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 '무저갱'의 헬라어 '아뷔스수'(* )는 70인역에서 심연의 물이나 땅을 가리키는 것으로 (창 1:2;7:11;시 71:20;107:26) 마귀를 가두는 곳이나(눅 8:31;벧후 2:4;유 1:6) 음부의 지하세계를 가리킨다(롬 10:7, Johnson, Ladd). 이곳은 사단과 짐승을 비롯한 마귀의 세력이 거하는 처소이며(9:1;11:7) 천년 동안 사단이 갇히는 감옥이다(20:3). 한편 '쇠사슬'에 해당하는 헬라어 '할뤼신'(* )은 베드로가 감옥에서 주의 사자에 의해서 풀려날 때 손에서 벗겨진 '쇠사슬'(* ,할뤼세이스)과 같은 단어이다(행 12:7). 천사가 가지고 있는 무저갱의 열쇠와 큰 사슬은 사단을 결박하기 위해 사용되는 도구로 무저갱에 거주하는 사단의 세력과 권세가 제한될 것으 암시한다(Morris, Mounce).
=====20:2
본문은 12:9과 동일한 표현으로 하나님을 대적한 악한 자에 대한 호칭을 네 가지로 진술하고 있다.
용을 잡으니 - '용'은 구약성경에서 리워야단, 라합, 악어, 뱀 등으로 불리우는 것으로 (욥 40:15;시 74:14;89:10;사 27:1;51:9;암 9:3)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며 그 머리에는 일곱 면류관이 있다(12:3). 이는 하늘의 대적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Beasley-Murray) 하나님을 대항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고 박해하는 존재를 가리킨다(Mounce).
옛뱀 - 이것은 창 3장에서 아담과 하와를 속이던 뱀을 상징하는 호칭으로 속이는 자를 의미한다.
마귀요 사탄이라 - '마귀'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볼로스'(* )는 문자적으로 '비방하는 자'를 의미한다. 또한 '사단'(* ,사타나스)은 '대적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본래 고유명사가 아니었으나 후에 고유명사로 바뀌었다. '마귀와 사단'은 사람들의 죄를 하나님에게 고소하는 고소자나 비방하는 자이다(Beasley-Murray).
잡아 일천년 동안 결박하여 - '잡아'의 헤라어 '에크라티센'(* )은 '힘'을 의미하는 '크라토스'(* )에서 유래한 단어로 능력을 행하여 구속하는 것을 의미한다(마 26:50). 이것은 '결박 하여'와 '던져'(30절)라는 표현과 연결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늘어나는 것을 방해하는 것과 같은 사단의 영향력을 부분적으로 제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Hendriksen) 속이는 자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도록 완전히 제한하고 구속하는 것을 의미한다(Walvoord, Mounce, Ladd). 한편 '일천 년 동안'은 10*10*10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문자적으로 일천년을 의미하기 보다는 일정한 기간을 나타낸다. 학자들에따라 일천년에 대한 견해는 천년왕국과 관련하여 네 가지 견해, 즉 (1) 후천년설(Postmillennialism), (2) 세대주의적 전천년설(Dispensational Premillennialism), (3) 역사주의적 전천년설(Historical Premillennialism), (4) 무천년설(Amillennialism)로 나뉜다. 네 가지 견해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본장부제 강해를 참조하라.
=====20:3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 본절은 천사가 천년 동안 사단을 무저갱에 가두는 이유를 밝힌다. 여기서 '만국'은 해석상의 어려움이 있다. 왜냐하면 앞장에서 메시야와 적그리스도의 전쟁에 인류가 참가하였으며 적그리스도를 따르던 왕들과 군대는 메시야에 의해 패배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19:18-21).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절에서 다시 '만국'이 언급된것에 대해서 학자들은 두 가지 견해를 주장한다. (1) 혹자는 19장에서 언급된 저그리스도와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나라라고 주장한다(Moffatt, Ladd). (2) 혹자는 전쟁에 참여하였다가 남은 자라고 주장한다(Caird, Mounce).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한편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는 사단을 천년동안 구속하는 것이 형벌이 아니라 사단의 영향력을 상실하여 사단으로 하여금 더이상 미혹하지 못하게 하는 것, 즉 천년동안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함에 있음을 시사한다(Ladd, Mounce, Johnson, Morris).
그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 - 본문은 하나님의 목적을 나타낸다(1:1;4:1;막 8:31;13:7;눅 24:26, 44). 사단이 무저갱에서 잠깐 동안 풀려나는 것은 사단을 무저갱에 구속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계획을 촉진 시키는 것으로 세상의 종말을 초래하기 위함이다.
=====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않은 자들이 있어...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인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 - 본서에서는 '보좌들'에 대해서 많이 언급된다. 사단의 보좌(2:13)와 짐승의 보좌(13:2;16:10)를 제외한 나머지 보좌는 하늘에 있는 것으로 하늘에서 통치 함을 암시한다. 한편 보좌들에 앉은 자에 대해서 이어서 나타나는 언급들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과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표를 받지도 않은 자들'이 동일한 부류를 지칭한다고 주장한다(Mounce, Morris). 이들은 그 근거로 13:15을 제시한다. (2) 혹자는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과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표를 받지도 않은 자들'은 두 부류로서 예수에게 신실하게 충성한 무리들 전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add, Johnson, Beasley-Murray, Barclay). 왜냐하면 이들은 죽기까지 충성한 자들로서 2, 3장에서 언급된 이기는 자들과 같기 때문이다.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 그들은 예수에 대한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 인해서 죽임과 온갖 고난을 당하였다. 한편 '영혼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쉬카스'(* )는 6:9에서 언급된 제단 아래서 신원하는 순교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사용된 것으로 순교자들이 비록 육체적으로는 목 베임을 당해 죽었으나 하나님 안에서 생명을 소유한 자들임을 시사한다.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하니 - 본문은 5:9, 10의 반복으로 단 7장을 반영한다. 다니엘서에서는 옛적부터 계신 자가 성도들을 위하여 신원할 뿐만 아니라 때가 되어 나라를 성도들에게 주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단 7:18, 22, 27).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충성을 다한 자들이 죽임을 당하였든 당하지 않았든 간에 모두가 하나님 나라를 받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권을 가지고 천년 동안 통치할 것을 시사한다. 한편 '살아서'의 헬라어 '에제산'(* )은 육체적인 부활을 지칭할 때 사용된 단어로 (1:18;2:8;13:14;마 9:18;요 11:25;행 1:3;9:41;롬 14:9) 그리스도에게 충성한 자들이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동안 통치할 것을 시사한다(Johnson, Ladd, Mounce).
=====20: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 '그 나머지 죽은 자들'에 대해서 혹자는 순교하지 않은 믿는 자들과 물신자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unce)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대적한 불신자들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Johnson, Ladd). 왜냐하면 전자의 견해를 따르면 '나머지 죽은 자들' 곧 순교하지 않은 믿는 자들과 불신자들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지 못하고 둘째 사망에 참여하게 된다(6절). 이 경우 순교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영원한 사망에 이르는 둘째 사망에 참여하게 된다는 모순을 낳게 되기 때문이다. 한편 '살지 못하더라'의 헬라어도 역시 '우크 에제산'(* )으로 불신자들은 천년이 지나기까지 육체적인 부활을 하지 못할 것임을 암시한다.
이는 첫째 부활이라 - '첫째 부활'이라는 어구는 비록 본장에서 '둘째 부활'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할지라도 '둘째 부활'이 있음을 전재하는 것으로 4절에서 언급된 그리스도에게 충성한 자들과 순교자들의 육체적인 부활을 의미한다(Irenaeus, Justine, Walvoord, Ladd, Morris, Johnson).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 첫째 부활에 참예한 자들은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에 복이 있으며 거룩한 자들이다(Beasley-Murray). 본절은 그들이 복이 있는 근거에 대한 진술이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 '둘째 사망'은 모든 사람이 직면하는 육체의 사망을 가리키는 체째 사망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둘째 부활에 참여하는 불신자들이 맞게되는 사망이다. 이것은 불못에 던지우는 심판을 가리킨다(14, 15절;21:8). 체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이 복이 있는 것은 둘째 부활과 전혀 상과이 없어서 영원히 고통을 당하는 둘째 사망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구약 시대의 제사장은 성전에서 봉사하면서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교제하는 자들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체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은 직접 하나님 앞에 나아갈 권리를 소유한 자들로서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며 교제를 나누는 자들이다.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 - 체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제사장일 뿐만 아니라 왕권을 소유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통치하게 된다(4절).
=====20:7
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 본절은 3절의 반복이다. 사단은 그리스도와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이 다스리는 정해진 기간 동안 무저갱에 갇혀 있다가 그 기간이 지난 후 잠깐 풀려나게 된다. '차매'로 번역된 헬라어 '텔레스데'(* )는 어떤 목표에 이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정기간에 도달하였음을 시사한다. 한편 '옥'은 무저갱을 의미한다.
=====20:8
나와 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곧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봐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니라 - 본절에서 땅의 사방 백성과 동일시 되고 있는 '곡과 마곡'은 겔 38, 39장에 나타난다. 에스겔서에 따르면 곡은 회복한 이스라엘을 침략하기 위하여 부쪽 지방인 마곡에서 오는 메섹과 두발의 왕을 의미한다(겔 38:2, 6). 그러나 이것은 시편에서 하나님과 메시야를 대적하는 열방들로 나타난다(시 2편). 시편과 마찬가지로 본절의 '곡과 마곡'은 에스겔과 같이 어떤 특정한 왕이나 지역을 의미하기 보다는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대적하기 위하여 일어난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Johnson, Mounce, Beasley-Murray). 왜냐하면 본절에서 곡과 마곡을 말할 때 특정 지역과 특정 사람을 가리키는 '땅의 사방 백성'과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은 아마도 천년왕국 기간 동안 마음 속으로 메시야를 떠난 사람들일 수도 있다(Johnson, Ladd). 만약 그들이 천년왕국 기간 동안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라면 그것은 인간의 죄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Ladd). 단지 사단은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교만하고 범죄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내고 발전시키는 것에 불과하다(Beasley-Murray). 한편 '미혹하고'는 사단이 무저갱에서 천년만에 풀려나와 행한 일을 말하는 것으로 사단이 '속이는 자'임을 분명하게 나타내주는 표현이다(3절;12:9;13:14;19:20). 사단은 무저갱에서 천년동안 갇혀있으면서도 속이는 자로의 본질을 상실하지 않고 무저갱에서 풀려나자 마자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여 세사의 종말을 초래하게 한다.
=====20:9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 사단과 대적자들이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에워싼 곳에 대해서 요한 두 가지로 진술하고 있다.
(1) 성도들의 진 - '진'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렘볼렌'(* )은 군사 용어로 군대의 영문 안이나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진영을 의미한다(출 14:19;민 2:2;신 23:14;행 21:34, 37;22:24;히 11:34;13:11, 13). 이것은 사단의 활동이 계속되는 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 순례자의 삶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Mounce, Johnson, Morris, Beasley-Murray).
(2) 사랑하시는 성 - 이것은 어떤 장소적인 의미를 지녀서 유대교 종말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팔레스틴의 예루살렘 성이 영적으로 새로워지고 회복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시 78:6-8;87:2, Backwith) 다음장에서 언급될 거룩한성 예루살렘과 같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21:10).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을 받고 사랑함을 받는 백성들을 가리킨다(Bruce, Morris, Beasley-Murray). 한편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는 에스겔의 환상을 반영하는 것으로(겔 38:22;39:6) 하나님의 분명하고도 신속한 심판을 의미한다. 여기서의 심판자는 쿰란 문서나 유대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쿰란 종파에 속한 사람이나 유대인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사단과 대적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하여 전쟁을 일의키기도 전에 멸망을 당하게 된다(Ladd, Morris).
=====20: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 사단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을 대적하는 대적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불에 의해서 소멸되나, 사단은 본절에서와 같이 다른 방식으로 심판을 받는다. 사단은 대적자들과는 달리 '불과 유황 못', 즉 '불못'에 던져겨 영원한 파멸을 맞이하게 된다.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 '불과 유황 못'에는 사단이 던져지기 이전에 이미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있다.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19장에 나타난 바와 같이 그리스도 재림 때에 사단의 조종을 받아 하나님을 대적하여 전쟁을 일으키다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패망하여 '유황 불붙는 못'에 던져졌다(19:19, 20). 한편 '세세토록 밤낮 되로움을 받으리라'는 사단의 멸망이 단순히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그들이 당하는 고통은 끊임없이 지속되는 것으로 영원한 멸망을 시사하는 표현이다(Morris, Ladd, Mounce).
=====20: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않으신 자를 보니 - '크고 흰'은 보좌에 않으신 이의 권능과 영광, 거룩, 그리고 위엄을 나타낸다. 한편 '그 위에 않으신 자'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 가능성을 지닌다. (1) 심판하시기 위해서 보좌에 않으신 이가 그리스도라는 것이다.왜냐하면 신약성경에서 심판의 권한이 아버지에게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위임되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요 5:22;고후 5:10;딤후 4:1). 또한 에녹서에서도 메시야께서 심판하시는 것으로 나타난다(위경 에녹 1서 45:3;51:3;55:4;61:8). (2) 보좌에 앉으신 이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서에서 '보좌에 앉으신 이'는 하나님이셨으며(4:2, 9;5:1, 7, 13;6:16;7:10, 15;19:4;21:5) 존절에 반영되고 있는 단 7:9, 10에서도 역시 하나님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자주 심판권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둘 다에게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본문의 '그 위에 앉으신 자'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일체성과 단일성을 나타내는 듯하다(Mounce). 즉 본절은 '보좌에 앉으신 이'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가 보다는 심판자의 심판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듯하다.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 본문은 '여섯째 인'을 떼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인 '해가 검어지고 별이 떨어지며 하늘이 종이 축이 말리는 것처럼 말리는 것'을 상기시킨다(6:12-14). 이것은 타락하고 썩어진 피조물의 종말에 당할 강력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시사할 뿐만 아니라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모두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될 것을 암시한다(Mounce, Ladd, Morris). 타락한 첫 창조의 피조물들은 썩어짐에 종노릇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 해방되고 새롭게 창조될 것을 고대하고 있다(롬 8:19-23). 이러한 사실은 본문이 단순한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내는 것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내로운 창조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나타내고 있음을 시사한다(21:1;사 11:6-9;65:17;벧후 3:13).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 '죽은 자'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인류 전체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easley-Murray). (2) 혹자는 첫째 부활을 오직 순교자에게만 제한함으로 본절에서 나타난 죽은 자는 불신자들과 순교하지 않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주장한다(Mounce). (3) 혹자는 첫째 부활을 그리스도에게만 충성을 다한 하나님의 백성 전체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이해하여 본절에 나타난 죽은 자는 오직 하나님을 대적한 불신자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Ladd, Johnson). 이 세 가지 견해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한편 심판을 받기 위해 보좌앞에 선 자들에게는 두 종류의 책이 펼쳐져 있다. 여기서의 두 책 중에서 첫번째 책인 행위를 기록한 책이 믿는 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행위를 기록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불신자들의 해위만을 기록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Johnson).
(1) 책들이 펴 있고...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 첫번째 책은 단 7:10을 반영한 것으로 인간의 행위가 기록된 책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인간의 행위에 따라 심판이 이루어진다.
(2) 또 다른 책이 펴져 있으니 곧 생명의 책이라 - '생명책'은 인간의 행위가 기록된 책과는 달리 하나님의 백성의 이름이 기록된 책이다(출 32:32, 33;단 12:1;눅 10:20;빌 4:3). 이 책은 오직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만이 열수 있는 책이다(3:5;13:8;21:27).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에게 충성한 자들 만이 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암시한다(Ladd). 두 책, 즉 인간의 행위가 기록된 책과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함으로 구속을 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된 책 사이에는 인간의 행위와 믿음이라는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상 아무런 문제가 발생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의 행위는 그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Johnson).
=====20: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 '바다'는 매장되지 않은 시체가 있던 곳을 가리킨다. 당시에 시신이 매장되지 않았다는 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왕상 13:21, 22;14:11;렘 8:1, 2). 반대로 버려져 있는 시신을 매장하는 것은 가장 친절한 행위이며 신앙의 행위로 인정되었다(Beasley-Murray). 이런 상황에서 바다에서 죽은 시체의 부활은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부활하며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한편 '사망과 음부'는 죽음의 영역을 묘사하는 것으로 죽은 자들의 실재와 사람들이 죽음 후에 맞이하게 되는 상태를 나타낸다(Johnson). '사망'은 전쟁, 기근, 역병 그리고 야생 짐승에 의해서 당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악을 상징한다(Beasley-Murray). 또한 '음부'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하데스'(* )는 중간 상태에 있는 영혼들이 거하는 장소로 나타내기도 하며(행 2:27, 31) 의롭지 못한 자들이 죽은 후에 가는 곳으로 나타내기도 하고(눅 16:23) 무덤과 동일시 되기도 한다(6:8). 이러한 음부에 대해서 혹자는 단순히 죽은 자들이 거하는 처소라고 주장하나(Kiddle) 불의한 자들이 죽은 후에 가는 곳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다음절에서 의인화된 사망과 음부가 영원한 형벌을 받아 불못에 던져지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사망과 음부'를 지배하시며 통치하신다(1:17, 18, Beasley-Murray). 본문에서 '바다와 사망과 음부'가 죽은 자들을 내어 준다는 것은 흰 보좌에 앉으신 이가 심판하실때에 예외없이 모든 사람들이 육체로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을 시사한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 본문은 앞절의 반복이다. 흰 보좌 앞에 펼쳐진 책, 즉 모든 사람들이 행한 행위에 대해 기록한 책대로 보좌에 않으신 이는 그들의 행위를 심판하신다.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 본절의 '사망과 음부'는 의인화된 표현이다(6:8). 이 '사망과 음부'는 사단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이 유황 불못에 전지워져 영원한 형벌을 받는 것같이 동일하게 유황 불못에 던지워진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승리하신 후에는 더이상 사망이 필요없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21:4. Johnson). 즉 이것은 사망이나 애통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암시한다(21:4;고전 15:16). 한편 '둘째 사망'은 하나님의 백성이나 불신자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육체의 죽음을 의미하는 첫째 사망과는 달리 오직 불신자들만이 겪는 죽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은 둘째 사망이 주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6절). 본절에서 이러한 둘째 사망은 불못과 동일시되고 있다. '불못'은 일반적으로 지옥을 의미하는 '게헨나'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게헨나'는 '흰놈의 골짜기'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게 힌놈'(* )에서 비롯된 것이다. '게 흰놈'은 예루살렘 성 밖 남쪽에 위치한 곳으로 예루살렘 성의 쓰레기를 태우기 위해 늘 불이 붙고 있었다. 또한 몰렉 우상을 숭배하면서 인간을 희생 재물로 드릴 때 불로 태운 곳이기도 하다(왕하 16;3;21:6). 그래서 예레미야는 그 골짜기를 살육의 골짜기로 부르고 있다(렘 7:31-32).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Beasley-Murray). 이러한 불과 하나님의 심판이 연결되어서 '게 힌놈'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하나님의 불의 심판으로 인식되었다(사 66:24). '게 흰놈'과 같은 의미를 지닌 불못은 하나님을 대적한 자들에 대한 심판과 그들의 최후의 패배를 시사한다(Mounce).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리라 - 본절은 앞절에 대한 부연 설명이다. 앞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첫째 부활에 참여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둘째 사망인 불못이 전혀 주관할 수 없다. 단지 둘째 사망이 주관하고 지배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충성하기 보다는 짐승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대적한 불신자들 뿐이다. 그러한 불신자들은 사단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이 겪는 영원한 멸망의 길을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제 7막에서 두번째 심각한 문제의 부분에 접어들게 된다. 그것은 속칭 천년왕국의 문제이다. 어디까지 문자적인 해석을 하여야 하며, 어느 성경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가? 현재의 사건인가, 아니면 미래의사건인가? 19장 다음의 사건인가,아니면 동시대 사건인가? 이 모든 문제가 다루어져야 하겠지만 이미 천년왕국에 대한 네가지 견해는 해석의 방법에서 다루었기에 여기서는 전체적인 흐름에서 이 문제를 전개하면서 역사의 궁극적인 실재로서 역사하는 현장의 두 세력인 마귀와 그리스도의 왕권(으로 대변되는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려고 한다.
제 7막 제 4장 마귀의 현재상태
(계20:1)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계20:2)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하여 (계20:3)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
우리는 제7막 전반부를 통하여서 그리스도의 전쟁과 승리를 보있다. 그것이 사단과 교회에 어떤 의미를 주는가하는 문제에 대하여서 설명하는 것이 요한계시록 20장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 부분은 미래의 어떤 사것이 아니라 신약시대 전체에 있을 사건인 것이다.
그러면 이 부분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것을 알기 위하여 상징적인 부분과 해설의 내용을 살피고 각 부분을 살펴야 할 것이다.
우선 이 부분의 상징적인 내용을 뽑아서 정리하여 보자. 한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 천사는 큰 용을 붙잡아 천년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겨넣고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였다.
그러면 첨가된 해설은 무엇인가? 용은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다. 그들이 갇혔다는 것은 천년이 차기까지 더 이상 만국을 미혹하지 못함을 뜻한다.
이 부분에서 강조되는 용의 결박이란 무엇인가? 용을 사탄이라고 상징적으로 해석하듯이 결박하다는 상징어에 해당하는 해설어도 별도로 찾아내야만 요한이 본 장면 전부를 바로 해석할 수 있다. 요한이 본 환상에서는 사탄이 용으로 형상화 되었기 때문에언어 표현상 잡다,묶다,던지다,풀리다 등의 동사가 얼마든지 사용될 수 있다. 형상화된 영적 존재에게 사용된 이 표현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용을 사탄으로 환원하듯이 잡다,묶다,던지다,풀리다를 사탄에 올바로 결합할 수 있는 의미의 단어로 환원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도 요한은 용이 갇히게 된 것은 "사탄이 민족들을 더 이상 미혹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3)이요, 천년이 차서 사탄이 옥에서 놓여 밖으로 나가는 것은 "땅의 사방에 있는 민족들을 미혹하기 위함"(7)이라고 부언했다. 용이 잡한 결과가 사탄이 민족들을 미혹하지 못하는 것이다. 용이 놓인 결과는 반대로 사탄이 다시 민족들을 미혹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 넣는 것이다.
미혹한 결과는 어떠했는가? 이러한 것은 다시 상징어들로 기록이 되어있다. 바다의 모래와 같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 평지로 올라가서 성도들의 진과 거룩한 성을 포위했다(9). 이것은 사탄이 나라와 민족을 충동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대적하는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3절의 사탄이 민족들을 미혹하지 못하게 한다는 표현은 용이 결박된 결과로 성도들을 향한 이런 종류의 공격이 천년동안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3절의 "더 이상"은 사탄의 사역(만국을 미혹함)이 천년 이전에도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천년이 시작되며 용이 갇히고 사탄이 민족들을 더 이상은 미혹하지 못하게 되고, 성도들에 대한 민족들의 공격이 별효과를 나타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용이 갇히고 묶이고 감옥에 갇힌다는 상징적 묘사는 사탄이 세상에(민족들에게) 이때껏 행사해 오던 그 지배력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표현이다. 천년이 지나서 다시 그 세력을 회복하겠지만(20:7-8,19:19)결국은 멸망하고 만다.
이런면에서 관찰하면 19:11-21은 20장과 거의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하늘이 열리고 백마를 탄자가 나타난다(19:11).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른다(14).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고 불리우는 그는 날카로운 칼로 만국을 친다. 20:l-7에서 한 편에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다른 편에 민족들이 대조되듯이 19장에도 백마를 탄 사람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다른 편에 민족들이 대조를 이룬다. 민족들에게 미처는 사탄의 미혹이 중지되고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이들을 심판하고 다스리듯이 말탄 자의 칼이 민족들을 쓸고 지나간다. 19,20장 어디에나 그리스도의 승리의 모습이 넘친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자들이 이 승리에 동참한다. 20:7-10에 다시 나오는 민족들과 성도들의 대조처럼 19:19-21에는 짐승과 땅의 임금들, 그 군대들이 모여 말탄 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킨다(19). 그러나 잠시 후에는 짐승이 잡히고 이적을 행하여 사람들을 미혹하던 거짓 선지자도 잡힌다. 그리고 산채로 유황 불 붙는 못에 던져진다. 20장에서는 이들을 조종하고 이들에게 악의 세력을 행사하던 사탄의 운명이 다루어진다.
용의 결박이 의미하는 바를 좀 더 정확히 하기 위하여 용이나 사탄,옛뱀 혹은 마귀가 언급되어있는 12장으로 돌아가 보자. 여자가 낳은 아이가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지자(5) 곧 용과 그의 사자가 하늘로서 쫓겨난다(9). 요한은 이 장면에서 용을 옛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소개한다. 20:l의 용의 결박은 12:9의 하늘로부터 용을 추방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용의 결박은 예수님의 초림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해야된다.
제 7막 제 5장 교회의 현재상태
(계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 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하니 (계20: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계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계20:7) 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계20:8)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 (계20:9)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계20: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이 부분의 상징적인 광경은 다음과 같다. 많은 사람들이 보좌 위에 앉아 있었는데 그 들에게 심판권이 주어졌다. 그들은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이 잘린자들의 영혼들과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절하지도 않았고 자신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않은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동안 다스렸다. 죽은 자들 가운데 남은 사람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아나지 못했다.
그리고 해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성도들만이 첫 부활에 참여한다. 첫 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복되고 거룩하다. 둘째 사망이 이들 위에 아무 권세를 갖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동안 그와 함께 다스릴 것
이다.
이 본문에 대한 많은 해석이 우리를 혼란히게 만들기에 다음의 문제들을 차례대로 생각하여 보자.
l.(속칭)천년왕국이라는 용어에 대하여
한국교회는 계시록 20장의 천년을 천년왕국으로 번역하여 사용함으로 불필요한 어려움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천년왕국이란 단어는 성경 어다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러한 나라는 별도로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문제를 삼아야 하는 것은 요한계시록 20장의 천년이 어떤 성질의 것이냐는 질문이다.하나님의 나라가 예수의 사역에서 시작하여 시간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그 전체 과정 중 도대체 어느 시점에서 바로 이 천년이 시작하느냐는 데 그 핵심이 있다. 복음서의 천국개념이 예수의 재림과 심판, 그리고 계속 이어질 영원의 세계를 포함하기 때문에,천년은 예수의 초림으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발전 시간표 위에 어디엔가 표시될 수 있는 기간이어야 한다.
계시록 20:4-6의 바실류에인을 왕노릇한다고 번역한 것도 천년이란 시간적 표현이 왕노릇하다와 합쳐져서 장소적 의미의 천년왕국으로 변한 것이다. 본문에는 장소에 관하여 표현이 어디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다. 바실류에인은 "왕이 되다"와 "왕으로서의 통치권을 행사하다(왕노릇하다)", "왕으로서 다스리다"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단어는 때때로 "지배하다,권한을 행사하다"의 의미로 사용된다(롬5:14,21,6:12,고전4:8). 이때 바실류에인의 주체가 꼭 왕일 필요는 없다. 본문에서 바실류에인이 나타내는 내용은 성도들이 왕이 된다거나 왕으로서의 권한을 행사한다는 것이 아니라 왕이신 그리스도의 통치행위에 성도들도 동참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천년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한다"(계20:4,6) 표현을 근거로 왕국이나 천년왕국을 고집하는 것은 잘못이다.
2.살아났다(에제산)는 말의 의미
살아났다는 모두 두번 사용되었다. 두번 다 요한이 목격한 광경을 묘사하는데(상징부) 한번은 성도들에게, 다른 한번은 성도들을 뺀 나머지 죽은 자들에게 나오는 이 단어는 종말에나 있을 육체적 부활을 확증하는 단어가 아니라 요한이 본 광경 속의 사람들이 확실히 살아났다는 것을 증명하는 단어이다.
그가 본 이 장면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상징하는가,또 교회에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함인가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이 광경을 요한은 잠시 후에 첫째부활(5절)이라고 설명한다. 에재산은 상징어요 첫째부활은 그 설명어이기 때문에 같은 것을 지시하는 것임에 틀림없지만,그러나 금촛대를 교회라고 설명하듯이 보인 것(상징, 즉 살아나는 것)과 그 보인 것이 의미하는 것(실제,즉 첫부활)은 문자적으로 일치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사도요한이 보았다고 그려주는 장면에서 에제산을 통하여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는 광경을 연상할 수 있고,그것을 첫 부활이라고 실감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살아난 사람들이 성도들이라는 사실도 어김없이 독자들의 기억창고에 저장된다. 따라서 살아났다가 기억속에 새겨주는 첫 부활은 예수의 증인들,즉 하나님의 말씀때문에 고난당하고 죽은 사람들과 관계된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요한이 첫부활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복되고 거룩하다고 찬양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첫부활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라는 질문에 에제산은 더 이상은 대답을 주지 않는다. 또 더 대답하도록 강요해도 안된다. 에제산의 상징어로서의 역할은 첫 부활을 뇌리에 심어줌으로써 끝난다. 다음 단계에서 계속 찾아야 할 대답은 결국 첫 부활이 성도들과 관계하여 어떤 사건을 지시하느냐로 간추려 진다.
3.첫[째] 부활
첫 부활이란 용어가 둘째 부활이나 마지막 부활등을 연상하도록 여운을 남기지만 이러한 용어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이것은 계시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부활이란 단어는 계시록에 총 두번(20:4,5) 나오는데 두번 다 첫부활이란 관용적 표현에 사용되었다. 이 용법은 첫부활을 이해함에 있어서 부활은 부활인데 첫번째 부활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관용어로서의 첫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질문하도록 요청한다.
첫째와 비교할 수 있는 단어는 6절의 둘째죽음에 사용된 둘째뿐이다(20:14). 첫째 둘째라는 수사에 붙어오는 명사들이 부활과 죽음이란 서로 상반된 개념이기 때문에 첫째와 둘째만을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논리적인 무리를 범하고 있다. 첫부활의 의미를 캐기 위하여 결국 이것을 둘째 사망과 비교할 수 밖에 없다.
첫부활과 둘째사망의 아주 명확한 두가지를 지적해야 하겠다.
①이 둘은 서로 배타적이다. 첫째부활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둘째사망에 참여하지 않는다(20:6). 이 말을 역으로 바꾸어 첫째부활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은 누구나 둘째 사망에 직면해야 한다고 말해도 좋다. 상호 배타적이라는 말은 첫부활과 둘째 사망이 서로 반대어라는 의미는 아니다.
②둘째 사망이란 추상적으로는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형벌을 상징적으로는 불못(20:14-15),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21:8)을 뜻한다.
이 두가지 제한은 첫부활이 성도와 육체적 부활일 수 없다는 결론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둘째 사망에는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만이 들어가기 때문에 그 자체가 하나님의 저주이다. 첫부활은 영생,영원한 구원,최후적 평안 혹은 생명의 면류관의 전조내지는 개시로 이해되는데 이러한 축복은 둘째 사망의 반대말이기 때문이다(계2:10-11 참조). 그런데 20:6에는 첫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들에 대한 찬양이 유난히도 강하게 둘째 사망의 면제와 함께 선포되었다. 첫부활이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고정되는 소위 천년왕국에서가 아니라 아직도 유동적인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유동적인 세계에 살고 있을 때 심판의 예언은 심각한 경고가 된다. 심판의 면제를 예고하는 것은 그 자체가 위로요 격려가 된다. 첫부활은 더 이상 움직일 수없는 세계의 일이 아니라, 아직도 위기와 위험이 닥쳐오고 극단적인 인내와 신앙의 씨름이 필요한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일 때 둘째 사망이 이들 위에 아무 권세를 갖지 못한다는 선언은 l00%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첫 부활이 성도의 부활이요 그래서 성도들은 이제 영원한 세계에서의 고정된 운명에 들어가고 있다면 이 진술은 불필요한 삽입구가 되고 만다. 하나님의 마지막 상급이나 은총, 위로는 계시록에서 항상 그 자체로 성도들의 기쁨과 영광이 된다는 것과 형벌의 면제에서 오는 안도의 한숨이 이 영원한 기쁨의 원인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4.천 년
천년이란 수치는 모두 네 번 사용되었다. 두 번은 요한이 본 두 번은 요한이 본 계시를 묘사하는데 나오고 두 번은 그 광경을 설명하는 해설에 나온다. 장면묘사와 해설에서 `천년'은 각각 사탄의 결박과 관계하여 한번, 성도들의 통치와 관계하여 한 번 나온다. 이렇게 상징부와 해설부에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을 때 해석학적으로 어느 것을 고정하는가에 따라 그 결과가 크게 달라진다. 다음의 두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
①상징부의 개념을 해설부가 그냥 넘겨 받았다. 이것은 상징부에 사용된 천년을 원개념으로 고정하는 방법이다. 천년이 정말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면 천년은 상징적인 수치일 수 밖에 없다. 계시에 나타난 이 상징적인 수치를 요한은 아무 설명 없이 그대로 해설부에 옮겨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수치가 상징하는 내용은 그 자체로는 판명되지 않는다. 천년과 함께 사용된 다른 개념들이나 이 개념들이 만들어내는 전체 사건묘사를 통해 그 의미를 결정하는 길 밖에 없다. 그렇게 천년의 의미를 결정한다 하더라도 이 `천년'을 다른 개념들을 돋보이게 하려고 설정된 배경이기 때문에 요한이 전달하려는 전체 내용에서 별 중요한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② 해설부의 개념을 상징부에 그대로 도입했다. 이것은 위의 경우와는 반대로 해설부에 사용된 천년을 원개념으로 고정하는 것이다. 해설부의 주개념을 정말 상징부에 미리 예시한 것이라면 천년은 상징화하지 않은 실재 수치이어야 한다. 요한은 천년이란 기간을 강조하기 위해 이 천년을 변화없이 다른 상징적 개념들 사이에 섞어 넣은 것이 된다. 이 경우 여러 상징어들이 천년을 부각시키는 배경노릇을 하기 때문에 모든 상징어들을 이 천년과 관련지어 설명해야 한다.
위의 두 가능성 중에 어느 것이 천년의 경우에 해당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근거는 본문에 하나도 없다. 계시록에 수 많은 상징어들과 상징수들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천년도 상징수일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지는 못한다. 이런 확신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해서 쉽게 천년이 실제기간이라고 결론지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성경 어디에도 이 천 년에 해당하는 기간이 문자적으로 설명되어 있지도 않고 주장되고 있지도 않다는 사실이 `천년'이 실제기간일 것이는 확신을 갖지 못하게 한다.
모든 해석가는 두 가능성 중에서 어쩔 수 없이 자의적으로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에게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계시록 20장의 모든 정황을 살피고 난 뒤에도 결국은 마음이 끌리는 것을 선택하고 자신이 선택한 것을 그럴듯하게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것 밖에 남아 있지 않다. 제 천년왕국설은 이 양자택일의 기로에서 머뭇거리며 다른 단어들을 확인하고 최후의 용기를 내어 하나를 선택한 결과일 뿐이다. 첫번째 가능성을 따라 천년의 의미를 해석할 때 무천년론자나 후천년론자가 되고, 두번째 가능성을 따라 `천년'을 고정시킬 때 전천년론자가 된다. 성경해석해석상 천년이란 단일 개념만을 가지고는 아무도 둘 중 어느 하나가 옳다 그르다 할 수 없는 것이 본문이 가진 최대의 난점이다. 우리도 관례를 따라 천 년의 의미선택을 유보하고 다른 단어들을 살펴볼 수 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5)다스림의 의미
마지막으로 살아난 성도들이 하는 일에 관심을 집중시켜 보자. 요한이 본 그들이 살아나는 광경`첫 부활'의 상징적 표현임을 우리는 앞에서 지적했었다. 그리고 4절의 보좌에 앉아 있는 사람,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이 잘린 자들의 영혼들, 그리고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절하지도 않고 자신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않은 사람들을 별 다른 토론없이 `성도들'로 해석하였다. 6:9-11, 13:6-16을 참고하면, 이러한 해석은 당연한 것이다. 창세 이후로(13:8) 어린 양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사람은 모두 짐승에게 경배하는 이마나 손에 짐승의 표 받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요한이 본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서 보좌에 앉아 심판하는 권한을 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동안 다스리는 사람들은 창세 이후의 성도들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받아 행사하는 심판하는 권세나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림,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지칭하는가? 이 질문은 `첫 부활'과 `천년'의 의미를 구명하는데도 중요한 관건이 된다.
바실류에인은 상징부에 한 번 해설부에 한 번 모두 두번 나온다. 상징부에는 부정과거형으로서 요한이 본 환상에서 막 `살아난' 성도들이 아마도 민족들을(「용의 결박」란 참조) 다스리던 과거의 행동을-그가 실제로 보았던 장면이기 때문에-기술하는데 사용되었다. 해설부에는 미래형으로서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미래에-예언의 형태를 지니기 때문에-나타날 어떤 행동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같은 단어가 서로 다른 부분에 채용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도 두 가능성을 타진해야 한다.
①상징부의 바실류에인이 해설부에 그대로 도임되었거나 상징부에 사용된 의미를 고정시켜야 한다.
②해설부의 바실류에인이 상징부에 상징적인 의미 없이 그대로 전용되었다-이 경우 해설부의 의미를 고정시켜야 한다.
바실류에인의 근본적인 의미는 바실류스에서 파생된 것으로 `왕이 되다', `왕으로서의 권한을 행사하다'이다(마 2:22). 이 용법에서는 `왕'을 그 주체로 취하는 것이 상례이다. 왕이 자신의 통치권을 행하는 것은 의인에게는 은총과 평화를 악인에게는 심판과 저주를 의미한다. 같은 단어지만 왕이 아닌 다른 사람이나 다른 무엇을 주체로 취할 때는 단어의 의미가 약간 달라진다. 왕이 백성들에게 그 대권을 행사하듯이 한 주체가 객체에게 막강한 권력이나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의미한다. 롬 5:21에서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하고 은혜도 의로 말미암아왕노릇하여"라고 한 것은 왕의 절대권과 비슷한 강도로 죄 혹은 은혜가 사람에게 나타난다는 뜻이다. 죄나 은혜가 왕은 아니지만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또 고린도전서 4:8에서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노릇 하였도다"라고 쓴 것은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바울 사도의 허락도 받지 않고 멋대로 모든 것을 판단 결정한 것을 비꼬는 말이다. 주도권을 쥐고 독단적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계시록 20:4,6의 용례]는 바실류에인의 이 두 가지 의미와 약간 다르다고 판단된다. 성도들은 왕도 아니고 왕으로서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도 아니다. 왕과 같은(= 비슷한) 권한의 행사도 아니다. 성도들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린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선 그리스도와 관계하여 이 바실류에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피는 것이다.
계시록은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왕으로 소개한다. 이 점에 있어서 계시록은 복음서와 같은 기독론을 보유하고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해 복음서에서 확립된 기독론을 근거로 삼아 계시록이 출발하고 계속 진행하고 있다. 계 1:5에서 요한은 그가 본 계시를 적기 전에 그리스도를 "땅의 임금들의 우두머리"로 소개한다. 이 표현은 19:16에 기록된 "왕들의 왕이요 주들의 주"란 칭호와 큰 차이가 없다. 계시록의 커다란 주제인 하나님은 "만국의 왕이시다"는 찬양과도 일맥상통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권세를 인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기셨다는 복음서의 진술과 마찬가지로 계시록에서도 하나님께서 왕권을 그리스도에게 넘겨 주시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요한이 본 계시가 시작되면서 하나님이 등장하시고(4:2-3)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 그리고 경배가 돌려진다(8-11)절). 잠시 후 어린 양이 등장하면서 하나님의 오른 손에서 책을 취하시자(5:5-7) 이제는 네 생물과 스물 네 장로들의 찬송과 경배가 하나님과 어린양께 동시에 올려진다(9-16절). 계시록에는 이렇게 직접적으로는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의 통치가-동시에 하나님의 통치가-그 주제가 되고 있다.
왕으로서 다스리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ll장의 한 장면이 질문에 대한 적당한 답을 제공한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하늘에서 큰 음성이 울린다: "세상의 나라가 우리 주님,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다. 그가 영원무궁히 왕노릇하실(= 다스리실)것이다"(15절). 그러자 즉시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의 보좌에 앉아 있던 스물 네 장로들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말한다:"당신에게 감사하옵나이다. 주여!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던 이, 당신이 친히 큰 능력을 취하셨고 또 왕노릇하셨습니다(= 다스리셨습니다)"(16절). 이 찬송에 이어 두 가지 하나님의 사역이 거론된다. 첫째, 진노한 이방인들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심판과 둘째, 하나님의 종, 선지자들, 성도들, 즉 주님의 이름을 무서워하는 자들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상이 그것이다.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가 왕이시요 왕으로서 통치권을 행사하신다는 사상은 특히 보좌라는 상징적 표현을 통해 계시록 전체에 각 장마다 풍부하게 나타난다.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내린다고 묘사하지 않았는가(22:1)! 보좌란 신적 권위와 신적 통치의 상징이다. 이 하나님의 통치는 그의 백성들에게는 항상 구원과 은총, 보호 등으로 나타나고 그의 대적들에게는 분노와 심판 등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계시록만이 아니라 복음서를 관통하는 대 주제이다 !
그리스도께서 왕이시기 때문에 그의 백성인 성도들은 종종 나라
라 불리운다. l장 6절에서 요한은 예수께서 그들을 하나님, 그의 아버지를 위한 나라로 만드셨다고 고백했다.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을 위하여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다고 찬양된다(5:9-l0).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천국이란 개념을 설명하시며 종종 하나님의 통치의 대상에게 핀트를 맞추어 나무와 같이 자라는 것으로, 밀가루를 모두 발효시키는 것으로, 또 그물을 채우는 것으로 비유하셨던 것과 비슷한 표현이 아닌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통치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가져오기 때문에 신약성경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백성들, 즉 교회의 탄생과 성장과 발전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성도들이 어떻게 이 그리스도의 통치에 동참하는가? 우리의 시점에서 이것은 오로지 미래의 일인가? 계시록 22:5은 어쩌면 틀림없이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뜻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원한 나라에 이르기 전에 또 한 번의-예를 들면 천년왕국에서의-통치를 예상해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길인가? 우리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의미에서만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현재적 통치에 동참하는가 ?
다시한번 20장 4-6절로 돌아가 보자. 요한은 살아난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꼐 천년동안 다스리는 광경을 보았다. 보좌에 앉은
사람들이 심판을 받는 광경과 연결하여 생각한다면 그들의 통치는 민족들에 대한 심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환상이
상징는 것을 요한은 6절에서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그와 함께 천년동안 다스리실 것이다"고 설명한다. 성
도들은 왕이 아니라 제사장으로 이 통치에 동참한다. 그리고 그 통치는 같은 성도들이나 인간 이외의 다른 피조물이 아니라 사탄
의 이용물이 되고 있었던 민족들과 관계된다. 이러한 통치는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하던 시기를 기준으로 삼아도 미래가 아니라 이미 그의 현재에서 실현되고 있었다. 이점을 우리는 l장 6절에 기록되고 있는 사도 요한의 설제상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요한은 일곱교회에 편지를 띄우면서 그 교회에 성도들과 자신을 우리란 집단체로 표현하며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고 고백했다. 그리스도의 통치의 대상인 `나라'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 통치의 주체인 제사장이 이미 요한의 시대에 요한과 요한의 편지를 받는 교회에 이루어져 있었다. 요한의 실제상활(1세기 말)과 계 20장장의 천년의 상황이 같다는 것은 요한이 이 천년을 역사의 종말에 시작될 천년왕국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는 지울수 없는 증거이다.
같은 표현이 5:10에 요한이 본 환상에서 되풀 된다 :"그는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을 위하여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다"). 그 결과로 그들은 땅에서 통치할 것이다. 이 찬송의 특징은 보혈을 통한 구속과 통치가 결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통치가 이 땅 위에서 진행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 요한은 죽은 영혼들이 천상에서 수행하는 사역에 관심을 가진 것 같지는 않다.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교회를 앞선 세대와의 연합체로 보며 고통과 환난을 당하는 그 배후에 짙게 깔려 있는 승리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 같다. 2:26의 약속도 같은 범주에 속하는 말씀이다. 이러한 통치 사역을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께 받았던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성도들도 땅에서 동일한 통치권을 행사할 것임을 시사하셨다. 교회를 상징하는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고 이 여자가 낳은 철장으로 만국을 칠 아이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올리우고 하늘에서 쫓겨난 용이 홀로 된 여자를 광야에서 일정기간(1260일, 혹 한 때와 두 때와 반때) 핍박하기를 시작하기 전에 요한은 다음과 같은 찬송을 삽입했다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어졌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그들을 참소하던 자가 쫓겨 났고 또 그들이 어린 양의 피와 그들이 증거하던 말을 인하여 그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옆도다"(12:9-11). 성도들이 핍박과 순교로 얻은 것은 패배나 고통이 아니라 사탄에 대한 승리였다. 사탄은 성도들의 피를 할기는 했지만 이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패배를 당하고 쫓겨난 것으로 말해진다. 이 모두가 그리스도의 피와 관계되어 있다. 그리스도와 그의 성도들은 교회 역사의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과 함께, 적어도 어린 양이 하늘 보좌에 앉게 되는 그 시점부터 만민 위에 군림하는 통치권과 승리를 소유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17장 14절로 눈을 돌려 보자. 앞의 문맥은 명백하게
요한의 시대에 대한 평가와 예언을 담고 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17장 전체의 내용이 로마와 로마제국의 황제들에 관한 이상임을 동의한다. 그들은 교회를 대적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대적하게 되는데 요한계시록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길 것"이라고 호언장담한다. 뿐만 아니라 "어린 양과 함께 한 자들, 즉 부르심을 받고 선택받은 진실한 자들도 그들을 이길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승리의 노래는 이미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순교의 피를 흘림으로 성취된다. 성도들의 이러한 승리와 하나님의 통치에의 참여는 미래의 영원한 세계에서 주어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계시록 20장 4-6절의 성도들의 통치는 계시록 전체에 비추어 볼때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과 박해와 순교의 배후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다른 면 즉 영적인 면에서 조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의 통치와 승리라는 관점에서 우리의 역사 배후에 일어나고 있는 영적 실체를 보여주는 계시이다.
이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려도 좋을 것이다. 계시록 20장의 `천 년'은 복음서의 `천국'의 시간적 표현이다. 역으로 `천국'은 천년의 시공간적 표현이다. 그것은 같은 것이며 예수의 재림으로 다른 상황으로 발전할 것이다.
6.잠간 놓인 사단
(계20:7) 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계20:8)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 (계20:9)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계20: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이 부분의 상징부는 다음과 같다. (사단에게 미혹된)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지면에 올라와서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는 성읍을 포위했다. 그러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삼켜 버렸다.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는 불과 유황 못에 던지웠다.
그리고 해설에 해당하는 내용을 보면 천년이 차면 사탄이 잠깐 풀린다. 그가 땅의 사방에 있는 백성들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여 전쟁을 위해 그들을 모은다. 그들은 성도들을 위협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하신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것은 역사의 말기에 사단과 땅의 백성들이 성도들에 대적하여 일어나는 듯이 보이지만 마귀는 결국 여원한 심판의 자리인 불과 유황못에 던지운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귀가 일으키는 전쟁이 무엇인가? 미혹이라고 하였다. 성도들이 제사장적인 다스림으로 나가는 것을 거절하고 사단의 미혹으로 성도들을 대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때가 곧 저들의 멸망의 순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영역에서 최후까지 우리의 다르심(세상에 대한 성도의 통제권)에 굳게 서야한다. 19장의 모습을 통하여서 군대장관이신 그릿도로 말미암아 13장의 두 짐승이, 20장에서는 그 짐승을 지배하는 미혹하는 마귀도 동일한 심판에 처하여 짐을 보여준다.
제 7막 제 6장 마지막 심판(백보좌 심판)
(계20: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계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계20: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계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계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내가... ..보니"라는 말로 장면은 다시 바뀌어서 역사의 마지막 날의 모습으로 간다. 그것은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하실 날"(행17:31)이다.
1.심판의 주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이다.
크고 흰보좌가 있는 곳은 어디인가에 대하여서는 본문이 더 이상 설명하지 않기에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금하도록 하자. 문제는 그 순간에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으며(11), 새 하늘과 새땅이 이루어지는 순간인 것이다(21:1).
그 보좌는 크다고 하는 말은 심판의 최종성ㄱ화 그 결정의 엄중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보좌가 희다는 사실은 보좌에 앉으신 분의 영광스러움과 거룩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1:14 참조).
문제는 거기에 누가 앉아서 계시는가하는 문제이다. 어떤이는 하나님 자신이라고 하고, 어떤이는 그리스도로 본다. 그러나 성경전체를 통하여서본다면 성부 하나님이 그 아들 옛후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심판하시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시며(요10:30), 성부께서는 성자에게 심판의 권세를 주셨다(마28:18,요5:22-27). 그렇다면 우리의 관계도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여하에 심판이 달려있는 것이다.
2.심판받는 자들
1]모든 사람디 다 심판을 받는다.
(계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심판을 받는 자들은 인류의 시초 아담으로부터 제일 마지막 사람까지 모두 포함히 된다. 거기는 무론대소하고 인간이 만들어낸 구별이나 효력이 없으며, 유명인사와 무명인사, 부모와 자녀,통치자와 피통치자,부자와 가난한 자,인기 스타와 그 팬들,영웅과 추종자들,교수와 문맹인, 목사와 회중,사장과 근로자들,정부와 백성,이 모든 자들중에 누구나 높거나 낮아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없다.
2]죽은 자들이 부활함으로 그 심판에 나아오게 된다.
(계20: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어떻게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심판을 받으러 나올 수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죽은지 오래되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들이 침대에서 평안히 죽었건, 교통사고로 죽었건, 폭탄에 맞아 죽었건, 바다에 빠져 죽었건 심판을 받기 위하여 모두 부활한 것이다. 바다라는 말은 매장되지 못한 시체들을 생각나게 하고, 사망과 음부는 죽은 자들의 실재와 사망후에 맞이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그 모두에서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오직 하나님만이 그 신비한 일을 하실 수가 있다. 우리들의 관심은 심판, 부활의 과정이나 원리를 알아 내려는 것보다 그날을 대비하는 것에 집중하여야 한다.
세상 만민이 다 판결을 받기 위하여 부활된다.
3.근거-책 들
(계20:12) .......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계20:13) .......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철저한 심판
책들에 근거하여 심판을 이룬다고 하는데 이는 상징적인 표현이다. 그 내용은 무엇인가?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책들에 기록된대로",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라고 표현을 하고있다. 즉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들의 행위가 빠짐없이 모두 기록이 되듯이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따라서 심판하신다는 말이다.
우리들의 겉과 속이 모두 심판을 받게된다. 우리들의 언행,생각,의도,가장 비밀스러운 습관과 욕망,공적으로 행한 일과 어두운데서 행한 일,누구를 위하여 어떻게 살았으며 우리들의 은사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등에 대하여 낱낱이 조사를 받고 심판을 받게 된다.
각 개인의 가치관,성품의 진가,행위,속마음 등이 백일 하에 다 드러나게 된다. 그 모든 것들이 마치 책에 자세히 기록되었다가 펼쳐 보이듯이 숨길수 없게 다 드러나게 된다.
2]생명의 길은 어디에?
그러면 나의 구원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것도 나의 행위의 문제인가? 또 다른 근거가 주어지고 있다. 바로 곧 "생명책"(21:7-어린양의 생명책)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하나님의 선택하신 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인데 그들 자신의 공로나 의나 죽음이나 생애가 아닌,그리스도의 공로와 그리스도의 의와 그리스도의 생애와 그리스도의 죽음에 근거해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자들이다.
4.언도
그러면 언도의 본질적인 측면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바라보아야 할 내용이 있다.
(계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계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1]둘째 사망[=불 못]에 참예할 자
둘째 사망에 참예할 자, 즉 영원한 불 못에 들어갈 사람은 자신의 행위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행위로는 아무도 그 심판에서 이 언도를 피할자가 없다.
2]결정적인 언도의 기준
그것은 바로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거기에서 제외된다는 사실이다. 즉 판결의 차이를 내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설명이 되어야 한다. 즉 그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아니냐의 문제이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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