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 '형제 사랑'은 이웃 사랑을 강조하는 성결 법전과 연결되는 것으로(레 19:18) 믿음의 공동체 내에서 형제와 자매를 연결하여 연대감을 갖도록 하는것이다(22,23절; 2:11,12,17; 3:1,12; 10:19).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지속적으로 지녀야 할 독특한 특징이다(Lane). 저자는 당시의 수신자들 사이에 신앙이 약해진 자들을 결속시키고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적으로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권면하고있다(Bruce, Hewitt).
=====13: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 저자는 앞절에서 권면한 '형제 사랑'을 더 확대하여'손님 대접'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손님 대접'에 관한 권면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을 반영한 것이다(마 25:35).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으로 인해서 복음 전도 여행과 그 여행을 위한 숙식을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손님을 대접하는것은 복음 전도 사역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다(행 21:4,7,16,17,Thuren, Morris, Hewitt). 그러기에 손님 대접에 대한 권면은 초기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메시지였으며 그들이 지켜야 할 의무였다(딤전 3:2; 딛 1:8; 벧전 4:8,9, Bruce,Lane).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 본문은 아브라함의 일을암시한다. 아브라함이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세 사람의 손님을 영접하고 대접하였을 때 세 손님은 사라에게 이삭의 출생에 대해 예언하였다(창 18:1-21). 본문은손님을 대접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인이 행해야 하는 덕목임을 시사한다.
=====13:3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 본문에서 저자는 '형제 사랑'에서(1절) '손님 대접'으로(2절), '손님대접'에서 '갇힌 자와 학대받는 자에 대한 대접'으로 확대하고 있다. 당시 '갇힌 자들'은 심한 대우를 받아서 음식이나 의복에 대해 가족이나 친구들의 도음을 받아야만했다. 만약 가족이나 친구들의 직접적인 도움이 없다면 그들은 감옥에서 굶주려 죽어야만 했다.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이 갇힌 자들을 도와주면 그들 역시 갇힌 자와 동일한대우를 받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자신이 갇힌 것처럼 생각하여 도와주라고한다(고전 12:26, Morris, Bruce). 한편 '학대받는 자'는 신앙 때문에 악한 대우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11:36,37, Lane).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신앙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소외된 자들과 연대감을 가지고 자신의 몸이 학대받는 것처럼 생각하여 그들과 교제를 나누어야한다(10:32-34; 11:36-38, Filson).
=====13:4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 '모든 사람'의 헬라어 '엔 파신'(* )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있다(Morris, Hewitt). (1) 중성으로 이해하면 단순히 성적인 순결 뿐만 아니라 모든형편 속에서 결혼을 중시하고 귀하게 여겨야 함을 시사한다. (2) 남성으로 이해하면모든 남자들이 결혼을 귀하게 여겨야 함을 시사한다. 두 가지 해석 중 전자가 더 타당하다고 그리스도인들이 성적인 범죄를 행하지 아니하는 것은 단순히 남자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며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결혼 생활 속에서 성적인 범죄를 행하지 아니하고 결혼을 귀하게 여겨야하기 때문이다. 한편 '침소'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코이테'(* )는 성적인 정결(淨潔)과 함께 사용된 용어로 성생활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다(Morris, Lane). 성적인 범죄를 통해 침소를 더럽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결혼을 욕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행위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신다(17절). 저자는 성적인 죄를 범하는 자에 대해 두 부류로 묘사한다.
(1) 음행하는 자들 - 이것은 결혼 외에 다른 방법으로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포함하여 모든 성적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을 가리킨다.
(2)간음하는 자들 - 이것은 결혼시에 표현한 서원에 불충실하여 이를 어기며 성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을 가리킨다.이러한 두 부류의 행위는 불법적인 성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반드시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Bruce, Lane, Hughes).
=====13:5,6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 돈을 사랑치 말라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주 강조된 금지 명령이다. 돈에 대한 탐욕은 타인의 권리를 생각지 아니하고 오직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게 할 뿐 아니라 마음에 두 주인을 섬기게 하여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고 범죄하게 만든다(마6:24; 눅 16:13; 딤전 6:10, Bruce, Thuren). 그 결과 우상 숭배의 결과를 초래하기때문에 저자는 본절에서 현재 주어진 여건과 물질에 대해 만족할 것을 권면한다. 저자는 현재 주어진 것에 대해 만족해야 할 이유 두 가지를 제시한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 본문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인용문은 없으며 단지 필로(Philo)가 동일한 인용문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On the Confusion of Tongues, p.166). 하지만 저자의 인용문과 필로의 인용문이 동일하다고 해서 저자가 필로의 것을인용했다고(Moffatt, Spicq) 생각할 이유는 없으며 도리어 다른 헬라어 역본에서 인용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Morris, Lane, Michel, Delitzsch, Riggenbach).그리스도인들이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현재 주어진 여건에 만족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지켜주시고 함께 하시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창 28:15; 신31:6; 수 1:5; 사 41:17).
모든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지켜주신다는 사실은 바울과 같이 현재에 주어진 환경에 자족하게 한다(빌 4:11-13)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 본문은 시 118:6의 인용으로 앞서 언급된 인용문과 연결되어 '약속과 응답'의 형태를 취한다(Michel). 하나님께서 돕는 자로서 그리스도인들과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시편 기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돈과죽음의 위협으로 부터 자유로와지며 담대해질 수 있다(2:14,15, Lane). 한편 '사람이내게 어찌하리요'는 부정을 유도하는 수사학적 질문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를 대항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롬 8:31, Hewitt, Morris).
=====13: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 '인도하는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헤구메논'(* )은 본장에서 본절을 제외하고 두 번 더 나온다(17,24절). 17절과 24절은 현재의 지도자들을 가리키는반면에 본절의 '톤 해구메논'은 신앙을 지키다가 죽은 지도자들을 가리킨다(Hewitt,Bruce). '톤 헤구메논'이 가리키는 인물에 대해 혹자는 '장로'라고 추측하며(Morris)혹자는 '주의 제자'라고 주장하나(2:3, Hewitt) 명확하지 않다. 한편 '인도하는 자'의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공동체 내에서나 선교 사역 때에 설교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행 4:29,31; 8:25; 13:46, 빌1:14, Michel, Riggenbach) 지도자들이 청중에게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하여 구원하시는 종말론적 메시지를 전달하였음을 나타낸다(1:1,2).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던 지도자들을 기억하고 더불어 그들의 신앙을 본받아야한다.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 '종말'의 헬라어 '에크바신'(* )은 매일의 생활에 대한 결과를 나타내며(Hughes, Bruce)동시에 '죽음'에 대한 완곡한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Moffatt, Westcott). 그리스도인들은 지도자들이 수많은 고난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 신앙을 지키다가 심지어 죽기까지한 것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과거에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전하고 그 말씀에 의지하며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굳게 잡은 사실을 주의하여 살펴보고 따라야 한다.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 본문에 대한 해석은두가지이다. (1) 혹자는 본문이 이 세상의 지도자들은 죽고 사라질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변함이 없으심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Bruce, Morris). 이 견해에 따르면 본문은예수께서 '어제' 하나님께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5:7),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변호하시며, '영원토록'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간구하시고 계심을 나타낸다. (2) 혹자는 본절이 7절과 9절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Hewitt, Lane). 이 견해에 따르면 본절은 '어제' 과거의 지도자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그를 전파하였으며 '오늘' 수신자 공동체가 '어제' 전함을 받은하나님의 말씀을 이상한 가르침과(9절) 바꾸려고 하는 상태에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에의해서 주어진 구속이 '영원한' 것임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13: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 저자는 본문에서 수신자들에게 다른 교훈에 빠지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식물'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마신'(* )은 9:10에서 사용된 '먹는 것'과 동일한 단어로 이상한 교훈을 전하는자들은 이러한 식물을 통한 의식이나 규례에 의해서 온전하여지고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거짓된 여러 가지 다른 교훈은 엣세네파(Essenes)나 그와 비슷한 종파와 연관된 혼합주의적인 영지주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Bruce, Hughes). 그러나'식물'은 육체에 제한된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온전한 것을 이루실 때까지 허락된 예법에 블과한 것이었다(9:10). 그러기에 식물과 의식을 통해서는 전혀 어떠한 유익도 가져다 줄 수 없으며 온전히 깨끗게 할 수 없고 단지 외적인 것만을 정결케 할뿐양심을 정결케 할 수 없다(9:13,14).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유익과 풍성함은식물과 그에 따른 의식을 지킴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의 효능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2:9)과 기도를 통해서(4:16)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달된다. 그리스도인들은오직 은혜에 의해서만 온전하여질 수 있으며 거짓 가르침이 말하는 것처럼 식물이나그 의식에 의해서 온전해질 수 없으니 그 식물과 그에 따른 규례는 오직 그리스도의구속 사역이 도래할 때까지로 제한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13:10
우리에게 제단이 잇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 혹자는 '제단'의 헬라어 '뒤시아스테리온'(* )이 문자적인 희생 제단 자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나(Hewitt) 그것은'희생 제사'에 대한 환유(換喩)로(Bruce, Lane)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인 사역에 대해언급할 때 사용되었다(8:1-5; 9:11-14,24-26; 10:11,12). 이것은 은유적으로 영문 밖에서 당하신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암시한다(12절; 12:2, Spicq, Montefiore,W. Manson, Andriessen). 십자가상에서의 예수의 죽음은 구원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은혜를 유지하는 원천이 된다(Bruce). 그러기에 새 언약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은음식이나 그에 따른 급례에 의해서 거룩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의 희생 제사에 의해서 거룩해지며(12절; 9:14; 10:10,14) 그 제단은 레위기에 규정된 법을 따르는제사장들이나 유대인들은 전혀 참여할 수 없으며 맛볼 수 없는 것이었다(6:5, Kuss).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희생 제사는 구약에서 규정한 제사 규례나 정결 규례보다 훨씬우월한 것이며 온전케하는 것이다. 한편 혹자는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를 문자적으로 신약 시대의 성만찬과 연결지어 제단을 성만찬 식탁으로 해석한다(Schroger).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본절 내에 성만찬에 대한 어떠한 암시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볼 때 타당하지 않다.
=====13: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밖에서 불사름이니라 - 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은 희생 제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 갔으며(레 16:14,15) 희생 제물의 시체는 영문 밖에서 불살라 버렸다(레 16:27).한편 '영문 밖에서'라 함은 다음 절에서 언급될 그리스도의 고난의 장소를 암시한다.구약의 성소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예시하는 제단에서 먹을 권리를 갖고 있지 못하며 여전히 구약의 제의에 따라 사는 자들은 골고다에서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성취된 속죄 사역의 결과인 그리스도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수 없다(Lane).
=====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으니라 - 저자는 본절에서 '영문 밖에서' 희생 제물을 불살라 버린 것과(11절) 성문 밖에서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의 고난을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Lane).(1) 성문 밖에서의 예수의 죽음은 속죄일의 속죄제를 나타내는 것으로(J. Jeremias).예수의 고난이 대제사장적인 속죄 사역을 성취하기 위한 새로운 조건임을 시사한다(10:12). (2) 예수께서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신 것은 거룩한 영역으로부터 배제당하는 수치를 나타낸다. 그것은 산헤드린에 의해서 예수께서 정죄받으심은 물론 백성들에 의해 배척(排斥) 당하심과 급기야 처형 당하심을 시사한다. 한편 '거룩케하려고'에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아세'(* )는 '하나님을 위해 구별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에 의해서 드려진 제사가 제시하지 못했던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새로운 방법을 시사하는 것으로 오직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만 거룩해질 수 있음을 나타낸다.
=====13:13
그런즉 우리는...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 '영문 밖'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그것이 지상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천상적인 영역으로의 이동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Thompson). (2) 혹자는 그것이 유대교를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고주장한다(Hewitt, Morris, Bruce, Hughes, Westcott, Filson). 이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유대인들은 '영문'을 거룩한 것으로, '영문 밖'을 더럽고 부정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영문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은(12절)거룩한 영역에서 제외 되었으며 부정하고 부끄러운 것로 이해되었다(레 13:46; 민5:2-4; 신 23:11; 눅 6:22). 그러나 전에 거룩하던 영문은 부정하여졌고, 전에 부정하던 영문 밖은 거룩하여졌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영문에서 쫓겨나 영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이다(Bruce). 따라서 저자는 아직도 옛 언약과 유대교의 범주인 영문 안에 머물러 있지 말고 이제 새 언약과 그리스도가 계신 영문 밖으로 나아갈 것을권면하고 있다.
그 능욕을 지고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영문 밖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조건을 나타낸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능욕을 지는 일' 즉 유대교를 떠나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동일한 고난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 곧 십자가 상의 죽음은 이방인들에게 수치스러운 일이었으며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신 21:22,23; 갈 3:13,Hewitt, Morris). 그fl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기 위해서 그와 동일하게 수치와 치욕으로 이해된 십자가를 짐으로 그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제자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는 복음서의 제자도와 동일하다(마10:37,38; 막 8:34-38).
=====13:14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영문 밖에 나아가기 위해서 '능욕'을 기꺼이 받아야 하는 이유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생활하는 이 세상이나 유대교 안에는 영구한 하늘의 도성은 없으며 단지 일시적인 도성만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장차 올 도성은 사라질 도성이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경영하시는 터가 있는 도성(11:10,16) 곧 하늘의 도성이다. 그들은 하늘에 기록된 천국 시민이기 때문에 오직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고 이 세상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며 나그네와 같은 생활을 하게 된다.
=====13:15,16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맘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 '예수로말미암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 아우투'(* )는 문자적으로 '그로말미암아'라는 의미로 두 가지를 의미한다. (1)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찬미의 제사가옛 언약의 제사장들에 의해서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드려지는 것임을 의미한다. (2)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제사는 더 이상 옛 언약의 제사장들이 드렸던 동물 희생 제사가 아님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 의해 온전한 희생제사가 단번에 드려졌으므로 더 이상 속죄를 위한 동물 희생 제사를 필요로 하지 않기때문이다. 도리어 그리스도인들이 드려야 할 제사는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찬미하는 제사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찬미의 제사를 드린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희생 제사가 하나님께 온전하게 열납되었음을 시사한다(Hewitt). 한편 '항상'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드려지는 찬미의 제사가 지속적이어야 함을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끊이지 않고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을 계속적으로경험할 때 가능하며 하나님의 약속의 불변성을 확신할 때 이루어진다(Lane).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옅매니라 - 본문은 호 14:2(LXX)의 인용으로 '찬미의 제사'에 대한 설명이다. '입술의 열매'는 감사제와 감사 찬송시 사용하는 '말'에대한 셈어적인 표현이다(잠 10:31; 12:14; 13:2; 18:20). 하나님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제사는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고 드러내는 찬양으로서(LXX 시 49:23)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와 선함에 대한 응답이며 하나님과의 계약을 진실하게 이행할 수있도록 하는 조건이다(Lane, Morris, Bruce).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 저자는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이'찬미의 제사'뿐 아니라 사랑의 행위도 하나님께 드려야 함을 역설한다. '선을 행함'의 헬라어 '유포이이아스'(* )는 타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모든 친절한 행위를 가리키며, '서로 나눠 주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이노니아스'(* )는 돈이나 물건은 물론 타인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나누는 관용(寬容)을 가리킨다(Morris, Lane, J.Y.Campbell). 타인을 사랑하는 실제적인행위가 없는 찬미의 제사는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사랑의 행위가 동반되어야한다(Thuren).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의 행위를동반한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이유이다. 친절과 관용 그리고 찬미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새 언약하에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요구하시는 예배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 '말'로는 물론 '행함'으로 제사를 드려야한다. 하나님의 뜻은 이러한 제사를 통해서 성취되며, 하나님은 이러한 제사를 기쁜마음로 열납하신다(Lane).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 본절의 '인도하는 자'는 7절의'죽은 지도자'와는 달리 현재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인도하는 '지도자'들을 가리킨다.저자가 반복적으로 지도자들에 대해 복종할 것을 강조하는 것은(7,24절) 당시 배교의위험과 이해 관계에 직면하여 지도자들을 잘 따르지 아니하고 대적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2:1-4; 3:7-12; 5:11-6:12; 10:23-29; 12:12-17,25-29, Hewitt,Lane, Riggenbach).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 본문은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존경을 받고 복종함을 받는 근거이다. 그것은하나님께서 지도자들에게 부여하신 목회적 권위와 책임감이다. '경성하기를'의 헬라어'아그뤼프누신'(* )은 양떼들을 돌보기 위해 밤을 지새우는목자상을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단어로 신약성경에서 주로 종말론적인 '깨어 있음'을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막 13:33; 눅 21:36; 엡 6:18, Spicq, Bruce, Morris).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영혼 즉 그들의 영적 생활과 복리를 위해서(10:39, Morris,Bruce, Michel) 날마다 깨어 있어 돌보는 자들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존경과 순종을 받을 만한 권위가 있다. 한편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는 지도자들의 책임을 나타낸다. 참된 지도자들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책임 이행에 대한 답을 요구하실 때 응답해야만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어서 거짓 교사들과 같이 이상한 다른 가르침을 전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파하며 그리스도인을 돌보고양육한다.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히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지도자들을 섬기고 순종해야하는 이유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지도자에게 순종하는 것은 지도자들이 양떼들을 돌보기 위해서 경성(警醒)하는 것이 즐거움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의불순종과 고집으로 인해서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이행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근심스러운 일이 된다면 그 지도자의 인도함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전혀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Bruce, Hewitt, Morris).
=====13: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 1인칭 복수인 '우리'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우리'가 순수한 복수로 저자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Westcott, Kent). (2) 혹자는 '우리'가 서간체 복수로 저자 자신만을 의미한다고주장한다(Hewitt, Bruce).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Morris). 왜냐하면다음 절에서 1인칭 단수인 '내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저자는 지도자로서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 줄 것을 수신자들에게 부탁하고 있다.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 개역성경에는 '가르'(* ,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본문 즉저자가 가지고 있는 '선한 양심'이 수신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할 수 있는 근거가 됨을시사한다. '더럽혀진 양심'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되므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져야 한다(9:14). 저자가 본절에서 자신의 '선한 양심'에 대해 확신하는 것은 자신을 향한 타인의 비방에 대한 방어책으로(Morris, Lane, Hewitt) 저자 자신이 지도자로서 선한 행동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의무를 잘 수행하였음을 시사한다(Bruce).
=====13:19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를 위하여 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하노라 - 저자는본절에서 수신자들이 속한 공동체에 다시 방문할 수 있도록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한다.재방문을 위한 기도 요청은 저자와 수신자들간에 개인적으로 상당한 친분 관계가 있었으며(Hewitt, Lane) 또한 저자가 수신자 공동체를 방문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방문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저자의 투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Hewitt, Morris, Bruce). 왜냐하면 23절에서 디모데가 감옥에서 나오면 함께 방문할것이라고 함으로써 자신이 감옥에 투옥되지 않았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저자가 수신자 공동체에 방문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확실히 있으나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13:20,21
본문은 송영이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 본문은 사 63:11의 '백성과 양 무리의 목자를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를 인용한 것이다. 이사야 본문은 모세에 대한 진술이다. 저자는 모세에 대한 진술인 이사야 본문을 인용하여 미디안의 목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 부터 이끌어 낸 모세를 유형론적으로 해석하여 '양의 큰 목자'이신 예수께 적용하고 있다(Lane, Bruce). '큰'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메간'(* )은 본서에서 예수의 우월성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으며(4:14; 10:21) 모세와 예수의 비교 또한 새 언약의 중재자인 예수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저자의 독특한 논증 방법이었다(1:1-4; 2:1-4; 3:1-6; 8:1-6; 10:26-31;12:18-29). 저자는 예수께 '큰 목자'라는 칭호를 부여함으로 사 63:11에서 모세에게칭한 '양 무리의 목자'와 대조를 이루게하며 옛 언약의 중재자인 모세보다 새 언약의중재자인 예수께서 더 위대하심을 강조하고 있다.
영원한 언약의 피로 - 본문은 슥 9:11(LXX)의 영향을 받았다. '언약의 피'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언약의 희생 제사임을 시사하며(9:20; 출 24:8) '영원한'은 예수의 속죄 사역이 영원한 효력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1:8; 5:6,9; 6:20; 9:12,14,15;10:12,14). 예수의 사역과 희생은 영원한 언약을 이루는 근거가 되었으며 이러한 영원한 언약은 새 언약과 동일한것으로 옛 언약올 대신하였다. 본문은 다음에 언급될 예수의 부활과 연결된 것으로, 예수의 부활은 예수께서 자신의 희생으로 이루신 영원한언약을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셨으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통해서 영원히 살아계심을 나타낸다(9:20, Morris, Hewitt, Lane).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 본문은 본서 내에서 부활을 직접적으로 언급한유일한 구절이다. 예수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정하고 비준(批准)하신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을 통해서 이루어졌다(Michel, Cranfield, Thuren). 한편 '이끌어내신'의 헬라어 '아나가곤'(* )은 두 언약 즉 옛 언약과 새 언약하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나타낸다.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내신 하나님의 간섭은(출 6:7; 20:1,2; 레 19:36; 25:38; 26:13; 신 5:6; 사63:11-14) 죽은자로부터 예수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행위를 예표한다(Lane).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끝어 내심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새로운 언약 즉 영원한 언약을 맺으시는 근거가 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근거가 된다(21절, Cranfield,Thuren).
평강의 하나님이 - 이 칭호는 구약성경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인들이 만든 하나님의 칭호라고 볼 수 있으며(Lane) 하나님께서 평화의 근원이시며수여자이심을 시사한다. 또한 이것은 수신자 공동체 가운데 배교의 위험과 지도자와의불협화음이 있었음을 암시한다(Bruce, Morris, Hewitt). 그래서 저자는 송영에서 수신자 공동체에게 하나님께서 '평화의 하나님'이심을 상기시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위해 서로간의 불화를 억제하고 지도자에게 순복하여 평안을 이룰 것을 강조한다(17절, Spicq, Thuren, Morris, Bruce).
모든 선한 일에 너희들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 '모든 선한 일에'의 헬라어 '엔 판티아가도'(* )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윤리적인 선한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여 선한 윤리적인행위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Spicq). (2) 혹자는 선한 일을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한다(살후 2:17, Michel). (3)혹자는 선한 일을 '하나님의 선한 선물'로 해석한다(마 7:11; 눅 1:53; 갈 6:6; 약1:17, Lane, Morris).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문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저자는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수신자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은혜로 공급하여 주셔서 온전하게 함으로 하나님 자신의 뜻을 행할수 있도륵 하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본문은 앞서 언급된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와상호 보완적이다. '즐거운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며(12:28)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도록(15,16절) 부름을 받은 존재임을 시사한다.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중재자이시며 새 언약 공동체 내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중재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Lane,Morris).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륵 있을지어다 아멘 - '그에게'에 대해서 혹자는 문법적으로 '하나님'이나 '예수'와 모두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둘 다를 가리킬 수 있다고주장하나(Morris)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Bruce).왜냐하면 본문의 송영은 죽은 자로부터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응답이기 때문이다(Lane).
=====13:22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 '형제들아'와 '용납하라'는 말은 저자가 앞서 기술한 배교나 비그리스도인에대한 격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진술, 그리고 지도자와 수신자들 사이의 갈등에 대한훈계와 비교되어 부드럽고 애정이 서려 있다. 본문에서 저자는 이제까지 진술한 내용을 '권면의 말'이라고 정의함으로 자신이 이제까지 진술한 것이 책망보다는 격려차 위로에 기인한 것이었음을 밝히고 다시 한번 본서의 내용에 주목해 줄 것을 암시하고 있다. '권면의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투로구 테스 파라클레세오스'(* )는 행 13:15에 나오는 표현과 유사한 것으로'설교를' 지칭한다(Bruce, Morris, Lane). 한편 '간단히...썼느니라'가 가리키는 부분에 대해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13:18-25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Knox).(2) 혹자는 13장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R. Anderson). (3) 혹자는 본서 전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rris, bruce, Hewitt, Lane).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썼느니라'의 헬라어 '에페스테일라'(* )는 '편지를 썼다'라는 의미로 본 서신 전체를 가리키며, '간단히 썼다'는 것은유대 문서나 초기 그리스도인 문서에서 공손함을 나타내는 문학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Hewitt, Lane).
=====13:23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너희를 보리라 - 저자가 바울의 동역자였던 디모데를 '우리 형제'라고 것은 디모데가 수신자들에게 매우 잘 알려져 서로 교제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한편 '놓인 것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폴렐뤼메논'(* )은 완료 시상으로 이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사역의 임무를 부여받고 보냄을 받은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E.D. Jones). (2) 혹자는 감옥에서 풀려난 것을 가리킨다고주장한다(Hewitt, Lane, Morris).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아폴렐뤼메논'이 전자의 견해처럼 사용되었을 경우는 목적어를 동반하나 본절에서는 목적어를 동반하고 있지 않으며, 더욱이 '아폴렐뤼메논'이라는 단어는 흔히 감옥에서 풀려나는 경우에 사용되었기 때문이다(Brice, Morris). 그러나 디모데가 언제 어디에 있는 감옥에 갇혔었는지는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디모데가 감옥에서 풀려난 사실을 먼저 알고 전하면서 디모데가 속히 올 경우 함께 방문할것을 밝히고 있다.
=====13:24
너희를 인도하는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 저자는 본문에서 앞서 언급한것과 마찬가지로 '인도하는 자'와의 문안을 통해서 갈등 관계가 아니라 선한 관계를형성하여 그들에게 순복(順服)할 것을 암시한다(7,17절). 한편 '모든 성도'에 대해서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혹자는 본서의 수신자들이 속해 있는 도시 전체의 성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ane). (2) 혹자는 본서의 수신자들이 모이는 가정 교회의 성도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uce).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여 화평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화평을 이름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암시적으로 권면하고 있다.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의 헬라어 '호이 아포테스 이탈리아스'(* )는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혹자는 당시 이탈리아에 흩어져 사는 자들이 이탈리아 내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안한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picq). (2)혹자는 이탈리아 밖에 있는 사람이 이탈리아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안하거나 이탈리아가 고향인 자들이이탈리아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안한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uce). '호이 아포 테스 이탈리아스'는 이 두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가 어렵다(Morris, Bruce, Hewitt).
=====13:25
은혜가 너희 모든 사림에게 있을지어다 - '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 )는 비록 흔히 사용되던 인사법이라 할지라도 본서를 마감하는 종결 인사로서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저자가 본서에서 계속적으로 하나님께서 구속하시고 인도하시며 도와주시는 은혜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9절; 2:9; 4:16;12:15). 저자는 마지막 인사로 수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킴으로 배교(背敎)의 위험에 처해 있는 수신자들과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는 물론 지도자와 수신자들간의 갈등관계를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할 것을 암시하고 있다(Lane).
11장과 12장이 믿음과 소망에 대해 다루었다면 본장은 사랑의 실천 면을 다루고 있
다. 본장의 주제는 크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레 19:18;신
6:4,5)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예배의 모습과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은 자로서
행해야 할 바른 실천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본장을 통해서 하나님을 잃어버린 불신앙과 인간성 상실의 위기에 직면한 이
시대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과 진정한 형제애에 대해 배울 수 있다.이제 본장의 내용
을 이해하기 위해 본장에 나타난 신학적 논의와 구조적 특징 및 당시 성도들의 삶의
정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신학적 논의. 본장에 대한 신학적 논의는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된다. 하나는 본
장이 부록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이요, 또 하나는 본장의 마지막 인사가 바울의 것
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까) 전장까지의 문맥상의 연결을 볼 때, 본장이 부록의 성격을 띠고 있는 본문으
로 간주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본장은 논리상 앞장과의 명백한 연결어가 없이 갑작스럽게 돌입한다. 이로 인
해 본장은 어조와 주제에 있어서 앞장들과 사뭇 다르다.
둘째, 본장은 일반적인 훈계를 말하고 있을 뿐 본서에서 누누이 부각된 저자의 특별
한 관심을 담고 있지 않다.
이런 이유로 본장은 논리의 일관성과 형식 및 내용에 있어서 부록의 성격을 띠고 있
는 본문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본장은 전장의 28절 내용과 연결되고 있으며, 본서에
서 주로 사용되었던 모세 오경과 시편등의 구약적 어휘를 사용하고 있다(6,11절). 그
러므로 본장은 완전한 본 서신의 일부이다. 더욱이 본장은 교차 대칭 구조를 사용함으
로써 문학적 양식으로 기록된 앞의 장들과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다) 본서의 서두가 서신서의 형식을 갖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본 서신의 서두는
분실되었거나 삭제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주장은 본서를 억
지로 바울 서신의 형식에 꿰맞추려는 태도이다. 마카비서, 바나바서, 클레멘트서, 요
한일서에는 서신체 형식의 서두가 없다. 특히 본장은 앞장에서 볼 수 없는 저자와 독
자의 개인적 관계를 수록하고 있다.만약 본서가 12장이나 본장 17절에서 마감되었다
면, 이것은 편지의 형식이 아닌 논설문이나 단순한 교훈을 실은 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본장을 통해 저자는 주제 전개뿐만 아니라 실제 생활의 적용에도 관심을 표명
하고 있다. 즉 독자들의 신앙의 유익과 실천을 위한 권면과 마지막 인사말로 보아 본
서는 나름대로 서신서의 형식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본장에는 바울의 서신체, 특히 빌립보서에서 두드러진 표현이 부분적으로 나타
난다(16절; 빌 4:18/21절; 빌 4:20/23절; 빌 2:19,23,24). 이렇듯 본장이 전체적으로
바울의 문체 및 사상과 다르면서도 부분적으로 바울의 서신체와 유사한 사실이 결코
본서의 완전성을 의심할 수 있는 요소가 될 수는 없다.
(2) 구조적 특징. 본장에는 사랑의 주제를 언급하는 본문과 교차 대칭 구조를 갖는
본문이 나타나 있다.
(까) 사랑의 주제를 언급하는 본문. 본장은 진정한 이웃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으로 시작한다(1-6절). 이 부분은 성도들에게 당시의 공동체의 삶의 자리를 알게 해
주며 성도들이 사랑해야 할 것은 무엇이며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교훈하고
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끊임없이 소유하려고 한다. 그러나 성도는 사랑의 삶을 살도
록 부름받은 자이다. 사랑의 주제를 언급하고 있는 1-6절 내용을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
|본 문| 주 요 어 휘 | 내 용 |
+-----+-----------------------------------------------+------------------------+
|1,2절| 필라델피아, 필롸세니아스 | 형제 사랑과 손님대접 |
| | ( , ) | |
+-----+-----------------------------------------------+------------------------+
| | 톤 데스미온, 톤 카투투메논 ( | 갇힌 자와 학대받는 사람|
| 3절 | , ) | 을 생각할 것 |
+-----+-----------------------------------------------+------------------------+
| 4절 | 가모스, 코이테 | 혼인을 귀하게 여길 것 |
| | ( , ) | |
+-----+-----------------------------------------------+------------------------+
|5,6절| 아필라르귀로스, 아르쿠메노이 | 돈을 사랑치 말고 가진 |
| | ( , )| 것으로 만족할 것 |
+-----+-----------------------------------------------+------------------------+
(다) 교차 대칭 구조를 갖는 본문. 10-16절은 구조상 7-9절 및 17-19절과 구별된
다. 10-16절의 구조를 보면, 10-12절은 설명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13-16절은 설명에
근거한 권면이다. 그리고 설명부와 권면부는 전체적으로 교차 대칭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이것을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 설 명 > < 권 면 >
+---------------------------+ +-----------------------------+
| 10 절 | | 13 절 |
+---------------------------+ +-----------------------------+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위+---+ +-----+그런즉( ,토이뉜) |
|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 | | |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밖 |
|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 | | | |( ,여소)으로 나아가자 |
|을 권이 없나니 | | | | |
+---------------------------+ | | +-----------------------------+
+---------------------------+ | | +-----------------------------+
| 11 절 | | | | 14 절 |
+---------------------------+ | | +-----------------------------+
|이는( ,가르) 죄를 위 | | | |이는( ,가르) 우리가 여 |
|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 | | |장차 올 것을 찾나니 |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르니| | | | |
|라. | | | | |
+---------------------------+ | | +-----------------------------+
+---------------------------+ | | +-----------------------------+
| 12 절 | | | | 15, 16 절 |
+---------------------------+ | | +-----------------------------+
|그러므로( ,디오) 예수|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
|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 | | |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드리자.|
|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 +--------------+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
| ,여소) 고난을 받으셨느 | |기를 잊지 말라. |
|니라. | | |
+---------------------------+ +-----------------------------+
위의 도표를 보면 설명하는 구절들이 교차 대칭을 이루는 권면의 구절들에게 '동기'
를 제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의도적으로 먼저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설명하고, 후에는 성도로서 짊어지고 나가야 할 고난을 제시하고 있다.
(3) 당시 성도들의 삶의 정황. 본서에서 성도들의 삶은 유대교로 인한 배교와 로마
로 인한 박해의 위험을 안고 있었음이 나타난다. 그러나 본장에서는 색다른 삶의 면모
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공동체의 분열과 분쟁과 반목으로 일관된 '사랑의 결핍'이다.
1세기말에는 박해로 인해 갇힌 자가 많았으며,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는 유랑자들이
(strangers) 있었다. 또한 당시에는 혼인을 순결하게 여기지 않는 사상들과 안락과 쾌
락만을 일삼는 윤리가 난무했다. 그리고 박해로 인한 궁핍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돈을
사랑하는 풍조가 만연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속죄의 의미를 참되게 알지 못함
으로 인해 지도자와 성도간의 불일치가 존재하였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
고 시종 일관 사랑의 회복과 실천에 대해 피력하고 있다. 본장은 하나님 사랑의 회복
과 이웃 사랑의 실천 및 지도자와의 관계 회복 등이 주요한 내용을 이루고 있는 것이
다.
한편 본장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즉 1-19절은 사랑의 회복을 다루고
있으며, 20-25절은 마지막 인사와 축도를 다루고 있다.
1. 사랑의 회복(13:1-19)
본문은 나누는 공동체의 상황 아래서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또한 본문은 12:28에서 예배에 대한 주제적 암시를 받았다. 진정
한 예배란 삶의 전영역이 거룩해져야 한다는 확장된 개념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
게 해드리는 삶에 대한 기꺼운 받아들임을 전제한다. 이제 본문에 드러난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 및 지도자와 성도와의 관계에 대해 면밀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1) 이웃 사랑. 판넨베르크(Pannenberg)는 "인간을 떠나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
고 하나님을 떠나서는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최대 관심은 인간
에게 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을 다루기에 앞서 인간 사랑을 다루는 것은 나름대로
의의가 있다 하겠다. 저자는 본문을 통하여 우리의 이웃을 위한 열정과 사랑의 냉랭함
으로 시작되는 성도간의 믿음의 붕괴를 경고하고 있다. 본문에 드러난 이웃 사랑의 대
상은 누구인가 ?
(까) 형제 사랑. 성도가 실천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은 형제 사랑이다. 본문
1절에는 '계속하라'라는 강한 어조의 명령형이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지
속적인 사랑이다(요 13:1).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한 성도들이 각기 고난 속에서 서
로 격려하고 위로한다면 겹겹이 쌓인 모든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다) 손님 대접. 당시 사회에 있어서는 여행자들이 거처할 숙소가 비위생적이었으
며 숙박 시설의 비용은 엄청나게 비쌌으므로 쉽게 이용할 수 없었다. 이들 중에는 복
음 전파에 일익을 담당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따스한 손길을 요청하는 가난한 나그네
들도 있었다. 우리의 삶에는 개방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의 집과 교회를 개방하여
도움이 필요한 형제들을 맞아들여 기꺼운 마음으로 대접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
신의 집과 교회를 개방해 놓고 어떤 사람이든 사랑으로 맞이하는 자의 처소를 찾아가
실 것이다(마 25:35-40).
(따) 갇힌 자를 생각함. 초대 교회 당시 감옥에 갇힌 자들은 매우 혹독한 대우를
받았으며, 그들의 음식과 필수품은 아주 형편 없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했다. 박해
의 상황으로 볼 때 복음으로 갇힌 자들은 부지기수였다. 본문은 수많은 사람들이 인간
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기본 권리를 되찾기 위해 싸우고 있는 수많은 양심수들의 모
습을 기억하게 해준다. 아직도 이 땅에는 자신의 생애를 감옥에서 보내야 하는 수많은
양심수들이 갇혀 있다. 우리는 부당하게 투옥된 모든 사람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
도를 증거했다는 이유로 고난받는 우리의 형제들에 대하여 항상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또한 그들의 자유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마) 순결과 자족. 본문은 거룩의 속성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에게 비추어 볼 때
위배되는 비윤리성을 고발한다. 그것은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는 결혼의 가치성의
몰락과 돈을 사랑하는 물질주의이다.
(a) 결혼의 순결성. 결혼이란 도덕적 순결과 서로에 대한 영원한 책임성을 전제
로 한다. '혼인을 귀히 여기라'(4절)는 말은 '결혼을 값지게 하라'(RSV) 또는 '하나님
의 창조 질서에 걸맞게 결혼 생활을 하라'는 의미이다. 당시에 금욕주의자들은 결혼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천시하였으며, 반면에 쾌락주의자들은 자유로운 성생활을 권장하였
다. 이에 저자는 혼인을 귀히 여길 것과 아울러 결혼의 가치를 무너뜨리는 '음행'(
,포르노스)과 '간음'( ,모이코스)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음행
은 무절제한 성생활을 뜻함이요, 간음은 정상적인 부부 관계를 파괴하는 행위를 말한
다.
우리 사회에는 점차 프리 섹스(free sex)와 동성 연애, 미혼모, 에이즈(AIDS), 증가
하는 이혼률 등 다양한 성범죄들이 쌓여가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사회 질서뿐 아니라
가정의 파괴등으로 인간을 해롭게 하고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 질서를 역행하는
이 모든 것을 철저히 심판하실 것이다(창 19:4-28; 고전 6:9,10; 벧후 2:14).
(b) 자족(自足). 돈에 대한 탐욕과 성적 방종은 상호 연관이 있다(고전
5:10ff.). 바울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딤전 6:10)고 한 점은 이
점을 염두에 둔 것이다. 지나친 부(富)는 종종 육욕의 유혹에 쉽게 빠지게 한다. 여기
서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소망을 둔다는 것을 뜻한다. 성도는 결코 자
기 자신으로 인해 만족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바울은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 6:6)라고 하였으며, 또한
그는 감옥 안에서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빌 4:11)라고 말하
였다. 그는 결코 자기 자신으로 인해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서 허락하신 '육체의 가시'마저 감사하게 여겼다(고후 12:7).
주는 어떤 분이신가 ?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
게 어찌히리요'(6절). 저자는 하나님께서 야곱(창 28:15)과 여호수아(수 1:5)에게 주
신 신변 보장의 약속의 말씀뿐 아니라, 고민에 빠져 있던 시편 기자가 마침내 찾게 된
평안에 대해서도 독자들이 상기하도록 서술하고 있다(시 118:6). 성도는 자신에게 가
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 거할 때에 비로소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다(6절).
(2) 하나님 사랑. 십자가의 사랑은 왜(Why), 어디에서(Where), 어떻게(How) 일어났
는가 ? 그것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도록 요청하고 있는가 ?
(까) 거룩케 함. 유대인의 속죄일에는 대제사장이 수송아지를 잡아 그 피는 지성
소로 가지고 들어가고 제물은 영문 밖에서 불태웠다(레 16:14,15,27). 이 같은 제사를
통해 대제사장의 죄와 백성의 죄는 속죄받았다. 이와 같이 예수도 백성을 거룩케 하시
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다.
당시의 유대인 성도들은 유대교적인 예배와 희생 제물을 바치는 제사, 이스라엘 백
성만이 누리는 선민으로서의 특권, 율법적 요소 등을 여전히 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은 자기 백성이 진정한 성화를 얻는데 있다. 성도
의 거룩케 됨은 죄로부터의 자유와 모든 얽매임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또한 성도들이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거룩의 참의미를 실현하시길 원하신다.
(다) 진정한 예배.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것을 믿었으므로 성문 밖에서 죽
으셨다. '장차 올 영구한 도성'(14절)이 없는 고난은 절망 그 자체이다. 이 도성은 그
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한 자에게 소유된다. 부활의 경험은 예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
이며(빌 3:10), 그와 더불어 고난을 나누는 것은 생활 가운데서 장차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것이다(벧전 4:13,14).
'성문 밖'(12절)의 개념은 무엇인가 ? 이것은 '구원의 새로운 장소'를 뜻한다. 구약
시대에 성전은 예배의 장소로서만이 아니라 구원의 중심지로도 이해되었다. 대제사장
은 지성소에 들어가 수양과 수염소의 피를 뿌리고 그 다음에 살아있는 염소를 취하여
그 위에 안수하고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짊어지게 해서 광야로 내보냈다(레 16:1 ff.).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장소는 중심에서 '주변으로'이동되어졌다.
예수는 추방당하고 버림받은 자들과 함께 광야와 같은 곳에서 죽으셨다. 추하고 불결
한 땅은 예수로 말미암아 거룩한 땅이 되었다. 구원이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실천적 면을 내포한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유대교의 선민 사상과 같은 사적 소유나 개인적 특권으로 해석해 왔
다. 결과적으로 교회는 배타적 공동체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는 것은 그가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죽으신 그곳으로 따라 나서는 것을 포함한다.
즉 그것은 당신의 백성을 위해 고난당하신 예수가 있는 그곳에 나의 삶을 헌신하는 것
이다.
따라서 진정한 예배란 첫째는, 성문 밖에서 고난당하신 예수로 말미암은 감사의 찬
미를 드리는 일이요(15절), 둘째는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 나눔과 섬김의 삶
을 사는 것이다(13,16절).
(3) 지도자와 성도의 관계. 지도자와 성도의 관계의 깨어짐은 지도자와 성도간의 분
리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분리를 초래하며, 이것은 공동체의 깨어짐을 초래한다. 이
에 대해 통분히 여긴 저자는 본문에서(7,17-19절) 지도자와 성도의 관계에 대해 강조
하고 있다.
(까) 모범적인 지도자상. 본문은 모범적인 지도자상에 대해 네 가지로 말하고 있
다.
첫째, 교회의 지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되 그 행실은 모범적이어야 한다(7
절).
둘째, 지도자는 성도들의 영혼을 '경성하여 지키는'( ,아그뤼프네
오) 사람들이다(17절). 이 '아그뤼프네오'라는 단어는 '잠'에서 유래되었으며 그 의미
는 타인의 생명을 구원하고 지키기 위해 늘 깨어 있음을 뜻한다. 70인역(LXX)에서 이
단어는 도시에서 파수병으로 근무하는 병사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 안에 일어난 분열과 분쟁으로부터 성도들을 지키기 위해 경성하고 있
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내 양떼를 치라'(요 21:17)는 명령에 잠시도 졸지 않았던
성실한 지도자들이었다.
셋째, 지도자는 즐거움으로 일해야 한다(17절). 이는 위로부터의 권위를 힘입었기
때문이다. 지도자의 즐거움은 현세의 만족에 근거하지 않는다. 지도자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소명(召命)아래서 삶을 영위하므로 사람에게서 전적으로 자유하다. 그러나
그 자유에는 제한이 있다. 그 제한은 섬김이다. 비록 지도자는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
하나, 그는 모든 사람들의 종이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섬김 가운데서 다른 사람을 위
한 자유를 생각해야 한다.
넷째, 지도자는 성도들의 기도에 의지한다(18,19절). 지도자는 만능인으로서 행세하
려고 완전을 보이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성도에게 기도를 요청하는
자이다.
(다) 성도의 자세. 위에서 제시된 모범적인 지도자상에 대한 성도의 자세는 기억
하고(7절), 순종하며(17절), 문안하는 것이다(24절). 지도자는 그 자신을 위해 존재할
수 없다. 지도자는 성도들을 위하여 존재하며, 성도들은 그 지도자를 순종해야 한다.
또한 지도자는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는 경건의 훈련과 더불어 다양한 각도에서의 진지
한 연구를 거듭하여 성도들을 일깨워야 한다. 성도들에 대한 제자 훈련과 양육이 온전
하게 이루어진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더 역동적으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실
현하실 것이다. 성도는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하며 그들의 위로부터의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
* '성문 밖'에 대하여. 예수가 성문 밖에서 죽었다(12절)는 사실은 선교에 관한 보
다 완전한 이해를 제공한다. 교회의 선교는 안으로 불러모으는 차원뿐만 아니라 더 넓
은 세계로 흩어져야 한는 적극적 선교의 차원을 갖는다.
교회는 '사도직'을 수행함으로써 자기의 존재를 확인한다. '사도직'은 하나님 나라
와 세계를 연결하는 기본 개념이다. 따라서 선교는 그의 구속된 백성과 관계하며 그들
을 세상으로 보내어 일하게 하는 데 관계한다(눅 10:1). 본 주제강해에서는 '성문 밖'
의 성경적 관점가 선교의 목표 및 선교의 방향과 대안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성문 밖'의 성경적 관점. 이에 대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으로 나누어서 살펴보
자.
(까) 구약성경.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은 세계의 중심이었으며(겔 5:5), 어느
민족이든 구원을 위해서는 시온의 거룩한 산으로 와야 했다(시 6:2; 미 4:1 ff.). 북
왕국과, 뭇 민족들의 포로가 된 후에도 유다는 이러한 자의식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
은 거룩한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바벧론에서도 그들의 종말론적 비전을 생생하게 간직
하였다. 때가 되자 몇몇 지도자들은 귀향하여 성전을 재건하였다. 포로가 되어 남아
있는 사람들은 유배지에서 생활하면서도 해마다 예루살렘에로의 순례를 시도하였다.
따라서 구약 시대의 선교는 기본적으로 '변방에서 중심으로'이동하는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다) 신약성경. 신약성경에서 예수의 죽음은 선교의 본질을 명백히 보여준다. 선
교는 더 이상 '오는 것'이 아니라 '가는 것'이다. 저자는 본장을 통해서 이렇게 말한
다.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凌辱)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로 나아가자"(13절). 선
교의 초점은 영원한 국외자(Outsider)로 자신을 동일화시킨 예수 위에 놓여져야 한다.
선교는 우리의 안락하고 화려한 성안의 장벽과 문을 뚫고 세상을 위해 '그가 당하신
능욕'을 어깨에 메고 그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교회의 건축과 성장은 '약속의 땅에서도 외방에 있는 것처럼'(11:9) 천막에 잠시 머
물러 살았던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잠시 머물러 있는 공동체의 의미를 갖는다. 교회
는 고립된 요새나 성곽이 아니라 잠정적 거주지요, 광야의 천막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성문 밖에'현존하시는 예수께 나아가 임시 체류자로서의 삶을 살 때
비로소 하나님께 참된 찬양의 제사를 올릴 수 있다. 그 삶이란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
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신'(2:17)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랑과 신실함을
구현하는 삶이다. 이런 삶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자신까지도 기꺼이 희생하는
'능욕윽 지는'(13절)삶의 자세가 요청된다. 이러한 삶이 바로 거룩한 것이라 할 수 있
다.
(2) 선교의 목표. 선교는 성문 밖으로 나아가 십자가에서 처형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바라보게 된 '장차 올 영구한 도성'(14절)을 목표로 한다. 죄와 악의 세계,
고난과 불의의 세계는 영원한 도성이 될 수 없다. 그 속에서 행하는 우리의 나눔과 섬
김의 실천은 도성을 향해가는 통로에 불과하다.
새 예루살렘에 대한 꿈이 없는 선교는 좌절에 이르고 만다. 그것은 순환성과 일회성
에 끝나버리고 미래 앞에서 무능력하게 된다. 예수의 죽음은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으
로 하여금 죄와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자유케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우리는 자유로
운 세계를 바라보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로와질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일해야 한다.
(3) 선교의 방향과 대안. 성도는 편안하고 안락한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 문 밖에
서 십자가에 고난당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증언하는 사도적 대리인이 되어야 한다.
성도는 더 이상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구원의 은총을 개인적 소유로서만 간직하지 말고
주변의 이웃들에게 증거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는 다른 사람을 위해 생명을 내줄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을 태세를 갖추고 있을 때에 참된 교회로서 존재할 수 있다.
2. 마지막 인사와 축도(13:20-25)
이제 저자는 본서의 독자들에게 간략한 몇 가지 사항을 권명함으로써 본서를 마무리
짓는다. 이 마지막 권면에는 앞에서 밝힌 모든 내용을 총괄한 뛰어난 목회적 교훈이
나온다.
본문은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마지막으로 나타내면서 성도들을 축복 기도하고
있으며(20,21절), 다음은 성도들이 소중히 여겨야 할 성도간의 교제와 은혜를 언급함
으로써 본서의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22-25절).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과 형제
들과의 교제에 초점을 맞추어 보기로 하자.
(1) 하나님의 속성. 마지막 권면 속에서 저자가 언급한 하나님의 속성은 무엇인가 ?
(까) 평강의 하나님. 하나님만이 참된 평강의 원천이 되신다. 본서의 독자들은 하
나님을 떠나 인간적인 차원에서 평강을 얻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본문은 하나님 자신
에게만 참된 평강이 있으며, 하나님을 떠난 세상의 쾌락과 안일은 괴로움일뿐임을 교
훈한다. 하나님은 죄로 인하여 분리되었던 관계를 예수의 피흘리심을 통해 화해시키는
사랑의 행위자이시며 '평강의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은혜를 받은 성도가 항상 기억해
야 할 것은 그러한 평강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능욕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 저자가 축도한 내용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실현되
기를 소원하는 기도문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선한 일이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해 갖고 계서서 지금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말한다(빌 1:6; 2:13).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혼자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온전케 된 자와 함께 일하신다. 그래서 저
자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온전케 하시기를 기도하였다(21절). '온전케 하다'(
, 카타르티조)라는 말은 '충분하게 공급하다', '부서지고 찢어진 것을
수선하다', '조절하다', '구비하게 하다'등의 의미이다. 이는 성도들의 삶이 하나님으
로 인하여 부족함이 없게 되기를 기도한 내용이다. 결국 성도의 삶 전체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뜻이 이 땅 위에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방편이어야 한다.
(2) 형제들과의 교제. 저자는 이제까지 독자들에게 책망과 격렬한 어투로 충고한 것
이 사사로운 감정이 아닌 그들의 신앙 성숙을 위한 권면이므로 시비없이 받아들여 주
기를 바란다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한다. 이어서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디모데가 놓였다
는 것과 이달리야에서 온 자의 문안 소식을 새롭게 전해주고 있다(23,24절). 디모데가 놓였다 함은 그가 옥살이에서 풀려났다고 해석함이 옳다. 이것으로 인해 그 당시에는 갇힌 자가 많았을 것을 추측케 해준다(3절).
그밖에 본문에는 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에게 문안하라는 권면도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저자가 디모데와 자기 자신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 또 그들에게 문안하고 싶어하는 이달리야인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는 이유는 그만큼 성도의 교제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에 대해 나타내주기 위해서이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은혜가 모두에게 있기를 바랐다(25절). 이러한 축도는 신약성경 서신서의 말미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상례적인 문구이다(딛 3:15).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은 목회자로서 사랑하는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마지막으로 호소할 수 있었던 뜨겁고도 간절한 축복의 기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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