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 통곡하였더라. 불신앙의 바람이 이스라엘 전체를 휘몰아쳤다. 모세는 이러한 백성들의 비탄에 찬 반응에 대해 ‘소리 높여’, ‘부르짖으며’, ‘통곡하였다’고 표현함으로써 그들의 울부짖음이 점차 고조되고 확산되어 갔음을 시사하였다. 한편 여기서 ‘소리를 높이다’(히, 타사 에트 코람)는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소리 높혀 외치다’ 또는 ‘불타는 심정으로 아우성치다’ 등의 뜻이며, ‘부르짖다’(히, 나탄)란 ‘가슴을 치며 울다’는 뜻이다. 그리고 ‘통곡하다’(히, 바카)는 ‘몹시 애통(한탄)하며 울부짖다’란 의미이다. 결국 그들은 완전히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밤새도록’ 절규하며 점점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건 것이다. 그들이 절망 중에 오히려 하나님을 찾아 간구하기 보다 자기 연민과 회한의 감정에 빠져든 근본적인 이유는 오직 약속에 대한 불신과 믿음의 결핍 때문이었다. 실로 믿음이 없이는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신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다(히 11:6).
14:2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백성들이 출애굽의 두 지도자를 원망한 것은 배은망덕한 일인 동시에 두 지도자를 세우신 여호와의 권위에 도전하는 악행이었다. 이처럼 원망을 일삼는 자는(출 17:3) 결국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멸망당하고 만다. 이 사실을 교훈삼아 후일 사도 바울은 항상 근신할 것을 우리에게 명하였다(고전 10:10-11).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여행 중 상황이 조금만 나빠져도 습관적으로 죽음을 운운했다(출 14:11, 16:3). 이는 하님의 모든 구원의 은총(유월절 사건, 홍해 사건, 만나 사건 등)을 업신여기는 처사인 동시에, 자유와 생명을 향유할 가치가 없는 자임을 스스로 증거하는 태도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떤 역경에 처할지라도 생명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끝까지 인내해야 한다(약 5:7-11).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여행 중 상황이 조금만 나빠져도 습관적으로 죽음을 운운했다(출 14:11, 16:3). 이는 하님의 모든 구원의 은총(유월절 사건, 홍해 사건, 만나 사건 등)을 업신여기는 처사인 동시에, 자유와 생명을 향유할 가치가 없는 자임을 스스로 증거하는 태도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떤 역경에 처할지라도 생명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끝까지 인내해야 한다(약 5:7-11).
14:3 우리를 …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패악한 백성들의 억측이다. 하나님은 분명 그 백성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당신을 중심으로 한 복된 국가를 만드시려 했다(출 3:7-8).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바로의 추격의 칼로부터, 광야의 죽음의 갈증과 기아로부터 고비 때마다 구원하셨다. 이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던 그들이었지만 정탐꾼들의 부정적인 보고로 인해 오히려 하나님을 적대자요, 살인자로 매도하고 말았다. 이처럼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에 관해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엄청난 차이를 나타낸다. 따라서 참믿음은 지적인 데에만 머무르지 않고 전인격적으로 수납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백성들의 이러한 불신앙적이고 쓸데없는 걱정은 후일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하였다. 즉 훗날 그들이 염려했던 자녀들은 생존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오히려 그들 자신은 광야에서 죽음을 맞게 되었다. 이것은 불신앙의 역설(paradox) 아닌가?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처자를 걱정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들의 연약한 믿음을 염려해야 했다.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죽음을 두려워한 자들의 비겁한 생각이다. 그리고 진정한 자유와 선민(選民)으로서의 특권은 헌신짝처럼 버리는 노예 근성의 발로이다. 아울러 애굽이 죄악된 세계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환난을 만난 성도가 옛 죄악된 생활로 되돌아 가고자 하는 어리석음의 전형(典型)을 보여 준다. 참신앙인은 과거 죄악되고 비굴했던 생활에로의 회귀보다 고난스런 현실을 꿋꿋이 인내하는 가운데 끝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빌 3:13-14).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백성들의 이러한 불신앙적이고 쓸데없는 걱정은 후일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하였다. 즉 훗날 그들이 염려했던 자녀들은 생존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오히려 그들 자신은 광야에서 죽음을 맞게 되었다. 이것은 불신앙의 역설(paradox) 아닌가?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처자를 걱정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들의 연약한 믿음을 염려해야 했다.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죽음을 두려워한 자들의 비겁한 생각이다. 그리고 진정한 자유와 선민(選民)으로서의 특권은 헌신짝처럼 버리는 노예 근성의 발로이다. 아울러 애굽이 죄악된 세계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환난을 만난 성도가 옛 죄악된 생활로 되돌아 가고자 하는 어리석음의 전형(典型)을 보여 준다. 참신앙인은 과거 죄악되고 비굴했던 생활에로의 회귀보다 고난스런 현실을 꿋꿋이 인내하는 가운데 끝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빌 3:13-14).
14:4 한 지휘관을 세우고. 여기서 ‘지휘관’(히, 로쉬)이란 ‘머리’란 뜻으로서 곧 인도자, 우두머리 등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옛 생활로의 복귀를 위해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를 배척하고 자신들의 뜻을 충족시키는 지도자 선출을 운운했다. 이는 지금까지의 단순한 불평보다 보다 구체적이고 계획적인 패역으로서, 더 이상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겠다는 교만한 발상의 극치요, 배은망덕한 불신의 절정이었다.
14:5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 모세와 아론은 폭도가 된 백성들에게 대항치 않고 그들 앞에서 이 모든 상황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표시로 엎드려 간구하였다(Calvin). 그리고 간구의 자세는 배를 땅에 대고 누운 자세였다.
14:6 여호수아와 …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두 지도자 모세와 아론의 행동(5절)에 믿음 있는 두 정탐꾼이 동조하는 장면이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옷을 찢는 것은 극한 슬픔과 고통과 분노를 표시하는 행위이다(창 44:13, 스 9:5).
14:7 심히 아름다운 땅. 여기서 ‘심히’를 뜻하는 원어 ‘메오드’는 반복될 경우 보통 최상급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리고 ‘아름다운’이란 ‘풍부한’, ‘편한’, ‘잘 되는’ 등의 의미를 뜻하기도 한다. 결국 위의 말은 가나안 땅이 자신들이 보아왔던 그 어떤 땅보다 비옥하며 풍족할 뿐아니라, 영적으로도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축복되고 은혜로운 땅임을 시사한다.
14: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가나안 땅 입국은 오직 ‘여호와의 기쁘신 뜻’, 곧 그분의 주권적인 은혜에 기인한 것임을 밝힌다. 따라서 가나안 땅 입국은 인간의 행위나 주변의 상황에 구애됨 없이 오직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 여부에 따라 결정될 것이었다. 그런데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일찍부터 베풀어져 있었다. 백성들은 단지 그 은혜를 받아 누리기만 하면 되었다. 따라서 여호수아와 갈렙은 바로 이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출 3:8 및 민 13:27, 그리고 신 11:9 주석을 참조하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출 3:8 및 민 13:27, 그리고 신 11:9 주석을 참조하라.
14:9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여호와를 거역하는 것은 곧 (1) 여호와의 약속을 믿지 않는 것과 (2) 여호와의 뜻을 거부하는 악행을 동시에 의미한다. 일찍이 여호와는 가나안을 그들에게 약속하사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가나안에 거룩한 나라를 건설코자 하는 뜻(계획)을 가지고 계셨다(출 3:8).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이는 손쉽게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다는 확신에 찬 말이다. 동시에 이 말은 가나안이 이스라엘의 필요를 넉넉히 채우는 보고(寶庫)임을 시사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한편 여호수아와 갈렙이 이런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가 함께 하신다’는 믿음 때문이었다(수 1:5-6). 그러므로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굳센 믿음을 가질 때 인간이 지닌 모든 문제는 말끔히 해결된다(롬 8:31-39).
그들의 보호자. 직역하면 ‘그들의 그림자’이다. 무서운 사막 지역에서는 큰 산이나 반석이 태양의 열기를 차단하는 보호물이 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보호를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으로 ‘반석’, ‘산성’(시 18:2), ‘그림자’(시 91:1-2)등이 자주 사용되었다. 한편 본문에서 가나안 백성을 향한 여호와의 보호(그늘) 기능은 ‘일반 은총적’ 측면, 곧 가나안인들에게 구원을 목적한 보호가 아니라 일상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배려하신 보호를 의미한다(마 5:45). 그러므로 본 절은 가나안 원주민에게는 이제 이러한 배려까지 철회된 상태이므로, 그들은 전혀 희망없는 족속들임을 강조한 말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예언하신 바 가나안 족속에 대한 심판 유예 기간은 이제 끝났던 것이다(창 15:16).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이는 손쉽게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다는 확신에 찬 말이다. 동시에 이 말은 가나안이 이스라엘의 필요를 넉넉히 채우는 보고(寶庫)임을 시사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한편 여호수아와 갈렙이 이런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가 함께 하신다’는 믿음 때문이었다(수 1:5-6). 그러므로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굳센 믿음을 가질 때 인간이 지닌 모든 문제는 말끔히 해결된다(롬 8:31-39).
그들의 보호자. 직역하면 ‘그들의 그림자’이다. 무서운 사막 지역에서는 큰 산이나 반석이 태양의 열기를 차단하는 보호물이 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보호를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으로 ‘반석’, ‘산성’(시 18:2), ‘그림자’(시 91:1-2)등이 자주 사용되었다. 한편 본문에서 가나안 백성을 향한 여호와의 보호(그늘) 기능은 ‘일반 은총적’ 측면, 곧 가나안인들에게 구원을 목적한 보호가 아니라 일상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배려하신 보호를 의미한다(마 5:45). 그러므로 본 절은 가나안 원주민에게는 이제 이러한 배려까지 철회된 상태이므로, 그들은 전혀 희망없는 족속들임을 강조한 말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예언하신 바 가나안 족속에 대한 심판 유예 기간은 이제 끝났던 것이다(창 15:16).
14:10 온 회중이 … 돌로 치려 하는데. 정곡을 찌르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설득에 오히려 백성들이 완전히 이성을 잃은 모습이다. 이는 마치 스데반의 의로운 설교에 유대인들이 그를 돌로 치는 모습과 같다(행 7:57-58). 회개를 모르는 패역한 백성들의 공통된 모습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이 침해받을 때에 일어나셔서 영광을 보이신다(16:42, 욥 38:1).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전격적인 개입은 항상 악인에게는 심판을, 의인에게는 구원과 축복을 동반한다(시 37:28, 145:20). 여호와의 영광이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셨는가의 문제에 대해 카일(Keil)은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상징하는 ‘빛의 섬광’이 회막의 구름 가운데로부터 터져나왔을 것이라고 추측한다(출 16:10).
여호와의 영광이 …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이 침해받을 때에 일어나셔서 영광을 보이신다(16:42, 욥 38:1).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전격적인 개입은 항상 악인에게는 심판을, 의인에게는 구원과 축복을 동반한다(시 37:28, 145:20). 여호와의 영광이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셨는가의 문제에 대해 카일(Keil)은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상징하는 ‘빛의 섬광’이 회막의 구름 가운데로부터 터져나왔을 것이라고 추측한다(출 16:10).
14:11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를 대변하는 말인(출 10:3, 16:28, 렘 23:26)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불평과 반역을 일삼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음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그들의 해방과, 광야에서의 생존을 위해서 많은 ‘이적’을 그들의 목전에서 베푸셨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믿지 않음으로’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또 다른 ‘이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이었다(마 11:20-24).
14:12 전염병으로 … 멸하고. 하나님께서 패역한 백성을 친히 진멸코자 계획하신 것은 이번만이 아니었다(출 32:10). 그만큼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멸망당해 마땅한 패역한 백성이었다. 한편 여기서 ‘전염병’(히, 데베르)이란 ‘흑사병’과 같은 악성 유행병(plague)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치료불가능한 질병이었다(32-33절).
네게 … 크고 강한 나라를. 이는 금송아지 우상 사건 때에도 언급된 말이다(출 32:10). 이처럼 거듭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산 백성들은 광야에서 처참한 죽음을 맛보아야 했으며, 이로인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고(창 12:2, 17:7) 모세를 통해 이루시려던 당신의 나라를 건설코자 하는 계획도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직면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비록 패역한 세대는 포기하셨지만, 당신의 나라 건설이라는 원대한 계획은 모세를 통해 계속 추진하고자 하셨다.
네게 … 크고 강한 나라를. 이는 금송아지 우상 사건 때에도 언급된 말이다(출 32:10). 이처럼 거듭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산 백성들은 광야에서 처참한 죽음을 맛보아야 했으며, 이로인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고(창 12:2, 17:7) 모세를 통해 이루시려던 당신의 나라를 건설코자 하는 계획도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직면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비록 패역한 세대는 포기하셨지만, 당신의 나라 건설이라는 원대한 계획은 모세를 통해 계속 추진하고자 하셨다.
14:13 주의 능력으로. ‘능력’(히, 코아흐)이란 ‘생기’, ‘힘’ 등을 의미하는 말로써 여기서는 열 가지 재앙 등으로 애굽의 바로와 그 신(神)들을 파멸시키고 가나안 광야 여정을 주도하셨던 하나님의 주권적인 힘을 가리킨다. 출 32:11에는 ‘큰 권능과 강한 손’이란 말로 더욱 시각적이고 박진감 넘치게 표현하였다.
14:14 그들도 들었으니. 여기서 ‘그들’은 애굽 백성들을 비롯하여 이스라엘이 광야 여정동안 거쳐 온 주변 족속들 및 가나안 민족들을 지칭한다. 이들은 애굽에서 해방되어 가나안으로 향하던 이스라엘 위에 베풀어진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명성을 곧 그들의 신 여호와의 명성으로 간주하였다(15절).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몰락(이유야 어떻게 되었든)은 곧 하나님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이라는 것이 모세의 중보 기도의 논지였다.
대면하여 보이시며. 매우 친밀한 관계를 의미한다(12:8).
낮에는 구름 기둥 … 밤에는 불 기둥. 출 13:21 주석 참조.
대면하여 보이시며. 매우 친밀한 관계를 의미한다(12:8).
낮에는 구름 기둥 … 밤에는 불 기둥. 출 13:21 주석 참조.
14:16 여호와가 … 능력이 없었으므로 … 죽였다. 모세의 간절한 중보 기도는 자신의 체면과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되지 않기를 바라는 충정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모두 옳다고는 볼 수 없다. 만일 모세의 주장 대로라면 하나님이 이방 민족들의 비판적인 눈을 의식하여 패역한 이스라엘을 결코 정의롭게 치리(治理)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도가 호소력을 가지는 이유는, 이유야 어떻든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언약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방인들에게는 만약 이스라엘 자신들이 섬기는 신에 의해 그 백성이 죽었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조롱거리가 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방인들은 ‘여호와’란 신(神)이 어떻게 우연히 애굽의 신을 격파했는지 몰라도, 막상 가나안 신들과의 싸움을 앞두고 그 패배가 두려워 그러한 우스꽝스러운 일을 벌였다고 조롱할 수도 있는 것이다.
14:17 이미 말씀하신 대로. 금송아지 우상 숭배 사건을 종결짓는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의 중보 기도를 들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던 부분(출 34:6-7)을 일컫는다. 여자적(如字的)으로 똑같지는 않으나 그 의미상 동일하다.
14:18 본 절은 모세의 호소가 성숙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보여 준다. 즉 그가 인식한 하나님은 인자가 많아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시지만, 그렇다고 그 사랑으로 인해 죄악을 그대로 방치해 두시지는 않는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사실이다. 실로 긍휼과 인자가 풍성하신 하나님은 사죄하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러나 이 사죄(赦罪)는 죄악을 방치하는 것으로써가 아니라, 공의에 기초한 희생제물로써만 가능하다(히 9:22). 이런 사실은 본 절의 ‘사하다’(히, 나사)란 말이 ‘옮겨버리다’(bearing away), ‘감당하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는 데서 확실하다. 즉 이 말은 희생제물을 통한 대속적(代贖的)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이같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성품이 가장 잘 드러난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사건이다(롬 3:25-26).
14:19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앞 절에는 공의와 사랑이 조화된 하나님의 성품이 언급되었는데, 본 절은 모세가 그 성품 중 그분의 ‘인자’(仁慈)에 더욱 매달리고 있는장면이다. 실로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죄 용서 받을 수 있는 아무런 자격이 없다. 따라서 만약 하나님이 공의로만 인간을 대하신다면, 그 앞에 살아남을 사람은 한 명도 없다(룸 3:10-18). 그러므로 연약한 인간은 그분의 광대하신 인자에 매달릴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 사하신 것 같이.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역과 원망은 실로 그 뿌리가 깊다. 즉 출애굽 직후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 왔을 때(출 14:10-12), 마라에서 먹을 물이 없었을 때(출 15:22-24), 신 광야에서 먹을 것이 부족했을 때(출 16:1-3), 르비딤에서 마실 물이 없었을 때(출 17:1-3), 모세가 시내 산에서 더디 내려온다고 생각했을 때(출 32:1), 광야 여행이 좀 힘들다고 생각됐을 때(민 11:1), 애굽의 생선과 마늘 등이 먹고 싶었을 때(민 11: 4-6), 그리고 지금 가나안 땅의 정복이 어렵다고 생각했을 때, 그들은 지체없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또한 그들을 세우신 하나님을 멸시했다. 그러나 그 때마다 하나님은 진노하시되,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사 그들을 멸하시지는 않으셨다. 그러므로 모세는 다시 한번 그 크신 자비하심에 기대어 죄사함을 간구하고 있다.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 사하신 것 같이.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역과 원망은 실로 그 뿌리가 깊다. 즉 출애굽 직후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 왔을 때(출 14:10-12), 마라에서 먹을 물이 없었을 때(출 15:22-24), 신 광야에서 먹을 것이 부족했을 때(출 16:1-3), 르비딤에서 마실 물이 없었을 때(출 17:1-3), 모세가 시내 산에서 더디 내려온다고 생각했을 때(출 32:1), 광야 여행이 좀 힘들다고 생각됐을 때(민 11:1), 애굽의 생선과 마늘 등이 먹고 싶었을 때(민 11: 4-6), 그리고 지금 가나안 땅의 정복이 어렵다고 생각했을 때, 그들은 지체없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또한 그들을 세우신 하나님을 멸시했다. 그러나 그 때마다 하나님은 진노하시되,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사 그들을 멸하시지는 않으셨다. 그러므로 모세는 다시 한번 그 크신 자비하심에 기대어 죄사함을 간구하고 있다.
14:20 내가 … 사하노라. ‘내가 사했노라’(KJV, RSV, I have pardoned)로 해석함이 좋다. 즉 하나님의 사죄는 벌써 완결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백성들이 당장 한 번에 죽지 않게 되고, 또한 기존의 이스라엘을 폐하고 모세를 통해 새 민족을 세우시겠다는 말씀을 취소하셨다는 뜻이지 그들에게 마땅히 내릴 형벌조차 취소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금송아지 숭배 사건 때 보류되었던 그 형벌(출 32:3)에 지금의 죄악까지 겹쳐 이제 그 죄악의 한도가 찼기 때문에 더 이상 형벌을 미룰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원망하던 백성들은 하나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어가야 했다.
14:21 진실로 … 맹세하노니. 직역하면 ‘내가 살아 있는 것과 같이, 여호와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게 될 것처럼’이다.
내가 살아 있는 것. 보통 사람들이 맹세를 할 때에는 자신보다 탁월하고 불변하는 존재의 권위를 빌어 맹세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존재 위에 거하시는 최고의 권위자이기 때문에 어떤 약속과 맹세를 하실 때는 하위(下位)에 있는 어떤 대상을 두고 약속하실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은 다만 당신 스스로의 권위로 맹세하실 뿐이다(히 6:13-14). 그러므로 이는 유일신 여호와(스스로 있는 자, I am who I am.) 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한편 이처럼 하나님께서 당신 스스로를 두고 한 맹세는 결코 변경되거나 상쇄되지 않고 반드시 성취하신다.
여호와의 영광이 … 충만할 것. 백성들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창 12:1-3, 17:5-8) 당신의 나라 건설과 선민(選民)의 번영을 온전히 주도해 가심으로써 온 우주 가운데 당신의 영광이 충만할 것이라는 말씀이다(빌 2:9-11). 이는 당신의 영광스런 계획이 결코 수정될 수 없음 같이 22, 23절의 저주 선언 역시 결단코 철회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내가 살아 있는 것. 보통 사람들이 맹세를 할 때에는 자신보다 탁월하고 불변하는 존재의 권위를 빌어 맹세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존재 위에 거하시는 최고의 권위자이기 때문에 어떤 약속과 맹세를 하실 때는 하위(下位)에 있는 어떤 대상을 두고 약속하실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은 다만 당신 스스로의 권위로 맹세하실 뿐이다(히 6:13-14). 그러므로 이는 유일신 여호와(스스로 있는 자, I am who I am.) 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한편 이처럼 하나님께서 당신 스스로를 두고 한 맹세는 결코 변경되거나 상쇄되지 않고 반드시 성취하신다.
여호와의 영광이 … 충만할 것. 백성들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창 12:1-3, 17:5-8) 당신의 나라 건설과 선민(選民)의 번영을 온전히 주도해 가심으로써 온 우주 가운데 당신의 영광이 충만할 것이라는 말씀이다(빌 2:9-11). 이는 당신의 영광스런 계획이 결코 수정될 수 없음 같이 22, 23절의 저주 선언 역시 결단코 철회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14:22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여기서 ‘10’은 ‘완전수’이다. 그런 점에서 ‘열 번’이란 숫자적으로 꼭 ‘10회’를 가리킨다기 보다는 백성들의 끝없는 반역을 강조한 표현이라 볼 수 있다. 한편 이스라엘이 국가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한 사건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즉 홍해 사건(출 14:11-12), 마라 사건(출 15:23-24), 신 광야 사건(출 16:2), 만나 사건(출 16:20, 27), 르비딤 사건(출 17:1-3), 금송아지 사건(출 32:1-6), 다베라 사건(11:1), 기브롯 핫다아와 사건(11:4-23), 가데스 바네아 사건(14장) 등이다(Keil & Delitzsch).
14:23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여호와의 주권을 인정치 않는 자, 그리고 그분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한 자들은 예외없이 약속된 기업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실로 불신앙이 빚어낸 비극적 결과이다.
14:24 오직 내 종 갈렙은. 20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중 오직 갈렙만이 가나안 입국을 허락받은 것은 아니다. 여기서 갈렙은 20세 이상으로 그 처벌 대상에서 면제된 자들을 대표하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갈렙이 일반 백성들의 신앙적 수준에서 가장 온전히 여호와를 의뢰한 자로 대표되기에 적합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갈렙은 여호수아(그는 모세의 뒤를 이어 전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특별한 위치에 있었다)를 비롯하여 아론과 엘르아살(수 14:1) 등 레위 지파(이들은 정탐꾼을 파견하지도 못했고, 또한 가나안 땅의 분배에서도 제외될 것이었다) 등의 다른 입국자들을 대표해서 언급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아직 가나안 입국 금지 선고가 내려지지 않았던(27:13-14) 모세의 경우도 지금은 ‘갈렙’이란 이름 안에 감추어진 입국자였다고 할 수 있다.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여기서 ‘온전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말레’는 ‘가득 채우다’, ‘충만하다’, ‘만족시키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결국 ‘온전히 따랐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만족하실 정도로 넉넉히 그분의 뜻에 순종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바로 이같은 순전하고도 능동적인 순종으로써(삼상 15:22) 이 일에는 용기와 결단이 요구된다(마 16:24). 그러나 거기에는 반드시 영광스런 결말이 따를 것이다(마 5:11-12). 그리고 후일 갈렙은 이 일을 자신의 긍지로 삼고 살아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수 14:8).
그 땅을 차지하리라. 수 14:6-15에서 온전히 성취되었다.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여기서 ‘온전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말레’는 ‘가득 채우다’, ‘충만하다’, ‘만족시키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결국 ‘온전히 따랐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만족하실 정도로 넉넉히 그분의 뜻에 순종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바로 이같은 순전하고도 능동적인 순종으로써(삼상 15:22) 이 일에는 용기와 결단이 요구된다(마 16:24). 그러나 거기에는 반드시 영광스런 결말이 따를 것이다(마 5:11-12). 그리고 후일 갈렙은 이 일을 자신의 긍지로 삼고 살아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수 14:8).
그 땅을 차지하리라. 수 14:6-15에서 온전히 성취되었다.
14:25 골짜기. 이 골짜기는 팔레스타인의 남방 사막 지대(Negeb)를 일부 포함하고 있는 아모리 산지의 접경 지역, 곧 오늘날 ‘와디무레’(Wady Murreh) 골짜기를 가리킨다(Keil & Delitzsch).
돌이켜 홍해 길을 따라 광야로. 약속의 땅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다. 그들은 가나안을 눈 앞에 두고 ‘돌이켜’ 홍해로 나 있는 길(출 13:18)을 따라 다시 ‘시내 광야’로 들어가야 했다. 이제 그들은 아무 목표없이 그저 광야를 방황하는 초라한 유랑 민족의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다. 목표없는 삶이 무의미하듯 목적지 없이 방황하며 오직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려야 했던 그들은 이제 지옥의 나날을 보내게 될 것이었다. 이는 불신앙의 결과가 얼마나 처참한 지를 똑똑히 보여 준다.
돌이켜 홍해 길을 따라 광야로. 약속의 땅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다. 그들은 가나안을 눈 앞에 두고 ‘돌이켜’ 홍해로 나 있는 길(출 13:18)을 따라 다시 ‘시내 광야’로 들어가야 했다. 이제 그들은 아무 목표없이 그저 광야를 방황하는 초라한 유랑 민족의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다. 목표없는 삶이 무의미하듯 목적지 없이 방황하며 오직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려야 했던 그들은 이제 지옥의 나날을 보내게 될 것이었다. 이는 불신앙의 결과가 얼마나 처참한 지를 똑똑히 보여 준다.
14:26 26-35절. 이 부분은 이곳 가데스 바네아 사건으로 인해 향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까지 소요될 38년간의 광야 생활 및 그 광야 생활 중 받게 될 징계의 원인과 그 징계의 세부적 사항을 다루고 있다.
14:27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직역하면 ‘내가 언제까지?’이다. 거듭거듭 불평과 원망을 일삼는 이스라엘의 완악함이 극에 달했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애틋한 심정이 짧은 말 속에 잘 응축되어 있다.
14:28 내 삶을 두고. 직역하면 ‘내가 살아 있는 것처럼’이다. 21절 주석 참조.
내 귀에 들린 대로 … 행하리니.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혈기를 따라 지껄인 2절의 말(“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대로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광야에서’ 그들을 죽이시기로 결정하셨다는 뜻이다. 즉 백성들은 자신들의 불신앙과 그로 인한 망발(妄發)을 하나님 앞에서 책임져야 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진리는 다음과 같다. 인간의 혀는 자신의 생사(生死)를 가늠하는 척도이며(잠 18:20-21, 약 3:5-8),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범하지 않은 죄에 대해서 징계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해서만 심판하신다(마 25:40, 45, 46, 고후 5:10).
내 귀에 들린 대로 … 행하리니.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혈기를 따라 지껄인 2절의 말(“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대로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광야에서’ 그들을 죽이시기로 결정하셨다는 뜻이다. 즉 백성들은 자신들의 불신앙과 그로 인한 망발(妄發)을 하나님 앞에서 책임져야 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진리는 다음과 같다. 인간의 혀는 자신의 생사(生死)를 가늠하는 척도이며(잠 18:20-21, 약 3:5-8),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범하지 않은 죄에 대해서 징계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해서만 심판하신다(마 25:40, 45, 46, 고후 5:10).
14:29 이십 세 이상으로. 이는 가데스 거역 사건의 책임자 범위에 관한 내용이다. 즉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한 전쟁을 수행할 만한 나이로 계수된 자 곧 육체적, 정신적으로 성숙한 나이인 20세 이상(1:3) 된 사람들에게 불신앙의 첵임을 물어 광야에서 죽게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호와의 군대 구성원으로서 죄악된 이방 세력과 싸워야 했음에도,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분의 약속을 멸시함으로써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였기 때문이다.
14:30 갈렙과 … 여호수아 외에는. 24절 주석 참조.
살게게 하리라 한. 원문에 가깝게 번역하면 ‘정착시켜 주겠다고 손들어 맹세한’(공동번역)이 된다. 이 말을 통해 한 가지 의문시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맹세하신 것을 스스로 파기하시는 변화 무쌍한 존재이신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 불변하신 분으로서 당신의 계획을 결코 변개(變改)치 않으신다(삼상 15:29, 약 1:17). 그러므로 하나님은 비록 불평하는 자들은 광야에서 죽이실 것이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을 위시한 20세 미만의 새 세대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들이실 것이다. 결국 20세 이상 된 자들이 가나안에 입국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변덕이나 심술 때문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의 죄악 때문이었다.
살게게 하리라 한. 원문에 가깝게 번역하면 ‘정착시켜 주겠다고 손들어 맹세한’(공동번역)이 된다. 이 말을 통해 한 가지 의문시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맹세하신 것을 스스로 파기하시는 변화 무쌍한 존재이신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 불변하신 분으로서 당신의 계획을 결코 변개(變改)치 않으신다(삼상 15:29, 약 1:17). 그러므로 하나님은 비록 불평하는 자들은 광야에서 죽이실 것이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을 위시한 20세 미만의 새 세대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들이실 것이다. 결국 20세 이상 된 자들이 가나안에 입국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변덕이나 심술 때문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의 죄악 때문이었다.
14:31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여기서 유아(히, 타프)란 원래 ‘아장아장 걷다’는 의미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이 말이 20세 미만의 사람 모두를 지칭했다. 가데스 바네아의 불평, 불만자들은 이들을 핑계로(3절) 가나안 정복을 반대했으나, 하나님은 바로 이들을 보존하시기로 결정하셨다. 아마 이들은 아직 육체적, 정신적으로 미숙하여 여호와의 군대 구성원이 될 수 없었고, 따라서 가나안 정복 전쟁에 참여해야 할 책임이 부여되지 않았기 때문에 형벌이 모면된 것 같다. 하지만 이들이 생존할 수 있었던 더 큰 이유는, 이들을 통해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반드시 만 20세가 되지 않은 자라고 해서 모두 불평, 불만을 하지 않은 자라고 보는 것은 무리이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본질상 죄 아래 놓여 있다(엡 2:1).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지 않고는 누구도 생존할 수 없다.
14:32 엎드러질 것이요. ‘엎드러지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팔’은 ‘허물어지다’(fall down), ‘내던져지다’(throw down), ‘사라지다’(perish)등의 뜻이다. 즉 가데스 바네아의 거역자들은 하나님의 형벌로 광야에서 소망 없이 하나 둘씩 스러져 갈 것임을 암시한다. 참고 또 참으시는 하나님의 인내와, 베풀고 또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만홀히 여기는 자의 종국을 잘 보여 준다(갈 6:7). 전체 200만 이스라엘 인구 중 20세 이상 된 남자와 여자의 수효를 대략 120만명으로 산정한다면, 38년(13,870일) 기간 동안에 매일 80-90명이 죽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의 징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불순종의 죄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끼도록 하기에 족하였다.
14:33 너희의 자녀들은 너희의 반역한 죄를 지고. 여기서 ‘반역한 죄’(히, 누테켐)란 ‘간음’ 또는 ‘우상 숭배’를 뜻하는 말인 바(출 34:16), 본문의 기자(記者)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평하고 자신들의 고집을 내세운 것을 ‘영적 간음’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이런 죄를 범한 자의 자녀들은 그 부모의 영향을 받아 광야에서 40년동안 영적 고통 뿐 아니라 육체적 고통도 감수해야 했다. 부모가 자녀의 생명을 좌우 할 수는 없으나, 그 생활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출 20:5-6).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 직역하면 ‘목자들이 되리라’이다. 카일(Keil)은 이 해석을 받아들여 ‘휴식이 전혀 없는 (광야의) 목자 생활을 하리라’는 의미로 이해했다. 즉 끝 없는 방랑으로 피곤한 삶을 살 것이라는 뜻이다.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 직역하면 ‘목자들이 되리라’이다. 카일(Keil)은 이 해석을 받아들여 ‘휴식이 전혀 없는 (광야의) 목자 생활을 하리라’는 의미로 이해했다. 즉 끝 없는 방랑으로 피곤한 삶을 살 것이라는 뜻이다.
14:34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하나님께서 형벌로 내린 40년 광야 유랑 생활의 산술적 근거가 제시되었다. 특별히 여기서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유랑 기간을 친히 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확히 계산하면,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본격적으로 유랑한 기간은 시내 산의 인구 계수 시기(출애굽 제2년 2월 1일)로부터 아론의 죽음(출애굽 제40년 5월 1일) 후 새 인구 조사 시기까지 대략 38년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출애굽 직후부터 하나님을 거역하기 시작하여 시내 산의 인구조사가 있기까지 이미 1년 이상을 거역과 불평의 세월로 보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미상 그 기간도 방랑의 기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Pulpit Commentary). 그리고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일시에 죽이지 않고 40년 간의 기간에 걸쳐 그들을 징계하신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백성들에게 스스로를 반성하며 죄악의 비참한 결과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고 (2) 또한 20세 미만의 새 세대가 구 세대를 이어 하나님의 거룩한 임무를 맡을 수 있는 성숙함에 이를 때까지의 기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격렬한 심판의 와중에서도 당신의 백성을 향한 긍휼과 사랑을 잊지 않으신다(합 3:2).
내가 싫어하면. 여기서 ‘싫어하다’(히, 테누아티)는 ‘거절하다’, ‘낙담시키다’는 의미로서, 계속적인 이스라엘의 거역과 불평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실망하시고 더 이상 은혜 베푸시기를 그친 것을 가리킨다. 이처럼 인간의 죄는 위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내가 싫어하면. 여기서 ‘싫어하다’(히, 테누아티)는 ‘거절하다’, ‘낙담시키다’는 의미로서, 계속적인 이스라엘의 거역과 불평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실망하시고 더 이상 은혜 베푸시기를 그친 것을 가리킨다. 이처럼 인간의 죄는 위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14:36 그 땅을 악평하여 … 원망하게 한 사람. 곧 13:4-15절에 언급된 12명의 각 지파 정탐꾼 중에서 유다 지파 갈렙과 에브라임 지파 호세아(여호수아)를 제외한 나머지 10명의 정탐꾼들을 가리킨다(이들의 목록에 대하여는 13:4-15를 참조하라).
14:37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 백성을 충동질하여 온 이스라엘에 불신과 불평을 주입한 10정탐꾼들은 ‘여호와 앞에서’, 곧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분명히 보아 확인할 수 있는 어떤 공개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징벌을 받아 처참한 죽음을 맛보아야 했다. 이는 거룩한 공동체에 범죄를 유포시키는 죄가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똑똑히 보여 주는 한 예이다(고전 10:10).
14:38 여호수아와 … 갈렙. 이 두 믿음의 용사는 후일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도 지대한 공헌을 세운다. 즉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가 되어 가나안 정복 전쟁을 총지휘하는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고, 갈렙은 가나안 족속 중 가장 강력한 족속인 아낙 자손을 물리치는 용맹한 업적을 이룩했다. 실로 여호수아와 갈렙의 믿음 앞에서 가나안 족속은 그들의 먹이가 되었다(9절).
14:39 모세가 이 말로. ‘이 말’이란 26-35절에 기록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 내용을 가리킨다.
백성이 크게 슬퍼하여. 백성들의 때 늦은 한탄이다. 이 때 늦은 후회는 여호와의 극렬한 분노를 어찌할 수 없었으며, 비록 죄 용서(20절)는 받았으나 쓰디쓴 죄의 열매(32-33절)는 스스로 감내해야 했다. 그러므로 회개에는 그 때와 기한이 있는 법이다(고후 6:1-2, 히 12:17).
백성이 크게 슬퍼하여. 백성들의 때 늦은 한탄이다. 이 때 늦은 후회는 여호와의 극렬한 분노를 어찌할 수 없었으며, 비록 죄 용서(20절)는 받았으나 쓰디쓴 죄의 열매(32-33절)는 스스로 감내해야 했다. 그러므로 회개에는 그 때와 기한이 있는 법이다(고후 6:1-2, 히 12:17).
14:40 산 꼭대기로 올라가며. 이 산은 가데스 근처의 호르 산이다. 이 산은 가나안 남쪽 경계선을 이룬다. 그리고 이 산지에는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거하고 있었다(25절).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이곳을 오른 것은 그 원주민을 정복하기 위함이었다. 즉 이스라엘은 이곳을 점령함으로써 그들이 ‘산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왕상 20:28), 그 하나님께 순종하겠다는 결의를 보이고자 했다. 그러나 이 같은 결행은 광야로 나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25절)을 또 다시 거부한 것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더욱 크게 살 뿐이었다. 실로 범죄자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과실을 보상하기 위한 인간적인 노력이나 변명보다 진실된 참회와 순종이다.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곳. 아브라함 때로부터 거듭 약속되어져 온 가나안 땅을 가리킨다(창 15:16-21).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곳. 아브라함 때로부터 거듭 약속되어져 온 가나안 땅을 가리킨다(창 15:16-21).
14:42 패할까 하노라. 직역하면 ‘패하지 않도록’이다. 전쟁의 주관자(삼상 17:47)이신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패배를 자초하는 일이다. 한편 하나님께서 그들과 동행치 않은 이유는 그들이 ‘여호와를 배반하였기’(43절) 때문이다. 즉 그들은 여호와를 따르는 일을 거부하고, 자신의 추악한 감정의 노예가 됨으로써, 그들의 왕이신 하나님을 그들의 삶 속에서 몰아내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이스라엘에게 시급한 것은 전쟁 수행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회복하는 일이었다.
14:43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너희 앞에 있으니. 아말렉 족속은 에돔 족속으로부터 갈라져 나와(창 36:12), 시내 반도를 중심으로 그 세력을 뻗치며 유랑하던 강력한 유목민들이었다. 그리고 모세 당시에는 이 족속이 가나안 족속과 동맹 관계를 맺은 상태에서 가나안 남방 지경에 거주하고 있었다.
14:44 그들이 그래도 … 올라갔고. 모세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출전 금지 명령을 끝내 청종치 않고, 자신들의 그릇된 열심이 마치 하나님을 섬기는 최선의 방법이라도 되는 양 이스라엘은 막무가내로 서둘러 금지된 땅으로 올라갔다. 특히 ‘그래도’란 말은 백성들의 의지적인 불순종과 불신앙이 최고조에 달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하나님을 제외시켜버린 종교적 열심은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온다(사 1:10-17).
언약궤와 모세는 진영을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이는 모든 백성이 산에 오른 것이 아니며 일부분은 산 아래 머물러 있었음을 시사한다. 더욱이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산 아래 있었던 사실은 여호와께서 산에 오르는 자 가운데 함께 계시지 않았음을 시각적(視覺的)으로 보여 준다. 하나님(언약궤)을 앞세우지 않고(10:33), 자신의 고집과 주장을 하나님의 권위 위에 둔 자에게는 패망만 따를 뿐이다.
언약궤와 모세는 진영을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이는 모든 백성이 산에 오른 것이 아니며 일부분은 산 아래 머물러 있었음을 시사한다. 더욱이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산 아래 있었던 사실은 여호와께서 산에 오르는 자 가운데 함께 계시지 않았음을 시각적(視覺的)으로 보여 준다. 하나님(언약궤)을 앞세우지 않고(10:33), 자신의 고집과 주장을 하나님의 권위 위에 둔 자에게는 패망만 따를 뿐이다.
14:45 내려와 그들을 무찌르고. 이스라엘의 어리석은 고집은 그들의 치욕적이고도 철저한 패배로 끝났다(신 1:44). 이 패배는 출애굽 후 이스라엘이 최초로 겪은 것이다. 한편 이때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징계코자 사용하신 심판의 도구라 할 수 있다.
호르마까지 이르렀더라. ‘저주’라는 뜻의 ‘호르마’는 가데스 부근의 한 장소이다. 비록 이곳은 훗날 이스라엘이 재탈환하여(21:3, 수 12:14, 삿 1:17) 시므온 지파에게 분배하였지만(수 19:4), 가나안 정복의 첫 교전이라 할 수 있는 이곳에서의 패배로 가나안 주변 국가들은 이스라엘을 깔보고 무시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하나님의 명령과 인도를 거부한 자는 세상으로부터 치욕과 멸시를 당하게 된다(마 5:13-14).
호르마까지 이르렀더라. ‘저주’라는 뜻의 ‘호르마’는 가데스 부근의 한 장소이다. 비록 이곳은 훗날 이스라엘이 재탈환하여(21:3, 수 12:14, 삿 1:17) 시므온 지파에게 분배하였지만(수 19:4), 가나안 정복의 첫 교전이라 할 수 있는 이곳에서의 패배로 가나안 주변 국가들은 이스라엘을 깔보고 무시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하나님의 명령과 인도를 거부한 자는 세상으로부터 치욕과 멸시를 당하게 된다(마 5: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