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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각 사람 - 이에 해당하는 원어는 '파사 프쉬케'(* )로 직역하면 '모든 영혼'(every soul)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바울이 '모든 사람'(every man)이나 '모든 성도'(every believer)라고 표현하지 않고 '모든 영혼'으로 표현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인가 ? 혹 여기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이 세상에서의 권력에 대해 성도가 취해야 할 태도가 아니라 영적인 세계에서의 질서에 관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각 사람'(* )이라는 표현이 모든 사람 개개인을 표시하는 구약적 용법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런 의문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본문의 '각 사람'(* , every soul)은 몸(body)과 다른 것으로 구분되는 영혼(soul)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person)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본문은 소위 '이 세상'에 살아있는 사람 모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바울의 이 서신을 읽게 되는 로마의 기독교인 각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위에 있는 권세들 - '위에 있는 권세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해서 대체로는 국가의 정치적 권세, 인간 통치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로마의 권력(權力)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디벧리우스(Dibelius)에 의해 제기되어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에 의해 결정적으로 주장된 다른 견해도 있다. 쿨만에 의하면 본문의 '권세들'(* , 여수시아이)은 인간의 권세와 천사적 권세 모두를 가리킨다고 한다. 이 주장의 근거는 바울이 '권세'(* , 여수시아)의 복수형을 사용했을 때 그것이 악한 천사나 선한 천사를 가리키는 용법으로 사용됐던 사례가 있다는 데 있다(8:38;엡 1:21;3:10;4:12;골 1:16). 이 주장이 어느정도의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1-7절의 맥락에서 볼 때 '권세'라는 말에 인간적인 것 외에 천사적인 존재가 내포된다고 볼 수는 없다. 특히 '세금'에 관한 언급은 이것이 세상의 인간적인 통치 권세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굴복하라 - 굴복(subjection)이라는 말은 순종(obedience)이라는 말보다 더 범위가 넓고 엄격한 관계를 표현해준다. 머레이(John Murray)는 이 굴복의 의미가 정부 관리들의 재판권과의 관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한다. 즉 독자들은 그들 각자가 정부관리들의 재판권에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여 그들의 권위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브루스(Bruce)는 본문으로 부터 쿨만(Cullmann)의 견해 즉 '권세들'(* , 여수시아이)이 천사적 세력(특히 악한 천사)을 가리킨다고 하는 주장을 반박한다. 브루스의 주장의 요지는 바울이 천사적인 세력에 대해서 말할 때 그들에게 굴복해야 한다고 말한 적은 한번도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바울은 기독교인들이 천사적 세력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어 있으며 창조주이자 모든 악한 세력을 이기신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골 1:16;2:10, 15). 권세는...
모든 권세는 - 전자는 대표 단수형이고 후자는 복수형이다. 따라서 전자는 세상에 인간적 질서를 세우고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운 일반 원칙임을 말하는 것이고 후자는 개개의 구체적인 권력이 다 하나님의 경륜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본문은 모든 사람들이 세상의 정치 권력에 대해 굴복하는 태도를 가져야 하는 이유를 말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 따라서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는 세상의 권세에 대해서도 복종해야 한다. 너무나도 단순하면서도 자명한 원리이다. 그러나 이 말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보편화하여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적용시키려고 하거나, 신앙인과 국가 권력과의 관계를 규정(規定)짓는 말로 확립하고자 할 때는 논란이 생길 수 있다. 만약 어떤 권세가 악을 징벌하고 선을 장려하며, 선한 양심에 반(反)하는 방식으로 그 권세를 행사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권세가 '사랑과 정의'라고 하는 하나님의 계율에 위배되는 방식으로 행사되고 불의를 조장하며 악을 도모한다면 그때에는 그 권세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 ? 이에 대하여는 본장 1-7절 주제강해 '시민 복종과 불복종의 한계'와 '사회 참여에 관하여'를 참조하기 바라며 여기서는 '모든 권세에 복종하라'고 한 바울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1) 바울은 후자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으며 전자의 가능성 즉 이상적인 국가 권력과 그것의 집행에 대해서만 원칙적인 언급을 하는 것이다. 바울이 국가의 권세에 대해서 (실제로는 로마의 권력) 그와 같이 긍정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었던 데에는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는 대로 법치주의에 근거한 로마의 권력이 그의 선교에 오히려 도움이 되었던 것이 작용했을 수 있다(행 28:16-28). (2) 모든 국가의 권력이 하나님의 결정에 의한다는 것은 구약 성경적 배경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라는 애굽의 왕은 적어도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악명높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바로를 왕좌에 오르게 한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것이 구약의 증거이고 또한 바울이 취한 신앙이었다(9:17). 이런 의미에서 모든 국가의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사적 섭리라는 안목으로 헤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권력 그 자체의 정당성 보다는 모든 권력 위에서 결정권을
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기독교인들에게 로마 권력에 복종하라고 가르침으로써 불필요한 경계와 오해를 불식(拂拭)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4) 기독교 자체에서 생겨난 문제로 열광주의자에 관한 것이 있는데 이들은 하늘의 시민권 사상과 그리스도의 왕되심에 대한 열광 때문에 지상의 권력들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멸시하고 무시하는 태도를 가졌다. 이런 신앙은 그 자체로도 문제려니와 로마인들에게도 좋지 않은 반작용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것을 배경에 두고 볼 때,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고 한 바울의 진술은 열광주의자들에 대한 공격이라고 볼 수 있다.

=====13:2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심판을 자취하리라 - 논리는 매우 간단하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주셨다. 그러므로 그 권세를 거스리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니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적어도 권세자들이 하나님의 선한 사자들로서 선과 악을 구분하여 상과 벌을 준다면(3, 4절) 이 말은 수긍할 수 있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브루스(F.F. Bruce)가 제기한 질문처럼 만일 가이사가 자기 권세의 한계를 넘어 하나님의 영역을 주장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 어떠한 권력이나 위정자가 하나님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경우, 가령 가이사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이 부여해준 권세의 범위를 넘어 하나님의 자리에서 경배받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 이런 경우 우리는, 즉 사람과 하나님이 대립되는 경우, 그리고 반드시 양자 택일을 해야하는 경우에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선택해야 한다(행 4:19, 20;5:29). 만약 그렇지 않고 이 본문이 시간과 공간, 조건을 초월하여 적용되는 불변의 원리라면 이것은 공의와 정의에 반(反)하는 각종 전제 정치 체재와 독재체재를 정당화해주는 구실을 할 수 있게 된다. 이에 대해 혹자는 넓은 의미 즉 하나님의 섭리의 면에서 본문을 이해하려 한다. 이들의 주장은 이런 것이다. '바로'라고 하는 악한 왕도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세워졌던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의 높으신 뜻과 경륜을 다 이해할 수 없다. 어떤 권력은 하나님의 정의에 합당하지 않으나 그것은 세상을 통치하는 하나님의 질서의 한 부분을 이룬다는 것이다(Lenski). 반면 혹자는 본문을 사도들의 서신 전체 문맥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럴 경우 어떠한 권력도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권세의 목적과(3, 4) 범위 내에서만 복종을 요구할 수 있고 기독교인 역시 그러한 범위 안에서만 복종의 의무를 질 뿐, 정도를 벗어나 하나님께 돌려야 할 충성마저도 권력이 요구할 때는 저항할 수 있고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본다(Bruce). 어떠한 개인이나 국가가 정권이나 권력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을 때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기대하는 바와 상관없는 방식으로 자신의 권세를 오용(誤用)하거나 남용할 수도 있다. 이런 것을 감안할 때 후자의 견해가, 권력에 대한 성도들의 태도를 바로 세우는데 타당한 견해라고 여겨진다. 한편 본문에서 언급하는 '심판'은 더이상 구체적인 언급이 없어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그러한 것은 인간의 심판을 받는 것이 낫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는 없다는 구약의 선지자적 정신의 구현이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4:19;5:29)는 사도들의 신앙정신과 "몸은 죽여도 영혼을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는 예수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신앙의 정조를 지키다가 당하는 숭고한 믿음의 결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권세를 거스려 '심판'을 자취하는 자는 정당한 신앙적 이유를 떠나서 권세자들에 대한 그릇된 이해 속에서 하나님이 세원 권위에 반항하여 불순종하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13:3
 관원들은 - 공동번역은 본문을 '통치자들'로 번역하고 있다. 이 복수형은 특정한 대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통치 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통치자들'로 표현되는 대상은 권력의 상충부 즉 최고 통지권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로마의 관리들을 다 포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표현 속에서 바울은 아마 자기가 겪었던 로마의 관리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행 19:35-41;21:31-40;22:24-30;24:10).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 공동번역은 '악한 일', '선한 일'을 '악을 행하는 자',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이것이 정확한 번역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본문의 '악한일...선한일'은 추상적인 개념으로서의 행위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행하는 자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한편 통치자들은 악을 행하는 자에게나 두려운 존재이지 선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운 대상이 아니라는 것은 1, 2절에 나오는 권세의 개념이 어떤 전제를 가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즉 권세는 선을 보장하고 악을 규제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전제이다. 만약 어떤 권세가 이 전제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선을 담보하거나 악을 제어하는 기능에서 이탈하여 애초의 전제에 반(反)하는 방식으로 권세가 행사될 때 그 권세는 권세의 수여자(授與者)인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2절). 그런데 바울은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아마 이것은 바울의 경험때문일 것이다. 그에게는 로마법에 의한 통치 또는 법에 의한 질서 유지가 여러차례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네가...
아니하려느냐 - 공동번역은 본문을 의문문으로 보지 않고 서술문으로 보아 "통치자를 두려워하지 않으려거든 선을 행하십시오"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의문문으로 표현한 개역성경의 번역이 바울이 강조한 바를 더욱 강하게 나타내 보여준다고 본다. 바울은 복수를 사용하지 않고 '너'라는 2인칭 대표단수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복수를 써서 표현하는 것보다 강한 인상을 주는 표현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는 표현은 매우 간결하면서도 대단히 강한 인상을 남기는 수사적 표현이다. 사실 권력은 사람들에게 두려운 대상이다. 왜냐하면 권력은 막강한 힘으로 사람의 정신과 육체에 타격을 주거나 제한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을 행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다. 여기서의 '악'은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악, 즉 법에 위반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것은 통치자들의 권한이, 궁극적인 죄를 심판하는 하나님의 권한을 위임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허락된 권력과 그 권력의 효력이 미치는 영역 내에서의 질서를 깨뜨리는 행위 즉 실정법(實定法)을 위반하는 행위만을 처벌하는 것으로 한정됨을 의미한다. 선을 행하라...
칭찬을 받으리라 - 본문에서 '그에게'는 물론 통치자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칭찬을 받는다'는 말은 어떤 보상을 받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확실히 여기에는 보상의 개념이 없으며 단지 인정을 받는다는 정도의 의미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여기서 선을 행해야 하는 동기는 적극적인 의미에서 보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권세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은 상당히 현실적인 동기이다.

=====13:4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 공동번역은 본문을 "통치자는 결국 여러분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입니다"로 번역하고 있다. '선을 이루는 자'라는 표현보다는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심부름꾼'이 더 적절한 번역이라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권세라고 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선을 추구하는 성향을 가진 것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다만 악을 제거하고 질서를 유지함으로써 대다수의 선량한 국민들을 유익하게 하는 것을 그 본질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역사적, 현상적 고찰에서부터 얻어진 결론일 뿐 권세를 세우신 하나님의 원칙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들 위에 모든 제도, 특히 통치 권력 제도를 세우신 하나님의 원래 목적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1) 천지 창조에서도 나타나듯 질서와 조직은 하나님의 근본 속성이다. (2) 또한 그 질서와 조직을 통하여서만이 교회와 성도가 이 땅 위에서 보호받으며 원래의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갈 수 있다(딤전 2:1, 2). 실로 모든 권위와 통치의 모체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러한 뜻을 이 땅위에서 실제로 구현시키기 위하여 파생적으로 그 권력의 일부를 국가의 통치자들에게 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통치자는 그 통치권이 하나님의 법이라는 범위(category)내에 있을 때 그 권세의 신적인 기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 법을 월권할 때는 이미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아니며 단지 성도를 단련시키는 하나의 악한 도구로 전락될 뿐이다. 따라서 성도는 원(源) 권력이자 모법(母法)인 하나님의 뜻과 법을 따라 마음으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면서 선지자적 경고를 부단히 해야 한다. 이러한 통치자와 성도간의 관계성은 '주 안에서 부모를 순종하라'(엡 6:1)는 사도 바울의 또 다른 메시지와 일맥 상통한다.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 여기서는 '두려움'의 동기가 강조되고 있다. 본문에서 '공연히'는 '근거없이', '목적없이'의 뜻이다. 그리고 '칼'은 헬라어 '마카이라'(* )를 번역한 것인데 이는 로마의 단검을 가리키는 말로 시민을 사형시킬 때 사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칼'이 구체적으로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권세의 힘만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되며 사소한 잘못에서부터 극형에 이르기까지 그 형벌을 부과하고 집행할 수 있는 권세의 총체적인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칼'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합법적인 권세이며, 목적없이 임의대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하는 자를 징벌한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진노하심 - 여기서의 '진노'는 헬라어 '오르게'(* )의 번역인데 이 말이 신적 진노 곧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세속적 진노 곧 통치자의 진노를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혹자는 '진노'(* , 오르게)라는 말이 본서에서 사용될 때 그 의미는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던 것을 근거로 하여(1:18;4:15) 전자, 즉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는 것이라고 본다(Lenski, Morrison). 그러나 다른 학자는 3-5절의 문맥상 후자, 즉 지상적 통치자의 진노를 가리킨다고 본다(Kasemann). 원칙적인 면에서 보면 지상의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기능, 즉 선을 도모하고 악을 징벌하는 기능에 충실하다고 할 때 이 권세에 의한 진노는 곧 하나님의 진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어떤 통치자가 선을 금하는 법을 만들고 악을 도모한다고 할 때 그 법에 저항하다가 당하는 진노는 하나님의 진노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본문의 진노는 하나님의 진노이자 그것의 대행자인 지상적 통치자의 진노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통치자는 막중한 책임을 느끼게 된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대행(代行)하는 자로서 선을 추구하고 악을 제거해야 하는 본연의 책임을 충실히 수행하는 한계 안에서 그에게 주어진 '칼'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13:5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 국가의 권세에 굴복해야만 하는 이유는 그 '권세'가 칼을 휘두를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어서 그 처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이유는 권세자가 하나님의 사자 즉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선을 장려하며 악을 징계한다는 대의 명분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 권력이 이를 충실하게 수행한다면 성도는 그 권한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 노를 인하여만...
양심을 인하여 - 본문의 '노를 인하여'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하여'(to avoid God's Wrath)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RSV). 권세를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므로 권세에 굴복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권세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 되어 하나님의 진노가 뒤따른다고 볼 수 있고, 국가 권력은 이를 대행하는 역할을 한다. 한편 바울은 '양심'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는데(행 23:1;24:16;고후 1:12;4:2;딤전 1:5) 이 양심으로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고 악에 대해서는 죄의식을 느끼며 또한 하나님께 대해서는 일종의 의무감을 가지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이 양심을 따라 정당한 권세에 굴복해야 한다. 결국 본문을 통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인이 권세에 복종해야 하는 것이 자명한 당위성(當爲性)을 갖는 것이라고 할진대 소극적인 의미에서는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도 권세에 굴복해야 하지만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의무감과 충성을 위해서 굴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권력에 복종하는 동기는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양심의 준수에서 나타나야 한다. 한편 '양심을 인하여' 즉 '양심을 따르기 위해서'(공동번역)라는 표현은 기독교인이 지상의 권력에 대하여 지녀야 할 태도의 기준이 융통성 있다는 것을 제시해주는 것으로 해석하게 한다. 여기서의 양심은 분명히 하나님 말씀의 법에 근거한 양심이다. 따라서 어떤 지상의 권력이 '권선징악'에 합당하게 그 권위를 행사한다면 마땅히 모든 기독교인들은 그 권력에 복종해야 하겠지만 혹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따르고자 하는 양심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칼을 휘두른다면(4절) 지상의 권력에 의한 핍박을 받더라도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도록 행동해야 한다(행 4:19, 20). 또한 우리의 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감이므로 모든 제도에 대해 순종함에 있어서 주를 위한다는 조건이 있어야 한다(벧전 2:13).

=====13:6
 공세를 바치는 것 - 바울은 국가에 대한 의무 이행 즉 복종의 구체적인 예로 납세(納稅)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본문은 로마의 기독교인들이 이미 로마 국가가 부과한 세금을 내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로마의 기독교인들이 납세를 거부하거나 납세에 대한 저항을 하고 있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혹 로마의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이교도의 국가인 로마 정부에 세금을 내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징벌이 두려워서 억지로 세금을 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이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은, 비록 이교 국가라 하더라도 로마 정부가 가진 권위를 부여하신 분이 하나님이므로 세금을 바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적 양심에 거리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혹자는 세속적인 권력에 대한 납세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는 바울의 납세관이 복음서에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21)는 예수의 가르침에 의해 영향받았다고 본다(Lenski). 한편 일부 영지주의자들은 이 구절을 해석하기를, 여기에 나온 권세에의 복종은 지상의 권세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천사나 보이지 않는 권세자들에 대한 복종이라고 했는데, 이레니우스(Irenaeus)는 그의 저서 '이단 논박'(Against Heresies, V. 24)에서 본 구절에 대하여 이 문맥에서 말하는 권세에의 복종을 보이지 않는 영적 세력이 아니라 지상의 통치 세력에 대한 복종임을 증거했다.
 하나님의 일군 - 본문의 '일군'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이투르고이'(* )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 이 말은 본래 제정 일치(祭政一致) 사회의 왕적 제사장직에서 온 말로 70인역에서는 '제사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코이네(Koine) 헬라어 개념에서는 일반적인 국가의 관리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또한 신약성경과 초대교회의 문헌들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고귀한 봉사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다(15:16, 27;눅 1:23;행 13:2;고후 9:12 등). 대개의 학자들은 이 말이 4절의 '사자'(* , 디아코노스)보다 높은 권위를 가진 말이라고 본다(Murray, Bruce).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 여기서 '이 일'이 세금을 징수하는 일을 가리킨다고 볼 경우 이는 관원들의 직무를 부분적으로만 표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관원들이 오직 세금을 징수하는 일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 일'이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직무를 가리킨다고 보는데(Lenski) 이렇게 보는 것이 본문의 의미를 좀더 명확히 드러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관원들이 세금 징수의 일을 하는데 그 일은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통치자들에게도 깊은 의미를 제공한다. 즉 통치자들은 그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 바로 하나님께서 위임해준 일이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하며 그들의 직무가 갖는 이러한 성격을 잘 인식하고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섭리 안에 머물러야 한다. 한편 '항상 힘쓰느니라'는 말은 적어도 통치자들이 공공의 일을 충실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13:7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 '공세'(* , 포론)는 피정복민이 지배 국가에 바치는 '조공'(朝貢)을 의미하며 '국세'(* , 텔로스)는 국가에 내는 세금을 가리킨다. 6절에서는 독자들이 세금을 바쳐야 하는 근거와 세금을 부과하는 정당서을 묘사한 것이고 본절에서는 마땅히 납세를 해야 할 것임을 언급한다. 만약 당시의 모든 성도들이 다 세금내는 일을 잘 준수하였다면 바울이 본절을 말해야 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이로 보아 당시에 세금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혹자는 이들이 세상의 일상적인 질서, 현세의 정치 질서를 부정하는 열광주의자들이었을 것이라고 본다(Kasemann). 따라서 바울은 본절을 통해 그들에게 현세의 질서는 하나님에 의한 것이며 따라서 모든 사람은 이 질서 안에 머물러 있어야함을 말하는 것이다.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 여기서 두려움과 존경은 실제적으로 권력 또는 권력을 가진 자에 대한 내면적인 태도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성도들은 권력에 대해서 절대적인 두려움을 가져서는 안되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秩序)에 순종하는 의미에서 정당한 두려움과 존경을 품어야 한다.

=====13:8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 본문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는, 성도들이 살아가는데 있어 갚지 않고 남겨두는 빚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사랑이란 성도들이 지불해야 하는 빚으로서 '다갚음'이 없는 영원한 부채라는 것이다. 한편 '아무에게든지'라는 표현은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하는 대상이 '성도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에까지 확장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 '다 이루었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플레로켄'(* )은 현재완료형이다. 이는 사랑하는 순간 율법을 이룬 것임을 말해준다. 여기서 바울이 율법을 무시하지 않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율법은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수의 가르침과 일치한다(마 5:7).

=====13: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 바울은 율법의 예로 십계명을 들고 있다(6, 7, 8, 10계명).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율법인 십계명의 조항을 들어 그가 말하려고 하는 바, 사랑이 얼마나 결정적인 것인가를 말해주려고 한다. 인용에 있어서 부모 공경과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조항은 생략했는데, 이는 바울이 자신의 논리 전개상 불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Calvin). 즉 바울은 사랑과 관련하여 이웃과의 관계에서 두드러지는 항목들을 선택했거나, 아니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항에 해당되는 율법 조항을 들어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는 '...을 하지 말라'하는 금령(禁令)이 '사랑'이라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규범으로 대치되고 있음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 바울은 레 19:18을 예증 문구로 인용하면서 사랑의 결정적인 가치를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이 계명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며 율법의 핵심이고 완성임을 명백히 보여준다(막 12:31;갈 5:14;약 2:8).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 본문은 사랑의 소극적인 의미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성도들은 이런 의미에서의 사랑도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이런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사랑도 강조되어야 한다. 사랑은 능동적인 것이고 따라서 모종의 행동을 필연적으로 유발시키지만 그것이 결코 이웃을 해롭게 하는 것으로 나타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본문에서의 '완성'(* , 플레로마)은 '충만'으로 번역될 수도 있으나 8절의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와의 조화를 생각할 때 전자의 번역이 더 분명한 의미를 드러낸다고 본다. 그러나 사랑으로 율법이 충만해진다고 하는 것도 의미있는 것이다.

=====13:11
 이 시기를 알거니와 - 본문의 '시기'(* , 카이로스)는 연대기적으로 흐르는 '시간'(* , 크로노스)이 아니라 '계절'(season)과 같이 어떤 특성을 가진 개념의 시간이다. 여기에서 '이 시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카이론'(* , '그 시기를')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주의 재림으로 오게 될 역사의 종말을 그 시기의 성격이나 현상들을 통해 깨닫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깨달음은 주의 가르침(마 24장)에 근거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가 주는 의미를 바로 깨달으라고 하는 바울의 촉구가 담겨있는 표현이다.
 우리의 구원이 - 본문의 '구원'은 현재의 고난으로부터의 탈피 또는 점진적인 구원의 과정에 참여함이 아니라 종말론적이고 최종적인 완성으로서의 구원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는 주의 강림 때 일어날 미래적 구원의 정점(定點)이 더 가까와지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 믿을 때보다 - 믿기 시작했을 때라고 보아도 무방하겠으나 혹자는 이것을 세례와 관련시켜 세례받은 때로 보기도한다(Kasemann). 적어도 초대교회에서 믿음을 갖는 것과 세례를 받는 것은 불가 분리의 관계에 있었으므로 '처음 믿을 때'를 세례받을 때로 보아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가까왔음이니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엥귀테론'(* )은 비교급으로 보다 더 가까이에 있다는 의미이다. 이는 성도의 최종적인 구원이 확실히 보장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역사가 종말과 우주적인 구원을 목표로 하고 진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역사의 끝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이루어진다.

=====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 '깊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에콰센'(* )은 '진전되었다', '많이 지났다'의 의미를 갖는 '프로코프토'(* )의 부정 과거 시제로서 '밤이 많이 지났다'는 의미도 포함되지만, '이미 밤이 지났다'는 의미가 더욱 많이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낮이 '가까왔으니'(* , 엥기켄)는 완료형으로 '이미 와 있다'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천국 선포를 한 시점에서 이미 하나님 나라가 왔다(* , 엥기켄)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해석이 더욱 타당하다. 한편 '밤'이 현세상이라면 '낮'은 구원이 있는 천국을 가리킨다. 본문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신천 신지(新天新地)가 가까왔음을 말해주는데 이 종말의 가까움에 관한 바울의 표현에 대해 독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날'이 임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1) 바울의 '가까움'에 대한 강조를 인간들이 계산하는 연대기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예언적 전망'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마치 베드로가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벧후 3:8)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2) 바울의 '가까움'에 대한 강조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감옷을 입자"는 결론으로 향하고 있다. 이는 현재적 경건의 삶을 촉구하는 것이다. 지금은 이미 참빛이 왔기 때문에 낮의 세력이 성도들에게 임하였으나 실제로는 밤이다. 즉 성도들은 여전히 악한 세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눅 16:8). 따라서 지금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죄의 세력에 대한 전투적인 삶이다.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 - 바울은 낮과 밤에 다른 옷을 입는 것에 착안하여 지금 벗어버려야 할 것과 새로 입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본문은 어두움으로 상징되는 죄악 곧 사단의 일과 빛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일의 대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두움을 악한 세력으로, 빛을 선한 세력으로 대비시키는 것은 당시에 일반화된 관행이었으므로 독자들은 이것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가령 쿰란 문서에 의하면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누인다. 한 부류는 어두움의 사자에 의해 지배를 받고 다른 한 부류는 빛의 왕자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그러다가 말세에는 이들 두 세력이 큰 싸움을 벌이게 되는데 그것을 가리켜 '빛의 아들들과 어두움의 아들들의 전쟁'이라고 한다(Vermes). 바울은 전쟁용사의 무장(武裝)에 대해서 엡 6:13-17에 자세히 기록한 바 있는데 본 구절의 '갑옷'도 성도의 전투적인 삶을 잘 보여준다. 성도들은 비록 어두움의 세상과 접하며 살지만, 성도의 실체는 낮의 자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싸움이 수반되는 것이 필연적이다. 하지만 성도의 싸움은 승리가 보장된 것이므로 주의 강림으로 드러날 영광과 변화될 삶을 기대하며 살아간다(고후 3:18;4:14).

=====13:13
 낮에와 같이 단정히...시기하지 말며 - '낮에와 같이'라는 표현은 지금이 밤이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바울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성도들이 실제로 낮에 살고 있다고 여기고 생활하라는 것이다. '방탕과 술취함', '음란과 호색, '쟁투와 시기'가 나열되고 있는데 이러한 행위들은 단정히 행하는 것과 상반된다. 이러한 무절제한 성적인 방탕과 시기로 인한 싸움은 죄된 속성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러한 속성을 이겨내지 못하면 파멸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 한편 바울이 본서를 쓰고 있던 고린도 교회는 이러한 분위기에 쉽게 접할 수 있는 곳이었다(Harrison).

=====13:14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 본 구절은 신자의 전신 갑주(엡 6:13-17)를 요약적으로 명제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칼빈(Calvin)은 본문을 가리켜 '영의 권능으로 강하여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으로써 모든 성결의 의무를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된 상태를 뜻한다'고 하였다. 그리스도로 더불어 옷 입는다는 말은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여한 바 됨을 의미한다(6:1-10).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 공동번역은 본문을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요"라고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육신의 일 자체를 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욕을 추구하기 위해 몸을 내어두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육신에 관한한 모든 것이 악하다고 하는 의미가 전혀 없다. 다만 그것이 정욕을 충족시키려는 것으로 움직여질 때 죄악이 되는 것이다.

 

 

  12장부터 기술되어온 그리스도인의 실천적인 생활에 대한 교훈은 이제 본장에  이르
러 성도가 지녀야 할 바람직한 국가관 및 사회 생활에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핵심적인
윤리에 그 초점을 두고 있다.
  본장의 내용을 상고하기 위해 먼저 전후 문맥적 흐름에 유의한 다음 전장 전체에 부
각되는 중심 주제에 초점을 맞추기로 하자.
  (1) 문맥상의 유의점. 12:1-15:13까지가 본서의 실천편임은  주지의  사실이거니와,
이 부분을 '이웃 사랑'이라는 수평적 관계의 원리를 따라 '그리스도인들 상호간의  관
계' 혹은 '교회 밖에서의 성도의 생활'이라는 주제에 의지하여 내용을 구분할  수  있
다. 이렇게 할 때 본장은 '교회 밖에서의 성도의 생활' 즉 '그리스도인과 사화와의 관
계성'에 많은 강조점을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거시적으로 보면, 본서의 실천편은 서론 부분(12:1, 2)과 '교회 내에서의 성도의 생
활'(12:3-13), '이웃과 대적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적용되는  윤리'(12:14-21),  '사회
생활'(13:1-14), 그리고 '성도들간의 생활 윤리'(14:1-15:13) 등으로 구분할 수  있으
며 이는 크게 '교회->사회->교회->'라는 흐름으로 내용이 엮어짐을 보여준다.  바울은
교리편(1-11장)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원리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상세하고 체
계있게 역설하였거니와 그의 실천편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인의 생활  현장  구석구석을
총망라하여 균형있는 신앙 생활의 지침을 종합적으로 교훈해 주었다.  우리는  바울의
이러한 교훈들이 현장감없는 무미 건조한 이론이 아니라 그의 전삶을  통해  철저하게
자각된 절실한 체험적 원리임을 재삼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2) 중심 주제, '국가와 사회 생활의 윤리'라는 본장의 제목이 시사하듯이.  본장에
는 성도가 사회 생활을 함에 있어서 취해야 할 국가관(1-7절)과 기독교  윤리(8-10절)
및 기독교의 종말 사상(11-14절)이 더불어 기록되어 있다. 이에 본장  전체의  내용을
심도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가관과 종말론적 신앙', 그리고 '기독교 윤리와  종말
론'이라는 상관성있는 주제들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까) 국가관과 종말론적 신앙. 이 주제는 1-7절과 11-14절에 대한  관계를  설명해
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바울이 본문을 통해 말하고 있는 국가관은 소극적인  어조를
띠고 있르며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 종말론적 신앙과 밀접한 연관을 맺느나. 혹
자는 국가 권력에 대해 복종해야 한다는 바울의 권면이 현상 유지적이며 소극적인  것
으로서 그가 복음 전파를 위해 로바 제국의 정치에 영합(迎合)하지 않았나 하고  의심
을 떠올린다. 즉 본장에 거론된 바울의 윤리 내지 도덕론은  정략적  공리주의(政略的
功利主義)의 입장에 근거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전혀 타당성이 없다.  바울의
국가관이 소극적 색채를 띠는 것은 사회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위치 및 종말론적 신앙에
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를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a)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위치. 바울 당시 대부붑다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제국
의 통칠마 받는 피지배자였다. 일부 예외는 있지만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에도  마찬가
지일지 모른다. 성별이나 인종이나 신분의 차별을 개의치 않은 기독교에 귀의한  사람
들은 전체 가가와 사회라는 거시적 영역에서 보면 소수의 무리요 피지배자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보다 과거에 더 심했을 지 모르나 다소의 차이를 불문할 때,  아
직도 여전히 타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사실이 아니다. 세
상 국가 권력과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순결하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문
제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의 정치와 사회 제도 등에 대하여 소극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열등한 신분이나 상태에 기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신앙  생활을  가장
중요시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가치관에 기인하는 것이다. 한편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지배층에 속하는 그리스도인의 경우 국가 권력에 순응해야 한다는 바울의 교훈을 남용
해서는 안 된다. 권력이 있는 그리스도인은 권력없는 자가 순종하는 것처럼 두렵고 떨
리는 마음으로 권력을 행사해야 할 것이다. 만일 바울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올바른 국가관을 교훈한다면 피지배자의 입장뿐 아니라 지배자, 즉 권력자에 대해서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을 것이다.
    (b)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 신앙. 바울이 소극적인 국가관을 말한 것은  그리스도
의 재림을 확고히 믿는 종말론적 신앙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
나님 나라를 본향으로 하는 시민이기에 재림의 날을 대망하며 '고요하고 단정한  중에
평안한 생활을 하려'(딤전 2:2) 한다. 이러한 신앙 생활을 이유로 하여  그리스도인은
정치나 사회 문제에 대하여 소극적 태도를 견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권
력과 영합하거나 일신의 영달(榮達)을 위해 권력에 아부하는 일과는 근본적으로  다르
다. 비록 사회 문제나 국가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소극적이라 할지라도 그
소극성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거짓이 없으며', '선한 성격'을 가지는 것이다(12:9).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런 자의 신앙과 생활 태도는 위선적이요 자기 기만적이라  아
니할 수 없다.
   (다) 기독교 윤리와 종말론. 이 주제는 8-10절과 11-14절의 관계에 적용된다. 앞에
서 우리는 종말론적 신앙과 그리스도인의 국가관에 대해서 살펴보았거니와,  거기서는
종말론적 신앙이 국가와 사회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주요한 영향을  미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일반적인 기독교 윤리의 당위성이 종말론에서 비롯되지  않
음에 유의해야 한다. 오히려 기독교의 제반 윤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지상 대명(마 22:37-40)에 근거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할 수  있
는 자는 그리스도안에서 거듭난 존재이어야 가능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한 그리스
도인이 되어야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다시 세상에 반사시킬 수 있는  것이다.
즉 '거룩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5:5) 될 때 사랑
의 행위로서 성령의 열매들(갈 5:22, 23)을 현실 가운데서 맺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은 종말론이 기독교 윤리의 내용을 규정짓거나 제한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종말 사상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기독교의 건전한 윤리관을  해
칠 수 있다. 예컨대, 임박한 종말 의식을 가진 자는 무정부주의자가 되거나 현실을 무
시하는 나태한 생활을 하기 쉽다. 바울은 이처럼 임박한 종말 의식으로 말미암아 현실
삶을 도외시하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경고한 바 있다(살후 3:6-12). 그러므로 성도
들은 현실을 망각한 종말 사상에 현혹되거나 치우쳐서는 안 될 것이다.
  한편 본장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단락(1-7절)에서  바울은  먼저
구원받은 성도가 신앙 양심에 위배되지 않는한, 국가와 사회의 질서를 존중해야  한다
고 말한다. 그 다음 둘째 단락(8-10절)에서는 성도들이 율법의 완성인 사랑을 몸소 실
천함으로써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인간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권고한다.  그리고
셋째 단락(11-14절)에서는 모든 불신앙적인 일을 멀리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빛된 생활
을 하라고 말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하는 성도의 참된  자세를  강조하며
본장을 맺는다.

  1.시민으로서의 책임과 의무(13:1-7)
  성도와 국가와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는 본문은 성도와 이웃과의 관계에 대해  서
술하고 있는 12:14-21의 맥락을 계승한 것으로서 삶의 긴요하고도 구체적인 영역에 기
독교 윤리를 적용한 것이다.
  본문의 내용을 상고하기 위해 먼저 바울이 국가관에 대해 언급하게 된 동기와  배경
을 살펴보고 이어서 국가 권력의 신적 기원과 국가 권력에 대해 성도가  순종해야  할
이유 및 그 순종의 방법 등에 대해 살펴보기로하자.
  (1) 본문의 기록 동기와 배경. 바울이 성도의 구체적인 사회 생활 가운데서  특별히
국가관에 대해 부득불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동기와 배경은 다음과 같다.
   (까) 당시 로마 기독교회 내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던 유대인들은 그들의 조국 이
스라엘이 로마의 속국(屬國)이라는 굴레로부터 벗어나 정치적 독립을 얻기를 갈망하고
있었다(요 6:14, 15;행 5:36, 37).
   (다) 당시 로마 교회의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함 여러 기독교회  내에는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자유의 개념을 잘못 이해한 사람들이 많았다. 즉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죄의 멍에로부터의  자
유가 아니라 정치적, 육적인 의미에서의 자유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여 8:31-33).
   (따) 그 당시 로마 정부는, 기독교가 반(反)로마주의 입장을 고수하는 유대교와 접
촉하였으며 따라서 유대주의의 혁명적이며 반역적인 기질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있다
고 확신하고 있었다.
  바울은 이상에서 언급한 세 가지 사실 때문에 로마 교회 성도들이 가져야 할 올바른
국가관을 제시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복음의 선포가 진전될 수 있도록 하는  바람직한
질서가 교회 내에 유지되도록 하였다(12:18). 당시 로마 교회의 상황과 오늘날의 교회
가 처한 상황이 다소 차이가 있긴 하나 사도 바울이 본장에서 천명한 국가관은 예수께
서 성도들에게 주신 사면, 곧 복음의 선포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고 있다(마 28:19, 20).
  (2) 국가 권력의 신적(神的) 기원. 바울은 본문에서 성도와 국가의 관계를 언급하면
서 국가 권력에 대하여 긍정적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는 본문  외에  신약성경의
몇 군데에서도 같은 견해가 나타남을 볼 수 있다(딤전 2:1, 2;딛 3:1;벧전  2:13-17).
바울이 이처럼 국가 권력에 대해 긍정적 입장을 취하는 것은 국가 권력의 기원이 하나
님께 있다는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사상은 어디에서  유래된  것일
까? 이는 근세 초기에 절대 군주들을 옹호한 왕권 신수설(王權神授說)에서 비롯되었다
기보다는 바로 구약성경의 말씀에 그 연원(淵源)을 둔 것이다. 즉 다니엘  2:21;4:25;
이사야 10:5, 6등은 열왕들을 세우시고 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명백하게  선언하
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구절들을 알고 있었을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국가관에
대해 교훈할 때 이를 적용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상과 같은 사실을 근거로 포악한 권력자들의 죄악에  대한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고 추론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권력  행사를
허락하셨지만 권력을 남용하는 죄까지 허용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 나
오는 인물 가운데 사울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의해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움
을 받았다(삼상 9:15-17).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명령과 공의(公義)를 저버리고  폭군
의 길을 걸어갔을 때 (삼상 13:8-14;15:1-9;22:17-19) 이방 족속 불레셋과의 전쟁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역사(삼상 31:1-6;대상 10:1-14)는 그와 같은  사실을  잘
입증해 준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 양심을 거스리는 불의한  권력자들이나
그 권력자들의 시책에 대해서 무조거넣까이요 맹목적으로 복종해서는 안  된다.  이런
경우에 성도들은 마땅히 자신의 신앙 양심을 지키기 위하여  겨란을  해야  한다(왕상
18:1-46;단 3:13-18). 즉 우상 숭배와 같이 극단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의한  통
치자들의 불의한 행위를 묵인하고 그대로 굴종한다면 그것은 진리를 거스려  하나님을
배반하는 어리석은 행위이다(잠 15:9, 10;딤후 3:7, 8).
  우리는 이상과 같은 사실을 통하여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성도는  시
민으로서 통치자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아울러 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도
록 기도해애 한다(딤전 2:1, 2). 설령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의한  통치자가  있더라도
그에 대해 성도가 취해야 할 자세로서 폭력적인 투재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성도는 자신의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 할지라도 박해를 가하는 사악한 통치자들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마 5:44). 둘째, 통치자들은 자신이
가진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을 경외(敬畏)함으로
섬기고'(시 2:10, 11) 공평과 공의를 행하여야 한다(겔 45:9). 그래야만 통치자는  하
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자신의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단 4:34-37).
  (3) 국가 권력에 순종해야 할 이유. 바울은 성도가 국가의 법에 순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두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5절).
   (까) 사람이 법에 순응하지 않으면 '진노'(*          , 오르겐)의 위협이  뒤따른
다는 것이다. 이 호소는 개인적인 유익, 즉 자기 보존의 본능에 근거를 두고 있다.
   (다) '양심을 인하여' 국가의 법에 순응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양심'으로 번역된
헬라어 '쉬네이데신'(*                    )은 '사람이 나쁜 일을 했을 때  받는  고
통'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과 국가가 모두 그 궁극적인 바탕을
하나님의 섭리 안에 두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 지각(知覺)'이란 뜻을 갖는다. 성도는
이상에서 언급한 두 가지 이유 가운데 후자(後者), 곧 그리스도인의 선한 양심을 인하
여 국가의 법에 순응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사도  베
드로도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벧전 2:13)라고  말함으로써
강조하였다. 하지만 성도가 자신의 시낭을 지키기 위해 법에 의한 형벌을 감수해야 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 세운 제도가 하나님의 뜻에 위배될 경우이다(엡 6:12).
  (4) 국가 권력에 순종하는 방법. 바울은 본문에서 성도가 국가 권력에 순응하는  방
법을 두 가지로 나타내고 있다.
   (까) 물질적인 순종. 성도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가 운영의 재원(財源)이 되는
세금을 바쳐야 한다(6절). 왜냐하면 납세는 국민의 의무이며 거두어진 세금은  국민의
안녕과 복지 증진이라는 선한 일에 사용되기 때문이다. 사실 성도가 국민으로서  지켜
야 할 기본 적인 의무 사항에는 납세 이외에 국방의 의무, 교육의 의무, 근로의  의무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성도는 이러한 의무 사항들을 결코 소홀히 하는 일이 없어야 하
겠다(마 22:18-21).
   (다) 정신적인 순종. 바울은 국가의 공직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두려움'과 '존경'
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교훈하였다(7절). 여기서  '두려움'(*           ,  포본)은
'나라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마땅히 돌려야 할 깊은 공경심'을, 그리고
'존경'(*          , 티멘)은 '일반적으로 모든 공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돌려야 할 경
의'를 의미한다. 이렇게 성도가 국가의 공직자들에게 두려움과 존경의 자세를  갖는다
함은 그들이 인간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며 악을  억제
하고  선을  증진시킨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일반  은총에  기여하기   때문이다(잠
16:12;29:4). 그러나 '두려움'과 '존경'은 권세를 부여받은 자들이 올바른 권력  행사
를 할 때에만 돌릴 의무가 있으며 만약 권세자들이 자신들의 권세를 남용한다면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법을 따라야 한다.
  * 시민 복종과 불복종의 한계. 1-7절은 시민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국가 또는  사회
권력에 대하여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서 가장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본 주제 강해에서는 그 근본 취지만을 밝히고 세부 내용은 문단 강해를 참조
하기로 하자.
  여기 바울의 교훈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마 22:21)는 예수의 교훈을 잘 반영한 것 같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로마의 지배에 불
만을 가졌으며, 일부 열성 당원들은 종교적인 이유를 들어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
이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로마  식민지하에서
그들의 정부에 대하여 자주 반란을 일으켰었다. 바울이 로마서를 집필할 당시에도  로
마에서는 반란이 일어나서 글라우디오(Claudius)는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했었는데
이때 그리스도인들도 유대고의 한 파당(派黨)으로 간주되었고 자연히 혼란에 휘말리게
되었다. 또 한편 당시에 유대인들과 성도들에게 깊게 작용하던 종말론적 사상으로  인
해 곧 소멸해 버릴 세상의 권력과 제도들을 무시해 버리려는 경향이  농후했다.  이런
상황하에서 사도 바울은 어떤 정부 또는 권위 아래 있는 성도는 교회의 질서 못지않게
세상의 질서를 지키며 유지하기 위하여 힘써야 함을 강조했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질서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권위의 통치 구조가 하나님의 섭리
를 따라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성도는 삶의 실제적인 전영역에서  권위에  원칙적으로
복종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식민지하에 있는 성도들이 정치적인 혁명에 참여하며  자유를
위하여 투쟁하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실제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취급하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근분 취지는 국가라는 조직 속의 시민 생활에서 법률
과 정부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함을 말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전체적
으로 개인으로서의 성도가 국가의 권위와 법에 순응하여 질서를 세우듯이 국가 권력도
성경에 분명히 언급된 하나님의 법에 따라 마땅한 처리를 해야 할 전제가 있음을 강조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 성도의 순복(順服)은 그것이 '하나님의 법에 합당할 때'라는 조건이 붙
은 것이다(행 4:19). 그러므로 국가 권력이 불의를 행할 때 성도는 야합하거나 굴종할
것이 아니라 적법한 절차를 거쳐 공의의 회복에 앞장서서 불의의  세력을  개혁하여야
한다(Calvin). 정당한 정의와 권위에 대한 순응이 성도의 덕목이듯이 불의에 대한  비
판과 개혁 또한 성도의 의무인 것이다. 이 분문을 곡해하여 불의한  권력에의  맹종을
요구하는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사를 볼 때 왕왕 있어 왔거니와 그들은 말씀을 호도(糊
塗)한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사 1:23;9:13-16;마 22:15-21;계 18-19).
  * 사회 참여에 관하여. 본문에서 바울은 국가 권력이 하나님께서 내리신 일반  은총
의 범주에 속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즉 국가 권력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따라 발
생한 것으로서 모든 악으로부터 선을 지키기 위하여 인간의 자유를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되는 것이 있다. 만일 국가가 권력을 남용하여 불의와  악
을 일삼는다면 그 때 성도는 어떻게 행동하며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라는  문제
가 바로 그것이다. 이 문제는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국부적인 문제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인  동시에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시민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마
22:21)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 있거니와, '사화 참여'에 대한 성경적 입장을  살펴
보기로 하자.
  (1) 예수의 교훈. 사복음서를 볼 때 예수께서 어떠한 정치적 활동을 하신 적은 한번
도 없다. 오직 예수께서 관심을 가지셨던 것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인간 영혼의  구
령(救靈) 사업이었다. 이러한 점은 한편으로 당시 로마 제국의 속박하에 있었던  이스
라엘 민족의 정치적 상황에는 예수께서 너무도 무관심하셨다거나 전혀 개의치  않으셨
다는 인상을 준다. 사실 예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 당신의 사역에 전념하시면서 이
스라엘의 정치적.사회적 문제에는 관여하지 않으셨다. 이러한 예수의  태도는  자연히
이스라엘의 민중들의 요구와는 상충되게 마련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물론 예수의 제
자들조차도 예수께서 그들을 압제하던 이교도인 로마를 쳐부수고 새로운 왕국을  지상
에 세우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눅 19:11). 하지만 예수께서는 이 땅의 정치  문제
에 관여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정치 문제를 초월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땅의 정치 문제에 관여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정치 문제를 초월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시 민족의 반역자로 낙인찍힌 세리도 개의치않고 당신의 제자로
삼으신 거시다(눅 5:27-32).
  (2) 칼빈의 견해. 요한 칼빈은 정치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까) 궁극적으로 하나님만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시는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  피
조물은 결코 한 나라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권한이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것과 더불어 국가를 만드셨고 당신의 전은하신 능력으로 국가의 역사를 짜관하시고 통
치하신다.
   (다) 그러나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반역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
치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는 없고 다만 그 통치의  권
위 행사만이 인간에게 제도적으로 주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권위의 행사는 참다운  인
간의 행복과 선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따) 그러므로 인간은 그 권위의 행사가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지 궁극적으로  다른
동료들을 지배할 수 없다.
  (3) 기탸 견해들. '그리스도인의 사회 참여'라는 현실적 문제를 놓고 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논쟁을 거듭해 왔다. 이러한 논쟁들의 양상은 매우 다양하나 여기서는  편의상
이 논쟁의 양 극단의 경우에 초점을 맞추어 그들이 내세우는 주장의 요점을 파악해 보
기로 하자.
   (까) 적극적인 입장. 이는 강력한 사회 참여를 주장하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 의하
면 적극적인 사회 참여가 없게 된다면 국가는 소수가 지배하는 둑재 국가가 되거나 정
치적으로 무질서한 무정부 상태에 처하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개개인의
능력과 특성에 따라서 국가의 정치와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햐애 한다고 주장한
다. 그리고 이러한 참여는 어떤 제도나 기관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말
하고 있다.
   (다) 소극적인 입장.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고  있
다.
    (a)정치와 하나님의 일은 구분되며 따라서 정치가 교회의 주요 관심사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정치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지 못하며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치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폭력을 제어하고 악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일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의 세상에서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그리스도인들은 썬어가는 세상의 부패을 방지하는  소
금과 빛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의 정치 문제와 사회  문
제에 그리스도인들이 전적으로 가담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인들은 천국 시민으로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b) 그리스도인들은 사회 문제 등과 같은 세상 사에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것
인가를 결정함에 있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그 동기와 기준으로 삼아야  한
다. 세상에서 절대 악과 절대 선을 구별하는 것은 힘든 일이며 불가능한 것일지  모른
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바, 선하고 온전한 뜻을 분별한다면 그  구분이  가능하
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란 바로 거짓이 없는 사랑(9절)을 실천하는 것이다.  따
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모든 문제에 관한 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
다는 동기에서 행동의 출발점을 삼아야 하며, 어떤 인간적인 목적이나 결과를  이루기
위하여 행동을 수단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4) 결론. 이상에서 우리는 사회 참여에 대한 두 부류의 견해를 살펴보았거니와  이
상반된 견해가 가장 첨예하기 나타났던 것은 20세기 초라고 할 수 있다. 즉 당시 근본
주의자들(fundamentalists)이 신앙의 절대성과 이성에 대한 우위성을 강조한 반면  자
유주의자들은 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경의 무오성, 축자 영감설 등을  무시하였고
그리스도인의 사회 참여 및 선행을 강조하였다. 물론 근본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이
강조한 '사회적 복음'(social gospel)에 대해 깊은 반감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상과 같은 양 극단보다는 성경 자체가 말하는 바에 최대의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
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까) 교회와 성도의 근본적 사명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
이다(행 1:8). 따라서 인간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일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
다.
   (다) 성도는 개인적으로 사회 참여를 할 수 있으나 이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나 사회 문제에 관한 한, 사람마다 제각기  다름  의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 판단과 정치적 판단은 그 성격이 다르다. 도덕적 판단
에는 선악에 대한 적절한 판단 기준이 있지만 정치성을 띤 문제에 있어서는 흑백 논리
이상으 전략적 성격을 내포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정치적  견해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인정할 수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따) 교회의 이름을 걸고 단체적으로 사회 참여를 하는 것은 삼가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이므로 변화 많은 세상에 의해 영향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을 향해 거룩한 사명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2. 사랑의 의무(13:8-10)
  앞 문단에서 바울은 성도와 국가와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하였거니와 본문에서는  성
도가 사화와의 관계, 즉 '이웃에 대한 성도의 의무'를 언급하고 있다.
  분문 전체에 부각되어 있는 중심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 보기로 하자.
  (1) 사랑의 의무의 당위성.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레위기 19:18에서 하나님이 명하신 바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강령(大綱領)으로  말씀
하신 바이다(마 22:37-40). 이와 같이 성도들에게 최고의 요구로서 사랑이 강조된  것
은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그를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성도들에게 베풀어졌다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벧전 2:24).
즉 성도들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었으나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구원을 받았기 때
문에 '사랑에 빚진 자들'이다. 그 사랑의 빚은 그 본연의 성질상 다 갚을 수 없다. 따
라서 성도들은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을 하도록 힘
써야 한다(마 7:12).
  (2) '사랑'과 '율법'.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10절)이라고 천명함으로써 사라
와 율법의 본질적 성격을 말하고 있다. 율법과 사랑의 본질적 성격을 개별적으로 살펴
보기로 하자.
   (까) 율법의 성격. 유대인들에게는 613조문의 율법이 있다. 이 613개의 조문  중에
서 365개항은 '...하라'는 긍정적 형태이고 나머지 248항은 '...하지 말라'는  부정적
형태로 되어 있다. 이 율법 전체의 내가을 종합 요약한 것이 바로 십계명이며 이는 구
약 전체를 이해하는 데 초점이 된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 십계명 중에서 8계명은 부정
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 다른 두 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와 '네 부
모를 공경하라'이다. 그러나 다른 두 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와
'네 부모를 공경하라'이다. 그러나 심지어 이 두계명 가운데 전자(前者)도 부정적  요
소를 지니고 있다. 즉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은 그 뒤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부연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출 20:3-17;신 5:7-21). 이와 같이 하나님의 율법이 '하지
말라'는 부정적 형태를 띠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 속에 있는 본성적인  죄악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율법은 간음, 살인, 도적질, 탐내는 것 등을 죄로 규정
하면서 우리들에게 이러한 죄를 금(禁)하고 있다. 아무튼 율법의 형태가 금지  형식이
든 권유 형식이든, 인간 상호간의 관계에 대해 규명하는 율법 조문들은 인간에게 죄가
무엇이며 하나님의 공의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경고해 주는 고극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 사랑으 성격. 율법에 비해 사랑은 적극적이고 포괄적인 성격을 지닌다.  사랑
은 소극적으로 '하지 말라', '하라'는 규범을 넘어 적극적으로 남을 향하여 자신의 모
든것을 열어 보이고 내어주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은 개별적 윤리, 법 조항을 넘어 그
윤리와 법의 강령을 완성하는 근원적 힘이라고 하겠다. 우리 주님은 율법의 요구를 완
성한 것이나 다름없다(고전 13:1-13).
  성도들은 이와 같이 포괄적이요 적극적인 '사랑'을 삶의 가장 귀중한 원리로 삼아야
한다. 이 원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요 13:34)으로서 모든 도덕률
을 완성하며 모든 도덕률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간혹 사랑의  대상을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사랑의 대상인 '이웃'은 자기에게 우호적인 사람뿐
만 아니라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포함한다. 그가 어떠한  성품의  소유자이든
아니면 어떠한 처지에 있든 일단 나의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나의 '이웃'인 것이
다(눅 10:37).

  3.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생활(13:11-14)
  본문은 바울의 종말론에 대한 강조이다. 이런 종말론적 각성이야말로  우리  신앙의
생명력을 유지시켜 주는 활력소이다.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 기록 동기와 중심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1) 기록 동기.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마땅한 생활상을  그린  본문은
삶의 제 영역에 적용되는 실턴적 윤리를 규정한 12:14-13:10의 일련의 내용과의  연관
하에서 그 기록 동기를 찾을 수 있다. 이미 장 강해에서 '기독교 윤리와 종말론'에 관
하여 언급한 바거니와 바울은 성도들에게 '균형된 신앙 생활'의 지침을 제공해 주고자
본문을 기록하였다. 그러면 '균형된 신앙 생활'이란 무엇인가 살펴보기로 하자.
   (까) 현실 생활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다. 국가 권력에  순응하며  원수를
악으로 갚지 말라는 것 등의 제반 윤리는 모두 '이웃을 사랑하라'는 대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 만일 현실 생활에서 이러한 대명제의 요구를 무시하고 하나님만을  믿는다고
한다면 그의 신양은 열매가 없는 공허한 신앙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
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말씀하셨다. 성도는 자신의 신앙이  성숙되
면 될수록 그의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빛을 그의 생활에서 더욱 밝게 비추어야 할 것이
다.
   (다) 신앙 생활에 힘쓰는 것이다. 성도는 현실 행활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
아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신앙이 깨어 있어야 한다. 여기서 특별히 바울은  그
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굳게 가지며 적극적으로 육신의 일을 벗어버리고 하나님
의 능력과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할 것을 가르친다. 이와 같이 성도가 내세에  대
한 소망을 확고히 하고 성령을 좇아 사는 삶을 영위하는 것은 성도의  본향이  썩어질
이 세상에 있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있기 때문이다(히 11:13;벧전 2:11). 만
일 현세에 지나친 애착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등한시 한다면 그 또한 하나님의 구원의
반열에서 멀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주의 재림의 날을 맞는 마음으로 삶의
순간순간에 빛의 역할을 감당해가야 할 것이다.
  (2) 중심 내용. 본문은 성 어거스틴의 회심과 밀접히 결부되어 있다. 어거스틴은 도
덕적으로 방탕한 생활을 했으며 종교적으로도 마니교를 믿는 등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
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오랜 세월 동안 기도하신 어머니의 기도 결과 하나님께  돌
아오게 되었다. 즉 그는 어느 날 고통과 근심 속에 뜰을 거닐다가 어린 아이들의  '펴
서 읽어보라'는 노래 소리를 듣고 집으로 들어가 성경을 펴 읽게 되었는데 그때  그의
눈에 맞닥뜨린 구절이 바로 본문이었던 것이다. 본문은 특히 '때'를 잘  분별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11절). 어떤 사람은 시간을 회전하는 윤회의 개념에서 이해하고 또  어
떤 사람은 직선적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행동할 수
있는 현재 시간이다. 현재 우리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바라며 깨어 있는  생활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육욕에 빠져 무절제와 방종의 생활을 하고 있는가? 바울은 '오직 주예
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14절)고  권면하고
있다.
  * 바울의 종말론(終末論). 볼트만(R. Bultmann)은 바울의 종말론이 이스라엘 역사와
세계사를 다루지 않고 인간의 역사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지만, 이는 빗나
간 해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이 철저히 조직화된 력사관을 서술하지 않은  것
은 사실이다. 바울은 역사 철학자도 역사 신학자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인간
중심적인 종말론을 펼치고 있다거나 개체적 인간의 발전 과정을 통해 세게사를 조명하
고 있다고 단정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바울은 역사 속에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의 지속적인 행위를 묘사하고 있다. 즉 그의 종말론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과 그것의 성취라는 맥락에서 전개되고 있는 바, 과거, 현재, 미래가 창조주요 구속주
이신 하나님의 예언적 계시에 의해 이끌려가는 하나님 중심의 종말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항목들을 통해 바울의 종말론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1) 바울의 종말론의 일관성. 바울의 종말론이 그의 사역 기간을 통해 무언가  변화
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즉 바울은 미래의 재림에만 전적인 강조
점을 두는 노골적인 묵시 사상(默示思想)에서부터 성장하여, 구원의 현재적인  완성과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에 강조점을 둔 보다 세련된 실존주의적(實存主義的) 견해로 나아
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에게서 발견되는 이러한 다변적 요소는 그의 초기부터  말
기에 이르는 서신을 통하여 볼 때 대조가 된다기 보다는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예컨대, 비교적 초기 서신을 보면 바울은 전도 설교에서 신자들에게 미래를  환
기시켜 주면서(살전 1:10) 유대 묵시 사상과 거의 유사한  재림론을  펴는  한편(살전
4:13-5:11;살후 2:1-12) 믿는 자 안에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로 특징지워진 그리스도인
의 행위에 대해서도 말하였다(갈 2:20). 또한 고린도와 로마에 있는 신자들에게  보내
는 편지에서 바울은 죽음이 육신의 장막을 벗어버리고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라고  말
하면서(고후 5:1-10) 재림시의 완성된 종말을 강하게 강조하고(8:8-15;고전 15:12-58)
교회의 공기도문(公祈禱文)과 같은 표현인  '주께서  임하옵소서'라고  말하였다(고전
16:22). 로마의 옥중에서 쓴 서신에서 그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서 거듭 말하고 있으나 동시에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
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우리의 낮은 몸을  자
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20, 21)고 말하였다.  그리고  목회
서신에서도 현재 교회의 제반 문제에 강조점을 두면서 또한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린다고 말한 것을  볼  수
있다(딛 2:13). 이렇듯 바울 서신에서는 주로 그때의 상황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재림시에 살아 있을 것이라는 바울 자신의 기대도 살아가는 동안 변경되
었을 수도 있다(고전 15:51, 52;고후 5:1-10;살전 4:15-17). 그러나 바울의  그리스도
인으로서의 생활과 사역을 통해서 볼 때 미래에 대한 그의 사상과 중심에  자리잡았던
것은 재림 사상이었다.
  (2) 바울의 재림 사상. 바울에게 있어서 재림(parusia)이란 우선 그리스도와 신자와
으 영원한 연합이요(살전 4:17), 신자들의 육체적 부활로써 그몸이 '그리스도의  영광
스러운 몸과 같이' 변화됨으로 말미암아 그 본래 목적인 양자됨을 실현하는 것을 말한
다(8:23;빌 3:21). 또한 재림은 비록 신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긴 해도(8:1)  심
판을 의미한다. 심판이 공력에 대한 시험을 의미하긴 해도 그리스도를 미든 자들의 구
원에 대해서는 문제가 되지 못한다(고전 3:13-15;5:5;고후 5:10). 그러나  그리스도를
떠난 자들에게는 재림이 '홀연한 멸망'이요 '진노'요 '저주'의 날이다(살전 1:10;5:3,
9;살후 2:10-12). 게다가 재림 때에 (까)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찰  것이요(11:25)
(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드디어 성취될 것이며(11:26-31)(따) 피조물도
인간의 죄로 말미암은 속박에서 해당될 것이며(8:19-22;고전 7:31)(마)  모든  정사와
권세가 먼저 아들에게 굴복하여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께 바쳐지게 될 것이며(고전 15:24, 27)(바) '맨 나중 원수'인 죽음이 멸망받을 것이며(고전 15:26)(빠) '아들 자신도 그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함이다(고전 15:28).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구약 시대부터 이미 점진적으로 계시,  성취된  바요,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서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현재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삶과 친교를 체험하고 심지어 죽음에서 보다 밀접한 교제를  나누게  된다 할지라도 양자됨의 온전한 실현과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완성은 재림의  날에  이르어 성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신자들의 기도문처럼 소망 중에 "오 주여,  오시옵소서!"하고 그날을 사모하고 있다(고전16:22).

 

 

  * 영.육과 바울의 구원론.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영(靈)과 육(肉)의 대조를  통하여
성도가 육적 원리가 아니라 영적 원리에 의해서만 살 수 있고 또 살아가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예컨대, 본장 14절과 8:3-17 그리고 갈라디아서 5:16-24등에서 바울은  육체의 소용과 성령의 열매를 극명하게 대조시키면서 그의 구원론을  전개시키고  있다. 따라서 본 주제 강해에서는 영육의 개념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바탕으로 바울의  구원론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1) 영육에 대한 성경적 이해. 성경에는 인간의 영혼과 육체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온다. 우선 이는 하나님에 위해 피조된 인간이 영과 육으로 이루어진 데에서 비롯된다 하겠다(창 2:7). 그러면 성경이 가르치는 영육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어떤 것일까?
   (까) 혹자는 인간의 육체는 악하고 영혼만 선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느네 이는 고대의 세속 철학에 기반을 둔 것으로 철저히 잘못된 이원론(dualism)이다. 성경은 분명히 영도 육도 하나님이 지어 주신 것으로서 본래는 둘 다 선한 것임을  가르쳐  준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가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된지라"(창 2:7).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욥 33:4-6). 그러나 성경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온 후 영육이  동시에 오염되었음을 가르친다(5:12).
   (다) 인간의 영육은 이땅에서의 생명이 계속되는 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완전한
유기적 결합체이다. 따라서 영육은 상호 긴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육신의 일거수  일투족은 영혼의 지정의(知情意)를 반영하는 것이다. 또 역으로 육신을 단정하게 처신하느냐 아니면 방탕하고 추하게 다루느냐 하는 것은 영혼의 상태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하겠다.
   (따)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육신도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임을 깨달아 선하고  즐겁게 활용하되 방탕과 무절제로 흐르지 말고 정절과 근신으로 행함으로써 육신을 통하여 영혼의 신실함을 더욱 잘 드러냄과 동시에 주위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돌리게 해야 할 것이다(고후 7:1).

  (2) 바울 서신에서의 영육의 개념. 바울 서신에서 영과 육이란 단어가 사용될 때 참으로 중요한 사실은 영과 육이 문자 그대로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본장 13, 14절의 경우도 그러하다. 여기서 만약 본문의 육이란 말을  인간의 실제 육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육체는 무조건 악하니 금욕 나아가  육체의 모든 것을 부정해 버리는 비성경적 극단론에 빠질 염려가 있다. 따라서 흔히  바울 서신에서의 '육신'은 인간의 신체 발부(身體髮膚)가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인격에 상존하고 있는 죄성'(7:17)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영'도 인간의 오염된 영혼이 아니라 '초월적 하나님께서 인간의 전인격 안에 보내 주신 생명과 진리의 영 즉 성령'을 가리킨다.

  (3) 영육의 개념과 바울의 구원론. 앞에서 언급한 영육에 대한 개념과 바울의  구원론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까) 인간은 육적 속성으로 인하여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었는데 성령의  은혜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어 주셨으므로 이제는 그저 감사할 뿐 더 이상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다) 과거 육신에 속했던 시절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또  따를
수도 없었듯이 이제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는 육신의 죄악된 일을 따르면 안 되고 또 따를 수도 없다.
   (따) 성도들은 구원의 확신과 기쁨 속에서 승리의 삶을 살아가되 최후의 승리를 바라보며 현재의 고난을 이기는 꿋꿋한 신앙의 장부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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