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죽은 자를 위해 자기 몸을 자해(自害)하던 행위는 고대 이방인들의 고행적(苦行的)인 풍습이었다. 즉 당시 이교도들은 장례식 때 죽은 자의 넋을 위로하고 음부(陰部)의 신들을 달래기 위해 자기 몸에 상처를내고 피를 흘리는 자해 행위를 자행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방 우상 종교의 그릇된 고행주의(苦行主義), 곧 자학과 고행을 통해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마음을 움직이며, 그리하여 동정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미신적인 행위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히 구별된 이스라엘은 결코 그러한 우상 숭배적인 장례풍습을 본받지 말아야 했다(레 19:28).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 직역하면 ‘네 눈 사이를 대머리지게 하지 말라’이다. 히브리인들은 관습상 머리털을 밀지 아니하였다. 따라서 대머리는 으레 수치와 멸시의 대상이었다(왕하 2:23). 그렇지만 예외적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조국의 멸망 등에 임해서는 머리털을 깎음으로 종교적 애도(哀悼)와 통회를 나타내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행위였을 뿐이다(사 15:2, 렘 16:6). 그러므로 본 절의 의미는 죽은 자에 대한 합당한 애도 외에는 지나친 호상(護喪) 행위를 하지 말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레 21:5 주석 참조. 한편 본 절은 진정 생의 궁극적 소망과 가치를 하나님께 둔 자는 비록 사랑하는 부모 형제 친척의 상(喪)을 당했다 할지라도 결코 극단적인 좌절 상태에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아울러 교훈해 준다. 왜냐하면 성도들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도리어 이 땅에서의 수고로운 삶을 끝내고 부활하는 그 날까지 안식하는 복된 일이기 때문이다(살전 4:13-18). 이런 견지에서 아인즈워드(Ainsworth)의 다음과 같은 인용구는 음미할 만하다. “나무 토막을 향하여 너는 나의 아비라 하며, 돌덩이를 향하여 너는 나를 낳았다 하는(렘 2:27) 이교도들은 세상의 아비가 죽었을 때에 더 이상 자신을 보호해 줄 아비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베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 그러나 영원토록 살아 역사하시는 하늘 아버지 여호와를 가진 성도들은 비록 육신의 아비가 죽었다 할지라도 극단적으로 자기 몸을 벨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결코 아비 없는 자가 아니라 계속 아비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1. p.784).
여호와께서 … 기업의 백성을 삼으셨느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거룩한 기업의 백성이 된 것은 그들에게 어떠한 자격이나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신 7:7).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당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그들을 만민 중에서 구별하셨다. 이런 점에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을 따라 구원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도 예외일 수는 없다(엡 1:11).
무엇이든지 먹지 말라. 이러한 규례는 이스라엘의 위생적인(hygienic) 식생활을 배려해 주어진 것이기도 하지만(Grotius, MIchaelis), 보다 근본적인 목적은 종교적이고도 영적인 차원에서 찾을 수 있다. (1) 구약의 모든 의식법(儀式法)이 그러하듯 외적(外的) 정결 의식을 통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내적(內的) 신앙의 성결에 이르도록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2) 모든 부정한 것으로 인한 오염에서부터 성결을 유지케 함으로, 백성들이 죄로부터도 자신을 거룩히 보존하는 ‘성결의 도’(聖潔之道)를 터득토록 하기 위함이었다. (3) 가장 기본적인 식생활에서조차 이방인들과 엄격히 구별된 삶을 살게 함으로, 백성들이 자신을 하나님께로부터 구별받은 선민(選民)임을 늘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었다(레 11:1-8).
소와 양과 염소. 위의 2가지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정결한 짐승이자, 또한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로 쓰이는 대표적인 짐승들이다(레 1:3-13).
볼기가 흰 노루. 원어 ‘디숀’은 염소와 비슷하나 그보다는 몸이 크고 살진 편인 ‘영양’(antelope)을 가리킨다.
굽이 갈라져 쪽발도 되고. 여기서 ‘굽’은 ‘찢다’, ‘나누다’란 뜻의 ‘파라스’에서 파생된 말로, 곧 완전히 둘로 나뉘어진 상태를 가리킨다.
새김질도 하는. 여기서 ‘새김질’은 ‘부수다’, ‘쪼개다’, ‘씹다’란 뜻의 ‘가라르’에서 파생된 말로, 곧 입으로 음식물을 계속 씹는 상태를 가리킨다. 한편 이러한 2대 조건을 지닌 짐승들은 대개 초식 동물이면서, 동시에 성질이 사납지 않은 평화스럽고 온순한 짐승들이다. 레 11:3 주석 참조.
그 사체도 만지지 말 것이니라. 사체(死體)를 부정한 것으로 간주한 것은 죽음을 죄의 결과로 여긴(롬 6:23) 성경의 독특한 사상의 반영이다(레 21:17, 22:4). 그러므로 비록 살아 있는 것이라도 부정한 짐승을 먹거나 접촉하면 부정한 일로 간주되었으니, 그 주검을 접촉하는 것은 더더욱 부정한 일로 간주되었다(레 11:8).
물수리. ‘바다 독수리’(ospray)의 일종인데, 공동번역은 이를 ‘흰꼬리수리’로 번역하고 있다(레 11:13).
흰 올빼미. 해오라기와 비슷하나 몸빛은 흰색이다. 주로 동부 시베리아, 중국, 만주, 한국 등지에 서식하는데, 세계의 희귀종 중 하나이다(레 11:18).
올응. 새끼 독수리의 일종이다(레 11:18).
노자. ‘가마우지’(cormorant)를 가리킨다. 연못이나 하천, 해만(海灣) 등지에 서식하면서 물고기를 잡아먹고 사는데, 주로 한국과 일본에 분포한다(레 11:17).
대승. ‘오디새’(hoopoe)나 ‘댕기물떼새’(lapwing)를 가리킨다.
박쥐. 실상은 포유 동물이나, 공중을 완전하게 날아다닐 수 있으므로 고대인들은 이를 조류로 분류하였다(레 11:17).
스스로 죽은 모든 것은 먹지 말 것이나. 비록 먹도록 허용된 정결한 짐승이라 할지라도 자연사(自然死)한 것은 먹지 말라는 뜻이다(출 22:31, 레 7:24, 17:15, 22:8). 왜냐하면 자연사했거나 다른 동물에게 죽임당한 짐승의 경우에는 그 고기 속에 피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을 먹을 시에는 곧 ‘피를 고기와 아울러 먹지 말라’(12:23)는 계명을 어기는 셈이 된다. 이처럼 율법은 그 어떠한 경우일지라도 피의 식용(食用)을 엄격히 금지시키고 있다. 12:23 주석 참조.
성 중에 거류하는 객.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고 있으면서도 아직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 나그네를 가리킨다(Targum). 즉 어느 정도 이스라엘 사회에 동화되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로 작정하였으면서도, 아직 할례를 받지 아니하여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지 못한 자들을 가리킨다(Maimonides, Ainsworth).
이방인. 이스라엘인의 영토에는 거주하지 않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이스라엘과 접촉하던 순전한 외국인을 가리킨다(Pulpit Commentary).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지니라. 가나안 사람들의 사악한 식생활과 미신적인 종교 의식을 따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즉 가나안 족속들은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는 것이 최고의 맛을 내는 요리법이라고 생각하였을 뿐 아니라, 그러한 행위에 주술적(呪術的) 의미까지 부여하여 이를 종종 자행하였다. 그러나 실로 염소새끼를 그 생명의 유지원(維持源)인 어미의 젖에 삶는 것은 생명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아주 야만적인 행위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 같은 이방인들의 사악한 관습을 성민(聖民) 이스라엘은 결코 답습하지 말 것을 단호히 명령하셨다(출 23:19). 이처럼 여호와의 규례와 법도의 근본 정신은 일상 생활의 세부적인 면과 하찮은 미물(微物)에까지그 사랑과 긍휼이 미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출 23:19 주석 참조.
(1) 첫째 십일조: 한 해의 추수가 끝나면 백성들은 먼저 모든 소출의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자기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들에게 주어야 했다(민 18:21-24). 그러면 레위인들은 백성들로부터 받은 십일조에서 다시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거제로 바쳐야 했는데, 이것은 곧 제사장들의 몫이 되었다(민 18:26-29). 이처럼 분배받은 기업 없이 성막에서 종교적 직무에만 전념하는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의 생계를 보장해 주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쳐야 하는 십일조의 첫 단계를 ‘첫째 십일조’라고 부른다.
(2) 둘째 십일조: 혹은 ‘축제 십일조(Festival Tithe)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첫째 십일조를 바친 백성들이 그 나머지 소출(십분의 구) 가운데서 다시 십분의 일을 구별한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자신들이 직접 중앙 성소로 가지고 올라가는데, 한 해 동안 풍성한 축복을 내려주신 하나님께 감사 축제를 드리는 비용으로 사용되었다(12:5-19). 이때 중앙 성소가 너무 멀면, 현물 대신 일단 현금으로 바꾸어 가지고 가서 성소 근처에서 다시 잔치에 필요한 예물들을 구입할 수 있었다(24-26절). 한편 이 감사 잔치에는 가족과 친지는 물론 수하의 남녀 종들과 성중의 레위인들까지 모두 참여하였다.
(3) 셋째 십일조: 안식년(제7년인 이 때에는 토지를 경작하지 않기 때문에 십일조를 바치지 않았다)을 기준으로 제3년과 제6년에는 위의 ‘둘째 십일조’로 잔치를 베푸는 대신 각 처소에서 그 비용을 다 모아 들여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 나그네, 가난한 자, 고아, 과부 등을 위한 구제비로 사용하였다(28-29절, 26:12). 그리고 이 때 백성들은 자신들이 마련한 이 ‘둘째 십일조’를 율법대로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거짓 없이 사용했노라고 하나님 앞에 맹세해야 했다(26:13-15). 따라서 이 ‘셋째 십일조’는 또 다른 십일조가 아니라, ‘둘째 십일조’와 동일한 것인데 다만 용도에 있어서 다를 뿐이었다. 즉 ‘둘째 십일조’는 안식년을 기준으로 제1년과 2년 그리고 4년과 5년에 쓰는 ‘감사 축제용’이었고, ‘셋째 십일조’는 안식년을 기준으로 제3년과 6년에 쓰는 ‘이웃 구제용’이었다. 한편 본문은 이중 둘째 십일조(22-27절)와 셋째 십일조(28-29절)에 관한 규례이다.
토지 소산의 십일조. 여기서는 특별히 십분의 일을 바치고 나머지 소출에서 다시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바치는 소위 ‘둘째 십일조’를 가리킨다.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 이스라엘의 유일 중앙 성소로 택정된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킨다. 12:5 주석 참조.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은 팔레스타인의 3대 소산물로서 곧 모든 농작물을 대표한다. 따라서 이는 곧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수확한 모든 농작물의 십일조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7:13).
네 소와 양의 처음난 것. 십일조와 더불어 하나님께 돌려야 마땅한 모든 초태생들의 대표물이다(12:6).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제2의 십일조’를 시행하는 목적이다. 즉 그것은 백성들이 한 해 동안의 풍성한 소출을 거둔 데 대하여 온 가족과 더불어 즐거워하며, 받은 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케 함으로써, 온전히 여호와를 경외할 수 있게 교훈하기 위함이었다.
택하신 곳. 12:5 주석 참조.
독주. 원어 ‘쉐카르’는 과일이나 곡식, 꿀 따위를 발효하여 증류시킨 것을 가리키는데, 포도주와 달리 아주 독한 음료이다(Jerome). 한편 랑게(Lange)는 포도로 만들 술이 곧 ‘포도주’이고, 포도가 아닌 다른 재료로 만든 것이 곧 ‘독주’라고 해석하셨다.
네 권속. 자신의 일가 친척 뿐 아니라, 수하에 있는 종들까지 함께 지칭하는 말이다(12:12).
그리하면 … 복을 주시리라. 인간의 얄팍한 산술적(算術的)인 계산만으로는 분명 자기의 소득 중 일부를 떼어 바친다는 것은 손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재물이 모두 자신의 힘으로 얻은 자신의 것이라는 교만과 불신앙의 소치이다. 진정 인간의 생사 화복과 천지간의 재물을 하나님께서 홀로 주장하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인정하면, 오히려 바침으로써 배로 복을 받는 풍성한 은혜의 생활을 누릴 것이다. 모세도 이러한 염려에서 십일조 생활을 권면한 후, 그 마지막 결론으로서 ‘순종에 따른 범사 축복’의 메시지를 잊지 않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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