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 베드로는 본절에서 그리스도의 본(本)을 강조하고 있다. '육체의 고난'은 문자적으로 '육체 안에서 고난을 받으셨다'라는 의미로(KJV, RSV, NASB) 그리스도께서 '육의 생활영역'에서 죽기까지 고난받으셨음을 시사한다(3:18, Michaels,Stibbs, Blum).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 '갑옷'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플리사스데'(* )는 '무기'를 뜻하는 '호플론'(* )에서 유래된 단어로 여기서는 전장(戰場)에서 사용하는 것처럼 싸움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현세의삶 속에서 사상이나 이념들을 방어하기 위한 것을 의미한다(Lenski).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갖추어야 할 갑옷으로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제시하고있다. 여기서 '같은 마음'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위해서 고난 속에서도 인내하며 온유했던 대속적인마음을 의미한다(빌 2:5, Cranfield).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지상 생활 속에서고난당하시는 가운데 가지셨던 마음으로 무장해야 한다.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에 대해서혹자는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나(Kelly)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던 고난에 동참한 '그리스도인들'을 일컫는다(Calvin, Bigg, Selwyn, Michaels, Blum).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과 죽음에 동참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죄의 유혹과 권세가 이기지 못하여 죄가 끊어지게 되며(롬 6:8, 11) 깨끗한 삶을 영위하는 성화의 한과정을 경험하게 된다(Selwyn, Cranfield, Stibbs). 베드로는 수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의 동참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무장함으로 죄의 권세가지배할 수 없는 성화의 삶을 영위하도록 권면한다.
=====4:2
그후로는...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 본절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하는 삶을 제시한다. '육체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사르키'(* )는 '육체 안에서'라는 의미로 육체로 살아가야 하는 지상생활을 나타낸다. 한편 '남은 때'는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생명이 남아 있는 시간을 의미한다.
사람의 정욕을 좇지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 '사람의 정욕'과 '하나님의뜻'은 강한 대조를 이룬다. '사람의 정욕'의 헬라어 '안드로폰 에피뒤미아이스'(* )에서 '안드로폰'은 본서에서 한번을 제외하고는(3:4) 모두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며(6절;2:4, 15), '에피뒤미아이스'는 단순히 성적인 욕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본성에서 비롯된 모든 죄악된 욕망을 의미한다(요일 2:16, Selwyn, Michaels).한편 '하나님의 뜻'은 문맥상 죄를 그치고(1절) 부끄러운 죄악들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2, 3절).비록 베드로는 본절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해 정의하지 않았지만, 본서 내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왕을 공경하며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19절; 2:15,17;3:17).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인간의 타락된 본성에서 비롯된죄악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만 한다.
=====4:3
너희가...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다 - 본절은 수신자들의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이전의 삶에 대한 묘사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삶은 과거 그리스도인이 되기전으로 족한 것임을 시사한다. '이방인의 뜻'은 '하나님의 뜻'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본절의 '뜻'의 헬라어는 '불레마(* )로 2절에서사용된 하나님의 '뜻'(* , 델레마)과는 큰 차이가 있다. '불레마'는 확고한 목적성이 없어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것처럼 변하기 쉬운 것을 가리키며 '델레마'는 목적을 위해서 변하지 않는 뜻을 가리킨다(Caffin). 한편 '행한것'에 해당하는헬라어 '카테이르가스다이'(* )는 완료 분사로 수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에 전부 이방인 이었음을 암시한다.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수신자들은 더이상 과거 이방인의 삶과 동일한 죄악된 삶을 영위할 이유가 없다. 죄악된 삶은 과거 이방인 시절로 족한 것이다. 베드로는 경고하기 위해서 과거 수신자들이저지른 세 가지 부류의 죄악을 열거한다.
(1) 음란과 정욕 - 본문은 성(性)과 관계된 죄악이다. '음란'은 절제되지 않은 지나친 정욕으로 인한 부도덕한 성행위를 가리키며.'정욕'은 사악한 욕망들이 내적으로 감추어진 상태를 말한다. 이 '정욕'은 '음란'으로 향하게 된다(2절;2:11).
(2)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 - 본문은 '술'과 관계된 죄악이다. '술취함'의 헬라어'오이노플뤼기아이스'(* )는 '포도주'라는 뜻의 '오이노스'(* )와 '솟아 오르다'라는 뜻의 '플뤼오'(* )의 합성어로서술에 만취한 상태를 가리킨다. '방탕'은 술취한 사람들이 거리를 쏘다니며 난동을 부리는 것을 의미하며 '연락'은 '큰 술잔치를 베풀어 즐기는 것'을 가리킨다. 술이 만취 되었을때 사람들은 이성을 상실하고 쉽게 범죄하게 된다.
(3) 무법한 우상 숭배 - '무법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데미토이스'(* )는 부정 접두어 '아'(* )와 '허락하다'라는 뜻의 '데미토스'(*)가 합성된 말로서 자연과 양심의 법으로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우상 숭배를 가리킨다. 이러한 우상 숭배는 음주와 음란이 섞인 가증스러운 것이었다(왕상 21:26; 겔 7:20; 롬 2:22). 그 결과 죄를 범할 뿐만 아니라 창조주며 구속주이신 하나님을 기억지 못하게 되고 그분을 떠나 허탄한 우상에 빠져버리게 된다.
=====4:4
이러므로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 '이러므로'의 헬라어 '엔 호'(* )는 본서에서 다섯 번 나타나며(1:6; 2:12; 3:16,19) '이러한 생활안에 있으므로'를 의미한다.이것은 한때 이방인과 같은 생활을 하였지만 이제 그리스도로 인하여 변화된 삶이 되었음을 시사한다. 한편 '이상히 여겨'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세니존타이'(* )는 '이방인'을 의미하는 '크세노스'(* )에서유래된 말로 '낯선 사람처럼 보이다'라는 의미이다(행 10:6, 18;17:20). 이방인들은과거에 자신들과 같은 생활을 하던 그리스도인들이 낯선 사람처럼 행동하며 그들과 함께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을 이상히 여겨 비방한다(Bigg). 이러한 모욕과 비방은 단순히 그리스도인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이다.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 하지 아니하는 것을 - 본문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비방하는 이유이다. '극한'(* , 아소티아스)은 자기 자신을 무모하게 버려 두는 것을 의미한다(눅 15:13). 그러므로 '극한 방탕'은 자신을 절제하지 않으며 방종한 생활에 버려둠으로 도저히 구원받지 못할 생활을 말한다(엡 5:18; 딛 1:6). 이방인들은 과거에 방탕한 생활을 하던 그리스도인들이구원을 받아 전혀 다른 새 삶을 사는 것을 보고 자신들처럼 살지 않는다고 비방한다.
=====4:5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 본래 하나님께서 소유하고 계시던 심판의 권세를 그리스도께 주셨다(요 5:22,27; 행 17:31; 롬 2:16).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생활에 대해서 마땅히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산자와죽은자'는 그 당시에 살아 있는 사람과 이미 죽은 자들을 말한다(살전 4:15). 여기서'죽은 자'는 복음을 듣지 못한자와 그리스도인들을 비방하는 자들도 포함된다.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는 '마땅히 심판하시는 자'를 표현한 것으로 심판의 필연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4: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 본절에 '이를위하여'(* )라 함은 그리스도께서 산자와 죽은 자의 심판주가 되심을 가리킨다(Selwyn).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자'의 '심판주'가 되시기 위해서 '죽은자'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 '죽은 자'에 대해서 혹자는 영적으로 죽은 자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나(Augustine, Frasmus, Luther) 이 견해는 문맥상 타당성이없다. 왜냐 하면 앞절에서 육체적으로 죽은 자에 대해 이미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Stibbs). 따라서 본절의 '죽은 자'는 살아있을 동안에 복음을 듣고 회개하였으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하기전에 죽은 그리스도인을 의미한다(Dalton, Kelly, Moffat, Selwyn,Cranfield).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베드로는 '육체로'와 '영으로'를, '심판을 받으나'와 '살게 하려 함이니라' 대조시켜서 본절이 '죽은 자'에게도 복음이 전파된 목적임을 나타내고 있다. '심판을 받으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리도시(* )는 부정 과거로 육체로는 세상에서 이미 심판을 당하였음을 시사한다. 반면에 '살게 하려 함이니라'의 헬라어 '조시'(* )는 현재형으로 '죽은 자'들이 심판을 받아 육체로는 죽음을 당하였을지라도 하나님과 더불어 영으로는 영원히 살고 있음을 시사한다. 복음은 영원한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하는 능력으로(요일 3:14)그리스도인들은 육체로는 죽임을 당할수 있으나 영적으로는 복음이 제공하는 생명력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수 있다.
=====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 '만물의 마지막'은 일반적으로 예수의 재림을 의미한다(3:10, Stibbs). '가까 왔으니'의 헬라어 '엥기켄'(* )은 '가까이잡아 당기다'라는 의미를 가진 '엥귀스'(* ) 에서 유래한 단어이다.이것은 임박한 상황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베드로는 박해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낙심치 말고 소망을 가질 것을 권고하고 있다.
너희는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깨어서 기도해야 한다. '정신을 차리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소프로네사테'(* )는 '소리'라는 뜻의 '소스'(* )와 '마음'이라는뜻의 '프렌'(* )의 합성어로서 '올바른 마음', '침착한 마음'을 의미하며'근신하여'는 환경에 따라 요동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중심을 잡는 조심성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흔들리지 않고 기도할 뿐만 아니라 무절제한 생활을 버리고 깨어 있어야 한다.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 '무엇보다도'는 어떠한 일보다 사랑을 먼저 할 것을 말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사랑의 중요성을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열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열심으로'(* , 에크테네)는 '힘껏 노력하는', '전심 전력하는'이라는 의미로 그리스도인이 힘써서 할 사랑은 감정적으로 하는 일시적인 사랑이아니라 의지의 결단을 가지고 행동을 수반하는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은허다한 죄를 덮을수 있다. 즉 피차간에 있는 허물을 덮어 주고 서로를 세워주고자하는 사랑은 죄를 가리운다(잠 10:12). '죄를 덮느니라'에 대해서 혹자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친절한 행위를 보여줌으로써 그 보상으로 자신의 잘못이 가리워질 수있다고 주장하나(Tertullian, Origen) 여기서의 사랑은 친절한 행위를 함으로 오는 반대급부를 바라는 사랑이 아니다. 이것은 사랑을 하고 있는 주체자의 죄가 가리워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고 있는 객체자의 죄가 가리워짐을 의미한다.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죄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무조건적으로 용서되었기 때문에 더욱더 타인의잘못을 용서할 수 있게 된다.
=====4: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 '대접하기를'의 헬라어 '필록세노이'(* )는 '사랑'을 의미하는 '필로스'(* )와 '나그네'를 의미하는 '크세노스'(* )의 합성어이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나그네에게 사랑을 베풀다'라는 의미로 당시에는 '여관'이 없었기 때문에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구체적인 사랑의 표현 방법이었다(딤전 3:2; 5:10; 딛 1:8).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단순히 잠자리를 제공하는 차원이 아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고난과 핍박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쫓겨다니면서 전도 생활을 하는 등 어려운 처지에 있었던 자들이 많았기때문이다(Lenski, Cranfield). 따라서 나그네를 대접하는 행위는 사랑의 행위 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기회여서 사도들은 자주 이 덕에 대해서 언급하였다(롬 12:13;히 13:2; 요삼 1:5-8). 한편 베드로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조건으로 '원망없이'할 것을 권면한다. 당시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 힘에겨울 수도 있었으며 많은 어려움이 뒤따르기도 하였다. 그렇다 할지라도 불평하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랑의 행위는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고 그리스도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마 25:35, 38, 40 ).
=====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서로 봉사하라 - '은사'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선물'로서 다양하다(롬 12:6;고전 12:4).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서로 다른 은사를 주셨다할지라도 그 은사는 서로 비교되거나 자기의 유익과 자랑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고전 4:7) 교회의 몸을 세우기 위한 것이다(Cranfield).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받은 은사를 가지고 서로 봉사해야 한다. 이 '봉사' 는 '상대를 섬기는 것'이고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 본절은 은사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은사를 통해 서로 섬겨야하는 자세를 나타낸다. '각양'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이킬레스'(* )는 여러 가지 특색의 은사를 나타내는 것으로 하나님은 한 사람에게 모든 은사를 주시지 않고 각 사람마다 다양한 종류의 은사를 허락하셔서 각 사람이 서로를 위해 섬기고 봉사하여 필요한 부분을 채우도록 하신다. 한편 '청지기'는 본래 '집안의 재산을 관리하는 하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각양은사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은사를 사용하는 방법을 말한다. 청지기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며, 관리하는 자로서 자신이 받은 은사를 통해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는것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과 멋을 추구해야 한다(Robertson, Blum).
=====4:11
베드로는 본절에서 은사의 사용 범주에 대해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 첫번째 범주는 '말의 사용'이다. 여기에서 '말하려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랄레이'(* )는 모든종류의 말을 의미하며 '말씀'의 헬라어 '로기아'(* )는 하나님의 입에서나오는 말씀으로 계시를 의미한다(Blum ). 그리스도인은 공적이든, 사적이든 간에 말할 때 하나님의 말씀처럼 즉 성경 말씀처럼 해야한다(고후 5:20; 살전 2:13). 이것은마치 '하나님의 신탁'을 전하는 것처럼 그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을 표본 삼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함을 시사한다(Lenski).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 둘째범주는 '봉사'이다. 베드로는 봉사의 종류가 많기 때문에 다 열거하지 않고 한단어로 묶고 있다.'공급하다'의 헬라어 '코레게이'(* )는 본래 '합창하다'라는 의미였으나 후에 '하나님이 아낌없이 주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유익과 덕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봉사하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공급해주시는 것을 염두에 두고 힘껏 봉사해야 하며 자기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는 것이 아니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봉사해야 한다(Calvin).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함이니 -본절은 그리스도인이 앞서 언급한 두가지 범주 즉 말과 봉사의 영역에서 하나님의말씀을 하는 것처럼, 그리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처럼 해야 하는 이유이다. 하나님께서 각양 은사를 베풀어 주신 것은 오로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주어진 은사를 통해 삶을 살아가는 전영역에서 오직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행해야만 한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은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로 인해서 가능한 것임을 암시한다(Beare).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 본절은 하나님을 찬미하는송영이다(롬 11:33-36; 엡 3:20, 21). '그에게'의 헬라어 '호 에스틴'(* )은 선행사가 예수 그리스도인지, 하나님인지 분명치 않으나 만약 '예수 그리스도'라고 한다면(Stibbs, Michaels, Kelly, Goppelt, Selwyn)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영광'이란 의미가 되어 논리에 어긋난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이 논리상 타당하므로 본절에 해당하는 선행사를 '하나님'으로보는 것이 적절하다(Blum, Clement).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이시고 영광이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께 연결되기 때문에(롬 16:27; 유 1:25; 계 1:6, Lenski, Robertson) 찬미 대상이 누구든 간에 의미에는 특별한 차이가 없으며 아마도 베드로도 대상을 구별하지 않았을 것이다.한편 혹자는 송영이 이곳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원래 본절이 독립된 것이었는데 삽입된 것으로 주장하나(Clement)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위엄을 강조할 때 자주 사용되기 때문에 이 주장은 적절치 못하다.
=====4:12
사랑하는 자들아 - 베드로는 본절부터 다시 핍박 받는 자들에 대한 권면을 한다.본문은수신자를 향한 베드로의 애정어린 마음을 나타내며(2:11) 동시에 새로운 권면의시작을 알리기도 한다.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 본절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다가오는 시련은'불시험'으로 묘사된다. '시련하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 페이라스몬'(* )은 진위(眞僞)를 가리는 것으로 유혹이아니라시험(test)을 의미한다. 이 '시련'은 본절에서 '불 시험'과 동일시되고 있다. '불 시험'의 헬라어 '테 엔 휘민 퓌로세이'(* )는 문자적으로 '너희 중에 타고 있는 불'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고통스럽게 타는 불'로서 소돔성을 파괴시킬 때의 불로 묘사되며(Josephus) 또한 종말에 '바벨론 성'을 멸망시킬 불로 나타나기도 한다(계 18:9, 18). '퓌로세이'는 순수한 금속을 얻기 위해 제련하는것으로서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시련이 불같이 뜨거울 것을 상징한다(시 66:10; 잠27:21; 계 3:18, Stibbs, Blum). 이러한 시련을 끝까지 믿음으로써 견디는 자는 저주로부터 구원을 얻을 것이다. 한편 '오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노메 네'(* )는 현재분사로 베드로나 수신자가 이미 경험했고 또한 현재에도 고난을당하고 있으며 장차 계속 다가올 시험임을 시사한다.
이상한 일 당하는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 '이상히 여기지'의 헬라어 '크세니제스데'(* )는 실제적인 박해에 의해서 '사람을 마비시킬 정도의충격'을 의미한다(Beare).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 앞에 다가오는 시련을 엄청난 충격으로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그 시련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그 고난의 동참을통해 하나님께서 기쁨과 영광에 참예케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Stibbs, Blum).
=====4: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 고난을 당하는 것은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한것이라면 그것은 가치있는 것이다.'그리스도의고난'은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말하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겪어야 하는 필연적인 여러 가지 핍박과 치욕 등을 의미한다.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고난을 겪을 때와같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영광의 승리가 기다리고 있으므로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즐거워하라'의 헬라어 '카이레테'(* )는 현재분사로 그 즐거움이 일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것임을 시사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받을 때 후에 주어질 영광의 승리를 바라보며 항상 어떤 조건하에서도 즐거워해야 한다.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때에 너희로 줄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함이라 - 본절은'히나'(* ,'...위하여')로 시작하는 절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때 즐거워하는 목적이며 마지막 때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갖게한다. 현재에 당한 고난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견디지 못할정도로 어려운 것이지만 그날의 영광을 생각하면 능히이기고도 남을 만한 것이다.'기뻐하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갈리오메노이'(* )는 너무 기뻐서 어찌할바를 모르는 극도의 기쁨을 나타내는 단어로(Lenski)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과 극명한 대조를 통해 고난보다 즐거움과 기쁨이 훨씬 큰 것임을 암시한다.
=====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 엔 오노마티 크리스투)는문자적으로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표현은 주님이 하셨던 표현이며(마 5:11) 초대 교회 당시에는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받는 박해가 당연한것이었으므로 거의 전문적인 표현 방식으로 성경의 여러 곳에서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다(마 10:22; 요 15:21; 행 9:16; 15:26; 21:13; 계 2:3; 3:8, Kelly). 한편 '욕을 받으면'은 믿지않는 사람들로부터 비방이나 능욕을 받는 것으로 본서에서 여러 번 사용되었다(4절; 2:12, 15; 3:16).
이것은 70인역에서 악인들이 하나님과 백성들에게 비방했던 것에 대해 많이 사용했으나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가 받은 모욕을 나타낼때 많이 사용되었다(마 27:40 - 44; 롬 15:3; 히 13:13).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서 고난을 당하고 욕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지상 생활에서 당하신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후대 영광에 참여할 복된 것이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 본문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당하는 자들이 복 있는 이유이다. 본절에서 '영광의 영'은 '하나님의영'과 동일시되어 '성령'을 나타낸다.'영광의영'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테스 독세스'(* )는 문자적으로 '그영광의 그'이다. 이 표현은 쉐키나(S-hekinah)를 묘사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는 영광을 가리킨다(출 16:7; 24:16; 29:43; 40:34; 민 14:10; 왕상 8:10, 11; 사 6:1 ; 겔 1:28,Cranfield, selwyn).'하나님의 영' 곧 '영광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 핍박받는 사람들에게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임하게 되며 성령의 임재는 하나님의 소유됨을 시사한다(Stibbs). '계심이라'의 헬라어 '아나파우에타이'(* )는 '쉬게 하다', '자리잡다'라는 의미로 성령의 임재를 시사한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마음속에 임재해 계셨으며 스데반이 순교할 때도 하나님의 영이 임했다(행 7:55, Bigg).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시 임재를 통해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한 고난이 동참할 때 하나님의 두드러진 속성인 영광을 보게 된다(행 7:55).
=====4: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은 '그리스도의 이름'때문에 받는 것이어야 하며 세상에서의 잘못 때문에 고난을 받아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악행으로 받는 고난은 결코 그리스도의 영광이 아니며 그 악행 자체는 형벌을 받아 마땅한것이므로 그리스도의 고난과는 별개의 것이다. 여기서 '...로'(* , 호스)는 앞의세 가지 범죄와 다음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사이를 분리하여 '남의 일을 간섭하는자'를 강조하고 있다.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는 '남의것을 탐내는 사람'이나(Deismann), '금지된 일 하는 자'(Bigg) 혹은 '밀고자'(NIV)를 가리킨다. 이러한 자들이 받는 고난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것도,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받는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로 인해 고난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4: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 받은즉 - '그리스도인으로'는 '그리스도의 고난' 즉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받는 고난'이다(13절).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은 자주 사용되는 표현은 아니지만(행 11:26; 26:28) 그 말은 예수를 믿는 자들을 가리킨다. 처음에는 '제자','형제', '성도'라는 호칭이 사용되다가 안디옥에 교회가 설립되었을 당시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가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아그립바는그리스도인을 경멸할 때 사용하여(행 26:28) 초기에는 주로 신자들을 박해할 때 사용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Goppelt). 따라서 신약성경 기록 당시에는 보편적인 단어가 아니었으나 그후 A.D. 64 년 경까지 로마에서 신자사이에 이 말의 적합성을 깨닫고 그들 스스로가 보편적으로 사용하였다(Tacitus, 행 11:19 - 26 주제 강해 '그리스도인' 참조).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 본절은 베드로 자신의 수치인 그리스도를 부인한 사건을 암시한다(막 14:66 - 72, Blum). 베드로는 처음에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하였으나(막 14:68) 이제 그는'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있다. '그 이름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엔 토 오노마티투토'(* )는 후기 사본에서 '이런 이유 때문에'(* , 엔 토 메레이 투토)로 기록 되어 있다(K,L,P). 그래서 흑자는 이 구문을 '그리스도인의 자격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 때문에'라는 의미로서 신분 의식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Selwyn, kelly). 그러나 '그이름으로'는 단순히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라는 의미이다(Blum, Stibbs). 왜냐하면 당시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 붙어도 고난과 핍박을 당하였기 때문이다(14절).
=====4:1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 '하나님 집'은 교회를 가리킨다(고전 3:16; 딤전 3:15; 벧전 2:5). 왜냐하면 구약시대 선지자들의 예언에 하나님의 심판이 성소에서 시작된다고 했기 때문이다(렘 25:29; 겔 9:6; 말 3:1-6 ).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받는 것으로 인하여 이미 심판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있으나(마 24:8, 9) 이심판은 멸망당할 심판이 아니라 마지막 날에 아무도 피할 수 없는 것임을 공개적으로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본절은 종말의 모습이 먼저 그리스도인에게 임해서 성결케 하고 다음에 확대될 것이라는 사상을 표현하고있다(1:7; 슥 13:7-9; 말 3:1-5, Stibbs,Blum).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 그리스도인들도 심판을 받게 되는데 하물며 악인들은 어떠하겠는가? 이 심판 앞에서는 아무도 피할 수 없다. 베드로는 앞서 언급한 '하나님 집'과 '하나님의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을 대조시켜 하나님의 복음에 순종하는 하나님 집도심판을 받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더 크고 분명한 심판을 받을것임을 시사한다. '하나님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세상에 선포된 그리스도인의 메시지'로(막 1:15; 롬 1:1; 살전 2:2, 8, 9, Michaels),이런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살후 1: 5-10).
=====4:18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 본절은 잠11:31(LXX)의 인용이다. '의인'은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구원은 쉽게 얻는 것이 아니며 어려운 불 시험을 통과하여야만 한다(12절). 그러므로 경건한 자들이 얻는 구원도 '겨우' 얻는 것이다. 혹자는 '겨우'(* ,몰리스)를 '고통'이라고 하나(Scott) 여기서는 '간신히', '겨우'라는 말이 합당하다.의인인 그리스도인도 심판을 통해서 겨우 구원을얻는다. 의인들도 그러할진대 경건치않은 자들은 당연히 그에 합당한 심판을 받고 멸망당할 것이다. 베드로가 본절에서 의인의, 구원을 이렇게 표현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방탕한 길에 빠지지 않고 경각심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다(Calvin).
=====4: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 그리스도인들이 삶을 영위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인해 찾아오는 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는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이는 모든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지켜주시며 돌보아 주시기 때문에 그 고난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은 성화의 과정을 거쳐서 구원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1:6; 5:6).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 -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고난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박해하는 핍박자들에게 악으로 갚을 수 없다.그래서 베드로는 도리어 선을 행하므로 갚아야 하며, 확신을 가지고 고난 가운데에도자신의 영혼을 보호해 주실것을 부탁해야 한다(Stibbs). '부탁할지어다'의 헬라어 '파라티데스도산'(* )은 '예금하다', '맡기다'의 '파라티데미'(* )에서 유래된 말로서 '완전한 신뢰를 가지고 의탁하는 것'을 뜻한다. '파라티데스도산'의 대표적인 예는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의탁하는 것과(눅 23:46) 스데반의 의탁이다(행 7:59). 한편 '조물주'(* , 크티스테)는 외경에는 많이 등장하지만 신약성경에는 이곳에만 나온다. 이러한 표현은 능히 모든 피조물을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하나님의 능력을 시사한다(Bigg).
본장은 앞장에 이어 성도의 고난에 관한 문제를 계속해서 다루고 있다. 여기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고 참고 견디되 고난 중에서도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며 진실하게 생활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본장의 내용을 상고하기 전에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들은 다음과 같다.
(1) 타서신과의 비교,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본 서신에는 바울 서신과 유사한 표현들이 많이 등장한다. 본장에 나타난 몇 가지 유사한 표현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가) 육체의 고난. 본장에서 베드로는 육체의 고난을 죄 때문에 받는 고난의 정점
(頂點)이며 극치로 보고 있다(1절).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거니와,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고난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살고 있음을 나타낸다. 바울도 그의 서신들을 통하여 육체의 고난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같이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요 옛 생활에 대하여 죽은 자이다(갈 2:20).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육체의 고난을 받으신 것처럼 성도가 육체의 고난을 받는 것은 그의 옛 사람이 죽어(롬 6:6) 선하고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나) 악의 목록. 본장에 수록되어 있는 악의 목록(3절)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것들과 유사하다(롬 13:13,14; 갈 5:20,21). 음란, 정욕, 술취함, 방탕, 연락(宴樂),
무법한 우상 숭배 등은 모두 이방인의 행위이며 이는 하나님과 뜻이 대립되는 것이므로 버려야 할 것들이다.
(다) 경주의 비유. 바울은 여러 곳에서 성도의 신앙의 생활을 경주에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즉 바울은 성도가 상을 얻기 위해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다할 것을 역설하였다(고전 9:24; 갈 2:2; 5:7; 빌 2:16). 본장에서 베드로도 '달음질하다'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4절). 그러나 바울의 비유와는 달리 베드로는 열심으로 경주에 임하듯이 열광적으로 악을 추구하는 이교의 생활을 염두에 두고 있으며 그 속에서 방탕한 생활에 탐닉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라) 대접의 미덕. 초기 교회에 있어서 남을 대접하는 미덕은 모든 형제를 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간주하는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이었다. 바울은 이 덕목을 성도의 신성한 의무로 강조하였으며(롬 12:13; 히 13:1,2) 베드로 역시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9절).
(마) 영적 은사.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를 서로 봉사하고 섬기는 데 사용하라고 권면하는 부분(10,11절)은 로마서(롬 12:6-8)와 고린도전서의 은사장(고전 12장)을 연상케 한다. 바울은 다양한 은사에 관하여 언급하였으나 베드로는 특별히 말하는 것과 섬기는 은사에 관하여 강조하고 있다.
(2) 중심 메시지. 본장에 나타난 베드로의 중심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가) 하나님의 최후 심판. 베드로의 메시지에는 강한 종말론적 사상이 함축되어
있다.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와 선택과 소명에 의존하는 것으로(1:2; 2:10-12)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하여 선포되었으며(1:10ff) 예수의 사역에 의해 성취되었고(1:19; 3:18) 전도자들에 의하여 널리 전파되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있어서 위대한 전환점이며 그리스도인이 살고 있는 시대는 말세이다. 베드로는 본문에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다고 선언하고 있다(7절). 이는 곧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의미하는 것으로(1:17; 2:23) 심판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진지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6절).
(나) 고난의 극복. 임박한 종말의 관점에서 베드로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종말이
다가오고 있으므로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1:6; 5:10). 베드로는 서신 전체를 통하여 고난이 반드시 오리라는 것을 누누이 언급하였지만, 서신의 분위기가 결코 어둡지 않은 것은 고난의 극복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곧 그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며(1:8; 4:13) 육체의 고난을 받는 것은 죄에서의 해방을 의미함을 강조하고 있다(1절;롬6:7).
(다) 선행의 중요성. 본 서신에는 선행(善行)에 관한 언급이 매우 많이 등장한다
(2:11-4:19). 본장에서 베드로가 말하는 선행은 봉사에 대한 올바른 태도이다. 하나님께서 불의한 백성을 불러내어 거룩하게 하신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거룩한 백성에 합당한 아름다운 덕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다(2:9). 그들은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인 바(2:5), 그들의 제사는 기도뿐 아니라 일상적 생활의 봉사, 즉 선행을 포함한다.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성도의 봉사(11절)는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2:12). 그들은 비록 이 땅에서 흩어진 나그네로 존재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고대하며 거룩하게 살아가는 고귀한 백성들인 것이다.
(3) 구조 및 내용. 본장은 다음과 같은 구조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까) 구조. 본장의 교훈은 다음 장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거니와 반복, 강조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
| 본 문 | 1 - 11 절 | 12 절 - 5 : 11 |
+------------------------------+------------------------+----------------------+
| 고난에의 참여 | 1 - 6 절 | 12 - 19 절 |
+------------------------------+------------------------+----------------------+
| 근신하라 | 7 절 | 5 : 8 - 10 |
+------------------------------+------------------------+----------------------+
| 말세의 삶 | 8 - 11a 절 | 5 : 1 - 7 |
+------------------------------+------------------------+----------------------+
| 송 영 | 11b 절 | 5 : 11 |
+------------------------------+------------------------+----------------------+
(다) 내용. 본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단락에서 베드로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을 얻은 성도들이 때가 악할수록 더욱 근신하여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살아갈 것을 촉구하고 있다(1-11절). 둘째 단락에서는 지금까지 언급한 고난의 의미를 되새기며 결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기쁨으로 참여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12-19절).
1. 고난의 의의와 성도의 자세(4:1-11)
베드로는 본문에서 성도는 그리스도처럼 고난받을 각오로써 영적 무장을 해야 하며 핍박이 가중되는 상황 가운데서도 경건한 삶을 살아갈 것을 권면하고 있다. 다음과 같이 본문의 내용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1) 역사적 배경. 그리스도인이 되어 세상을 살아갈 때 이야기되는 문제는 세속화이다. 세속적인 것이 만연하는 상황 속에서는 옛 생활 대한 유혹이 많기 때문에 타락의 위험성이 크다. 본문은 초대 교회 당시의 부패한 사회상과 각 개인의 삶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본문에 암시되어 있는 이방인의 세속 문화는 음란, 정욕, 술취함, 방탕, 연락(宴樂), 무법한 우상 숭배 등이다. 헬라의 종교 의식중에는 연락과 음란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처럼 우상을 숭배하는 일은 성적 문란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특히 하나님의 법에 철저히 위배되는 일이었다. 그 당시 이방 종교로부터 개종한 교인들 중에는 이러한 이방인의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초신자들이 있었다. 또한 그들이 옛 생활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도했을 경우에는 이방인들의
비방과 유혹을 받아야만 했다. 베드로는 이렇게 어려운 현실 가운데 처해 있는 연약한 성도를 향하여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의 비결을 제시하고 있다.
(2) 육체의 고난과 죄. 그리스도께서 친히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다는 사실은 성도가 현세(現世)의 고난을 이길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하나님과 동등한 본체이신 그리스도(빌 2:6)께서는 성육신(成肉身)하시어 육체의 고통을 당하셨고 마침내 십자가에 죽으셨거니와 그 죽음은 인간의 죄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그분을 본받아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마음, 곧 거룩하고 의로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인간은 안일할 때에 가장 죄의 유혹을 받기 쉽다. 역설적으로 베드로는 육체의 고난을 통하여 죄악을 이길 수 있는 힘을 부여받는다고 교훈하고 있다(1,2절). 고난을 당할 때에는 심히 괴로우나 그로써 죄를 지양(止揚)하고 남은 생애를 하나님의 뜻대로 살수 있다면 그 고난은 오히려 성도에게 유익하다. 이는 성도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지배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죄는 인간의 육체의 정욕을 통해서 가장 강하게 활동한다. 그러므로 육체의 고난은 죄를 극복하게 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성도에게 있어 커다란 스승이라 할 수 있다. 영(靈)으로 살기 원하는 자는 영의 고난을 기뻐하면서 육신의 소욕을 제어하며 살아간다. 곧 심판날이 올 것인즉 그때는 산자나 죽은 자나 모두 심판대 앞에서 행한 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니(5절) 성도는 현재 당하는 고난을 감수(甘受)하고 유혹을 물리쳐야만 한다.
(3) 선한 청지기로서의 삶. 앞서 고난의 유익을 설파한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임박했다고 단언하면서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선한 청지기적 삶을 살 것을 당부한다(7절).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성도의 삶은 기도와 사랑과 봉사의 삶이다.
(가) 기도하는 삶. 주의 재림이 임박할수록 세상에는 악이 번창하며 혼란이 가중
할 것이기 때문에 성도들은 정신을 차리고 깨어서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통하여야 할 것이다. 즉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유지함으로써 구원의 반열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기도는 성도의 호흡인 바, 기도없이 성도는 영적 삶을 영위할 수 없다.
(나) 사랑하는 삶.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기도가 필수적인 요소이며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사랑이 필수적인 요소이다. 공동체 속에서는 무엇보다도 서로 사랑하는 일을 꾸준히 해야 한다(요일 3:11,23; 4:7,11).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주는 것이므로 사랑으로써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사랑의 구체적인 행위는 서로 대접하는 자세로 나타난다. 이 땅에 나그네로 사는 동안 의지할 곳 없는 형제, 자매들을 영접하며 후대해 주는 일은 매우 소중한 사랑의 표현이다. 나그네 대접은 초대 교회에 있어서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로 나타난다(딤전 3:2; 딛 1:8; 히 13:2; 요삼 5-8). 특히 신실한 성도들은 복음 전도자들의 사역을 위하여 장소를 옮길 때 장소를 제공해 주거나 여러가지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다) 봉사하는 삶. 끝으로 종말의 시대를 사는 성도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각양 은사를 최대한 발휘하여 공동체를 위하여 헌신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즉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여 은사를 사용하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여야 한다. 예컨대, 말씀의 은사를 받았거나 봉사의 은사를 받았으면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기에 성실하고도 겸손하게 이 은사들을 사용함으로써 결국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성도의 존재 목적은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
*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한 심판. 본문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를 예비하셨다고 증언하고 있다(5절). 이 말씀은 사도신경의 한 구절이 되었으며, 3:19과 더불어 본서의 난해한 구절로 취급되고 있다. 본 주제 강해에서는 이에 대한 정통적인 해석을 소개하고자 한다.
(1) 재림의 목적.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오르실 때의 모습 그대로 하늘로부터 가시적(可視的)인 형태를 입고 재림(再臨)하실 것이다. 이 사건은 세상 끝날에 일어날 것인즉 그리스도의 재림의 목적은 산 자와 죽은 자 모두를 그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하는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사 위엄의 통치를 수행하실 것이다.
(2) 산 자의 의미. 산 자들이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마지막 날에 살아 있을 사람들로서 신자나 불신자를 막론하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볼 자들이다.
(3) 죽은 자의 의미. 심판주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살아 있는 자들뿐 아니라 이미 죽은 자들까지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말한다(시 7:8; 사 66:16; 욜 3:12; 행 17:31; 딤후 4:1).
(가) 먼저 죽은 자들이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하고 일찍 죽은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데 그중에는 성도들을 박해한 이방인들도 포함되어 있다. 죽은 사람들도 죄를 핑계할 수없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고 생명을 누리기를 원하사 그들 속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롬 1:18-20).
(나) 본 구절은 영적인 측면에서의 해석도 가능하거니와 여기에서 죽은 자들이란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분리된 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엡 2:1).
2. 시련에 직면한 성도에 대한 격려와 권고(4:12-19)
베드로는 처음부터 고난받는 성도들을 염두에 두고 본 서신을 기록하였거니와 본문에서는 좀더 강한 어조로 그들을 격려하고 권고하고 있다. 앞에서는 이교도의 환경 속에 살고 있는 성도의 일반적인 삶의 원칙을 다루었으나 본문에서는 실제적인 박해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다음과 같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시대적 상황. 본문에서 베드로는 박해를 불 시험(firing)이라고 부르고 있거니와 이러한 은유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화형에 처해졌던 사실을 암시한다. 성도들은 네로(Nero)의 박해 때에 로마 성에서 타오르는 횃불로 화형을 당하였다. 그런데 본문에서 베드로가 불 시험이란 말을 쓴 것은 당시 성도들이 화형에 처해졌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박해받는 자들이 그들의 믿음을 시험받았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베드로는 이미 앞에서도 믿음의 시련을 연단하는 불에 비유한 바 있다(1:7).
(2) 시련과 그리스도와의 연합. 베드로는 우선 성도들에게 모진 시련이 닥친다 할지라도 결코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경고한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축복보다는 무서운 시련이 닥치는 것에 대해여 의아해 하고 있있으며 이는 그리스도와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는 성도가 당하는 시련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일이라는 점을 역설한다. 즉 성도의 시련은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그들의 신앙에 부응하는 것이다. 시련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박해를 받아들이고 인내함으로 강화된다. 이러한 사실은 교회의 오랜 시련 속에서 실제로 경험되었다. 순교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할 때 진실고 그와 하나됨을 느꼈다. 예수께서도 자신을 따르는 자는 반드시 고난을 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하셨고(마 16:24; 요 15:18-20),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끊임없는 위로가 되었다(롬 8:17; 딤후 2:11,12). 성도들이 이 땅에서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되 즐거워할 이유는 고난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온전히 하나된다는 사실에 있다.
베드로는 본문에서 바로 이러한 사실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기뻐해야 할 것은 결국 주께서 영광 가운데 재림하실 때에 그의 영광에 참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육적으로는 고통스럽지만 영광의 주와 함께 영원히 왕 노릇할 것을 생각하면 기쁨으로 고난을 받아들일 수 있다(딤후 2:12).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시련을 당한다면 결코 이상히 여기거나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려야 한다.
(3) 그리스도인의 선한 행실. 베드로는 고난받는 자들에게 결론적으로 몇 가지 권면을 주고 있다.
첫째, 죄로 인하여 고난받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 때문에 고난을 받되 결코 살인자, 도적, 행악자 등의 죄목으로 고난을 받는 일은 없어야 한다. 성도들이 이러한 죄목으로 고난을 받는다면 그것은 죄의 대가일 뿐이지 그리스도로 인하여 받는 고난은 아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죄로 인하여 받는 고난의 결과는 사망이지만(롬 6:23) 의를 위해 받는 고난의 결과는 영광과 하나님의 나라임을 알고(마 5:10) 어두운 시대의 빛으로서의 올바른 삶의 모본을 제시해야 한다.
둘째, 고난은 심판의 전조(前兆)임을 깨달아야 한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심판이 자기 백성들의 태만을 벌함으로 시작된다는 선지자들의 사상을 이어 받아(렘 25:29; 겔 9:6) 오늘날 신자들이 당하는 고난을 심판의 전조로 보고 있다. 즉 그는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된 것을 느끼면서 오늘날 성도들조차 고난을 당하고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복음을 거부하는 불순종의 자식들의 종말은 얼마나 처참하겠느냐는 말로 성도들을 위로하고 있다. 종말의 시대에 살고 있는 성도들은 구원의 반열에 떨어져나가지 않도록 깨어 있는 신앙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고난을 받는 성도들은 끝까지 선행에 힘쓰고 신실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탁해야 한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 영혼을 부탁하셨듯이(시 31:5; 눅 23:46)박해받는 성도들은 순교의 위협 속에서도 담대하게 선을 행하며 신앙의 의지를 지켜나가야 한다.
* 본서에 나타난 기독론. 베드로는 본서에서 그의 독특한 기독론을 제시하고 있거니와 그리스도에 관한 베드로의 사상은 두 가지 사건, 곧 고난과 영광으로 요약될 수 있다. 본 주제 강해에서 이에 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구약적 배경. 고난과 영광이라는 주제는 구약 예언의 주제로서 베드로는 이를 매우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소망에 근거하였듯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성도의 소망이 걸려있는 기초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었다고 선포함으로 그리스도의 사건을 예견하였다(사 9:2).
(2) 복음 선포의 본질.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과 영광은 복음의 본질적 부분이다. 베드로의 기독론이 가장 잘 서술된 3:18-22에는 오늘날 성도들의 신앙 고백이 잘 나타나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으며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여기에 덧붙여 그리스도께서 능력으로 오신다는 사상이 본서 곳곳에 서술되어 있다(1:7,13). 이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한 것이며(5절), 신실한 자를 영광과 명예로 보상하기 위한 것이요(1:6; 5:4) 그의 대적자들에게는 벌을 주시기 위한 것이다. 장차 거룩한 날이 오면 그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며 그를 따르는 자들이 그 영광에 참여할 것이다(13절; 5:1,6).
(3) 복음과 윤리. 바울 사상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은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과 연결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하심이다(2:24). 그가 육체로 죽으신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정욕에 지배받는 이방인의 옛 삶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기 위함이다(1-3절). 즉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근거가 된다.
베드로의 기독론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없이 고난받으셨고 부활하심으로 영광 가운데 계시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고난을 받는 성도는 그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요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의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는 기쁨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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