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주석, 창세기 2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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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 후처. [אִשָּׁה 잇샤] ‘부인’, ‘아내’ 또는 일반적인 ‘여자’를 가리키는 말이나 후처로 번역된 것은 언약의 자손을 낳을 합법적 아내인 사라와 구별하기 위함이다(6절, 대상 1:32).

그두라. 이름의 뜻은 ‘향기’이다.

사라가 죽은 후에 아브라함은 다시 결혼했다. 이삭처럼 사라의 죽음 후에 아브라함도 위로를 받았다(24:67). 이삭이 자기 어머니에 대해 그러했던 것처럼, 아브라함 역시 사라를 생생히 기억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새로운 아내의 정체가 불분명하다. 역사가들이 그두라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으면서 그두라의 아들들을 하갈의 아들들과 연관 지어 언급하는 것을 보면, 그두라가 하갈일 수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아브라함이 그두라의 아들들을 하갈의 아들과 같이 대한다는 점 또한 중요하다. 아브라함은 어떤 종류의 영적 영향력도 피하고자 그 아들들을 집에서 내보내고, 사라에게서 낳은 아들과 그들을 명확히 구별한다.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었고”(5절), 자기 서자들에게는 재산의 일부를 선물로 주었다(6절). ‘첩’이라고 구분한 것 또한 하갈과 마찬가지로 그두라 역시 첩이었음을 암시한다. 그두라와의 결혼에 대한 기록에 앞서 사라를 기억하는 이야기가 쓰여 있는 것 역시 그두라와 하갈이 같은 인물일 가능성을 말한다고 설명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본 장 1~4, 12~18절에서 이스마엘의 자녀들의 목록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그두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의 목록이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두라와 결혼한 후에 갖게 된 여섯 자녀를 기록해 놓은 족보의 목적은, 아마도 아브라함이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즉각적인 증거를 제공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두 번째 족보는 훗날 야곱과 마찬가지로(창 35:22~26) 열두 족속을 갖게 된(비교, 창 17:20) 이스마엘의 자손에 관한 기록이다.

 

25:2 아브라함이 그두라에게 얻은 여섯 아들들의 이름은 아람 종족들의 명칭과 일치된다.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이 부분적으로 성취된 것이다(17:4). 아브라함이 생식 불능의 나이(137세)에도 생산력을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의 언약이 자연의 한계를 능가함을 증명한다.

시므란. ‘찬양하는’이란 뜻이다.

욕산. ‘새 사냥꾼’이란 뜻이다. 남부 아라비아의 야키쉬에 사는 힘야릭 족속의 조상으로 알려져 있다.

므단. ‘분쟁’이란 뜻이다.

미디안. ‘심판’이란 뜻으로써 후에 므단과 미디안 두 족속이 한 족속으로 합쳐진 것 같다.

이스박. ‘버리는 자’란 의미이다. 에돔 땅 쇼백에 정착한 듯하다.

수아. ‘부귀’란 뜻이다. 이두매의 산 지역의 지명과 동일하다.

 

25:3 스바. 소와 나귀를 강탈하던 스바 족속의 조상(욥 1:15, 6:19)이다.

드단. 후손은 에돔의 남동쪽에 위치한 족속으로 두로의 주요한 교역민(겔 25:13)이었다.

앗수르 족속. 북부 아라비아 사람들로 팔레스타인 남쪽에 거주한 것 같다. 히브리 발음으로 아슈림인데 앗시리아와 혼동하면 안 된다.

르두시. ‘핍박을 당하는’의 뜻이다.

르움미. ‘민족’이란 뜻으로써 이들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산재한 듯하다.

 

25:4 에바. ‘어둠’이란 뜻이며 사 60:6에는 풍요로운 족속으로 나온다.

에벨. ‘송아지’란 의미이다. 헷야즈의 바누기파족과 관련이 있다.

하녹. ‘추종자’란 의미이다.

아비다. ‘지식의 아버지’란 뜻이다.

엘다아. ‘하나님이 불렀던 자’란 뜻이다.

 

25:5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구속 목적이 담긴 혈통 관계를 잊지 않고 자신의 합법적 상속자이자 언약의 후손 이삭에게 자기 모든 소유를 물려주었다. 더욱이 아브라함은 가나안땅에의 약속과 언약의 상속권까지도 물려주었다.

 

25:6 재산. [히, 마타노트] ‘선물’, ‘혜택’이란 뜻이다. 이는 이삭이 아브라함에게서 받은 ‘모든 소유’와는 달리 서자들은 재산 상속권을 요구할 수 없고 단지 주는 것만을 받을수 있는 언약 밖의 자손임을 보여 준다.

동쪽 땅. [히, 에레츠 케뎀] ‘동쪽의 땅’. 광의적인 의미로는 아라비아이다. 이삭과 서자를 다른 곳에 거주하게 한 것은 이들 사이에 발생할 소지가 있는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고 언약 자손의 순수한 혈통을 보존코자 하는 아브라함의 신중한 처사였다.

 

25:7 향년. [히, 예메 쉐네 하예] 직역하면 ‘인생 햇수의 날들’이다. 인생이란 햇수로 계수되기 보다는 하루의 날들로 이어진 연약한 존재임을 연상케 하는 히브리적 표현이다. 이는 하루 하루의 중요성을 인식시켜 준다.

백칠십오 세. 아브라함은 75세에 부르심을 받은 후 100년간의 나그네 생활을 마치고 175세에 세상을 떠났다.

 

25:8 나이가 높고 늙어서. 직역하면 ‘백발의 나이로 그 연수(年數)가 충만하여’이다. 이는 지상에서 복된 수명을 누렸다는 뜻으로 아브라함이 이 땅위에 머무는 동안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 속에 여한이 없이 풍성한 삶을 살다가 생의 승리자로 죽어간 사실을 보여 준다(잠 16:31, 20:29).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그리스의 영혼 불멸 사상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구약성경의 이 구절이 그 입장을 지지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열조’란 사후에 형성된 한 사회이며, 죽은 자들은 그 사회에 가입된다는 설명이다.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라는 표현은 당사자가 조상들의 무덤에 묻혔다는 뜻이 아니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조상들과 함께 묻히지 않았기 때문이다(창 25:8, 9). 그것은 죽는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고 주장하는데 어떤 절에는 이 표현이 죽음과 구분되어 사용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제시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논리적인 해석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이 먼저 죽은 자들의 사회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용례. 먼저 이 표현의 용례를 보면 몇 가지를 알 수 있다. 첫째, 어떤 구절에서 이 표현은 죽음을 강하게 언급할 때 사용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아브라함이 …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마지막 숨을 내쉬고]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 그 아들들이 그를 … 장사하였으니”(창 25:8-9, 창 25:17, 35:29, 참고 창 49:33, 신 32:50). 이 구절은 죽음이 지닌 종결성을 강조한다. 심지어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그렇다는 것이다. 한편 죽음과 장사가 ‘열조에게로 돌아간다’라는 표현과 나란히 언급된 사실은, 그 표현이 반드시 죽음이나 장사의 정확한 동의어는 아님을 뜻할 수도 있다. 둘째, 그 표현은 ‘죽다’와 동의어인 듯하다. 하나님께서는 아론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아론은 거기서 죽어 그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라”(민 20:26)라고 하셨다. 같은 구절이 모세의 경우(민 27:13, 31:2)와 땅을 정복했던 세대에 대해서도 나타난다(삿 2:10). 셋째, 그 표현은 ‘무덤에 장사되다’와 거의 동의어인 듯하다. 여호와께서는 요시아 왕에게 “내가 너로 너의 열조에게 돌아가서 [문자적으로 ‘나는 돌아가게 하는 자다.’]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문자적으로 ‘너는 너의 무덤에 평안히 들어갈 것이다.’](대하 34:28, 왕하 22:20)라고 말씀하셨다. 그 구절의 둘째 부분은 첫 번째 부분을 명확히 한다. 열조로 돌아간다는 것은 열조의 무덤에 묻힌다는 의미이다. 넷째, 때로 전체 구절을 사용하는 대신에 ‘죽는다’라는 의미로 ‘돌아간다’는 동사만 나타나기도 한다(민 27:13, 호 4:3, 사 57:1).

구절의 의미. 이 구절의 의미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그 구절과 사람이 죽은 후에 무엇인가가 생존한다는 것은 아무런 문맥적 연관성이 없다. 둘째, 죽은 사람(주검)이 조상에게 돌아가는 것이지, 사람을 구성하는 한 요소(예를 들어 영혼, 영)가 그런 것이 아니다. 셋째, 이는 기본적으로 죽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것은 죽음의 특별한 한 측면을 강조한다. 히브리어 표현으로 볼 때 ‘마지막 숨을 쉰다’는 죽음이 이르렀음을 말하고 ‘장사되었다’는 말에서는 죽음을 헤어짐으로 간주한다. ‘열조에게 돌아가다’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우리 조상들처럼, 우리는 죽을 것이고 무덤에서 그들과 함께할 것이다. 우리의 순례는 끝나고 우리는 앞서 있던 자들처럼 쉴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를 섬기는 자들에게는 그 이상이 있다. 넷째, 그 동사는 언제나 수동태로 표현된다. 각 사람은 돌아간다(“is gathered”). 자신의 힘으로 조상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이다. 수동태로 묘사된 것으로 보아 하나님께서 그 일을 수행하는 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왕하 22:20). 그렇게 본다면 하나님의 종들은 죽어도 잊히지 않는다는 게 그 표현에 담긴 뜻일 것이다. 그들이 죽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을 자기 백성의 일원으로 여기신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죽음 뒤의 각 사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여기시는지를 보여 준다. 그 구절 안에는 부활의 소망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25:9 이삭과 이스마엘이. 평소 화목하지 못했던 그들이 아버지 아브라함을 장사하기 위해 협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을 가져온 것처럼, 때때로 의인의 죽음이 불화의 감정을 해소하고 화목의 장을 마련할 때가 있다.

 

25:10 없음.

 

25:11 브엘 라해로이. 이 뜻은 ‘나를 감찰하시는 생존자의 우물’(16:14)이다. 하갈이 사라를 피하여 도주하던 중 샘곁에서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 위로와 축복을 받은 뒤 그 샘을 명명한데서 연유되었다.

 

25:12 12-18절은 이스마엘의 열두 아들의 이름과 그들이 정착한 지역에 대한 언급으로써 일찍이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주어진(16:10-12, 17:20, 21:13), 자손이 많아지리라는 언약의 성취이다.

아브라함에게 낳은 아들 이스마엘.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 아브라함과의 관계때문에 비록 선민의 대열에 들지는 못했지만 이스마엘이 낳은 후손들은 세상적으로 존귀케 되었으며 신정국 이스라엘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성장했다.

 

25:13 세대. [히, 톨다] 원 뜻은 ‘출생’이다. 따라서 ‘세대대로’를 ‘출생 순서대로’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게달. ‘검은 피부’라는 뜻으로써 사 21:7에는 활을 잘 사용하는 족속으로 묘사되었다. 그들의 천막은 보기좋고 내구성이 강한 것으로 유명하다(렘 49:29, 아 1:5). 아라비아 페트라와 바벨론 사이에 있는 광야에 거주했었다(사 42: 11, 시 120:5).

앗브엘. ‘하나님의 기적’이란 뜻이다. 이 족속은 사해 남서부에 거주하였다.

밉삼. ‘달콤한’, ‘즐거운’, ‘향기로운’ 등의 뜻이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25:14 미스마. ‘듣는다’, ‘주의하다’란 의미이다. 70인역과 불가타역에는 마스마로 되어 있다.

두마. ‘침묵’이란 뜻의 말. 시리아와 바벨론의 경계선에 위치한 두맛 엘드옌델에 거주했다.

맛사. ‘견디다’의 뜻. 두마의 북쪽에 있는 미사노이에 정착하였다.

 

25:15 하닷. ‘날카로움’이란 뜻이다. 이 족속은 오만과 바레인 근처의 아라비아 해안땅에 거주했다.

데마. ‘오른 손을 사용하다’란 의미이다. 주로 무역에 종사한 족속이다(욥 6:19, 렘 25:13).

여둘과 나비스. 요단 동편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민족과 가까운 족속이다.

 

25:16 촌. 성벽이 없는 임시 거주지를 의미한다(사 42:11). 즉, 이동할 수 있는 장막의 진을 일컫는다.

부락. 요새화 된 유숙지를 뜻한다(민 31:10, 아 8:9).

열두 지도자들. 이스마엘 후손의 창성함(숫자적으로나 사회적으로)을 보여 주는 구절이자 언약의 온전한 성취를 나타낸 부분이다(17:20). 특히 ‘지도자’(나시)이란 큰 무리의 지도자(겔 45:9)나 추장(30:2)을 일컫는 말로써 이스마엘 자손의 흥왕함을 대변해 주는 말이다.

 

25:17 이스마엘은 … 백삼십칠 세. 아브라함 사후(死後) 48년만에 이스마엘은 파란 많은 생을 마감했다. 비록 그에게는 언약의 후손 이삭과 같은 축복이 주어지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의 죽음에 대한 기사(8절)와 동일한 표현으로 그의 죽음을 언급한 것은 죽음 후의 상태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기 때문이다.

 

25:18 술. ‘성벽’이란 뜻이며 브엘세바와 애굽 사이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다.

형제의 맞은편에 거주하였더라. ‘거주하다’(나팔)란 ‘넘어지다’(시 10:10),’엎드러지다’(사 3:8)는 뜻으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오래 ‘정착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결국 이 부분은 이스마엘 후손들이 그들의 물려받은 땅에서 형제 민족들과 대치하면서(정복. 수탈당하지 않고) 살았음을 암시한다.

 

25:19 믿음의 조상인 아버지 아브라함과 파란만장한 인생 드라마를 연출할 아들 야곱과 비교해 볼 때 비교적 평온하고 순탄한 생을 보낸 이삭의 생애는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1) 활동적인 시기로 그의 결혼과 두 아들의 출생을 비롯하여 야곱이 밧단 아람을 향한 시기까지(25:20-28:9). (2) 노쇠 현상과 무기력함 속에서 고통을 감내하는 시기(28:10-35:29). 그는 이스라엘의 타족장들과는 달리 특이하게 부각되는 공로나 행적은 없으나 성경이 항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표기하듯(출 3:16, 왕상 18:36) 아브라함으로부터 야곱까지 이어지는 하나님의 언약의 맥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 족장들의 생애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사항은 언약의 후손(씨, the Seed)을 대망하는 것이기에 족장 개인에 대한 역사는 이런 맥락에서 추적되어야 한다.

이삭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창세기는 대부분 족장들의 역사로 엮여져 있다. 그런데 이런 역사들을 기술함에 있어서 ‘족보’를 자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족보는 단순한 인명의 열거가 아니라 그 인명을 통해 기나긴 역사를 압축, 요약한 다이제스트(digest) 역사 기록임을 알 수 있다. 본 절은 본 책의 족보 기록 중 아홉 번째 등장하는 것으로 (1) 이삭 후예의 역사성과 (2) 언약의 후손이 어떻게 이어져 내려가고 있는가를 밝혀 주며 (3) 이삭 후에 새롭게 등장하는 야곱의 생애를 조명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25:20 밧단 아람. [히, 파단 아람] ‘아람인의 벌판’이란 뜻이다. 메소포타미아의 북부 지역을 지칭하며 본래 아브라함 가문의 발생지로 간주된다. 구체적으로 리브가의 출신지를 언급하는 이유는 그녀가 혼합 민족이 아닌 언약 백성인 아브라함의 순수한 혈족으로 하나님의 기업을 소유할 자격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25:21 임신하지 못하므로. 이삭은 40세에 결혼하였으나 20년 동안 리브가를 통하여 자식을 갖지 못했다. 아브라함의 후처인 그두라는 벌써 6형제를 낳았고 그 자손들까지 번성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첩의 소생인 이스마엘 역시 이미 12형제와 12방백을 이루고 있었다. 결국 근 20년의 기도가 응답되어 나이 60세에 쌍둥이를 얻게 될 뿐 아니라 그의 후손도 번성케 된다(히 6:14, 15). 하나님의 은총이 지연될 때 10년을 견디지 못하고 첩을 얻었던 아브라함과는(16:3) 달리 이삭은 그런 실수를 범치 않았다. 하나님이 맺으신 약속의 성취는 확실하나 간혹 더딜 때가 있다(합 2:3). 이는 약속의 씨가 단순한 자연적 결실이 아닌 하나님의 은총의 산물임을 확신케 하기 위해서이다(시 127:3).

위하여. [히, 레노카흐] ‘마주 대하여’란 전치사이다. ‘간구하매’와 함께 사용되어, 항상 누구를 염두에 두고 기도한다는 의미이다.

간구하매. [히, 아타르] ‘향을 피우다’란 어근에서 유래한 말로써 성도의 기도가 향연과 같이 올라감을 비유한다(Gesenius).

 

25:22 싸우는지라. [히, 라차츠] ‘압박하다’, ‘깨뜨리다’ 등의 뜻이 있으나 본문에서는 ‘서로 요동하다’는 번역이 적합하다. 즉 복중의 태아가 격한 몸부림을 했다는 뜻이다. 이는 쌍 태아의 복중 싸움으로 인한 현상이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간섭으로 임신케 된 리브가는 정상적인 태아의 운동 이상의 요동으로 인하여 놀랐다.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이 말은 다음 세 가지 사실을 내포한다. (1) 임신의 고통으로 인한 육체적 괴로움의 하소연(Rosenmüller). (2) 복중의 태아가 요동하다가 유산하면 어찌할까라는 정신적 갈등, 그리고 (3) 신적 은총으로 잉태한 아이가 뱃속에서부터 싸우는 데서 연유한 영적인 불안감을 토로하는 의미다. 즉, 리브가는 자기 태중에 있는 아이들의 싸움에서 육체적인 괴로움과 정신적 갈등과 영적인 불안감을 동시에 느꼈던 것이다. 한편 리브가의 이 예감은 원시 복음(3:15)에 계시된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의 싸움, 즉 영육간의 싸움(롬 7:15-22)과 종말에 있을 그리스도와 사탄간의 우주적인 투쟁(계 20:1-3, 10)을 쌍태의 싸움으로 예고한 하나님의 신비로운 계시였다.

 

25:23 국민. [히, 고이] 단수로는 ‘나라’, ‘국가’이고 복수는 ‘열방’, ‘이방’, ‘이방인들’, ‘이방사람’, ‘민족’, ‘만민’, ‘국민’, ‘족속’, ‘거민’ 등으로 번역되었다. 여기서는 이스라엘과 에돔의 두 ‘민족’을 지칭한다.

태. [히, 베텐] ‘비어있다’는 어근에서 유래한 말이며 ‘태, 자궁, 배, 몸’으로 번역된다.

복. [히, 메에] ‘부드럽다’는 뜻의 어근에서 유래, 오직 복수로만 사용된다. ‘복부’, ‘배’, ‘자궁’으로 쓰였으며 상징적인 의미에서 동정심을 가리킬 때도 있다.

강하겠고. [히, 아마츠] ‘강하다’, ‘담대히 하다’, ‘굳세게 하다’, ‘힘있게 하다’는 뜻의 미래 미완료형으로써 계속적인 강성함을 계시한다. 이는 이스라엘이 상대국 에돔보다 지속적으로 모든 면에서 앞서 나갈 것을 예견한 말이다.

섬기리라. [히, 아바드] ‘일하다’, ‘봉사하다’, ‘경작하다’, ‘노예의 신분이 되다’, ‘노동하다’란 뜻의 미래 미완료로 에돔 족속이 이스라엘의 지배 아래 있게 될 것을 암시한 말이다.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 섬기리라. 예언적인 신탁의 형태로 표현된 이 대답은 한 태 속에서 두 국민과 두 민족의 창시자인 야곱과 에서가 출생하여 그후 야곱의 장자권 계승과 더불어 그들의 후손인 이스라엘과 에돔 사이의 뿌리깊은 갈등과 반목 그리고 이미 승부가 결정난 필연적인 싸움이 계속되리라는 예언이다. 결국 이 예언은 야곱 자손이 에서의 자손을 정복했던 출애굽 사건과 다윗의 치세중에 여자적으로 성취되었다(삼하 8:12, 13, 대하 21:8). 더 나아가 바울은 영적 해석으로 이 예언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 교리를 설명했다(롬 9:10-23, 말 1:2-4). 따라서 본 예언은 사람의 구원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과 그의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구절로 이해되어야 한다.

 

25:24 기한. [히, 욤] 문자적으로는 ‘날’로써 일출에서 일몰까지, 또는 일몰에서 다음 일몰까지를 의미하거나 제한된 시간이나 기한을 의미한다(1:5의 주석을 참고하라).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이다.

 

25:25 붉고. [히, 아드모니] ‘아담’이란 히브리 말에서 유래한 말로써 ‘머리, 팔 또는 안색이 붉은’이란 뜻이다. 이는 혈기 왕성했던 에서의 성격과 조화를 이루는 외모의 한 특징이다.

털옷. [히, 에데르 세아르] 직역하면 ‘털이 많은 겉옷’이다. ‘전신이 털옷 같다’는 말은 신생아의 외모가 기이하게 붉은 털로 싸여져 있다는 말로 그의 야성적이고 육욕적인 성품을 예견케 한다(Kalisch, Keil). 후에 그는 들판을 돌아다니는 사냥꾼이 되어 아버지가 즐기던 음식올 대접하여 부친 이삭의 사랑을 독점했다.

에서. [히, 에사우] 이름의 뜻은 ‘거친’, ‘털이 많은’이다. 이는 그의 열정적이고 동물적인 기질을 대변해 준다(Murphy). 에서는 피부가 붉었으므로 ‘에돔’이라고도 하였다.

 

25:26 발꿈치. [히, 아카브] 이는 ‘발뒤꿈치를 잡는다’, ‘속이다’, ‘불의로 남의 뒤를 친다’(27:36), ‘발뒤꿈치를 든다’(시 41:9) 등의 뜻을 갖는다. 한편 발꿈치를 잡고 출생한 것에 대한 해석으로는 이 말이 (1) 지극히 짧은 시간적 격차를 묘사한 말이다(Bush) (2) 야곱이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으려는 듯이 바짝 뒤쫓아서 나온 모습을 말한다(Delitzsch) 등의 견해가 있다. 그러나 호 12:3에서의 인용은 문자 그대로의 해석을 정당화한다(Keil). 허나 우리가 집중 추적해야 될 사실은 이런 의학적인 난제가 아니라 영적이고 예표적인 의미를 지닌 하나님의 섭리이다.

야곱. [히, 야아콥] 어근 아카브는 ‘발뒤꿈치’(heel, 3:15, 호 12:3) 또는 ‘발뒤꿈치를 잡는다’란 뜻과 ‘뒷면’이란 의미가 있어 나쁜 의도로 사용될 때는 ‘남을 사취하는 자’(27:36), ‘거짓되다’(렘 9:3, 17:9), ‘발꿈치를 든다’(시 41:9)는 뜻을 내포한다. 기이한 출생에 의해 붙여진 그의 이름은 이와 같이 좋지 못하나 훗날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태어났을 때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즉 이스라엘(32:8)이라는 한 영광된 이름을 얻게 되었다.

 

25:27 장성하매. [히, 가달] 육체, 정신, 소유, 명예, 또는 자존심 등의 측면에서 ‘크게 되다, 자라나다, 확대되다’란 뜻이다. 가사를 충분히 분담할 수 있는 연령에 도달했음을 암시한다.

익숙한. [히, 야다] ‘알다’(12:11), ‘깨닫다’(출 34:29), ‘습득하다’, ‘동침하다’(4:1)란 뜻으로 단순한 지식을 의미하지 않고 체험적으로 안다는 말이다. 에서의 능숙한 사냥솜씨를 암시한다.

사냥꾼. [히, 차이드] ‘곁에 엎드리다’, ‘쫓다’란 어원에서 유래한 말로 ‘예비하다’(수 9:5), ‘양식’(수 9:14), ‘식물’ (느 13:15)로도 번역됐다. 에서의 민첩한 기질과 양식을 위해 사냥업에 종사했음을 보여 준다.

들. [히, 사데] ‘뻗치다’는 어근에서 유래되어 ‘밭’(23:17), ‘전지’ 등으로도 번역되나 앞의 ‘사냥꾼’이란 말로 보아 ‘들판’, ‘초원’이 적합하다. 결국 ‘들 사람’이란 농부가 아니라 넓은 초원을 가로지르며 사냥을 일삼는 자를 가리킨다.

사람. [히, 이쉬] ‘현존하다’, ‘강하다’란 어원에서 유래하였다. 이 말의 용법은 짐승과 대립되는 경우에(출 11:7), 또는 여자(2:23)나 하나님(32:28)과 대립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아담’이 흙으로 된 허무함과 비참성을 지닌 인간을 표현한다면, ‘이쉬’는 능력을 지닌 인간을 나타낸 말이다(시 42:9, 62:9). 여기서는 에서의 야성적인 늠름함을 암시하기 위해 사용된 듯하다.

조용한. [히, 탐] ‘완성하다’에서 유래하여 ‘순전한’(욥 1:1), ‘완전한’(시 64:4), ‘온전한’(잠 29:10)등의 도덕적인 용례가 많으나 여기서는 강한 인상을 풍기는 에서와 대조적으로 단지 야곱의 평온하고 단순한 면(Luther)을 표현한 듯하다(고전 1:26-29).

장막에 거주하니. ‘거주하다’는 ‘야샤브’로 ‘머물다’(13:12), ‘거주하다’(출 12:40). ‘앉다’(삿 3:5), ‘우거하다’(26:17)로 번역된다. 야곱은 가정적인 사람으로 집안에 머물기를 좋아했으며 부친을 계승하여 전형적인 목양에 종사한 듯하다.

 

25:28 사냥한 고기. [히, 파아 차이드] 문자적으로 ‘그의 입 안에 있는 사냥물’이다(LXX). 에서가 사냥하여 얻은 고기를 계속적으로 즐겨 왔던 이삭의 습관을 알 수 있다.

좋아하므로. [히, 아하브] ‘애정을 갖다’, ‘사랑하다’는 뜻으로 선택의 원인이 사랑에 있음을 표현할 때 사용된다(신 10:15, 말 1:2-3). 반면에 불선택의 미움을 의미할 때는 ‘사네’ 란 말이 사용된다(말 1:3). 또한 하나님이 베푸시는 언약적 사랑을 표현할 때는 ‘헤세드’란 말을 썼다(신 7:9, 미 7:20, 왕상 8:23). 본문에서는 에서를 편애한 이삭의 선택적 사랑이 에서의 사냥한 고기 때문임을 밝힌다. 결국 이러한 부모의 편애가 자녀에게 끼친 영향을 두 아들의 생애와 그 후손의 역사에서 볼 수 있다.

 

25:29 죽. [히, 나지드] ‘끓어오르다’에서 유래한 말로 끓인 음식, 즉 ‘수프’, ‘진한 국’을 의미한다. 오늘날에도 팔레스타인에서 재배되는 적갈색의 렌즈 콩에다 양파, 쌀, 그리고 올리브 기름을 섞어 만드는 음식이 있다(삼하 17:28, 23:11).

곤비하여. [히, 아예프] ‘기운이 없어지다’란 뜻이다. 지쳐서 기력을 상실한 상태를 묘사한 말이다(욥 22:7, 시 63:1, 삿 4:21).

 

25:30 붉은 것. [히, 아돔] 원문에는 이 말이 두 번 반복되어 ‘그 붉고 붉은 것’으로 나온다. 에서가 팥죽의 붉은 색깔에 자극받은 식욕 때문에 지극히 흥분한 상태에 있음을 묘사한다(Wordsworth). 본래의 붉은 피부에다 이 붉은 팥죽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이후 사람들은 그를 에돔(‘붉다’는 뜻)이라고 불렀다.

먹게 하라. [히, 할이테니] 직역하면 ‘나로 돌이키게 하라’로 에서의 왕성한 식욕을 드러낸다.

 

25:31 장자의 명분. [히, 베코라] 기본 어근인 ‘태를 열다’에서 파생된 말로 사람이나 짐승의 ‘초태생’과 추상적으로는 ‘장자의 상속권’을 의미한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의 처음 출생한 자가 갖는 특권과 책임은 다음과 같다. 외적 특권으로 (1) 아비의 뒤를 이어 가장이 되어 가문의 대소사(大小事)를 처리할 수 있는 주도권(27:1-45, 대하 21:3)과 (2) 다른 형제에게 할당된 유산의 두 몫을 분배받을 수 있는 자격(신 21:15-17)을 가진다. 내적 특권으로 장자는 (1)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한 가정의 대표자로서 모든 일을 수행함과 동시에 (2) 언약 관계에서 영적 축복의 후계자가 된다. 또한 책임도 병행하는데 그것은 부친의 노후나 사후, 모친과 미혼 자매들을 부양해야 할 의무이다.

오늘. [히, 카욤] 직역하면 ‘오늘처럼’이나 여기서는 ‘빨리’, ‘우선적으로’를 뜻한다(삼상 2:16, 왕상 1:51).

팔라. [히, 마칼] ‘팔다’, ‘양도하다’의 강조 명령형이다. 야곱이 이런 장자권의 소유를 위한 흥정을 하게 된 배경에는 (1) 그가 평소에 장막에 머물때 장자권의 영적 축복을 부모로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반면, 에서는 장자권의 가치에 관해 무지하므로 가능했고 (2) 과거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기는 언행을 자주하는 것을 눈여겨 보아 왔었고 (3) 사전(事前)에 이 문제를 놓고 농담조의 대화가 빈번하여 에서의 경계심이 해이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행위에 있어서 굶주림에 처한 형의 처지를 이용해 장자권을 흥정한 처사는 정당화 될 수 없다. 이것은 야곱의 고달픈 인생 여정의 한 원인임을 알 수 있다.

 

25:32 내가 죽게 되었으니. [히, 히네 아노키 호레크라모트] 직역하면 ‘보라 나는 죽음의 지경에 이르렀으니’이다. 에서의 이 대답에 대한 해석들로는 에서가 (1) 너무 굶주려 죽어가는 급박한 위경에 도달했다는 것과(Calvin) (2) 사나운 짐승을 쫓음으로 인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말과 (3) 삶의 종국적 결과가 죽음이니 장자권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란 견해 중 에서가 평소 취했던 경박한 태도를 보아 지금 당장 배고파 죽게 되었는데 장자권이 무슨 소용이냐는 식의 현실 지상주의의(Keil) 셋째 견해와 의미가 통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 유익하리요. [히, 라마 제] 직역하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이다. 에서가 한 이 말의 의도는 (1) 지금 아사(餓死) 직전에 있는데 장자권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2) 내가 죽으면 야곱이 대신 장자권을 차지할텐데 장자의 명분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라는 순간적 욕망을 추구하는 두 의중이 복합된 듯하다.

 

25:33 맹세하고. [히, 샤바] 완전 수인 ‘일곱’이란 명사에서 유래하여 ‘일곱번 말하다’ 즉 ‘서약하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맹세는 하나님의 권능과 심판 아래 쌍방간에 맺은 약속을 신실히 이행할 것을 서약하는 성스러운 의식으로써 그 약속한 바에 대한 신뢰성을 높이는 방법으로 사용되었다(출 22:11, 민 5:19).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구약 당시 장자권의 상실은 (1) 본 절처럼 본인의 의사로 맹세를 통하여 직접 양도할 때 (2) 서자가 장자일 경우 합법적인 아내가 그후 아들을 낳아 장자의 명분을 요구할 때(21:10) (3) 아비의 직권으로 다른 아들을 선택할 때(48:22, 대상 26:10) (4) 중죄에 대한 징벌로 박탈당할 때(49:3, 4, 대상 5:1) 합법적으로 가능했다. 성경 기록과 유사한 풍습이 기록된 아카드어 토판인 누지서판(Nuzi Tablets)에는 한 형제가 상속받은 숲을 다른 형제에게 세 마리의 양을 받고 팔고 있는 상속권 거래에 관한 실례가 소개되어 있다.

 

25:34 떡. [히, 레헴] 어근 ‘먹다’에서 유래하여 식량, 곡물, 빵 등을 포괄하는 말이나 여기서는 죽과 함께 먹는 빵을 의미한다.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히, 와야칼 와예쉐트 와야캄 와예라크] 직역하면 ‘그리고 그가 먹었다. 그리고 그가 마셨다. 그리고 그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가 갔다’. ‘와우’(그리고) 용법으로 계속 이어지는 본 절은 자신의 행동에 관하여 생각할 여지를 두지 않고 일을 해치우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목전의 욕심만 채우기에 급급한 육적 사람의 상태를 생생히 묘사했다.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히, 바자] ‘업신여기다’, ‘경멸하다’는 뜻이다. 본 절에서는 와우 용법으로 앞의 문장인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에 연결됐다. 어리석은 행위에 대하여 전혀 뉘우치는 빛이 없는 에서의 완강한 태도를 보여 준다. 인류의 첫 조상 아담과 하와가 영생을 금단의 열매와 바꾼 이래(3:6) 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지정의(知情意)가 마비되어(엡 2:1-3, 4:8) 무분별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히 12:16은 에서를 가리켜 ‘망령된’(베베로스) 자라 일컫는데 이는 ‘속된’ 혹은 ‘불경건한’이란 뜻으로 속된 욕심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축복의 기회를 하찮게 다루는 자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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