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주석, 신명기 3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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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 하늘이여 … 땅은 … 들을지어다. ‘모세의 노래’(1-43절)의 서두로서 모세는 매우 장엄한 표현을 사용하여 듣는 자들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다. 한편 본 절은 ‘하늘과 땅을 불러 증거를 삼는다’(4:26, 30:19, 31:28)는 말과 같은 의미인데, 이처럼 모세가 하늘과 땅으로 하여금 자신의 말에 귀기울이라고 한 것은 곧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채택함으로써 (1) 그 말(일명 ‘모세의 노래’)의 ‘불면성’ 및 (2) 전 우주의 관심이 집중되어야 할 만큼 중요하다는 ‘중대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였다(30:19).

 

32:2 아주 장엄한 1절의 표현과는 대조되는 매우 서정적인 표현이다. 모세는 자신의 입을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메마른 사람의 영혼을 새롭고, 기름지게 만드는 단비와 이슬 같다고 선언하고 있다(Keil). 이는 또한 이스라엘이 옥토와 같은 마음밭을 갖고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줄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실로 물이 귀한 팔레스타인의 환경을 참작할 때, 그리고 타는 듯한 사막의 메마름을 백성들이 익히 알고 있음을 감안할 때 이 비유의 신선함을 선명히 느낄 수 있다(히 6:7-8).

내 교훈. ‘교훈’에 해당하는 ‘레카흐’는 ‘받아들인 것’이란 뜻이다(Keil, Pulpit Commentary). 따라서 ‘내 교훈’이란 모세의 교훈이라는 뜻이 아니라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교훈, 즉 ‘하나님의 교훈’이라는 뜻이다.

이슬. [히, 탈] ‘살짝 뿌리다’, ‘덮다’란 말에서 파생된 말이다.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이슬이 많이 내리는데 그 원천은 지중해의 습한 바람이다. 8-9월 중에 많이내리는 이슬은 팔레스타인에서는 수자원으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특히 비가 제때 안 내릴 경우 이슬은 한 해의 농사에 큰 구실을 한다. 따라서 만약 이슬이 제대로 내리지 않으면 가뭄의 피해는 가중된다. 이런 점에서 이슬은 비 못지 않게 중요한 자연의 혜택이었다.

가는 비. [히, 사이르] ‘머리카락’, ‘털’에서 파생된 단어로 ‘가볍게 내리는 비’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생명을 돋아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력’을 상징한다.

단 비. [히, 레비빔] ‘풍성함’, ‘많음’에서 파생된 단어로 ‘소나기’(KJV, showers) 또는 ‘많은 비’(NIV, abundant rain)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사람들의 눈에 현저하게 띄일 정도로 크게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생명력’, ‘강권력’을 상징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메마른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힘이요, 삭막한 심령에 풍성한 결실을 보장해 주는 능력이다.

 

32:3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리니. 하나님의 성품과 역사 등을 온 천하에 널리 증거하고 선포하겠다는 뜻이다(Lange). 여기서 ‘이름’은 그 이름에 의해 대변되는 자의 성품이나 업적 따위를 상징하고 있다(12:3).

우리 하나님께 위엄을 돌릴지어다. ‘우리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라’(NIV, praise the greatness of our God)는 뜻이다(Keil). 즉 모세가 증거한 하나님의 성품과 놀라운 역사를 듣고서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이다(시 29:1-2, 96:7-8). 한편 여기서 ‘위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고델’은 특별히 모세 오경의 특징적 단어로서 (3:24, 5:24, 9:26, 11:2), 본 노래가 모세의 저작임을 증거한다.

 

32:4 그는 반석이시니.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찾고 의지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언제나 안전하고 영원한 피난처가 되신다(Lange, Keil). 성경에는 하나님을 반석에 비유한 구절이 많은데(삼상 2:2, 시 18:2, 19:14, 31:3), 특히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를 ‘신령한 반석’(고전 10:4)으로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아무튼 모세의 이러한 표현 역시 사막 시대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곧 쉽게 쌓였다가 쉽게 흩날리는 모래 산과는 달리 언제나 제자리에 변함없이 우뚝 서 있어, 사막의 온갖 위험으로부터 여행자들의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 주는 거대한 반석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하였을 것이다. 한편 하나님을 ‘반석’(히, 추르)에다 비유하는 이러한 표현 역시 모세 시대의 특징을 반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당대에 그러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이름이 많았는데, 예를 들면 ‘브다술’(민 1:10, 구속의 반석), ‘수리엘’(3:35, 하나님은 나의 반석) 등이 그렇다(Keil & Delitzsch, Pulpit Commentary). 이런 맥락에서 헬라어 역본 70인역(LXX)은 본 장에 나타나는 ‘반석’을 모두 ‘하나님’(헬, 데오스)으로 번역하고 있다(Matthew Henry).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이 말은 하나님의 미쁘신 신실성(faithfulness)과 전혀 불의(iniquity)가 없으심을 증거하는 말이다(삼상 15:29, 시 99:4).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공동번역은 이를 ‘올바르고 곧기만 하시다’로 번역하였다. 여기서 ‘공의’(righteousness)와 ‘바름’(justice)은 둘 다 하나님의 ‘공의성’과 ‘공평성’을 재삼 강조하는 말이다. 이와 같이 동일한 뜻을 가진 낱말을 나열시켜 의미를 강조하는 기법을 가리켜 일명 ‘중언법적(重言法的) 표현’이라 한다.

 

32:5 흠이 있고 삐뚤어진 세대로다. 이는 곧 하나님께 반역한 ‘패역한 세대’를 가리킨다. 그 의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패역할 뿐 아니라 완악하기가 이를 데 없음을 강조한 말이다(RSV). 이런 의미에서 시리아 역(Syriac)은 이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녀들이 되었다’란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Pulpit Commentary). 사실 40년 광야 역사를 통해서도 나타났듯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한 없는 은혜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그 사랑과 은혜를 저버린 패역하고 목이 곧은 백성이었다(9:6, 출 32:9).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이러한 질책성 경고는 오늘날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악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세대를 향한 준열한 꾸짖음이기도 하다(마 3:7-10).

 

32:6 너를 지으신. 이에 대하여서는 KJV와 RSV의 해석이 다르다. 전자는 ‘너를 사신’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사건을 염두에 둔 번역이다(시 74:2). 그러나 후자는 ‘너를 창조하신’으로 번역하여, 뒤에 나오는 ‘너를 만드시고 세우셨도다’는 말과 호응하게 하고 있다(사 64:8). 혹자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진정 자신의 소유로 획득하여 인친 사건은 출애굽 사건이라고 보기 때문에 전자를 지지한다(Keil, Pulpit Commentary).

네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표현은 성경에 자주 나온다(삼하 7:14, 대상 17:13, 시 68:5, 89:26, 사 63:16, 렘 3:4, 19, 말 2:10). 한편 구약에서 ‘아버지’(히, 아브)라는 말은 한 가족의 가장을 지칭하기도 했지만 더러는 한 개인이나 공동체의 조상을 가리키기도 했다(창 28:13, 왕상 2:10, 왕하 19:12). 그 뿐 아니라 간혹 존경을 표하는 칭호로도 사용되었다(삿 17:10, 왕하 2:12, 6:21). 따라서 본 절에서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칭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담겨 있다. (1) 누가가 예수의 계보에서 하나님을 인류의 첫 번째 조상으로 소개한 것처럼(눅 3:38),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조성하신 참하나님이시다(사 44:2, 24). (2) 아버지가 그 자녀를 보호하듯 하나님 역시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양육하시는 분이시다(10-14절, 사 43:2). (3) 부모가 자녀들로부터 공경을 받는 것이 마땅하듯 하나님은 이스라엘로부터 당연히 경배받아야 할 분이시다(시 135:3-4).

 

32:7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이스라엘의 역사는 거듭되는 인간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끊임없는 은혜와 사랑과 긍휼로 점철된 역사였다. 이는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거듭 하나님께 죄악만을 쌓던 이스라엘의 패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끝까지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들이신 사건만을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따라서 미래의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죄악의 길에 빠질 때 이러한 그들의 과거 역사를 겸허한 마음으로 회고함으로써 진정 그들은 하나님께 회개하고 자복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과거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 가운데 베풀어 주신 갖가지 은혜를 오늘 기억하는 것이 신앙의 필수 요소이다.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가정을 중요시하는 히브리인들의 교육 방식은 어느 민족에게서도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히브리 어린이들은 일차적으로 자기 부모로부터 교육을 받으며 자랐는데 그 영향은 실로 지대한 것이었다(6:7). 그 대표적인 경우로는 유월절 절기 때마다 공동 식사를 나누며 과거 하나님의 섭리와 조상들의 역사를 가르침 받던 것을 들 수 있다(출 13:14-16).

 

32:8 본 절은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당신의 예지로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세계 열방을 섭리로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민족들에게 기업을 주실 때. 세상 나라들의 모든 역사를 친히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강조하는 말이다(단 4:35).

인종을 나누실 때. 공동번역은 ‘인류를 갈라 흩으실 때’로 번역하고 있다. 즉 바벨탑 사건 이후 인류의 언어가 나누어지고, 지역적으로 흩어지게 되었던 때를 상기시켜 준다(창 11:1-9).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 정하셨도다. 70인역(LXX)은 이를 “하나님의 천사들의 수효를 따라 … ”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는 각 민족마다 그 민족을 지키는 수호 천사가 있다고 생각한 후기 유대교 사상이 가미된 자의적 해석이다. 아마 그들은 신 4:19, 단 10:13, 20-21, 12:1의 의미를 잘못 해석한 것 같다(Keil & Delitzsch, Pulpit Commentary). 그리고 혹자는 이스라엘 12지파의 수효와 가나안과 그 아들들의 수효가 일치한 점(창 10:15-20)을 들어 여기서 ‘민족들’이란 ‘가나안 족속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Matthew Henry).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유익을 염두에 두시고 세계를 분할하셨다’는 뜻이다(Calvin). 즉 하나님께서는 구속사의 전개를 위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특수성을 미리 염두에 두셨다. 과거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세계 열방을 섭리하셨던 하나님은 오늘날에는 영적 이스라엘 자손의 공동체인 교회를 중심으로 세계를 주관하고 계신다.

 

32:9 여기서 ‘이스라엘’을 ‘야곱’(‘속이는 자’)으로 지칭하고 있는 까닭은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 조상 야곱처럼 간사한 백성이라 할지라도(창 25:27-34, 27:1-29, 33:10), 하나님께서 극진하신 사랑으로 그들을 선택하사 당신의 분깃으로 삼았음을 시사하기 위함이다.

그가 택하신 기업. 문자적 뜻은 ‘그의 토지로 측량해 놓은 것’ 또는 ‘그의 상속 재산으로 정해 놓은 것’을 의미한다(시 16:6).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열국들 가운데서 특별히 당신의 ‘자’(히, 헤벧)로 구분해 놓은 자신의 분깃(portion)이란 뜻이다(Lange, Keil, Pulpit Commentary).

 

32:10 황무지에서 … 광야에서. 황무지와 광야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40여 년 동안 방랑하던 황량하고 삭막한 땅이다. 실로 그곳은 아무런 수확도 기대할 수 없고 단지 짐승의 울음만이 처량하게 들려오던 두렵고 낯선 오지였오 크고 두려운 곳이었다(1:19). 따라서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과 세심한 배려가 없었더라면 이스라엘은 결코 그곳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Herxheimer).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눈동자는 인간의 신체 부위 중 가장 귀중한 것일뿐 아니라, 아주 쉽게 다칠 수 있는 약한 부위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말은 ‘최우선적으로 아끼며 아주 조심스럽게 보호한다’(시 17:8, 잠 7:2)는 의미이다(Lange, Keil, Wycliffe).

 

32:11 마치 독수리가 … 새끼를 받으며. 어미 독수리는 새끼들을 날게 하기 위하여 일부러 둥지에서 새끼들을 떨어뜨린다. 그런 후 주위에서 조심스럽게 지켜보다가 새끼들이 힘에 부쳐 떨어질 때는 신속하게 새끼를 받아 새끼들이 해를 당하지 않게 한다. 이런 방법을 반복함으로써 어미 독수리는 새끼를 강하고 튼튼하게 키운다. 모세는 바로 이러한 사실에 비유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답게 양육하기 위하여 광야에서 사랑과 공의로 훈련시키셨음을 설명하고 있다(출 19:4).

보금자리를 … 너풀거리며. 새끼들이 보금자리에서 졸고 있을 때 깨워 날게 하려고 어미 독수리가 그 둥우리를 어지럽게 휘젖는 것을 가리킨다(Knobel, Matthew Henry).

“독수리는 자기 새끼에 대해 유난히 헌신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수리는 주로 산 꼭대기에 산다. 독수리가 새끼에게 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새끼를 등에 업고 시나이 평지가 내려다보이는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 낭떠러지로 떨어뜨린다. 만일 새끼가 너무 어려서 잘 날지 못하면 아비 독수리는 신속하게 아래로 내려가 새끼를 낚아챈 다음 등에 업고 다시 험준한 바위 위의 둥지로 날아 올라간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었는지 보라’(출 19:4)고 말씀하신다”(George A. F. Knight, Theology of Narration (Grand Rapids, 1976년), 128).

 

32:12 여호와께서 홀로 … 다른 신이 없었도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인도하며 보호하신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이셨음을 강조한다(6:4). 이러한 사실은 지나온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이 친히 목도한 것이기도 하다(29:2-3, 출 19:4). 따라서 이를 알면서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우상)을 섬긴다면 그것은 무엇으로도 변명할 수 없는 큰 죄악이 될 것이었다(Keil).

 

32:13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여기서 ‘땅의 높은 곳’이란 가나안 땅을 가리킨다. 성경에는 종종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내려간다’는 표현이 나오는데(창 12:10, 26:2, 42:1-3). 이는 가나안 땅을 높은 곳으로 여기고 있는 히브리인들의 관념에 근거한 것이다. 그리고 ‘타고 다니게 하다’는 말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자신의 소유로 삼을 것을 의미한다(Keil, Lange, Wycliffe, Pulpit Commentary). 결국 하나님의 축복 속에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의 소유가 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명예롭게 고양시키신 일이다(사 58:14).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가나안 땅의 기름진 상태를 묘사한다(11:9). 그런데 그러한 사실을 굳이 본 절과 같이 표현하고 있는 까닭은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1) 가나안 땅에는 실제로 바위밑이나 그 틈 사이에 야생하는 벌이 많아 반석으로부터 꿀을 채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 자갈이 많은 척박한 땅에서도 포도나무,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종려나무 등과 같이 팔레스타인의 대표적인 유실수라고 할 수 있는 나무들이 잘 자라 기름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Lange, Puplt Commentary). 한편 카일(Keil)은 여기서 더 나아가 이 말은 가장 척박한 곳에서도 가장 귀한 소산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32:14 소의 엉긴 젖. ‘엉긴 젖’에 해당하는 ‘헤므아’는 ‘치즈’나 ‘버터’와 같이 절반 정도 응고된 우유를 가리킨다. KJV는 이를 ‘버터’(butter)로, NIV와 RSV는 ‘응유’(curd)로 각기 번역하고 있다.

양의 젖. ‘젖’에 해당하는 ‘할라브’는 액체 상태 그대로의 젖을 가리킨다.

어린 양의 기름. 성경 표현상 ‘기름’(히, 헬레브)은 흔히 ‘최고’, ‘최상’을 상징한다(민 18:12). 따라서 이 말은 ‘가장 좋은 어린 양’을 의미한다(Vitringa, Alexander).

바산 에서 난 숫양과 염소와 … 밀. ‘바산’은 갈릴리 동북쪽, 길르앗 이북에 위치한 고원 지대이다(3:1). 이곳의 땅은 매우 비옥하고 목초지가 많아 가축사역과 밀 경작으로 유명하였다(시 22:12, 사 33:9).

 

32:15 여수룬. 이스라엘을 명예롭게 일컫는 시적 표현 또는 별명이다(33:5, 26, 사 44:2). 70인역(LXX)은 이 말을 ‘사랑받는 자’로도 번역했으나. 델리취(Delitzsch)는 이 말의 어원을 ‘아샤르’ (‘옳음’, ‘곧음’)로 보고 ‘옳은 자’ 또는 ‘의로운 자’로 이해했다(민 23:10). 따라서 ‘여수룬’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의로운 자가 된 이스라엘’을 의미한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이처럼 명예롭고 존귀한 명칭이 본 절에서는 이스라엘의 사악함을 드러내는 데 사용되었다. 즉 마땅히 그 이름의 뜻답게 의로운 길을 걸으며 살아가야 할 백성들이 오히려 배교의 길을 걷고 있으므로, 이를 꾸짖기 위해 이스라엘을 풍자적으로 ‘여수룬’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Calvin).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풍족한 삶을 누리게 되자, 오히려 하나님을 배신하였다는 뜻이다(Luther).

업신여겼도다. [히, 나발] 원뜻은 ‘시들다’, ‘마르다’이다. 여기서는 하나님을 ‘가볍게 여겼다’(KJV), 또는 ‘거부했다’(NIV)는 뜻이다(미 7:6).

 

32:16 다른 신. 11:27-28, 13:6 주석 참조.

가증한 것. [히, 토에바] 원뜻은 ‘구역질 나는 것’으로 곧 ‘우상’을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것들을 얼마나 혐오하시는지를 잘 나타내 준다. 23:18 주석 참조.

 

32:17 귀신들. 이 말에 해당하는 ‘쉐딤’은 본래 반신 반인(demigod, 半神半人)이란 뜻을 지닌 앗스르의 수호신 ‘쉐두’에서 온 말이다. 그런데 70인역(LXX)과 불가타역(Vulgate)은 이를 ‘귀신’(demons)으로 번역하였다(Keil, Pulpit Commentary). 그러나 여기서 이 말은 신약적 개념의 마귀나 귀신을 뜻하지 아니하고, 어디까지나 ‘이방 우상들’을 의미한다.

근래에 들어온 새로운 신들. ‘근래에’(히, 믹카로브)는 통상 시간적, 장소적 근접 상태를 모두 의미하며, 여기서는 시간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근래의 신들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먼 열조 때부터 오랬동안 알아왔던 신, 곧 여호와 하나님과는 뚜렸이 대조되는 헛된 신들이다(13:2, 6). 한편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누구나 종교적 성향을 갖고 있다(행 17:22). 그리하여 인류 역사 속에서 무수한 새 신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참신이 아니었으므로, 그것을 섬기던 특정 민족이나 집단의 흥망성쇠와 더불어 명멸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살아계신 참신이신 까닭에 역사와 공간을 초월하여 영존하신다(시 102:26-27).

 

32:18 상관하지 아니하고. ‘괘념하지 아니하다’, ‘무관심하다’란 뜻이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을 배신하였는 지(15절) 그 과정을 시사해 준다.

 

32:19 여호와께서 보시고. ‘보다’에 해당하는 ‘야레’는 ‘놀라다’, ‘두려워하다’로 번역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본 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의 배은 망덕한 범죄 행위에 대하여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극도로 실망하셨다는 의미가 된다.

 

32:20 내가 내 얼굴을 … 숨겨. 하나님께서 더 이상 상대방과 관계하지 않으시고, 그들에 대한 모든 보호와 긍휼을 중단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31:17-18 주석 참조.

그들은 심히 … 자녀임이로다. 영역본 RSV는 이를 ‘그들은 완악한 세대이고 신실하지 않은 자녀들이다’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5절과 흡사한 표현이다.

 

32:21 본 절은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 행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느끼시는 감정을 인간적인 차원으로 묘사한 구절이다. 즉 이는 한 남편이 음란한 아내에게 자신이 멸시당하고 있음을 알고, 그 역시 다른 여자와 연애를 함으로써 보복하는 질투 심리를 연상시켜 준다. 그러나 하나님의 질투나 보복은 미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랑에 근거한 교육적 차원의 징계이다. 이 선고는 앗수르, 바벨론, 메대, 바사, 로마 등과 같은 이방 민족이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그들을 괴롭힘으로써 역사상 성취되었다. 한편 신약 시대의 사도바울은 이러한 본 절을 구속사적 측면에서도 이해하였다. 즉 그는 복음을 거절한 유대인들보다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들을 먼저 교회 안으로 이끄심으로써, 유대인들로 하여금 시기나게 하여 그들도 마침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실 하나님의 구속 섭리를 설명하기 위해 본 절을 인용하였다(롬 10:19, 11:11).

내 질투를 일으키며.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을 의인화시킨 표현 방법으로 신학적으로는 신인 동형 동성론적 표현이다(출 20:5, 사 42:8).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우상 숭배하는 자들에 대하여 질투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외에 다른 대상에게 헌신과 애정을 바치는 행위를 하나님께서 결코 용납치 않으신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표현한 말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질투’는 고대 근동의 다른 신들처럼 인간의 성공이나 번영 그리고 배반 등에 대해 시기하고 암투하는 그러한 질투가 아니라, 자신에게 돌아올 고유한 영광이나 찬송이 자신의 피조물인 다른 생명체나 무생물체에게 엉뚱하게 주어질 때 하나님의 속성상 우러나오는, 당신의 백성을 향한 또 다른 사랑의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백성의 영혼이 헛된 우상에게 빼았길 때 그것을 질투하시는 것이다(출 34:14, 수 24:19). 하나님의 이러한 품성은 우상 숭배하는 행위를 ‘음행’이라는 말로 정죄한 사실(렘 13:27, 겔 16:20, 호 9:1)에서도 잘 드러난다.

허무한 것. 우상의 속성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4:23). 레 26:1 주석 참조.

백성이 아닌 자. 이스라엘측에서 볼 때 정상적인 백성(민족)으로 볼 수 없는 자들, 곧 하나님을 떠나 인간의 소욕대로 사는 ‘이방 민족’을 가리킨다(Keil).

 

32:22 내 분노의 불. 하나님의 분노를 ‘불’에 비유한 표현은 성경에 자주 타나나다(렘 15:14, 17:4, 애 4:11). 실제로 하나님은 불로써 이스라엘에게 분노를 표하기도 하셨다(민 11:1-3).

스올의 깊은 곳까지 불사르며. ‘스올’은 신약 시대의 ‘무덤’ 또는 ‘지옥’(헬, 하데스)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나 구약시대 당시에는 ‘사후의 세계’에 대한 계시가 명확하지 못했었다. 따라서 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스올’ 곧 ‘무덤’은 선악간을 막론하고 죽은 자들이 가는 곳인 ‘지하 세계’를 가리킨다. 창 37:36 주석 참조, 결국 본 절은 분노의 극렬함으로 인해 땅 속까지 미치는 듯한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을 의미한다.

 

32:23 쌓으며. [히, 사파] ‘문지르다’, ‘깨끗이 하다’, ‘면도하다’는 뜻도 지니고 있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칼뱅(Calvin)은 이를 ‘완전히 멸망시키다’는 뜻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은 개역개정 성경과 마찬가지로 ‘쌓아 올리다’(heap)로 번역하고 있다(KJV, NIV, RSV, Living, Bible).

내 화살이 다할 때까지 그들을 쏘리로다. 하나님의 재앙이 위에서부터 쏘아대는 화살에 비유되고 있다(시 7:13, 슥 9:14). 이는 곧 하나님께서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더 이상 자기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고 물리쳐 없앨 대적으로 간주하겠다는 뜻이다.

 

32:24 하나님의 심판의 화살(23절)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들인지를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곧 극심한 기근과 각종 질병 그리고 전쟁(25절)이다. 이러한 재앙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으며 무모한지를 잘 보여 준다.

불 같은 더위와 독한 질병. 이는 각각 ‘열병’(fever)과 ‘흑사병’(pestilence)을 가리키는 듯하다(RSV, Living Bible).

들짐승의 이. 사나운 야수들의 송곳니(fangs, NIV)에 의해 갈갈이 찢겨 죽으리라는 경고이다.

티끌에 기는 것의 독. ‘티끌에 기는 것’이란 뱀을 가리킨다(창 3:14). 그러므로 이는 각종 독사(viper, NIV)에 의해 입는 상해를 의미한다.

 

32:25 밖으로는 칼에, 방 안에서는 놀람에. 후일 남 왕국 유다의 몰락을 바라보면서 예레미야가 “밖에서는 칼이 내 아들을 빼앗아 가고 집 안에서는 죽음 같은 것이 있나이다”(애 1:20)라고 탄식한 것은 바로 본 절의 성취일 것이다. 실상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천만인이 둘러 치려 하여도 두려워하지 않으나(레 26:7-8, 잠 3:6). 그렇지 못한 자들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한다(레 26:36-37, 잠 28:1).

젊은 남자와 … 백발 노인. 패역한 세대, 사악한 종류에게 임할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을 보여준다. 아울러 예외 없는 하나님의 심판의 엄중함을 보여 준다.

 

32:26 흩어서. [히, 파아] 원뜻은 ‘훅불다’이다. 여기서는 강한 바람에 날려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는 먼지와 같이 비참한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32:27 원수를 자극하여 … 걱정하였으니. 이는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이스라엘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을 마치 자기들의 힘과 용맹 때문인 줄로 오해하여, 이스라엘을 멸시할 뿐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까지 비웃을까 걱정된다는 뜻이다. 만일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그 지엄하신 영광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한낱 조롱거리 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본 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되 당신의 영광을 훼손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선민 이스라엘을 완전한 파국에까지는 이르지 않게 하실 것임을 시사해 준다.

우리의 수단이 높으며. 자신들의 힘이 강하고 용맹이 탁월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이방인들의 어리석은 교만을 가리킨다(Keil).

 

32:28 그들은. 본 절부터 이하에 나오는 ‘그들’은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대명사이다. 혹자는 이를 27절과 연관, ‘이스라엘의 대적’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하는데(Wycliffe) 전체 문맥에 상치되는 견해이다.

모략이 없는.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들의 주(Lord)로 깨달아 아는 지각이나 분별력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Lange).

 

32:29 이 부분은 이스라엘이 만일 지혜로운 마음을 품어서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지 아니하고, 따라서 하나님도 그들을 대적에게 내어 주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일종의 가정법적 탄식이다. 이로 볼 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징계의 채찍을 맞고 돌아오기 전에, 아예 처음부터 자신의 말씀에 순종하여 영원히 축복된 삶을 살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심을 명백히 알 수 있다.

지혜. [히, 호크마] 여기서 지혜는 단순히 기교적인 지식이나 사변적인 학식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과 언약 백성이라는 맥락 안에서, 그 관계를 올바로 유지시켜 주는 이론적인 총명함과 명철함, 실천적인 유능함과 슬기로움, 도덕적인 정직함과 성실함, 영적인 온전함과 청결함을 총체적으로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지혜는 결코 세상에서 얻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얻을 수 있다. 그런즉 한마디로 말해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호크마’ 곧 지혜의 근본이라 하겠다(시 111:10). 따라서 이러한 지혜가 없는 백성은 결국 멸망당할 수 밖에 없다.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는 선지자 호세아의 말도 지혜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우치기 위한 그의 기별이었다.

 

32:30 그들의 반석. ‘반석’(4절), ‘너를 낳은 반석’(18절)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반석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킨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주지 아니하셨더면. 이스라엘 대적들의 자고한 생각(27절)을 직접적으로 반박하고 있다. 동시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써 겪게 되는 패전의 참담한 결과를 보여 준다.

 

32:31 그들의 반석이 우리의 반석과 같지 아니하니. 여기서 ‘그들의 반석’은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믿고 의지하는 이방의 각종 신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우리의 반석’이란 물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킨다.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을 반석으로 삼지 않을 때, 물질, 재산, 권력, 심지어 허탄한 우상신까지 자신의 반석으로 의지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능 앞에 대적할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애굽의 술객들도 모세와 겨루다 결국 하나님의 권능에 굴복하고 말았다(출 8:16-19). 그러므로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삼상 2:2)라고 고백하였다.

원수들이 스스로 판단하도다. 혹자는 대적이 스스로 자신들의 신보다 여호와를 더 전능하다고 인정할 리 없다고 하면서 본 절을 의심하기도 한다(Schultz). 그러나 성경 기록만 보더라도 이러한 예는 많다. 즉 애굽 군사들의 경우(출 14:25), 이방의 술사 발람의 경우(민 23:23), 가나안에 거했던 라합의 경우(수 2:9-10), 그리고 블레셋 족속 아스돗 사람들의 경우(삼상 5:7) 등이 스스로 여호와를 자신들의 신보다 능하다고 판단한 경우이다(Keil & Delitzsch).

 

32:32 그들의 포도나무. ‘이스라엘’을 총칭하는 말이다(호 10:1, 욜 1:7). 시편 기자와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한 극상품 푸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가나안 땅에 심었다고 묘사한 적이 있다(시 80:8, 사 5:2).

소돔의 포도나무요 고모라의 밭의 소산이라. 이스라엘이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소돔과 고모라의 음란을 따르는 타락한 백성이 되었음을 비유하고 있다(창 18:20, 19:4-9, 사 1:10, 렘 23:14).

독이 든 포도. 29:18의 ‘독초와 쑥의 뿌리’라는 말과 의미상 같은 뜻으로, 우상 숭배를 비롯한 이스라엘의 온갖 죄악된 행위를 의미한다(29:18). 후일 선지자 이샤야도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사 5:2)라고 탄식했다.

 

32:33 뱀의 독이요 독사의 맹독이라. ‘뱀’에 해당하는 ‘탄닌’은 코브라 종류를 가리키는 듯하다(출 7:10). 그리고 ‘독사’에 해당하는 ‘페텐’은 살모사와 같이 치명적인 독을 지니고 있는 뱀들을 가리킨다(Kitto, Smith, Rosenmüller). 따라서 본 절은 이스라엘의 죄악이 치명적인 것임을 의미한다(Calvin). 후일 사도 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고 말함으로써, 죄의 독성을 한 마디로 요약하였다.

 

32:34 이것이 내게 쌓여 있고 … 봉하여 있지 아니한가. 영역본 Living Bible은 본 절을 “그러나 이스라엘은 나의 특별한 백성이며 내 보물 창고 안의 보석들처럼 인침을 받았다”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이것’이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된 ‘독이 든 포도’(32절), 뱀의 독 같은 포도주(33절)와 같은 이스라엘의 온갖 죄악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본 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죄악을 심판의 때까지 잊지 않고 반드시 간직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죄악은 그들의 마음 판에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어 있다고 말함으로써(렘 17:1), 회개하지 않은 죄악은 어떤 경우에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32:35 내가 보복하리라. 타락하고 불경건한 자들을 반드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을 표현한 말이다. 후일 사도 바울도 이 구절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설명하였다(롬 12:19, 히 10:30).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영역본 제임스왕역(KJV)은 이를 ‘때가 되면 그들의 발은 미끄러질 것이다’라고 번역하였다. 하나님께서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방법으로 심판하실 것을 암시한다(창 15:16).

 

32:36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고. ‘판단하다’에 해당하는 ‘딘’의 원뜻은 ‘재판을 집행하다’, ‘심판하다’이다 그러나 RSV는 이를 확대 해석하여 ‘변호할 것이다’(will vindicate)라고 번역하였다.

그 종들을 불쌍히 여기시리니. ‘그 종들’이란 특정인, 즉 이스라엘의 선지자나 경건한 무리들만을 가리키기보다는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자기 백성)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다’(히, 나함)는 말도 원래 ‘한숨 쉬다’는 뜻이나, 여기서는 ‘동정하다’, ‘긍휼히 여기다’(시 135:14)란 의미로 봄이 타당하다.

갇힌 자나 놓인 자가 없음을 보시는 때. 여기서 ‘갇힌 자’와 ‘놓인 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치 않다. 혹자는 ‘매인 자와 자유로운 자’로 보기도 하며(Gesenius, Fürst), 혹자는 ‘결혼한 자와 독신자’로 보기도 한다(Keil). 아무튼 ‘갇힌 자와 놓인 자’란 표현은 ‘모든 사람’ 또는 ‘온갖 종류의 사람’을 가리키는 히브리적 격언이다(Pulpit Commentary). 따라서 본 절은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중에 남아 있는 자들이 거의 없을 때를 가리킨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더 이상 멸망 중에 내버려 두시지 않고 마침내 회복시키실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중에 ‘거룩한 씨’를 계속 보존시키실 것이다(사 6:13).

 

32:37 37-28절. 여기서 ‘그들의 신들’, ‘그들이 피하던 반석’, ‘그들의 제물의 기름을 먹고’ ‘전제의 제물인 포도주를 마시던 자들’은 모두 이스라엘이 정성스럽게 제사드리며 의지하였던 ‘헛된 우상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 절은 환난 날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우상의 무능함과 그것들을 섬겼던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을 역설적으로 준엄하게 꾸짖고 있다.

 

32:38 제물의 … 너희를 돕게 하고. 사실 이방의 우상들은 고기를 먹지도, 술을 마시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바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4:28) 나무와 돌덩이이기 때문이다(28:36).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그것들이 마치 복이라도 주는 것인양 지성껏 섬겼으니 이제 그들에게 도움을 청해보라는 풍자적 질책이다. 따라서 이 말은 후일 갈멜 산에서 엘리야가 450인의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할 때 그들에게 조롱하듯 한 말을 연상시킨다.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왕상 18:27).

 

32:39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하나님의 유일성을 단호히 천명해 주는 적절한 번역이다. 6:4 주석 참조.

죽이기도 하며 … 낫게도 하나니. 천지간에 인간의 생사 화복을 주관하실 수 있는 신은 우주 만물의 창조자요 인류 역사의 통치자인 살아계신 하나님 여호와 밖에는 없다. 한편 이 말은 또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회복 의지를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기도 하다.

 

32:40 내 손을 들고 말하기를. ‘손을 들다’란 말은 사람들이 맹세할 때 관습적으로 손을 들고 맹세하는 것을 가리킨다(창 14:22).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처럼 손을 들고 맹세하시는 것처럼 표현한 것은 하나님을 인간과 같은 육체를 소유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표현함으로써, 매우 생동감 넘치는 효과를 거두고자 한 신인 동형 동성론적 표현이다.

 

32:41 번쩍이는 칼을 갈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인들에게 전율을 느끼게 하는 표현이다(시 7:12).

내 손이 정의를 붙들고. 심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뜻하는 시적 표현이다(Keil).

 

32:42 화살이 … 칼이 그 고기를 삼키게. 여기서 ‘화살’과 ‘칼’은 의인화 되어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는 자들로 나타난다. 따라서 본 절은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움과 심판 당할 대적의 처참함을 잘 보여 준다. 회개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가 무한하듯, 이처럼 범죄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역시 철저하다.

대적의 우두머리의 머리로다. 여기서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파르아’는 ‘머리털’이란 의미를 지닌 ‘페라’에서 파생된 말이다. 그런데 보통 왕이나 방백들은 풍성한 머리털로 구별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한글 개역개정 성경은 70인역(LXX)의 번역을 따라 ‘우두머리’로 번역하였다(Gesenius, Schultz).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러한 근거의 희박성을 들어 ‘파르아’를 문자 그대로 ‘털투성이의’, ‘털이 많은’이란 의미로 보고 있다(Keil, Knobel, Herxheimer). 그러한 견해를 취한다면, 본 절은 ‘원수들의 숱이 많은 긴 머리로다’란 뜻이 되고, 그 의미는 ‘힘이 세고 자고한 대적들’이란 비유적 표현이 된다(Keil & Delitzsch, Pulpit Commentary).

 

32:43 너희 민족들아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민족들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대적들에게 행하신 공의로운 심판을, 주의 백성 이스라엘과 더불어 기뻐하고, 또한 주께 영광돌려야 했다(Rosenmüller). 그런데 이는 우리에게 놀라움과 의아심을 안겨 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대적을 징계하신 일이 어째서 민족들이 이스라엘과 함께 기뻐할 일인가? 아마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운동을 세계 만만이 보고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매튜헨리(Matthew Henry)는 본 절을 교회 영역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후일 사도 바울이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에 동참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다는 사실을 변증할 때 본 절을 인용한 점으로 보아(롬 15:10) 타당성 있는 견해이다.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 ‘속죄하다’에 해당하는 ‘카파르’는 ‘덮다’ 또는 ‘화목하다’는 뜻이다. 레 1:4, 4:20 주석 참조. 그런데 심판이나 징계는 비록 죄에 대한 경고는 될지언정 결코 회복이나 화목의 방편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된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켜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흘리는 속죄 행위’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히 9:22). 따라서 이 말은 장차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을 위해 이 땅 위에 속죄제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케 하는 메시아적 메시지로 이해할 수 있다.

 

32:44 모세와 눈의 아들 호세아가 와서. ‘호세아’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란 뜻의 ‘예호슈아’의 축약형이다. 즉 ‘호세아’는 여호수아를 가리킨다(민 13:8, 16). 그런데 여기서 ‘여호수아’란 이름 대신 ‘호세아’란 이름을 쓰고 있는 이유는 본 절은 모세의 말에 제3자가 주(註)를 단 형식으로 처리되었기 때문이다(Keil, Pulpit Commentary). 여하튼 호세아(여호수아)가 모세와 함께 백성들에게 노래를 들려준 것은 회막에서 위임식을 가진 이후(31:14) 여호수아가 이제 이스라엘의 지도자의 자리에 서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 노래의 모든 말씀을 … 말하여 들리니라. 200만에 달하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일일이 전달되는 과정은 역시 장로나 지휘관들을 통해서였을 것이다(27:1).

 

32:45 없음.

 

32:46 오늘 너희에게 증언한 모든 말. 1절에서 43절에 이르기까지 언급된 ‘모세의 노래’를 가리킨다.

너희의 마음에 두고. 깊이 자각하고 인식하여 한시라도 잊지 아니하는 것을 의미한다(6:6).

너희의 자녀에게 명령하여 … 지켜 행하게 하라. 자기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고 교육하는 것은 히브리인들의 최대 의무 중 하나였다(6:7, 11:19).

 

32:47 헛된 일이 아니라 … 생명이니. ‘헛된 일’에 해당하는 원어 ‘다바르 레크’는 ‘무익한 말’, ‘빈 말’이란 뜻이다. 이 말이 ‘생명’의 반대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력이 있어(히 4:12) 영혼을 소성케 하며(시 19:7), 사람을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 3:16).

이 일로 말미암아. 직역하면 ‘이 말씀에 의하여’라는 뜻이다. 그런데 공동번역은 ‘이 말씀을 따라야’로 적절히 의역(意譯)하고 있다.

 

32:48 그 날에. 모세가 노래(1-43절)를 지어 그 모든 말씀을 백성들에게 들려준 날을 가리킨다(Keil, Lange). 그 날이 언제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모세의 임종과 관련시켜 볼 때 출애굽 제40년(B.C. 1406) 11월 말경인 것으로 추정된다.

 

32:49 아바림 산. 사해 동북편, 모압 평원에 위치한 산맥으로서, 요단 강과 사해를 동쪽으로부터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다(민 27:12).

느보 산. 아바림 산맥의 가장 높은 봉우리로서 해발 802m이다. 팔레스타인 전역을 살펴보는 데 최적의 장소로서, 가시 거리가 약 100 km에 달해 청명한 날에는 헤스본과 예루살렘까지도 볼 수 있다(Lange).

 

32:50 호르 산. 모세의 형 아론이 임종을 맞이했던 산이다(민 20:28). 확실치는 않지만 가데스 근처 에돔 변경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상에게로 돌아간 것 같이. 이 어구에 대한 자세한 해석은 창 25:8의 ‘열조에게로 돌아가매’의 주석을 참조하라.

너도 올라가는 이 산에서 죽어. 하나님의 종으로서 모세의 삶은 호렙 산에서 시작하여(출 3:1-17) 이처럼 느보 산에서 끝나게 된다. 그동안 그의 삶에 있어서의 중요 사건은 여러 산들과 밀접히 연관되었었다.

 

32:51 모세가 가나안 땅을 바라볼 뿐 그곳에 들어가 그 땅을 밟아보지 못할 운명에 처한 이유는 므리바 물 사건(민 20:2-13)으로 인해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범죄하여. 성경에서 말하는 범죄란 단순히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차원의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대인적(對人的)인 의미보다는 대신적(對神的) 차원의 의미가 더 강하게 나타나는데, 곧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는 모든 행위를 총칭하는 말이다. 범죄에 대한 어원은 이러한 성경의 범죄 개념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다음은 주요 범죄 어원의 설명이다.

1. 구약: (1) “하타”(레 6:3, 신 1:41, 삿 10:10, 사 1:4). ‘과녁을 빗나가다’, ‘표적을 맞추지 못하다’란 뜻의 ‘하타아’에서 유래함. (2) “쉐가가”(민 15:22, 25, 28). ‘부지중 그릇 행하다’, ‘바른 길을 벗어나다’란 뜻의 ‘샤가그’에서 유래함. (3) “페샤”(스 10:13, 잠 29:6, 겔 14:11, 단 8:12). ‘어기다’, ‘반역하다’란 뜻의 ‘파샤’에서 유래함.
2. 신약: (1) “파라바시스”(롬 5:14, 히 2:2, 9:15). ‘반대하다’, ‘명령을 거스리다’란 뜻의 ‘파라바이노’에서 유래함. (2) “파랍토마”(롬 4:25, 5:15, 갈 6:1, 골 2:13). ‘옆으로 떨어지다’, ‘옆길로 새나가다’란 뜻의 ‘파라핍토’에서 유래함.

 

32:52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하리라. 3:27, 민 20:12 주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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