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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 - 베드로는 수신자들에게 자신을 두 가지호칭으로 소개하고 있다. (1)예수 그리스도의 종. '종'에 해당하는 헬라어 '둘로스'(*  )는 당시 사회에서 주인에게 완전히 예속되어 있는 '노예'를 가리킨다. 본문은 베드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바 된 존재이며 동시에 수신자들과 동등한 존재임을 나타낸 것으로 베드로 자신의 겸손을 시사한다(Blum, Green). (2)사도헬라어 '아포스톨로스'(* )는 문자적으로 '보냄을 받은 자'라는 의미로 베드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위임받아 행사하는 대리인임을 시사한다(Lenski, Blum). 이 것은 베드로 자신의 사역과 권위를 강조한 표현이다(Kelly,Bauckham). 한편 '시몬 베드로'로 번역된 헬라어 '쉬메온 페트로스'(* )에서 '쉬메온'은 '쉬므온'(* )을 헬라어로 음역한 것이며,'페트로스'는 아람어에서 유래한 '케파스'(* )와 동일한 것으로 '반석'을 의미하는 별명이다(서론참조).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본문이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두 위격(位格)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Plumptre, Mayor, Windisch,Kasemann). (2) 혹자는 '하나님과 구주'가 예수 그리스도를 수식하는 것으로 한 위격(位格) 즉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고 주장한다(Bauckham, Blum, Bigg).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과 구주'는 하나의 관사인 '투'(* )에 의해서 수식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란 칭호는 비록 드물게 사용된다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칭호로 사용되고 있으며(요 1:1,18;20;28;히 1:8,9) '구주'또한 기독론적 칭호로 사용되고 있다(11절;2:20;3:2,18;눅 2:11;요 4:42; 행 5:31;13:23;엡 5:23;딤후 1:10;딛 1:4;2:13;3:6). 한편 '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카이오쉬네'(* )는 '동일하게 보배로운'과 연결된 것으로 (Bigg,Bauckham) 믿음을 힘입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라기보다는 (Spicq, Stoger)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공정함을 의미한다(13절;2:5,7,8,21;3:13, Green, Bauckhanm, Bigg).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 - '동일하게 보배로운'의 헬라어'이소티몬'( )은 '이소스''(* , '동등한')와 '티메(*, '명예')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 '같은 특권을 가진'이란 의미이다. 이것은 '우리와'와 대조된 것으로 혹자는 베드로와 같은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을대조시킨 것이라고 주장하나(Plumptre, Mayor, Leaney) 베드로와 같은 사도들과 사도가 아닌 그리스도인을 비교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Moffatt, Spicq, Zahn,Lumby,James). 왜냐하면 본서에서 유대인 그리스도인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Bauckham).따라서 본문은 본서의 수신자들이 베드로와 같은 사도들과 동등하게하나님을 의지하여 구원에 동참하였음을 시사한다.

=====1: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 본절의 '앎'은 일반적인 지시를 뜻하는 헬라어'그노시스'(* )가 아니라 '온전한 지식'을 의미하는 헬라어 '에피그노시스'(* )이다. '에피그노시스'는 기독교로 개종하여 구원을 얻는데 꼭 필요한 결정적인 하나님의 지시를 말하는 반면에(3절;2:20, Bultmann), '그노시스'는 기독교적 생활 과정에서 획득되어지고 발전되어지는 지식을 의미한다(5절,6절;3:18,Bau-ckham).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에피그노시스'를 통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하여보다 깊고 참된 지식을 소유하게 되며 은혜와 평강을 누리게 된다(Green).

=====1: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 '신령한능력'의 헬라어 '테스 데이아스 뒤나메오스'(* )는 '희한한 능력'(행 19:11)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을말한다(수 22:22;시 50:1;사 9:6;겔 10:5). 그러나 '테스 데이아스 뒤나메오스'를 수식하는 '그의'가 가장 가깝게 언급된 것이 '그리스도'이며 1절에서 '우리 하나님'이란칭호가 그리스도에게 사용된 것으로 보아 본문은 '그리스도의 신적인 능력'으로 보는것이 타당한 듯하다(Green, Bauckham, Bigg).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제2위격이신 하나님으로서 하나님과 같은 신기한 능력을 소유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능력을 공유한 자이심을 시사한다(Fornberg, Bauckham). 한편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신적인 능력을 통해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받게 된다. '생명'은 인간들이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는 원동력, 즉 예수께서 공급하시는 힘을 의미하는 것으로(요 1:4;요일 5:11, 12) '영생'을 암시한다. 또한 '경건'은 변화된 자가 지니게되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행 3:12;딤후 3:5) 하나님의 뜻을존중하고 순종함으로 누리게 되는 도덕적인 생활을 시사한다(Bauckham).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 '영광과덕'의 헬라어 '독세 카이 아레테'(* )는 신적인 능력의 현시로서 구약에서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나(LXX 사 42:8, 12) 본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영광과 덕'을 통해서 사람들을 변화시키며 회개토록 역사하신다(Blum). 한편 본서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강조하므로(8절;2:20) '부르신 자'는 하나님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봄이 타당하다(Bigg, Green, Bauckham).

=====1:4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 이 약속은 그리스도의 영광과 덕으로말미암아 주어진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미래의 일들 즉 그리스도의 재림(3:4,9,12),새 하늘과 땅(3:13)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11절)에 참여케 되는 것을 가리킨다.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 '피하여'의 헬라어 '아포퓌곤테스'(* )는 부정 과거 분사로서 '피한 이래로'라는 의미이다(Bigg, Blum).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은 후부터 죄와 정욕과 거리가 멀어지며 피하게 된다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네스데데이아스 코이노노이 퓌세오스'(* )에서 헬라어 '데이아스'(* , '신에게 속한')는 성경적 용어라기보다는 헬라 사상에 따른 이교적 표현이다(Richardson). 베드로는 이 단어를 의도적으로사용하여 그의 논쟁을 전개시키고 있다(Kasemann). 그러나 본문은 이교도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의 내면에 본래부터 신과 같은 거룩한 성품이 있어서 이것을 잘 계발하면 성인(聖人)이 되고 거스리게 되면 악인(惡人)이 된다는 사상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참된 연합을 통해서 성령의 교제로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됨을 시사한다(Bigg, Green).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로 거듭나게 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참된 영적 교제를 나누며(요 14:16,17,26), 장차나타날 영광과 축북에 참여하게 된다(롬 8:18).

=====1:5,6,7
 이러므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 아우토 투토'(* )는 문자적으로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for this very reason)라는 의미로 3,4절전체를 받는다(Bauckham). 더욱 힘써...
공급하라 -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통해서 얻은 구원에만 만족해서는안 된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데 필요한 모든 영적 자원을 주셨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이 그 자원을 바탕으로 자발적으로 성숙을 향하여 진보해가야함을 권면한다. '공급하라'의 헬라어 '에피코레게사테'(* )는 무대 공연 비용을 지불하는 사람을 가리켜 사용된 것으로 풍부하게 공급하고 지원하라는 의미이다(Green, Blum).
 믿음에 덕을 - '믿음'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로서(엡 2:8,9)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이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게 되며 세상과 썩어질 것을 피하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된다(4절). 따라서 이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밑바탕이 된다(롬 5:1; 히 11:1;유 1:20). 베드로는 이 '믿음'에 '덕'을 공급하라고 권면한다. '덕'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레텐'(* )은 '디카이오쉬네'(*, '의')와 동일한 것으로 도덕적인 탁월성을 의미한다(Bauckham,Green).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덕을 말하는 것으로(3절)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닮음으로 도덕적 탁월성을 배울 수 있음을 시사한다(빌 4:8;벧전 2:9).
 덕에 지식을 - '지식'은 기독교인이 덕있는 생활을 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 또는 '통찰력'을 말한다(롬 15:14;고전 13:2;벧전3:7, Bauckham).이것은 점진적으로 획득되어진다.
 지식에 절제를 - '절제'는 고대 그리스 사상과 헬레니즘의 철학적 윤리학에서 높이평가되는 덕목이다. 신약성경에서 절제는 육체적 욕망의 지나친 방종과 이방 세계의성적 남용(濫用)에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성령의 열매에 속한다(갈 5:23).
 절제에 인내를 - '인내'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리라고 소망하는 가운데 고난과 악에 대항하여 용기있게 지속적으로 참는 것을 가리킨다(Bauckham). 이것은 믿음을 지속하는 능력이며 세상 체계의 압박에 저항하는 능력으로(눅 8:15;롬 5:3;히 12:2) 환난에 직면해서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견디어서 끝내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다.
 인내에 경건을 - '경건'은 삶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며 헌신하여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을 가리킨다(Green, Blum). 특별히 초기 기독교에서는 이 말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존경과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도덕적 생활방법을 나타낼 때 사용하였다.
 경건에 형제 우애를 - '형제 우애'는 베드로전서에서도 이미 언급되었으며(벧전1:22;3:8) 또한 신약성경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진 덕목이다(롬 12:10; 살전 4:9;히13:1; 요일 5:1). 이방 세계에서는 이 단어가 혈육을 나눈 가족간의 사랑을 나타낼 때사용되었으나 초대 교회에서는 믿음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가 된 그리스도인들의 교제를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Bauckham).
 형제 우애에 사랑을 - '믿음'으로 시작된 그리스도인의 덕목이 '사랑'으로 완성된다. '사랑'은 모든 덕목들 가운데 으뜸이며(고전 13장), 사랑의 본체인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세상에 보여주신 것으로 남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행동을 의미하며,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다(요 3:16;롬5:5; 요일 3:16;4:8). 이와 같은 덕목들은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들이 맺어야 하는 열매로서 바울이 언급한 '성령의 열매'(갈 5:22,23)와 '하나님의 사람'(딤전 6:11)이 갖추어야 할 덕목과 내용이 유사하다. 위의 모든 덕목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점진적으로 얻을 수 있으며, 각 덕목은 다른 덕목들과 상호 관계 속에서 생성되며 발전된다.이러한 덕목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사랑으로 완성되어가야 한다(Bengel).

=====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 본문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주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앞서 언급한 덕목들의 목적이요 부산물이라고 주장한다(Mayor, Reicke, Green, Spicq). (2)혹자는 그리스도을 아는 지식이 앞서 언급한 덕목들의 근원이라고 주장한다(Bigg, Kelly, Bauckham). 이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자신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의 성품에참여할 수 있도록 하시며(3절) '알기에'라고 번역된 헬라어 '에피그노신'(*  )이 2절에서도 언급된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그리스도인의 전생활에 기본이 되는 구원얻는 지식임을 가리키기 때문이다(Bauckham).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 '게으르지'(* ,아르구스)와 '열매 없는'(* , 아카르푸스)은 본서에서 동의어로 사용된다(Bauckham). 이 두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대부분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있어서 윤리적 노력과 관계되어 쓰여졌다. '게으름'은 '행함이 없는 믿음'(약 2:20)을, '열매없음'은 윤리적 특성이 드러나지 않는 삶을 나타낸다(마 3:8;막 4:20;갈 5:22;골 1:10;약 3:18).

=====1: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 5-7절에서 언급한 덕목들을 갖추지못한 자들에 대한 묘사이다. '소경'의 헬라어 '튀플로스'(* )는 신약성경에서 진리 보기를 거절하거나 보지 못하는 자들을 은유적으로 표현할 때 사용되어졌다(마 15:14;23:16;눅 6:39;요 9:40,41;롬 2:19). 또한 '원시치 못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뮈오파존'(* )은 '근시'라는 의미로 본절에서는 '튀플로스'와 함께 결합하여 장님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Bauckham). 앞서 언급한 덕목들을 갖추지 못한 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의 빛을 잃어버려서 영적 안목이 어두워진 자들이다(계 3:17, Bigg). 이들은 바로 앞에 놓여 있는 인간적인 탐욕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한다.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 본절은 과거에 그리스도인들이 받았던세례에 대한 언급이다. '옛'에 해당하는 헬라어 '팔라이'(* )로 미루어 볼때 베드로는 본절에서 과거에 행한 세례를 염두에 두고 있으며 죄가 청산된 것을 잊어버리고 과거로 되돌아가려는 자들을 전제로 언급하고 있다(Blum, Bigg). 또한 '깨끗케하심'의 헬라어 '투 카다리스무'( )도 역시 정결케 하는세례를 가리킨다(행 22:16;고전 6:11;엡 5:26;딛 3:5). 본래 세례는 죄 용서와 더불어이제까지의 죄된 생활을 시작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믿음을 세례에만 국한시킨나머지 거룩한 삶을 추구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옛 죄악의 상태로 되돌아갈 위험이있다(2:20). 이에 베드로는 죄악된 삶으로 되돌아가려는 경향을 경고하면서 세례가 죄를 씻을뿐만 아니라 더이상 죄에 머물지 않고 성결한 삶을 살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음을 상기시킨다(Bauckham).

=====1:10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 본절은 5절의 반복으로 부지런히 애쓰라는 권면이다. '굳게 하라'의 헬라어 '베바이안...포이에이스다이'(* ...  )에서 '베바이안'은 의사(意思)를 확인할 때 사용하는 법률 용어로 무엇을 '확실히 한다'는 의미이며, '포이에이스다이'는 중간태로서 수신자 스스로가 해야하는 일임을 시사한다(Blum, Bauckham, Bigg). 한편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의 구원이 하나님의 '부르심'(벧전 1:15;2:9,21;3:9;5:10)과 '택하심'(벧전 1:2)에 관계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Richardson). 그런데 베드로가 본절에서 '부르심'을 먼저 언급한 것은인간의 응답에 강조점을 두기 위함이다(Blum). 즉 복음에 합당한 윤리적 삶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인은 은혜 안에서 이루어지는 도덕적인 노력을 통해서 거룩한삶을 영위해야 하며 궁극적인 구원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Blum, Bauckham).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 '실족'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타이세테'(* )는 원래 말(馬)이 '디딤돌에서 미끌어지는 것'을 나타낸다.'프타이세테'에 대해서 혹자는 '범죄'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롬 11:11;약 2:10;3:2,Blum, Green). 그러나 본절의 '프타이세테'는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구원얻지 못하는 것을 시사한다(유 24:Bigg, Richardson, Kelly, Lenski, Grundmann). 왜냐하면 다음 절에서 영원한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노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Bauckham).

=====1:11

 이같이 하면...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 '주시리라'의 헬라어 '에피코레게데세타이'(* )는 7절에 언급된 '공급하라'와 같은 단어로, '넉넉히'(* ,플루시오스)와 함께 결합되어 하나님께서 거룩한 관대함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기에 충분하도록 하실 것임을 시사한다(Bauckham). 비록 베드로가 앞절에서 궁극적인 구원을 얻는데 인간의 노력이 필요함을역설하였으나 본절에서 또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고 있다(3절).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를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묘사하지않고 그리스도께 속한 것으로 진술한다(눅 1:33;계 11:15). 베드로가 이렇게 표현한이유는 아마도 본 단락(3-11절)에서 언급된 기독론적 관심과 일치시키기 위함일 것이다(Bauckham). 이러한 그리스도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으로(눅 22:30)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하며(마13:41;16:28;눅 23:42;요 18:36) 미래에주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을(3:13)가리킨다. 한편 '우리 주 곧 구주'의 헬라어 '투 퀴리우 헤몬 카이 소테로스'(* )는 문자적으로 '우리 주이시며 구세주이신'이란 의미로 기독론적 칭호이다(2:20;3:2,18).그리스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구세주이실 뿐만 아니라 온 우주의 주(主)이시다.

=====1:12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 '진리'는 '복음'을 가리키는 것으로(갈 2:5,14;5:7;엡 1:13;골 1:5;살후 2:12,13;딤후 2:15;약 1:18;요이 1:4) 전반적인 사도적 가르침을 시사한다(Green, Blum, Bauckham). 한편 '섰으나'의 헬라어 '에스테리그메누스'(* )는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형제를 굳게 하라'고 권면할 때 사용하신 단어와 동일한 것으로(눅 22:32) 수신자들이 기독교 신앙안에서 가르침을 받고 굳게 서있기 때문에 거짓된 가르침의 위험에 쉽게 넘어지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베드로는 본절에서 수신자들이 사도적 진리를 바탕으로 굳게 선그리스도인들임을 인정하고하고 있다.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 - 베드로는 수신자들이 이미 진리에 서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다시 권고하는 이유가 수신자들로 하여금 항상 진리를 상기하고 부지런히 애써서 진리 가운데 굳게 서있게 하기 위함임을 역설한다.


=====1:13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 '장막'의 헬라어 '스케노마티'(* )는 문자적으로 고대 근동의 유목 민족들이 임시적인 거주지로 사용했던 '천막'을 가리킨다. 본절에서 이것은 '육체'를 가리키므로 본문은 '목숨이 살아 있을 때까지'를 의미한다. 이는 베도로가 자신의 죽음이 곧 다가올 것을 예감하였음을 암시한다(14절,Blum, Bauckham, Green).

=====1: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 본절은 베도로가 자신의 죽음의 임박함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설명해주고 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에게서 받은지시는 요 21:18을 가리킨다(Plumptre, Bigg, Lumby, Green, Zahn, Bauckham,Lenski). 요 21:18은 예수께서 친히 베드로가 노년에 당할 순교에 대해서 예고하신 것으로 베도로는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하기 이전에 이미 그 예고를 알고 있었으며(Robertson) 당시 초대 교회에서도 요 21:18의 예수 그리스도의 예고가 베드로의 순교에 대한 예언이라는 것을 대부분 광범위하게 알고 있었다(Bauckham). 따라서 요 21:18의 베드로 순교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은 그의 임박한 죽음에 대한 암시가 되며본서의 수신자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다.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 베드로는 그의 죽음이 가까와옴을 깨닫고 있었다. 여기서 '임박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키네'(* )는 베드로가사용한 독특한 용어로서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2:1). (1)'곧'(사 59:7), '신속한'(약 1:19)을 의미한다(Bauckham). (2) '갑작스런'을 의미한다(2:1, Green, Zahn,Plumptre). 이 두 가지 의미 중 어느 한 견해를 선택하기는 어려우나 두 가지 의미 모두가 베드로의 죽음의 절박함을 표현한 것으로 그의 순교의 임박함을 암시한다(Meyer,Bengel, Bigg).

=====1:15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하노라 - '이런것'은 베드로가 수신자들에게 행한 '교훈'이나 '권면'을 가리키는 것으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이런 것'이 미래 즉 베드로의 죽음 후에 주어진권면을 가리키며, 마가가 베드로의 해석자로서 베드로의 설교를 근거로 마가복음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이런 것'은 '마가복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Irenaeus, Plumptre,Bigg, Mayor, Green). (2)혹자는 '이런 것'이 본서 자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Knopf, Chaine, Windisch, Kelly, Grundmann).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서내에서 마가복음과 상관 관계를 맺는 암시가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본서전체와 12-15절은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Bauckham). 따라서 베드로는 본서에서언급한 모든 교훈과 권면이 자신의 죽음 후에도 보존될 뿐만 아니라 수신자들에게 계속적으로 상기되어서 수신자들로 하여금 진리 안에 굳게 설 수 있게 될 것임을 확신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나의 떠난 후'는 '나의 죽음 후'를 의미한다. 여기서 '떠난'의 헬라어 '엑소돈'(* )은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의미하며은유적 표현으로 '죽음', '임종'을 시사한다(눅 9:31).

=====1: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 본서에서'능력'과 '강림'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나타난다. '강림'의 헬라어 '파루시안'(* )은 일반적으로 영광 중에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종말론적인의미로 사용되었다(마 24:3,27,37,39;살전 3:13;4:15;약 5:7,8;요일 2:28). 혹자는 이것이 그리스도의 초림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나(Spicq, Chase) 본절의 '파루시아'는 미래에 있을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킨다고 봄이 타당하다(Bauckham, Green, Blum). 왜냐하면 베드로는 본 서신 전체에서 거짓 교사들의 그릇된 가르침으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종말론적인 가르침 즉, 영광중에 오실 그리스도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3:4,12). 한편 '능력'의 헬라어 '뒤나민'(* )은 '파루시아'와 연결되어 '영광'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마 24:30;막 9:1;13:26;눅 21:27,Bauckham). 그리스도의 능력은 재림하실 때 온 세계에 완전하게 드러나게 된다(마26:64;막 14:62;행 1:11;히 9:28). 그의 능력은 재림을 통해서 불법한 자와 적대자들을 심판하시고(살후 2:8;계 19:11-16) 그 나라를 온전히 완성하심으로(계 11:15-18)드러나게 된다.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자라 - '공교히 만든 이야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세소피스메노이스 뮈도이스'(* )는 '지어낸 말', '허구', '우화', '신화', '거짓말'을 뜻하는 고대 용어로 신약성경에서 복음의 진리와 대조되어 항상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다(딤전 1:4;4:7;딤후 4:4;딛 1:14). 베드로는 사도들이 전하여준 종말론적 교훈들이 거직 교사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님을 강력하게 변호한다. 당시 거짓 교사들은 사도들의 종말론적 권면이 수신자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하여도덕성을 유지시키기 위함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러한 종말론적 권면을 사실적이고 문자적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우화적으로 해석하였다(Bigg, Bauckham, Blum). 그래서 베드로는 이러한 거짓 교사들의 교훈을 강력하게 반박하면서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재림등 사도들이 전하여 준 교훈들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님을 주장한다. 한편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위엄을 친히 보았음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위엄'은 신적인 권위와 장엄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베드로가 목격한 예수의 변화산상 사건을 가리킨다(Green, Bigg).'친히 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포프타이'(* )는 신비 종교들에서 사용된전문 용어로서 가장 높은 경지의 신비를 경험하였음을 가리키는 말이다(Kelly,Green). 베드로는 거짓 교사들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와 어휘들을 채택하여 그들의 거짓된 가르침을 반박하고 있다(Blum).

=====1:17
 지극히 큰 영광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 '지극히 큰 영광'은 변화산상사건의 구름과 연결된 히브리적 표현으로서(출 16:10;민 14:10;겔 1:4) 하나님의 초월성을 드러내는 표현 방법이다. 이와 같은 표현은 변화산상의 사건은 물론(마17:1-9;막 9:2-10;눅 9:28-36) 구약의 시내산 사건(출 24:16)에도 나타난다. 그러나본절에서 베드로는 시내산 사건이 아니라 변화산상 사건의 독특성을 약화시키지 않기위함이다. 베드로는 변화산상 사건에서 계시된 예수를 모세와 같은 종말론적 예언자로본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왕이신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보고 있다(Bauckham, Blum).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 '내 아들'은 유대주의에서 메시야에 대한 진술로 해석한 시 2:7의 인용이다. 시 2편에 의하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야는 '아들'이라 불리며(7절) 시온산에서 왕으로 등극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모든 적대 세력을 지배하시고 다스리신다(8,9절). 초대 교회는 이런 시 2편을예수께 적용시켜 예수께서 재림 때에 종말론적인 심판을 행사할 것으로 해석하였다.또한 '내 사랑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아가페토스 무'(* )는 메시야의 칭호로서 구약성경에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유일한자' 혹은 '독자'라는 해석으로(창 22:2, 12, 16) 예수께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시사하며, 다른 하나는 '선택된 자'라는 해석으로 (사 42:1) 예수께서 메시야 직분을 수행하기 위해서 선택받은 자이심을 시사한다(Bauckham). 한편 '내 기뻐하는 자'는 사42:1의 인용으로 메시야 직분을 수행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기쁘게 선택하셨음을시사한다(Green, Bauckham).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 여기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부르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들됨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한편 '존귀와 영광'의 헬라어 '티멘 카이 독산'(* )은 일반적으로 한 짝을이루고 있는 단어이다(시 8:5;히 2:7, 9;벧전 1:7). '존귀와 영광'에 대한 해석은 세가지이다. (1)혹자는 예수의 변형된 모습의 영광스러움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igg,Windish).(2)혹자는 하늘 음성에 의하여 예수에게 주어진 '위엄'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Grundmann, Chase, Muller). (3)혹자는 '존귀'는 음성을 통해서 예수에게 주어진위엄을 의미하며, '영광'은 가시적인 변형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ayor, Wand,Green, Kelly). 그러나 '존귀와 영광'은 엄밀하게 구별할 수 없는 이중적인 표현으로하나님께서 예수의 변형된 모습의 영광스러움에 아들이심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시는 존귀를 부여하셨다는 의미로 봄이 타당하다(Blum). 따라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성한 영광을 입으셨으며, 하나님의 대리자인 왕으로서 종말론적인 심판과 통치를 수행할 임무와 권한을 부여받았음을 암시한다(Bauckham).

=====1:18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 '거룩한 산'은 구약성격에서 시온 산을 의미하나 역사적으로 시온 산에서 예수께서 변형하셨다는 근거가 없다(Green). 그래서 오늘날 그 산이 구체적으로 어느 산을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으나 대부분 헤르몬 산이나 다볼 산 중의 하나로 보고 있다. 그 산이 어느 산이든지 간에 베드로가 그 산을 '거룩한 산'이라고 부른 이유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 산에 영광 가운데 임하셨고 예수의 신적 영광이 그 산에서 나타났기 때문이다(Bigg).

=====1:19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 본절에서'더 확실한 예언'은 구약 전체에 나타난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의미한다(Blum,Bauckham, Spicq, Kelly, Grundmann). 베드로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들이 자신들이 체험하고 전하고 행한 일들과 동일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변화산상 사건이 구약의 예언자들이 미리 예상했던 예언의 성취로서 미래에 나타날 파루시아(재림)를 확실히 보증해줌을 진술한다(RSV, NIV, Bauckham). 한편 베드로는 '예언'을 '어두움을 비추는 등불'에 비유한다. '어두운 데'는 빛되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을 의미한다(사 9:2;엡 6:12). 그 예언의 말씀은 등불로서(시 119:105)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을 향해 빛을 비추는 역할을 한다(Blum).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 '날'은 재림의 날을 가리키며(Blum, Green) '샛별'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계 22:16). 따라서 '날이 새어 샛별이...떠오르기 까지'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까지'를 의미한다. 한편 '너희 마음에'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혹자는 본절이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삶 가운데 일어나는 계몽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Plumptre, Spicq, Grundmann, Kasemann). (2)혹자는 본절이 종말론적인진술이나 말씀을 연구하는 가운데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내면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chelkle, Kelly, Green). (3)혹자는 그리스도의 실제적인재림의 때에 초래되는 그리스도인들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lum, Bauckham).세 가지 견해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1:20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 베드로는 성경에 나타난 모든 예언들을 함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여기서 '사사로이 풀 것'의 헬라어 '이디아스 에필뤼세오스'(* )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1)성경의 어떠한 예언도 사람이 개인적으로 해석할 문제가 아니다(NIB, RSV, KJV,Blum, Bauckham). (2)성경의 어떠한 예언도 예언자 자신의 해석에 의한 것이 아니다(Calvin, Plumptre, Lumby, Green, NIV). 두 가지 견해 중 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본서에서 베드로는 당시 거짓 교사들이 성경을 임의로 그릇되게 해석하고 있다는 점을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2:1;3:16).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 베드로는 예언의 말씀이 사사로이 해석되지 않아야 되는 근거로 성경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제시한다. '하나님께 받아 말한것'이라는 베드로의 진술은 성령의 이중적인 저작권을 암시한다. 즉 원저자이신 성령께서 영감을 통해서 성경 기록자에게 오류가 없는 성경을 기록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고전 14:37;딤후 3:16;딤후 3:10-17 주제 강해 '성경 영감론' 참조). 구약의 제자들도 역시 자신들의 예언이나 말씀이 자신의 뜻이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밝히고 있다(삼하 23:2;렘 1:7,9). 그러나 당시의 거짓 교사들은 재림에 대한 구약성경의 예언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부정하였을 뿐만 아니라선지자 자신이 표적이나 꿈, 환상을 통하여 지어낸 신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16절). 베드로는 이러한 거짓 교사들의 주장을 논박하기 위하여 본절에서 구약성경의 예언에 대한 신적 기원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본 서신은 소아시아에 흩어져 살고 있던 성도들에게 권면을 하기 위해서 쓰여진  베드로의 두번째 편지이다. 첫번째 편지에서 베드로는 고난당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그것이 장차 영광으로 변할 것이므로 소망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 소망을 변호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두번째 편지인 본 서신에서는 믿음 안에 있는 성도들을 혼란케 한 거짓된 가르침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본서에 나타난 거짓된 교사들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윤리  의식의  부재(不在)였다. 이들에 의하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성도들은  더 이상 윤리적으로 살지 않아도 되었다. 이러한 가르침들은 초대 교회 안에 많은 문제들을 야기시켰다. 그래서 베드로는 본장에서 건전한 윤리적 생활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성도들의 믿음은 포괄적인 일련의 덕성으로 나타나야만 하는 것이다. 성도들은 거룩한 삶에의 추구를 통하여 그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해야  한다.  성도들이  선(善)에 부요한 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1) 중심 주제. 성도들에게 있어 세상에서의 삶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목적은 이 세상과 관련되어 있다. 성경은 구원의 범위가 인간만으로 한정되지 않고 이 세상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즉 온 우주를 포함하는  하나님의 창조의 중심이 세상이었고,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에게 부여하신 사명  또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관리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이 타락되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서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이 수행되는 장소가 바로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목적과 이 세상의 구속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성도에게 있어서 세상의 삶은 무의미할 수 없다. 성도의 삶의 의미는 단지 현세(現世)에서 '미래의 천국'을 기다리는 것 자체에 있지 않다. 오히려 복음서를 보면,  예수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그들의 삶의 의미를 이 세상, 이 인간 사회에 두도록  강조하셨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 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거듭난 이후의 삶, 즉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성도의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그에 따르는 책임 혹은 의무가 주어지며, 그것을 수행해 나가는 것은 바로 제자된 자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이유요 목적이 된다. 프란시스  쉐퍼는 이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곧 그리스도인들)은 이곳(세상)에 살고 있으며,  바로
이곳에 그들의 생(生)의 목표와 하나님을 위한 의무가 있다. 예수의 제자들은  염세주의자나 도피주의자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조직 속에 살고 있지도  않으며,  그렇게 살아서도 안 된다."
  성도의 의무란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왜곡되고 타락한 이 세상의 질서를 하나님의 뜻대로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2) 중심 사상. 베드로는 성도의 윤리적 삶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한다.  윤리란
'사람이 살아가야 할 마땅한 도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정의에 입각하여 성도의 윤리를 정의하면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마땅한 도리'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성도의 윤리라고 하면 성도들의 삶의 본질과 상관없는 것, 또는 신앙의 악세사리 정도로 생각을 한다. 그러나 성도의 윤리적 삶은 살아도 되고 안  살아도 그만인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한 사람을 도덕적으로 만드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도의 윤리적 삶은 그의 본질과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다. 성도들은  그의 성도됨을 포괄적인 일련의 덕성으로 나타내야 한다. 성도들은 끊임없는  결단  속에서 윤리적 삶을 살기에 힘써야 한다. 이것이 그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10절)하는 것이다.
  (3) 내용 분석. 본문은 크게 4개의 단락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 단락(1,2
절)은 저자와 수신자 사이의 인사말을 담고 있으며, 둘째 단락(3-11절)은 성도들의 윤리적 삶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셋째 단락(12-15절)은 베드로가 본  서신을  집필한 동기에 대한 내용이며, 넷째 단락(16-21절)은 그의 가르침을 반대하는 사람에 대한 대답을 다루고 있다. 본장의 내용을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
|                            성도의 윤리적 삶                                  |
+-------------+----------------------+--------------------+--------------------+
|   1,2 절    |     3 - 11 절        |    12 -15 절       |     16 - 21 절     |
+-------------+----------------------+--------------------+--------------------+
|   인사말    |  성도의 윤리적 삶    |    집필 동기       |   베드로의 변증    |
+-------------+----------------------+--------------------+--------------------+

  1. 인사말(1:1-2)
  1,2절에서 우리는 저자와 수신자 그리고 문안의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본  서신의 저자는 1절에서 보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베드로'이다. 여기서 특이할 만한 점은 그가 '사도'라는 칭호와 함께 '종'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헬라어에서 '종'(             ,둘로스)이라는 개념은 주인에게 완전히 예속되어 있는 노예를 의미하였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란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히  예속되어 철저히 그분의 말씀을 지키며 충성을 다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한편 '사도'( ,아포스톨로스)란 '보내다'( ,아포스텔로)라는
동사에서 온 명사로 '파송된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전서와 달리 후서에서는 수신자들이 사는 장소가 어디이지 밝혀져 있지 않다.  하지만 3:1에 기록된 내용으로 보아 수신자들은 전서에 기록된 자들과 동일한 성도들일 것이다. 베드로는 그의 두번째 편지에서 그의 편지를 받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이라는 칭호를 적용시킨다. 사람의 의(義)는 다 더러운 옷과 같아서(사 64:6)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고 자신하지 못한다. 성경은 말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어떤 사람들은 의로워지기 위해서 계명들을 읽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자신의 수고와 노력으로 의롭게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롬 3:10).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될 수 있는가 ?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義)를 덧입을 때 비로서 가능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지은 죄로 인하여 아무도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생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사 인간의 죄를 짊어지게 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나 자신을 그분의 말씀에 복종시킬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게 된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것을 '보배로운 믿음'이라고 불렀다. '보배로운'이란 말은 '정말로 가치가 있는 것',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어떤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이 보배로운 이유는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었던  내가 주께서 덧입히신 의(義)로 인해 다시 살게 되었으며 나의 모든 죄가 용서받고 장차 하나님 앞에 완전하게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보배로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갖게 함으로써 '은혜'와 '평강'을 풍성히 누린다.

  2. 성도의 윤리적 삶(1:3-11)
  본문에서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믿음 안에 거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말을  한다. 하나님께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3절)을 성도들에게 주신 목적이 무엇인가 ? 그것은 '정욕을 인하여 세상의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4절)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것은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4절)이다. 본문에  기록된 '주었다'의 헬라어 '데도레타이'(                   )는 '도레오마이'( '선사하다')의 완료 중간태 직설법으로 '그가 약속을 주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삶 속에서 약속을 이루어 가신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는 '정욕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4절)을 피해야 한다. '피하여'( ,아포퓌곤테스)라는 동사는 고대 복합 동사인 '아포퓨고'(        )의 부정 과거 능동태 분사로 '멀리 도망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는 정욕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으로부터  멀리 도망친 상태에 놓여 있어야 한다.
  5-7절은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힘써야 할 덕목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이것을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
|순서| 덕 목 |       내                      용       |      참 고  구 절      |
+----+-------+----------------------------------------+------------------------+
| 1  | 믿 음 |하나님의 선물로서 성도의 신앙 생활의    |롬 5:1; 엡 2:8; 히 11:1;|
|    |       |첫 관문                                 |유 1:20                 |
+----+-------+----------------------------------------+------------------------+
| 2  |  덕   |하나님의 탁월하신 성품을 따라 모든      |롬 14:19; 엡 4:29;      |
|    |       |일에 선을 추구하는 용기                 |살전 5:11               |
+----+-------+----------------------------------------+------------------------+
| 3  | 지 식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올바른 삶을 살아     |롬 15:14; 고전 13:2     |
|    |       |가게 하는 판단력 또는 이해력            |벧전 3:7                |
+----+-------+----------------------------------------+------------------------+
| 4  | 절 제 |하나님을 안 자가 계속해서 자신을 바로   |행 24:25; 고전 7:5      |
|    |       |파악하고 자신을 매사에 통제할 수 있는 힘|갈 5:23                 |
+----+-------+----------------------------------------+------------------------+
|    |       |예수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환난에 직면해서|고후 1:6                |
| 5  | 인 내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견디어서 끝내|약 1:3                  |
|    |       |는 승리를 쟁취하는 것                   |                        |
+----+-------+----------------------------------------+------------------------+
|    |       |새로운 시각에서 하나님과 자신을 발견하고|딤전 4:7,8              |
| 6  | 경 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 세상에 자신을 방 |딤후 3:5                |
|    |       |임하는 일을 삼가하는 일종의 헌신        |                        |
+----+-------+----------------------------------------+------------------------+
| 7  |형제애 |인간을 위한 희생과 봉사와 친절          |롬 12:10; 약 2:15,16    |
+----+-------+----------------------------------------+------------------------+
| 8  | 사 랑 |성도가 갖추어야 할 인격 중 최고의 덕목  |롬 13:8; 고전 13장      |
+----+-------+----------------------------------------+------------------------+
  8-11절에 이르는 내용은 5-7절에 이어 계속되는 권고이며, 5-7절의  내용의  근거와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다. 그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 것에 관심을 갖지  아니하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에 자신을 복종시키지 아니하는 자는 성도의 생활의  근본 목적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이러한 자는 인생의 최종 목표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눈 앞에 떨어지는 생(生)의 부스러기에 자신의 영혼이 멍들어 간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성도의 삶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나는  것이다.
              
  3. 집필 동기(1:12-15)
  11절에서 베드로는 성도의 삶의 중요성에 대해서 역설하였거니와 성도의 삶은  그의 본질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즉 그의 삶은 그의 본질이 무엇인지  증거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날마다 자신의 삶을 성찰하면서 '내가 하나님 앞에 부족한 것은 없는지 살펴보며 자신에게 있어야 할 것이 없음을 인하여 슬퍼하고 자신에게 없어야  할 그 무엇이 있음으로 인하여 애통하며 그것을 그리스도 앞에 쳐 복종시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 베드로는 이러한 사실을 그들로 하여금 '생각나게'하고  '일깨우기'  위하여 본 서신을 기록하였다. 아마도 그것은 자신이 죽은 이후에라도 그들이 받은 교훈을 항상 기억하고 살아가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1)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12절). 베드로는 성도들이 비록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항상 그위에서 언급한 사실을 기억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느꼈다. 어떠한 사실을 진리로 아는 것과 그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이 항상 동일한 것은 아니다. 바로  이러한 점을 깨우치기 위해서 베드로는 본 서신을 기록한 것이다.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해서 항상 진리를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알고는 있지만 그 말씀을 실천하지 않기도 하고, 그 말씀을 기억의 한쪽 구석에  접어두고 살기도 한다. 안다는 것이 항상 그 말씀을 생각하며 그대로 살기 위해서  몸부림 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어떠한 사실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  사실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실제로 우리에게 어떠한 유익도 주지  못할 것이다. 베드로가 본 서신에서 말하는 '생각나게'한다는 의미는 그 말씀이 그의 의식과 삶 속에 뿌리를 내려야 함을 뜻하는 것이다.
  (2)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13절).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에서 '장막'(                ,스케노마)은 원래 고대 근동 지방에 사는  유목민들이 임시로 거주하는 '처막'을 지칭하는 단어였는데, 본문에서는 '자신의 육체'를  영원한 집'(요 14:2)과 대조하여 말한 것이다(고후 5:1-4). 따라서 '이 장막에 있을  동
안에'란 자신의 목숨이 살아 있을 때가지를 의미한다. 그는 그의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성도들을 '일깨워 생각하게 하려'하였다. 본문에 사용된 '일깨워'( ,디에게이레인 휘마스)란 단어는 현재 능동태 부정사로 부주의에  대
한 경각심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베드로는 무엇을 일깨우려 하였는가 ? 그것은 성도들의 삶의 중요성이었다.  베드로가 본인의 생(生)의 유한성에 대해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의 삶은 장막 생활과 같은 것이다. 베드로와 같이 우리도 이 장막을 벗어날 때가 임박하였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생은 잠시 있다가 사라질 안개와 같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을 위하여, 어떠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 ? 베드로는 이러한 사실을 성도들의  마음속에서 일깨우고자 하였다.

  4. 베드로의 변증(1:16-21)
  (1) 그리스도의 재림(16절). 아마도 베드로는 재림에 대해서 부정적 견해를 갖고 있었던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두고 16절의 말을 한 것 같다.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에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3:4)라고 말하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대항하여 베드로는 자신의 가르침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가 아님을 역설한다. '공교히 만든 이야기'(  ,세소피스메노이스 뮈도이스)는 '꾸며낸 우화'라는 뜻을 지닌다. 재림의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분이 올라 가신 것처럼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셨다(행 1:11). 주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신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것이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재림에 대해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올라가신 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흔히 잘못된 가르침을 전달하는 자가 말하는 것처럼 영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모습으로 다시 오신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東)에서 서(西)까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임한다. 그분은 '구름을 타고'오실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그분의 오심을 '바라볼'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은 마태복음에 기록된 열 처녀의 비유와 같이 갑자기  도적같이, 홀연히 임할 것이다(마 25:1-13). 또한 분명히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어떤 전조(前兆)가 일어난다. 그러나 주님은 갑자기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이다. 그래서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깨어 있을 것'을 권면하셨다(마 24:44).
  주께서 다시 오시는 목적이 무엇인가 ? 그것은 이 세상의 일들을 종결시키기 위함이다. 주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이미 죽은 자와 산 자들, 신자와 비신자들이 다 그분 앞에서 하나님의 엄위하신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마태복음 7:21이하에 기록된  말씀은 이러한 점에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였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는데도 천국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 거부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그들의 문제는 주의 뜻을 알고 있었지만 그 뜻대로 살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아는 것보다 행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행하는 자라야'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신자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롭게 부각시킨다.  베드로는 재림을 언급하면서 바로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었다. 따라서 성도들은 장막을 떠날 날까지 그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데 전심 전력(全心全力)해야 한다.
  (2) 변증의 본질(16-18절). 본문은 우리의 신앙이 허탄하고 망령된  신화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16절)는 베드로의 진술은 변증학적으로 상당히 큰 의미가 있다. 그것은 베드로가 외치는 복음의 권위와 관련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우리는...친히 본 자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그 경험은 개인적,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이 사실을 근거로 주님의 부활은 참되다고 말하였다.
  (3) 성경의 권위(19-21절). 19-21절에서 베드로는 그의 가르침이 공교히 꾸며낸  것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한 것임을 한번 더 역설한다. 우리에게 있는 '더 확실한  예언'(19절)은 성경이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같은 역할을 한다(시 119:105). 따라서 성도들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19절)는 말씀처럼  성경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리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해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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