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구스’를 ‘미디안’과 동일시하여(합 3:7) ‘구스 여자’는 모세의 본처인 ‘십보라’(출 2:21)를 가리킨다는 견해이다(Calvin, Knobel).
(2) 모세가 그의 아내 십보라의 사망 후 재혼하였는데, 바로 그 새 아내가 ‘구스 여자’였다는 견해이다(Michaelis, Keil, Ewald). 유대 전승도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즉 모세는 출애굽시 함께 탈출해 나온 잡족 가운데 한 여인을 후취(後娶)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 역사사가 요세푸스는 이 여인이 에디오피아의 공주였다고 전한다(Antiquities II. 10. 2). 이에 대하여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Keil & Delitzsch). 즉 ‘그것은 율법에 표현된 바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평등 사상 및 친교관계를 직접 나타내 보여 주고자 했기 때문이다’(Baumgarten). ‘그것은 미래에 이루어질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복된 연합 관계를 본보기로 보여 주고자 했기 때문이다’(Gerlach).
위의 견해 중 (2)번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① 본서의 기록자 모세가 자신의 아내 십보라에 대해 ‘구스 여자’라고 그처럼 불명확하게 언급했을 리 없으며, ② 모세가 소명을 받기 전(前) 도피 생활에서 결혼한 모세의 아내를 놓고 미리암과 아론이 문제 제기를 했을 리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엘렌 지 화잇은 (1)번의 견해를 지지한다.
“구스여자(민 12:1)로 불리웠지만 모세의 아내는 미디안 사람이었으므로 곧 아브라함의 후손이었다. 그 여자는 외모에 있어서 살빛이 다소 검은 점에서 히브리 사람들과 달랐다. 십보라는 비록 이스라엘 사람은 아니었으나 참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었다”(부조와 선지자, 383).
미리암과 아론이 … 비방하니라. 원문에서 강조하는 바는 ‘미리암’이 모세 비방을 주도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첫째, 미리암의 이름이 이스라엘의 제사를 집례하는 대제사장 아론의 이름보다 앞서 기록되었기 때문이며, 둘째, ‘비방하니라’(히, 테다베르)는 말의 동사가 여성형 주어를 취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리고 셋째, 이 사건에 대하여 미리암만 징계를 받아 온 이스라엘의 앞에서 수치를 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번 사건은 미리암이 적극 주도하고 아론이 이에 소극적으로 동조한 것 같다(Keil, Pulpit Commentary, Lange). 한편 그들이 모세의 결혼을 두고 비방거리로 삼은 동기에 대해 추론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이방인과의 결혼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린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침묵하시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영적 순수성 보존을 위해 가나안 7족속과의 통혼을 금지하셨을 뿐(출 34:16, 신 7:1), 이방인과의 결혼을 아예 금지시키신 것은 아니었다(창 48:5, 롯 4:13-22). 또한 가나안 정복 당시와 에스라 9장, 그리고 느헤미야 13장에 강조된 이방인과의 결혼 금지는 그 결혼이 가져올 종교적 타락(우상 숭배)과 도덕적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2) 선민(選民)으로서의 민족적 우월성과 배타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은 그 종교적 자긍심보다 그 육신적 우월 의식에 사로잡힐 때마다 질책을 면치 못했다(Kurtz). (3) 그 무엇보다 가장 근본적인 동기는 모세의 탁월한 지위에 대한 그들의 교만한 질투심 때문이었다(2절). 그러므로 그들은 실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는 경구를 깊이 깨달아야 했다.
여호와께서 … 들으셨더라. 이는 인간의 행동과 사고 전체를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강조한 표현인 동시에, 이 사건의 정확하고도 공정한 심판을 하시고자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나설실 것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즉 당시 모세의 ‘온유함’을 따라갈 자가 아무도 없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모세 스스로를 치켜세우는 교만한 표현이 아니라, 그 당시의 정황을 객관성 있게, 그리고 모세의 심적 고통을 깊이 있게 다룬 표현이다. 그러나 비평 학자들은 본 절의 표현을 근거로, 본서 및 오경의 저자를 모세로 보지 않고 후대 기록자에 의한 삽입문이라 본다. 그렇지만 고대의 저작 속에 필자가 자신을 객관화시켜 묘사한 작품은 허다하다(Josephus, Xenophon). 아니면 모세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대필(代筆)케 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H. E. Freeman). 여하튼 이러한 사실에 대해 칼메트(Calmet)의 다음의 말은 음미할 만하다. ‘여기서 모세가 아무런 교만의 마음 없이 자신을 칭찬한 것처럼, 다른 곳에서는 아무런 위선의 마음 없이 또한 자신을 질책할 것이다’(Kiel & Delitzsch).
세 사람은 회막으로. 회막(會幕)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친히 만나시는 장소로서 곧 이스라엘 통치의 중심이었다(17:4, 출 29:42-43). 한편 이곳으로 3인을 부르신 것은 그들 사이에 진행된 비방 문제를 판결하기 위함이었다. 혹자(Lange)는 이 일 이후부터 회막의 앞뜰에 여인들의 출입이 가능해졌다고 한다(5절).
장막 문에 서시고. 모세를 비방했던 미리암과 아론이 나아오자 구름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께서 ‘장막 문’ 곧 ‘회막 뜰 입구’에 서셨다(레 8:3, 31, 33). 아마 이때 구름은 미리암과 아론 두 사람을 덮고 그 구름 속에서 여호와가 말씀하심으로써 당신의 현존(presence)을 밝히셨던 것 같다.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며. 직역하면 ‘만약 너희 가운데 여호와의 선지자가 있으면’이다. 이는 미리암과 아론의 직능이 ‘선지자’ 또는 ‘선지자적 역할’을 담당한 자라는 사실을 암사히는 표현이다. 한편,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에게 당신의 뜻을 계시하시는 방법 두 가지를 제시하셨다.
(1) 환상으로(히, 바마르아): ‘환상’(vision)이란 ‘보다’, ‘나타나다’, ‘제시하다’ 등의 뜻을 지닌 히브리어 ‘라아’에서 유래한 말로 곧 하나님께서 인간의 감각을 통하여 인지(認知)시키시는 초자연적인 광경을 가리킨다(창 46:2, 삼상 3:15, 겔 1:1).
(2) 꿈으로(히, 바할롬): 외부의 변화없이 인간 내면의 사고 작용과 감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시는 방법이다(창 20:6, 삼상 28:6, 단 2:4). 그러나 모세는 이러한 간접적이고 일방적인 방법으로 하나님과 교제한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상호 ‘하나님과 대면하는’ 영광을 부여 받았다.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직역하면 ‘외모를 보듯이 하고 수수께끼로 아니하며’이다. 즉 눈으로 보아 단번에 이해할 정도로 확실히 말하고, 이해할 수 없게 말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죄인된 인간은 그 누구도 하나님의 본체를 볼 수 없다(출 33:18-23, 딤전 6:16). 그러므로 여기서 ‘여호와의 형상’(תְמֻנַת יְהוָה 테무나트 야훼)이란 여호와의 본체를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또한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신 하나님(겔 1:26, 단 7:9), 또는 여호와의 사자(使者)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의 형상(창 16:7)과도 다르다(Keil).
여기서 ‘여호와의 형상’이란 당신의 영광의 실체를 가리킨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외형적으로 고유한 형상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여기서의 ‘형상’이란 출 33:11의 경우처럼 그의 위엄스럽고 영광스러운 임재의 가시적인 형태(form)를 나타낸다. 이는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에게 찾아오셔서 그와 만나시기 위해 사용하신 특수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본 절 전체에서 강조하고 있는 바는 모세의 직위와 역할은 다른 모든 선지자들 및 백성들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아무도 하나님께서 부여하시고 인정하신 모세의 권위를 시기하거나 비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미리암은 나병에 걸려. 그 당시 나병은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산 자들이 걸리는 천형(天刑)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치료되기까지 하나님의 임재의 거룩성이 미치는 진영에서 격리되어 생활해야 했다(레 13, 14장). 한편 여기서 나병의 증세가 ‘눈과 같이’ 희어졌다는 말은 그 병세가 상당히 악화(惡化)되었음을 나타낸다.
아론이 … 본즉. 당시 아론은 제사장으로서 나병을 판별해야 하는 직무를 갖고 있었다(레 13:2). 따라서 그는 미리암의 증세를 살폈을 것인데, 여기서는 그 증세의 완연함으로 인해 자세히 관찰할 필요도 없이 즉각 알아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 모세 비방에 가담한 아론에게는 나병이 발병하지 않았다는데, 그 이유는 다음 몇 가지로 추론해 볼 수 있다. (1) 그는 미리암의 충동질에 단지 동조했을 뿐이다. (2) 거룩한 제사를 집례하는 직책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 직책의 부정을 막기 위해 나병이 면제되었다. (3) 나병 발병은 교훈적인 성격의 징계로써 비방자의 대표인 미리암만으로도 충분했다. 따라서 구태여 대제사장 아론을 징계하지 않더라도 신적 권위자에 대한 질투가 가져다 주는 부정적 결과를 미리암을 통해 아론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었다(Matthew Henry’s Commentary, Pulpit Commentary).
벌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소서. 아론은 자신과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한 것(2절)이 악한 동기(질투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시인하고 자신들이 짊어져야 할 죄의 벌을 면제해 달라고 호소했다. 죄의 벌은 범죄자의 몫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면제될 수도 있다는 것이 그들의 신앙관이었기 때문이다(8:12, 레 4:4). 이는 책임 회피성 간구라기보다 자신의 죄악을 적절히 깨닫고 통회하는 자만이 요구할 수 있는 청원이다. 한편 구속사적으로 이 간구는 죄의 짐을 벗게 되는 놀라운 사실을 예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롬 5:8).
진영 밖에 이레 동안 가두고. 미리암의 범죄 대가는 극심한 나병으로 나타났고, 이에 따른 모세의 중보 기도 결과 그녀는 7일간의 수욕 기간을 거친 후 회복될 것이라는 응답을 받았다. 한편 여기서 ‘7’은 완전수로서, 결국 7일간의 격리는 (1) 범죄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완전히 차단하고야 만다는 사실과 (2) 완전한 참회를 통하여 비로소 회복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한편 나병이 완쾌될 경우 정결 의식을 거친 후 비로소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으로 활동할 수 있었는데, 본문에는 언급이 없지만 7일 후 미리암도 이 정결례를 치룬 후 진영에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레 14: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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