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주석, 신명기 2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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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 모세와 … 장로들이 … 명령하여. 이스라엘 사회에서 장로 제도는 하나님의 뜻을 회중 전체에게 매우 신속하고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효과적인 통신 체계이기도 하였다(출 12:21-28).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명령. 이 말에 대해서는 세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본 절 이후에 나오는 모세의 분부 곧 요단 강을 건넌 후 돌에 율법을 새기는 일과 제사를 드리는 일, 그리고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서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는 일 등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이다(Lange). (2) 단지 27-28장에 기록된 축복과 저주의 말씀만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이다. (3) 돌에 율법을 새기는 것(2-3절)을 모든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상징적 표현으로 이해하여 ‘온 율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Keil, Knobel, Schultz). 이 세 견해 중 어느 것을 택해도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본서 전체의 정황으로 보아 맨 후자의 견해가 보다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27:2 너희가 요단을 건너. 모세가 이 말을 할 때 이스라엘은 아직 모압 평지에 있었다(1:1, 5, 34:1). 이스라엘이 출애굽 초 ‘홍해’라고 하는 고비를 겪고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듯이(출 14-15장), 본 절은 언약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쳐야 할 또 하나의 고비가 있음을 시사해 준 것이다.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때는 B.C. 1446년 아빕월(종교력 제1월, 태양력 3-4월)이다(출 13:4). 그리고 여호수아의 인도하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을 건너 최초로 가나안 땅에 들어간 때는 B.C. 1405년 아빕월(일명 니산월)이다(수 4:19-20). 따라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생활했던 기간은 약 40년 가량이었음을 알 수 있다(민 14:33-34). 한편 여기서 ‘날’(히, 욤)은 ‘바로 그날’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때’, ‘즈음’, ‘연후’(창 2:4, 민 3:1, 전 12:3) 등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Keil, Pulpit Commentary).

큰 돌들을 세우고. 율법을 기록하기 위한 기념비적인 큰 돌들을 많이 세우라는 뜻이다. 오늘날과 같은 책이 없었던 고대 사회에서는 돌에다 기념비적인 사건이나 법을 기록하여 여러 지방에 세워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하는 습관이 성행했었다(수 7:26, 8:29, 24:26-27, 삼상 7:12, 삼하 18:17).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1902년 몰간(M. J. Morgan, 1857-1924, 프랑스 출신의 고고학자)이 수사(Susa)에서 발굴해 낸 함무라비 법전(Hammurabi’s Code)이 있다. 아무튼 팔레스타인에는 돌이 많았으므로, 그러한 돌비를 세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석회를 바르라. 이는 글자를 새기는 데 편리할 뿐 아니라, 새긴 글자가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이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석회(히, 시드)는 내구성이 강하지 못하니 이것을 발라서 만든 돌비는 후손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당시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Keil, Lange). 아무튼 돌이나 건축물의 외벽 따위에 석회를 발라 그 위에 각종 문양이나 글을 새기는 기법은 고대 애굽에서 성행하던 양식이었으므로(Hengstenberg),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체류 당시 이 기법(技法)을 배웠을 것이다.

 

27:3 율법의 모든 말씀. ‘율법의 모든 말씀’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 지에 대해서는 다음 세 견해가 있다. (1) 단순히 본 장 15-26절에 언급된 축복과 저주의 말씀만을 가리킨다(Josephus, Masius, Clericus). (2) 신명기 율법을 가리킨다(J. Gerhard, A. Osiander, Vater). (3) 모세 율법 전부를 가리킨다(Keil, W. L. Alexander). 이 중 세 번째 견해를 지지하는 유대 랍비들에 의하면, 모세 율법의 총 항목수는 613개이므로 그것을 많은 돌비에 여럿이 기록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한다. 여하튼 중복된 모세 율법의 모든 조항까지 다 기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모세 율법의 핵심되는 조항 전부를 다 기록했다고 보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Pulpit Commentary, Keil & Delitzsch).

그 위에 기록하라. 이는 혹자들(J. D. Michaelis, Rosenmüller)의 주장처럼 돌 위에 먼저 율법을 기록한 후 석회를 바른 것이 아니다. 이는 돌에 먼저 석회를 바른 후 율법을 그 석회 위에 기록한 것이다(Keil, Lange, Pulpit Commentary), 그래야만 글자를 새기는 데 편리할 뿐 아니라, 새긴 글자가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Thomson, Land & Book). 한편 가나안 땅에 입성한 후 이처럼 돌에다 석회를 바른 후 하나님의 율법을 기록하는 이 의식이 지니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이는 광야에서와 마찬가지로 가나안 땅에서도 하나님의 통치권이 분명히 임한다는 사실을 가시적으로 포고하는 상징적 행위이다. 따라서 이 의식은 향후 가나안 땅에서 펼쳐질 이스라엘의 역사는 바로 이 돌들 위에 새겨진 율법의 준수 여부에 따라 그 흥망 성쇠가 좌우된다는 사실을 실감있게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본토를 수사학적으로 묘사한 말로서 ‘풍요롭고 기름진 땅’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이 가나안을 가리키는 말로서 성경에서 아주 빈번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에(출 3:8, 민 13:27, 렘 11:5, 겔 20:6), 이 표현은 가나안의 별칭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 표현이 단순한 수사학적 표현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 ‘젖’은 우유나 버터를 가리키는데 이것은 소나 양 등 가축들에게서 실제로 많이 얻을 수 있는 것이었고, 또한 ‘꿀’은 가나안의 토산품이 될 정도로 야산과 나무 그리고 꽃 등에서 많이 채취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삿 14:8, 삼상 14:25, 대하 31:5). 그렇다고 이 표현이 결코 일차적인 자연 조건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은 일부 비옥한 지대를 제외하고는, 사실 물이 넉넉하지 못하고 기온차가 심하며 곳곳에 불모지가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국 이 표현은 그 땅의 언약적 위치를 드러내는 말로서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복스럽고 살기 좋은 땅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이 임하는 곳이야말로 진정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표현은 하늘 가나안, 즉 성도들이 훗날 영생을 누릴 신천 신지의 아름답고 풍요로운 모습을 연상시켜 준다.

네게 말씀하신대로 하리라. 이 부분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다시 강조되고 있는 부분이다. 일찍이 B.C. 2000년경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조상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다(창 12:7). 그런데 B.C. 1400년경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완전 정복함으로써 (수 12장), 이 약속은 약 600년 만에 그대로 성취되었다. 한편 이러한 당신의 신실성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11)고 친히 언급하셨다.

 

27:4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에발 산은 이스라엘이 저주를 선포하도록 되어 있는 산이다(13절). 그런대 율법을 기록할 돌비와 하나님께 제사드릴 제단(5-6절)을 이 저주의 표상인 에발 산에 세우도록 한 이유는 아마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으로 인하여 초래될 저주의 심각성을 일깨워 주며 죄와 저주가 희생제사로 말미암아 속함을 얻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Keil). ‘에발 산’에 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11:29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사마리아 사본(Samaritan Codex)은 여기 ‘에발 산’을 ‘그리심 산’으로 대체시켜 놓고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사마리아인들이 자신들의 성산(聖山)인 ‘그리심 산’을 부각시킬 목적에서 자의로 변경시킨 것일 뿐 고대의 여타 모든 히브리 사본에는 ‘에발 산’으로 표기되어 있다(Gesenius, Verschuir).

석회를 바를 것이며. 2절 주석 참조.

 

27:5 제단 곧 돌단을 쌓되. 율법을 새긴 돌비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인간을 찾아오시는 것에 대한 상징이라 본다면, 제단을 쌓는 것은 인간이 희생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Matthew Henry).

그것에 쇠 연장을 대지 말지니라. ‘다듬지 않은 돌로 쌓으라’는 말과 함께 다음과 같은 뜻을 나타내 준다. 자연석(自然石) 그대로 제단을 쌓으라는 뜻으로, 이는 곧 외적인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기거나 신경을 쓰는 일 없이 ‘오직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려야 함을 교훈해 준다. 쇠 연장은 사람의 피를 흘리는 데 사용될 수 있는 준(準)무기이다. 따라서 그같은 부정한 도구로써 구원의 단이 될 여호와의 거룩한 제단을 만들 수 없다는 뜻이다. 한편 이와 유사한 규례는 출 20:25에도 나와 있다.

 

27:6 번제를 드릴 것이며. 번제는 죄의 속죄 및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 유지와 그분께 대한 온전한 헌신, 봉사를 상징하는 제사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입성한 후 먼저 이같은 제사를 드리는 것은, 곧 당시 우상 숭배의 중심지였던 가나안(7:23-26)에 대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의미를 지닌다. 또한 가나안에서의 모든 죄악을 제거한 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결하고 헌신적인 삶을 살 것임을 다짐하는 의미를 지닌다.

 

27:7 또 화목제를 드리고. ‘화목제’는 하나님의 축복과 구원에 대하여 감사하며, 하나님과 인간 간의 상호 화목과 친교를 간구하는 제사이다. 따라서 광야 생활 동안 하나님께 범죄하고 불화했던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성한 후 먼저 이러한 제사를 드리는 것은 자못 의미깊은 일이다. 즉 이는 곧 이스라엘이 그 때라도 광야의 어려움을 딛고서 끝내 가나안에 입성하게 된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을 의미한다(3절).

거기에서 먹으며 … 즐거워하라. ‘화목제’는 번제와 달리 희생물의 기름진 부분만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고(레 3:3-5), 나머지는 제사장과 경배자가 함께 나누어 먹으면서 기쁨을 나누는 제사이다(레 7:15-17, 30-34).

 

27:8 마치 2절의 말씀을 4절에서 다시 확인시키듯, 3절의 말씀을 본 절이 다시 확인시키고 있다.

분명하고 정확하게 기록할지니라. 이처럼 율법을 기록하라는 말이 3절에 이어 재차 그리고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음은 돌비에 새겨진 율법을 백성들이 그대로 심비(心碑)에 새겨 철저히 지켜야 할 의무가 있음을 시사해 준다(Hengstenberg).

 

27:9 모세와 레위 제사장이. 1-8절까지의 모세의 지시는 ‘장로들’(1절)이 이스라엘에게 전달하였으나, 본 절 이하의 전달 사항은 ‘제사장들’이 맡았다. 당시 제사장들은 제사 의식을 집전할 뿐 아니라,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며 축복과 저주를 선포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10:8, 21:5, 민 6:23-27). 아마 이러한 까닭에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서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는 일에는 제사장들이 동참하게 된 것 같다.

잠잠하여 들으라. ‘잠잠하여’에 해당하는 ‘사카트’는 특히 ‘주의를 기울이기 위하여 조용히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마 모세는 이 말을 하면서 40년간에 걸친 이스라엘의 불신앙적 거역 사건들을 염두에 둔 듯하다(민 11:1-9, 12:1-16, 16:1-35). 즉 그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대하여 방자하고 분요하기 짝이 없었으며 말씀을 순종함에 있어 매우 완악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그같은 지난 과오를 벗어 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하여서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조용히 삼가 겸손해질 필요가 있었다.

오늘 …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으니.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소유이자 거룩한 백성으로 인정받은 것은 이미 출애굽 초 시내 산에서의 일이었다(출 19:5-6). 따라서 본 절은 이제서야 비로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정식 백성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껏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아 오고 있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26:18-9).

 

27:10 여호와의 말씀. ‘말씀’에 해당하는 일반적인 원어는 ‘다바르’이다(1:1, 출 19:7, 34:28, 수 8:34, 시 119:9). 그러나 여기서 ‘말씀’으로 번역된 ‘콜’은 ‘글’(word)보다는 ‘소리’(voice)라는 의미가 강하다(KJV, RSV). 그러므로 우리는 본 절에서 이스라엘에게 인격적으로 찾아오셔서 친근히 말쏨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다.

청종하여. [히, 샤마] 원뜻은 지식적으로 ‘알아듣다’, ‘경청하다’, ‘이해하다’이다. 그러나 진정한 앎이란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므로, 그로부터 ‘순종하다’(30:2)란 뜻이 파생되었다. 이는 우리에게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는 성경 말씀을 생각하게 해 준다.

명령과 규례. ‘명령’, ‘규례’, ‘법도’ 등과 같은 말은 대개 두 단어 이상이 한 구절에 동시에 사용되어 뜻을 강조하는 중언법적(重言法的) 표현으로 많이 사용된다(10:13, 창 26:5, 민 9:3, 대하 7:17, 스 7:10). 그러나 본 절의 두 단어를 굳이 구분한다면, ‘명령’에 해당하는 ‘차와’는 십계명과 같이 의무 이행이 강조되는 핵심적인 지시 사항을 의미한다(5:31). 반면 ‘규례’에 해당하는 ‘호크’는 수행할 명령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규정해 놓은 ‘법규’를 의미한다(4:1).

 

27:11 11-13절. 이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이른 후, 그곳 세겜 땅 북쪽에 있는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서 반드시 이행하여야 할 ‘축복과 저주의 의식’을 언급한 부분이다. 이 의식은 이스라엘 12지파가 각기 6지파씩 양쪽 산에 갈라서서 축복과 저주를 각기 선포하는 의식인데, 수 8:30-35에서 그대로 실행되었다. 한편,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이 왜 축복과 저주의 산으로 각각 선정되었는지에 대해서는 11:29 주석을 참조하라.

 

27:12 요단을 건넌 후에. 2-4절에 이어 본 장에서 벌써 네 번째 언급되고 있는 구절이다. 이는 그만큼 요단을 건너는 일이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 획기적인 사건임을 시사해준다.

시므온과 … 베냐민. 모두 야곱의 정부인인 레아와 라헬에게서 태어난 후손이다(창 29:31-30:24, 35:16-18). 그러나 그중 레아의 막내 아들인 스불론 지파와 서모 빌하를 범하였던 장자 르우벤(창 35:22) 지파는 여기서 제외되었다.

축복하기 위하여. 야곱의 정부인에게서 난 아들들이 이처럼 축복을 선포하는 일을 맡은 것에 대하여 카일(Keil)은 ‘적자(嫡子)가 서자(庶子)보다 신분이 높고, 축복이 저주보다 품격이 높은 만큼 적자가 축복을 선포하는 일을 맡은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평하였다(Keil & Delitzsch, Vol. I-iii. p. 433).

그리심 산. 사마리아 성읍 부근에 위치한 오늘날의 ‘예벨 엣 투르’(Jebel et Tur)이다. 남북으로 에발 산과 마주보고 있는데, 특별히 그리심 산이 축복을 선포하는 산으로 선택된 이유에 대하여서는 11:29 주석을 참조하라.

 

27:13 르우벤 … 납달리. 전술한 것처럼 르우벤과 스불론 외에는 모두 야곱의 첩이었던 빌하와 실바의 후손이다(창 29:31-30:34). 르우벤과 스불론이 여기에 속하게 된 이유는 아마 르우벤은 서모 간통 사건으로 인한 장자권 박탈 때문이었을 것이고(창 35:22, 49:4, 대상 5:1), 스불론은 레아의 막내 아들이었기 때문(창 35:23)이었을 것이다(Keil, Lange, Pulpit Commentary).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 혹자들은 그리심 산에 선 지파들을 축복받은 지파들로, 에발 산에 선 지파들을 저주받은 지파들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단정은 무리이다. 왜냐하면 에발 산에 서게 될 지파들 중에도 단, 아셀, 납달리 지파처럼 야곱의 축복을 받은 지파들이 있으며 그리심 산에 서게 된 지파들 중에도 시므온, 레위와 같이 야곱의 저주를 받은 지파도 있기 때문이다(창 49:1-27). 따라서 축복의 산에 오른 자들은 율법에 순종하는 자들을, 저주의 산에 오른 자들은 율법을 거역하는 자들을 각기 상징할 뿐으로 이해함이 좋다. 한편 에발 산이 특별히 저주를 선포하는 장소로 선택된 이유에 대하여서는 11:29 주석을 참조하라.

 

27:14 레위 사람. 여기서는 레위 지파에 속한 모든 자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언약궤를 메고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의 중앙 부분에 서서 모세의 말을 전달받아 양편에 갈라 서 있는 백성들에게 큰소리로 외칠 ‘레위 제사장’(9절, 수 8:33)을 가리킨다(Delitzsch, Lange, Alexander, Wycliffe).

큰 소리로 … 이르기를. 혹자들은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사이에서 외치는 사람의 목소리가 양편 산 중턱에 운집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잘 들릴 수 있었겠는가라는 점에 의문을 표시한다. 그러나 성서 고고학자들에 의한 정밀 조사 결과 양쪽 산의 음향 효과가 매우 훌륭하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또 여러 차례의 실험 결과 여러 사람이 외칠 경우 충분히 들려진다는 사실도 입증되었다(Stanley, Syria & Palestine / Tristram, Land of Israel / Hastings, Bonar, E. G. Kraeling).

 

27:15 장색. 각양 물건을 정교하게 만드는 기술자를 가리킨다. 당시 이들은 우상을 만들어 파는 일로 많은 이익을 보곤 하였다(행 19:24).

가증하니. 23:18 주석 참조.

은밀히 세우는 자. 십계명 중 제2계명(5:8-10, 출 20:4-6)을 은밀히 범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 ‘은밀히’에 해당하는 원어 ‘바사테르’는 ‘은밀한 장소에’(KJV, in a secret place)로도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다. 그렇다면 ‘은밀한 장소’로 꼽을 만한 곳은 어디이겠는가? 물론 눈에 잘 안 띄는 골방이나 비밀 장소를 들 수도 있겠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곳으로는 역시 사람의 마음 속을 꼽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보다 더 큰 비중으로 자기 마음 속에 은밀하게 품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 숭배이다.

모든 백성은 … 아멘 할지니라. ‘아멘’이란 말은 본래 ‘확실하다’, ‘신실하다’는 뜻의 ‘아만’에서 유래한 단어로 문장이나 대화의 끝에서 사용될 때 ‘과연 그렇습니다’,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빕니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27:16 경홀히 여기는. [히, 칼라] 원뜻은 ‘가볍다’로, 곧 상대방을 업신여기거나 비천히 여기는 것(잠 12:9), 평가 절하하거나 모독을 주는 것(사 16:14), 그리고 지독히 경멸하는 것 따위를 가리킨다. 그런데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부모를 이처럼 업신여기는 것은 곧 자신의 근본을 망각한 행동일 뿐 아니라, 급기야는 부모를 통해 그 생명을 부여하신 하나님을 경홀히 하는 일이다(21:18).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 6:1)고 권면하였다. 출 20:12 주석 참조.

저주를 받을 것이라. [히, 아루르] 기본형은 ‘아라르’로 ‘버림을 받다’란 뜻이다. 즉 이는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범죄한다면, 버림을 받는 쪽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 자신임을 잘 증거해 준다(Calvin).

 

27:17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 여기서 경계표(KJV, landmark / NIV, boundary stone)란 땅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세운 돌이나 푯말을 뜻한다(창 31:51-52). 따라서 이러한 경계표를 마음대로 옮기거나 없애 버리는 것은 타인의 재산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 행위이다. 한편 성경 뿐 아니라 고대 바빌로니아의 법도 경계표를 침해하는 행위를 큰 범법 행위로 규정하고 매우 엄격하게 다스렸다. 19:14 주석 참조.

 

27:18 맹인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 고대 근동에는 여러 가지 환경적 요인과 풍토로 인하여 의외로 맹인이 많았다. 즉 고온 건조한 기후와 쉴 새 없이 이는 먼지, 그리고 비위생적인 생활 환경 및 가난으로 인한 영양 실조 등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쉽게 실명(失明)하였다. 그런데 예로부터 이러한 맹인을 일부러 괴롭히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다. 따라서 본 절이 의미하려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그래서 영역본 Living Bible은 본 절을 ‘맹인을 이용하여 그 이익을 취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Cursed is he who takes advantage of a blind man)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이웃을 하나님의 계명의 길에서 벗어나도록 유혹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영적으로 해석하였다. 아무튼 이는 보다 광범위한 의미로, 장애자의 약점을 이용하여 불의한 이익을 취하거나 또는 그들을 괴롭히며 실족케 하는 일 따위를 엄격히 금하고 있는 조항임에는 틀림없다(레 19:14, 롬 15:1). 실로 율법은 그러한 약자들의 약점을 악용하는 죄악에 대해서는 보다 혹독한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 레 19:14 주석 참조.

 

27:19 객이나 고아나 과부. 가난하며 약한 자, 그리고 억눌리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을 대표하는 구약 시대의 3대 약자들이다(14:29, 16:11, 14, 24:21, 26:12-13).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 여기서 ‘억울하게 하다’에 해당하는 ‘나타’는 ‘비틀다’, ‘굽게 하다’, ‘벗어나게 하다’는 뜻으로, 정당한 판결을 내리지 아니하고 힘 있는 자를 두호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행위에 대하여서는 이미 24:17에서도 엄금했던 바, 실로 하나님께서는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암 5:24)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임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27:20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는 자. ‘동침하다’에 해당하는 ‘샤카브’는 성(性) 관계를 갖기 위해 ‘잠자리를 같이 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아내’에 해당하는 ‘에쉐트 아비’는 ‘아버지의 여자’란 뜻이다. 따라서 비단 이는 계모 뿐 아니라 아버지의 첩과도 성 행위를 하는 것을 포함한다.

아버지의 하체를 드러냈으니. 영역본 RSV는 이를 ‘아버지의 여자를 벌거벗겼으니’로, NIV는 ‘아버지의 침소를 더럽혔으니’로 번역하고 있다. 아무튼 이처럼 아버지의 침소, 아버지의 여자를 넘보는 행위는 인간의 기본 윤리를 저버리는 패역이니, 저주를 면할 길 없다(22:30). 레 18:8 주석 참조.

 

27:21 짐승과 교합하는 자. 동성애, 근친 상관 등과 더불어 변태적인 성 행위 중의 하나인 수간(獸姦)을 행하는 자를 가리킨다. 수간자(獸姦者)는 근친 상간자 및 남색자(男色者)와 더불어 땅을 더럽히는 추악한 성범죄자로서 아스라엘 사회에서 반드시 제거되어야 했다(출 22:19, 레 20:15-16). 성경은 결코 생리적인 성적 욕망이나 충동을 죄악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性)의 창조자로서 하나님께서는 성을 인간들이 누릴 수있는 지극한 기쁨으로 간주하셨다(잠 5:18, 전 9:9, 요 3:29). 이것은 창조시 아담의 독처를 좋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한 여자를 창조하여 준 사실(창 2:18, 22)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그러나 바로 이 남녀 창조 사건에서도 분명히 예시되었듯이 남녀간의 성적 욕망은 일부 일처의 신성한 결혼 제도에 의해서만 충족되어야 한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요 비밀이다. 여기서 ‘비밀’이라고 한 것은 훗날 사도 바울이 설파했듯이 신랑과 신부의 한 몸 되는 결합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순결한 일체성’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22:13-30, 엡 5:31-32). 따라서 하나님의 신성한 창조 질서가 반영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심오한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이 내포되어 있는 일부 일처의 결혼 제도를 떠난 모든 성(性) 남용은, 더욱이 수간, 근친 상간, 동성애 등 타락한 인간의 어그러진 심성(心性)에 기인하고 있는(롬 1:26-27) 모든 변태적인 성행위는 단순한 도덕적 범죄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죄에까지 이르는 추악한 성범죄 행위인 것이다. 특히 고대 이방의 문란하고 타락한 제사 의식이나 설화 등에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수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엄한 인간의 가치를 하등 동물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극악한 소행이므로 거룩한 공동체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결단코 용납될 수 없었다. 따라서 성경은 일관성 있게 이러한 모든 성범죄를 보다 엄격히, 그리고 철저히 배격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성도는 성(性)의 타락으로 인해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가나안 족속의 멸절 그리고 로마의 패망 등을 거울삼아 성(性)개방 풍조로 인해 성(性)을 가볍게 취급하거나 심지어 상품화시키는 타락한 세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빛된 자녀답게 고결하고 아름다운 성(性) 윤리관을 견지해야 할 것이다(레 18:23, 20:15-16 주석 참조).

 

27:22 자매 … 동침하는 자. 누이는 항렬상 자기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자이다. 따라서 그러한 누이를 범하는 것은 우생학적(優生學的) 폐단은 차치하고라도, 곧 자기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는 짓이나 마찬가지 행위이므로 저주를 면할 길 없다. 레 18:9 주석 참조.

 

27:23 장모와 동침하는 자. 성경은 자신의 장모와 성 관계를 갖는 파렴치한에 대하여서는 그들 모두를 반드시 화형(火刑)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레 18:17, 20:14 주석 참조.

 

27:24 이웃을 암살하는 자. 과실치사(過失致死)가 아닌 한, 그 어떠한 살인 행위도 하나님 앞에서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 특히 암살 행위는 더욱 그러한데,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1) 상대방이 미처 방어 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기습하는 도발 행위이기 때문이다. (2) 죄를 은폐하려는 의도에서 저지르는 계획적 살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출 20:13, 민 35:16-21 주석 참조.

 

27:25 무죄한 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 살인의 대가로 뇌물을 받는 행위는 곧 인간의 값어치를 추잡한 뇌물보다도 낮게 취급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비록 사람의 눈을 피해 그같은 죄를 자행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국 하나님의 공의의 눈은 피할 수 없기에 저주를 면할 길 없다. 출 23:7-8 주석 참조.

 

27:26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 사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자란 아무도 없다(롬 3:10).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출애굽의 영웅 모세도, 그리고 성군(聖君) 다윗도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죄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짐짓 범죄치 아니하려고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 율법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이라 하겠다(창 6:9).

아멘. 이 말의 어원인 ‘아만’은 본래 어떤 대상을 ‘지지하다’ 혹은 ‘신임하다’란 뜻이었다. 여기서부터 이 말은 기도나 찬양 및 선언이 종결되어지는 종지부나 끝맺음에서 ‘진실로 그렇습니다’ 또는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동의나 소원의 뜻을 가진 ‘아멘’으로 발전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아멘’이란 말은 단순한 종결(終結)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곧 어떤 선포나 찬양 그리고 기도 등을 지지하거나 확인 또는 시인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그대로 나의 삶 속에 적용시키겠다는 결단의 의지(意志)까지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한편 신약 시대에 ‘아멘’이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강조 용법(‘진실로 진실로’란 말은 헬라어로 ‘아멘 아멘’이다)으로 자주 사용되었고, 바울 사도에 의해서는 축복과 찬양(Doxology)의 결미어(結尾語)로 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그의 계시록 서신에서 이 말을 인격화시켜 존재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말로도 사용하였다(계 3:14). 이 모든 배경하에서 ‘아멘’을 복창(復唱)하던 일은 유대인들의 습관이 되어 왔으며, 또한 그들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전달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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