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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 '이와 같이'(* , 호모이오스)는 2:13을 가리킨다(Blum). 그러므로 아내 된 자들이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지위에 있어서 열등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따른 가정 생활의 기능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아내들이 노예와 같은 지위에서 남편들에게 맹종을 할 수는 없으나 행복하고 화목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 가장인 남편이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고 아내는 그 결정에 따라야 한다(Stibbs). 따라서 남편과 아내의관계는 주.종의 관계가 아니라 협력자의 관계이다.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얻게 하려 함이니 - 본문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 하는 목적을 나타낸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하고 믿지 않는 남편이 구원을 얻도록 하는 것이어야한다. '도를 순종치 않는 자'는 그리스도인 여자들이 믿지 않는 남자들과 결혼한 상황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그리스도인 여자들을 비방하는자들을 가리킨다(9절;2:12,15,Balch, Michaels). 그리스도인 여자들이 비그리스도인 남편들과 결혼했을 경우 그여자는 남편의 사회적인 배경에 따른 여러 가지 습관과 종교적인 의식들을 이해해야 한다.만약 순종치 아니한다면 그 사회는 그리스도인의 자질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게 된다.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여자들은 비그리스도인 남편을 자신들의 말로써 회심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에게 복종하는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도록 해야 한다.'말로 말미암지 않고'는 기독교 진리에 대해서 전혀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만 지나친 말싸움이나 유창한 말을 가지고 입씨름 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한편 '구원을얻게 하려 함이니'에서 '얻게 하려함이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르데데손타이'(* )는 '이익'을 의미하는 '케르도스'(* )에서유래된 말로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이익이 되게 하다'라는 뜻이다.

=====3:2
 너희의...봄이라 - '봄이라'의 헬라어 '에포프튜산테스'(* )는 '주의 깊게 관찰하다'의 뜻으로 비그리스도인 남편이 그리스도인 아내의삶을 자세히 관찰함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됨을 암시한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아내의 행위는 두 가지로 묘사된다.
 두려워하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앤 포보'(* )는 남편에 대한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의 모습이다(Blum, Robertson). 비그리스도인 남편은 그리스도인 아내가 하나님을 늘 인식하고 경외하는 가운데 삶을 영위해 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게 될 것이다.
 정결한 행위 - 이것은 흠이 없고 깨끗한 '순결한 삶'을 의미한다. 비록 이교도처럼 이교신을 숭배하는 예배에 참여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 아내는 당시 사회의 정숙한 아내상에 맞는 삶을 살아감으로 비그리스도인 남편으로 하여금 아내를 인정케 하고 그 아내가 섬기는 하나님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해야 한다(Michaels).

=====3:3
 너희 단장은...외모로 하지 말고 - 본문은 외모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는 의미보다는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행동할 것을 시사한다. 여자들의 단장은 마땅한 것이나 인위적으로 사람들에게 보이게 하려고 단장하는 것은 금해야 한다.왜냐하면 비록 사람은 의모를 보고 판단할지라도 하나님은 마음 중심을 보시기 때문이다(삼상 16:7). '단장'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스모스'(* )는 질서를 가진세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당시에 쓰인 장식을 나타낸다(Robertson). 당시 전반적으로 사치를 즐길 수 있는 계층의 사람들은 많지 않았지만 일부 계층에서 머리를 땋고, 금장식을 했던 사람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3:4
 오직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 )은 앞절과 본절이 대조되고 있음을나타낸다. '외모,'단장'과 '숨은 사람', '머리, 금, 옷'과 '심령'을 대조시켜서 그리스도인 여인이 갖추어야 할 것에 대해서 강조한다(Selwyn).
 마음에 숨은 사람을 - '숨은 사람'은 앞절의 '외모'와 대조 개념으로 '속 사람'을의미한다(롬 7:22; 고후 4:16; 골 3:9, Michaels). 속 사람의 '마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진 생명이며,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마음으로서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뿌리를 두며, 그와 연합하여 깨끗하고 신실하며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리킨다(15절;1:22).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썩지 아니할 것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앤 토 아프다르토'(*  )는 본서의 독특한 용어로 구속함 받은 그리스도인 여인에게 아주 자연스러운 표현이다(1:4,18,23, Michaels). 이것은 두 가지 마음으로 정의된다. (1) 온유하고.
 이것은 마음의 동요를 일키지 않는 것으로(Bengel) 남편의 태도나 요구를 부드럽게 받아들이는 기질을 나타낸다(Stibbs) (2) 안정한 - 이것은 타인에 의해서 일어나는동요에 흔들리지 않는 평온함으로(Bengel) 틀림없이 남편을 보필하는 것을 나타낸다(Stibbs) 이런 마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인정할 만하며 가치있는 덕목이다. 한편'심령'의 헬라어 '프뉴마토스'(* )는 '성령'을 의미하지 않고 그리스도인 여인이 지니는 어떤 '기질'을 나타낸다(Lenski, Michaels). 이러한 온유하고안정한 심령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그리스도로부터 온다.

=====3:5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 - 여기서는 구체적인 구약 시대의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거룩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아이'(* )는 '거룩한 선지자'를 칭할 때 사용되었으며(눅 1:70; 행 3:21) '사도'(엡 3:5)와 '천사'를 호칭할 때(막 8:38)도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의 여인들에게 사용되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사용된 것으로(1:15; 2:5,9) 그리스도인들이하나님께 소망을 둔 것처럼 구약 시대의 '부녀들'도 이미 하나님께 소망을 둔 자로서'거룩한 자들'이었다(Michaels). 하나님에게 둔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 한편 '부녀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귀나이케스'(* )는다음 절에서 예로 '사라' 혼자만이 언급된 반면에 복수로 나타나고 있다. 유대 전승에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의 아내인 사라, 리브가, 라헬과 레아가 족장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본절의 '부녀들'은 이들을 가리키는 듯하다(Michaels). 이들은 그들의뜻이 하나님 앞에 고정된 자들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메시야를 갈망했던 그들은(5절; 1:3,13; 히 11:13) 내면의 아름다움을 단장했던 자들이었다(Bengel, Blum).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 저자는 '거룩한 부녀들'이 갖춘 내면의 아름다움을 '순종'으로 소개하고 있다. '단장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코스문'(* )은 습관적인 행위를 나타내는 미완료 과거로서 '단장하곤 했다'라는 의미이다. 여인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은 내적인 단장이며 썩어 없어질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되는 장식이었다.

=====3: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 저자는본절에서 순종을 통해서 내면적인 아름다움으로 단장한 '거룩한 부녀들' 중 '사라'를실례로 들고 있다. 사라는 아브라함을 '주'라고 부름으로 그에게 복종했다(창 18:12).비록 자기 남편을 주라 칭했던 것이 당시의 풍습이라 할지라도 베드로는 본문에서'주'라는 호칭이 아브라함에 대한 사라의 순종의 표시임을 강조한다. 이는 신자들이그리스도를 주라 칭하고 복종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Stibbs). 한편'딸'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크나'(* )는 문자적으로 '자녀'를 의미한다.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아브라함이 모든 믿는 자의 믿음의 아버지인 것처럼(롬 4:11; 갈 3:7) 아브라함에게 순종한 아내 사라 역시 모든 믿는 자의어머니가 되며(갈 4:22-31) 아브라함과 사라는 모든 믿는 자의 부모가 된다. 실제로사 51:2에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동일하게 유다의 부모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의심할 것 없이 신약에서도 동일하게 부모로 간주할수 있다(Goppelt).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 이 부분은 본절에대한 삽입구로 볼 필요가 없다. 하나의 독립된 구절로 보아서 '너희가 선을 행하면','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의 분사구로 해석함이 탸당하다. 그러나 이는'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딸이 될 수 있다'라는 조건적 분사로서가 아니라 이 현재 분사를 부정과거로 연결시켜 이미 '사라의 딸이 되었으므로선을 행하고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해석되어야 타당하다(Lenski). 한편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는 잠 3:25의 인용이다. 이 말은 너희가 딸이 되었으므로 이교도 남편들이 선을 행하는 것을 방해하고 난폭하게 취급하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그러한 두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침착하고 용기를 가지라는 권면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딸이 되었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3:7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 아내가 남편에게순복한 것처럼 남편들도 아내들에게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와같이'는 1절과 동일한분사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결혼의 관계를 세상의 제도적인 것으로만 보지 말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로 인식해야 함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남편 된 자들이 마땅히아내들에게 결혼 생활 속에서 감당해야 할 의무는 연약한 아내를 보살펴 주는 것임을말하고 있다. 부부 관계에 있어서는 마땅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이 '지식'에 대한 헬라어 '그노신'(* )는 하나님께서 의도하고 있는 결혼 관계에 대한 인식즉 결혼 생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바로 분별하는 통찰력을 의미한다(Vincent). 한편'동거하다'의 헬라어 '쉬노이쿤테스(* )는 '함께 살다'의 '쉬노이케오'(* )에서 나온 말이다. 이것은 특히 성교와 관련된 말이나(Kelly) 본문에서는 단순히 남편이 아내와 갖는 성적인 관계만이 아니라 여자의 육체적인 연약함을 돌보는 전체적인 관계를 나타낸다(Reicke).
 저는...귀히여기라 - 베드로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남편들이 아내들을 귀하게 대할 것을 권면한다.
 더 연약한 그릇이요 - 이것은 지적이나 도덕적인 연약성이 아닌 육체적인 연약성을 가리킨다(Blum).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 - 아내가 남편에게 귀히 여김을 받을 또 다른 이유는 영적인 면에서 남편과 동등하게 영생의 은총을 공유한 자이며 그것을 상속받을 동등한 동반자이기 때문이다(Stibbs, blum, Michaels).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 남편과 아내가 꾸미는 가정은교회의 축소판이다(Clement). 가정 안에서 남편과 아내가 협력하며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기도하였을 경우 두 세사람과 함께 계신 주님께서 응답하실 것 이다(마 18:20;고전 7:5). 그러나 서로의 관심과 사랑을 필요로 하는 기도 생활에서(4:7-11; 마5:23-24; 6:12,14; 18:15-20; 막 11:25) 남편이 악하게 아내를 대하거나 서로가 불화하는 경우에는 기도의 효력이 발생하기 어렵다.

=====3: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 베드로는 본절에서 2:18-3:7에 있는 명령을 마무리하면서5개의 형용사를 사용함으로 완곡한 권면을 하고 있다. 본절에 사용된 5개의 형용사는동일하게 분사적인 용법을 취하고 있다. 이는 특별한 계층으로 부터 신자의 특성으로관심을 옮긴 것으로(Goppelt, Selwyn) 신자의 상호 관계에 대한 언급이다.
 마음을 같이하여(* , 호모프로네스) - 이것은 '같은'을 뜻하는 '호모스'(* )와 '마음'을 의미하는 '프렌'(* )의 합성어로서 '한가지 일에 뜻을 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동일한 의견을 가지라는 의미가 아니라 각자가 서로에 대한 동일한 관심을 가지며 영적인 끈으로 연합되어야 함을 시사한다(행 4:32, Michaels).
 체휼하며(* , 쉼파데이스) - 이것은 '함께'를 뜻하는 '쉰'(* )과 '고통을 받다'에 해당하는 '파스코'(* )의 합성어이다. '쉼파데이스'의 직접적인 의미는 '동정심을 갖다'로 다른 사람의 감정에 참여하여 고난 받는 사람을 적극적으로 동정하는 것을 나타낸다(히 10:34).
 형제를 사랑하며(* , 필라델포이) - 신약성경에서 본절에만 나오는 '필라델포이'는 '사랑'에 해당하는 '필로스'(* )와 '형제'에 해당하는 '아델포스'(* )의 합성어이다. 이는 단순한 형제애가 아니라그리스도의 사랑에 결속시키는 형제애로서 그리스도인이 행해야 할 윤리적 덕목이다(롬 12:10; 살전 4:9,10; 히 13:1; 벧후 1:7).
 불쌍히 여기며(* , 유스플랑크노이) - 이것은 '좋은'의뜻을 가진 '유'(* )와 '마음'을 뜻하는 '스플랑크논'(* )의합성어이다. '유스플랑크노이'는 히포크라테스 당대에 '내장이 강한' 사람을 가리켰으나 의미가 변화되어 '용기 있는'이나 '인정 많은'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Selwyn).신약성경에서는 인간의 가장 깊은 감정이나 동정심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고후7:15; 몬 1:7, Bigg).
 '겸손하며'(* , 타페이노프로네스) - 이것은 '겸손한'의 의미를 가진 '타페이노스'(* )와 '마음','생각'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렌'(* )의 합성어이다. 이는 예수께서 가지셨던 마음으로(잠 29:23;빌 2:6-9) 낮은 마음을 나타낸다.

=====3: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 베드로는 본절에서 일반적인 불신자와의 관계를 말함으로써 결론을 맺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행동 원리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 뿐만 아니라 자기를 해치고 욕하는 자에게도 보복하는 일이 없이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게 대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직접 말씀하셨던교훈이다(눅 6:27-29; 23:34). '갚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디돈테스'(* )는 당연히 갚아야 하는 것을 가리키는 '아포디도미'(*,'지불하다')에서 유래한 단어이며, '복을 빌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율로군테스'(* )는 저주의 반대말로 '좋게 말하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당연히 악이나 욕으로 갚아도 될 만한 상황 속에서라도 저주나 앙갚음을하지말고 도리어 축복하고 중보 기도해야 함을 시사한다(Blum).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히나'(* , '...을 위해서')로서 목적절을 나타낸다. 그러나 본절의 '히나'는 목적절로 보아서는 안 된다. 만약 목적절로 해석하면 복을 받기 위해 다른 사람을 축복해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본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을 유업으로 받게하시려고 부르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타인에게 복을 빌어야 한다'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복을 빌어야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Lenski,Bengel, Blum).

=====3: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 본절은 시 34:12-16을인용한 것이다. 본래 시편에서는 '생명'과 '좋은 날'이 이 세상과 관련된 표현이나 베드로는 본절에서 시편을 인용하면서 그 의미를 종말론적 차원까지 확대하고 있다(Blum). 즉 베드로는 '생명'이 단순히 '이 세상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소망인 영생을 지칭하는 것으로(Michaels), '생명을 사랑하고'는 7절의 '알아'와연결되어 단순히 생명을 사랑하고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깨달아서 그 목적에 맞게 소망하는 것으로 그 의미를 확대시키고 있다(Lenski). 한편 '좋은 날'은 시편 기자가 '이 세상의 아름답고 즐거운 날'로 묘사했으나 본문은 장차 올세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Beare, Kelly) '그리스도인에게 영광을 가져다 줄날'을 가리킨다(1:8). 이렇게 영생을 소망하고 사랑하며 다가올 세계를 기다리는 자는곧 그리스도인이다.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맡하지 말고 - 영생을 사랑하고다가올 세계를 간절히 바라는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혀를 조심하여 악한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약 3:6). '궤휼'에 해당하는 헬라어 '돌론'(* )은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해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헐뜯는 것을 삼가하며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 이러한 화평은 세상에 목표를 두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목표로 삼을 때 이루어진다.

=====3: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 '떠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클리나토'(* )는 문자적으로 '돌아서라'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의지로 악에서 돌아서서 다른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말과 행실이 일치하는 가운데 선을 행해야한다(Tasker).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리 - 본문은 시 34편에서 인용한 듯하다(Goppelt,Michaels). '화평을 구하는 것'은 서로를 세워 주는 것이며(딤후 2:22), 현실적인 삶에 순응하여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평화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할 수 있는 삶이다.이런 '화평'은 상대가 불신자든(롬 12:18) 특별히 그리스도인이든 간에(고후 13:11; 살전 5:13) 신약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윤리적 덕목으로서그리스도인들이 열심을 다해 붙잡아야 할 것이다.

=====3: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 '주'에 대해서혹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나(Michaels) 시 34:15,16에서와 마찬가지로 '여호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Blum, Stibbs). 한편 '눈'은 항상자신의 섭리에 따라 자기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감찰하심을 의미하며(출 2:25) '귀'는자신이 백성의 필요한 간구를 들으심을 의미한다(출 3:7).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 '주의 낯'은 하나님께서 악행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계시는 진노의 모습을 나타내는 히브리적 표현이다(Blum). 한편 '향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 )는 두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1) '넘어서'(over). (2) '대항하여'(against). 두 가지 의미 중 본절에서는 후자의 의미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눈은 선을 행하는 자들이나 악을 행하는 자들이나 동일하게 향하시나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넘어 가시며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그냥 지나가지 않으시고 악한 자를 대적하여 진노하시기 때문이다(시 34:16).

=====3:13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 '열심으로'에 해당하는헬라어 '젤로타이'(* )는 '뜨겁게 하다' 혹은 '타는 듯하다'의 뜻을 가진 '젤로오'(* )에서 유래된 말이며, '해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코손'(* )은 '나쁜'이라는 뜻의 '카코스'(* )에서 나온 말로서실제로 '상처를 내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눈이 의인을 향하시고또한 그의 귀가 의인의 간구를 들으시므로 열정을 갖고 선을 행하는 자들이 해를 당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본절은 선을 행하는 자들이 세상에서 전혀 해를 당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본절은 유대주의적인 표현으로(시 56:4; 118:6; 마10:28; 롬 8:31, kelly)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따라서 본절은 육체적인 것은 해칠 수 있지만 근본적인 영혼까지는 해칠 수 없으며(마 10:28), 그들이 믿음의 사람에게 육신적으로 해를 가한다고 할지라도 묵묵히 참고 선을 행하면 하나님의승리가 보장됨을 시사한다.

=====3: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 헬라어 본문에서 '고난을 받으면'은 실제로 일어날 확실한 박해를 암시한다(Robertson). 본문은 예수께서 말씀하신팔복을(마 5:10)이 베드로가 인용한 것이다(Michaels). 한편 '복있는 자'(*  , 마카리오이)는 베드로가 자신의 서신에서 잘 쓰는 단어 형태로(4:14) 이러한 복은 장차 하나님 나라에 속할 기대를 가지고 견뎌내는 자가 갖는 것으로 미래적인것이다(Blum). 따라서 본문은 수신자들이 고난이 닥친다 하더라도 그 순간을 견디어이기면 축복의 영광을 소유할 것임을 시사한다.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 본절은 사 8:12의 인용이다. 70인역은 '저희에 대한 두려움'로 잘못 이해하여 '앗수르 왕에 대한 두려움'으로 번역하였으나 히브리어 본문에 의하면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 말라'고 되어 있다.따라서 본문은 '톤 포본 아우톤'(* , '그들의 두려움을')으로 '그들의 두려움을 두려워 말라'로 해석되어야 한다. 베드로는 본절에서 어떠한 상황하에서든지 주께 헌신한 자들이 흔들리지 않고 확고하게 서 있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Calvin).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 본절은 사 8:13의 인용이다.사 8:13에서 '주'는 '만군의 여호와'를 가리키는 것이나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온 톤 크리스톤'(*  )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퀴리온'앞에 관사가 없으므로 서술격으로 해석되어 '그리스도를 주로서'라는 의미이다(Christ as Lord,NIV,RSV). (2) '퀴리온'과 '톤 크리스톤'을 동격으로 '주, 즉 그리스도를'이라는 의미이다(Bigg, Micha6els, Selwyn). 한편 '거룩하게 하고'의 헬라어 '하기아사테'(* )는 그리스도를 '거룩한 분으로 인정하라'는 의미로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을 나타낸다(Michaels). 그리스도인은 마음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을 불러주신 거룩하신 분, 그리스도를 알려야 한다(1:15,16; 2:9b).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그리스도인이 가지는 소망이라 함은 하나님 안에서 영생을 소유하는 기대이다(1:3,21;롬 4:18; 엡 2:12).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두고 소망을 가진 자들은 비그리스도인들과 구별될 수 밖에 없으며 비그리스도인들은 그 점에 대해 의아해 하고 질문하게 된다. 그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진리의 수호뿐만 아니라 그것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대답'에 해당하는 '아폴로기안'(* )은 본래 재판석상에서 공식적으로 변호할 때 사용되어진 용어이다(행 22:1; 25:16). 본문에서 법정 용어가 사용된 것은 공식적인 대답의 요건을 갖추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어떤 사람, 어떤 상황에서도 대답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 헬라어 본문에는 '알라'(* , '그러나')가 본문앞에 삽입되어 있다. 베드로는 '알라'를 사용하여 대답할 것을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온유'의 헬라어 '프라위테토스'(*  )는 태도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성품이며(딤후 2:24,25) '두려움'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부'(* )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다(2절; 1: 17;2:17, Blum).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변론하는 과정에서자기 주장이나 감정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온유함과 두려운 마음으로 합당한진리만을 말하도록 해야 한다(Stibbs).

=====3: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 '선한 양심'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하나님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인식하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게 살아가는데에서 생기는 자유와 담대함과 관련된다(행 24:16; 딤전 1:19, Michaels, Blum). 이러한 선한 양심은 그리스도인들이 변론할 수 있는 가장 합당한 근거이다. 아무리 논리에 맞는 대답과 설득력이 있다고 할지라도 만약 양심이 선하지 않다면 복음에 대해서올바로 증거하지 못한 자가 되고 만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함이라 - '욕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페레아존테스'(* )는 '모욕하다'를 뜻하는 '에페레아조'(* )에서유래된 말로서 '정신적으로 학대하다'라는 의미이다(Robertson). 그리스도인이 선한양심과 깨끗한 행동을 보일 때 그를 모욕하고 핍박하던 자들의 거짓이 드러나 오히려그들이 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3:17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나으니라 - 이 구절은 2:20과 같은 구조의 문장으로 되어 있다. 특별히 '선을 행함'(* , 아가도포이운테스)과 '악을 행함'(*, 카코포이운타스)이 병행 구절로 되어 비교되고 있다. 악을 행하는자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그들이 행한 악의 결과이며 하나님의 심판으로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선을 행하는 자들이 고난을 받는 것은 자신들의 잘못으로 고난을 받는것이 아니고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그러기에 선을 행하는 자들이 당하는 고난은 부끄러움이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고난을 통해서 역사하셔서 고난받는 자들을 축복하신다(2:15,19,20; 4:13,14; 골 1:24, Stibbs, Blum).그러므로 악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보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

=====3:18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 '죽으사'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어떤사본에서는 '에파덴'(* , '고난당하였다')로 되어 있으며(B.K.P) 어떤사본에서는 '아페다넨'(* , '죽었다')으로 나온다(* ,A.C). 여기서어떤 것을 취한다 할지라도 의미에는 변화가 없으나(Blum) 2:21과 4:1의 연관성으로보아 '에파덴'으로 보는 것이 탸당한 듯하다(Caffin, Lenski). 한편 '죄를 위하여'에해당하는 헬라어 '페리 하마르티온'(* )은 '죄에 관하여','죄에 대하여'라는 의미로 속죄제의 희생을 나타낼 때 쓰인 어구이다(레 5:7; 6:20;겔 43:21).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이유로서, 그의 죽음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단번에 드린 대속적인 죽음이었다(Bigg).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 의인이시지만 죄를 지은 불의한 인간을 위하여 대신 고난을 받으시고(사 53:5,6,11,12) 대속적인 죽음을 당하셨다(Blum). '대신하셨으니'의 헬라어 '휘페르'(* )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대속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 본절은 '히나'(* , '위하여')로 시작되는 목적절로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신 목적을 나타낸다. '인도하다'에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사가게'(* )는 본래 법관 앞으로 데려오거나궁전 앞으로 데려올 때 사용된 용어로서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의 깊이를 보여주려는 의도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프로사가게'는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이나(히 6:20) 희생 제물과 관계가 없으며(Selwyn, Kelly, Goppelt). 어두움에서 빛으로, 우상에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나아가는 개종의 경험과 연관된다(Michaels, Stibbs).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도록 하며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도록 하였다.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 본절은 '죽으심'과'부활', '육신'과 '영'이 대조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시 헬라에서는 물질과 영을 나누어서 해석하는 방법이 유행하였으나 본절의 '육체로는'의 헬라어 '사르키'(* )와 '영으로는'의 헬라어 '프뉴마티'(* )는 도구를 나타내는여격이 아니라 영역을 나타내는 여격이다. 따라서 '육'과 '영'은 그리스도의 몸과 영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육'은 인간적인 생명의 영역에서의 그리스도를 '영'은부활하신 생명의 영역에서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selwyn, blum, Dalton, Michaels).

=====3:19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 본절은 해석상에 있어서 난해한 구절중의 하나이다. 본문에 있는 영은 누구인가? 만약 영을 예수 그리스도로 본다면 예수그리스도께서 친히 전파하셨는지, 아니면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전파했는지,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셨다면 누구에게, 언제, 무엇을 전파하셨는지에 대해논란이 많다. (1) 혹자는 '에녹의 영'이 음부에 있는 타락한 천사들에게 전파했다고주장한다(Nestle, Harris, Moffatt, Goodspeed). (2) 혹자는 그리스도가 죽으신 후 부활하기까지의 동안에 노아의 홍수 때 멸망하여 음부에 갇혀 있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전파했다고 주장한다(Bigg, Hunter).(3) 혹자는 그리스도가 성육신 전에 성령으로 노아를 통해 당시의 패역한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전도했다고 주장한다(Jerome,Augustine, Aquinas). 이 견해에 따르면 본절의 '옥'은 이 세상은 의미한다. (4) 혹자는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천사들에게 전도하신 것이라고 주장한다(Blum, Dalton,Kelly). 이러한 견해들 중 세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20절; 1:10,20; 벧후 2:5).

=====3: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 1세기 때에 묵시 문학에서 노아의 홍수는 종말에 오는 심판의예표로 종종 이용되곤 하였다(마 24:37-39; 벧후 3:3-10). 또한 신약 시대에 와서 노아 시대의 홍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로 비유된다(21절). 그래서 홍수 가운데 방주에 들어간 자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도우심으로 보존된 '의의 상징'이었다(히 11:7).반면에 홍수에 멸망당한 자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한 결과로 그리되었다. 하나님은 '방주를 예비할 동안 오래 참고 기다리셔서' 회개할 기회를 주셨지만(창 6:3; 롬2:4; 벧후3:9) 그들은 회개하지 아니함으로 방주에 들어갈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여기서 '방주'는 '교회'에 대한 상징으로(Justin, Tertullian) 노아 시대에 120년을 기다리셨던 하나님은 지금도 죄인들을 위해 오래 참고 기다리신다(벧후 3:9).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겨우 여덞 명이라 - '물로 말미암아'(* , 디 휘다토스)는 '물을 통하여'라는 의미이며 '방주에서'에 해당하는 헬라어'에이스 헨'(* )은 '방주 안에서'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방주 안에 들어간자들이 물을 통하여 구원을 얻었음을 시사한다. 방주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은 물로 인하여 심판을 받았지만 방주 안에 있던 사람들은 물이 안전하게 방주를 밀어올림으로구원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를 통한 구원을 상기시켜준다. 한편 '여덟 명'이란 숫자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불과 소수만이 구원을 얻은 것으로 특히 고난을 받은 자들에게 용기를 주는 것이다(Kelly).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맘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 노아의 가족을 구원한 물은 세례를 상징한다. 그렇다고 해서 본문이 세례의 형태에 참여한 것을 곧 구원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에 참여하여 연합되어야 얻을 수 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생명을 얻었음을 고백하는 표시이다. 실제로 노아 홍수때의 물은 세례시의 물의 '실체'(* , 안티튀폰)이고 세례 때의 물은 '표상'(* , 튀포스)이다(TDNT).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 본문은 세례의 중요성을 배제시키려고 함이 아니다. 단지 세례는 몸의 더러움을 씻어내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행위로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혹자는 '육체의 더러운 것'에 나타난 소유격을 주격으로 보아서 '육체가 더러움을 제거함으로'라는 의미로 보나(Bengel) 세례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까닭에 심령의 죄를 씻어내는 것이다(히 10:22). 그 결과 그리스도인은 선한 양심을 소유하게 되고 하나님을 찾게 된다.

=====3:22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 그리스도께서 고난 후에 승귀하여 영광의 자리에 계심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오르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류데이스'(*   )는 19절에서 사용되었던 분사로서 계속적인 승리의 전진을 나타낸다(Stibbs). 그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셔서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최고의 권세와 모든 피조물로부터 존귀를 받으시는 영광 중에 거하신다(시 110:1; 롬 8:34).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 여기에 나오는 세 가지 존재들 즉 '천사'와 '권세', 그리고 '능력'은 강력한 힘을 지닌, 선한 천사나 악한 천사의구별없이 영적 세력을 의미한다(롬 8:38; 고전 15:24; 엡 1:21) 이들은 영적 존재로서일시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으나 결국 하나님 우편에 계셔서 온세계를 다스리시는그리스도께 무릎을 꿇고 말 것이다.

 

 

  앞장에서 성도의 대사회적 의무를 언급하기 시작한 베드로는 본장에서 계속하여  부부에 대해 권면함으로 아울러 본 서신의 중심 주제인 의를 위한 고난을 상기시키고 있다. 본장의 구체적 내용은 문단 강해에서 상고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본장의 역사적 배경과 구약적 배경을 살펴본 후 중심 주제에 유의 하기로 하자.
  (1) 역사적 배경. 베드로는 본장에서 주로 남편에 대한 아내의 태도에 초점을  맞추어 교훈을 베풀고 있다(1-6절). 그 시대 사회에서는 여자의 지위가 무시되고 한  인격체로서 존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여기에서 베드로가 대상으로  하고 있는 여인들은 이교도 남편들과 결혼한 자들이었다. 따라서 당시 신앙의 문제로 인하여 파탄에 이른 가정이 많이 있었다. 이교도 남편들은 기독교를  치명적인  미신(迷信)이라고 멸시 했으므로 그 가정에는 평화가 있을 수 없었다. 이교도 지도자들은  아내가 남편의 종교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가르쳤으므로 많은 남편들은 아내가 자기와 다른 종교로 개종했을 경우에 자기에게 충실할 수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드로가 남편에 대한 아내의 일방적인 순종을 요청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해할 만 하다. 즉 아내들은 최대한 기독교적 순종의 미덕을 나타내며  경건하고  순결한 생활 태도를 보임으로써 이교도 남편들을 감화시켜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만
했다.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가중되고 주의 재림이 임박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어떤 방법으로든 선한 행실로써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는 일은 성도의 우선적인 관심사여 마땅한 의무이기 때문이다.
  (2) 구약적 배경. 베드로는 바울을 비롯한 신약성경의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구약적 배경을 가지고 그의 교훈을 베풀고 있다. 본장에서 나타난 구약적 배경을  살펴보기로 하자.
    (까) 믿는 자들의 어머니인 사라. 바울은 아브라함을 믿는 자들의 아버지로  간주
하였고(롬 4:16,17),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믿는 이들의 모본(模本)으로 제시하였다(히 11:8-12). 베드로는 본장에서 사라를 모든  믿는  이들의  어머니로(창 17:15,16), 그리스도인들은 그녀의 영적인 딸로 묘사하고 있다(6절). 베드로는 사라의 믿음과 순종과 선행을 실례로 제시함으로써 옛 계약의 백성들과 새  계약의  백성들을 구속사적 맥락에서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 인용구. 베드로는 본장에서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시 34:13-17).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하는 의인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그들은 악인들과는 달리 생명을 누리게 되리라는 것이다(10-12절). 물론 구약에서는 의인에게 내려지는 축복이 주로  평안과 장수를 의미하지만 본장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의미한다. 또한 베드로는 이사야의 말씀(사 8:12,13)을 의지하야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고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것을 당부하고 있다(13,14절).
    (따) 노아의 방주.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의 신앙 위인들 중 노아를  언급하였거니
와(히 11:7) 베드로는 본장에서 노아의 방주와 세례를 연결시키고 있다(20,21절).  순종의 사람 노아는 홍수로부터 구원을 얻었던 바, 그것은 육체적 구원인  동시에  영적 구원, 즉 하나님의 진노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한다. 성도는 구원의 외적 표(標)인 동시에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됨을 의미하는 세례를 통하여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존재이다.
  (3) 중심 주제. 본장에 흐르고 있는 두 가지 중심 주제를 숙고해 보기로 하자.
    (까) 순종의 윤리. 베드로가 제시하고 있는 가정의 윤리에 있어서 중심을  이루고
있는 미덕(미덕)은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이다(1절). 앞장에서도 그는 국가  권력에 대하여 성도는 순종해야 하며(2:13), 종된 자들 역시 주인에게 순종해야 함을  역설하였고(2:18), 이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기 위하여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2의  본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심화되는 핍박과 임박한 재림 사이에서 그는 구조적인 악에  대항하기보다는 오히려 주님의 날을 기다리며 복음을 전파하라는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을 수행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다) 성도와 고난. 베드로는 곧 닥쳐올 가혹한 핍박을 예견하고서 이에 대하여 성도들에게 굳건한 믿음과 올바른 행실을 지키라고 권면한 후에 그리스도에 대속적 고난을 실례로 들어 성도의 고난에 적극적인 의미와 영적 교훈을 부여하고 있다(13-19절).성도들에게 있어서 시련은 하나의 특권이요 필연적인 것이다(1:7).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의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감사하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써 고난을 극복해야 한다.
  한편 본장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단락에는 아내된 자들의 올바른 태도와 남편된 자들의 도리가 제시되어 있고 이어서 지금까지 제시된  교훈들에  대한 결론적인 권면이 담겨 있다(1-12절). 둘째 단락은 핍박의 상황 속에서 성도가  취해야 할 합당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 본보기로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언급하고  있다(13-22절).

  1. 부부에 대한 권면(3:1-12)
  앞에서 주인과 종의 올바른 관계에 관하여 교훈한 베드로는 본문에서 성도의 바람직한 부부관계에 대한 권면을 베풀고 있으며 아울러 신자 일반에 대한 결론적인  권면을 하고 있다. 본문의 내용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1) 아내된 자들의 올바른 태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아내의  자세로서 다음 세가지를 제시하고 있다(1-6절).
    (까) 순종하는 태도. 초대 교회 당시에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불신자를 남편으로 가진 성도들이 많았으며(행 1:14;17:4) 이에 따른 신앙 생활고 가정 생활의 조화가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즉 기독교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성도들은  남편에게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덕을 끼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있는 자들에게 주는 베드로의 최선의 권면은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 덕을 끼치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순종이란 결코 일방적인 굴종은 아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순종은 믿지 않는 남편의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과  사랑으로  섬기는  행위를  의미한다(엡 5:22;  골 3:18,19;  딤전 2:9-15).
    (다) 경건하고 순결한 생활. 아내의 순종에는 경건하고도 순결한 생활 태도가  포함되어야 한다. 기독교적인 경건과 순결의 모습은 무언(無言)중에 감화력을  발휘하여 불신자인 남편을 능히 감동시키고 개종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내들은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여 남편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경건하고  순결한  생활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따) 온유하고 정숙한 아름다움. 당시 공동체 안에는 부유한 여성들이 있었던 바,
베드로는 그들에게 자기를 과시하는 화려한 의복을 입지 말 것을 교훈하면서 온유하고 정숙한 아름다움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미덕임을  강조하고  있다(딤전 2:9). 여기서 베드로는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를 믿음의 어머니로  묘사하면서 그 본을 따를 것을 강조하고 있다(5,6절).
  (2) 남편된 자들의 도리. 그리스도인 아내의 태도를 집중적으로 다룬 베드로는 그리스도인 남편의 태도를 간략하지만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한 마디의 교훈으로  요약하고 있다(7절).
    (까) 지식을 따를 것. 먼저 남편들은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同居)해야  한다.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남편으로서 변화된 모습을 나타내야 한다. 즉 옛날에 따르던 인간적인 지식이나 세속의 전통대로 하지 말 것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진리의 지식을 따라 살아야 한다.
    (다) 온유하게 대할 것. 이는 여자를 무시하고 종과 같은 비천한  존재로  여기던
사회적 상황에서 주어진 교훈이다. 특히 베드로는 여자가 육체적으로 연약한 존재임을 상기시킴으로써 여성에 대한 폭행이나 구타 등 여성의 인격을 무시하는 행위를 삼가할 것을 암시적으로 교훈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하나이며 동등한 인격체이다. 그러므로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하듯이 남편도 마땅히 아내에게 온유와 관용으로 대해야 한다.
    (따) 귀하게 대할 것. 이는 아내들은 남편들과 마찬가지로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7절)라는 점에 근거한다. 하나님 앞에서 남녀의  차별이  없으니(갈 3:28) 남편들은 아내를 함께 기업을 받아 누릴 자로 여기고 겸허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겨야 한다. 결론적으로 남편과 아내는 서로 존중함으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이며 이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참된 모습을 이웃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3) 결론적 권면. 지금까지 사회 구조와 관계속에서 성도가 시민으로서,  종으로서, 아내로서, 그리고 남편으로서 각각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에 관하여 언급한  베드로는 이제 시편 말씀(34:13-17)에 근거하여 공동체 전체에게 주는 결론적인 권면을  베풀고 있다(8-12절). 즉 성도의 공동체적 의무를 다섯 가지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이 지켜야 할 규범이라 하겠다.
    (까) 체휼(體恤)하라(8절). 성도들은 상호간에 생각과 감정을 같이 하라는 권면의
말씀이다. 즉 성도는 다른 사람의 기쁜 일에 함께 할 뿐 아니라 타인의 고난에도 기꺼이 동참할 수 있어야 한다(롬 12:15; 고전 12:26; 히 4:15).
    (다) 형제를 사랑하라. 성도들은 주 안에서 영적으로 거듭난  형제  자매들이므로
시기와 다툼을 버리고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온전히 이루어야 할 것이다(살전 4:9,10).
    (따) 불쌍히 여기라. 공동체 내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당한 자들을 도와  주되 그리스도께서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것처럼 하라는 것이다(롬 12:20).
    (마) 겸손하라. 기독교의 덕목 중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겸손은 그리스도께서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빌 2:6-11).
    (바) 악인에게 복을 빌라.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는 말씀은  구체적으로 박해자를 대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이는 할 수만 있으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라는 바울의 교훈과도 일치하며(롬 12:17,18),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상기시킨다(마 5:44). 이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롬 12:21). 이렇게 사는 것이 축복된 삶, 곧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며 성도들은  이러한 삶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 한편 본문의 교훈을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교훈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
| 절 |         벧 전  3 장            | 절 |            롬  12 장              |
+----+--------------------------------+----+-----------------------------------+
|    |마음을 같이 하여                |16a |마음을 같이 하여                   |
|    +--------------------------------+----+-----------------------------------+
|    |체휼(체휼)하며                  |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
|    |                                |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
|    +--------------------------------+----+-----------------------------------+
| 8  |형제를 사랑하며                 |10  |형제를 사랑하여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    |                                |    |서로 먼저 하고                     |
|    +--------------------------------+----+-----------------------------------+
|    |겸손하며                        |16b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
|    |                                |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
|    |                                |    |체 말라                            |
+----+--------------------------------+----+-----------------------------------+
|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17a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
|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14a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
+----+--------------------------------+----+-----------------------------------+

  * 성경적인 부부관(夫婦觀). 본문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 가정에서의 여성의 태도에 큰 비중을 두고 여러 가지 교훈을 베풀고 있거니와 남편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면서도 동등한 부부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본 주제 강해에서는 성경에 나타난 남편과 아내의 역할을 살펴봄으로써 바람직한 부부 관계를 제시하고자 한다.
  (1) 구약.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인은 주로 아버지나 남편에게 종속되어 있는 열등한 존재였다. 그러나 여인이 지닌 아내로서의 지위와 어머니로서의 지위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중대한 것이었다. 또한 여인은 가정에서 뿐 아니라 정치, 군사, 경제 및 종교 생활에서 역할을 감당하기도 하였다.
    (까) 아내로서의 위치와 역할. 이스라엘 아내의 위치는 여자 노예의 위치와는  다른 것으로서 남편은 자기의 노예를 팔 수 있고 심지어는 자기의 딸도 팔 수  있었으나(출 21:7) 자기의 부인은 팔 수 없었다(신 21:14). 남편은 자기의 아내를 내어쫓을 수 있지만 그 여인은 다시 자유롭게 결혼할 수가 있었다.
    (다) 어머니로서의 위치와 역할. 가정에서 여인의 위치는 어머니가 되면서,  특히
아들을 낳으면서 높아진다(창 16:4). 어머니로서의 역할로 남편은 자기 아내와 더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고 자녀들은 어머니에게 순종과 존경을 바칠 의무를 지닌다. 십계명은 같은 비중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존경하도록 명령하고 있으며(출 20:12),  지혜서들은 자녀가 어머니에게 돌려야 할 의무와  존경심을  강조한다(잠  19:26;  20:20; 23:22; 30:17).
  (2) 신약. 신약에 나타난 기독교의 부부관은 구약의 개념보다 훨씬 발전된 것으로서 남편과 아내는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이루어가는 동역자로 묘사되고 있다.
    (까) 예수의 가르침. 예수께서는 부부(夫婦)는 한 몸인즉,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막 10:8,9). 또한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로 장가드는 자는 본처(本妻)에 대하여 간음을 행하는 자요,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을 가는 것도 역시 간음을 행하는 것이라 하여 남편과 아내의  동등한 위치와 역할을 강조하셨다(막 10:11,12).
    (다) 바울서신. 예수와 마찬가지로 바울은 남자와 여자에게 같은  권리와  책임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즉 남자나 여자 모두 결혼, 이혼, 재혼에 대해서 같은 과정을 밟아야 하며 삶의 동반자로서 동등한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고정 7장). 그는  서신을 통하여 남편과 아내에게 주는 교훈들 속에서 한결같이 서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할 것과 순종과 사랑의 원리를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나갈 것을 촉구하고 있다(엡 5:22,33; 골 3:18-21).
  이상에서 살펴본 바대로 성경은 결혼의 신성함과 아울러 가정에서의 남편과  아내의 인격적인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부부는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함께 받을 자로서(7절) 협력하여 주님을 섬기는 모본을 보여야 할 것이다.

  2. 의를 위한 고난(3:13-22)
  앞에서 공동체의 일원들에게 주는 권면을 마친 베드로는 본문에서 고난에 직면한 신자가 핍박자를 향하여 취해야 할 태도를 제시하면서 그 본보기로서 그리스도의 고난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다음과 같이 본문의 내용을 상고해 보기로 하자.
  (1) 성도의 생활 태도. 베드로는 반기독교(反基督敎) 사회에 살고 있는 성도들이 불신자들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할 것인가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까) 선을 행하라. 그는 먼저 불신자들과 함께 살아갈 때에 성도들이 열심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한다(13절). 선을 행하는 자라고 하여 박해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박해자들은 믿는 자들의 육체는 상하게 할지라도 그  영혼까지 파멸시키는 근본적인 해를 끼치지는 못한다(롬 8:31,35).  그러므로  성도들은 선을 행하되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끝까지 참고 기다리면(고전 15:58; 갈  6:9; 살후 3:13; 히 12:3,5) 하나님께서 그에게 큰 축복으로 보답해 주신다는 사실을  신뢰하고 묵묵히 선을 행해야 할 것이다(마 5:10-12).
    (다) 거룩한 태도를 가지라. 이는 마음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분을 생각
하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디에서 무슨 일을 당하든지 복음의 말씀을 당당하게  증거할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성도들에게는 모든 기회가 훌륭한 전도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또한 거룩하게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온유한 마음과  경건한 태도를 가지고 선한 양심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럼없는 양심으로 행한다면 결국에는 핍박하던 자들이 부끄럼을 당하게 될  것이며 그들이 개종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2) 고난당하는 자의 표본. 베드로는 자신의 교훈에 설득력을 더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불신 사회에 살면서 선을 행하다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신 것을 본받는 일이다(17절)
    (까) 그리스도의 사역. 베드로는 의를 위한 고난의 의미를 밝히기 위하여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간략하게 묘사하고 있다(18,19절). 그리스도께서는 의로운 분이셨으나 인간의 죄 때문에 고난을 받으셔야만 했다. 그 결과로 죄인이었던 자들이 구원을 얻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다) 고난과 영광. 이처럼 육신으로 세상에 오셔서 죽음으로 고난을 받으셨을  뿐
아니라 영으로 불복(不服)하는 자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파하시리만큼(19절) 인간을  사랑하셨던 그리스도께서는 마침내 하나님께로부터 권세와 영광과  존귀를  받으셨다(22절). 즉 하나님의 보죄 우편에서 만물(萬物)을 다스리는 분이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불신 사회에 살면서 남을 위해 선을 행하며 무고하게 고난을 당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으로 하늘의 상과 영광의 기업을 쌓는 일이 된다. 잠시 동안의  고난은 영원한 영광과 결코 비교할 수 없다(롬 8:18). 본장에서 베드로는  의를  위하여 고난받는 자들을 격려하며 그들에게 소망의 메시지를 주고 있다.
  (3) 세례의 의미. 끝으로 베드로는 본문에서 기독교의 세례를 언급하고 있거니와(21절) 여기에서 공동체의 성례전의 관습을 엿볼 수 있다. 특이할 만한 것은 노아 홍수를 세례와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대홍수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노아의 여덟 식구로서 (20절; 벧후 2:5) 이들은 방주를 통하여 물의 심판에서 구원함을 받았다(창 9:11:15). 베드로는 이러한 노아의 역사적 사건을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의 원형(原形)으로  보고 있다. 즉 노아의 식구들이 홍수 속에서 구원을 얻은 일과 관련하여 물 세례를  통하여 오는 구원을 말하고 있다. 세례는 육신의 더러운 때를 씻는 예식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살아나 새로운 인간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죽으시고 영으로 부활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육의 옛 사람을 장사지내고 영의 새 사람으로 태어나 하나님의 뜻을 좇는 선한 양심의
사람으로 변모된다는 것이다(행 24:26; 히 10:19-22). 이처럼 세례  의식이란  노아의
구원 사건을 상징적으로 재현하는 것으로 중대한 의미를 지니므로 성도들은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세례 의식에 임해야 할 것이다.

  * 연옥설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  본문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음을 증언하고 있다(19절). 이 구절은 가장 논란이 심한  신학적 난제(難題)중의 하나이며 따라서 이 구절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특히 카톨릭은 이 구절을 근거로 연옥설(煉獄說)을 주장하고 있다. 본 주제 강해에서는 연옥설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을 살펴 보기로 하자.
  (1) 연옥설. 로마 카톨릭 교회와 그리이스 정교회에서는 인간이 죽은 후 거하는  중간 처소로 연옥(purgatory)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곳은 순교자와 같은 일부  성도들을 제외한 성직자들 조차도 가서 거하게 되는 곳으로 이 세상에서 지은 죄가 완전히 씻겨질 때까지 고통과 연단을 받는 정화의 장소라고 한다. 이곳에서 받는  고통의  정도와 그 기간은 사람이 지은 죄의 경중(경중)에 비례하는데, 이곳에서 자신의 죄를  완전히 보상한 후에야 비로서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연옥에 있는 자들이 자신의 죄를 보상할 수 있는가 ? 연옥에 있는 자들은  그곳의 불꽃 속에서 고통을 당할 뿐 스스로는 자신의 죄를 보상하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다.  다만 지상에 있는 그의 가족이나 친척, 친구들이 그를 위하여 드리는 미사(missa)나  헌금, 각종 교회 봉사 등에 의해서만 그의 죄는 점점 보상되며 마침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성화(聖火) 된다고 한다. 이 같은 연옥의 교리는 마르시온(Marcion)에게서  찾아볼 수 있거니와 그는 주장하기를 예수께서 죽으신 후 연옥에 가셔서 그곳에 있는 영들을 전도하여 천국으로 인도하셨다고 한다.
  (2) 기독교의 입장. 인간의 죽음 후에슨 영생과 영벌의 두 가지 가능성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기독교의 견해이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고 그분의 공로를 힘입음으로써만이 죄에서  해방되어 구원에 이를 수 있을 뿐 인간적 공로에 의해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롬 3:23-28). 뿐만 아니라 이미 죽은 자를 위하여 드리는 기도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상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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