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주석, 신명기 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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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매 칠 년 끝. 매 칠 년 되는 해의 연말이 아니라, 7년을 주기로 하여 그 주기의 마지막, 즉 ‘제7년째’를 의미한다. 이를 가리켜 일명 ‘안식년’(安息年, the Sabbatical year)이라고 하는데, 이 때에는 땅을 경작하지 않고 묵혀 두도록 규정되어 있다(레 25:4-5).

면제하라. 즉 안식년 채무 면제에 관한 규례이다. 그런데 여기 규정된 채무 면제(債務免除)의 정의에 대해서는 상반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부채의 완전 탕감을 의미한다(Lange, Matthew Henry). 둘째, 안식년에만 국한된 빚 독촉의 면제를 의미한다(Philo, Calvin, Keil, Pulpit Commentary). 그런데 (1) 매 안식년마다 모든 채무가 완전 탕감되어 버린다면, 사실상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어떠한 형태의 금품 대여 행위도 사라져 버릴 것이다. (2) 또한 여기서 ‘면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어근 ‘샤마트’는 ‘쉬게 한다’, ‘묵여두다’(출 23:11)는 뜻으로 일시적인 일의 중단을 강하게 나타낸다. (3) 그 뿐 아니라 ‘그것을 면제하고 … 독촉하지 말지니’(2절)라는 말도 빚 탕감보다는 오히려 빚 독촉의 면제를 강하게 나타내준다. 따라서 위의 두 견해 중 후자가 본문과 부합되는 타당한 견해로 보인다.

 

15:2 채주. 직역하면 ‘자기 손을 빌려 준 소유주’란 의미이다. 이는 특별히 고리 대금업자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단지 다른 사람에게 돈이나 물건 또는 식량 따위를 선의(善意)로 빌려 준 모든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한편 모세 율법은 이스라엘인이 이방인에게 돈이나 물건을 빌려 준 때에는 이자를 받을 수 있으나, 동족에게서는 이자를 받을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23:19-20).

독촉하지 말지니. ‘독촉하다’에 해당하는 ‘나가스’는 ‘거세게 몰아치다’, ‘강제로 징수하다’는 뜻이다. 풀핏(Pulpit) 주석은 이를 ‘윽박지르다’로 풀이하고 있다.

여호와를 위하여 면제를. 이는 곧 안식년 동안 백성들이 가난한 자들에 대한 빚 독촉을 면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근거한 것으로서, 오직 그분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의미한다. 한편 이러한 안식년의 채무 면제 기능에서부터 ‘면제년(免除年, Year of Release)이란 명칭이 부여되었다.

 

15:3 이방인에게는 네가 독촉하려니와. 여기서 ‘이방인’에 해당하는 ‘노크리’는 ‘게르’(출 12:49)와는 달리 이스라엘과는 종교적으로 전혀 무관한 순수 외국인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들은 이스라엘의 율법과는 무관하게 안식년에도 쉬지 않고 일을 하여 계속 소득을 거두어 들이는 자들이었으므로(Keil), 안식년 채무 면제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15:4 없음.

 

15:5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이 구절과 11절의 내용은 상충되는 것처럼 보인다. 11절에는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 절은 실제로 이스라엘 중에 가난한 자가 모두 사라질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예루살렘 성경(Jerusalem Bible)은 이 진술을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게 하라.”고 번역하였고, New Living Translation은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어야 한다.”고 번역하였다. 이런 번역이 좀더 본문의 뜻을 잘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즉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도록 노력하라는 말이다.
세상이 존속하는 한 가난의 현실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 중에 가난한 자는 항상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현실에 대한 예언적 진술일뿐만 아니라 그 민족과 개인들에게 가난한 자들에게 자비로 반응하라는 호소이기도 하다.
이와 비슷하지만 다른 견해는 본 절을 조건적인 약속으로 본다. “너희가 넉넉하게 나눔으로써 그 모든 지시를 따른다면,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을 안다.]”와 같은 의미로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따르노라고 공언하는 사람들 사이에 무력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두시고 그들의 보호에 의존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을 시험하신다. 하나님의 가난한 자녀들에게 나타내는 우리의 사랑과 봉사로써 우리는 그분에 대한 사랑의 진실성을 입증해 준다. 그들을 등한히 하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거짓 제자들이며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자들임을 보여 준다”(엘렌 지 화잇, 치료봉사, 205).

 

15:6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허락하다’의 원어 ‘다바르’는 ‘선언하다’, ‘약속하다’는 뜻으로, 이미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축복의 언약을 가리킨다(6:3, 7:12-15, 11:8-15).

여러 나라에 꾸어 줄지라도. 개개인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동족들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풀 때, 궁극적으로 나라 전체가 하나님께로부터 크나큰 축복을 받아 열방 중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라는 약속이다.

 

15:7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완악하게 하다’에 해당하는 ‘아마츠’는 ‘요새화하다’, ‘완강하게 하다’, ‘딱딱하게 하다’는 뜻으로 곧 이웃에 대한 사랑이나 동정심을 고의적으로 억제하여 마음을 굳게 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여기서 ‘손을 움켜 쥐다’는 말은 이웃에게 동정의 손길을 베풀기를 거절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는 곧 마음을 완악히 한 결과이다. 그러나 모든 재물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자라면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한 채 자신의 재물을 움켜쥐는 것과 같은 완악한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15:8 그에게 필요한 대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구절이다. 즉 Living Bible은 이를 ‘그들이 필요로 하는 만큼’(as much as they need)으로 번역하였으며, NIV는 ‘그가 무엇을 필요로 하든 간에’(whatever he needs)로 번역하였다.

넉넉히 꾸어주라. 부족함을 충분히 채워 줄 수 있을 만큼 넉넉하게 꾸어 주라는 뜻으로, 곧 이 명령의 근본 정신은 진정한 이웃 사랑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본 절은 모든 재물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겸손히 시인하는 청지기 정신이 선행될 때 비로서 온전히 지켜질 수 있는 명령이다.

 

15:9 악한 생각. [히, 벨리야알] 단순히 ‘악한 생각’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무가치하고 쓸데없는 생각, 곧 정도(正道)에서 벗어난 ‘망령된 생각’(잠 23:33)을 가리킨다. 이는 역설적으로 가난한 이웃이 극히 필요로 하는 물건을 꾸어주는 것이 지극히 마땅함을 시사해 준다(행 2:44-45).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면제년(免除年)이 되면 빚을 되돌려 받는 것이 일 년 이상 지체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악한 생각을 가리킨다.

악한 눈으로. 자신에게 꾸고자 하는 궁핍한 형제를 못마땅한 눈초리로 대하거나, 그에게 좋지 않은 눈초리를 보내는 것을 가리킨다.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도움을 거절당하여 결과적으로 극심한 곤경에 빠진 가난한 이웃은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게 될 것이고, 그 부르짖음은 재판장에게 호소하는 일종의 고소(告訴)가 되어, 마침내 도움을 거절한 자는 안식년 채무 면제 규정 불이행 죄로 하나님께 정죄당할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같은 사실은 가난한 이웃에 대한 구제는 단순히 행할 수도 있고 행하지 않을 수도 있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행하여야만 하는 성도의 도리이자 의무 사항임을 강조해 준다(요일 3:17, 4:21). 한편 이는 채무 면제법(1-3절)이 올바로 시행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보장 제도이기도 한데, 즉 채무 면제 규례로 인해 발생할 소지가 있는 인색한 행동에 대한 미리 경고하고 있는 조항이다.

 

15:10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아끼다’의 원어 ‘라아’는 ‘상하게 하다’, ‘괴롭히다’, ‘상처 입히다’ 등의 뜻이 있다. 이는 구제하면서도 자신이 큰 손해를 본다는 식으로 언짢아 하는 것은 곧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일 뿐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행위가 됨을 시사해 준다. 아무튼 진정한 구제의 자세는 하나님의 진노가 두려워(9절) 마지 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에서 즐거움으로 행하는 것이다(고후 9:7). 또한 그리할 때 그러한 마음의 자세를 귀히 보시고,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손을 펴사 그에게 범사 축복, 만사 형통의 복을 주실 것이다.

 

15: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4-5절의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는 말과 상반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4-5절은 면제년(免除年, Year of Release) 규례가 잘 지켜지면 그 규례로 인하여 가난한 자가 극한 궁핍을 더 이상 당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지, 결코 이스라엘 중에 더 이상 가난한 자가 하나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로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 이 땅 위에는 항상 고통과 가난이 상존하게 되어 있다(창 3:17-19). 이 점은 예수께서도 친히 증거하신 사실이다(마 26:11). 본 절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 입각해, 인간 세상에는 항상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자가 상존하기 마련임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15:12 네 동족 … 네게 팔렸다 하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자 하나님의 종이었기 때문에, 원칙상 다른 사람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레 25:39-43).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히브리인들이라 할지라도 동족 뿐 아니라 이방인의 종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레 25:47), 대개 원인은 다음과 같다. (1) 빚이나 가난 때문에 스스로를 종으로 판 경우(레 25:39), (2) 극도의 빈곤으로 인해 그 부모에 의하여 종으로 팔린 경우(느 5:5), (3) 범죄로 인해 종으로 전락한 경우(출 22:1-3) 등이었다.

일곱째 해. 안식년(安息年)을 가리키는 제7년(1절)으로 오해할 수도 있으나 그렇지 않다. 18절에 의해서도 분명히 알 수 있듯, 이는 어떤 사람이 종이 된 날로부터 6년이 지나고 제7년이 되는 바로 그 해를 가리킨다. 출 21:2주석 참조.

 

15:13 빈 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즉 제7년째가 되어 주인을 섬기던 종이 자유롭게 될 시점에 이르거든, 주인은 그 종이 자립할 수 있도록 생계 대책을 마련해 주라는 의미이다. 이는 종을 자유하게 하는 제도가 유명 무실(有名無實)한 제도로 끝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종이란 자기 노력에 대한 응분의 보상을 받지 못하는 자이므로, 비록 제7년째에 해방되어 자유의 몸이 된다 할지라도 생활 대책이 마련되어 있지 않는다면, 극도의 가난에 시달리다 결국에는 또 다시 종의 신세로 전락하고 말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15:14 양무리 … 타작 마당 … 포도주 틀. 제유법적(提喩法的) 표현이다. 즉 여기서 ‘양무리’는 가축을, ‘타작 마당’은 곡식을, 그리고 ‘포도주 틀’은 과일을 각각 대표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결국 주인이 가진 모든 소유 재산을 가리킨다.

후히 줄지니. ‘후히’에 해당하는 ‘아나크’의 원 뜻은 ‘질식시키다’이다. 이는 곧 상대편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충분히 주라는 강조적 의미이다. 이에 대하여 유대 주석가들은 ‘은 30세겔 이상을 주어야 한다’고 주석하였는데 그 기준은 다음과 같다. (1) 당시 노예 한 사람의 가격이 은 30세겔이었고(출 21:32), (2) 품꾼 한 사람의 1년 임금이 약 10세겔이었다는 점(Hammurabi 법전)에 기초한 것 같다. 따라서 종이 6년 동안 주인을 섬겼다면 그는 60세겔에 해당하는 노동을 제공한 셈이니, 자신의 몸값 30세겔을 제하고도 30세겔을 받을 가치가 있다는 계산이 성립된다. 한편 본 절의 규례는 초기에 주어진 종의 규례(출 21:2-11, 레 25:39-55)에 추가된 내용이다.

 

15:15 애굽 땅 … 기억하라. 주인이 종 되었던 자에게 7년째에 이르러 자유와 더불어 재물까지 후히 주어야 할 이유와 근거이다. 즉 그것은 이스라엘도 과거 400년 동안 애굽에서 종노릇 하였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되었을 뿐 아니라 애굽의 수많은 보화와 의복, 가축들을 지니고 나올 수 있었다. 따라서 자신들도 이같은 과거 역사를 기억하고 동족 중 부득이 종 된 자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이 마땅하였다(출 22:21, 23:9, 레 19:34).

 

15:16 주인을 떠나지 아니하겠노라. 당시 히브리 사회에서는 종에 대한 주인의 태도가 온유하였을 뿐 아니라, 종의 신분도 어느 정도 보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일은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위와 같은 경우는 종살이를 하던 자가 주인의 호의를 입어 결혼함으로 처자(妻子)를 거느리게 된 경우이다. 왜냐하면 그 경우 자신은 제7년째에 해방이 될 수 있어도, 처자는 엄연히 주인의 소유이므로 여전히 종으로 남게 되기 때문이다(출 21:4). 따라서 처자에 대한 사랑은 그로 하여금 자유를 포기하고, 비록 종의 신분이지만 계속해서 가족과 함께 생활하기를 결심케 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출 21:5).

 

15:17 송곳을 가져다가 그의 귀를 … 뚫으라. 평행 구절(출 21:6)에 의하면, 이에 앞서 주인은 스스로 자유를 포기한 종을 재판장에게로 데리고 가서 그러한 사실을 법적으로 확인한 다음에, 그 종의 귀를 주인 집의 대문이나 대문의 기둥에 대고 송곳으로 구멍을 뚫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귀를 예속과 복종의 기관으로 간주했던 고대 근동의 관습으로, 곧 이 의식은 이제 그 종이 주인과 주인의 집에 영원히 예속(隷屬)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상직적 의식이었다. 한편 이러한 의식(儀式)을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잔인한 의식으로 보일지 몰라도 당시의 관점에서는 결코 잔인한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 다른 이방 족속들은 노예를 자신의 소유로 삼을 때, 이마나 어깨에 화인(火印)을 새기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시 종들은 대개 귀걸이를 한 상태였기 때문에, 귀에 구멍을 뚫는 것은 그토록 고통스런 행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히브리인들은 이 의식을 치른 후 그 때 사용한 송곳을 주인집의 문이나 문설주에 꽃아 놓음으로써, 그 종이 죽을 때까지 그 집의 종임을 가시적(可視的)으로 입증하였다.

여종에게도 그같이 할지니라. 이 규례는 “사람이 자기의 딸을 여종으로 팔았으면 그는 남종 같이 나오지 못할지며”(출 21:7)라는 규례와 모순되는 듯하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왜냐하면 그 구절은 주인이 여종을 첩(妾)으로 취한 경우에만 해당되는 규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 절은 여종이 단순하게 일만 하다가 제7년을 맞이한 경우를 가리킬 뿐인데, 이 때에는 남종과 마찬가지로 해방될 수 있었다.

 

15:18 품꾼의 삯의 배나 받을 만큼 너를 섬겼은즉. 자신들도 하나님에 의해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자들이라는 역사적 사실(15절) 외에, 수리적(數理的)으로 따져 보아도 이미 그 종으로부터 6년간 충분한 이익을 거두었으니, 그를 7년째에 해방시켜 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이다. 사실 정해진 낮 시간에만 일하는 품꾼에 비해 종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고하는 자들이니, 품삯으로 계산한다면 종은 동일한 임금을 받고도 품꾼의 두 배 이상의 일을 하는 셈이다(Michaelis, Baumgarten). 따라서 주인은 결과적으로 그 차액에 해당하는 만큼의 이익을 거둔 셈이 되는 것이다.

 

15:19 처음 난 수컷은 … 여호와께 드릴 것이니. 초태생(初胎生)을 드리는 규례는 모세 오경에서 거듭 주어지고 있는 규례이다(출 13:2,12, 22:29-30, 34:19, 레 27:26, 민 3:13, 8:16-17, 18:15). 이 경우 그 초태생은 난지 8일 이후부터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수 있었는데, 그것은 8일 만에 행하는 할례 의식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출 22:30, 레 22:27).

구별하여. 출 13:2,12 주석 참조.

첫 새끼. 레 27:26 주석 참조.

 

15:20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 12:5 주석 참조.

여호와 앞에서 먹을지니라. 초태생을 ‘중앙 성소’에서 하나님께 화목제물로 드린 후, 제사장의 몫(레 7:30-34)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경배자가 가족과 함께 성소 뜰에서 먹으라는 뜻이다(레 7:15-17).

 

15:21 21-22절. 비록 초태생이라 할지라도 흠이 있는 경우, 그 짐승은 제물용으로는 사용할 수 없었고 식용으로만 사용할 수 있었다. 그 까닭은 여기서 제물로 구별된 초태생은 장차 온 인류를 대속할 영원한 화목제물인 예수 그리스도의 무흠(無欠)을 예표했기 때문이다(고후 5:21).

 

15:22 노루와 사슴을 먹음 같이. 12:15 주석 참조.

 

15:23 오직 피는 먹지 말고. ‘피’는 그 자체 속에 포함된 ‘죽음’과 ‘생명’이라는 이중 개념으로 인해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어 놓는 속죄(贖罪)의 상징적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성경은 이러한 최고의 종교적 성물(聖物)인 피의 식용(食用)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는데, 이것을 어기는 자는 극형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창 9:4-5, 레 7:27, 17:10). 신약 시대에도 이러한 입장은 견지되어 예루살렘 총회에서 동일한 원칙이 가결되었다(행 15:20). 피의 식용을 이처럼 철저히 금지시킨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피는 곧 육체의 생명 그 자체와 동일시 되었으므로(창 9:4, 레 17:11, 14) 피를 마시는 행위는 사실상 생명을 삼키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2) 피로써 상징된 생명은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 영역에 속하였으므로 피를 마시는 행위는 하나님의 주권을 모독하는 신성 모독죄와 같았기 때문이다. (3) 피를 마시는 행위는 이방의 우상 숭배자들이 즐겨 행한 그들의 극악한 제사 의식이었기 때문이다. (4) 무엇보다도 피는 속죄의 유일한 수단으로서(히 9:22) 장차 인류의 죄를 대속할 그리스도의 보혈(寶血)을 예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5) 피는 사람의 건강에 해롭기 때문이다.

물 같이 땅에 쏟을지니라. 짐승의 피를 마치 물을 쏟듯 당에 쏟아야 할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피는 생명을 상징하는 것인 만큼, 본래 그 생명이 비롯되었던 흙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함이다(창 3:19, 전 3:20). (2) 그것은 오직 생명의 주권이 흙으로부터 그 생명을 창조 하신(창 2:7)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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