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주석, 창세기 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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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יְהוָה 야훼’란 신(神)명칭을 본 장에서 일관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은 본 책 기자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선택된 백성을 향한 그 분의 언약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증언해 준다(2:4).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일반 사람들도 들을 수 있는 말씀으로 아브람이 계시를 받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브람의 심령 속에 내적으로 임했는지 분명치 않다. 다만 ‘이르시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마르’의 의미가 대개 ‘말한다’, ‘이야기한다’란 점에 비추어 볼 때 전자일 가능성이 크다.

고향. 혹자(Calvin)는 이를 ‘우르’로 이해하고 아브람이 구체적 소명을 받은 때를 우르에 있을 때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11:31). 그러나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후 떠난 곳이 ‘하란’인 점에 입각할때(4절) 이는 하란, 더 나아가 우르와 하란을 포함하는 메소포타미아 전지역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떠나 … 가라. ‘누가 네 뒤에 남든지 상관 말고 너를 위하여 떠나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교 역사는 이러한 떠남과 분리의 역사인데 오늘날 우리 성도들 역시 죄악된 이 세상에서 분리되어 의와 거룩함을 따르는 순례의 길을 떠나야 한다(롬 12:2).

내가 네게 보여 줄 땅. 직역하면 ‘내가 네게 보여 줄 그 땅’. 여기서 ‘보여 줄’ 은 미래 미완료형으로 아직까지는 보여지지 않으나 미래에는 구체적으로 보여질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땅’은 아브람으로서는 불명확하나 하나님으로서는 이미 작정해 놓은 가나안 땅을 의미한다.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Living Bible은 문두(文頭)에 ‘네가 그렇게 하면’(If you do)이란 말을 부기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큰 민족’ 이란 단순한 숫자적으로 인구가 많은 것 뿐 아니라 영적으로 위대한 민족을 가리키는 바 곧 ‘이스라엘’ 에 적합한 명칭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그의 적은 수의 친척을 떠나기만 하면 (1절) 그 보상으로 오히려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시리라고 보장하셨다.

네게 복을 주어. 아직껏 무자(無子)한 아브람(11:30)이 많은 무리의 아비가 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있는 근거이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분이니 그분께서 원하시고 또한 복을 내려 주시기만 하신다면 인간적인 모든 제약은 사라지고 만다(롬 4:18).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직역하면 ‘내가 네 이름을 크게 할 것이다’이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유명하게 하여 그 이름이 길이 회자(膾炙)되게 하시겠다는 뜻이다. 실제로 역사 속에서 아브람의 이름은 위대하게 되었다. 즉 열국의 아비(17:4, 5), 선지자(20:7), 하나님의 방백(23:6), 여호와의 종(시 105:5, 6) 하나님의 벗(약 2:23) 등의 명칭을 부여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은 선민 이스라엘의 시조(始祖)로서, 또한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는 영원한 믿음의 조상으로서 길이 남게 되었다. 이처럼 사람을 높이시는 이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이시니 겸손한 자는 높이 들림받지만 무릇 스스로 높아지려는 자는 낮아지고 말 것이다.

너는 복이 될지라.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예 베라카’는 곧 ‘너는 복이 될지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말이 함죽하고 있는 의미에 대하여는 다양한 견해가 제시된다. (1) 아브라함으로 인한 물질적 풍요(슥 8:12)를 의미한다(Gesenius, Rosenmüller). (2) 사람들이 서로 축복할 때 아브라함의 이름을 빌어 축복하는 축복의 양식(樣式)이 된다는 뜻이다(Calvin, Knobel, Kimchi). (3) 여기서 복은 영적인 복으로써 곧 아브라함은 그로 말미암는 복의 기준이 되리라는 뜻이다(Keil, Delitzsch, Kalisch). 이상의 견해를 종합해 볼 때 물론 첫 번째와 두 번째 견해도 일면 타당성이 있지만 가장 타당한 듯한 견해는 세 번째 견해이다. 그런데 여기서 아브라함으로 말미암는 영적 축복이란 단순히 아브라함 개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궁긍적으로는 그의 가계(家系)에서 약속된 ‘여자의 후손’(3:15)인 메시아가 나리라는 뜻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과 영생은 누구든지 그를 믿기만 하면 미칠 수 있는 것이니(살후 2:13, 14) 그 같은 메시아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가리켜 ‘복’이라 칭함은 당연하다.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 내가 저주 하리니. 하나님과 아브람과의 각별한 관계를 나타내는 이 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상호 공수 맹약을 맺으시겠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제 아브람의 이웃은 아브람과의 관계에 따라 그들도 각각 하나님께 축복과 저주를 받게 될 것을 의미한다. 이 원리는 신약 시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여기서의 ‘저주’(칼랄)는 ‘감소시키다’, ‘낮게 여기다’ 는 뜻으로 곧 남을 멸시하거나 하찮게 여기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과 특별 맹약을 맺은 하나님의 종 아브람을 멸시하는 행위는 곧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가 된다는 뜻이다.

내가 저주하리니. 여기서의 ‘저주’(아라르)는 하나님의 법에 따른 공적 저주를 의미 하는데 이에는 구체적이고도 직접적인 징계 조치와 형벌이 따르게 된다(삼상 2:30-33).

땅의 모든 족속이 … 얻을 것이니라. ‘복’(2절)에 대한 보충, 확대 설명이다(갈 3:8). 축복은 타락 결과 인간에게 주어진 저주(2:17, 3:16-19)와는 정반대되는 것이니, 이러한 축복은 단순한 물질적 축복 뿐 아니라 죄를 사해 주는 영적 축복을 포함한다(Calvin, Keil, Luther). 즉 본질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구상의 모든 민족이 자신의 죄에 대하여 해결받고 진정한 삶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리라는 복된 언약이다(눅 24:47).

 

12:4 여호와의 말씀. ‘말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다바르’는 ‘명령’을 의미한다(27:19, 왕상 12:12). 따라서 이는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행동의 절대 기준으로 삼았으며 말씀의 권위를 존중, 어김이 없었음을 나타내 준다(22:1-12).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롯이 아브라함과 함께 메소포타미아를 떠난 사실이 거듭 언급되고 있는 까닭(11:31)은 그가 이후 아브라함과의 관계에서 많은 족적을 남겼기 때문이다(13:1-13, 14:13-16, 19:1-28).

아브람이 …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라함의 향년이 일백칠십오 세였으니(25:7) 이때는 그의 중년기이다. 대개 중년기의 사람들은 현실에 안주하려 하며 변화를 기피하려는 것이 일반적인데, 갈 바를 알지 못하고서도 지체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고향 집을 나선 아브람에게서 우리는 진정한 용기와 신앙의 결단력을 보게 된다(마 4:18-22).

 

12:5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 연로한 부친 데라로 말미암아 뜻하지 아니하게 체류하게 되었던(11:31) 하란 거주 생활이 비교적 오래 지속되었음을 나타낸 준다. 한편 당시 아브람과 롯은 유목인이었으니(13:5) 그들의 모슨 소유물은 대부분 가축이었을 것이다(13:2).

얻은 사람들. 직역하면 ‘획득한 자들’. 대족장 아브라함 집에 속한 남녀 종들과 그들의 자식을 가리킨다. 일손이 부족한 아브람에게 많은 가축을 돌보기 위해서는 부득이 종들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본 절은 마치 아브람이 목적지를 알고서 길을 떠난 듯이 오해할 수 있는 구절이다. 그러나 이는 11:31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결과 필연적으로 도달할 수 밖에 없는 작정된 땅이 바로 가나안임을 일깨워 주는 구절일 뿐이다(1절).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하란에서 가나안까지는 약 480 km정도의 거리인데 당시의 여행으로 미루어 보아 아브람 일행은 유프라테스 강변을 따라 시리아에 도착, 그곳 광야를 횡단하여 다메섹에 이른 후 가나안으로 직진하였을 것이다.

 

12:6 모레 상수리나무. [히, 엘론 모레] ‘본다’는 뜻을 가진 ‘라아’로부터 파생된 ‘모레’는 종교적인 의미에서 ‘가르치는 자, 선생’을 뜻하는데 ‘예언자’로 번역될 수도 있다. 그리고 ‘강하다’란 뜻을 가진 ‘울’로부터 파생된 ‘엘론’은 상수리나무 처럼 재질(才質)이 강하며 병충해도 잘견디는 나무를 가리킨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모레 상수리나무’를 고대 이교도들이 신탁(oracle)을 받을 때 사용하던 ‘예언자의 나무’로 본다. 그러나 ‘마므레’와 같이(13:18) ‘모레’가 단순히 상수리나무 숲을 소유한 주인의 이름일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Alford, Murphy, Kalisch).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아브람이 세겜에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 벧엘과 남방으로 옮겨 가게 된 이유 중의 하나이다(8-9절). ‘가나안 사람’은 함의 후예(10:6)로 우상숭배 행위에 탐닉하며 배타심이 강하던 족속이었으니 아브람이 그들 가운데서 생활하기란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가나안 사람. ‘가나안’이 서부 팔레스타인 전역을 가리키듯이 ‘가나안 사람’도 어떤 특정 족속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정착하기 이전 시대의 가나안 거주민들을 말한다. 그 사람들 중에 아모리 족속이 B.C. 2000년기에 메소포타미아에서 온 이주민으로 처음 나타났다. 구약의 몇몇 언급들은 아모리 족속의 땅과 가나안 땅을 동일하게 간주하는 것처럼 보이는데(창 12:5-6, 15:18-21, 48:22), 이는 ‘아무루’(Amurru)를 시리아-팔레스타인의 일부로 묘사하는 B.C. 18세기의 알랄라크(Alalakh) 토판에 반영된 전통이다. 텔 엘-아마르나 본문(Tell el-Amarna texts, B.C. 14-13세기)은 레바논의 아무루 왕국이 해안 무역 및 상업을 독점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모세 시대뿐 아니라 후기 청동기 시대(B.C. 1550-1200년경) 내내 두 족속(아모리, 가나안)이 언급되어도 놀랄 일이 아니다. 이스라엘인들의 팔레스타인 정복으로 가나안 족속과 아모리 족속의 많은 도시 국가가 파괴되었지만 남부 팔레스타인 해안에서 흥기한 블레셋 동맹이 특히 가나안 족속의 영토를 더욱 제한시켰다. (W. E. Elwell and B. J. Beitzel, Baker Encyclopedia of the Bible [Grand Rapid, MI: Baker Book, 1988], 406).

 

12: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나타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아’는 ‘증명하다’, ‘보이다’는 뜻으로 아브람에 대한 하나님의 현현(theophany)이 꿈이나 환상이 아닌 눈으로 볼 수 있는 객관적인 실제로 이루어졌음을 증언해 준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므로(요 4:24) 눈에 보이는 것은 온전한 하나님 자체가 아니라 그분의 임재의 상징이거나 표시일 것이다(17:22, 18:1, 2, 출 3:2). 그러나 이것은 계시를 받는 자가 분명히 인지할 수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이르시되. 대개의 경우 하나님의 현현(顯現)에는 선포되는 말씀이 동반된다. 따라서 계시 수납자는 하나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분의 특별 계시를 귀로 들을 수 있다(33:24-30).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1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이다. 이로써 아브람은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섭리에 의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곳 가나안이 자신의 후손들에게 허락된 ‘약속의 땅’임을 알게 되었다. 훗날 이 약속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출애굽의 원동력이 되었으며(50:24, 출 3:15-20) 또한 민족적 일체성을 유지하는 근본 동인이 되었다.

여호와께 …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제단을 쌓은 자로는 아브람 이전에 이미 노아가 있지만(8:20) 자신에게 현현하신 하나님을 기념하여 제단을 쌓는 자는 아브람이 처음이다. 이로써 아브람은 장차 그의 후손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될 것에 대하여서도 함께 감사하였을 것인데 참된 신앙은 이처럼 보지 못하고 장래 일에 대하여서도 믿고 감사할 줄 아는 것이다(히 11:1, 13).

 

12:8 벧엘. ‘하나님의 집’이란 뜻. 아브람 당시의 본래 이름은 ‘루스’였으나 야곱에 의해 벧엘로 바뀌었다(창 28:16-19). 예루살렘 북방 약 19 k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베이틴(Beitin)으로 좋은 샘들이 많아 고대로부터 유목민들의 각광을 받던 곳이다.

아이. ‘황폐한 작은 산’이란 뜻. 벧엘 남동쪽 약 3 km 지점에 위치한 가나안의 요새화 된 성읍이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시 아간의 범죄로 일차 정복에 실패한 성읍이 바로 이 아이 성이다(수 7:1-26).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여기서 단을 쌓는 것은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을 뜻하며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찬송과 기도가 있는 공적(公的) 예배를 드리는 것을 뜻한다(4:26). 즉 아브라함은 가나안 입성 후 처음으로 모든 식솔들을 불러 모아 하나님께 대한 공적 예배를 드림으로써 자신의 가정에 예배 규례를 확립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아브람은 정처없이 유리하는 중에서도 하나님과의 교제를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찬양은 성도가 멈추어서는 안 되는 영적 호흡이다.

 

12:9 점점 … 옮겨갔더라. 이러한 이주 원인은 원주민과의 마찰 때문으로 추측되는데(6절) 얼마의 시간 동안에 어느 만큼 이동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가다가 장막을 치고, 다시 출발하곤 하는 일을 되풀이 하였을 것이다.

 

12:10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가나안(팔레스타인) 지방은 지리적 여건상 우기와 건기가 뚜렷이 구분되어 대개 양력 10, 11월에 집중적인 비가 내린다. 따라서 이때 비가 적게 오면 그 다음 해에는 기근이 들게 마련인데 가나안으로 이주한 아브람에게 때맞춰 닥친 이러한 기근은 다시 그의 신앙과 인내를 시험하는 계기가 되기에 충분하였다.

애굽에 … 내려갔으니. 애굽은 나일 강이란 풍부한 수원(水原)으로 인해 어지간한 가뭄에도 불구하고 거의 기근을 모르는 지역이다. 따라서 아브람이 기근을 당하여 메소포타미아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지혜로운 행동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애굽은 성경에서 세속을 상징하는 나라나 혹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적 도움, 수단으로 묘사되어 있음을 볼 때 (사 31:1) 그가 하나님의 뜻을 묻지도 않고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경솔한 처사이자 실족을 자초하는 전조 행위였다 하겠다.

 

12:11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직접 재난을 당하기도 전에 미리 도덕적 나약성과 두려움을 보인 아브람의 태도는 하나님을 의뢰치 아니하는 자가 드러내게 되는 비신앙적 면모와 다를 바 없었다.

 

12:12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시대를 막론하고 이방인이 타지에서 경원시 당하는 것은 보편적 현상이다. 더구나 당시 애굽 사료들에 의하면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살인쯤은 예사로이 자행하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아브람은 애굽인들이 자신을 죽이고 사래를 빼앗아 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그가 지금까지 자신을 인도하며 보호해 주신 하나님의 권능의 손길을 여전히 믿었더라면 이러한 부질 없는 염려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12:13 원하건대. [히, 나] 간청을 나타내는 기본 불변사로 ‘미안하지만’, ‘부탁드리지만’ 정도의 정중한 어감을 지닌다. 이는 아브람이 아내 사래에 대한 결례인 줄 알면서도 자신의 의사를 완곡히 강요하였음을 시사한다.

나의 누이라 하라. 혹자는 아브라함의 이러한 태도는 아내 사래의 순결을 보호하기 위해 부득불 취한 신중하고도 불가피한 처사라고 합리화시키기도 한다(Rosenmüller). 그리고 사래가 아브람의 이복 누이였던 점(20:12)만을 생각하면 아브람의 이러한 행위는 잘못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과 현시를 받은 아브람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지 않고 인간적인 처세 방법을 택했다는 것은 엄연한 잘못이자 나아가 남을 속이려는 기만이 아닐 수 없다.

내 목숨이 … 보존되리라. 아브람의 이기심과 허물이 노출된 대목이다. 왜냐하면 거짓말의 결과 자신의 생명은 보존할 수 있었을는지는 몰라도 사래의 순결은 무방비 상태에 처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15, 19절). 이처럼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도 그 이면에는 죄와 결점을 지닌 인간에 불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약속의 땅으로 다시 인도하신 것(13:1)은 그분의 신실하심과 사랑 때문인데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그 같은 품성에 입각해 낮고 천한 우리를 택하사 부유하고 지혜롭다 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고전 1:28).

 

12:14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여기서 ‘아리땁다’는 것은 외견상 보기에 아름다운 용모와 자태를 뜻한다. 비록 이때 사래의 나이 65세를 웃돈 때이긴 하나(4절, 17:17) 127세란 그녀의 수한에 비추어 볼 때(23:1) 원숙미를 자랑할 중년기이다. 더욱이 그녀는 아직 아이를 낳은 적이 없으니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으며 혈색 또한 좋았을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비록 애굽인들이 흑인은 아니었지만 그 쪽 여인네들의 피부색이 거무스름한 것에 비추어 볼 때 사과 빛 피부색을 지닌 사래의 용모는 더욱 돋보였을 것은 분명하다.

 

12:15 바로. ‘바로’는 히브리어로 ‘파르오’인데, 이것은 ‘큰 집, 저택’을 뜻하는 애굽어를 음역한 것이며, 고왕국(Old Kingdom, 2575-2150 B.C.) 시대로부터 ‘왕궁, 대궐’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다가 출애굽 시대의 왕조인 제18왕조 때부터는 애굽의 ‘왕’을 가리키는 칭호로 그 의미가 격상되었다.

바로의 궁으로. 고대 근동 및 애굽의 세도가들은 여러 첩들을 거느렸으며 특히 왕들은 수십, 수백 명의 후궁(後宮)들을 거느리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바로가 사래를 궁전으로 불러들인 것은 곧 그 같은 후궁 중의 하나로 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끌어들인지라. 혹자는 본 구절에서 사래의 순결성을 의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브람과 특별한 관계의 공수 동맹 계약을 맺은(3절) 하나님께서 곧 약속의 자녀를 생산할 사래가 바로에게 정절을 빼앗긴 후 때늦게 재앙을 내린다는 것은 도저히 말이 안 된다. 따라서 본 절은 사래에게 남편이 없는 줄 안 바로가 그녀를 정식 후궁으로 맞아들이기 위해 일단 후궁(Harem)으로 모셔 놓은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12:16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고대 근동에서는 신랑 될 사람이 신부 될 사람의 가족에게 결혼 대가로 예물을 주는 것이 관례였다(출 22:16, 신 22:29, 삼상 18:25). 아브람이 사래로 인하여 후대받은 것도 바로 이러한 의미이다.

아브람이 … 얻었더라. 아브람이 바로의 선물을 받은 것은 물론 타의였겠지만 그가 끝내 입을 열어 자신의 거짓을 밝히지 아니한 것은 결국 자기 아내를 판 것과 다름없는 비겁한 행위였다.

 

12:17 사래의 일로. 사래는 장차 약속의 자녀를 낳을 열국의 어머니이다(17:16). 따라서 비록 아브람의 약한 믿음과 실수 때문에 아내에 대한 그의 권리를 빼앗겼다 하나 하나님께서는 사래가 바로의 첩으로 전락되는 것을 결코 방치하지 않으셨다.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비록 바로가 모르고서 남의 아내를 취하였다고는 하나 언약의 전승 가문을 모독함으로써 하나님의 권위를 훼손시킨 죄는 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고의적이 아니었던 점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발하신 재앙은 직접적인 징계가 아닌 경고를 주시기 위한 간접적인 수단이었을 것이다(20:6, 7).

 

12:18 아브람의 거짓과 불성실에 대한 바로의 삼중적인 책망이 나타나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 아브람이 이방인 바로에게 오히려 책망당한 것은 그의 거짓과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간섭적, 주권적 보응이라 할 수 있다.

네 아내라고 … 아니하였느냐. 사래가 아브람의 아내라는 사실을 바로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알았는지 확실치 않다. 하지만 이 일로 하나님의 선지자 아브람이 이방의 군주 바로에게 힐책당한 것은 마치 맛을 잃은 소금이 천시당하듯(마 5:13) 도덕적으로 순전치 못한 하나님의 자녀 역시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소받을 뿐임을 교훈 해준다(빌 2:15).

 

12:19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사래가 명실 공히 순결을 잃지 아니한 아브람의 아내임을 증언해 준다. 이처럼 하나님께선 당신의 백성들이 위기 중에 처할 때 결코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고 항상 돌아보시는 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스스로 곁길로 나가려는 자들에 대해서는 채찍으로 돌보실 것이다(사 1:5).

 

12:20 그들이 … 보내었더라. 아브람이 자기 가족과 소유를 이끌고 애굽에서 나온 것은 다음과 같은 점에 의해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의 예표로 볼 수 있다. (1) 기근으로 인해 애굽에 내려간 점(42-47장) (2) 애굽에서 어려움을 겪은 점(출 1장) (3) 하나님의 돌보시는 역사와 재앙에 의해 구출된 점(출 7장-12:30) (4) 풍부한 소유물을 이끌고 출애굽한 점(출 12:31-38). 여기서 우리는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언약의 땅 가나안을 아브람의 후손에게 주려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된다.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된 우리들에게 언약의 땅 천국을 주시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까지 내어주셨다(골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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