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주석, 창세기 04장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4:1 동침하매. [יָדַע 야다] 원뜻은 ‘속속들이 알다’, ‘체험적 지식을 갖다’. 부부간의 성 행위는 단순한 육체 관계가 아니라 서로에 대해 보다 깊이 이해하고 애정을 나누는 정신적 상호 교류 관계여야 함을 교훈한다.

가인. 히브리어 ‘קַיִן 카인’은 ‘얻다, 소유하다’라는 뜻의 동사 ‘카나’에서 유래한 단어로써 아담과 하와가 아들을 ‘얻은’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케 하는 이름이다. 하지만 가인은 인류 역사의 첫 살인자가 되었고, 그것도 친동생을 살해한 무도한 범죄의 장본인이 되었다. 죄의 세상에서 사람이 얻는 것이 얼마나 허무하고 무익하고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물교훈이라 할 수 있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אֶת־קַיִן 에트 카인] 문자적 뜻은 ‘여호와로부터’ 또는 ‘여호와와 함께’이다. 다수 번역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로 번역한다. 이는 하와가 자신의 득남을 하나님의 선물로 인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여자의 후손’(3:15)에 대한 약속의 성취로 이해했음을 나타내 준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성경 기자가 기록한 첫 번째 사건은 바로 가인의 탄생이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본 절에 등장하는 “여호와”(YHWH )라는 단어는 “남자”라는 단어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는 문장을 다음과 같이 직역할 수도 있다. “내가 득남하였도다. 이는 여호와시라.” 국제표준역(ISV)은 “I have given birth to a male child - the LORD(내가 남자 아이를 낳았으니 이는 여호와라)”라고 번역하였다.
이 문장을 직역한 것에 따르면, 하와가 창세기 3:15의 메시아 예언을 기억했으며 자신이 낳은 아이가 구주, 곧 여호와라고 믿었음을 보여 준다. “구주의 강림은 에덴에서 예언되었다. 아담과 하와는 이 약속을 처음 듣고 이 약속이 속히 성취되기를 고대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맏아들이 구주이기를 바라면서 그 아들을 기쁨으로 환영하였다”(엘렌 화잇, 시대의 소망, 31).
가인은 창세기 4장에 기록된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는 부모가 거의 ‘숭배’했던 맏아들이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에 의하면 하와는 가인의 탄생에 대해서는 기대감이 가득한 어조로 말하는 반면, 아벨의 탄생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아벨에 관해서는 서술자가 그저 “또…낳았다”라고 기록할 뿐이다(2절).
가인의 이름은 ‘얻다’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동사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성경 기자가 기록한 첫 번째 사건은 바로 탄생이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창세기 4:1에 등장하는 “여호와”(YHWH )라는 단어는 “남자”라는 단어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문장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득남하였도다. 이는 여호와시라.” 국제표준역(International Standard Version)은 “I have given birth to a male child - the LORD(내가 남자 아이를 낳았으니 이는 여호와라)”라고 기록한다.
이 문장을 직역한 것에 따르면, 하와가 창세기 3:15의 메시아 예언을 기억했으며 자신이 낳은 아이가 구주, 곧 여호와라고 믿었음을 보여 준다. “구주의 강림은 에덴에서 예언되었다. 아담과 하와는 이 약속을 처음 듣고 이 약속이 속히 성취되기를 고대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맏아들이 구주이기를 바라면서 그 아들을 기쁨으로 환영하였다”(엘렌 화잇, 시대의 소망, 31).
가인은 창세기 4장에 기록된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는 부모가 거의 ‘숭배’했던 맏아들이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에 의하면 하와는 가인의 탄생에 대해서는 기대감이 가득한 어조로 말하는 반면, 아벨의 탄생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아벨에 관해서는 서술자가 그저 “또…낳았다”라고 기록할 뿐이다(창 4:2).
가인의 이름은 ‘얻다’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동사 ‘קָנָה 카나’에서 왔으며 이는 무언가 귀하고 능력 있는 것을 소유하게 되었음을 나타낸다. 반면, 영어로 아벨이라고 표기된 히브어 ‘הֶבֶל 헤벨’은 “입김”(시 62:9), 또는 “숨”(시 144:4)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허무함, 공허함, 실체가 없음을 나타낸다. 전도서에서는 ‘헛됨’을 나타내기 위해 ‘헤벨’이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물론 성경에 기록된 것 이상의 것을 추측할 필요는 없지만,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소망을 오직 가인에게 두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벨이 아니라 가인이 약속된 메시아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편, 기원전 2세기에 기록된 유대의 문헌인 “희년서”(The Book of Jubilees(160-150 B.C.), 성경에 포함되지 않은 구전(口傳)된 설화를 담은 책)에 의하면, 아담과 하와는 A.M.(창세를 기산점으로 한 연대) 64-70년에 맏아들 가인을 얻었고, 그로부터 7년 후인 71-77년에 아벨을 낳았으며, 78-85년에 장녀 ‘아완’을 낳았고, 99-105년에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희년서, IV:1-2). 아담과 하와는 28년간(A.M. 99-127) 아벨의 죽음을 애도했고(IV:7), 130세에 셋째 아들 ‘셋’을 낳았다(창 5:3). 그리고 서기 1세기의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아담과 하와는 아들 33명과 딸 23명을 낳았다.

 

4:2 아우. 원어 ‘אָח 아흐’는 ‘한 형제’(9:5, 27:6, 45:14), ‘친척’(12:5, 28:2), ‘동족’(레 25:3) 등을 뜻한다. 이는 단순한 혈연 관계에 앞서 서로 간을 떼놓을 수 없는 본원적 사랑과 신뢰를 중요시하고 있는 단어이다.

아벨. ‘아벨’은 히브리어로 ‘헤벨’이고, 그 뜻은 ‘호흡, 안개, 헛됨, 허무’이다. 전도자가 외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라는 말에서 ‘헛되다’라는 단어는 모두 히브리어로 ‘헤벨’이다. ‘아벨’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은 별 느낌이 없겠지만, 히브리인들이 ‘헤벨’이라는 이름을 부르거나 일컬을 때는 그 단어의 의미와 아벨의 ‘허무한’ 삶 또는 ‘안개’ 같이 사라져 버린 꿈이 함께 겹쳐서 떠오를 것이다.

양 치는 자. [רֹעֵה צֹאן 로에 촌] ‘צֹאן 촌’은 ‘양’뿐 아니라 ‘염소’ 등 몸집이 비교적 작은 모든 가축을 뜻한다(27:9, 민 32:16). 따라서 아벨은 여러 종류의 가축을 돌보는 자였음을 알 수 있다.

농사하는 자. 직역하면 ‘땅의 노예’, ‘땅을 섬기는 자’. 대지(大地)에 대한 고대인들의 애정이 잘 드러나 있는 표현이다. 한편 농업과 목축업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형태의 직업으로 하나님의 문화 명령(Cultural mandate) 속에 이미 계시되어 있었다(1:28).

 

4:3 세월이 지난 후에. 문자적 의미는 ‘날들의 마지막에’라는 성경상의 관용어이다(40:1). 그런데 혹자는 이를 ‘수확할 때가 되어’란 뜻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소산. 원어 ‘페리’는 ‘과실’, ‘열매’란 뜻으로 땅을 경작하여 거둔 ‘과실’, ‘열매’란 뜻으로 땅을 경작하여 거둔 각종 수확물을 의미한다(3:2, 레 25:19, 왕하 19:29).

제물. [מִנחָה 민하] 4절에서처럼 가끔은 ‘희생제물’을 의미하기도 하나, 대개는 고운 밀가루와 감람유, 유황을 제물로 삼아 드리는 소제(素祭)를 뜻한다(레 2:1-16). 이러한 소제는 번제를 드릴 때마다 항상 함께 드려졌는데 이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충성을 상징하는 제사이다.

 

4:4 첫 새끼. 두 가지 복합적 의미를 지닌다. (1) 아벨이 거둔 첫 소산이란 점에서, 가장 귀한 것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쳤다는 의미를 지닌다(출 13:2). (2) 희생제물이란 점에서,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산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3:21>.

기름. ‘살찌다’란 단어에서 파생된 말로 ‘지방’(fat), ‘기름진 것’(45:18)을 의미한다. 즉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또 다른 양들 가운데 가장 살찌고 기름진 것을 골라 하나님께 믿음으로(히 11:4) 바쳤다.

받으셨으나. [שָׁעָה 샤아] ‘주목하다’, ‘존경하다’는 뜻. 즉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제물이므로 기쁘게 받아들였다는 의미이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가인과 아벨)은 가축의 초태생을 희생 제물로 바침으로, 약속된 속죄인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나타내야 할 것이었다. 이것들 외에 땅의 처음 익은 열매를 감사 제물로 주 앞에 바쳐야 할 것이었다”(엘렌 화잇, 부조와 선지자, 71).
아벨이 하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동물로 된 제물에 더해 채소로 된 제물을 드린 반면, 가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희생 제물로 바칠 동물을 가져오지 않고 오직 “땅의 소산”만을 제물로 드렸다. 이것은 그의 동생의 태도와 대조되는 공개적인 불순종이었다. 이 이야기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아벨과 그가 피로 드린 제물)과 행함으로 말미암는 구원(가인과 그가 드린 땅의 소산)의 대표적인 예로 여겨진다.
물론 이 제물들이 가지고 있던 영적 중요성이 있지만, 그 제물 자체에 어떤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들은 죄인들의 물리적인 필요를 채우시는 것은 물론 구원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상징과 이미지에 불과했다.

 

4:5 받지 아니하신지라. ‘쳐다보지도 아니하셨다’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가인과 그 제물에 대해선 관심조차 기울이지 아니하셨음을 뜻한다. 한편 본문만으로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법으로(How) 제사를 받아들이거나 혹은 거부하였음을 나타내셨는지 알 수 없으나 아마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아벨의 제물은 태우고, 가인의 제물은 그냥 내버려두시는 방법을 사용하셨을 수 있다(왕상 18:37, 38). 엘렌 지 화잇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셨’(창 4:4)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 제물을 살랐다. 그러나 가인은 주의 직접적이요 분명한 명령을 무시하고 과실만을 제물로 드렸다. 그것이 가납되었음을 보여 주는 아무런 표적도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았다”(부조와 선지자, 71).

안색이 변하니. [יִּפְּלוּ פָּנָיו 이풀루 파나우] ‘얼굴을 강타하다’는 말로 극심한 분노나 불만에 의해 안면 근육이 경직된 것을 의미한다(욥 29:24, 렘 3:12). 이것은 죄인의 일반적 태도인데 자신의 제물이 거부당한 것을 본 가인은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했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방자히 불만을 토로하였다.

가인의 반응은 두 부분으로 기록되어 있다.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가인의 분노는 하나님과 아벨을 향했다. 가인이 하나님께 분노한 이유는 자신이 불공정함의 피해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으며, 아벨에게 분노한 이유는 자신의 형제를 질투했기 때문이다. 무엇이 그렇게도 샘이 났을까? 단순히 제물 때문이었을까? 성경의 짧은 기록에 드러나지 않은 무언가가 그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정확한 문제가 무엇이었건 간에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물을 받아주지 않으셨기 때문에 낙담했다.

 

4:6 본 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두 질문은 가인의 두 상태와 연관되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비난하고 계시지 않았다. 아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질문을 하셨는데 그렇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답을 모르셨기 때문이 아니라 가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면서 자신이 처한 상태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항상 그러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타락한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하신다.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실망하게 했을지라도 말이다.

 

4:7 네가 선을 행하면 … 못하겠느냐. 죄를 짓지 않은 자는 떳떳하게 행동할 수 있다는 히브리인들의 관용구이다. 따라서 본 절은 ‘네가 잘했다면 왜 떳떳하지 않겠느냐?’라는 역설적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회개하고 마음의 변화를 경험하라는 부르심이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받아주시고’ 용서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다만 가인은 자신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야 했다.

낯을 들지. ‘얼굴을 높이다’, ‘의기 양양한 표정을 짓다’는 뜻이다. 즉 낯을 든다는 것은 양심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잘못을 뉘우치고 선을 추구하려는 마음을 갖기는 커녕 오히려 더 완악한 마음을 갖는다면’이란 뜻.

죄. [חַטָּאת 하타트] ‘חַטָּאָה 하타’(빗나가다, 과녁을 맞추지 못하다)에서 파생된 말로 인간이 하나님의 뜻과 법을 벗어나 곁길로 나아가는 것이 곧 죄임을 일깨워 주는 단어이다. 여기서는 죄의 화신(化身)인 ‘사탄’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함이 적절하다.

엎드려 있느니라. ‘잠복하다’, ‘쭈그리다’는 뜻으로 먹이를 단숨에 낚아채기 위해 웅크리고 있는 짐승을 연상 시켜준다. 따라서 ‘죄가 문에 엎드린다’는 말은 사탄이 마음 문, 곧 심령에 침입하여 악으로 그를 굴복시키기 위해 호시 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뜻이다.

죄가 너를 원하나. [אֵלֶיךָ תְּשׁוּקָתֹו 엘레카 테슈카토] ‘죄가 너를 향하여 기를 쓰고 달려들려고 하나’란 뜻이다. 즉 죄(사탄)는 마치 우는 사자와 같은 것이어서 삼킬 것만 있으면 그 즉시로 달려든다는 의미이다(벧전 5:8).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외부로부터 찾아드는 죄의 유혹 뿐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서부터 일어나는 죄의 욕망을 물리치고 이겨내라는 뜻. 그러나 이는 인간의 의지나 결단, 인내만으론 온전히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니 항상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야 할 것이다(마 26:41, 요 16:13).

 

4:8 말하고. [יֹּאמֶר 요메르] ‘אָמַר 아마르’(말하다)의 미래 완료형으로써 가인이 이야기한 시점이 하나님께로부터 책망(6, 7절)을 듣고난 뒤 어느 정도의 시간이 경과한 때였음을 알려줌. 한편 본 절 내에는 이 말에 걸리는 목적어가 없다. 그러나 70인역(LXX)이나 사마리아 오경, 불가타역(Vulgate) 그리고 공동번역은 이 말의 목적어가 ‘들로 가자’란 말을 수록하고 잇다. 즉 가인은 하나님의 책망과 권면을 듣고서도 회개는 커녕 분노와 불만을 억제치 못한 채 아벨을 죽이려 들판으로 꾀어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목적어가 본문보다 앞에 나오는 경우가 흔한 히브리 문법의 특징상 가인이 하나님께로부터 들었던 책망(6, 7절)을 그대로 아벨에게 이야기 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아우. 이미 2절에서 다룬 단어이다. 그런데 본 장에서 이 단어가 거듭거듭 나오는 까닭(9-11절)은 (1) ‘형제 살인’이라는 가인이 범한 죄의 흉악성을 강조하며 (2) 아담이 지은 죄(3:6)의 영향이 단 시간 내에 골육지친 간의 불화와 살인으로까지 발전되었음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쳐죽이니라. 원뜻은 ‘죽을 의도를 가지고 때리다’이다. 가인의 마음이 확고 부동하게 사탄에게 정복당해 있었음을 증언해 준다.

 

4:9 네 아우 … 어디 있느냐. 최초 타락한 아담에게 주셨던 질문과 동일한 성격의 질문이다(3:9). 곧 지금이라도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라는 독촉인데, 이처럼 범죄한 인간을 쉽게 버리지 않으시고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허용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에 기인한다(출 34:6, 시 33:5).

알지 못하나이다. [לֹא יָדַעְתִּי 로 야다티] ‘יָדַע 야다’(알다)의 과거 완료형 부정으로 ‘나는 처음으로 알지 못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곧 형제에 대한 우애와 책임을 부인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 전자 전능하신 하나님을 기만하려 든 뻔뻔스런 대답이다. 범죄한 인간이 그럼에도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의 죄를 자복하는 것 뿐인데 이처럼 가인은 도리어 하나님을 속이려 들었으니 그의 결국이 어떠할런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지키는 자. ‘돌보는 자’, ‘시중드는 자’, ‘파수꾼’ 등을 의미한다. 가인은 형으로서 마땅히 동생인 아벨을 돌보며 지켜 주어야 할 인간적 책임이 있는 자였다.

니이까. [הֲ 하] ‘그렇지 아니하다’는 전제를 내포하고 있는 의문사이다. 즉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런지는 알 수 없으나 아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로 곧 형제간의 관계성 단절을 선언하는 뻔뻔한 반문이다.

 

4:10 무엇. 원어 ‘메’는 원래 ‘무엇’, ‘어떻게’, ‘왜’ 등과 같은 뜻의 의문사이나 간혹 ‘얼마나’라는 감탄사로 쓰이기도 한다. 여기선 탄식의 의미가 가미되어 ‘그토록 놀라운 일’ 정도의 뜻이다.

하였느냐. [עָשָׂה 아사] ‘행하다’(출 40:16)는 뜻 외에 ‘범하다’(레 4:2)는 뜻도 지닌 단어로 여기선 ‘무슨 잘못을 저질렀느냐’는 의미이다.

호소하느니라. 원뜻은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다’. 즉 ‘사람 살려!’라고 부르짖는 비명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때로는 억압받는 약자가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보호받기 위해 법에 간절히 호소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왕하 8:3). 그러므로 ‘핏소리가 하나님께 호소한다’는 것은 그분께서 무죄한 자의 피흘림을 친히 아시고 그것을 절대 간과치 아니하신다는 뜻이다(시 37: 12-15). 한편 인간 생명은 하나님께서 수여하신 것으로 그분만이 홀로 좌우할 수 있다(9:5, 6). 따라서 인간이 타인의 생명을 해(害)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중요한 도전 행위이니 비록 인간측의 호소가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선 응당 이 일에 대해 신원(神寃)하실 것이다(살전 4:6).

 

4:11 땅에서. [מִן־הָאֲדָמָה 민 하아다마] 두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구절이다. (1) ’그 땅에서부터’란 뜻. 이는 하나님께서 땅을 사용하시어 가인에게 저주를 내리셨다는 의미가 된다. (2) ‘그 땅보다 더 많이’란 뜻. 이는 인간 범죄로 말미암아 인간과 더불어 자연계가 함께 당하고 있는 고통(3:17)보다 더욱 극심한 고통과 저주가 가인에게 임할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4:12 밭 갈아도 … 주지 아니할 것이요. 하나님께서 토양의 생산력을 제어하사 가인에게 정당한 노동의 소출(所出)을 허락치 아니하시겠다는 뜻이다(신 11:17). 대지를 제2의 고향으로써 따스한 어머니의 품과 같이 여겼던 고대인들의 사상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께서 가인과 대지와의 정상 관계를 단절시킨 이 형벌은 얼마나 큰 저주의 성격을 띠고 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효력. 원어 ‘코아흐’는 ‘힘’(strenght), ‘생산력’, ‘능력’, ‘본질’ 등과 같은 여러 뜻을 지니고 있는데 여기서는 인간이 음식물로 삼는 각종 채소류와 곡물류를 의미한다(1:29, 2:5).

피하며 유리하는 자. [נָע וָנָד 나 와나드] ‘נָע 나’(도망자, 피난자)는 ‘נוַּע 누아’(계속해서 도망치다, 흔들리다)에서 파생된 말로, 하나님께로부터 내어침을 당한 가인이 다른 피조 세계에서조차 배척당하였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죄의식에 사로잡혀 일생 동안 심적으로 쫓기는 삶을 살았음을 시사해 준다. 두 번째 단어인 ‘나드’(방랑자, 부랑자)는 ‘누드’(헤매다, 방황하다)에서 유래된 말로, 가인이 한 곳에 안주치 못하고 이리저리 떠도는 나그네 삶을 살았음을 증언해 준다. 가인이 그 같은 삶을 산 이유는 (1) 아무리 수고하여도 그에 준하는 소산을 얻지 못하자 다른 삶의 터전을 구하기 위해 (2) 양심의 가책과 고통에 짓눌려 심적 안정을 누리지 못했기 때문에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4:13 아뢰되. [אָמַר 아마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자백하는 것을 뜻하는 히브리어 ‘יָדָה 야다’(레 5:5, 렘 3:13)와는 달리, 명령을 하달하거나 자신의 의사를 개진(開陣)하는 것을 뜻한다(대상 21:17). 가인이 자신의 죄에 대해선 회개치 않고 단지 형벌이 중한 것에 대해서만 절망, 탄식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죄벌. [עָוֹן 아온] ‘עָוָה 아와’(구부리다, 사곡되이 행하다)에서 파생된 말로 본래는 ‘죄’, ‘악’, ‘불법’을 뜻하나(15:16, 수 22:17, 단 9:13) 이차적으로는 본 절에서와 같이 죄에 대한 ‘징계’, ‘형벌’, ‘심판’을 뜻하기도 한다(욥 19:29).

무거우니이다. 능력과 인내 면에서 역부족이라는 뜻이 아니고, 부과된 형벌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뜻이다. 범죄하고서도 하나님께 반문했던 가인의 뻔뻔스러움(9절)을 회상시켜 주는 구절이다. 하나님 앞에 범과한 인간은 자신에게 미칠 형벌에 대해 염려하거나 어떻게든 이를 면해 보려 발버등쳐서는 안 되며 마땅히 자신의 죄에 대해 애통하며 괴로워해야 한다(사 6:5, 눅 23:41). 그리할 때 하나님께선 우리를 긍휼이 여기사 비록 진홍같이 붉은 죄라도 양털같이 희게 씻어 주실 것이다(사 1:18).

 

4:14 오늘. [הַיֹּום 하욤] ‘욤’(날, 때)에 정관사 ‘하’가 붙은 것으로 ‘바로 이 날’이란 뜻. 이는 가인이 범죄한 데 대해 하나님의 즉각적인 형벌이 선고되었음을 강조해 준다.

이 지면에서 …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성경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뵙지 못하게 되었다’란 말은 그분의 관심권 밖으로 벗어나 더 이상 그분의 도움과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이다(신 31, 8, 시 104:29). 가인은 이처럼 끝까지 자신의 죄에 대해선 생각지 않고, 범죄한 결과 하나님께로부터 영원히 배척당하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공포에만 사로 잡혀 이러한 본능적 비명을 지른 것이다.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히브리인들에게서 독특하게 찾아볼 수 있는 ‘고엘 제도’(민 35:19-21), 즉 자신의 혈족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을 경우 반드시 그 죽은 자의 일가 친척이 보복토록 규정하고 있는 율법을 상기시켜 준다. 이와 유사한 규정은 고대 로마인이나 고울인(Gaul, 프랑스인)에게서도 발견되는데 어떤 범죄로 인해 추방령을 당할 자는 모든 법적 권한을 박탈당했다. 따라서 그 누구라도 자유롭게 그를 살해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본 절은 성경의 난해한 구절 중 하나로 남는데, 그 까닭은 당시 아담과 하와 외에 가인에게 복수할 또 다른 사람이 있었는가 하는 의문점 때문이다. 즉 1장부터 본 장에 이르기까지의 기록 중에는 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 이 네 인물만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 학자들간에는 서로 의견이 분분한데 그중 대표적인 견해는 다음과 같다. (1) 장차 태어날 아담의 또 다른 후손을 염두에 둔 말이다(Delitzsch). (2) 굶주린 들짐승을 가리킨다(Josephus). (3) 이미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태어나 도처에 살고 있는 많은 자손들을 의미한다(Havernick). 다만 이들은 구속사에 필요한 인물만을 선택 기록하는 성경 기록 특징상 성경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을 뿐이다. 이러한 견해 중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을 뿐 아니라 뒤에 이어지는 문맥과도 부합되는 견해는 세 번째 견해이다.

 

4:15 벌. 단순한 ‘형벌’이 아닌 ‘복수’(vengeance)를 의미한다(삼상 24:12, 겔 24:8).

칠 배. [שִׁבְעָתַיִם 쉬브아타임] ‘쉬브아’(일곱)의 쌍수(dual number)로 ‘일곱 번’ 또는 ‘일곱 배’란 뜻.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7’은 완전수이니 벌을 일곱 배나 내리겠다는 것은 완전하고도 철저하게 보응하겠다는 의미이다(레 26:28).

표. 원어 ‘אוֹת 오트’는 ‘기념비’, ‘증거믈’, ‘깃발’, ‘표시’ 등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것이 문자 그대로 어떤 외형적인 표식인지 아니면 가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내적 확신인지는 분명치 않다. 어쩌면 하나님께선 아하스의 일영표(日影表) 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십도나 물러나게 하심으로써 히스기야를 확신시켜 주셨던 것처럼(왕하 20:8-11), 어떠한 표적을 행하사 가인에게 확신을 심어 주셨을런지도 모른다.

죽음을 면하게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계명에 의하면 살인자는 당연히 처형토록 되어 있다(9:6, 출 21:12, 레 24:17, 민 35:16-212, 31). 그렇지만 정작 하나님께서는 인류 최초 살인자인 가인을 살려 주셨다. 따라서 그 까닭에 대하여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데 그중 가장 개연성 있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1) 죄악이 관영(貫盈)할 때까지 심판을 유보하신 것뿐이다. 이는 추수 때까지 알곡과 가라지가 한 밭에서 자라도록 허용하시는 하나님의 심판 원리(마 13:24-30)에 근거한 견해이다. (2)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함이다. 즉 사람들은 가인이 당하는 저주와 고통(12, 13절)을 보고서 살인의 결과가 얼마나 처참한 것인지를 교훈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3) 계명을 세우사 인간에게 생명을 주관할 수 있는 절대자이심을 인지시키기 위함이다. 아무튼 본 절은 죄인에게까지도 미치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를 보여 준다(겔 33:11).

 

4:16 떠나서. [יָצָא 야차]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8:7, 신 4:45) 외에 ‘달아나다’, ‘피하다’(렘 11:11)란 뜻도 지니고 있다. 이는 가인이 하나님께 쫓겨나기에 앞서 스스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려는 의사가 강했었음을 시사해 준다.

거주하더니. [יָשַׁב 야샤브] ‘정착하다’, ‘계속하다’는 뜻.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는 저주에도 불구하고 한 곳에 안주하려는 가인의 욕망을 드러내 준다.

 

4:17 아내. 여기에 나오는 가인의 아내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아담과 하와에게 다른 아들과 딸들이 있었음이 분명하며, 가인과 아벨이 아마도 그 딸들과 결혼을 했을 것이다. 이런 관습은 두 번째 세대에게는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결혼했더라도 그 당시에는 근족 혼인을 통해 유전될 수 있는 선천적인 결함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홍수가 있은 지 오랜 후에도 아브라함은 그의 이복누이와 혼인했고(창 20:12), 모세의 아버지 아므람이 자신의 아버지의 누이인 요게벳을 아내로 취했다는 것(출 6:20)은 고대에는 이런 관습이 허용되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 거룩한 제사장 나라로 구별하신 후에는 온갖 형태의 근친상간을 금하는 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다(레 18:7-17, 20:11, 12, 14, 17, 20, 21, 신 22:30, 27:20, 22, 23). 결론적으로 인간 역사의 시초에는 친척 간의 혼인이 불가피했으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된 나라가 되었을 때는 근족 간의 성적인 관계가 금지되었다. 이렇게 금지한 이유는 일차적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성민으로서 지니는 특별한 위치 때문이고, 또한 죄의 영향이 더욱 현저하게 나타남에 따라 유전적인 결함이 전해질 위험이 증가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위험이 창조 직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에녹. ‘봉헌’ 또는 ‘헌신’의 뜻일 수도 있으며, ‘시작’을 의미할 수도 있다. 아마도 가인이 그의 아들에게 지어준 이름은 그가 원하는 대로 살기를 시작하고자 하는 의도를 나타냈을 수 있다. 그로부터 하나님을 경외치 않는 인간 계보(18-24절)가 시작되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

성. 문자적으로 ‘영원한 거주지’를 뜻한다. 성을 쌓은 것은 단지 영구적인 거주지로써 그의 가족들을 위하여 요새화 된 영지(領地)를 세우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세상의 첫 ‘성’이 최초의 살인자에 의하여 건축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인간이 자연 가운데 살며 그 속에서 창조주의 능력과 권세를 보도록 한 하나님의 계획은 이와 같이 무시되었다. 오늘날 존재하는 많은 악들은 인간의 최악의 본능이 지배하며 온갖 유형의 부도덕이 성행하는 큰 도시들로 인간들이 무리하게 모여든 일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쌓고. [יְהִי בֹּנֶה 예히 보네] ‘הָיָה 하야’(이다, 있다, 존재하다)와 ‘בָּנָה 바나’(건축하다, 짓다, 수선하다)가 복합된 진행형으로 ‘그가 쌓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는 가인이 성의 건축을 완성치 못했음을 암시해 주는데, 그 까닭은 그가 땅에서 항상 유리하는 삶을 살게끔 저주 받았기 때문이다(12, 14절).

 

4:18 없음.

 

4:19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יִּקַּח־לֹו שְׁתֵּי נָשִׁים 이카흐 로 쉐테 나쉼] 여기서 ‘לֹו 로’는 ‘자신을 위하여’란 뜻으로 곧 이기주의적인 목적과 욕망을 드러내 준다. 그리고 ‘이카흐’(맞이하다)는 ‘부부 관계를 맺다’(신 24:5), ‘장가들다’(대상 7:15)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인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를 깨뜨린 최초의 경우이다.

 

4:20 장막. [אֹהֶל 오헬]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거하심을 상징하는 처소인 ‘성막’을 뜻하기도 하나(출 26:7) 여기선 주로 유목민들이 사용하는 일반 텐트를 의미한다.

 

4:21 수금. [כִּנּוֹר 킨노르] ‘현(絃)을 퉁겨 소리를 내는 악기’란 뜻. 다윗 시대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발전되어 온 현악기이다(삼상 16:23, 19:9).

퉁소. [עוּגָב 우갑] ‘עָגַב 아가브’(숨쉬다)에서 파생된 단어로 목동들이 즐겨 불던 갈대 피리나 플루트 등과 같은 초기 형태의 관악기를 가리킨다(욥 30:31).

 

4:22 없음.

 

4:23 상처. [פֶּצַע 페차] ‘파차’(찢어지다, 부상당하다)에서 온 말로 일차적으로는 자상(刺傷)을, 이차적으로는 모든 형태의 부상을 뜻한다.

죽였고. [הָרַגְתִּי 하라그티] ‘הָרַג 하라그’(때리다, 살해하다)의 과거 시제 내지 미래 시제이다. 이 중 어느 시제로 보느냐에 따라서 본 절 전체의 의미는 크게 달라진다. (1) 과거 시제로 볼 경우 그 뜻은 ‘내게 상처를 입혔기 때문에 나는 그를 죽였다’가 된다. (2) 미래 시제로 볼 경우엔 ‘만일 누가 내게 상처를 입힌다면 나는 그를 죽여버릴 것이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라멕의 아들인 두발가인이 철기구(무기)를 만들었다는 이야기(22절)에 이어 본 절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는 누군가가 위해(危害)를 가해 올 경우 그 무기를 사용하여 복수하겠다는 자만섞인 경고인 것 같다.

상함. ‘חָבַר 하바르’(연결하다, 결합하다)에서 파생된 말로 본래는 ‘줄로 맨 자국’을 뜻했으나 ‘타박상’이란 뜻으로 전의(轉義)되었다.

 

4:24 칠십칠 배.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주셨던 약속(15절)을 자신의 처참한 살인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각색시킨 구절이다. 즉 친동생을 죽인 가인조차도 하나님께서 살려 주셨는데 하물며 원수에게 정당한 보복을 한 자신을 살려 주시지 않겠느냐는 자만에 찬 확언인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긍휼을 만홀히 여긴 것이며 인간 생명을 경시한 극단적 잔학성과 교만의 발로이다. 당시 사람들은 가인을 통해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교훈(15절)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매사에 근신하여야만 했는데 라멕은 이를 외면하였으니 오히려 스스로가 하나님의 공의에 근거한 칠십칠 배의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18:25).

 

4:25 그의 이름을 … 하였으니. 직역하면 ‘그리고 그녀가 그 이름을 … 라고 불렀다’. 이처럼 어머니가 자식의 이름을 지어 준 경우는 창세기에 종종 나타나는데(1절, 29:32-35, 30:24, 35:18) 이는 친히 해산의 고통을 겪고 낳은 자녀에 대한 어머니의 각별한 애정과 기대를 드러낸 행위라 하겠다. 왜냐하면 히브리 사회에서 자녀의 이름은 대개 아버지가 짓는 것이 관행이었기 때문이다(26절, 5:28, 29, 21:3, 눅 1:62, 63).

셋. 맏아들은 살인자가 되어 타락한 삶으로 떨어졌고, 둘째 아들은 형의 손에 희생된 후, 약 30년의 긴 세월이 지난 뒤에 하나님이 “아벨 대신에” 주신 ‘셋’은 히브리어로 ‘셰트’인데, 그 뜻은 ‘대신하다, 부여하다, 지명하다’이다. ‘셋’은 아담에게 다른 두 아들 ‘대신에’ 주어진 아들로서 아버지 아담에게 새로운 희망을 ‘부여’하였고, 적통(嫡統)의 후손으로 ‘지명’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인류의 의로운 혈통을 계승하는 당당한 후사(後嗣)가 되었고, 그 혈통을 입증하는 존귀한 족보에서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아담, 셋, 에노스”(대상 1:1).

 

4:26 이름을 불렀더라. 정확한 뜻은 ‘이름을 불러 그에게 말을 걸다’이다. 이는 곧 셋 시대에 바른 신지식(新知識)을 가진 자들이 하나님께 자신들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겸손히 고백하며 기도와 찬양, 감사와 경배가 있는 공적 예배를 드렸다는 의미이다(12:8, 21:33, 26:25, 대상 16:8). 이처럼 셋의 자손들은 가인의 자손과는 달리(16-24절)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삶을 유지하였는데, 이는 우리들에게 세상이 제 아무리 부패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러한 세태에 물들지 말고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점을 교훈해 준다(롬 12:2).

 


Articles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