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 '증인'의 헬라어'마르튀론'(* )은 일차적으로 '관람자'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본절이 결승점을 향하여 달려가는 운동 경기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절의'마르튀론'은 단순히 수동적인 관람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증인으로서 진리를증거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이다(Michel, Peterson). 즉 '마르튀론'은 앞장에서언급된 신앙의 선배들을 가리키는 것으로(11장)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고난 속에서도 인내하며 충성을 다한 자들이었다. 저자는 이러한 증인들을 먼저 언급함으로 수신자들에게 증인들과 마찬가지로 고난 속에서 좌절하지 말고 인내하며 최선을다하여 경주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모든...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 경주자는 두 가지릍 벗어버려야 한다.
(1) 무거운 것 - 이에 해당하는 혤라어 '옹콘'(* )은 운동 선수가 운동을 하는 데 방해가 되는 체중을 나타내는 것으로 최선을 다하는데장애물이 되는 것을 가리킨다(Morris, Bruce).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장애물은 부를사랑하는 것,세상적인 관심사나 자만에 빠져있는 것 혹은 세상에 애착하는 것 등을 의미할 수 있다(Spicq, Mora).
(2) 얽매어기 쉬운 죄 - '죄'의 헬라어 '텐 하마티안'(* )에 대해 혹자는 배교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Kasemann). 그러나 배교는 본절의 내용인 그리스도인들이 경주하는 것과 무관하므로 타당하지 않다. 본절의 '텐 하마르티안'은 단수로 어떤 특정한 죄를 지칭하기보다는 '죄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Montefiore, Michel, Peterson, Bruce, Hewitt) 여기서는 경주를 하는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연약성을 가리킨다(Spicq, Mora).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경주를 하는 과정에서 불필요하며 장애물이 될만한 모든 것을 버려야만하며 동시에 인내로서 경주해야 한다.저자는 인내하는 가운데 경주를 한 앞선 증인이 많음을 진술함으로 수신자들을 비롯한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이 수많은 어려움에 처한다 할지라도 인내하며 경주해야 함을 권면한다. 왜냐하면 앞선 허다한 증인들이 결승점에 도달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바라는 결승점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Bruce).
=====12:2
믿음의...예수를 바라보자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의 경주의 목표인 예수에 대한진술이다. '믿음의'는 '주'만을 수식하는 것이 아니라 '주'와 '온전케 하시는 이' 둘다를 수식한다(Bruce, Lane). '믿음'은 11장에 나타난 허다한 증인들이 삶속에서 지녔던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를 나타내며 예수의 지상생활에서도 그 예를 찾을 수가있다(Moffatt, Westcott, Bruce, Hughes). 한편 저자는 본문에서 예수에 대해 두가지칭호를 사용한다.
(1) 주(* , 아르케곤) - '아르케곤'은 '아르코'(* , '시작하다', '지배하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능동태일 경우 '지배하다'라는의미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나타내며 중간태일 경우 '시작하다'라는 의미를 취해 선구자되심을 나타낸다. 두 가지중 후자가 더 타당한 듯하다(Bruce, Lane, Morris). 그리스도께서는 수신자뿐 아니라 앞절에서 언급된 앞선 '허다한 증인들'보다 더 앞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셨다. 왜냐하면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으며광야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들과 동행하셨기 때문이다(유1:5, Bruce).
(2) 온전케 하시는 이(* , 텔레이오텐) - '텔레이오텐'은 '텔레이오오'(* , '완수하다')에서 유래한 단어로 '완성자' 혹은 '완전자'라는의미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지상 생활 가운데 그 믿음을 온전히 실행한 자임을 드러낸다(Moffatt,Westcott, Bruce). 저자는 '아르케곤'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우선적으로 행한자이며 동시에 믿음을 행함에 있어서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자임을 시사하며 '텔레이오텐'을 통해서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완전히성취하셨음을 드러내고 있다(Peterson, Westcott).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기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 '위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티'(* )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1) '대신에'. 이 경우에 본문은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시기 이전에 누리셨던 하늘의 지위와 복을 버리시고 죄인들만이 당하는 형벌인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음을 시사한다. (2) '위하여'. 이 경우에 본문은 앞으로 다가올즐거움 즉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릴 구원과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을위해 당시 수치스러운 것으로 이해되었던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여 걸어가셨음을 시사한다. 문맥상 후자의 해석이 더 타당하다. 한편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는즉위식을 나타내는 시 110:1의 인용이다(2:5-9; 8:1,2; 10:12,13). '앉으셨느니라'의 헬라어 '케카디켄'(* )은 완료 사상으로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심을 시사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그 수치를 참으시고이루신 승리가 영원하며 완전함을 나타낸다(Bruce).
=====12: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 저자는 본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을 제시함으로 고난당하는 수신자 공동체를 위로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거역하고 대항하며 직접십자가에 못박았던 대적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대응하시지 아니하시고 참으셨다. 이러한그리스도의 인내는 고난을 당하고 있는 수신자 공동체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
=====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 본절은 앞절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수신자들의 고난에 대한 비교이다. 저자는 이 비교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이 수신자들이 당하는 고난보다 훨씬 극심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인내하신것과 같이 수신자들도 그래야 함을 시사한다. '죄와 싸우되'는수신자들의 공동체와 악의 세력과의 갈등을 나타내는 것으로 '죄'는 1절에서 언급한'죄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3절의 '죄인들'과 같이 악의 무리를 가리킨다(Lane). 한편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는 수신자들이 죄에 대항하여 당한고난이 순교에까지 이르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수신자들은 고난을 당할때 자신들보다더 심한 고난을 당한 허다한 증인들과 수치와 죽음에도 인내하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며결코 낙심해서는 안 되며 그들과 같이 인내하고 고난에 잘 대응해야 한다.
=====12:5,6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 본문은 '아들들인 너희에게 말한 권면을 완전히 있었느냐?' 라는 의미의 수사학적 의문문이다. 이물음을 통해서 저자는 수신자들이 훈련과 교육의 측면에서 부과된 고난의 바른 개념을완전히 잊어버렸음을 확고하면서도 부드럽게 비난하고 있다. 다음에 언급되는 인용문을 통해서 저자는 수신자들이 인내해야만 했던 고난이 훈련의 성격을 띤 것임을 진술하고 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 본문은 잠 3:11,12의 인용이다. 이는 하나님의 징계하시는 행위에 대한 의도를나타내는 바,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더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을 개인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고난을 통해서 훈련시키심을 시사한다. '징계하심'에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데이아스'(* )는 꾸짖음, 교정, 징벌과 같은수단을 통해서 교훈하시며 교육하시는 것을 의미한다(신 8:5). 하나님은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부모와 같이 자기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 뜻에순종하도록 함으로 목표에 도달하도록 훈련시키신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징계와 책망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사이가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임을 나타내어 '아들됨'을 강조하는 것이며 동시에 자식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과 사랑을 시사한다(Bruce, Hewitt,Morris). 한편 본문의 '내 아들들아'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휘에 무'(* )이나 인용문인 70인역 잠 3:11에는 '휘에'(* , '아들아')로 되어 있어 본문에 인칭대명사 '무'(* , '나의')가 삽입된 것으로 보인다. '우'가 없는 '휘에'는 잠언 전체에서 교사가 학생을 부를 때 사용된 표현이다(Lane, E.Ahlborn). 저자는 이러한 의미를 지닌 70인역에 '무'를 삽입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새 언약을 이루신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됨을 강조하고 있다(Bertram, Bornkamm).
=====12: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 '너희가 참음은'의 헬라어 '휘포메네테'(* )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1) 혹자는 직설법으로 이해하여 개역성경 본문처럼 해석한다(Hewitt). (2) 혹자는 명령법으로 이해하여 '너희는징계를 참으라'는 의미로 해석한다(Morris).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왜냐하면 문맥상 명령법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 본문은 아버지로서 자녀를 징계하는 것이 보편적인 것임을 말하는 수사학적표현이다. 아들이 아버지와 징계를 받는다는 사실은 아버지가 그 아들을 진정한 아들로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고난을 통해 징계를 하신다는 것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아들로 인정하고 계심을 시사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을 슬퍼하거나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이 하나님의 징계로 하나님의 아들됨의 증거임을 깨달아 기뻐해야 한다.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아들이 아니니라 - 저자는본절에서 징계를 받지 않는 경우를 통해서 징계가 아들됨의 증거임을 반증한다. '사생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노도이'(* )는 노예나 첩의 아들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단어로 모든 사생아를 의미한다. 또한 '참아들이 아니니라'의 헬라어 '우크 휘오이'(* )는 서자(庶子)를 가리킨다. 만약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징계가 없다면 그는 서자이며 사생아이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할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도 될 수가 없다. 반대로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의징계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사랑과 상속자로서의 특권적 위치를 소유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12:9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께서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 '영의 아버지'는 '육체의 아버지'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하늘 세계가 복종하는 초월적인 분 즉 하나님을 가리킨다(Kuss, Lane).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주로서 그리스도인들을 훈련시키고 헌신을 요구할수 있는 최고의 권위를 소유하신 분이시다. 저자는 최고의 권위를 소유하신 영의 아버지와 육신의 아버지틀 대조함으로 자녀들이 육신의 아버지보다 더 위대한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징계하실 때 당연히 복종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살려'의 헬라어 '제소멘'(* )은 생명으로의 초대를 의미하는 것으로(신30:11-20) 종말론적 구원을 즐기는 것과 연결된다(10:38,39, Peterson).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징계를 받을지라도 좌절하여 배교하는 것이 아니라 인내하며 담대히 나아가 복종함으로 온전한 구원을 소유하여야만 한다.
=====12:10
본절은 '호이 멘 가르...호 데'(* ... , '저희는 ...오직 하나님은')라는 단어의 대비를 통해 육신의 아버지와 영의 아버지의 비교를 나타내고 있다.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 '자기의 뜻대로'는 육신의아버지의 징계가 자녀에게 유익을 끼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것으로 징계의 불확실성을 시사한다. 또한 '징계하였거니와'의 헬라어 '에파이듀온'(* )은 미완료 시상으로 육신의 아버지의 징계가 불완전하여 반복되었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저희' 곧 육신의 아버지가 행한 징계는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자녀에게 유익을 끼치는지 조차도 불확실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은 육신의 아버지를 공경하였다(9절).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 하나님의 징계는 육신의 아버지의 징계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이다(Bruce).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징계하시는 목적을 나타내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을 영적인 성숙과 거룩함에 이르도록 하심을 시사한다. '거룩하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오테토스'(* )는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공유하고 있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성품을 나타내는 것으로(Morris, Procksch)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완전하여진다(Bruce, Lane).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훈련의 성격을 띤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속성인 거룩함을 공유할 수 있도륵 하신다. 한편 그리스도인이 온전한 성화를 이루는데는 인내를 통해서 믿음을 보존함으로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미래에 있다(Lane,Michel, Hughes, Peterson). 훈련의 성격을 띤 고난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실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며 종말론적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다.
=====12: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 저자는 '프로스 토 파론'(* , '당시에는')과 '휘스테론'(* , '후에')을 대비 시켜서 하나님의 징계가 그 당시에는 어려움과 슬픔을 가져다 주지만 궁극적으로놀라운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임을 강조한다.'의의 평강한 열매'는 평강과의로 이루어진 열매를 의미한다(Lane). '평강과 의'는 종말론적 구원의 선물로서(Michel) 미래에 소유하게 될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흔적이다(Peterson).
=====12: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 저자는 본문에서 사 35:3을 인용하여 고난으로 인해 소진(消盡)된 상태에 있는 수신자들에게 강하고 담대해질 것을 권면하고 있다. '피곤한 손'은 '불구가 된 손'(JB)으로 무용(無用)하여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본절의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은 철저하게 소진되고 좌절한 사람을 나탄내는 표현이다. 한편 '세우고'의 헬라어 '아노르도사테'(* )는 '강하게 하다'라는 의미로(NIV) 고난으로 인해 좌절에 빠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어서 담대해질 것을 나타내는 권면이다.
=====12: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받게하리 - 본문은 잠 4:26의 인용이다. '곧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르다스'(* )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 가운데 적절한 행동을 취하는 것으로 윤리적인 것을 의미하나 본절에서는 믿음의 시련을 통해서 도달하는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를 의미한다(Lane). 그리스도인들은 시련에 의해서 좌우로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인 목표를 향해 곧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한편 '어그러지지'의 헬라어 '에크트라페'(* )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곧은 길로부터 떨어져나가는 것을 의미하여 '배교'를 시사한다고 주장한다(Hughes, Kasemann). (2) 혹자는'탈구(脫臼)하다'라는 의미로 믿음이 흔들리는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rris,Bruce, Hewitt).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만약 전자의 경우 처럼 배교를 의미한다면 '배교는 더이상 속죄할 수 있는 제사가 없다'는 말(10:26)과 '고침을 받게하라'는 명령과 부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Lane). 저자는 본절에서 시련과 위험 속에서 좌절하고 소진된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여 신앙의 최종적인 목표인 종말론적 구원만을 향하여 매진할 수 있도록 하라고 권면하고있다.
=====12:14
모든 사람으로...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 '좆으라'의헬라어 '디오케테'(* )는 단순히 찾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긴박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Morris, Lane, Michel). 이것은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에 대한 보답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노력을 강조한다.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추구해야 할 것에 대해서 두 가지로 진술한다.
(1) 화평함 - 이것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ㄱ)혹자는 불신자들까지 포함하는모든 사람들과의 평화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orris, Bruce, Hewitt, Spicq,Montefiore, Andriessen). (ㄴ) 혹자는 십자가상에서 성취된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에의해서 회복된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평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Lane, Foerster). 이두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평은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인들, 혹은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화평을 이룰 수 있는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화평을 통해서 타인의 행복과 복지를 위한 책임을 갖게 된다.
(2) 거룩함 - (* , 하기아스몬) - 코이네 헬라어(Koine Greek)에서 '-모스'(* )로 이루어진 단어는 '행위'를 나타낸다(Lane). 그러기에'하기아스몬'은 거룩해진 상태를 가리키기보다는 거룩해져 가는 과정을 나타낸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에 강조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서 성도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이고자 할 때 주어지는 것이다(Michel, Morris, Bruce)거룩함은 그리스도인이 소유해야 할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반드시 거룩해져야만 한다(레 11:45; 벧전 1:15,16). 이러한 화평과 거룩함이 없이는절대로 하나님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화평과 거룩'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해 그리스도인에게 성취된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드러내야 할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이다(마 5:9).
=====12:15,16
너희를 돌아보아 - '돌아보아'의 헬라어 '에피스코푼테스'(* )는 현재 능동태 분사로 '계속적으로 지켜 보고 감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공적인 목회 사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서로를 돌보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3:12,13; 10:24,25). 저자는 그 과정에서 조심해야할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1) 하니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 '이르지 못하는' 에해당하는 헬라어 '휘스테론 아포'(* )는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서 어떤 혜택으로 부터 제외되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구하여도 얻기가 어려움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은헤에 대한 거절,불신앙, 혹은 가볍게 여기는 마음으로 인해서 복음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은혜를 자진해서 포기하는 것을시사한다(Lane, Morris, Michel, Casey, Bruce).
(2) 쓴 뿌리가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 본문은 신 29:12(LXX)의 내용을 반영한다.그러나 본서의 헬라어 본문은 본서저자가 나름대로의 의도를 가지고 생략한 것이 발견된다.
┌────┬─────────────────────────────────┐
│ 본 문 │ │
│ │메티스 리자 피그리아스 아노 퓌우사 에노클레 │
│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두려워 하고'
├────┼─────────────────────────────────┤
│ 신 │메 티스 에스틴 엔 휘민 리자 피크리아스 아노 퓌우사 에노클레 카이 │
│ 29:17 │피그리아 │
│ (LXX) │'너희 중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쓴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을 │
│ │두려워하라' │
└────┴─────────────────────────────────┘
저자는 신명기 본문에서 두 가지를 생략하고 있다. (ㄱ) '에스틴 엔 휘민'(* , '너희 중에 있다'). 왜냐하면 '에스틴...에노클레'(* ... , '있다...괴롭게 하고')가 구문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Michel). (ㄴ)신명기 본문의 마지막에 있는 '피크리아'(* , '쓴').이 말을 생략한 것은 중복을 피하기 위함이다(Lane). '쓴 뿌리'는 쓰고 독이 있는 열매를 내는 것으로 신명기에서는 우상 숭배와 연관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인용을 통해서 완고한 기질로 인해서 생겨나는 불신앙과 배교가 수신자들의 공동체에 팽배해지지 않도록 조심할 것을 경고한다.
(3)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에서와 같이 망령된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 저자는 본문에서 창 25:29-34의 '에서'를 예로 들어 공동체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어려움에 대해 경고한다. 성적 부도덕을 행하는 '음행하는자'(* , 포르노스)와 나란히 '에서'를 언급한 점에 대해 두 견해가 있다.(1) 혹자는 '음행하는 자와...망령된 자'의 헬라어 '포르노스에 베벨로스'(* )에서 '에'(* , '또는')가 '음행하는자'와 '망령된 자'를 분리시키는 것으로 수신자의 공동체내에 '음행하는 자'와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라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주장한다(Elliott, Bruce, Riggenbach, Morris, Westcott). (2) 혹자는 '포르노스'를 은유적으로 해석하여 하나님과의 계약을 파기하는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 '망령된 자'와 동일한 의미로 보며 '음행하는자'와 '망령된 자' 둘 다가 에서의 경우에 해당되는 것으로 주장한다(Lane). 두 가지 견해 중 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포르노스'를 은유적으로만 해석해야 할 이유가 없으며 실제로 저자는 문자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13:4). 한편 '망령된'에 해당하는헬라어 '베벨로스'(* )는 '거룩하지 못한' 혹은 '세속적인'이란 의미로 영적인 면보다는 현세적인 것에 더 치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림으로 현세적인 것을 위해서 하늘의 참 복을 무가치한 것으로여기고 내던져 버리는 자의 모델이 되었다(Thompson). 이러한 에서의 행위는 하나님께서 장자에게 주시고자 했던 축복에 대한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으로 배교자들과 전혀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Hewitt, Morris).
=====12:17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 본문은 앞절에서 망령된 자의 예로 제시된 에서에 대한 설명이다. '축복'은 에서가 아버지 이삭에게서 받고자 했던 하나님의 실제적인 복을 의미한다.또한 '기업'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약속하신 땅의 소유를 가리키나 본서 내에서는 아들됨과 연결된다(Lane). 예수께서는 만유의 상속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1:2,4)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통해서아들의 지위를 얻는 자로(2:10) 하나님의 약속을 상속받을 자들이다(6:12,17,18;9:15)이러한 그리스도인의 기업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할당하신 것이다. 한편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 이페르 메타 다크뤼온 에크제테사스 아우텐'(* )은 문자적으로 '비록 눈으로 그것을 구하였을지라도'라는 의미로 개역성경 본문에는 '그것을'(* , 아우텐)이 생략되어 있다. '아우텐'은 앞서 언급한 '축복'을 가리키는 것으로 에서가 축복을 다시 받기 위해서 눈물로 간구했음을 나타낸다(Bruce, Hewitt). 에서의 눈물은 축복을 도로 찾기 위한 눈물이었지 장자 명분을 통한하나님의 은혜를 가볍게 생각한 것에 대한 회개의 눈물이 아니었다(Lane).그러기에 그가 눈물을 흘리며 간구했던 축복을 하나님으로 부터 받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하나님의 선물을 멸시하였기 때문이다(Westcott, Andriessen). 에서가 눈물로 간구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 부터 장자권에 대한 재고(再考)의 기회를 얻어내지 못한것은 배교자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해당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가볍게 여기고 현세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엄중한 경고가 된다(6:7,8,Lane).
=====12:18,19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 만한 불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느니 - 본문에는 '시내 산'이라고 나타나지 않지만 시내 산에 대한 언급임이 분명하다(Morris,Lane, Bruce, Hewitt).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현현하실 때 나타났던 징조에 대해 본문은 일곱 가지-만질 만한, 불 붙는 산, 흑운, 흑암, 폭풍, 나팔 소리, 말하는 소리-로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구약의 시내 산 사건 때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만질만한'의 헬라어 '프셀라포메노'(* )를 사용하여 다음에 언급된시온 산 사건과 분명한 대조를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시내 산 사건이 외적으로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현상을 통해서 물질적이고 만져서 느낄 수 있는 상태임을 시사한다(Windisch, Casey). '프셀라포메노'를 제외한 나머지 여섯 가지도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현현 때 동반되었던 외적이고 가시적이며 가칭적인 현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로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두려움을 품게 한다(출 19:16-22; 20:18-21; 신4:11,12; 5:22-27). 이 일곱 가지 징조는 두려움을 주며 하나님과의 만남을 모호하게하는 현상이다. 즉 불 붙는 산과 흑암, 흑운 등과 같은 가시적인 현상은 하나님을 계시하기보다는 도리어 모호하게 하여 하나님의 임재만을 느끼게 하였으며, 폭풍과 나팔소리 그리고 말하는 소리와 같은 가청적인 현상은 하나님의 음성을 분명히 이해할 수없는 굉장히 큰 소리로 두려움만을 유발시켰다(신 4:12, Casey, Lane).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소리를 더이상 듣지 않도록 해달라고 간구하였다.
하나님은 그 간구를 들으시고 모세를 통해서만 말씀하시기로 결정하신다(출 19:16-19;20:18-21; 신 5:23-28).
=====12:20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이 금지된 것은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에게도 해당되었다(출 19:12,13).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무시한 것에 대한 심판은 신속하고 가공할 만한 것이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공포감을 느끼게 하였다. 이러한 것은 옛 언약하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음을 시사한다(Thomas, Casey,Lane).
앞장에서 저자는 구약 시대 믿음의 선진(先進)들을 열거하여 박해와 배교라는 이중
의 위험을 안고 있는 1세기말의 공동체에게 믿음의 본질을 역설하였다. 이제 뒤이은
본장은 딱딱한 듯한 앞장의 역사적 논술로부터 벗어나 믿음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 것
인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에 대해 언급한다. 본장은 조금은 침울한 분위기
를 자아내고 있지만 어둠 속에서의 촛불이 밝게 빛나듯 간간이 밝은 승리의 함성들을
담고 있다. 본서의 독자들은 현재 인내의 깊은 밤에 처해 있다. 따라서 저자는 본장에
서 목회자로서의 뜨거운 권면의 말씀과 함께 엄중한 경고를 하고 있다.
본장은 크게 두 단락으로 대별할 수 있는 바, 앞 단락(1-13절)에서는 그리스도인을
장거리 경주자에 비유하면서 경기의 선두이자 푯대는 십자가의 굴욕을 참으신 예수임
을 강조한다. 본장의 뒷 단락(14-29절)에서는 구약성경의 인물인 에서를 통하여 배교
(背敎)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저자는 그 결론으로서 성도의 자세를 언급하는 바, 성도
는 변치 않는 나라를 기업으로 받았으므로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길 것을 훈계
하고 있다. 본장의 내용을 좀더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본장에 드러난 독특한 문체
와 구조적 특징 및 중심 주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1) 문체적 특징. 본장은 권면의 말씀으로 이루어졌으며, 이 권면의 말씀은 앞장의
논증적 선포에 대한 반응이다. 특히 11:39,40과 본장 1절은 핵심 단어(key-word)로 연
결되어 있어 본장과 앞장과의 긴밀성의 강도를 더해주고 있다. 그것을 도표화하면 다
음과 같다.
+----+-----------------------------+-------------------------------------------+
|구분| 1 절 | 11 : 39, 40 |
+----+-----------------------------+-------------------------------------------+
| | 증인들 | 증거를 받은 사람들 |
| 내 |( , 마르튀론)|( ,마르튀레덴테스)|
| 용 +-----------------------------+-------------------------------------------+
| | 우리( ,헤민) | 우리( ,헤몬) |
+----+-----------------------------+-------------------------------------------+
1절은 신앙의 내용을 풍요롭게 설명해 주고 그 실천에 강력한 자극을 준 11:39,40을
이어받은 것이다.
또한 본장 1절의 '이러므로'( ,토이가룬)는 앞장에 대한 전이임
을 가리킨다. 즉 본장과 앞장은 거듭 믿음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거니와, 앞장은 믿음
에 대한 논증이요 본장은 믿음에 대한 권고인 것이다. 이러한 전이는 다음과 같은 문
체적 특성에서 선명하게 부각된다.
첫째, 앞장의 문체는 직설법인 반면에 본장은 권고적인 가정법을 사용하고 있다.
둘째, 앞장은 주로 3인칭을 사용한 반면에 본장에서는 약간의 1인칭 복수(1,9절)와
다수의 2인칭 복수(3,4,5,7,8,13절)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본장의 문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앞장에서는 믿음에 대한 논증에 역점을 두었으나 본장에서는 공동체를
위한 목회자적 권고에 중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셋째, 본장에서는 특별한 어휘들이 사용되고 있다. '인내'( ,휘포모
네)와 어원이 같은 '참다'( ,휘포메노)가 사용되고 있다(2,3,7절). 그
러나 이러한 인내는 곧 '징계'( ,파이데이아)의 개념으로 발전되고 있
다(5,7,8,11절). '징계'의 원어 '파이데이아'는 본서 가운데 오직 본장에만 나타난다.
이와 같은 '인내'와 '징계'라는 단어의 사용으로 보아 우리는 당시 독자들의 삶이 짙
은 어두움의 분위기였음을 알 수 있다.
(2) 구조적 특징. 본장은 크게 1-13절과 14-29절의 두 부분으로 나뉜다. 그런데 두
단락의 구조적 특징은 평행법과 교훈적 미드라쉬 형태로 나타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
면 다음과 같다.
(까) 평행법. 본장은 전체적으로 평행적 표현 방법으로 엮어져 있다. 그것을 도표
화하면 다음과 같다.
+--------------------+ +---------------------+ +---------------------+
| 1 - 3 절 | | 4 - 11 절 | | 12 - 13 절 |
+--------------------+---> +---------------------+ ---> +---------------------+
| 권 면 | | 설 명 | | 권 면 |
| ( Exhortation ) | | ( Exposition ) | | ( Exhortation ) |
+--------------------+ +---------------------+ +---------------------+
+--------------------+ +---------------------+ +---------------------+
| 14 - 17절 | | 18 - 24 절 | | 25 - 29 절 |
+--------------------+---> +---------------------+ ---> +---------------------+
| 권 면 | | 설 명 | | 권 면 |
| ( Exhortation ) | | ( Exposition ) | | ( Exhortation ) |
+--------------------+ +---------------------+ +---------------------+
위 도표를 보면, 중심 부분이 양쪽의 권면의 말씀으로 둘러싸여 구조적 일관성을 이
루고 있다. 앞뒤 부분이 권면의 말씀으로 시작하고 권면의 말씀으로 끝을 맺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본장을 통해 저자가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은 공동체를 향
한 훈계임을 엿볼 수 있다.
(다) 교훈적 미드라쉬. 본장의 대부분은 교훈적 미드라쉬 형태를 취한다(5-11절;
26-29절). 미드라쉬(midrash)는 '찾다', '논급하다'에서 유래한 말로 구약성경에는
'주석'(대하 13:22; 24:27)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미드라쉬'는 단순한 주석이
아니라 성경 본문의 심원한 의미를 찾아내어 교훈과 건덕을 장려하는 주석이다. 본장
에 적용된 미드라쉬를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5-11절은 잠언 3:11,12을 인용하여 1세기말의 공동체에게 하나님이 부여해 주
신 징계의 의의를 재해석해주고 있다. 구약성경 본문을 먼저 인용해 놓은 다음 공동체
에게 그에 부합된 교훈을 던져주는 것은 교훈적 미드라쉬 형태의 특성이다.
둘째, 26-29절은 학 2:6을 먼저 인용하면서 종말의 지연과 핍박으로 인해 좌절에 빠
진 독자들에게 영구한 나라에 대한 소망을 재해석해주고 있다.
셋째, 본장 외에 본서의 3:7-4:13에서도 교훈적 미드라쉬 형태가 나타난다.
(3) 중심 주제. 본장의 중심 주제는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성도의 위치
와 신분 및 자세이다.
(까) 성도의 위치. 성도는 장거리 경주자의 위치에 있다. 성도 앞에는 이미 힘겨
운 경주를 다 마친 믿음의 선진들(11절)이 있다. 그들은 열심히 선한 싸움을 싸우며
달려갈 길을 마쳤으며 지금의 성도들에게 힘찬 환호와 갈채를 보내고 있다. 경주자의
특징은 첫째, 달리기에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을 벗어버려야 한다. 둘째, 경주의 푯대는
친히 고난을 당하시고 영광 중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셋째, 경주의 자세는 피
흘리기까지 싸워 이길 수 있는 인내이다.
(다) 성도의 신분. 성도는 아버지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신분을 지닌다. 아
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육 과정인 훈련을 받게 된다. 영의 아버지(9절)는 육의 아
버지와 비교되며, 하나님은 진정한 영의 아보지로서 궁극적인 통찰에 의거하여 행위하
신다.
(따) 성도의 자세. 성도로서 마땅한 자세는 공동체와 더불어 화평(和平)함과 거룩
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즉 배교에 대한 유혹 속에서 에서와 같은 자가 되지 않고, 하
나님의 시온 산과 영구한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기쁨과 감사의 생활을 하는 것이
다.
1. 성도의 푯대(12:1-13)
본문은 성도의 삶을 푯대를 바라보며 달리는 경주에 비유하면서(빌 3:14; 딤후
4:7), 그 푯대는 예수 그리스도임을 나타낸다. 그런데 그 경주는 인내를 필요로 한다.
믿음의 삶은 부단한 인내를 요구하는 힘든 경주와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을 통해
자신의 믿음의 진실성을 증거한 자들이(11:2,4,5,39) 우리를 격려하고 있으며, 바로보
고 달려갈 그리스도가 있음을 인지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
저자는 성도들에게 현재의 고난을 그들의 믿음을 성숙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하
신 연단임을 피력하고 있다. 본문을 세부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1) 경주의 자세. 성도는 장거리를 뛰는 경주자와 같으므로 인내를 가지고 그리스도
를 바라보아야 한다.
(까) 경주의 자세. 성도는 경주에서 승리하기 위해 자신의 영적 장해물을 제거해
야 한다(막 5:35; 눅 5:18,19). 방해물은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이다(1절).
'무거운 것'( ,옹콘)이란 헬라 문학에서는 지나친 몸무게나 귀찮은 짐보따
리 등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본문에서는 경주에 거추장스러운 죄나 경주자의
주의를 흩어지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사는 이 땅에는 달리지 못하도록 유혹하
고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하도록 하는 어둠의 요소들이 얼마나 많은가 ? 1세기의 경
주자는 경기장에 나설 때 거의 벌거벗은 상태로 달렸다고 한다.
'얽매이기 쉬운 죄'는 단단히 밀착하여 얽매는 죄이다. 죄는 우리와 너무 밀착되어
있어서 우리는 그것에 휘말려들기 쉽다. 죄의 증상은 아직도 계속되는 자신의 성격적
결함, 쉽게 저지르는 죄, 끊을 수 없는 습관 등 여러가지로 나타나는데 이것들은 우리
를 머나먼 경주에서 탈락시키거나 좌절케 한다.
(다) 경주자의 푯대. 경주자는 인내로써 경주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인내하기
에 너무나 많은 제한과 연약성을 지니므로 인내의 표본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리스도는 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이신가 ? 그는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기 때문이다(2
절). 그의 '즐거움'이란 이기주의적 기쁨이 아닌 자기 백성을맙坪?완성 때문에 가
지시는 기쁨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10:7,9) 낮아지고(2:14,17), 순종하
는(5:8) 종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러므로 그의 제자들인 성도는 인내로써 아픔, 고
난, 배신을 경험하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열심히 좇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 자신의 고통의 신학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그가 안락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아니라 십자가상에 있는 모습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로 하여금 고난받게 하시는 하나님은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받으셨고 오늘
날에도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서 계속 고난 받으신다. 본회퍼(Bonhoeffer)는 히틀러
정권에 의해 무참하게 처형당하기 아홉 달 전에 감옥에서 그의 친구 에버하르트 베트
게(Eberhard Bethge)에게 이렇게 편지하였다. "고난받는 하나님만이 도울 수 있다."
예수의 이름 중에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마 1:23)는 뜻이다.
그런데 '임마누엘'의 의미는 그의 언약 백성과 나누는 고난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예
수는 주린 자와 목마른 자, 나그네와 헐벗은 자, 병든 자와 갇힌 자를 돌아보셨으며
가난하고 고난받는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셨다(출 2:24; 사 63:9; 마 1:23;
25:34-40). 이러한 예수를 바라보며 행장을 가볍게 하고 먼 길을 가야 하는 우리들은
자기 개인의 믿음을 위한 인내라는 소극적인 차원에서 벗어나 도리어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해 고난을 인내하는 적극적 차원으로 상승되어야 할 것이다.
(2) 고난의 의의. 본 서신의 독자들은 자신들의 고난에 대해서 하나님의 무관심과
침묵으로 대하고 있다고 간주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인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된 자를
징계하신다. 징계가 없는 자는 사생아에 불과하다. 징계는 형벌적인 면과 교육적인 면
이 있다. 하나님의 징계는 후자에 속한 것으로 성도들은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아야
할 것이며 또한 낙심하지도 말아야 한다. 도리어 고난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 조용히 기다려야 한다(사 63:9; 살전 3:3).
로마의 부권 제도에 ?의하면, 아버지는 자기의 가족에 대해 절대권을 가졌다. 만일
아들이 자라 결혼하여 자녀를 두면 아버지는 손자들에게까지 절대권을 가졌다. 아들이
성년이 되어 사회의 높은 지위에 있더라도 그 아버지가 생존하는 한 아들은 역시 부권
아래 있었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징계를 언급했을 때 그 의미를
분명히 알았다. 까닭없이 그 자녀에게 눈물을 흘리게 할 아버지가 없듯이, 오직 하나
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신다. 하나님의 모든 징계 과정
은 우리의 유익이 그 목표이다. 아버지의 훈계가 없다면 자녀들은 철없고 미숙한 상태
에 머물 것이다. 징계는 자녀의 교육과 훈련을 위한 질책이다. 이런 모진 과정을 이겨
낸다면 점점 더 성화(聖化)의 높은 단계로 나아갈 수 있으며 더욱 하나님과 깊은 교제
를 할 수 있게 된다.
(3) 상황에 대한 권면. 본 서신의 독자들은 '피곤'과 '연약' 및 '어그러짐'의 상황
에 직면해 있었다(12,13절). 그들은 모진 박해 가운데서 낙심과 좌절로 자포 자기의
상태에 이르렀던 것이다. 저자는 이사야 35:3을 나름대로 인용하여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던 독자들에게 믿음에 굳게 설 것과 주위의 연약한 형제들을 도우라는 권면의
메시지를 주고 있다. 당시 팔레스틴(Palestine)의 가정 교회들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흐려져서 유대교로 복귀하려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성숙하고 훈련
된 믿음의 동역자가 절실히 필요했다.
또한 저자는 잠언 4:26을 인용하여 성도들이 목표를 향해 행진할 것을 촉구한다. 먼
저 앞서서 나아가는 성도들의 모습을 그들 중에 낙심한 자들이 보고 새로운 용기를 얻
어 다시 전진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각기
주변의 성도들에 대한 책임이 있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12,13절을 성도들이 몸
소 바로 행함으로써 일변 믿는 듯하면서 의심하는 다른 사람들을 교정시켜 주라는 의
미로 해석했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 공동체는 어그러짐의 상황에 직면했을 때 아픔을 당하고 있는
당사자에게만 내맡기고 있지 않은가 ? 그 당사자는 말없는 눈빛으로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要請)하고 있음을 기억하자.
* 징계( ,파이데이아)에 대하여. 징계는 히브리어로 '무사르'(
)이며 헬라어로는 '파이데이아'( )로서 '훈육', '징벌', '교정',
'훈련'이라는 뜻이다. '징계'는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과 관련된다. 이는 사람의 죄나
허물을 바르고 선한 방향으로 인도하기 위해 사용되는 방법이다. 이스라엘의 가정과
사회에서 '징계'는 중요한 교육 방법이었다(잠 13:24). 그래서 이스라엘의 아버지들은
자식의 훈계를 위해 자주 채찍을 들었다(잠 22:15). 신약 시대에도 같은 사상이 교회
및 신자에 대하여 적용되었다(고전 11:32; 고후 6:9). 본문에서는 구약성경에서의 징
계, 유대교에서의 징계 및 신약성경에서의 징계에 대하여 차례대로 살펴보기로 하자.
(1) 구약성경에서의 징계. 구약성경에서 '징계'는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이스라엘과
구성원들 개개인에게 주는 교훈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신 11:2; 시50:17; 렘
17:23; 32:33). 이러한 교훈적인 하나님의 징계는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 속에서 나타
난 하나님의 행동을 통하여 표현되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므로 그의 선택된 민족에게
거룩을 요구하신다(레 19:2). 이 거룩함이 깨지면 하나님께서는 가르침과 형벌과 보상
으로써 계약 백성들을 지키신다. 율법은 특별히 하나의 교육적인 힘이다(시119편). 당
시는 아버지가 어린 세대를 가르칠 책임이 있는 율법의 수호자였기에 아버지는 때때로
육체적인 징벌을 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육체적인 징벌은 사랑 가운데서 행해져야
하며 분노로 행해져서는 안 되었다.
(2) 유대교에서의 징계. 유대교의 회당은 경건의 훈련을 제공한다. 회당에서는 하나
님을 사랑하고, 덕을 사랑하며,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삼중적인 관점에서 바른 것을
선택하도록 가르친다. 필로(Philo)에 의하면, 영혼은 덕으로 훈련됨으로써만 선한 은
총을 획득할 수 있다. '징계'는 구원의 뜻을 가진 샘 또는 근원이다. 물론 이것은 궁
극적인 근거이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더불어서만 가능하다. 요세푸스(Josephus)에게 있
어서 교육이란 가르침과 실천을 포괄하며 종교는 그 목표이다. 그는 율법이 가르침과
실천의 가장 훌륭한 융합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헬라의 문화 규범을 받아
들여 구약의 징계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후기 유대교 신학에서는 고난
을 통한 징계가 나타난다. 랍비(Rabbi)들은 하나님의 교육 방식이 본질적으로 교정하
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영향은 마카비 시대에 나타났다. 훈계는 징계의 형태로도
나타난다. 랍비 문헌에 있어서 징계는 죄를 전제한다. 이것은 죄에 대한 질책이며 교
정이지만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한다.
(3) 신약에서의 징계. 바울은 율법은 제한된 효력을 가질 뿐 율법의 시대는 그리스
도와 더불어 끝났다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율법을 반대하지 않았으며, 율법
을 교육적인 역할을 하는 몽학 선생으로 보았다(갈 3:24).
본장은 고난의 훈련을 언급한다. 고난은 아버지의 책임있는 사랑 안에서 나타나는
징계이다. 그러므로 고난은 아들됨의 보증이요 하나님의 은총과 용서에 대한 보증이
다. 이것은 훈련에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져다 준다. 징계는
목적이 아니라 방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교육의 목적을 위해서 참고 인내해야
한다. 징계는 처음에는 고통스럽지만 후에는 의로운 평화의 열매르 가져다 준다. 하나
님의 사랑의 뜻이 징계 뒤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성도는 징계에 처할 때 그
것을 받아들이는 삶의 자세에서 증명된다.
2. 배교에 대한 경고(12:14-29)
앞 단락에서는 믿음의 경주와 고난의 인내에 대해 언급하였다.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 바, 14-17절에서는 공동체의 통일을 위한 서로의 책임을 강조하고 배교
의 경고로서 구약의 인물인 에서를 예시한다. 18-24절은 옛 언약의 대조 묘사로서 시
내 산의 모세와 시온 산의 예수의 대비를 통해 옛 언약에 대한 새 언약의 우월성을 증
거한다. 25-29절은 영존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성도로서 감사와 기쁨의 자세를 가
져야 한다는 권면의 말씀이다.
본문의 내용을 상고하기 위해 주를 볼 수 있는 길과 시온 산의 우월성 및 영존하는
나라에 초점을 맞추어 보기로 하자.
(1) 주를 볼 수 있는 길. 그것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和平)과 거룩'을 좇는
것이다(14절). 이는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이 내적 갈등과 분리주의적인 성향을 없앤
기반 위에서 하나님께 헌신하는 생활을 가리킨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는 12,13절
의 내용과 연결되는 것으로서 강한 지체 의식으로 피차 나눔과 돌봄의 삶을 살라는 의
미이다. 주를 볼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까) 화평과 거룩. 하나님은 죄로 인해 단절된 당신의 백성과 화평을 누리고자 예
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주도하셨다. 이 같은 화평의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죄로부터
거룩케 하시려고 가장 극악한 사형수 틀에 예수 그리스도를 달리게 하셨다. 이제 그
사건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성품인 화평과 거룩을 닮아가야 한
다(마 5:8,9). 이러한 삶은 주(主)를 볼 수 있도록 한다. '주를 볼 수 있다'는 말은
그 누구도 방해치 못하는 끊을 수 없는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성을 뜻한다.
(다) 육적 욕망의 제거. 본 서신의 독자들인 유대인 성도들 중에는 박해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를 버리려는 자들이 있었다. 저자는 이런 자들을 에서에 비유하였다. 에
서의 성품은 감정적이고 정욕적이다. 그는 한끼의 음식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의 존귀
한 위업을 잃어버린 장본이었다. 그는 영적 특혜보다 육적 욕망에 의미를 부여했기 때
문에 한번 팔아넘긴 장자권을 다시 회복할 수 없었다. 성도는 안락과 즐거움으로 인해
참된 복(福)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따) 쓴 뿌리의 제거.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한다(15절)는 말은 신명기 29:18,29
을 배경으로 하는데, 그 내용은 우상 숭배에 의해 이스라엘이 큰 손실을 당한다는 것
이다. '쓴 뿌리'란 배교의 위험성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쓴 뿌리'는 전염병과
같아서 전 교회에 신속히 퍼질 염려가 있다. '쓴 뿌리'를 뽑아내기 위해 모든 그리스
도인들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
(2) 시온 산의 우월성. 저자는 마지막으로 대조적인 두 장소를 대비시킨다. 그 두
장소는 '시내 산'과 '시온 산'이며 이 장소들은 각각 율법과 복음이 선포된 곳이다.
저자는 이 두 장소의 비교를 통해 옛 언약과 새 언약을 장엄하게 비교하였다.
(까) 시내 산의 하나님 현현. 시내 산의 하나님 현현(顯現)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움으로 가득하게 하였으므로 그들은 모세를 중보자로 내세웠다(출 20:19; 신
5:23,24). 그러나 백성의 지도자로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모세조차도 하나님의 위
엄과 권위에 압도되어 두려움에 떨 지경이었다. '만질 만한 불 붙는 산'(18절)은 구약
교회의 외형적이며 지상적인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흑운과 흑암과 폭풍'(18절)
은 하나님께 쉽사리 나아갈 수 없는 성격을 특성을 보여준다. 구약 시대의 강조점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무한한 심연이 놓여 있다는 사실에 있다. 하나님의 음성은 압도
적이었고, 하나님의 임재는 접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다) 시온 산의 이미지. 이제 성도는 이미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시온 산에
이르렀다. 이곳은 두려움과 공포의 장소가 아닌 즐거운 축제의 자리였다.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의 사역을 통해 우리는 이 복된 자리에 설 수 있게 되었다.
(따) 성도의 감격. 하나님의 백성이 거하는 시온 산에 이른 성도들은 이미 천국의
실재를 맛보고 있다. '천만 천사'(22절)와 '의인의 영들'(23절)은 천국에 거하는 존재
들에 관한 언급이며, '장자들의 총회'(23절)는 모든 성도들의 회합을 의미한다(출
4:22).
따라서 성도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며, 이를 위해 늘 그리
스도와 교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요 15:4,5; 요일 1:3).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삶은
또한 교회 중심의 신앙 생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
이다(엡 1:23). 예수는 우리와 같은 인성을 입으시고 우리를 위해 '뿌린 피'(24절)로
설득력있게 중보하신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근거는 그의 '뿌린 피'
이다. 우리의 가슴속에는 '뿌린 피'에 대한 감격이 남아 있는가 ?
(3) 영존하는 나라. 하나님은 왜 또 한번 땅과 하늘을 진동케 하시겠다(26절)고 하
셨는가 ? 그것은 진동치 않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함이다(27절). 땅과 하늘은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안정되고 영구적인 것으로 보일지라도 사실상 일시적인 것들에 불과하
다. 오직 흔들리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손한 영존하는 하나님의 나
라이다(28절). 그것은 영원한 존재이신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그
러므로 외부로부터의 박해가 아무리 격심하더라도 그것이 성도에게 있는 풍성한 은혜
를 빼앗아갈 수 없다. 도리어 이 같은 이유로 인해 주위의 흔들리는 상황을 흔들리지
않는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극복할 수 있다.
그러면 진동치 못할 나라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행할 바는 무엇인가 ? 먼저 은혜를
체험해야 한다(28절). 은혜의 체험이 없이는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사울이 사도 바울이 될 수 있었던 통로는 바로 다메섹 도상에서 고
난의 예수를 만났던 체험이었다. 은혜를 받음은 성도의 감사와 직결된다. 진정으로 하
나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긴다.
'경건함과 두려움'(28절)은 하나님의 위대성과 우리 자신의 무능력을 강조한다. 이것은 기쁨과 자발적인 경배의 상태이다. 29절은 신명기 4:24을 인용한 것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 속에 경건함과 두려움을 수반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경건함과 두려움을 지닌 자는 극심한 고난 속에서, 또한 유혹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한다. 감옥 속에서 행한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송은 무거운 철책을 끊어버렸으며, 죽음 앞에 선 한 가정의 가장인 간수를 살려냈다(행 16:19-34). 난파 직전의 휘몰아치는 폭풍우 속에서도 하나님만 의뢰한 모라비안들의 경건과 경외는 한쪽 귀퉁이에서 두려움에 떨었던 요한 웨슬레라는 한 청년으로 하여금 감리교(Methodist)의 창시자가 될 수 있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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