:23에서는 이 단어를 고유 명사로 생각하여 문자 그대로 ‘고임’이라 하였다. 본문에서는 ‘고임’이란 단어에 정관사가 붙어 있으므로 이는 고유 명사를 나타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고임’이란 당시 ‘하로셋’에 거하던 가나안 여러 족속을 지칭하는 듯하다. 한편 하로셋이란 지명은 성경 중 이곳에만 나온다. 따라서 이곳 역시 그 위치가 분명치 않은데, 디베랴 호수 남쪽의 갈릴리 평원 어느 한 지점이었던것 같다.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여기서 ‘이스라엘 자손’이란 전체 12지파를 가리키지 않는다. 대신 하솔을 중심한 일대(2절)의 납달리 지파 내지 그 지파를 중심한 북부 지역의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6, 10절). 왜냐하면 당시 야빈이 철 병거 900승으로 이스라엘 12지파 전체를 점령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학대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라하츠’는 ‘비틀어 짜다’는 뜻이다. 이는 곧 포도즙을 짜기 위해 밟아 으깨듯 이스라엘에 대한 야빈의 압제가 매우 혹독했음을 시사해 준다.
여선지자. 성경에서 여자로서 선지자직을 감당한 사람으로는 드보라 외에도 모세의 누이 미리암(출 15:20)과 훌다(왕하 22:14) 등을 들 수 있다. 즉 이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예언자적 기능을 은사로 받았다.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드보라의 종려나무’란 드보라가 종려나무 아래서 재판했던 데서 유래한 것이다. 그런데 본서 저자가 본서를 기록할 때에도 그 나무가 ‘드보라의 종려나무’로 알려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기념하여 그렇게 칭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드보라가 그 종려나무 있는 곳에서 살았다는 것인지, 그곳에 앉아 재판만을 주관했다는 것인지는 본문의 문맥만으로서는 해결될 수 없다. 왜냐하면 ‘거주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샤브’가 ‘거주하다’란 의미와 ‘앉다’라는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려나무’가 드보라의 재판과 관련하여 언급되었으므로, 이는 그녀가 재판시 마다 그곳에 앉아서 재판을 진행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재판을 받더라. 사사 시대 당시 재판하는 일은 사사의 임무 중 하나였다. 2:16 주석 참조. 즉 사사는 전쟁시에 자기 민족의 구원자 역할을 담당했지만 평상시에는 백성들의 송사를 맡아 다스림으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시행될 수 있도록 했다. 특별히 드보라는 여자로서 사사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신으로 충만하여 ‘대언하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래서 저자는 드보라의 이름을 언급할 때에 ‘여선지자’(이샤 네비아)라는 말을 덧붙였다(4절).
납달리 게데스. 납달리 지파가 얻은 견고한 성읍 가운데 가장 중요한 도성 중 하나이다(수 19:37). 이것은 유다 지파에 속한 ‘게데스’와 구별되는데(수 15:23), 야빈의 도성인 하솔 성에서 동북쪽 4.8 km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다.
너는 … 가라. 이처럼 드보라가 바락을 불러 그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전쟁을 수행토룩 한 까닭은 그 자신이 여자였기에 직접 군대를 지휘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추측컨대 이들은 하솔 왕 야빈으로부터 가장 많은 괴로움을 당한 지파인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대적을 치는 데 선봉장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 5장의 드보라의 노래에는 이 두 지파 외에 다른 지파의 이름도 언급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이 전투에는 납달리, 스불론 지파와 인접한 잇사갈 지파도 참여했음이 분명하다(5:15).
다볼 산. 해발 약 528 m 되는 산이다. 이곳은 갈릴리 바다에서 남서쪽으로 약 16 km 떨어진 이스르엘 골짜기에 속해 있다. 초기 교회 전승(A.D. 4세기경)에 따르면 예수께서 그 모습이 변형되셨던 변화산(마 17:1-8, 막 9:2-8, 눅 9:28-36)이 바로 이 다볼 산이라고 하는데 분명치 않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드보라가 야빈과의 접전지로 이곳을 택한 이유는 아마 그곳이 하솔 왕 야빈의 철 병거(3절)가 다다를수 없는 장소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여기서 ‘넘겨 주다’에 해당하는 원어 ‘나탄’은 ‘꼼짝 못하게 하다’ 또는 ‘패하게 하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 대적에게 내어 주시어 패하고 종노릇하게 한 것을 ‘팔다’라는 말로써 나타낸 것과 같은 표현이다(3:8). 즉 이는 과거 이스라엘이 대적에게 완전히 패하였듯이 이제 야빈과 시스라의 군대가 꼼짝없이 이스라엘에게 패하고 말리라는 강조적 표현이다.
이상과 같은 세 견해 중 가장 타당하다고 볼 수 있는 견해는 세 번째 해석이다. 왜냐하면 모세도 과거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을 때 자신의 약점을 앞세워 거절하고자 시도했으며(출 4:10), 사사 기드온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을 때 자신의 비천함을 이유로 이를 거절하고자 시도했기 때문이다(6:15). 사실 만약 바락이 불신앙적이거나 대적들을 정말로 두려워 했다면 결코 하나님과 드보라에 의해 야빈과의 전쟁을 수행하는 데 선봉장으로 선택될 수 없었을 것이다.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어떤 이는 드보라가 바락의 요구(8절)로 인해 불쾌하여 본 절과 같이 말했다고 주장한다(A. E. Cundall).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본 절 전후 문맥 어느 곳에서도 암시되어 있지 않다. 단지 본 절은 바락이 시스라의 군대와 싸워 승리할 것이지만 결정적인 승리는 여인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17-24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전쟁의 승패는 군사의 많고 적음이나 훌륭한 무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에 달려 있음을 바락에게 깨닫게 해주시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삼상 17:47).
게데스로 가니라. 혹자는 여기에 언급된 ‘게데스’는 ‘납달리 게데스’(6절)와 동일시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A. E. Cundall). 왜냐하면 드보라와 바락이 현재 만나서 이야기 하고 있는 장소가 바로 이 ‘납달리 게데스’인 것으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 라마와 벧엘 사이에 거주하고 있던 드보라가 사람을 보내어 납달리 게데스에 살고 있던 바락을 불러온 것으로 되어 있다(6절). 따라서 이 드보라와 바락이 군사를 모아 다볼 산으로 출전하기 위해(12절) 우선 납달리 게데스로 올라간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를 따라 올라가고. ‘올라가다’의 원어 ‘알라’는 군대의 움직임과 관련되어 사용될 때에는 전투가 예상되는 어떤 장소로 그 군대가 진격하는 것을 가리킨다(수 7:2, 삼상 24:22, 왕상 9:16, 14:25, 20:1, 대하 35:20).
겐 사람 헤벨. 모세의 장인이 바로 이 겐족 출신인데(1:16), 성경 다른 곳에서는 미디안 출신인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출 2:16, 3:1, 민 10:29). 이로 볼 때 겐족과 미디안족은 일찍부터 상호 친밀한 유대 관계를 이루었거나 아니면 서로 동화되어 한 민족을 이룬 것 같다. 아무튼 ‘겐 사람’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16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드보라와 바락에 관한 기사 도중 갑작스럽게 겐 사람 헤벨이 언급되고 있는 까닭은 이후 전개되는 시스라와의 전쟁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자가 바로 이 ‘헤벨’의 아내인 ‘야엘’이기 때문이다(17-24절). 즉 본 절은 헤벨의 아내 야엘의 가문과 신원을 미리 소개할 목적으로 삽입된 것이다.
떠나.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자손들은 팔레스타인으로 이주 후 유다 지파의 경내에서 거주했다(1:16). 그런데 헤벨은 그 가족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납달리 지파의 경내인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등지고 이스라엘의 압제자 하솔 왕 야빈과 손을 잡았다(17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그러한 헤벨의 아내를 들어 쓰사 시스라를 죽였으니 인간이 미처 헤아리기 어려운 깊고 오묘한 섭리를 잘 드러내 준다.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문자적으로 이 말은 ‘사아난님에 있는 상수리 나무’란 뜻이다. 무슨 사연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이 나무는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졌던 것 같다. 한편 ‘사아난님’은 납달리 지파의 남쪽 변경에 위치한 한 장소이다(수 19:33). 오늘날 ‘칸 엣 투잘’(Khan et Tujjar)로 불리우고 있는데 아다미(Adami) 남동쪽 약 6.4 km 지점의 ‘벧스안-다메섹 도로’의 중도에 위치해 있다.
이는 … 시스라를 네 손에 넘겨 주신 날이라. 즉 오늘이 20년 동안 가나안 왕 야빈으로부터 받았던 압제(3절)에서 해방되는 날이며, 그 위대한 역사는 바락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로 시스라를 죽인 자는 바락이 아닌 야엘(21절)인데 이는 이미 드보라가 예언한 바이다(9절).
여호와께서 너에 앞서 나가지 아니하시느냐.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실제적인 장군은 바락이 아닌 바로 하나님이심을 나타내 준다. 따라서 이 같은 사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전쟁을 수행하던 자인 바락에게 큰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또한 바락이 수행하는 전쟁에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하셨다는 사실은 바로 그 전쟁이 단순히 이스라엘을 압제했던 하솔을 징계하기 위한 목적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드러난 하솔의 죄악을 심판하기 위한 거룩한 전쟁임을 시사해 준다(신 9:3, 삼하 5:24, 시 68:7, 사 52:12).
바락이 … 다볼 산에서 내려가니. 드보라와 바락의 탁월한 전략을 보여 준다. 즉 그들은 시스라의 군대가 기손 강 평지에 집결한 것을 보고서는(13절) 다볼 산 고지에 매복시켜 두었던 만 명의 군사들로 하여금 일시에 기습 작전을 감행토록 한 것이다.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걸어서 도망한지라. 이처럼 시스라가 병거를 버리고 도망친 까닭에 대해서는 5:21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갑작스럽게 기손 강을 범람케하사 그 주변 평지에 집결해 있던 시스라의 철 병거와 군사들을 휩쓸어 버리게 하신 것이다. 그러니 자연 진흙탕이 된 평지에서 철 병거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렸고 시스라는 걸어서라도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초자연적 방법으로 시스라의 군대를 격파하셨는지를 잘 드러내 준다.
하로셋학고임에 이르니. 시스라의 패잔병들이 도망간 곳은 ‘하로셋학고임’으로 시스라가 거주하던 장소였다. 2절 주석 참조. 이로 보건데 시스라의 군대는 자기들이 주둔하던 곳으로 도망쳐 원군과 합세하여 바락의 군대와 싸울 작정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들의 지도자가 없는 상태에서 그들이 바락의 군대를 대항한다는 것은 부질 없는 일이었다.
화평이 있음이라. 비록 공수 동맹(攻守同盟) 관계는 아니지만 야빈과 헤벨 사이에 두터운 친교 관계가 형성되어 있어 서로 다툼이나 분쟁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Matthew Henry’s Commentary).
두려워하지 마소서. 이러한 말만으로써는 야엘이 처음부터 시스라를 속이려 든 것인지 아니면 처음에는 진정으로 시스라를 환대하며 그의 처지를 위로하였으나 뒤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사 마음을 바꿔 시스라를 죽인 것인지 알 수 없다. 어쨌든 야엘은 시스라를 안심시키며 그에게 최상의 접대를 베풀었는데 이는 결정적으로 시스라가 방심하도록 만든 계기가 되었다(Matthew Henry’s Commentary).
우유 부대. 요세푸스는 이 부대 속에 있는 우유는 상한 것 즉 이미 변하여 시큼한 맛이 나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탄훔(R. Tanchum)은 이 부대 속에 있는 우유는 완전히 지쳐 있는 사람이 먹을 때 그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그러나 드보라의 노래에 나타나 있듯이(5:25) 이것은 엉긴 우유 곧 반쯤 ‘버터’가 된 최고급 우유임에 틀림없다(A. E. Cundall). 그리고 그 우유를 담은 부대는 유목민들이 여행시 포도주나 물, 우유 등을 넣어 가지고 다니던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것인 듯하다.
네게 묻기를 … 없다 하라. 이처럼 시스라가 헤벨, 즉 남자의 거실을 피해 야엘의 장막(17절) 곧 여자의 거실에 숨어 들고서도 또 다시 보안을 지켜 주도록 부탁한 것은 그가 심리적으로 극도로 불안한 상태에 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정작 그가 안심하고 몸을 의탁한 야엘의 거실이 바로 그의 사형 집행대가 될 줄이야!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나(롬 8:28) 반대로 하나님의 미움을 입은 자는 모든 일이 꼬여서 벌을 받기 마련이다. 즉 시스라는 야엘을 통해서 사람들의 눈을 속이려 들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그를 찾아내어 심판하신 것이다(시 139:7-8).
그가 깊이 잠드니.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시 127:2). 그러나 여기 시스라의 잠은 평안한 휴식을 취하는 잠이 아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낯을 피해 다시스로 도망가던 요나가 배 밑창에서 곤히 잠을 잔 것과 흡사하다(욘 1:5).
말뚝을 그의 관자놀이에 박으매. 혹자에 따르면 고대 근동에서 생활하는 유목민들에게 있어서 장막 세우는 일은 주로 여인들이 하던 일이므로 여인들은 망치로 말뚝을 박는 것에 익숙해 있었다고 한다(G. F. Moore). 그렇다면 야엘이 장막 말뚝으로 시스라의 관자놀이(temple)를 꿰뚫은 것은 그다지 힘든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편 야엘은 시스라를 추격하는 바락에게 잠든 시스라를 넘겨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자신이 직접 그를 죽인 까닭은 아마 바락의 도착이 지연되는 동안 시스라가 원기를 회복하여 도망친 후 다시 힘을 규합하여 이스라엘에 대항할 것을 염려했던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기절하여 죽으니라. 이로써 드보라의 예언(9절)은 온전히 성취되었다. 한편 혹자는 야엘이 시스라를 안심시켜 깊이 잠들게 한 후 아주 잔인 무도한 방법으로 그를 죽였다 하여 그녀의 행동이 사탄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본문의 문맥과는 상치되는 주장인데 곧 야엘의 배후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야엘의 마음을 주장하사 하나님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구원, 악인에 대한 심판을 위해 이 일을 하도록 인도하셨다. 따라서 거기에는 어떠한 미움이나 사악함 그리고 개인적인 복수심이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 그러기에 드보라와 바락도 그의 ‘감사 노래’(5장)에서 야엘의 신앙과 용기를 칭송한 것이다(5:24-27).
바락이 … 보니 시스라가 엎드러져 죽었고. 이로써 바락 역시 드보라의 예언(9절)대로 시스라를 죽이는 영예는 자신이 취하지 못하고 여인에 불과한 야엘에게 넘어갔음을 분명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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