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주석, 창세기 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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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롯과 함께. 애굽에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던 롯이 여기서 다시 나타난다. 이는 아브람과의 언약 관계 속에서만 롯이 그 의미를 지니기 때문인데(12:4), 이것은 그의 후손 암몬과 모압 족속 역시 항상 이스라엘과의 관계 아래에서만 신정사(神政史)에 그 모습을 나타낸 것과 같다(신 23:3, 삿 3:13-14, 왕하 24:2).

네게브로 올라가니. 애굽 쪽에서 보았을 때에 정확한 방향은 북쪽으로 올라간 것이 된다. 즉 아브람 일행은 남하할 때의 순서와는 역순으로 네게브를 거쳐 벧엘과 아이 부근(3절, 12:8)으로 올라간 것이다. 한편 여기서 ‘올라가다’는 말은 가나안 땅보다 낮은 지대인 애굽에서 팔레스타인 산지 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나타낸 표현이다.

 

13:2 풍부하였더라. [히, 카베드] 원뜻은 ‘무겁다’로 미처 다 관리할 수 없을 만큼 차고 넘친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아브람이 하란에서 모은 소유(12:5)에 바로로부터 받은 예물을 더하였기 때문인데(12:16) 굳이 이러한 사실이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까닭은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의 향방을 암시하기 위함이다(6절).

 

13:3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애굽에서 네게브에 이른 뒤 잠시 휴식한 후 다시 행진한 것을 나타내 준다. 이처럼 길을 가면서 정기적인 휴식을 취하는 것은 사람 뿐 아니라 가축들을 고려한 유목민들의 전형적인 여행 방식이다(33:13-14).

 

13:4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제단을 쌓은 것만을 가리킨다면, 두 번째로 제단을 쌓은 곳이다(12:8). 아브람이 하나님께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은 세겜이었다(12:6-7). 그러나 세겜에서는 단순히 하나님의 현현을 기념하기 위하여 단을 쌓았을 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공적 예배를 드리기 위해 단을 쌓았던 곳은 벧엘이 처음이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이 말은 공적 예배를 가리킨다. 아브람이 애굽에서의 잘못을 회개하며 하나님께 찬송과 감사로 진실한 기도를 드리고 새 삶에의 결의를 다진 것을 뜻한다(시 18:49, 50:51). 이처럼 신앙인도 범죄하며 넘어질 수는 있으나 그 때마다 하나님을 처음 만났던 뜨거운 체험을 상기하며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계 2:4-5).

 

13:5 장막이 있으므로. 유목민들은 대개 사람들이 휴식하며 거처하기 위한 장막 뿐 아니라 가축들을 위한 별도의 장막도 아울러 준비해 가지고 다녔다. 그런데 롯에게 이러한 장막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언급된 이유는 그에게도 아브람 못지않게 딸린 사람과 가축이 많았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13:6 그 땅이 …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가나안 땅에 임했던 기근(12:10)이 완전히 해결되지 못한 탓에 많은 가축을 방목할 목초(牧草)와 물이 부족했던 것도 요인 중의 하나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많은 재물이 도리어 근심이 된 경우이다(딤전 6:10). 즉 두 가정은 각각의 재산이 많아지자 서로의 재산을 돌보기에 급급하였으며 그 결과 지금껏 유지해 왔던 화목한 관계가 깨어지게 된 것이다(약 4:1). 이처럼 세상에는 재물 때문에 우정과 가정이 파괴되는 경우가 흔한데 성도들은 세상 모든 물질이 하나님께로 부터 주어지는 것(대상 29:12, 마 6:25-32)임을 깨달아 지나치게 땅의 것에 집착하는 삶을 삼가야 할 것이다(마 6:33, 눅 12:15-21).

 

13:7 목자가 서로 다투고. 아브라함과 롯의 양 가정의 분쟁이 먼저 목자로부터 비롯된 것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좋은 목초지와 샘의 근원을 확보하여, 가축 사육에 지장이 없도록 하는 최우선적인 임무는 목자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26:20). 특히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더하면 더할수록 양가 목자들 사이의 반목과 다툼은 더하였을 것이다.

가나안 사람과 …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아브람의 가정과 롯의 가정이 서로 분쟁하게 된 간접적인 이유이다. 즉 아브람 일행이 장막을 친 곳은 임자 없는 지역이 아니라 이미 원주민이 주거하고 있던 지역이었으니 한정된 주거 면적 안에서 상대편보다 더 유리한 목축지를 선점하기 위해서는 다툼이 불가피하였을 것이다.

 

13:8 친족. 문자적으로는 ‘형제(친척)인 사람’. 아브람이 이 점을 강조한 까닭은 자신들간의 집안 싸움이 여호와의 성호에 누를 끼침은 물론 결코 자신들에게나, 원주민에게도 덕이 되지 않음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또한 서로간의 다툼은 그 지역 원주민들이 자신들을 공격하고 추방하는 좋은 계기로 삼을 수 있음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다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리바’는 ‘주먹다짐’ 보다는 대개 ‘말다툼’이나 ‘논쟁’을 의미한다(신 19:17, 욥 31:13, 잠 18:6). 물론 성도들간이라고 이러한 말다툼이 전혀 없을 수는 없으나 그러한 때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며 자신의 주장을 일보 양보하는 지혜와 미덕이 필요하다(잠 10:12, 13:10).

 

13: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사해 연변을 따라 벧엘에서 소알까지 펼쳐져 있는 광활한 땅 뿐 아니라 요단 강 양편을 따라 형성되어 있는 비옥한 평지도 함께 가리키는 것 같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예수의 산상수훈을 연상시켜 주는 말로써(마 5:38-42) 참된 신앙에서 비롯된 아브람의 겸허하고 관대한 인격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이러한 양보는 세속적 처세술(12:10-13)을 완전히 초월한 여호와 신앙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빌 2:3, 4). 아무튼 아브람의 자기 희생적 대 양보는 (1) 둘 사이의 불화의 틈을 탄 원주민들의 기습 공격 가능성을 막았으며 (2) 롯과의 종교적 화평을 유지, 이방 사회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지 않았고 (3) 아브람이 더욱더 하늘 분깃만을 의뢰하게 됨으로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덕망을 쌓게 된 3중 효과를 거두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공동체가 화평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의 자기 희생이 필요하다는 사실과 아울러 그 희생은 결국 모두를 살리는 길이라는 교훈을 깨닫게 된다.

 

13:10 눈을 들어 … 바라본즉. 단순히 좌우를 둘러보았다는 뜻이 아니라 이것 저것 세속적인 여러 조건을 따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즉 롯은 탐욕에 찬 눈과 마음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으로 이용하기에 급급하였을 것이다.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요단 강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벧엘 지경과는 달리 강 좌우변에 위치한 요단 평지는 모압 산맥으로부터 흘러내려오는 풍부한 수원 덕분에 평상시의 가뭄하에서는 그다지 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애굽 땅과 같았더라. 애굽은 천혜(天惠)의 보고인 나일 강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일찍부터 관개 수로 시설이 잘 되어 있어 비옥한 땅이 많았다. 특히 나일 삼각주(Delta)지경은 세계적인 옥토로 이름나 있다.

 

13:11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롯은 아브람의 조카로 하란을 떠난 이래 줄곧 아브람의 영향하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보호자이자 후견인인 아브람에게 아들과 같은 의무를 이행해야 마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택권을 행사함에 있어서 아브람에게 양보할 줄 몰랐고 세속적 이해 관계에만 눈이 어두워 이기적 선택을 하였다. 그에게는 아직도 세속적이고 물질 중심적인 애굽의 정신이 남아 있었다. 따라서 그의 이러한 이기적 선택은 미구에 닥쳐 올 모든 불행을 자초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이러한 분리는 양가 사이의 불화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아브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작용하였다. 즉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불러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명하셨다(12:1). 따라서 아브람이 롯과 함께 있는 한 여전히 아비 집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가진 상태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서 롯을 분리시킨 것이다.

 

13:12 가나안 땅. 넓은 의미에서는 팔레스타인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해안 지대 및 내륙지대를 모두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브람이 롯에게 양보한 요단 평지를 제외한 그 일대의 산지를 뜻한다.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세속적 부와 향락에 끌려 동으로 점점 옮기다가 죄악의 도성 소돔에까지 들어간 롯의 행적(14:12)은 세상 명예와 물질에 눈이 어두워 신앙의 세계를 떠나 점점 죄악의 세계로 빠져들어가는 타락한 신자의 전형이다. 그 결과는 비극일 수 밖에 없는데 롯 역시 포로신세, 가산의 몰락, 아내와 사위의 상실, 딸과의 불륜 등 온갖 참상을 겪게 되었다.

 

13:13 여호와 앞에. 직역하면 ‘여호와께 대하여’ 혹은 ‘여호와께서’. 이는 인간이 범하는 모든 죄악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범죄하는 것임을 강조해 준다(시 51:4 참조).

큰. [히, 메오드] ‘심히’(1:31), ‘강렬’(출 10:19), ‘풍부’(13:2), ‘번성’(47:27)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데 소돔인들의 죄악의 정도가 그 양과 질에 있어서 상식선을 넘어선 매우 심각한 것임을 시사해준다.

 

13:14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직접 현현하시어 이 말씀을 주셨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조카 롯을 떠나 보내고 적막한 가운데 처해 있는 아브람에게 임한 위로와 확신(12:2)의 약속이다.

눈을 들어 … 바라보라. 롯과의 결별로 인한 인간적 고독과 상심을 극복하고, 또한 롯처럼 탐욕의 눈이 아닌(10절) 믿음과 소망의 눈으로 약속의 땅(12:7)을 바라보라는 말이다. 이 장면은 훗날 비스가 산 정상에서 모세에게 가나안 땅을 보여 주신 하나님의 행동을 연상시킨다(신 34:1-4). 이와 같이 믿음은 갖지 못한 것을 소유하며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신앙이다(히 11:1). 따라서 신자는 신앙의 눈으로 하늘 가나안 곧 천국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히 11:15, 16).

 

13:15 보이는 땅.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지상의 땅 가나안 뿐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천상의 땅 가나안까지 염두에 둘 때 그 의미는 보다 새로워진다.

네 자손. 가나안 땅을 천국의 모형으로 이해할 때, 이는 지상 가나안의 실체인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모든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엡 3:6)을 포함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영원히 이르리라.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변역될 수 없다. 그러나 그 약속의 효력은 이를 믿고 받아들이는 자에게만 미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제1세대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약속의 땅에 대한 소망을 저버린 결과 그 땅을 상속받지 못한 것(민 14:26-38)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13:16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12:2)는 약속을 보다 강조한 표현이다. 계속해서 ‘하늘의 뭇별’(15:5), ‘바닷가의 모래’(22:17)로 이어지는 후손에 대한 약속은 당시 늙고 무자(無子)한 아브람에게는 꿈과 같은 소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약속은 역사적으로도(왕상 4:20), 영적으로도 성취되었으니(마 8:11, 롬 4:16, 갈 3:7) 하나님의 약속은 마침내 성취되며 또한 하나님 안에서는 능치 못할 일이 없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18:14, 막 9:23).

 

13:17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아브람이 현재 발딛고 있는 땅이 곧 그의 후손에게 상속될 바로 그 땅(12:7)임을 확신하게 하기 위한 탐방 명령이다.

 

13:18 이에. 하나님께서 명령한 즉시 행동에 옮긴 신속성을 나타낸 단어로 아브라함의 신앙의 성숙성이 엿보인다.

헤브론. 벧엘 남방, 예루살렘 남쪽 약 30여 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으로 본래 명칭은 기럇아르바이다(23:2). 훗날 여섯 도피성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수 20:7) 다윗이 이곳에서 7년 반을 치리하기도 하였는데(삼하 2:1-4, 11) 이스라엘 신정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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