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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그러므로...버리고 - '그러므로'에 해당하는 혤라어 '운'(* )은 결과를 유도하는 접속사로 본절이 1:23-25의 결론임을 시사한다. 본절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거듭난 자가 취하여야 할 행동들을 나타낸다. 한편 '버리고'는 2절의 '사모하라'와 대조되어 믿음으로 갓 태어난 자들이 성숙한 삶을 위해 갖추어야 할 구체적인생활 태도를 제시한다(슥 3:3,4; 엡 4:22,23; 골 3:8,10; 약 1:21).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버려야 할 악덕들을 '모든'을 사용하여 세 범주로 구분하여 제시하고있다.
 모든 악독(*  , 파산 카키안) - 이것은 단순한 '악의'와는 다른 것으로 남을 해하려는 무자비한 모든 악들을 의미한다(행 8:22; 롬 1:18; 엡4:31; 골 3:8, Michaels, Lightfoot, Selwyn, Stibbs, Lenski).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 , 판타 돌론 카이 휘포크리세이스 카이 프도누스) - '궤휼'의 헬라어 '돌론'(* )은 '미끼로 끌어들이다'라는 의미의 '델로'(* )에서 유래한 단어로 3절의 '순전'과 반대되는 '속임'을 의미하며, '외식'에해당하는 헬라어 '휘포크리세이스'(* )는 '아래'를 의미하는 전치사 '휘포'(* )와 '심판'을 나타내는 '크리시스'(* )의 합성어로겉과 속이 다르게 판단하는 죄를 가리킨다. 또한 '시기'는 자기 우월감에서 나오는 행동으로 타인이 잘 되는 것을 방해(妨害)하는 죄악을 의미한다.
 모든 비방하는 말(* , 파사스카탈랄리아스) - 본문은 복수로 표현되어 남을 향해 무고히 '중상 모략'하거나, 악담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죄악은 악의에 찬 마음에서 비롯된다(12절; 롬 1:30; 고후 12:20).

=====2:2
 본절은 부정적인 금지 명령을 한 앞절과는 달리 긍정적인 명령문으로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것을 제시한다.
 갓난 아이들같이 - '갓난'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티겐네타'(* )는 '아르티'(* , '방금')와 '겐나오'(* , '되다', '나다')의 합성어로 방금 태어난 상태를 묘사해 준다(Lenski, Robertson). 그리고 '아이들'(* , 브레페)은 문자적로 '아직 출생하지 않은 아이'를 의미하지만(눅 1:41,44) 본문에서는 '네피오이'(* , '유아')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눅 2:12). 이 '갓난 아이들'은 영적으로 거듭난 자에 대한 비유로 마치 갓 태어난 아이가엄마의 젖을 간절히 찾듯이 그리스도인이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함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되었다(마 18:3; 막 10:14,15).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 '순전하고'의 헬라어 '아돌론'(* )은 부정접두어 '아'(* )와 '유인하다'라는 의미의 '돌로스'(* )의합성어로 '궤휼'(1절)과 반대되는 거짓이 없는 순수함을 의미한다. 한편 '신령한'에해당하는 헬라어 '로기콘'(* )은 '말씀', '이성', '교리' 등으로 해석되는 '로고스'(* )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로 나뉜다. (1) 혹자는 '말씀의 젖'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AV, Calvin,Bigg, Caffin, Bengel, Keil, Lenski). (2) 혹자는 '사리에 맞는 젖'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RSV, Vincent, Hort). 두가지 해석 중 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바로 앞장에서도 '말씀'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1:23-35) 본절 후반부에서도 구원에 이르게 하는것이라고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수하고 신령한 젖'은 가감이 없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한편 '사모하라'의 헬라어 '에피포데사테'(* )는 갓 태어난 어린 아이의 상태를 나타낸다(빌 2:26). 베드로는 마치 갓 태어난 어린아이가 엄마의 젖을 갈구하는 것처럼 영적으로 거듭난 자들이 성장하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말씀을 갈망해야 함을 강조한다(시 119:20, Michaels, Blum,Calvin).
 이는 이로 맡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신령한 말씀의 젓을 사모해야 하는 이유를 나타낸다. 칭의 곧 의롭다 하심을얻는 것은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단회적 사건이지만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성장하는것은 일생동안 이루어야 하는 과제이다. 성장하고 성숙해져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사모할 때 가능해진다(히 5:11-14). 본문의 '구원'은 마지막 날에 있게 될 그리스도인의 최종적 구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성화의 완성(完成)을 시사한다. 이런 구원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이지만 계속적인 성장으로 나타내 보여야 할 미래의목표이기도 하다(1:5,9; 고전 3:1-4, Stibbs, Caffin).

=====2: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리라 - 본절은 시 34:8의 인용으로 '에이'(* , '만약')로 시작되는 조건문이다. '인자하심을 맛본다'라는 것은 마치 갓난 아이가 젖의 맛을 알게 되는 것 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한 것을 가리킨다. 이처럼 말씀의 능력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은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라가기위해 말씀을 더욱 사모하여 그 능력 안에서 성숙해 가야 한다.

=====2: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 저자는 본문에서 '버린'과 '택하심을 입은'을 대조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에게 배척당한 진정한 메시야임을 드러낸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는 예수를 메시야로 영접하여야 할자칭 건축자들인 유대인들이 오히려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사실을 가리킨다(막 8:31; 눅 9:22; 행 4:11). 예수께서는 비록 유대인들에게는 배척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히셨을지라도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받았다. '택하심을입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클레크톤'(* )은 '인정받다'라는 의미를 가진 '도키몬'(* )에서 파생된 단어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을지라도 하나님께는 존귀함을 받았음을 시사한다(행 2:22-24).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 '보배로운'의 헬라어 '엔티몬'(*  )은 문자적으로 '존경을 받는', '존귀한'이라는 의미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내신 영광을 가리킨다(1:19; 눅 7:2; 14:8; 빌 2:29).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무지와 불순종으로 인해 배척 당하셨으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높이셔서 교회의 영원한 기초가 되게 하셨다. '산돌'은 실제로 유대인들 사이에 메시야를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신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모퉁이의 머릿돌'(마 21:42), '생명수의 반석'(고전 10:4), '기초석'(고전 3:11), '심판의 돌'(단 2:34)로 비유되었다(Blum, Stibbs, Leighton, Selwyn). 이러한 비유와 마찬가지로 메시야이신 예수를 비유하는 '산 돌'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이 확실한 사실이며 예수께서 영원한 생명을주는 교회의 초석이 되심을 시사한다. 한편 '나아와'의 헬라어 '프로스 혼 프로세르코메노이'(* )는 현재 분사로 사용되어그리스도인이 예수께 단순히 역사적 사실로서 한 번만 나아오는 것이 아니라 항상 끈임없이 나아와야 함을 강조한다(Robertson, Lenski, Caffin). 또한 이것은 이스라엘백성들이 광야의 반석에서 물을 마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앞에 나아올 때는 언제든지 그로 말미암아 신령한 물을 마실 수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고전 10:4,Hort, Bigg, Reicke). 본절은 예수께서 비록 사람에게는 버림받았을지라도 메시야로서자신에게 나아오는 모든 자의 구원의 반석이 되심을 시사한다.

=====2:5
 너희도 산 돌같이 - 베드로는 앞절에서 그리스도를 산 돌에 비유하였으나 본절에서는 산돌을 그리스도인들에 비유하고 있다. '산 돌'에 해당하는 헬라어 '리도이 존테스'(* )는 복수로 그리스도 앞에 나아오는 자는 누구든지 산돌이 되며 생명의 근원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하나가되어야 할 존재임을 시사한다(Lenski, Leighton, Robertson).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 '신령한 집'은 저자가 본절에서 그리스도인을 제사직에연결시키는 것으로 보아 성전 곧 교회를 의미한다(시 69:9;사 56:7; 막 11:17, Blum).한편 '세워지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코도메이스데'(* )는 예수께서 직접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실때 사용된 동사와 동일하다. 베드로는 사람들이 단지 교회에 나아올 때 그리스도인이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리스도에게 나아와서 그리스도와 연합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산 돌이 되며 거듭난 자들과의 연합을 통해 교회를 이루게 됨을 강조한다(롬 12:1;15:16; 고전 3:16: 엡 2:21-22; 3:6, Alford, Vincent, Stibbs, Leighton, Selwyn,Mi-chaels).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 베드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제사장에 비유하고 있다. '제사장'의 헬라어 '히에라튜마'(* )는 '제사장의직분'이나 '제사장의 단체'를 의미한다(눅 1:8, Hort, Meyer).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생명을 가진 산 돌이라는 사실에서 진일보하여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제사직을 수행하는 제사장이 되었음(만인제사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새로운 제사장적 역할에 참여하게 되었음을시사한다(Blum, caffin, Alford, Selwyn, Reicke). 실제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장이어야 했던 것을(출 19:6) 이루지 못했으나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교회가 그이상(理想)을 실현했으며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그 직무를 감당하게 되었다(롬 12:1;빌2:17; 히 13:15; 계 1:6; 5:10; 20:6, Lightfoot, Calvin, Stibbs).

=====2:6
 경에 기록하였으되 - 베드로는 앞서 진술한 자신의 가르침을 구약성경을 인용하여증명한다. 본문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오티 페리에케이 엔 그라페'(*)는 문자적으로 '경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라는뜻으로 이제까지 논증한 진술 곧 그리스도께서 산 돌이신 것과 그에게 나아가는 자도누구든지 산 돌인 것이 성경 안에 이미 확증(確證)된 사실임을 시사한다(사 28:16; 롬9:33).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 본절은 사 28:16의인용이다. 모퉁이 돌'에 해당하는 '아크로고니아이온'(* )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현관의 돌이라고 주장한다(Jeremias). (2)혹자는 건축물의 현관이나 기초를 닦는데 필요한 돌이라고 주장한다(Grant). (3) 혹자는 건축물의 벽과 벽 사이를 잇는 건물의 기초요 중심되는 돌이라고 주장한다(Lloyd,Calvin, Stibbs). '아크로고니아이온'이 '가장 높은'이란 의미를 가진 '아크로스'(*  )와 유대인의 건축 양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초요 중심인 '모퉁이 돌'을 의미하는 '고니아이오스'(* )의 합성어인 것으로 보아 세번째의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이것은 '모퉁이 돌'이 벽과 벽을 연결하여 건축물을 지탱하는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퉁이 돌이 되신 그리스도께서도 이방인과 유대인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셔서 교회를 이루심을 시사한다(엡 2:20, Blum,Stibbs, Michaels). 한편 '시온에 두노니'는 요긴한 모퉁이 돌로서의 그리스도의 독특한 위치가 하나님에 의하여 이미 확정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두노니'의 헬라어'티데미'(* )가 본절에서는 현재 능동태로 사용되고 8절에서는 부정과거수동태로 사용되어 그리스도의 역할이 이미 확정되었으며 지금도 수행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독특한 지위가 생명을 주는 역할을하며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거치는 돌이된다(8절; 마 21:42,44; 롬 9:33).
 저를 믿는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피스튜온에프 아우토 우 메 카타이스퀸데'(*)는 문자적으로 '저를 믿는자는 다급한 일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는 의미로 두려움과 공포로 부터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 견고히 서게 됨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인이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는 때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현재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보호를 받는 것이라고 주장한다(Bengel). (2) 혹자는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Meyer).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

=====2:7,8
 베드로는 본문에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비교하여 각자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가 어떤 가치로 나타나는지를 설명한다(Wiesinger, Caffin).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 '보배이나'의 헬라어 '헤 티메'(* )에서 관사 '헤'는 강조적인 표현으로 그리스도는 자신과 연합한 그리스도인에게크나큰 영광이요 보배가 되심을 시사한다(Blum). 한편 베드로는 믿지 않는 자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가 지니는 가치에 대해 두 가지 인용문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1)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 본문은 시 118:22의 인용이다. '버린'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도키마산'(* )은 문자적으로 '거절당한'이란 의미로(고전 9:27,RV) 그리스도께서불순종하는 자들에게 거부당하신 사실을 나타낸다. 이러한 사실은 구약성경에서 이미예언되었을 뿐만 아니라(시 118:22) 예수께서도 친히 그 예언을 확인하셨다(마 21:42;눅 20:17,18).사람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여 버렸으나 하나님은 배척당한 예수를 영광의 자리로 높이셨다.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는 사 28:16을 반영하는 것으로(6절 주석참조; 마 21:42; 막 12:10; 눅 20:17; 행 4:11) 하나님님에 의해서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심을 시사한다(Blum).
 (2)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 본문은 사 8:14의 인용이다. '부딪히는 돌'은 길가에 있는 불필요한 돌들처럼 보행하는데 어려움을 주는 방해물을 암시하며 '거치는 반석'은 덫이나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이나 덫이 되며 심판의 돌이 된다(Origen, Caffin, Delitzch, Selwyn, Stibbs).그러나 그리스도 자체가 장애물이나 덫이 되는 것은 아니다.단지 믿지 않는 자들이 그리스도를 불신앙함으로 걸림돌이 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 '덫이나 장애물'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들의 불신앙이다(Beare, Blum).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본문 역시 '믿지 않는 자'에 대한 진술이다.'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의 헬라어'프로스코프투신 토 로고 아페이둔테스'(* )는 문자적으로 '순종치 않아 말씀에 넘어진'이라는 의미로 믿지 않는 자들이 넘어지는 원인이 순종치 않는 불신앙에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이렇게 정하신 것이라'에서 '이렇게'는 '넘어지나니'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문은 믿지않는 자들의 불순종에 대한 형벌이 예정되었음을 시사한다(Blum, Hort, Bigg, Caffin,Beare).

=====2:9
 베드로는 본절에서 7, 8절과는 달리 믿는 자들의 신분적인 특권에 대해 네 가지로언급한다((Caffin, Calvin).
 택하신 족속이요 - 본문은 사 43:20의 인용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로 말미암는그리스도인의 영적 신분을 시사한다. '족속'의 헬라어 '게노스'(* )는 '혈통' 혹은 '출생'을 가리킨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육적인 혈통의 후손으로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 되었다고 자랑하나 진정한 택함을 받은 족속은 혈통이나 민족의 차별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의 연합을 통해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이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영적 이스라엘'을 나타낸다(1:23; 신7:6-7; 사 44:1-2, Robertson, Blum, Selwyn).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 본문은 출19:6의 인용으로 두 가지로 해석된다.(1)혹자는'왕정의 제사장' 곧 왕에게 속하여 왕을 섬기는 제사장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engel, Stibbs). (2) 혹자는 '왕인 동시에 제사장'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롬 5:17,Clement, Bigg, Stibbs, Blim). 이러한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그리스도인은 왕이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서 만국통치하며, 동시에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는 자이다.
 거룩한 나라요 - 본문 또한 출 19:6이 인용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현재 직책이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거룩한'은 구별되어 하나님께 드린것을 나타내는 말로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선별하신 존재들임을시사한다(blum, Stibbs).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 본문 출 19:5; 사 43:21; 말 3:17의 인용이다. '소유된'의 헬라어 '페리포이에신'(* )은 특별한 대가를 지불하고 획득된 것을 나타낸다(행 20:28; 엡 1:7; 살전 5:10, Robertson, Stibbs). 그리스도인은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사셔서 그의 자녀로 삼으신 언약의 백성이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본문은 하나님께서 위의 네 가지 신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여하신 이유이다.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는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과정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이전에 죄와 사망의 어두움에서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신' 사실을(롬 8:29,30; 엡 1:4) 시사한다. 한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죄와 사망의 어두움에서 구원하여 앞서 언급한 네 가지 신분을 부여하신 목적은 덕을 전하게 하는 것이다. '덕'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스 아레타스'(* )는 '찬미', 혹은 '탁월함'을나타낸다. 이는 하나님만이 갖는 온갖 종류의 속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을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빛의 자녀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실제적 행동들을 시사한다(stibbs, Calvin).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과 역사를 전해야 할 책임이있다.

=====2:10
 본문에서 베드로는 호 1:6,9,10; 2:23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 상태와그리스도인이 된 후의 상태를 비교한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 수신자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는 이방인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나 그리스도와 연합한 이후는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롬 9:25,26, Bengel). 이러한 사실은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삼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들뿐 아니라 이방인들도부르셨음을 암시한다(Caffin).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 '얻지 못하였더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크 엘래에메노이'(* )에서 '엘레에메노이'는 '엘레에오'(* , '불쌍히 여기다')의 완료 수동태 분사로서 이방인들이 오랫동안 하나님의 긍휼의 대상으로 머물러 있지 못했음을 암시한다(Stibbs,Robertson, Caffin). 이와는 반대로 '얻은'의 헬라어 '엘레에덴테스'(*  )는 사건이 종결되었음을 나타내는 부정과거 수동태 분사로 하나님의 긍휼을 오랫동안 얻지 못하던 이전의 상태에서 단회적인 회개 사건으로 구원을 받았음을 시사한다(Hort, Michaels, Stibbs). 그리스도인은 과거에 하나님의 긍휼을 얻지 못했던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고 죄와 사망의 어두움에 복종하던 종에 불과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긍휼을 얻어 빛 가운데 있어 구원받은 존재가 되었다.

=====2:11
 사랑하는 자들아 - 이것은 베드로가 본서와 베드로후서에서 모두 7회나 언급한 애정어린 호칭이다(4:12; 벧후 3:1,8,14,15,17). 이 호칭은 수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초대 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사용된 호칭이며(롬 12:19; 살전 2:8, Blum, Caffin) 본서와 베드로후서에서는 간곡한 권면이나무엇을 환기시킬 때 사용되었다.
 나그네와 행인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 '나그네'의 헬라어 '파로이쿠스'(  )는 일시적으로 거주하여 법적인 권리를 가지지 못한 자를 가리키며'행인'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레피데무스'(* )는 거쳐가는길손으로 정착자가 아닌 자를 나타낸다. 베드로는 이 용어들을 은유적으로 사용하여그리스도인들이 천국 시민으로 신령한 신분을 가지고 있으며(빌 3:20) 단지 이 세상에서의 삶은 나그네나 행인처럼 잠시 머물렀다 가는 유한(有限)한 것임을 시사한다(시39:12; 히 11:13, Stibbs, Lenski).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 '육체'의 헬라어 '사르키콘'(* )은 단순한 '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악한 본성을 의미한다. 이처럼 육체에서 비롯된 정욕은 영혼 즉 하나님께서 부여하셔서 그리스도인이소유하고 있는 영적인 삶을 어렵게 한다. 본문에서 언급된 '육체'와 '영혼'은 양립될수 없는 것으로 하늘에 속한 신령한 신분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은 그에 합당한 영적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타락된 악한 본능과 대적하여 싸워야만 한다(롬 6:6; 7:23; 고전 9:27; 갈 5:16,17; 골 3:5, Stibbs, Caffin, Blum, Leighton).

=====2: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 '이방인'은 본래 육체적 혈통으로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을 지칭하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를 영접지 않은 비그리스도인을가리킨다.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잘못을 간과하지 않으며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을 부정하고 모욕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비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물론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책잡히지 않는 선한 행동을 해야한다. '선하게'의 헬라어 '칼렌'(* )은 나타나는 행위 뿐만 아니라(마 13:8)그 본성까지 옳은 것을 의미한다(히 13:18).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삶 가운데서 선한 행동을 해야 하는 이유이다. '보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포프튜온테스'(* )는 '감시자'를 의미하는 '에포스테스'(* )에서 유래한현재 능동태 분사로 비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세심하게 관찰함을 시사한다(3:2, Meyer). 한편 '권고하시는 날'은 눅 19:44을 반영한 것으로 구약성경에서는하나님이 '위로와 해방을 주시는 날'(출 3:16; 삼상 2:21), '심판과 형벌의 날'(출32:34; 시 58:6)을 의미했다. 이러한 '권고하시는 날'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1) 혹자는 이방인들이 회개하는 날이라고 주장한다(Kuhl, Calvin, Hunter). (2) 혹자는 마지막 심판날이라고 주장한다(Hart). (3) 혹자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심판대앞에 서는 날이라고 주장한다(Moffatt).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이방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방편(方便)이 되어지기를 바라는 본문의 문맥으로 보아 첫번째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Lenski, Stibbs, Blum).

=====2:13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 '제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티세이'(* )는 본래 '토대'나 '창조물'을 의미한다(막 13:19; 롬 1:25;고후 5:17; 골 1:1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제정한 법과 질서에 대해 '크티세이'를 사용하는 것은 인간의 제도들 조차도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음을 암시하며(롬 6:1),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적 윤리 생활을 사회 제도내에서 충실하게 이행해야 함을 시사한다(Meyer, Calvin). 그러나 인간이 세운 제도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것은아니다. 그것에는 '주를 위하여'라는 분명한 기준이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적 행위의 궁극적 목적은 주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Bigg, Clark, Hoffmann). 본문은 모든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기에 징계에 대한 두려움이나 인간적인 동기에 의해서행동해서는 안 됨을 시사한다.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 '위에 있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스 휘페레콘티'(* )는 '위에 서다'(* , 휘페레코)의 능동태분사로 '보다 높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위에 있는 왕'은 신적 왕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뛰어난 통치자' 곧 당시의 로마 황제를 나타낸다(롬 3:1,Stibbs, caffin).베드로는 당시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나 왕이 잔악한 폭군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복종해야 한다고 권면한다(요 19:11).

=====2:14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하라 - 본문은 롬 13:3,4을 반영한 것으로 위정자들의 임무를 나타낸다. 위정자나 혹은 통치자의 역할은 악행하는 자를 징계하고 처벌하며 선을 행하는 자를 칭찬하고 포상하는 것이다. '그의 보낸'의 헬라어 '디 아우투 펨포메노이스'(*  )는 문자적으로 '그를 통하여 보내어진'을 의미한다. 여기서 대명사 '그'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하나님이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Calvin, Hort, Robertson). (2) 혹자는 로마 황제가 속주들을 다스리기 위해 총독들을 파송한 것을 근거로 황제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Caffin, Bigg, Clark).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방백들은 범법자를 처벌하고 선행자를 포장(褒奬)하라는 황제의 뜻을 수행할 책임을 갖고 있는 지방총독이나 식민지 총독들을 가리킨다. 그러기에 그들은 황제에 의해서 보냄을 받은 방백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동시에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 보냄을 받는 통치자라고도 할 수 있다(롬 13:1-7).

=====2: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 '어리석은 사람들'의 헬라어 '텐 톤 아프로논'(* )는 이성이 없을정도로 몰지각한 사람을 의미하는데(고전 15:36) 본절에서는 위정자나 혹은 비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또한 '무식한'에 해당하는 '아그노시안'(* )은단순히 지식이 결핍된 것만이 아니라 진리를 배우거나 수용하기를 거절하는 것을 나타낸다(고전 15:34). 그리스도인들은 생활 속에서 선행을 행하고 위정자들이나 법에 순복함으로 이방인 곧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책잡히지 않아야 한다(12절, Stibbs, Caffin,Leighton).

=====2:16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 '자유하나'의 헬라어 '호스 엘류데로이'(* )는 문장 구조상 독립 주격구문으로 앞절의 '선행으로'에 연결된다(Alford).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유'를 소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 자유를 방종이 아닌 합법적인 권위에 대한 자발적인 순종으로 나타내야 한다. 한편''악'은 온갖 종류의 '악덕'을 의미한다(12,14절). 그리스도인은 자유를 소유했다고 해서 그 자유를 오용하여 악덕을 행하는 구실을 삼거나 혹은 방종하는 구실을 삼아서는 안 된다. 도리어 그 자유를 통해서 더욱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이 소유한 자유를 사용하는방법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죄와 사단 그리고 이기적인 욕망에서 해방된 진정한자유이다(요 8:32,36; 롬 6:15; 갈 5:13). 그러한 자유를 소유한 그리스도인의 삶의자세는 자기의 이기적인 욕망에 자유를 사용하는 죄의 종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서 오직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롬 6:16-23). 따라서그리스도인들은 앞서 언급한 방백이나 법에 대해 어쩔 수 없는 외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세로 순복해야한다(Stibbs).

=====2: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 '공경하며'의 헬라어 '티메사테'(* )는부정과거 명령형으로 강조성을 띤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에 대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피조물로서의 가치를 인정하고 공경심을 가져야 한다(Caffin, Blum,Stibbs).
 형제를 사랑하며 - '사랑하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파테'(* )는 '아가파오'(* , '사랑하다')의 현재 능동태 명령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된 자들을 계속적으로 사랑해야 함을 시사한다. 이는 그리스도인들만이갖는 독특한 특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자들의 지속적인 우애를 가리킨다(1:22; 3:8; 4:8; 5:14, Stibbs, Caffin, Selwyn).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 '두려워하며'(* , 포베이스데)와 '공경하라'(* , 티마테)는 모두 현재 중간태 명령형으로 행동의지속성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왕을 존중해야하나 하나님과 왕을 섬기는 자세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왕을존중하고 순복한다 할지라도 몸은 죽여도 영혼은 멸할 수 없는 그들을 두려워해서는안 되며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해야 한다(마 10:28). 따라서 하나님과 왕에 대한 태도는 상충(相衝)될 수 없으며 왕을 공경하는 것은 형제 사랑이니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에 어긋나지 않게해야 한다(Alford, Blum).

=====2:18
 사환들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케타이'(* )는 문자적으로'집의 것'이라는 의미로 '가정에 소속된 하인'을 나타낸다(눅 16:13; 행 10:17; 롬14:4, Robertson, Caffin).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으로 사회적 신분이 천한 '종'(*  , 둘로스)과는 다른 의미의 가족의 일원으로서 종속된 자들을 가리킨다(엡6:5-7; 골 3:22-25; 딤전 6:1; 딛 2:9).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 '두려워함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포보'(* )는 존경심을 가지고 경외하는 마음을 의미한다(17절).이는 형벌이나 처벌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에 대한경외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환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주인들의 권위를중시해야 함을 시사한다(엡 6:5, Lenski, Stibbs, Robertson). 한편 '순복하되'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탓소메노이'(* )는 '휘포탓소'(*, '순종하다')의 현재 중간태 분사로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주인에 대해 순종해야 함을 시사한다(3:1; 롬 12:16, Robertson, Michaels).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러하라 - 사환들의 순종은 주인의 인격의 좋고 나쁨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는다.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과 '까다로운 자들'에는 관사 '토이스'(* )가 연결되어 주인들의 인격을암시한다. 여기서 '관용하고'의 헬라어 '에피에이케신'(* )은 '양보한다'는 의미를 가진 '에이코'(* )에서 파생된 말로 법같이 엄하지 않고 쉽게 용서하는 마음을 의미하며 '까다로운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이스 스콜리오이스'(* )는 '마음이 뒤틀린 자'란 의미로 성품이 온당치못해 하인들을 가혹하게 대하는 자들을 가리킨다(Alford, Robertson. Leighton). 사환들은 주인의 인격을 불순종의 변명거리로 삼지 말고 주인의 인격이 어떠하든지간에 순복해야 한다.

=====2: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 본절은 사환들이 까다로운 주인을 만나 부당한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경우를 나타낸다.'하나님을 생각함으로'는 인간의 행동이 의무감에서 마지못해하는 복종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임을 시사한다(Caffin, Bigg). 사환들은 까다로운 주인에게 부당하게 어려움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통해서 주인의 부당한처우에 대해 인내해야 한다. 한편 '이는 아름다우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투토 가르카리스'(* )는 문자적으로 '왜냐하면 이러한 것은 감사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AV) 혹은 '이러한 것은 인정받기 때문이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마 5:10-12에 대한 반영으로 종이 주인의 부당한 처사를 당할지라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참으면 그 행동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은혜받을 증서가됨을 시사한다(Caffin, Stibbs, Selwyn, Blum).

=====2: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 '죄가 있어'의 헬라어 '하마르타논테스'(* )와 '매를 맞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콜라피조메노이(* )는 현재분사로 계속적으로 죄를 짓고, 그 죄의 결과로 반복되는 응당한 벌을 받는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생활 곧 사환들 자신에게 과오가 있어서 주인에게 매를 맞고 참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 본문은19절에 대한 확대 해석이다. 고난을 받음이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죄의 결과라면수치스러운 것이나 하나님께 복종하는 마음으로 선을 행하다가 당하는 것이라면 오히려 은혜로 받을 가치가 있다(Caffin, Moffatt).

=====2:21
 개역성경에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호티'(* ,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호티'는 본절이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참아야 하는 이유임을 시사한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 '부르심'은 본래 구원에 초대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초청을 의미하나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든 영역에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주권(主權)을 암시한다(롬 8:28-30, Blum, Hort).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며, 구원을이루어가는 것이다(엡 4:1; 빌 3:12-14).
 그리스도도...하셨느니라 - 베드로는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이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고난을 연결시킨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
 너희를 위하여 - '위하여'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당하신 고난은그리스도인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대신 당하신 것으로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순수하게 타인을 향한 목적에서 행동하셨음을 암시한다(요 10:11. Stibbs, Michaels).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종의 형체를취하시고 고난을 받으신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종의 모범을보이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을 속죄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고난의 참된 본보기를 제시하시고 따라오도록 하셨다(마 20:28; 26:28; 눅 24:25-27,44-47, Bengel, stibbs, Blum,Leighton).

=====2:22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 베드로는 사 53:9 인용하여 그리스도께서 누죄하심에도 불구하고 고난당하심을 강조하여 그리스도께서 애매히고난 받는 자의 참된 모범이 되심을 확증하고 있다(마 26:60; 요 18:38; 19:4,6). '궤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돌로스'(* )는 '거짓'을 뜻하는 것으로 당시 종들이 많이 저지른 죄악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시 고난받는 종들과는 달리 거짓이 없으실 뿐만 아니라 죄가 없으신 무흠하신 존재이셨다(Caffin, Stibbs, Leighton).

=====2: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본절은 사 53:7을 암시하는 것으로 베드로가 친히 목격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낸다(마 26:64).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법정에서 아무런 죄 없이 우리를 대신하여심문과 고난을 당하시는 가운데서도 위협하거나 욕하지 아니하시고 침묵하셨다. '대신욕하지 아니하시고'의 헬라어 '우크 안텔로이도레이'(*  )와 '위협하지 아니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크 에페일레이(* )는 모두 미완료 시제로 그리스도께서 시종일관 죄를 타인에게 돌리지 않는 습관적 태도를 나타내 보이셨음을 시사한다(Robertson, Michaels).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자에게 부탁하시며 - 본문에는 목적어가 나타나지 않는다.그래서 본문에 나타나지 않는 목적어에 대해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자기자신이라고 주장한다(Bigg, Caffin, Robertson). (2) 혹자는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자들이라고 주장한다(눅 23:34, Alford). (3) 혹자는 주님에 관해 열리고 있는 재판의과정이라고 주장한다(Vincent, Hart, Bengel). 세가지 견해 중 첫째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부탁하시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레디두'(* )가 미완료 시제로 계속적인 위탁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며 눅 23:46에서도 주님의 죽음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Stibbs).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을 대신하여 수많은 고통을 당하시는 가운데 침묵하시고 도리어 모든 일을 공의로 심판하실하나님께 자기 자신과 모든 결과를 맡기셨다(Bengel, Selwyn, Blum).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 '친히...그 몸으로'의 헬라어 '호스 아우토스...엔 토 소마티'(* ... )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관계대명사 '호스'(* )와 강조적 재귀 대명사 '아우토스'(* )가 연결되어 자발적인 의지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한편 '담당하셨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네넹켄'(* )은 '제단에 희생 제물을두다'는 의미를 가진 '아나페로'(* )의 부정과거로 그리스도께서 속죄제물이 되신 것을 암시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 죄인에 대하여는 제물을 대신하였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공의를 만족시켰다(사 53:12; 골 2:14;히 9:28, Kuhl, Bigg).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십자가상에서 희생 제물이 되신 이유이다. '죄'의 헬라어 '타이스 하마르티아이스'(* )는 복수로, '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 디카이오쉬네'(* )는 단수로 표현되어 죄인이 갖는 죄의 속성과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의 법정적인 측면을 나타낸다(롬 6:1-23; 갈 2:20).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에 동참하여 의를 획득하게 되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 본문은 사 53:5의 인용이다. '채찍'의 헬라어 '몰로피'(* )는 본래 매질로 말미암은 자국이나 흔적을 의미한다. 베드로는 사 53:5의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인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셨음을 드러냄으로(Lumby)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의 모범을바라보면서 순종하고 인내해야 함을 강조한다(Caffin, Leighton, Calvin).

=====2: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 본문은 사 53:6의 인용으로 구원받기이전의 상태를 나타낸다. 구원받기 이전의 그리스도인들은 길을 인식치 못하고 습관적인 방황에 빠져 비참한 상태에 있었다(Blum, Leighton).
 이제는 너의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 베드로는 상반절의'전에'와 본문의 '이제'(* , 뉜)를 대비시켜 구원받기 이전의 죄의 노예 상태에머물러 있던 영적 죽음의 상태와 생명을 얻은 현재의 상태를 극명하게 대조시키고 있다. '목자'는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었으며(시 23:1; 사40:11; 겔 34:23) 신약성경에서는 구원받은 자들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마 25:32; 요 10:14; ; 13:20). 또한 '감독'은 '목자'와 거의 같은 의미로목자의 기능적인 면, 곧 돌보고 감찰하는 면을 나타낸다(행 20:28). 그리스도인들은과거에 죄인으로서 죄의 종노릇을 하였으나 이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을 뿐 아니라 우리의 목자와 감독되신 그리스도에게 그 영혼을 보호받는다(4:19; 겔34:23, Bengel, Bigg, Leighton).

 

 

  본장은 앞장에 이어 말씀으로 거듭난 성도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에 관하여 권고하고 있다. 먼저 베드로는 거룩한 제사장으로서의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을 언급한 후에 그들이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취해야 할 행동에 관하여 교훈한다. 본장의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다음 사항들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1) 문학적 양식. 베드로는 본장에서 일련의 생생한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1-10절). 그 비유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까) 성장의 비유. 베드로는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라는 갓 태어난 아기의 이미지를 통해 성도의 성장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2절).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맛본다는  것은 곧 주를 맛보는 것이며(시 34:8), 그것은 주의  영원하신  말씀을  맛보는  것이다(1:25). 성도가 주의 말씀과 관계성을 가지게 될 때 성장이 일어나며  성장의  목표는 신앙의 성숙과 더불어 완전한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성장의 비유는 바울 서신에도 나타나고 있거니와 바울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할 것을 역설한 바 있다(엡 4:13-15).
  한편 이 비유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젖'이라든지 '어머니', '갓난 아기'와 같은 용어들은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머리'(엡 4:15)나 '온전한 사람'(엡 4:13)등과 같은 남성적인 용어들과는 달리 여성적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 건축물의 비유. 본장에서 성장의 비유는 건축물의 비유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에베소서에서 이 비유들은 함께 협력하는 존재인 교회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엡 2:21; 4:16). 본장에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이미지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성장의 비유를 통한 개인적인 교훈에서부터 건축물 비유를 통한 공동체적인 교훈으로 초점을 옮기고 있다(4-10절). 그리스도께서는 신앙 공동체의 산 돌이시며 동시에 믿지 않는 자들이 걸려 넘어지는 돌이시다( 시 118:22; 사 8:14,15). 공동체의 구성원인 성도들도 역시 산 돌이며 함께 모여 신령한 집을 구성한다.
  본 비유에서 베드로가 인용한 구약의 말씀(사 28:16)은 바울  서신에서도  발견되고 있거니와(롬 9:33), 바울은 건축물의 비유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머릿돌과  터로  삼는 신앙 공동체를 묘사하였었다(고전 3:9-17; 엡 2:20-22).
  (2) 타 서신과의 비교. 본장에는 바울 서신과 병행을 이루는 교훈들이 몇 가지 등장한다. 본장에서 베드로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 즉 국가의  시민으로서의 의무와 종으로서의 의무에 관하여 언급한 부분(13-25절)은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에도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다(엡 5:21-6:9; 골 3:18-4:1).
  본장과 바울 서신과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먼저, 바울 서신에는 법규들 사이에  균형과 상호 관계성이 두르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반면, 본장에는  부분적으로만  언급되어 있다. 예컨대, 바울 서신에는 종과 주인에 대한 의무가 함께 등장하고 있거니와  본장에는 종의 의무만 강조되고 있다. 이는 본 서신의 독자들 중에 주인의 신분을 가진 자보다 종의 신분을 가진 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다음으로 바울은 가정에 대한 규례들을 제시함에 있어서 그리스도께 대한 복종을  전제로  하고 출발하고 있으나(엡 5:21), 베드로는 먼저 권세 잡은 자들에 대한 복종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의 교훈을 시작하고 있다(13절). 시민으로서의 성도의 의무를 강조하는 이러한 주제는 로마서와 목회 서신에도 나타난다(딤전 2:1-7; 딛 3:1,2).
  (3) 구약과의 연관성. 본장에서 노예들의 의무에 관한 베드로의 권고는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고난받는 종의 노래'와 매우 유사하다. 이는 베드로가 죄없이  고난받으신 그리스도의 복종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예수의 무죄하심(22절; 사 53:9)이나 욕과 고난을 당하시는 장면(23절; 사 53:7),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심(24절; 사 53:11,12), 예수의 희생을 통하여 우리가 구원을 얻음(24절; 사 53:5), 죄인들의 회개(25절; 사 53:::6) 등은 이사야의 사상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한편 본장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단락은 개인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와 임무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1-10절). 성도는 각자 신령한  말씀을 사모하여 완전한 구원에 이르도록 성장해 나가야 할 것이며 만방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함으로써 거룩한 제사장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단락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성도의 삶의 자세에 관한 교훈이다(11-25절). 여기에는 국가에 대한 시민으로서의 의무와 주인에 대한 노예로서의 의무가 명시되어 있다.

  1. 산 돌의 공동체(2:1-10)
  앞에서 성도의 거룩한 생활의 당위성을 강조한 베드로는 본문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거듭난 공동체는 과연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본문의 내용을 상고해 보기로 하자.
  (1) 신령한 젖. 거듭난 성도들이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모든 악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자로서 마치 갓난 아기가 젖을 사모하듯이 신령한 젖, 곧 순수한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여 결국은 무럭무럭 자라나는 것을 말한다. 베드로는  성도를 새롭게 태어나서(1:3,23)새 시대의 성취에 대한 새로운 소망을 갖는 존재로 묘사한다. 소망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며, 소망의 현재적 기반은 영원한 하나님의 약속과(1:25) 믿는 자들의 거룩한 공동체이다. 먼저 거듭난 사람은  거듭나기  이전의 생활 태도를 벗어버려야 할 것이니, 악의를 품지 말고 타인을 기만하거나  시기하거나 비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롬 13:14; 엡 4:22; 골 3:8,10).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은 공동체 안에서 영적 성숙을 향해 계속 성장해  나가야 하는바, 마치 어린 아기가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라 장성한 어른이 되는 것처럼  완전한 구원에 이르기까지 계속 하나님의 완전을 모방하면서 자라가야 한다. 본문에서  베드로가 말하는 신령한 젖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고전 3:2). 성도들은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을 통해서만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미 주의 인자하신 구원의 역사를 체험한 성도들은 거룩한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주의  말씀을  사모하고 묵상하는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한다(수 1:8; 시 1:2; 19:9,10; 119:97).
  (2) 산 돌의 공동체. 성도가 된다는 것은 개인의 평안과 행복의 추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성도는 개인 홀로 존재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된  자이며, 또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생겨난 공동체의 일원(一員)이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살아있는 돌'(living stone)에 비유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흔히 돌로 비유되고 있다. 즉 '모퉁이의 머릿돌'(마 21:42), '생명수의  반석'(고전 10:4), '산 돌'(4절), '부딪히는 돌'(8절) 등이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사 28:16)을 인용하여 예수께서 시온의 모퉁이돌, 즉 새 성전의 초석(礎石)이 되심을 암시하고 있다.
  시온의 모퉁이돌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살아 계셔서 믿음의 공동체의 산 기초가  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보배로운 '산 돌'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고 마침내 죽임을 당하여 외견상으로는 건축자가 쓸모없다고 버린 죽은  돌같이  보였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존귀한 자로서 하나님 집의 가장 중요한 모퉁이돌이 되어 인류를 구원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는 돌이 되셨다. 그러므로  모퉁이돌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보배의 역할을 하지만 불신자들에게는 건축자가 버린 돌처럼 부딪히고 넘어지는 올무가 된다(시 118:22; 사 8:14,15; 마 21:44; 눅 20:18).
  한편 공동체의 구성원 역시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산 돌'이며 그들은  함께  모여 '신령한 집'을 구성한다(5절). 즉 성도 각자는 건축에 필요한 요긴한 돌이며,  모퉁이돌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집을 이룩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 바울은 교회의 구성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의 몸의 지체들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고전 12:27).
  (3) 새 계약의 백성.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신령한  집을  구성하며 살아 있는 공동체로서의 사명을 수행하는 자들이다. 베드로는 본문에서 성도의 정체와 임무에 관하여 좀더 자세하게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성도는  택하신  족속이요(사 43:20), 왕 같은 제사장이요(출 19:6; 계 1:6), 거룩한 백성이요(출 19:6), 구분의 소유된 백성이다(신 7:8; 말 3:17). 즉 성도는 거룩한 제사장의 직분을 맡은 자로서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공동체를 이루는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적 제물로 바쳐진다(롬 12:1).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중심 인물로 부각시켰던 히브리서와는 대조적으로(히 4:14,15)  본서는 모든 성도가 하나님께 나아가 합당한 제사를 드리는 공동 제사장직을  수행해야  함을 강조한다.
  성도들은 새 계약의 백성들이며 참이스라엘이다(갈 6:16). 그들은 선택된  자들이며(요 15:16-19), 옛 계약의 백성들과는 달리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세상을 위하여 중재하고 화해시키는 거룩한 제사장의 임무를 맡은 자들이다. 전에는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으나 지금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으나 이제는 긍휼함을 얻는 자로 변화되었다(호 2:23). 이렇듯 구원의 축복을 받고  거룩한 백성으로 변모된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받지  못하는  자들에게 빛을 밝혀주고 그분의 크신 덕을 널리 선포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것은 이처럼 거룩한 사명을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 만인 제사장주의. 구약 시대의 성도와는 달리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 사역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인간적인 중보가  필요없이 직접 하나님을 섬기며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소위 '만인 제사장주의'로서 그 증거 구절이 본문에 등장한다(9절). 성경에 나타난 만인 제사장주의의 배경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1) 구약 시대에 있어서의 제사장직. 구약 시대에 있어서의 제사장직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근본 개념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한다는 것이었다. 직접  나서서 집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제사장은 하나님께 바치는 희생 제의(祭儀)의 집행 감독관이었다. 도한 제사장은 신탁의 말씀의 시여자(施與者)요 말씀에 대한 해설자였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화복(禍福)의 통로가 되었다. 한편 유대교에서 제사장직은 레위족에서 세습적으로 맡아왔다.
  (2) 그리스도의 제사장직, 신약성경에는 제사장직에 대한 개념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위대하고 완전한 대제사장의 역할을  담당하셨다는 교리는 히브리서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유일하게  제사장이라는 명칭을 그리스도에게 실제적으로 적용시키고 있다. 흠 없는 희생 제물이요 죄 없는 대제사장으로 묘사된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번의 제사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영원한 중재를 확립시켰다(히 7:26-28).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이 갖는 권위와 명예는 구약  시대 아론의 제사장직을 폐지하고 영구히 대행하였다는 사실에 있으며,  구약의  인물인 멜기세덱에서 그 원형을 보게 된다(창 15:18; 히 7:3).
  한편 이러한 사상은 그리스도 자신이 언급하신 '많은 사람의 대속을 위한'  사명(막10:45)과 최후의 만찬시 떡과 포도주로 새로운 언약을 세우신 그리스도의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막 14:22-25). 특히 바울 서신에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지닌 희생적 성격이 명확히 드러난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를 유월절 양(고전 5:7)과 화목 제물에(롬 3:25) 비유하였고, 그리스도의 중보의 교리(갈 3:20)및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자의 직분에 대하여 가르쳤다(고후 5:19; 엡 2:16; 골 1:20). 본 서신에서도 그리스도의 속죄 사상이 여러  군데 나오며(1:2,18,19; 2:24; 3:18), 이러한 주제는 요한 신학의 중심이  되기도  한다(요 1:29; 요일 1:7; 2:2; 4:10; 계 1:5; 5:9; 12:11).
  (3) 성도의 제사장직. 신약성경은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교회의 모든 거룩한 무리들에게 적용하고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인류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고 운명하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 사건(마 27:51)에서도 명백히  증거된 바, 휘장이 찢어진 것은 그리스도의 찢긴 몸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열렸음을 시사한다(히 10:19,20). 그러므로 이제 자기 몸으로 성전을 삼으신 그리스도(요 2:19) 안에 거하는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의 구별 없이 직접 하나님을 뵐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갈 3:28).
  교회는 세례와 성찬을 통한 영적 교통과 령의 현존에 의하여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의 권위와 특권을 함께 누리게 된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한 제사장이 된다는 사상을 강조하고 있으며(5,9절), 계시록에도 이러한 주제들이 나온다(계 1:6; 5:10; 20:6). 한편 성도가 제사장이 된다는 사상은 옛 언약 가운데 있는 백성들에게도 이미 예표적으로 말씀하신  바  있다(출 19:6; 시 132:9,16; 사 61:6).

  2. 공동체 일원으로서의 의무(2:11-25)
  하나님의 선택된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특별한 지위에 관하여 언급한 베드로는  성도들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인가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교훈하고 있으며 이는 다음 장까지 계속 이어진다. 다음과 같이 본문의 내용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1) 이방인 중에서의 올바른 행실. 베드로는 성도들을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부르면서 그의 권면을 시작하고 있다(11절; 히 6:9; 벧후 3:1,8; 요일 2:7; 3:2). 4장  초반부(4:11)까지 계속될 일련의 교훈들은 이 땅에 나그네와 같이 거하는 성도들이 육욕(肉慾)을 제어하고 선한 행실을 나타냄으로써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권면으로 요약할 수 있다(11,12절).
    (까) 성도의 정체. 본문에 의하면 성도는 이 세상에 속한 존재인 동시에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나타난다(빌 3:20). 베드로는 성도를 '나그네와 행인 같다'라고 표현한다. 즉 구원함을 받은 성도는 천국 시민권을 갖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성도는 이 땅에서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에  대항해야만 한다. 영혼은 하늘에 속한 것이며 육체의 정욕은 땅에 속한 것으로서 성도들은 성령의 지배 아래 있는 영적인 존재인 동시에 육신을 입고 있으므로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 육욕을 따라 살기 쉽기 때문이다.
    (다) 성도의 사명. 이 땅에서는 잠시 나그네로 거하고 있는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는 육체의 정욕을 죽이고  날마다  거룩한 성품을 덧입어야 한다. 성도들이 이방인의 사회에서 선한 행동을  나타낸다면  그들을 비난하던 자들도 감동할 것이며 마침내는 불신자들도 주께 돌아오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그들의 삶 자체로써 선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2) 국가에 대한 태도. 베드로는 박해에 직면하여 사방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에게 조심스럽게 국가에 대한 성도의 태도를 충고하고 있다.
    (까) 역사적 배경. 당시 로마 제국은 약소국들을 점령하며 착취하고 자유를  강탈함으로 점점 비인간화된 사회를 만들어갔다. 이러한 로마 제국의 횡포 아래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유만으로 박해를 받던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을 버리고 배교(背敎)하거나 국가에 반항하는 극단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성도들은 결코 무정부주의자도 아니요, 국가 권력에 아부하는 자도 아닌즉, 베드로는 극심한 박해의  물결이  밀려오는 상활 속에서 성도들이 지혜롭게 살아 남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다) 무저항주의. 사실상 힘이 없는 백성들이 국가에 저항하고 대항한다면 목숨을 잃게 될 것이고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은 명약 관화(明若觀火)한  일이거니와  베드로는 하나님의 날을 기다리며 무저항의 방법으로 선으로 악을 이길 것을 당부한다.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박해를 감수하며 신앙을 지켜나가야 할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임박한 심판의 날을 기다리며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에  충실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 이러한 권고는 바울의 가르침과도 동일한  차원의  것이라 할 수 있다(롬 13:1-7).
    (따) 권위에의 순종. 베드로는 결론적으로 세상 권력에 복종할 것을 권면한다. 하나님께서 악한 나라와 권력을 방치하시는 것은 분명히 당신의 섭리와 뜻이 계시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우선 권위에 순종하고 의무를 다함으로써 무모한  고난을 피할 뿐 아니라 복음 전파에 방해를 받지 말아야 한다. 성도의 올바른 태도는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국가의 권력을 존경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베드로는 성도들이 박해의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복음 전파의 사명을 잘  감당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3) 노예에 대한 권면. 바울 서신에서와 마찬가지로 베드로는 노예를  향한  충고를 잊지 않고 있다. 이는 교회의 성도들 중에 노예 계급에 속한 자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당시 로마 사회는 노예 제도가 깊숙이 뿌리박혀 있었고 인구의  절반 이상이 노예의 위치에 있었으니 어떤 힘으로도 그것을 제거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바울과 마찬가지로 베드로는 노예 제도를 인정하고 있는 상태에서 노예들을 향하여 최선의 권면을 베풀고 있다.
    (까) 노예의 태도. 당시 상황속에서 베드로가 제시하고 있는 최선책은 그리스도인 노예들이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에게 순복하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매사에 그분의 뜻에 순종하듯이, 노예들은 최선을 다하여 주인에게 충실해야 한다. 어떠한 위치에 있든지 하나님을 의식하며 비신자들보다 훨씬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한다면 주인의 사랑받는 자가 되어 주인을 감동시킴으로써 결국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 노예의 사명. 베드로는 노예들이 받는 수난을 그리스도의 수난으로까지 끌어올리고 있다. 비록 부당한 고난을 받을지라도 선을 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니  참고 묵묵히 선을 행하라고 권면하면서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몸소 본을 보여 주셨음을 강조한다. 예수께서는 욕을 받으시되 욕하지 아니하셨고(눅 23:34),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않으셨으며(사 53:5; 히 2:10),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셨다(눅 23:26-46).
  그러므로 노예들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그리스도의  수난을 생각하면서 고난을 참고 견디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고난은 그것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장차 큰 영광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자유한 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선을 도모하는 자는 결국 자기도 살고 남도  구원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 영역 주권론.  본문에서 베드로는 세상 질서 및 권력에 대한 성도의 태도를  언급하고 있다. 이에 본 주제 강해에서는 '영역 주권론'이라는 제하에 그 문제들을 다루어 보고자 한다.
  (1) 정의. 영역 주권론이란 하나님께서 인간을 세상 통치를 위한  자신의 대리자로
창조하셨으며, 이를 위하여 인간 사회에는 각기 독특한 기능과 역할을 갖는 각종 단체 및 제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와 단체는 하나님 안에서 고유한 독립성과 긴밀한 유기성을 가지고 있으며 모두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있기 때문에  어느 한 단체나 제도가 다른 것을 예속시키거나 지배할 수 없다.
  (2) 기원. 중세 시대에 성직자들은 세상 권력에 대한 교회의 우위를 주장하여  세상 권력이 교회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세속적 군주들은 교회에  대한 세속 권력의 우위를 주장하여 양자간에 끊임없는 충돌과 반목(反目)이 야기되었다. 이에 대하여 19세기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자인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영역 주권론'이라는 말을 인정하는 동시에 건설적으로 견제, 비판하여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이바지해야 하는 유기적 관계에 있음을 주장하였다.
  (3) 특징. 영역 주권론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까) 독립성.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단체 및 제도들은 주 안에서 각자의 독립
성이 보장되기 때문에 이를 무시하고 침해하거나 지배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잘못된 시도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인 동시에 인간의 존엄성까지 말살하려는 결과를 초래한다. 또한 이러한 독립성은 비단 정권과 교회의 관계뿐 아니라 가정,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인간 생활 전반에 걸쳐 적용된다.
    (다) 보완성. 독립성만을 강조하다 보면 각 제도간의 조화로운 선의 추구는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고 사회발전을 저해하여 창조 질서를 거스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따라서 각 영역들은 독립성을 유지하되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서로의 결손과 부족을 보완하며, 비판과 협력 등의 방법을 통하여 공의와 사랑이 넘치는 사회를  건설해가야  한다.

  * 국가의 공직자. 베드로는 본문에서 국가의 왕이나 방백(方伯)들에게 순복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은 국가의 공직자들에 대하여 어떠한 증언을 하고  있으며 공직자들에 대한 성도의 바람직한 태도는 무엇인지 보다 상세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1) 성경의 증언. 하나님께서는 국가 공직자의 신분을 인정하실 뿐  아니라  신분의 고귀한 존엄성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구약성경의 지혜 문서에 의하면  왕들은  다스리며, 장관들은 질서있게 하며, 재판관들은 이 땅의 위대한  자들임을  말하고  있다(잠 8:15,16). 또한 공직자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심판하는  자들이다(신  1:17;  대하 19:5-7). 사도 바울도 공직자들의  직책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으며(롬 12:8), 더 나아가 이들의 권세는 하나님에 의해 정해졌으며 이들은 선행하는 자를  칭찬하며 악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내리는 하나님의 종들이라고 말하고 있다(14절; 롬 13:1-7).
  (2) 공직자들의 임무. 이렇듯 성경에서는 국가의 공직자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중히 여긴다. 그러므로 공직자들은 직무 수행을 할 때에 하나님을 생각해야 하며 주님의 종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그들이 좋은 법에 의하여  국민의 생활을 다스리고 인도해야 하며 정의와 심판으로서 국가의 번영과 평화를 유지, 확보해야만 한다(렘22:1-9). 정의는 무죄한 자들을 보호하고 유지하며 자유케 하는 것이며, 심판은 악한 자들과 폭행자들을 억제하며 비행자들을 벌하는 것이다.
  (3) 성도의 의무. 성도는 공직자의 구원과 번영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며 이들의  통치에 순응하고 이들의 법과 제도에 따라야 하며 이들에 의하여 부과된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이로써 정의롭게 직무를 수행하는 고위 공직자들에게 순종 할 뿐 아니라  악한 통치자들에게도 그리하여야 한다. 악한 통치자는 백성의 죄를 꾸짖는 하나님의  채찍이요 선한 통치자는 인간들의 구원을 유지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기 때문이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권세에  저항하면 하나님의 질서와 제도를 거역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공직자에 대한 순종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막을 수  없다는 점이다. 주님께서는 모든 왕들 가운데 왕이시므로 공직자들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동시에 성도들은 주님께 먼저 순종한 다음 공직자들에게 순종해야  한다.  만일 누가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것을 명령할 경우 그것에 순종할 수는 없다. 사람보다는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기 때문이다(행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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