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명령. 이 말에 대해서는 세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본 절 이후에 나오는 모세의 분부 곧 요단 강을 건넌 후 돌에 율법을 새기는 일과 제사를 드리는 일, 그리고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서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는 일 등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이다(Lange). (2) 단지 27-28장에 기록된 축복과 저주의 말씀만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이다. (3) 돌에 율법을 새기는 것(2-3절)을 모든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상징적 표현으로 이해하여 ‘온 율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Keil, Knobel, Schultz). 이 세 견해 중 어느 것을 택해도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본서 전체의 정황으로 보아 맨 후자의 견해가 보다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때는 B.C. 1446년 아빕월(종교력 제1월, 태양력 3-4월)이다(출 13:4). 그리고 여호수아의 인도하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을 건너 최초로 가나안 땅에 들어간 때는 B.C. 1405년 아빕월(일명 니산월)이다(수 4:19-20). 따라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생활했던 기간은 약 40년 가량이었음을 알 수 있다(민 14:33-34). 한편 여기서 ‘날’(히, 욤)은 ‘바로 그날’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때’, ‘즈음’, ‘연후’(창 2:4, 민 3:1, 전 12:3) 등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Keil, Pulpit Commentary).
큰 돌들을 세우고. 율법을 기록하기 위한 기념비적인 큰 돌들을 많이 세우라는 뜻이다. 오늘날과 같은 책이 없었던 고대 사회에서는 돌에다 기념비적인 사건이나 법을 기록하여 여러 지방에 세워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하는 습관이 성행했었다(수 7:26, 8:29, 24:26-27, 삼상 7:12, 삼하 18:17).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1902년 몰간(M. J. Morgan, 1857-1924, 프랑스 출신의 고고학자)이 수사(Susa)에서 발굴해 낸 함무라비 법전(Hammurabi’s Code)이 있다. 아무튼 팔레스타인에는 돌이 많았으므로, 그러한 돌비를 세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석회를 바르라. 이는 글자를 새기는 데 편리할 뿐 아니라, 새긴 글자가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이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석회(히, 시드)는 내구성이 강하지 못하니 이것을 발라서 만든 돌비는 후손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당시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Keil, Lange). 아무튼 돌이나 건축물의 외벽 따위에 석회를 발라 그 위에 각종 문양이나 글을 새기는 기법은 고대 애굽에서 성행하던 양식이었으므로(Hengstenberg),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체류 당시 이 기법(技法)을 배웠을 것이다.
그 위에 기록하라. 이는 혹자들(J. D. Michaelis, Rosenmüller)의 주장처럼 돌 위에 먼저 율법을 기록한 후 석회를 바른 것이 아니다. 이는 돌에 먼저 석회를 바른 후 율법을 그 석회 위에 기록한 것이다(Keil, Lange, Pulpit Commentary), 그래야만 글자를 새기는 데 편리할 뿐 아니라, 새긴 글자가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Thomson, Land & Book). 한편 가나안 땅에 입성한 후 이처럼 돌에다 석회를 바른 후 하나님의 율법을 기록하는 이 의식이 지니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이는 광야에서와 마찬가지로 가나안 땅에서도 하나님의 통치권이 분명히 임한다는 사실을 가시적으로 포고하는 상징적 행위이다. 따라서 이 의식은 향후 가나안 땅에서 펼쳐질 이스라엘의 역사는 바로 이 돌들 위에 새겨진 율법의 준수 여부에 따라 그 흥망 성쇠가 좌우된다는 사실을 실감있게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본토를 수사학적으로 묘사한 말로서 ‘풍요롭고 기름진 땅’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이 가나안을 가리키는 말로서 성경에서 아주 빈번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에(출 3:8, 민 13:27, 렘 11:5, 겔 20:6), 이 표현은 가나안의 별칭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 표현이 단순한 수사학적 표현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 ‘젖’은 우유나 버터를 가리키는데 이것은 소나 양 등 가축들에게서 실제로 많이 얻을 수 있는 것이었고, 또한 ‘꿀’은 가나안의 토산품이 될 정도로 야산과 나무 그리고 꽃 등에서 많이 채취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삿 14:8, 삼상 14:25, 대하 31:5). 그렇다고 이 표현이 결코 일차적인 자연 조건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은 일부 비옥한 지대를 제외하고는, 사실 물이 넉넉하지 못하고 기온차가 심하며 곳곳에 불모지가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국 이 표현은 그 땅의 언약적 위치를 드러내는 말로서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복스럽고 살기 좋은 땅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이 임하는 곳이야말로 진정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표현은 하늘 가나안, 즉 성도들이 훗날 영생을 누릴 신천 신지의 아름답고 풍요로운 모습을 연상시켜 준다.
네게 말씀하신대로 하리라. 이 부분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다시 강조되고 있는 부분이다. 일찍이 B.C. 2000년경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조상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다(창 12:7). 그런데 B.C. 1400년경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완전 정복함으로써 (수 12장), 이 약속은 약 600년 만에 그대로 성취되었다. 한편 이러한 당신의 신실성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11)고 친히 언급하셨다.
석회를 바를 것이며. 2절 주석 참조.
그것에 쇠 연장을 대지 말지니라. ‘다듬지 않은 돌로 쌓으라’는 말과 함께 다음과 같은 뜻을 나타내 준다. 자연석(自然石) 그대로 제단을 쌓으라는 뜻으로, 이는 곧 외적인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기거나 신경을 쓰는 일 없이 ‘오직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려야 함을 교훈해 준다. 쇠 연장은 사람의 피를 흘리는 데 사용될 수 있는 준(準)무기이다. 따라서 그같은 부정한 도구로써 구원의 단이 될 여호와의 거룩한 제단을 만들 수 없다는 뜻이다. 한편 이와 유사한 규례는 출 20:25에도 나와 있다.
거기에서 먹으며 … 즐거워하라. ‘화목제’는 번제와 달리 희생물의 기름진 부분만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고(레 3:3-5), 나머지는 제사장과 경배자가 함께 나누어 먹으면서 기쁨을 나누는 제사이다(레 7:15-17, 30-34).
분명하고 정확하게 기록할지니라. 이처럼 율법을 기록하라는 말이 3절에 이어 재차 그리고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음은 돌비에 새겨진 율법을 백성들이 그대로 심비(心碑)에 새겨 철저히 지켜야 할 의무가 있음을 시사해 준다(Hengstenberg).
잠잠하여 들으라. ‘잠잠하여’에 해당하는 ‘사카트’는 특히 ‘주의를 기울이기 위하여 조용히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마 모세는 이 말을 하면서 40년간에 걸친 이스라엘의 불신앙적 거역 사건들을 염두에 둔 듯하다(민 11:1-9, 12:1-16, 16:1-35). 즉 그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대하여 방자하고 분요하기 짝이 없었으며 말씀을 순종함에 있어 매우 완악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그같은 지난 과오를 벗어 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하여서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조용히 삼가 겸손해질 필요가 있었다.
오늘 …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으니.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소유이자 거룩한 백성으로 인정받은 것은 이미 출애굽 초 시내 산에서의 일이었다(출 19:5-6). 따라서 본 절은 이제서야 비로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정식 백성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껏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아 오고 있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26:18-9).
청종하여. [히, 샤마] 원뜻은 지식적으로 ‘알아듣다’, ‘경청하다’, ‘이해하다’이다. 그러나 진정한 앎이란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므로, 그로부터 ‘순종하다’(30:2)란 뜻이 파생되었다. 이는 우리에게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는 성경 말씀을 생각하게 해 준다.
명령과 규례. ‘명령’, ‘규례’, ‘법도’ 등과 같은 말은 대개 두 단어 이상이 한 구절에 동시에 사용되어 뜻을 강조하는 중언법적(重言法的) 표현으로 많이 사용된다(10:13, 창 26:5, 민 9:3, 대하 7:17, 스 7:10). 그러나 본 절의 두 단어를 굳이 구분한다면, ‘명령’에 해당하는 ‘차와’는 십계명과 같이 의무 이행이 강조되는 핵심적인 지시 사항을 의미한다(5:31). 반면 ‘규례’에 해당하는 ‘호크’는 수행할 명령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규정해 놓은 ‘법규’를 의미한다(4:1).
시므온과 … 베냐민. 모두 야곱의 정부인인 레아와 라헬에게서 태어난 후손이다(창 29:31-30:24, 35:16-18). 그러나 그중 레아의 막내 아들인 스불론 지파와 서모 빌하를 범하였던 장자 르우벤(창 35:22) 지파는 여기서 제외되었다.
축복하기 위하여. 야곱의 정부인에게서 난 아들들이 이처럼 축복을 선포하는 일을 맡은 것에 대하여 카일(Keil)은 ‘적자(嫡子)가 서자(庶子)보다 신분이 높고, 축복이 저주보다 품격이 높은 만큼 적자가 축복을 선포하는 일을 맡은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평하였다(Keil & Delitzsch, Vol. I-iii. p. 433).
그리심 산. 사마리아 성읍 부근에 위치한 오늘날의 ‘예벨 엣 투르’(Jebel et Tur)이다. 남북으로 에발 산과 마주보고 있는데, 특별히 그리심 산이 축복을 선포하는 산으로 선택된 이유에 대하여서는 11:29 주석을 참조하라.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 혹자들은 그리심 산에 선 지파들을 축복받은 지파들로, 에발 산에 선 지파들을 저주받은 지파들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단정은 무리이다. 왜냐하면 에발 산에 서게 될 지파들 중에도 단, 아셀, 납달리 지파처럼 야곱의 축복을 받은 지파들이 있으며 그리심 산에 서게 된 지파들 중에도 시므온, 레위와 같이 야곱의 저주를 받은 지파도 있기 때문이다(창 49:1-27). 따라서 축복의 산에 오른 자들은 율법에 순종하는 자들을, 저주의 산에 오른 자들은 율법을 거역하는 자들을 각기 상징할 뿐으로 이해함이 좋다. 한편 에발 산이 특별히 저주를 선포하는 장소로 선택된 이유에 대하여서는 11:29 주석을 참조하라.
큰 소리로 … 이르기를. 혹자들은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사이에서 외치는 사람의 목소리가 양편 산 중턱에 운집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잘 들릴 수 있었겠는가라는 점에 의문을 표시한다. 그러나 성서 고고학자들에 의한 정밀 조사 결과 양쪽 산의 음향 효과가 매우 훌륭하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또 여러 차례의 실험 결과 여러 사람이 외칠 경우 충분히 들려진다는 사실도 입증되었다(Stanley, Syria & Palestine / Tristram, Land of Israel / Hastings, Bonar, E. G. Kraeling).
가증하니. 23:18 주석 참조.
은밀히 세우는 자. 십계명 중 제2계명(5:8-10, 출 20:4-6)을 은밀히 범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 ‘은밀히’에 해당하는 원어 ‘바사테르’는 ‘은밀한 장소에’(KJV, in a secret place)로도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다. 그렇다면 ‘은밀한 장소’로 꼽을 만한 곳은 어디이겠는가? 물론 눈에 잘 안 띄는 골방이나 비밀 장소를 들 수도 있겠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곳으로는 역시 사람의 마음 속을 꼽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보다 더 큰 비중으로 자기 마음 속에 은밀하게 품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 숭배이다.
모든 백성은 … 아멘 할지니라. ‘아멘’이란 말은 본래 ‘확실하다’, ‘신실하다’는 뜻의 ‘아만’에서 유래한 단어로 문장이나 대화의 끝에서 사용될 때 ‘과연 그렇습니다’,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빕니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저주를 받을 것이라. [히, 아루르] 기본형은 ‘아라르’로 ‘버림을 받다’란 뜻이다. 즉 이는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범죄한다면, 버림을 받는 쪽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 자신임을 잘 증거해 준다(Calvin).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 여기서 ‘억울하게 하다’에 해당하는 ‘나타’는 ‘비틀다’, ‘굽게 하다’, ‘벗어나게 하다’는 뜻으로, 정당한 판결을 내리지 아니하고 힘 있는 자를 두호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행위에 대하여서는 이미 24:17에서도 엄금했던 바, 실로 하나님께서는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암 5:24)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임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아버지의 하체를 드러냈으니. 영역본 RSV는 이를 ‘아버지의 여자를 벌거벗겼으니’로, NIV는 ‘아버지의 침소를 더럽혔으니’로 번역하고 있다. 아무튼 이처럼 아버지의 침소, 아버지의 여자를 넘보는 행위는 인간의 기본 윤리를 저버리는 패역이니, 저주를 면할 길 없다(22:30). 레 18:8 주석 참조.
아멘. 이 말의 어원인 ‘아만’은 본래 어떤 대상을 ‘지지하다’ 혹은 ‘신임하다’란 뜻이었다. 여기서부터 이 말은 기도나 찬양 및 선언이 종결되어지는 종지부나 끝맺음에서 ‘진실로 그렇습니다’ 또는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동의나 소원의 뜻을 가진 ‘아멘’으로 발전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아멘’이란 말은 단순한 종결(終結)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곧 어떤 선포나 찬양 그리고 기도 등을 지지하거나 확인 또는 시인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그대로 나의 삶 속에 적용시키겠다는 결단의 의지(意志)까지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한편 신약 시대에 ‘아멘’이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강조 용법(‘진실로 진실로’란 말은 헬라어로 ‘아멘 아멘’이다)으로 자주 사용되었고, 바울 사도에 의해서는 축복과 찬양(Doxology)의 결미어(結尾語)로 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그의 계시록 서신에서 이 말을 인격화시켜 존재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말로도 사용하였다(계 3:14). 이 모든 배경하에서 ‘아멘’을 복창(復唱)하던 일은 유대인들의 습관이 되어 왔으며, 또한 그들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전달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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