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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축복의 유일한 주체자 ‘하나님’(אֱלֹהִים 엘로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며, 인간은 언약에 근거한 복을 받는 객체에 불과할 뿐임을 보여 준다. 즉 하나님께선 아담에게 주셨던 원시 복음(3:15)을 기억하시고 그에게 준 것과 동일한 축복(1:28)을 인류의 새 조상인 노아 가족들에게 주신 것이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자신의 심중에 결심하셨던 바(8:21)를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장면이다. 이로써 인류에 대해 갖고 게셨던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더욱더 구체적으로 실행될 수 있었다(8-17절).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혹자는 1:28과는 달리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이 생략된 것에 대해 주목한다. 그리고 그 까닭에 대해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들로부터 땅을 정복할수 있는 권한을 거두어 가셨기 때문으로 이해한다. 이는 타락한 인류와 함께 고통을 겪고있는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될 날만 고대하고 있다는 가르침(사 6:1-9, 롬 8:18-23)에 부합된다. 따라서 비록 땅이 부단히 정복되어 가고 있는 점은 부인될 수 없지만 피조계에 대한 원초적 지배권(정복권)을 박탈당한 인간은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대로 자연계를 온전히 회복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계의 온전한 회복은 오직 여인의 후손, 곧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가능할 것이다(엡 1:22).

 

9:2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노아 홍수시에 물고기도 그 종류대로 보존되었다거나 아니면 전멸되었다는 언급이 없었는데 여기서 다시 물고기가 등장한다. 이는 (1) 본래 물에서 살도록 지음 받은 생명체이므로 홍수 심판시에도 자연히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2) 또한 인간과 함께 땅을 생활 터전으로 삼던 뭇 피조물과는 달리 인간의 죄책(罪責)에 비교적 영향을 받지 않은 생명체였으므로 심판의 대상에서 유보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튼 여기서 물고기까지 언급된 것은 인간을 제외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명체를 가리키기 위함이다.

너희를. 노아 가족만이 아닌 오고 오는 세대에 걸친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두려워하며 … 무서워하리니. 아담의 범죄 이전에는 인간과 다른 피조물 간에 아름다운 공존 관계가 유지되었으나(2:19) 타락 이후 이제는 하등 피조물들이 인간 권위에 도전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인간과 뭇 짐승들 간의 관계는 하나님께서 그것들에게 심어 주신 인간을 향한 본능적 두려움에 의해서만 서로의 관계가 유지될 수 있음을 시사해 준다. 한편 여기서 ‘두려워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מוֹרָא 모라’는 ‘יָרֵא 야레’(깜짝 놀라다, 도덕적으로 경외하다, H3372)에서 파생된 말로 하나님께서 동물들에게 주신 선천적 ‘공포’를 의미한다. 그리고 ‘무서워하다’에 해당하는 ‘하타트’는 ‘위축시키다’, ‘위협하다’는 말에서 파생된 것으로 인간들로부터 당한 무서운 경험에 의해 후천적으로 취득케 된 ‘두려움’, ‘불안감’을 의미한다.

이것들은 너희 손에 붙였음이니라.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타락 이후 이제는 영적 권위로는 더 이상 동물계를 지배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내리신 명령과 권위, 배후에서 역사하신 섭리에 의해서 계속해서 지배할 수 있음을 뜻한다. 일부 동물들을 가축으로 길들여 사용하고 있는 것은 그 좋은 예이다.

 

9:3 산 동물. 인간에게 육식(肉食)을 허용하고 있는 최초 구절이다. 그러나 ‘산 동물’이라고 제한하여 다른 짐승에 의해 찢겼거나 이미 죽은 것은 모두 제외하고 있는데 이러한 규정은 훗날 율법화되었다(출 22:31, 레 22:8). 이는 시체를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던 히브리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정결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였다(민 19:16).

채소 같이 … 너희에게 주노라. 채소에 덧붙여 이제 동물도 인간의 음식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정확히 언제부터 육식이 허용되었는가에 대해선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다. (1) 홍수로 말미암아 땅이 황폐해진 결과 식물이 부족하자 비로소 육식이 허용되었다(Rosenmüller, Clarke, Kalisch). (2) 처음부터 허용되었으나 인간의 신체 구조상 채식이 적합하였으므로 스스로 먹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홍수 후 연약해진 신체의 변화로 인해 육식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Pererius, Aquinas, Luther). (3) 타락 전에도 육식이 허용되었으나 여기서 그 허가가 새롭게 갱신된 것이다(Calvin, Bush, Lange).

성경 어디에도 홍수 전에 육식이 허락되었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노아 홍수 후에 최초로 육식이 허락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홍수의 영향으로 인해 예전처럼 식물로 된 음식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육식을 허락하신 것이다. 이와 같은 식습관의 변화는 본래의 창조 때와 비교하여 사람과 동물들 사이의 관계에 변화를 가져왔다. 창조 이야기 속에서는 사람과 동물 모두 식물로 된 음식을 먹었기 때문에 서로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홍수 후에는 음식으로 사용하기 위해 동물을 죽여야 했음으로 둘 사이에 무서움과 두려움의 관계가 형성되었다(2절). 사람과 동물이 서로를 잡아먹게 되었을 때, 에덴에서 누리던 것과는 다른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허용에는 두 가지 제한이 있었다. 첫째, 모든 동물이 음식으로 적합한 것은 아니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첫 번째 제한은 “정하고 부정한” 동물을 구분하는 데서 분명히 나타난다(참조, 8:19-20). 두 번째 제한은 핏속에 생명이 있으므로 피는 절대로 먹지 말라는 것이었는데(4절), 이것은 분명하고도 새로운 명령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홍수의 때까지 사람에게 육식을 허락하시지 않으셨다. 사람이 의존해서 먹고 살 수 있는 모든 것이 파멸되었으므로 주께서는 부득이 노아가 방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간 짐승들 가운데서 정결한 짐승을 먹어도 좋다는 허락을 노아에게 주셨던 것이다. 그러나 육식은 사람을 위하여 가장 위생적인 식사는 아니었다”(엘렌 화잇, 교회에 보내는 권면, 228).

 

9:4 그 생명되는 피. 생명체가 일정량 이상의 피를 흘리면 죽게 되는 것을 볼 때 생명과 피는 불가분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이 자명하다. 그러므로 성경은 피를 생명과 동일시 여기고, 더 나아가 영혼이 거하는 처소로까지 묘사한다(레 17:11, 14). 따라서 고기를 피 채 먹지 말라는 명령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모든 생명은 창조주 하나님의 것이므로 인간이 그 주권을 절대 침해할 수 없다. (2) 비록 짐승의 피일망정 피를 흘리고 먹는 일이 습관화되면 자연히 사람의 생명까지도 경시될 우려가 있다. 따라서 모든 생명의 존엄성을 교훈하시기 위함이다(Calvin).

먹지 말 것이니라. [히, 로 토켈루] ‘아칼’(먹다, 소비하다)의 미완료형 부정 명령으로 영원토록 먹지 말라는 의미이다. 즉 이 명령은 노아 당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대에 걸쳐 전인류가 지켜야 할 명령임을 뜻한다. 그러므로 모세 율법도 피를 먹지 못하도록 엄히 규정하였고(레 3:17, 17:21, 신 12:25, 15:23), 초기 교회에도 이방인 개종자들이 피를 먹는 것은 금하였던 것이다(행 15:20, 29).

 

9:5 반드시. 문자적 뜻은 ‘왜냐하면’, 그러나 여기선 인과적 의미보다 제한적 의미가 강하므로 ‘반드시’(surely)로 번역하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다. 즉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해 인간 생명을 해친 자는 사람과 짐승을 막론하고 그 피에 대한 책임을 꼭 묻겠다는 뜻이다.

너희 피 … 찾으리니. 여기서 ‘찾는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다리쉬’는 ‘추적하다’, ‘조사하다’, ‘탐구하다’(신 12, 30, 스 10:16)는 뜻이다. 따라서 본 절은 하나님께서 인간 생명을 해치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그냥 넘기지 않으시고 끝까지 추적하여 징벌하시겠다는 강한 의미임을 알 수 있다.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모세 율법은 이에 대한 세부 규정을 기술해 놓았다(출21:28, 29). 그런데 짐승은 영혼이 없는 존재로 율법 조항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미물이니 짐승을 처벌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들에게 경고를 주기 위함으로 이해된다.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직역하면 ‘사람의 손 곧 모든 사람의 형제의 손에서’, 이 말의 정확한 의미는 ‘사람이 같은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에게도’(공동번역)이다.

 

9:6 사람의 피를 흘리면. 여기서 ‘흘리다’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샤파크’는 ‘소비하다’, ‘붓다’(시 69:24, 호 5:10)는 뜻으로 우연한 실수로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죽인 것을 뜻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에 대해선 반드시 보수하셨으나 우연한 실수로 사람의 피를 흘린 자에 대해선 그 생명을 보존토록 특별히 조치하셨다(출 21:13, 민 35:11-15).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정확한 번역은 ‘사람에 의해 그 피를 흘릴 것이라’, 즉 피의 보복을 하되 가인의 경우처럼 하나님께서 직접하시는 것이 아니라(4:18-12) 재판권을 사람에게 맡겨 간접적으로 시행하시겠다는 뜻이다. 모세시대에는 이것이 고엘(גֹּאֵל, 갚는 자, 피의 보복자) 제도로 성문화되어 나타난다(민 35:19, 신 19:12). 그런데 이것이 살인자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복수할 수 있다는 근거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십계명은 개인으로서의 살인을 엄격히 금하고 있다(출 20:13).

자기 형상대로 … 지으셨음이니라.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원천적으로 설명해 준다(1:26, 27). 물론 인간 타락으로 인해 그 같은 하나님의 형상은 많이 훼손되었지만 그래도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 부분적으로 남아 있어 하나님과의 교제시 그 접촉점(Contact point)을 이룬다(롬 1:19). 그러므로 인간을 살해하는 것은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상해(傷害)하며 그분을 모독하는 하나님의 형상 파괴죄가 된다. 한편 여기서 ‘형상’(히, 첼렘)은 주로 성질상에 있어서의 유사성을 가리키는 말이지만(5:3) 인간의 육체 역시 하나님의 영광이 깃들기에 합당하도록 존귀하고 품위있게 구성되었음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

 

9:7 그 중에서 번성하라. 6절과 대조되는 구절로 결국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퇴락치 아니하고 번성하기를, 그리고 그들에게 형벌 대신 축복 주시기를 원하고 계심을 보여 준다. 또한 이는 인간이 허무하게 살해당해서는 안 되는 존귀한 존재이며 나아가 번성하고 땅에 편만하여 그 어떠한 삶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펼쳐 드려야 할 자들임을 시사해 준다(롬 12:2).

 

9:8 하나님. [히, 엘로힘] 우주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강조하는 이 명칭(1:1)이 거듭 사용된 것(1절)은 하나님이 노아와 그 가족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9, 10절)과 무조건적인 언약을 체결하셨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9:9 내가. 언약의 주체자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심을 역설하는 말이다. 즉 이는 하나님이 스스로 언약을 베푸시고 그대로 실행할 것임을 강조해 주는데 이것은 피조물에 대한 그분의 무한한 사랑의 증거이다.

언약. 본래는 상호동등한 입장에서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계약으로 어느쪽이든 이를 어길 때에는 그에 준하는 보응이 따르기 마련이다(6:18).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언약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무조건적인 언약이다.

“언약을 세우리니”라는 표현이 세 번 반복되는데(9, 11, 17절), 이는 하나님께서 앞서 주셨던 약속을 반드시 지키신다는 것을 강조해서 드러낸다(6:18). 육 일간의 창조 이야기와 평행을 이루는 앞부분의 내용에 이어, 이 부분은 창조 이야기 가운데 일곱 번째 날, 안식일을 다루는 부분과 평행을 이룬다. 본문에서 “언약”이라는 단어가 일곱 번 반복되는 것은 안식일을 떠오르게 한다. 안식일과 마찬가지로 무지개는 언약의 증거이다(13, 14, 16절, 비교, 출 31:12~17). 안식일과 마찬가지로 무지개는 우주적 범위를 가지고 있고 온 세상에 그 영향을 미친다. 창조의 표징으로 주어진 안식일이 모든 곳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한 날인 것처럼, 다시는 물로 세상을 멸망하지 않으시겠다는 약속 또한 모든 곳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9:10 세우리니. 본 장에서는 언약을 ‘세우는 것’을 가리키는 각기 다른 세 종류의 히브리어가 사용되었다. (1) 쿰: 본 절(원문상에는 9절)과 11, 17절에 나오는데 타락한 세상을 회복시키며 유지하는 언약의 기능을 강조하는 말이다. (2) 나탄: 12절에 나오는데 언약이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에 의해 주어졌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3) 자카르: 15절에서 ‘기억하다’로 번역된 단어로 언약의 지속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9:11 다시는 …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여기서 ‘홍수’(마불)에 정관사(하)가 붙은 것은 다시는 ‘그 홍수’, 즉 노아 홍수와 같은 세계적인 대홍수가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국지적인 홍수가 자주 발생한다 하여 이를 하나님의 언약에 상치되는 것으로 오해하여서는 안 된다(8:21).

 

9:12 대대로 영원히. 직역하면 ‘숨겨진 세대에까지’. 이는 비록 인간들에게는 장래의 모든 일이 숨겨진 비밀처럼 알 수 없는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해서 낱낱이 아시고 미리 그들을 위해 계획하시고 계심을 나타내 준다(엡 1:3-10).

증거. [히, 오트] ‘우트’(오다, 나타내다. 동의하다)에서 파생된 말로 곧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에 대해 보증하시고 그 언약과 함께 하심을 명백히 나타내는 ‘신호물’, ‘표시’, ‘전조’(前兆) 등을 의미한다.

 

9:13 무지개. 이것이 이전까지는 없었으나 노아와의 언약 후 비로소 생겨났는지 그 이전부터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1) 하나님의 천지창조 사역의 성격과 (2)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도 기존의 별을 두고 맹세하신 것(15:5)에 근거할 때 무지개는 기존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Calvin, Kalisch, Lange).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은 자신의 언약시 중표로 삼으시거나(신 4:26, 3:28, 시 19:1) 신령한 진리를 보여 주는 도구로 삼으시곤 하신다(마 6:26-30). 아마 그 이유는 당신이 친히 창조하신 천지 만물은 당신의 실천적 행위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언약의 증거.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신 모든 언약은 그 본질에 있어 영원 불변하다(6:18). 그러나 그것이 주어지는 형식과 증거는 시대를 따라 형태를 달리한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생명이 단절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이란 약속을 주셨고(3:15) 모세시대에는 모세 같은 선지자의 약속을 주셨다(신 18:15). 그리고 왕국시대에는 다윗의 위(位)를 이을 영원한 왕에 대한 약속을(삼하 7:12), 이사야 시대에는 고난 받는 종의 약속을 주셨다(사 42, 53장). 그런데 여기서는 무지개 언약을 주심으로 물 심판으로부터의 보호를 약속하고 계시니 결국 이 모든 언약의 증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징(表徵)이자 그리스도교 언약의 그림자인 것을 알 수 있다.

 

9:14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직역하면 ‘구름의 구름을 땅 위에 모을 때에’, 이처럼 많은 구름이 한 지역에 모인다는 것은 곧 큰비가 내릴 전조이다(삿 5:4, 왕상 18:44, 45, 시 77:17).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를 보고서 또다시 노아 홍수 같은 물심판이 일어나지 않을까 불안해 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염려에서 자유토록 하기 위해 주신 보호의 증표가 곧 무지개이다.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무지개는 주로 소나기가 그친 후 찬란한 햇살이 비취기 시작할 때 목격된다. 그 까닭은 무지개가 형성되는 데 반드시 햇빛과 자욱한 안개 또는 물방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본 절도 이러한 사실에 근거한 표현으로 햇살을 등진 맞은편 구름 가운데 무지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가 구름을 인간 죄악으로 말미암아 찾아든 각종 환난과 질고로(3:16-9), 무지개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참된 평안과 영원한 안식을 상징하는 것(요 3:16-18)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다 더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9:15 다시는 물이 …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직역하면 ‘홍수를 위한 물이 다시 있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께서 세상 종말에는 물이 아닌 불로써 온 우주를 심판하실 것이란 점이다(벧후 3:10). 이 같은 심판이 지니는 성격이 어떠할런지는 소돔 성에 임한 국지적인 유황불 심판만으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는데 성도들은 영적으로 항상 깨어 있어 이 같은 심판 중에서도 마치 물 심판 때 구원을 얻은 노아 가족들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장중에 온전히 붙들림 받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벧후 3:12-14).

 

9:16 보고. [히, 라아] 힐끔 쳐다보고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자세히 주목하여 살펴보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31:42, 민 13:18) 하나님의 세밀한 주의력과 관심을 표명해 준다.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하나님께서는 기억하신다’는 말이 15절에 이어 반복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이 당신의 언약을 언제나 신실하게 준행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신인동형 동성론적(神人同形同性論的) 표현이다. 한편 언약의 징표인 무지개가 홍수를 막고 있듯이 오늘날 우리가 영원한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십가가에서 흘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가 하나님의 진노를 막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그 피 공로를 덧입기만 하면 하나님의 진노에서부터 자유하게 될 것이다(요일 1:7).

 

9:17 또 이르시되. 스스로에게 다시 다짐하실 뿐 아니라(공동번역) 노아에게 재차 공식적으로 확언하신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보증과 맹세는 비단 노아 뿐 아니라 홍수 후 전 인류가 그 어떠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낙심치 않을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9:18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노아의 여러 손자들 중 특별히 가나안만 그의 아버지와 관련하여 언급되고 있는 까닭은, 함이 실수한 결과 저주를 받게 될 인물(24, 25절)로서 향후 전개 되는 성경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9:19 퍼지니라. [히, 나파츠] 원뜻은 ‘산산이 때려 부수다’(삿 7:19, 시 2:9). ‘흩뿌리다’로 이 말은 노아의 후손들이 마치 잘 익은 봉숭아 꽃씨가 터져 사면에 흩어지듯 세상 구석 구석에까지 확산, 정착해 살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한편 이는 ‘땅에 충만하라(1절)는 하나님의 축복의 성취인데 노아와 그 가족들은 아담과 거의 비슷한 상황 가운데(1:27, 28) 종족을 번성시켜 나갔다.

 

9:20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직역하면 ‘땅의 사람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기 시작하였다’, 이는 노아가 인류 최초의 농부였다든지 그 때야 비로소 포도 재배가 이루어졌다는 뜻은 아니다. 아담도 토지를 경작하였고(3:23) 가인도 땅의 소출을 수확하던 자였다(4:2, 3) 다만 이는 홍수 이후 황폐해진 땅을 노아가 다시 경작하기 시작하였다는 뜻이다.

포도나무.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케렘’은 복수(plural)의 의미로 많은 포도나무를 가리킨다. 아라랏 산의 위치로 추정되는 아르메니아지역(8:4) 북서편에는 넓은 야산 지대가 있는데 이곳은 실제로 고대의 유명한 포도 생산지였다.

 

9:21 포도주를 마시고. 포도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인’은 발효되지 않은 ‘포도즙’을 가리키기도 하고 발효된 ‘포도주’를 가리키기도 하는 상용어이다(레 10:9, 시 60:3, 사 22:13, 욥 1:5). 그런데 여기에서는 노아가 발효된 포도주를 먹은 것이 확실하다.

취하여. [히, 샤카르] ‘잔뜩 마시다’는 뜻으로 자신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만취된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발효된 포도주나 독주를 금하고 있다(잠 23:20, 21, 사 20:1, 28:7, 엡 5:18).

벌거벗은지라. 직역하면 ‘그 자신을 벗었다’로 스스로 옷을 벗어버려 알몸을 드러낸 것을 뜻한다. 당대에 완전한 자로 하나님께 인정받았던 노아도 이처럼 잠깐의 방만(放漫)한 자세로 인해 시험에 빠진 것은 우리 성도들이 한순간이라도 영적 긴장을 풀어서는 안됨을 교훈해 준다(마 26:41, 벧전 5:8).

포도원에서의 노아의 행동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했던 일을 상기시킨다. 두 이야기 속에는 과일을 먹는 것, 벌거벗게 되는 것, 가리는 것, 저주, 그리고 축복과 같은 공통된 주제들이 포함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노아는 자신의 조상 아담과 마찬가지로 실패의 역사를 이어갔다. 과일이 발효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셨을 때 가지고 계셨던 계획이 아니었다. 노아는 자기 마음대로 행동했고 그 결과 자제력을 상실하여 벌거벗게 되었다.

 

9:22 ’하체’. ‘하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르와’는 ‘벗게 하다’, ‘발가벗기다’란 뜻을 가진 ‘아라’에서 파생된 말로, 넓은 의미로는 벌거벗은 상태를 가리키나 좁은 의미로는 사타구니 부분의 성기를 가리킨다. 타락전 순결한 기쁨의 상징이었던 이것이 아담 범죄 이후 수치(3:7, 신 24:1)와 불결함(애 1:8)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보고. [히, 라아] 단순히 힐끗 지나쳐 보았다는 뜻이 아니고 만족스럽게 응시하였음을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함의 실수는 아비의 하체를 본 그 자체에 있지 아니하고 그것을 보고 악의적으로 즐긴 데 있음을 시사해 준다.

함이 노아의 벌거벗음을 ‘보았다’라는 사실은 금지된 나무를 ‘바라본’ 하와를 떠올리게 한다(창 3:6). 이와 같은 유사성은 함이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단순히 실수로 슬쩍 쳐다본 것이 아니었음을 알려 준다. 그는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대신 자신이 본 것을 이야기하고 다녔다. 반면, 함과 달리 즉시 아버지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한 그의 형제들의 반응은 함의 행동을 분명히 책망한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의 중요성을 보게 된다. 우리를 이 땅에 존재하게 한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미래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출 20:12, 비교, 엡 6:2). 바로 그로 인해, 함과 그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은 것이다.

두 형제에게 알리매. 보다더 적극적이고 경박스런 함의 죄이다. 정상적인 부자간(父子間)이라면 아들이 아비의 허물을 덮어 주는 것이 상례인데 함은 형제들까지도 아비의 수치를 목격하고 쾌감을 느끼도록 충동질한 것이다. 이처럼 범죄자들은 남들도 자신의 범죄에 가담토록 강요함으로써 동질감과 심리적 안정감을 얻으려는 경향이 있다.

 

9:23 옷을 가져다가. 옷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시믈라’는 주로 겉옷(garment)을 가리키는데(신 10:18, 삿 8:25, 룻 3:3) 때로는 덮개나 보자기를 가리키기도 한다(삼상 21:9). 그런데 여기에 정관사 ‘하’가 붙은 것을 볼 때 셈과 야벳이 취한 옷은 노아가 벗어 아무렇게나 놓아 두었던 바로 그 옷일 수도 있다.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수치를 보지 아니하고 덮어 주려는 조심스럽고도 사려 깊은 행동이다. 이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최초 효도의 예로써 비록 십계명으로 성문화(成文化)되지 않았을지라도 부모에 대한 존중은 인간이 지녀야 할 기본 도덕률임을 교훈해 준다(출 20:12). 한편 다른 사람의 수치를 드러내지 않고 가려 주는 행위는 성도가 지녀야 할 당연한 태도인데 왜냐하면 성도들 역시 하나님 앞에서 죄로 인한 허물과 수치를 가리움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9:24 작은 아들. 22절을 볼 때 이 자는 함인것 같다. 그러나 혹자는 가나안으로 보기도 하는데(Poole, Inglis, Lewis) 이는 25절에서 가나안이 저주받고 있는 점에 근거한 견해이다.

 

9:25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난해 구절 중의 하나로 아비의 하체를 조롱한 함의 범죄가 왜 그의 아들 가나안의 저주와 연결되었는가하는 의문점이 제기되는 부분이다. 이에 대하여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1) 함이 받을 형벌의 가혹함을 더하기 위하여 가나안으로 대표되는 그의 후손들을 저주하였다(Calvin, Lange). (2) 노아는 예언의 은사를 통하여 장차 가나안족이 징계를 받게 될 것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Theodoret, Willet). (3) 가나안이 노아의 수치를 처음 목격하고 그 사실을 함에게 고한 진짜 범죄의 하수인이요 공범자였다(Aben Ezra, Poole, Jamieson). (4) 함이 노아의 막내 아들인것 같이 가나안도 함의 막내 아들이므로 같은 원리로 저주받았다(Hoffman, Delitzsch). (5) 당시 가나안도 이미 그의 아버지의 불경건함과 죄악을 답습하고 있었다(Ambrose, Keil). 아무튼 함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 아들이 저주받은 것은 자신이 저주받은 것 이상의 형벌이었고, 또한 자신의 미래는 아들 가나안의 미래 속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함은 가나안과 함께 복합적으로 저주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종들의 종. 최상급을 나타내는 히브리어의 관용적 표현으로 ‘가장 비천한 종’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용례로는 ‘신의 신’(신 10:17) ‘왕 중 왕’, ‘노래 중의 노래’등이 있다. 한편 이 저주는 역사속에서 그대로 성취되어 가나안 족속은 여호수아 시대에 셈족인 이스라엘인들에 의해 가장 비천한 종의 형태로 전락되었고(수 9:23), 그 나머지는 솔로몬 시대에 완전히 정복당했다(왕상 9:20, 21). 그후에도 칼타고인이나 애굽인들과 같은 가나안 족속들은 페르샤인, 마게도냐인, 로마인 등과 같은 야벳 족속들에 의해 계속 철저히 정복당하였다(Keil).

가나안의 아버지 함에게 내려진 저주는 축복의 약속 또한 포함한다. 셈의 후손들인 하나님의 백성들은 가나안을 정복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 셈의 장막에서 야벳을 창대하게 하실(27절) 메시아를 위해 길을 준비하게 될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세상을 향한 이스라엘의 구원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모든 민족에게 확장될 것이라는 예언적 암시이다(단 9:27, 사 66:18~20, 롬 11:25). 함에게 내려진 저주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구원을 받아들이는 함과 가나안의 후손을 포함하여 모든 민족에게 축복이 될 것이다.

 

9:26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셈의 하나님’은 귀하고 특수한 것이나 하늘에 속한 신령한 축복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할 때 먼저 하나님과 연관지어 사고하며 발언하는 히브리인들의 관례를 보여 주는 구절이다(신 33:20).

‘찬송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라크’가 사람에게 적용되면 ‘그를 축복하다’는 뜻이 된다(신 28:6, 룻 3:10). 따라서 본 절은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셈에게 축복 베푸시기를 원한다는 함축적 의미를 지닌다.

 

9:27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문자적 뜻은 ‘야벳에게 넓은 공간을 주사’, 이 말은 비단 야벳 족속의 영토와 인구 뿐 아니라 문명, 문화에도 관계된 것인데 참으로 유럽의 문화와 과학, 헬라의 철학, 로마의 법정신 등은 야벳의 후손들에 의해 이룩되었다.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이 말은 야벳 족속이 셈 족속을 지배하게 되리라는 뜻이 아니다. 이는 그들이 종교적으로 셈 족속의 영향을 받게 될 것이란 뜻이다. 야벳이 셈의 종교적 축복에 동참하게 되리라는 뜻이다(Calvin, Keil, Lange). 실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3:15)은 후일 셈의 후손 중에서 그리스도가 나셨고 그로 말미암아 복음이 온 누리에 퍼짐으로써 성취되었다. 한편 함 족속 역시 비록 종의 신세로나마 셈과 야벳의 장막에 거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배제당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오늘날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얻을 수 있는 것이다(요 3:16).

 

9:28 없음.

 

9:29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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