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요한계시록 0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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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 '계시'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칼류시스'(* )는 '본래 감추어져 있던 것을 드러내 보인다'는 말로 성경에서는 '진리에 대한 통찰력'(엡1:17) 혹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의 나타냄'(살후1:7; 벧전1:7)을 의미한다(Johnson, Lohmeyer). 본문에서 '아포칼류시스'가 복수가 아닌 단수로 언급된 것은 본서가 여러 개의 예언과 환상으로 말하고 있으나 '말씀'이라는 하나의 일치점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 예수 그리스투)에 나타난 속격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목적격 소유격으로 해석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라고 주장한다(Hughes). (2)혹자는 주격 소유격으로 해석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계시라고 주장한다(Kraft, Charles, Ladd).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Tenney, Morris). 그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요한에게 주어진 것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관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 '그에게'는 앞서 언급된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계시를 주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계시의 근원임을 시사한다(Mounce, Morris, Lenski, Johnson). 즉 성부 하나님은 모든 섭리의 계획자이시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그 일의 성취자이심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것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종속설(從屬說)을 뜻하지 않는다(요3:34,35; 5:20-24; 7:16; 8:28,29; 12:49; 14:10,24; 16:15; 17:8, Alford, Morris).
 반드시 속히 될 일을 - '반드시'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이'(* )는 예언적 필연성을 내포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섭리대로 일이 확실히 성취될 것을 나타낸다(Loh-meyer). 한편 '속히 될 일'은 하나님의 계시가 미래에 성취될 사건임을 암시한다(4:1; 22:6; 단2:28,29,45, Johnson). 여기서 '속히'(* ,엔 타케이)는 본서에 7회나 반복되어 사용되고 있으며(2:16; 3:11; 11:14; 22:7,12,20) 이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로 나뉜다. (1)혹자는 시간적 성취의 관점으로 해석한다(Vincent, Hengstenbe-rg). (2)혹자는 종말론적 임박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계시의 성취의 진행과 확실성을 나타낸다고 해석한다(Alford, Johnson, Morris, Mounce). '엔 타케이'는 예기치 못한 때에 갑자기 성취되는 것을 나타낸다. 즉 '엔 타케이'는 인간의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측면에서의 시간적 개념으로(벧후3:8) 하나님의 갑작스런 개입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계시의 성취와 그 확실성을 나타낸다.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 본문은 계시의 전달 경로를 나타낸다. (1)하나님. (2)예수 그리스도. (3)근원이신 하나님께서 계시의 전달자이며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를 통해 자신의 종인 요한에게 전하셨으며, 그 종 요한은 수신자들에게 자신이 받은 계시를 전하였다. 여기서 세 번이나 언급되는 '그'(* ,아우투)는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본문의 주 동사인 '에세마넨'(* , '지시하신 것이라')의 주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은 모든 계시의 근원이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께 계시를 전달받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종들, 천사, 그리고 종 요한에게 전달하고 계심을 나타낸다. 한편, '그 천사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투 앙겔루 아우투'(* )는 '그 천사를 통해'라는 의미로 천사의 매개적 역할을 나타내며(22:6,16), '그 종 요한에게'의 헬라어 '토 둘로 아우투 요안네'(* )는 수단이나 기구를 나타내는 여격이 사용되어 요한이 계시 전달의 인간적 수단으로 사용되었음을 나타낸다. 결국 본서의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에서 기원하여 참됨 중보자되신 그리스도를 통해 천사와 인간적 도구로 말미암아 수신자들에게 전달된다(Sweet, Moffatt, Ironside).

=====1: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 본문은 앞절에서 언급된 동일한 내용을 다른 형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 즉 계시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증거되어 나타났음을 나타낸다. 즉 사도 요한이 본 환상이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직접하신 증거이며, 하나님의 말씀임을 나타낸다. 또한 본문에서 요한 자신이 본 환상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가 동일시됨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신약 시대 사도들과의 연속성을 엿볼 수 있다(Johnson, Plum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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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서에는 일곱 부류의 복 있는 사람에 대한 진술이 나타난다. (1)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 (2)주 안에서 죽는 자(14:13). (3)깨어 옷을 지키는 자(16:15 ). (4)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청된 자(19:9). (5)첫 부활에 참여한 자(20:6). (6)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22:7). (7)두루마리를 빠는 자(22:14). 본절에 나타난 사람은 일곱 부류의 복 있는 사람중 첫번째에 해당된다. 이 예언의 말씀을...복이 있나니 - '이 예언의 말씀'은 본서가 예언서임을 나타내는 것으로(10:11; 22:6,7,10,18,19) 본서의 말씀이 예언의 한 부분일 뿐만 아니라, 영적, 윤리적 권면과 권고를 포함한 현재적 경고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Johnson). 요한은 이 예언의 말씀과 관련하여 세 부류의 사람들에게 복이 있음을 기술한다.
 읽는 자 - 이에 해당하는 원어 '호 아나기노스콘'(* )은 관사 있는 단수 분사로 초대교회에서 회중을 대표하여 성경을 읽던 자를 나타낸다. 듣는 자들(* , 호이아쿠온테스)과 지키는 자들(* , 테룬테스). 이 두 부류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모두 복수로 예언의 말씀을 듣고 지키며 행하는 회중들을 나타낸다(눅4:16; 행13:15,21; 골4:16, Johnson, Zahn, Robertson). 요한은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는 유대인들의 관습을 통해서는(느8:2,3; 눅4:16; 행13:15; 살전5:27) 본서의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때가 가까움이라 - 본문은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는 이유이다. '때'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로스'(* )는 보편적인 시간을 나타내는 '크로노스'(* )와는 달리 결정적인 섭리를 나타내는 종말론적 시각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가 승천한 이후부터 다시 오실 재림의 때까지는 인간 편에서 볼 때 항상 임박한 긴장(緊張)의 시간이며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정한 시간이다. 그러므로 복 있는 자는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킴으로 종말을 준비해야 한다(마24:3-51; 요21:22, Johnson, Mounce).

=====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 본문에서 아무런 수식어 없이 '요한'이라고 언급한 것은 서신을 받는 일곱 교회와 밀접한 관련을 맺어 서로의 사정을 잘 알고 있음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요한이 아시아 교회의 지도자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Mounce). 한편 '아시아에'는 본래 로마의 영토를 지칭하는 것으로 아타톨리아 고원에 이르는 소아시아의 서편 지역을 가리킨다(Morris, Kiddle). 당시 아시아 주에는 '드로아'(행20:5), '골로새'(골1:2), '히에라볼리'(골4:13) 등 많은 교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일곱 교회에만 편지하고 있다. 이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일곱 교회가 역사상의 모든 교회를 대표한다고 주장한다(Seiss, Kuyper). (2)혹자는 '일곱'이란 숫자가 완전 수이므로 계시록에 언급되는 다른 일곱이라는 문학적 양식을 따른 것이라 주장한다(Morris, Johnson, Moffatt, Greijdanus). (3)혹자는 일곱 교회가 처한 황제 숭배화의 특별한 관계 때문이라고 주장한다(Mounce)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를 제외한 나머지 견해는 타당하다(레4:6,17; 8:11,33; 민19:12; 롬12:6-8; 약3:17, Ford, Vincent, Canon).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 아포 호 온 카이호 엔 카이 호 에르코메노스). '말미암아'의 뜻을 가진 전치사 '아포'(* )는 보통 소유격 명사와 함께 쓰임에도 불구하고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주
격 명사와 함께 사용되었다. 이런한 표현 방법은 본서에서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8절; 4:8; 11:17; 16:5) 요한이 헬라어 문법상 어긋나는 이 표현을 사용한 것은 영원불변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신적 성품을 손상시키지 않고 경외하려는 동시에서 비롯되었다. 즉 이러한 표현은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는 하나님을 잘 묘사하려는 요한의 의도를 암시한다(Greijdanus, Morris, Johnson, Ladd).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전능하신 분이다(8절; 4:8).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 '일곱 영'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일곱 천사라고 주장한다(Beasley-Murray, Mounce). (2)혹자는 성령이라고 주장한다(Ladd, Johnson, Morris). 두 가지 해석 중 후자가 타당하다. 전자의 경우 본절과 다음절에 나타나는 삼위일체론적 인사말에 어긋나며 본서에 나타나는 '영'은 천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나 마귀의 영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령을 '일곱 영'으로 표현한 것은 성령의 속성과 권능이 완전(完全)하고 성결함을 시사한다(3:1; 4:5,6; 5:5; 슥3:9, Johnson, Morris, Robertson, Barclay, Lenski, Ladd).

=====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 본문은 성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수식하는 첫번째 수식구로 그리스도의 전 생애가 충성된 증인으로(시89:37; 사55:4) 새 언약을 성취시킨 것이었음을 나타낸다(Morris, Johnson). 즉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드리기까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성취시킨 하나님의 충성된 증인이었다(Ladd). 이러한 사실은 당시 박해와 고난에 처해 있던 일곱 교회의 수신자들에게 위로와 죽도록 충성해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2:13; 11:3; 17:6, Mounce, Johnson).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 '먼저 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프로토토코스'(* )는 바울의 경우 모든 피조물의 근원이나 통치자의 의미로 사용한 반면(골1:15),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첫 열매가 되었다는 의미로 사용하여 그리스도께서 모든 죽은 자들에 대하여 주권을 소유하고 계심을 시사하고 있다(시89:27, Ladd, Mounce, Johnson).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땅의 임금들의 머리'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아르콘 톤 바실레온 테스 게스'(* )는 문자적으로 '땅의 왕들의 통치자'를 의미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왕적 직분을 표현한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만물 위에 뛰어나시며 모든 권세자들을 지배하시는 주권적 통치자이심을 시사한다(6:15; 17:14; 19:16; 시89:27; 빌2:9,10, Johnson, Mounce, mor- ris, Ironside).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 '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 )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들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선물을 의미하며(롬1:7; 고전1:3), '평강'의 헬라어 '에이레네'(* )는 히브리인들의 인사말로 인간의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풍요로운 영적 상태와 화목을 가리킨다. 이 인사는 평범한 인사와는 달리 하나님의 축복이 종적, 횡적으로 임할 것을 기원하는 것이다(롬1:7; 고전1:3; 엡1:2; 벧후1:2, Mounce, Craft, Martin, and Kiddle).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 '사랑하사'의 헬라어 '아가폰티'(* )는 현재 분사로 계속되는 사랑을 나타낸다. 이 '사랑'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Mounce). 한편 '해방하시고'에 해당되는 헬라어 '뤼산티'(* )는 부정 과거 분사형으로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죄에서 해방하신 공효(功效)를 시사한다(5:9; 마20:28; 요8:34-36; 갈3:13; 딤전2:6; 히9:12; 벧전1:18,19, Moffatt, Mounce, Lenski). 이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죄에서 해방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 바와 같이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며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하게 된다(12:11).

=====1: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것임을 나타내며(22:3; 엡1:6) 구원 사역이 삼위 하나님의 협동적 사역으로 수행되나 근원적으로는 성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시사한다(요6장). 한편 '나라와 제사장'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실레이안, 히에레이스'(* , )는 문자적으로 '나라, 곧 제사장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제사장들의 집합체를 가리킨다. 이는 출19:6과, 벧전2:9의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왕됨과 제사장됨을 시사한다(Beckwith, Morris, Lenski).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 '영광'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돝사'(* )는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반영하는 것으로(출33:9; 겔1:28)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삼위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본문의 경우에는 관사와 함께 사용되어 하나님의 신적 속성에 관한 찬양과 공경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Mounce). 그리고 '능력'의 헬라어 '토 크라토스'(* )는 인간이 갖는 권리나 내적 능력보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의 능력을 나타낸다(벧전4:11). 한편 '세세토록'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톤 아이오논'(* )은 문자적으로 '세대들의 세대들에'라는 의미로 '영원성'을 나타낸다(18절; 4:9,10; 5:13; 7:12; 10:6; 11:15; 15:7; 19:3; 20:10; 22:5, Lenski). 요한은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이 수신자들에게 영원토록 함께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 본문은 단7:13을 반영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타낸다. 이것은 예수께서 친히 확증하신 바며(마24:30; 26:64) 사도 바울에 의해 입증된 재림의 모습이다(살전4:17). 여기서 재림과 연결되어 나타나는 구름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의 위엄을 나타내는 초자연적 현상인 듯하다(Morris, Lenski, Johnson).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 본문은 슥12:10의 예언을 반영한 것이다.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공개성을 나타낸다. 현재는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실로 인식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이지만 그리스도의 재림 때는 그리스도인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눈으로 확연히 보게 될 것이다(Ladd). 한편 '그를 찌른 자들'은 역사적으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Moffatt, Plummer, Johnson, Ladd). 그리스도는 이런한 자들에게도 자신의 재림을 분명하게 드러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박해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자신의 재림을 드러낸다는 사실은 그리스도 자신이 우주적 주권을 소유한 분으로서 온 세상을 공의롭게 심판하실 심판주이심을 시사한다(Mounce, Lenski).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 본문은 심판의 보편성을 나타낸다.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이루어질 회개치 못한 다들의 비참한 상태를 나타낸다. 본문은 종말에 이르기까지 회개치 않은 불신자들이 당할 두려움을 극명하게 시사한다(Morris, Mounce, Ironside).
 그러하리라 아멘 - '그러하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나이'(* )는 동의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히브리어 '아멘'(* )과 같다. 요한은 동의어인 '그러하리라'와 '아멘'을 이중적으로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종말적인 재림의 확실성을 강조한다(Greijdanus, Morris, Mounce).

=====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 '알파'는 헬라어 문자의 첫 글자며, '오메가'는 마지막 글자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역사의 시작인 동시에 마지막이 되셔서 그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시대와 세대의 주가 되심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창조주와 심판주로서 모든 주권을 소유하고 계신다(21:6; 22:13, Beasley-Murray,Charles, Robertson). 이런한 하나님이 보증하신 그리스도의 재림은 확실한 것이다.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 본문은 4절의 반복으로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 즉 '영원히 자존'하신 하나님의 성품을(출3:14) 묘사한다. 이는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체 안에 존재의 기반을 가지고 계셔서 창조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시며 영원 불변하신 심판자이심을 나타낸다(Johnson). 그 하나님은 장차 오셔서 자신이 섭리하신 심판을 이루실 것이다(Ladd).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 '전능한 자'의 헬라어 '판토크라토르'(* )는 본서에 9회나 언급되는 중심 단어로 문자적으로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을 나타낸다. 이것은 곧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자가 분명히 가져야 될 속성이다(Johnson).

=====1:9
 나 요한은 - 요한은 다시금 자신을 밝혀 하나님과 자신과 수신자들 사이의 관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요한이 자신을 '사도 요한'이라 밝히지 않는 것은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과 친분이 있음을 암시한다(22:8, Johnson).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 요한은 본문에서 자신과 수신자의 관계를 기술하고 있다. '너희 형제요...동참하는 자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호 아델포스 휘몬카이 슁코이노노스'(* )로 하나의 관사 '호'에 의해 두 가지 칭호 즉 '형제'와 '동참하는 자'가 연결되어 있다. 이는 '형제'인 까닭에 '동참하게 된다'는 인과 관계를 드러낸다. 한편 '예수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예수'(* )는 문자적으로 '예수 안에서'란 의미로 '주 안에서'란 바울의 사상과 상통하며, 문법적으로는 '환난'과 '나라'와 '참음'의 세 말에 공통적으로 연결되어 '환난'과 '나라' 그리고 '참음'이 예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Moffatt, Mounce). 여기서 '환난'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대해 온전히 충성할 때 나타나는 고난을 가리키며(요16:33; 행14:22; 딤후3:12) '나라'는 메시야적 통치의 축복을 말하며, '참음'의 헬라어 '휘포모네'(* )는 '휘포'(* , '아래에')와 '메노'(* ,'머물다')의 합성어로 충성된 자들에게 요구되는 적극적인 인내를 가리킨다. 이것은 요한도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축복을 기다리는 가운데 환난 속에서 인내하고 있음을 나타낸다(Johnson, Ironside).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 '인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와 관련되어 요한의 밧모섬 행(行)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갔다고 주장한다(Spitta). (2)혹자는 하나님의 말씀, 곧 계시를 받기 위해 갔다고 주장한다(Weiss, Bleek, Lucke). (3)혹자는 복음 전파에 대한 박해로 말미암아 유배되었다고 주장한다(Moffatt, Charles, Vincent, Plummer, Johnson). 세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이 도미티안 황제 때 에베소 지방에서 전도하던 중 밧모섬에 귀양갔다가 후에 귀환(歸還)하였다고 역사가와 교부들이 전하기 때문이다(Irenaeus, Clement, Eusebius).

=====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 '주의 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테 퀴리아케 헤메라'(* )는 문자적으로 주께 속한 날을 의미하는 것으로 '안식후 첫날'(막 16:2; 눅24:1; 요20:19; 행20:7) 혹은 '매주일 첫날'(고전16:2)과 같은 뜻이며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유대교의 안식일이었던 토요일이 사도 시대부터 안식일 다음 날인 주일로 대치된 것을 가리킨다(요20:19; 행20:7; 고전16:2, Morris, Lenski, Ladd). 한편 '성령에 감동하여'의 헬라어 '에게노멘 엔 프뉴마티'(* )는 문자적으로 '내가 성령 안에 있었다'는 뜻으로 이는 단순히 성령을 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황홀한 상태에 있게 되었음을 암시한다(4:2; 17:3; 21:10; 행10:10; 11:5, Lohmeyer, Ladd, Johnson,Mounce).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 '나팔소리'는 구약 시대에 백성을 불러 소집하거나 군사적으로 경고할 때(겔33:6), 전쟁 때(겔7:14), 그리고 특별한 의미로 절기 때(레23:24) 사용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한 징표로 나타난다(마24:31; 살전4:16). 본서에서 70회나 사용되며 종말론적인 특성을 나타내는 본문의 '나팔소리'는 심령들을 일깨우는 천사의 음성으로 이해된다(Morris, Mounce, Ladd).

=====1:11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 '써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그랖손'(* )은 부정과거 명령형으로 즉각적인 이행을 촉구하는 표현이다. 이는 특별히 히브리 예언 방식으로, 본서에서 12회나 반복되어 사용됨으로 본서의 기록이 하나님의 권위로 되었음을 시사한다(Morris, Robertson).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 본문에 제시된 교회의 명칭은 1:4에서 언급된 '일곱 교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각각의 교회에 보내진 특별한 메시지는 2,3장에서 동일한 순서로 나타난다('일곱 교회'에 대해서는 2,3장의 주석 참조). 특별히 기록된 말씀을 일곱 교회에만 보내라고 한 것은 그 도시들이 소아시아 중서부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며(Zean) 동시에 일곱 교회에 대한 메시지가 보편적으로 모든 교회에 해당되기 때문이다(Mounce, Lenski).

=====1:12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 요한이 처음으로 본 것은 슥4:2의 환상과 비슷한 일곱 금 촛대로 여기서 '촛대'에 해당하는 헬라어 '뤼크니아스'(* )는 세워놓거나 달아메는 '등잔불'을 가리킨다(출 25:31; 왕상7:49; 슥4:2). '일곱 금 촛대'는 스가랴서에서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반면에(슥4:2) 본문에서는 수신자들인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와 나아가 전세계의 보편적인 모든 교회들을 나타낸다(20절, Mounce, Johnson, Kiddle).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 '인자 같은 이'란 단7:13,14을 반영한 것으로 계시자이신 그리스도의 '인성'을 고양시켜 표현한 것이다(행7:56). 요한은 이 표현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인성은 물론 영광으로 고양된 그리스도의 모습을 암시하고 있다(Beas ley-Murray). 그리스도가 성전의 촛대 사이로 움직이시는 것은 그의 대제사장적 임재와 교회의 머리되심을 시사한다(Moffatt, Mounce).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 '발에 끌리는 옷'은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이 착용한 예복으로(출28:4; 레16:4; 사6:1)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과 그의 권위와 위엄을 시사한다(Johnson, Mounce).
 가슴에 금띠를 띠고 - 이 또한 대제사장 혹은 왕의 예복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출28:8; 29:5) 권세를 가지신 메시야의 모습을 나타낸다. 이렇듯 요한은 구약성경에 묘사된 대제사장과 왕의 모습을 빌어 그리스도의 위엄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성을 나타내고 있다(Bruce, Johnson, Mounce, Morris, Ironside).

=====1: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 본문은 단7:9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성경에서 흰 색깔은 항상 '권위'와 '영광'과 '순결'을 상징하기에 본문은 그리스도의 성결과 영원성 혹은 그의 영원한 신성을 상징한다(사1:18, Mounce, Kiddle).
 그의 눈은 불꽃 같고 - 이는 단10:6을 반영한 것으로 그분의 전지성으로 모든 악을 꿰뚫어 아시는 날카로운 공의의 눈을 상징하며(Vincent) 아울러 승리로 재림하실 그리스도의 심판을 시사한다.

=====1: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 '빛난 주석'의 헬라어 '칼콜리바노'(* )의 어원(語源)은 분명히 알 수 없으나 일반적으로 '금 같은 청동' 혹은 '양질의 합금이나 놋쇠'로 이해된다(계2:18). 그리스도께서 빛난 주석의 발을 가지셨다는 사실은 초림 때에 '십자가에 못 박힌 발'과는 달리 재림 때에는 영광과 권능으로 오셔서 모든 더러운 무리들과 반대자들을 밟아 심판할 것을 상징한다(단10:6, Lenski, Mounce).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 본문은 10절의 '나팔소리 같은'에 뒤이어 나타나는 음성에 대한 묘사로 겔43:2에 똑같은 표현이 나온다. 이는 불가항력적인 권위와 위엄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음성이 모든 죄인들에게 두려움을 줄 무서운 음성임을 시사한다(시29:3,4).

=====1:16
 그 오른 손에 일곱 별이 있고 - '오른 손'은 권세있는 능력 혹은 보호와 안전을 상징한다(출15:6; 사41:10; 행2:33). 그리고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를 뜻하며(20절) 더 나아가 전세계에 흩어진 모든 교회의 사자들을 상징한다. 따라서 본문은 일곱 교회 즉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의 영광과 보호하심 가운데 있음을 시사한다(Lenski, Johnson, Mounce).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 이는 신,구약 성경에서 흔히 사용된 비유이다(사11:4; 49:2; 눅2:35; 엡6:17; 히4:12). 혹자는 '날선 검'을 '율법과 복음'의 양면으로 해석하기도 하나(Tertullian, Victor) 본문은 단순히 날선 검의 심판적 기능을 묘사한 것으로 만국을 심판하시는 메시야의 심판권을 시사한다(19:15; 살후1:8, Charles, Mounce, Walvoord).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 '얼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프시스'(* )는 '외관'으로 이해되므로(Lenski, Mounce) 본문은 환상 전체에 대한 결론적 묘사로 보인다. 이것은 마치 과거에 변화산에서 순간적으로 체험한 그리스도의 영광의 모습과 유사한 것으로(마17:2; 막9:3, Plummer) 그리스도의 신성한 영광과 우월함을 시사한다(Johnson).

=====1: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 본문은 인간이 사도 요한이 그리스도에 대한 초자연적인 환상을 보고 두려움과 떨림에 압도되었음을 시사해준다. 이는 계시를 받을 때 흔히 일어나는 모습으로(수5:14; 겔1:28; 단8:17; 10:15; 마176; 행26:14) 인간의 연약성과 죄악으로 말미암아 느끼는 두려운을 시사하며 일반적인 공포와 전율의 감정과는 다른 것이다(Greijdanus, Lenski, Moffatt).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때 흔히 제자들을 안심시킨 것과 같이(마14:27; 17:7; 막6:50) 인자한 모습과 음성으로 요한을 위로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고 에이미 호 프로토스 카이 호 에스카토스'(* )는 구문상 강조 용법으로 '처음과 나중인 바로 나로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는 8절에서 하나님에 대한 칭호로 나타난 '알파와 오메가'와 동일한 것으로 8절에서는 하나님에게 적용되어 있으나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칭호로 나타낸다. 그리스도는 이렇듯 자신의 칭호를 통해 위로하심으로 요한에게 절대적인 확신을 주고 있다(Mounce, Zahn, Ironside).

=====1: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 '곧 산 자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 호 존'(* )은 앞절의 '처음과 나중'이라는 칭호를 보충하는 언급으로 늘 살아있는 '영원성'을 나타낸다(출3:14; 시42:2). 한편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역사적 사실을 가리킨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생명을 제한시킨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수여할 수 있는 구속사적 순종의 사건이다(요5:26, Lohmeyer).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 '음부'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두'(* )는 히브리어 '스올'(* )을 번역한 것이다. 이것은 구약성경에서 육신의 죽음 상태와 무덤 혹은 죽은 영혼들이 가는 곳을 가리켰으며(왕상2:2,9; 욥3:13; 30:23; 시89:48; 사14:9; 겔32:28, Johnson, Greijdanus) 신약성경에서는 죽은자들이 있는 곳(행2:27,31), 혹은 죽어서 악인들이 거하는 곳을 의미하였다(20:13,14; 눅16:23). 그리스도는 자신의 고난과 죽음,부활을 통해 사망의 영역을 정복하시고(고전15:54,55, Vincent) 영원히 살아계셔서 죽음의 영역을 주관하는 열쇠 곧 권능과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

=====1: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 본문은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 그리고 '장차 될 일'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본서의 내용을 3구분하여 '네 본 것'은 1장의 '인자에 대한 환상'을, '이제 있는 일'은 2,3장에 있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현재 상태를, '장차 될 일'은 4-22장까지의 내용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Charles, Sweete, Lenski). (2)혹자는 본절의 주동사가 '기록하라'임에 주목하여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누고, '현재와 미래에 될 일'로 구분하여 해석한다(Mounce, Moffatt, Johnson).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요한이 보고 기록해야 하는 것은 본서의 전체이다.

=====1: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 '비밀'에 해당하는 '뮈스테리온'(* )은 원래 '가둔다' 혹은 '닫는다'는 의미의 '뮈오'(* )에서 파생된 말로(10:7; 17:5,7) 단순히 '신비롭다'는 개념이 아니라 '상징적인 환상에 대한 내적인 의미'로 하나님께서 계시하셔야만 알 수 있는 내용을 가리킨다(단2:7; 골1:26; 살후2:7, Charles, Robertson).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 '사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앙겔로이'(* )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1)혹자는 교회에서 가장 우세하고 지배적인 정신(the prevailing spirit of the church)을 의인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Mounce). (2)혹자는 '교회 자체'를 상징한다고 주장한다(Bleek, Sweete). (3)혹자는 일곱 교회의 감독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Zahn, Weiss) (4)혹자는 이 사자가 교회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점을 들어 교회에서 책임을 맡은 천사들이라 주장한다(Johnson, Moffatt, Charles, Rist). 이러한 견해들 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단10:13,20.21). 한편 촛대로 상징된 일곱 교회는 일차적으로 소아시아의 선택된 교회를 말하나 본질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하여 세워진 세계의 모든 교회를 가리킨다(엡3:10).

 

 

제목과 문안 인사

                                요한계시록 1:1-8
 요한계시록은 구조적으로 서론 부분(1:l-8)과 결론 부분(22:6-21)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l.문안 인사로 시작하고(l:4,5),축복기도로 끝을 맺는다(22:21)
(계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계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계22: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2.중심 주제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계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22:7,12,20
 7-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12-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20-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3.때가 가까움을 말씀하신다
(계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계22:10)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4.사자를 보내어서 종들로 알게 하셨다.
(계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계22:6)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5.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하나님(예수 그리스도)
(계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6.지키는 자들에게 복이 있다.
(계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계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이 서론의 부분은 표제에서 시작하여 문안 인사로 나아가고 있다.

l.제목一예수그리스도의 계시
 1-3절은 이 책의 서론으로 l절은 계시의 유례를, 2절에서는 계시의 성격을, 3절에서는 이 계시의 목적을 선언하고 있다.

l.제목-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묵시)
 이것이 이 책의 이름이다. 요한 계시록이란 이름은 후대에 붙인 이름이지 성경 자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한다.
 계시(묵시)-계시라는 말은 벗긴다는 뜻의 단어(아포칼룹시스)로 문학적 분류가 아니라 이 책의 성격과 목적(반드시 일어날 일에 대한 전문적인 용어)을 지적하는 말이다.    
 주전200-주후 100년 사이에 유대에서 묵시문학이라는 유대-기독교적 문학 장르가 있었다. 요한계시록은 여러 면에서 그 문학 장르와 유사한 점이 있다. 그러나 분명히 차이점도 있음을 알아서 무조건 묵시문학으로 취급하는 것은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묵시문학적 방법이 여러 면에서 도움이 되기도 한다.
 묵시문학과의 유사점: 인간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사건들의 제시를 다룸
                                        환상과 꿈을 사용
                                        가끔 기괴하고 환상적인 상징을 사용
                                        세상의 종말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관심
                                        우주의 대 이변적 종말 사건에 관심
묵시문학과의 차이점: 과거 몇몇의 위인들의 이름을 빌리지 앉고 요한이라는 생존 인물의 이름을 둔다.
 계시록은 문학작품이 아니라 일종의 편지이며 특정 지역의 교회에 읽혀지도록 의도되었다.
 묵시문학은 염세적이어서 위로를 멀리 동떨어진 미래의 것으로 보나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현실적 용어로, 그리고 재림을 확신케 하는 용어로 나타난다. 그래서 예언이라고 한다(l:3).
 요한은 천상의 실체들을 보긴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피안적이거나 거짓이 아니라 사건들과 교회의 현실 상황에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다. 그러면서 구속적 완성을 내다본다.

예수 그리스도
 계시록에서는 1:1-5에서만 이중적인 칭호가 3번 나오고 나머지에서는 예수라는 말로 나온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목적격 소유격으로 계시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인가, 아니면 주격적 소유격으로 그리스도께서 주신(혹은 매개하여 주신)계시라는 말인가? 여기서는 후자이다. 계시의 대상은 속히 될 일이라고 다시 나오기 때문이다.

반드시 속히 될 일
 계시의 내용은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고 한다. 이 말씀은 구약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단2:28)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 왕의 꿈 곧 왕이 침상에서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은 이러하니이다
 바로 은밀한 것, 후일에 될 일이라는 말을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는 말에서 반영하고 있다.
 일이란 단순히 교회의 핍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종말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반드시 이루어질 일이다. 이 역사는 하나님의 성품으로부터, 그리고 창조와 구속 안에서 그의 목적의 제시로부터 일어나는 논리적인 필요 요건이다.
 문제는 '속히'라는 말이다. 이 말이 과거주의를 옹호해 주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①갑자기 혹은 일단 지정된 시간이 되면 지체없이란 의미이다.
 ②이것은 시간적 의미가 아니라 그 일의 확실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문제는 선지자들은 연대기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으며, 미래는 항상 임박해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깝고도 먼 미래를 하나의 캔버스 위에 그린 것이다. 그러므로 연대기에는 거의 강조점이 없다. 그러므로 항상 미래를 임박한 것으로 보고 기대하면서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성경의 예언의 특징이다(막13:33).

 계시의 유래: 하나님-그(예수 그리스도)-천사-요한-그 종들
 하나님은 모든 계시의 원천이시다(단2:28,29,45).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을 떼고 두루마리를 열어서 보이시는 계시의 매개자이시다(계5:1-7,6:l,3,5,7,9,12,8:1).
 그리고 그 다음의 의미가 또 문제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는 말속에서 지시하신 분이 누구냐는 문제이다.
①그리스도이시면 천사는 22:8에 나오는 그 천사일 것이며, 22:16의 내용도 그러한 것으로 보인다.
②하나님이시면 천사는 사자라는 일반적인 의미로(1:20,2:l,8)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킬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계시는 요한에게 전달되었다. 이는 모종의 기호에 의하여 알려졌음을 암시한다(계시라는 말이). 그러므로 이것은 상징적이 되며, 이것은 우리에게 미래사의 문자적 계시가 아니라 앞으로 반드시 될 일에 대한 상징적 묘사를 기대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계시는 종들에게 주어진다. 종들은 근본적으로 기독교 선지자들인데(암3:8,계10:7,11:18) 이 책의 다른 곳에서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계7:3,19:5,22:3).

2.계시의 성격::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자기의 본 것
 요한은 여기에서 자신을 오로지 자기의 본 것을 증거한 사람으로 소개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가 바로 그것인데 그것은 두 가지의 것이 아니라 동격으로 같은 내용이다. 그리고 요한은 그 성격에 대하여 특히 상징적인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문자적인 것이나 들은 내용의 제시가 아니라 바로 그가 본 것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본다는 점은 상징성과 보는 이의 느낌이 중요시되며,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굉장히 곤란하게 만든다.

3.계시의 목적: 읽고 듣고 행함
 요한계시록의 목적이 여기에 등장한다. 그는 예언이라고 하다. 이는 앞일을 예고하는 것 뿐 아니라 의미를 밝히는 것을 의미 할 수도 있다. 이 경우에 시간적인 요소는 예언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통치의 원칙들과  그것들이 다가오는 역사 속에서 예증되는 징후를 밝히며, 어떤 법칙과 그것이 작용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적용의 실상을 제시하는 것이다.
 읽는 자는 유대교에서 온 습관으로(눅4:16,행13:15), 옛날에는 잘 읽는 사람이 흔하지 않았으며 후에는 읽는 자가 공직이 되었다.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공적으로 읽혀지려는 목적을 가진 서신의 성격이 있다.
 듣는 자들과 지키는 자들이 본질적으로 본 서신이 주어진 목적이다. 단순히 사건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교훈으로 이 편지가 간주되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들에게 복이 있다고 한다. 요한계시록에는 7번 복이 선언되는데(14:13,16:15,19:9,20:6,22:7,14),그 중의 첫 번째이다.
 그리고 그 이유로는 때가 가깝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서 때라는 말은 위기의 시간이나 결정적인 순간을 알리는 종말론적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다(마8:29,막13:33,고전4:5).

2.문안 인사(4-5상)
 문안 인사에는 당시 일반적인 순서를 따라서 세 가지 내용이 등장한다.
①발신자: 요한이라고 밝힌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으나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 요한으로 생각된다.
②수신자: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라고 밝힌다. 아시아의 로마 영토에 있는 특정한 일곱 교회의 회중들이 바로 이 서신의 독자이다. 이는 예언적으로 인간 역사의 시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당시의 교회들이다(11절에서 다시 언급하겠다). 그 외에도 많은 교회들이 있었으니 우선 7이라는 숫자가 가지는 완전이라는 뉘앙스와, 그 교회들이 가지는 특성들 속에서 전체의 다양성을 대표하기에 다른 교회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아도, 역시 동일하게 적용이 되며, 그런 의미에서 신약의 교회가 생긴 때부터 재림 시까지 모든 교회에게 주는 도덕적 영적인 진전을 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③인사: 은혜와 평강-우리 성경에는 이 말이 한글 어순에 따라서 5절에 등장을 하나 원어에는 4절에 등장을 한다. 은혜라는 말은 정상적인 헬라어의 인사이며 평강은 히브리 인사의 솰롬의 종교적 변형을 결합한 것이다. 그러나 교회로 이 단어가 들어오면서 은혜는 인간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을 가리키며, 평강은 그 은혜의 결과로 일어난 영적인 행복을 가리키는 말이다(롬l4:17).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세상에서 주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어디에서 주어지는가? 은혜와 평강의 삼중 적인 출처를 4절 하반부에서 시작하여 5절 상반부에서 밝힌다.

i.첫째 출처- (계1:4)...."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로부터 나온다. 이 말씀은 출애굽기 3:14의 헬라어 형태를 반영하고 있다(문법적으로 '아포' 뒤에는 속격이 나오나 요한은 하나님을 불변적으로 주격으로 써서 문법을 무시하고서라도 하나님의 위엄을 강조하고 있다). 유한한 세상적 존재가 아니라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존재하시는 분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온다는 것이다.
 그것도 단순히 영원하실 뿐 아니라 앞으로 오실 분, 즉 우리와 함께 거하실 분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영원한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킨다. 결국 이 말은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씀이다. 그런데 단순히 요한은 다른 서신처럼 아버지로부터가 아니라 이렇게 풀어서 설명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교회가 당하는 핍박 밑에 놓여 있을 때 특히 적절하기 때문이다. 불확실한 미래는 영존의 능력으로 역사의 전 과정을 통치하시는 분을 요구한다. 바로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시며, 그분이 우리에게 은혜와 평강을 주신다는 것이다.
ii.둘째 출처-"그 보좌 앞에 일곱 영"
 이 부분에 대하여서는 여러 가지 해석들이 등장한다. 특별히 재림과 연결하여 천사들이 등장하며(누가복음9:26) 때때로 성부와 성자와 연결되어서 천사들이 등장하기에(디모데전서5:21) 천사들로 보기도 한다(어떤 이는 유대 전통의 일곱 천사장-우리엘,라파엘,라구엘,미가엘,사라카엘,가브리엘,레미엘 에녹 전서20:1-8,토빗12:15,에스드라후서4:l-으로 보나 유대의 전통을 기독교에 집어넣는 것은 곤란하다).
 그러나 우리는 더욱 살펴야 한다. 계시록에는 3:l,4:5,5:6에만 이 표현이 등장한다. 3:1은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라고 하는데 "과"라는 말이 접속사가 아니라 보족어라면 위의 내용을 지시하는 것이 된다(일곱 별은 l:20에서 사자라고 하기에). 그러나 4:5과 5:6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하여서 구약성경 스가랴 4:2,10을 반영하며, 거기에 보면 스가랴 4:6에서 여호와의 신으로 등장하기에 성령으로 보아야 하며, 일곱이라는 것은 이사야 11:l의 일곱 가지 속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 성부와 뒤에 성자가 나오기에 성령으로 보는 것이 가장 좋다. 지금 우리의 느낌은 성부께서 멀리 계시지만 그 앞의 일곱 영이신 성령께서 그 능력을 우리에게 적용시키시는 것이다.
 iii.세 번째 출처-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세 번째 출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그리스도에게는 삼중의 칭호를 사용한다.
 a."충성된 증인",증인이라는 말은 순교와 연결되며, 그분은 진리를 증거한 결과 죽으신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진리의 증인이시다. 이는 불의에 결코 타협할 수 없이 신앙을 유지하고 신실하여야 할 자들에 대한 중요한 모범이다.
 b.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분"(골l:18). 시편89:27에 의하면 먼저라는 말은 우선권(고전15:20)의 의미보다는 주권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현재 주권적인 통치를 하고 계신다면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충성된 자들도 그의 통치에 참례하는 것이다(계20:4-6).
 C.“땅의 임금들의 머리”시편89:27은 여기에도 적용이 되며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그러하시다(빌2:10-11).

 그러므로 이러한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진 은혜와 평강은 환난과 핍박을 능히 초월하는 것이다.

 이 문안 인사는 때가 가까운 때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가?

3.그리스도께 대한 찬미(5하, 6)
 요한은 문안 인사에서 은혜와 평강의 출처를 밝히면서 그리스도의 신분(칭호)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여기에서 끝날 수가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과거와 현재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 일을 생각할 때에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과거와 현재 우리를 위하여 하신 그 일에 감사하여서 감격의 찬미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①송영-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6)
 여기서 영광은 찬양과 공경이며, 능력이란 권능과 힘을 함축한다. 이 두 단어는 5:13에서처럼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돌리는 송영에 결합이 되어 있다. 그것은 곧 높아지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며, 동시에 그렇게 간주하라는 권면이다.
 세세토록이라는 말은 최상급을 나타내는 말로 시간과 영원에 대한 최대의 용어이다.

②송영의 이유
 a."우리를 사랑"(현재분사)-이는 계속되는 끝없는 사랑을 의미한다. 과거에 사랑하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변함이 없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것이다.
 b.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씻었다)"(부정과거분사)-그리스도의 그 사랑이 단 한번의 사실로 과거에 일어난 예를 들라면 바로 갈보리의 십자가 사건이다. 이 해방은 그리스도의 피로 산 것이다(5:9).
 C.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6)-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결과가 등장한다.
 원래 이 말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말씀이다(출19:5,6). 그런데 베드로는 그 제사장 나라라는 말을 교회에도 적용시킨다(벧전2:5,9).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해당되던 말이 신약 교회에게로 옮겨졌다는 것은 요한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 감격이 그리스도를 찬양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나라라고 불리우는가? 교회가 왕의 통치를 받는 이유인가, 아니면 교회가 왕적인 역할을 다하기 때문인가? 그 대답은 요한계시록5:10에 있다(계20:6,22:5 참조).
(계5:10)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나라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통치를 받기 때문만 아니라 그 이상 그들이 그리스도의 통치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또한 신자들은 제사장이다. 이것은 교회가 이방인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라는 강조점이 아니다. 이 말은 더 이상 신자들은 중보를 필요로 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감사, 예배, 찬양 등의 제사 직무를 수행하기 때문이다(벧전2:5,롬12:l,히13:15,사61:6 참조).
 집합적으로 그들은 왕국이며(그리스도가 모든 세상의 임금들의 통치자로 승귀되심과 관련된 그들의 왕권적 지위를 강조한다) 개별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제사장들이다(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의 결과로 그들이 하나님에게 직접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 강조된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렇게 과거와 현재의 은혜가 찬양을 돌리게 한다.

4.주제의 선포
(계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이 말씀은 구약성경의 두 부분을 연결하면서 우리에게 계시록이 보이려는 주제를 강조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미래에 어떻게 되실 것을 선포하고 있다.
(단7:13)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슥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슥12:12)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막14: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볼지어다"라고 외친다. 이 말은 헬라어의 감탄사이다. 깜짝 놀라서 외치는 내용이다. 바로 이 부분에 요한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①"구름을 타고 오시리라"-이것은 다니엘 7:13에 의하면 오시는 분이 바로 "인자 같은 이"심을 밝히는 부분이며, 주님은 그 사실을 자신이라고 하신다(막14:62). 여기의 구름이라는 말은 하늘 구름이냐, 아니냐는 것은 관심의 초점이 아니다. 구약의 사상은 구름이란 하나님의 임재와 연관이 되기 때문이다(출13:21,16:10,마17:5,행l:9).
②공개적으로 오신다-"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볼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그를 찌른 자들도 보게 된다(슥12:10,요19:37).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에 대하여 무관심한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까지 확대된다.
③심판주로 오신다-"땅에 있는 족속들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요한계시록에서 이 사실은 계속 강조 확대된다. 이 애통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하나님의 심판이 드러나면서 일어나는 양심의 가책이다(16:9,11,21참조). 그러면 신앙인은 어떠한가?  그 대답은 여기에 나타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계시록의 문맥에서 성도는 땅에 속한 자가 아니다.
④약속의 보증과 선포-"그러하리라 아멘" (헬라어와 히브리어의 긍정의 형태를 결합한 강조) - 이 대답은 교회의 회답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선포로 보인다. 틀림없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 선포는 8절의 서론으로 연결이 된다.

(계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정말로 7절의 말씀이 사실인가? 그러하리라고 하였다. 어떻게 그러할지를  아는가? 그 근거를 8절이 밝힌다. 하나님의 속성상 분명히 그렇다는 것이다.
 그분은 어떤 분인가?
①"알파와 오메가"-이것은 헬라어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로 그 사이의 모든 것을 포함한다는 의미이다. 즉 그분은 그 사이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주권적인 주님이시다.
②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그분이 오셔서 그 모든 일을 이끌어 가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일을 틀림이 없다.
③그러면 그분에게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가? -"전능한 자"(만물에 대한 대권을 강조한 말로 보인다)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은 다가오는 핍박 가운데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라는 격려와 권면이다.

 

제 1막 그리스도를 중심에 둔 교회

 요한계시록의 첫 번째 내용은 두 번째 단락이 시작하는 4:l이 시작하기 전까지이다. 일반적으로 소아시아 7교회에 대한 편지로 알려진 부분으로 그 내용이 집중적으로 2,3장에서 등장을 한다.
 그러나 우리가 각 교회의 편지 시작 부분에 나오는 내용들은 l:12이하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환상과 연결이 되고 있으며, 자연히 우리의 눈길을 l장의 환상의 부분으로 돌리게 하며 그 l장의 환상의 교훈 밑에서 2,3장의 내용이 정리가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내용의 앞에 요한의 제시를 받을 때의 형편에서 어떤 의미에서 요한계시록이 전체적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보여주는 중대한 안내판(이정표) 역할을 보게 되는데, 바로 그 상황 자체가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게 된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임이 틀림없다. 동시에 그 내용은 요한계시록의 제 1막을 시작하는 서언임을 11,12절 의 연결에서 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구조를 머리에 그리면서 l장의 내용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계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계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계1:11)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서머나,버가모,두아디라, 사데,빌라델비아,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계1:12)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계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1: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계1: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계1:16)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계1: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계1: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계1: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계1: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제 1막 서론: 그리스도를 중심에 둔 교회

1.서언과 음성
 요한은 다시 자신을 설명하는 내용으로부터 본문을 시작한다. 이는 참으로 요한계시록의 중요한 내용을 등장시키고 있음에 주의하여야 한다.

 (계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요한은 먼저 자신을 형제라고 한다. 형제라는 말은 신자간의 공통적 명칭이었으며, 그들이 같은 신앙적인 공동체의 지체들로서 경험한 밀접한 관계를 나타낸다.

 그러면 그가 어떤 의미에서 한 형제임을 주장하고 있는가? 그들의 공동적인 세 가지 단어로 표현된 체험 속에서 설명이 되고 있다.
 (계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바로 이 내용이 복음 안에서 현재의 우리의 주소를 잘 설명하여 주는 내용이면서, 동시에 요한계시록이 기록되고 있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바로 신앙인에게 주어진 현상태의 중요한 측면에서 시작이 되어야 한다.

①신앙인의 현주소
 ㄱ)나라에 동참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진리의 십자가와 부활 및 승천에서 우리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우리의 상태는 현재의 눈에 보이기에는 큰 차이가 없으나 벌써 놀라운 변화가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본문에 나타나는 "예수의 나라에 동참"하는 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골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골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을 얻었다는 것은 단순히 나중에 천국에 간다는 의미 이상이다. 이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 동참하는 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나라를 재림하시는 날에 영원하게 상속받게 되는 것이다.

 ㄴ)예수의 환난에 동참
 여기에서 동시에 따라오는 중요한 문제가 등장한다. 현재의 우리 상태는 여전히 사탄의 세력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이 땅에서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은 환난이다.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행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이 땅위에서 성도들(교회)은 사탄의 미움의 대상이다.

②신앙인의 자세(요한의 권의 측면이 지향하는 방향)
 ㄱ)현재의 자세-참음
 그러면 신앙인들이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처세하여야 하는가? 피할 길을 찾으라고 하는가? 아니다. 참음에 동참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요한계시록l:3의 지킴의 측면이 등장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나타나는 내용도 역시 잘 견디어 예비된 복을 누리라고 한다. 이것은 성경 전체의 측면에서 중요한 권고이다.
(마24: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빌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빌1:30)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ㄴ)요한의 동참의 모법
(계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있었더니"라는 말은 지금 현재의 기록 때는 밧모에 있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말로 보인다.
 그러면 그러한 고난이 신앙이 약한 자나 어떤 독특한 자에게만 있는가? 아니다. 오히려 요한은 자신도 그러한 고난에 동참하고 있음을 말한다.
 어떤 고난을 받았는가?-밧모라하는 섬에 있었다고 한다. 밧모라는 섬은 나무도 없고 바위만 있는 화산활동으로 인하여 생긴 섬이다. 그러면 거기에 왜 가는가? 요사이 소아시아에 가는 여행자들은 구경을 하러 가지만 요한은 그러하지 않았다. 그러면 왜 갔는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서라고 한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란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의 환난에 해당하는 내용이며, 그가 밧모에 있다는 사실은 참음으로 그 일을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계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바로 거기에서 요한계시록은 시작하고 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환난과 나라의 의미와 참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일을 위하여 요한은 부름을 받고 있는 것이다. 구약성경의 선지자로 비교한다면 독특한 일을 위하여 소명을 받은 사건에 해당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①부르심의 때-"주의 날에"
 요한은 주의 날에 부름을 받았다. 주의 날을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여호와의 날(요한계시록의 주요한 주제임에 틀림이 없다)로 설명하려는 주장도 있지만 그러나 종교적인 예배를 위하여 구별한 기독교인의 날인 주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안식후 첫날(행20:7,고전16:2)을 주의 날(주일)로 부른 최초의 기록일 것이다.
 기독교의 안식일이 주의 첫날인 주일에 주일 성수를 하게 된 것은 단순한 역사적 산물이 아니라 이미 사도 시대에 주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②계시의 방법-"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이 말은 바울이 말하는"성령 안에"있는 성도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롬8:9). 그것은 모든 성도들의 당연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령에 의하여 독특한 사건인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 된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다(행11:5,22:17.고후12:l,2). 이러한 경험은 구약의 선지자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었다.

③주어진 사명-(계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계1:11)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서머나,버가모,두아디라, 사데,빌라델비아,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ㄱ)큰 음성의 명령
-그 음성은 요한이 하나님의 영에 실존적으로 열린 상태에서 들린 음성이었다(10).
-그 소리는 요한의 뒤에서 나는 음성이었다.
-그것은 오해할 가능성은 없는 음성이다-나팔 소리같이 분명하고 명확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누구의 음성이었겠는가? 어떤 이는 15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소리는 많은 물소리 같기에 천사의 음성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4:l처럼). 그러나 17-19에서 기록하라고 명령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10,11의 음성도 동일하신 분의 음성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ㄴ)방법-"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보내라"
 2절(1:18,2:l,8,12,18,3:l,7,14,14:l3,19:9,21:5에도 보는 것이라는 말씀이 나온다)의 해석을 참조하라.

ㄷ)대상-일곱 교회인데 이는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단순히 7개의 교회 만이라는 의미보다는 환난과 나라에 동참하여 인내가 필요한 대상들을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말로 보인다(실제로 그 당시 7교회는 있었으며-그것은 어쩌면 7 우편 구역에서 유래되었을 수도 있다-그 내용은 2,3장에서 다룰 것이다). 그러나 그 특징은 분명히 7교회 이외의 다른 교회에도 적용이 필요하며 오늘에도 주신 것임에 분명하다.

2.계시자의 나타나심-승리자이신 그리스도
 요한은 여기서 단순히 계시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정도가 아니라, 나중에 설명이 되듯이 그 자체가 바로 계시였음을 보게 된다.

(계1:12)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요한은 자신에게 명령하신 분을 보려고 몸을 돌이켰다. 여기서 돌이키다는 말은 실제로 몸을 돌이킨 것이지 다른 상징적인 의미를 붙이는 것은 곤란하다. 그때에 그는 놀라운 모습을 보게 된다.

①"일곱 금촛대"
 일곱 금 촛대는 성막의 하나의 금촛대의 일곱 가지(출애굽기 25:36)모양이라기 보다는 솔로몬의 성전의 촛대의 모양을 생각나게 한다(왕상7:49). 그러나 그 숫자는 7보다 많은 듯하다. 그 의미에 대하여서는 20절(교회라고 한다)에 밝힌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요한의 입장에서 살펴져야 할 것이다.

②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
 여기에 인자 같은 이라는 말은 구약성경 다니엘7:13에서 나타나는 용어로,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는 인자라는 말을 항상 자신에게 사용하셨다. 그러나 이 명칭은 이 땅에서의 예수님을 가리키기보다는 단순히 사람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분이신 하늘의 예수님을 가리킨다. 그래서 인자 "같은"이라고 한다.

 바로 그 분이 촛대 사이에 있다는 사실을 주의하라. 먼 하늘에서 방관자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촛대 사이에 계시는 것이다. 그 의미의 적용은 나중에 설명부에서 다루어 보자.

 그러면 그 인자같은 이의 모습은 어떠한가?
(계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1: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계1: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계1:16)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이것이 어떠한 의미인가? 여기서 우리는 Caird의 말을 듣는 것은 지혜로울 것이다. 그는 각 설명적인 구절의 근원을 조사하여서 목록을 만든다는 것은  "무지개를 풀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요한이 이러한 암시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주의를 환기시키고 감동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며....그의 목표는 기억의 연상의 메아리를 울리게 하여......그의 독자들로부터 그가 예언적 황홀경에서 경험한 압도적이고 혼절케 하는 경이에 대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모습에서 여러 가지 구체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힘이 든다. 결국 어떤 의미를 붙였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100인100색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이것이 해석이 되면서 나타나는 부분에서 우리가 이 구체적인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무엇을 나타내려고 하는지는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는 구체적인 의미를 붙이려고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3.계시자의 명령
 이제 돌아본 요한에게 일어난 반응과 바로 그 인자 같은 이가 내리시는 명령이 따라 나온다.

1]계시자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바로 앞에서 본 계시의 모습에서 인자 같은 이의 모습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①(계1: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맨 먼저 요한의 반응이 나온다. 이 사실은 우리가 위에 본 인자 같은 이의 모습을 느끼게 만들어 주는 중요한 표현이다. 그것은 그가 본 그분이 바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존재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바로 하나님을 만나고서 나타났던 현상들이다(사6:5,겔l:28,단8:11,10:9,11). 즉 요한이 본 분은 단순히 땅에 계실 때 고난 당하시던 그러한 주님이 아니라 신적인 그리스도를 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위에서 나타난 계시의 장면에 대한 요한의 행동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이다. 그분의 모습이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존재이시다.

②(계1: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이제 요한에게 들려 오는 소리는 "두려워말라!"하시던 주님의 음성이시다(마14:27,17:7). 바로 말씀하시는 분이 처음이요 나중이시다. 구약에서 이 말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44:6)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48:12).
 그러면 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가? 이제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능력의 하나님이시기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요한에게 알리시고 계신다. 그 이유는 18절에서 계속된다.
 
③(계1: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8절에서는 그분이 우리들의 그 환난을 모르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전에 죽으셨던 분이시다. 그리고 이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살아 계신 분이시다. 그분은 본질적으로 생명을 소유하고 계신 분이신 것이다.
 바로 그분이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다(열쇠라는 말은 히브리 개념으로 권세를 가리킨다. 마태복음18:19참조). 그분은 무슨 열쇠를 가지시고 계시는가?  바로 사망과 음부의 열쇠라고 하신다. 물론 여기서 음부라는 말은 마태복음 16:18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마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바로 음부라는 말은 교회를 위협하는 세력을 대표하는 말로 등장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음부의 영역을 주관하는 권능과 권위를 가진 분이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누구도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음부란 무엇인가? 요한계시록에서는 6:8,20:13-14에서 등장하는데 꼭 죽음과 연결되어 등장한다. 이는 구약의 스올에 해당하는 단어로 사망을 달리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2]계시자의 명령
(계1: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여기의 기본적인 명령은 기록하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보내는 것을 포함하는 명령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11).
 그러면 기록할 내용이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네 본 것(1장)과 이제 있는 일(2,3장)과 장차 될 일(4장 이하)이라는 세 가지 내용으로 보려고 한다. 특별히 역사적으로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나 세대주의자들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맨 앞에 나오는 "네 본 것"이란 말은 계시의 또 다른 종류를 가리키는 말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이미 앞부분에서부터 계속적으로 요한계시록을 통칭하여 본 것이란 말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지 않는가(2,11절)? 그러므로 여기에서 본 것을 또 다른 내용으로 뒤에 나오는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과 전혀 다른 내용으로 설명하는 것은 오히려 전체의 통일성을 깨뜨리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본 것이라는 말은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요한이 보고 있는 계시(묵시)의 내용들은 바로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요한이 앞으로(어떤 의미에서 이미 쓴 것도) 쓸 내용은 바로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이다.
 그러면 질문은 이것이다. 어디까지가 이제 있는 일이고, 어디까지가 장차 될 일인가? 그러나 사실상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그렇게 나눌 수 있는지 의문이다. 오히려 본문의 의미는 네 본 것 즉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이라는 말로, 본 것 즉 묵시의 의미가 어디에 연결이 되어야 하느냐 하면 이제 뿐 아니라 장차 될 일에도 적용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19절의 의미를 가지고 역사적인 방법으로 나누려는 시도는 무의미한 노력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 현재와 미래를 구분하는 시도, 우리의 입장에서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려는 시도는 해석을 힘들게 만든다. 대부분의 내용이 미래에는 물론 과거와 현재에도 속한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한다.

3]요한의 본 것(12-16)의 의미
(계1: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이제 친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 요한이 본 계시의 의미를 친히 설명하신다. 그것은 놀랍게도 강조점이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니라  그의 손에 있는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왜 일곱 별인가를 볼 수 있다. 그것은 촛대가 일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 이를 비밀이라고 한다. 이는 10:7,17:5,7에도 나타난다. 즉 상징적 환상 자체가 의미가 아니라 내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 보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그 비밀의 내용은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를 나타내는 비밀(상징)이었고, 일곱 별은 이 일곱 교회의 사자라고 한다. 그러면 여기의 교회의 사자(헬라어로는 천사를 가리키는 단어인 앙겔로스이다)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가?
 유대교의 회당에서 "회당의 천사"라는 직분이 교회로 전입된 것인가, 아니면 7교회의 감독인가, 7교회에서 요한에게 혹은 요한이 7교회에 보낸 사자(메신저)인가, 교회의 수호 천사인가?

 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다니엘 10장과 비교하여 보는 것도 재미있다.
          요한계시록 1장                          다니엘 10장
          1:9 나 요한은                              10:2 나 다니엘이
          1:9,l0 기록 시기와 장소             10:4 기록 장소와 시기
                 밧모섬, 주의 날                          힛데겔강가, 정월 24일
          1:13 인자에 대한 묘사               10:5.6 한 사람에 대한 묘사
          1:17 요한이 죽은 자같이 됨      10:9 다니엘이 실신 함
     1:17 인자가 요한에게 손을 얹다   10:10 한 존재가 손으로 다니엘을 만짐
         1:17 두려워하지 말라                 10:12 두려워하지 말라
         1:19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10:14 말일에 백성들이 당할 일을 말하라
         1:20 일곱 교회의 사자들            10:13 군장(천사. 군)

 이렇게 비교하면 천사로 보인다. 물론 수호 천사의 개념은 성경에도 나타난다(마18:l0,행12:15). 또한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자들을 별로 나타내는 것은 군장이란 단어와 연결이 되어서 군장은 별로 연결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민24:17 ,마2:2).
 그러나 오히려 이는 교회와 동일시된 같은 자격자이거나, 교회의 지배적인 정신을 의인화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은 어느 누구라기 보다는 바로 교회 자체라고 이해하는 것이 또 다른 상징으로 대표를 통하여 나타난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면 이 환상의 의미가 무엇을 강조하는 것인가?
 먼저 인자의 오른 손에 있는 일곱 별의 의미부터 생각해 보자. 이는 9절의 내용과 연결하면 교회는 그의 나라이지만 동시에 환난을 받는 존재이다. 그러면 그때에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시는 것인가? 그저 하늘에서 구경이나 하시는 것인가? 아니다. 그의 오른 손 안에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다. 위의 18절에 나타난 대로 사망과 음부도 감히 교회를 넘나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환난에서 보호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자가 촛대 사이로 다니시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교회의 상황 속에서 교회만 내 팽개치시는 분이 아니시라 항상 깊은 관계를 유지하시면서 임재 해 계심을 느끼면서 살아야 한다.
 이 말은 우리의 위로이면서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조심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즉 인자는 우리를 보호하실 뿐 아니라 교회의 순수성을 보존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수성을 보호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책망하시고 징계하시기도 한다.

 결국 제 1막에서는 교회의 환난 당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내용으로 신앙인들은 참음으로 그 승리를 누려야 함을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