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내가 다시 근심으로 너희에게 나아가지 않기로 스스로 결단하였노니 - 본문은 바울이 본 서신을 기록하기 이전에 두 번 고린도를 방문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왜냐하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설립을 위해 첫번째로 그곳을 방문한 이후에(행 18:1-8) 쓴 고린도 전서에는 슬픈 방문에 관한 어떤 암시도 없는 반면 본문에는 '가슴 아픈 방문'에관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내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에 의해야기될 바울에 대한 오해와 교회에 발생한 제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두번째로 그곳을 방문했을 것이다. 고린도전서를 발송한 이후에 있었던 이 두번째 방문은(12:4;13:1,2)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더욱 큰 불신과 마음의 상처만 남긴방문이었기에 가슴아픈 방문이었다. 이 가슴 아픈 방문이 1:15,16절의 여행 계획과 관련이 있다고 보며, 마게도냐로 가는 길에 방문한 것이 바로 이 방문이었다고 본다. 그리하여 되돌아오는 길의 방문은 피차간의 가슴 아픈 만남이 되지 않기 위하여 여행 계획을 변경한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계획을 변경시킬 때 상당한 고심(苦心)을 한 흔적이 엿보이는데 이는 그가 계획의 변경을 서술할 때 '결단했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 데서 드러난다.
=====2:2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하면 나를 기쁘게 하는 자가 누구냐 - 본절에 대한 개역성경의 번역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데 그 내용은 "나를 기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여러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면 나를 기쁘게 해줄 사람에게 슬픔을 안겨 주는 셈이 되지 않겠습니까?"(공동번역)의 뜻이다. 이 말 속에는바울이 고린도 방문 계획을 변경한 이유가 암시되어 있다. 즉 원래의 계획대로 고린도방문을 강행하여 지금까지 저지른 성도들의 잘못을 엄단한다면 그것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큰 근심의 요소가 되기 때문에, 그렇게 행하지 않고 계획을 변경하여 그들에게회개(悔改)할 시간적 여유를 줌으로써 훗날 기쁨으로 만나기를 원했던 바울의 깊은 생각이 담겨 있다. 이렇듯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유익하고 자신에게도 기쁨이 되는세심한 목회적 배려를 행하였다.
=====2:3
이같이 쓴 것은 - '쓴 것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그랖사'(* )는 서간체의 과거형으로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썼던 것을 가리킨다.그렇다면 이 편지는 고린도전서이거나 전서와 후서 사이에 보낸 것으로 알려진 '눈물의 (준엄한) 편지'일텐데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Lowery, Harris). 이 편지는 현존하고있지 않은 것으로 바울이 가슴 아픈 방문을 한 후 기록한 것으로 믿어지며 A.D.56년봄 디도를 통해 고린도에 보내진 것으로 보인다.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 바울이 씨를 뿌려 거둔 열매인 고린도 교인들은 당연히 바울에게 기쁨이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관계가 매우 열악한 상태에 놓여 있기때문에 바울에게 기쁨을 주어야 할 고린도 교인들이 도리어 근심을 끼치는 형편이 되었다. 바울이 진정으로 근심하고 마음 아파하는 것은 단순히 오해에서 비롯된 감정상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염려하는 것은 그들이 거짓 사도들에 현혹되어(11:13)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온전한 신앙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이런 문제에 대해직접 방문하여 책망하고 문책(問責)하는 것이 피차에 마음만 상하게 할 뿐 근본적인문제 해결에 별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하였으며 그리하여 그는 고린도 방문 계획을(1:15, 16) 취소하고 대신 눈물의 편지를 디도를 통해 보냄으로써 회개의 기회를 주고자 했던 것이다.
나의 기쁨이 너희 무리의 기쁨인줄 확신함이로라 - 바울이 겪는 모든 회노 애락은고린도 교인들을 위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1:6-12). 지금은 관계가 많이 악화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버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바울은 자신의 기쁨이 그들의 기쁨이 된다는 확신을 표하는 것이다. 혹자는 본문에서 고린도에는 문제를 야기시키는 사람들이 있었지만(5, 6절;11:13) 대부분의 교인들은 여전히 건전했다고 추론한다(Barrett).
=====2:4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 - 이것은 바울이 '눈물의 편지'를 쓰게 된 이유와 그때의바울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환난'에 해당하는 헬라어 '들립세오스'(* )는 `압박', '괴로움'을 뜻하며 '애통'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노케스'(* )는 '억압', '고통', '고민'의 뜻이 있어 바울의 심정이 매우 심한 괴로움과 고통을 당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바울이 이토록 깊은 심적 고통을 당했던 것은 고린도 교회안에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이 있었고 이들의 반(反)바울적 논리에 고린도 교인들 중 일부가 동조(同調)하는 데까지 나아갔기 때문이다.
많은 눈물로 - 바울이 겪고 있는 심적 환난과 애통은 눈물로 씌어진 편지에서 절정을 이룬다. 바울은 가끔 눈물의 편지를 쓰거나 는물로 호소했는데(빌 3:18;행 20:19,31) 이것은 눈물 흘리는 것을 수치로 여겨 참았던 스토아의 학자들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근심하게 하려 한것이 아니요...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바울의 눈물의 편지가 부분적으로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을 슬프게 했음을 말해준다(7:8). 바울이 눈물로 써보낸 편지의 핵심은, 비록 그들이 바울을 슬픔 가운데 빠지게 했지만 바울은 그들에 대하여 지금도 변함없는 사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려는 것이었다. 바울은 이 사랑을 '넘치는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혹자는 이처럼 문제가 많은 고린도교인들을 남달리 사랑하는 데에는 문제아(問題兒)들을 더 사랑하는 심리가 작용했을 것이라고 본다(Farrar, Barrett). 자기들의 잘못에도 불구하고변함없는 사랑을 전하고 있는 바울의 편지를 받은 고린도 교인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회개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7:9).
=====2:5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 본절에서 거론되는 핵심적인 논리의 주제는 '바울을 대적하여 문제를 일으킨 자가 누구였으며 그가 한 일은 무엇이었는가?'이다. 이문제들에 대해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바울의 서신들에서 찾아낼 만한 근거 자료들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먼저 5-7절과 7:12에 근거할 때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한 사람이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 사람이 고린도 교인 중 한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외부에서 고린도로 여행 온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다음은 이 문제의 인물이 행한 일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 과거에는 고전 5:1 이하에서 언급되고 있는 근친상간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었으나(Tertullian), 현재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런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전자의 견해는 3, 4절에 언급된 서신이 고린도전서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 전제가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최근 학자들은 이 적대자의 행위가 바울의 두번째 고린도 여행 즉 가슴 아픈 방문과 관련하여바울을 모욕하고 바울의 권위를 무시한 행위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Barrett, Lowery,Harris). 그런데 이 행위가 바울 개인에 대한 도전 행위일 뿐만 아니라 전체 교회에대한 문제 행위로 여겨지는 것은 바울과 고린도 교회사이의 특수한 관계 때문 일 것이다. 고린도 교회는 전적으로 바울이 전한 복음에 근거해 있다. 그리고 바울의 복음 사역과 그의 인격과 사도적 권위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바울에 대한 도전은 그의 인격과 사도권에 대한 도전이며 교회 전체에 대한 적대 행위였던것이다.
어느 정도 너희 무리 - '어느 정도'라는 표현은 대적자에 대한 바울의 태도가 상당히 완화되었음을 반영한다. 바울은 대적자의 문제가 해결된 상황에서 가능한 한 자극하지 않는 방향으로 정리하고자 했을 것이다. '너희 무리'로 번역된 헬라어 '판타스휘마스'(* )는 문자적으로 '너희 모든 무리'라는 뜻이다(all ofyou, NIV). 이것은 바울을 대적했던 자가 고린도인이 아닌 외부에서 유입(流入)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2:6
많은 사람에게서 - 이것은 고린도 교회의 주류를 이루는 사람들이 적대자를 반대하여 바울을 지지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아울러 본문에 표현된 `많은 사람'(* , 톤 플레이오논)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소수의 사람들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이 소수의 사람들은적대자의 처벌을 반대하는 그룹과 더 엄한 징계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과격한 그룹으로 나뉘었거나 아니면 중징계를 주장하는 하나의 그룹만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후자일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Harris).
벌 받은 것이 족하도다 - 여기서 '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티미아'(* )는 신약에서는 이곳에만 나오고 외경 지혜서 3:10에 한 번 나오는 것으로법적인 의미에서의 '처벌'을 뜻하는지 아니면 단지 잘못된 행위에 대한 '책망' 또는'비난'을 뜻하는 것인지 결정하기 어렵다. 그리하여 혹자는 전자의 의미를(Farrar),혹자는 후자의 의미를 주장한다(Barrett). 그런데 '에피티미아'와 어원을 같이하는 '에피티만'(* )이 신약에서 30회 사용되는 중 한 곳에서만(유 1:9) 징계의 의미로 사용되고 나머지에서는 '비난'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점과(Barrett), 소수의 교인들만이 엄한징계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을 가능성이 높은 점을 고려할때(7절)후자의 뜻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2:7
저를 용서하고 - 바울은 앞에서(5절)적대자가 끼친 근심을 '어느 정도'라는 완곡한표현으로 묘사함으로써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했다. 이제 바울은 한걸음 더 나아가 용서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바울이 적대자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는 것은 그의 명예를 존중해 주는 것으로 바울이 이제 그를 용서했음을 말해준다. '용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사스다이'(* )의 뜻은 `선물을 주다', '은혜를 베풀다'이며 이는 '용서'라는 행위의 무조건성을 잘 나타내 준다. 즉 하나님의 용서가 인간의 의에 대한 급부(給付)가 아니라 인간의 불의에도 불구하고 은혜로서 주어지는 선물인 것처럼 바울이 지금 말하는 용서도 그런것이라는 사실이다.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 바울이 적대자를 용서하라고 한 것은 그의 영혼이끝내 구원에서 멀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아마 그 적대자는 고린도 교회의많은 교인들로부터 책망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반성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용서하지 않고 엄한 징계를 내린다면 그는 좌절하여 영영 교회에서 낙오되어 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가 비록 바울의 권위에 손상을 입히고 교회에 해를끼쳤지만 가능한 한 용서하고 권면하여 회개하고 새롭게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이었고(눅 17:3) 교회가 따라야 할 도리였으므로 바울은 이것에 충실하고자 했던 것이다.
=====2:8
그러므로 사랑을 저희에게 나타내라 - 바울은 적대자를 사랑하고 용서해야 하는당위성을 한 영혼이 지나친 낙심 가운데 좌절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목회적(牧會的)이유에서 찾고 있다. 이제 고린도 교인들은 그 적대자에게 사랑을 공개적으로 확인시켜 줌으로써 그의 슬픔을 덜어주고 그를 용서하였음을 확증해 주어 그로 하여금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야만 했다.
=====2:9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하여 - 본문은 바울이 '눈물의 편지'(3, 4절)를 썼을 때 주요 관심사가 적대자를 처벌하는 데 있지 않고 고린도 교인들의 신앙을확인하고 바로잡아 주려는 데 있었음을 말해준다. 바울이 알고자 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여전히 바울의 가르침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하는 것과 그들이적대자로 말미암은 시험에 얼마나 잘 견디어 내는가 하는 것이었다. 본절의 `증거'로번역된 헬라어 '도키메'(* )가 '시험'(試驗)을 의미한다는 것은 그와 같은 사실을 나타내준다(the test, NIV).
=====2:10
너희가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 이것은 바울이 용서를 권면하면서도 결코 강요하지 않고 고린도 교인들의 결정을 존중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바울 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도 피해자였으므로 적대자를 용서할 것인가의 여부에 대해서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용서해 주기를 바랐고 그들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했지만 자기 자신은 이미 용서를 했다. 본문의 '네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이라는 표현은 가정이 아니라 이미용서한 사실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앞에서는 고린도 교인들이 용서하면 자신도 용서할 것이라고 진술하고서 곧이어 자신은 이미 용서했음을 말하는 데엔 분명 모순된 부분이 있는 듯하나 여기에는 적대자를 용서해야 하는 당위성과 고린도 교인들도 바울의뜻에 순종하여 용서하리라는 확신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면 문제가 될 것은 없다. 더욱이 바울이 용서한 것은 자신의 관대함을 자랑하기 위함이나 순간적인 감정에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고린도의 교인들을 위하여 한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증인으로보시고 인정하는 가운데 행한 진실된 것이었다.
=====2:11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 바울은 회개하고 있는 적대자를 용서해야 할 또하나의 이유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용서하지 않는 것이 곧 사단에게 속는 것이므로 속지않기 위해서는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단의 목적은 기독교 신자를 유혹하여 자신의 종으로 삼는 것이다. 본문의 경우, 범죄한 자의 마음을 낙담케 하여 완전히좌절에 빠지게 하는 것이나, 피해자인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에 복수심을 유발시켜 범죄자를 용서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나, 그리하여 용서하라고 권하는 바울과 용서하고자하지 않는 교인들사이에 분란을 야기시키는 것도 모두 사단이 꾀하는 것이다.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 그러나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은 사단에게 속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사단이 그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어떤사악한 계획을 꾸미고 있는지 알고 있으며 그 궤계를 저지(沮止)시키는 것이 사도로서의 직무임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2:12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 바울은 가슴 아픈 고린도 방문이후 에베소에 되돌아와 '눈물의 편지'를 디도에게 주어 고린도를 방문하게 하였다.바울은 디도를 보내면서 드로아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듯하며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마게도냐에서 만나기로 한 듯하다(13절). 바울이 드로아를 방문한 것은 이 약속에 의한 것이었을 것이나 에베소에서 데메드리오가 주동이 되어 발생한 은장색들의 소동 때문에 다소 약속보다 일찍 왔을 것으로 보인다(행 19:23-41). 그런데 본문에 의하면 바울의 드로아 방문의 목적은 디도와의 만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위함이라 했다. 바울은 가슴 아픈 고린도 방문 후 심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으며디도를 통해 '눈물의 편지'를 보내 그 결과가 상당히 궁금하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그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적인 일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물론 디도를 만나지 못한 불안 때문에 끝내는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마게도냐로 떠났지만, 복음 전하는 일을 최우선적 과제로 여기는 바울의 사도적 소명은 대단히 강한 것이었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바울의 열정은 주님의 인도를 받아야 결정적인 기회를 얻게 된다(행 16:6-10).
=====2:13
심령이 편치 못하여 저희를 작별하고 - 아마 드로아에서 몇일 동안은 바울이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약속된 기일이 되도록 디도가 도착하지 않자 바울의 심령은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복음을 전할수 있는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고 마게도냐로 떠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토록 바울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다음의 두가지 일 것이다. 첫째, 고린도 교회에 대한 불안이다. 바울의 고린도 방문은 그에게 슬픔만을 안겨 주었고 그리하여 두 번째 방문을 취소하고대신 디도편에 '눈물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것의 결과에 대한 불안이 있었던 것이다.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직접 방문을 피하고 편지로 대신하였는데(1-3절) 그것이 오히려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거나 지난번 방문 때 있었던 가슴아픈 일들이 치유되지 않고 도리어 더욱 악화된다면 그것은 피차간에 불행한 일이 될것이다. 둘째, 디도의 도착이 지연되는 것이 혹시 디도의 신변에 불상사가 발생했기때문이 아닌가 염려되었다. 더구나 디도는 눈물의 편지를 전하는 일 외에도 당시 기근으로 빈핍(貧乏)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금을 모금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었으므로강도들의 위협에 처할수 있는 일이었다. 이런 일로 인해 바울은 더 이상 드로아에 머무를 수 없어 마게도냐로 떠나간 것이다.
=====2:14
이기게 하시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드리암뷰오'(* )는 로마의 황제나 장군들이 전쟁터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결박하여 끌고 오면서 군중들에게구경시키는 개선행진을 가르킨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언제나 끼워 주시는'(공동번역)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듯 바울은 자신을 포함한 그리스도인들을 승승 장구하는 장군의 영광에 참여하는 병사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 - 여기서 '냄새'는 로마 황제가 개선할 때 길가에 향을 피워냄새를 내는 것이나 쥬피터카피톨리누스(Jupiter Capitolinus) 신전까지 개선행진을하여 희생 제물을 드릴 때 향을 피우던 관례에서 가져온 개념이다. 바울은 하나님과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전하는 것을 향기에 비유하고 있다. 자기가 복음을 증거하였으나 사실상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바울 자신은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을 도구로 삼아 그리스도의 지식을 전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다.
=====2:15
그리스도의 향기 - `향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오디아'(* )는 구약에서 '희생 제사'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이다(창 8:21;출 29:18;레 1:9;민 15:3).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는 삶은 그가 롬 12:1에서 말한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희생 제사와 같은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종이자 예수의 삶을 연장하여 사는 자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배척과 핍박을 당하였고 죽음을 무릅써야 했다(행21:13;23:12-15;골 1:24). 그리스도의 향기로서 전해진 바울의 복음 전파는 부분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부분적으로는 거부되었다(행 17:32). 이러한 받아들임과 거부의 차이는 종말론적 차이로 나아간다. 받아들이는 자들은 구원을 얻을 것이나 거부하는 자들은 망하게 된다.
=====2:16
사망에 이르는 냄새...생명에 이르는 냄새 - 바울에 의해 선포된 하나의 설교가 두가지의 결과를 가져온다. 하나의 향기인 바울의 메시지가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의 악취가 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의 향기가 된다. 예수의 죽음이 평범한 한 인간의죽음이며 그것으로 끝난 것이라고 여기는 자들은 그들의 생각에 따라 죽음을 맞게 될것이나,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식하고 그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며 자기를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믿는 자들에게는 생명이 주어지는 것이다(롬 8:34). 하나의 실재가 선과 악, 생명과 죽음과 같이 두가지 효력(效力)을 발생하는 것에 대한 개념은 유대인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개념이었다. 그 한가지 예로 '토라'를 들 수 있는데 혹자는 소개하기를 "꿀벌이 자신의 주인을 위해서는 꿀을 간직하고 다른 자들을 위해서는 독침을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토라의 말들은 이스라엘에게는생명의 약이고 세상 민족들에게는 죽게 하는 독약이다"라고 하였다(Manson).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 이것은 바울이 적대자를 염두에 두고하는 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요함으로 자신만만해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가름하는 중대한 사역을 인간적인 자격이나 능력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그 일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다.
=====2:17
혼잡하게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펠류온테스'(* )는행상인이 과일의 좋은 것을 맨위에 놓아 전체가 좋은 것인양 판매하는 '부도덕한 상행위'를 가리키거나 포도주에 물을 타 양을 많게 하여 질 낮은 포도주를 판매함으로써'과도한 이익을 얻는 행위'를 가리킨다. 본절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보며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거짓 전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여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을 나타낸다(Barrett). 이것은 플라톤이 소피스트들을 가리켜 자신들의 지적 상품을 돈으로 파는 자들이라고 비판했던 것과유사한 것으로, 거짓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상품으로 팔아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형편없는 것으로 만드는 행위를 시사하고 있다(11:4,13).
순전함으로 말하노라 - 거짓 전도자들의 모습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바울의 복음전파의 자세를 말하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지도 않고 사람에게 인기를 얻으려 하지도 않았다. 바울은 자기가 행하는 능력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능력과 말씀만을 전하였다. 또한그의 모든 선교행위는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한 것이므로 조금도 개인의이익이나 사심이 개입되지 않았다. 이것이 그가 육체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는것의 증거이며 그의 진실성(眞實性)의 증거인 것이다(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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