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주석, 출애굽기 32장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32:1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시내 산에 오르내린 기록은 다음과 같이 총 8번 나온다.
1차: 오름 19:3, 내려옴 19:7.
2차: 오름 19:8, 내려옴 19:14.
3차: 오름 19:20, 내려옴 19:25.
4차: 오름 20:21, 내려옴 24:3.
5차: 오름 24:9, 내려옴 ?.
6차: 오름 24:15, 내려옴 32:15.
7차: 오름 32:30, 내려옴 32:34.
8차: 오름 34:4, 내려옴 34:29.

더딤. [히, 보쉐쉬] ‘지연되다’, ‘연기하다’는 동사 ‘보쉬’에서 유래한 말로 ‘창백하다’, ‘부끄러워하다’, ‘실망하다’, ‘당황하다’란 뜻이다. 이는 모세의 더딤에 대한 백성들의 마음 상태가 잘 암시되어 있다. 모세가 백성들과 헤어져 시내 산으로 들어간 지 40일이나 지났으니(24:16, 18) 모세를 절대적인 지도자로 알고 그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던 백성들에게 이 기간이 상당히 긴 기간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아론은 모세와 함께 출애굽의 역사를 일으켰으며(4:29, 5:1) 모세의 대변인으로(4:14-16, 30, 16:9-10) 모세와 함께 행동했다(24:1). 또한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산에 올라갈 때 그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지명(24:14)했기 때문에 모세가 없는 상황에서 이제 백성들은 아론에게 새로운 ‘지도체제’를 요구했다.

우리를 인도할 신. 백성들이 요구한 것은 ‘눈에 보이는’ 신이었다. 오랜 기간 애굽 생활을 통해 그들은 가시적(可視的)인 우상들만을 접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invisible) 하나님에 대해서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바로잡기 위해 ‘형상을 만들지 말 것’(20:4)을 강력히 말씀하셨는데 백성들은 이러한 고차원적 신앙을 받아 들이지 못하였다. 그들은 보아야만 믿는 자들로,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 자들이었다(요 20:29). 한편 여기서 ‘신’으로 쓰인 단어는 ‘엘로힘’인데 직역하면 ‘신들’이라는 뜻의 복수형이다. 이것은 백성들이 애굽의 다신(多神)종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보여 준다.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구원해 낸 이가 하나님이 아니라 모세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세는 자신들이 직접 대면했기 때문에 바로 그가 자신들을 인도해 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과의 신앙에 견고히 서있지 못하였다는 증거이다. 왜냐하면 백성들을 인도하여 내신 분은 모세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언약 관계를 맺으신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3:6-8, 16, 17, 창 15:8-21, 17:7). 모세는 단지 그 같은 사역에 쓰여진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 했다. 그런데도 그들이 이같은 사실을 올바로 깨닫지 못했던 것은 후에 그들이 모세를 원망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16:3, 민 21:5). 한편 오늘날에도 능력있는 교회 지도자는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숭배될 수 있는 위험이 있는데, 이것은 당연히 경계되어야 한다.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여기서 ‘어찌 되었는지’에 해당하는 ‘메 하야 로’는 ‘그에게(로) 무슨 일이(메) 일어났는지(하야)’의 뜻이다. 즉 모세가 황량한 돌산에 들어간 지 40일이나 되었기 때문에(24:18) 백성들은 그의 신변에 무슨 사고가 일어난 줄로 생각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한 신과 같이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처럼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아 그들에게는 ‘전능한’ 신의 개념이 없었고, 단지 신은 유한하고 비(非) 전능한 것으로 생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잘못 이해한 결과이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호 4:1, 6)이 모든 것에 앞서야 함을 교훈해 준다.

 

32:2 금 고리. 이것들은 이스라엘 벡성들이 출애굽할 때 애굽인들로부터 받아낸 것들이다(3:21, 12:36). 당시 하나님께서 이 같은 패물을 (애굽 사람들을 통해) 백성들에게 주신 이유는 성막과 그 기구를 만드는 데 쓰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오히려 이를 우상을 만드는 데 사용하였다. 오늘날도 하나님이 주신 물질적 복을 이처럼 오용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32:3 모든 백성이 … 가져 오매. 아마 아론은 신을 만들어 달라는 백성들의 요구(1절)를 정면으로 거부하지는 못하고, 그들에게 귀중품을 가져오도록 요구함으로써 패물에 대한 그들의 애착심을 자극하여 그들 스스로가 우상 만드는 것을 단념토록 꾀하였을 수도 있다(Augustine). 모든 인간 특히 여자들은 금, 은, 보석과 각종 장신구에 대한 애착이 강하므로 계책은 상당히 그럴듯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론의 이러한 얄팍한 계략은 백성들의 의외의 행동에 의해 여지없이 무너졌다.

 

32:4 조각칼로 새겨. 분명 이 기술은 애굽에서 배운 것이다. 당시 애굽은 이러한 조각술과 공예술 및 주조술(鑄造術) 등이 매우 뛰어난 곳이었다.

송아지 형상. 당시 애굽에서는 황소 형상의 아피스(Apis)를 비롯, 인간의 모습을 가진 프타(Ptah)와 오시리스(Osiris), 악어의 머리 형상을 가진 소보크(Sobok), 매의 머리를 가진 호루스(Horus)와 라(Rah) 및 숫양의 머리 모습을 한 아문(Amun) 등을 주요신으로 섬겼고, 이외에도 태양과 나일 강 등 자연도 숭배하였다. 여기서 이스라엘 벡성들이 만든 송아지 형상은 애굽의 우상 아피스(Apis)를 본뜬 것이 분명한데, 그들은 이 송아지를 여호와의 형상으로 여긴 것 같다(5절). 따라서 이 금송아지 우상은 그후 이스라엘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고 나타난다(왕상 12:28, 대하 13:8, 호 10:5). 이처럼 그들이 하나님을 송아지로 형상화한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송아지의 차원으로 격하시켰음을 뜻한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고 명하신 것은(20:4), 사람들이 바로 이와 같이 그 형상으로 하나님을 제한하는 잘못를 범하기 때문이다.

너희의 신이로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을 다음 몇가지로 지적할 수 있다. (1) 하나님은 지금 시내 산에서 모세와 만나고 계시는데 다시 신을 만든 점(19:20, 24:12-8). (2)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도 우상을 만들었다는 점(20:4, 5). (3) 애굽에 임한 10재앙시 애굽의 모든 우상들이 깨뜨려지는 것을 눈으로 똑똑히 목도하고서도 다시 신을 만들어 구속주 하나님을 배반한 점(7:14-12:36) 등이다.

 

32:5 여호와의 절일. [히, 하그라야훼] 여기서 ‘하그’는 ‘축제’, ‘절기’라는 뜻이므로 이 어구를 직역하면 ‘여호와께 축제(의 날)’란 말이 된다. 이 말은 하나님이 정하여 주신 유월절이나 초막절 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여호와, 즉 금송아지에 대한 축제의 날을 의미한다. 고대 이방 종교의 축제는 음주, 가무(歌舞) 및 부도덕한 성행위로 이루어졌는데, 애굽 생활에서 이런 것들을 익히 보았던 백성들은 여호와의 절일 이라는 말을 이와 관련하여 이해했음이 틀림없다. 한편 본 절 초두의 ‘아론이 보고’라는 말은 수리아 역본(the Synriac Peshitta)에는 ‘아론이 두려워하여’로 되어 있다. 즉 아론에게 새로운 지도 체제(새로운 신)를 요구하는 백성들의 기세가 폭력으로 연결될 기미가 보이자, 아론은 지금까지 억제해 왔던 환락을 ‘여호와의 절일’이라는 이름으로 허용함으로써 이를 무마하려고 한 것 같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도 환락 허용이라는 일시적 방편으로 순간의 위기를 넘기려 하는 술수가 정책적 차원에서 실시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32:6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이 양 제사에 대하여서는 20:24 주석을 참조하라.

먹고 마시며 … 뛰놀더라. 이방 종교 축제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여기에는 필수적으로 난잡한 성행위가 수반되는데 오늘날에도 일부 지역에서 이같은 모습을 볼 수 있다. 한편 여기서 ‘뛰놀더라’는 ‘차하크’는 (흥겹게 떠들며) ‘놀다’의 뜻인데 이는 곧 육체적 환락을 가리키는 말이다. 특히 당시 이방 종교에서 황소신은 ‘힘’과 ‘생산’의 상징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그 형상 앞에서 ‘뛰노는’ 것은 곧 성적으로 타락한 행동을 의미한다.

 

32:7 네가 … 인도하여 낸 네 백성. 지금까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리켜 ‘내 백성’(암미, my people)이라고 하셨으나(3:7), 여기서는 ‘네 백성’(암메카, your people), 즉 모세의 백성이라고 부르신다. 그것은 이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19:5-8)을 일방적으로 파기하여 하나님 백성의 자격을 상실했기 때문이다(Jerome). 이에 대하여 카일(Keil)과 같은 학자는 모세가 백성의 대표자이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다고 주장하나 다른 곳에서는 이와 같이 부르지 않았음을 볼 때 그의 견해는 설득력이 약하다. 그리고 칼뱅(Calvin)은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그 죄책(罪責)을 슬퍼하도록 하기 위해 이렇게 불렀다고 주장한다. 여하튼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백성’이라고 하셨으나, 모세는 이를 다시 ‘주의 백성’으로 ‘변경’시키고 있다(11절).

부패하였도다. [히, 쉬헤트] 기본 어근 ‘쇠하트’는 ‘부패하다’는 뜻과 함께 ‘망하다’, ‘그르치다’는 뜻이 있으며 ‘잃다’, ‘낭비하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이는 곧 이스라엘 백성이 단순히 타락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계약을 파기함으로써 하나님의 계획을 그르쳤다는 뜻이며, 따라서 이제는 망하게 되었다는 강한 의미를 가니고 있다.

 

32:8 떠나. ‘떠나다’, ‘피하다’는 뜻의 동사 ‘수르’는 ‘외면하다’, ‘반역하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길을 … 떠나’는 ‘길을 … 외면하여’, 혹은 ‘길을(에) … 반역하여’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것은 백성이 정로(正路)에서 벗어난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배신했음을 가리킨다.

예배하며.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샤하’는(공경의 표시로) ‘엎드리다’, ‘절하다’는 뜻인데 특히 몸이 땅에 닿도록 엎드리다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여기서부터 ‘경배(예배)하다’라는 뜻이 파생되었다. 일찍이 모세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전했을 때, 백성들이 하나님께 경배했는데(4:31), 그 때 ‘경배하다’는 뜻으로 쓰인 단어 역시 ‘샤하’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이 경배의 대상을 하나님에서 송아지로 바꾸었음을 보여 준다. 이같은 경우를 가리켜, 성경은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마친다고 표현하였다(갈 3:3).

 

32:9 목이 뻣뻣한. 이 말은 원래 농부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소나 말에게 쓰던 표현으로 성경에서 고집이 세고 악한 상태를 가리키는 관용어로 사용된다(34:9, 신 9:6, 왕하 17:14, 대하 30:8, 느 9:16, 렘 7:26, 행 7:51). 여기서도 이 말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따르지 않는 이스라엘의 상태가, 마치 농부의 말을 듣지 않는 우직한 소나 말과 같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후일 선지자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직접 소와 나귀에 견주어서 질책하기도 했다(사 1:3).

 

32:10 내가 하는대로 두라. [히, 하니하 리] ‘하니하’는 ‘정착하다’, ‘쉬다’, ‘놓아두다’. ‘내버려두다’란 뜻의 동사 ‘누아흐’의 미완료형으로 이를 직역하면 ‘나를 내버려두라’ 혹은 ‘날 쉬게 하라’가 된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KJV, NIV)은 ‘날 내버려 두라’ 혹은 ‘날 혼자 있게 하라’(let me alone)로 번역하였다. 이는 더 이상 하나님께서 백성들과 관계를 갖지 않으시겠다는 절교 선언이다. 즉 하나님은 지금까지 이스라엘과의 관계 속에서 그들과 ‘함께’(together) 하셨지만, 이제부터는 그 관계를 끊어버리시고 ‘홀로’(alone) 하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은 곧 영원한 형벌과 죽음만을 의미할 뿐이다.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이 약속은 처음에 아브라함에게 하신 것인데(창 12:2, 18:18) 이스라엘이 계약을 깨뜨렸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를 철회하고 대신 모세와 새계약을 맺으시겠다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의 ‘나라’와 창 12:2의 ‘민족’은 모두 ‘고이’를 번역한 말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동일한 내용을 모세에게도 약속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이 제안은 모세에게 매력적인 ‘유혹’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데. 만일 이 제안이 모세에 의해 받아들여졌다면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 ‘모세의 자손’으로 새롭게 구성되었을 것이다(Keil). 또한 이것은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들이 아브라함과 같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롬 4:3) ‘믿음의 후손’이 아니라, 모세의 율법을 지켜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는 ‘율법의 후손’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지금 모세에게 이후 하나님의 백성의 자격과 성격을 결정짓는 중대한 제안을 하고 계신 것이다.

 

32:11 하나님의 제안에 대해 모세는 ‘거부 의사’를 분명히 표시하면서, 대신 백성을 위해 ‘중보 기도’를 드린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소돔의 멸망 직전에 그들을 위해 중보 역할을 한 것과 유사하다(창 18:20-33). 한편 모세의 호소 속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담겨 있다. (1) 이스라엘을 구원해 놓고 다시 멸망시킬 수 없다. (2) 이방인(특히 애굽인)에게 놀림감이 된다(12절). (3)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하셨던 약속을 지키셔야 한다(13절). 이 가운데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과거부터 지금까지 해오신 당신의 후회 없으신 사역에, 두 번째는 그 누구도 업신여기지 못할 당신의 영광스러운 성호에, 세 번째는 무조건으로 베푸시는 당신의 은혜로우신 성품에 각각 호소한 것이다.

구하여 이르되. [히, 예할] ‘예할’은 ‘할라’의 강조 형태로 ‘간구하다’, ‘간청하다’는 뜻이며 여기에서 ‘기도하다’는 뜻이 파생되었다. 그리고 이 단어에는 ‘슬프게 하다’, ‘아프게 하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백성들을 위한 모세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만큼 간절했음을 보여준다. 결국 하나님은 모세의 이 중보 기도를 통해 당신의 뜻을 돌이키셨다(14절).

주의 백성. 이것은 모세가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과 세운 언약(창 17:6, 26:4, 28:14, 35:11)에 근거하여 말한 것이다. 모세는 백성들이 범죄하였지만 여전히 ‘주의 백성’임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7절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네 백성’이라고 말한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32:12 노를 그치시고. ‘그치시고’에 해당하는 원어 ‘슈브’는 ‘멈추다’, ‘돌이키다’, ‘취소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를 직역하면 ‘당신의 진노로부터 돌이켜서’이다. 즉 모세는 하나님이 진노하신 것을 취소하도록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뜻을 돌이키사. 여기에 사용된 원어 ‘나함’은 본래 ‘한숨 쉬다’는 뜻인데 함축적으로 ‘뉘우치다’, ‘후회하다’, ‘동정하다’, ‘위로하다’는 의미도 있다. 따라서 ‘뜻을 돌이키사 …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는 ‘주의 백성을 동정하사 부디(제발) 화를 거두어 주소서’라고 번역할 수 있다.

 

32: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 하소서. 여기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야곱)은 일찍이 선민을 대표하여 삼위일체 되시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의 3대 족장들이다. 따라서 만일 하나님이 그들의 언약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하여 이들을 멸망시키면, 결과적으로 하나님 스스로도 이들 조상에게 한 약속을 깨뜨리는 셈이 된다(창 12:2, 15:14-16, 26:3, 4, 35:9-15). 모세는 바로 이 사실을 지적하면서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주를 가리켜. [히, 라혭 바크] 문자적으로는 ‘당신에게(라혭) 당신 스스로(바크)’라는 뜻이다. 히브리인들은 맹세할 때에 몇 가지 공식적인 어구를 사용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명예를 걸고 말하거니와’라는 형태이다. 이런 뜻에서 당신의 명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으신 하나님께서는 ‘내가 나를 가리켜 멩세하노니’(창 22:16, 사 45:23, 암 6:8), 또는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겔 17:19)라고 맹세하셨다. 한편 이러한 맹세에는 그 맹세를 지키지 않을 경우 당할 징벌이 명시되기도 하는데, 고대 근동인들은 동물을 두 조각으로 갈라 계약(맹세) 당사자가 그 사이로 지나감으로써 맹세를 범한 자는 이 짐승처럼 두 조각이 날 것이라는 표증으로 삼기도 하였다. 따라서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을 때에도 이와 같은 의식으로 행했는데(창 15:9-17), 모세가 ‘주를 가리켜’라고 말함은 바로 이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모세는 계속하여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여 중보 기도 하고 있다. 이와 같이 언약에 근거하여 중보 기도를 하는 모습은 후일 솔로몬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다(왕상 8:22-26), 따라서 우리도 예수께서 세우신 언약에 근거하여(히 8:8-12) 담대히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존재 기반을 근거로 맹세하신 모든 언약들은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한 영원 불변한 것이기 때문이다(히 6:13-18).

허락한. 원문상으로는 ‘내가 주겠다고 말한’이다.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직역하면 ‘그들이 그것(땅)을 영원히 소유하리라’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을 약속하셨고(창 13:14-17), 이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셨다. 만약 하나님이 그들을 멸망시키면 그 땅은 이방인의 소유가 되고 말 것이므로 모세는 지금 이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즉 모세는 하나님의 성품을 근거로 해서 모든 가능한 이유를 들어 가며 간절하고도 끈질지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32:14 뜻을 돌이키사. [히, 나함] 이 말이 12절에서는 ‘노를 그치시고’로 번역되었다. 또한 이 말은 ‘후회하다’는 의미로도 쓰이는데 성경에는 하나님이 몇 차례 ‘후회하신’ 기록이 나타나 있다. “한탄하사”(창 6:6), “뉘우치사”(대상 21:15), “뜻을 돌이키시리라”(렘 26:13), “뜻을 돌이키셨으므로”(암 7:3). 이러한 표현은 변개(變改)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속성(말 3:6, 시 102:27)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속성상 일의 동기와 목적과 약속에서 불변하신 분이시다. 다만 성경에 나타난 이러한 표현들은 참고 참으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 것뿐이다(삼상 15:11 주석 참조). 따라서 여호와께서 그분의 결정을 돌이킬 수 있도록 확신을 준 것은 그분이 자신의 백성을 위해 기꺼이 생명을 내놓으려고 하는 진실한 중재자(모세)를 발견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의 간청을 들으시고 그의 이기심 없는 기도를 응답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종을 시험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실성과 범죄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백성들에 대한 그의 사랑을 시험하셨다. 그러나 모세는 이 시련을 고상하게 잘 견디어 냈다. 이스라엘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이기적인 동기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선민의 번영은 자기 개인의 명예나 큰 나라의 조상되는 특권보다도 더 귀중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실함과 단순한 마음과 그의 진실함을 기뻐하시고 그에게 신실한 목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중대한 책임을 맡기셨다”(Ellen G. White, 부조와 선지자, 319).

 

32:15 돌이켜. [히, 이펜] 즉 ‘방향을 바꾸다’란 뜻이다 그리고 동사 ‘파나’의 기본 뜻은 ‘향하다’, ‘대면하다’인데 이는 지금까지 하나님과 대면하고 있던 모세가 (백성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보장을 받고 다시 백성과 대면하게 된 것을 뜻한다. 베드로는 예수와 함께 산 위에서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자 산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 그대로 머물자고 했는데(눅 9:28-33), 모세의 태도는 이와 대조되는 것으로 백성에 대한 책임과 관심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은혜의 ‘산 위’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현실의 ‘산 아래’를 향해 돌이키는 생활을 해야 한다.

두 증거판. 즉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판을 가리킨다(31:18). 그런데 십계명을 ‘두 돌판’에 써 주신 하나님의 경륜 속에는 ‘10’이란 숫자가 지니는 ‘완전성’( 完全性)과 ‘2’란 숫자가 지니는 증언성(證言性)이 분명 내포되어 있었을 것이다(신 4:13).

판의 양면 이쪽 저쪽. 판의 양면, 즉 판의 앞뒤로 글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은 판의 한 면에 글이 새겨져 있는 당시의 비석들과는 다르다. 이는 사람이 만든 법을 새긴 비석과는 달리 하나님이 제정하신 법을 새긴 비석임을 시각적으로 알게 하는 것이다. 한편 두 돌판에 기록된 십계명 구분법에 대해서는 신4:13 주석을 참조하라.

 

32:16 하나님이 만드신 것. [히, 마아쉐 엘로힘] ‘마아쉐’는 ‘아샤’(만들다)의 명사형인데 활동, 노동이라는 뜻이 있으며 특히 (공들인) ‘작품’이라는 의미도 포함한다. 따라서 증거의 돌판은 하나님께서 ‘수고해서’ 만드신 ‘작품’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후에 나타나는 모든 법과 사상들이 성경에서 출발하였고, 이 성경 가운데 최초로 기록된 형태가 곧 십계명 임을 생각할 때 이 증거의 판이 갖는 의미는 대단히 중요하다.

 

32:17 여호수아. 모세와 함께 산중턱까지 올라갔던 일행 중(24:1) 모세가 산으로 들어갈 때까지 계속해서 그를 수행했으며(24:13) 다른 사람들이 모두 산 밑으로 내려갔을 때에도 모세가 돌아오기 까지 산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자이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진 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세는 산 정상에서 이미 이스라엘 진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 있었다(7절).

싸우는 소리. [히, 콜 밀레하마] ‘전쟁(밀레하마)의 소리(콜)’라는 의미이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돌아올 때까지 진에 내려가지 않고 산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떠드는 소리를 듣고 전쟁이 난 줄로 생각했다. 즉 다른 부족이 쳐들어와서 전쟁이 벌어진 것으로 알았을 것이다.

 

32:18 승전가 … 패하여 부르짖는 소리. 원문에는 ‘승리하여 외치는 소리 … 패배하여 외치는(부르짖는) 소리’로 대구를 이루고 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그들을 추격하던 애굽 군대가 홍해에서 전멸되자 ‘승전가’를 불렀던 일이 있었다(15:1-21). 그리고 출애굽 전야에 있었던 애굽 사람의 호곡(12:30)은 하나님과 바로의 대결에서 애굽이 ‘패하여 부르짖은 소리’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듣기에는 노래하는 소리로다. 여호수아와는 달리 하나님께로부터 백성들의 상황을 전해 들은 모세는 그 소리가 우상을 숭배하는 가무(哥舞) 소리인 줄 금방 알았다.

 

32:19 춤 추는 것. [히, 메홀로트] ‘메홀라’의 복수형이다. 따라서 이것은 여러 종류의 춤 혹은 춤 동작의 여러 형태를 가리킨다. 우상 앞에서 춤추는 것은 이방 종교의 전형적인 제의(祭儀)형태로 황홀 상태(ecstasy)까지 이르러 급기야는 도덕적 가치 판단 능력을 상실하기까지 하는데, 여기에서 성적 타락이 일어나게 된다. 지금도 인도 종교에서는 우상 앞에서 춤추는 일이 흔하다.

크게 노하여.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하르 아프’를 직역하면 분노가 ‘불타올라’란 뜻이다. 이 말은 하나님이 진노하셨을 때(10절)에도 쓰인 말이다. 처음에 모세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백성들의 편에 서서 용서를 빌었으나, 막상 백성들의 범죄 현장을 보고서는 하나님의 편에 서서 이처럼 화를 낸 것이다. 이는 그만큼 백성들의 죄가 심했음을 보여 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진노하시는 것에 대해서 똑같이 미워하고 노할 수 있어야 한다.

그 판들을 … 깨뜨리니라.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백성들이 지키고 따라야 할 언약의 법을 받아 내려왔으나 정작 이를 실천해야 할 백성들은 그와 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즉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린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증거 판을 깨뜨림으로써 언약의 효력이 상실되고 파기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었다. 그것은 또한 법을 지켜야 할 사람들이 그 법을 따르지 않게 된 시점에서는 더 이상 법이 소용없음을 보여 주는 행동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세가 깨뜨린 것은 법이 새겨진 돌판이며, 그 법 자체를 깨뜨린 것은 아니다. 이는 모세가 다시 법을 받으러 산으로 올라갔음(34:4)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두 번째 돌판은 하나님이 직접 만드시지 않고, 모세가 만들어야 했다.

 

32:20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금덩어리 자체는 불에 타지 않는다. 그러나 나무나 그 외 다른 물질로 만든 상(像)에 금을 입힌 것이라면, 불에 탈 수 있고 부수어 가루를 내기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여기에 나오는 금송아지는 겉만 도금한 것인 것 같다(Keil). 이와 같은 우상 제작 방법은 사 30:22, 40:19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파괴 행위는 우상에 대한 응징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만든 우상이 자신도 방어하지 못하는 얼마나 무능력하고 헛된 것인지를 분명히 깨달을 수 있다. 요시야 왕의 종교 개혁 때에도 이와 같이 우상과 산당을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든’(왕하 23:15) 일이 있다.

물에 뿌려 … 마시게 하니라. 금가루를 탄 물이 백성들에게 ‘저주가 되게 하는 쓴 물’(민 5:24)이 됨을 의미한다. 모세 율법하에서 외간 남자와의 부정으로 의심받은 여인은 일련의 조사를 받고 ‘저주의 물’을 마셔야 했는데(민 5:12-24). 이스라엘 역시 지금 그의 ‘남편’이 되신 하나님께 대해 부정을 저질렀기 때문에 이 물은 바로 ‘저주의 물’의 성격을 지닌다. 또한 이는 자신이 지은 죄는 반드시 스스로 죄값을 담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교훈해 주기도 한다(겔 18:2).

 

32:21 당신에게 어떻게 하였기에. 여기서 ‘어떻게’로 번역된 부분은 ‘무엇을’이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아마 아론은 백성들로부터 위협은 받았을테지만 실제적인 해악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을 큰 죄에 빠지게 하였느냐. 모세는 죄의 책임을 백성들에게가 아니라 그 지도자에게 묻고 있다. 지도자의 행위는 전체 구성원들에게 미치는 영향 및 책임이 실로 막중하다. 한편 ‘큰 죄’는 히브리어로 ‘하타아 게돌라’인데 우상 숭배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중대한 죄악인지를 시사해 주는 말이다.

 

32:22 내 주여. [אֲדֹנָי 아도나이] ‘아도나이’(나의 주, my Lord)라는 말은 사람들이 종종 하나님께 대해 사용했던 칭호이다. 특히 이스라엘 역사의 후대로 가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를 직접 부르는 것이 불경하다고 생각하여 ‘여호와’ 대신 ‘아도나이’를 주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아론이 모세에게 이러한 호칭을 사용한 것은 모세가 그의 형 아론에게 하나님과 같은 권위를 갖고 있었음을 뜻한다. 이같은 권위는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을 때 이미 허락하신 것이다(4:16) 만일 전체 이스라엘을 이끌어야 할 모세가 육신의 형에게 매이게 된다면 백성들로부터 권위를 인정받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가장 어려운 대상인 형으로부터도 권위를 인정받도록 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이끌어 갈 수 있게 하셨다. 모든 권위는 오직 하나님께로 부터 오며 또한 그러한 권위만이 참된 권위가 된다(롬 13:1).

이 백성의 악함. 문자적으로는 ‘악(죄) 중에 있는 백성’이란 뜻이다. 아론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백성들에게 슬며시 떠넘기고 있다.

 

32:23 모세의 물음에 대해 아론은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모세의 물음은 ‘백성들이 아론에게 무엇을 했는가’인데 아론은 백성들이 악했고 자신은 단지 금만 수집했다는 사실을 애써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아론은 실제적으로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할 수 있는 길을 열었고, 자신이 그 제사장 역할을 했다. 즉 아론은 소극적으로 백성들의 죄를 묵인, 방조했고, 적극적으로는 동조, 협력, 나아가서 그 지도자 역할까지 했던 것이다(Wycliffe). 한편 23절에 나타난 각 어구는 1절 주석을 참조하라.

 

32:24 빼내라.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파라크’는 ‘뜯어내다’, ‘부스러뜨리다’. ‘조각내다’는 뜻을 갖는다. 따라서 백성들은 단순히 금붙이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이미 그것을 부숴뜨린 상태로 가져온 것이다. 우상 숭배를 위해 백성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던 귀금속을 파괴할 정도로 열의를 갖고 있었던 셈이 된다.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이 말은 아론의 대답 중 결정적으로 잘못된 부분이다. 송아지는 불에서 저절로 나온 것이 아니라 실제로 ‘붓고’, ‘새겨서’ 만든 것이다(4절). 하지만 이러한 죄 지은 인간들의 책임 전가와 사실 호도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악습이다(창 3:12, 13).

 

32:25 방자하니. 이 말의 히브리어 ‘파라’의 원뜻은 ‘풀어놓다’, ‘석방하다’이며 이와 함께 ‘벌거벗기다’는 뜻도 있다. 따라서 영어 성경은 이를 각각 다르게 번역하고 있는데 NEB와 NIV는 ‘통제를 벗어나 제 멋대로’(out of control)로, RSV는 ‘해이해져서’(had broken loose)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KJV는 원문의 어감대로 ‘벌거벗은’(naked)으로 번역하였고, Living Bible은 이에서 좀 더 의미를 부여한 ‘간음하니’, ‘성적으로 범죄하니’(committing adultery)로 번역하였다. 즉 백성들은 이방 종교의 제사의식에서와 마찬가지로 우상 앞에서 벌거벗고 광란의 축제를 지냈고, 이는 자연적으로 성적 타락으로 연결되었던 것 같다. 설령 직접적인 성적 타락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이스라엘이 구속주 여호와를 떠나 이방신을 만들어 우상 숭배를 한 것은 자신들의 영적수치를 드러낸 것임에 틀림없다(렘 2:20).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여기서 ‘원수’란 특히 애굽 사람들을 가리킨다(12절).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앞에서 광란의 축제를 벌이는 모습은 애굽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껏 자신들의 신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그렇게 출애굽을 강행하더니, 결국 광야에서 자신들이 섬기는 송아지 신(Apis)을 섬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모세는 지금 행여 여호와의 영광이 이방인들에 의해 조롱당할까바 그것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고 또한 거기에 분노했던것이다.

 

32:26 진 문. 시내 산 앞에서 야영하고 있던 백성들의 진영(19:1, 2) 입구를 가리킨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 직역하면 ‘여호와를 위하는 자는 누구냐?’ 혹은 ‘누가 여호와를 위하는가?’라는 말이다. 즉 모세는 일방적으로 ‘여호와를 위하는 자는 나오라’고 하지 않고, 누가 그런 사람인가를 물어서 확인한 다음 자신에게 나오라고 하였다. 이는 곧 백성들에게 선택과 결단을 함께 요구한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 말은 회개를 촉구하는 경고이기도 했다. 따라서 실제로 이에 해당하는 자는 우상 숭배에 참여하지 않은 자들 및 비록 우상 숭배에 참여했다 할지라도 즉시로 그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레위 자손이 다. 정확히 말하면 레위인들 중 우상 숭배에 참여하지 않았던 모든 자들일 것이다. 곧이어 이들은 모세의 명을 따라 그들의 이웃과 형제까지 칼로 쳐죽였는데,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 일로 간주되어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받았다(신 33:9). 때로 신앙은 이러한 갈등을 극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신약 시대에 그리스도께서도 밝혀 말씀 하셨다(마 10:37-39).

그에게로 가는지라. 모세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백성들 앞에 섰다. 따라서 모세 편에 서는 것은 곧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었다.

 

32:27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 말은 후대의 예언자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어구이다(사 56:1, 66:1, 렘 10:2, 19:1, 22:1). 예언자들은 자신들의 말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만을 전달했는데, 모세가 이 같은 공식 어투로 말을 시작하여 그 역시 하나님의 예언자로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아마 이스라엘 진은 외부와 차단된 형태였던 것 같다. 특히 ‘문’이라고 번역된 ‘샤아르’는 ‘대문’, ‘성문’을 뜻하는데 이로 볼 때 그 진은 여러 텐트로 이루어진 일종의 성(城)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마 이것은 광야 행진 중 당할지도 모를 이민족의 습격에 대비키 위함이었을 것이다.

형제. 육신의 형제가 아니라 같은 이스라엘인을 가리킨다. 이처럼 성경에서 ‘형제’라고 할 때는 자주 친구나 이웃, 동족을 가리켰다(레 25:25, 왕상 12:24, 약 2:15).

죽이라. 이에 해당하는 기본 동사 ‘하라그’는 일반적 의미의 살해보다는 한층 가혹한 ‘살육하다’란 의미이다. 따라서 모세의 명령은 인정 사정없이 죽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사형’ 에 해당되는 죄나 그 기준이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을 죽이라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 아마 모세가 하산해서 금송아지를 불사르고 일련의 문책 조치를 단행할 때, 그 때까지도 반성의 기미가 없이 계속 죄를 짓고 있던 사람들이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25절).

 

32:28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하니라. 이들 죽임 당한 삼천 명은 우상 숭배의 주모자급 인물들이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칼뱅(Calvin)도 주장하기를, 처음부터 사태의 현장에 있었던 레위인들은 전체 백성을 우상 숭배로 끌어 들인 적극적인 주모자들이 누구인지 다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한편 범죄자들을 잔인하리만큼 철저히 응징하는 본 장면을 통해 우리는 피상적이고 감상적인 안타까움을 초월하여 죄, 특히 우상 숭배의 죄악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가증스럽고 또 그 결과가 무서운지를 더욱 처절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행위를 통해 죄악의 뿌리는 호리라도 남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아울러 명심해야 할 것이다.

 

32:29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직역하면 ‘너희 손을 채우라’(fill)는 뜻이다. 한글 개역과는 달리 명령형의 말인데, 여기서 ‘손을 채운다’는 말은 곧 제사장적 역할을 뜻한다(29:9). 즉 레위인들이 범죄한 자들을 죽인 것은 그들을 희생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바친 것으로 간주되었으니, 결과적으로 레위인들은 제사장으로 위임받은(손을 채운) 셈이 된다.

복을 내리시리라. 이 복은 곧 하나님께서 레위인들을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주어 하나님을 섬기게 하신 축복을 의미한다(민 1:47-54).

 

32:30 올라가노니. 일차적으로는 다시 산으로 올라간다는 뜻이다. 그런데 ‘올라간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알라’에서 ‘번제’를 뜻하는 ‘올라’가 생겨났으므로, 이 말에는 일종의 제사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모세가 산에 올라간 것은 백성들을 위한 대속 제사를 드리러 간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32:31 모세는 이미 범죄한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탄원한 결과 전 백성들을 다 진멸하려던 그분의 뜻을 돌이켜 놓은 적이 있다(14절). 그렇지만 그것은 징벌의 경감에 불과했지 완전한 사면에 대한 약속을 얻어낸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모세는 이제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온전한 사죄를 탄원하고 있는 것이다.

 

32:32 죄를 사하시옵소서. 이는 두 가지 사실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준다. 곧 (1) 하나님께서는 능히 죄를 사해 주실 수 있는 권능자이시다. (2) 그러나 죄 사함의 여부는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뜻에 달려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죄를 자복하기만 하면 용서해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시니(사 1:18, 19), 우리는 이 약속에 의지하여 그분께 죄 용서를 구할 수 있다.

기록하신 책. 이 말이 성경 다른 곳에서는 ‘생명책’으로도 표현되었다(시 56:8, 69:28, 139:16, 단 12:1, 빌 4:3, 계 3:5, 13:8, 17:8, 20:12). 이것은 인간의 삶과 죽음이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나타내 준다. 시민 명부에 자신의 이름이 등재된 자들만이 그 지방의 주민 또는 그 나라의 국민으로 인정되며 아울러 시민권이 보장되었던 당시의 풍습에서 따온 이 ‘생명책’이라는 말은 신약에서는 보다 영적인 의미를 지닌 개념으로 나타난다(빌 4:3, 계 3:5). 곧 이 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만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모세의 이 기도는 신약 시대 자기 동족 유대인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던 바울의 기도와 유사하다(롬 9:3). 책임을 회피했던 아론과 달리 모세는 이처럼 자기 민족을 위해 생명까지 내놓을 만큼 투철한 책임 의식과 동포를 사랑하는 정신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Bengel). 실로 모세나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천국의 기쁨을 잘 아는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적인 생명까지 걸고서 그토록 간절히 중보 기도 드리는 이유는 죄중에 죽어갈 무지하고 불쌍한 뭇 영혼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이처럼 사랑의 힘은 크고 위대하다. 예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그 치욕스런 십자가를 흔쾌히 지신 것도 ‘오직 사랑’ 그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죽어가는 뭇 영혼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할 책임이 있는 우리들도 이같은 사랑의 마음을 지녀야 할 것이다(고전 4:1, 2).

 

32:33 누구든지 … 범죄하면 … 지워 버리리라. 모세는 백성들 대신 자신의 이름을 지워 달라고 했는데,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범죄자’들을 지우겠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누구든지 … 범죄하면’은 원문상 ‘범죄한 사람은 누구나’이다. 즉 죄를 지으면 누구나를 불문하고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 말씀은 아무리 믿고 구원을 보증받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떠나 반역하면 구원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즉 한번 믿으면 그 구원이 어떤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고 유지된다는 사상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32:34 내가 네게 말한 곳. 이곳은 호렙 산에서 모세를 소명할 때 계시하셨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땅’을 가리킨다(3:8). 따라서 모세의 중보기도를 들으신 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그곳으로 인도하라고 명하신 것은 곧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셨음을 암시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한 그 언약에 근거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자신의 백성으로 인정하시고 계시며 그들의 죄를 사하시어 모세로 하여금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도록 명하셨던 것이다.

사자. 여러 가지 견해가 많지만 일반적으로 제2위 하나님 되시는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23:20 주석을 참조하라.

내가 …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 ‘보응하다’는 말의 원어는 ‘방문하다’(파카드)의 뜻이다. 따라서 이 부분을 직역하면 ‘내가 찾는 날에는 그들의 죄를 찾으리라’가 된다. 한편 ‘파카드’에는 이외에도 ‘계산하다’, ‘복수하다’라는 의미도 있는데, 이 용례대로 번역하면 ‘내가 (그들의 죄를) 계산하는 날에는 그 죄를 갚으리라’가 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지금은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고 징벌하지 않았으나, 다시 죄를 지으면 훗날 이번의 죄까지 함께 징벌하시겠다는 뜻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듭 거듭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출애굽 제1세대 (출애굽 당시 20세 이상 된 자)는 갈렙과 여호수아만 제외하고 모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었다(민 14:29-30).

 

32:35 본 절은 28절에 언급된 삼천 명 살륙 사건에 대한 부연 설명이자 본 장의 결론이다.

치시니. ‘치다’는 뜻의 동사 ‘나가프’는 ‘때리다’, ‘살해하다’는 뜻 외에 ‘역병에 걸리다’는 뜻도 있는데, 여기에서 ‘온역’(네게프) 이라는 말이 유래했다. 한편 이러한 ‘나가프’는 하나님의 즉각적인 징벌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기도 했는데(민 11:23) 이로 미루어 보아 하나님께서는 레위인들의 ‘사형 집행’과 별도로 또한 역병으로 백성을 치신 것 같다. 따라서 대부분의 영어 성경도 이를 역병(plague)과 관련하여 번역하고 있다.

아론이 만든 바 그 송아지를 만들었음이더라. 아론이 만든 송아지를 백성들이 다시 만들었다는 뜻이 아니다. ‘만들다’에 해당하는 원어 ‘이사’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그중에는 ‘실시(행)하다’, ‘제공하다’, ‘준비하다’, ‘공급하다’ 그리고 ‘섬기다’는 의미도 있다. 따라서 본문은 ‘그들이 아론이 만든 그 송아지를 섬겼음이더라’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혹은 ‘그들이 아론이 준비한 송아지를 만들었음이더라’로도 번역할 수 있는데, 하나님은 송아지를 만든 행위보다 그것을 섬긴 행위 때문에 진노하셨으므로 앞의 번역이 더 자연스럽다. NEB도 ‘그들이 아론이 만든 송아지를 섬겼기 때문에’(for worshipping the bull-calf which Aaron had made)라고 번역했다.

 


Articles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