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 지금까지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 즉 사환(2:18), 아내들(3:1), 남편들(3:7), 모든 사람들(3:8)에 대한 권면이었으나 본절은 장로들에 대한 권면이다. '장로'(* , 프레스뷔테루스)는 구약 시대부터시작된 호칭이다(출 3:16,18; 24:9; 민 11:16; 수 20:4). 구약 시대에는 주로 나이가많은 연장자들을 부르는 호칭으로 사용되었으나 점차적으로 직분을 나타내는 호칭으로바뀌게 되었다. 신약 시대에 와서는 예루살렘 교회가 장로 제도를 사용하였으며(행11:30; 21:18) 바울과 바나바는 전도 여행을 하면서 각 교회에 장로들을 세웠다(행14:23). 따라서 이 제도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여러 지역으로 번져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장로'는 '감독'(* , 에피스코포스)과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딤전 3:1; 딛 1:7). 그러나 감독은 직분적인 측면의 성격이 강하며, 장로는 신분적인 측면이 강하다. 이와 같은 장로는 교회에서 전반적인 것을 관리하는 영적지도자로서 교인들을 양육하고 돌보며 인도하는 일을 감당하였다(히 13:7;약 5:14, Blum, Stibbs, Selwyn). 한편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권면할 수 있는 자신의자격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1) 함께 장로 된 자요 - 이것은 베드로 자신의 사도적 권위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서로가 같은 동역자임을 강조하는 주장이다. 이는 결코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다른 사람을 훈계하고자 하는것이 아니며 자신도 '장로'로 같은 '장로'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함을 시사한다(Brown).
(2)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 이것은 베드로 자신이 직접 그리스도의 고난을목격한 증인이요(행 5:32; 10:39), 그것을 증거할 책임을 부여받은 사람임을 의미한다(요 21:15 - 18; 행 1:8).
(3)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 '나타날 영광'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보여 주실 영광이며(4:13) 동시에 베드로를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누릴 영광이다(롬 8:17, 18). 혹자는 본절의 영광이 변화산상에서 베드로가 목격한 영광을 지칭한다고 하나(Stibbs) 그것보다는 장차 임할 미래적인 사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5: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 베드로는 요 21:15 - 17에서 예수께서자신에게 부탁했던 말을 다른 목자들 즉 장로들에게 권면한다. 본래 '양'은 그리스도의 것이며(요 10:14; 21:15), 하나님의 것이다(행 20:28). 그런데 목자장이 되시는그리스도께서 양 무리를 돌보는 직임(職任)을 사람들에게 위임하신 것이다. 베드로는그리스도께서 부여하신 '양 무리'를 돌보고 양육하는 직임을 다하라고 장로들에게 권면한다. 장로들은 이 때 두 가지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한다.
(1)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 '부득이함으로'의 헬라어 '아낭카스토스'(* )는 '자원함으로'와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억지로'를 의미한다. 일부 영역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가 빠져 있는데(KJV) 그러면 뒤에 나오는 '자원함'을 설명할 수 없다.장로들은 주어진 직임을 행할때 인간적인 열심이 아니고 성령께서 주신 마음으로 즉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열심으로 행해야 한다(행 20:28).
(2)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 본절은 당시의 장로직에 일정한 보수가 있었음을 암시한다(딤전 5:17, 18). '더러운 이'는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자신들에게 맡겨진 공동체의 재정을 이용하는 행위이며(Kelly), '즐거운뜻'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뒤모스'(* )는 헌신적으로 열심을 내는것을 가리킨다. 장로들은 자신의 사리 사욕을 채우기 위해 공동체의 재정을 이용하거나 돈을 목적으로 직임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헌신하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5:3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 - 본절 역시앞절과 마찬가지로 장로가 직임을 감당할 때 취해야 할 마음 자세에 대한 언급이다.'맡기운 자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클레론'(* )은 본래 '제비 뽑기'란의미의 '클레로스'(* )에서 나온 단어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들어갔을 때 제비 뽑기를 하여 땅을 할당 받았던 것에서 유래한다(수 18:10). 그래서'클레론'은 '분배', '몫', '할당' 등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막 15:24; 행 1:26), 본문에서는 레위인에게 할당한 기업처럼 신성한 은혜에 의한 '몫'이다(민 3:12). 한편 '주장하는 자세'는 권세를 가지고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양 무리는 하나님의 것이고,장로 직임은 하나님의 은혜로 맡겨진 것이기 때문에 장로들은 지배를 하거나 다스리는자세로 양 무리를 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겸손한 마음과 신성한 모습으로 모범을 보여서 양을 양육하고 돌봐야 한다.
=====5: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 신약성경에서 단한번 나오는 '목자장'(* , 아르키포이메노스)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예수는 '목자'로 불리어졌으나(2:25) 본절에서는 장로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목자장'으로 사용되었다(Deissmann). 모든 양들의 목자가되시는 예수는 '큰 목자'요(히 13:20) '선한 목자'(요 10:11, 14)이시며 베드로를 포함한 장로들은 목자장이신 예수의 '대리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대리 목자들에게 그의 행위에 따라서 적합한 보상을 해주실 권리가있다. 그것의 상급은 '시들지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이다. '시들지 아니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마란티논'(* )은 '아마란티노스'라는 절대로 시들지 않는 꽃 이름에서 나온 단어로 '쇠하지 않음'을 상징하며(Robertson) '면류관'은 운동경기에서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월계관'을 가리킨다. 직임을 잘 감당하는 장로들은 그리스도로부터 합당한 상급으로 영원히 쇠하지 않는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롬 8:17, 18; 요일 3:2).
=====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 본절에서는 '장로'를 1절에서 처럼 굳이 '직분자'로 해석하거나, '젊은 자'(* , 네오테로이)를 '성직자'나 '집사'들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네오테로이'가 성경에서 직분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따라서 본절의 '장로'는 단순히 '연장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Kelly, stibbs, Blum). 젊은 사람들이 연장자에게 순복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마땅한 질서이다. 한편 '허리를 동이라'의 헬라어 '엥콤보사스데'(* )는 '옷 입다'라는 의미로 노예들이 주인을 시중들기 위하여 앞치마를 두르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예수께서 수건으로 앞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을 상기시키는 권면으로(요 13:14 - 17) 겸손히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 본절은잠 3:34(LXX) 의 인용으로 겸손해야 하는 이유이다. 젊은 자들이 장로들에게 겸손해야하는 이유는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대적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티탓세타이'(* )는 군대를 배치시킬때 사용하는 군사 용어였다(Caffin).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의뢰하지않고 교만하여 자기의 능력만을 믿는 자들을 대적하셔서 파멸시키신다. 반면에 겸손하여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은혜를 허락하신다.
=====5:6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 '하나님의 능하신 손'은 구약 시대에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악인들을 심판하실 때에 종종 사용되었던 표현이다(출 3:19; 6:1; 13:3; 신 9:26; 렘 21:5). 베드로는 '겸손'과 '높임'을대조시켜서 현재에 받는 어려운 고난을 통해 겸손할 때 장차 그리스도의 때 곧 재림의때가 되면 거룩한 자리에 참여하게 되는 영광으로 바뀌게 될 것을 권면한다.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 본절은 시55:23(LXX)의 인용이다.
'염려'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림난'(* )은'나누다'라는 의미의 '메림나'(* ) 에서 유래한 단어로 악한 자들로부터 받는 핍박 뿐만 아니라 내면에 있는 여러 가지 걱정이나 고민 등을 의미한다(마6:25 - 34).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염려를 다 그리스도께 맡겨야 한다. '맡겨 버리라'의 헬라어 '에피립산테스'(* )는 '던져버리다'라는 의미로 부정 과거 분사형이나 본절에서는 새로운 명령형 형태를 취하지 않고 6절의 명령법과 연결되어 강조되고 있다(Kelly). 이것은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는 자들이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항상 보호하시는 손에 염려를 맡겨야함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을 권고하시기 때문이다. '권고하심이니라'의 헬라어 '멜레이'(* )는 '돌보다', '관심을 갖다'라는 의미로 '염려가 그에게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관심을 가지고 우리를 돌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걱정과외부로부터 오는 위험을 맡겨야 하며 그때만이 평강을 소유하게 된다.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자를 찾나니 -'깨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그레고레사테'(* )는 '깨어 있다'라는 의미인 '에게이로'(* ) 에서 유래된 단어로 잠에서 깨어있는 상태뿐만 아니라 영적인 경각심을 갖도록 할 때 또는 권고나 주목을 요청할 때 사용되었다(마 26:40, 41; 막 13:35 - 37, Lenski).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이 근신하고 깨어 있어야 할 이유는 대적 마귀가 삼킬 자를 찾아 다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마귀'(* , 디아블로스)는 '비난하는 자' 곧 '사단'을 가리킨다(대상 21:1; 욥1:6- 12; 슥 3:1). 베드로는 '마귀'를 배고픈 사자로 비유하여 사단의 유혹이 강력함을시사한다.
=====5:9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 '굳게 하여'(* , 스테레오이)는 '흔들리지 않는 반석같은 단단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원래 마귀를 대적하는표현으로 많이 사용되었다(Selwyn). 본문에서도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 믿음을 반석처럼 견고하게 세울것을 권면하는데 이 말을 사용하고있다. 이러한 '믿음'은 그리스도를터로 하였을 때 굳건히 설 수 있으며 굳건한 믿음의 소유를 통해서 마귀를 강력히 대적 할 수 있다(약 4:7). 이는 죽음의 위협에서도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고 죽기를 각오하고 적극적으로 싸울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Kelly).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 '세상'은성경에서 사용되었으나 본문에서는 '사람이 사는 보편적인 우주'를 지칭한다(Kelly).또한 '형제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결속을 강화시키는 표현이다(1:22; 2:17; 3:8). 이세상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동일한 몫의 고난을당한다(Kelly). '당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텔레이스다이'(* )는 '완성하다'를 뜻하는 '에피텔레오'(* )에서 나온현재 진행형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이세상에서 계속적으로 고난을 당하는 가운데 목적을향하여 나아가는 것을 시사한다. 비록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수 많은고난 가운데 처하게 되지만 그 고난을 통해 보다 완전한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
=====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 - 베드로는 본절에서 모든 권면을 마치고 위로의 힘을 얻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행하시는 일에 대해 언급한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란표현은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소망의 위로가 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모든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특별한 도우심으로 은혜를 베푸심을 암시한다.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는 먼저 '그리스도 안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부르시는 사역에서시작된다. 그 부르심의 목적은 영원한 영광 즉 궁극적인 구원을 소유하게 하는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 안에서'의 헬라어 '엔 크리스토'(* )는 바울이잘 쓰는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구속사역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을 부르시는 것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되었음을 시사한다.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 '잠깐 고난'은 장차 온전한 구원의 완성을 의미하는'영원한 영광'과 대조를 이룬다.이 세상에서 잠시 동안 겪는 고난은 그것을 참고 견디어 소유하게 되는 영원한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베드로는 본절에서 4개의 동사를 나열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확증하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도우심은 결코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확실한 개입에 의하여 이루어 지는 것이다(Selwyn, RV).
온전케 하시며 - 이것은 '완전케하다'를 뜻하는 것으로 본문에서는 박해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온전한 모습으로 회복시켜 주시는 것을 시사한다(고전 1:10; 고후 13:11).
굳게 하시며(* , 스테릭세이) - 이는 '어떤박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도록 견고하게 하는것'(살후 2:17)을 나타낸다.
강하게 하시며(* , 스데노세이) - 이는 자율적으로 봉사하도록무장시킨다는 의미로서(Masterman) '굳게 하다'의 동사와 뚜렷한 구별을 할 수 없는동사이다.
견고케 하시리라(* ,데멜리오세이) - 이는 확고한 신앙의 터전 위에서 요동치 않도록 하는 것을 나타낸다(Bengel).
=====5:11
권력이 세세 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 이런 송영은 유대교나 기독교에서많이 사용되는 형태이며(4:11) 그리스도의 교훈(마 5:16), 바울서신(롬 11:36; 16:27;갈 1:5; 딤후 4:18), 공동서신(2:12; 히 13:21; 벧후 3:18), 묵시서신(계 1:6; 5:13)등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권력'의 헬라어 '크라토스'(* )는 신약성경에서 오직 하나님에게만 사용된 단어로 온 우주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을 의미한다(Stibbs).
=====5:12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 '실루아노'를 언급한 것으로 보아서 12절에서 14절까지는 사도 베드로의 친필인 것을 말해준다. '실루아노로 말미암아'의 표현은 실루아노가 본 서신의 대필자임을 분명히 해준다. 그는 '실라'라고도 하며 바울의 제2차 전도 여행 때 동행했던 자이다(행 15:22- 33; 15:40; 18:5). 그리고 바울의 서신에서도 '실루아노'라고 불리었다(Selwyn). 실루아노가 베드로에게 어떠한 도움을 주었는지는 자세히 나오지 않으나 베드로 전 후서 를 기록하는데 큰 공헌자였을 것이다. 베드로는 '실루아노'를 '신실한 형제'라고부른다. '신실한 형제'에 해당하는 헬라어 '투 피스투 아델푸'(* )는 정관사로 연결되어서 수신자들이 실루아노에 대해 잘알고 있음을 시사한다(Stibbs).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서라 - 본서의주요한 특징은 권면이다. 베드로는 지금까지 권면한 모든 것이 '은혜'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베드로가 이제까지 권면한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삶 속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며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을 시사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삶 자체가하나님의 은혜이며, 그리스도인들은 그 은혜 안에서 뿌리를 내려야 흔들림이 없이 굳게 설 수 있는 것이다.
=====5:13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의 헬라어 '헤 엔 바뷜로니 쉬네클레크테'(* )는 문자적으로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그 여자'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그여자'란 누구인가? 에 대한 견해는 두가지이다. (1) 혹자는 베드로의 아내라고 주장한다(Stibbs). 왜냐하면 베드로는 전도여행에 아내를 데리고 다녔었기 때문이다(고전 9:5, Clement). (2) 혹자는 '바벨론에있는 교회'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enski, Kelly, Blum). 이 두 가지 견해중 후자가타당하다. 왜냐하면 헬라어로 교회는 여성 명사이기 때문이다. 만약 베드로의 부인이었다면 구체적으로 이름을 열거 하였을 것이고 또한 고대의 사본에는 교회라고 직접표현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바벨론'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 이다. (1) 혹자는 베드로가 가서 전도한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있는 실제 '바벨론'이라고 주장한다(Calvin). 그러나 베드로가 그곳에서 전도는 정확한 근거가 없고 초대 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가 로마에 있었음이 확실하기 때문에 타당성이 없다. (2) 혹자는 '애굽의 한도시'라고 주장한다(Strabo, Josephus).그러나 베드로가 이곳을 방문했다는 확실한 근거가 희박하고 기독교가 초기에 이곳에서 발전했다는 자료도 없다. (3) 혹자는 '로마'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enski, Stibbs, Kelly, Blum). 바벨론은 세상을 상징하는 은유적 표현으로서 로마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 베드로는 마가를 '아들'이라 부르고있다. 초대 전승에 의하면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가 떠난 후에 베드로의 동역자가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베드로가 마가를 내 아들 이라고 한것은 바울이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부른 것과마찬가지로(딤전 1:2;딤후 1:2) 친아들이 아니라 영적인 아들이라는 의미이다. 베드로의 영적 아들인 마가는 바나바의 조카로서(골 4:10) 본명은 마가 요한이다(행 12:12,25). 그는 바울의 제 1차 전도 여행 때 동행했으나 제 2차 전도 여행때는 동행하지 않았다(행 13:5;15:37-39). 그러나 후에 바울이 투옥되자 시중을 들었었다(골 4:10; 몬1:24).
=====5:14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피차 문안하라 - 이러한 표현은 바울 사도가 주로 사용한 표현이다(롬 16:16; 고전 16:20; 고후 13:11; 살전 5:26). '입맞춤'은 초대 교회에서 사용되었던 인사법으로(눅 7:45, Justin, Tertullian, Chrysostom) 2세기 경까지 지속되었다. 3세기 이후에는 남녀가 구분되어 행해졌으나(TDNT) 그것이 언제까지 지속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 베드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평강이 있기를 기도함으로 서신을 끝맺는다. '평강'(* , 에이레네)은 히브리인의 인사말로서 '샬롬'(* )과 같은 것으로 본 서신은 '평강'으로 시작해서(1:2), '평강'으로 끝을 맺는다. 이 '평강'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과 관련된 것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할때 소유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사도 베드로는 이제 본장을 통하여 몇 가지 특별한 지시와 더불어 결론적 권면과 함께 작별 인사를 함으로 본 서신을 끝맺고 있다. 본장을 상고하기 위하여 먼저 다음 사항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1) 바울과 베드로. 초대교회의 대표적이 사도로서는 바울과 베드로를 들 수 있거니와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베드로는 유대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받아 각기 사도적 사명을 수행하였다. 본서에 나타난 베드로의 가르침과 바울의 가르침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까) 유사점. 베드로는 바울과 개인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복음은 바울의 복음과 상당히 유사하다. 베드로는 본서에서 바울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메시야되심과 지상 사역에 관해 언급할 때 구약의 말씀들을 인용하여 묘사하고 있다(1:24,25; 2:6,9,22-24). 또한 그는 주의 재림이 임박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사회 윤리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가에 관하여 권면할 때 바울과 마찬가지로 기존 질서에 순응하며 선(善)을 행하는 가운데 주의 재림을 예비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2:11-25).
(다) 차이점. 바울 사상과 비교되는 베드로의 사상은 주의 재림시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이 살아 남아 있는 자들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는 점이다(4:5,6).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인과 공동체 안에 내재(內在)하는 성령을 강조하고 있는 데(롬 8:2,16) 반해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계획에 따라 임재하신 성령을 강조하고 있다(1:2,11,12; 4:14).
(2) 사도행전과의 비교. 본장에서 베드로가 양무리의 목자인 장로들에게 베푸는 권면(1-4절)은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행한 설교와 병행을 이룬다(행 20:17-38). 이 설교들은 먼저 '장로들'을 향한 설교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바울은 사도행전에서 예수께로부터 받은 복음 증거의 사명을 위하여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고 기꺼이 충성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였거니와(행 20:24), 본장에서 베드로는 목양(牧羊)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2a절). 또한 바울은 자신이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내지 아니하고 자비량으로 선교 사역을 감당하였음을 밝혔으며(행 20:33,34) 본장에서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결코 더러운 이(利)를 위하여 사역사지 말것을 당부하고 있다(2b절). 뿐만 아니라 바울은 범사에 모든 이들에게 본을 보였음을 자신있게 말하였거니와(행 20:35) 베드로는 본장에서 장로들에게 모든 양무리의 본이 될 수 있기를 당부하고 있다(3절).
(3) 끝맺는 인사. 본 서신의 끝부분에 나타나는 마지막 인사와 축도(12-14절)에 나오는 몇 가지 사항들에 관하여 고찰해 보기로 하자.
(까) 바울과 실루아노. 첫장에서도 언급하였거니와 베드로는 실루아노에게 매끄러운 헬라어로 자신의 메시지를 표현하도록 임무를 맡겼다. 그리고 본문(12절)에서는 마지막 인사말에 실루아노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이는 바울 서신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고전 1:1; 고후 1:1; 빌 1:1)사도 베드로가 전하는 권면의 말씀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된 것이며, 이 일에는 복음 사역에 함께 참여한 동역자들이 증인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 베드로와 마가. 바울이 디모데를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부른 것처럼
(고전 4:17) 베드로는 마가를 '내 아들'(13절)이라 부르고 있다. 마가느 바나바의 생질(甥姪)이었고 바울의 제 1차 전도 여행에 참여했다가 도중 하차한 인물로서(행 13:13) 베드로의 친아들이 아닌 믿음의 아들이었다.
(따) 사랑의 입맞춤과 평강.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입맞춤의 교환이 바울 서신에도 여러 번 언급되어 있다(롬 16:16; 살전 5:26). 이는 성도들간의 사랑과 호의에 대한 외적 표현이었다. 한편 본 서신에 나타나는 베드로의 축복 기도는 독특하다. 바울은 보통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하고 있으나 베드로는 '평강'을 빌고 있다. '평강'을 기원하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인사였으며(눅 24:36; 요 20:19), 베드로는 예수를 본받아 이러한 인사법을 사용하고 있다.
본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단락은 교회의 지도자들에 대한 권면을 담고 있거니와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는 목자로서의 합당한 자세를 교훈하고 있으며(1-4절), 둘째 단락은 일반 성도들에게 주는 권고로서 고난과 박해의 어려운 시기를 살아가는 자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베풀고 있다(5-14절).
1. 교역자에 대한 권면(5:1-4)
베드로는 먼저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권면하고 있다. 시련과 박해가 일어나는 상황에서 성도들이 혼란 가운데 방활할 때에 교회 지도자의 책임은 실로 막중하다. 따라서 베드로는 수난 시대의 교회의 지도자들이 취해야 할 태도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1) 장로의 직분. 베드로는 공동체의 연로한 회원들인 장로들에게 권면을 베푸는 데 있어서 먼저 자기 자신을 모델로 세우고 있다.
(까) 장로 베드로. 본문에는 베드로의 사적(私的)인 지위를 말하고 있는 유일한
표현이 나온다(1절). 베드로는 주의 양들을 먹이도록 임무를 부여받은 장로된 자이다(1절; 요 21:15ff). 그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고난을 목격한 자(행 1:8; 5:32; 10:39)로서 증거를 소유한 자이며 곧 나타나게 될 영광을 함께 누릴 자이다. 이 영광은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그리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으로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1:21; 3:22). 베드로는 이렇게 자신을 소개함으로써 그와 함께 장로된 자들에게 희망과 격려를 불어넣고 있다.
(다) 장로의 기원. '장로'란 교회의 원로 지도자에 대한 호칭으로서 구약 시대에는 공동체 내의 유능하고 노련한 지도자를 가리켜 장로(長老)라고 불렀다(레 4:15). 그런데 이 제도가 초대 교회에 까지 내려오면서 그 직능이 다양해짐으로 인해 신약 시대의 장로는 단순히 연륜이 있는 자라기보다는 교회의 영적 지도자로 간주되었다. 한편 '장로'와 '감독'은 그 자격과 직책에 있어서 유사성을 지니고 있으나(딤전 3:1,2; 딛 1:6,7) 장로는 주로 직능적인 측면보다는 신분적인 측면이 강조되는 직분이며, 이에 반해 감독은 신자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교훈과 권면을 베푸는 등 영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이 강조되는 직분이다(딤전 3:1-7). 베드로는 본문에서 이러한 직분을 맡은 자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교훈을 베풀고 있다.
(2) 양 무리의 목자. 베드로는 장로를 가리켜 '양 무리의 목자'(2절)라고 표현하고
있다. 베드로는 이러한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지배하려는 유혹에 대하여 경고하고 지도자의 올바른 의식을 고취시키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선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치시기까지 하셨다(요 10:11ff.). 이처럼 선한 목자상은 그리스도처럼 양들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내놓을 수 있는 희생 정신을 내포하고 있다. 선한 목자는 적들 앞에서 무리들을 보호하며 그들의 영적 양식을 공급한다(행 20:28-31). 당시 복음 전도자들은 박해자들로 말미암아 갖가지 핍박과 수난을 받았거니와 이러한 목자 정신이 없다면 결코 복음 전파 사명을 수행할 수 없었다. 따라서 베드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위탁받은 목자의 사명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양 무리이므로 오로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올바로 목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베드로는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본받아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을 몸소 체험하였으며 복음을 위하여 십자가를 거꾸로 지면서까지 순교한 증인이 되었다.
(3) 장로의 임무. 베드로는 장로의 구체적인 임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교훈하고 있다.
(까) 먼저 장로들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양떼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진해서 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마지 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기꺼이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쁨으로 해야 한다. 만약에 자원(自願)함으로 하지 않고 부득이함으로 주의 일을 한다면 그것은 그의 마음속에 구원의 기쁨과 감격이 소멸해 버렸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다) 더러운 이(利)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해야 한다. 삯군 목자는 노략하는 이리와 같아서 겉으로는 양을 위하는 듯하나 속으로는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거짓 목자이다. 교회 지도자의 탐욕에 대한 이와 유사한 경고가 바울의 목회 서신에도 나타난다(딤전 3:3; 딛 1:7). 목회에 대한 사명감이 사그러졌을 때 이러한 사심(私心)이 생겨나는 바, 베드로는 열정을 가지고 기꺼이 목양에 임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따) 양떼 위에 군림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즉 지배자로서의 주인 노릇을 하여 세도를 부리거나 강제로 다스리지 말라는 것이다(막 10:42-45). 이는 탐욕보다 더 미묘한 유혹이다. 권위를 소유한 자는 자칫하면 굴종을 바라는 교만한 마음을 갖기가 쉽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죄악된 본성을 과감히 내어버릴 것을 명령한다. 하나님의 사람은 인간의 모든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요 오직 그리스도의 성품을 새롭게 덧입은 자인즉 그에게는 멸망해가는 자의 썩은 악취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겨나야 할 것이다. 그런즉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범사에 모범을 보여야 하며 이로써 모든 양들이 그의 언행을 따르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장차 목자장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영광의 면류관을 상으
로 받게 될 것이다(고전 9:25; 딤후 4:8; 계 2:10; 3:11; 4:4).
* 성경에 나타난 장로직. 본문에서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주는 교훈을 베풀고 있거니와 본 주제 강해에서는 성경에 나오는 장로 직분에 관하여 고찰해 보기로 하자.
(1) 구약 시대에 '장로'란 말은 인품과 용기가 있고 권세있는 집안의 일원(一員)을
지칭한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도 장로가 있었고 고대 이집트나(창 50:7) 모압 자손, 미디안 자손에게도 장로가 있었다(민 22:7). 이스라엘 왕정 시대 이전에는 '군주'나 '방백'이 장로와 같았으나(삿 5:15; 8:6-16) 그후 이러한 자들은 왕의 관원이 되었다. 또한 '장로'는 법령을 발표하는 자(삿 5:9; 사 10:1), 귀인(민 21:18; 삼상 2:8), 용사(삿 11:1), 우두머리(삿 11:8) 등을 가리키기도 하였다.
장로는 친족, 지파, 지역 사회의 생활 가운데서 권위를 행사하였다. 전쟁에서는 지휘자요, 다툼에서는 재판관이요, 치리(治理)에서는 지혜로 충고하는 자요, 증인이었다. 장로들은 공동 사회를 대표하고 관리했으며 그 사회의 중심 인물이었다(레 4:13-21; 신 21:1-9). 한편 신명기에는 재판관으로서의 역할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신 19:2; 22:15-18). 그리고 그들은 제사 의식에 참여했으며(출 24:1,2; 레 4:13-21), 다윗을 왕으로 삼고 언약을 세울 때 증인의 역할을 하였다(삼하 5:3).
구약 시대에 장로들은 제사장 다음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장로의 기원은 모세가 광야에서 70인의 장로를 임명한 사건으로 거술러 올라간다(민 11:16). 그들은 협동으로 선출되고 기도와 안수로써 임명되었다. 시대가 지남에 따라 장로들은 방대한 율법 해석의 전례를 남겨 놓았기 때문에 '장로들의 유전'이라는 것이 생겨났다(막 7:3-5).
(2) 신약 시대에 '장로'는 연장자나 원로의 개념 외에 지혜와 경험을 겸비한 현자의 개념을 내포한다. 특히 유대교나 교회의 공동체에서는 특별한 위엄과 책임이 따르는 직분이나 지위를 가진 사람들을 일컫는 전문적인 의미로서 사용되었다. 기독교의 장로 직분은 구약 시대의 전통을 이어받은 유대교의 제도에서 파생되었으며 유대교의 장로의 임무에 대해서는 미쉬나적 문헌인 산헤드린(Sanhedrin)에 매우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신약 시대에는 유대인 공동체마다 장로의 공회가 있었으며,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공회로는 예루살렘에 있는 산헤드린으로서 이는 모든 유대인 사회에서 대법원의 역할을 하였으며 로마 당국에 대해서는 유대 민족을 대표하였다. 그들의 기본 임무는 재판에 관한 것으로서 율법을 해석하고 그 위반자의 처벌을 규정하는 일이었다.
신약 시대의 초대 교회 공동체는 이 장로 제도를 적용하였다. 사도행전에는 야고보나 사도들과 관련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에 관한 기사가 나오는데 이들은 유대 교회에 비길 만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행 11:30; 15:2; 16:4).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이 소아시아에 세운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임명했으며(행 14:23),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마지막 전도 여행 중에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만났다(행 20:17). 바울 서신에는 그들이 목회적 임무를 수행하는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포함되어 나타나나(롬 12:8; 살전 5:12,13). 기독교 장로의 목회적 직분은 본 서신과 야고보 서신에도 기록되어 있다(1-4절; 약 5:14).
2. 일반 교인에게 주는 권면(5:5-14)
앞에서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권면을 베푼 베드로는 교회의 젊은이들에게 권고를 줌과 아울러 종말을 살아가는 신자들이 신앙으로 마귀를 대적할 것을 경고하면서 마지막 인사와 축도로 본 서신을 마무리 하고 있다. 다음과 같이 본문을 상고해 보기로 하자.
(1) 겸손과 순종의 미덕. 교회의 젊은 청년들은 자기들의 목자요 감독인 장로들에게 마땅히 순종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상호간에 겸손으로 옷을 입어야 할 것이니 단순히 겉으로만 입어서는 안 되며 영혼의 옷을 입어야 한다(골 3:12). 베드로는 훈계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잠 3:34). 즉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신다는 것이다. 공동체 안에서의 연령이나 직분에 관계없이 철저히 겸손의 미덕을 지니되 특히 청년 신자들은 공동체의 어른들에게 순복해야 한다. 청년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는 불순종이다. 청년들은 아직 불완전하고 미숙하기 때문에 인생의 경험이 풍부하고 영적 체험이 깊은 교회의 지도자들의 말씀에 겸손하게 귀를 기울이고 따라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 앞에 절대적으로 낮아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십자가에 자기를 못박고 완전히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음부에까지 내려가신 그리스도를 하나님 우편까지 끌어올리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 앞에 스스로 낮아진 자를 때가 되면 높여주신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은 당신의 자녀들의 보호와 원수들의 심판을 위하여 그들 앞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떠한 시련 가운데서도 계속해서 신뢰를 가지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철저하게 낮아지는 훈련을 해야 할 것이다.
(2) 마귀를 대적하다.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마귀를 대적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세상은 매우 위험하니 결코 한순간이라도 방심할 수 없는 형편이다. 특별히 영적 전쟁에 있어서는 엄중한 경계가 요구되며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성도들은 모든 인간의 제도에 대하여 반항이나 보복을 꾀하지 말고 복종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2:13). 왜냐하면 그들은 이러한 인내로써 해가 아니라 축복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 대적에 있어서는 문제가 다르다. 영적 대적에게 복종하는 것은 믿음에서 떨어지게 되는 위험에 부딪히게 되므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저항해야 한다.
본문에서 베드로가 경계하고 있는 '마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돌이키게 하려는 영적 대적이다. 구약 성경 욥기에서 사단은 욥의 신앙의 순수성을 시험하기 위하여 재앙을 가하는 하나님의 사자의 역할을 하는 자로 나타난다. 하지만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마귀가 인격적인 영이며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배후 세력이라고 증언한다(엡 6:11). 또한 베드로는 마귀를 두루 다니며 먹이를 찾는 굶주린 사자에 비유하고 있다(8절).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사자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맹수의 표본이었다(시 22:14; 욥 1:7). 성도들이 박해에 못이겨서 신앙을 저버릴 때에는 사자에게 먹이게 되듯이 마귀에게 삼키우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악한 대적 마귀에 대하여 소극적 태도를 보이지 말고 믿음으로 굳게 서서 대항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3) 고난과 영광. 지금까지 고난 중에 있는 신앙 공동체에게 교훈을 베푼 베드로는 끝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최종적인 확신을 그들에게 주고 있다.
(까) 하나님의 부르심의 성격.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지금은 그들이 박해의 상황 가운데 있을지라도 결국은 그들을 영광으로 인도하실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성도들을 부르셔서 그리스도를 믿고 당신의 영원한 영광을 누리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응답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선택하신 은혜 안에서의 부르심과 그리스도의 영광에 관하여 증거한 바 있다(살후 2:13,14).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그리스도의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도록 부르심 속에서 계시되었고 장래에는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다) 고난을 이기라. 성도들 앞에 놓여 있는 영원한 영광에 비교하면 현재 당하는
고난은 극히 가벼운 것이다(롬 8:18). 비록 성도가 박해로 말미암아 상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회복시키시고 확고하게 세워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박해를 받는 성도는 현재의 암울한 상황으로 인하여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들이 서 있는 기초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견고한 기초 위에 세우실 것이며 그들의 믿음은 완전한 지식에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전권을 가지고 영원토록 통치하실 하나님께서 성도의 편에 계시는 한, 성도는 결코 염려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다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야할 일은 고난 중에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장래의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며 전진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 속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을 확신하는 까닭이다(빌 1:6).
* 본 서신에 나타난 베드로의 신관(神觀). 본 서신에서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심판주요 모든 것을 결정하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본 서신에 나타난 베드로의 신관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1) 심판주 하나님. 베드로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각 사람의 행위대로 공평하게 판단하시는 분이시다(1:1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한다. 불순종의 자식처럼 욕망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거룩하심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1:14-16).
(2) 창조주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의 처음이요 끝이시다. 그는 어두움 가운데서 성도들을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분이며(2:9) 그의 미리 아심을 따라 그들을 택하신 분이시다(1:1,2). 또한 그는 성도들이 그들의 형제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며(4:10,11), 박해를 받을 때에 함께 하신다(4:14).
(3) 신실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물들을 끝까지 지키시는 신실한 분이시다(4:19). 그는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시며 그들이 온전히 당신을 의뢰하기를 원하신다(7절). 더욱이 그는 성도들을 끝까지 온전케 하시며 굳세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는 은총을 베푸신다(10절). 또한 영광의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하여 그들을 연단하시고 최후에는 영원한 영광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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