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요한계시록 0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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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 '에베소'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1)상업상으로는 매우 중요한 교역의 중심지로서 소아시아에서 제일 부유한 도시이며 유프라테스에서 라오디게아를 경유하여 에베소까지 이르면서 동방의 산물이 종착하는 곳이었다. (2)종교적으로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데미(Artemis) 여신상이 있어서 미신이 성행하였으며 황제 숭배가 행해지던 부도덕한 곳이었다. (3)정치적으로는 로마로부터 자치권을 인정받아 '스트라테고이'(Strategoi)라는 독자적 행정관이 있었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통치 기관으로서 '불레'(Boule)라는 민회관과 순회 재판소가 있었다. 따라서 명목상 '버가모'가 소아시아의 수도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에베소가 소아시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Mounce, Kraft, Kiddle). 이러한 에베소에 기독교 신앙이 전파된 것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또한 바울이 이 에베소 지역에 2년 간 머무르며 목회하였고 후에 디모데가 바울의 열심을 본받아 목회 활동을 함으로 예루살렘과 안디옥에 이어 기독교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행19장; 딤전1:3, Ironside). 한편 '사자'는 그리스도에 의해 책임을 갖고 교회를 수호하는 하늘의 천사들을 가리킨다(Johnson, 1:20주석 참조).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 본문은 에베소 교회에 계시된 그리스도의 모습에 대한 묘사이다.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에서 '붙잡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라톤'(* )은 단순히 '잡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요동할 수 없도록 확실하게 움켜쥐고 있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호하시고 통치하시며 지배하고 계심을 시사한다(1:13,16,20). 한편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 역시 그리스도께서 교회들을 사랑하고, 능력 가운데 교회에 임재하고 계심을 암시한다(Mounce, Johnson, Clarke).

=====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 '행위'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르가'(* )는 포괄적인 의미로 전체적인 삶의 모습을 말하며(요3:19,20; 5:36; 요일3:8), '수고'의 헬라어 '코폰'(* )은 단순한 노력의 차원이 아니라 고통스런 노동을 동반할 최선의 삶을 가리키고(롬16:12; 고전15:10), '인내'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모넨'(* )은 '아래'를 의미하는 '휘포'(* )와 '머물다'를 의미하는 '메노'(* )의 합성어로 어떤 어려움도 개의치 않고 적극적으로 극복해 나가는 확보 부동함을 나타낸다(약1:3, Lenski, Morris). 이런한 '행위'와 '수고'와 '인내'의 항목에 대해 혹자는 살전 1장과 연결시켜 '믿음의 행위',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로 해석하여 각각 독립적인 덕목이라고 주장하며(Rist), 혹자는 '수고'와 '인내'를 '행위'의 내용으로 해석한다(Mounce, Johnson, Charles, Moffatt, Plummer). 두 가지 견해 중 헬라어 구문상 후자가 더 타당하다. 한편 '알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다'(* )는 단순히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나타내는 '기노스코'(* , '알다')와는 달리 직관적으로 아는 생득적(生得的) 지식을 가리킨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가 행하는 수고와 인내를 모두 알고 계심을 나타내므로 그리스도의 전능성을 시사한다(9,13절; 3:1,8,15, Sweete).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 본문은 에베소 교회가 가졌던 고상한 영적 분별력을 말한다. 여기서 '악한 자들'(* , 카쿠스)은 관사 없는 복수 명사로 문자적으로 '악한 것들'을 뜻한다. 이 말이 정확하게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으나 대체적으로 에베소에 있던 거짓 사도 혹은 거짓 교사들을 가리키는 듯하다(Mounce, Johnson, Ladd, Greijdanus). 이들은 자칭 사도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가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주의자들로 본다(고후11:13-23, Spitta). (2)혹자는 바울의 제자들로 간주한다(Holtzmann). (3)혹자는 '니골라당'으로 본다(Bousset, Charles), 이 중 세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6절에 에베소 교회가 미워하던 거짓된 자들인 니골라당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행20:28-30; 고후11:13; 갈1:8,9).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은 예수를 부인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주장하는 교리나 확신을 통해서 이익을 추구하였다(고후 11:13,15; 12:11). 교회는 자칭 사도라 하는 이런한 거짓된 자들의 거짓을 구별할 필요성이 있었고, 에베소 교회는 훌륭한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들의 열매'를 통해(마7:20) 거짓을 분별하고 모든 사람들이 알도록 그들의 거짓을 드러냈다(고전14:29; 살전5:21; 요일4:1; Johnson, Mounce).

=====2: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 본절은 앞절에 나타난 사실을 반복하여 더욱 강조함과 동시에 에베소 교회의 신앙의 정절을 나타낸다. 당시 교회는 황제 숭배 강요 때문에 심한 박해 가운데 있었고,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이단들의 내적 도전들이 많았으나 에베소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잡고 복음에 확고히 서서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들의 신앙을 굳게 지켰다.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 본절은 에베소 교회에 대한 책망을 나타낸다. '처음 사랑'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 이다. (1)혹자는 에베소 교인들이 가졌던 기독교적인 사랑 즉 형제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행20:35; 엡1:15, Vincent, Plummer, Charles, Moffatt, Rist, Kiddle). (2)혹자는 처음 그리스도를 영접하면서 가졌던 그리스도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cott).에베소 교인들은 자신들의 교회에 있던 거짓 사도들을 분별하느라고 형제를 의심하고 엄격하게 구별함으로 형제에 대한 사랑이 식어졌다(Barclay, Mounce, Ladd).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형제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막12:29ff., Beasley-Murray, Johnson).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형제 사랑을 동반하기 때문에 진정한 기독교적 사랑은 어느 하나라도 무시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두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한편 '버렸느니라'에 해당하는 '아페카스'(* )는 부정 과거로 단회적 행동을 나타내어 에베소 교인들이 그들이 가졌던 처음 사랑과 완전히 단절되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본문은 에베소 교회가 교리적(敎理的)으로 칭찬할 사실이 있다 할지라도 생명 없는 형식주의로 전락하여 사랑을 상실했음을 단호하게 책망하고 있다(Alford, Johnson).

=====2:5
 본문은 에베소 교회의 책망을 돌이킬 수 있는 방법 세 가지를 명령어를 사용하여 제시한다. 이러한 세 가지 명령은 에베소 교인들을 보호하시려는 그리스도의 단호한 명령이며 권고이다.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 이것은 죄의 원인을 깊이 생각하되 과거와 현재의 차이를 생각하라는 명령이다. 여기서 '생각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므네모뉴에'(* )는 현재 능동태 명령형으로 '계속하여 생각하고 회상하라'는 의미이다.(눅15:17-22). 에베소 교인들은 잃어버린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그것을 어디에서 무엇으로 인해서 상실하게 되었는가를 상고해야만 한다.
 회개하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타노에손'(* )은 부정 과거 명령형으로 단번에 결정적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이다(마3:2; 눅15:20). 처음 행위를 가지라 - 에베소 교인들은 특별히 회개하여 돌아가되 무분별한 사랑이 아닌 그들이 가졌던 처음의 사랑으로 돌아가야 한다(Kiddle, Moffatt). 여기서 '가지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이에손'(* )은 '행하다'는 의미를 가진 '포이에오'(* )의 부정 과거 능동태 명령형으로 '지금 즉시 행하라'는 말이다(마 3:8, Robertson, Johnson, Mounce). 에베소 교인들은 지금 즉시 처음에 그리스도에 대해 가졌던 사랑으로 형제들에게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 본문은 그리스도의 권면을 외면했을 때 초래할 결과에 대한 진술이다. '내가 네게 임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르코마이 소이'(* )는 미래적인 현재 능동태로 예언적인 사실의 확실성을 나타낸다(22:20; 요14:13; 요일2: 18). 그러기에 혹자가 주장하는 대로 '그리스도의 재림'때의 사건으로 해석하는 것보다는(Clarke), 오히려 회개치 않을 경우 맞게 될 현재적 심판을 선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Morris, Charles, Alford, Plummer). 한편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에베소 교회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게 될 것이라고 해석한다(Ramsay). (2)혹자는 당장 있게 될 지금의 심판을 말하는 것으로 에베소에서 교회가 없어지고 그 도시 전체가 황폐화할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요 15:6; 엡1:22, Mounce, Greijdanus, Charles). 두 가지 해석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문맥상 현재에 임할 그리스도의 심판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2: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 '니골라당'에 관해서는 본서 이외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이것의 기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된다. (1)역사적으로 이는 사도행전에 언급된(행6:5)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인 니골라가 타락하여 만든 이단이라고 추측한다(Irenaeus, Tertullian, Alford). (2)언어적으로 '니골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니콜라이톤'(* )은 '백성'을 뜻하는 '라오스'(* )와 '없애다' 혹은 '정복하다'를 의미하는 '니카오'(* )의 합성어로 구약성경에 기록된(민22:12) '발람'(* , '백성을 이긴')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발람의 행위와 동일시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파괴하는 거짓 무리들로 추측한다(Bousset,Cha- rles, Trench, Ewald).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는 바와 같이 니골라당은 발람의 교훈을 따른 자들로 이해된다(14,15절).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 본문은 예수께서 지상 사역 중 반복해서 내리신 명령이며(마11:15; 13:9,43; 막4:9,23; 눅8:8; 14:35), 본서에서 일곱 교회를 향한 서신의 결론적 어구로 반복된다(11,17,29절; 3:6,13,22), '귀 있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에콘 우스'(* )는 개교회 전체에 속한 청중들 모두를 가리키는 것으로(11,17,29절; 3:6,13,22) 여기서 '귀'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며 통역하시는(Swete) 그리스도의 영이요(Beckwith) 예언의 영인(Kiddle) 성령의 권면을 들을 수 있는 귀를 나타낸다. 한편 '교회들에게'(* , 타이스 여클레시아이스)는 복수로 각 교회들에게 보내진 서신 맨 끝에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문구이다. 이는 이 편지들이 특정한 한 지역 교회에 보내진 것이 아니라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보편적인 교회를 향해 보내진 것임을 시사한다(Lenski, Hughes).
 이기는 그에게는 - 본문은 그리스도의 권면대로 행하여 승리한 자들에게 주어진 약속이다. '이기는 그에게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니콘티'(* )는 관사가 있는 현재 능동태 분사로 계속해서 이기는 자를 가리키며 본서와 복음서에서 여러번 반복되는 문구이다(17,26절; 3:5,12,21; 5:5; 12:11; 15:2; 17:14; 요16:33; 요일2:13). 또한 이 말은 군사적인 용어로 그리스도와 사단의 타협없는 대결상을 잘 묘사한다. 즉 사단과 대결하여 끝까지 그리스도에게 충성한 자를 나타낸다(Mounce).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 '낙원'의 헬라어 '토 파라데이소'(* )는 페르시아에서 유래된 말로 일차적으로는 인류 최초의 거주지였던 에덴 동산을 암시하며(창2:8-10) 궁극적으로는 구원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하나님 나라 자체를 의미한다(22:1-4,14; 눅23:43, Morris, Robertson, Johnson). 한편 '생명나무의 과실'은 죽음과 고난이 존재하지 않는(22:2) 영생(永生)을 상징한다(Johnson, Mounce, Ladd, Beasley-Murray). 그리스도의 권면대로 회개하여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에베소 교인들은 첫창조 때에 에덴 동산이라 했으며 종말론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할 예루살렘 즉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게 되며,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접근조차 할 수 없었던 생명나무 즉 영생을 영원히 누리게 될 것이다.

=====2: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 '서머나'는 에베소 북쪽 약 80km 지점에 있었고, 당시 인구가 약 20-30만 정도로 소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 도시였다. '서머나'란 말 가운데 '머'(Myrrh)는 '유향'이란 뜻으로 이곳은 향료 수출지로도 유명하였다. 또한 이곳은 호머(Homer)의 출생지이며 학문, 특히 과학과 의술이 발달한 도시였다. 종교적으로는 이교 문화와 종교의 집합처로 황제 숭배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서머나는 소아시아 도시들 가운데서 지리적으로나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그로 인해 복음이 순수하게 전달되지 못하고 황제 숭배가 성행하는 등 혼합화와 박해가 뒤따른 도시였다(Johnson, Kraft). 한편 '서머나 교회'에 대해서는 본 서신 외에 잘 알려진 것이 없으며 다만 '폴리갑의 생애'에서 바울이 이곳에 전도하였다고 전한다(Eusebius). 그리고 사도 요한의 제자이며 서머나 교회의 초대 감독이었던 폴리갑(B.C.155-166)이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 '처음이요 나중이요'는 1: 17,18의 반복된 표현이다. 이는 우주를 창조하시고 역사 전체를 지배하시며 태초에도 계셨으며 역사의 종말에도 계신 그리스도의 주권을 나타낸다. 한편 '죽었다가 살아나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스에게네토 네크로스 카이 에제센'(* )은 두 부정 과거 시제가 사용된 표현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역사적이며 단회적으로 일어났던 사건임을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계시하신 것은 투옥과 사형의 핍박 가운데 있는 서머나 교회 교인들에게 소망을 주시기 위함이다(Johnson, Lenski).

=====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 '환난'에 해당하는 헬라어 '들마신'(* )는 '무거운 물건 밑에서 눌려 부서지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신앙으로 말미암아 받는 외부적 핍박을 시사한다. 또한 '궁핍'의 헬라어 '프토케이안'(* )은 '외적 핍박으로 생긴 물질적인 빈곤'을 나타낸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황제 숭배를 거절함으로 당한 경제적 제재나 적대 감정을 가진 유대인이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당한 경제적 어려움을 가리킨다(Johnson, Ladd).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 서머나 도시 자체는 부요한 도시였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는 온갖 핍박으로 인해 실제적으로 궁핍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서머나 교회를 향해 부요하다고 인정하신다. 이것은 육신적으로는 궁핍하나 내적으로 정결하고 부요함을 의미한다(눅12:21; 고후6:10; 딤전6:17,18; 약2:5). 이는 외적으로는 부요하나 내적, 영적으로 궁핍했던 라오디게아 교회와 정반대이다(3:17).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 서머나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는 서머나의 유력한 위치에 오른 자들이 많아서 기독교를 박해하고 방해하였다. 예를 들면 황제 숭배를 이용하여 거짓된 말로 로마 제국을 충동해서 서머나의 감독이었던 폴리갑을 처형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고 그들이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손인 것을 천국 시민권으로 오해함으로 더욱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였다. 실제로 초대 교회 여러 이단들과 잘못된 사상들 가운데 유대주의는 가장 포괄적이며 무서운 기독교 진리의 훼방자였다(Moffatt, Johnson, Kraft).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하여 하나님의 선민임을 자랑했던 서머나의 유대인들은 사실상 진정한 유대인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진정한 유대인은 혈통(血統)에 의한 표면적 유대인이 아니고 그리스도에의한 이면적 유대인이기 때문이다(롬2:28,29). 서머나의 유대인은 도리어 사단의 회였다. '사단의 회'는 자칭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여호와의 총회'라 했으나(민14:27,35) 그들의 실체는 사단의 자식이며,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적대자임을 시사한다(요8;31- 47). 그들은 교회와 복음을 방해하며 교인들을 핍박하였다. 이들에 대한 언급은 본서 전체에서 자주 나타난다(13절; 3:9; 9:11; 12:9,10,12; 13:4; 20:7,10 Johnson).

=====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 서머나 교회에 대한 서신에서는 책망과 심판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고 곧바로 권면 즉, 곧 있게 될 고난을 상기시키며 두려워 말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보아 당시의 신자들이 장차 임할 핍박과 고난을 생각하고 두려워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 본문은 장차 서머나 교인들이 받게 될 핍박의 내용이다. 서머나 교인들을 핍박하는 것이 유대인이든 당시 정부이든 간에 그 핍박의 주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였다. 마귀는 서머나 교인들을 시험하기 위해 몇몇 사람을 감옥에 넣을 것이었다. 한편 '시험을 받게 하리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스데테'(* )는 '유혹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련을 통해서 '시험하다'는 뜻으로 감옥에서 받을 온갖고난이나 핍박을 의미한다. 이러한 고난과 핍박을 그리스도인들은 감수해야 하며 심지어 순교로까지 자신들의 신앙을 증명해야 한다.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 본문은 환난의 기간을 나타낸다. '십일 동안'의 헬라어 '헤메론 데카'(* )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십일은 짧은 기간을 가리키거나 실제로 열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창24:55; 민11:19; 단1:12,14; 행25:6, Alford, Charles, Plummer, Johnson, Kiddle, Beasley-Murray, Ladd). (2)혹자는 십일은 극단적이면서도 완전한 환난을 상징하고 긴 기간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민14:22; 욥19:3, Mounce, Summers). 두 가지 견해 중 전자가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십일은 짧은 기간을 나타내는 셈어적 표현이기 때문이다(Johnson, Moffatt)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누 피스토스 아크리 다나투'(* )에서 '기누'는 '기노마이'(* , '되다')의 현재 중간태 명령형으로 과거의 순교자들이 순교하기까지 충성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드러냈던 것처럼 서머나 교인들도 죽기까지 신앙을 지켜야 함을 시사한다. 이것은 당시 극심한 황제 숭배 강요 속에서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던 교인들을 향한 단호한 명령이다. 한편 '생명의 면류관'은 죽기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고 신앙의 정절을 지킨 자에게 주어진 상급이다. '면류관'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 (1)'디아데마'(* )로 '왕관'을 의미한다. (2)'스테파노스'(* )로 운동 경기에서 승리자에게 주어진 '승리의 관'을 의미한다. 두 가지 중 본문에 사용된 면류관은 후자에 해당되는 것으로 운동 선수가 경기에서 끝까지 싸워 승리하 듯이 온갖 핍박에서 신앙의 정절을 지킨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을 가리킨다. 성경은 '생명의 면류관'(약1:12) 외에도 '썩지 않는 면류관'(고전9:25), '자랑의 면류관'(살전2: 19), '의의 면류관'(딤후4:8), '영광의 면류관'(벧전5:4) 등을 그리스도인이 받을 상급으로 진술하고 있다.

=====2:11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 본문은 앞절에서 언급된 생명의 면류관과 연결된 것으로 승리자에게 주어진 약속을 나타낸다. '둘째 사망'은 탈굼에서 유래한 것으로 유대인에게는 아주 친숙한 용어였다(Johnson, Beasley-Murray). 이것은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 모두가 직면하게 되는 육체적 사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비그리스도인이 당할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分離) 곧 영원한 죽음을 가리킨다(Ladd). 그리스도인들의 최후에 비그리스도인이 당할 불못 즉 영원한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20:14; 21:8). 이러한 그리스도의 약속은 순교에 직면한 서머나 교인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2: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 '버가모'는 서머나 북쪽 약 100km되는 곳에 위치한 수도로 주전 130년 경에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곳은 에베소와 서머나가 상업적으로 아시아의 중심 역할을 한 반면에 문화적인 측면에서 아시아의 중심부 역할을 했다. 그래서 의학교가 있었으며 장서 20여 만권을 소장한 도서관이 있었으며 책을 만드는 종이인 양피지의 생산지였다. 종교적으로 치료의 신으로 이해되었던 '아에스쿨라피우스'(Asclepius)라 불리는 뱀신과 주신인 '제우스'(Zeus), 그리고 아테네 신전 지도자 '디오니소스'(Dionysos) 등을 숭배하는 우상 숭배지였다.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 본문은 버가모 교인들에게 계시된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1:16의 반복이다. '검'은 권위와 능력을 가진 심판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으로 버가모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과 니골라당을 대적하여 심판하실 것임을 시사한다(16절, Mounce, Lenski).

=====2:13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 '네가 어디 사는 것'은 단순히 버가모 교인들이 버가모에 살고 있는 것을 안다는 의미보다 버가모 교인들이 지금 처하여 있는 어려움을 안다는 의미이다. 버가모가 황제 숭배와 온갖 우상 숭배의 중심지였기에 그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당하는 고난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고난을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심으로 위로하신다. 한편 '사단의 위'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혹자는 버가모 지역의 대표적인 우상 신전 중 특별히 제우스 제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Deissmann). (2)혹자는 버가모 도시 자체가 언덕처럼 생겨서 평원 위로 솟아오른 모습이 하나의 제단처럼 보였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본다(Wood). (3)혹자는 버가모가 이방신과 황제 숭배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Johnson, Mounce, Alford). 세 해석 중 마지막 해석이 가장 타당하다.사실상 버가모는 황제 숭배를 비롯한 모든 우상 숭배의 중심지였다.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 '굳게 잡아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라테이스'(* )는 '크라테오'(* , '붙잡다')의 현재 능동태 시상으로 '계속해서 굳게 잡았음을 의미한다(25절; 3:11). 따라서 이것은 여러 가지 우상과 황제 숭배의 강요 가운데서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한편 본절에는 고난과 순교 가운데서도 신앙을 저버리지 않은 한 사람 안디바를 제시한다. '안디바'( , 안티파스)는 '모든 것에 대적하는 자'란 의미로 그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로 나뉜다. (1)이름의 의미 자체가 밝히는 것처럼 어느 개인이 아닌 당시 순교자 전체에 대한 지칭이다. (2)당시 버가모에서 최초의 순교자든지 아니면 위대한 어떤 순교자를 지칭한다. 두 가지 추측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터툴리안은 '안디바'가 버가모 교회의 명성 높은 감독으로 황제 숭배 거절로 인해 불에 타 순교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Moffatt).

=====2: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 분문은 버가모 교회가 내부적으로 분열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즉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으로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지만 반면 부분적으로는 발람의 교훈을 좇는 자들이 있었던 것이다(6절). '발람'은 어원적으로 '백성을 정복하라'는 의미의 '니골라당'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6절 주석 참조).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 분문은 버가모 교인들이 따랐던 발람의 교훈에 대한 설명이다. 발람의 교훈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이방사람들 잡혼(雜婚)을 하게 하고 우상 숭배하는 일에 타협케 한 것을 가리킨다(민22-25장; 31:8,16). 발람은 발락의 청구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정면으로 저주하지는 않았으나 모압 여인을 통해 이스라엘을 유혹하게 하여 음행케 함으로 이스라엘 백성 중 수만 명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죽게 하였다. 이러한 '발람의 교훈'은 신약성경에서(벧후2:15; 유1:11), 혹은 유대 역사에서 늘 경계의 표적으로 언급되었다. 이처럼 당시 버가모도 특히 우상 숭배가 많은 지역이었고,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형식으로 세상과 타협하였다. 따라서 본문은 버가모 교인들이 우상 숭배에 동참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혼합화된 현상은 정죄받을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Bousset, Plummer, Johnson, Charles, Kiddle).

=====2: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 '이와 같이'는 앞절에서 언급된 발람의 교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절에서는 언급되는 '니골라당의 교훈'과 '발람의 교훈'이 동일한 것임을 암시한다.

=====2: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 본절은 발람의 교훈과 동일한 니골라당의 교훈에 빠져있는 버가모 교인들에 대한 권면과 그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생겨날 일에 대한 경고이다. 그 권면은 '회개하라'는 것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회복할 것을 의미한다. 만약 회개하여 신앙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심판이 임하게 된다.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에서 '임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르코마이'(* )는 미래적인 현재 중간태 시상으로 지금 그리스도께서 임하고 있다는 현재성과 김급함을 나타낸다(5절; 3:11; 11:14; 22:7,12,20,Johnson). 한편 '내 입의 검'은 '심판의 말씀'을 의미한다(19:15). 마치 하나님이 발람의 추종자들을 칼로 심판하셨던 것처럼(민31:8) 우상이나 황제 숭배와 타협하는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의 검으로 심판하실 것임을 시사한다(엡6:17; 히4:12).

=====2:17
 본절은 권면을 듣고 그대로 행함으로 신앙을 지킨 승리자에게 주어진 약속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 '감추었던 만나'는 후손들을 위해 언약궤 안에 두었던 만나 항아리가(출16:32-34; 히9:4) 솔로몬의 성전이 파괴될 때에 예레미야 혹은 천사에 의해 감추어졌다가 장차 메시야 왕국에서 공개 된다는 유대 전설을 반영한 것으로(마카비하2:4-6; 바룩29:8) 이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혹자는 만나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유지할 삶의 능력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Swete). (2)혹자는 '감추었던'이란 말은 이 세상에 없고 하늘에만 있다는 의미로 보아 하늘에서만 먹는 양식으로 해석한다(Meyer). (3)혹자는 '감추었던 만나'는 신령하고 참된 양식으로 생명의 양식이신 예수를 통해 주어지는 것으로 해석한다(Greijdanus, Charles, Johnson, 요6:33,39,48).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즉 '감추어진 만나'는 생명나무의 열매와 마찬가지로(7절) 하나님께서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나라에서 주실 영원한 생명을 상징한다(Beasley-Murray).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 승리한 버가모 교인들에게 두번째로 주어질 것은 새 이름이 기록된 흰 돌이다. 여기서 '흰'것과 '새'것은 장차 천국에서 맞게 될 모습을 상징하는 것으로 본서에서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이다(1:14; 3:4,5,18; 4:4; 6:2,11; 7:9,13,14; 19:11,14; 20:11; 21:1,2,5 Trench, Charles, Plummer). 이 '흰 돌'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이다. (1)혹자는 '흰 돌'을 이방의 미신 사상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아 황제 숭배 사상과 관련있는 것으로 해석한다(Moffatt). (2)혹자는 만나가 하늘에서 내린 것처럼 하늘에서 내린 흰 돌로 본다(Rist). (3)혹자는 당시의 풍습에서처럼 재앙을 막기 위해 사용한 흰 돌에다 알 수 없는 이름을 새겨 넣은 것으로 본다(Holtz- mann). (4)혹자는 재판 과정에서 배심원들이 사용한 무죄 표시의 흰 돌로 해석한다(Clarke, Bengel). (5)혹자는 하늘에서 내려온 것으로 대제사장의 흉패에 붙인 보석으로 본다(Trench). (6)혹자는 경기에서 승리한 자에게 우승의 기념으로 새겨 주었던 흰 돌로 본다(Zahn).(7)혹자는 연회장에서 초대의 표시로 사용한 흰 돌로 본다(Plumptre, Johnson). 이 가운데서 여섯번째와 일곱번째의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 '흰 돌'은 하나님 나라에서 신앙의 정절을 지킨 승리자에게 주는 상급이며, 영광스런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케하는 상급이다. 한편 '새 이름'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그리스도'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해석한다(Kiddle, Lohmeyer, Rist). (2)혹자는 '부활을 통해서 새로운 상태에 들어간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Beasley-Murray).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Johnson). 즉 세상에 감추어져 있으나 장차 드러나게 될 그리스도 자신의 이름이든지(3:12; 14:1), 아니면 구속받은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이름을 나타낸다.

 

 

*편지들의 구조

 에베소 교회에서부터 라오디게아 교회까지 소아시아의 7교회에게 보내는 편지로부터 제 1막의 내용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 내용의 본질은 제 1장의 본질에서 살펴야 할 문제이다. 그 편지들은 일정한 형식들로 구성이 되어 있다.

1]받는 이들에 대한 언급-교회의 사자
 이들에 대한 여러 가지 설명을 1:20의 해석을 참조하라.

2] 1장의 환상적 표현 중에서 택한 해설적 표현으로 저자를 밝힌다. 그분의 존재는, l장에서는 인자 같은 이로, 2:18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밝힌다. 각 표현과 1장과 비교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에베소-2:1,l:12,13,16. 서머나-2:8,l:17,18, 버가모-2:12,l:16. 두아디라-2:18,l:14
 사데-3:1,1:16, 빌라델비아-3:7,l:18 라오디게아 3:14.l:5

3]편지 서문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도입부에서 쓰던 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의 어투를 모델로 한 "......하시는 이가 가라사대"라는 말로 시작한다.

4]편지의 내용은 각각의 교회를 방문하고 쓴 보고서와 유사하다. 각 교회들의 행위를 검토하고 판단을 하는데, 여기에 행위라는 말은 삶의 태도, 행동, 습관, 활동, 이루어 놓은 업적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5]이 편지를 읽는 자들이 신중한 태도를 가지고 읽을 것을 요구한다. 복음서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공식적인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마11: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칭찬, 비난의 말씀을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과 동일시하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한 교회에 주신 편지도 "교회들"이라고 하심으로 그 편지를 다른 교회도 함께 읽고 조심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시며, 동시에 오늘 우리로 하여금 같이 살피게 한다.

6]인내할 것을 권면-회개를 권면함

7]승리하는 자에게는 약속이 주어진다. 이 약속은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하여 분투하고 인내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이는 운동경기에 임하는 선수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고전9:24-,딤후2:5-,히12:1,2 참조).

8]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받게 될 위로와 위협이 강조된다. 요한계시록 전체 서문과 끝맺는 말의 주제인 "그가 오시리니, 내가 오리니"(1:7,22:7,12,20)라는 말씀이 7교회에 보낸 편지 속에서 계속 나타난다. 서머나 교회에서는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지 앉지만 2:10의 생명의 면류관에서 추정될 수 있다.

 그러면 이 7교회는 어떠한 목적으로 주어진 것인가?
어떤 이들은 이 부분을 세상의 교회사의 묘사로 간주한다.
에베소 교회- 1세기 사도의 교회(-100년까지의 교회):처음에는 부흥하였으나 열심이 식어져 감
서머나 교회-4세기 초 콘스탄틴 대제가 국교화할때까지 박해받은 교회
버가모 교회-콘스탄틴 황제의 후원으로부터 4,5세기 국교 시대의 교회(교황권이 형성될 때까지)
두아디라 교회-교황 시대로부터 15,16세기의 종교개혁 시대까지
사데교회-16,17세기의 생기 없던 종교개혁 시대의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18세기의 복음주의 부흥과 개혁, 19세기 대선교 운동의 시대
라오디게아 교회-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의 계속될 미지근한 교회

 그러나 이 7교회에 보낸 편지는 보편적으로 모든 교회에게 강조적으로 주어진 문학적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7교회는 이미 사도 요한 당시 동시대에 다 존재한 교회가 아닌가? 그러면 이 첫 번째 막에서는 무엇을 주로 강조하는가? 그것은 제 1장의 내용과 연결이 되어서 2,3장을 보아야 한다.
 먼저는 부활의 주님께서 친히 교회의 머리로 계신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이 각 교회의 첫부분에서 강조가 되고 있다.
 다음으로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의 그 은혜 속에서 각자가 자신들의 행위에 답변해야 할 책임을 부활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성실히 수행하여야 한다.
 결국 본질적으로 교회에게 인내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도 각자에게 주어진 교훈과 우리 교회를 향한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이다.

제 1막 제 1장 에베소 교회
(계2: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계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계2: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계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계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계2: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계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1.받는 이들-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1)에베소 교회
 에베소 교회에게 제일 먼저 편지한 것이 아주 흥미롭다. 그것은 2,3세기의 자료에 따르면 사도 요한이 에베소 도시와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요한은 그의 생애 말기에 에베소에서 살았고 그 교회에서 가르쳤으며 그곳에서 장수하다가 죽었다고 알려졌다. 또한 에베소에서 60마일(약 100Km) 떨어진 밧모섬에 유배되었다. 에베소는 아시아 도에 있는 로마 정부의 행정 중심지로서 찬란한 건물과 도로, 여러 민족과 제의들이 혼합된 주요 도시였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대동하고 고린도(바울이 제 2차 전도 여행 중인 주후 52년)에서 에베소에 왔을 때 세웠으며 그후 바울은 에베소에 다시 와서 고린도 교회를 세우는 일을 위해 2년이상 그곳에 머물렀다(행18:18-,19:1-,20:17-).
2)교회의 사자-1:20 참조

2.환상적 표현으로 나타난 저자의 모습
 그의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계신-이것은 그가 교회 생활 중심에 계시며 교회의 사자들에 대한 그의 권세를 상징한다(1:20)-그리스도는 에베소 교회에 전달되는 이 메시지의 저자이시다. 그 그리스도께서 그 사이에 다니신다는 것은 그의 주되심과 활동적이고 역동적이며 은혜를 주시고 심판을 행하신다는 것과 그가 교회의 상태에 직접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예의 주시하고 계시다는 것을 가리킨다.

3.서문
 "......이가 가라사대" 이는 신적인 선언의 시작을 표현하는 중요한 말이다.

4.칭찬
 "내가... 알고" 주님은 교회 사이에 다니시며 모든 사실을 다 아시고 계신다. 그 주님은 항상 칭찬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①"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
 그의 교회 가운데 다니시는 주님은 그 교회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을 아신다. 일곱 교회 가운데 다섯 교회에 대하여 "내가 네 행위를 아노라"고 말씀하시며(에베소,두아디라,사데,빌라델비아,라오디게아) 다른 두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에도 그는 "내가 ...를 아노라"라든가 "내가 너의 환난을 아노라"(서머나)든지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버가모)라고 말씀하신다(2:9,13,19,3:1,8,15).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으시다"(요2:24,25).                                                  
 이 일곱 교회에게 보낸 편지가 확인하듯이 그는 각각의 교회의 문제와 상황과 부합된 단지 어떤 문제만이 아니라 선한 행위뿐만 아니라 악한 행위 등 모든 행위를 아신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도한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139:1-4). 사도 베드로도 이와 비슷하게 고백을 하였다. "주여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오니...."(요21:17).
                                                                              
 에베소의 경우 비난의 말이 있지만(4,5) 어조는 주로 칭찬하는 것이다. 에베소 교인들에게 쉬운 것이 아니었으나 그들이 역경과 핍박을 만났을 때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수고와 인내였다.

②(계2:2) .....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에베소 교회의 칭찬할 만한 요소는 자신들을 복음의 수종자, 특히 자칭 사도로 가장하는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사기꾼들은 사도적 권위를 가졌다고 주장하면서 예루살렘에서 왔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이들의 교훈과 행위를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의 교훈과 행위와 비교하여 시험해 보았고 그 결과 그들이 거짓되다는 것을 밝혀 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자기들이 입으로 고백하는 것과 같은 유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1세기의 사도 교회를 비롯하여 모든 세기의 교회는 설득력 있는 화술로써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속이는 자들이 잠입해 들어옴으로써 교회의 존립에 위협을 받아 왔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그의 제자들에게 거짓 선지자들과 심지어 거짓 그리스도가 일어날 것을 경계하라고 부탁하셨다(막13:22,마7:10,24:11,24).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사도로 사칭하는 행악자들과 싸워야 했고, 디모데에게 거짓말을 하는 외식하는 자를 경계하라고 당부했다(딤전4:2). 베드로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인 거짓 선생들에 대해서 언급하였다(벧후2:1). 요한도 다른 곳에서 많은 적그리스도가 이미 나타났다고 선언하고서(요일2:18) 정통적인 가르침에 대하여 반대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을 시험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셨음을 부인하는 것, 다시 말해서 초대 교회의 복음의 핵심을 위협한 이원론적인 이단의 특징이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표지로 낙인찍힌 교훈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그리스도 즉 참으로 하나님의 성육하신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자마다 기독교의 진정성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거짓 선생들이다(요일4:1-3). 오늘날도 동일한 시험을 잘 견지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본문에서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사도적 진리의 전달자라고 고백하면서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을 잘 시험하여 그들이 사기꾼인 것을 잘 밝혔기 때문에 칭찬을 받았다.

③(계2: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본문은 앞 절의 칭찬 내용을 되풀이하고 확증한다. 그들의 신앙이 참되다는 것은 그들의 인내와 오래 견딘 것으로 증명된다. 그들은 고통스러운 압제와 환난의 억압하에서도 투쟁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의 꾸준함의 비결은 그들이 모든 고난을 내 이름을 위하여 받았다는 데 있다. 자기들을 위하여 고난을 받았다면 그들은 금방 포기했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 중심적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는 고난이 하나님께 빚 갚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구주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셨기 때문에 자원하여 고난을 받은 것이다. 그들은 공적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감사의 표시로 고난을 받았다. 더욱이 그들을 주님을 위하여 환난과 모욕을 참으면 복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예수께서 친히 이렇게 선언하셨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마5:11). 사도들은 복음을 전파한 것으로 인해 매를 맞은 후에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였다"(행5:41).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분을 위하여 고난을 받고 견디는 것은 참기 힘든 어려운 길을 가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비교할 수 없는 영광에 이르는 길이다(빌2:8, 롬8:18,고후4:17).                  

5.책망
(계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칭찬 후에 꾸지람이 따른다.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각 교회의 상태는 그들 사이에서 행하시는 주님께 깊은 관심의 대상이었다(2:1). 꾸지람을 하지 않거나 비난을 하지 않는 것이 순전한 사랑의 표시는 아니다. 신랑 되신 그리스도는 그의 신부인 교회가 거룩하며 흠이 없기를 바라신다(엡5:25-27,고후11:2).              
                                                                              
 에베소 교회의 처음 사랑이 식었다는 것은 만사가 다 좋은 것은 아니라는 분명한 증거이다. 그러한 상황이 비참한 결과를 야기시킨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증명한다. "네 소년 때의 우의와 네 결혼 때의 사랑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광야에서 어떻게 나를 좇았음을 내가 너를 위하여 기억하노라 그때에 이스라엘은 나 여호와의 성물 곧 나의 소산 중 처음 열매가 되었나니...." 그리고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열조가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건대 나를 멀리하고 허탄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렘2:2-5). 환난 중에 견디되 사랑을 버려서는 안된다. 그 견딤은 사랑의 동기부여를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견딤은 기쁨이 없고 내향적인 것이 되기 쉽다. 사랑이 식는다는 것은 고린도 교회가 빠졌던 문제와 바른 길에서 이탈하게 되는 근원이 된다(고전1:10,13:1-). 요한이 언급하는 처음 사랑이란 주님께 전적인 헌신을 한 처음의 자발적인 사랑이며,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전적인 사랑에 대한 합당한 반응이다(롬12:1, 요일4:19). 이것이 요한이 권면할 때 그의 마음을 지배했던 주제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4:7,10,16).
 그러므로 처음 사랑이 식는다(감소한다)는 것은 경건이 감소한다는 표시이다.

6.권면-예수님의 상담
(계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처음 사랑이 떠난 것은 타락이다. 그것은 경건뿐만 아니라 실천적인 행동에서도 쇠퇴의 징조이다. 처음 사랑과 처음 행위는 같이 가기 때문이다. 행위는 사랑에서 우러나온다. 그러므로 처음 사랑이 없어졌다는 것은 비이기적인 열정과 기쁨에 찬 헌신에서 우러나는 처음 행위가 없어졌음을 의미한다. 처음 사랑을 되찾는 것은 처음 행위로 돌아가는 것이며 만일 그것이 하나님 앞에 바른 관계의 회복을 뜻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에베소 교회에게 필요한 것이다. 주님을 위해서 계속해서 수고하고 견디고 있긴 하지만 에베소 교회는 지금 쇠퇴 상태에 있으며 그래서 책망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떨어진 원래의 열정과 헌신을 기억하고 그 쇠퇴를 회개하고 그 처음 사랑으로 되돌아가라는 권면을 받는다.                  
                                                                              
 여기에 주님은 만일 에베소 교회가 회개하지 않으면 그가 와서 그 교회의 촛대를 옮기실 것이라는 사실을 덧붙이셨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우리는 여기사 다시 교회를 교회들과 구별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마16:18). 그러나 우리가 이 경고에서 배우듯이 이것은 어떤 특정한 곳에 있는 교회가 어두움 가운데 빠질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사실 에베소는 초창기에 밝게 빛난 지역 교회의 빛을 더 이상 볼 수 없던 많은 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교회의 증거의 밝은 빛은 모든 세기에 걸쳐 계속해서 빛나는 꺼지지 않는 빛이다. 왜냐하면 그 빛은 어두움 가운데 빛나며 흑암이 정복할 수없는 하나님의 빛이기 때문이다(요1:5).                  
                                                                              
 본문의 요지는 에베소 교회가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 교회의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신다는 데 있다. 이 말씀은 등장 또는 빛과 관련된 촛대를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말씀을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해 준다. 즉 전에 빛이 없던 곳이 어두움 가운데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다. 교회의 결점은 비단 그 교회뿐만 아니라 그 교회가 복음의 빛을 계속 비추어야 할 그 지역 사람들에게도 비극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계속 되며 그분은 그의 진리의 빛을 비출 다른 교회를 세우실 것이다.

(계2: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에베소 교회가 칭찬 받을 만한 것은 그들이 사도인 체하는 악한 사람들을 용납지 아니했다는 것(2:2)이었는데, 이제 다시 그들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한 것으로 인해 칭찬을 받는다. 이 니골라 당의 정체와 특별히 그 당의 지도자 또는 창당자인 니골라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2,3세기에는 이들이 사도행전 6:5에 언급된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니콜라우스(니골라)라 칭하는 안디옥 출신의 유대교 개종자에게서 그 당명을 취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 견해를 지지할 만한 확고한 증거는 없다. 분명한 것은 니골라 당이라 알려진 분파 또는 파당이 사도의 교회에 나타나서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행위의 통일성과 순결성을 파괴하려고 위협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버가모 교회의 교인들 중에서도 지지 세력을 얻고 있었다(2:14-). 거기서 그들은 발람처럼 우상에게 제사 드린 음식을 먹는 것을 인정하고 온갖 부도덕한 행위를 부추겼다. 이 내용은 두아디라 교회와 관련하여서는 그들의 행위가 이세벨의 행위를 본 딴 것이라고 지적되었다(2:20). 그러므로 이러한 자유 분방한 교훈은 아시아 일곱 교회 가운데 세 교회에서 발견되며 니골라 당, 발람, 이세벨 등 세 가지 명칭은 동일한 이단을 지칭할 가능성이 크며, 이들의 행위는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와 상충되는 것이었다(행15:29). 에베소 교인들이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한 것은 주님과 한 마음이었다(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7.신중한 태도의 요구와 승리자에 대한 약속
(계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귀 있는 자란 귀머거리가 아닌 자라는 의미가 아니라 주의하라는 의미이며, 들을지어다라는 명령은 좋은 목적에 귀기울이라는 것 즉 듣고 순종하기 위해 귀를 기울이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책임 있는 경청을 명령으로 주신 것은 말씀하시는 이가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권고의 말씀은 모든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이다(2:11,17,29,3:6,13,22). 여기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성령께서 어느 한 교회에 말씀하시는 것은 곧 모든 교회에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1세기 어떤 특정한 지역에 있는 교회들에게만 아니라 오고 오는 세기 동안 전세계에 있는 모든 교회에게도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도 그의 교훈을 개인들에게 적용함에 있어서 이와 동일한 형식을 사용하셨다(막4:9,23 등). 요한계시록 2:1(과 계속되는 나머지 여섯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의 서문)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주님께서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과 동일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하시는 일은 진리이신 아들(성자)을 증거하는 것과 그가 가르치신 것을 가르치고 그의 것을 우리에게 선포하심으로써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요14:6,26,15:26,16:14). 이러므로써 성삼위의 제 2위와 제 3위 하나님의 조화로운 통일성이 입증된다. 각각의 교회가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에 귀 기울이는 것은 귀있는 각 개인의 책임이다.

 이에 덧붙여 인내하고 승리하라는 권면이 교회의 각 지체들에게(이기는 이에게) 주어진다. 이 권면은 본문의 에베소 교회의 지체들에게만 아니라 아주 풍성한 상징적인 용어로써 모든 교회의 지체들에게도 은혜로운 약속의 형식으로 주어진다(2:11,17,26-28,3:5,12,21). 이렇게 하여 회개하지 아니한 결과에 대한 경고가 소망과 격려의 말로써 부드럽게 되었다. 이는 회복하고 재기하는 데 아직도 늦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사람이 창조 받고 살던 곳 즉 그 중앙에 있는 생명 나무에 방해받지 않고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던 동산과 연관 있는 것이 분명하다(창2:9). 사람이 죄가운데 타락했을 때 쫓겨났던 그 동산 그 중에서도 특히 그 생명 나무로 가는 길에서 추방당했다(창3:22-24).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간의 죄의 극악한 결과인 사망의 세력이 힘을  잃고(롬5:12-,6:23),생명 나무에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성취가 약속보다 영광스러우며 추수가 씨앗보다 풍성한 것처럼 참으로 복락원은 실낙원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영광스럽다. 요한계시록의 결론 부분에 나타난 것처럼 새롭게 되고 영화롭게 된 창조에서 생명 나무는 풍성한 열매를 계속 맺을 것이며, 구속함을 받은 많은 무리들이 자유롭게 그 풍성함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211-,22:1,2). 하나님의 신실한 자들이 기업으로 받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의 풍성함이 이렇게 상징되었다.    

제 1막 제 2장 서머나 교회

(계2: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계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계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계2: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1.받는 이들-서머나 교회
 에베소에서 북쪽으로 35마일(약 5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서머나(오늘의  이즈미르)는 아시아 도의 또 다른 중요한  번영한 도시였다. 서머나는 본문과 1:11을 제외하고는 신약성경 다른 곳에서는 언급되지 않는 도시이나 고대의 기록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디모데의 형제요 그가 일찍이 밤빌리아에서 가르쳤던 스트라데와 함께 서머나에 머물렀다. 2세기 중엽에 순교의 죽음을 당한 서머나의 유명한 감독 폴리갑은 젊은 시절에 사도 요한과 주님을 뵌 그 밖의 다른 사람들과 친분 관계가 있었으며 그들로부터 교훈을 받았다.                                                                       

2.환상적으로 나타난 저자의 모습

3.교회의 형편
1]외적으로 고난 당하는 교회
(계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주님은 서머나 교회에 속한 성도들에게 닥친 환난을 다 알고 계신다. 주님의 앎은 초연한 앎이 아니라 연민하시는 앎이다. 우리를 위해 고난의 잔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시고 피의 세례를 받으신 주님은 우리가 그분의 종으로서 참아 내는 시험과 환난에서 전적으로 우리와 함께 고통 당하신다(막10:38,39 히4:15).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신 그분은 세상의 재물과 부를 다 빼앗긴 가난이 어떤 것인지 잘 아시며, 그분을 따르는 서머나 교회 지체들이 세상적인 번영과 부요를 자랑하는 그 도시에서 쫓겨난 것도 다 아신다.

2]실상은 부요한 자니라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부요한 자라고 재확신시키신다. 그들은 주님께서 자원하여 가난하게 되셨기 때문에 풍성한 영적인 복을 받고 영원의 보화로 부요하게 되었다(고후8:9). 그들은 사람의 생명이 그가 소유하고 있는 재물의 풍성함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풍부함에 있다는 것을 배운 사람들이다(눅12:15,21). 바울이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모든 것을 잃고 그것들을 배설물같이 여기게 된 것도 그것이 잃는 것이 아니라 무모한 부요로움이라는 것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빌3:8). 이와 마찬가지로 야고보도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판단에 가난한 자들을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셨다고 증거하였다(약2:5). 구약의 모세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히11:26).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그들이 더 낫고 영구한 산업(재산)이 있는 줄 알았기 때문에 자기들의 산업을 빼앗겨도 기뻐했다(히10:34). 자기들의 구주를 위하여 고난을 받기 위해 부름을 받은 자들은 세상의 보화와 하늘에 있는 보화의 무한한 차이를 안다(마6:19-21).               
                                                                              
 여기에 언급된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은 조상이 유대인이고 유대인 가정에서 출생한 자들임에 틀림없으나 영적인 의미에서 유대인이 아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저들에게 약속하신 메시아요 구주이신 예수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그 안에서 예가 되었다는 진리에 대해서 스스로 고집스럽게 눈감아 버렸기 때문이다(고후1:20). 하지만 처음 신자들은 모두 복음의 은혜로 말미암아 삶의 변화된 유대인들이었다. 서머나 교회의 이 거친 원수들의 훼방은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의 성취로써 그의 성육하신 모든 것을 강퍅하게 거절하는 것이다. 그들을 사단의 회(모임)로 지칭한 것은 이들이 실상은 전혀 복음이 아닌 변질 된 사이비 기독교 복음을 퍼뜨렸음을 의미한다(갈1:6,고후11:3,4,딤전1:3,4).                
                                                                              
 기독교로 맨 먼저 개종한 사람들도 유대인이었고 기독교의 믿음을 맨 먼저 핍박한 사람들도 유대인이었다. 문제의 핵심은 유대인들이 비유대인들보다 더 악했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받은 특권을 지닌 사람들로서 모세와 선지자들이 예언한 모든 복이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실현된 새언약을 제일 먼저 환영했어야 했다는 것이다(히8:6,9:15,12:24).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유대인들에게 전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시기가 가득해서 그가 전한 메시지를 반대하고 훼방하는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적의에 찬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그들에게 먼저 전해야 할 것이지만 그들이 그것을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그들이 영생에 합당치 않은 자임을 드러냈다고 말했다(행13:44-46).                                                           
                                                                              
 세례요한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3:9). "이는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2:28,29).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확신시킨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얻은 하나됨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구별이 없다. "너희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을 따라 유업을 이을 자이며"(갈3:28,29),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말할 때 의도한 것이다(갈6:16).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은 자는 그의 원수이며 사단의 회로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적대 행위를 하게 된다.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이 자기들의 아비라고 자랑하는 유대인 대적자들에게 그들의 행위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아비 마귀에게 속하였다고 말씀하셨다(요8:33-44). 서머나 회당 예배자들은 복음을 영접하는 사람들이 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 또는 그들의 지도자들은 적의를 품고 복음을 대적하였다.

3]신실의 촉구
(계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①저들에게 말하여진 미래
 서머나 교회의 신자들 앞에는 옥에 갇히고 죽임을 당하는 등 심한 환난이 놓여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아무리 고통스럽다 해도 두려워 할 만한 것은 아니다. 신약성경에는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대적하는 원수들이 신자들에게 행하는 일로 인하여 두려워하지 말라는 권고가 여러 차례 언급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그의 제자들에게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셨다(마10:28). 그들이 임박한 환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받는 시험을 통제하셔서 그들의 신앙이 정결하게 되고 강해지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겉으로 나타나는 것과는 달리 그 시험은 신자들의 승리로 돌아가며 서머나 교회에 환난을 가함으로써 그들을 넘어뜨리려는 악한 심정을 가진 마귀는 패배할 것이다. 복음으로 인해 당하는 고난의 이런 면을 사도 베드로는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에게 경탄할 만큼 잘 제시하였다(벧전 1:5-7). 부연하거니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은 영광으로 관을 쓰는 것이다(롬8:18).
                                                                              
 둘째 그들이 통과할 환난은 한정된 기간만 지속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 환난을 열흘로 제한하셨다. 이 말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제하에서 지속된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도들이 당하는 핍박을 복으로 바꾸지 못하실 분이 아니시다. 그러나 핍박 자체는 경건하지 못한 것이며 핍박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이 정하고 있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성도들의 생애뿐만 아니라 그분의 뜻을 대적하는 불경건한 원수들의 운명을 통제하시는 실로 그분의 피조계 전체를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이야말로 묵시의 핵심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13:5에는 짐승에게 마흔두달로 상징적으로 정해진 기간 권세를 하라고 허락했다는 기록이 있다). 본문의 십일은 핍박이 허용된 한정된 짧은 기간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 환난이 길고 강렬해 보여도 영원의 관점에서 볼 때는 무의미하다. 그래서 바울은 사도로서 당하는 고통이 전혀 경감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 대해서 그의 고난은 영원한 영광을 이루는 길이고 장차 누릴 영원한 영광에 비교하면 아주 잠깐이고 대수롭지 않은 가벼운 것이라고 설명했다(고후 4:17).

②신실의 촉구
 셋째 이것은 방금 언급한 두 번째 이유에서 따라오는 것으로서 주께서는 죽기까지 충성하는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므로 잃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 얻는 것이 된다. 영광스러운 상은 옥에 갇히고 순교하는 것이 얼마나 대단치 않고 순간적인 것인지를 보여준다. 영광스러운 상이 있을 것이므로 옥에 갇히는 것과 순교하는 죽음은 오히려 환영할 만한 것이다. 그리고 "제자가 그 선생과 같으면 족하다"고 친히 가르치셨다(마10:24,25).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핍박의 심한 시험을 당할 때 눈을 들어 그들의 주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하신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히12:2,3). 이와 같은 의미로 야고보는 고난의 시험을 받는 사람을 복있다고 선언하였다. 성도는 시험을 통과하고 그 믿음이 정순하다는 증거를 얻게 되면 "주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이다"(약1:12). 사도 바울이 순교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 속에서 확신을 가지고 말한 내용이 바로 이것이다(딤후4:6-8). 순교를 당하든지 않든지간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기까지 충성하는 사람들은 모두 생명의 면류관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음을 확신한다. 생명의 면류관은 관 쓰시고 보좌에 앉으신 성도들의 주님과 구주의 영광스러운 존전에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한 기쁨이요 생명의 충만한 복이며 다시는 그것을 없애지 못하는 것이다.

(계2: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일곱 교회에 보내는 각각의 편지에 권고가 있으며 각각의 권고에는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이 들어 있다. 본문에서는 앞절 죽기까지 충성하는 사람으로 정의된 이기는 자에게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주어졌다. 이 둘째 사망은 우리가 요한계시록 20:6,14,21:8에서 배우는 대로 마귀와 그의 모든 추종자들을 위해 예비된 최종적인 파멸이다. 둘째 사망은 생명에서 쫓겨남, 즉 새하늘과 새땅의 비교할 수 없는 영광과 완전함에서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쫓겨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섬뜩한 결말로부터 주의 구원받은 자들은 구원을 받았다. 게다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 존재의 의의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것과 생명 나무의 실과는 먹는 것(7절)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제 1막 제 3장 버가모 교회
(계2: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계2:13)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계2: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계2: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계2: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계2: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1.받는 이들-버가모 교회
(계2: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서머나에서 북쪽으로 약 50마일(8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버가모 시에 있는 교회는 황제 숭배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잡다한 이교의식 속에서 생존을 위해 투쟁한 기독교 교회 중의 하나였다.

2.환상적으로 나타난 저자의 모습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로 묘사된 주님에 대해서는 1:16을 참조하라. 이 편지가 임박한 심판의 내용을 전하는 불길한 어조로 되어 있는 것은 이 편지에 묘사된 버가모 교회의 심각하리만큼 타협적인 상태를 고려하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3.칭찬-사탄의 핍박에 대한 승리
(계2:13)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사단의 보좌가 있는데에 교회가 있다는 것은 버가모에 마귀의 영향력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악한 환경 속에서도 복음의 능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머나에서는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이 주로 유대인들이었다면 반면(빌라델비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9,3:9에 사단의 회라고 명명된다), 버가모에서는 주로 이교에서 비롯되었던 것같다(다음절에 우상 숭배와 관련하여 제사와 행음에 대한 언급이 이를 암시한다). 버가모는 사단의 보좌가 그리스도의 보좌보다 득세한 것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어떠하든 지간에 그리스도의 능력과 권세가 사단을 비롯한 모든 것보다 비류없이 높다는 것이 영원한 진리이다. 이 진리는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환상들 속에 잘 나타나 있다(11:15-,19:1-). 그렇다고 할지라도 버가모와 같은 도시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능력을 발하는 참된 믿음(고후12:9)만이 사면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든 경건치 않은 악한 세력들을 대항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일반적으로 모든 시대 모든 상황에 해당되는 것이다. 하지만 미신이 난무하고 복음에 대한 이 진리를 좀더 주목하고 집중해야 하는 경우와 지역이 항상 있어 왔다.                     
                                                                              
 심한 박해의 시기를 곧 맞이하게 될 서머나 교회와는 달리(2:10) 버가모 교회는 기독교 메시지에 적대적인 사단의 잔인한 횡포를 이미 경험하였다. 버가모의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의 시험을 당할 때 보여 준 흔들림 없는 태도로 인하여 그들은 주님의 칭찬을 받았다.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버가모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심지어 목숨을 빼앗기는 지경에 이를 때에도 굳게 섰다. 우리에게 알려진 바는 없지만 여기에 언급된 안디바는 교회의 감독 또는 지도자였을 것이다. 안디바는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죽임을 당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를 "나의 증인이요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한 충성된 자"라고 칭찬하였다. 그가 순교를 당한 것은 버가모 교회의 영적 지도자를 그들에게서 빼앗아 가고 그 교인들에게 위협을 가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정신은 꺾이지 않았고 그들은 자기들을 구속하기 위하여 보배로운 피를 흘리신 주님을 부인하기를 거부하였다.                                                                   
                                                                              
 나의 증인 나의 신실한 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는 친히 신실한 증인이 되셨다(1:5). 게다가 안디바의 신실한 증거가 사단의 위가 있는 버가모에서 아주 밝게 빛났다면 사단이 온 우주에 자기의 보좌를 둔(요14:30,16:11,고후4:4) 세상의 빛이시요(요8:12,9:5) 또한 그의 속죄의 죽음으로써 세상에 만연된 사단의 통치를 몰아내신 그의 신실하신 증거는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빛난다(요16:31,요일3:8).

4.책망-유혹에 실패: 발람의 교훈, 니골라당의 교훈
(계2: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계2: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버가모 교회의 성도들이 계속해서 환난과 핍박을 당하고 있었을지라도 그들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은 그들 가운데 교훈과 행실에 있어서 일관성 없는 것으로 인해 그들을 꾸짖을 필요가 있음을 아셨다. 주께서 그 교회에 책망할 두어가지 내용은 우상 숭배와 성적 부도덕과 관련된 것이며 버가모 교회 성도 전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몇몇 사람이 이러한 죄에 깊이 관여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러한 정도에서 이탈한 것과 원리상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범죄자들을 제거하는 일(고전5:1-)에 어떻게 손을 쓰지 못하였다. 발람 선지자가 모압 왕 발락의 청을 받고 대면한 자리(민 22-24장)에서 발람은 주님의 말씀을 어색하게나마 전하기는 하였지만 아주 마지못해서 전한 것 같다. 결국 발람은 모세의 명령으로 민중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겉으로 드러난 죄목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여호와께 범죄케 하였다"는 것이었다(민31:8,16). 그들이 행한 배역한 행위에는 이방 신 바알을 섬긴 것이 들어 있다(민25:1-). 그래서 본문에서는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한 자로 묘사된 것이다. 예루살렘 총회가 금지한 행습들에 기독교의 신앙과 행음(행15:20,29)이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신약의 다른 곳에서도 발람은 불의의 삯을 사랑한 사람으로 정죄되었다(벧후2:15, 유11).                                                   

 에베소 교회는 주님도 미워하시는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한 것으로 인해 칭찬을 받았으나(2:6) 버가모 교회는 그들 가운데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에 대해 동조적인 태도를 보이는 자들이 있는 것으로 인해 주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였다. "이와같이"라는 문구가 암시하듯이 니골라당의 교훈은 우상 숭배와 부도덕한 행실과 관련된 발람의 행실과 유사하였다(2:6).                                         

5.권면
(계2: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에베소 교회와 마찬가지로(2:5) 버가모 교회 역시 아직은 회개하고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를 모욕하던 데서 돌이켜 바른 길로 복귀하기에 늦지 않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주께서 친히 속히 임하여 그 입의 검으로 그들, 곧 발람 당과 니골라 당과 싸우리라는 경고가 첨가되었다(2:12,1:16). 이것은 영적인 전투이다. 주께서는 그의 말씀을 곡해한 자들을 그들이 곡해한 바로 그 말씀으로 치실 것이다(요12:48). 본서의 다른 편지에서처럼 이곳에서도 다시금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가 평안 가운데 한 마음으로 서 나가는데 얼마나 관심이 있으신 지를 감지하게 된다.

6.승리자에 대한 약속
(계2: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라고 다시 한번 성령께서 한 교회에 말씀하시는 것이며 그가 말씀하시는 것은 주의 깊게 경청하여 실행에 옮겨야 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구약의 만나는 이스라엘 광야를 여행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위해 위로부터 내리신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이라고 묘사된 양식이었다(출16:4,시78:23,24). 성막의 성소에 금항아리에 담아 보관한 광야의 만나(출16:32-34,히9:4)는 장차 주어질 참된 생명의 떡에 대한 상징과 약속이라는 점에서 감추인 만나로 생각할 수 있다. 만나로 상징된 약속은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참된 떡이요 세상에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양식(떡)이라고 선언하신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요6:31-33). 예수께서는 "내가 생명의 덕이요....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고 선언하였다(요6:35,48,51).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성육하신 아드님은 이제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신 그리스도이시다. 지금은 그가 우리의 시야에서 벗어나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다(히 9:11,12:24).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천상의 도시를 향하여 순례의 길을 가는 우리를 부양하고 강하게 하는 감추인 만나이시다. 동시에 그가 우리의 생명이 되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다고 확신한다(골3:3).    
                                                                              
 이기는 그에게는 감추인 만나뿐만 아니라 흰 돌이 약속으로 주어졌다. 고대 사회에서 흰 돌을 승인의 표와 받아들임의 표였다. 반면 검은 돌은 거부와 축출을 의미하였다. 이것은 말하자면 오늘날 어떤 클럽의 회원 가입 자격 여부를 놓고 이기는 그에게 약속된 흰 돌은 주님에 의하여 받아들여짐과 그의 구원받은 자들의 무리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돌 위에 기록된 새 이름을 비밀스런 신성한 이름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3:12에 주님께서는 이기는 자 위에 하나님의 이름과 주님 자신의 이름과 새 이름을 기록하시겠다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14:1에 그 이마에 기록된 어린양의 이름과 그의 성부의 이름이 있는데 144,000명에 관한 내용이 있으며 22:4에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간 주님의 종들의 이마에는 주님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 침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귀중한 그의 특별한 소유라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이름이 기록된 곳이 사람의 이마가 아니라 흰 돌이며, 더욱이 받는 자 외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다는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기는 각 사람에게 주신 이름임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름이 기록된 흰 돌은 하나님의 승인과 받으심의 확신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수많은 구원받은 자들을 획일적인 군중과 동일하게 보시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해 준다. 받는 사람만 알 수 있는 이름은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독특함과 각 사람의 대한 관계의 구별됨을 시사한다. 하나님에게는 이름들을 혼동하는 일이란 없을 것이다. 그 이름이 주께서 주신 것인 만큼 흰 돌을 받는 사람은 주께 귀중한 존재요 그의 소유이다. 본문에서 하도 요한에게 계시된 것은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라"는 오래 전의 약속이 성취된다는 것이다(사62:2,65:15,43:1). 선한 목자이신 예수께서는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며.....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느니라"(요10:3,4). 새창조때에는 모든 이름이 그 이름의 독특함으로 인해 주 하나님과 그것을 받는 사람 사이에 신성한 결속이 설립되는 새 이름이 될 것이다. 같은 이름은 둘도 없을 것이다. 환언하자면 이것은 각 사람이 지음 받고 각 사람의 마음에 인을 받는 하나님의 형상의 의의가 마침내 충만하게 되고 실제적으로 표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 1막 제 4장 두아디라 교회
(계2: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계2: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계2: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계2: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계2:22) 볼찌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계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 (계2: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계2: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계2: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계2: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계2: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계2:29)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1.받는 이들-두아디라 교회
(계2: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두아디라 시는 버가모에서 동남쪽으로 약 40마일(65Km) 떨어진 내륙 지방에 위치하고 있으며 옷감 염색으로 유명한 활발한 무역 중심지였다. 유럽에서 바울이 맨 처음 개종시킨 사람은 두아디라 성읍 출신의 옷감 장수 루디아였다(행16:14).

2.환상적으로 나타난 저자의 모습
 요한에게 말씀하시는 분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밝혔다. 사실 요한계시록에서 주님에 의하여 또는 주님에 대하여 이 칭호가 사용된 곳이 이 본문뿐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그의 아버지가 되신다고 선언한 여러 곳의 내용과 완벽하게 일치한다(1:6,2:27,3:5,21,14:1). 그의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 같다는 묘사는 1:14,15의 내용을 반복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절대적인 의로움과 굽히지 않는 완전성을 인상 깊게 전달한다.        

3.칭찬
(계2: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그의 눈이 불꽃과 같으신 이가 모든 교회에 대해 가지신 절대적인 권세로서 두아디라 교회에게 "내가 네 사업을 안다"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교회에게 칭찬할 것과 꾸짖을 것을 정확히 알고 계신다.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믿음의 생활의 중요성은 신약성경 전체를 통해 분명하게 나타나는 내용이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인 덕성 가운데 단연 으뜸이 되는 것이며(갈5:22,고전13: 요일4:7-)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에 따라 살고 죽는다(히11장). 본문이 암시하는 내용은 두아디라 교회에는 처음 사랑을 저버린 에베소 교회(2:4)와는 대조적으로 사랑과 믿음이 지속되었으며 그로써 교회는 칭찬을 받았다. 두아디라 교회가 칭찬 받은 또 다른 하나는 성도들의 섬김 즉 자발적인 봉사이었다. 신약에 사용된 섬김(디아코니아)라는 용어의 뜻은 직분을 맡은 자들의 특별한 사역(행6:4,20:24,21:19,롬11:13,고후4:1,골4:17,딤전1:12,딤후4:5), 좀더 일반적인 의미에서 행정(행6:1,고전12:5,고후3:7-,엡4:12,히1:14),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돌본다는 의미의 섬김(행11:29,롬15:31,고후8:4,9:1,12,13)등 다양하다. 두아디라 교회 교인들의 섬김은 하나님과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섬김에서 그들의 사랑과 믿음을 실제로 증시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뗄 레야 뗄 수 없는 것이 바로 그들의 인내였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환난을 참았다. 그들에게는 목표에 대한 강한 열정이 있었고 그 결과 그들의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았다. 칭찬을 아낄 이유가 없었다.

4.책망과 권면

1]책망
(계2: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칭찬뿐만 아니라 책망할 필요도 있었다. 두아디라 교회는 자칭 여선지자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들을 꾀어 음행과 우상 숭배에 참여케 하는 이세벨을 환영하였다. 이 점에서 이세벨 숭배와 니골라당 발람당(6,14,15)은 유사성이 있다. 그 지역에 있는 교회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은 외관상으로는 다르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사교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세벨은 이스라엘 왕 아합의 부인과 이데올로기적으로 유사한 어떤 것을 가리키는 암호명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르쳐 음행과 우상숭배로 특징되는 바알 숭배에 빠지게 한 이세벨이라는 이름을 이와 유사한 모든 경우에 적용했을 것이다(왕상16:29-).                               
                                                                              
 또 다른 가능성은 본문의 경우 이세벨은 여선지의 자격으로 두아디라 지경에서 이런 이교적인 행동을 부추기는 실제의 한 여성을 지시한다는 것이다. 이세벨, 니골라당, 발람당 등이 각기 다른 형태를 띠고 나타난 동일한 사교를 대표한다고 하면 에베소 교인들이 이 사교를 미워했고(2:6), 버가모 교인들은 그들을 용납하였고(2:14,15)-물론 그 사교를 꺼려하긴 했지만 맞서서 대적하지는 않았다- 두아디라 교인들은 그들의 악한 영향을 저지하지 않고 환영하였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2]경고의 무시
(계2: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 도다
 짐작컨대 이세벨은 처음에 겉으로는 중생한 듯이 보이며 참된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나 마음이 완악하여지고 반항심이 생겨 빛을 저 버리고, 하나님의 아들을 발로 밟고 언약의 피를 모독하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였다(히10:29). 그녀는 회개할 뜻이 전혀 없었다. 요컨대 그녀의 심정은 배교였다.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신 것은 이 이세벨에 대하여 잘 말씀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 하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23:37)   

3]각 대상들을 향한 경고 및 권고(22-23)
①거짓선지자에 대한 경고
 욕정의 침상이 질병의 침상이 되어 버렸다.

②그의 추종자들
 억제되지 않는 방탕함과 부자연스러운 악습이 끔찍하고 무서운 질병을 초래하는 것처럼 불경건한 불신앙은 사람을 큰 환난 가운데 몰아 넣는다.

 그러나 마음이 완악하여 회개하지 않는 이세벨과는 달리 그녀의 사주를 받아 배교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행한 행위를 회개할 기회가 아직 있다. 우리가 얼마든지 상상 해 볼 수 있는 것처럼 만일 이세벨이 사람들을 유혹하여 육체적인 음행을 저지르게 하였다면 이것은 동시에 심각한 영적 정신적 불신의 징조였다. 인간성의 하나 됨은 곧 몸을 그 정신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혐오스러운 욕정이란 불경건한 토양에서 증식되는 것이며(롬1:24,25)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경고한 것처럼 주께서 "이 모든 일에 신원자가 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라"(살전4:6,7). 또 바울은 이와 유사한 유혹에 빠질 위험에 처한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다음과 같이 교훈 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이것은 이세벨을 추앙하는 사람들에게도 권고가 되는 말씀이다.

 이세벨의 자녀는 말하자면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르거나 그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자들로서 이세벨의 악한 행위를 그대로 답습하는 무리이다. 사망으로 죽인다는 말은 치명적인 온역 또는 환난으로 죽이는 것을 의미하는 구약적 표현이다. 그들이 계속해서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에게 닥치는 이 무서운 심판이 단지 두아디라 교회에게만 아니라 주께서 그의 교회의 순결함과 완전함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모든 교회에게 미칠 것이다. 기억해야 할 놀라운 사실은 뜻과 마음을 살피시는 그분 앞에서 감출 수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각 사람의 존재와 성품의 가장 깊은 곳이라도 다 살피신다(히4:12,13). 내적 기관인 뜻과 마음(문자적으로 신장과 심장)은 사람의 의지와 감정의 보이지 않는 중심이요 원천이다(시7:9,26:2).                      
 영적인 간음에 의하여 태어난 자녀는 회개하지 않고 불경건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가정에 속하지 않는 사생아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신실하지 못한 유다 백성들을 무녀의 자식, 간음자와 음녀의 씨.... 패역의 자식, 궤휼의 종류라고 선언하셨다(사57:3,4). 그리고 성육하신 아드님은 마음이 굳은 예루살렘 사회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정죄하셨다(마12:39,16:4). 그는 불꽃같은 눈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2:19)이시므로 사람이 숨기는 것을 보시고 사람이 알리기를 원치 않는 것을 아신다. 어떠한 비밀도 그에게서 감출 수 없는 그분만 "내가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고 선언하실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의 입술로 말미암아 선언하신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시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리라"는 내용과 같은 것이다(렘17:10,참조 계11:20,20:12). 주님의 판결은 절대적으로 공의롭다. 아무도 까닭 없이 칭찬을 받지 않을 것이며 무고하게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다.

③신실한 자들(24)
 이 편지를 받은 두아디라에 남아 있는 자들은 구체적으로 여선지자 이세벨의      
유혹을 받지 않고 그녀가 가르치는 깊은 것으로 속임을 당하지 않을 사람들을 가리킨다. 소위 이 깊은 것이란 깊은 비밀의 계시, 짐작컨대 비의적인 지식(그노시스)에 대한 계시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한 기독교적인 진리와는 거리가 먼 사단의 깊은 것이며 음부에서 온 것이며 위로부터 온 진리가 아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깊은 것이 우리에게 계시되었다(고전 2:10)는 바울의 주장은 널리 퍼져 있는 잘못된 이러한 교훈을 바로잡기 위해서 인용되었을 것이다. 사도의 교훈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던 것이 바로 이 지식이었다(본문에서 알지 못하는 이라는 말은 이베셀이 전한 깊은 것을 진리로 인정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신실하고 분별력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께서는 "내가 다른 짐을 너희에게 지우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이 말은 이세벨이 주창하는 악한 교훈과 행실을 멀리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에 사용된 언어는 사도 요한이 배석하였던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 사항을 생각나게 한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행 15:28,29 참조 2:20). 일찍이 바로 이 총회에서 베드로는 구원이 주 예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우리 조상도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는"것에 대하여 비난하였다(행15:10). 다시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면서 그들은 "무겁고 지기도 어려운 짐을 사람들의 어깨에 지우고 있다"고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마23:4). 그처럼 주님께서는 여기서도 두아디라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불필요하고 소용없는 요구를 짐 주울 의향이 없음을 밝히신다.

5.이기는 자에 대한 약속(26-29)
 음행과 부도덕과 관련된 모든 것을 물리치는 것과 굳게 잡는 것은 동전의 양면에 해당한다. 한편은 다른 한편을 함축하며 부정적인 것은 적극적인 요구에 의해 균형이 잡힌다. 너희에게 있는 것은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선하고 참된 것 즉 그들이 받은 참된 복음, 주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 거룩함을 추구함 등, 요컨대 그들이 칭찬 받은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가리킨다(2:19). 이 본질적인 요소들을 굳게 잡는 것은 가만히 서 있거나 자기 방어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열정과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데서 더 진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주님 재림의 긴박성은 경건한 생활의 동인이 된다. 그러므로 그들의 주님은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고 그들을 격려하신다. 두아디라 교회 교인들과 우리는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그의 오심을 대망하며 살아야 한다. 두려움으로가 아니라 그를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과 그가 가져오시는 영광의 완전함에 들어간다는 기쁜 기대를 가지고 대망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오실 때 그의 뜻을 행하는 신실하고 지혜로운 종들에게 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24:45,46). 그러한 사람은 그가 나타나실 때 주 앞에서 확신을 가지며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그의 소망을 그리스도에게 두며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을 자기의 바람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가 깨끗하신 것처럼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요일2:28,3:2,3). 그렇다면 그가 오실 때까지 굳게 잡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나의 일을 지키는 자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그에게 있는 것을 굳게 지키는 자"의 또 다른 표현이다. 여기서 이기는 자에게 약속된 말씀은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27)는 설명에서 표현된 것처럼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권세에 그와 연합하는 것이다. 사실 이 약속의 기초는 성육하신 하나님의 아드님에게 예언의 말씀으로 선포된 것에 있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2:8,9). 구속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권세는 구속자의 권세와 일치한다. 구속자의 영광은 그들의 영광이 되며 그의 다스림에 그들도 참여한다.                  
 그런점에서 본문은 바울이 주창한 "참으면 우리가 그와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딤후2:12)라든가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질문한 성도가 세상을 심판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는 말씀과 같은 효과를 지닌다(고전6:2). 이와 비슷하게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그의 보좌에 앉을 것이라고 확신을 받는다(3:21의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보낸 편지에 기록됨). 주님의 권세는 절대적이며 온 피조물에 대한 그의 주권은 지고한 것이라는 내용은 본서 요한계시록의 가장 큰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12:5,19:15).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이러한 그의 주권적인 권세에 그와 하나가 될 것이다.                                                        

 새벽별은 길고 긴 밤의 암흑이 물러가고 새 날이 도래했음을 알리는 말하자면 전령이다(벧후 1:19). 이것은 도무지 밤이 없는 나라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에게 주어진 약속이다(계21:25). 더욱이 새벽별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소유하고 계신 것이다. "나 예수는....광명한 새벽별이로다"(계22:16). 그러므로 새벽별을 받는 다는 것은 가치 있는 선물이 없는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아들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환난의 밤에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기꺼이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빌3:7,8). 그러나 바울의 열정과 열심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시피 이 새벽별 약속이 전하는 놀라운 기쁨은 긴급한 어조가 없는 것이 아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자"(롬13:12,13).            
 이 타락한 세상은 현재 밤이나 영원한 낮의 빛이 새벽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삶에 영접한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이미 비추고 있다. 베들레헴에 그가 오심은 `위로부터......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는' `돋는 해'의 출현이었다(눅1:78,79). 사단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에 비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창조 때에 어두운 데서 빛을 비추신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적인 능력으로 재창조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다"(고후4:4,6). 그러므로 자기 마음에 이 천상의 은혜의 빛을 받은 사람은 "의인의 길은 돋는 햇빛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른다"는 것을 안다(잠4:18). 그들에게 지금은 아득히 빛나는 새벽별이 장차 원만하게 될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아들과 그의 영광의 충만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