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인간을 가리켜 ‘여호와의 사자’로 표현한 곳은 없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대신 성경에는 이 땅에 현현하신 하나님 그분 자신을 가리켜 ‘여호와의 사자’로 표현한 경우가 많다(13:18, 창 22:11, 민 22:32, 왕하 1:3). 또한 본절에서 이 ‘여호와의 사자’는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라고 말하였는데,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킨 분은 하나님이시다.
또한 성경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구약 시대에 이 땅에 현현하셨던 하나님은 거의 예외 없이 성육신 이전에도 여전히 활동하셨던 성자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이셨음을 알 수 있다(말 3:1). 따라서 본절의 여호와의 사자도 그리스도이신 것이 확실하다.
길갈에서 보김으로 올라와. 이 구절은 마치 어떤 길갈 출신의 선지자가 길갈에서 보김으로 온 것처럼 생각하게 해준다. 그러나 이 구절은 어떤 선지자가 온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과거 길갈에서 여호수아에게 나타났던 여호와의 군대 장관, 즉 하나님의 사자(수 5:13-15)가 길갈에서 가졌던 사명과 동일한 사명을 가지고 이제 보김에 나타났음을 가리킨다(Keil, Cassel). 즉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실패가 여호와께 대한 불순종에 기인한 것임을 깨닫게 하고 이스라엘을 언약에의 순종으로 이끌기 위해 여호와의 사자가 보김에 다시 현현한 것이다.
길갈. 요단 강 서쪽, 여리고 근처에 위치한 성읍이다. 이곳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초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곳은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넌 후 최초로 진 친 곳으로서(수 3-4장), 기념비를 세우고(수 4:20-24) 할례를 받은 곳이기도 하다(수 5:2-9). 또한 이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다음 해 시내 광야에서 지킨 이후(민 9:1-5) 처음으로 유월절을 지키기도 하였다(수 5:10-12). 이런 점에서 길갈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초기에 정치, 군사, 종교의 중심지로서 그 기능을 다했음을 알 수 있다(수 9:3-15, 10:6-43). 그러나 가나안 정복의 초기에서 중기로 넘어가면서 이스라엘의 중심 무대는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옮겨지게 된다.
보김. ‘우는 자들’이란 뜻인데 그 정확한 위치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70인역의 역자들은 보김을 벧엘과 동일한 지역으로서 벧엘의 다른 이름일 것이라고 보았다. 벧엘은 사사 시대에 있어서 종교적 중심지였는데(20:18-28, 21:1-4) 본문을 보면(1-5절) 마치 보김이 그 벧엘과 동일한 기능을 행하고 있어서 이 주장에 힘을 더하고 있다. 두 지명의 연관성에 대한 또 하나의 근거는 창 35:8에 나온다. 거기에서는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자 야곱이 그 주검을 ‘벧엘 아래 상수리 나무 밑에’ 묻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고 부른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알론바굿’의 뜻은 ‘통곡의 상수리’인데 이는 ‘우는 자들’이란 ‘보김’의 뜻과 서로 연관이 되어 있다.
내가 너희의 …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출애굽과 가나안 정착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의 성취이다(창 13:14-15, 15:13-16, 17:8). 본절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이 사건들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상기시킨 것은 하나님의 신실성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민 23:19, 시 71:22).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은 사사기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이스라엘 백성의 패역한 모습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2절).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여기서 여호와의 사자가 지적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은 언약에 철저하였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치 않고 언약을 시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2-3절). 한편 구약에서 ‘언약’은 ‘결속’이나 ‘관계’의 개념으로 사용되었다(P. Robertson). 즉 ‘언약’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리트’는 ‘결속시키다’라는 뜻의 동사 ‘바라’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결속’, ‘족쇄’라는 뜻의 아카드어 ‘비리투’와 깊은 연관이 있다(Weinfeld). 그러므로 언약을 맺는다는 것은 곧 양자간의 깊은 결속을 다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성경에서 뜻하는 바 언약 관계는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간의 영원한 ‘결속’을 의미한다.
한편 ‘언약을 맺는다’의 히브리어 ‘베리트 카라트’의 문자적인 뜻은 ‘언약을 자르다’이다. 이것은 언약을 맺을 때 동물을 반으로 갈라 약속의 증표로 삼던 고대 의식에서 유래한 말이다(창 15:10-11). 이러한 언약적 의식은 어느 한 쪽이 언약을 파기할 때 그 사람은 갈라진 동물과 같이 처참히 죽게 된다는 저주를 상징하고 있다. 그러므로 3절에 언급된 것과 같은 하나님의 징계는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필연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언약을 맺지 말며 … 제잔들을 헐라 하였거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게 될 때에는 먼저 상대방에게 평화를 선언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리하여 그 성읍이 평화하기로 회답해 오면 공을 바치게 하고 같이 살지만 그러지 아니할 때에는 그 성읍을 치라고 명령하셨다(신 20:10-15). 그러나 가나안 원주민들의 경우만은 예외였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족속들 가운데서 호흡이 있는 자는 하나도 살리지 말고 다 진멸하라 하셨다(신 20:16-18). 그런 점에서 본절 역시 가나안 땅의 호읍이 있는 자는 철저히 진멸하여 그들과 화친 언약을 맺거나 그들의 우상을 숭배하게 될 소지를 아예 뿌리째 뽑아버리라는 적극적 의미의 명령이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신 7:1-5).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내 목소리’란 곧 ‘하나님의 명령’을 가리킨다. 출애굽 후 광야에서 보낸 이스라엘의 40년 역사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패역의 역사였다. 그런데 본절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입성한 후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치 아니하였음을 증언해 준다. 따라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 하는 자식들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들이라”(사 30:9)고 말할 수 있다.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너희는 이러한 잘못에 대하여 어떠한 합당한 설명을 할 수 있느냐’는 물음이다. 이에 대하여 이스라엘은 유구무언일 뿐 달리 변명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히브리어 원문에는 ‘그들은 너희에게 옆구리(히, 치딤)가 되며’로 되어 있다. 여기서 ‘치딤’은 ‘누구에 대하여 대항하다’는 뜻의 동사 ‘차다드’에서 파생된 것으로 ‘대적’을 의미한다(Cundall). 한편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 민 33:55에는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로, 수 23:13에는 “너희의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의 눈에 가시가 되어서”로 나온다. 이 모든 표현들은 이스라엘이 대적 가나안인들로부터 받을 상처와 고통, 괴로움을 의미하는 것들이다.
그들의 신들이 … 올무가 되리라. ‘올무’에 해당하는 원어 ‘모케쉬’는 ‘덫으로 유혹에 빠뜨리다’라는 뜻의 동사 ‘야코쉬’에서 파생된 것이다. 이 말은 곧 이스라엘이 가나안인들의 우상 제단을 파괴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신들을 용납할 경우 겪게 될 비극을 의미한다. 즉 사냥꾼의 올무에 빠져 든 새가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욱더 올무에 얽히는 것처럼 일단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신들을 받아들이면 헤어날 수 없는 우상 숭배 죄에 빠지고 말 것이라는 뜻이다. 물론 그 결과 이스라엘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질투와 징계뿐이다(출 20:1-6).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여기의 제사는 ‘속죄제’와 ‘번제’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목적이 죄사함을 받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대개 제사는 회막이 있는 곳에서 행해졌으므로 보김은 당시 회막이 있던 ‘실로’(수 18:1)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Cassel, Hervey).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김에서 제사를 드렸다고 해서 그곳에 반드시 성막과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곳이면 어디서든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곤 했다(6:26, 13:15-20, 삼하 24:25).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소가 없는 보김에서 제사드렸다는 것은 오히려 당시 보김에 나타났던 여호와의 사자가 여호와 당신 자신의 현현이었음을 입증하는 한 증거가 된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기업으로 가서 땅을 차지하였고. 이는 어디까지나 백성들이 이미 여호수아에게로부터 분배 받았던 각자의 영토(수 15-19장)로 되돌아 간 것을 가리킨다(Golinga). 그러나 혹자는 이를 1장에 기록된 것과 같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미점령지 정복 사업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같은 일은 분명 여호수아 사후에 일어난 일이니(1:1) 잘못된 견해이다.
여호와께서 …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 수 24:31에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들”로 기록되어 있다. 즉 여호수아 생전에는 물론 그 이후에도 생존했던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가나안 정복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베푸셨던 큰 권능을 친히 목격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이곳에는 수 24:31의 ‘모든 일’에 ‘큰’(히, 하가돌)이 추가되어 ‘모든 큰 일’로 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자들인 장로들이 하나님의 큰 일을 후대에 교육하지 않는다면, 그로인하여 발생한 이스라엘의 타락의 책임은 장로들에게 있음을 강조한 것이라 하겠다(Cundall). 이처럼 하나님께 큰 은혜를 입은 자일수록 사회와 이웃에 대한 책임은 더 중하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여호수아의 생애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그중 전기(前期)는 출애굽 기간 동안 모세를 보좌하며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쌓아 나가던 준비기이다. 그리고 후기(後期)는 모세 사후 이스라엘의 새 지도자로 등장, 가나안 정복 사업을 완수하고 임종하기까지의 활동기이다. 따라서 이제 모든 역할을 끝내고 평안히 죽음을 맞이한다.
딤낫 헤레스. 수 19:50과 24:30에는 ‘딤낫 세라’로 나타나 있다. 이것은 ‘헤레스’의 히브리어 자음을 ‘세라’로 잘못 기록한 필사자의 오류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Cassel, Hervey). ‘딤낫 헤레스’는 벧엘 북서쪽 16 k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딥네’(Tibneh)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딤낫 헤레스’는 ‘태양의 부분’(the portion of Sun)이란 뜻이다. 때문에 혹자는 ‘헤레스 산’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도 추정한다(1:35). 딤낫 헤레스가 아얄론 근처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것 같다(Pulpit Commentary).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기서 ‘알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다’는 (1) 관찰이나 사고 활동을 통해서 아는 것(창 8:11), (2) 경험으로 아는 것(민 31:18), (3) 마음으로 아는 것(수 23:14)을 의미한다. 본 절에서는 (2) 또는 (3)의 의미로 사용된 것 같다.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지녀야 할 ‘신전의식’(神前意識, Coram Deo), 즉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들임을 상기시켜준다. 사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하나님께로부터 숨겨질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이 제 아무리 은밀하게 범죄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곧 하나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는 것이다(시 33:13-15, 139편).
바알들을 섬기며. 여기서 ‘바알들’이라는 복수형이 사용된 까닭은 ‘바알’이 비단 한 족속만의 신이 아니라 고대 근동의 여러 국가, 여러 민족들이 섬기던 이방신이었기 때문인 듯하다(Lange, Keil & Delitzsch, Pulpit Commentary). 한편 지방에 따라서 바알의 명칭은 매우 다양하게 붙여졌다. 예를 들면 바알브릿(계약의 바알, 9:4), 바알브올(브올산의 바알, 민 25:3, 호 9:10), 바알갓(행운의 바알, 수 11:17, 12:7), 바알세붑(파리의 바알, 왕하 1:2), 바알스본(북쪽의 바알, 출 14:2, 민 33:7) 등이 있다. 이 중 바알스본과 바알브올은 모압인들에 의해 숭배되었고, 바알세붑은 에그론 족속에 의해, 바알 샤마임(하늘의 주)은 베니게와 시리아와 갈대아인들에 의해 숭배되었다. ‘바알’은 ‘주’(Lord)란 뜻으로 하늘의 비와 땅의 폭풍을 주관하던 가나안의 남신(男神)이다.
그들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염려하시면서 금지했던 사항이다(신 4:15-28, 7:1-5). 그러나 출애굽 사건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 새 세대는 가나안 지방의 원주민들과 주변의 근동 족속들이 섬기던 우상들을 숭배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시고 오직 여호와만을 위한 백성들로 삼으시려한 의도(출 19:5-6)를 백성들이 망각했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에서는 이와 같이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출애굽시키신 여호와를 망각하고 버린 것에 대하여 계속해서 책망하고 있다(삼상 10:18-19, 왕상 9:9, 렘 22:9). 한편 구약 시대 당시 가나안과 주변의 근동 국가들 사이에서 숭배되던 이방신들로는 바알 외에도 아스다롯, 그모스, 몰록, 다곤 등이 있다.
바알과 아스다롯. 가나안 신화에 따르면 바알은 엘(El) 신의 아들로서 하늘의 비와 땅의 폭풍을 주관하는 풍요와 번영의 신이다. 그리고 아스다롯은 아낫과 엘 신의 아내인 아세라와 함께 가나안의 3대 여신 중 하나이다. 혹자들은 아스라롯이 바벨론에서는 이쉬타르로, 북시리아에서는 아낫으로 불려진 것을 볼 때 아스다롯과 아낫은 동일 여신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이 둘은 모두 전쟁과 성(性)의 여신으로서 애굽에서는 이들을 구별하지 않고 하나로 합하여 ‘안타르트’라고도 불렀다. 그러나 렘 44:19에서 아스다롯이 ‘하늘 여신’으로 불려진 것으로 보아 바알의 누이이며 아내인 아낫과는 구분되고 있음이 틀림없다.
대적의 손에 팔아 넘기시매. 여기서 ‘팔다’에 해당하는 원어 ‘마카르’는 ‘노예로 넘기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애굽에서의 400년간 노예 생활에서 겨우 벗어난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범죄로 인하여 다시 대적의 손에 넘겨져 속박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이 범죄하면 그들을 이방의 손에 넘겨서라도 징계하고 훈계하신다(3:8, 삼상 12:9).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이스라엘이 사방의 대적들로 인해 당한 극심한 괴로움의 일례는 6:1-6에 잘 묘사되어 있다. 거기에는 파종기만 되면 대적들이 올라와서 이스라엘을 치므로 곡식을 생산할 수 없고 그나마 있는 가축까지도 약탈당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 외에도 이스라엘은 열국들과의 빈번한 전쟁에 시달려야 했는데 대적들의 수하에 놓인 바 되어 고통당하기 일수였다(3:8, 12-14, 13:1). 결국 이 같은 사실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예고하신 바 타락과 불신앙에 따른 저주(신 28:15-68)가 그대로 임하였을 보여준다.
(1) ‘사사(士師)’는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가 사망한 후부터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등장할 때까지,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이스라엘의 군사(軍事) 및 치안(治安) 지도자였다(삿 2:16-18).
(2) ‘사사’의 히브리어 ‘שֹּׁופֵט 쇼페트’는 원래 ‘재판장’(judge), ‘지배자’(ruler)라는 뜻으로써, 사람들 사이에 생기는 분쟁과 소송을 해결하는 ‘심판관’이었다.
(3) 그러다가 ‘사사’의 영향력이 정치와 군사 쪽으로 확대되었고,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하는 ‘구원자’로서의 성격이 강하게 되었다.
(4) 약 350년 동안(c. 1400-1050 B.C.)에 12명의 사사들이 활동하였다.
즉 하나님께서는 필요에 따라 ‘사사’를 세우셨는데 곧 대적들의 손에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 할 때였다.
노략자의 손에서 … 구원하게.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신 목적이다. 이는 곧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보여준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죄악에 빠졌을 때에는 엄격한 심판과 징벌을 가하셨으나 그들이 고통 중에 신음할 때에는 사사들을 통하여 그들을 구원해 주셨다(3:9).
다른 신들을 따라가 음행하며.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출 19:5-8)에 있는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신부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숭배한 것은 곧 영적 간음 행위로 규정할 수 있다(Hervey, Keil, Matthew Henry). 그런데 당시 가나안인들의 종계 제의에는 음행의 순서가 들어 있었다. 가나안인들의 신당에 남창과 여창이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의 신들을 섬겼다는 것은 영적 음란에 빠졌다는 것뿐만 아니라 실제로 육적 음란에도 빠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속히 치우쳐 떠나서. ‘치우치다’에 해당하는 원어 ‘수르’는 ‘기울다’, ‘떠나다’, ‘외면하다’, ‘반역하다’라는 뜻이다. 이는 곧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외면하고 엉뚱한 데로 돌아선 것을 가리킨다. 그들이 이처럼 반역 행위를 ‘속히’ 했다는 사실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사사가 사는 날 동안에는 … 구원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신 목적을 거듭 보여주고 있다(16절). 이스라엘은 평안할 때에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으나 극심한 고통 중에서는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같은 부르짖음도 외면치 않으시고 그들을 돌보셨는데 곧 사사를 통해서이다(3:7-11). 이는 곧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징벌을 가하시는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곧 불과 같은 시련을 통해서라도 당신 백성이 다시 의의 길로 돌아서게 하는 데 있다(욥 23:10).
뜻을 돌이키셨음이거늘. ‘뜻을 돌이키다’의 히브리어 ‘나함’은 ‘동정하다, 위로하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한 번 정하신 뜻을 돌이켜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셨다는 것은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삼상 15:29)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이와 유사한 경우는 모세의 기도로 인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지 않은 사건(출 32:9-14)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 모든 경우는 실상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바꾼 것이 아니라 당신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겠다는 언약(출 19:5)에 충실한 자세로 복귀하신 것을 의미한다.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기서 ‘행위’의 원어 ‘미마알르레헴’은 ‘어떤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나 ‘어떤 물건을 먼지 구덩이 속에 굴리는 것’ 또는 ‘어린 아이와 같이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위에서 설명한 ‘타락하여’와 그 뜻이 서로 통한다. 그리고 ‘패역한’의 원어 ‘카샤’는 목이 곧고 교만하여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하지 않는 ‘종교적인 타락’을 가리킨다(출 32:9, 33:3). 이것은 사사를 통하여 대적의 압제에서부터 구원 받는 체험을 하였던 백성들이 사사가 죽고 나면 이전보다 더욱 심한 죄악의 길로 돌아섰음을 보여준다. 그들의 이 같은 반복적 타락은 개가 그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벧후 2:22).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명령한 언약. 여기서 말하는 언약은 구체적으로 ‘모세의 언약’(출 19:1-5)을 가리킨다. 이 언약은 이후 이스라엘 역사의 척도가 되었는데 이스라엘의 흥망성쇠는 바로 이 언약에 대한 이스라엘의 순종 여부에 달려있었다.
시험하려 함이라. ‘시험하다’의 원어 ‘나사’는 ‘입증하다’는 뜻 외에도 ‘연단하다’, ‘시련을 가하다’라는 뜻도 지니고 있다. 이는 곧 잠시 동안 시련 가운데 내버려둠으로써 본래의 자세를 되찾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본 절에서 하나님이 사사를 보내지 않으시고 당분간 열국의 압박에서 신음토록 이스라엘을 버려두시는 목적을 발견하게 된다. 즉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이스라엘을 고통 속에 당분간 버려두시는 것은 19절에서 본 바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이상 어린 아이들처럼 먼지 구덩이 속에서 구르지 못하게 하고 완고함을 버리도록 하려는 목적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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