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받을 줄을 알고 - 야고보는 자신을 포함한 '선생들'이 더 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을 경고한다(Tasker, Burdick).여기에서 '심판'의 헬라어 '크리마'(* )는 '재판을 통하여 내려진 판결'을 의미한다(롬 13:2,Dibelius-Greeven, Robertson). 선생들이 받을 '더 큰 심판'은 단순히 '다른 그리스도인들보다 선생들이 더 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책임'을 수반한 '은사'로서의 '선생'의 사역을 성실하게 수행하지 않았을 경우,그에 상응하는 심판관의 대가가 치러져야 함을 시사한다(눅 12:48,Moo,Adamson). 야고보는 이런 경고를 통해서 선생으로서의 가르치는 사역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Moo).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 '되지 말라'(* , 메 기네스데)는 부정어 '메'(* )와 '...이 되다'를 뜻하는 '기노마이'(* )의 현재 중간태 명령법인 '기네스데'가 결합된 것으로 선택적인 권고의 성격이 아니라 금지를 요구하는 명령이다(Robertson, Burdick). 이러한 어휘들은 당시 대부분의 독자들이 지위 향상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가운데, '선생'이라는 직임의 권위와 명성에 매료되어 영성이나 도덕적, 윤리적인 책임감 없이 어떻게든 선생이 되려는 갈망이 공동체 전반에 편만했음을 추측하게 한다(Burdick, Moo). 더욱이 바울이 교회 직임에 대해 진술한 것을 살펴 볼 때(고전 12: 8; 엡 4:11) 당시에 이러한 현상이 있었음을 추측하기에 충분하다(Tasker, Moo, Mayor).
=====3: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 원문에 있는 '폴라'(* ,'많은,많은 것에')라는 단어를 개역성경에서는 삽입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 명확한 의미를 파악 하기가 어렵다(Robertson, Martin, Moo, Dibelius-Greeven). '폴라'의 의미에 대해 혹자는 죄의 '수량'(RSV)이나 죄의 '다양성'(NIV, 잠 10:19),또는 이 두 가지 모두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Martin).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의미상에 큰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따라서 본문을 '우리는 모두 많은 실수를 한다'혹은 '우리는 모두 많은 것에 실수를 범한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다. 한편 '실수하다'를 뜻하는 단어 '프타이오멘'(* )은 유대 문헌이나 신약성경에서 영적인 실패, 즉 모든 죄의 행동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2:10; 벧후 1:10, Moo, Burdick).한편 '프타이오멘'의 인칭 어미인 '-오멘'(* )은 1인칭 복수 주격을 나타내는 것으로,야고보가 경고 받는 '선생들'의 부류에 자신을 포함시킬 뿐만 아니라 실수하는 '우리' 가운데도 역시자신을 포함시키고 있음을 나타낸다(Robertson, Moo, Martin).
만일 말에 실수가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 본문의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자면'은 '실수하다'라는 의미의 '프타이에이'(* )와 '...아니다'를 의미하는 '우'(* )가 연결되어 말의 실수를 부정하고 있는 조건문으로서 어떤사람이든 말에 실수가 없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함을 암시한다(Martin). 이것은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조차 때때로 죄를 범하게되는 죄의 보편성을 시사한다(Burdick). 1절에서의 선생들에 대한 경고가 2절에서 '말'에 대한 주의로 연결되어,본절의 '말'은 후속절의 초점이 되는 '혀'에 대한 이야기에 배경을 제공한다. 이러한 전후 문맥으로 볼 때 본문은 '만일 말로 범죄하지 않는 자면'을 의미한다(Burdick, Martin, Moo). 한편 '온전한 사람'은 죄가없거나 결백한 의미에서의 완전함이 아니라 잘 갖추어지고 성숙한 '온전함'을 나타낸다(1:4, Martin).야고보는 말로 행하는 범죄는 누구든지 쉽게 범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말을 잘 통제하여 실수를 범하지 않는 사람은 성숙되고 온전한 사람임을 강조하며 더불어 언어생활을 조심할 것을 권고한다.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 야고보는 이와 같은 본문을 통해서 상이해 보이는듯한 1절과 3절의 내용을 자연스럽게 하나로 연결시키고있다(Dibelius-Greeven). '굴레 씌우리라'의 헬라어 '칼리나고게사이'(* )는 '재갈을 물리다'라는 의미로 신약성경에서 드물게 쓰이는 단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가 1:26절에서 '혀'와 연결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Robertson) 본문도 역시 다음절부터 전개될 혀에 관한 진술과 관련 하여 권면을 전개하려 한 듯하다. 사실상 본문은 1-12절까지의 내용에 있어 핵심이 되는 것으로, 선생들에게서 시작된 경고를 전체 그리스도인 공동체로 확대시키고 있다.즉 야고보의 이러한 진술은 지도자들에게 그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Matin) 궁극적으로는 공동체에 전반적인 적용을 의도하고 있음을 나타낸다(Moo).선생이든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이든간에 혀를 제어(制御)하여 말의 실수가 없게 하는 것은 결국 온몸에 굴레를 씌워 죄짓는도구로 이용되지 못하도륵 하는 것과 같다(Burdick, Tasker).
=====3:3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 헬라어 본문에서 본절의 첫머리에 나타나는 '에이 데'(* , '만약','if', 'When')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 이다. (1) 혹자는 '이데'(* , '보라')라고 주장한다(C P, Mayor, Ropes).(2) 혹자는 '에이 데'(* , '만약')라고 주장한다(A, B, K, L,RV, NIV, Martin, Moo, Dibelius-Greeven).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비록 '이두'(* , '보라')가 4,5절에서 등장하여 '이데'가 조화를 이룬다 할지라도 '이데'는 본서에서 한번도 사용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본절의 재갈 예는 말(馬)의 온 몸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말의 '입'에 물려진 재갈에 있음을 나타낸다. 즉 재갈이 말의 '입'에 채워짐으로 말이 통제된다는 사실이 강조된다(Moo). 야고보는 이렇게 해서 다음에 이어지는 다른 예화들과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뤄간다.
=====3:4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 본절은 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 이전에 그 예로 배와 키의 관계를 나타낸다(Moo,Tasker). 즉 야고보는 작은 부분을 통해 커다란 몸체를 조종할 수 있음을 암시하면서(Moo, Dibelius-Greeven) 배와 키의 관계를 제시한다. 큰 몸체가 '광풍에 밀려갈 때' 일지라도 사공은 자그마한 키를 통해 원하는 방향으로 배를 조종할 수있다. 야고보는 말과 재갈, 배와 키, 몸과 혀를 비교시켜서 혀가 작지만 혀를 제어하지 않을 경우 엄청난 범죄가 발생하게 됨을 강조한다.
=====3:5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 '이와 같이'로 연결되는 것은 앞의 두 예화가 본절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뒷받침 해준다(Burdick, Mayor). 이것은 본절이 3,4 절의 예화를 완성하고 있음을 시사한다(Martin). 재갈과 키가 그 자체의 왜소함에도 불구하고 말의 온몸과 배의 진로를 좌우하듯이, 우리의 혀역시 비록 크기는 작을지라도 그 역할은 매우 크다(Moo, Tasker). 헬라어 본문에는 '큰 것을 자랑하도다'의 헬라어가 '메갈라 아우케이'(* )로 되어있으나 다른 사본에는 '메갈라우케이'(* , '자랑하다', '뽐내다')로 되어있어(* ,P*20, k, L,) 의미 파악에 주의를 요한다(mayor, Tasker). '메갈라우케이'로 보게 될 경우 '자랑하는 혀'의 의미가 강조 되는 반면에 '메갈라 우케이'로 이해할 경우 '큰 것을 자랑하다'라는 의미로 '작은 혀'와 '큰 역할'이 대조된다(boasts of great things, RVS, Tasker, Robertson). '메갈라우케이'와 '메갈라 아우케이' 두 경우 중 후자의 것이 타당하다.왜냐하면 앞서 언급된 두 가지 예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작은 것'과 '큰 것'이 대조되기 때문이다. 본문은 비록 혀가 작을지라도 큰 역할을 하여 엄청난 힘, 곧 잠재된 거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Moo, Martin, Burdick).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 본문의 '어떻게 작은'과 '어떻게 많은'은 동일한 헬라어 단어 '헬리콘'(* )으로 한 단어가 두상반 된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야고보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 일종의 균형과 대칭의 효과를 내고 있다(Moo, Martin). 한편 '나무'에 해당하는 헬라어 '휠렌'(* )은 메마른 지중해 기후로 인한 불꽃에 의해서 쉽사리 재가 되어 버릴수 있는 팔레스틴 언덕의 산림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RSV, Moo, Martin). 야고보는 본절에서 산림이 작은 불씨에 의해 파괴되어 버림을 예로 들어 혀의 잠재적인 파괴력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있다(Burdick).
=====3: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 본절에서는 5절에서 보여준 혀의 파괴적 성향이 곧 바로 언급된다. '혀는 곧 불이요'는 '혀 또한 불이다'(Adamson) 혹은 '이와같이 혀는 불이다'(Martin)라고 것이 자연스럽다. 한편 '세계'의 헬라어 '코스모스'(* )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꾸밈(벧전 3:3), (2)악의 총체(Vulgate), (3)사악한 세상 조직의 타락하고 반역적인 형세(Tasker, Martin, Moo, Robertson). 이 세가지 중 세번째 해석이 문맥상 가장 타당한 듯하다(1:27;4:4, Moo).혀는 불과 같이 모든 것을 태워 버릴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모든 악들과 연관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범죄케 한다(Burdick).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 '바퀴'를 의미하는단어 '트로콘'(* )은 '트레콘'(* , '달리다', '뛰다')에서 파생된 것으로 오르페우스 신비 종교의 문서에서 사용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야고보가 오르페우스 신비 종교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하기보다는 당시에 널리 대중화 되어있었던 종교적 또는 철학적 표현을 효과적으로 사용했음을 암시한다(Robertson, Moo, Martin, Dibelius-Greeven, Mayor). 이것은 인생의 전영역 가운데 성쇠(盛衰)를 가리키는 듯하다(Moo,Burdick). 이렇게 혀는 온 몸을 더럽힐 뿐만 아니라 불과 같아서 인생을 파괴시킬 수 있다. 한편 혀와 동일시되며 인생 전체를 파괴시킬 수도 있는 불의 근원은 '지옥불'이다. '지옥'을 뜻하는 헬라어 '게엔네스'(* )는 힌놈의 골짜기를 지칭하는 히브리어 '게힌놈'(* )에서 유래한 표현이다(Burdick, Martin, Moo ). '게힌놈'은 예루살렘 정남방의 쓰레기 소각장으로, 계속 타고 있는 쓰레기 불로 말미암아 마지막날의 심판의 장소로 자주 비유되어 왔다.야고보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만약 각자가 자신의 혀의 힘을 제어하는 데에 실패한다면, 급기야 완전한 파멸에 이르는 것을 피할 수 없음을 경고하고 있다. 파멸할 수 밖에 없는 것은 혀의 오용과 남용이 사단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Martin, Moo, Tasker, Mayor).
=====3:7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 본절은 다음절의 내용을 유도하기 위한 대조적인 예이다. '길들므로'의 헬라어 '다마제타이'(* )는 현재 시상이며 '길들었거니와'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다마스타이'(* )는 완료 시상이다. 야고보는 현재시상과 완료시상을 중복하여 사용함으로 인간이 여러세대에 걸쳐 짐승과 새,벌레와 해물(창9:2-7;행 10:12; 11:6)등의 동물들을 지배하고 정복한 상태의 연속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Robertson, Tasker, Burdick, Mayor, Adamson, Moo).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연을 다스리고 정복할 권한을 주셨으며(창 1:28;시 8:6-8) 실제로 인간들은 동물들을 다스려 길들였고,동물들은 인간에게 지배되고 복종하였다.한편 '짐승'을 나타내는 '데리온'(* )은 원래 신약성경에서 길들지 않은 동물들 즉 야생 동물에만 사용되어 왔다. 야생 동물이 길들여지는 것은 사 11:6-9처럼 메시야 시대의 상징으로 쓰여진다(Adamson).
=====3: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가득한 것이라 - 앞절에서 언급한 바대로 인간은 모든 짐승을 다스리고 길들였다. 반면에 인간은 자신의 지체 중 하나에 불과 한 혀를 스스로 제어할 수 없다. 야고보는 앞절에서 인간이 다스린 동물과 본절에서 인간이 다스릴 수 없는 혀를 대조시켜서 혀의 악함과 파괴력을 강조하고있다. 하지만 비록 인간 자신의 능력으로는 혀를 제어할 수 없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의 혀는 성령에 의해서 지배되며, 하나님의 긍휼과 도우심과 은혜로 말미암아 제어될 수 있다(Burdick,Moo, Mayor, Martin). 야고보는 본절에서 제어되지 않은 혀의 두 가지 속성을 제시한다.
쉬지아니하는 악 - '쉬지 아니하는'의 헬라어 '아카타스타톤'(* )은 1:8의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에서 '정함이 없는'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이것은 '아카타스타톤'이 수식하는 악이 불안정함과 한 마음을 품지 않는 데서 기원함을 시사한다(Moo). 이러한 악은 마치 복종될 수 없는 흉악한 짐승과도 같은 것으로 결코 제어될 수 없음을 암시한다(Burdick,Tasker).
죽이는 독 - '죽이는'을 뜻하는 헬라어 '다나테포루'(* )는 '다나토스'(* , '죽음')와 '페로'(* , '가져오다')의 합성어로 '죽음을 가져오는'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Robertson).'죽이는 독이 가득 하다'는 구약성경의 교훈들을 반영하는 것으로(시 140:3; 잠 10:8; 11: 9, Moo) 독사에게 물린 즉시 온 몸에 독이 퍼지고 급기야는 죽음을 초래하는 것처럼(Burdick,Robertson, Moo) 혀는 이웃을 파괴시킬 뿐만 아니라 범죄케 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다.
=====3:9
야고보는 혀의 양면성 즉 '찬송'과 '저주'를 대비시켜서 그 불합리성을 제시한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 '주 아버지'라고 해석되는 헬라어 '톤퀴리온 카이 파테라'(* )는 '주와 아버지'가 아니라 '주이신 아버지'라는 의미로 '주'와 '아버지' 모두가 하나님께 적용되고 있다(Robertson). '주 아버지'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고백으로(RV, Tasker) 혀의 가장 고귀한 기능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임을 시사한다(Martin, Moo).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 '저주'는 구약성경에서 자주 나타나는 주제이다(창 9:25; 49:7; 잠 11:26; 24:24; 26:2). 이러한 저주는 고대 세계에서 큰 힘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며, 상대방으로 하여금 하나님으로 부터 분리되어지고 영원한 심판을 겪게 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그러나 구약성경에 비해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저주하는 것을 금했다(롬 12:14).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저주를 금하고 오히려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라 하셨다(눅 6:28, Moo, Martin). 한편 '형상'을 의미하는 '호모이오신'(* )은 '닮게 만들다'는 뜻을 가진 '호모이오오'(* )로부터 온 것으로 '하나님의 외관대로 지으심을 받은 것'을 의미한다(made after the likeness of God, RV). 또한 '지음을 받은'을 의미하는 헬라어 '게고노타스'(* )는 완료시제이다. 이 두 가지 즉 '호모이오신'과 '게고노타스'는 인간이 범죄로 타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자신의 거룩함을 보여 주는 흔적을 여전히 가지고 있음을 암시한다(Tasker, Burdick). 이에 야고보는 사람이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또 사람을 저주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높이고 저주하는 것과 마찬 가지임을 강조하여 그 불합리성을 나타낸다(Burdick). 그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3:10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 하리라 - 야고보는 한 입에서 찬양과 저주가 나오는 이중성을 드러내며 경고한다(Mayor). '마땅치 아니하니라'의 헬라어 '우 크레'(* )는 선악간의 차이를 분별하는 기준 이라기보다는 이중적인 면 즉 찬송과 저주의 공존으로 인해 생겨나는 불안 정함을 시사한다(Tasker). 이와같이 입에서 나오는 말의 이중성으로 인해서 생기는 모든 양태는 죄악이며 사람들이 가장 범하기 쉬운 범죄이다. 이러한 말의 폐해(弊害)에 대해 예수께서도 엄중히 경고하셨기에(마 15:11,18,19)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지배와 인도하심을 따라 우리의 입을 일관성 있게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사람에게 사랑과 친절을 베푸는 것에 효과적으로 사용하여야 한다(Burdick).
=====3:11
본절의 샘의 비유는 매우 인상적이고 효과적이다. 왜냐하면 건조한 팔레스틴 기후에서 샘의 중요성이란 이루 말할 수 없으며 많은 마을과 촌락들이 이 샘과 시내를 의존하여 형성되었다(Moo, Martin).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 본문 처음에 등장하는 '메티'(* , '어찌...하지 않겠느뇨')는 야고보가 즐겨쓰는 문학적인 표현으로, 부정적인 대답을 예상하면서 묻는 수사학적인 질문이다(Moo, Martin,Robertson). 야고보는 이 수사학적 질문을 통해서 한 샘이 두 가지 맛을 낼 수 없음을 예로들어 한 입에서 경배와 저주가 나오는 것이 부당함을 예증한다. 한편 '구멍'을 나타내는 헬라어 '오페스'(* )는 땅의 갈라진 틈 또는 바위 표면에 갈라진 한틈을 의미한다(Robertson, Tasker, Adamson). 이러한 틈새에서 솟아나는 두 종류의 물 즉 '단 물'과 '쓴 물'은 '신선한 물'(fresh water)과 '짠 물'(salt water)을 가리킨다(NIV, RSV). 한 샘에서 신선한 물을 내놓다가 다시 짠 물을 내놓는 일은 있을수 없으며(Moo, Martin, Adamson),만약에 신선한 물에 쓰거나 짠 물이 첨가된다면 그 물은 이미 신선함을 잃어 효력을 발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물을 마시는 자에게 피해를 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입에서 찬양과 저주가 나오는 것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혀가 사악하게 활용되었을 때 그 말은 바로 이 쓴 물과 같아져서(Moo) 비극을 초래하며 전체를 그릇되게 한다(Martin).
=====3:12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 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본문 역시 부정어 '메'(* , '아니')로 시작되어 부정적인 대답을 요구하는 수사학적인 질문이다(Martin). 본문에서 열거되는 무화과나무, 감람열매, 포도나무, 무화과등의 식물을 사용하는 비유는 고대 문학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Martin). 신약성경에도 복음서를 중심으로 여러 번 사용되고 있다(마 7:16-20; 12:32,33; 눅 6:43-45,Martin, Adamson). 이 비유가 신약성경에서 사용될 때의 의미는 '선한 마음에서 선한 것이 나오고 악한 마음에서는 악한 것이 나옴이 마땅하다'는 것이다(Moo, Martin). 따라서 야고보는 본 비유를 통하여 모든 나무가 자신의 특성에 맞게 열매를 맺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같이 짠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 야고보는 본문에서 11절의 질문으로 돌아가 11,12절의 수사학적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앞서 언급한 이중성의 부당함 즉 한 샘에서 두 종류의 물이 나올 수 없고 한 나무가 다른 종류의 열매를 맺을 수 없음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결국 짠 물은 짠 물일 뿐이라는 일관된 부정적 견해 즉, 혀의 악함을 드러내어 강조하고 있다(Tasker, Moo, Martin).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는 이유는 그 근원에 있어 나무와 열매의 비유처럼,짠 물이 단 물의 근원일 수없기 때문이다(Burdick). 그러므로 선한 사람의 입에서 선한 말이 나오고 악한 사람의 입에서는 악한 말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3:13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 본절은 '티스'(* , '누구')로 시작하면서 새로운 문단을 소개한다(13-18절, Adamson). '지혜'애 해당하는 헬라어 '소포스'(* )는 유대인들이 교사, 서기관, 랍비를 가리킬 때 사용한 전문용어였으며 '총명'의 헬라어 '에피스테몬'(* )도 특별한 지식이나 훈련을 받은 전문인을 가리킨다(Moo, Tasker, Burdick, Robertson). 이러한 '지혜와 총명'은 1절에서 언급한 '선생이 되려하는 자들'을 암시한다. 한편 '지혜의 온유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프라위테티 소피아스'(* )는 문자적으로 '지혜로부터 나오는 온유함으로'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지혜'는 헬라적 지혜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하는 실제적인 히브리적 개념의 지혜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Adamson). 또한 '온유함'은 약함이나 체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포괄적인 포용성으로 성령의 인도함 가운데 성취될 수 있는 부드러움을 가리킨다(갈 5:22,23, Burdick). 야고보는 본절에서 선행과 온유의 근원을 믿음과 동일하게 취급되는 지혜로 보면서(Tasker, Burdick) 선생이 되려는 자들에게 선생을 영예와 지위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삼지말고 참된 선생으로서 하나님을 아는 지혜에서 비롯된 온유함으로 모든 사람에게 선행을 행해야 함을 권면한다.
=====3:14
그러나 너희 미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 '젤론'(* , '시기')은 신약성경에서 긍정적으로도(요2:17),부정적으로도 사용된다(행 5:17, Robertson, Moo). 본절에 사용된 '젤론'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이기적인 열정을 의미한다(Mayor). 또한 '다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리데이안'(* )은 '이기적인 야망'의 의미로 자기나 자기편의 특권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태도를 가리킨다(Moo, Burdick).이것으로 인해서 '당파심', '불화'가 일어나기에 바울은 '당파심'이나 '불화'의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였다(고전3:3; 고후 12:20; 갈 5:20, Martin, Moo, Dibelius-Greeven, Robertson). 당시 본서의 수신자들중에는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과 열정 그리고 야망에 빠져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편을 만들고 당(黨)을 지어 홀란스럽게 만들며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자들이 있었다(Burdick). 그래서 야고보는 이런 자들을 향해 이기적인 욕망과 야망에 빠지지 말고 진리를 거스려 교만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3: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 본절은 앞절에서 언급한 내용인 이기적 욕망과 야망에 사로잡힌 '지혜'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다(Burdick). 즉 그것은 참된 지혜의 근본이신(잠 2:6)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지혜가 아니다(Martin, Moo).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지혜는 세가지 특성을 지닌다.
세상적이요 - 이것은 하늘과 비교하여 부정적인 의미의 땅을 지칭하는 표현으로(Moo, Martin, 고전 15:40; 고후 5:1)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인정하기보다는 세상의 제한된 사고와 견해로 평가하는 지혜를 나타낸다. 이러한 지혜는 세상의 인침을 받은 일련의 모든 활동과 동일한 의미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전 1:20;2:5,6, Adamson, Martin).
정욕적이요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쉬키케'(* )는 '영적'인 것과 비교되는 '육신적'인 것을 의미한다(Moo,Martin, Adamson, 고전 2:14; 15:44,46).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되어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한 자들 즉 중생하지 못한 자들의 특성 이다(Burdick).
마귀적이니 - 이것은 참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기인하지만(잠 2:6) 이기적인 욕망과 야망에 사로잡혀 중생하지 못한자들이 소유하는 지혜는 마귀에 의해서 그 행동과 생각을 지배받고 선동됨을 나타낸다(Martin, Moo, Adamson).
=====3:16
개역성경에는 '가르'(* ,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본절이 이기적인 욕망과 야망에 사로잡힌 거짓된 지혜의 특성을 정의한 것(15절)에 대한 근거임을 시사한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 '요란'을 뜻하는 헬라어 '아카타스타시아'(* )는 '무질서함'(고전 14:33)을 나타내며 일반적으로 무정부 상태와 정치적인 소동을 연상케 하는 단어다(Robertson,Burdick). 또한 '악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울론'(* )은 요 5:39의 '아가다'(* , '선함')와 반대 개념으로 하나님과는 전혀가까워질 수 없는 악한 행위를 나타낸다. '시기'와 '다툼' 즉 이기적인 욕망과 열정 그리고 야망은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영적인 생명과 사업을 파괴시키는 무질서와 악한 행위만 생산할 뿐이다(Burdick). 그러기에 그러한 것을 유발시키는 거짓된 지혜는 세상적이고 정욕적이며 마귀적인 것이다(15절).
=====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 본절은 앞서 언급된 거짓 지혜와 대조되는 참된 지혜 즉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지혜의 특성에 대한 진술이다.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지혜는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실천적인 것이다.
성결하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그네'(* )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지혜의 기본적 특성으로 성적인 순결의 의미보다는 모든 악한 태도나 동기가 없음을 의미하며 '거짓된 지혜'의 이기적인 동기와 대조를 이룬다(Robertson,Burdick).
화평하고(* , 에이레니케) - 이는 '평화를 사랑함'이나 '평화를 가져옴'을 의미한다(히 12:11). 이것 역시 독한 시기와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위로 난 지혜는 모든 이에게 화평을 가져다준다(Tasker).
관용하고 - 이로 번역된 헬라어 '에피에이케스'(* )는 주로 왕으로서의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로 죄인에 대해 단호하게 징벌하실 수 있음에도 블구하고 용서하시고 인내하시는 온유와 자비를 나타낸다.
양순하며 - 이의 헬라어 '유페이데스'(* )는 '유'(* , '잘','좋게')와 '페이도마이(* , '순종하다')의 합성어로 '잘 순종 하는'이나 '유순한'을 의미한다. 이것은 교만하여 진리를 대적하는 것과(14절) 대조되는 것으로 위로 난 지혜는 하나님께 잘 순응하는 성품을 소유케 한다.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 '긍휼'과 '선한 열매'는 상관 관계를 갖는다. '긍휼'은 가난하고 곤경에 처한 자들을 실제로 도와 주는 마음 자새로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며 하나님의 정죄 아래에 있는 자이다(2:13). 이러한 긍휼을 드러낼 때 그 결과로 선한 열매를 맺게된다(마 7:17,18, Martin, Burdick).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 거짓된 지혜의 당을 만들고 구별하며 자기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과는 달리 위로 난 지혜는 구별이나 위선이 없는 공평함과 신실함이 가득하다.
=====3:18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 본문은 '위로 난 지혜'에 대한 결론이다. '의의 열매'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르포스 디카이오쉬네스'(* )는 '의로 이루어진 열매'를 뜻한다(Laws, Ropes). '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든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Moo) '화평'과 긴밀한 상관관계를 지닌다(시 85:10;사 32:17, Tasker).이러한 의는 이기적인 욕망과 야망에서 비롯된 무질서와 악한 행위에서는 생겨날 수 없으며 오직 화평 가운데서 맺어질 수 있는 열매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인 화평을 소유하고 닮은 자녀이기에 화평을 이루어 '의'를 이루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마 5:9).
본서는 성도들의 삶을 위한 일련의 권고와 훈계들로 가득차 있다. 옴니버스(omnibus)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야고보의 서신들에서 논리성을 찾는다는 것이 무리라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록 그의 서신이 바울의 서신들에서 발견되는 논리적 정연성이 결여된 듯이 보일지라도 '복음의 실천'이라는 주제 아래 특이한 방법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본장은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본서에서 발견되는 주제의 진행과정과 구조적 특징에 초점을 맞추어 보기로 하자.
(1) 주제의 진행 과정. 야고보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당시 교회 안에서 나타나는 여러가지 문제들의 원인이 '영적인 미성숙'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본 서신을 읽다 보면 '온전'이라는 단어를 자주 접하게 되는데,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영적인 미성숙'에 대칭되는 개념으로'성숙'을 의미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그의 서신을 기록하면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했다. 그가 말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 첫째로, 그는 시련속에서 인내하는 사람이고(1:2-5) 둘째로, 그는 사회적인 삶과 고백이 일치하는 사람이며(1:27) 셋째로, 그 믿음이 그의 삶 가운데 역동적으로 나타나는 사람이다(2:14-26). 이것이 1,2장에서 언급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었다. 본장에서 야고보는 보다 실제적인 예를 통하여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러한 면에 있어서 본장과 다음에 살펴볼 4, 5장은 1,2장의 선언에 대한 적용이라고 할 수 있다.
(2) 구조적 특징. 어떤 학자들은 본서의 내용과 문학적 양식 관계(文學的 樣式關係)를 구약의 지혜 문학(知慧文學:잠언, 전도서, 욥기, 시편)과 비교한다. 지혜 문학은 구약 안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지혜 문학을 제외한 구약의 다른 책들은 신앙 고백적인 입장에서 쓰여진 책들이다. 즉 이스라엘 공동체의 독특한 종교적, 역사적 체험을 통해서 형성되고 전승되어 내려온 신앙적 확신을 토대로 기록된 것이다. 이에 비해 지혜 문학은 상대적으로 인간의 이성과 관찰, 즉 인간의 지적 활동에 그 출발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혜 문학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신앙적 확신이나 종교적인 가르침보다는 이성적인 지적 활동에 의하여 삶의 여러 가지 국면에 대한 해답을 시도하려고 한다. 그러나 지혜 문학도 그 종착점에 있어서는 이스라엘의 신앙적 입장과 만나게 된다. 잠언 9:10에서는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한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하여 바로 지혜 문학과 이스라엘 신앙적 입장과의 만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지혜의 의미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혜는 단순한 세상적 경험으로 채워져서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참지혜는 수평적(水平적)이라기보다는 수직적(垂直的)이다. 따라서 지혜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 비록 그것이 현세적이며 일상적인 이야기를 다루지만, 그 의도는 이러한 점에 있어 본서는 지혜 문학과 맥(脈)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지혜 문학의 또다른 특징 가운데 하나는 개인적이라는 점이다. 구약의 지혜 문학은 전이스라엘의 소망이 아니라 한 개인의 생활 속에서 믿음이 어떻게 열매를 맺는가에 강조점을 둔다. 여기서도 우리는 지혜 문학과 본서의 유사성을 발견한다.
(3) 내용 분석.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야고보는 본장부터 5장까지 1,2장에서의 선언, 곧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삶 속에서 자신의 믿음을 나타내야 한다는 말씀에 대한 적용을 다루고 있다. 본장은 그 중에서 두 가지 적용점을 제시한다. 그것은 '말'과 '지혜'이다. 이 두가지는 교회 공동체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갈등의 원인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보아야 할 것은 지혜이다. 야고보가 말하는 지혜란 무엇인가 ? 이미 언급한 것처럼 본서에서 지혜는 말씀의 적용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지혜와 지식은 다르다. 지식은 인간이 단지 어떠한 사실에 대하여 인지하는 것을 말하지만, 지혜는 그 지식을 삶 속에 적용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따라서 야고보가 본장에서 말하는 지혜란 적어도 말씀의 적용이라고 볼 수 있다.
본장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단락인 1-12절에서 야고보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혀를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둘째 단락인 13-18절에서는 참된 지혜에 대해서 언급한다.
1. 혀의 올바른 사용(3:1-12)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삶일까 ? 전장에서 야고보는 자신의 믿음을 삶 가운데 실천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제 본장에서 야고보는 그 믿음을 삶 가운데 적용하는 몇 가지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 가운데 하나는 혀의 올바른 사용이다. 야고보가 본 서신을 기록할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혀 때문에 심각한 문제들에 봉착(逢着)하게 되었다. 그래서 야고보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내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1:19,20)고 말했으며 더 나아가 그는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1:26)고 말하였다.
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들 중에 가장 영향력 있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이 입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고, 기도를 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입을 가지고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험담을 하거나 타인의 마음속에 심한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어떻게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올 수 있겠는가(3절) ?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샘이 한 구멍에서 단 물과 쓴 물을 낼 수 없듯이, 그리스도인들은 한 입으로 서로 모순된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야고보의 외침이다. 따라서 혀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야고보는 본문에서 혀의 특성과 영향력(3-5절), 혀를 제어하지 못할 때 오는 결과(6-8절), 그리고 혀의 불일치(9-12절)에 대해서 언급함으로써 혀를 올바르게 사용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본문을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
| 혀 ( 1 - 12 절) |
+-----------+-------------------------+--------------------------+-------------+
|주제의 제시| 혀의 영향력 | 혀를 지키지 못할 때 오는 | 혀의 불일치 |
| (1,2절) | (3-5절) | 결과 ( 6-8절 ) | (9-12절) |
+-----------+-----------+-------------+------------+-------------+-------------+
|성숙한 그리| 예 1 | 예 2 | 예 1 | 예 2 |이것이 마땅치|
|스도인은 말+-----------+-------------+------------+-------------+아니하니라 |
|의 실수가 | 재갈 | 키 | 작은 불 |쉬지 않는 악,| |
|없다 | | | |죽이는 독 | |
+-----------+-----------+-------------+------------+-------------+-------------+
(1) 주제의 제시(1-2절). 지금까지 일관되게 '믿음과 행함'이라는 주제를 다루어 온 야고보는 본문에 들어와서 선생의 책임에 대해서 언급을 한다. 물론 이것도 '복음'의 '실천'이라는 그의 일관된 주제의 흐름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선생의 책임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찾기가 어렵다. 아마도 야고보는 선생됨과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 이라는 두 가지 문제를 하나의 고리로 묶어서 해결하려 했던 것 같다.
(가) "내 형제들아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1절). 유대인들은 높은 지위와 권력을 손에 넣는 것만큼 선생이 되고자 했다. 아마도 그것이 선생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존경 때문이었던 것 같다. 탈무드에 "자기 부모와 랍비가 물에 빠졌을 때 랍비를 먼저 구하라"고 기록된 것으로도 랍비에 대한 유대인들의 존경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이 말하는 선생은 랍비는 아닐지라도 랍비가 가졌던 권위를 그대로 누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본문에서 말하는 '선생'은 '우리가 그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랍비와 같은 공식적인 교사들이라기보다는 비공식적인 교사들이었다.
유대인들은 가르치는 자를 매우 선호하였다. 그래서 낯선 자들에게도 그에게 배울 것이 있으면 가르칠 기회를 제공할 정도였다. 바울도 방문자들에게 제공되었던 이러한 혜택 때문에 여러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담대히 증거할 수 있었다. 문제는 가르칠 것이 없으면서도 선생이 되려는 사람들에게 있었다. 그래서 야고보는 선생이 받을 심판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선생됨의 막중함을 새롭게 일깨운다.
(나)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2절). 이제 야고보는 선생의 역할과 그 책임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그가 본래 말하고자 하였던 중심 주제인 온전한 사람으로 넘어간다. 온전에 대해선 이미 1장에서 언급하였으므로 그것이 성숙을 의미한다는 점만 밝혀 둔다. 본장에서 야고보가 말하는 온전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만일 스스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한다면 말에 실수가 없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2) 혀의 영향력(3-5절). 야고보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비유(比喩)를 사용하여 혀의 영향력에 대해서 설명한다.
(가) 재갈(3절). 어떤 사람들은 재갈에 대한 비유가 적절치 못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혀는 재갈과 달리 온 몸의 움직임을 조절하는 기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록 혀가 몸을 통제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혀로 인하여 그 사람의 인격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재갈의 비유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갖는다. 야고보는 재갈이 비록 작지만 큰 말을 움직이게 하듯이 세치밖에 안 되는 혀지만 그 영향력은 화자(話者)의 인격, 나아가 삶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는 엄청난 것이라는 사실을 이 예화를 통해서 보여준다.
(나) 키(4절). 큰 광풍에 비교할 때 배의 키는 상대적으로 작게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키가 없다면 배는 바다 가운데서 표류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키는 배를 움직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사람에게 있어선 혀가 배의 키와 같은 역할을 한다. 망망 대해(茫茫大海)에서 작은 키가 배의 항로를 결정하듯 혀는 그 사람의 일생을 바꿀 수가 있다. 일반적으로 그 사람의 말이 그의 일생을 결정한다고 한다. 그래서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보다 긍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향유(享有)한다고 한다.
적극적인 사고 방식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로 "나는 할 수 있다"라는 표현이 있다. 비록 그것이 신앙(信仰)은 아니지만 이러한 신념(信念)이 한 개인의 삶에 유익을 준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랜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을 목전에 두게 되었을 때, 모세는 각 지파에서 한 명씩을 뽑아서 가나안 땅을 40일간 탐지하게 하였다. 40일 후 정탐꾼들이 돌아와서 한 보고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좌절케 했다. 그때 여호수아와 갈렙이 분연히 일어나 낙담에 빠져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안 된다. 못 한다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곳에 보낸 것이 아니냐 만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능히 우리가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으리라'(민14:6-8).어떤 사람들이 후에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차지했는가 ? 불가능 속에서 가능을 바라본
여호수아와 갈렙이었다.
또한 키는 사공의 뜻대로 조정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혀의 영향력이 크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의 뜻에 의해서 조절될 수 있다. 마치 큰 말을 재갈로 묶어서 다루듯이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혀를 하나님의 뜻대로 제어해야 한다는 것이 야고보의 가르침이다.
(다) 불(5절). 어떤 사람은 5절을 6절과 연결지어 해석하려고 하는데 5절은 6절과 독립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야고보는 5절에서 '이와 같이 혀도'라는 말로 앞에서 열거한 두 예화의 뒤를 이어 계속해서 세번째 예화를 열거한다. 작은 불이 많은 나무를 태우는 것처럼 혀의 영향력은 많은 나무들을 삽시간에 태울 정도로 크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혀를 조심스럽게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3) 혀를 지키지 못할 때 오는 결과(6-8절). 야고보는 혀를 지키지 못할 때 오는 결과를 두 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가) 불(6절).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게 제시되어 왔다. 실제로 본절의 내용 가운데 '불의(不義)의 세계'를 빼도 의미상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불의의 세계'는 왜 이 부분에 삽입되었는가 ? 그리고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 RSV 는 "And the tongue is a fire. The tongue is an unrighteous world among our members, staining the whole body, setting on firethe cycle of nature, and set on fire by hell"이라고 함으로써 '혀는 불이요'를 하나의 완전한 문장으로 보고 '불의의 세계'를 뒤와 연결시켜서 해석하였다. 반면에NIV는 "The tongue also is a world of evil among the parts of the body. It currupts the whole person, sets the whole course of his life on fire, and is itself set on fire by hell"이라고 함으로써 '혀는 불이요'와 '불의의 세계'를 동격으로 해석하였다. 본절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구두점을 어디에 붙이는 것이 더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전후 문맥상 NIV의 해석이 더 보편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혀는 불이며 또한 불의의 세계이다. 혀는 전인격을 부패시키며, 그의 삶의 행로를 불사른다. 그래서 잠언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잠 18:21).
(나) 쉬지 않는 악과 죽이는 독(7-8절). 야고보는 혀가 얼마나 다루기 어려운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짐승과 새 그리고 해물과 같은 것도 사람에 의해서 길들여지지만 혀는 그렇지 못하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본절에 사용된 '길들이다'(다마조)는 말은 '길들이다'보다는 '복종시키다'가 더 적절한 뜻이다. 이 단어는 창세기 1:28에서 인간이 동물을 '다스린다'는 의미로 쓰였으며, 또한 마가복음 5:4에서 귀신들을 '제어하다'의 의미로 쓰여졌다.
길들여지지 않는 혀는 쉬지 아니하는 악이다. '쉬지 아니하는'(아카타스타톤)이라는 말은 혀의 불안정성(不安定性)을 나타낸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혀는 올바로 다스려지지 아니하면 파괴적인 결과를 낳고야 만다. 그래서 칼빈(Calvin)은 혀의 이러한 특성에 대해서 말하기를 "혀보다 더 넘어지기 쉽고 위험한 것은 없다"라고 하였다.
길들여지지 않는 혀는 또한 죽이는 독(毒)이 가득한 것처럼 위험하다. 이것은 독으로 상대를 해치는 짐승을 암시하는 것으로 길들여지지 않은 혀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표현이다.
야고보가 이렇게 혀의 길들여지지 않는 점을 부각시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타락한 사람의 본성으로는 혀를 길들일 수 없음을 강조함으로써 오직 중생한 사람만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혀를 굴복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처음 그가 제기한 문제인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과도 연결된다. 즉 교회 안에서 야기되는 많은 문제들 가운데 특히 혀 때문에 발생하는 것들을 염두에 두고,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영적인 미성숙'에 기인한 것이므로 그리스도인 자신들의 부족함을 돌아보게 하기 위하여 이 이야기를 전개한 것이다.
(4) 혀의 불일치(9-12절). 어떤 사람들은 이 부분이 혀의 긍정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는데 전후 문맥상 그것은 별로 타당성을 갖지 못한다. 이 부분은 하나의 역설(paradox)이다. 즉 그는 변덕스러운 혀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어떻게 한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함께 날 수가 있겠는가 ?'라고 반문한다. 거듭난 성도, 성숙한 그리스도인에게 그가 고백하는 믿음과 그의 삶에 있어서의 행동의 불일치가 어울리지 않듯이 혀의 불일치는 있을 수가 없다. 무화과나무는 무화과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 만일 무화과나무를 심었는데 거기서 감람 열매가 맺혔다면 그 나무를 아무리 무화과 나무라고 생각했다 할지라도 그 나무는 감람나무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스스로가 아무리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또 입으로 '주여 주여'하며 많은 능력을 행한다고 할지라도 그 입술의 열매가 없으면 그것은 스스로의 착각이라는 엄중한 경고가 본 단락의 내용 속에 깔려 있다(마 7:21).
2. 두 지혜(3:13-18)
본서는 외형상 단편적인 글들의 모음집처럼 보인다. 하지만 본서를 주의깊게 읽어 내려가다 보면 하나의 주제 아래 치밀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본 단락에서 말하는 '지혜'는 앞에서 언급된 '혀'와 상관없는 것이 아니다. 표현 방식이 다를 뿐이지 두 이야기는 모두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이라는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유형은 다르나 의미가 같은 이야기들을 반복적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의 지혜'와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과 '영적으로 성숙지 못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영적으로 미성숙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선생이 되기를 즐겨하는 자들은 세속적인 지혜를 따라 행하는 자들로 끊임없이 자신의 정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시기와 다툼 그리고 거짓을 일삼는다. 하지만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따라 성숙한 삶의 열매들인 성결, 화평, 관용, 양순, 긍휼, 선한 열매, 편벽과 거짓 없음 같은 것들을 맺는다.
본문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 본문의 내용을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
| 두 지혜 (13-18절) |
+-------------+-------------------------------+--------------------------------+
| 문제 제기 | 세속적인 지혜 | 위로부터 난 지혜 |
| (13절) | ( 14-16절 ) | ( 17,18절 ) |
+-------------+----------------+--------------+---------------------+----------+
| | 성 격 | 결 과 | 성 격 | 결 과 |
| +----------------+--------------+---------------------+----------+
| 지혜 있는 |(1) 시기 | 요란과 | (1) 온유 | |
| |(2) 다툼 | | (2) 성결 | 화 평 |
| 자가 누구냐?|(3) 자랑 | 모든 | (3) 화평 | . |
| |(4) 거짓 | | (4) 관용 | |
| | | 악한 일 |(5) 긍휼과 선한 열매 | 의 |
| | | |(6) 편벽과 거짓 없음 | |
+-------------+----------------+--------------+---------------------+----------+
(1) 문제 제기(13절).
본문에서 야고보는 수사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사람이 아무리 지혜가 많아도 그것이 삶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지혜는 무의미한 것이다. 지혜는 지식과 다르다. 지식이 어떠한 사실에 대해서 인지하는 것이라면 지혜는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을 그의 삶 가운데 적용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어느 학자는 지혜를 '지식을 바르게 사용하는 인격과 기술의 총체이다'라고 정의하였다. 이렇듯 지혜는 그의 삶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야고보 당시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도 그의 삶 가운데 자신의 지혜를 나타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야고보는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고 하여 지혜가 온유함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온유'( ,프라위테티)란 우유 부단(優柔不斷)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헬라어로 온유는 '사나운 짐승이 길들여지는 것'을 의미한다. 유약한 것이 온유가 아니가. 참된 온유는 주님의 사람으로 길들여지는 것이다. 참으로 지혜있는 자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최선을 다해 그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려고 애쓰는 자이다.
(2) 세속적인 지혜(14-16절).
이제 야고보는 온유함으로 나타나는 지혜가 아닌 세속적인 지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이 지혜의 특징은 무엇인가? 본문에서 야고보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세상적인 지혜의 특징으로 들었다.
첫째로, 독한 시기이다.시기(猜忌)는 질투라기 보다는 열심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따라서 '독한 시기'란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구별되는 '그릇된 열심'을 의미한다.
세상적 지혜의 두번째 특징은 다툼이다. 이것은 시기의 결과로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다.
다툼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자기를 드러내려는 데 있다. 이것이 세상적 지혜의 세번째 특징이다.
끝으로 세상적 지혜의 네번째 특징은 진리를 거스려 행하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를 자랑하다 보면 과장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거짓이 동반된다. 이러한 것들이 세상적인 지혜의 특징이며 그 결과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다.
(3) 위로부터 난 지혜(17,18절).
야고보는 여기서 참된 지혜의 특징들을 세세히 열거하고 있다. 참된 지혜의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로, 온유이다. '온유'는 전술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길들여졌다'는 의미이다.
둘째로 성결이다. '성결'(하그네)이란 '혼합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참된 지혜를 소유한 사람들은 성결한 삶,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산다.
셋째로, 화평이다. 화평이란 옳바른 관계를 의미한다. 참된 지혜를 소유한 사람은 하나님과 또한 사람들과 옳바른 관계를 맺고 산다.
넷째로, 관용이다. '관용'(에피에이케스)이란 '정당한', '공정한'의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대인 관계에 적용되는 단어로서 '타인을 자기와 동등하게 대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다섯째로, 긍휼과 선한 열매이다. '긍휼'(엘레우스)은 '실제적인 도움'을 의미한다. 그리고 '선한 열매'( ,카르폰 아가돈)은 긍휼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여섯째로, 편벽(偏僻)과 거짓 없음이다. '편벽이 없다'는 말은 '흔들림이 없다'는 의미이다. 이 세상속에 속한 지혜는 상대적이기 때문에 시시각각으로 흔들린다. 하지만 하늘의 지혜는 절대적이기에 흔들림이 없다. 세상의 지혜는 편벽되기에 그것을 감추려고 거짓을 동원하지만 위로부터 난 지혜는 거짓이 없다.
위로부터 난 지혜의 결과는 무엇인가 ? 화평과 의이다. 이것은 참된 지혜의 열매로 16절의 세상적인 지혜의 열매와 대조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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