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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 -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는 베드로 자신을 부르는호칭이다. 이 호칭은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전파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보냄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으로 사도로서의 베드로 자신의권위와 존엄을 나타낸다(마 16:18,19; 막 3:16; 요 1:42; 21:15-19, Blum, Stibbs).한편 '베드로'는 아람어에서 '바위'를 의미하는 '케파'(* )를 헬라어로 명명한별명이다. 베드로의 히브리 이름은 '시므온'이었을 것이며 헬라어로는 '시몬'이었다(행 15:14; 벧후 1:1).
 본도, 같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 본문에 언급된 다섯 지역은 모두 소아시아에 위치해 있었으며 현재는 터어키 타우루스 산맥(Taurus Mountains)의 북쪽에 해당하는 로마 지역이다. 당시 소아시아에는 보다 많은지역에 그리스도인이 거주하였음에도 불구하고(행 16:6-8) 본서에서 다섯 지역만 언급되었으며 '본도'와 '비두니아'가 동일 지역에 대한 이름임에도 불구하고 두번 언급된것에 대해 혹자는 이 편지를 소지한 실루아노(5:12)가 심방한 지역이었다고 주장한다(Hort, Robertson). 즉 이 견해에 따르면 실루아노가 배를 타고 흑해를 지나 본도에입성하여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를 거쳐 비두니아를 통과해 로마로 항해해 갔기 때문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지명이 각기 따로 언급되었으며 본서 수신자들이 사는 지역도 이 다섯 곳만 언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단지 추정에 불과하며 본문에 특별히 다른 언급이 없으므로 단정하기 어렵다(Michaels). 한편'흩어진 나그네'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레피데모이스 디아스포라스'(* )에는 관사가 없어 정확히 누구를 지칭하는지 불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아스포라'는 '팔레스틴을 떠나 사방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을 의미하며 '파레피데모이'는 '어떤 지역에 머무르는 사람들'을 의미하였기 때문에 당시 네로 황제(A.D.54-68)의 박해를 피해 소아시아에 흩어져 살던 그리스도인은자신들을 가리키는 말임을 인식하였을 것이다(Stibbs). 또한 '나그네'라는 표현은 수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다니는 입장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안식처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 나라임을 인식하고 순례하는 자임을 암시한다(Blum).

=====1:2
 본절에서 베드로는 앞절에 '흩어진 나그네'로 지칭된 수신자들을 삼위 일체적인신앙과 사역에 입각하여 묘사하고 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택하심을 입은 자들 - '택하심을 입은 자들'(* , 에클레크토이스)은 개역성경에는 본절에 나타나나 헬라어본문에는 1절에서 나타난다. '에클레크토이스'는 1절의 '파레피데모이스'(*   , '나그네들')와 대비된다.'에클레크토이스'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묘사하는 반면 '파레피데모이스'는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성을 나타내며, '에클레크토이스'가 하나님 앞에서 특권을 소유한 그룹인 반면 '파레피데모이스'는 세상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그룹을 나타낸다(Michaels). 이러한 '에클레크토이스'는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칭하는 칭호였으나(대상 16:13; 시 105:6; 사 65:9,15)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하는 집합적인 칭호이다(2:9; 5:13). 한편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은 하나님의 목적, 선택, 부르심, 섭리와 연관된 것으로 단순히 하나님께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아신다는 의미 이상으로 개인과의 특별한 관계를시사한다(1:20; 암 3:2; 행 2:23; 롬 8:29,30; 11:2, Cranfield, Stibbs). 이 특별한관계는 하나님의 선택하심과 자기 백성을 통치하시는 섭리를 가리킨다(Blum).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 '거룩하게 하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아스모'(* )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연관된 것으로(살전4:7) 한편으로는 부르심그 자체와 동일한 실제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을 의미하여 구별됨을 시사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부르심에 합당하도록 즉 인간의 책임을 의미한다(롬 6:19,22; 살전4:3,4; 딤전 2:15, Michaels). 구속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에 의해 거룩한 삶 즉 성화의 삶을 살게된다(Cranfield).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 에이스 휘파코엔 카이 란티스몬 하이마토스 예수 크리스투). '휘파코엔'(* , '순종함')과 '란티스몬'(* , '피뿌림')이 비록한 전치사'에이스'(* , '위하여')와 연결되어 있다 할지라도 '예수 크리스투'(* , '예수 그리스도의')는 '란티스몬'에만 연결된다(Michaels).본절에서 '휘파코엔'에 대해 혹자는 하나님의 선택의 목적인 하나님에 대한 순종으로해석하며(Blum, Cranfield, Stibbs) 혹자는 믿음의 순종(롬 1:5; 16:26) 즉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해석한다(Michaels, 22절). 이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복음을 순종함으로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봉사와 순종이 뒤따라야하며 그것을 통해 성장해 간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은 구약 시대의제사 의식을 암시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피는새 언약의 매개체로서(출 24:3-8; 히 9:18-21) 이 피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구속함을받았으며 하나님 앞에 담대하고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히 10:19-22).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 유대인의 전통적인 인사법으로 목회서신을 제외한 바울의 다른 서신에도 똑같이 기술되고 있다. 그러나 바울 서신과 베드로 서신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1) 문법상 바울의 인사는 '소원에 따른 간구'형식으로 표현된 반면(롬 1:7; 고전 1:3; 고후 1:2) 베드로의 인사는 '부정과거 수동태 회구' 형식으로 표현되었다(벧후 1:2). (2) 내용상 바울은 그리스도인 전체에 대해목자적 심정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임하기를 간구하나 베드로는 그리스도인 각자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체험하도록 간구하고 잇다(Michaels).

=====1:3
 찬송하로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율로게토스'(* )는 동사'율로게오'(* )에서 변화된 형용사이다. 문법적으로 본문을 표현하기위해서는 술어 동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스토'(* , '하게 하다')나 '에스틴'(* , '...이다') 혹은 '에이에'(* , '...지어다')가 있어야 한다.그러나 전통적으로 내려온 유대인의 송영에서는 찬양의 대상이 하나님일 경우 술어 동사를 사용하지 않고 표현하였다. 베드로는 아마도 이러한 전통을 따라 표현한 듯하다(Robertson).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데오스 카이 파테르 투 퀴리우 헤몬 예수 크리스투'(* )에서'퀴리우'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결되어 있다. '주'는 승귀된그리스도에게 부여된 칭호로서 초대 고회의 신앙 고백이었다(롬 10:19; 고전 12:3; 고후 4:5; 빌 2:11, Cranfield). 성부 하나님은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배하시는대상이며,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이시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Michaels). 한편 '그 많으신 긍휼대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구원하시고 아버지가 되시는 근원을 시사한다. 그 근원은 '하나님의 긍휼'이다. '긍휼'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어 구원을 얻게 하고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이 되게 하는 근본적인 요인이다. 이것은 '은혜'(*, 카리스)와 등일한 의미로 사용되나 '은혜'가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나타내는 반면에 '긍휼'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자 하는 동기를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구원하신 것은 자신의 풍성하신 긍휼을 따라 은혜로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할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예수 그리스도의...부활하심으로'의 헬라어 '디 아나스타세오스 예수 크리스투'(*  )에서 '예수 크리스투'의 속격은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1) 주격 소유격으로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를의미한다. (2) 목적격 소유격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를 일으키셨다'를 의미한다. 이 두가지 의미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절 전체가 하나님이 주체로 언급되기때문이다(Michaels). '아나스타세오스'는 '산 소망'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거듭나게 하사'와 연관된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을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한편 '거듭나게 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겐네사스'(* )는 동사 '아나겐나오'(* )의 부정과거 능동태 분사로 거듭남의 사건이 과거의 역사적인 사실임과 동시에 현재에도 구체적인 사실로 중명됨을 시사한다. 신약성경에서는 '거듭난다'에 해당하는 헬라어에 대해 일반적으로 '팔링게네시아'(* )를 사용한다. 그런데 본절에서 '팔링게네시아'가 아니라 '아나겐네사스'를 사용하였다. 그 이유에 대해 혹자는 베드로가 기독교의 구원에 대한 이해보다는 이교의 영향을 받아 이 단어를 사용했다고 주장한다(Bigg). 왜냐하면 당시 신비주의나 스토아 학파에서는 '깨달아 거듭난삶'을 아는자를 '아나겐네사스'란 단어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가 이 같은 이유로 '아나겐네사스'를 사용했다기보다는 본서에 강하게 비쳐지는 예수의 가르침을 그대로 옮기려 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Michaels).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거듭나다'를 '겐네데 아노덴'(* )으로 표현하셨으며(요3:3) 이것은 '아나겐나오'와 같은 어원에서 나왔기 때문이다.'겐네데 아노덴'에서 '아노덴'이 '다시'(again)라는 의미로 사용되든 '위로부터'(from above)라는 의미로 사용되든 모두 '아나겐나오'와 같은 의미가 된다. 따라서 베드로는 본서에서 예수께서이미 사용하신 단어를 다시 사용하므로 예수의 가르침을 그대로 옮기고 있다.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여 강조하고자 했던 거듭남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요 3:3-8). 그리스도인들은 거듭남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소유하신 생명과 같은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Stibbs).
 산 소망이 있게하시며 - '산 소망'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거듭나게 된 결과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안에서거듭나는 새 생명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의 특징으로 4절의 '기업'이나 5절의 '구원'을가리킨다(Michaels). 이 '산 소망'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이미 마련한 것이다(Blum).

=====1:4
 석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사나니 - '기업'에 해당하는 헬라어 '클레로노미안'(* )에 대해 혹자는 구약성경에서는 '거룩하게 구별된 소유물'을 의미하며 신약성경에서는 '현재에 이미 누리는 소유물'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ort). 그러나 '클레로노미안'이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용례를 정리해 보면 대략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1) 하나님 나라(마 25:34; 엡 5:5).(2) 영생(마 19:29; 막 10:17; 눅 10:25). (3) 구원(히 1:14). (4) 약속(히 6:12).(5) 축복(3:9). 이러한 기업은 '산 소망'과 연결된 것으로(3절) 거듭난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Michaels, Blum). 따라서 본절의 '기업'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자녀와상속자로서 현재에 누리는 것이 아니라(롬 8:18; 갈 4:7) 미래에 주어질 것을 가리키며 이때 성령은 미래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질 기업의 보증이 되신다(롬8:11,18-23; 엡 1:14, Michaels). 한편 베드로는 이러한 기업의 온전함에 대해 부정접두어 '아'(* )로 시작하는 세 단어, 즉 '아프다르톤'(* , '썩지않고'), '아미안톤'(* , '더럽지 않고'), '아마란톤'(*  , '쇠하지 아니하는')을 사용하여 설명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미래에완전히 소유하게 될 '기업'이 지상의 것과는 달리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임을 시사한다(Lenski, Robertson).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 '하늘에'는 복음서에서 '하늘 나라'와 연관될 뿐만 아니라 예수의 특정한 말씀, 즉 마 5:12; 6:19,20; 눅 12:33과 연결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질 기업이 영원할 뿐만 아니라 전혀 손상되지 않으며 모든 위험으로부터 안전함을 시사한다(Lenski,Robertson). 한편 '간직하신 것이라'의 헬라어 '테테레메넨'(* )은 완료시상으로 이미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기업을 마련해 두셨음을 시사한다(Blum).

=====1: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 '말세에'는 그리스도인의 구원이 온전하게 성취되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 곧 파루시아를 가리킨다(롬8:18-25; 빌 3:20,21; 골 3:4; 요일 3:2). 파루시아 때 성취되는 '구원'은 앞서 언급된 '산 소망'(3절), '기업'(4절)과 연관된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얻어 향유하고있는 구원의 실현 혹은 종말론적 차원의 완성을 의미한다(Stibbs, Blum).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 '보호하심을 입었나니'의 헬라어 '프루루메누스'(* )는 '프루레오'(* )의 수동태 분사 현재로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계속적으로 이루어지고있음을 시사한다. '프루루메누스'는 본래 군사 용어로서 순례자로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공격하는 사단을 막아주며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나타낸다(Stibbs,Leighton). 종말에 하나님의 기업을 상속할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완성 때까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받는다. 그러나 비록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다 할지라도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므로 믿음 안에 거하여야 하며, 그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종말론적 구원의 완성을 누릴수 있게 된다(Michaels, Stibbs).

=====1: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 '시험'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스모이스'(* )는 외부에서 다가오는 시험으로 상위 단계로나아가기 위해 거쳐야하는 시련(test)을 의미한다(약 1:2, Bigg, Michaels). 그런데베드로가 언급한 '여러 가지 시험'이 어떤 특정한 역사적 사실을 암시하는가에 대하여혹자는 '포이킬로이스'(* , '여러 가지')가 고전 헬라어에는 나타나지 않고 마카비 시대와 신약 시대에만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마카비 시대에 일어났던 고난이나 신약시대의 예루살렘 멸망(A.D.70)을 예고한 듯하다고 주장한다(Selwyn,Hort). 그러나 이러한 추측이 정확한 지는 분명하지 않다(Michaels).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 개역성경에는'엔 호'( , '이 가운데')가 생략되어 있다. '앤 호'는 '말세'를 가리키는 것으로(5절, Michaels, Blum) 종말론적 구원의 완성을 암시한다. 비록 현재에 고난을 당하여 근심에 빠진다 할지라도 그러한 고난은 '잠시 동안만' 있을 것이며 그 후 종말론적구원이 완성되는 파루시아 때에는 현재 당하는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과 기업이 기다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산 소망 가운데 기뻐할 수 있게 된다.

=====1:7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 본절은 약 1:3과 유사하여 혹자는 베드로가 야고보서를 참조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Robertson). 그러나 야고보와 베드로의 표현에는 차이가 있기에 참조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차이점은 두 가지이다. (1) 야고보서에는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배우는 '수단'으로 언급되는 반면 본문에서는 금보다 더 귀한 가치를 지닌 '목적'으로 취급되고 있다. (2)야고보서에는 믿음의 시련이 온전한 신앙에서 요구되는 한 요소에 불과하지만 본문에서 믿음의 시련은 신앙의 최고 요소로 취급되고 있다. 베드로는 본절에서 앞서 언급된차이점과 같은 자신의 의도를 강조하기 위해 '히나'(* )로 인도되는 목적절로믿음의 시련을 수식하고 있다(Michaels). 베드로가 시련을 통한 믿음과 금을 비교하여강조하는 바는 (1) 참된 믿음은 변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는 사실과 (2) 금이 불로 연단받듯이 믿음도 시련을 통해 연단받는다는 사실이다. 베드로는 이러한 강조점을 통해고난당하는 수신자들을 위로하고 있다(Bigg, Leighton, Michaels).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 금이불에 의해 제련되어 순수해지듯이 그리스도인 역시 시련을 통해 참되고 순수한 신앙을소유하게 된다. 이 참된 신앙이 온진히 밝혀지는 날 곧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순수하고 참된 신앙을 소유한 자는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된다. '칭찬과 영광과 존귀'는 종말론적 보상 혹은 상급으로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기다리는 온전한 '구원'의 모든 것을 나타낸다(롬 2:7,10; 빌 1:11; 히 2:7,9, Michaels).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네 - '보지 못하였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크 이돈테스'(* )는 문법적으로 맞지 않다. 왜냐하면 '이돈테스'는 '호라오'(* , '보다')의 제2부정 과거 능동태 분사로서 분사의 부정으로는 '메'(* )를 써야 함에도 불구하고 본절에서는 '우크'가 쓰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양보적'인 의미보다 '사실적'인 의미를 강조하기위함이라고 주장한다(Robertson). 즉 본문은 '비록 너희가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가아니라 '너희 가운데 아무도 예수를 보지 못했다'라는 의미로 '사실성'을 강조한다.(2) 혹자는 베드로 자신이 예수를 친히 목격했음을 수신자들과 비교해 강조했다고 주장한다(Selwyn). (3) 혹자는 베드로를 포함해 수신자 전체가 현재 계시하시는 예수를보지 못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표현이라고 주장한다(Michaels). 즉 본절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보지 못하나 믿고 있는 수신자들을 칭찬하려고 했다. 세가지 견해 중 마지막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수진자들이 비록 예수를 보지 못하나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장차 종말론적 보상으로 주어질 영광과 존귀와 칭찬을 현재 볼 수없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바라보며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한다.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 '받음이라'의 헬라어 '코미조메노이'(*  )는 '코미조'(* )의 현재 중간태 분사로 구원이지금도 실현 과정에 있음을 강조한다. 참된 믿음의 결과인 미래에 주어질 종말론적 보상은 영원하며 온전한 구원이기 때문에 현재 믿음을 소유한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주어질 상급을 소유하고 누리는 것과 동일하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온전히 완성되는 구원은 미래에 속해 있다(Stibbs, Blum). 한편 베드로는 이러한 구원에 대해 '영혼의 구원'(* , 소테리안 프쉬콘)이라고 표현하고 있다.이 때문에 베드로가 '영'과 '육'을 구별하는 헬라어 이분법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고보기 쉬우나(Dihle)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영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쉬콘'은 히브리적 이해 속에서 '자아'나 '인격' 전체를 지칭하기 때문이다(2:25; 4:19,Dautzenberg, Selwyn). 비록 베드로가 '프쉬콘'을 신체적 생명으로 생각하였을지라도그것은 육체적 죽음을 초월하는 생명이다(Michaels).

=====1: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 본절에서 불특징인으로 나타나는 '선지자들'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1) 혹자는 베드로 당시에 활동하던 선지자들이라고 주장한다(Selwyn). 이 견해는 본서를 읽는 수신자들이 선지자에 대해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베드로가 불특정으로 썼다고 추측한다. (2) 혹자는 구약성경 전체에 나타나는 선지자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ichaels, Blum, Cranfield). 이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전자의견해는 본절과 12절 이하에서 선지자들이 예언하므로 유익함을 얻은 자들은 선지자들자신이 아니라 수신자들을 포함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간파하였으며 신약 시대의선지자를 포함할 경우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알았기에 그것을 재삼강조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직접목격하지 못한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을 가리킨다.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은 메시야의때에 대해서 간절히 알기를 원했으며 그것을 알기 위해 말씀을 연구하였다(눅 10:24).

=====1: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상고하니라 - '그리스도의 영'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선재(先在)하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Windisch, Lenski). (2) 혹자는 성령을의미한다고 주장한다(Michaels, Selwyn).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영'은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영' 혹은 '주의 영' 혹은 '성령'과 상호 교환으로 사용되고 있으며(행 1:16; 2:33; 벧후 1:21)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성령의 사역이기 때문이다(12절; 요 15:26, Stibbs). 성령께서 예언자들로 하여금 메시야의 때와 그가 받으실 고난과 영광에 대해 예언하게 하였다(삼하 23:2; 눅 24:26).

=====1: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예언자들이 간절히 알기를 원하며 열심히 상고하고 예언한 것은 예언의 내용 곧 메시야의 때에 대해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기에 예언자 자신과 당대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이었다(롬  4:23,24; 15:4; 고전9:9,10;10:11, Blum, Stibbs, Michaels).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 '보내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스탈렌티'(* )는 수동태 분사로 성령께서 보내심을 받았음을 나타낸다. '성령을 보낸 자'에 대해서신약성경은 '하나님 아버지'(요 14:16,26; 갈 4:6)라고 나타내기도 하며 '예수 그리스도'(요 15:26; 16:7; 행 2:33)로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성령'을 보낸자에 대해서 특정한 자로 정하기는 어렵다(Michaels). 한편 앞서 언급된 예언자들이메시야의 고난과 영광을 예언하여 전한 것을(11절) 본절에서는 '복음'과 동일시하고있다.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이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라 말씀을 상고하여 메시야의 고난과 영광을 예언하였던 바와 같이 신약 시대에 복음을 전하는 자들도 성령을 힘입어메시야의 고난과 영광 즉 복음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였다.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 '살펴보기를'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큅사이'(* )는 '자세히 주의하여 보다'라는 의미로 잘 보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는 것을 나타낸다. 천사들은 본래 하나님의 계획을 전달하는 존재이기에인간보다 훨씬 더 깊은 뜻을 알 수 있지만 구원의 계획은 너무도 오묘하여서 제대로파악할 수 없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실현되어 하나님의 계획이 공개되고 선포될 때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그들은 예수의 초기 지상 생활을 지켜보았으며(딤전 3:16) 구속이 완성될 때에는 찬양으로 기뻐할 것이다(계 5:11-14,Blum). 한편 베드로는 10-12절의 논의를 통해 복음의 전달 과정을 세 단계로 기술하고있다. (1) 선지자(10절). (2) 복음전파자(12절). (3) 천사들(12절). 이러한 전달과정을 거쳐 실현된 하나님의 오묘하신 구속 계획은 신실하게 성취되어 왔다(Lenski,Cranfield).

=====1: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 '동이고'의 헬라어 '아나조사메노이(* )는 '급한일을 당할 때 취하는 태도'(출 12:11)로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게으른 삶을 반성하고 목표로 매진하는 자세'를 가리킨다(Lenski). 예수께서도 이 단어를 사용하여 종이 취해야 할 바른 자세(눅 12:35)를 말씀하셨는데 베드로가 동일하게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온전한 구원의 성취를 소망하는 가운데 긴장된 자세로 인내하며 주님을 기다리도록 권면하기 위함이다(Michaels).
 근신하여...온전히 바랄지어다(* , 네폰테스 텔레이오스 엘피사테) - 본문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헬라어 문법에서 부사가 '오스'(* )로 끝나면 앞에 있는 날말을 수식한다는 점에 근거하여 '텔레이오스'가 앞에 있는 '네폰테스'를 수식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온전히 근신하여'로 해석한다(Michaels, Bigg). 이 경우 '온전히 근신하여'는 '인내'를 강조한다. (2) 혹자는 일반적인 헬라어 문법으로 따질 때 동사 앞에 있는 부사가 동사를 수식하는 것으로 이해하여 '온전히 바랄지어다'라고 번역하며 '소망'을 강조하는 것으로 본다(Selwyn, Lenski). 이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가져다 줄 은혜를 소망하면서 이 세상을 사는동안에 마음을 가다듬고 언어나 행동에 있어서 조심하며 인내 가운데 살아야 한다(Blum, Stibbs).

=====1: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스 테크나 휘파코에스'(*)는 전형적인 셈어적 표현이다(막 2:19; 눅 10:6).특별히 셈족 언어에서 '자녀'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상속자'라는 뜻으로 자녀는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을 권리를 지닌다. (2) '부모의 인격이나 성품을 함께 나눈다'는 의미이다. 이 의미일 경우 누구의 자녀이냐에 따라 자녀의 인격이 결정된다(Selwyn). 이러한 언어적 배경 속에서 베드로는 수신자들을 향해 '불순종의 자녀'(엡 2:2)가 아니라 '순종의 자녀'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통해서(롬 1:5; 16:26) 복음을 받아들이며 순종하는 마음을 보이고 또한 하나님의 상속자이며 자녀가 되어서 아버지에게 순종하며 그 성품을 배워가기 때문이다(Michaels).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 '알지 못할때'에 해당하는헬라어 '엔 테 아그노이아(* )에서 '아그노이아'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들이 누구인가에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이방인'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Cranfield,Selwyn). 왜냐하면 헬라어 단어 자체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을 의미하며 바울도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의 무지에 대해 여러 번 언급했기 때문이다(행 17:30; 엡 4:18).(2) 혹자는 '유대인'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ichaels, Bigg). 왜냐하면 베드로에게있어서 '아그노이아'는 십자가의 도를 모르는 것에 해당하기 때문이다(행 3:14-17).이러한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즉, 이는 이방인이었든 유대인이었든간에 진정한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떠나 영적으로 죽은 상태를 나타낸다(Stibbs). 이러한 자는 사욕 즉 자연적인 충동에 사로 잡혀(Michaels, Stibbs) 충동대로 방종한 삶을 산다. 그러나 영적 생명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의 삶 즉 욕망에 사로잡힌 삶을 버려야만 한다.

=====1: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 '거룩한 자'는 70인역에서 하나님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칭호로서 '거룩한 자' 혹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나타난다(LXX 시 70:22; 77:41; 88:19; 사 1:4; 5:16; 12:6;17:7; 29:23; 30:12,15; 31:1; 41:20; 45:11; 55:5). 이것은 하나님의 정결함과 도덕적인 완전함을 시사한다(Blum). 이러한 하나님께서 수신자들을 과거에 처했던 어둠에서 광명한 빛으로 부르셨으며 하나님을 닮아 거룩한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2:9;5:10). '되라'의 헬라어 '게네데테'(* )는 '기노마이'(* , '되다')의 단순 과거 수동태 명령형이다. 그러나 고전 헬라어에서 '기노마이'의 수동태 명령형 '되다'(become)의 의미보다 '이다'(be)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따라서 '거룩한 자가 되라'는 명령의 의미보다 '거룩한 존재이니 거룩함을 나타내라'라는 의미이다(2:9).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닮아야 하는 존재로서 하나님의 성품을세상에 드러내야 한다. 한편 '행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스트로페'(*  )는 본서에서 '선한 행실'(2:12), '선한 양심'(3:16), '정결한 행위'(3:2)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이것은 '거룩'이 하나님께로의 분리를 의미하나 일상적인 삶의 행동과 연관된 것으로서 세상에서 윤리를 실행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Blum, Michaels).

=====1: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 여기서 '기록하였되'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그라프타이(* )는 구약성경을 인용할때 사용되는 전형적인 표현이다. 베드로가 인용한 본문은 레위기에 기록된 말씀으로(레 11:44; 19:2; 20:26)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하게 살도록 요청받은 말씀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하게 살도록 요청받은 이유는 거룩한 하나님께서 당신을 닮아가도록 그들을 부르셨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구약성경의 이 말씀을 언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대로 요청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복음 안에 산다 할지라도 율법과 무관하지 않으며 오히려 율법을 완성한 사랑의 원리를 따라 윤리적 삶을 영위해야 한다(Lenski, Stibbs).

=====1: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 '외모로 보시지 않고'의 헬라어 '아프로소폴렘프토스'(*)는 '얼굴을 보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나사파님'(* )에서 유래한 것으로 편견에 사로잡혀 불공평하게 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절대로 편견이나 불공평에 빠지지 아니하시고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공의로운심판자이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구약시대에서는 생소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에서 기인한 것이다(마 6:9; 눅11:2).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 '보살피시는 분'과(마 6:32) '재판장으로 심판하시는 분'이라고(눅 18:1-7) 가르치셨다. 베드로는 이러한 이해 속에서 하나님을아버지라고 부름으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의 아버지가 되셔서 그리스도인을 보살피실 뿐만 아니라 공의로 판단하시는 분이심을 강조하여 위로와 권면을 하고 있다.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 '나그네로 있을 때'는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지내는 삶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본향이 이 세상이 아님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천국 시민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 세상은 영원한 삶을영위하기 이전에 잠시 거쳐 지나가는 삶에 불과한 것이다(Stibbs). 그러므로 나그네와같은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히 거할 것처럼 안일하게 삶을 살아가는 것이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로 하나님이 원하는 악에서 떠난 거룩한 삶을 영위해야한다.

=====1:18
 너희가 알거니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도테스'(* )는 기독교의 가장 기초적인 신앙에 대해 언급할 때나(Hort) 표준이 되는 가르침을 언급할때 사용되는(Kelly) 관용구이다. '에이도테스'가 사용되는 경우는 두 가지이다. (1)사도의 교훈을 심화시켜 설명할 때(롬 6:9; 고후 5:6). (2) 앞에서 명령한 구절에 대한 설명이나 이유를 보충하고자 할 때이다(고전 15:58; 엡 6:8,9). 이 두 가지 중 본절의 '에이도테스'는 후자의 경우이다. 왜냐하면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17절)는 권면에 이어 계속해서 그 이유를 설명해 나가기 때문이다(Michaels,Blum).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한 것이 아니요 - '망령된 행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스 마타이아스 아나스트로페스'(* )는 유대인의 생활 양식을 가리키기보다는 이방인의 생활 양식을 의미한다(Blum). 더욱이 '망령된'의 헬라어 '마타이아스'(* )는 이방종교의 특성을 나타내는 단어로 우상 숭배와 관련되어 사용된다(렘 2:5; 8:19; 행 14:15; 엡 4:17). 한편 '구속된 것'의 헬라어 '엘뤼트로데테'(* )는 고대 로마의 노예 제도에서 비롯된 용어로 두가지를 의미한다(Blum, Selwyn). (1) 돈을지불하고 사다. (2) 속박에서 해방시키다.베드로는 본절에서 수신자들이 구속받기 위해 치른 대가가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여기는 '금과 은'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임을 밝힘으로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신 구속사역이 완전한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막 10:45; Lenski). 이러한 대가의 귀함과 완전함에 대한 베드로의 진술은 '값 없이' 구속함을 받았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사 52:3)과 상치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비록 문자적인 의미가 다르다 할지라도 그것은 강조점의 차이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구속이 완전하여 (1)과(2)의 의미를 모두 강조하고 있지만 이사야는 바벨론에 포로가 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려는 태도로 (2)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Michaels).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 '어린양 같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스 암누'(* )는 세례 요한이 예수를 가리릴 때 이미 사용한 표현이다(요 1:29,36). 본문의 유래에 대해 혹자는 사53장에서 비롯 되었다고 주장한다(Bigg). 왜냐하면 사 52장에서는 구속의 대가를 예수의보혈과 비교하며 사 53장에서 예수와 어린양을 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무리가 따른다. 왜냐하면 본절에서 어린양의 피는 예수의 보혈로 비유되는 반면에 사 53장에는 어린양의 피가 없으며 심지어 침묵하는 어린양으로만 비유되고 있기때문이다. 즉 사 53장은 예수의 고난을 나타내나 구속의 보혈과는 연결되지 않는다.차라리 본문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출 12장에 나타난 유월절 어린양과 대비시킨 것이다. 왜냐하면 본문은 유월절 어린양이 지닌 구원과 해방에 대비된 예수의 사역을 시사하기 때문이다(Michaels). 예수께서는 유월절의 어린양과 같이 죄와 허물이없으신 유일한 분으로서 그의 구속은 보다 완전하고 귀한 것이다(출 12:46; 요 19:36;고전 5:7, Blum).

=====1:20
 그는 창세 전부터가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 본절은 전형적인 비교 구문인 '멘...데'(* ... ,'한편...또다른 한편')로서 베드로는 이 구문을 통해 '창세 전'과 '말세'를 비교하여 네 가지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1)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창세 전'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진실하게 진행되었다(Michaels). (2) 동사 시제에 있어서 '미리 알리신 바'의 헬라어'프로에그노스메누'(* )는 완료 수동 분사로 하나님께서 구속 사역에 대해 '미리 알리신' 내용이 완전했음을 시사하며, '나타내신 바'의 헬라어 '파네로덴토스'(* )는 부정 과거 수동 분사로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 사역이 일회적으로 완전했음을 시사한다(Lenski). (3) 내용상'창세 전'은 메시야의 신성과 사역을 나타내며 '말세'는 구속과 부활의 증거를 보여준다(Stibbs). (4) '프로에그노스메누'와 '파네로텐토스' 모두 수동태 분사형으로 인간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인간의 타락이나 죄악도 하나님의 계획을파기시킬 수 없음을 시사한다(Michaels).

 

 

  본장에서부터는 예수의 수제자로서 누구보다도 예수를 잘 알고 있었던 사도  베드로의 권위있는 말씀을 상고하게 된다. 주 예수의 사역과 죽으심과 부활을  직접  목격한 베드로는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곳곳마다 복음을 증거하였다. 본서는 베드로의 그러한 노력이 잘 나타나 있는 서신이다. 본장은 본서의 서론 부분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설명하면서 복음의 귀중함을 강조하고 있으며 나아가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지녀야 할 삶의 태도에 관하여  권고하고  있다.
본장의 이해를 위하여 먼저 다음 사항들을 숙고해 보기로 하자.
  (1) 시대적 배경과 저자의 의도. 본 서신은 사도 베드로가 로마 시에서 순교 당하기 직전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에게 격려와 권면의 말씀을 적어 보낸 것이다. 초대 교회의 대표자로서 팔레스틴과 소아시아 지방을 전도하고 있었던 베드로는 그의 생애 말기에 로마 제국의 수도에 가서 대대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로마 제국은 유대교나 기독교를 허용하기는 하되 천대하거나 무시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복음 전도가 결코 수월한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주후 64년에 네로(Nero)황제가 로마 시 화재 사건의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전가(轉嫁)하면서 기독교  박해가 가속화 되었다. 이 같은 형편에 직면한 베드로는 실라와 마가와 같은 신실한  동역자들과 함께 로마를 방문하여 로마의 성도들과 더불어 고난을 받으며  교회의  장래를 염려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로마에서 시작된 박해가 전국으로 퍼져나갈 것을 예상하고 고난을 대비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을 촉구하기 위하여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는 여러 교회들에게 회람(回覽)시킬 목적으로 본 서신을 기록하였다.
  (2) 문학적 특징. 본장에는 다음과 같은 본서 특유의 독특한 문학적 특징들이  나타난다.
    (까) 문체. 본 서신은 매우 세련되고 아름다운 문체로 기록되어 있으며 어휘나 문법이나 문장력에 있어서도 상당히 수준 높고 고상한 헬라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갈릴리 어부 출신으로서 아람어를 사용했던 베드로가 어떻게 그렇게 고등한 헬라말 편지를 쓸 수 있었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으나 이에 대하여는 결론부에  베드로가 언급한 말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5:12). 즉 베드로는 그의 동역자 실라를 통해서 자신의 뜻을 전달한 것이다. 따라서 본서의 심오한 사상은 베드로의 것이지만 수려한 문체는 실라의 것이라는 결론이다.
    (다) 문안 인사의 형식. 편지 형식으로 기록된 본서는 서두에 인사 부분을 포함하고 있거니와 이는 신약의 서신들과 초기 그리스도인 편지들에서 흔히 나타나는 세  부분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발신인은 자기  정의(self-identification)를  하고 수신인을 지명한 후에 은혜와 평강을 비는 적절한 인사를 한다. 또한 관례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의 삼위 일체적인 구원사역에 관하여 언급한다.  본 서신은 특히 '디아스포라'(Diaspora)에게 보내는 서신임을 전제로 하고 있다.
    (따) 찬송시. 신약의 많은 서신들의 서두 부분에는 문안 인사 다음에  관습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기도가 나오거나(롬 1:8; 고전 1:4; 빌 1:3; 골 1:3; 살전 1:2;살후 1:3; 몬 4) 또는 하나님께 찬양과 축복을 비는 구절들이 이어진다(고후 1:3; 엡1:3). 본 서신은 후자의 경우로서 에베소서의 찬송시와  상당히  유사하다(엡1:3-14). 하지만 에베소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하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을 찬송하고 있으나(엡 1:10) 본 서신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대조가 나타나지  않으며 이미 하나됨을 경험한 그리스도인 독자(讀者)들을 전제로 하고 있다(1:3,5)
  (3) 구조적 특징. 본장은 서론 부분(1,2절)을 제외하고 크게 도 부분으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거니와 두 문단은 서로 병행을 이루고 있다. 본장을 다음과 같이 도표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자.
+-----+--+----+----------------------------------------------------+-----------+
|문 단|절|비교|                내용 및 특이 사항                   | 병행 구절 |
+-----+--+----+----------------------------------------------------+-----------+
|     |3-|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찬양함                         |           |
| 첫  | 5| A  |                                                    |엡 1:3     |
| 째  |절|    |종말론적 기대 (5절)                                 |           |
|     +--+----+----------------------------------------------------+-----------+
| 문  |6-|    |실제적인 교훈 : 믿음으로 시련을 이기라              |롬 2:7,10  |
| 단  | 9| B  |                                                    |약 1:12    |
|     |절|    |종말론적인 기대 (5절)                               |           |
|( 3  +--+----+----------------------------------------------------+-----------+
|  |  |10|    |구원의 증인들                                       |           |
| 12  |- |    |  a. 과거 선지자들의 연구 (10,11절)                 |           |
| 절 )|12| C  |  b. 선지자들에게 임한 신적 계시 (12a절)            |           |
|     |  |    |  b. 현재 그리스도인에게 임한 신적 선포 (12b절)     |           |
|     |절|    |  a.현재 천사들의 연구 (12c절)                      |           |
+-----+--+----+----------------------------------------------------+-----------+
|     |13|    |종말론적인 기대 (13절)                              |           |
| 둘  |- | B' |                                                    | 롬 2:6    |
| 째  |17|    |실제적인 명령 : 거룩한 생활을 하라                  |           |
|     |절|    |                                                    |           |
| 문  +--+----+----------------------------------------------------+-----------+
| 단  |18|    |                                                    |           |
|     |- | A'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찬양함                         |           |
|( 13 |21|    |                                                    |           |
|  |  |절|    |                                                    |           |
|  21 +--+----+----------------------------------------------------+-----------+
| 절 )|22|    |                                                    |           |
|     |- | C' |선지자들에게 계시된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            |약 1:10,11,|
|     |25|    |                                                    |     18    |
|     |절|    |                                                    |           |
+-----+--+----+----------------------------------------------------+-----------+

  1. 미래의 기쁨과 현재의 시련(1:1-12)
  본문에서 베드로는 흩어져 있는 성도들에게 문안 인사를 한 후 여러 가지 시련에 처해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그들의 신앙이 연약해지지 않도록 염려하는 마음에서 격려의 말씀을 베풀고 있다. 그는 먼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요약하여  상기시키고  있으며, 박해를 이기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승리를 얻을 것을 당부하고 있다. 다음 사항들을 통하여 본문의 내용을 상고해 보기로 하자.
  (1) 흩어진 나그네. 본 서신의 수신자들은 '흩어진 나그네'로서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등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어떤 특정한 장소를 막론하고 방방곡곡에 흩어져 나그네처럼 살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전통적 종교를 버리고 개종한 자들로서 가족이나 친척들로부터 버림받고 사회에서 소외되어 나그네처럼 유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베드로는 그들이 비록 나그네처럼 흩어져 있으나 택하심을 입은  자들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에 따라 선택되었고 성령을 통하여 성별(聖別)된 자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말하는 흩어진 나그네의  정체(正體)이다. 베드로는 이제 새로운 이스라엘, 곧 이 세상에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소망의 메시지를 주고 있다.
  (2) 베드로의 찬양. 베드로는 권면에 앞서 먼저 찬송시의 형태로 자신의 신앙  체험을 고백한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까) 찬양의 대상. 베드로는 하나님을 향하여 찬송을 드리고 있다.  그가  찬양을 드리는 하나님은 살아 계신 분이시며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피조물에게 무한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다. 더구나 당신의 독생자, 만민이 고대하던 메시야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은 능히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다.
    (다) 찬양의 내용.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구체적으로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지적한다. 그의 고백에 의하면,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신 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사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성도들을 거듭나게 하시며 그들에게 산 소망을 주신 분이시다. 과거에 예수를 배신한 적이 있던 베드로는(막 14:66-72)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한 자였다. 이제 그는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입고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요 3:36) 한없는 감격과 기쁨으로 복음을 널리  증거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있다.
    (따) 찬양의 이유. 베드로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궁극적 이유는 그분께만 산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소망 없는 멸망의 자식을 구원하여 천국의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소망을 주셨다. 그것은 부귀나 명예와 같지 없어질  기업(基業)이 아니라 나그네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영원한 곳에 예비해 두신 은혜의 기업이다. 성도는 찬란한 영광의 기업이 보장된 자들이며 또한 종말에 나타나기로 예비된 완전한 구원을 약속받은 자들인 바, 비록 지금은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치밀하신 계획과 선하신 뜻 아래 진행되고 있으니 결코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고 그분의 은총을 찬양해야 한다.
  (3) 구원을 기뻐함.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 사역을 찬양한 베드로는 시련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말고 오히려 더 큰 구원을 얻기 위한 훈련의 기회로 삼아 적극적  삶을 살 것을 당부한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산 소망은 이미 구약 시대부터 예언된 것으로 천사들도 갈망하는 확실한 것이다.
    (까) 시련 중의 기쁨. 본문에서 베드로는 현재와 미래를 대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6,7절). 성도는 비록 현재 시련을 당하나 미래에는 즐거워하게 된다(마 5:4; 롬 8:18; 고후 4:17). 그들은 지금 전투 상태에 있으나 마침내 승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성도의 현재를 특징지우는 것은 고난과 시련이며 미래를 특징지우는 것은 칭찬과 영광과 존귀이다. 성도가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과 시련은 금보다 더 값진 믿음의  연단을 가져온다. 믿음의 결과는 칭친과 영광과 존귀인 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린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비록 성도가  세상에서 불같은 시련을 당한다 할지라도 구원의 소망이 가득 찬 즐거운 삶을 영위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다) 영원한 구원의 섭리. 베드로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관하여 역설하였거니와 그 구원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만세 전부터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이며 이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미 구약 시대에 예언되었음을 강조한다. 즉  성령께서는 선지자들을 감동시키셔서 메시야의 고난과 영광을 미리 증거케 하셨으며(사 11,53장) 신약 시대에는 복음 전도자들에게 역사하시어 구원을 전하게 하셨다. 또한 천사와 같은 하늘의 존재들도 인간의 구원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구원을  동경한다. 구원이란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를 막론하고 하늘과 땅 모두가 관련된 하나님의  우주적인 사건인 바, 성도에게는 이처럼 우주 만물이 애타게 기다리던 구원이 보장되어 있으므로 시련 중에서도 능히 기뻐할 수 있다.

  * 기업(Inheritance).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위하여 하늘에 영원한 기업(基業)을 예비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4절). 성경에서 말하는 기업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가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1) 구약에서의 기업. 성경에서 기업이라는 말은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구약에서 '기업'(         ,나할레)은 '재산', '소유물'과 같은 뜻으로서 가나안 땅을  열 두 지파에게 분배해 준 사건과 관련하여 '토지'나 '영토'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특히 성경의 문맥에서는 아버지나 조상들로부터 상속받아 소유한 것이라는  법률적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신학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따라 순종하는  백성에게  내려 주시는 선물이나 재산을 뜻한다. 약속의 땅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기업이며(신 4:21; 렘 3:18,19), 이 땅은 이스라엘의 각 지파에게 그  지파의  크기에 따라 분배되었다.
  (2) 신약에서의 기업. 신약 전반에서 '기업'( ,클레로노미아)이라는 말은 주로 영적이고 신학적인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악한 농부에 대한 예수의 비유에서 기업은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마 21:38).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믿음의 의로 말미암아 기업의 상속을 약속받았으며(롬 4:13), 성령께서는 성도 안에  있는
영광의 기업의 보증이시다(엡 1:18).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에게만 영원한 기업이 보장되어 있는 바(4, 18절; 히 11:8), 불의한 자는 기업을 받을 수 없다(고전 6:9,10).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상속자이기도 하며(갈 3:16) 축복의 성취라는 점에서 보면 기업 자체이기도 하다(갈 3:14). 한편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과 새 언약의 중보로서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는 분이심을  증거하고 있다(히 9:15).

  2. 거룩하라는 베드로의 권면(1:13-25)
  앞 문단에서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의 큰 은혜를 받은 성도의 특권에  관하여  언급한 베드로는 본문에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 것을 역설하면서  보다  실제적인 교훈을 베풀고 있다.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본문의 내용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1) 성도의 소망과 인내. 본문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종말론적 기대가 잘  드러나 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선택받고 구원을 체험한 성도들은 험난한  이 시대를 살아갈 때에 근신하며 인내해야 할 터인즉,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으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자에게는 시험이  닥치고 환난과 핍박이 따르거니와 그럴 때마다 성도들은 마음에 믿음의 무장을 하고  뚜렷한 소망 안에서 구원이 완성되는 재림의 날을 기다려야 한다.
  성도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함으로 죄사함을 받고 구원함을 얻어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며, 또한 이 땅에 거하는 동안 하나님의 나라를 선취(先取)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특권을 가지고 살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까지는 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것임을 알고 확고한 소망  안에서 주의 다시 오심을 기다려야 한다.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 즉 구원이  완성되는 날에 성도들은 부활과 영생의 기업에 참여하며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그날의 영광을 생각하며 현재 당하는  고난을  인내로써 극복해야 한다. 이처럼 베드로는 박해에 직면한 성도들에게 임박한 주의 재림을  상기시키면서 소망 가운데 모든 어려움을 이겨 나갈 것을 당부하고 있다.
  (2) 성도의 성화(聖火). 주의 재림을 앞 둔 성도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 베드로는 재림이 임박했으므로 성도들이 비윤리적으로 살아도 좋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율법을 인용하여 엄격히 명하기를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촉구한다(15절).
    (까) 성화의 이유. 베드로는 본 서신의 독자들이 이방 세계 가운데 사는 성도들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저들이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영적무지 가운데 육욕(肉慾)을 따라 살던 자들임을 지적하고 있다(14절). 그러나 동시에 베드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은총으로 인하여 구속함을 받았으니 예전의 악한 행실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할 것을 당부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본래의 창조의 의도대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신의 형상(形象)에 부합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의 자녀가 된 자들은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의 행실을 모두 벗어 버리고 거룩하게 변모되어야 한다. 이러한 자만이 마지막 날 영광 가운데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기쁨으로 맞이하게 될 것이다.
    (다) 성화의 표본(標本). 베드로는 성도의 성화를 이야기하면서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16절). 구약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거룩한 삶을 살아야 했다(레 19:2). 즉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분이시며 당신의 나라는 죄악이  존재하지 않는, 성결한 곳이므로 하나님의 백성 역시 거룩한 자여야 했다.
    (따) 성화의 길. 베드로는 덧붙여서 거룩해지는 길을 제시한다. 성도가 과거의 모든 악한 생각들과 행실들로부터 속죄를 받았다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며 썩어질 금이나 은같이 세상적인 것으로 값을 치러서 얻은 것도 결코 아니며 흠없고 순전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값을 치르고 얻은 완전한 구속의 은총이다. 구속함을 받은 자가 거룩해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인간적 노력이나 힘으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속죄의 능력을 지닌 그리스도의 피에  의지할 때 가능하다. 하나님의 구의 은혜를 회상하며 기쁨과 감격 속에  머무는  것이 거룩한 생활의 기초가 된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을 능히 거룩하게 하시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부족함이  없게 하신다.
  (3) 진리에의 순종. 하나님께서 성화의 주체이시며 표본이라는 사실을 밝힌  베드로는 마지막으로 성도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간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진리이시므로 하나님의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 바로 거룩해지는 것이다. 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순종한다면 정결함을 얻게된다(엡 2:2; 5:6; 살후 1:8). 또한 진리로 인하여 영혼이  깨끗해진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형제를 거짓없이 뜨겁게 사랑하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거룩해지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거룩함에 도달하기 위하여 성도들이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서로 열심으로 사랑할 것을 권면한다. 형제  사랑은  예수의  명령이요  새  계명으로서(눅 10:27) 사랑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맛볼 수 있게 된다. 성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그 마음밭에 뿌려져서 그 힘에 의하여 거듭나게 되었던 바, 그  진리의 힘에 의하여 새로운 삶을 영위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오직 진리의 말씀에 순복함으로써 거룩함에 도달할 수 있다. 진리 안에 거하지 않는 자, 진리를  따르지  않는 자들은 결코 사랑하라는 예수의 계명을 지킬 수 없으며 거룩한 백성이 될 수도  없다. 성결한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떳떳이 서기 위해서는 날마다 말씀에 순종하여 지켜  행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다.

  * 개인적 종말론. 본문에서 베드로는 개인의 종말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즉 성도 각자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완전한 구원을 이룬다는  것이다(5,7,13절). 본 주제 강해에서는 개인적 종말에 관하여 자세히 고찰해 봄으로써 성경에 근거한  올바른 지식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육체적 죽음. 이는 육체에서 영혼이 분리됨으로 육체의 생명읽이 종결되는 상태를 말한다(전 12:7; 요 19:30; 약 2:26). 그러나 이것은 육체의 기능이 정지되는  것이지 존재 자체의 멸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까) 죄와 육체적 죽음의 관계. 죽음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이다(창 2:17; 롬 5:12; 6:23). 곧 죽음은 신적 진노의  표현이며(시  90:7,11),  심판이며(롬 1:32), 정죄이며(롬 5:16), 저주로서(갈 3:13) 필연적인 것이다(히 9:27).
    (다) 성도에게 있어서 죽음의 의미. 죄사함을 받은 성도 역시 불신자와  마찬가지로 죽는다. 그러나 그 죽음의 의미는 단순히 지상 생활의 끝이며, 끝없는 심판 상태에 처할 불신자의 죽음과는 엄청난 차이를 지닌다. 죽음은 성도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며 속된 생각을 없애고 영적 성장을 도모하여 성스러운 단계로 나아가게 한다.
  (2) 영생. 시작도 끝도 없으신 하나님께서는 영생하는 분이시나(딤전 6:16) 그 형상을 부여받은 인간에게는 시작은 있는 반면 끝은 없다. 즉 악인은 사후(死後)에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당하며(계 20:10) 성도는 행복한 상태로 영원한 삶을 살게 된다( 요3:36; 5:24; 갈 6:7,8). 악인의 존속은 영벌이며  성도의  존속은  영생인  것이다(요 3:36). 영생에 대한 성경의 증거는 다음과 같다.
    (까) 구약. 구약에서 에녹(창 5:24; 히 11:5)은 죽음을 맛보지  않았고  아브라함(창 25:8)과 이삭(창 35:29)과 야곱(창 49:33)은 죽었으나 존재가 소멸되지 않고 열조에게 돌아간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욥(욥 19:25,26)과 다윗(시 16:10,11)과 솔로몬(전 12:7). 이사야(사 26:19), 다니엘(단 12:2,3), 호세아(호 13:14)등은 영생에 대해 증언하였다.
    (다) 신약.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영생을 믿었으며 예수께서 직접 영생에 대해 언급하셨고(요 11:25,26), 사도 바울(롬 8:18; 고후 4:17,18; 딤후  4:7,8)과  히브리서 기자(히 11:19)도 이에 대해 증언하였다.
  (3) 중간기 상태. 인간이 죽은 후 부활할 때까지 영혼이 어디에서 어떠한 상태로 머물러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들이 있다.
    (까) 중간기 처소에 대한 카톨릭의 견해. 인간은 상태에 따라 각기  다른  처소에 거한다는 주장이다.
      (a) 천국. 영세를 받고 신자가 된 후 선행과 공적을 쌓은 자는  즉시  천국으로 간다.
      (b) 지옥. 영세를 받지 못한 성인이나 영세를 받은 후 치명적인 죄를 지은 자는 즉시 지옥으로 간다.
      (c) 연옥. 영세를 받았으나 완전치 못한 신자는 고통의 장소인  연옥에서  정화(淨化)의 기간을 거친 후 천국으로 들어간다.
      (d) 선조 림보. 구약 시대 성도들의 영혼이 그리스도의 부활  때까지  기다리며 머무는 장소이다. 그리스도는 부활 전에 이곳에 내려가셔서 이들을 해방시키시고 천국으로 끌어 올이셨다고 주장한다.
      (e) 유아 림보. 영세를 받지 못하고 죽은 모든 유아들이 특별한 형벌이나  행복 없이 영원히 지내는 장소이다.
    (다) 중간기 처소에 대한 성경적 견해. 인간이 죽은 후 세상 마지막 날 백보좌 심판을 통하여 영원한 축복과 형벌을 선고받기까지 일단 머무는 처소에  관하여  성경은 확실하게 제시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종합적 고찰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원칙을 이끌어 낼 수 있다.
      (a) 최종적 심판은 인간의 사후 즉시 개별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세상 마지막 날 백보좌 앞에서 공식적으로 행해진다(단 7:10; 롬 14:10; 계 20:12-15).
      (b) 영생과 형벌의 장소는 오직 세상 종말 뒤에 새로이 도래할  신천지(新天地)의 천국과 지옥밖에 없다(마 25:31,46; 계 20:10; 21:1-4,8).
      (c) 일단 육적 생명이 끝나면 더 이상 최후의 심판에 영향을 끼칠 회개와  범죄는 없다(시 6:5; 눅 16:25,26; 히 9:27).
      (d) 육체적 죽음을 통하여 영과 육은 분리되며 영은 각기 중간기  처소로  가나 육은 완전히 부패하여 흙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성도는 부활시에 새 육체를 갖게 된다(전 3:21; 12:7; 고전 15:44,51-53).
  이상의 원칙과 성경의 관련 부분을 종합하여 학자들은 사후에 육은 무덤에서 부패하나 영은 각각 천국과 지옥의 중간기적인 상태인 낙원과 음부로 돌아간다고  본다. 즉 성도들의 영은 낙원에, 불신자들의 영혼은 음부에 가는데 낙원은 이 세상에 비하면 비할데없이 즐거운 것이며 음부는 매우 고통스러운 곳이나, 낙원과 음부는 장차  도래할 완전한 천국과 지옥에 비하면 그림자에 불과하다(눅 16:22-25; 23:43; 고후 12:4;  계 2:7; 6:9-11; 7:9,10; 20:13).
    (따) 사후 영혼의 의식 상태.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영혼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은 견해들이 있다.
      (a) 영혼 수면설.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무의식, 즉 잠자는 상태로 부활  때까지 유지된다.
      (b) 멸절설. 죄로 인하여 영생의 능력을 상실한 인간은 죽은 후 영원히  의식을 상실한다.
      (c) 조건적 영생설.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영혼들만 멸절한다.
      (d) 제 2시련설.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자들은 중간기에 회개하고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 개혁파 견해. 사후 인간은 각기 처소에서 즐거움 혹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의식을 갖고 있다고 본다(눅 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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