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주석, 창세기 0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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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만나주석 1.0.0

창세기 서론

(1) 제목
유대인들은 히브리어 성경의 첫 글자를 따서 창세기를 ‘בְּרֵאשִׁית 브레쉬트’(태초에)라고 부른다. “창세기”(創世記, Genesis)라는 이름은 70인역에서 번역한 것으로, 헬라어 게네시스(genesis)는 “기원” 또는 “근원”을 뜻하는 단어이다. 이 명칭은 히브리어 성경의 원본에 처음부터 붙어 있던 것이 아니라, 여러 세기가 지난 뒤에 덧붙여진 것이다.

(2) 저자
본 책의 저자는 모세이다. 특히 본 책은 신 · 구약성경 자체와 모든 고대 문헌 및 전승, 그리고 교회 교부들이 모세의 책으로 인정하는 오경 중 첫째 책이다.

(3) 기록 연대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한 시점인 B.C. 1446년 이후와 모세가 느보 산상에서 임종을 맞이한 B.C. 1406년 사이의 어느 시기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본다. 엘렌 지 화잇은 히브리인들이 아직도 애굽의 속박하에 있을 때, 미디안 광야에서 기록하였다고 언급하였다(부조와 선지자, 251).

(4) 주제
구속 계시의 막을 여는 책으로써 그 내용에 있어서도 기원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즉 우주와 생명의 기원을 비롯하여 사람, 안식일, 결혼과 가정, 죄와 죽음, 문명과 문화, 그리고 희생과 구속 등 모든 존재의 기원이 명쾌히 기록되어 있다. 아울러 본 책은 각 부분마다 계보 기록의 서두를 이끄는 가운데 출생, 선택, 족보, 역사 등의 구속적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태초에. [בְּרֵאשִׁית 브레쉬트] 히브리어 ‘רֵאשִׁית 레쉬트’는 ‘첫째, 처음, 최초, 시작, 최상의 것’을 의미한다. 70인역(LXX)은 이 말을 요 1:1과 같이 ‘시작, 처음, 영원’이란 뜻을 지닌 ‘εν αρχη 엔 아르케’로 번역하였다. 이 말은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시작한 역사적 ‘시간의 출발점’을 가리킨다. 즉 창세기는 영원 전 사건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우주 및 인류가 탄생하는 시점으로부터 시작되는 역사를 다루고 있다.
첫 구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1) 이어지는 1장 내용의 요약 또는 제목.
(2) 7일 창조주일이 있기 수백만 년 혹은 수십억 년 전에 이뤄진 이 지구와 그 안에 있는 생명체의 창조.
(3) 7일 창조주일이 있기 6,000 ~ 10,000 년 전에 이뤄진, 원시 상태의 지구를 포함한 우주의 창조.
(4) 7일 창조주일의 첫째 날에 이뤄진 우주의 창조.
(5) 우주의 창조가 있은지 오랜 후 7일 창조주일 첫째 날의 첫 일부 시간.

처음 세 가지 견해는 지구가 7일 창조주간 이전에는 혼돈된 상태로 존재했다는 전제가 요구된다.
창조 기사(記事)에 관한 여러 추측들과 이론들이 존재하지만, 인간 지식의 유한함을 인정한다면, 분명하게 계시된 것 외에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시인해야 한다.

하나님. [אֱלֹהִים 엘로힘] ‘엘로힘’은 하나님의 신적 능력을 나타낸다. 이것은 강하고 힘센 분, 창조의 하나님(출 20:2, 단 9:4)으로 그분을 묘사한다. 반면 ‘יְהוָה 여호와’란 호칭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과 은총을 강조한다(출 15:2, 3, 호 12:5, 6). 여호와는 당신 자신을 ‘나는 스스로 인는 자’ 혹은 ‘나는 스스로 될 자’(I shall be what I shall be)로 기술함으로써 당신의 백성과의 변함없는 관계를 지적하신다.

히브리어 명사 ‘אֱלֹהִים 엘로힘’은 복수형이다. 단수형은 ‘אֵל 엘’과 ‘אֱלוֹהַּ 엘로아흐’이다. 일부 학자는 ‘엘로힘’이 복수형인 점을 들어 이를 다신론적(多神論的) 사상의 반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신학사에서는 이 복수형이 구약성경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지지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이 용어는 이교 신들을 지칭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되므로 문맥을 고려해서 이해해야만 한다.

▷ 복수 ‘엘로힘’: 창 1:1의 복수형이 복수의 신들(다신교)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그것은 삼인칭 단수 동사(바라, ‘he created’)의 주어이기 때문이다. 즉 복수 주어에 단수 동사를 사용한 문법적으로 이례적인 형태이다(‘In the beginning the Gods (he) created’). 그리스도교 시각에서 복수 ‘하나님들’은 신학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하나님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이 현상에 대해 각기 다른 설명을 제시한다. 우리는 이 구절의 히브리 본문이 왜 그렇게 기술됐는지 이유를 명확하게 제시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왜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서 삼위일체에 대한 관련성을 찾았는지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있는 그대로, 본문은 분명하게 많은 신이 아니라 한 하나님을 말한다(‘He Created’). 복수형 엘로힘은 신성의 세 인격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문맥상 복수형은 하나이신(단수) 신 안에 내재한 복수적 특성을 암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게 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다.

▷ 복수 하나님과 복수 동사 그리고 대명사: 1:26에는 “하나님[엘로힘]이 이르시되[그가 말하되] 우리의[누 : 일인칭 복수대명사] 형상을 따라 우리의[누 : 일인칭 복수 대명사]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나아세 : 일인칭 복수형 동사].” 설명하는 글에서는 복수 엘로힘이 단수형 동사를 취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목에서는 주어, 동사, 대명사가 모두 복수 형태이다. 그런 다음 마무리 설명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하나님[엘로힘]이 자기[오 : 일인칭 단수 대명사] 형상 곧 하나님[엘로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바라 : 동사, 삼인칭 단수]”(27절). 다시 본 절의 형태로 돌아간다. 학자들은 26절의 복수 동사와 복수 대명사를 설명하지만 일치된 제안은 거의 없다. 가장 무난한 설명이 있다면 자신의 내적 존재가 복수형인 한 하나님이 성경의 주요한 캐릭터라는 사실을 본문이 입증하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 복수성을 그 자체로 심사숙고할 때 우리는 한 걸음 나아가 한 하나님 안에 복수의 인격이 존재한다고 제안할 수 있다.

▷ 복수의 인격체: 본문은 직접 복수의 인격체를 옹호한다. 우리는 창조하시는 하나님뿐 아니라 창조에 직접 참여하는 하나님의 영[루아흐 엘로힘]을 발견한다. 성경의 증거는 독자들에게 유일한 한 창조주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성령은 하나님이어야만 한다. 창조에는 한 가지 요소, 즉 말씀이 존재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말씀은 하나님과 창조물 사이에서 직접 중재한다(하나님→말씀/성령→창조). 시편 기자는 이것을 분명하게 기술한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루아흐]으로 이루었도다”(시 33:6). 하나님, 말씀, 성령, 창조가 등장한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대부분은 창세기에서 신령한 존재 내에 복수의 인격체를 지닌 한 하나님을 발견한다는 것과 더 깊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그 한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규명된다는 것이다.

천지. 문자적으로는 ‘하늘과 땅’을 뜻한다. 여기의 하늘과 땅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1) 수십억 년 전에 창조되었다고 여겨지는 우주를 가리킨다.
(2) 태양계를 가리킨다.
(3) 지구와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대기권 하늘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위의 해석 중 어떤 해석이 좀더 합리적일까? 윌리엄 셰이(William H. Shea)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런 용례들[창조 기사에 사용된 ‘천지’ 또는 ‘하늘과 땅’]을 조사해 보면, ‘하늘’이라는 단어는 우주가 아니라 오히려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대기권 하늘을 가리킨다는 것이 나타난다. 따라서 창 1:1에 나오는 ‘천지’라는 구절의 초점이 우주 또는 별들이 있는 하늘이 아니라 이 지구에 맞춰져 있다”(William H. Shea, “Creation”, Handbook of Seventh-day Adventist Theology, ed., Raoul Dederen(Hagerstown, MD: Review and Herald, 2000), 420).

레갈라도(Regalado)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창세기 1장, 특히 ‘태초에’나 ‘천지’ 같은 단어를 면밀하게 연구해보면, 문맥에 비춰보든지 언어학적으로 보든지 창조 기사는 우리의 세계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으며,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과 같은 우주 전체의 창조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F. O. Regalado, “The Creation Account in Genesis 1: Our World Only or the Universe?” Journal of the Adventist Theological Society 13/2 [2002]: 120).

하젤(Hazel)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하늘과 땅’이라는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갈은 어순으로, 때론 뒤바뀐 어순으로 41번 쓰였는데, 이 명사구는 우리가 사는 지구와 그것을 감싸고 있는 천체를 가리킨다”(G. F. Hazel, 은혜로 맺은 새언약(시조사, 2018), 13).

사 65:17에서 하나님은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노니”라고 말씀하시며, 또 계 21:1에서 요한은 죄로 얼룩진 옛 ‘하늘과 땅’을 대체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본다. 여기에서 대체되는 하늘과 땅은 우주 전체가 아니라 죄로 얼룩진 지구와 대기권 하늘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본 절의 ‘천지’는 우주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지구와 대기권 하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창조하시니라. [בָּרָא 바라] 구약에는 ‘창조하다’란 뜻의 단어가 세 종류 나온다.

첫째, 여기서 사용된 ‘바라’는 주로 무(無)에서 유(有)에로의 완전한 신적 창조 행위를 가리킨다(롬 4:17, 히 11:3 참조).
둘째, ‘עָשָׂה 아사’는 이미 창조된 물질을 재료로 더 나은 물체를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16, 25, 26절).
셋째, ‘יָצַר 야차르’는 ‘아사’와 비슷하나 특별한 목적에 따라 기존 사물을 새로 완벽히 조성하는 것을 가리킨다(2:7, 9).

한편 천지창조를 주제로 하는 본 장에서 ‘바라’, ‘아사’, ‘야차르’ 등 이 세 단어는 정확한 뜻에 따라 해당 구절에서 사용되었음 알 수 있다. 그 예로 ‘바라’는 (1) 무에서 유에로의 존재 창조를 가리키는 1절, (2) 생물에게 생명의 근원을 주시는 창조 행위를 가리키는 21절, (3) 그 전까지 전혀 없었던 영적 존재의 창조를 가리키는 27절에서만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존재하게 하실 때 물질을 창조하지 않으셨다는 이론은 근거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세상을 조성하시면서 이미 존재하는 물질에 의존하지 않으셨다”(Ellen. G. White, 교회증언 8권, 258).

지구가 창조주일 이전에 이미 혼돈된 상태로 존재했는가? 이에 대하여 재림교 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재림교인들은 언제나 무로부터의 창조 곧 하나님이 지구를 존재케 하실 때 이미 존재하고 있던 어떤 물질에 의존하지 않았다는 신조를 견지해 왔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이 지구를 형성하고 있던 물질을 만드신 것은 창조주일의 첫째 날이었고, 그 즉시 엿새 동안의 창조사역을 계속하셨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왔다. 하지만, 거의 초창기부터 어떤 재림교인들은 창세기의 기사가 문자적인 엿새 동안의 창조사건 이전에 먼저 지구라는 물체를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셨음을 뜻한다는 이해를 인정해 왔다”(“Creation” in The Seventh-day Adventist Encyclopedia, ed. Don F. Neufeld (Hagerstown, MD: Review and Herald, 1976), 357).

 

1:2 땅. 접속사(וְ 웨)와 정관사(הָ 하)가 붙어 있어 직역하면 ‘그런데 그 땅’이다. 여기서 ‘땅’은 육지와 바다를 구분할 때 사용하는 ‘육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지구’를 가리킨다.

혼돈하고 공허하며. [תֹהוּ וָבֹהוּ 토후 와보후] 이 구절은 ‘그리고’를 뜻하는 접속사(וָ 와)로 연결된 두 개의 명사로 이루어져 있다. ‘토후’는 단독으로 여러번 나타나는데, ‘무(無)’, ‘헛된 일’(사 29:21), 또는 ‘외딴 혹은 황무한 곳’(욥 6:18) 등을 뜻한다. 또한 우상의 ‘헛된 것’(삼상 12:21), 하나님 앞에서 열방이 ‘아무것도 아님’(사 40:17), 법정에서의 ‘허망한 것[진술]’(사 59:4) 등을 일컫는 말로 사용된다. 두 번째 단어 ‘보후’는 성경에서 이곳 말고는 단지 두 번 더 나오는데(사 34:11, 렘 4:23), 두 번 다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로 땅이 혼돈하고 황무하게 된 상태를 가리킨다. 종합해 보면 본 절의 ‘혼돈하고 공허하며’는 하나님의 말씀이 지구에 질서를 부여하기 전, 지구가 아직 조성되지 않은 상태, 즉 아무 생명체도 살지 않고 있는 무질서하고 텅빈 상태를 가리킨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여기서 ‘흑암’은 단순히 빛에 대칭되는 어둠의 개념이 아니라 창조 이전 빛이 없는 상태를 포괄적으로 나타낸다. 한편 공동번역은 이를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로 번역하였다. 왜냐하면 ‘깊음’에 해당하는 원어 ‘תְּהוֹם 테홈’은 때로 ‘깊은 바다’(시 42:7, 겔 31:15)나 지하물의 근원지(7:11, 시 78:15)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아마 이는 창조된 원시 형태의 지구가 물 혹은 물 같은 유동체로 덮여있었으며 사면에는 칠흑 같은 어둠만이 있었음을 뜻하는것 같다. 본 절의 “깊음 위”와 “수면 위”는 같은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이 구절은 창조의 상황을 언급하며 하나님의 성령이 성경에 언급된 첫 번째 경우이다. 그 진술이 직접적일 정도로 분명하지는 않기 때문에 문장의 중대한 의미를 알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용어와 문맥만으로 이해할 뿐이다. 양쪽 모두를 살펴보자.

▷ 하나님의 영: ‘영’은 히브리어로 ‘רוּחַ 루아흐’인데 ‘바람,’ ‘숨’을 의미한다. 몇 사람이 여기 나오는 “하나님의 영”이란 구절을 “하나님의 바람”, “전능한 바람”이라고 해석했을지라도, 전통적인 독법을 거절할 만한 타당한 이유는 없다. 구약성경에서 그 히브리어 구절은 언제나 “하나님의 성령”을 의미한다. 시편 104편 30절에서는 창조 때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가, 하나님께서 자연계 안에서 운행하도록 보냄을 받은 “당신의 영”이라는 인격적인 용어로 묘사되었다. 성경은 창조에서의 신적 활동에서 성령의 역할에 대해 많이 말하지 않는다. 시편 104편 30절은 성령을 창조를 위한 그리고 창조의 회복과 보존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규명한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기운(루아흐-바람, 영, 숨)으로 이루었도다”(시 33:6, 참고 욥 26:13). 이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숨/성령’으로 창조하신다. 신약성경은 ‘말씀’을 하나님의 성육신하신 말씀인 그리스도와 동일시한다(요 1:1-3). 그분들이 창조에 함께 참여했고 창조는 하나님의 특권이기에, 그분들은 본질상 신적 존재들이다.

▷ 동사 ‘운행하다’: [‘רָחַף 라하프’] 동사 ‘라하프’를 몇 사람은 ‘품다’로 번역했는데, 이것은 세상을 성령으로 부화된 일종의 우주적인 달걀로 암시한다. 그것은 고대의 신화적인 사고에 근거했다. 그러나 그 동사는 전혀 ‘품다’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떨리다’(렘 23:9) 또는 ‘너풀거리다’(신 32:11)를 의미할 수 있다. 신명기 32장 11절에서 그 말은 비행을 배우고 있는 자기 새끼를 붙잡기 위해 날아가는 독수리의 재빠른 움직임을 묘사한다. 그것은 급속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앞뒤로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을 전달한다. 여기서 그 용어는 창조 세계 내부에서 성령이 직접 활동하고 계심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초월적인 창조주시라고 창세기 1장에서 말하고 있지만 창조 세계 내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역동적인 임재는 내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 성령과 창조: 이 구절의 직간접적인 문맥을 살펴볼 때, 우리는 다음 몇 가지를 인정해도 무방할 것이다.
첫째,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성령은 성경의 나머지 부분에서 드러난 성령과 동일한 분이기 때문에, 다른 구절들이 그분에 대해 말한 내용들이 창조에서의 그분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성령께서는, 다른 것들 사이에서, 사람들이 특정한 과업을 행하도록 잠재능력을 계발시킬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분께서는 창조 세계의 잠재 능력을 보존하고 계발시킴으로 창조에 직접 참여하신다.
둘째, 우리는 또한 다음과 같은 명백한 사실, 즉, 지구가 인간의 거주지로 체계를 갖추기 전에 성령께서 그곳에 임재 하셨다고 확언할 수 있다. 그래서 성령의 사역은 본문에서 묘사된 창조의 사역과 연관성을 가진다고 말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시 말해, 성령의 활동은 창조 주간에 있을 하나님의 일을 위한 준비 과정임을 말하기 위해 하나님의 성령이 먼저 소개되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잠재력을 지닌 원재료를 창조하셨고 그분만이 그것을 보존하고 개발할 수 있다(예를 들어, 창 1:11, 24). 창조 세계의 잠재 능력은, 유신론적 진화에서 말하는 것처럼 스스로 실체화되지 않는다. 말씀이신 분은 신적 의도와 조화되도록 그 일을 실현한다.

결론적으로 창조 세계에 나타난 성령의 임재 즉 ‘운행’이라는 말로 표현된 그의 끊임없는 활동과 동작을 통해 무한한 피조물의 잠재력이 보존된다. 또 하나님의 말씀과 결합하여 그 잠재력이 발휘되는 것도 그분의 임재를 통해서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 세계가 존재하도록 신비스런 방식으로 함께 일하셨다.

 

1:3 이르시되. [אָמַר 아마르] 6 일간의 창조 기사에서 10회나 반복 사용된 이 말은 하나님은 말씀의 하나님이시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 능력이 있음을 보여 준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 공허하지 않고(신 32:47, 사 55:11, 렘 23:2) 그대로 이루어지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곧 그분의 능력(power)이요 행위(Action)임을 알 수 있다. 시편 기자는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 33:9)라고 하였고, 사도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히 11:3)라고 말한다. 한편 창조시부터 말씀으로 역사하신 하나님은 오늘날도 말씀으로 인간들을 권고하신다. 그리스도교는 말씀의 종교이다.

빛이 있으라. 하나님의 첫 번째 명령은 ‘빛’과 ‘존재’(있으라)에 관한 것이었다. ‘빛’(אוֹר 오르)은 때로 열(사 44:16), 불(사 31:9), 태양(욥 31:26), 번개불(욥 27:3)등 구체적인 발광체 혹은 발광 현상을 가리키기도 한다. 어거스틴(Augustine)은 여기의 빛을 신적 은사와 능력을 상징하는 영적인 빛으로 보았으나, 실제 빛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그런데 빛이 첫째 날에 창조되었고, 태양은 넷째 날에 만들어졌다면(창 1:14), 첫째 날의 빛은 무엇인가? 첫째 날의 ‘빛’은 다음의 두 가지 중의 하나일 것이다. (1) 하나님께서 따로 만드신 빛, (2) 하나님에게서 비쳐 나온 빛.
그러나 성경은 이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다.

성경학자들은 창조 과정에 나타난 이 난제에 대한 몇 가지 해결책을 제안하였다. 그 중 두 가지는 자세히 살펴볼 가치가 있다.

(1) 첫째날의 빛은 하나님의 임재였다. 창조주일의 7 일을 창세기의 창조 기사(창 1:1-2:4a)와 같은 순서로 묘사한 찬양시인 시편 104편에서, 첫째 날의 빛은 하나님의 영광과 연관돼 있다.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2절). 여호와는 빛이시므로(시 27:1, 요일 1:5) 그의 임재는 빛을 가져오며, 그에게서 빛이 나온다. 출애굽할 때(출 13:21)도 여호와가 이스라엘에게 빛이 되었고, 애굽 군대에게 어둠이 되었던 홍해의 경험(출 14:19-20)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는 빛의 근원이었다.
태양에 의존함 없이 빛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개념은, 하나님 자신이 빛이라고 말하는 요한계시록(21:23, 22:5)에서도 입증된다. 고대 랍비들의 문헌도 창조의 첫째 날의 빛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였다고 언급한다. 하나님은 빛은 궁극적 근원이시다(사 60:19-20).

(2) 창조의 첫째 날에 하나님이 태양계를 창조하셨으나(이로써 첫째 날부터 이미 존재한 저녁-아침의 하루 주기를 설명할 수 있다), 태양은 아직 지구와의 관계에 있어서 의도된 목적에 맞게 배치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이는 넷째 날에 하나님이 태양과 달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들로 낮과 밤을 주관하고 빛과 어둠을 나누며 계절와 날과 해를 이루도록(창 1:14, 18) 지정하였음을 뜻할 수 있다. 그러므로 태양과 달은 첫째 날부터 존재하고 있었으나 넷째 날부터 지구에서 볼 수 있었다. 창조의 둘째 날에 언급된 궁창 위의 물(7절)이 지구를 덮어 태양이 지구에서 보이지 못하도록 막았을 수 있다. 그렇다면 넷째 날에 물의 막(幕)이 사라졌을 것이다.

위에서 제안된 두 해결책은 상호보완적일 수 있으므로 함께 결합하여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임재는 처음 3일 동안 빛의 주된 근원이었을 수도 있으나, 그 빛에는 태양의 빛(첫째 날에 이미 태양계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전제 아래)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넷째 날부터는 초점이 오늘날 알려진 천체들에서 발산된 빛에 맞춰졌다.

 

1:4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 표현은 일곱 번(4, 10, 12, 18, 21, 25, 31절) 반복되는데, 하나님의 활동을 인간의 언어로 전달하고 있다. 이것은 곧, 창조의 각 행위가 조물주의 계획과 의지를 완전히 충족시킨 것을 뜻한다. 마치 우리가 자신의 노력의 산물들을 바라보고 살핌으로써 그것들이 우리의 계획과 목적에 부합할 때 만족하고 행복해 하듯이, 하나님도 창조 행위 다음에는 항상, 그의 산물들이 그의 계획에 완전히 일치한다고 만족해 하시고 기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 104:31)신다.
또한 ‘좋았더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טוֹב 토브’는 아름답고 예쁜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비친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창 6:2)이나 매력, 리브가의 “아리따움”(창 24:16), 그리고 밧세바의 “아름다움”(삼하 11:2)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의 천지 창조에는 세 번에 걸친 분리 사역이 나타나있다. 즉 (1) 빛과 어둠의 분리 - 4절 (2) 궁창 아래의 물과 위의 물로 나눔 - 7절 (3) 바다와 땅의 분리 - 9절. 처음에 무질서한 지구에는 오직 어둠만이 존재하였다. 빛이 들어옴으로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 어둠과 빛은 나란히 존재하지만, 서로 구분된다. 후일 바울은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고후 6:14)라고 말하여, 빛과 어둠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의와 불법에 연결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인 삶의 원칙을 설명하였다.

어둠의 세계에 빛이 들어옴으로 어둠과 빛의 분리가 일어난 것처럼, 세상에 복음이 전해질 때 분리와 불화가 일어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눅 12:51)라고 말씀하셨다.

 

1:5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하나님께서 최초로 창조물에게 이름을 부여하신다. 이것은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시 74:16)임을 의미한다. 고대에는 이름을 부여하는 일이 항상 중요한 일이었다. 이름들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주의 깊이 선택되었다. 하나님은 나중에 동물들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일을 아담에게 맡기셨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경우에 사람의 이름도 정해주시거나 바꿔 주셨다. 예수의 이름과 침례 요한의 이름은 지시된 것이다. 또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창 17:5), 사래를 사라로(창 17:15), 야곱을 이스라엘로(창 32:28), 시몬을 베드로로(막 3:16) 바꾸거나 더하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문자적으로는 “저녁이 있었고, 아침이 있었으며, 첫째 날이라”이다. 여기서 ‘저녁’은 ‘밤’을 나타내기도 하며, ‘아침’은 밤과 대조하여 낮시간 전체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므로 “저녁이 있었고 [뒤따르는 밤 시간과 더불어], 아침이 있었고 [계속되는 낮 시간과 더불어], 이는 첫째 날”이라는 진술은 분명히 천문학상의 하루, 곧 24 시간의 하루에 대한 묘사이다. 아침에 앞서 저녁이 먼저 언급되고 있는 까닭은, 빛이 나타나서 낮이 시작되기 전까지 계속 어둠만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유대인들이 저녁을 하루의 시작으로 계산하고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날. 여기의 ‘날’은 히브리어로 ‘יוֹם 욤’인데, 이 말의 뜻에 대한 이해는 전통적으로 다음의 세 견해로 요약된다.

(1) ‘날’은 곧 한 시대를 가리킨다(Day-Age Theory : 요세푸스, 이레나에우스, 오리겐). 이들은 5, 8, 13절의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말이 하나의 상징적 표현으로써 한 시대의 끝과 다른 한 시대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 주장의 근거는 창조주 하나님께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시 90:4)고,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벧후 3:8)으므로, 하나님을 하루 24 시간의 범주 안에 가둘 수 없다는 것이다.

(2) ‘날’의 기간이 전반부와 후반부가 서로 다르다(어거스틴, 바빙크). 즉 태양이 창조된 넷째 날 이전의 3 일은 오늘날의 하루와 다른 장구한 기간이고, 이후의 3 일은 24 시간이다.

(3) ‘날’은 문자 그대로 오늘날의 24 시간 하루를 가리킨다(루터, 칼뱅).

일반적으로 (3)번의 견해가 보수적인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다. ‘날’이 오늘날의 24 시간 하루를 나타낸다는 이론의 근거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가) 창조 기사의 문맥은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창 2:4)이라고 하여 창세기 1장이 족보 곧 역사임을 시사한다. 그것은 신화도 예언도 은유도 비유도 시(詩)도 아니다. 즉 실제적인 의미를 지닌 역사이다. 다시 말해, 창조 기사에서 물은 오늘날의 물과 똑같은 실제 물이고, 동물은 실제 동물이다. 그러므로 ‘날’도 오늘날의 ‘날’과 똑같은 ‘날’이다.

(나) 창조 주일의 ‘날’이라는 단어는 시종일관 단수로 나타나며, 항상 전치사나 접미사 등 다른 연결사와 결합되지 않고 원래의 명사 자체만 나타난다. 이것은 이 말이 상징적인 말이 아니라 실제적인 말이라는 뜻이다.

(다) 창조의 ‘날’은 항상 수사(數詞)와 함께 나온다(‘첫째 날’, ‘둘째 날’ 등등). 성경이 역사적인 기사에서 ‘날’이라는 말을 수사와 결합하여 사용할 때 그것은 항상 정상적인 하루를 가리킨다. 예를 들면, 민수기에서 사용된 “첫째 날”, “둘째 날” 등등(민 7:12-78, 29:1-35)은 분명히 오늘날의 하루를 가리킨다.

(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말은 항상 특정한 날을 가리키는 말 앞에 나온다(창 1:5, 8, 13, 19, 23, 31). 이 표현은 저녁(밤)과 아침(낮)으로 구성된 24 시간 하루를 말하는 것이다.

(마) 다른 성경본문들은 창조의 7 일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 특히 넷째 계명은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출 20:9-11)고 말한다. 출 31:17에도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다고 하였다. 창조의 7 일이 오늘날의 7 일과 다르다면 넷째 계명과의 모순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 또한 창조 사역에 있어서 후반부 3 일은 분명히 오늘날과 같은 태양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24 시간을 의미한다면 전반부 3 일도 후반부의 3 일과 같아야 하는 것이 논리와 이치에 맞는다.

게르하르트 폰 라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심할 여지 없이 7 일은 실제의 날들로 이해되며, 또한 이 세상에서 독특하며 반복될 수 없는 시간의 경과로 이해된다”(Gerhard von Rad, Genesis: A Commentary, trans, John Marks (Philadelphia, PA: Westminster, 1972), 65).
프레타임도 이에 동의하여 이렇게 말한다. “날을 다르게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상징적 이해, 순서는 있지만 연속적은 아니라는 주장, 제의적 이해 등)은 많지 않다. 진화론적 시간 개념에 비춰 날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진화론과 조화시키려는 데 너무 많은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Terence E. Fretheim, “Were the Days of Creation Twenty-Four Hours Long? Yes”, in The Genesis Debate: Persistent Questions About Creation and the Flood, ed., Ronald Youngblood (Nashville, TN: Nelson, 1990), 12-34).
고든 웨넘도 견해를 같이 한다. “여기서 날은 24시간의 하루라는 기본적 개념을 갖고 있다는데 의심할 여지가 없다”(Gordon J. Wenham, Genesis 1-15, Word Bible Commentary, 52 vols. (Waco, TX: Word, 1987), 1:19).
제임스 바의 진술 또한 적절하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창세기 1-11장의 저자가 연속적인 6 일간 곧 우리가 오늘날 경험하는 것과 같은 24 시간으로 구성된 날들 동안 창조가 일어났다는 개념을 전달하려 했음을 믿지 않는 히브리어 교수 또는 구약 교수는 어떤 세계적인 대학교에도 없다”(James Barr, Personal letter to D. C. K. Watson, April 23, 1984, published in the Newsletter of the Creation Science Council of Ontario, 3/4 (1990-91).
하젤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날을 구분 짓는 운율이 있는 구절,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는 창조주일의 날의 정의를 보여 준다. 창조의 날은 저녁과 아침으로 구성돼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문자적인 날이다. … 그것은 그 외의 다른 것을 의미할 수 없다”(G. F. Hasel, “The Days of Creation in Genesis 1”, in Creation, Catastrophe & Calvary, 60).

그런데 여러 주석가들이 창조의 날들은 오랜 기간, 심지어 수천 년의 기간이었다는 사상에 집착하는 이유는, 프레타임이 지적했듯이 주로 그들이 영감된 창조의 기록을 진화론과 일치시키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지질학자들과 생물학자들은 이 지구의 초기 역사는 수백만 년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그동안 지질학적 형성이 천천히 이루어졌고, 생물의 종(種)들이 진화했다고 믿도록 사람들을 가르쳐왔다. 성경은 그 신성한 기록 전체를 통하여 이 진화론을 반대한다. 많은 주석가들이 창조의 날들은 오랜 기간이었다고 선언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제칠일 안식일을 거절하기 때문이다.

 

1:6 물 가운데. 여기서의 물은 지구 표면을 덮고 있던 물(2절)을 가리킬 것이다. 지구를 덮고 있던 최초의 큰 물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졌고 나뉘어진 물과 물 사이에 궁창을 만드셨다.

궁창. [רָקִיַע 라키아] 원어상 의미는 ‘두들겨 넓게 펼친 판(板)’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고대 히브리인들의 개념상 ‘라키아’는 별과 달이 붙어 있고, 하늘 위의 물을 받치고 있으며, 높은 산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단단한 하늘의 판이 펼쳐져 있는 광활한 공간(firmament)을 가리킨다. 그래서 욥은 “그는 북쪽을 허공에 펴시며”(욥 26:7-8)라고 말한다.

 

1:7 궁창 아래의 물. 바다를 비롯한 지구상의 모든 물을 가리킨다.

궁창 위의 물. 궁창 위의 물은 일반적으로 대기권 위쪽에 있는 두꺼운 수증기층이라고 생각되는데, 노아 홍수 때에 모두 땅에 쏟아진 것으로 볼 수 있다. “ …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창 7:11-12).

그대로 되니라. ‘그대로’는 ‘명하신 대로 확실히’ 또는 ‘틀림없이’의 뜻이다. 궁창을 만드시고 궁창 아래의 물과 위의 물로 나뉘어 지는 일이 하나님의 명하신 대로 된 것이다.

 

1:8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하늘’에 해당하는 원어 ‘שָׁמַיִם 샤마임’은 ‘높다’를 뜻하는 동사 ‘샤마’에서 유래한 말로 ‘높은 곳’을 의미한다. 현대의 번역본들과 마찬가지로 히브리어에서도 이 말은 하나님의 거처와 궁창을 모두 일컫는 이름이다. 이 구절에서 ‘하늘’은 인간의 눈에 우리의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일반적으로 창공으로 불리는 덮개나 둥근 천장처럼 보이는 대기권 하늘을 가리킨다.

 

1:9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셋째 날의 전반부 동안에 이루어진 세 번째 창조의 행위는 뭍(육지)과 물(바다)을 분리하는 일이었다. 시편 기자는 이 사건을 그림 같은 시어로 묘사한다. “옷으로 덮음 같이 주께서 땅을 깊은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로 솟아올랐으나 주께서 꾸짖으시니 물은 도망하며 주의 우렛소리로 말미암아 빨리 가며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정하여 주신 곳으로 흘러갔고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갔나이다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시 104:4-9).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땅이 드러나서 경계가 형성되었다.

 

1:10 부르시고. [קָרָא 카라] ‘선포하다’(렘 34:15), ‘공포하다’(레 23:21)란 뜻. 즉 권위를 가지고 공식적으로 언명함을 뜻한다. 고대 셈족 문화권에서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는 주권이나 소유권의 행사를 의미한다(왕하 23:34, 24:17). 따라서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신 후 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모든 존재와 생명의 참된 주인은 오로지 하나님 한분 뿐임을 암시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 원시의 땅은 그다지 아름답고 좋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물 아래에서 융기한, 초목도 없는 골짜기와 언덕과 평지의 세계였다. 그러나 그것을 만든 용도, 그리고 곧 이어 펼쳐질 새로운 경이에 이르는 준비 단계로써, 그것을 볼 수 있는 조물주께는 좋게 보인 것이 당연하다.

 

1:11 풀. 히브리어는 ‘דֶּשֶׁא 데셰’로써 그 뜻은 “푸르다”, “푸르게 되다”, “싹이 트다”이다. 이 말은 푸른 싹과 연한 풀, 곧 동물에게 먹이를 공급해 주는 각종 식물(植物)을 가리킨다. 아마도 여기서 “풀”(데셰)은, “채소”(עֶשֶׂב 에세브)가 “씨 맺는”이라는 수식어가 없이 나타날 때는 ‘채소’(에세브)와 동의어로 사용된다.

씨 맺는 채소. “채소”(עֶשֶׂב 에세브)는 풀보다 좀 더 성숙한 식물(食物)로써 그 속에 씨가 있는 것이 가장 현저한 특징이며, 인간이 먹도록 하나님이 고안한 두 종류의 식물 가운데 하나이다. 다른 하나는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창 1:11, 29)이다.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여기서 열매를 맺는 나무들의 세 가지 특징을 주목할 수 있다: (1) 열매를 맺음, (2) 열매 속에 씨가 들어 있음, (3) 열매가 “지면”(地面)에서 혹은 땅위에서 맺힘. 이 나무들은 인간에게 또 하나의 식물(食物)의 근원을 제공할 것이었다. 이 나무는 29절에도 언급된다.

각기 종류대로. 1장에서만도 10회나 사용된(11, 12, 21, 24, 25절 등등) 이 표현은 창조시 모든 생물은 이미 독특하게 구별된 종(種, species)의 형태로 창조되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각기 종류대로’를 뜻하는 히브리어 ‘לְמִינֹו 레미노’는 ‘종류’(Kind), ‘종’(species)을 뜻하는 ‘מִין 민’에서 파생된 말인데, 성경에서 이 말은 매종류와 까마귀 종류, 개 종류와 고양이 종류 등 제각기 독특하게 구별된 종(種)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지 결코 매와 까마귀, 그리고 개와 고양이의 조상으로서 어떤 기본적인 소수의 종류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생물학적 변천 과정을거쳐 저급한 종에서 고등한 종으로의 발전이나, 종과 종사이의 상태변이(變移)를 주장하는 진화론(進化論, evolution theory)은 비성경적 이론이다.

 

1:12 땅이 … 내니. 셋째 날의 식물은 땅으로부터 올라왔다. 이것은 생명을 간직한 식물을 생산하는 능력이 땅에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든 것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1:1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5절의 주석을 참고하라.

 

1:14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광명체들’(מְאֹרֹת 므오로트)은 3절과 4절의 ‘빛’(אוֹר 오르)과 같지 않다. ‘광명체들’은 광원(光源)들, 빛의 보유자들(holders), 발광체들을 의미한다.

이 구절은 “광명체들로 낮과 밤을 나누도록 지정하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 번역은 광명체들이 이미 존재했다는 가정을 따르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라는 창 1:16의 진술은 “이미 만드셨다”로 번역되어야 하는데, 이는 두 광명체가 넷째 날 이전에 이미 창조되었음을 암시한다. 히브리어 문법에 의하면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교의 신전들에 있는 태양과 달의 신들과는 달리, 창조의 기사는 다만 하나님이 이름 없는 발광체들 즉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를 만드셨다고 말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분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태양과 달 숭배가 침투하지 못하도록 방벽을 치셨다. 이러한 반(反)신화적 요소는 하나님이 통치하고 계시고 그분이 빛의 창조주이시며 빛의 궁극적 근원이심을 강조한다. 빛과 시간은 그분께 의존한다. 그분만이 찬양을 받아야 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낮과 밤”을 구분하는 일은 첫째 날부터 있어 왔지만 넷째 날에 그 일을 광명체들에게 맡기셨다. 첫째 날의 ‘빛’과 본 절의 ‘광명체’들에 관한 주석은 3절의 주석을 참고하라.

징조. [אוֹת 오트] 자연적인 현상 혹은 사건에서 보여지는 ‘표징’(출 10:2)을 뜻한다. 이런 일은 주로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므로 ‘이적’(출 4:17)으로도 번역된다. 어떤 사람들은 천체의 징조들이 사람들의 개인적인 운명을 결정한다고 잘못 생각하였다. 점성가들은 그들의 행습을 정당화하는 근거를 본 절에서 찾는다. 그러나 성경은 어떤 형태의 점과 운명 예언도 강력히 반대하므로, 인간의 일과 운명을 예언하는 데 해와 달과 별들이 길잡이 구실을 하도록 하나님이 지정하였다는 사상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예레미야는 히브리인들에게 이방인들을 쓸데없는 공포로 떨게 하는 하늘의 징조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경고한다(렘 10:2). 그리고 이사야는 모욕적인 풍자(諷刺)로 “하늘을 살피는 자와 별을 보는 자와 초하룻날에 예고하는 자들”(사 17:13)을 비웃으며 그들의 권면을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고 사악한 일이라고 말한다.

계절. [מוֹעֵד 모에드] ‘지정하다’, ‘고정하다’(히 야아드)에서 나온 말이다. 새들의 이주 시기(렘 8:7), 축제의 절기(시 104:19, 슥 8:19) 등과 같이 계절의 순환에 다라 반복되는 주기(週期)를 가리킨다.

날과 해. 넷째 날의 태양과 관련하여 지구가 운동하는 것으로 측정되는 시간의 기본 단위인 ‘날’(日)과 ‘년’(年)을 뜻한다. 이것은 달력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1:15 광명체들. 14절의 ‘광명체들’과 같은 것이다.

 

1:16 주관하게 하시고. [מֶמשָׁלָה 멤샬라] 이 말은 ‘통치, 지배, 관할, 영토’ 등을 의미한다. 즉 큰 광명체인 태양과 작은 광명체인 달이 낮과 밤을 주관하고 관할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사실은 일월 성신(日月星辰) 숭배 사상과 점성술적인 미신에 빠져 있던 고대인들과 현대인들에게 일월성신은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이며, 이들의 역할은 단지 낮과 밤을 구분하며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따라 날과 해를 구분하며 봉사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또 별들을 만드시고. 본 구절에서 “만드시고”라는 단어는 원문에는 없지만, 번역자들에 의해 첨가된 것이다. 따라서 16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될 수 있다.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별들과 함께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참조 시 136:8-9). 이렇게 보면, 별들이 있는 하늘은 창조주일이 있기 오래 전에 창조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욥 38:7에 의하면, 지구를 창조할 때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다. 여기서 “새벽별들”이 천사들을 나타내고, 별들의 하늘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 본문은 창조주일 이전에 천사와 별들이 이미 존재했음을 암시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구절에 대한 또 하나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본 절의 원문을 보면, ‘만드사’라는 단어가 맨 앞에 나온다. 그리고 그 ‘만드사’의 목적어가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 그리고 ‘별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넷째 날에 만든 것에는 ‘별들’도 포함된다.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LXX)도 넷째 날에 별들을 만드신 것으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넷째 날에 만들어진 별들은 우주의 별들이 아니라, 태양계에 속한 행성(行星)들이라는 것이다. 현대 천문학자들은 항성(恒星)만을 별(star)로 구별하지만, 성경은 태양계의 빛나는 행성도 별로 일컬었으며, 또한 숭배하는 자들도 있었다.

 

1:17 없음.

 

1:18 보시기에 좋았더라. 죄가 들어온 결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난 현재의 지구와는 달리, 천체들은 인간의 범죄의 결과로 고통을 당하지 않았으며, 창조주의 능력을 반사한다. 모든 천체들이 우주의 법칙을 충실하게 지키고 있다. 천문학자들과 항해사들은 천체 세계에서는 기존의 법칙을 벗어난 어떤 이탈도 일어나지 않으며,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1:19 없음.

 

1:20 물들은. 우리는 본 절에서 물과 궁창이 해양 생물과 날짐승의 창조로 번성케 되는 것을 본다. 원문은 “물들은 움직이는 생물을 많이 내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이는 문자적으로 “물들은 무리들로 가득 차게 하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구절을 더 분명하게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가득차다”라고 번역된 동사는 또한 “많이 번성하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 용어는 물고기뿐만 아니라 가장 큰 것에서부터 가장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해양 동물에 적용되며, 파충류에도 적용된다.

생물. [נֶפֶשׁ חַיָּה 네페쉬 하야] 직역하면 ‘산 영’(living soul)이란 뜻이다. 여기서는 살아 움직이는 동물을 가리킴. 고대 히브리인들은 식물이 부동적이므로 생명을 갖지 않은 것처럼 취급하였다. 따라서 동물을 이전에 창조된 식물과는 구분하여 움직이며 숨쉬는 것임을 강조하는 용어, 즉 생물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번성하게 하라. 히브리어 ‘שָׁרַץ 샤라츠’는 ‘꿈틀거리다’, 무수히 많아 우글거리는 것이 마치 꿈틀거리는 듯이 보인다는 점에서 ‘풍부하다’, ‘무수히 생기다’(출8:13)란 뜻으로 발전되었다.

새가 날으라. 창 2:19에 의하면 “공중의 각종 새”가 하나님에 의해 “흙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말한다. 1:20의 대한 히브리어 본문의 정확한 번역은 “그리고 땅위에는 새가 날으라”이다. 새는 가금(家禽)과 야생 조류를 다 포함한다.

 

1:21 큰 바다 짐승. 큰 ‘바다 짐승’(תַּנִּינִם 탄니님)은 큰 바다 동물을 가리키는데, 성경에서 ‘용’(사 27:1, 51:9), ‘뱀’(출 7:9, 10, 12)등으로도 번역되었다.

날개 있는 모든 새. ‘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עוֹף 오프’는 곤충, 가금을 포함한 공중을 날라다니는 모든 종류의 생명체를 가리킨다(7:14).

 

1:22 복을 주시며. [בָּרַךְ 바라크] 기본 뜻은 ‘무릎을 꿇다’(시 95:6)이다. 이 말이 하나님께 적용될 때에는 ‘찬송하다’(9:26), 피조물에게 적용될 때에는 ‘축복하다’(27:33)란 뜻이 된다. 여기서 복의 내용은 이어지는 말에서도 드러나듯 풍성케 하는 것인데, ‘복주다’란 말 자체에도 ‘풍족케 하다’(신 33:11)란 뜻이 있으므로 생육 번성에 대한 내용이 더욱 강조된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생육’은 ‘열매 맺다’라는 뜻으로 풍부한 결실을, ‘번성’은 ‘많을’(7:17) 뿐만 아니라 ‘크고’(스 10:13) ‘강한’(대하 11:12)상태를 뜻한다. 이와 같이 유사한 언어를 반복하여 기술한 것은 하나님이 생물들에게 생명의 보존력과 번식력을 축복으로 주심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축복은 오늘날에도 생명체마다 제각기 갖고 있는 자기 방어 수단과 독특한 출산 방식으로써 종족을 보존, 번식시키는 것에서 잘 나타난다.

충만하라. 하나님의 ‘채워주심’(렘 15:17)으로 ‘넘칠’(수 3:15) 정도로 ‘가득한’(6:13) 상태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축복은 풍부함을 통해 나타난다.

 

1:23 없음.

 

1:24 생물. [נֶפֶשׁ חַיָּה 네페쉬 하야] 셋째 날과 마찬가지로 여섯째 날은 육지 동물과 인간의 창조라는 이중의 창조 행위로 인해 부각된다. 바다와 공중의 생물들(네페쉬 하이야, 20절)로 채워진 다음에, 종류대로 산 존재들을 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땅에 발해졌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세 부류로 나누어진다.

가축. [בְּהֵמָה 베헤마] ‘말 못하다, 침묵하다’란 말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가축들이 말하지 못하는 것에 착안하여 이 명칭이 부여된 듯하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더 큰, 길들여진 네 발 짐승을 가리키지만(창 47:18, 출 13:12), 때로는 더욱 큰 육지 동물을 총괄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잠 30:30, 전 3:19).

기는 것. [רֶמֶשׂ 레메스] 이 말은 벌레, 곤충 및 파충류와 같이 발이 없거나 작은 발을 많이 가지고 있어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작은 동물들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육지 레메스를 의미한다. 바다의 레메스는 바로 전날에 창조되었다.

땅의 짐승. [חַיְתֹו־אֶרֶץ 하예토 에레츠] 이 말은 성경에서 생명있는 모든 ‘생물’(6:19)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들짐승’(레 5:2)과 같은 야생 동물들을 가리킨다.

 

1:25 없음.

 

1:26 우리. 이 말에 대한 여러 해석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서 자신을 재촉하는 의미로 복수형을 사용하셨다.
(2) 삼위일체에 대한 구약적인 표현이다.
(3) 하나님께서 천사들과 의논하셨음을 가리킨다.
(4) 히브리인들이 장엄한 것을 나타낼 때 자주 사용하는 장엄의 복수형이다.

그러나 ‘우리’라는 복수는 초기 교회의 신학자들에 의해 거의 만장일치로 신성의 삼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창조 사역에 있어서 신성의 제2위(位)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셨다는 것은 분명하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기를,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요 1:3)었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고전 8:6)다고 하였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히 1:2)다고 하였다. 또한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창 1:2)신다고 하였으므로 신성의 제3위이신 성령께서 창조 사역에 협력하셨음을 인지할 수 있다.

형상 … 모양대로. ‘형상’(צֶלֶם 첼렘)과 ‘모양’(דְּמוּת 데무트), 이 두 단어는 유사한 단어로써 비슷한 말을 연속 사용하여 강조의 효과를 나타내는 히브리 수사법을 반영한 것이다. 굳이 분류하자면 ‘형상’(image)은 어떤 사물과 그것을 그린 그림이 서로 닯은 것처럼 인간과 하나님이 외적으로 닮았음을 뜻하며, ‘모양’(likeness)은 추상적인 면에 있어서의 유사성을 가리킨다. 이 말들은 육체적인 의미(첼렘)와 영적이고 정신적인 측면을 포함하는 내적인 의미(데무트)를 함축한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전인(全人)이 하나님의 외모와 성품의 영향을 받아 지음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시 8:4-5). 신 6:5은 마음(영적인 측면), 뜻(정신적인 측면), 힘(육체적인 측면)이라는 인간 존재의 여러 차원을 언급한다. 살전 5:23에도 비슷한 표현이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류는 본질적으로 이러한 차원을 모두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1) 인간이 저급한 상태에서 고등한 상태로 진화되었다는 진화론(evolution theory)의 허구성을 깨우쳐 주며 (2)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 하나님과의 교제 대상으로 인간만이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엡 4:23, 24, 골 3:10). 그러나 창조시 부여된 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타락시 크게 훼손되었다. 그러나 끝내 상실되지 아니하고 그 흔적은 계속 남아 있어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능케 하는 접촉점(contact point)이 되었다. 따라서 인간이 피조물 중에서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지를 깨달을 수 있는 반면 타락으로 말미암는 인간 비하(卑下, 3:16-19) 역시 얼마나 뼈아픈 비극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엘렌 지 화잇은 하나님의 사람이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람은 태초에 품성(charater)뿐만 아니라 용모(form)와 생김새(feature)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각 시대의 대쟁투, 644).
“사람은 외모나 품성에 있어서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게 될 것이었다. 그리스도만이 아버지의 ‘본체의 형상’(히 1:3)이시나 사람은 하나님의 모양으로 지음을 받았다. 그의 본성은 하나님의 뜻과 조화되었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일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애정은 순결하였고 그의 식욕과 감정은 이성(理性)의 지배 아래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그분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는 가운데 거룩하고 행복하였다”(부조와 선지자, 45).
“아담이 창조주의 손에서 나왔을 때, 그는 그의 육체적(physical), 지적(mental), 그리고 영적(spiritual) 본성(nature)에서 있어서 그의 창조주의 형상을 가지고 있었다”(교육, 15).

사람. [אָדָם 아담] 창조 사역의 절정은 사람의 창조였다. ‘사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담’은 이중적인 뜻을 갖고 있다. 첫째는 보통 명사로써 일반 사람을 가리키며, 둘째는 고유 명사로써 최초의 사람인 ‘아담’을 가리킨다.
‘아담’이라는 히브리어는 창조의 역사를 기록한 창세기 1-2장에서 17회 사용되었는데, 처음 9회는 개역개정판에서 ‘사람’이라는 보통명사로 번역되었고(1:26-2:18), 그 다음 8회는 ‘아담’이라는 고유명사로 번역되었다. 다수의 영역본이 이와 비슷하게 번역했으나, 새국제역(NIV)과 새개정표준역(NRSV)은 17회 모두를 ‘man’(사람)으로 번역했다. 어느 것이 ‘사람’이고 어느 것이 ‘아담’인지를 구분할 방법도 없고 구분할 필요도 없던 시절이다.

한편 ‘아담’이란 말의 기원에 대해서는 (1) ‘붉다’라는 뜻의 ‘아담’에서 유래하여 인간의 피부 빛을 반영하고 있다는 견해, (2) ‘빛나다’란 뜻의 아랍어에서 유래하여 아담을 빛나는 자로 묘사한다는 견해, (3) ‘데리고 오다’, ‘결합시키다’라는 말에서 유래하여, 아담이 인류의 조상이며 모든 인류를 하나로 결합시키는 자로 묘사한다는 견해, (4) ‘모양’이란 어원에서 유래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음을 뜻한다는 견해, (5) ‘땅’ 곧 ‘아다마’에서 유래하여 인간이 흙으로 만들어졌음을 반영한다는 견해 등이 있다.

다스리게 하자. ‘주권을 잡다’, ‘지배하다’, ‘세력을 떨치다’, ‘통치하다’라는 뜻이다. 인간이 다른 피조물들을 주관할 수 있는 권위와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고등한 존재임을 보여준다. 엘렌 지 화잇은 “그 사람에게 그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릴 통치권이 주어진 바 되었다”(부조와 선지자, 44)고 말하였다. “그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은 지구상에 있는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지, 천체를 지배할 통치권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지구를 떠나서는 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구 바깥의 세계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1:27 자기 형상. ‘자기’는 단수형이다. 26절의 복수형은 신성의 복수성을 나타내고 있고, 본 절은 하나님의 단일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복수성과 함께 단일성의 특성도 가지고 계시다.

남자와 여자. ‘여자’는 남자와 구별됨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본 절에서 남자와 더불어 여자의 창조를 특별히 언급한 것은 창조시부터 남녀는 동등하다는 사상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 한 쌍 이상의 부부를 창조하셨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성경적인 생각인가?

1. 다원발생론의 유래 : 다원발생론이란 쉽게 말해 태초에 하나님께서 여러 쌍의 부부를 창조하셨다는 생각이다. 그 반대는 단일기원설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줄곧 단일기원설을 가르쳤는데 17세기에 이르자 하나님께서 태초에 또 다른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사상이 등장했다. 주된 이유는 다양한 인종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 인종 간의 차이가 이토록 극명한 것은 다원발생, 즉 하나님께서 또 다른 부부를 창조하신 결과일 것이라고 이해한 것이다.
이 관념은 후에 인종주의, 심지어 노예 제도나 인종 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리스도교 사상에서 단일기원설은 신학적으로 원죄 교리를 지지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죄는 보편적이고 그것은 출산을 통해 첫 부부에게서 전 인류에게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자연진화의 영향으로 가톨릭은 원죄의 교리를 뒷받침하는 데 더 이상 단일기원설을 적용하지 않는다.

2. 다른 논증들 : 어떤 이들은 다원발생론을 알리기 위해 성경의 논증들을 사용하려고 시도한다. 하나님께서 물고기, 동물, 새를 창조하실 때, 각 종류의 한 쌍이 아니라 상당히 많은 수를 창조하셨다고 주장한다. 인간에 대해서도 그분께서는 동일한 일을 행하실 수 있었다. 심지어 히브리어로 아담은 꼭 인류 중 한두 명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며 그것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을 창조하셨음을 함축한다고 주장한다.
또 여러 쌍을 창조했다는 사상은 가인의 아내가 어디서 왔는지를 잘 설명한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그녀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땅의 다른 장소에 두었던 다른 부부들 중 하나에서 태어났다. 고대 근동의 창조 신화 중 몇은 신들이 인간을 집단으로 창조했다고 말한다. 바벨론 신화 중 하나에 따르면, 인간들은 주신들을 위해 천한 일을 담당하는 하층 신들을 대신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그러려면 많은 인간이 창조되어야 한다.

3. 성경의 증거 : 성경은 인간이 남자와 여자 한 쌍의 창조로 시작되었다고 소개한다. 그러나 고대 근동 문학은 여성의 창조를 포함하지 않는다. 창세기 1, 2장이 맞붙어 있다는 사실에서 두 장은 인간 창조에 대해 서로 다른 두 이야기를 소개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동일한 역사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장은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 한 쌍의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간략하게 서술하고 2장은 그들의 창조를 자세히 설명한다.
하와는 계획에 없었다가 나중에 지음 받은 존재가 아니다.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려는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 창조된 존재이다. 성경 본문은 분명하다. 하와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창 3:20)가 되었다. 바울은 이같이 진술한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행 17:26). 가인은 분명히 아담과 하와가 낳은 많은 아들딸에게서 태어난, 그의 친척 중 한 명과 결혼했다(창 5:4).
성령의 능력으로, 성경의 가르침이 인간의 교만하고 오만한 마음을 꿰뚫고 양심을 울려야만 한다! 인간 가치의 점진적 변화라는 사상이 인종 문제에 끼친 참상을 지금처럼 끔찍하게 실감하는 시대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서 각 나라, 족속, 백성이 함께 모인 세계 교회야말로 이 은혜의 기적을 방증하는 곳이다.

 

1:28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창조주의 축복은 종의 번식 및 존속과 관련이 있다. 여러 주석가들은 이 하나님의 명령을, 인간의 재생산은 끝없이 계속되지 않고 세상이 인간과 그들의 지배를 받을 동물들로 가득 차게 될 때 중단되어야 함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땅에 충만하라”는 말은 “땅을 가득 채우라”는 뜻이다.

정복하라. [כָּבַשׁ 카바쉬] ‘발로 밟다’(미 7:19), ‘복종케 하다’(민 32:22)란 뜻이다. 이는 땅을 자신의 것으로 취급하여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경작하고 채굴함으로써, 지질학적인 조사와 과학적인 발견과 기계적인 발명을 통하여 땅의 막대한 자원들을 선한 목적과 필요를 위해 이용할 권리를 인간에게 허락하는 것이다.

 

1:29 채소. [עֶשֶׂב 에세브] ‘풀’이나 ‘푸른 풀’을 뜻하며 나무가 아닌 초본(草本) ‘식물’(植物)을 가리킨다.

나무. [עֵץ 에츠] ‘나무’, ‘목재’를 의미한다. 이곳에서는 아마도 각종 과일 나무를 가리킬 것이다.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최초의 인간과 동물에겐 채식(菜食)만이 허용되었음을 보여 준다. 육식(肉食)은 타락 후 노아 홍수 사건 직후에야 비로소 허용되었다(창 9:3). 그러므로 피흘림이 뒤따르는 육식 행위는 결코 하나님의 본래 뜻이 아니었다.

 

1:30 없음.

 

1:31 심히 좋았더라.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마무리 지어 주는 이 구절은 지금까지 반복되어 온 감탄사(10, 12, 18, 21, 25절)보다 한층 더 고조된 것으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모든 것이 한 치의 오차나 흠도 없이 완벽하고 아름답게 완성되었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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