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저주하는 소리. 여기서 ‘저주’는 원어로 ‘알라’인데 ‘저주’의 뜻뿐만 아니라 ‘맹세’의 뜻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NKJV은 ‘맹세의 말(utterance of an oath)’로, 개역한글판은 ‘맹세시키는 소리’라고 번역하였다. 이것은 현재 판결 하고자 하는 범죄 사건에 대해 아는 사람에게 증인으로 하나님 앞에서 진실을 말하도록 요구하는 재판장의 엄숙한 ‘진술 요청’을 가리킨다. 따라서 증인의 입장에서 보면, 재판장의 이 말은 자신에게 맹세시키는 소리가 된다. 그러므로 재판장의 이 맹세시키는 소리를 듣고도 증인된 자가 자기의 보고 들은 바를 진술치 않을 경우, 그것은 그에게 죄가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묵비 행위로 말미암아 진실이 왜곡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법은 인간의 법과는 달리 인간 내면의 양심까지도 법으로 규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신본주의적 율법의 특징이다.
증인이 되어. 여기서 ‘증인’(에드)이란 다른 사람의 범죄를 눈으로 직접 목격했거나, 간접적인 경로를 통해서라도 그 사실을 알고 있어서, 재판장의 판결을 돕기 위해 법정에 출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 사회에서 이런 사람은 재판시 그 재판의 정확한 판결을 위해 보고 들은 바를 사실 그대로 증언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모세 율법 규정은 사건의 올바른 판결을 위해서 최소한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을 필요로 했다(민 35:30, 신 17:6, 19:15).
죄를 져야 할 것이요. 자신이 보고 들은 내용을 사실대로 진술할 경우 올바른 판결에 도움이 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러한 증인이 있으면 법정에 출두해 달라는 재판장의 요청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진실을 숨기는 자는 그 허물이 결국 자신에게 죄가 되어 되돌아 간다는 뜻이다(잠 29:24). 그러나 이러한 죄는 고범죄(故犯罪)로는 간주되지 않았고, 근본적으로 태만이나 두려움 등 인간의 연약함에서 비롯된 죄로 간주되어 속죄제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허물.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온’은 ‘굽다’(crook), ‘뒤틀리다’(pervert), ‘잘못하다’(do amiss)란 뜻의 ‘아와’에서 파생된 말로, 곧 ‘죄’(sin), ‘불의’(iniquity), ‘사악’(perversity)이란 뜻이다(삼하 3:8, 느 9:2, 욥 10:6, 시 59:4, 사 1:4, 렘 5:25).
5:2 부정한 들짐승. 짐승의 정(淨), 부정(不淨)에 대한 구체적인 구별은 11:1-47을 참조하라. 구약 시대 이러한 짐승의 정,부정 구별은 종교 의식상의 구별로서, 택한 백성을 부정한 것으로부터 분리시켜 거룩한 데로 나아가게 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외적 정결로부터 내적 정결로, 의식적 정결로부터 도덕적이고 영적인 정결로 숭화시키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고후 6:17-18, 살전 4:7).
또한 성경은 영적인 면과 신체적인 면을 분리하지 않는다. 부정의 법이 사람의 신체적인 건강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증거가 성경에서 다수 발견된다. 거룩함과 부정함은 인간 존재의 상반되는 두 국면을 가리킨다. 부정은 죽음의 영역에 속하며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외부 사물 중에서 시신(민 19:11), 동물의 사체(레 5:2), 피(레 15:19-20)와 닿으면 불결해진다. 그런 사람은 성소 및 다른 사람과 분리된다. 거룩함은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의 영역을 지칭한다. 거룩한 분과 접촉하는 일은 은혜의 선물이며 이스라엘이 영적·사회적·신체적 생명을 누릴 기회를 제공한다. 인간의 삶에 관한 성경적이고 전인적인 이해에서는 영적 건강과 신체의 건강을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부정한 … 사체를 만졌으면. 여기서 말하는 부정(不淨)이란 양심이나 도덕적 부정이 아니라, 종교 의식상(儀式上) 부정한 것을 말한다. 구약 시대에 부정한 짐승이나 가축, 혹은 곤충의 사체(死體)는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여기서 사체가 부정한 것으로 간주된 것은 아마 사체가 타락과 죄의 비극적 결과이기 때문일 것이다(창 3:19, 롬 6:23). 따라서 의식법상 이러한 부정한 것과 접촉된 자는 자신이 알았든 몰랐든 그 부정의 영향을 피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러한 자는 하나님께 속죄제를 드려 그 부정을 속함 받아야 했다. 이것은 택함받은 백성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을 본받아 부정의 상징이나 모양이라도 버려야 된다는 사실을 교훈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약 시대 사도 바울은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 :22)고 권면하고 있다.
또한 의식법에는 위생 원칙 또한 내재된 것으로 나타나는데, 몇 가지 예증을 들 수 있다. 시신이나 동물의 사체를 만지는 일이 금지되었다(레 17:15). 부정한 것과 접촉했을 때 심지어 아픈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 침을 뱉을 경우에도 물의 역할은 중요했다(레 15:7-8). 물은 전염병을 제거했다. 부정한 것이 퍼지지 못하도록 고립 혹은 격리도 실행되었다(민 31:21-24). 그 대상에는 특별한 질병이 포함되기도 했다(레 14:15, 15:26-27). 인간 배설물의 적절한 처리도 전염병의 방지와 악취 제거를 위해 법의 제재를 받았다(신 23:12-14).
부지중이라고 할지라도. 여기서 ‘부지중’이란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엘람’은 ‘감추다’, ‘숨기다’란 뜻의 ‘알람’에서 파생된 말이다. 따라서 ‘부지중’이란 말은 어떤 사람이 잘못을 범하였는데도 그것이 그에게 감추어져 있는 상태, 즉 본인이 그것을 미쳐 죄인 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무지(無知)의 상태를 가리킨다. 이것은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죄가 아직 죄로서 그에게 자각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처럼 잠복(潛伏)되어 있는 죄는 반드시 깨달아 속죄함 받아야만 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행여 하나님의 뜻을 잘 몰라 죄를 범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롬 12:2, 빌 1:10).
허물이 있을 것이요. ‘허물’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아온’은 ‘나쁘게 되다’, ‘굽은 길로 빗나가다’란 뜻의 기본 동사 ‘아와’에서 파생된 말로 곧 하나님의 율법에서 빗나가 굽은 길로 나아간 나쁜 것, 곧 “죄”(罪)를 가리킨다.
5:3 사람의 부정. 이것은 사람과 관련된 부정(不淨)을 가리키는 말로 곧 주검을 만지는 것(11:24, 31, 39), 출산하는 것(12:2-5), 나병 및 피부병에 걸리는 것(13:1-14:57), 유출병이 있는 것(15:1-15), 설정(泄精)하는 것(15:16-18), 월경하는 것(15:19-24), 혈루(血淚)하는 것(15:25-30) 등이다. 이러한 부정을 입은 자는 그 부정을 제거해야 할 책임이 뒤따른다. 물론 여기서의 ‘부정’은 도덕적인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 의식상의 부정으로서 선민의 내적 거룩성을 보존하기 위한 외적정결법을 교훈하기 위한 부정이다.
그것을 깨달을 때에는. 사람이 부정을 입고도 그것이 부정인 줄 깨닫지 못했을 때는 죄의식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정결법을 통하여 그것이 부정인 줄 깨달은 후에는 반드시, 그리고 신속히 그 부정을 속함 받아야 했다. 따라서 백성들은 부지런히 하나님의 율법을 배우고 익혀 무엇보다 먼저 죄를 죄로 바로 깨달아야만 했다.
5:4 악한 일이든지 선한 일이든지 하리라고. 곧 하나님 앞에서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맹세하는 모든 내용을 가리키는 말이다(Lange, Keil). 이는 ‘선악간”(善惡間)이란 말로도 표기된다(창 31:29, 민 24:13).
함부로 말하면.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바테’는 ‘거칠게 말하다’, ‘무모하게 말하다’, ‘함부로 지껄이다’란 뜻을 가진 기본 동사 ‘바타’에서 파생된 말이다. 따라서 이 말은 ‘경솔하게 함부로 맹세를 발설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그에게 허물(죄)이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거룩성에 누(累)를 끼쳤기 때문이다. 즉 구약 시대의 모든 맹세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모든 맹세는 하나님과의 약속으로 간주되어 그 맹세는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지켜져야 했다. 그러므로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순간적인 기분이나 흥분, 혈기 등으로 쉽게 맹세를 한다는 것은 여호와의 거룩한 이름을 경솔히 취급한 죄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고의적으로 여호와의 성호(聖號)를 모독하려 하지 않은 경우에는 인간적인 연약함이나 실수로 간주되어 속죄제를 드림으로써 속죄받을 수 있었다.
그 중 하나에 그에게 허물이 있을 것이니. 여기서 ‘그 중 하나’란 ‘악한 내용의 맹세든지, 혹은 선한 내용의 맹세일지라도 함부로 무모하게 맹세한 경우에’ 라는 의미이다. 그러한 경우, 맹세를 발설한 자는 하나님께 죄를 얻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전도서 기자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전 5:2)고 충고하였고 이어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 나으니”(전 5:5)라고 경고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후일 신약 시대에 이르러 그리스도께서 밝히 말씀하신 바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마 5:34)란 말로써 승화되어 나타난다.
5:5 이 중 하나. 즉 앞에 열거된(1-4절) 세 가지 유형의 죄악 중 하나란 뜻이다. 여기서 그 세 가지 유형의 죄란 다음과 같다. (1) 증인된 자로서 그 진술의 책임을 기피한 죄(1절), (2) 부지중 짐승이나 사람의 부정을 입은 죄(2-3절), (3) 무모하게 맹세한 죄(4절) 등이다.
허물. 이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솸’은 곧 하나님의 계명을 범한 ‘죄’를 가리킨다.
잘못하였노라 자복하고. 즉 자기가 무모하게 발설한 여러 맹세를 잊고 있다가, 그 중 하나라도 깨닫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는, 지체 없이 하나님께 스스로 고백하여야 한다는 뜻이다(시 51:4).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전, 인간은 반드시 먼저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달아야 된다는 사실과 그 죄를 하나님께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죄에 대한 진정한 자각과 자복이 없는 제사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 실로 죄에 대한 자각과 자복이야말로 사죄의 첫 단계인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1)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정당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요, (2) 또한 자신이 범한 죄에 대해서 겸손히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을 구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요일 1:9). 그리고 여기서 ‘자복하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힉트와다’는 ‘집어 던지다’(throw away), ‘바깥으로 내놓다’(cast out)란 뜻의 ’야다’에서 파생된 말로써, 곧 하나님 앞에 모든 죄를 다 털어 내어 놓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유대 전승 의하면, 이러한 고백은 죄를 범한 자가 그 죄를 속함 받고자 속죄제 제물을 드릴 때, 그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고 했다고 한다(Lange).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성소에 속죄제물을 가져왔을 때 실제로 자신들의 죄를 고백했는지에 관해서는 학자들도 논쟁한다. 모든 속죄제가 죄의 자복을 포함한다고 단언할 명확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성경의 몇 구절을 살펴보고 그 뜻을 알아보자.
▷ 죄의 자복과 희생제사 : 자복과 속죄제에 관한 첫 번째 언급은 레 5:5에 나타난다. 문맥을 보면 재판에서 증언해야 할 고의적인 범죄(1절), 정결 예식 수행의 지연(2-3절), 맹세의 지체(4절)를 위해 속죄하는 것이다. 민 5:7에서, 자복과 배상은 신성을 더럽혔다고 여겨지는 윤리적인 범죄에 요구되었다. 이것들은 반역적, 반항적인 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 죄들은 의도성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율례는 분명하게 죄인 편에서의 공개적인 인정을 요구한다.
마지막 경우는 레 16:21인데, 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자기의 손을 염소의 머리에 얹고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고백한다. 이것은 독특한 예식이며 그 염소는 희생제물로 드려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속죄제를 드릴 때 언제나 죄의 자복이 있었다는 사상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의문은 왜 속죄제를 취급하는 다른 구절들에서는 죄의 고백이 언급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레 4장). 아마도 레 5:5과 민 5:7에서 고백이 강조된 이유는 범한 죄의 고의적인 성격인 듯하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레 16:21의 고백에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우리는 속죄제를 다루는 다른 구절에서 고백이 빠진 것에 대해 명백한 이유를 모른다.
그러나 이런 본문에서의 고백 언급의 누락이 자동적으로 그런 고백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복 이면의 기본적인 신학 원칙은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이다. 틀림없이 이 원칙은 모든 속죄제에 적용되어 왔다.
▷ 희생제사, 소리 말 : 시편은 성전 예식에 소리와 말이 함께 했다고 말한다. 학대로부터 구원받은 후에 예배자는 이같이 말한다.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시 27:6). 화목제에 관한 구절들은 말을 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러나 시 54:6에 따르면, 거기에는 여호와를 찬양하는 일이 함께 있었다. 감사제를 드릴 때, 사람들은 “노래하며 그의 행하신 일을 선포”(시 107:21-22, 레 7:12)하도록 열렬하게 권고받았다. 즐거운 의식을 행할 때, 이렇게 찬양이 있었기에, 죄를 고백하고, 희생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고 복을 받은 채 집으로 돌아가는 회개한 죄인들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시 24:5, 32:1-2, 5, 7, 11). 시편 기록자들은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51:3-5), 하나님의 정결케 하심을 구하고(7, 10절) 자신이 드린 희생의 무가치함을 인식하고(16절), 종국에는 희생제사가 상한 심령의 물리적 구현일 때, 하나님께서 그 희생제사를 받아들인다고 인정한다(17-19절). 속죄제가 전혀 아무 말도 없이 드려졌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 자복의 의미 : 죄인들은 자복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범했고 참으로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인정했다(레 16:21). 또 그들은 죄를 자복하고 버림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찾을 수 있음을 알고 있다(잠 28:13). 성경에서 자복은 언약의 갱신과 연관이 있다(느 5:5-37, 10:18-19). 이것은 속죄제를 드릴 때의 자복을 언급한다. 다시 말해 여호와로 말미암은 죄의 용서는 깨어진 관계의 회복을 의미했다(출 34:1-10). 회개한 죄인들은 여호와 앞에서 그분께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며 자신이 죄를 범한 사람에게 화해를 요청했다.
따라서 고백이 두드러지게 강조되어 있는 구절들에서는, 무엇보다 밝혀져야 할 고의적인 죄들을 주로 다루고 강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일반적인 속죄제에 자복이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고백이 없었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화목제의 경우 아무런 언어적 표현이 요구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본 대로 그 제사들에도 말로 표현하는 일이 함께 있었다.
5:6 여호와께 속죄제를 드리되. 여기에 언급된 속죄제는 개역한글판, 바른성경 등에서는 ‘속건제’로 번역하였다. 이것은 본 장 14절 이하로부터 6:7까지 나오는 본격적인 속건제(아솸)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께 대한 범과에 대해 자신이 책임을 지고 그 대가로 속죄의 예물을 드린다는 뜻으로 이 말을 사용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속죄제와 속건제를 엄밀히 구별하기란 매우 힘들다.
양 떼의 암컷 어린 양이나 염소. 이 예물은 속죄제에서 평민이 범죄하였을 경우 그 범죄를 속함 받기 위해 드리는 속죄 예물과 같다(4:28, 32). 그런데 만약 본 절이 속건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경우였다면, 이때의 예물로는 흠 없는 양의 ‘수컷’이라야만 했을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본 절은 4:1로부터 5:13까지 이어지는 속죄제 규례에 관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제사장은 … 속죄할지니라. 속죄를 위한 제사 방법 및 절차는 아마 평민을 위한 속죄제(4:27-35) 때와 같았을 것이다(Lange). 한편 ‘속죄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파르’는 ‘덮다’(cover), ‘취소하다’(cancel), ‘달래다’(placate)란 뜻이다. 따라서 ‘속죄’란 말은 희생제물의 피로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를 달래며, 또한 덮어 가리우는 것을 말한다.
5:7 힘. 여기서 힘’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야드’는 본래 ‘손’(hand)이란 뜻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손’은 종종 ‘능력’이나 ‘형편’ 등을 나타낸다(창 49:24, 출 3:19, 민 35:25, 느 6:9).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 범과(죄)를 깨닫고 그것을 속함 받기 원하되, 형편이 가난하여 어린 양이나 염소를 바칠만한 능력이 없는 자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로도 속죄제 예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 수 있었다. 이러한 예물은 구하기가 수월했을 뿐 아니라 가격도 쌌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부담없이 구할 수 있었다. 이처럼 속죄 예물로서 새 종류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은 분명하다. 즉 (1) 죄 용서함 받는 일에는 결코 빈부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었고(Matthew Henry), (2)속죄의 의미는 결코 제물의 가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제물의 피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하나는 속죄제물 … 하나는 번제물. 새 두 마리 중 먼저 한 마리로 속죄제물을 삼아 죄 용서함을 받음으로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해야 했다. 그런 후, 그 죄 용서 받음에 대한 감사 및 헌신의 표시로 남은 한 마리의 새로 번제물을 삼았다(Talmud, Matthew Henry).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제사가 합하여 비로소 완전한 속죄제가 되었다(Lange). 이것은 속죄제가 비단 죄 용서함 받는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헌신의 단계에까지 이르는 것을 뜻한다.
5:8 범죄자의 범과를 속함 받기 위해 속죄제물로 드려진 새의 처리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제사장은 그 새의 머리를 비틀어 끊고, 흐르는 피를 번제단 곁에 흔들어 뿌려야 했다. 다음으로 제사장은 뿌리고 남은 피를 속죄제의 일반적인 특징을 따라 번제단 밑에 모조리 짜 흘려야 했다. 한편, 번제 제물로 드려진 또 다른 새의 처리법은 일반 번제의 규례대로 행하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1:14-17의 주석을 참조하라.
머리를 … 비틀어 끊고. 1:15주석 참조.
몸은 아주 쪼개지 말며. 1:17 주석 참조.
5:9 피를 … 뿌리고 … 흘릴지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는 일반 제사 원리에 근거하여, 특히 죄 사함 받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속죄제에서는 반드시 피가 요구되었다. 속죄의 제단 위에서 흘려지는 이 피는 장차 온 인류의 죄를 대속키 위하여 십자가 상에서 흘려질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하고 예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속죄를 위해서는 반드시 피가 필요했으며, 또한 피가 있는 곳에는 은총의 속죄가 반드시 있었다.
5:10 규례대로 번제를 드릴지니. 속죄제를 위해 바쳐진 두 마리의 비둘기는 각각 속죄제물과 번제 제물로 바쳐야 했다. 그 중 번제 제물로 바쳐야 하는 새의 처리법은 일반 번제 규례와 같았다. 즉 멱통과 더러운 것(깃털)은 제하고 피는 단 곁에 흘린 후 몸통 부분만을 반쯤 열어 젖힌 다음 그것을 제단 위에 온전히 화제로 불살랐다(1:14-17).
5:11 산비둘기 … 집비들기. 1:14 주석 참조.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예물로. ‘에바”(Ephah)는 구약 시대 부피의 고체량 단위로서 1에바는 약 23리터이다. 따라서 에바 십분의 일은 약 2.3리터 가량 되는 양이다. 한편 속죄제는 죄 사함 받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제사이므로 죄 사함에는 피가 반드시 요구된다는 원리(17:11, 히 9:22)에 입각하여 원칙적으로 속죄제물은 피 흘릴 수 있는 가축이라야 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극빈자의 경우, 피가 들어 있지 않는 가루를 속죄제물로 허용하신 것은 가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크신 배려와 긍휼의 반영이다. 그러나 고운 가루는 그 자체로서 속죄제물로서의 독립적인 제물의 자격을 갖추고 있지는 않았다(Gispen). 다만 가축을 대신하여 허용된 것 뿐이다. 따라서 속죄제물용 고운 가루는 반드시 매일 번제단 위에서 불타고 있었던 상번제물(常番祭物) 위에 놓여져 그 제물이 흘린 피와 더불어 속죄제로 불살라져야 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세우신 피제사의 원리를 지키시되 문자적인 자구(字句)에 얽매이시지 않으시고, 항상 가난한 자와 연약한 자들의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사 그들 역시 죄 용서함 받기 위해 당신께 나아오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도록 배려하셨다.
이는 속죄제인즉 … 유향을 놓지 말고. 속죄제는 하나님께 범죄한 자가 그 죄를 속함받기 원하여 드리는 제사이다. 따라서 기쁨과 감사로 인해 자원하여 드리는 소제의 경우와는 달리, 속죄제물용 고운 가루 위에는 기쁠 때나 축제시에 사용되는 기름과 유향을 첨가시킬 수 없었다(Keil, Lange, Matthew Henry). 이것은 이스라엘 온 회중의 속죄를 위한 매년의 속죄일(7월 10일)에 이스라엘 온 백성이 머리에 기름을 바르지 않고 금식을 하는 등, 모든 기쁨을 제하고 스스로 자신을 괴롭게 해야 한다는 사실(23:27-29, 민 29:7)과 맥락을 같이 한다.
5:12 기념물.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즈카라’는 예물 중 하나님의 몫으로 구분된 것으로서, 온전히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되는 예물을 가리킨다(2:2).
한 움큼. 이는 유대 랍비들의 주장처럼 단지 손가락을 모아 움켜 잡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손에 가득찰 정도로 퍼담은 양(handful)을 가리킨다(Keil, Lange).
제단 위 여호와의 화제물. 이는 곧 감사와 헌신의 표시로서 매일 조석(朝夕)으로 드려졌던, 그리하여 끊임없이 번제단 위에서 불타고 있었던 상번제물(常番祭物)을 가리킨다. 그런데 속죄제물용 고운 가루를 이 상번제물 위에 올려 놓고 함께 불살랐던 이유는 바로 피흘림 당한 번제물의 효력을 덧입기 위함이었다.
5:13 이 중에서 하나. 곧 본 장 전반부에서 언급된, 증인이 되고도 진술 요청을 회피한 죄(1절), 짐승의 사체(死體)로 인한 부정(2절), 사람의 부정(3절), 혹은 함부로 맹세를 발한 허물(4절) 중 하나를 가리킨다.
속죄한즉. 4:20 주석 참조.
그 나머지. 번제단 위에서 불살라진 기념물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를 가리킨다. 이것은 소제의 경우와 같이 제사장의 몫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2:3 주석을 참조하라.
5:14 여호와께서 … 이르시되.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거나 혹은 새로운 지시나 규례가 주어질 때 통상 사용되는 성경의 관용구이다. 여기서는 속죄제 규례에 이어 속건제 규례(5:14-6:7)를 언급하고자 사용된 말이다. 동시에 이 말은 모세 율법의 모든 규례가 여호와께로부터 기인한다는 계시적(啓示的) 특성을 명확히 보여 주는 말이다.
5:15 성물. [히, 코데쉬] ‘구별하다’, ‘바치다’란 뜻의 ‘카다쉬’에서 파생된 말로 곧 구별하여 여호와께 봉헌된 모든 예물들을 의미한다. 여기서 이 예물들이 거룩한 것은 그것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성물들은 여호와의 거룩하신 일에만 사용되어야 했고, 결코 인간을 위한 사사로운 일에 사용되어질 수 없었다. 만일 무지나 실수 등의 이유로 인해 그러한 잘못을 범했을 경우에는, 하나님의 소유를 침범한 죄가 되기 때문에 반드시 속건제를 드려 죄 사함 받아야 했다.
부지중에 범죄하였으면. 4:2 주석 하반부를 참조하라.
속건제. 하나님의 성물에 대해 범과했을 때, 혹은 인간 상호 간에 재산상의 피해를 입혔을 경우, 그것을 속함 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로 배상(賠償, repayment)의 성격이 짙은 제사이다.
네가 지정한 가치를 따라. 곧 모세가 각 예물에 대해 판단하는 가치를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당신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중재자로 인정하시고 또한 권위를 부여해 주셨음을 의미한다. 후에 이처럼 속건제물의 값을 정하는 일은 제사장들에게 위임되었다(27:12, 14).
성소의 세겔. 세겔은 구약 시대에 무게로 측정되는 통용 화폐 단위였는데, 보통 1세겔은 약 11.4g이었다. 당시 은 30세겔은 장정 노예 한 사람의 몸값이었다(출 21:32). 그런데 이 단위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달리 적용되었으므로 정확한 기준을 세우기 위해 성소에 보관된 도량형으로 세겔의 무게를 측정한 단위가 바로 성소의 세겔이다.
몇 세겔 은에 상당한 흠 없는 숫양. 즉 최소한 두서너 세겔 이상의 값어치가 나가는 숫양 중에서 흠 없는 것이란 의미이다(Abenezra). 이처럼 속건제가 일반 제사와는 달리 제물의 액수에 상당한 비중을 두는 이유는 속건제가 배상의 성격이 강한 제사이기 때문이었다.
5:16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자기가 범과한 성물(聖物)의 값어치에다 그 값어치의 오분의 일(1/5)의 벌과금을 덧붙여 배상해야 한다는 규정이다. 따라서 성물의 범죄자(汎過者)는 속건제물로 두 세겔 이상의 값어치가 나가는 흠없는 숫양과 더불어 자신이 범과한 성물 액수의 1/5에 해당하는 벌과금을 반드시 가산하여 제사장에게 가져와야 했다.
속건제의 숫양. 이 숫양은 최소한 두 세겔 이상의 값어치가 나가는 숫양으로서, 흠 없는 것이어야 했다. 따라서 유대 랍비들의 말에 의하면, 이 숫양은 1년 이상된 숫양이어야 했다(Matthew Henry).
5:17 계명. 곧 이것은 여러 규례, 제도, 지시 사항 등 여호와께로부터 주어져 성문화(成文化)된 모든 계명 혹은 율법을 가리킨다(4:2).
부지중에. 원어 ‘로 야다’는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란 뜻이다. 즉 이것은 죄를 죄인 줄 깨닫지 못하고 ‘무지(無知)로부터’ 지은 죄를 가리킨다(Lange).
5:18 지정한 가치대로. 여호와의 계명을 범하는 행위는 결과적으로 여호와의 주권 및 권리를 침해한 사실로 간주되어 여호와께 속건제물을 바쳐야 했다. 이때 바치는 속건제물은 배상의 성격을 띤 것이므로, 범죄자는 최소한 제사장의 판단 여하에 따라 적어도 두서너 세겔 이상의 가치가 나가는 흠 없는 숫양으로 드려야 했다(Abenezra, Abarbanel, Knobel). 한편 속건제의 경우 반드시 드려야만 하는 흠 없는 숫양 외에 오분의 일의 벌과금이 가산되어졌는데 여호와의 계명을 범한 경우에는 그에 대한 언급이 없다. 아마 이 경우에는 범죄자가 부지중 범한 계명의 비중에 따라 제사장이 그 가치를 상징적으로 지정했거나 혹은 양심이 정한 바에 따라 1/5의 벌과금을 바쳤을것으로 추정된다.
속죄한즉 … 사함을 받으리라. 여기서 ‘속죄한즉’(키페르)의 기본 동사 ‘카파르’는 ‘덮다’(cover), ‘무효로 하다’(disannul)란 뜻으로서, 곧 ‘속죄’란 희생제사의 제물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덮어 그 진노를 무효화시키는 행위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함을 받으리라’에 해당하는 ‘니셀라흐’는 ‘용서하다’(forgive, pardon, spare)란 뜻의 ‘살라흐’에서 파생된 말로서, 희생제사의 제물로써 범죄자의 죄는 분명 용서함 받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5:19 이는 속건제니. ‘속건제’ (trespass-offering, repayment-offering)와 속죄제의 차이점은 명확하지는 않으나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즉 속죄제가 하나님의 계명에 분명히 나타난 어떤 율법을 어겼을 경우 그것을 속함 받기 위해 드린 제사인 반면, 속건제는 인간 상호간이나 혹은 하나님의 성물에 대해서 범과했을 때 그것을 속함 받기 위해 드린 제사이다. 그리고 속건제의 경우, 범법자는 손해를 입힌 사람이나 성물에 대하여 그 피해액의 오분의 일을 더 배상한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께 속건제를 드릴 수 있었다. 그리고 속건제는 속제죄와는 달리 언제나 ‘개인적인 것’이었다.
여호와 앞에 참으로 잘못을 저질렀음이니라.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진정한 화해는 가해자 측의 최대한의 배상과 피해자 측의 최대한의 관용으로 이루어 진다. 즉 공의와 사랑의 정신이 어우러질 때 그 속에서 비로소 참된 화해와 교제가 싸트는 것이다. 인간이 여호와 앞에 범과한 경우, 여호와께서 인간에게 속건제를 요구하셨다는 사실은 바로 이러한 공의와 사랑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계시 사건은 결국 우리의 속건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의 희생과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십자가 사건에서 궁극적으로 온전히 성취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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