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길르앗 땅’은 사해 위, 얍복 강 유역에 위치한 지역으로서 유향의 산지로 유명하다(렘 8:22). 이곳은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에게 분배되었다(3:12-17, 수 13:24-31). 그런데 여기서 ‘단’은 정확히 어느 곳을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만일 이곳이 단 지파가 차지한 가나안 최북단 헤르몬산 기슭의 단(수 19:47, 삿 20:1)을 가리킨다면, 본 절은 다음과 같이 이해되어야 한다. 즉 비스가 산에서 헤르몬 부근의 단까지는 거리가 무려 160 km 정도나 된다. 따라서 모세가 아무리 시력이 좋고, 또 서 있는 곳이 높다고 할지라도 정상적으로는 그곳까지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일은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모세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셈이 된다(Matthew Henry).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기서 가리키는 ‘단’을 헤르몬 부근의 단으로 보지 아니한다. 대신 길르앗 부근에 위치하였던 어느 한 성읍이나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Lange, Keil, Pulpit Commentary). 만일 본 절이 모세가 일반적인 눈으로 볼 수 있었던 지역을 가리킨다고 할 것 같으면, 이들의 견해는 상당히 타당성이 있는 셈이 된다. 그러나 모세의 임종을 맞이하여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의 약속에 근거한 가나안 전경을 보이시고자 하셨다면, 전자의 견해 역시 상당한 설득력이 있게 된다.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 소알까지 보이시고. 여리고는 예루살렘 동편, 요단 골짜기 남단에 있던 큰 성읍이다(수 18:21). 그런데 이곳을 ‘종려나무의 성읍’이라고 부른 까닭은 그곳이 종려나무의 산지로 유명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알은 ‘벨라’(창 14:2)로도 불리웠던 사해 남단, 요단 평지에 위치한 고대 가나안 성읍을 가리킨다(창 13:10, 19:20-23). 따라서 본 절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사해 서부의 연안 지대’를 보이셨다는 뜻이 된다.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출애굽의 영웅이자 이스라엘의 위대한 영도자인 모세는 누구보다도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모세는 그의 간절한 간구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입성이 끝내 허락되지 않았다(3:23-29). 그 일차적 이유는 물론 므리바 물 사건(민 20:12) 때 모세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온전히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이다(31:2, 32:51). 그러나 이 사건은 우리들에게 보다 깊은 교훈을 던져 준다. (1) 모세는 율법을 상징하는 자였던 바, 이는 율법이 결코 인간을 하늘 가나안으로 인도해 들이지 못함을 보여 준다. (2) 천국은 결코 인간의 공로로 말미암아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님을 보여 준다.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여호와의 말씀대로’에 해당하는 ‘알 피 야훼’는 직역하면 ‘여호와의 입을 따라’란 뜻이다. 이 말은 모세가 ‘여호와의 종’이라는 사실에 매우 걸맞는 표현이다. 즉 그는 죽음에 있어서도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거룩한 땅의 경계 밖인 ‘모압 땅’에서 죽었다.
그럼 모세가 자기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기록할 수 있었을까? 오경 같은 문학적인 작품이 지도적인 인물의 죽음으로 결론을 맺는 것은 특이한 일은 아니지만(수 24:29-30에도 비슷한 언급이 있음), 바로 이런 특징 때문에 저자에 관한 문제가 야기된다. 수세기 동안,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모세가 성경의 첫 다섯 책(오경)을 기록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어떻게 모세가 자신의 죽음에 대해 기록할 수 있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답할 때 몇 가지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 모세가 오경의 저자라는 입장 때문에 그가 자기의 죽음에 대한 기사를 미리 기록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요세푸스는 이런 견해를 지지했는데 모세가 “자신이 죽음을 거룩한 책들에 기록해 둔 것은 그들이 자신의 특별한 덕행 덕분에 자기가 하나님께로 갔다고 말할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Flavius Josephus, Antiquities of the Jews, 8.48)고 진술했다. 그러나 성경의 다른 부분에 있는 증거에 의하면, 어떤 선지자나 사도가 어떤 기록된 성경 문서의 저자라고 하여 그 문서의 모든 부분이 낱낱이 직접 그들의 손에 의해서 기록되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예레미야 51장은 “예레미야의 말이 이에 끝나니라”(64절)는 말로 끝맺는데, 그렇다면 52장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 기록되었을 것이다. 요한복음의 끝부분에 믿음의 공동체가 남긴 간단한 기록(요 21:24에 사용된 ‘우리’라는 표현을 주목하라)이 있는데, 그것은 복음서 기록의 진실성을 뒷받침한다. 마치 저자가 죽은 후에 그의 자서전에 편집자에 의해 추가된 후기가 그가 저자임을 부정하지 않는 것처럼, 위의 경우에서도 역사적인 부록이나 결론부의 성경 구절들이 다른 사람에 의해 포함되었다고 그것이 해당 문서의 원래 저자의 신분을 바꾸진 않는다.
둘째, 모세의 기록 활동을 언급하는 다수의 구절이 오경에 산재하여 있다는 사실이다. 출 24:4은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였다고 진술한다. 신 31:9도 “모세가 이 율법을 써서”라고 말한다. 민 33:2은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 노정을 따라 그들이 행진한 것을 기록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오경을 저술할 수 있도록 해 준 자료들을 기록하는 일에 모세가 밀접하게 관여했음을 가리키는 광범위한 증거들이 있다.
셋째, 예수께서 모세를 오경의 저자로 간주하셨다는 것이다. 요 5:46에서 예수께서는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다고 말씀하셨다.
넷째, 모세가 오경을 기록했다는 입장을 지지하는 여러 가지 내적 증거가 있다는 것이다. 오경에 묘사된 사건들에 실제로 참여했던 사람에게서나 기대할 수 있는 목격담(출 15:27 참조), 애굽을 친숙하게 아는 면이 나타나 있는 것, 상당히 많은 애굽어 단어들이 구약의 다른 곳에서보다 오경에 많이 사용되었다는 사실, 오경에 언급된 동물과 식물의 다수가 애굽과 시내 반도에서 발견된다는 사실 등이 모세를 오경의 저자로 지지하는 증거들에 포함된다. 이것들은 애굽에서 양육과 교육을 받고 많은 세월을 광야에서 보낸 모세에게서나 기대할 수 있는 특징들이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것은 근래에 오경에 나타난 통일성과 세심한 문학적 기법 등에 대한 이해가 증가되고 있다는 점이다. 근자에 보수적인 학자들뿐 아니라 심지어는 자유주의 학자들도 오경의 대부분의 자료에는 오직 한 명의 저자만 존재함을 지지하는 설득력 있는 논증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논증들에 비추어 볼 때, 전통적인 입장을 지지하여 모세를 단일 저자로 보지만, 신 34장에 있는 그의 죽음의 기사를 쓴 자를 여호수아나 다른 지도자로 볼 수 있는 타당성 있는 근거가 있다.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 없으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모세를 장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유 1:9은 이러한 사실의 근거가 된다. 즉 하나님께서는 천사장 미가엘을 보내어 모세의 시신을 인간이 알지 못하는 곳에 장사하도록 명하셨던 것 같다. 그 이유는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무덤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을지도 모를 위험성 때문이었을 것이다(Calvin, Stanley). 한편 모세가 엘리야와 더불어 변화 산상에 나타난 사실(마 17:3, 막 9:4, 눅 9:30)을 볼 때, 모세가 부활하여, 에녹과 엘리야처럼 승천한 것으로 보인다(Matthew Henry).
눈이 …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이삭은 말년에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였고(창 27:1), 야곱 또한 마찬가지였다(창 48:10). 그러나 모세가 다른 사람에 비하여 노쇠하지 않았던 까닭은 그가 막중한 책임을 떠맡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항상 하나님의 도우심을 앙망함으로 새 힘을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사 40:31).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지혜의 영’이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덧입혀 주신 ‘참된 지혜’ 곧 ‘호크마’를 가리킨다(32:29). 따라서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안수할 때 그에게 이러한 지혜가 충만히 임하였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친히 여호수아를 모세의 후계자로 인정하셨음을 의미한다.
대면하여 아시던. 여기서 ‘알다’에 해당하는 ‘야다’는 단지 지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닌, 깊고 오랜 교제를 통해 인격적, 경험적, 영적으로 아는 것을 가리킨다(고전 8:3). 따라서 이는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주 친밀하게 지내신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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