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우리 강한 자가 - '강한 자'의 헬라어 '호이 뒤나토이'(* )는 보통 '능력있는 자', '~을 할 수 있는 자', '힘 있는 자'를 뜻하나 여기서는 '영적으로 강한 사람'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 논쟁에서 자신을 강한 자의 편에 넣어 말하고 있다.
마땅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페일로멘'(* )은 '하여야 할 것이다'(should)라는 권고의 의미보다는 '해야만 한다'(must), '의무가 있다'(ought)라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즉 강한 자가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은 권고나 권면으로써 수행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무적으로 수행되어야 함을 나타낸다.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 '약점'(* , 타 아스데네마타)은 '연약함'의 의미로 쓰이며 '담당'(* , 바스타제인)은 갈 6:2에 나오는 '너희가 짐을 서로 지다(bear)'와 같이 '짐 따위를 지다'라는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이와 같이 강한 자는 약한 자의 여러가지 약점들을 짊어져야 한다. 그러나 강한 자가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할 때 사랑 안에서 행해야만 한다. 사랑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열쇠이다(E. F. Harrison).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 믿음이 강한 자가 연약한 자에 대해서 그들 자신의 입장만을 고수하려고 한다면 연약한 자는 시험에 빠져 낙심하게 될 것이다. 또한 강한 자가 자기 이익을 위해 힘쓰며 약한 자 앞에서 그들의 강함을 뽑낸다면 약한 자는 믿음에서 돌아서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가 모든 성도들의 기쁨을 위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치 않은 것처럼(고전 10:33) 강한 자도 연약한 자에 대해서 그렇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15: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 이 말씀은 단순히 남의 기분을 맞추라는 의미가 아니다. 또한 남이 원하는 바를 맹목적으로 좇는 일을 요구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Hodge). 이는 타인의 영적 각성에 유익이 되는 일이라면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그 필요를 채워주라는 의미이다. 성도에 대한 이러한 요구는 가능한 많은 사람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의 모든 유익을 구하지 않고 그들에게 기쁨을 주었던 바울의 삶이기도 하였다(고전 9:19-23).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 타인의 영적 유익을 위하여 이루어야 할 목표는 '선'(善)을 이루고 '덕'(德)을 세우는 일이다. '선을 이루고'의 헬라어 '에이스 토 아가돈'(* )은 내적 가치, 특히 도덕적 목적을 나타내는 말로서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남을 생각하는 행위'를 말한다(Murray). 즉 성도들이 약한 형제들의 약점을 자신의 것으로 짊어지면서 살아야 할 원칙을 말씀한 것이다. 또한 '덕을 세우도록'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스 오이코도멘'(* )은 '집을 세우다'라는 의미를 가지며 여기서는 성도들로 하여금 지혜와 사랑, 은혜와 거룩에 이르도록 믿음의 성장을 촉진케 하는 행동을 가리킨다. 전자가 내적 목적이나 가치를 지향하는 반면 후자는 외적 목적을 지향한다(Bengel). 결국 이것은 사람들의 인기나 기분을 맞추기 위하여 사람들을 기쁘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적 유익을 위하라는 의미이다(Robertson).
=====15:3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 헬라어 원문에는 접속사 '왜냐하면'(* , 가르)을 사용하여 앞절의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여야 할'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성도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에게 친히 모범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직면한 모든 문제를 경험하셨다.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혹은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살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며 모든 사람의 기쁨을 위하여 살 것이냐의 갈림길에서 그는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셨다(요 8:29). 그는 비록 많은 사람의 반대를 불러 일으켜 자신에게 죽음이 초래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요 2:17)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결코 중단하지 않고 그분의 뜻을 순종하셨다.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 이것은 시 69:9의 인용이다. 시 69편은 고난의 시로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그리스도를 박해한 자들을 보응할 것에 대한 예언이다(F.F. Bruce). 이 인용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께서 하나님을 향한 충성과 순종의 결과로 비난과 모욕을 받아 죽음을 당하시리라는 것이다. 이렇듯 바울은 시 69:9을 인용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겠다는 뜨거운 마음을 품고 그것을 실행하다 보면 사람들의 비난과 반대에 부딪혀 오해와 중상을 받게 되지만 이 때에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끝까지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자 하였다.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가리키나 구체적으로 바울이 앞절에서 인용한 시 69:9의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이 구약성경을 인용하고 있는 현상 자체는 당시 교회가 구약성경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음을 뚜렷이 반영해 준다(E.F. Harrison). 바울이 앞절에서 시편에 나타난 기록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키고 여기서 다시 성도들에게 적용시킨 것은 시편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에 기록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성경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장래의 모든 성도들을 교훈하기 위해 기록되었다(딤후 3:16).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 성경을 상징하는 진정한 목적은 영생에 대한 위대한 소망을 갖는데 있다(요 5:39). 본문은 영생에 대한 소망을 위해서 '인내'와 '성경의 안위(安慰)'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소망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 것은 인내가 영과으런 영생으로 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있어야 할 요소라면, 성경의 안위는 그러한 소망을 얻을 수 있도록 확신을 주기 때문이다(E.F. Harrison). 소망을 견지하는 방법으로서 전자(前者)가 주관적이면 후자(後者)는 객관적이다(Lenski). '인내'의 헬라어 '휘포모네'(* )는 고난당하는 자가 수동적인 자세로 체념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혹독한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용맹스런 군인처럼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목적과 신앙에 대한 충성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Findlay). 이러한 자세는 약한 자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는 자들에게 필요하다(Lenski). 약한 자들은 한 두 번 도움을 받는 것으로 바로 서지 못하므로 인내를 가지고 그들을 돌보아 주어야 하는 것이다. 한편 '안위'의 헬라어 '파라클레시스'(* )는 보통 '권고', '위로'를 뜻한다. 바울 서신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현재와 미래에 당신을 믿는 성도들에게 구원을 보장해 주시고 확신케 해주심을 의미한다. 특히 본절에서는 안위가 성경을 통하여 온다는 사실과 이 안위는 우리가 믿음으로 소유한 영생을 소망하는데 힘을 주고 확신을 갖게 해줌을 강조하고 있다.
=====15:5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 인내와 안위는 성경을 통하여 오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이다(E.F. Harrison). 이 같은 인내와 안위는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하고 또한 현재에는 형제간에 사랑과 협조를 갖게 한다.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 크리스톤 예순'(* )은 직역하면 '그리스도 예수를 따라'이다. 즉 '그리스도 예수의 특성과 모범을 본받아'(엡 5:24;골 2:8)라는 뜻이다(Robertson).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으로,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표준이며 모본이 되신다.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 본절은 희구법으로 미래의 소원을 나타내는 관용어적 표현이다(Robertson).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을 함으로써 서로 일치된 정신을 가질 뿐만 아니라 다같이 모든 일에 같은 확신과 생각을 갖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15:6
한 마음과 한 입으로 - '한 마음'의 헬라어 '호모뒤마돈'(* )은 '같은 심정을 가진', '만장 일치로' 등의 의미이며 바울은 본절에서만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한 입으로'(* , 엔 헤니 스토마티)는 '하나의 일치된 고백'을 뜻한다(E.F. Harrison). 이것은 일치된 신앙에 대한 생생한 표현으로서 모든 성도들이 하나가 되어 항상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 여기서 바울이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호칭한 것은 하나님(* , 호 데오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설명한 것으로 당시 초대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한 표현이었다(고후 1:3;11:31;엡 1:3;벧전 1:3). 당시 사도들과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을 구원론적 방법으로 그리스도와 연결시켜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우리의 구원 전부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즉 우리의 구속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독립적으로 혼자서 구원을 이루신 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부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한 구원의 예정 가운데서 성육신하여 이 세상에 오셔서 구원을 이루신 분임을 의미한다(엡 1:3;골 1:26, 27). 이러한 복음의 내용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론적 칭호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고백의 중심이 되며 기독교 신앙의 특징을 함축하고 있다(Lenski).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 '영광'의 헬라어 '돝사제테'(* )는 현재 능동태 가정법으로 '너희가 계속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는 뜻이다(Robertson). 성도들 개개인의 삶의 목적이나 교회 일치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의 연합의 중요성과 또한 그것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J. Calvin). 실로 성도들이 서로 마음과 뜻이 일치되지 못하고 불화와 갈등 속에서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면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다. 성도들이 '한 마음과 한 입으로' 일치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참된 영광을 돌릴 수 없다.
=====15:7
이러므로 - 바울은 접속사 '그러므로'(* , 디오)를 사용하여 14:1 이하에서 계속 되어온 문제 즉, 믿음이 강한 자와 연약한 자에 대한 내용을 총결론 내리면서 그가 서술하였던 바를 함축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 바울은 이제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를 본보기로 들어 6절에서와 같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이 성도들의 삶 속에서 가장 큰 목적임을 다시 한번 일깨우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란 말이 헬라어 성경에 '카도스 카이 호 크리스토스 프로셀라베토 휘마스'(*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 '그리스도께서도' 또는 '심지어 그리스도께서도'라고 강조점을 두어 해석함이 옳다. 즉 거룩하신 주님께서도 죄인인 우리를 받아주셔서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구원의 자리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런 우리가 어찌 다른 형제를 용납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강력한 권면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납하는 표준과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E.F. Harrison). 즉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받으셨는데 하물며 우리가 그 연합을 파괴하는 행위를 할 수 있느냐는 호소로, 서로가 용납하여 일치와 조화를 이루어야 할 필연성을 말하는 것이다(John Murray).
너희도 서로 받으라 - '받으라'의 헬라어는 '프로슬람바네스데'(* )로 '영접하다', '환영하다'의 뜻을 가진 명령적 권고이다. 본절은 14:1의 내용을 되풀이한 것으로서 14:1에서 사용된 동사와 여기서 사용된 동사 '프로슬람바네스데'가 동일하지만, 여기서는 그 명령이 강한 자에게만 돌려지기 보다는 오히려 강한 자와 약한 자 양쪽 모두에게 돌려지고 있다(Jonh Murray). 따라서 '너희'는 성도 전체를 가리킨다.
=====15:8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 그리스도께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차별하시지 않고 모두 받아주신 이유와 목적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본래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당하는 것으로서(갈 2:7-9)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표이며 인(seal)으로 받게 한 것이다. 이처럼 이방인과 구별되어 선택받은 선민의 상징으로 실시되어온 할례는 유대인의 약속과 특권의 표이다(John Murray).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할례의 수종자'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할례받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태어나셨고 또 친히 할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계약인 할례의 법에까지 순종하셨을 뿐 아니라 언약을 맺은 계약 백성 중의 하나가 되셔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수종자' 곧 '봉사자'가 되셨다는 뜻이다. 특히 '수종자'(* , 디아코논)란 말이 가리키는 의미는 '종' 또는 '섬기는 자'란 뜻이다(막 10:45;눅 22:27). 그리스도는 종으로서 낮게 되시기까지 하여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그 언약(창 12:1-3;17:1-8)을 친히 수행하신 것이다. 이러한 사역은 당시 유대인에게 국한된 것으로 보일지 모르나 분명 그것은 전인류를 위한 구속의 사역이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을 위하여 종으로 보내진 것은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확증하기 위한 것이었다(9:4, 5)고 지적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할례의 수종자'가 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메시야를 약속하신대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 언약을 성취하심으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입증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배반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그 신실하신 속성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종으로 오셔서 구원을 이루셨다(John Murray).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하시고 - 본절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입증하기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신 효과 및 목적을 나타내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즉 아브라함에게 한 자손을 허락하셔서 그 자손 가운데서 메시야가 나오게 하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들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하리라(창 12:1-3)는 약속이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견고케 된 것이다. '견고케 하시고'의 헬라어 '베바이오사이'(* )는 '성취하다', '확증하다', '확립하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증명될 뿐만 아니라 실현되고 확립되어 결실케 되었다는 것이다(John Murray). 바울이 이 말을 언급한 것은 이방인 신자들이 유대인 신자들을 경시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우선권을 주셨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려는 의도를 가진다. 즉, 유대인들을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근원 역사를 경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E.F. Harrison). 뿐만 아니라 유대인에게 있어서도 그리스도께서 '할례의 수종자'가 되신 목적을 상기시켜 구원이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이방인까지 포함함을(9절) 가르친다. 하나님의 구원 경륜의 진행 순서상 이스라엘이 먼저일 뿐이지 결코 이방인을 제외시킨 것이 아님을 알게 하므로써 유대인 신자들로 하여금 이방인 신자들을 멸시치 못하게 한 것이다(J. Calvin).
=====15:9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던 첫번째 목적이 하나님께서 그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견고케 하려 하심이었다면 이제 두번째 목적은 하나님의 긍휼을 이방인에게도 나타내셔서 이방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긍휼의 참여자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J. Murray). 그러나 이방인들은 먼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은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부름을 받은 것이다(4:16). 즉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요 4:22)고 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에 대한 구원의 계획과 그들을 통하여 영광받으실 것을 이미 구약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다. 따라서 바울은 구약의 말씀(시 18:49)을 인용하여 그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구약의 인용문을 언급하고 있는 주된 요인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함께 합심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라 이미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밝힘으로 로마 교회의 구성원인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 사이에 일어났던 여러 가지 갈등과 불화를 종식시키고 서로 연합하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결국 주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 돝사사이 톤 데온)는 구절이 앞절(8절)의 '견고케 하시고'(* , 베바이오사이)란 말과 연결되어 평행을 이룰 뿐만 아니라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 에드네 휘페르 엘레우스)라는 구절의 목적이 되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Meyer).
기록된 바 - 바울은 구약의 인용 구절을 주의 깊게 선택하여(9-12절) 8절과 9절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즉 이방인들이 어떻게 이스라엘에 참여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으며 자발적으로 영광을 돌리게 되었는지 구약의 구절을 인용하여 순서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이러므로...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 이 구절은 시 18:49을 인용한 것으로 다윗이 주변 이방인들을 정복한 후 그 승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찬양한 노래이다. 이것은 유대인인 바울 자신이 이방인 가운데 복음을 전파하고 그로 인해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 사실을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다(1:8).
=====15:10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 이 두번째 인용문은 신 32:43의 모세 노래의 마지막 절 내용으로서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다. 특히 본문은 70인역(LXX)의 문자적 인용으로 헬라어로는 '유프란데테, 에드네'(* , )이며 '즐거워하라, 이방인들이여'라는 의미이다. 즉 이방인들의 회심을 예언한 말씀이 이제 성취되고 있다는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Dunn). 또한 이방인들의 지위가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과 동참할 수 있을 만큼 높아진 사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E.F. Harrison). 그런데 맛소라 사본(MT)은 70인역(LXX)과는 약간 다르다. 맛소라 사본에는 "그의 백성(* , 암모)을 찬양하라, 오 너희 열방들아"라고 번역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히브리어 '암모'가 원문 그대로인가는 의문이다. 아무튼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을 강력히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헬라어 본문에서는 '주의 백성과 함께'(* , 투 라우 아우투)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이방인에 대한 매우 적대적이고 감정적인 히브리어의 의미를 보다 완화시켜 이방인도 수용하는 우주적인 의미로 변화시켜 주고 있다. 바울은 이와 같은 헬라어의 의미를 자기 자신의 신학에 적용시키고 있다.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과 약속에 따라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이 지금은 모든 믿는 자에게 적용된다는 그런 신학에 근거하여 이방인들의 구원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즐거워하라고 촉구한 것이다(Dunn)
=====15:11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 세번째 찬송시는 시 117:1의 인용 구절로서 이방인들이 회심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Godet). 이로 인해 모든 열방들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찬송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여기서 '모든 열방들아'(* , 판타 타 에드네)란 말은 모든 이방 민족들을 지칭하고 '모든 백성들아'(* , 판테스 호이 라오이)란 말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게 된 은혜를 입은 모든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함께 언약을 성취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의미이다. 이제는 이방인들이 유대 전통의 간섭을 받지 않고 유대인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주를 찬송한다는 것이다. 이 예언은 오늘날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함께 교회에서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을 예배 드리고 있는 사실에서 넉넉히 입증되고 있다.
=====15:12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 - 이 구절은 사 11:10 말씀의 인용이다. '이새의 뿌리'(* , 해 리자 투 옛사이)는 왕적 메시야를 가리키는 칭호로서(사 11:1-5;계 5:5;22:16) 곧 그리스도를 지칭한다(Dunn). 성경은 다윗의 혈통에서 그리스도가 날 것을 예언하였다(사 11:1, 10).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로서 그리스도의 육적 계보를 형성했다(삼상 16:11-13;17:12). 당시 유대인들은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날 것을 알고 있었다(마 1:1;12:23;21:9;막 10:48;12:35).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만세 전에 예정하고 계획해 놓으신 것이었기 때문이다(요 1:1, 2;계 5:5). 예언에 따라 그리스도는 다윗의 혈통으로 유대고을 중 가장 작은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지만(미 5:2;마 2:15, 16), 그는 모든 민족, 모든 나라들을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분이다.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 바울은 이사야의 글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약간의 차이를 두어 기록하고 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 엘라우고임 이드로슈)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소망을 두리라' 대신에 '돌아오리니'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성경의 일반적인 표현에 있어서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것은 '그에게 소망을 둔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여기서 '소망'은 헬라어 '엘피우신'(* )으로 본절에서는 기쁨과 확신으로 구원을 소망하며 기다린다는 뜻을 가진다. 본절에서 바울은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면서 이방인들의 부르심을 두 번이나 확증하고 있는데, 하나는 그리스도가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나서 이스라엘 백성 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다스릴 분이시라는 점과 또다른 하나는 이방인들도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서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15:13
소망의 하나님 - 하나님은 믿는 자의 소망의 근원이시고 소망의 유일한 대상이시다(시 73:24-26). 성경에서의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를 두고 하나님의 허락하신 미래를 확신한 가운데서 기다리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진다. 그 소망은 항상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이루어지는데, 단지 구약과 신약에서의 차이점은 구약은 앞으로 오실 자를 소망하고, 신약은 오신 자에 대한 소망, 그리고 다시 오실 자에 대한 소망을 가진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본절에서 '소망의 하나님'(* , 호 데오스 테스 엘피도스)은 영원한 구원에 대한 기쁘고도 확실한 기대와 간절한 소원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미하고 있다.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 본절은 바울의 기원과 권고가 포함된 축도 형식으로서 미래에 대한 소원을 나타내는 희구법이 사용되었다. '기쁨과 평강'의 헬라어는 '카라스 카이 에이레네스'(* )로서 기쁨(* , 카라)은 주 안에서(빌 3:1) 나타나는 신앙의 결과이며(빌 1:5), 성령의 열매이고(갈 5:22) '평강'(* , 에이레네)은 여러 가지 용례로 사용되어지는데 실제로 생명(* , 조에)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즉 평강은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로 회복시켜 주시는 그의 구원 사역에 근거를 두고 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 구원이 보증된 영혼의 내적인 평온 상태를 의미한다(Dunn). 한편 '믿음 안에서'의 '믿음'은 교회의 조화를 가져다 주는 유일한 토대가 되면 모든 인간에게 기쁨과 평강을 가져다 주는 기본적인 전제 조건이 된다(Dunn, Godet).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 본절은 앞에 나온 구약 인용문들의 요약이다. 기쁨과 평강의 근거가 믿음 안에서 시작된다면 소망 역시 믿음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런데 믿음 안에서 기쁨과 평강과 소망을 충만케 누릴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성령의 능력으로'(* , 엔 뒤나메이 프뉴마토스 하기우)이다. 여기서 '~으로'라는 전치사 엔(* )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라는 위치와 장소를 나타내는 처격임과 동시에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라는 도구적 의미를 지닌다(Dunn). 그리고 '능력'(* , 뒤나메이)은 일반적으로 '~할 수 있는 힘, 권능'을 나타내지만 여기서는 '성령께서 믿음 안에서 기쁨과 평강 그리고 소망을 일으키는 경이적인 능력'을 강조하는 뜻으로 사용된다(J. Calvin).
=====15:14
내 형제들아 -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좀더 부드럽고 다정한 호칭을 사용하여 친밀감을 형성하고 있다. 이 용어는 본서에서 자주 쓰는 표현으로 1:13;7:1;8:12;10:1; 16:17) 로마 교인을 향한 애정어린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 당시 로마의 성도들에게 약간의 불화와 갈등은 있었지만(14장) 전체적으로 볼 때 로마 교회는 신앙의 성숙한 면모가 가득했다. '가득하고'(* , 메스토이)는 충분히 가득찼다는 말로서 1:29에서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찼다는 말을 했을 때도 사용된 단어다. '선함'의 헬라어는 '아가도쉬네스'(* )로 여기서는 선천적 기질로서의 '선함, 착함'이 아니라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인해 삶 속에서 드러나는 '새사람의 인격의 덕성 및 도덕적인 성숙함'을 의미한다. '모든 지식'(* , 파세스 그노세오스)은 로마의 성도들이 더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로서(J. Murray) 저희에게 필요한 구원의 지식이 다 있어서 안전하고 확실하게 일을 진행할 수 있다는 뜻이다(Lenski). 더 나아가 고전 8:1, 7, 10, 11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그노시스'라는 단어는 구원에 관한 지식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통찰과 이해를 나타내므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오해했지만 로마의 성도들은 바울이 지금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과 계획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고후 2:14;4:6;10:5;빌 3:8, Dunn).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 로마의 성도들이 갖춘 성숙한 신앙의 또다른 면을 말하고 있다. '서로'(* , 알렐루스)는 약한 자들과 강한 자들 즉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을 가리킨다. 저희가 이렇게 서로 권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선한 마음과 충분한 지식이 있어서 저희 믿음과 생활에 필요한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아직 방문하지 않은 로마 교회는 목회자들이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항상 피차 권면하여 진리에서 이탈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살전 5:11).
나도 확신하노라 - 헬라어 성경에는 재귀 대명사 '아우토스'(* )가 삽입되어 '나 자신도 확신하노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1) 다른 사람의 객관적인 증거와 평가를 떠나서 바울 자신의 깊은 확신을 강조하는 표현이다(Meyer, Dunn). (2) 어떤 객관적인 자료에 근거해서 확증하고 확신한다는 표현이다(E.F. Harrison). 우리는 여기서 위의 두 견해가 다 작용한 가운데서 바울이 로마 교회에 대한 확신을 선언했다고 보아도 크게 잘못됨은 없겠으나 두번째 견해가 좀더 자연스런 해석이라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확신하노라'(* , 페페이스마이)가 수동 완료형이므로 자신의 추측에서라기 보다는 로마 교회의 사정을 잘 알 수 있는 어떤 근거에 의해서 확신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선언이 믿을 만한 증거에 바탕을 둔 확신이 아니라면 이것은 마음에 없는 칭찬을 감추기 위한 과장된 말에 불과한 것이다.
=====15:15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 에파나밈네스콘)는 잘 쓰지 않은 용어로 신약성경에서 본절에만 나온다. 그 뜻은 '어떤 교리를 반복한다'는 의미이다. 즉 그들이 알지 못한 어떤 새로운 것을 가르친다는 뜻이 아니고 이미 알고 있는 복음의 진리를 회상시킨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바울은 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라고 했을까 ?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1) 복음의 원리와 명령을 안다고 하면서도 그들의 행함에 부족함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더 굳건히 세우기 위해서다. 물론 성숙한 신앙적 면모를 갖춘 로마 교회였지만 온전함에 이른 것이 아니었기에 바울은 다시 한번 진리를 일깨워 주어 로마 교회를 튼튼하게 세우려고 하였을 것이다. (2) 이미 그들이 잘 알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는 수신자들의 신앙의 질을 존중해 주는 예의 바른 태도이다(Dunn). (3) 또한 여기서 가르친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구태여 '생각나게 하려고'란 용어를 쓴 것은 바울의 신앙 인격의 겸손한 표현법이다(Hendriksen). 이는 형제를 권면할 때에 상대의 인격을 존중해 주는 모범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 로마의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바울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특별한 의미와 감회를 주는 것이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 텐 카린 텐 도데이산 모이 휘포 투 데우)는 세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그리스도 안에서 만세 전에 택정함을 입은 것을 말한다(엡 1:3-6).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일반적인 주권으로 선택함을 받은 것을 바울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라고 노래했다. (2)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해 구원함을 받은 것을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고 강조했다(엡 2:5, 8). 지난 날 무지 가운데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하고 믿는 자를 멸절(滅絶)시키려 했던 악한 자신을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친히 만나 주심으로 자기를 불러 회개시키고 구원해 주신 그 사건을 그는 평생 감격하며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고 찬송했다. 바울 사도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대적했던 자신이 구원을 받은 것이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라고 그의 서신 곳곳에서 고백하고 있다(3:24;딛 2:11-14;히 2:9). (3) 사도적인 직분과 사역에 관련된 고백으로서 바울은 자기의 사도 직분을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고 말한다(행 9:15;고전 15:9-11;엡 3:7-9;딤전 1:12, 13). 교회와 믿는 자를 핍박하여 주님을 대적했던 죄인중에 괴수인 자신을 불러 구원해 주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이방인의 사도'로 삼아주신 것이야말로 은혜 중의 은혜라고 간증하는 것이다(롬 1:1, 5;갈 1:1, 15;2:9). 이중 본문에서 말하는 은혜는 문맥상 세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즉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예수께서 부르시고 세우신 사도적인 직분과 사역을 뜻한다(Murray, Dunn).
더욱 담대히(* , 톨메로테론) - 이 말은 비교적인 의미가 내포된 부사로서 바울 사도의 다른 서신보다도 본서를 '더욱 담대한 마음으로' 썼음을 나타낸다(12:3;14장). 바울은 자신이 로마 교회를 세우지 않았고 또한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은혜로 택정하시고 이방인의 사도라는 막중한 사명을 맡겨 주심을 생각할 때 그들을 권면할 자격을 찾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담하게' 말할 수 있었다.
대강(* , 아포 메루스) - 이는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1) '부분적으로', 혹은 '어떤 곳에는'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Meyer). (2) '다소', 또는 '어느 정도'라고 해석될 수 있다(Murray, Godet). 여기서 우리는 두번째 해석을 취한다 해도 크게 틀렸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첫번째 견해를 취함이 좀더 적절한 해석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한 '더욱 담대히'란 말은 (1)번의 해석과 연결시킬 때 비교적인 의미가 선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어느곳에서는 내가 더 대담하게 썼다'고 자연스럽게 연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어느 곳에서'(부분적으로)란 6:12, 19;8:9;12:3;13:3, 13, 14;14:3, 4, 10, 13, 15, 20 등을 들 수 있다(Meyer). 위와 같은 구절들에서 바울은 더욱 담대한 권면을 하고 있다.
썼노니(* , 에그랖사) - 이 말은 '과거에 ~했다'는 단순 과거형 동사로서 바울 사도가 이제까지 로마서를 쓴 사실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본서 저자가 사도 바울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증거를 보게 된다.
=====15:16
바울은 그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은혜를 본절에서 구체적으로 약술하고 있다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 바울은 대제사장의 명을 받아 기독교도들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중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이방인을 위한 복음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행 9:15;26:14-19). 즉 사도직의 은혜가 이방인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숭고한 사역의 성취를 위해 바울에게 주어진 것이다(Godet). 그 후에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온 생애를 전략하였다. '일꾼'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이투르곤'(* )은 '레이토스'(* , '백성')와 '에르곤'(* , '일')이 합성된 단어로 공직자 곧, 공적인 관리를 뜻한다(Godet). 종종 '군대의 종이나 왕의 신하'나 '성소에 부리는 자'(히 8:2)에 대해서도 사용된다. 그러나 특히 신약에서는 하나님에 의하여 임명된 일꾼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임명받은 일꾼을 말한다(Meyer). 바울은 이 단어를 그리스도의 일꾼된 자신에게도 사용하지만 또한 바울 자신의 일꾼된 에바브로 디도에 대해서도(빌 2:25)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바울에게 맡기신 사도직은 범세계적인 직무로서 복음 전파의 직무는 물론 제사장적 성격을 띤 직무였다. 즉 바울의 사명은 이방 세계를 하나님이 받으심직한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일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 히에루르군타)란 단어가 명백히 보여준다. 신약에서 본절에서만 사용된 '히에루르군타'란 단어는 '히에로스'(* , '거룩한')와 '에르고'(* , '일')의 합성동사 '히에루르고스'(* )에서 파생한 동사로서 '거룩한 사명을 수행하다', '제사장으로 봉사하다'의 뜻을 가진다. 이러한 사명을 받은 바울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 (1) 제사장 직무를 맡은 바울의 역할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인격은 물론 모든 청중, 곧 이방인의 인격을 하나님께 바치는 구원의 메신저(messenger)로서의 봉헌(奉獻) 행위였다. (2) 모든 교회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본서는 물론(1:8-10) 모든 바울 서신의 첫머리에 나타나는 모습이다. (3) 구체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행위를 포함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란 표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이 바울의 사도직은 제사장적 직무를 수행하는 기능이 있었다(Godet).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 이것은 신약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비유적 표현으로서 아마도 사 66:20로부터 발전된 개념일 가능성이 높다(Murray). 바울은 여기서 '이방인'(* , 톤 에드논)과 '제물'(* , 헤 프로스포라)을 동격으로 취급하여 복음에 의하여 얻어진 이방인을 사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 즉 영적인 희생 제물이라고 말하고 있다(Godet, Meyer). '제물'이란 제사 의식에서 마지막으로 바쳐지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한 것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비유적인 표현에서 우리는 복음 전파자의 사역의 목표를 보게 된다. 그것은 이방인들에게 단순히 복음을 전파할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순종케 함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한 제물이 되도록 그들의 영혼을 성결케 해야 한다는 사명인 것이다. 이런 뜻에서 사도직의 기능을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함으로 묘사했고, 사역의 대상인 이방인을 구약의 제사에서 제사장이 드리는 제물로 비유하여 나타낸 것이다(Calvin).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하심이라 - 당시 복음을 통해 회개한 이방인 신자들이 할례를 받지 않았다고 하여 불결하다고 주장하는 유대인 신자들이 있었기에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 바울은 이방인 신자들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고 깨끗게 되어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하게 된다고 말한 것이다(Blaiklock).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의 헬라어 '헤기아스메네 엔 프뉴마티 하기오'(* )는 완료형 수동태 분사 구문을 취하고 있어, 성화(聖化)가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로 칭의와 최종적인 구원 사이에서 이루어져 가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또한 성령께서 신자를 하나님이 받으심직한 상태로 창조해 가시는 주체임을 보게 된다(Harrison). 거룩한 삶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이다(8:2, 4).
=====15:17
그러므로(* , 운) - 앞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사도직과 이방인을 위한 임무를 말한 바울은 이제 그 사역의 구체적인 결과를 진술하기 위해 15절과 16절의 내용을 받는 접속사를 쓴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 엔 크리스토 예수) - 이 어구는 바울의 애용구로서 바울 신학의 기본어(key word)이다. 본문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란 말은 그리스도를 통하여(through Chirst Jesus)란 말로서 '자랑한다'는 용어가 시사할 수 있는 지나친 자기 자랑적인 태도를 부드럽게 유화시켜 준다(Godet). (2) 바울의 자랑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는 것으로 자랑의 근거를 강조하는 것이다. 즉 그의 자랑은 자기 자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높이는 것임을 말한다(Meyer). (3) 사도가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란 말을 첨부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랑이 아니고는 모든 자랑이 제거되어야 할 것임을 나타낸 말이다(고전 1:29, 30;고후 10:17, J. Murray). 위의 세 견해는 유사한 것으로서 본문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란 어구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덧붙여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헬라어 원문에 나타난 강조점의 문제이다.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란 어구는 '자랑하는 것'(* , 카우케신)이란 말을 직접 수식하고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부사구로서 '내가 가졌다'는 '에코'(* )라는 동사를 수식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란 말은 위의 세 가지 해석을 취하면서도 자랑 그 자체를 강조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바울이 자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의 근거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한층 강조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은 사도의 모든 사역의 근거요 내용과 목표였다.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 타 프로스톤 데온) - 이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1)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하나님께 관한 것'이다(Godet). (2) 일종의 부사적 대격으로서 '하나님께 대하여'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Dunn). 두 가지 해석을 다 취할 수 있다. 이 표현은 어떤 특정한 것을 가리킨다기보다는 하나님께의 섬김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에 관련된 것에 있어서만 자랑한다는 자랑의 범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용어는 예배 직무를 수행하는 유대인의 예배 의식적 표현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전문 술어로서(히 2:17;5:1) 앞절(16절)의 '제사장 직무'(* , 히에루르게인)와 '일군'(* , 헤기아스메네)과 일맥 상통한다(Godet).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 여기서 자랑의 구체적 내용은 16절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방인들이 복음을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드려진 것을 말한다. 여기서 바울이 유달리 자랑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도구로서의 축복을 받은 사실이다(고전 15:31;고후 1:12-14;7:4, 14;8:24). 이것을 바울은 자기의 면류관이요 기쁨이라고 했다(살전 2:19).
=====15:18
한글 개역 성경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헬라어 원문이나 영역본에는 이유를 나타내고 접속사 '왜냐하면'(* , 가르)이 본절 초두에 삽입되어 있다. 그러므로 본절은 17절에서 주장한 것, 즉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한 것에 대한 이유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 이것은 16절의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으로서 좀더 쉽게 직역하면 '이방인 편에서 순종이 생기게 하기 위하여'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순종하도록 이끄는 것이야말로 바울의 소원이었으며, 또한 그의 부르심의 목적이었다. 그리고 바울은 이것을 다시 상기시킴으로 로마의 성도들에게 자신의 사역에 대한 열매를 확실하게 가르치면서 이런 성과가 어떻게 무엇으로 성취되었으며 그 성격은 어떤 것인지를 규명하고 있다(J. Calvin).
나로 말미암아(* , 디 에무) - 이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가 행한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을 통한 '그리스도의 역사하심'을 강조한 것이다. 바울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이방인을 순종케 하기 위해 자기가 수고한 것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임을 말하고 있다. 아울러 자기 자신은 주님이 쓰시는 복음 전도의 도구요 하나의 통로였음을 명백히 밝히는 표현을 쓴 것이다(J. Murray).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바울 사도를 통해 쓰신 도구, 즉 방편과 원리가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1) '말과 일이며'(* , 로고 카이 에르고). 이것을 혹자는 그의 설교와 수고, 또는 전도와 생활이라고 말한다(눅 24:19;행 7:22;고후 10:11, Robertson). 그러나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말'(word)은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위한 사도 바울의 모든 노력을 총체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대개 그의 가르침과 설교(복음 증거)를 말한다. 그리고 '일'(deed)은 복음을 위한 그의 행적과 고난 즉 실천적 행실이 있는 삶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를 통해 나타나는 이런 것들을 거룩한 도구로 쓰셔서 구원 사역을 이루셨다(Lenski). (2)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 엔 뒤나메이 세메이온 카이 테라톤). 그리스도께서는 이방인을 향한 효과적인 전도 사역을 위하여 바울로 하여금 표적과 기사의 능력을 행하게 하셨다(행 13:7-12).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행 2:22)과 사도들의 사역에서도 나타났다(행 5:12). 여기서 '표적'(* , 세메이온)은 영적인 의미로서 인간들의 눈앞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역사를 의미한다(signs, KJV, RSV). 즉 영적으로 볼 수 없는 실재를 눈 앞에 나타내준 증표인 것이다. 그리고 '기사'(* , 테라톤)는 놀라운 일을 뜻하는 것으로서 일반적으로 볼 수 없는, 즉 자연 법칙을 초월하는 기적을 말한다(miracles, NIV). 이로보건대 표적과 기사는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자임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그가 전한 복음이 하나님이 계시하신 진리임을 증거한다. 아울러 무엇보다도 그 복음이 가리키는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역사상에 현실로 임했음을 일깨워 주는 표이다. 구약에서는 표적과 기사가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의 수단으로써 나타났으며, 특히 출애굽 때와 광야 생활 중에 그러했다. 그러므로 표적과 기사는 근본적인 의미에서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아무튼 이것은 바울을 통해 이방인을 부르실 때 쓰신 거룩한 방편이며, 그 결과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순종을 불러일으켰다(J. Calvin). (3) '성령의 능력으로'(* , 엔 뒤나메이 프뉴마 토스). 이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까) 본절의 결론적인 어구로서 사도의 사역이 성령의 능력의 역사가 아니고는 불가능했음을 나타내 준다(Calvin). (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의 구
인 성령을 의지해야 할 것임을 암시한다.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 바울은 여기서 곡언법(曲言法)을 사용하고 있으니, 곡언법은 어떤 문장을 강조할 때에 이중의 부정사를 사용하여 훨씬 더 강한 긍정을 이끌어 낼 때에 사용하는 어법이다. 본문에서는 '우 가르 톨메소'(* ,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와 '우 카테이르가사토'(* , '역사하신 것 외에는')는 썼다. 이 문장을 직역하면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지 않는 것은 어느 하나라도 말하지 않겠다', 즉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한 것만을 말하겠다'는 뜻이다. 따라서 본절의 의미는 '나는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을 순종케 하기 위해서 나를 통해 말과 일, 표적과 기사의 일을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이다(Meyer, Godet).
=====15:19
이 일로 인하여 - 바울은 원인 및 결과적인 접속사 '그러므로'(* , 호스테)를 사용하여 그가 18절에서 말한대로 그리스도의 복음의 일꾼으로 이방 전도 사역에 부름받아 여러해에 걸쳐 전도 활동을 하였음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이 일로 인하여'라는 말은 18절과 19절을 한데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Meyer).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 바울은 세 차례에 걸쳐서 소아시아와 지중해 북부 지역을 두루 다니며 전도 여행을 하였다(행 13-21장), 그가 복음 전도를 시작한 것은 다메섹과 아라비아 지방에서부터였으며(행 9:19, 20), 본격적으로 이방인의 사도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 것은 안디옥에서였다(행 11:25, 26;13:1-3). 그런데 어째서 그의 전도 사역의 출발점을 예루살렘으로 말했는가 ? 여기에 대해서 혹자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전도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던 것을 염두에 두고 말하였다고 한다(F.F. Bruce). 또한 혹자는 복음 전도의 출발점과 중심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에 그곳을 언급했다고 한다(Lenski). 후자가 좀더 타당한 의견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행 1:8에서처럼 복음은 예루살렘으로 시작해서 땅끝까지 전파될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루리곤'(Illyricum)은 아드리아 해의 동쪽 연안, 마게도냐에 근접해 있는 로마의 속령으로 오늘날의 유고슬라비아 영토에 해당한다. 공식 명칭은 일루리아(Illyria)로 바울은 3차 전도 여행 중 고린도에 체류하는 동안 일루리곤 지역을 방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행 20:1, 2). 아무튼 사도는 여러 해에 걸친 자신의 사역의 결과를 언급하는데서 자기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나 회심자의 수효, 또는 이러한 사역에 뒤따른 고난 등에 관한 설명을 생략하고 단지 자기가 수고한 경로를 표시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을 인용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Harrison).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 이것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 이르는 넓은 범위의 지역을 나다니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렇다고 목적지를 향해 곧바로 서둘러간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는 복음을 편만하게 전했다고 말하고 있다. '편만하게 전하다'의 헬라어 '페플레로케나이'(* )는 '플레로오'(* )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부족한 것으르 보충하고 완결짓는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직역하면 '복음을 채웠노라', '복음 전하는 일을 완성했노라'(NEB)로 번역할 수 있다. 또한 복음을 모든 곳에 전파하여 '완전히 밝히 드러내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Godet). 칼빈(Calvin)은 이것을 '바울이 부족된 것을 보충하면서 복음 전파를 넓게 퍼뜨렸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을 통하여 바울의 전도 활동을 짐작해볼 수 있는데 그는 전도 여행을 하면서 큰 도시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그곳에 교회를 세운 다음 그 지역의 새로운 회심자들에게 그 교회를 맡겨 그들로 하여금 그 주변 지방들을 보다 강력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복음화시키도록 한 듯이다.
=====15:20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자신의 사도직의 진실성을 확증하기 위해 지금까지 동양에서의 자신의 활동이 거둔 성공에 대해서 언급하였다(19절). 그리고 이제 본절에서는 서양에서의 미래 사역과 로마 방문에 대한 생각을 피력하기 위해 그가 항상 자기 사역의 지침으로 삼아온 원칙을 상기시키고 있다(Godet). 이러한 고백은 이미 다른 전도자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한 곳에서는 전도하지 않겠다는 바울의 확고한 선교 정책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자기 자신에게 닥치는 희생과 고난이 아무리 많더라도 복음을 위한 길잡이가 될 책임을 맡겠다는 그의 소망을 표현해 주고 있다(Harrison). '힘썼노니'라고 번역된 헬라어 '필로티무메논'(* )은 '필로스'(* , '사랑함')와 '티메'(* , '명예')가 합성된 단어로 '힘쓰다'는 의미 외에 '명예를 사랑한다' 또는 '영예로운 일로 간주한다', '열성으로써 노력하다'의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바울 자신이 개인적인 영예를 구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의 사도적 책임이었다. 사도란 단순한 목사나 전도자가 아니다. 바울 자신이 고전 3:10에서 말한대로 그의 사명은 '터'를 놓아 다른 사람이 그 위에 건축할 수 있게 하는 것, 즉 남들이 아직 가지 않은 곳,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지 않은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바울은 영예로운 일로 여겼고, 이 일을 사랑했으며 또한 최선을 다해 열정적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바울의 성스러운 자랑과 열망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여기서 어떤 새로운 사상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현재 목표를 향해서 다가가고 있는 선교 사역의 진행 방법과 정책 및 그 성격을 규졍하고 있는 것이다(Godet).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해야 할 막중한 사명을 갖고 있는 바울이(1:8, 14, 15;행 1:8) 여기서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한다는 자신의 선교 정책을 말한 것은 단순히 사도직의 구별 의식이나 우월 의식에서 한 말이 아니다. 이것은 바울의 사역의 독특한 특징으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야할 신성한 일을 자기 혼자 독불장군식으로 주장하지 않고 다른 사역자들의 전도 활동과 열매를 존중한다는 의사 표현이다. 즉 이미 복음이 전파된 곳에 또 가서 전하는 이중적 일을 하지 아니하여 하루라도 빨리 땅끝까지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파하고자 한 열망에서, 바울은 그러한 선교 원칙을 취한 것이다. 바울의 이런 선교 원칙은 그 결과 얻어지는 공적을 독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체 기독교 선교의 경제성을 위해서였다. 아직도 미개척지가 많은데 한 곳에 사역자들이 모이는 것은 기독교 전체의 공동 사역(team ministry)이란 관점에서 볼 때 비효율적이므로 자신이 먼저 앞장서서 고통을 무릅쓰겠다는 순교적 자세를 바울은 항상 갖고 있었던 것이다.
=====15:21
본절은 사 52:15의 70인역(LXX)의 문자적 인용으로서 앞절(20절)에서 말한 바울의 선교 정책이 자기 고집이나 자랑이 아님을 입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의 이방인을 위한 전도 사역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일치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 구절은 그 유명한 이사야의 '종의 노래' 즉 메시야의 자기 비하(빌 2:7, 8)와 고난과 승귀(빌 2:9-11)가 완벽하게 응결되어 있는 사 52:13-12의 내용으로서 그 종이 많은 민족과 왕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언급하고 있다.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 호이스 우크 아넹겔레 페리 아우투 와손타이).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 사 52:13-15에서는 '왕들'(* , 멜라킴)로 표현되었으나 본문에서는 유대인과 대조되는 이방인을 가리킨다.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 카이 호이 우크 아케코아신) - '듣지 못했다'는 것은 유대인들처럼 고난의 종되시며 메시야이신 주님에 관한 소식을 듣지 못했다는 뜻으로서 역시 이방인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리고 '깨달으리라'(* , 쉬네수신)는 말은 사도들이 전파한 주님의 소식, 곧 복음을 듣고, 예수를 메시야인 구세주로 알게 되어 믿음에 이르른 것을 뜻한다. 앞 구절의 '볼 것이요'란 말과 대등 소이한 표현이다. 이렇듯 열방에 복음의 빛이 비춰지므로 주께 돌아온 자가 역사상에 일어난 것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 것을 보여주는 획기적인 사건이다. 이런 관점에서 바울은 자기의 선교 사명을 인식하고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자신의 선교사역의 결과를 증거한 것이다. 한편 혹자는 이러한 예언이 바울의 사역에서 성취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그의 사도직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말한다(John Calvin). 왜냐하면 이 말씀은 특별히 사도들에게 위임되었고(마 28:19, 20;막 16:15), 그들에 의해서 이 말씀이 성취되어졌기 때문이다.
=====15:22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 로마 교회는 바울에 의해서 세워지지 않았지만, 1:13에서 이미 언급한대로 바울은 로마 교회를 방문할 계획을 여러 차례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로마를 방문하는 것이 늦어졌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1) 방금 서술한(20, 21절) 바울 사도 자신의 선교 원칙에 뿌리를 둔 장애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즉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않는다는 바울의 독특한 사역 방식이 작용한 것이다(Meyer). (2) 복음 전도 사역이 너무 바빴기 때문이다. 즉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지경에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워야 할 일이 쉴사이 없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또한 장애 요소가 된 것이다.사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불려지지 않는 곳에서 복음 전하는 것을 그의 사역의 원칙으로 삼았기에 연달아 진행되는 복음 전파와 교회를 세우는 일은 바울의 로마행을 본의 아니게 가로막은 외적인 장애 요소가 되었을 것이다(Harrison). 한편 '막혔더니'로 번역된 '에네콰토멘'(* )은 반복을 나타내는 미완료 수동태형으로서 외적인 장애요소가 계속해서 가로막았음을 보여 준다. 즉, 로마 방문 계획이 번번이 성취되지 못한 것이 바울 자신의 고의적인 뜻이 아니었음을 나타내 준다.
=====15:23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 '이제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뉘니'(* )는 일반적으로 '지금', '현재'라는 의미로 쓰이나 바울 서신에서는 새로운 시대나 상황의 전개를 분명하게 할 때에 자주 쓰인다(3:21;5:11;6:22;8:1). 여기서는 특히 상황의 전개를 분명하게 할 때에 자주 쓰인다(3:21;5:11;6:22;8:1). 여기서는 특히 상황의 전개에 관하여 쓰인 것으로 앞절(22절)의 상황과 대조되는 다른 경우가 펼쳐진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지방'(* , 토이스 클리마시 투토이스)은 복수이므로 '지방들'을 말하며 바울의 현재 선교하는 지역들을 의미한다. 즉 예루살렘에서부터 일루리곤까지 지중해 동부 지역의 도시들을 가리키며 대체적으로 에베소, 고린도, 데살로니아, 빌립보, 다메섹 등을 가리킨다. 바울은 그곳을 두루 다니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19절). 이제 더 이상 그 지역에서는 복음을 전할 새로운 곳이 없었기 때문에 좀더 새로운 지역에 눈을 돌리고자 하였다.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 '여러 해 전부터'로 번역된 헬라어 '아포 폴론 에톤'(* )은 '상당히 오래 전의 해부터'라고 직역할 수 있다(Robertson). 바울의 서바나와 로마 방문 계획은 갑자가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준비되고 계획된 것이었다.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지만 대개 로마 교회의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특히 바울의 서바나에 대한 전도 계획은 그가 지중해 동부 지역에 전도 사역을 치중하였을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서바나는 서쪽 변방으로 땅끝이라고 생각되었다. 이곳에 복음을 전파하기에 앞서 그가 로마에 들르기로 작정했던 것은 로마가 당시 세계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바나 선교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서 로마 교회의 협력을 필요로 했다. 그렇다면 단순히 선교 기지로 이용하기 위해서만은 아님을 1:11-13에서 보여준다. 즉 선교 계획에 동참하게 하기 전에 저들의 믿음을 확인하고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어 저희를 견고케 하며, 영적인 사귐을 통해 피차 유익을 받고 안위케하려는 목적도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중요한 내용이었다. 위에서 '원'(* , 에피포디안)이란 '간절한 열망'으로서 본절에서는 서바나에 가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하지 않고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라 했다. 이것은 바울이 로마 교회 성도들을 일차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15:24
이는 지나가는 길에 - 한글 개역 성경에는 삭제되어 있으나 헬라어 원문에는 '서바나'(* , 스파니안)가 삽입되어 있다. 즉 '서바나로 지나가는'(* , 호스 안 포류오 마이 에이스 텐 스파니안)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서바나는 지중해 연안의 서쪽에 위치한 곳으로 오늘날 스페인 지역이며 당시 그곳은 로마의 영토로 많은 유대인들이 이주하여 살고 있었다. 바울은 3차에 걸친 전도 여행 중에 지중해 전지역에 걸쳐 전도하였으나 아직 서바나 지역은 전도하지 못했다. 그는 원래부터 서바나에 대한 선교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교회 내에서의 끊임없는 분쟁과 위기와 바쁜 전도 일정들 때문에 그곳에 전도를 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23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어 그 일을 위해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Ernst Kasemann). 여기서 '지나가는 길에'(* , 디아포류오메노스)란 말은 '통과하는 길에'란 뜻으로 로마에서 오래 머물지 않겠다는 바울의 여행 계획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로마 교회를 향한 무성의한 모습이 아니다. 서바나로 가는 길에 잠깐 들려 간다고한 것은 앞절(20절)에서 밝힌 것처럼 '남의 터위에 건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쓴다'는 바울 사도의선교 원칙에 근거한 것이고 또한 될 수 있는대로 빨리 서바나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려는 열망과 전도 계획 때문인 것이지 결코 로마 교회를 무성의하게 취급한 것이 아니다. 로마 교회의 성도들을 향한 사도의 관심과 사랑을 생각할진대 더욱 그러하다(1:11-13).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 - 바울이 서바나를 향한 선교 계획의 중간 기착지로서 로마를 방문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너희를 보고(* , 데아사스다이 휘마스). 여기서 '보고'라고 번역된 '데아사스다이'(* )는 단순 과거행으로서 '본다'는 동작과 행위를 강조한다. 즉 그토록 보기 원했던 로마 교회 성도들을 보는 것이 바울의 방문 이유 중에 하나였음을 보여준다. 바울 사도가 저들의 얼굴 보기를 사모한 것은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통해 구원받은 한 형제로 여겼기 때문이다. (2)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 휘몬 프로톤). 여기서 보듯이 헬라어 성경에는 '교제하여'라는 말이 없다. 그러므로 원문 그대로 해석한다면 '먼저 너희의'라는 해석이 되지만 휘몬(* )이란 말이 제2인칭 복수 제 2격이란 점과 이 편지의 발신자와 수신자의 상호 관계를 생각할 때 한글 개역 성경에서 '교제하여'란 해석을 덧붙인 것은 행간의 의미를 살려주는 무난한 의역이라 생각된다. 이 어구를 의역한 우리말 성경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먼저 여러분을 만나'(새 번역), '여러분을 만나 함께 지내면서'(공동번역), '먼저 로마에 있는 여러분을 방문하여 교제를 가진 후에'(현대인의 성경). 그렇다면 여기서 말한 교제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일까 ? 그것은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베푼 구원의 은혜를 들으면서 저들의 믿음을 확인하고 또한 사도 자신이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어 그들의 믿음을 견고케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선교 계획(서바나를 향한)을 알려주어 그들도 참여케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피차 안위를 받는 성격의 사귐이었음을 알 수 있다(1:11-13). 이로써 처음하는 그들이었지만 한 믿음 안에서 한 하나님 아버지의 권속인 형제들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3)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 , 에안...아포 메루스 엠플레스도). '약간'(* , 아포 메루스)이란 말은 '얼마동안', '잠시나마'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만족을 받은 후에'(* .. , 에안...엠플레스도)란 말은 '충분한 기쁨을 누린다'는 뜻이다. 즉 오랫동안 사모했던 교인들의 얼굴을 직접 보고 교제를 나누는 사귐을 통해서 저들이 진실로 진리위에 굳게 서 있는 것을 확인한 사역자의 기쁨을 의미하며 또한 바울의 선교 계획에 참여하겠다는 저들의 믿음을 확인한 후에 오는 사역자의 즐거움을 가리킨다. 이것은 사도 바
과 지원을 통해서 새로운 선교지로 파송을 받아 복음을 증거해왔다(행 13:1-4;14:26;15:40). 그는 이러한 체험을 상기하면서 이제 마지막이 될지 모를 서바나 선교 계획에 로마 교회의 참여를 공개적으로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들의 기도, 재정적인 도움, 함께 복음 전파에 수고해 줄 조력자 등의 도움을 받아 로마 교회 이름으로 파송을 받아 아직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서쪽 변방까지 복음을 전파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로 보건대 바울의 로마 체류 성경이 잠정적이고 제한적인 것이며 또한 그의 방문 목적이 로마 교회와의 교제의 협력가가 지원을 힘입으려 함에 더 강조점이 있다는 것을 명백히 나타내 준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도 바울과 각 교회들과의 유대 관계가 굉장히 밀접했으며, 바울의 사역은 어디까지나 교회를 통한 선교 사역이었다는 점이다(J. Murray). 그리고 '바람이라'를 가리키는 '엘피조'(* )란 말은 '내가 바람이라'는 뜻으로 단순히 서바나에 파송받는 것뿐 아니라 본절 전체의 내용을 사도가 기대했다는 것을 나타내준다. 왜냐하면 '엘피조'가 '가르'(* , '이는') 이하와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15:25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 바울은 23절에 사용한 역접을 나타내는 접속사 '그러나 이제는'(* , 뉘니 데)을 반복 사용하여 서바나 선교 계획의 중간 경유지로서 로마를 바로 가야하지만 도중에 예루살렘을 거쳐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언급하고 있다. 바울이 그렇게 가기를 소원하였던 로마 교회의 방문을 또 뒤로 미룬 채 먼저 예루살렘을 방문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무엇이었겠는가 ? 예루살렘 교회는 모든 교회의 모(母) 교회로서 교회 지도자들 즉 사도들이 있는 교회이지만 지금은 핍박과 어려움 중에 있는 가난한 유대인 성도들이 많이 있었다. 이러한 위급한 교회를 모든 교회가 협력하여 도와줄 의무가 있었다. 이것은 모교회에 대해 이방 교회가 지녀야 할 당연한 태도이며 그들이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이 염두에 두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성도들과 기타 이방 교회의 성도들과의 화합과 일치였다. 예루살렘 이외의 모든 교회는 대부분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유대 기독교들과 이방인 기독교 개종자 사이에는 적지 않은 충돌과 마찰이 있었는데 유대 기독교 신자들은 이방인 기독교 개종자들에게 배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 가운데서 일부는 이방인 기독교 신자들에게 구약의 규례들을 따를 것을 강요하는 무리들도 있었다(행 15:1, 5). 이러한 형편에서 바울은 이방인 성도들의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예루살렘과 이방 교회 간의 관계가 극복되어 견고한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형성되리라 생각했었다. 이전에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교인들을 돌보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하여 바나바와 함께 수리아 안디옥에 있는 성도들로부터 헌금을 거두어서 도와준 적이 있었다(행 11:30;12:25). 그리고 바울은 갈 2:10에서도 예루살렘 교회를 도와줄 것을 이방인 교회에 호소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바울의 로마 교회의 방문이 다시 한번 불가피하게 지체되었고, 이와 같은 사정을 로마 교회에 알림으로 그들로 하여금 양해를 구하고 있으며 또한 그의 이러한 모범을 따르도록 독려하고 있다(John Calvin).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이러한 구제의 행동을 '성도를 섬기는 일'(* , 디아코논 토이스 하기오이스)로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성도를 섬기는 일'이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루살렘의 가난한 유대인 성도들을 구제하기 위해 마게도냐와 아가
=====15:26
이는...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지고 온 헌금은 고린도, 갈라디아, 마게도냐 등 많은 이방인 성도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힘껏 헌금한 것이었다(고전 16:1-3;고후 8, 9장);갈 2:10). 그런데 '마게도니아와 아가야' 사람들만 언급한 것은 바울이 본 서신을 쓸 때 아가야에 있었고 최근에 마게도니아를 지나왔기 때문이다(행 18:12;20:1, 2). 이것은 본 서신이 고린도에서 쓰여졌다는 사실을 뒷받침 해준다. 아가야는 헬라 명칭 '아카이아'(* )로 고린도의 수도였다. 그들은 어려운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서 헌금을 억지로 하거나 마지 못해서 하지 않고 자원하는 마음으로(고후 9:5-15) 기쁘게 사랑의 선물을 바울을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에 보냈다. 위에서 '얼마를 동정'의 헬라어는 '코이노니안 티나'(* )인데 '코이노니안'(* )은 일반적으로 '교제', '친교'의 의미이다. 이 문장을 직역하면 '얼마의 친교'를 세웠다는 말로 번역될 수 있다. 실제로 공동 번역에서는 '교우로서 정을 나누려고'라고 '친교'의 의미로써 번역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코이노니안'을 '친교'로 해석하기 보다는 '헌금'으로 해석하는 것이 좀더 무난할 듯하다.
=====15: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 바울은 여기서 이방인 교회의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구제 헌금의 성격을 '자원하는 심령과 의무'라는 관점에서 규정하고 있다. '빚진 자'라고 번역된 헬라어 '오페일레타이'(* )는 '오페일로'(* , '빚지다')의 목적 소유격으로 '의무를 가진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나 여기서는 '손해를 준 사람에게 아직 보상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바울은 이 용어를 1:14과 8:12에서도 사용하고 있는데, 자신을 가리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의 빚진 자'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고백은 의미심장한 것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무한한 은혜에 대한 채무자적인 자신의 심정을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복음의 빚진 자로서 사랑의 봉사와 복음 증거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바울의 이와 같은 태도는 이방인들 또한 유대인들에게 가져야 할 태도이다. 이방인은 유대인에게 복음의 빚진 자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빚진 자인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신령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티코이스'(* )는 '영적인', '성령에 부합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나, 여기서는 '하나님의 구속적 은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로부터 이방 세계로 전파된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으로 나셨으며 복음의 일차적인 대상 또한 유대인이었다. 그러므로 만일 예루살렘 교회가 그들의 영적 축복 곧 복음을 이방인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아직도 사단의 권세 아래, 죄악의 어두움 속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E.F. Harrison). 그런데 지금 이방인들은 예루살렘 유대 기독교 신자들로부터 시작된 복음을 받아들임으로(행 10장;11:19-22;15:40, 41)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되었다. 따라서 이방인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 성도들에게 빚진 자들이 된 것이다. 이 '빚'(* , 오페일로)은 상업적 빚의 의미가 아니라 은혜를 크게 입은 자에 대해 느끼는 의미로서 부채감(負債感)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방인 신자들이 그들의 '육신의 것'(* , 엔 토이스 사르키코이스) - 이 단어는 육신의 죄악된 면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육신의 일상 생활에 속한 필요한 것들을 말하는 것으로서 부유한 이방인 성도들이 물질로써 가난한 유대인 성도들을 섬기는 것을 의미함(Robertson)-을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유대인 성도들에게 나누어 줌으로 복음의 은혜를 갚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당연한 일인 것이다.
12장부터 거론된 '성도의 생활'은 본장까지 계속 이어지는 주제이다. 본장은 전장
(前章)에서 언급되던 '성도의 교회 생활'에 관해 계속 언급함으로 그 서두를 시작하는
데 그 내용은 구원받은 이방인들을 항한 메시지를 초점으로 하고 있다. 본장을 구조적
인 면과 내용 면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내용의 개요. 먼저 바울은 1-13절에서 14장의 주제에 이어 '서로 용납하라'는
권면을 하고 있다. 1절에서는 약한 형제를 돌보아야 할 강한 성도의 의무를, 2절에서
는 이웃을 기쁘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할 성도의 의무를 권면한다. 3-7절에서는
교회 안에서 각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로 포용하하고 권면한 후 마지막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섭리를 설명하며 교회의 보편성
(Catholicity)을 강조한다.
두번째 단락인 14-21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면서 자신은 예수 그리스
도의 일꾼으로서 복음의 제사장적 직무를 지니고 선교 사역을 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
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선교 신학적 분석에 의해 선교의 동기, 목적, 방법과 범위, 결
과 들을 찾아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22-32절에서 바울은 앞으로 복음 사역을 위하여 로마 교회를 방문하리라
는 계획과 아울러 로마 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을 위해 힘써 기도해 줄 것을 당부
한 후 33절에서 '평강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로마 교회와 그 성도들을 축복하고 있다.
(2) 구조적 특징. 일반적으로 본장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 하나가 1-13절인데
14장에서 거론되는 '아디아포라' 주제의 결론으로 여겨진다. 결론은 6절에 나온 '하나
님의 나라'이다. 즉 교회 전체가 한마음이 되어 온전한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다. 두번째 부분은 14-3절로서 본서 전체의 결론 부분이다. 본서는 서신(書信)이다.
따라서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대로 이 결론 부분은 바울의 개인적인 설명(14-33절),
바울의 문안(16:1-19), 마지막 인사(16:20-27)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본장에 나온 부
분은 본 서신 결론부의 서두인 셈이다.
본장에서 다루는 바울의 개인적인 설명자은 다각적이다. 이방인의 사도로서 자신의
사명감도 소개하고 또한 앞으로의 선교 사업세 대한 원대한 계획도 말하고 기쁜 마음
으로 하나님께 찬양도 한다. 그런 의미로 볼 때 14절에서부터 하나의 새로운 이정표를
긋는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본문의 스타일이나 내용이 공적(公的) 성격을 띠고
있어 본서가 하나의 개인 서신임을 잊기 쉬우나 14절에서부터 하나의 원대한 계획도
말하고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양도 한따. 그런 의미로 볼때 14절에서부터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개인적으로 자신에 관해 터놓고 이야기하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
다. 바울의 서신을 모두 끝맺는 말들이 있지만, 그는 다른 어느 서신보다도 로마인들
에게 보내는 이 서신에서 더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이것은 그가 한번도 그 도시와 그
곳의 교회를 방문한 적이 없었다는 점과 또한 그 독자들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기를 원
했기 때문이며 또 다른 이유는 의심할 바없이 그가 앞으로 로마를 방문할 계획이 있었
기 때문이다.
1. 서로 용납하는 성도(15:1-13)
14장의 주제에 이어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과 유대인의 벽을 허물고 모든 죄인
들을 은혜의 복음에로 초청하셨듯이 모든 성도들 또한 한마음과 한뜻으로 서로 솔선하
여 사랑의 봉사를 실천함으로써 한몸임을 드러낼 것을 당부한다. 본문의 구성상의 특
징, 중심 내용, 신학적 강조점 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구성상의 특징. 이 부분은 14장에 직접 연결되며, 14:1-12 및 14:13-23과 한단
을 이루는데 본문 역시 다시 1-6절과 7-13절의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본 단락에
서는 강한 자가 약한 자에 대하여 가질 태도를 언급하는데 이는 대국적(大局的) 견지
에서 그리스도 교회의 통일 원칙을 말한다. 본문의 두 작은 단락 1-6절과 7-13절에는
각각 끝에 결론적인 소원을 말하며 두 항 다 역사적 예수의 모범과 구약의 인용과 송
영을 넣고 있다. 둘째 항이 더 예배 의식적 언사를 쓰고 권면, 교훈, 송영의 문체가
섞여 있다. 특별히 바울은 성결의 문제가 끝나는 8장의 끝이나 선택의 문제를 끝내는
11장의 끝에서 그러했듯이 본 문단에서도 덕(德)의 문제를 끝맺으면서 중요한 구절마
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찬미를 잊지 않는다. 즉 성결의 문제를 끝맺을 때에는 그리
스도의 사랑을 찬미했고(8:37-39) 선택의 분제를 긔맺을 때에는 하나님의 지혜를 찬미
했으며(11:33) 덕의 문제를 끝뱉는 본문에는 소망의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다(13절).
더불어 14장에서부터 13절까지 이어진 성도가 지녀야 할 덕의 문제를 도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 구 절 | 권 면 | 권면의 근거 |
+----------+-----------------------------+-------------------------------------+
| 14:1-12 | 판단하지 말라 | 그리스도만이 모든 성도의 주인이시다 |
+----------+-----------------------------+-------------------------------------+
| 14:13-23 | 실적케 하지 말라 |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사랑의 율법 |
+----------+-----------------------------+-------------------------------------+
| 15:1-6 | 이웃의 약점을 담당하라 | 인간의 연약함을 담당하신 그리스도 |
+----------+-----------------------------+-------------------------------------+
| 15:7-13 | 서로 받으라 | 열방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
+----------+-----------------------------+-------------------------------------+
(2) 중심내용 : 신앙공동체의 하나됨. 세상에서는 비정한 약육 강식(弱肉强食)의 논
리만 통용될 뿐이다. 그러나 성도의 공동체, 신앙 공동체 안에서는 강자가 약자의 짐
을 대신 져 주어야 한다(갈 6:2).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우리에게는 언제나 진
실로 하나가 되도록 애써야 할 신성한 의무가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별한 본 단
락에서 바울은 참된 형제애를 바탕에 둔 신앙 공동체의 일치에 대해 말하고 있다.
(까) 신앙 공동체의 일치. 성경은 개인으로서의 '나'를 위해서도 기록되었지만 공
동체로서의 '우리'를 위해서도 기록된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우리'로서의 희망을 공
유한 형제들이 모여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 삶 속에서 실천함으로써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결국 그 삶은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는 삶이다.
선(善)이라는 말은 하나님과의 윤리적 관계를 강조한 말이고, 덕(德)이라는 말은 인
간과의 윤리적 관계에 보다 비중을 둔 말인데 바울은 이 말들을 성도가 자신보다 이웃
을 기쁘게 하되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함을 암시하는데 사용했다. 이러
한 내용은 교회 공동체의 일치를 강조한 것이다.
본장에서는 시낭 공동체의 일치의 방법과 결과 그리고 목적과 신학적 동기 등이 상
술되고 있다. 즉 신앙 공동체의 일치의 동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치케 하신 사역에서
비롯된다. 또한 신앙 공동체의 일치으 방법은 '서로의 약점을 담당해 주라'(1절)는 것
과 '서로 받으라'(7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방법들은 하나됨의 동기(motive)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을 때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능력이며 동시에 의무이다.
바울은 본문 첫절에서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마땅히 담당해야 한다고 강조하
였다. 이때 '마땅히'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로 '오페일로멘'(* )이
다. 이것은 '우리가 빚을 지고 있다'라는 뜻으로 교회에서의 강한 자의 의무를 강조하
는 말이다. 또한 7절에 기록된 '서로 받으라'(* ,
프로슬람바네스 알렐루스)는 말은 '서로 인격적으로 대등한 입장에서 남을 존중하며
영접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러면 이러한 방법으로 하나된 신앙 공동체는 어떤 모습
을 보이게 될까? 신앙 공동체가 일치된 결과 성도들은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시낭 공동체의
일치의 결과이며 목적인 셈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칭
의의 목적이며 우리의 성화의 목적이고 또한 선택의 목적이며 동시에 신앙 공동체에서
덕스러운 일치를 이루는 먹적인 것이다. 특별히 우리는 여기에서 성도 각자의 개성이
지니는 원심력은 모든 것을 포용하시되 정의와 사랑이라는 기준으로 오직 아버지께 영
광을 돌리신 주님의 구심력적 통제하에서 성도 개인의 삶뿐 아니라 신앙 공동체 전체
의 삶도 아름다운 조화를 이룰 수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다) 참된 형제애. 본문은 특별히 14장과의 연결 속에서 우리들이 사소한 것처럼
보는 문제들에 있어서 즉 '아디아포라'(adiaphora)의 문제에 있어서 같은 교우들을 어
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이 언급하는 내용은 앞장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강조한 교훈들로서 신양 공동체 내에서의 참된 형제애에 관한 것이다. 특별
히 본문을 분석해 보면 참된 형제애에 관한 네 가지 할 일과 네 가지 결과가 나타난
다.
(a) 네 가지 할 일. 참된 형제애를 가진 신자는 첫째로, 믿음이 연약한 자의 약점
을 돌보아 주어야 한다(1절). 둘째로, 자기 이웃의 유익과 덕을 도모해야 한다(2절).
셋째로, 그리스도를 따라 서로를 향하여 같은 생각이 되어야 한다(4, 5절). 넷째로,
형편이 어떠하든 동일하고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를 받아들여야 한다(7절).
(b) 네 가지 이유. 신자들에게 요구된 네가지 할 일을 해야 할 이유는 첫째, 그리
스도의 모범 때문이다(3절). 그리스도는 시편 69:19 말씀처럼 비록 자신이 모욕당하는
일이 되더라도 하나님자의 뜻을 언제나 우선하셨던 것이다. 둘째, 성경의 권면 때문이
다(4절). 성경은 우리들에게 인내와 위로를 주며 소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 셋째, 하
나님의 속성 때문이다(5절). 그분은 연약한 자들을 도우시는 인내의 하나님이며 교회
에서 신자들이 한마음으로 참 형제애를 누리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넷
째, 유대인과 이방인을 다같이 구원하는 것 즉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구원이 하나님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c) 네 가지 결과. 신자들이 참된 형제애를 행할 때 다음과 같은 결과들이 약속된
다. 첫째로, 덕을 세우게 된다(2절). 이는 성도들로 하여금 지혜와 사랑, 은혜와 거룩
에 이르도록 믿음의 성장을 촉진케 함으로써 결국 온 교회에 유익이 되게 한다. 둘째
로, 교회의 화합이다(6절). 신자 각 사람이 다른 사람으 안녕(安寧)에 관심이 있을 때
교회는 자연히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찬양이다(6절). 사랑과 화
합이 가득찰 때 교회는 아무런 잡음이 없는 온전한 찬양, 온전한 예배를 올리게 된다.
마지막으로, 믿음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가득 넘치는 기쁨과 평안이다(13절). 교회 안
에서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참된 형제애를 실천할 때 소망의 원천이신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는 기쁨과 평안으로 가득차게 되는 것이다.
(3) 신학적 강조점들과 교훈적 의미. 신양 공동체의 일치와 참된 형제애를 주 내용
으로 하고 있는 본문은 특별히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됨과 소망의 하나님이란 신학적
관심을 들어내고 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에 관한 것은 전반적으로 9-11장을 참
조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본문에 인용된 구약성경을 중심으로 한 해석과 소망의 하나
님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하자.
(까)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됨. 본문 중의 9-12절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구원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역을 점진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순서적으로 살펴보
면 다음과 같다.
(a) 9절 : 시편 18:49 혹은 사무엘하 22:50의 인용. 다윗(유대인)은 '이방인들 중
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한다. 이것은 측히 유대인 가운데 한
사람인 바울이 '이방인들 중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한 사실을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다(1:8).
(b) 10절 : 신명기 32:43의 인용.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더불어' 기뻐한다. 이
구절은 이방인들의 지위가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참할 수 있을 만큼' 높아진 사실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행
15:1-29).
(c) 11절 : 시편 117:1의 인용. 모든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함께' 하나님을 찬
양한다. 이는 이방인들이 이제는 유대 전통의 간섭을 받지 않고 '유대인들과 동등하
게' 주를 찬송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늘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교회에서 마음
껏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께 예배드리고 있는 것은 그와 같은 사실을 입증해 준다.
(d) 12절 : 이사야 11:1의 인용.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통치하시고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소망을' 가진다. 본절은 오늘날 세계의 모든 나라들
이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구분을 의지할 기회를 가지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상에서 우리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이 이미 성취되었고 또 계속 성취되
어 가고 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특히 4절에서 바울이 '이미 기록된 모든 말씀은
우리를 교훈하기 위하여'라고 적은 것은 바울이 성경의 과거성과 권위를 지시하면서
동시에 성경의 현재적 효능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죽어버린 문자가 아니라
살아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계시된 바에 의해 개인과 국가의 역사가 진행
되는 인류의 과거, 현재, 미래사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바울은 여기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는 교회의 보편성을 강조함으로
써 외형적, 개체적 교회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포함하는 전
교회의 일치를 간접으로 암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얻을 교훈은 교회 안
에서 우리는 빈부, 교육 정도 등 그 어떤 기중으로도 나뉘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바
울 당시으이 교회는 문제가 비교적 간단하여 이방인과 유대인 문제뿐이었으나 현대 교
회는 너무 복잡해져서 서로 조금만 달라도 쉽게 등을 돌리는 것을 볼 때 이 구절에 담
긴 영적 교훈을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다) 소망의 하나님. 여기에서 바울이 말하는 소망은 희미한 동경(憧憬)이 아니라
히브리서 6:19, 20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견고하게 뿌리를 내린 기대(期待)이다. 그러
므로 '소망의 하나님'이란 표현의 의미는 '소망의 원천이 되시며, 그를 신뢰하는 자들
에게 소망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이 소망의 대상은 이새의 뿌리에서 자
라난 싹에 계시되어 있는 삼위 일체 하나님 즉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나 보여진
삼위 일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소망에 넘치기를 바라고 계신다.
전지 전능하시며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그리스도인은 그 믿
음으로 말미암아 기쁨과 소망의 삶을 산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지상으 것을 바라거나
기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 있는 영원한 것을 기뻐하며 대망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신앙에 의한 소망 때문에 성도들은 모든 것을 인내한다. 하나님은 믿는 우
리드에게 소망을 주어 격려하고 강인한 인내를 갖게 하신다.
특별히 바울이 본문의 4절과 13절에서 소망을 강조한 것은 그것이 관용(寬容)의 덕
(德)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관용의 덕을 가지려면 인내심이 깊어야 하며,
인내심이 깊으려면 소망이 확실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이 약한 형제에 대하여
너그러울 수 있는 것은, 그에게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질 소망이 있기 때문이며 더 나
아가 모든 인류를 포함한 의와 화평과 성령에 의한 환희의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소망
이 하나님에 의해 주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실제로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죽음의 위기에 직면해야 했던
그 당시 성도들의 상황을 고려하면 이 소망의 의미는 더욱 절실한 것이다. 소망은 사
실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믿음과 동질의 것이다(갈 5:5;벧전 1:21). 그러기에 소망
은 미래 지향적이며 그 미래 지향성은 현재를 긍정케 하는 힘이 된다. 바울은 이런 과
정에서 미래의 소망이 현재의 성도들에게 큰 능력을 줄 수 있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도 현실에 편협되게 안주하는 대신 소망의 하나
님을 바라보며 살 때 더욱 귀한 형제애와 신앙 공동체의 일치와 성숙을 이루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2. 바울의 선교관(15:14-21)
바울은 이제 편지의 말미에서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사역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 심경
을 담담히 밝히고 있다. 본문은 로마 성도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리라고 본 사적(私
的) 문제들이 언급된다는 점에서 본서의 서론을 보충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바울의 과거의 사역과 현재의 상황 및 미래의 계획이 밝혀져 있기도 하다. 한편 본문
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네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로, 바울은 자신이 직접 본 적이 없는 로마 교인들을 향하여 매우 겸손하고 신
중한 태도로 대했다(14, 15절).
둘째로, 사도로서의 바울의 자랑은 그의 공적과 경력이 아니라 그가 주의 종으로서
복음 사역에 도구로 쓰였다는 것이었다(16, 17절).
셋째로, 현실 안주와 자기 과시에 머물지 않고 끝없이 새 개척지를 향하는 바울의
진취적 기상을 읽을 수 있다(19-21절).
넷째로,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자신을 들어쓰신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고 선교에
있어서의 한 가지 기본 원리를 밝힌다(20절).
(1) 선교 신학적 내용 분석. 본문은 선교자로서의 바울의 자기 인식과 자신의 과거
선교 사역에 대한 회고 및 감사 그리고 미래의 선교 계확과 그 원리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의 내용을 선교 신학적 입장에서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까) 선교자로서의 바울의 자기 인식. 바울은 16절에서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사역을 '제사장의 직무'라고
묘사한다. 이러한 바울의 자기 인식은 바울이 자신의 선교 사역에서 자신이 누구의 사
역자인지, 누구를 위한 사역자인지, 자신의 임무가 무엇인지, 어떤 목적을 지닌 사역
자인지를 제대로 깨닫고 있음을 알게 한다.
먼저 바울은 누구의 사역자였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이었다. 다음에 바울은 누
구를 위한 선교사인가?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사였다. 그러면 선교사 바울의 임무는 무
엇인가? 하나님의 복음에 대하여 제사장의 임무를 감당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선교
사 바울의 제사장적 임무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하게
이방인을 거룩한 제물로 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이며 '제사장 직무를 지닌 자'로 인식했던 바
울은 자신의 사역이 바로 하나님이 그에세 주신 복음을 목회자와 전도자로서 전파하는
것임을 알고 열심을 다해 충성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선교의 주도자요 주체는 그
리스도이시며 바울은 적즉적인 도구로 쓰이는 가운데 성령의 능력이 그의 선교 사역의
원동력이 된 것이라 하겠다.
(다) '선교 사역의 범위와 결과. 바울의 사역은 크게 두 가지 범위를 지닌다. 첫째
는, 이방인이라는 사도로서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 것은 안디옥에서였다(행
11:26;13:1). 그러나 아마도 기독교 전도 운동 전체의 출발점과 중심으로서의 예루살
렘을 바울 역시 자신의 선교 출발지로 삼은 듯하다(눅 24:47;행 1:8;F.F. Bruce). 한
편 사도행전이나 기타 바울 서신에는 일루리곤에 대한 언급이 없다. 현재의 유고슬라
비아의 달마티아 해안인 일루리곤은 아마 바울이 이방인 교인들의 성금을 가지고 예루
살렘으로 가기 직전에 그리이스에서 이곳으로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25, 26절).
결국 바울이 자시늬 사역의 범위를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라고 표현한 것은 그
의 1, 2, 3차 전도 여행을 통하여 사역한 지리적 범위를 전체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다음장의 지도 참조).
그러면 바울의 선교 사역의 결과는 무엇인가? 그 해답은 18절에 나와 있다. 곧 이방
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 것이다. 이 세상의 특징은 불순종이다. 하나님을 알
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감정을 중요시 여기는 것과 자아(自我)를 주장하는 것에
가치를 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만난 사람들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믿음 안
에서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선교한 결과 일어난 일이 바로 이방
인들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하게 된 것이며 그것은 동시에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게 된 것을 말한다. 바울의 이러한 선교 사역의 결과를
볼 때 바울이 자신을 '제사장 직무'를 맡은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라고 인식했던
것은 전적으로 옳았다.
(따) 선교 정책. 사도 바울은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
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라고 말한다. 이러한 바울의 고백은 이미 다른 전도자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한 곳에서는 전도하지 않겠다는 바울의 사려깊은 선교 정책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이와 같이 바울이 남의 터 위에 건축하기를 싫어한 것은 무엇을
이룩한 것에 대한 공(功)을 주장할 수 있어야만 만족하는 헛된 자존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될 수 있는 대로 복음을 듣지 못한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해야겠다는 뜨거운 사
명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별히 바울은 21절에서 장차 구원의 소식이 널리 전파되리
라는 이사야 52:15을 인용함으로써 그와 같이 개척자의 사명을 감당하며 새로운 영역
에 복음을 가져가려는 자신의 선교적 소망이 하나님의 계획과 일치됨을 보여주고 있
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이러한 선교 정책은 사도 바울의 탁월함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바울에게는 허세가 없으며 그가 선교에 애씀은 어떤 영광을 바라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들의 구원을 위해, 맡은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수고할 뿐이라는 그
의 진실을 나타낸다"고 극찬했다. 그리고 그가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그가 보
다 더 힘든 곳으로 달려가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더나아가 바울의 이런 강한
개척 의지는 그 결과 얻어지는 공적을 독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체 기독교 선교의
경제성을 위해서였다. 즉 아직 미개척지가 많은데 한 곳에 사역자들이 모이는 것은 기
독교 전체의 공동 사역(Team Misistry)이란 관점에서 볼 때 비효율적이므로 자신이 먼
저 앞장서서 고통을 무릅쓰겠다는 순교적 자세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에 복음을 전한다는 바울의 선교 방침은 오늘날 성
도들과 목회자들에게 커다란 교훈을 준다. 그것은 전도란 소위 '교인 뺏기 쟁탈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까4가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려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닥치는
희생이 아무리 크더라도 '해산(解産)의 수고'(갈 4:19)를 아끼지 않고 기쁨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도해야 한다는 것이다(고후 10:16).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롬 15:19절)
그 림
3. 로마 방문을 갈망함(15:22-33)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직접 만나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하는 바울의 간절한 바람이
잘 나타나 있는 부분이다. 바울의 선교적 안목에는 로마 제국의 서쪽 변방이었던 서바
나까지 포함되었다. 서바나 전도 여행을 통해 그는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증거하라'
하신(행 1:8) 주님의 지상 명령을 실현하고자 한 듯하다. 특별히 바울은 이러한 선교
의 큰 비전을 실현할 수 있도록 로마 교회가 물심 양면의 도움을 베풀어 줄 것을 희망
한다. 이러한 본문의 중심 내용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새로운 전도 계획. 22-29절에는 제 3차 전도 여행을 마친 바울이 새롭게 계획한
저노 여행이 언급된다. 바울 당시에는 로마 제국이 커다란 번영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
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지중해의 북부 연안 지역 및 소아시아가 세계의 중심이었
다. 바울은 세 차례의 전도 여행을 통해 그 세계의 대부분 지역을 복음화시켰는데 아
직 남은 곳이 서바나 곧 스페인 지방이었다(23절). 그리하여 그는 서바나 지방에 복음
을 전하려는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이 이 편지를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쓴것은 A.D. 57년 경이다. 그때 바울은 50세 이상이었다. 그 당시의 교통과 통신의 어
려움을 생각하면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 간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 제국의 서쪽 끝 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선교사의 정신이 아닌가! 그뿐 아니라 그는 서바나로 가기 전 먼저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하여 그 교회의 가난한 유대인 성도들에게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모금한 구제 헌금
을 전달하려 했다(25, 26절). 그런 다음 그는 로마 교회를 경유해 서바나로 갓 것을
계획했다. 왜냐하면 그는 로마 교회가 서바나를 복음화시키려는 자신의 전도 혀행을
위해 기도해 줄 뿐만아니라 재정적인 도움을 베풀어 줄 것을 바랐기 때문이었다(24,
28절). 우리는 이상과 같은 바울의 전도 계획을 통해 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
에게 명령하신 일 곧 복음 전파의 사명을 얼마나 귀중하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2)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함. 바울이 그리스도를 이방에 전파하고 그들을 제물로 드
림으로부터 이방인과 유대인 성도들 사이에 사랑의 교통이 전개되었다(25, 28, 30,32
절). 전에는 유대인의 눈에 이방인들은 돼지였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하나님께 향기
로운 제물인 성도들이 되었다. 바울은 그의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유대인
성도들을 돕기 위하여 그 자신이 세운 이방인 교회들로부터 특별 구제 헌금을 거두어
들인 적이 있었다(25, 26절;고전 16:1;고후 8:1, 2;9:1, 2;갈 2:10). 바울은 이방인
성도들이 낸 이 구제 헌금을 다음과 같이 비유하였다.
첫째, 바울은 이 헌금을 '빚을 갚는 것'으로 보았다(27절). 왜냐하면 이방인 성도들
은 주를 믿는 유대인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둘째, 바울은 이 헌금을 '열매'에 비유하였다(28절). 이것은 예루살렘 교회가 넓은
아량으로 복음의 씨를 퍼뜨린 결과 이제 그 보답을 받게 된 것이니 이 구제 헌금이야
말로 그들에게 영적인 축복을 기꺼이 나누어 준 데 대한 열매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에게 갔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갔으며, 그들 안에 그리스도를 전
파했다. 그리고 이제 그들에게서 유대로 돌아갈 때, 그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물
질적인 소유를 가지고 돌아갔다. 이방인 성도들에게서 바울이 이렇게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위한 구제 헌금을 모으고 또 그것을 전달한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그 헌금을 전달함으로써 유대인 성도들을 향한 이방인 성도들의 사랑을 나
타내려 했다(27절).
둘째로,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 성도들 중 상당수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
운 상태에 있었으므로 가장 적절한 시기에 그들을 도우려 했다(26절).
마지막으로, 이 일을 통해 유대인 성도들과 이방인 성도들이 서로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서 밀접하게 연합할 수 있기를 바랐다. 이와 같이 어려운 성도들에게 관심을 기
울이며 모든 성도들이 서로 연합하여 사랑 가운데 거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바울의 모
습은 오늘날 모든 목회자들이 본받아야 할 모본(模本)일 것이다.
(3) 바울의 간곡한 호소. 우리는 흔히 열렬한 복음 설교자이며 이타적 사랑에 가득
찼던 바울을 슈퍼맨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역시 우리
와 마찬가지로 연약한 자였다. 그러기에 그는 15장을 간곡한 호소로 끝맺고 있다. 그
간곡한 호소는 기도에 대한 부탁이다.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세가지 내용의 기
도를 부탁했다.
첫째로, 그가 예루살렘에 갔을 때 그를 박해하는 유대인들에게 해를 당하지 않도록
기도해 달라는 것이다(31절).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지만(행 20:24;21:13), 동시에 불신자들의 무모한 살인적 음모에
의해 희생당하므로 복음 전도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게 되는 결과 역시 원치 않았다
(행 9:29, 30).
둘째로,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 성도들을 위해 마련한 이방 교회의 구제 헌금을 유
대인들이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기도하라는 것이다(31절). 바울이 이 기도를 부탁한 이
유는 비록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합당한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사
실이 인정되었지만(행 15:19-29),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의 바리새적인 사람들은
여전히 바울과 이방인 교회들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행
15:5).
셋째로, 바울은 기쁨으로 로마 교회를 방문하여 그곳 성도들과 영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기도해 줄 것을 부탁했다(29절). 특별히 바울은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하나
님의 주권적인 의지에 따르는 일임을 강조하고 있다(32절).
이상과 같이 바울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부탁한 기도는 바울 개인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견고케 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바울은 30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한다고 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나 주관이 전혀없이 그의 기준과 방법과 지향점은 오직 주께 있음을 강력히 시사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남을 위해 기도해 줄 수 있고 또 남에게 기도를 부탁할 수 있다(약 5:16).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그 기도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어야 하며 구욱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살아가는 자만이 자신에게 곧 닥쳐올 고난 속에서도 '평강의 하나님께' 자신과 이웃의 삶을 온전히 맡기며 결코 요동함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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