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유대 랍비들의 전승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네 군단(軍團) 깃발의 문장(紋章)과 색깔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1) 동쪽 유다 진영을 대표한 기는 웅크린 사자의 모습이 그려진 녹색기였다. 여기서 사자의 모습은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라고 한 야곱의 예언을 반영한 것이고(창 49:9), 녹색기는 판결 흉패의 12색깔 중 유다 지파를 상징하는 ‘녹주옥’을 반영한 것이다(출 28:17). (2) 남쪽 르우벤 진영의 기는 사람의 얼굴이 그려진 홍색기였다. 이는 르우벤이 장자로서 가족의 머리였기 때문인 것 같다(창 49:3). (3) 서쪽 에브라임 진영의 기는 송아지 형상이 그려진 황색기였다. 이것은 요셉이 해몽한 바로의 꿈에 나타났던 소를 연상시킨다(창 41:1-4). (4) 북쪽 단 진영의 기는 독수리가 새겨진 백색과 홍색이 섞인 기였다. 이는 뱀으로 묘사된 단(창 49:17)이 이를 싫어하여 뱀의 천적인 독수리를 채택했기 때문이라 한다. 그리고 그 깃발의 색깔은 판결 흉패의 ‘벽옥’ 색깔을 반영한 것이다(Keil & Delitzsch).
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러한 그들의 전승 근거는 다음 두 가지 사실에 기초한 것이다. (1) 문장은 야곱의 임종시 예언(창 49:1-27)에 기초한 것이고, (2) 색깔은 대제사장의 판결 흉패의 색깔(출 28:15-21)에 기초한 것이다. 한편 유대 랍비들은 이러한 네 군단의 문장(紋章, crest)은 후일 에스겔의 환상 속에서도 분명히 확증된다고 한다(겔 1:10). 그러므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네 지파의 깃발은 하나님을 옹위하고 있는 모든 피조계를 대표하는 4생물들의 모습과 일치한다(겔 1:4-14, 계 4:6-11). 또한 성막과 그 사면의 깃발들, 그리고 천국의 보좌와 보좌 주위의 4생물들의 관계를 유추해 보면, 실로 광야에 세워진 성막은 천국과 하나님 임재의 상징임이 더욱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광야의 진(陣) 배치는 오늘날 광야 같이 험악한 인생길을 걷고 있는 순례자들에게 소망을 주는 희망찬 메시지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늘 가나안을 향해 행군하는 신앙의 순례자들은 C. F. 버틀러의 찬송시처럼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노래하며 신앙의 행진을 계속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다윗도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았기에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일지라도 오히려 천국의 풍요와 안식을 체험할 수 있었다(시 23:1-6).
조상의 가문의 기호. 여기서 ‘기호’(히, 오트)란 ‘신호’, ‘표’, ‘표시’, ‘깃발’ 등을 가리킨다. 이것은 네 방향을 대표하는 네 지파의 ‘군기’(데겔)와는 달리 단순히 12지파 각 종족을 상징하는 깃발일 것이다(Keil). 그리고 각각의 ‘기호’에 배경을 이루는 색깔은 아마도 대제사장이 달았던 흉패 위에 박힌 12개 보석의 색깔과 동일할 것으로 추측된다(출 28:17-21).
회막을 향하여 사방으로 치라. 직역하면 ‘회막 주위로 마주 보라’는 뜻이다. 한편 KJV는’회막 주위에서 멀리 멀어져’(far off about the tabernacle)로, NIV와 공동번역은 ‘만남의 장막에서 조금 떨어져’(the Tent of Meeting some distance)라고 해석했는데 이는 수 3:4을 참조한 의역인 듯하다. 수 3:4에는 언약궤와 이스라엘 진과의 거리가 2000규빗(약 912m) 정도 떨어지도록 명령되고 있다. 그런데 RSV는 원문에 충실하게 ‘각 방면에서 회막을 마주하여’(facing the Tent of Meeting on every side)라고 번역하였다. 만일 이것이 옳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천막 입구는 회막을 향해 배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이스라엘은 항상 성막을 바라보며 그곳을 사모하고 특히 그곳에 임재해 계신 하나님을 공경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레 19:30, 단 6:10). 물론 ‘외인이 가까이 오면 죽임을 당하는’(1:51) 규례로 보아 회막과 주거지와의 거리는 어느정도 떨어져 있었을 것이다.
진영의 군기에 속한 자라. 즉 동쪽 방향을 대표하는 유다 진(陣) 기에 예속된 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표현은 종속적인 의미라기 보다 하나님께서 유다 지파에게 내린 지휘권에 자발적으로 순종함을 가리킨다. 실로 이스라엘은 여호와 단 한 분의 왕으로 족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지파 백성들은 각자의 인격과 지위를 인정해야 했으며 서로가 유기체적인 관계를 지닌 자들로서 서로를 섬기며 오직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데 힘써야 했다. 이런 점에서 출애굽 여정 중의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 ‘광야 교회’라 부를 수 있다(고전 12:4-31).
유다 자손의 지휘관은 … 나손. 하나님께서는 각 지파을 지도할 지휘관 한 명씩을 선출하셨다. 그런데 그 지도자들은 지난번 인구 조사 때 모세와 아론을 도와 실무를 담당했던 자들이었다. 즉 1:4-16 에 기록된 지파의 두령들이 2:3-31에서 지휘관으로 재임명 받은 것이다. 한편 개역개정 성경에서 지휘관이란 말로 표현될 수 있는 히브리어는 ‘알루프’, ‘나시’, ‘로쉬’, ‘사르’ 등이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창세기에는 ‘알루프’만이 쓰였고, 민수기에는 대부분 ‘나시’가 쓰였다. 본서에 자주 쓰인 ‘나시’는 ‘들어 올리다’, ‘다른 사람들의 머리 위에 올리다’ 등의 뜻인 ‘나사’에서 온 말이다. 그러므로 ‘지휘관’이란 말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 우두머리(prince, chief)로 높여진 자를 가리킨다. 즉 각 지파의 대표자로서 ‘하나님에 의해 들어 올려진 자’가 곧 지휘관이다. 이는 결국 지휘관의 권위가 하나남께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나타낸다(롬 13:1).
중앙에. 즉 ‘가운데’란 뜻이다. 이말은 이스라엘 중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위치를 묘사할 때 종종 사용되었다(왕상 6:13, 겔 37:28, 43:7, 슥 2:5, 8:3). 한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계신다는 사실은 다음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종교적 의미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면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도우신다는 뜻이다. (2) 정치적 의미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12지파의 단결을 이루는 구심점이요 통치의 중심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해 계실 때, 곧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 가운데 있을 때, 이스라엘은 승승장구하였다. 그러나 ‘이가봇’, 곧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을 때, 그들은 대적 앞에서 무기력하기만 했다(삼상 4:1-22). 이러한 원리는 오늘날 성도들의 삶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즉 하나님을 그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사는 자들은 그의능력을 체험하며 승리의 삶을 살게 된다(시 118:6, 7). 반면에 죄가 주장하는 삶을 사는 자들은 슬프고 무기력한 나날 속에서 신음할 수 밖에 없다(시 31:10, 32:3, 4). 그리고 한편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당신의 장막을 치셨다는 점에서 구원사(救援史)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self-revelation)를 발견하게 된다. 즉 하나님은 광야 시대에 성막 위에 머무르는 구름기둥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본체의 영광을 바라볼 수는 없었다. 그런데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는예수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써 자신의 영광을 확실히 계시하시게 되었다. 요 1:14에 기록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의 표현 중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헬, 에스케노센 엔 헤민)를 직역하면 ‘그가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다’가 된다. 이는 성막을 통해 모형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당신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직접 자신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은 우리 가운데 임마누엘(마 1:23)로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계시 중의 계시’이다. 그리고 이 계시는 마침내 우리들의 구원이 완성되는 날, 우리가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며 동거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 아래 영원토록 머물게 될 때 그 완연한 실체를 드러낼 것이다(계 7:15-17, 21:3, 4).
그들의 진 친 순서대로. 비록 상대할 적이 없고 지루한 광야 행군이라 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절실히 요구된 것은 ‘질서’였다. 하나님은 바로 이 질서 의식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께 대한 경외와 순종을 가르치기 원하셨던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혼돈과 무질서를 배격하시는 질서의 하나님이시다(고전 14 :33).
자기 위치에서. 직역하면 ‘그의 손에서’란 뜻이다. 이말은 ‘ … 다음으로’라는 의미도 지닌다(느 3:2). 여기서는 두 번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데, 곧 성막 주위에 진을 친 그대로 진행하라는 뜻이 아니고, 진을 쳤던 자리에서 차례대로(앞선 지파 다음으로) 출발하여 진행하라는 뜻이다(10:13-28).
앞으로 행진할지니라. 본 장의 ‘진행할지니라’(9, 16, 17, 24, 31절)는 말은 모두 여기서처럼 ‘앞으로 전진하라’는 뜻을 지닌다. 일례로 전진하지 않는 자전거는 곧 쓰러지고 만다. 마찬가지로 전진하지 않는 신앙 역시 똑같다. 그러므로 성경은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킨다”고 경고한다(잠 1 :32).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의 세력과 싸우기 위해 하나님의 군대로서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야 하며, 또한 승리의 시온 성에 들어가기 위해 순례자로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때로 우리의 앞길에 안개가 자욱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인도에 모든 것은 맡기는 자세로 믿음의 행진을 계속해야 한다(히 11:8).
진 치기도 … 행진하기도. 이 단순한 행동 속에 이스라엘 백성의 나머지 38년 간의 광야 생활이 함축되어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설정해 주신 행동의 규범을 따라 기나긴 광야 여정을 진행해 갈 수 있었다. 이는 오늘날 우리 성도들 역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땅에 거하는 동안 주의 말씀과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당위성과 필연성을 제공한다(시 119:105). 한편 유대 전승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전체 진 규모 면적은 12평방 마일(약 19,308 평방미터) 정도였다고 한다(Palestinian Targums).
다음은 정주할 때의 진 배치를 성막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지파의 이름을 남동서북 방향으로 3지파씩 설명한 것이다. 먼저 성막을 기준으로 동쪽에는 유다(74,600명), 잇사갈(54,400명), 스불론(57,400명)의 3지파, 서쪽에는 에브라임(40,500명), 므낫세(32,200명), 베냐민(35,400명)의 3지파, 남쪽에는 갓(45,650명), 시므온(59,300명), 르우벤(46,500명)의 3지파, 북쪽에는 납달리(53,400명), 아셀(41,500명), 단(62,700명)의 3지파씩 위치하였다.
다음은 진행할 때의 진 배치로 이스라엘 지파의 이름을 법궤을 선두로 하여 3지파씩 설명한 것이다. 맨 앞쪽 선두에는 법궤가 위치하였으며 그 다음으로는 유다 지파와 잇사갈 지파와 스불론 지파가, 그 다음으로는 성막부품을 운반하는 레위 지파의 게르손 자손과 므라리 자손이 위치하였으며, 그 다음으로는 르우벤 지파와 시므온 지파와 갓 지파가 위치하였으며, 그 다음으로는 성막기구를 운반하는 레위 지파의 고핫 자손이 위치하였으며, 그 다음으로는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와 베냐민 지파가 위치하였으며, 마지막으로 단 지파와 아셀 지파와 납달리 지파가 위치하였다.
위와 같이 정주할 때의 진영 모습과 행진할 때의 진영 모습이 다른 이유는 광야의 좁은 길을 무리없이 지나가기 위해서였다. 한편 학자들 중에는 정주 시에도 만일 넓은 장소가 없을 경우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이상적인 진영 배치를 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는 이도 있다(Pulpit Commentary).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성막이 이스라엘 진영의 중심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었다. 그만큼 성막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큰의미를 지녔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스라엘의 행군 시에 언약궤가 3일 길을 앞서 간 것은 특이하다(10:33). 이때, 평소 성막 위에 덮여있던 구름(출 40:34-38)은 언약궤 위에 머물렀다(10:34).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친히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뜻한다. 언약궤의 덮개, 즉 속죄소에 조각된 그룹 위에 뒤덮인 구름의 진행 방향이 곧 이스라엘의 진로로 결정되었다. 시 80:1은 바로 이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한편 언약궤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표하는 십계명 돌판이 들어 있었다(신 10:4). 그러므로 언약궤가 이스라엘을 앞서 간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고 살아야할 것을 교훈해 준다. 개혁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는 곳까지 가고 하나님의 말씀이 멈추는 곳에서 멈춘다’고 하는 말씀 추종의 삶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광야 같은 인생 여정에서 우리 발걸음을 비추는 등(燈)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시 119:105)이 우리를 안내하는 대로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가는 삶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시 119:32). 그리할 때 그 길의 결국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러한 말씀(법궤)의 인도를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살아간다면 무섭고 두려운 광야에서 헤매고, 허우적거리다가 마침내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은 죽음의 광야를 벗어나 생명의 길로 향하게 만드는 생의 나침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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