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 '실상이요'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스타시스'(* )는 '아래에'라는 뜻인 '휘포'(* )와 '서게 하다', 또는 '확립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히스테미'(* )의 합성어이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아래에 확립하다' 혹은 '...아래에 서다'를 뜻하는 것으로 '기초'(Morris), '실체'(KJV), '확증'(NIV), '객관적 실체'(Lane)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휘포스타시스'는 사람의 생각에 좌우되는 주관적인 실체가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객관적인 실체를 가리킨다. 이러한 객관적 실체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에 확신을 더하는 근거이다(Lane). 바꾸어 말하면 믿음은 그리스도인이 객관적 실체를 확신하는 것이다. 믿음의 이러한 특성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진리의 말씀을 견고히 붙잡게 하며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확신하게 한다(Grasser). 한편 저자는 본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정의함으로써 '믿음'과 '바람'(hope)을 거의 동일시 하였다. 이는 믿음의 미래 지향적인 특성을 강조한 것이다(Thompson).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 '보지 못하는 것들'의 헬라어 '프라그마톤...우블레포메논'(* ... )에서 '것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라그마톤'은 '되어진 것', '사실', '행위', '사건', '업무'등을 의미하는 말로서 인간사(human events)를 의미한다. 저자는 '프라그마톤'을 사용하여 믿음을 인간사의 영역에 관련시켜 말하고 있다(Lane). 이는 '보지 못하는 것들'이 플라톤의 철학에서 말하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늘나라의 것들이 아니라 아직 보여지지 않은 사건들 즉 종말론적 미래에 나타날 사건들을 가리키는 것임을 시사한다(Williamson). 믿음은 미래 지향적이다. 이와 같이 미래를 내다보게 하는 믿음의 능력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고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해 담대하고 진지하게 나아가게 한다(Lane). 한편 '증거'의 헬라어 '엘렝코스'(* )는 법률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는 것으로서(Morris) '객관적인 증거' 혹은 '증명'을 의미한다. 이것은 믿음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임을 시사한다.
=====11: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 '선진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이 프레스뷔테로이'(* )는 '조상들'과 거의 동일한 의미로(1:1) 구약성경에 나오는 신앙위인들을 지칭한다(Morris). 한편 '이로써'의 헬라어 '엔 타우테'(* )는 여성 지시 대명사로서 1절에서 언급한 '믿음'(* , 파스티스)과 연결된다. 구약 시대의 신앙 위인들은 자신들의 확고한 믿음의 결과로 하나님으로부터 확신과 증거를 얻었다.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 '믿음으로'(* , 피스테이)는 본절에서 31절에 이르기까지 헬라어 본문의 첫 단어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옛 선진들이 믿음으로 살고 행동한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4-31절까지는 '피스테이'가 구약성경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들에 대해 사용된 반면 본절에서는 저자와 수신자들을 포함한 당시의 모든 그리스도인에 대해 사용되었다. 본절에서의 강조점은 헬라어 원문의 첫 문장인 '믿음으로...우리가 아나니'(* , 피스테이 노우멘)로 진리에 대한 인식이 믿음을 통해서 가능함을 시사한다. 특별히 본절은 창 1:1에 나타나는 세상 창조에 대한 인식과 연결되어 하나님께서 모든 세계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사실은 오직 믿음으로만 인식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 '보이는 것'의 헬라어 '토 블레포메논'(* )은 헬라적 유대주의(hellenistic judaism)의 전통에서 기인한 것으로 가시적인 우주를 가리킨다(외경 지혜서 13:7). 한편 '나타난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 파이노메논'(* )은 헬라어 오랜 철학적 전통에서 기인한 표현이다(Williamson, Philo). 저자는 유대주의 전통과 헬라 철학에서 사용되는 단어를 차용하여 그 내용을 부정하고 있다. 이는 저자가 당시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플라톤과 필로의 우주론, 즉 태초 혼돈 상태에 있었던 가시적인 물질들을 창조자가 이데아나 원형을 사용하여 질서를 부여함으로 우주가 생성되었다는 우주론을 배격하고 특히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헬라적 유대주의의 관점에서 창세기 1장을 이해하려는 시각을 막기 위한 것임을 시사한다('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이 형태를 갖추지 못한 물질들로부터 세계를 창조하였다';지혜서 11:17, Lane). '보이는 것' 즉 물질 세계는 '나타난 것' 즉 창조 이전에 존재했었던 어떤 물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무(無)에서 창조된 것이다(Ehrhardt). 즉 저자는 '무(無)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의 교리를 강조하고 있다(Widders, Bruce, Williamson).
=====11:4
저자는 2절에서 언급한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에 대한 실례를 본절에서 시작하여 31절까지 나열하고 있다.
믿음으로 아벧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 본절은 창 4:3-5에 있는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창세기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아벧의 제물은 열납(悅納)하셨으나 가인의 제물은 거절하신 것으로 나타나며 그 이유에 대한 언급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70인역에 따르면 가인의 제물이 거절당한 이유가 제사 절차상의 결함 즉 가인은 제물을 드릴 때 제물을 나누는 법대로 나누어 놓지 않았고 아벧은 제사 법대로 바르게 제물을 잘라서 드렸기 때문이라고 한다(Aptowitzer, LXX 창 4:7). 또한 필로에 의하면 아벧의 제물은 생명체였던 반면에 가인의 것은 생명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요세푸스는 가인의 행동에 도덕적인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는 아벧이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밝히고 있다. 즉 아벧이 드린 제사는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는 행위였다(Morris). 따라서 아벧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은 것은 자신이 드린 제사를 통해 나타난 믿음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 이는 하나님께서 아벧의 제물을 열납한 사실을 가리킨다(창 4:4). 즉 하나님께서는 아벧의 믿음과 의로움을 그가 드린 제물을 열납하심으로 증거하셨다.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 본문은 창 4:10의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는 말씀을 암시한다. 창세기에서는 '핏소리'로 되어있는 반면 헬라어 본문에는 '디헤스'(* , '그것을 통하여')로 되어있다. '헤스'는 '믿음'을 뜻할 수도 있고 '제사'를 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가 말한대로 아벧이 드린 제사가 그의 믿음의 표현이기 때문에 믿음이든 제사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벧은 죽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언제까지나 살아있는 소리가 되어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훈을 준다(Lenski).
=====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 본절은 창 5:21-14에 나오는 에녹에 관한 인용이다. 맛소라 본문에는(MT)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심'으로 되어있는 반면 70인역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옮기셨으니'로 되어 있다(창 5:24, Bruce, Morris, Lane). '옮기셨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테데켄'(* )은 '변화하다'라는 뜻을 갖는 동사 '메타티데미'(* )의 단순 과거 수동형으로 '바뀌다', '변화되다'를 의미한다. 이는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몸이 변화되어 하늘로 올리움 받았음을 암시한다. 저자는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하늘로 옮기울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에대해 '믿음으로'라고 진술한다. 그러나 구약성경이나 유대 전승에서는 에녹이 믿음을소유한 사람이라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며 단지 유대 전승에서 모든 세대의 회개의표본으로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시락의 교회서 44:16, Lane, Bruce). 저자가 이미 언급한 대로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죽은 행실을 회개함'은 개종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에(6:1) '하나님께 대한 신앙' 즉 믿음은 회개와 동일시 될 수 있으므로 유대 전승에서 회개의 표본으로 나타났던 에녹은 믿음의 표본으로 제시될 수있다(Luhrmann). 에녹의 믿음은 그가 옮기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이었으며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근본 요인이었다(Lane).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 본문은 에녹이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근거를 나타내는 것으로 창 5:22-24의 인용이다. 맛소라 본문(MT)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창 5:22,24) 70인역에서는 이를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본절뿐만 아니라 에녹에 관한 유대 전승마다 나타나는 어구로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임을나타내고 있다(시락의 교회서 44:16;지혜서 4:10,14). 저자는 '믿음'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과 연결지어 다음 절에서 '믿음'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하나님께서 저를 옮기우셨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믿음과 필연적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믿음이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저자는 그 '믿음'에 대해서 두 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1)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 '그가 계신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런 믿음은 사단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약 2:19). 그것은 구약 시대 선지자들을 통해 알려지고 마지막 때에 아들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1:1, 2) 하나님의 실존적(實存的) 존재를 뜻한다(Bruce).
(2)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 '상 주시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미스다포도테스'(* )는 '보상하다'라는 의미로 '상'은 '하나님을 아는 즐거움'을 가리킨다(Bruce).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최상의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시 43:4).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보답하시는 공의로우신 속성을 소유하신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 '경고하심'의 헬라어 '크레마티스데이스'(* )는 '신적인 의사 소통' 혹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응답' 혹은 '신탁'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8:5;12:25). 노아는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홍수로 온 땅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계시를 받고 방주를 예비하였다. 이것은 노아가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계시를 액면 그대로 믿었음을 반증한다. 즉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1절). 한편 '경외함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율라베데이스'(* )는 문자적으로 '거룩한 두려움'이란 의미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행동하다'를 의미한다(Robertson). '율라베데이스'는 '거룩한'에 강조점을 둘 수도 있고 '두려움'에 강조점을 둘 수도 있으나 전자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노아가 두려움에 못이겨 방주를 예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준비하였기 때문이다(Morris).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 '이로 말미암아'(* , 디 헤스)에서 '이'의 헬라어 '헤스'(* )는 지시 대명사로 '믿음'이나 '방주' 또는 '구원'을 가리킨다. 이 세 가지 중에서 본문의 문맥으로 보아 '헤스'는 '믿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by his faith, NIV, Robertson). 노아가 믿음으로 방주를 예비하였을 때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비웃었으나(Bruce) 노아의 믿음은 옳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세상 사람들은 홍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불신앙에 대해 정죄받았다. 결국 노아의 믿음은 그 당시 사람들의 불신앙을 정죄한 것이었다(Morris). 한편 '믿음을 좇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 피스틴'(* )은 노아의 의가 실현되는 방법이나 조건을 나타내는 것으로 노아가 믿음이라는 규범을 따라 하나님에게서 의를 수여받았음을 시사한다. 노아는 믿음을 따라 의로운 사람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증거하였다(창 6:22, Bruce). 따라서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는 노아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응답한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에게 수여하신 의를 공유하고 상속하였음을 시시한다(Lane).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때에 순종하여 - 저자는 본절에서 19절까지 유대인들의 가장 위대한 조상인 아브라함을 믿음의 표본으로 제시한다. 앞서 언급된 아벧과 에녹, 그리고 노아는 그 믿음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이 구약 성경에 없어서 그들에 대한 기록을 토대로 추정할 수밖에 없었으나 아브라함의 경우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라는 말씀에서 그의 믿음이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해당하는 헬라어 '칼루메노스'(* )는 '칼레오'(* )의 현재 분사형으로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은 즉시 즉각적으로 순종하였음을 시사한다(Westcott). 순종과 믿음은 불가분의 관계로 아브라함의 순종은 그의 믿음을 외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 아브라함은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창 12:1)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즉시 길을 떠났으며 가나안 땅에 이르렀을 때도 그는 그곳이 하나님이 자신과 후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신 땅인지 모르고 있었으며(창 12:5, 6), 하나님께서 다시 가르쳐 주신 후에야 알았다(창 12:7). 아브라함은 찾아가야 할 목적지도 알지 못한 채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그 명령에 순종하여 길을 떠났다.
=====11: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 '우거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로케센'(* )은 나그네처럼 기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발 붙일 만큼의 유업도 얻지 못하였으며(행 7:5),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헤브론 근처의 막벧라 밭을 사라의 매장지로 사기전까지는(창 23장)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죽을 때까지 보지 못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그와 동일한 약속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삭과 야곱도 그 약속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삭과 야곱도 그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하고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 '장막에 거하였으니'는 완전히 정착된 생활을 하지 못하고 나그네 생활을 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약속해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바를(창 12:2, 3) 성취하실 것을 굳게 믿었다.
=====11: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 본절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참고 기다리며 믿음의 인내를 할 수 있었던 이유를 나타낸다. '터'는 '기초'를 의미하는 것으로 '터가 있는 성'은 9절의 '장막'(* , 스케나이스)과 상반되는 표현이다. 장막은 터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이동하기 위한 임시 거처인 반면에 '터가 있는 성'은 한 곳에 고정된 영구한 집이다. 이 성은 지상에 있는 어떤 도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진동치 못하며 장차 올(12:28;13:14) 영원한 하늘 도성으로(Bruce, Lenski) 하나님에 의해 견고히 세워진 '시온 성'을 암시한다(시 48:8;87:1-3, 5;121:3;사 14:32;33:20, Lane). 한편 '경영하시고'의 헬라어 '테크니테스'(* )는 '기술'을 뜻하는 '테크네'(* )에서 파생된 단어로 '기술자', '설계자' 혹은 '건축가'를 뜻한다. 이를 앞서 언급된 '성'과 결부시킬 때 본절에서는 '설계자'나 '건축가'의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지으실'의 헬라어 '데미우르고스'(* )는 '사람의 무리'를 뜻하는 '데미오스'(* )와 '일'이란 뜻의 '에르곤'(* )의 합성어로서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자'의 뜻을 지닌다. 이 두 가지 표현은 하나님께서 실제적으로 성을 건축하셨음을 나타내는 것으로(Morris)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손수 지으신 하늘나라의 도성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믿음의 인내를 할 수 있었음을 시시한다.
=====11: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 '잉태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스 카타볼렌 스페르마토스'(* )는 남성의 정액을 생산하는 기능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헬라 관용구이기 때문에(Lucian) 이를 사라에게 적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라 자신'이란 말을 주격으로 보지 아니하고 대격으로 보아 '아브라함이 사라 자신과 함께...잉태하는 힘을 얻었다'라고 해석하면 된다(Bruce). 비록 사라가 잉태하게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믿지 못하고 웃었다 할지라도(창 18:9ff.) 사라가 끝까지 의심하였다고는 볼 수 없다. 사라는 곧 아브라함의 믿음에 동의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사라가 아브라함과 한 마음으로 믿음에 동의하지 않았다면 둘 사이에 부부 관계가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며 이삭도 잉태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Morris). 두 사람은 늙어 아이를 생산할 능력이 전혀 없었으나 약속하신 하나님의 미쁘심 곧 신실하심을 믿음으로 이삭을 출산할 수 있었다.
=====11: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은 아브라함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가 자손을 낳을 수 없었던 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한편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는 구약성경에 자주 나타나는 관용구로서 수많은 무리를 가리킨다(창 15:5;22:17;출 32:13;신 1:10;10:22).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수많은 무리를 자손으로 둔다는 기적적인 약속의 성취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라고 한 바울의 진술처럼(롬 4:19) 아브라함의 변치않는 믿음을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셨기 때문이었다(롬 4:22).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 '이 사람들'이란 8-12절에 언급된 인물들 즉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을 가리킨다. 그들은 모두 가나안 땅과 그 후손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들이었으나, 그 약속의 성취는 보지 못한 채 죽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실행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일생을 살았다. '보고'는 신체적인 눈으로 보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약속에 대한 것을 마음으로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Morris). 즉 그들은 믿음의 눈으로 약속의 성취를 바라보았다. 이 약속의 성취는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이라고 할 수 있으나 보다 근본적인 것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성취된 구원을 가리킨다(Bruce).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의 때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다가 보고 기뻐하였다(요 8:56).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 '외국인과 나그네'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 한 말 즉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창 23:4)와 야곱이 바로에게 한 말 즉, '내 나그네 길...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창 47:9)을 인용한 것이다. 저자는 본절에서 옛 신앙의 위인들의 그러한 고백을 통해 그들이 이 땅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나그네로 살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참된 소망을 하늘나라에 두고 살았음을 강조한다.
=====11: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앞절의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한 옛 조상 즉 아브라함이나 야곱과 같은 이들을 가리킨다. 이들이 자신들을 가리켜 나그네라고 한 것은 자신들이 살았던 이 땅이 본향(本鄕)이 아님을 분명히 한 것이다(Bruce). '본향'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트리다'(* )는 '선조의 땅', '고향'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들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존재하였으며 그들의 목적지가 하늘나라였음을 시사한다.
=====11:15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 본절의 '본향'은 하늘나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나 야곱이 가나안을 가기 위해 떠났던 지상의 고향을 가리킨다. 그들은 지상의 고향을 자신들의 본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만일 그랬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에 쉽게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아브라함은 이삭을 결혼시키려고 할 때 가나안 땅의 여인들 중에서 신부감을 택하지 말고 자신의 고향, 즉 메소포타미아로 가서 신부감을 구해오도록 그의 종에게 당부하면서도 '삼가 내 아들을 그리고 데리고 돌아가지 말라'(창 24:6)고 하였다. 야곱 역시 메소포타미아를 고향으로 생각하지 않았다(창 30:25;31:3). 아브라함은 사라를 가나안 땅에 묻었으며 자신 역시 그 곳에서 장사되었다(창 23:19;25:9-10). 이삭이나(창 35:27-29) 야곱도(창 49:29-33;50:13) 가나안에서 장사되었다. 그들이 이 땅에서 고향을 찾았다면 자신들이 태어난 지상의 고향으로 충분히 돌아갔을 것이다(Bruce). 그러나 그들의 본향은 하늘나라에 있었기 때문에 지상의 고향을 찾지 않고 믿음으로 하늘나라의 영원한 고향을 찾고자 했다.
=====11: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 그들이 찾았던 고향은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좋은 곳, 즉 '하늘에 있는 고향'이었다. '사모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레곤타이'(* )는 '...을 향해 뻗치다', '열렬히 갈망하다'라는 의미로 그들이 간절히 하늘나라를 갈망하였음을 시사한다. 한편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는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출 3:6, 15, 16)이라고 말한 사실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살았던 이스라엘의 족장들을 결코 부끄러워 하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하늘나라에 '한 성'을 준비해 놓으셨다. 이 '성'은 '장막'(9절)과는 대조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처소를 가리킨다.
=====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 부터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다(창 22:1-18).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명령은 아브라함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으나 그는 순종하였다. 혹자는 이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자식마저 포기해야함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고 주장한다(Lane).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생자가 이삭을 바치라고 명하셨을 때 이는 그에게 이겨내기 어려운 혹독한 믿음의 시험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수많은 자손을 허락해 주신다는 약속의 성취 여부가 이삭의 생명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부자간의 애정 문제를 제외하고라도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 사이에 커다른 모순이 생기게 됨에 따라 아브라함은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Morris). 그러나 이런 모순을 제거하는 일은 아브라함이 처리할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셔야 할 문제였다(Bruce). 그러기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킬 독생자를 하나님께 드렸다.
=====11:18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라고 약속하셨으며(창 12:2), 이러한 아브라함의 민족은 오직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한다고 약속하셨다(창 21:12). 이삭을 통해 아브라함의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그 이삭을 바치라고 요구한 것은 하나님 자신의 약속에 위배되는 행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그 약속하신 바를 이루신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Morris).
=====11:19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생각한지라'의 헬라어 '로기사메노스'(* )는 부정 과거로 단순한 견해가 아니라 단호한 내적인 확신이나 신념을 나타내는 말이다(Westcott, Lane).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 즉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그의 믿음은 아브라함 자신의 과거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아브라함은 죽은자와 다름없는 자신의 몸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인 이삭을 낳을 수 있었다(11, 12절). 아브라함의 이러한 경험은 자신의 아들 이삭이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해 주었으며(Moxnes, Teodorico) 그 확신으로 인해 자신의 종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창 22:5). 만약 아브라함이 이삭이 다시 살 것을 믿지 못하였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Bruce, Morris).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 '비유컨대'의 헬라어 '엔 파라볼레'(* )에서 '파라볼레'는 '유형', '상징', '예시'를 뜻한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이삭이 제물로 바쳐진 사실을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상징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Bruce) '엔 파라볼레'는 본절이 '예수의 부활에 대한 예시'임을 암시한다(Lane). 한편 아브라함이 정작 이삭을 죽이려고 칼을 쳐들었을 때(창 22:10) 그에게 있어서 이삭은 죽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Bruce). 그러나 그 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는 음성을 들었을 때 그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었다.
=====11: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하나님은 이삭에게 그 약속을 다시 확인시켜 주셨으며(창 26:2-5) 이삭은 장차 이루어질 이 약속받은 축복을 그의 두 아들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해 주었다(창 27:27-29, 39, 40). 이 때 합법적인 축복의 상속자는 맏형인 에서였으나 야곱이 속임수로 그 축복을 가로챘으며 에서는 그 나머지 축복을 받아야 했다(창 27:39, 40). 저자는 이러한 부당성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그는 이삭이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두 아들에게 축복하였다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삭의 이러한 행위는 믿음의 본질, 곧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1절)라는 것에 대한 실증적인 예(例)에 해당한다(Bruce). 한편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은 사실이 비합법적인 것이라고 단정할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실을 나중에 이삭이 알게 되었을 때 그 축복을 무효화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창 27:33)고 야곱을 인정해 주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 었기 때문이다(창 25:23).
=====11: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 본문은 20절과 마찬가지로 족장 야곱이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믿고 아들들에게 축복하였음을 나타낸다(Morris). 야곱은 자신의 임종이 가까왔을 때 손자인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축복하였다(창 48:13-20). 이 때 요셉은 장자의 축복을 장자인 므낫세가 받을 수 있도록 하였으나 야곱은 팔을 어긋나게 하여 오른손으로 차자인 에브라임 머리에 얹고 왼손으로 장자인 므낫세의 머리에 얹어 장자의 축복을 차자에게 해주었다(창 48:14, 19, 20). 이러한 사실은 장자에게 축복과 혜택을 부여하는 인간의 관습에 구애됨 없이 하나님은 그의 주관대로 뜻을 이루는 분이심을 시사한다.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 본문은 창 47:31(LXX)의 인용이다. 맛소라 본문(MT)에는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경배하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지팡이'와 '침상'이라는 두 가지로 번역이 되는 것은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 (mth)가 모음을 붙이기에 따라 '말테'(matteh, '지팡이')로 읽을 수도 있고 '밑타'(mittah, '침상')로 읽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본문은 70인역이므로 전자를 택하고 있다. 야곱이 그의 임종이 가까왔을 때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다는 것은 지상에서 '외국인과 나그네'(9, 13절)같이 살았던 그의 삶을 특징짓는 상징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왜냐하면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지팡이는 순례자의 상징적인 물건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Michel).
=====11: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 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 본문은 창 50:24, 25의 내용에 대한 인용이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켜 마침내 선조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실 것과 그 때 자신의 해골을 가지고 갈 것을 유언하였다(출 13:19;수 24:32). 이러한 사실은 요셉의 믿음을 잘 예증해 주는 것으로 자신의 선조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 내려온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이라고 확신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이르게 될 것을 예언하였다. 이는 요셉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성취하신다는 믿음을 소유하였음을 시사한다.
앞장은 그리스도의 일회적 희생으로 말미암은 구속의 완전성과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실천적 신앙을 강조하였다. '믿음장'으로 널리 알려진 본장은 앞장에서 언급한 빌음에
대한 확대설명을 전개함과 동시에 다음 장에 언급되는 소망의 선포에 대한 예비적 역
할을 하고 있다.
본장의 독자들은 긴박한 상황 속에 처해 있었으며(10:32-34), 그로 인해 안식과 보
상과 본향을 갈망했다. 그러나 저자는 피안의 응답을 함으로써 사람들을 위로하지 않
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담대하게 행동했던 신앙의 선배들을 통해
그 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 죽음과 같은 절망 속에서 믿음으로 승리했으므
로, 현재의 고난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 약속된 미래를 바라보도록 해준다.
본장의 구체적 분석에 들어가기 전에 본장의 구조적 특징과 강조점을 살펴보기로 하
자.
(1) 구족적 특징. 본장은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 규정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다음 하나님 말씀에 의한 창조가 언급되고 종말론적 전망이 제시되면서 믿음의 증인들
의 역사를 꿰뚫고 있는 '틀'이 제시된다.
본장은 성경의 구절들을 한 개념으로 총괄하는 랍비 문서와는 달리 병렬문과 인용문
들을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있다. 믿음 결코 성경의 보도 자체를 통해 부여되지는 않는
다. 오히려 저자는 성경의 보도 속에서 색출해내고 있다. 이와 비슷한 예는 구약성경,
초대교회, 클레멘트서에서 나타난다. 각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까) 구약성경. 구약시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신앙의 선조는 아브라함이며, 선
민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주요한 사건은 출애굽이다. 이스라엘은 민족적 수난에 직면할
때마다 그 당시의 지도자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신앙과 출애굽 사건을 회상하면서 힘을
얻곤 하였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의 수난의 역사는 다시 회복되곤 하였다. 회상의 형
태는 두 가지로 설교의 형태(수 24:2-13; 삼상 12:6-15)와 기도의 형태(느 9:6-37)이
다.
(다) 초대 교회. 초대 교회에서도 본장과 유사한 내용들을 찾아볼 수 있다. 스데
반은 순교하기 직전 지혜와 성령으로 공회 안에서 열띤 설교를 하였다(행 7:1-53). 대
적들로부터 고소를 당한 그는 이스라엘의 구속사를 개괄함으로써 구약 시대의 선진(先
進)들의 신앙의 본질을 설파하고 복음의 보편성을 선포하였다.
(따) 제1 클레멘트서.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는 신약성경에 바로 이어
지는 가장 초기의 저작자들 중 하나였던 교부(敎父)로서 92-101년 동안 주교 자리에
있었다. 그의 로고스론은 변증보다도 스토아주의에 보다 더 의존하고 있다. 그의 제 1
클레멘트서(17:1-19:3)는 본장과 구조적 유사성이 짙으므로 서로 비교해 보는 것은 유
익하다고 본다.
본장과 제 1클레멘트서의 형태는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짤막한 서론(brief
introduction)으로서 '증거를 얻었다'라는 진술로 특징 지워진다. 둘째, 신앙 위인들
에 대한 총괄적 내용으로서, 고난의 때에 하나님을 향해 어떠한 반응을 나타냈는지를
기술한다. 셋째, 난관을 잘 극복하도록 독자들을 고무시키는 내용으로 끝맺는다. 이
세 부분을 구체적으로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
| 구 분 | 히 11 장 | 제 1 클레멘트서(17:1-19:3) |
+--------------+-----------------------------+---------------------------------+
| | 1 , 2 절 | 17 : 1 |
| 서 론 +-----------------------------+---------------------------------+
| | 증거를 얻었음 | 증거를 얻은 사람들 |
|(Introduction)|( ,|( |
| | 에마르튀레데산) | , 투스 메마르튀레메누스)|
+--------------+-----------------------------+---------------------------------+
| | 4 절 | 17 : 2 |
| +-----------------------------+---------------------------------+
| |(1)믿음으로 |(1)아브라함은 |
| 내 용 순 위 |(2)아벧은 |(2)커다른 증거를 받았음( |
| |(3)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 , 에마르튀레데)|
| (Exemplars) | 드림 | 하나님의 친구로 불림 |
| |(4)그로 인해 증거를 받음 |(3)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겸손 |
| |( , 에마르| 하게 말하길 |
| | 튀레데) | "나는 흙이요 재요" |
+--------------+-----------------------------+---------------------------------+
| | 39절 , 12:1-2 절 | 19 : 1-3 |
| +-----------------------------+---------------------------------+
| 결 론 |모두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위대한 신앙인들의 복종을 통해 증 |
| |받았으나( |거를 지금까지 받고 있음 ( |
| (Conclusion) | , 마르튀레덴테스) | ,메마르튀레|
| |약속을 받지 못함. |메논). |
| |인내로 경주하며 예수를 바라 |평화의 목표를 바라보며 달려 가자 |
| |보자 | |
+--------------+-----------------------------+---------------------------------+
본장과 제1 클레멘트서 간에 강하게 일치되는 점들에 대하여는 양자간의 문학적 친
밀성이라는 점에 의하여 설명될 수 있다. 위의 도표를 살펴보면 두 가지의 특징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증거하다'( ,마르튀레오)라는 동사의 반복이다. 이것은 수
동태 분사와 부정사의 형태로서 한 개인의 인품과 성격에 중요성을 두기 보다는 구속
사적 사건에 관심을 두고 있음을 나타낸다. 즉 역사 속에서 구속을 이룬 주체는 '하나
님' 자신이며, 각각의 신앙 위인들은 하나님의 구속 행위에 믿음으로 순종하였음을 시
사한다. 둘째는, 1,2절과 39절이 본장의 내용을 지탱해 주는 '까치발'(inclusio)의 역
할을 한다.
+---------+--------------------------------------------------------------------+
| 절 | 내 용 ( Text ) |
+---------+--------------------------------------------------------------------+
| |"믿음( ,피스티스)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
| 1,2 절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
| | , 에마르튀레데산). " |
+---------+--------------------------------------------------------------------+
|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 |
| 39 절 | 디아 테스 피스테오스)증거를 받았으나( , |
| | 마르튀레덴테스)." |
+---------+--------------------------------------------------------------------+
곧 1,2절은 서론이요, 39절은 결론으로서 그 사이에 포함된 내용을 탄탄하게 엮어주
고 있다.
(2) 강조점. 본장에서 강조하는 바는 믿음의 개념과 믿음의 선진들 및 믿음의 특징
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까) 믿음의 개념. 저자는 본장에서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필요한 선행 조건이 믿
음이라고 피력한다. 그러나 본장에 나타난 믿음의 개념은 요한이나 바울의 개념과는
약간 다른 것으로서 독특한 성격을 띤다. 요한과 바울의 믿음은 예수를 인격적으로 믿
고 의지함으로써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구원을 얻게 된다는 개념이다. 그러나 본장에
나타난 믿음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를 현실화(現實化)시키는
실천적 면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다) 믿음의 선진들. 믿음의 사람이란 인간이 경험하는 현상 세계가 궁극적 가치
를 지니지 못하고 있음을 아는 자이다. 본장에 예시된 믿음의 선진들은 현실적인 상황
을 초월하여 미래를 바라보았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였다. 저자는 아벧,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뿐 아니라(4-16절) 그밖의 족장들과 사사, 선지자들을 살펴보고
있다(17-32절). 여기서 우리는 이들 가운데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극한
역경 속에서도 믿음과 소망을 잃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모두 하나님의 약속을
죽은 뒤에라도 성취받았다는 점이다.
(따) 믿음의 특징. 본장은 단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진술하기보다는 고
통과 죽음을 당했던 믿음의 사람들을 열거해 놓고 있다. 믿음의 특징은 이 세상에서
외부적인 축복이 주어지든, 고난이 주어지든 간에 '궁극적인 하나님의 약속'을 부여잡
는 것이다. 본장은 성도들로 하여금 핍박이 있더라도 믿음 안에 진실되이 거하도록 하
기 위해 기록되었다.
(3) 내용 분석. 본장은 크게 두 단락으로 나뉜다. 1-3절은 믿음에 대한 보편적 묘사
요, 4-40절은 그 묘사를 예증하고 선언한다. 즉 후자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신앙 위인
들의 실례들을 상세하게 열거함으로써 믿음에 대한 묘사를 예증한다. 본장을 세분화하
여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
| 구 분 | 인 물 | 중 심 내 용 | 참고 구절 |
+-------+---------+----------------------------------------------+-------------+
| 1-3절 | 서 론 | 믿음의 정의 | 롬 8:24 |
+-------+---------+----------------------------------------------+-------------+
| | 아 벧 | 더 나은 제사를 드림 | 창 4:3-5 |
| 4-7절 | 에 녹 | 하나님과 동행 | 창 5:22-24 |
| | 노 아 | 방주를 예비 | 창 6:9,22 |
+-------+---------+----------------------------------------------+-------------+
| | 아브라함| 순종, 본향을 바라봄 | 창 22:1-14 |
| 8:22절| 이 삭 | 야곱에게 축복 | 창 27 장 |
| | 야 곱 | 요셉의 각 아들을 축복 | 창 48:15-21 |
| | 요 셉 | 해골을 언약의 땅에 메고 가라고 명함 | 창 50:24-26 |
+-------+---------+----------------------------------------------+-------------+
| 23-31 | 모 세 |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함 | 출 2:11-15 |
| 절 | 라 합 |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 | 수 2:1-24 |
+-------+---------+----------------------------------------------+-------------+
| 32-38 | 무명의 | 생생한 신앙의 공적을 쌓았으나 |왕상 18:4,13 |
| 절 | 성도들 | 약속을 받지 못했음 | 단 3:23-28 |
+-------+---------+----------------------------------------------+-------------+
|39-40절| 결 론 | 더 좋은 것을 예비하신 하나님 | 히 12:2 |
+-------+---------+----------------------------------------------+-------------+
위의 도표에서 살펴보듯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의 삶들은 구속사적 지평을 활짝
열어준다. 믿음의 선진들은 죽음과 같은 모진 상황을 뚫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인내하였다.
1. 믿음의 정의(11:1-3)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삶을 경주한 선진(先進)들은 모두 보이지 않는 것을 믿었으며
(1절) 미래에야 성취될 약속을 굳게 신뢰하였다. 더욱이 고통스러운 일들과 시련들이
그들의 삶 가운데서 장애로써 가해졌으나 그것들은 결코 그들의 믿음을 꺾을 수 없었
다. 1-3절에 나타난 믿음의 정의를 두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자.
(1) 실상(實狀)과 증거(證據). 본장은 믿음을 두 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바라는 것
들의 실상'과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그것이다. 실상과 증거는 어떤 의미를 가
지고 있는가 ?
(까) 실상. 본서의 저자는 믿음을 참고 기다리는 소망으로 간주한다. 여기서 실상
이란 그 자체가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믿음으로 실체화된 것을 의미한다.
곧 마음으로 굳게 믿고 그대로 행하는 '확신'을 의미한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
실체들이 존재함을 알게 하고 그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한다. 그러나 믿음은 대상에 대
한 단순한 앎으로써의 지식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지식 이상의 확신을 말하는 초이성
적인 것이다.
(다) 증거. 증거란 보이지 않는 것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확신을 증명해 주는 것이
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증거로서 우리 안에 아로새겨짐에 따라 우리 안에는 믿음의
삶을 가능케 하는 역동적 힘이 생긴다. 이는 성령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살아 숨쉬기 때문이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흔들림 없는 확신 가운데서 살도록 하며
결코 낙심하지 않게 한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삶의 전영역 속에서 모든 일에 적극적
으로 여유로 대처할 수 있다(마 8:8). 왜냐하면 비록 믿음의 소유자들이 연약성을 띤
인간일지라도, 모든 사건과 상황을 통치하시며 믿음의 소유자를 완전케 하시는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12:2; 고후 4:7). 이처럼 믿음은 추상적 개념이 아닌
인간의 삶을 통해 실감나게 표현되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2) 창조된 세계. 본장은 창조 질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장엄하신 권능에 대한 믿음
을 강조하기 위해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있다. 실제로 본장은 그리스도께서 창조 사역
에 참여하신 것을 증거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2절).
본서는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 70인역을 사용하였다. 70인역은 창조 기사의 시초를
'땅은 보이지 않았다'( ,아오라토스)라고 기록하였다. 이와 동일한 구
절은 27절에서 '보이지 않는 자' 즉 하나님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무한하
신 권능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권능이다. 창조 부분에서 저자가 말하고 싶
은 것은 이 세계가 바로 '하나님의 세계'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 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창조를 인식한 자는 믿음으로 행동했으며 그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보여주려 하였다.
* 믿음에 대하여. 본장의 믿음은 1세기 말의 성도들의 상황과 관련된 것으로 핍박
과 박해 속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을 의미
한다. 이제 본 주제 강해에서는 믿음에 대한 성경적 이해와 철학적 논의들 및 믿음의
내용과 삶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믿음에 대한 성경적 이해.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내
용에 대해 굳게 신뢰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약성경에서의 믿음은 믿는 내용을 진리로
서 받는 것, 그리고 확신과 깨달음으로써 표현된다. 각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까) 구약성경의 믿음. 구약성경에 있어서 하나님은 당신의 역사적 행위(歷史的
行爲)와 예언자들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의지를 계시하였다. 구약성경의 70인역에서
'피스티스'9 )혹은 '피스튜에인'( )으로 번역된 몇 가
지 중요한 히브리어 원문의 단어들은 '바타흐'( , '안전함','걱정이 없음'),
'하사'( , '도피를 찾다'), '카와'( , '기다리다', '견디다') 등이다. 그
러나 '믿음'에 적절한 단어는 '헤민'( )이라는 동사이다. '아멘'은 이 동사의
어근인 '아만'( )으로부터 유래한다. 이 동사는 확실성(確實性)과 신실(信實)함
에 대한 신뢰를 의미한다.
이처럼 구약성경의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며 그것은 하나님에게 '자기의 실존
을 완전히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사 7:9).
(다) 신약성경의 믿음. 신약성경에서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것과 예수를 믿는 것
이 결합되어 있다. 그것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주(主), 그리스도로 신앙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은 단순히 하나님의 대언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화된 말씀(요
1:14)이요 행동하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는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신뢰와 결합
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신뢰한다는 것은 그가 선포하였고, 약속하였으며 그의 몸으로
써 체현(體現)한 하나님 나라에 속하며 이것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믿는 사람은
약속(約束) 가운데서 열려진 새로운 현실을 보기 시작하며 '일반적인'현실을 보지 않
는다.
(2) 철학적 논의들. 믿음에 대한 최초의 사상적 동화(同化)는 변증가의 신학에서 찾
을 수 있다. 고대 기독교 신학은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
다'(Credo quia absurdum Tertullian)라는 새로운 명제로 믿음을 나타냈다. 또한 고대
신학에서는 '교회의 권위를 참이라고 받아들이는 믿음'에 강조점을 두었다. 어거스틴
(Augustine)조차도 '권위에 대한 신앙'을 주장했다. 안셀무스(Anselmus)도 '나는 믿기
위해서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고 말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형상(形相) 없는 믿음'(fides informis)과 '형상을 입은 믿음'
(fides formata)을 구별한다. 그는 믿음과 이성 사이에는 조화가 있다고 했으며 '은총
은 자연을 무너뜨리지 않고 오히려 자연을 완성한다'고 하였다. 종교 개혁은 믿음을
새롭게 바라보았다. 루터(Luther)는 믿음과 이성을 대립시켜 놓았으며 믿음은 본질적
으로 신뢰임을 주장했다.
정통주의에서는 '앎'(지식)의 단계를 우선한다. 경건주의에서는 정통주의의 객관적
신앙에 반대하는 주관적 신앙을 강조한다. 계몽주의에서는 믿음을 이성의 내적 권위와
조화시키려고 하였다. 칸트(Kant)의 비판주의는 계몽주의를 넘어선다. 그는 이론 이성
은 단지 현상의 세계만을 붙잡을 수 있을 뿐 현상을 넘어서 있는 신(神)은 파악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신앙에 자리를 내주기 위해서 지식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고 하였다.
그러나 관념론 신학에서는 특수한 믿음 곧 주체적 신앙을 내세우면서 믿음을 '감정'
이나 '내면성의 영역'으로 돌린다(Schleiermacher).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에 따
르면, 기독교는 교리의 집성이 아니고 역설이며 실존의 내면성이다.
(3) 믿음의 내용과 삶. 믿음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승인(承認)이며, 믿
음의 삶은 주되심(Lordship)에 대한 인정(認定)이라고 볼 수 있다.
(까)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승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은 유일회적
(唯一回的)으로 일어났다(10:12). 믿음의 내용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된 우
리를 대신하여 고난당하셨고. 이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 새로운 계약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음에 대한 승인이다. 믿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안에 계
시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이며 말씀을 인식하며, 알며, 통찰하는 것이다.
(다) 주되심(Lordship)의 인정. 본회퍼(Bonhoeffer)에 의하면 믿음은 삶을 나 자
신 밖에 있는 근거 위에 정초(定礎)시키는 것, 즉 영원하고 거룩한 근거인 그리스도
위에 정초시키는 것(Begrundung)이다. 그리스도를 주(主)로 고백하며 산다는 것은 삶
의 소유권이 자기에게 있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자의 삶은 자기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간다. 그리스도의 뒤를 닮는 길은 단순한 명상과 기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궁
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데 있다. 그것은 '나를 따라 오너라'(막 1:17)에 대
한 순종의 행위로서 일어나며, 이 순종의 행위는 믿음의 행위로서 일어난다(8절).
이와 같은 믿음의 사람은 현실에 안주(安住)하지 않고 미래에 주어질 하나님의 구원
의 세계를 지향한다. 이 세상은 영원한 도성(13:14)이 아니라 일시적이요 잠정적인 세
계이다. 그는 이 세상에서 '외국인과 나그네'(13절)로서 살아간다. "주 앞에서는 우리
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寓居)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
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대상 29:15). 그러나 나그네의 이땅에서의 역할은 세계를 하
나님과 화해(reconciliation) 시키는 것이다.
2. 신앙의 모범들(11:4-40)
본문은 17세기 청교조 작가 리챠드 시베스(Richard Sibbes)가 '순교자의 소책자'라
불렀던 부분이다. 앞에서 믿음의 본질에 대해 기술한 저자는 그러한 믿음이 선진들의
삶속에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살피고 있다. 그들은 우리와 같이 실수도 하는 연약한
죄인들이었다. 그런데도 본장에서 이와 같은 믿음의 선진들을 언급한 이유는 무엇보다
도 그들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비범한 일들을 이룰 수 있었음을 밝히려 하기 때문이
다. 본문의 내용을 상고하기 위해 다음 사항들에 초점을 맞추어 보기로 하자.
(1) 참된 예배. 아벧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 그는 가인과는
달리 정결한 마음으로 믿음의 예물을 드림으로써(창 4:4; 요일 3:12)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칭찬을 듣게 되었다. 아벧이 드린 예배의 특징은 첫째, 헌신된 마음이다. 이
것은 외적 의무를 묵묵히 수행하는 것 이상의 의미로 예배의 가치는 겉보다는 마음에
있음을 나타낸다. 아벧의 예배는 믿음의 예배였다. 둘째, 피의 제사이다. 가인은 농사
하여 땅의 소출을 하나님께 드렸고, 아벧은 양을 쳐서 첫 새끼와 기름으로 드렸다(창
4:3-5). 유대인들은 피를 생명으로 생각했다. 하나님께 드릴 유일한 참된 예배는 피의
제사였다. 아벧의 희생 제물은 그의 믿음을 표시하는 증거였고, 이 믿음으로 인해 그
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받았다(창 4:4). 셋째, 자원하는 마음이다
(고후 8:12). 이것은 그가 제일 좋은 것으로 잡아드렸다는 사실을 통해 밝혀진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의 종류와 성격보다는 드리는 자의 마음을 보신다. 그리스도는 자
발적으로 자신의 몸을 우리를 위해 드리심으로써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셨다(빌
2:5-11).
(2) 하나님과의 동행. 참믿음의 소유자는 하나님과 매일매일 동행한다. 에녹에 대한
창세기의 짤막한 기사는 에녹이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즉 에
녹은 므두셀라의 출생 후에 하나님과 동행하였다(창 5:21,22).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최선의 방법이다. 왜냐하면
그 자체는 하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며 그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삶 전체를 하나님께 복종시킨다는 의미로 하나님에 의해서 삶이 통
제를 받으며, 하나님을 위해서 삶을 영위한다는 뜻이다. 에녹의 하나님과 동행한 삶은
다음 두 단어로 설명된다.
(까) '옮겼다'( ,메타티데미). 이는 어원학적으로 '나르다',
'옮기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바꾸다'의 뜻을 가진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과거와는
달리 현재 하나님 앞에 서 있음을 가리킨다(골 1:13; 요 5:24).
(다) '보다'( ,호라오). 이는 '맛보거나 체험한다'는 뜻이다. 에녹이 땅
에서 하늘로 '옮기워진' 사실은 육신적인 차원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죄의 삯인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기웠다는 것은 죽음의 권세를 이긴 것이며 초자
연적인 체험이다. 이는 죄와 허물이라는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의 왕되신 분과 진실한
교제를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 믿음은 자신을 떠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며 주 예수의 중보를 통해 하나님을 위해 행
하는 것이다. 혹자(M.Henry)는 이렇게 말했다. "믿음은 먼저 우리의 생각에 영향을 주
고 그 다음에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준다."
(3) 부르심(Calling)에 대한 자세. 아브라함은 이미 본서 6장에서 믿음과 인내로 약
속을 유업으로 받은 자의 모범으로 언급된 바 있다(6:13-15). 아브라함은 유대 전승에
서 유대인의 조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고, 동시에 신약에서도 믿음의 조상
으로 증거되고 있다. 본서에서는 모든 믿는 자들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라고 언급되
고 있다(2:16). 그렇다면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아브라함은 어떻
게 반응했으며,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의 그의 삶의 양태는 어떠했는가를 살펴보자.
(까) 믿음에서 나온 순종.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
종하였다. 아울러 그는 독자 이삭을 믿음으로 아낌없이 내어드렸다. 그의 순종은 말씀
하신 하나님께 대한 굳은 신뢰에 기인한 것이다. 다음은 아브라함의 순종의 진면목(眞
面目)을 나타내 준다.
(a) '떠나라'는 말씀에 대해 순종하였다. 떠남은 자기가 소유한 모든 애착을
'전적으로 포기함'을 일컫는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대한 지식을 전혀 갖지 못한 채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자신의 전 삶을 의탁하였다. 칼빈(Calvin)은 이에 대해 "우
리 수중에 있는 것을 버리고 멀리 떠나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곳을 찾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믿음의 시련이다"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걸음을 인도하시고 자신의 필요를 채
우시며, 자신의 장래를 예비하실 것을 믿었다. 이렇듯 그가 순종한 근본 이유는 약속
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믿음을 소유했기 때문이며, 오히려 그 약속은 그의 순종에 대
한 보상이었다. 아브라함은 그의 나이 75세에 자신의 본토를 떠났던 것이다. 이는 적
극적인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b)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쳤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사환들을 모리아산 기슭에 남겨두었을 때조차도 그들에게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창 22:5)고 말하였다. 또한 "하나님
이 번제할 양을 준비하시리라"(창 22:8)고 하여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믿음을 새롭게
나타냈다. 아브라함에게 닥쳤던 큰 시험을 통하여,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가장 좋은 약
속을 재확인하게 되었다(창 22:15-19).
(다) 외국인과 나그네 생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갈대아 우르를 떠난 아브라함
은 가나안에 도착하였다. 그곳은 꿈에도 그릴 정도로 빨리 정착하고픈 '약속의 땅'이
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가나안에서의 생활은 외국인과 나그네의 삶이었다. '외국인
과 나그네'의 개념은 신약성경에서 자주 나타난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의 '보이는 것'
들을 바라보면서 그것들의 무상함과 부패성을 감지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세상의 물질
적인 이익을 바라보는 대신 '더 나은'어떤 것, 곧 궁극적인 삶의 푯대인 '본향'(本鄕)
을 바라보았다. 다음을 통해 나그네의 특징, 도성의 개념 및 나그네의 삶의 모습을 살
펴보자.
(a) 나그네의 특징. 외국인들은 본향을 둔 나그네들이다. 나그네들은 때로 육신
적인 고초와 사회로부터의 추방, 감정 대립, 경제적 궁핍을 겪어야 한다. 어쩌면 이국
에서 거한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희 하나님이라 일
컬음 받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셨다(16절).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한 도
성을 예비하셨다. 1세기에는 도성에 대한 세 개념이 유행하였다. 첫째, 유대 사고에서
도성은 신적 주권이 있는 본향이었다. 둘째, 헬라 사고에서 도성은 특권을 나타내는
장소였다. 셋째, 스토아 학파에서 도성은 우주적인 소망의 초점이었다. 신약성경의 도
성 개념은 이 세 가지 모두와 연관되어 사용되었다.
(b) 나그네의 삶의 모습. '우거하다'( ,파로케센)라는 말은
'나그네처럼 기거하다'의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동일한 약속을 받았던 이삭과 야곱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9절). 비록 그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했지만 그들 역시
주인이 되지 못한 채 유랑 생활을 해야만 했다. 유랑의 삶은 즉각즉각 자리를 떠나야
하는 것으로서, 그 삶의 모습은 '검소하고 희생적인 삶의 양식'이었다. 초대 기독교의
많은 성도들은 [허마의 목자서](The shepherd of Hermas)를 읽었다.
"너희가 알다시피 너희는 하나님의 종들로서, 너희 도성에서 멀리 떠나 왔다. 만일
장차 들어가 거할 성을 안다면 왜 너희는 여기서 값나가는 땅을 예비하고 여기에다 모
든 것을 쌓으려 하느냐 ?"
예수는 우리를 위해 스스로 가난한 자로 오셨고 부자들에게 나눔과 섬김의 삶을 보
여주셨다. 그리스도인들이 검소한 생활 양식으로써 나눔과 섬김을 실천한다면, 그것은
이 어둠의 새계를 깨울 수 있는 새벽 종소리가 될 것이다.
(4) 민족의 지도자. 모세는 히브리 역사의 제 1인자이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노
예 상태로부터 구해내고 그들의 생활을 위해 하나님께 율법을 받았다. 혹자(Moffatt)
는 모세에 대해 세 가지 믿음의 행위를 언급한다.
(까) 부모의 믿음. 바로는 이스라엘을 미워하여 멸종시킬 계획으로 남자 아이들을
나는대로 죽이라고 명했다(출 1:15-22). 특별히 숨긴 아이들도 찾는대로 죽이라는 명
령을 내렸다. 아이들은 다른 아이가 우는 소리를 들으면 울게 마련이다. 애굽인들은
애굽인 여자들을 이스라엘 집에 들여 보내어 자기 아이를 꼬집어 울려 이스라엘 아이
를 찾아내었다.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계획을 믿었던 바, 아이를 더 이
상 숨길 수 없게 되자 바로의 권력 횡포를 두려워하지 않고(23절) 아이를 나일 강에
띄웠다.
믿음이란 이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올바른 일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단 3:17). 부모의 참다운 믿음의 자세는 모세를 존재하도록 해주었으며, 민족을 살리
는 기적을 낳게 된 것이다.
(다) 백성과 함께 함. 모세에게는 사회적 명예를 얻을 기회가 있었다. 즉 그는 애
굽의 왕자로서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출 2:10). 그러나 애굽 왕궁의 영화로운
삼과 사막의 위험이 깃든 삶 중 양자 택일을 해야 했을 때, 그는 민족과 함께 '고난'
(苦難)받기를 선택했다(24-26절). 그는 악으로 사치를 누리기보다 이스라엘 민족을 인
도해야 하는 고난의 길을 택한 것이다. 모세는 자기 백성편을 들고, 애굽을 떠나 미디
안으로 갔다(출 2:14-22). 그 백성들이 그토록 절망적인 고통 속에서 살고 있을 때 미
디안의 은거 생활은 모세에게 대단한 인내(忍耐)를 요하는 일이었다. 피크(Peak)는 다
음과 같이 말했다. "자신의 마음을 몽땅 사로잡고 있는 일을 포기하고 또 그런 비참한
상황에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기다린다는 것은 가장 보기 힘든 고귀한 용기에 속
한다."
모든 나라는 민족과 고난을 함께 하며 죄악의 낙(樂) 보다는 능욕을 받으면서도 의
(義)를 실현하기를 갈망하는 민족의 지도자가 절실히 필요하다. 또한 모세의 양쪽 팔
이었던 아론과 훌을 운운하며 대접받기를 요구하는 목회자적 권위 의식과는 대조적으
로 궁정의 영광보다는 광야를, 권위보다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의 삶을 살았던
모세의 목회자적 모습은 좋은 본보기가 된다.
(따) 바라봄. 모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안색'을 살폈다. 26절의 '바라봄
이라'( ,아페블레펜)는 말은 '그의 눈이 고정되었음이라'(NEB)는 의
미이다. 이 동사는 예술가가 자신이 그리거나 조각하려는 모델에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웨스트코트(Westcott)의 말에 따르면 고대 그리이스 작가
들은 이 단어를 '한 대상으로부터 다른 대상으로 향하여 눈길을 돌리는 것'을 의미하
는데 사용하였다고 한다. 일시적 이익보다는 영원에 시선을 고정시킨 모세는 하나님을
깨끗하게 바라보았으므로, 자신의 본분인 출애굽을 잘 감당할 수 있었다. 이처럼 믿음
의 눈은 현재의 고난 너머 저편에 있는 평안과 구원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어떠한
고난이라도 참아내게 한다(롬 8:18). 영원을 바라본다는 것은 단순한 현실 도피가 아
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사명에 대해 더욱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5) 믿음의 여인. 기생 라합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 백성이 성을 함락
시킬 수 있다는 믿음과 부패한 여리고 성의 필연적인 멸망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도울 수 있었다. 본장에서 보도되는 여러 믿음의 선진들과 비교
해 볼 때에 기생 라합은 종교적 동질성이나 고결함이 부족하였지만, 살아 있는 믿음으
로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신뢰했다. 타국의 정탐꾼을 숨겨주는 것은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었으며, 그들을 집으로 들인다는 것은 과감한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라합은 하나님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실 줄을 믿었으므로, 그 믿음에 자
신의 생명과 가족의 안전을 걸었던 것이다. 그 믿음으로 인해 그녀와 가족의 안전은
확실하게 보장되었다. 또한 라합의 이름은 놀랍게도 예수의 족보에 포함되었다(마
1:5).
* 구속사에 나타난 여성의 역할. 본장에 예시된 신앙 위인들 가운데에는 많은 여성
들이 등장하고 있다. 비록 양적 비중은 적을지라도 여성들은 구속사에 있어서 큰 영역
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성경 속에 나오는 여성들은 견고한 제도적 역할로부터 제한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하고 있다. 본 주제 강해에
서는 성경에 나타나는 여성들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1) 구약성경. 구약시대의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출 20:17)이고, 일생 동안 미성년
자 취급을 받았고, 재산을 상속받을 수 없었다(민 27:1-11). 또한 여성은 악의 근원이
었으며, 여성의 종교적 서원은 남편의 허락 여부에 달려 있었다(민 30:8,12). 이러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하나님은 성(性)이나 신분이나 종적에 관계없이 구속사의 도구로
서 미리암, 드보라, 훌다, 라합, 에스더, 다말, 야엘, 룻 등을 사용하셨다. 구약성경
에서 여성들이 차지하는 양적 비중은 적을지라도 구원사에서 그들이 담당한 역할은 매
우 결정적이며 중요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을 대표적인 여성을 예를 들어 도표화하
면 다음과 같다.
+-------+-----------------------------------------+--------------+-------------+
| 이 름 | 업 적 | 지 위 | 참고 구절 |
+-------+-----------------------------------------+--------------+-------------+
| |.출애굽시 모세와 아론과 함께 지도자로서 |지도자, 모세의|출 15:20; |
| 미리암| 역할을 함. |누이, 선지자 |미 6:3,4 |
| |.홍해를 건넌 후 경축의 노래를 부름 | | |
+-------+-----------------------------------------+--------------+-------------+
| |.사사로서 재판을 시행하고 공동체의 논쟁들|사사, 민족적 |삿 4:1-10; |
| 드보라| 결정하는 행정 장관의 역할을 함 |지도자, 군사적| 5:1-31 |
| |.이스라엘 군대가 가나안 철병군대와 싸워 |지도자 | |
| | 이기도록 인도하고 고무시킴 | | |
+-------+-----------------------------------------+--------------+-------------+
|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기생, |수 2:1-24; |
| 라 합| 적극적으로 참여함 |믿음의 행위자 | 6:22-27 |
| |.하나님은 민족과 출신, 직업에 관계없이 | | |
| |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심을 나타냄 | | |
+-------+-----------------------------------------+--------------+-------------+
| |.제사장 힐기야와 요시야왕의 보낸 사람들이|여선지자로 |왕하 22:14-26|
| 훌 다| 여호와의 말씀을 묻기 위해 훌다에게 갔음 |살룸의 아내 |대하 34:22-28|
| |.당시의 제사장은 선지자적 기능을 상실했 | | |
| | 으며 훌다의 능력은 제사장보다 뛰어났음 | | |
+-------+-----------------------------------------+--------------+-------------+
이상과 같이 구약성경에 나타난 여성을 보면 그 한계나 제한은 차별적인 문화나 환
경에서 더 많이 기인된 것일 뿐 하나님의 부르심 자체에는 차별이 없음을 알 수 있다.
(2) 신약성경. 신약성경은 여성의 위치와 기능에 대한 분명한 자료를 제공하지 않는
다. 여성의 역할에 대하여 어떤 표준적인 지도 체계가 확립되었다기보다는 '공동체의
필요성'에 따라 칭호와 기능이 조금씩 달랐던 듯하다.
목회 사역에 관련된 여성의 역할을 입증해 주는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교회 설립
(행 18:2,18,19; 빌 4:2,3), 공중 예배에서의 기능(고전 11:5), 교사적 역할(행
18:26), 예언자(행 21:9; 롬 16:7; 고전 11:5)등이다.
이제 가부장적 사회였던 유대 사회에서 예수께서는 여성들의 위치와 역할을 어떻게
보셨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복음서'에 나타난 여성의 활동을 살펴보자.
(까) 예수의 선교 여행의 동료 및 제자. 당시 유대적 관습에 의하면 여성들과 함
께 하는 여행은 전혀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졌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
산나는 예수와 함께 각 성과 촌을 두루 다니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였다. 또한 유대
교에서는 여성들이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허용되었던 일은 있으나 랍비의
제자는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누가복음 10:38-42에서는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가 예수
의 제자로 되어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마리아는 예수의 발 아래 앉아 말씀을 듣
고 있었다(눅 10:39). 발 아래 앉은 것은 제자, 즉 학생의 활동을 묘사하는 일반적인
표현 방식이었다(행 22:3). 여기서 마리아의 행위와 예수의 태도는 여성에게도 배울
권리와 제자가 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시사한다.
(다) 메시야의 증인. 요한의 공동체에는 지도력과 제자직에 있어서 여성과 남성들
이 모두 포함된다. 요한복음 4:1-42은 사마리아 지역의 선교에 있어서 한 여성의 선교
사 역할을 보도한다.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마리아 여성의 고백은 그 절정(絶頂)을
이룬다(요 4:29). 요한 복음서 기자는 여성의 인간적인 존엄성을 인정하는 예수의 모
습을 기록할 뿐 아니라, 여성은 예수의 메시지에 대한 합법적 증인임을 제시한다.
(따) 십자가의 증인. 십자가 사건의 일차적 증인은 3년 동안 예수를 좇던 12제자
들이 아니라 예수의 여성 추종자들과 선교 여행의 동료들이었음을 밝히고 있다(막
15:40,41).
(마) 부활의 증인. 신약성경의 기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여성의 역할은 예수의 빈
무덤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이 바로 여성들이라는 점이다. 사복음서는 모두 빈 무덤을 발견한 최초의 증인들이 여성들임을 말하고 있다. 또한 사복음서는 그 증인들이 다시 사신 예수를 만난 최초의 사람들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처럼 기독교 복음의 핵심적 부분이 예수의 추종자들의 증언에 근거함을 알 수 있다. 오늘날에도 교회에 있어서 여성들의 활동은 사뭇 크다. 하나님께서는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들에게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 1:8)고 지금도 명령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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