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7:1
 이 일 후에 - 이는 환상의 새로운 국면의 시작으로 본장이 여섯째 인의 재앙과 일 곱번째 인을 떼는(8:1) 그 사이에 일어나는 것임을 나타낸다.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 '네 천사'는 바람을 맏은 천사로서 이들은 자연계를 다스리는 천사들이다(Mounce), 한편 '땅 네 모퉁이'는 세상의 모든 곳에서 남은 자가 돌아올 것을 예언한 사 11:12의 '땅 사방에서'와 동일한 의미의 표현으로 온 세상을 가리킨다.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 '바람'은 파괴나 전쟁의 재앙을 상징한다(렘 49:36-38;51:1). 그러기에 '땅의 사방의 바람'은 종말에 온 세상에 임할 커다란 재앙을 암시한다(왕상 19:11; 욥 1:19;21:18; 시 1:4;14:18; 단 2:35;7:2). 한편 '붙잡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라툰타스'(* )는 '단단히 붙잡다'는 의미를 가진 '크라테오'(* )의 현재 능동태 분사로 계속해서 재앙을 행사치 못하게 한다는 의미를 가진다(Charles).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 '불지 못하게 하더라' 에 해당하는 헬라어 '히나 메 프네에 아네모스'(* )는 현재 능동태 가정법으로 '바람이 계속해서 불지 못하도록'이란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에게 인치기까지 재난을 중지시킨 사실을 암시한다(2, 3절).

=====7:2
 또 보매 다른 천사가 - '다른 천사'에 대해서 혹자는 그리스도로 해석하나(Walvoord, Ladd) 앞서 언급된 '네 천사'외에 또 다른 천사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Johnson, Mounce, Morris, 8:3 주석 참조). 본절에서 다른 천사의 역할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인을 쳐 보호 받도록 하는 것이다(3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 '살아 계신 하나님'이란 표현은 묵시 문학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으로 이교의 죽음은 우상에 반하여 창조자의 살아 계심을 부각시키는 표현이다(4:9, 10;15:7; 마 16:16;26:63; 히 3:12). 요한은 이 표현을 사용하여 비록 다른 천사가 하나님의 인을 친다 할지라도 그 주체는 하나님이심을 시사한다. 한편 '인'의 헬라어 '스프라기다'(* )는 자신의 문서나 노예, 혹은 소유물 등에 소유권이나(엡 1:3), 보증(고전 1:22)을 나타내는 표시를 뜻한다. 이는 짐승의 표와 대조를 이루어(13:16)인을 맞은 백성들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소유사 되며(14:1)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호나 안전을 보장받는 자임을 시사한다.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 '해 돋는 데로부터'의 헬라어 '아포아나톨레스 헬리우' (* )는 문자적으로 '동쪽으로부터'를 의미한다. 인을 가진 다른 천사가 동쪽에서 올라온다는 사실에 대한 해석은 다석 가지이다. (1) 혹자는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 문에서 올라온다는 예언의 성취로 해석한다(겔 43:4, Swete). (2) 혹자는 메시야가 동방에서 탄생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ibylline 3:652, Erbes, Lohmeyer). (3) 혹자는 '동쪽'이 묵시 문학에서 자주 사용되는 일종의 자세한 묘사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Mounce). (4) 혹자는 예수의 탄생과 관련하여 동쪽에서 별을 보며 박사들이 온 사실을 암시한다고 주장한다(마 2:1, Barclay, Morris). (5) 혹자는 모든 생물에게 생명을 주는 태양이 동쪽에서 솟아오르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암시한다고 가리킨다(De Wette, Hengstenberg). 이러한 다양한 견해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는 어렵다.
 
=====7:3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 '우리 하나님의 종들'에 대하여는 몇몇 해석이 있다. (1) 혹자는 '하나님의 종'들(1:1;2:20;19:2, 5;22:3, 6)과 '우리 하나님'(10, 12절;12:10;19:1, 5)을 합하여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engel). (2) 혹자는 하나님께 봉사함에 있어서 천사들과 비할 수 있는 존재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Robertson). 두 가지 견해 중 전자의 견해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장은 구원받은 백성들이 인침을 통해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마에 '인침'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공개적으로 임할 마귀의 권세로 부터 하나님의 종들이 보호받는 것으로 해석한다(Charles, Clark). (2) 혹자는 이기는 자가 받게 될 흰 돌(2:17) 혹은 성전의 기둥으로 해석한다(Rist). (3) 혹자는 성령 혹은 초대교회 이후의 세례로 해석한다. 세 가지 견해중 첫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인'은 소유나 보호를 나타내는 것으로 (9:4;14:1;겔 9:1-7;딤후 2:19) 짐승의 미혹을 당하지 않고 하나님의 진노 대상에서 벗어나 승리와 보호를 약속받는 것을 시사한다(13:7;16:2;20:4, Johnson).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 '해하지 말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아디케세테'(* )는 강한 부정 명령의 능동태 가정법으로 '해하기 시작하지 말아라'는 의미이다. 이는 인침을 받은 자는 짐승의 미혹에 기만당하지 않고 종말의 재앙에서 보호 받아 승리할 것임을 강력히 시사한다.
 
=====7:4
 내가 인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 '인맞은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에스프라기스메논'(* )은 완료 수동태 분사로 더이상 변함이 없는 완료된 수를 요한이 들었음을 나타낸다.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중에서 - '이스라엘'에 대한 해석은 본서에서 가장 난해한 해석 중의 하나로 일반적으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이스라엘을 문자적 의미로 취급하여 유대인 성도들로 해석한다(Bengel, Clarke, Walvoord). (2) 혹자는 '이스라엘'자르 문자적 의미가 아닌 영적 의미로 해석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 즉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한다(De Wette, Ladd, Johnson, Moffatt, Charles, Plummer, Vincent, Kiddle, Rist).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서에서 교회는 어린양의 신부로, 새 예루살렘 성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예수를 따를는 자를 참이스라엘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14:4;15:1ff. ;21:9-12). 더욱이 5-8절까지 언급된 12지파명도 구약성경에 나타난 12지파명과 다르다.
  인맞은 자들이 십 사만 사천이니 - '십 사만 사천'이 누구를 나타내는가에 대한 견해는 세가지이다. (1) 혹자는 순교한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Kiddle, Caird). (2) 혹자는 '이스라엘'자르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십 사만 사천'도 문자적으로 인치심을 받고 보호함을 받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으로 해석한다(갈 6:16, Walvoord, Richardson). (3) 혹자는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십 사만 사천을 유대인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완성된 교회로 해석한다(롬 2:28, 29;9:6, 7, Alford, Swete, Beckwith, Vincent). 이 세 가지 견해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한편 144,000에 대한 상징적 숫자 해석은 (3 * 4)** 2 * 10 ** 3 = 144,000이다. 3은 하나님의 수이며 4는 땅의 수로서 곱한 수가 완전수인 12이며, 이 12의 제곱과 충만수 10의 세제곱이 곱해진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충만함을 의미한다(Greijdanus, Lohmeyer, Ladd, Johnson).

=====7:5,6,7,8
 유다 지파 중에 인맞은 자가...일만 이천이라 - 요한은 인맞은 이스라엘 지파의 이름을 열거한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이름과 순서와 내용은 문자적인 의미보다는 영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Ladd, Lohmeyer, Hendriksen). 왜냐하면 12지파의 순서가 창세기나 에스겔서와 다를 뿐만 아니라 기록된 방식이 독특하여 영적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점에서 비롯된 본문의 특징은 다섯 가지이다. (1) 구약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야곱의 장자인 르우벤이 먼저 등장하는 것과는 달리(창 35:22-26;신 33:5-25) 본문에서는 유다 지파가 가장 먼저 등장한다. 이는 유다 지파에서 메시야가 나신 것을 반영하고 있다(창 49:10;대상 5:2;히 7:13, 14, Johnson, Mounce, Morris). (2) 본문에서는 단 지파가 생략되어 있다. 이에 대해 혹자는 '단'(* )이 부주의로 '만'(* , man, '사람')으로 기록되었거나(Spitta, Bleek) 혹은 우상 숭배로 인해서 고의적으로 제외되었거나(창 49:17;삿 18:18, 19, 30;왕상 12:29, 30, Clarke), 아니면 렘 8:16을 확대 해석하여 단 지파에서 적그리스도가 나온다는 랍비들의 해석과 연관되어 제외되었다고 한다(Weiss, Charles, Alford, Walvoord). (3)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동시에 등장하지 않고 본문에서 에브라임은 생략되고 대신 요셉이 삽입되어 있다. 이는 에브라임도 단 지파와 마찬가지로 우상 숭배로 인히서 생략되었고(호 4:17) 단 지파의 생략으로
12숫자를 맞추기 위해 욥셉이 삽입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Johnson, Mounce). (4) 레위 지파의 삽입이다. 요셉 지파가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로 나뉘어 12지파에 들어가고 레위 지파가 12지파에서 빠져 제사장 지파로서 신분이 격상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인 반면에 본문에서는 레위 지파가 삽입되어 혈통적 제사장 지파가 그리 중요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5) 모든 지파에 '중에 일만 이천'이 반복된다. 이는 12의 1,000배로 완전하고 큰 숫자임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동일하게 '...중에'(* , 에크)를 반복하여 인맞은 자들이 선택된 무리임을 암시해준다(Johnson).  

=====7:9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은 앞서 언급된 십사만 사천과 본절 하반절에서 언급되는 '셀 수 없는 무리'를 연결하는 표현이다(5:9 주석 참조). 이렇게 요한이 중복적 으로 표현한 것은 144,000이라는 숫자가 영적인 의미의 수임을 암시함과 동시에 구원의 문이 모든 민족에게 열려져 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Morris).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 본문이 누구를 의미하는가에 대하여는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큰 무리'가 십 사만 사천이라는 수로 상징된 자들과 동일인이라고 해석한다(Beckwith, Morris, Eller). (2) 혹자는 십 사만 사천과 구별하여 십 사만 사천은 유대인을 가리키고 본문은 큰 환난 가운데서 구원받은 이방인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Lamp). (3) 혹자는 본문이 큰 환난 때 짐승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순교자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Kiddle, Moffatt). 세 가지 견해중 첫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 '흰 옷'은 정결과 승리를 상징하는 옷으로(3:4 주석 참조)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아 구속받았음을 나타낸다. '종려 가지'는 일반적으로 승리나 기쁨의 상징으로 사용된다(요 12:13, Trench, Vicent, Alford).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아 흰 옷을 입은 허다한 무리들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구속 하심에 대해 기쁨으로 찬양할 것이다.

=====7:10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니 - 본문은 허다한 무리들의 찬양이가(9절). '구원하심'의 헬라어 '소테리아'(* )는 허다한 무리 자신들의 업적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와 어린양의 구속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을 가리킨다(Caird, Weymouth). 허다한 무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신 하나님의 구속하심에 대해 찬양을 성부와 어린양에게 돌린다(5:13;19:1).

=====7: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 '주위'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클로'(* )는 문자적으로 '원형으로'라는 뜻으로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생물들을 옹위하는 모습을 묘사한다(5:11 주석 참조).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 '엎드려 얼굴을 대고' 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페산...에피 타 프로소파 아우톤'(*  )은 경건한 예배의 행위를 나타낸다(4:10;5:14;11:16;19:4, 10;22:8, Charles).  

=====7:12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 - 본문은 모든 천사가 구속된 자들의 찬양에 대해(10절) '아멘'으로 화답하고 인간에게 주어진 구원에 대해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으로 5:12절의 찬양과 대조를 이룬다. 5:12절의 찬양과 대조해보면 본문의 찬양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1) 5:12, 13의 찬미는 어린양에게 바쳐졌으나 본절은 하나님께 드려진다. (2) 찬양 내용 중에서 5:12의 '부'가 본절에서는 '감사'로 대치되어 있다. '감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비롯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것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구속하신 것에 대한 것이다. (3) 본문에 '세세토록'이란 말이 삽입되어 이 모든 것이 영원한 것임을 강조한다. (4) 본문에는 두 번의 '아멘'이 사용된다. 처음의 '아멘'은 큰 무리의 찬송에 대한 응답이며 마지막의 '아멘'은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을 나타내는 것으로 영광스런 예배의 모습을 암시한다(5:12-14, Morris, Mounce, Lohmeyer).

=====7:13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 '장로 중에 하나'는 본서 가운데 나타나는 교회를 대표하는 장로들이 아니라 어떤 천상적인 존재인 듯하다(4:4 주석 참조, Johnson). 한편 '응답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크리데'(* )는 '아포크리노마이'(* ,'대답하다')의 부정과거 수동태로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응답한 사실을 나타낸다. 이는 예언서에서 흔히 등장하는 문답 형식으로(렘 1:11;겔 37:3;슥 4:2, 4, 5) 질문없이 스스로 해석하고 답하는 히브리어 중복성(Hebrew redundancy)을 나타낸다(Swete).

  =====7:14
 내가 가로되 - 본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레카'(* )는 완료 능동태로 생생한 증언을 나타낸다(Swete).
  내 주여 - 이는 천상적인 존재에 대한 경외심을 나타내는 표현이다(Vincent).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 '당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수'(* )는 강조적인 표현으로 '바로 당신'이란 의미이다. 이 말에는 자신의 무지에 대한 진지한 고백뿐 아니라 존경과 두려움의 감정이 내포되어 있다(Plummer, Swete).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 '큰 환난'의 내용에 대해서는 몇몇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모든 시대의 성도가 겪는 보편적인 환난으로 해석한다(Morris, Alford, Greijdanus, Niles). (2) 혹자는 종말에 겪을 환난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3:10;단 12:1;막 13:19, Charles, Walvoord, Mounce). 두 가지 견해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큰 환난'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스 들리프세오스 테스 메갈레스'(* )에는 정관사 '테스'(* )가 사용되어 그것이 특정한 사건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어린양의 피에 - 본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토 하이마티투 아르니우'(*  )는 수단을 나타내는 여격 구문으로 그들의 사죄 받음이 인간의 공적에 의한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보혈의 속죄피로 말미암은 것임을 시사한다(사 1:18;히 9:14;요일 1:7, Swete, Milligan). 한편 '씻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플뤼난'(*  )과 '희게 하였느니라'의 헤라어 '엘류카난'(* )은 모두 부정 과거 시제로 단회적인 행위를 나타낸다. 이는 그리스도의 희생 사역이 단회적이면서도 그 효력은 영원함을 나타낸다. 허다한 무리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서 깨끗함을 입고 구속받은 자들이다.
 
=====7:15
 그러므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투토'(* )는 문자적으로 '이것 때문에'라는 의미로, 본문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인한 결과임을 나타낸다.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 본문은 어린양의 피로 구속함을 입은 자가 누리게 될 특권에 대한 진술이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담대함은 오직 어린양의 속죄의 피로 깨끗함을 받은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권리이다(히 10:19).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 본문은 21:22에 '성전이 없다'는 말씀과 상치되는 듯하다. 그러나 본절에서 17절까지는 21, 22장에 나오는 구속받은 자들과 연관된 것이기에(21:3, 4,6)본문의 성전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임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Johnson). 한편 '섬기며'의 헬라어 '라트류우신'(*  )은 '봉사한다'는 의미를 가진 '라트류오'(* )에서 파생된 단어로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섬김은 물론 '제사장들의 특별한 제사적인 예배'를 의미한다(마 4:10;히 8:5). 이것은 본문에서 구속받은 성도들이 제사장의 중보나 제물의 필요없이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며 예배하며 섬길 수 있음을 의미한다(벧전 2:9). 그렇나 섬김과 예배는 '밤낮'없이 행해진다. 왜냐하면 새 예루살렘 성에는 밤과 낮의 구분이 없기 때문이다(21:25;22:5). '밤낮'은 쉼이 없이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상태를 나타낸다(20:10, Mounce). 구속받은 자들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 지속적으로 그를 경배하고 섬기게 된다.
  보좌에 않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 '장막을 치시리니' 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케노세이'(* )는 미래시상으로 이래에 함께 거하실 것을 나타낸다. 이는 광야에서 여러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고 있다(출 13:21;대하 7:1-3). 즉 본문은 하나님께 구속 받은 자들과 함께 거하셔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는 약속의 성취를 나타낸다(겔 37:27;슥 2:10, Morris, Johnson, Mounce).
 
=====7:16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 본문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벧론 포로 상태에서 귀환할 때의 이사야의 진술을 반영한 것으로(사 49:10) 구속 받은 자들이 누릴 영원한 축복을 나타낸다. '주림과 목마름'은 단순히 육체적 빈곤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갈급의 상태를 나타낸다. 구속 받은 자들은 그러한 주림과 목마름이 더이상 없는 완전히 충족된 상태를 누리게 될것이다(마 5;6;요 6:35).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 '아무 뜨거운 기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 카우마'(* )는 '불에 타다'라는 의미를 가진 '카이오'(* )에서 파생된 단어로 고통스러운 열기를 말한다. 이것은 일반적인 고통이나(Morris) 혹은 넷째 대접의 재앙을 가리킨다(16:9, Mounce). 한편 '상하지 아니할지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데 메 페세'(* )는 '떨어지다'의 의미를 지닌'피프토'(* )의 부정관사 시상으로 강한 이중 부정이다. 이는 구원받은 자들에게 지상에서와 같은 고통스러움이 경단코 없을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은 성도들이 전형적인 육체의 모든 고통에서 장차 해방될 것임을 시사한다(Mounce, Moffatt, Ford).

  =====7: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 '보좌 가운데 계신'은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보좌와 이심 사 장로들과의 중간 위치를 가리키나 위치적인 의미보다는 그리스도의 '중보자 직임'을 상징한다. 한편 '저희의 목자가 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이마네이 아우투스'(* )는 '보살피다'는 의미의 '포이마이노'(* )에서 파생된 미래 능동태로 문자적으로 '그들을 보살피실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중보적 사역을 실제로 행하실 것을 약속해 준다(요 21:16;행 20:28;벧전 5:2, Swete, Ford).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 '생명수 샘으로'의 헬라어 '에피 조에스 페가스 휘다톤'(* )은 어순상 '생명의'(* , 조에스)를 강조한다. 이는 다함이 없는 생명의 근원을 시사한다(21:6;22:1, 7;요 4:12, 14:7:38). 하나님께서는 구속받을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 본문은 사 25:8을 반영한다.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의 해당하는 헬라어 '여살레이프 세이'(* )는 문자적으로 '...으로 부터 제거해 버리다'라는 의미의 미래 시상으로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셔서 구속 받은 자들을 고통과 아픔으로 부터 해방시켜 주실 것을 시사한다(21:4). 이것은 장차 구속받은 자들이 누릴 영원하며 절대적인 희락과 평강의 축복을 나타낸다.

 

 

삽입-안전한 하나님의 종들
 요한계시록 제 7장의 내용만큼 많은 해석을 낳은 부분도 드물 것이다. 건전한 해석학적 입장을 고수하는 신실한 학자로부터 극딘격인 이단에까지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가지각색이다. 그러나 문자적으로 연결시켜 본다면 어느정도 입장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이 내용자체가 일곱인의 내용에 포함되 있지만 그 일곱개의 인의 내용에 해당하는 내용이 아니라 하나의 삽입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내용은 일곱 인의 어느 순서에 넣어서 해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물론 일곱인도 그 순서가 항상 차례대로가 아니라 겹쳐진 것을 보았다).
 두번째 이 십임은 하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그 질문은 바로 심판의 날[여호와의 진노의 날]을 맞이하여 신판의 두려움에서 외치는 절규였다.
(계6: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사건이 임하는 여섯째 인 다음에는 8:l의 일곱째 인이 이어진다. 그런데 그 무서운 진노의 날을 당하여 심판을 당하는 땅의 족속들이 피할 수 없는 진노 앞에서  "누가능히 서리요!"라고 하였다. 아무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모두 망하고 마는 것인가? 그 진노를 능히 이기고 살 자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진다.
 이제 그 사실에 대하여서 여러가지 해석들은 뒤로 미루고 성경구절을 살피면서 그 의미에 접근하여 보자.

1.인치심-언제?
 이 삽입의 장면은 여섯째 인의 사건이 나타난 후에 보여진 장면이다. 그러나 이 말이 여섯째 인 이후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 순서는 단순히 여서째 인에서 제기된 문제에 대한 해답이기에 그 이후에 나타난 것이다.
 다시 이야기의 배경은 앞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디로 돌아가고 있는가? 첫 부분에서부터 바로 그 시기를 보여준다.
(계7:1)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이 부분은 온통 묵시문학적인 표현으로 가득차 있다. 이 절의 표현은 땅의 사방의 바람이 불어서 땅(바다,각종 나무)에 불기 전에 일어난 사건임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면 이 표상들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고 6장의 내용으로 돌아가서 연결을 시켜보자.

 "네 천사"라고 한 것은 다음의 땅의 네 바람과 연결이 되어 있기에 네 천사라고 기록이 된 듯하다.
 "땅의 네 모퉁이"는 단순히 고대의 우주론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온 땅에"라는 의미이다.
 "땅의 사방의 바람"에서 바람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파괴의 수행자를 나타낸다. 다니엘7:2에서는 땅의 네 바람이 네 마리의 크고 무서운 짐승을 불러 온다. 예레미야 49:36에서는 사방 바람이 여호와의 맹렬한 분노를 열방에게 쏟는다고 한다.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아직 쏟아지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그 진노의 대상에서 각종 나무가 등장하는 것은 나무가 바람에 가장 예민하게 피해를 입기 때문에 등장한 표현으로 보이며, 그 나무를 사람의 상징으로 해석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물론 성경에서 나무가 사람을 상징하는 경우가 있지만 여기서는 그러한 문자적 근거를 밝히기란 어렵다. 사2:13,14:8,61:3,시l:3 참조).
 그러나 여기에서 가장 본질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 진노의 바람은 땅에 부는 바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다에 분다. 땅의 의미는 6장에서 살핀대로 악의 세력을 상징하는 표현이며, 바다도 요한계시록에서 역시 동일한 의미로 등장을 한다. 그런데 아직 그 바람이 불지 못하도록 천사들이 그 바람을 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아직도 땅위에 진노의 바람이 불기 전에 어떤 일을 여기에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6장에서 여기에 해당하는 내용은 어디에 있는가?
 본질적으로 땅에 혼란이 여러가지 일이 일어난 것은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즉 땅의 네 바람은 진노의 큰 날의 바람인 것이다. 그 진노의 큰 바람이 불기 전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2절에서 그 내용에  대하여 설명한다.
(계7:2)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해 돋는 데로부터"-구약에서 동쪽은 메시야의 오시는 방향으로 제시되고 있다(사41:25,말3:20). 그러므로 여기의 천사가 오는 방향이 동쪽인 것은 메시야의 사역의 어떤 결과이거나 메시야 시대의 은혜를 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천사가"-이 천사에 대하여 너무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단순히 그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에 관심을 모아야 할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구약성경에서 인의 상징은 대제사장의 이마에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새김의 모습에서 볼 수 있다(출28:26.39:30). 그렇게 함으로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기록하는 방법으로 소수을 나타내는 것임을 보여준다(사44:5). 그리고 그 인을 이마에 침은 에스겔9:4의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는 사실과 연결이 된다.
 그렇게 놓고 본다면 인을 치는 표상은 무엇인가? 6장의 질문과 연결하여 보면 진노의 큰 날을 피하는 표시이며, 그것이 우리가 해석한대로 주님 재림시에 악인에게 나타날 진노라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이기고 서게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인은 분명히 소속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것은 그 인의 주인에 의하여 보호를 받음을 나타낸다.

 그러면 그 인은 누구의 인인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이라고 한다. 사시는 하나님이라는 칭호는 구약성경에서 그의 백성을 위하여 개입하실 때마다 등장하는 이름이다(수3:10,왕하 19:4,16). 그렇다면 인침을 받은 자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소유를 가리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그 당시 인은 종 이나 자신의 소유의 가축에 치는 것이었다.

 천사는 땅을 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외쳤다.
(계7:3)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그 인을 치는 사건이 끝나기 전에는 결코 여섯째번의 인의 진노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의 진노의 그 심판의 날 이것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속한 자라는 증거로 인을 치시는 그 인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언제 치시는 것일까? 이 문제는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그것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우리에게 인치는 것이라면 도대체 어떤 사건일까? 이 문제는 누구에제 인을 치느냐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과 연결이 된다.
 그 대상은 3,4-14절에서 다루어지지만 한가지 간단한 대답으로 우선 정의를 내리고 다시,언제 어떤 종류의 인인지를 설명하고 다시 대상을 상술하기로 한다.
 3절의 정의에 의하면 인침을 받는 자는 "하나님의 종들"이라고 한다. 어느 누구에게 특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들에게 인을 치는 것으로(4-12절에서 다시 다룬다). 그렇게 본다면 중요한문제는 우리도 틀림없이 그 인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나는 언제 그 인과 관계가 있는가? 하나님은 무엇으로 어떻게 그 인을 치실(혹은 치신)것인가? 나의 이마에 아무리 만져 보아도 만져지지 않는데 말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그 대답은 너무나 분명하다.
(엡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엡1: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인치심의 때가 언제라고 하는가? "그 안에서 믿어.....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한다. 가장 분명한 대답은 모든 신앙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에 이미 인치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나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것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 인은 쇠로 달군 불도장이 아니라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셨기 때문이다. 이제 그 인치심을 받은 자는 진노의 문제에서 확실히 벗어난 것이다. 그 성령의 인치심으로 기업의 보증을 얻게 된 것이다(고후 l:22 ,엡4:30).
 이에 대하여 디모데후서2:19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딤후2:19)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들은 요한계시록 7장에 나오는 그 인치심을 받은 자들이요, 진노의 날을 이길 수 있는 자들이다(다음 항목에서 자세히 생각해 보자).

2.누가 인치심을 받는가?
 이미 위에서 간단히 다루었지만 이제 다시 이 문제를 상세히 다루어야만 한다. 그 문제는 3절에서 포괄적으로 말하고, 다시 4-14절을 통하여 길게 설명을 한다. 그 방법은 두가지로 나타난다.

①사도요한이 그 수를 들음
 4-8절을 통하여 사도요한은 인맞은 사람의 수를 듣게 된다. 그 슷자는 이스라엘의 각 지파중에서 인맞은 자가 144,000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숫자는 한 지파에 12,000명씩 12지파인데 그 지파의 이름은유다,르우벤,갓,아셀,납달리,므낫세,시므온,레위,잇사갈,스불론,요셉,베냐민으로 나타난다.

 그러면 이들이 과연 누구인가? 크게 그 내용은 두가지로 나뉘어진다.
 한가지는 문자 그대로 여기의 144,000명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간주하는 해석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각지파의 구분이 신약시대에는 족재하지 않는다고 인정이 된다. lO지파는 북왕조가 멸망한 이후 구분이 사라져 포로지에서 흩어져 버렸고, 남왕조의 유다지파만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더우기 이러한 지파개념으로 사람의 수를 헤아리는 방법이나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원의 또 다른 개념으로 등장시키는 것은 신약성경에서 더이상의 지지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를 육체적인 이스라엘로 보는 것은 무리이다.

 그렇다면 자연히 두번째로 이 해석은 새 이스라엘인 교회라고 보는 입장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열두 보좌에 앉아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19:28.눅22:30)고 하셨고,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자가 참 유대인이며(롬2:29), 교회는 하나님의 이스라엘(갈6:16)이라고 기록을 하였다. 야고보는 신앙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약l:1)라고 하였고, 베드로는 신자들을 “택하신 즉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라는 이스라엘에게 사용된(출19:6) 용어를 통하여 불렀다(벧전2:9).
 그러므로 사도요한이 들은 숫자는 영적인 이스라엘인 교회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3절에서는 우리 하나님의 종들이라고 불리우는 것이며, 동시에 9절 이하에서 직접 그 무리를 볼때에 각 나라에서 나온 큰 무리라는 말과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지 않는가?
 그러면 144,000이란 숫자는 어떻게 나온 것인가? 이것은 각지파의 12,OOO명의 숫자에 12지파를 곱한 것이다. 12,000이라는 숫자는 12 X l,000 이라는 것으로 구성이 되는데 이는 완전한 무리들을 나타내는 방법이다.

 각 지파의 이름들에 대하여서는 여러가지 견해들이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 지파들이 무려 18가지 다른 방법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함이 좋을 것이다. 그 중에 몇 부분을 비교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요한계시록      창세기     에스겔
      유다           르우벤       단
    르우벤           시므온      아셀
       갓             레위       납달리
     아셀             유다       므낫세
   납달리            스불론      에브라임
   므낫세            잇사갈      르우벤
   시므온              단        유다
     레위              갓        베냐민
   잇사갈             아셀       시므온
   스불론           납달리       잇사갈
    요셉              요셉       스불론
    베냐민          베냐민         갓

 장자가 아닌 유다가 먼저 기록이 된 것은 메시야가 유다지파의 사자이기에(5:5) 먼저 등장한 것 같고, 므낫세는 나오는데 에브라임 빠진은 아버지인 요셉이 들어가 있음으로 빠진 것이 아니고, 단지파가 빠것은 맨먼저 단지파가 기업을 포기하고 우상숭배에 빠진 배교자의 모습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삿18:30). 그러나 가장 본질적인 모습은 그저 12지파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지 어느 지파가 빠졌느냐에는 큰 관심이 없다.

②사도요한이 눈으로 저들을 봄
 이제 장면은 들음에서 보는 것으로 9절 이하에서 나온다. 거기에 나타난 모습들이 앞에 나온 144,000명과 다른 무리인가,아니면 같은 무리인가에 대하여 여러가지 견해들이 있으나 앞의 내용이 6:17절에 대한 설명이라면 아직도 그것과 연결된 대답으로 보는 것이 정당할 것이요, 그렇다면 두 부류의 무리가 아니라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요한이 들은 144,000명은 누구인가?
(계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그들은 단순한 혈통적인 유대인이 아니라 오히려 각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오는 보편적 존재들이며, 문자적인 144,000이 아니라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였다. 이는 분명히 구원받은 교회를 가리키는 내용이다. 그래서 144,000명을 14:4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계14: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저들의 수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것이다(창15:5,32:12).

③장로의 설명을 들음
(계7:13)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계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우리는 위에서 나타난 모습에 대하여 구체적인 설명의 구절을 찾아 보지는 못하였으나 이제 대화체로 저들이 설명된다. 저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두가지 설명을 하고 있다. 하나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요(현재의 상태), 다른 하나는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하였다(과거의 경험)는 것이다.
 여러가지 설명이 이 말씀으로 인하여 주어지나 그대로 보면 의미는 이러하다.
 먼저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은 사건은 과거의 일이다. 성도들이 깨끗한 옷을 입어야 함에 대한 상징은 시내산에서 여호와를 맞이하기 위하여 옷을 깨끗히 함에서부터 나온다(출19:l0). 그런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이 씻음을 받아 하나님 앞에 설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면 현재의 상태는 어떠한가? 바로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다. 여기의 환난이 관사가 있다고 독특한 어떤 환난(속칭 7년 대환난개념 같은)이 아니다. l:9에서도 일반적인 환난에 대해서도 관사가 붙어있다. 그러므로 여기의 환난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안에서 당하게 되는 환난을 가리킨다(행14:22,마5:10-12,요6:33). 본 구절의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온갖 고난과 시험들을 겪는 성도들을 끝까지 지켜 주셔서 승리의 영광의 길에 이르도록 하신다는 사실이다. 결코 주님은 아버지께서 지신에계 주신 자를 한 사람이라도 잃어 버리지 않으시는 것이다(요6:39).

 결국 인침을 받은 자는 어느 한 시대의 어떤 독특한 사건을 위한 특별한 어떤 사람을 위한 조치라기 보다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의 백성 전부에 대한 표현이며, 그 인침은 성령의 인치심이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신실한 보호를 보증한다.

3.인치심의 결과는?

1]진노를 이기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섬
(계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이는 바로 6:17의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이다. 저들은 진노를 넉넉히 이기고 어린양 앞에 서 있다. 그리고 흰옷을 입고 여려가지를 들고 있다. 분명히 진노의 큰 날을 이기고 승리한 자들이다.

 이제 여기서 다시 하늘의 동심원에서 바라보던(4,5장) 찬양의 모습이 다시 나타난다. 이제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찬양이 나온다.
(계7:10)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근본적인 내용은 구원에 대한 감사이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구원의 위대성(인치심의 의미)이 하나님께 있음을 찬양하는 것이다. 어느 누가 진노를 이기고 참된 승리자의 구원을 줄 수 있는가? 오로지 하나님과 어린양이시다.
 *찬송가 204장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이 찬양에 대한 천사들의 화답이 나온다.
(계7: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계7:12)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찌로다 아멘 하더라
 *여기서 장로들이 구원받은 성도들과 구별되어 있음을 주의하라!
 천사들이 성도들의 구원의 찬송에 아멘으로 화답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 찬양의 내용은 5장의 찬양부분을 참조하라.

2]인치심 받은 자들이 누리는 결과(삶)
 15절 말씀부터 시작하여 놀라운 결과들이 나온다. 이 영화로운 모습이 언제 일어날 것인가에 대하여서 여러가지 해석들이 있다. 대개 이 부분이 21장에서 반복이 되기에 앞으로 영광스러운 상태 묘사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고, 인의 사건을 병행법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보는 사람은 이 부분이 부활을 기다리는 중간기의 영혼의 상태라고 보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분명히 지금도 적용을 시킬 수 있는 내용들임을 기억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의 본질적인 목적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중에 영원히 거하게 되는 사건이 확실히 결정된 사건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내용은 본문에서 세가지 정도로 묶어 볼 수가 있다.

 ①즐거운 봉사의 삶
(계7: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 낮 하나님을 섬기매.....
 우리가 흔히 주 안에서 누리는 안식에 대하여 생각을 하다보면 은퇴생활이나 무위도식하는 생활로 착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은 이제는 온전히 그분이 기뻐하시는 봉사를 하면서 사는 생활이다. 이제 그가 있는 곳이 어디이든지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보좌 앞이요, 바로 하나님이 계신 성전이다. 이제 그는 밤낮(쉬지 않고 중단이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인 것이다.

②영원한 안전
(계7:15) ..........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계7:16)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찌니
 구약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함께 거하시신다고 약속하고 있다(겔37:27,슥2:10). 하나님께서 그의 임재로 그들을 보호하시는 것이다. 장막을 치시는 상징은 광야에서 성막(레26:), 구름기둥과 불기둥(출13:21-22),임재의 영광(출40:34,대하7:l-3)등에서 볼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이 직접 임재하심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감싸주고 보호하심을 보여준다(사4:5,6).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과 저 하늘나라 중에서 어느 곳이 더 안전한가? 그 대답은 똑 같다. 단지 이 세상이 더 고통이 있고,그곳은 더 행복한 상태일는지는 모르나 더 안전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완전히 안전한 상태에 이미 거하고 있다(시91:l,5,6,요l0:29.30).

③완전한 만족의 삶
(계7: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우리의 삶은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삶이며(사49:l0),눈물을 씻겨주시는(사25:8) 완전히 만족한 삶이다. 이는 단순히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의 상태가 고난이지만 내적인 성령안에서 누리는 그 평안과 만족은 영원하다.
 요한격시록 제 7장을 통하여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이기는 자를 보았다. 그들은 바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죄에서 해방되었고(칭의-14하), 현재 환난 가운데 살지만 거룩을 지키며,확실한 영화로운 삶을 얻은 자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신앙인의 모습이라는 사실이 우리로 감사와 찬양이 울려나오게 하지 않는가?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공지 호크마 주석과 강해
22 요한게시록 호크마 주석, 요한계시록 01장
21 요한게시록 호크마 주석, 요한계시록 02장
20 요한게시록 호크마 주석, 요한계시록 03장
19 요한게시록 호크마 주석, 요한계시록 04장
18 요한게시록 호크마 주석, 요한계시록 05장
17 요한게시록 호크마 주석, 요한계시록 06장
» 요한게시록 호크마 주석, 요한계시록 07장
15 요한게시록 호크마 주석, 요한계시록 08장
14 요한게시록 호크마 주석, 요한계시록 09장
13 요한게시록 호크마 주석, 요한계시록 10장
12 요한게시록 호크마 주석, 요한계시록 11장
11 요한게시록 호크마 주석, 요한계시록 12장
10 요한게시록 호크마 주석, 요한계시록 13장
9 요한게시록 호크마 주석, 요한계시록 14장
8 요한게시록 호크마 주석, 요한계시록 15장
7 요한게시록 호크마 주석, 요한계시록 16장
6 요한게시록 호크마 주석, 요한계시록 17장
5 요한게시록 호크마 주석, 요한계시록 18장
4 요한게시록 호크마 주석, 요한계시록 19장
3 요한게시록 호크마 주석, 요한계시록 20장
2 요한게시록 호크마 주석, 요한계시록 21장
1 요한게시록 호크마 주석, 요한계시록 22장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

All the Bibles, Commentaries and Dictionaries here have their own rights.
All rights are reserved for them, not for us. Thanks! Praise our great God, Christ Jesus!

HANGL Lingua Franca 한글 링구아 프랑카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