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 이 표현은 바울이 법을 아는 자들과 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구분하기 위해 제한적인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Murray). 바울은 오히려 모든 사람이 법을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이 표현을 사용했다.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 혹자는 '율법'을 예수께서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마 15:6)라고 말씀하셨던 변질된 유대인의 율법으로 이해했다(Hendriksen). 그러나 이 해석은 본절과 내용상 별로 상관이 없으며 '율법'이라는 용어에 너무 집착한 해석이다. 또 어떤 사람은 '율법'이 구약에 기록된 '율법' 중 특히 '모세 율법'을 가리킨다고 주장하고 있다(Murray). 사실 바울은 '율법'을 '모세 율법'의 의미로 사용했다(3:19;5:13;고전 9:8, 9;14:21;갈 3:10, 19). 본절에서 '율법'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노모스'(* )는 상반절의 '법'과는 달리 관사 '호'(* )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노모스'(* )는 신약성경에서 관사를 가지고 있으면 구약 '율법'의 의미로 번역될 수 있다. 그러나 본절에서 3절까지를 반드시 모세의 율법과 관련된 결혼 규례로 볼 수 없다. 이 결혼 규례는 어느 나라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일반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이와 같은 법의 강제성(强制性)하에 있게 된다는 사실이 본 구절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이다. 한편 '살 동안만'이라는 표현은 '사람의 전생애 동안'을 의미하는 것이지, '율법에 종 노릇하는 동안의 삶'(갈 4:8, 9)으로 (origen, Ambrose, Erasmus) 한정될 근거가 거의 없다.
=====7:2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되나 - 고전 7:39에서 바울은 본절과 동일한 내용의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다만 고전 7:39에서는 '법으로'란 말이 생략되어 있다. 본절에서 이 말이 첨가되어 있는 것은 1절에서 3절까지의 비유가 율법 아래 있던 사람이 율법에서 어떻게 해방되느냐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므로, '법으로'라는 말이 강조적으로 첨가되어 있다.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 여인이 남편에게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이다. (1) 본절의 진술과 같이 남편이 죽으면 그 여인은 남편에게서 해방된다. (2) 여인 자신이 죽게 되면 역시 남편에게서 해방된다. 4절 이하의 설명에 따르면 '율법'은 '남편'에 비유되고 있다. 그런데 '율법'은 죽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1-3절의 비유를 문자적으로 적용시킬 필요는 없다. 다만 굳이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여인 자신이 죽음으로써 남편에게서 해방되는 것으로 본문을 고쳐야만 한다. 이렇게 되면 여인에 비유될 수 있는 신자는 그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율법에서 해방되었다는 6:3, 4, 6의 진술과 합치(合致)될 수 있다.
=====7:3
본절에서 바울은 (1) 결혼 관계에 있는 여인이 그 관계를 지속시키지 못했을 때 '음부'가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율법에 의한 정죄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율법은 그 아래 있는 자들에게 조금도 자유를 주지 않으면서 그것을 범하는 자에게는 어김없이 정죄하게 된다. (2) 남편의 법에서 해방된 여인의 자유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다. 본래 성도는 죄의 종이요 율법 아래 있던 자였으나, 그것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은 그것에 대하여 죽는 것뿐이다(4절).
=====7:4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 바울은 율법이 죽을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이 죽어야 그 사람이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을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기 위해 죽는 것은 바로 옛사람인 바, 이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음을 맛보게 되었다. 바울은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 율법에 대하여 죽음으로써 사람은 율법에서 벗어났다. 위의 비유에서는 율법(남편)이 죽는 것으로 묘사되었으나 율법은 죽을 수 없기에 여인이 죽어야 한다(2절 주석 참조). 이 여인도 직접 죽을 수 없고 결국 대신 죽은 자에게 붙어 있게 됨으로써 그 죽음이 인정받게 된다. 그 후에 여인된 성도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으므로 다시 사신자와 연합하게 된다. 여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란 표현은 무엇보다도 결혼 관계의 성립을 보여주고 있다. 결혼 관계에 들어가는 것은 또한 두 몸이 한 몸으로 연합됨을 가리킨다. 이처럼 바울은 6장에서는 성도와 그리스도와의 연합(聯合)에 대해 추상적으로 설명했으나(6:3-6). 본장에서는 결혼 관계를 비유하여 보다 구체화 시키고 있다.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맺히게 될 열매에 대한 견해는 학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혹자는 결혼의 비유의 연속으로 보고 결실로서 '자손을 생산하는 것'과 연관짓고 있다(Fritzsche, Reiche). 그러나 이처럼 '열매'를 결혼으로 인한 자손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이 열매는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6:22)를 연상시킨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 맺는 열매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과 의라고 할 수 있다(Calvin). 즉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의'를 얻고 '거룩'하게 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대하여 열매를 맺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6장과 본장에서 말하는 '열매'의 본질이다. '열매'에 대해서는 6:22의 주석을 참조 비교하라.
=====7: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 바울은 항상 '육신'(* , 사릍스)을 '영' (* , 프뉴마)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사용하여 죄와 대항하기에 무기력한 인성과 그에 근거하는 삶의 방식을 나타낸다(8:3-9). '육신'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 '육신'을 통해서 죄가 왕 노릇하기 때문에 '육신'은 '죽을 몸'(6:12)이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의 인간'에 대해서 '육신'이라고 했으며, 또한 그리스도를 알지만 율법에 종 노릇하며 죄에 거하는 자들에게도 이 말을 적용했다(고전 3:1, 3).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신분상으로 육신에 속한 자가 아니라 영에 속한 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신에 속한 자 같이 행동하는 것은 그일을 행하는 사람 자신 뿐 아니라 그를 불러 의인되게 하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2:24). 어쨋든 본절에서 육신은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의 상태 즉, 그리스도와 무관(無關)한 삶을 살던 때의 신분을 가리킨다.
죄의 정욕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 파데마타 톤 하마르티온'(* )은 죄악의 성격을 갖는 정욕을 의미하는데, 혹자는 '색욕, 분노, 증오, 악한 뜻, 투기, 시기, 터무니없는 두려움'등으로 해석한다(Hendriksen). 그러나 본절에서는 좀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어서, '죄로 나아가고자 하는 욕구'(Meyer, Gifford, Murray)로 해석될 수 있다. 다만 바울은 7절과 8절에서 '죄의 정욕' 중 '탐심'을 대표적인 것으로 언급한다. 한편 바울은 '죄의 정욕'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 자체에서 일어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율법'으로 말미암는다고 진술하고 있다(7, 8절 주석 참조).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 여기서 '지체'는 '육신'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죄가 지체를 통해서 실제화되기 때문에 '역사하다'란 말과 어울리는 '지체'란 용어를 사용했다. 즉 사람의 '지체'는 죄에 붙잡혀 사용되면 '불의의 병기'이며 하나님께 붙잡혀 사용되면 '의의 병기'로 역사하게 된다(6:13).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 이 말은 6:13에서와 같이 사람의 지체가 '불의의 병기'로 사용된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맺는 것( 4절)과 반대로 죄와 연합하여 죄의 종노릇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 상태에 빠진 사람은 사망 가운데 있으며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로 있다. 이러한 상태가 그의 열매이며, 최종적으로는 영원한 사망의 열매로 이어진다.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 여기서 두 문장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즉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다'는 진술은 율법에서 벗어난 방법에 대한 설명이다(Murray).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호 카테이코메다'(* ) 가운데 관계 대명사 '호'(* )는 '율법'(* , 투 노무)을 선행사로 갖는 것이 분명하다. 비록 관계대명사 '호'(* )는 여격이고, '투 노무'(* )는 소유격이어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이는 '호'(* )의 전치사 '엔'(* , '...안에')이 여격을, '투 노무'(* , '율법')의 전치사 '아포'(* , '...로부터')가 소유격을 수반하므로 차이가 날 뿐이다. 그러므로 '얽매였던 것'은 '율법'을 설명해 주는 말이다. 율법은 사람을 얽매는 것이고,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죽는 방법 외에 다른 길이 없다. 사람의 정욕과 율법이 조화를 이루면 이처럼 과격한 방법이 아니고서는 율법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대표(代表)로 죽으신 것이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 바울은 '영'이란 용어를 매우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영'을 '성령'으로 해석하지만(Hendriksen, Murray, Stott, Harrison) 그 한 단어로 '영'이란 용어가 지닌 의미를 완전히 드러낼 수 없다. 바울이 '영'(* , 프뉴마)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용례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8장에서 '영'은 '육신'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영'이 죄에 대해서 전혀 배타적임을 가리킴과 동시에 율법에서 벗어났음을 보여준다. (2) '영'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갖게 된 '새생명'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이때에는 '영'이 '성령'과 동일시될 수 있다(8:14). (3) 본절에서와 같이 '영'은 '의문'(儀文)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즉 '의문'이 옛 시대의 지배 원리였던 것과는 반대로 '영'은 새시대의 지배 원리이다. 물론 새시대의 지배 원리는 '성령'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지만 새시대의 지배 원리 자체와 성령은 동일시될 수 없다. 새시대의 지배 원리에 속한 것으로는 '영'과 '복음'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성령과 사람의 영이 8장에서 구분없이 사용되고 있으며, 고전 6:17에서는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 언급되어 있다. 이와 같은 사실들로 볼 때 바울이 '영'이란 용어를 사용할 때에, 어떤 곳에서는 새 생명을 주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새시대의 지배 원리에 대해 적용하기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본절은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것'(Murray)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새시대의 지배 원리를 따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 이 표현은 '그런즉 어찌하리요'(6:15)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앞에서 설명한 바에 대해서 부연 설명을 하든지 아니면 앞의 내용과 연결시키면서 또 다른 주제로 전환하기 위한 바울의 상투적인 문장 전개 방법이다(3:1;4:1, 10;6:1;8:31;9:14, 30;10:8).
율법이 죄냐 - 바울이 지금까지 율법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취했으므로 그의 글을 읽는 사람들은 율법이 죄를 유발시키는 것으로 생각하게 될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사실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이 지금까지 율법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취한 것은 율법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으며 사람이 육신의 지배를 받을 때는 율법이 도리어 죄를 깨닫게 하고, 죄의 정욕에 사로잡히게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 이 말은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4:15)는 표현과 일맥 상통한다. 죄는 율법 때문에 생성되는 것도 아니며 율법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우리 안에 있다(Calvin). 다만 율법은 그 죄를 죄로 규정하면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낸다. '율법으로 말미암지'란 말은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해주는 데에 꼭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에 가까이 서 있는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더욱 확실하게 깨닫게 된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 바울은 율법 중 탐심(貪心)을 경계하는 구절을 대표적으로 언급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탐심은 인간의 심성 속에 은밀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실제적인 범법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죄로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율법은 인간의 심성에서 일어날 수 있는 악한 동기도 죄라고 가르쳐 줌으로써 죄를 깨닫게 하여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 인간 사회에서는 '탐심'으로는 죄가 성립되는게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악한 동기조차 죄로 규정된다(마 5:27, 28;6:1-4, 18). (2)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 2:16)으로 표현될 수 있듯이 타락한 인간의 죄는 탐욕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또한 우상 숭배와 같다(골 3:5). 바울이 '탐욕'을 우상 숭배와 같이 취급한 이유는 둘다 '헛된 것'을 추구하면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이다.
=====7:8
죄가 기회를 타서 - 본문은 '죄'(* , 하마르티아)가 주체로서, 인격성(人格性)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기회를'(* , 아포르멘) 엿보다가 '취한다'(* , 라부사)는 의미이다. 이처럼 죄가 인격성을 가지고 능동적인 활동을 한다는 표현은 죄가 가지고 있는 특성과 그 유래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해리슨(Harrison)의 말대로 본절 배후에 유혹과 타락에 관한 창세기 기사가 깔려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죄'가 인격성을 가진 주체로 표현되는 것은 사단의 교활한 특성을 반영하고자 한 것이다. 틈만 보이면 달려드는 맹수 같은 성격을 가진 죄의 모습을 보여준다.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 이 말을 달리 표현하자면, '탐심이 속에서 잠재해 있다가 계명으로 인해서 드러난다'라는 의미이다. 이 표현은 이미 7절 하반절에서 언급된 것과 같은 의미이기도 하다. 인간의 마음이 백지와 같음을 전제하고 죄가 계명을 통해 탐심을 유발시킨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미 인간 내부에 있는 탐심이 죄의 요구를 따라 계명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온갖 탐심을 이룬다는 말이다. 이처럼 끝없이 유발되는 죄로 인하여 인간은 도무지 살길을 찾을 수 없게 된다.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 본 구절은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4:15)는 말씀과 의미상 같다. 왜냐하면 '죄가 죽었다'(* , 네크라)는 것은 죄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에 대한 인식이 법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뜻으로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Calvin). 아무튼 본장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죄 자체는 항상 활동하고 있으나 인간 편에서 법이 없을 때는 그 죄를 죄로 여기지 못하고 있었는데 율법의 죄를 밝히 드러나게 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된다는 사실이 본장에서 강조되고 있다.
=====7:9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이라도 바울은 율법을 잘 알고 있었다. 바울은 율법의 각 조문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는 누구 못지않게 자신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한'(10:3)사람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의 바울은 율법에 대한 지식은 있었으나 깨달음이 없었던 것이다.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 '계명이 이르매'란 표현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계명을 깨닫게 되매'라는 말로 의역이 가능하다. 그리고 '살아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네제센'(* )은 '아나자오'(* )의 부정과거 동사로 본래 '다시 살아나다', '희생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본절에서는 단순히 '활동하게 되다'라는 의미이다(Hendriksen). 죄가 본래부터 있었으나 사람이 계명에 대해 깨닫기 시작하면 죄가 자기 속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깨달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죄의 요구도 함께 커지므로, 죄에 대한 자신감보다는 죄를 이겨내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게 된다.
=====7: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계명은 '생명과 복의 근원'이었다(신 5:31-33).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그 계명을 지킴으로써 생명을 얻게 되어 있었다(겔 20:11).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범죄할 기회를 주자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의의 길에서 인간의 생명을 지도하고 규정하여 생명을 보존하자는데 있다(Murray). 그리고 율법의 정신을 바로 깨달은 시 119편의 저자는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시 119:14)고 고백했다. 따라서 바울이 지금까지 부정적으로 언급해온 율법은 그 진정한 정신이 망각된 형식적인 유대인의 율법이기도 하며 또한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함으로써 그 기능을 다하는 의미에서의 그 율법이다(갈 3:23-25).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 인간은 어느 누구도 모든 계명을 다 지킬 수 없으므로, 그 계명에 따라 사형 선고를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여기에는 바울 자신도 예외가 아니다. 바울은 엄격한 율법 교육을 받았으나, 그것은 그에게 생명에 대한 희망보다 오히려 비참한 절망감과 정죄(定罪)만 주었다. 이러한 체험은 종교 개혁자 루터(Luther)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믿음에 대한 눈을 뜨기 전에는 형식적인 교리와 규정들이 그를 짓누르며 생명에 대한 소망이 전혀 없는 사망의 상태가 그를 괴롭힐 뿐이었다. 본절의 '되었도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휴레데'(* )는 '발견하다'는 뜻의 동사 '휴리스코'(* )의 단순 과거 수동태 형으로서 문자적으로 '발견되었다'는 의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이후에 비로소 율법과 계명이 자신을 정죄하며 그 자체 안에서는 죽음밖에 없음을 확연히 깨닫게 되었다.
=====7:11
표현 방법상 본절은 8절과 같지만 내용면에서는 서로 다르다. 8절은 죄를 드러나게 하는 계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 본절은 계명을 통해서 죄가 사람에게 철저한 좌절감을 맛보게 한다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나를 속이고 - 복음으로 말미암아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선포했던 바울은 이제 계명을 지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으나 이전과 같이 자신이 죄를 짓고 있음을 깨달았다. 죄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마땅히 계명을 지킬 수 있어야 함에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에, 바울은 죄가 계명을 통해서 자기에게 속임수를 쓰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 속임수는 죄가 계명을 통해서 바울로 하여금 죄의식을 갖게 함으로써 '네가 그래도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자랑할 수 있느냐 ?'고 정죄하는 것을 가리킨다. 바울은 이와 같은 속임당함에 의한 심한 좌절과 고민 가운데 있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속이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세파테센'(* )이 '여사파타오'(* )의 단순 과거 능동태 형으로서 '완전히 길을 잃게 만들었다'(mislead)는 점에서 분명하다.
나를 죽였는지라 - 이 표현은 9절 하반절의 '나는 죽었도다'란 고백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Murray). 혹자는 바울이 죄로 인한 '사망의 의식'을 갖게 된 것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 율법을 추종하던 때의 일이라고 주장한다(Hendriksen).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다음에 계속 이어지는 구절들에 의해 결코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갈등에 대한 묘사이기 때문이다.
=====7:12
이로 보건대 - 계명 자체가 사람에게서 죄를 유발(誘發)시키는 것이 아니라 죄가 계명을 도구로 하여 사람을 속이고 정죄하는 이 모든 사실을 종합적으로 생각해 본다는 의미에서 바울은 본절의 접속사(* , 호스테)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율법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 이 선언은 직접적으로 7절의 '율법이 죄냐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지만, 문자적으로는 율법과 계명이 지닌 속성을 표현해 주고 있다. 율법에는 하나님의 의가 투영(投影)되어 있으므로 그 자체는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할 수밖에 없다.
=====7:13
본절에서 바울은 계명이 선하다는 사실을 변증하면서, 그 선한 계명과 죄 그리고 성도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요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계명은 성도들 가운데 있는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한다. 이때 성도는 심한 죄의식을 느끼게 되며 선을 행하여 거룩하게 되고자 했던 소망이 좌절되어 심한 절망감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계명은 성도로 하여금 스스로 의롭게 되며 선한 삶을 살겠다는 결심을 허무하게 만든다. 이러한 현상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된 성도가 그 신분에 걸맞는 삶을 살아보려고 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계명이 성도의 삶을 좌절시킨다 하더라도 계명 그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이와 관련하여 계명이 성도를 허무와 좌절에 빠지게 한다면 폐기(廢棄)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율법 폐기론 내지는 율법 무용론을 염두에 두고 이에 대하여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 메 게노이토)고 분명히 잘라 말하고 있다.
=====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 율법이 신령하다는 것은 율법의 기원이 하나님께로서 시작되었음을 가리킨다(Black). 실제로 '신령한'(* , 프뉴마티코스)이란 형용사는 신약성경에서 세상적이고 육적인(* , 사르키노스) 것과 대조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전 2:13, 15;3:1;10:3, 4;12:1;15:44;엡 5:19;골 1:9;벧전 2:5). 그러나 율법이 비록 신적인 기원을 가진 신령한 것이지만, 그것이 지닌 약점(弱點)은 아무것도 온전케 만들 수 없다는 점이다(히 7:19).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 율법이 신령한 것이었던 점과 반대로 바울은 자신이 육신에 속한(* , 사르키노스) 자라고 고백한다. '육신에 속한 자'란 죄에 대해 저항력이 없는 자를 가리킨다. 바울이 6장에서 이미 자기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육신에 속한 자라고 고백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율법과 관련해서 볼 때, 성도는 항상 육신에 속한 자이며 죄인일 뿐이다. 그리스도를 믿고 중생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신령한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의미에서 성도는 육신에 속한자요 죄 아래 팔린 자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 대해서 혹자는 이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아니라고 주장한다(Thomas). 그렇다면 본절이 바울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난 고백이 아니라는 말이 성립된다. 그러나 바울은 이신 칭의(3:21-4:25)와 그것에서 비롯된 하나님과의 화해(5:1-21)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함께 거룩(성화)의 성취(6:1-23)에 대해서 논리를 전개해 왔고, 본장에서는 앞에서 설명한 것에 걸맞는 삶을 살아보려고 시도했으나 다시 율법의 굉장한 벽에 부딪힌 체험을 고백한 것이다. 따라서 본절은 비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 겪는 신앙의 갈등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죄 아래 팔렸도다'라는 말은 '죄에서 해방되었다'(6:18, 22)는 말과 대조적인 표현이다. 성도는 이 두 가지 신분을 동시에 지니고 사는 존재라는 사실을 무시하면 본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7: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 이 표현은 바울 자신이 행하는 것 자체를 깨닫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울 자신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뜻하는 바와 실제로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성도의 신앙적인 갈등은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회의가 찾아들게 되는 시점이 바로 이때이다.
=====7:16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 바울이 마음으로 바라는 것은 율법에 따라 의롭고 정당한 것이지만, 실제로 그 생각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에는 그 원하는 바가 나오지 않고 원치 아니하는 바가 나타난다. 이에 대한 해결책을 도출해 내기 위해 바울은 앞에서 했던 말을 다시 조건문 형식으로 반복한다. 동시에 그는 독자들로 하여금 그가 제시하게 될 해결책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 있다.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 율법은 인간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 지켜질 수 없다. 율법을 행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죄 아래 매인 자신의 모습만 발견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인간의 의지로 도달될 수 없는 지고선(Summum Bonum)이다. 율법은 바울이 원치 않는 바를 행할 때마다 그 자신을 정죄한다. 이때 바울은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7:17
이제는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뉘니데'(* , '그러면 이제는')는 3:21의 '이제는'과 같지만 본절에서는 어떤 주제의 전환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러면' 또는 '그런즉'을 의미하는 '운'(* )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Barmby). 따라서 15절과 16절에 이어지는 논리의 진전이 본절에서 제시되는데, 15절에서는 원치 아니하는 것을 행한다는 것을, 16절에서는 이처럼 원치 않는 것을 행할지라도 율법이 선하다는 것을 서술하고 나서 본절에서는 더욱 분석적이고 세밀하게 이 사실을 말하고자 '그러면 이제는'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한다.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 바울은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행하게 하는 것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죄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비록 죄가 자기 의지의 소산이 아니라 할지라도 자기 속에서 나온 것이다. 즉 바울은 죄가 기회를 탈 수 있는 불의의 병기로 자기 몸을 죄에게 드렸던 점에 있어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리고 본절에서 바울은 선을 행하려는 자아와 그 자아를 이기고 나타나는 죄를 구분하여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속에 죄가 실제로 존재하며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을 뿐 아니라, 비록 자기 속에 죄가 실제로 존재하며 활동하고 있어도, 자신의 실체는 이미 의롭다 인정받은 의인임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과 죄를 구분해서 생각하고 있다.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 성도의 신분은 영에 속한 자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죄를 대항하기에 무기력한 '육신'(* , 사릍스)을 가지고 있는 신분이다. 이 육신이 있는 한 죄는 항상 기회를 타서 성도로 하여금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게 한다. 이러한 체험은 바울이라고해서 예외일 수 없다. 누구든지 이러한 현실을 인정치 않는 자는 외식자가 되든지 완전주의자가 될 것이다. 외식자는 자신의 잘못을 항상 합리화시키기에 바쁠 것이며 완전주의(Perfectionism)를 추구하는 사람은 다시 율법주의로 되돌아가서 평생 갈등과 고민 가운데서 허덕이게 될 것이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 마음은 선한 것을 행하려고 결심하지만 육신이 연약하여 마음의 원하는 바를 실천할 수 없다(마 26:41). 이러한 사실은 인간 속에 내재하고 있는 부패의 뿌리가 얼마나 큰 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비록 거듭나서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자 결심하지만 죄가 연약한 육신을 장악하여 성도로 하여금 선한 일을 위해서는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성도는 이 사실을 깨닫고 무력한 상태를 벗어나려고 애쓰면 쓸수록 철저한 패배로 인한 비참함만 맛볼 뿐이다(24절).
=====7:19
본절은 15-18절까지의 진술을 요약하고 있다. 바울은 지금까지의 진술을 요약 반복함으로써 앞에서 언급했던 내용이 분명히 어떤 사실에 대한 것이었는지 보여 줌과 동시에 지금까지 고백한 신앙적인 딜레마(dilemma)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대답을 이끌어 갈 준비를 하고 있다.
=====7:20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 본구절은 17절의 반복이다. 그러나 바울이 유도해 내는 내용은 서로 다르다. 본절에서는 상반절에서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이라는 조건절이 언급된 다음 본구절이 곧바로 언급된 반면, 17절에서는 본절 상반절과 똑같은 조건절이 16절 상반절에 언급되고 그 다음 17절에서 본구절과 같은 말이 진술되기 전 16절 하반절에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는 본 구절에서 언급된 말이 16절과 17절에서는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과 연관지어져 있으나 본절에서는 우리 속에 있는 두 가지 서로 상반된 세력에 대한 진술과 연관되어 있기(21-23절)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이 17절에서 언급했던 말을 본절에서 다시 반복한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겪어야 하는 심각한 신앙적 현실을 일깨워 주기 위함이다. 한편 본절을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죄를 짓는 우리의 현실을 합리화시킬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극복되어야 할 신앙적 현실이라는 차원에서 본구절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이를 우리의 죄를 합리화시키는 진술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7:21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 일반적으로 바울은 '법'이란 단어를 율법에 대하여 사용했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그 뜻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렵다. 혹자느 이 '법'을 다음에 언급되고 있는 세가지 법, 곧 하나님의 법(22절), 마음의 법(23절), 죄의 법(23절) 모두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한다(Calvin). 그리고 혹자는 이 '법'이 '하나님의 법'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urray). 또한 이 주장을 뒷바침하는 해석을 유도하기 위해 '법'이란 단어 앞에 수단을 가리키는 전치사를 써서 '법에 의해서'라는 의미로 의역하는 학자도 있다(Erasmus). 그러나 머레이(Murray)의 주장은 큰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22절과 23절에서 하나님의 법과 그와 같은 의미를 지닌 마음의 법만 강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 대조되고 있는 '죄의 법'도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의 '법'은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우리 몸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립의 원리를 의미한다. 혹자는 이를 '지배 원리'(governing principle) 또는 단순히 '원리' 정도로 해석하는 데(Harrison, Black), 이것은 본절에 사용된 '법'의 의미에 접근을 했으나 그 의미를 완전히 드러내지는 못한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 19절에서 바울은 선을 행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악을 행하는 자신의 모순된 행위에 대해서 언급했으나, 본절에서는 그러한 모순된 행위가 발생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즉 그 이유는 자신 속에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와 함께 악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설명함으로써 바울은 악을 외부적인 어떤 요인이 아니라 사람 내부에 존재하는 실체(實體)로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악은 인간 내부에서 잠잠히 있지 않고 항상 인간의 모든 지체를 지배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Hendriksen).
=====7:22
내 속 사람으로는 - 혹자는 23절과 25절에서 대조되고 있는 마음과 육신이 몸과 영 또는 정신과 물질 간의 어떤 형이상학적인 구별이 아니라 윤리적인 구별이라고 주장한다(Murray). 이와 반대로 혹자는 고후 4:16을 근거로 하여 속 사람을 썩어질 겉 사람과 대조되는 것으로 이해한다(Calvin, Black). 더 나아가 혹자는 속 사람을 인간의 실질적인 자아로서 영(spirit)과 혼(soul)과 같은 비물질적인 부분으로, 겉 사람을 사람의 몸과 그 지체로 이해한다(Lenski). 여기서 후자의 주장들은 바울의 전체 사상 중에서 인간 이해 부분에 대해서는 만족시켜 줄 수 있으나 본절 이하에서는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속 사람이 23절과 25절의 '마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윤리적인 구분을 위한 것이지 인간의 실체를 구분하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본절에서는 윤리적인 면에서 속 사람을 단순히 선을 행하고자 하는 자아로 규정하고 악을 행하는 다른 자아와 구분시키고 있다.
하나님의 법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노모 투 데우'( )가 '율법'을 의미하는지 8:2의 언급과 같은 '성령의 법'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하나님의 법'을 '율법'으로 이해한다(Hendriksen, Murray, Harrison, Lenski). 그렇지만 '하나님의 법'이 '성령의 법'과 일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반드시 율법과 동일시할 필요는 없다. 지금 바울이 진술하고자 하는 것은 속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일으키는 '거룩한 원리나 힘'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이러한 거룩한 원리를 따르기를 즐거워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이 '율법'이나 '계명'을 포괄하는 '거룩한 원리'로 해석되어도 문제될 것이 없다.
즐거워하되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도마이'( )는 일차적으로 '...와 함께 즐거워하다'로 직역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전치사 '쉰'( , '함께')과 결합된 합성 동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렌스키는 '...와 교제 하거나 교제하게 되어 즐거워한다'는 해석을 제안한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함께'라는 의미를 강조할 필요가 없으므로 단순히 '...을 즐거워하다'(delight in, KJV, NIV, RSV). '...을 기뻐하다'(rejoice in;Scott, Robertson)라고 해석하는 것이 낫다. 또한 이 동사가 1인칭 단수를 나타내므로 '내가...을 즐거워하되'라고 이해해야 한다.
=====7:23
내 지체 속에서 - '지체'(肢體)는 '육신'과 동일한 의미다. 이 지체는 단순히 몸의 각 부분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죄와 대항하기에 전혀 무기력하며 죄로 인해 사망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의 몸'의 각 부분을 가리킨다. 비록 '지체' 그 자체는 '육신'과 마찬가지로 악한 것이 아니지만 죄가 연약한 육신의 지체를 통해서 역사하기 때문에 '지체'는 불의의 병기로 사용되는 것이다(6:13). 그러나 우리의 지체는 반드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는데 성령에 의해 인도함을 받을 때에라야 의의 병기로 하나님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 '마음의 법'은 22절의 '하나님의 법'에 상응하는 관계에 있다. 그리고 이 법은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선한 의지를 일으키며 '한 다른 법'인 '죄의 법'과 투쟁 관계에 있는 법이다. 다시 말해 '마음의 법'은 마음자체에서 일어나는 '법'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하는 의지를 선한 양심 안에서 일으키는 거룩한 원리이다. 한편 바울은 '한 다른 법'과 '마음의 법'이 투쟁 관계에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 '싸워'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즉 성도안에는 이 두가지 법이 서로 지배력을 행사하려고 투쟁하고 있으므로 성도는 자신도 모른 사이에 갈등 상태에 놓여 있게 된다. 바울은 본 구절을 통해 성도들 가운데 일어나는 갈등이 당연한 것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만일 바울이 이러한 언급을 성도들에게 하지 않았다면, 성도들은 이 두 법의 갈등으로 인한 신앙적 고민을 해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 '하나님의 법'이나 '마음의 법'이 단순히 율법이나 계명만을 의미하지 않듯이 '죄의 법' 역시 어떤 명문화된 법을 의미하지 않고 죄가 역사하는 원리 또는 죄의 세력을 지칭한다.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싸워 마땅히 하나님의 법이 이겨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 죄의 법이 하나님의 법을 이기고 성도를 죄의 법의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 이것이 성도가 현재의 삶 가운데서 겪게 되는 실상이다. 바울이 성도가 겪게 되는 신앙적인 현실에 대해 이토록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1) 성도 자신이 현실에서 죄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며 (2) 이러한 비참한 현실 가운데서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지닌 넓이와 깊이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3) 그런데 여기에는 성도 자신의 실존이 변화되어 있는 상태로 있기 때문에, 죄의 법이 심각한 도전을 해도 성도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자 한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바울은 비참한 현실 가운데 처해 있을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25절)고 선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 '보는도다'라는 표현은 경험적으로 '알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처럼 시각적인 경험으로 표현하여 성도가 처해 있는 비참한 현실을 강조한다.
=====7:24
스토트(J. Stott)는 본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불신자는 '자기 의'(self-righteousness)로 특정지워지면 본절과 같이 자신을 '비참한 피조물'로 인식하지 못한다. 성숙되지 못한 성도는 '자기 확신'(self-confidence)으로 특정지워지며 자기를 구원할 자에게 구하지도 않는다. 다만 성숙된 성도만이 '자기 혐오'(self-disgust)와 '자기 절망'(self-despair)의 상태에 이르게 되며 자기 육신 안에 선한 것이 조금도 거하지 않는 사실을 뚜렷하게 인식한다. 이 사람은 자기의 곤고함을 알아 믿음으로 구원을 위해 호소한다." 이와 같이 스토트는 본절을 거듭나지 못한 자의 탄식이 아니라 거듭났으며 성숙된 성도의 탄식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그가 주장한 '구원을 위한 호소'는 단순히 죄로부터의 구원을 위한 호소(Murray)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간의 갈등을 극복케 해달라는 호소이다. 불신자 또는 거듭나지 못한 자는 자기속에 일어나는 두 법의 투쟁을 깨닫지 못하며 따라서 그것으로 인해 탄식하지 않는다.
곤고한 사람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탈라이포로스'(* )는 개역 성경의 번역과 비슷하게 '심한 고난을 겪는 사람'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본절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실감나게 표현하여 '비참한 사람'(wretched man, KJV, NIV, RSV)으로 번역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혹자는 바울이 자신을 '곤고한 사람'이라고 탄식한 것은 절망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심각한 고민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Lenski). 그러나 이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지금 바울의 탄식은 선을 행하고자 노력하지만 항상 실패한 자신의 형편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이 전혀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절망감과 비참함을 탄식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고통'이나 '고민' 정도로 '탈라이포로스'를 해석하게 된다면 탄식하는 바울의 심정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한다.
사망의 몸 - 숙명적인 인간의 운명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죄와 사망의 세력을 벗어날 수 없는 비참한 상태의 몸을 가리킨다. 여기서 '사망'은 '죄의 결과'로 초래되는 것이므로(6:23) 죄의 세력을 의미한다.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 바울은 24절의 탄식에서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라고 질문을 던진 바 있다. 본 구절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즉 바울은 그토록 비참한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구속을 자기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되었던 것이다. 3:21-6:23이 교리적 차원에서 예수에 대한 바울의 이해를 보여 준다면 본절은 교리를 현실적인 삶에 적용함에 있어서 자신이 겪은 갈등을 통한 예수에 대한 바울의 이해를 보여 주고 있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 앞에서 계속 진술했던 것을 다시 반복하고 있지만, 본절은 의미상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 즉 같은 표현이 앞에서는(20-23절) 탄식으로 이어지는 내용이지만 본절은 진정한 해방의 선포를 위한 내용이다. 즉 이는 탄식이면서도 몸의 구속 곧 진정한 구원을 기다릴 준비를 갖게 하는 내용인 것이다(8:23). 이처럼 본 구절은 앞에서 진술했던 내용을 비참한 현실적 삶을 통해 여과(濾過)시켜 그리스도의 구속이 가진 보다 깊은 비밀로 이끌어 가도록 전환시키는 분수령이다.
전장(前章)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남용하여 계속 육체의 정욕을 따른 생활을
정당화하려는 반율법주의자(Antinomian)들의 극단적인 주장(6:1, 15)을 반박하였다.
이제 본장에서 바울은 건전한 신앙 생활을 저해하는 또하나의 극단적인 문제를 염두에
두고 있다. 즉 "우리는 율법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철저하
게 율법을 지켜야만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율법주의적인 문제에 대해 바
울은 "우리는 결코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와지는 것도, 구원을 받는것도 아니며 오히려
율법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할 뿐"이라고 명백히 답변하
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바울의 율법론을 포함하고 있는 본장을 읽음으로써 율법과 관
련된 제문제들을 파악하고 그에 대한 성경적 해답을 얻을 수 있다. 보다 포괄적이며
심도깊은 관점에서 본장을 이해하기 위하여 본장을 기록하게 된 바울의 내면적 배경,
외부적 자극과 배경이 된 율법주의, 그리고 정반대의 두 가지 오류 즉 반율법주의를
반박하는 6장과 율법주의를 반박하는 7장의 구조를 비교, 분석하여 보자.
(1) 본장을 기록한 내면적 동기. 사도 바울은 모세 율법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개념
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율법이란 단어를 광의적으로 해석하여, 양심에 호소하는 도덕
률(道德律)에 대한 전반적인 복종의 요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회심하기 전에
그는 철저한 바리새인으로 율법을 대단히 경외하였지만, 회심한 이후부터는 그것이 어
찌하여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고 오히려 죄책감만 갖게 하는가에 대하여 깊은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율법의 기능과 목적이 실제로 무엇인가에 대하여 명상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전반적으로 도덕적 행위를 위한 복종의 강제 원리와 형벌의 위협하
에서 나타난 율법의 기능을 검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율법 자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사람들의 범죄 행위를 억제하는 것뿐
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율법이 은혜의 섭리 아래서 행하여야
할 다른 기능이 있음을 인정하였다. 즉 율법은 인간의 양심속에서 죄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고 죄의식을 갖게 하며 속죄의 기쁨을 알게 하는 것이다. 바울이 깨달은 바는
결국 율법에 대한 바름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 많은 신앙적 손실이 뒤따르지만
(3:31) 율법을 바로 수용할 때 하나님의 깊은 뜻과 섭리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율법의 의미와 기능에 대한 더 상세한 것은 7-13절 주제 강해 '바울의
'율법'에 해한 이해'를 참조하기로 하자.
(2) 본장을 기록한 외부적 동기 : '율법주의'. 바울은 본장을 율법주의에 반대하기
위하여 썼다. 6자에서 거론된 반율법주의(율법 폐기론)와 더불어 율법주의 또한 칭의
받은 성도들에게 가장 흔한 걸림돌이 된다. 율법주의란 인간이 율법의 각 조항들을 그
대로 지켜 행함으로 거룩해지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신념이다
(사 58:2;마 15:1-9). 따라서 이러한 사상을 신봉하는 사람은'행하라'는 것과 '행하지
말라'는 것들의 목록표에 의해서 신앙을 측정한다(마 23:23;눅 18:11). 이러한 율법주
의의 치명적인 약점은 일상 생활의 드러난 죄들은 보면서도 그 죄들의 근원적인 죄는
보지 못한다는 데 있다. 즉 외면적인 면에 의해서 사람을 판단하지만 그 내적인 모습
은 간과해버리고 만다(잠 30:12;고후 10:12). 이것은 율법의 참된 근본 정신을 이해하
지 못한 데서 연유한다. 율법의 근본 정신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13:8,
10;마 22:37-40). 이같은 사랑의 정신을 망각한 율법의 준행은 다만 외식적인 행위에
불과한 것으로서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살 뿐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율
법을 무시하는 반율법주의가 되어도 안 되지만 율법주의에 빠진 나머지 율법의 노예가
되어서도 안된다.
(3) 6장과 7장의 구조 비교. 앞에서 언급한 바거니와 6장과 7장의 중심 논제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각각 율법 폐기론과 율법 절대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내용을 비교
분석하면 다음 도표와 같다.
+-----------+---------------------------------+--------------------------------+
| 비교 내용 | 6 장 | 7 장 |
+-----------+---------------------------------+--------------------------------+
|제기된 문제| 반율법주의(율법 폐기론) | 율법주의(율법 절대론) |
+-----------+---------------------------------+--------------------------------+
|문제를 | 칭의받은 그리스도인 | 칭의받은 그리스도인 |
|만난 사람들| | |
+-----------+---------------------------------+--------------------------------+
|문제 제기의| 죄가 더할수록 은혜가 넘치므로 | 칭의받은 후에도 예수 그리스도로|
|근거 | 아무렇게나 살자 | 인해서만 거룩하게 살 수 있다 |
+-----------+---------------------------------+--------------------------------+
|바울의 |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로 |
|반박 논지 | 자이므로 거룩하게 살아야만 한다 | 인해서만 거룩하게 살 수 있다 |
+-----------+---------------------------------+--------------------------------+
|바울의 | 죄로부터의 자유함을 세가지 비유 |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결혼의 |
|반박 형식 | (노예비유, 접목비유, 형사 소송 | 비유로 설명함 |
|(전반부) | 비유) 설명함 | |
+-----------+---------------------------------+--------------------------------+
|바울의 | 참자유의 본질과 자유인의 거룩한 | 율법의 본질과 기능, 율법아래 |
|반박 형식 | 삶을 논술함(객관적 경험과 견줌) | 서의 영혼의 투쟁을 논술함 |
|(후반부) | | (주관적 경험과 견줌) |
+-----------+---------------------------------+--------------------------------+
|결론적 | 죄에서 떠나 거룩한 성도로 살아라| 율법에 얽매이지 말고 그리스도 |
|내용 | | 안에서 거룩해져라 |
+-----------+---------------------------------+--------------------------------+
(4) 내용 분석. 율법과 성화의 관계를 다루는 본자을 내용별로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다.
1-6절 :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7-13절 : 율법의 본질과 기능.
14-24절 : 죄에 대한 성도의 투쟁.
25절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인의 승리.
문단 강해에서는 편의상 마지막 두 문단을 묶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율법으로부터의 자유(7:1-6)
바울은 본 단락에서 결혼 관계를 비유로 들어 정죄와 심판의 근거였던 율법으로부터
해방되고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진리를 서술하고 있으며 이러한 해방과 연합은 율법 아
래서는 획득할 수 없었던 풍요로운 생명의 결실을 가져온다고 지적하였다. 본문은 그
리스도인의 자유의 실재를 법률적 논의에다 근거를 두고 설명하고 있으며 두 가지 죽
음과 두 번의 결혼을 통해 갖게 되는 결과들을 '전에는', '이제는'의 양식으로 표현하
고 있다.
여기서는 결혼법을 예로 든 이유, 두 가지 죽음, 새 결혼의 결과에 대해 살펴봄으로
단락 전체의 신학적 흐름을 찾아 본 후 '전에는', '이제는'의 양식으로 구조화가 가능
한 6장과 7장의 비유들을 비교 분석해 보자. 이로써 칭의 이전의 삶과 칭의 이후의 삶
이 명확하게 대조됨으로써 성화의 당연성과 원리가 보다 뚜렷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1) 결혼법을 예로 든 이유.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이신 득의'의 복음을 전
함에 있어, 그 진리의 전후 과정과 그에 따른 성도의 삶을 가르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비유들을 주제와 수신자와 그들의 경험 수준과 범위를 적절히 고려하면서 사용하고 있
다. 본무네 나오는 결혼의 비유도 그러하다. 바울이 결호늬 비유를 실례로 든 이유를
세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결혼의 비유는 성도와 율법과의 뗄래야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를 보여준다.
특히 이 결혼의 비유에서 나타나는 아내를 개역성경에는 '남편 있는 여인'이라는 일반
적인 단어로 표현되었는데 원어상으로는 '남편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란 뜻의 '휘판드
로스'(* )가 사용되었다. 이는 바울이 이 단어를 통해 결혼의 법적 효
력을 강하게 부각시키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아내가 남편으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길은 남편이 죽은 경우이거나 자신이 죽는 경우뿐이다.
둘째, 본 서신의 수신자인 로마 교회 성도들은 법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이었기 때
문에 법률적 비유는 그들에게 쉽게 이해될 수 있었다. 지금도 로마의 유산과 문화 중
에서 손꼽히는 것은 토목 건축술(도로)과 법률이다.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의 가장
일상적인 수준의 비유를 들어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이해시킨 것이다.
셋째, 바울은 일반적으로 예수를 남편으로 표현하는 기독교의 교훈들을 염두에 두고
그 교훈들과의 조화를 위해서 결혼법의 비유를 택한 듯하다. 이미 기독교의 복음을 접
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한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새 남편으로서의 예수는 익숙한 개념
이었을 것이다.
(2) 두 가지 죽음. 바울이 예로 든 결혼법에 의하면, 남편에게 매여 남편의 지배를
받는 아내가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길은 남편이 죽는 경우뿐이다. 그러나 바울은 '한
행동은 한 인물과 더불어 만료된다'(Actio moirtur cum persona) 즉 죽음은 모든 계약
을 말소시킨다는 이 법적 원리를 두 가지 경우로 이야기한다. 한편으로는, 남편의 죽
음으로 인한 해방과 자유함(2,3절)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아내가 옛 남편인 율법에 대
하여 죽고 새 남편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하는 것이다. 두 경우는 모두 완벽하게
율법을 만족시키고 결혼법에 의한 의무로부터도 해방된 경우다.
성도는 이 두 가지 죽음에 유의해야 한다. 성도의 실패는 때때로 자신의 옛 남편의
죽음을 믿지 못하고 그 망령에 사로잡히거나 옛 남편에 대하여 자신이 죽은 것을 의심
하는 경우에 생긴다. 바울은 율법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소개하고 있다. "네 남편
은 죽었다. 옛 남편에 대해 너 자신도 죽었다. 넌 완전히 자유다. 새로운 다른 자아
(自我)이다. 이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3) 새 결혼의 결과. 이제 옛 결혼은 파기(破棄)되었다. 우리는 율법에서 벗어난 것
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우리를 저주하고 정죄하는
율법의 능력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뜻이다. 갈라디아서 3:13의 증언대로 율법의 저주
에서 속량받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속에 거하는 죄를 건드리며 삿대질하는 율법의 저
주에서 벗어났다. 법률의 의무도 끝났고 율법의 저주와 능력은 말소되었다. 여자는 남
편이 살아 있을 동안에만 그에게 매이는 것이다.
이제 성도는 새 남편 그리스도와 새 결혼을 했다. 이것은 앞장에 나왔던 노예의 비
유보다 한층 더 깊은 의미를 가진다. 새 주인에게 인계된 노예는 새 주인의 계명에 복
종해야 한다. 그런데 새 남편과 결혼한 아내는 새 남편에게 복종할 뿐만 아니라 그와
일체가 된다. 그러면 그 결과는 무엇인가? 첫째로, 새 남편과 결혼한 결과는 풍성한
열매맺음이다(4절). 이때 선행은 새 결혼 즉 새 남편과 아내가 연합한 소산이다. 둘째
로, 새로운 남편과 결혼한 아내는 자신의 행동을 마땅히 바꿔야 한다. 이제 우리는 의
문(儀文)의 묵은 것이 아니라(6절) 새영으로, 새로운 삶의 규범과 원칙 속에서 섬기며
살아야 하나. 외형적, 법조문적 섬김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으로 섬기는 생활이 시작되
는 것이다.
(4) 6, 7장에 나타나는 비유들. 그리스도인의 성화에 대해 말하고 있는 6, 7장에는
일곱 가지 비유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 비유들은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과
이후의 삶이라는 상호 대조적인 제요소들을 설명하고 있거니와, 이를 '전에는'과 '이
제는'이라는 항목하에 살펴보면 다음 도표와 같다.
+-----------+----------+---------------------------+---------------------------+
|비유 구분| 성경본문 | '전에는' | '이제는' |
+-----------+----------+---------------------------+---------------------------+
|세례의 비유| 6:3, 4 | 죄에 대하여 살음 | 죄에 대하여 장사됨 |
| | | | 새 생명으로 살음 |
+-----------+----------+---------------------------+---------------------------+
|접목의 비유| 6:5, 6 | 죄와 연합 | 그리스도와 연합 |
+-----------+----------+---------------------------+---------------------------+
|형사 소송의| 6:7 | 유 죄 | 무 죄 |
| 비 유 | | | |
+-----------+----------+---------------------------+---------------------------+
|병사의 비유| 6:12, 13 | 불의의 병기 | 의의 병기 |
+-----------+----------+---------------------------+---------------------------+
|노예의 비유| 6:16-19 | 죄의 종 | 의의 종 |
+-----------+----------+---------------------------+---------------------------+
|결실의 비유| 6:20-22 | 사망의 열매 | 영생의 열매 |
+-----------+----------+---------------------------+---------------------------+
|결혼의 비유| 7:1-6 | 율법의 아내 | 그리스도의 아내 |
+-----------+----------+---------------------------+---------------------------+
결론적으로 우리가 본 단락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자유이다. 이 자유를 에릭 프롬
(Erich Fromm)식으로 이야기 한다면, 구원을 받기 위하여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의무로
부터의 자유요, 영의 새로움으로 섬기기 위한 자유이다. 또한 불순종하는 자를 정죄하
는 율법의 선언으로부터의 자유요, 새 남편인 그리스도가 베푸시는 축복을 누릴 자유
이다.
* '육신'에 대하여. 본장 5, 14, 18, 25절 등 네 곳에 거듭 '육신'(* , 사릍
스)이란 말이 나온다. 몰론 본서의 다른 것이나 기타 바울 서신들에도 '육신'이란 당
너가 나타나나. 그러나 이곳 만큼 '육신'에 대한 바울의 신학적 관점을 뚜력하게 보여
주는 곳은 많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바울의 신학적 인간론 중에서 '육신'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1) 구약성경의 '육신'. 바울의 신학은 구약의 전통과 뗄래야 뗄 수가 없다. 특별히
인간론은 자신의 정신적, 신앙적 성장 배경인 구약으 전통 안에서부터 싹이 트고 발전
해 나가고 있다.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육, 혹은 육신은 히브리어로 '바사르'(* )
이다. 본래는 '피로 가득 채워져 있는 속살'이라는 의미인 이 단어는 보통 '생기를 부
여받은 흙'을 지칭한다. 창세기 6:13, 17, 19에서 육신을 '창조된 무든 생물'이라고
이해하며 옵기 33:25에는 단순히 '살'로 이해한다. 이에 나타나는 '육신'에 대한 공통
적인 의미는 곧 '생명을 지닌 유형체'라는 것이다. 또한 구약성경에서는 '육신'을 나
약한 것으로 이해한다. 욥기 10:4;시편 56:4;이사야 31:3;예레미야 17:5 들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육신'이 '약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기는 하지만
'죄된 것'으로 언급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바울이 '육' 혹은 '육신'에 대하여 '사
람, '신체'라는 의미라든지 '약하다'고 말할 때에 그것은 바로 바울이 구약 전통의 연
속선상에서 '육신'을 이해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구절
은 다음과 같다.
(까) '모든 사람'이한 뜻의 육체(3:20).
(다) '자연적 후예'임을 나타내는 육신의 자녀(9:8).
(따) '지상의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하는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고전 10:18).
(마) '신체적 쇠약'을 가리키는 육체의 약함(갈 4:13).
(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표현하는 육신(1:3).
(빠) '표면적, 즉 인간의 생리적' 육신(2:28).
(싸) '인간적 유약성'을 나타내는 육신(6:19).
(2) '육신'에 대한 바울의 이해. 구약성경의 전통에 의하면 인간은 약하기는 하지만
악하거나 죄된 것으로는 취급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런 입장을 중립적
인 이해라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육신에 대해 이러한 중립적 이해에 머무르지 않는
다. 본서 2:28, 29절에서 발견되는 '육신'은 이런 단순한 중립적 이해를 벗어나서 이
제 가시적이며 임시적인 것들의 영역으로 표현된다. 이렇게 볼 때 육신은 첫째로, 일
시성의 특징을 지니며 둘째로는, 죄(罪)된 것이 된다. 따라서 육신은 반신국적(反神國
的)이며 이세상적인 영역의 구성 요소로서 죄많은 인간 본성의 의미를 갖게 된다.
이제 본서 7장에 이르러 바울은 본격적으로 육체 혹은 육신을 인간의 부패성과 죄악
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거론하기 시작한다. 5, 14, 18, 25절에 나타나는 '육신'의 의미
는 바로 인간성의 모든 약점과 무능, 무력, 죄악성을 말하며 '육신=죄 많은 인간 본
성' 즉 죄 많은 욕망의 자리와 그 매개체로 여거지는 인간 본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외에도 이런 의미의 '육신'의 개념이 나타나는 곳은 다으뫄 같다.
(가) 인간이 궁극적으로 신뢰를 두면 악하게 되어버리는 육신(갈 5:16, 17).
(나) 악한 행위를 산출하는 육신(갈 5:19-21).
(다) 정과 욕심을 지니고 있는 죄의 본성(갈 5:24).
(라) 썩어진 것을 거둠(갈 6:8).
(마) 사망을 가져움(15절;8:13).
(바) 하나님의 법에 대적함(8:7).
(사) 정욕에 몰두함(13:14).
(아) 중생치 못한 자는 육신의 욕심을 따라서 삶(엡 2:3).
(3) 바울이 권면하는 '육신'에 대한 성도의 태도. 바울은 신자들에게 육신에 대한
태도를 여러 번 권면하고 있다. 특히 본서의 중간 부분인 성화를 권면하는 부분에서와
본서의 뒷부분인 하나님의 의의 적용을 촉구하는 것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가) 육신대로 살지말라(8:12, 13).
(나) 육신을 죽여라(갈 5:24).
(다) 육신에 대항하라(18-23절).
(라) 육신의 일을 계획하지 말라(13:14).
(마) 육신을 좇지 말라(8:1, 4).
2. 율법의 본질과 기능(7:7-13)
"성도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 혹은 벗어났다"라는 교훈은 "그러면 혹시 율법 자체
가 나쁜 것인가?"하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 그자체는 악이 아니며
다만 기능상으로 선과 악의 분멸 기준이 되어 죄를 규정하고 폭로하고 심화시키는 작
용을 함을 설명한다. 즉 악하면 그 죄가 악한 것이지 그것을 규정한 율법이 악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은 악을 악으로 보여주는 선한 기능을 하고 있다(12절). 다만 성
도는 주님의 은혜로 이 율법의 적용을 받지 않게 되었다는 점에서 율법과의 관계에 있
어서 죽은 것뿐이다. 율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본문 이하에 있는 주제 강해를 참조
하기로 하고, 본장 뿐 아니라 본서 전체에서 오해의 소지를 없애고 내용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종종 사용되는 '메 게노이토' 용법과 바울의 구원론.죄론에서 사용되는
죄의 의인화(擬人化) 표현, 그리고 열번째 계명을 예로 들어 율법과 죄의식을 설명한
이유, 율법을 통한 죄의 지배에 대해서 간략히 고찰해 보기로 하자.
(1) '메 게노이트'(* , '그럴 수 없느니라') 용법. '메 게노이토
'는 본장에 두 번(7, 13절) 3장에 세번(3:4, 6, 31), 6장에 두 번(6:2, 15), 11장에
두 번(11:1, 11), 본서 전체를 보면 모두 아홉 번 나오는 표현이다. '결코 그렇지 아
니하니라'고 번역된 3:6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그럴 수 없느니라'로 번역되었으며
모두 바로 앞에 반어법적(反語法的) 질문이 함께 나타난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해 말하는 3장에서는 하나님의 참된 미쁘심(3:4), 하나님
의 의(3:6), 믿음과 율법과의 관계(3:31)를 오해없이 규명하고 강조하기 위해 '메 게
노이토'가 사용되었다. 6장에서는 2절과 15절 두 번의 '메 게노이토' 표현을 사용하여
'죄에서 떠나라'는 주제를 명확히 표현하고 있다. 본장에서도 바울은 율법의 기능으로
말미암은 율법의 본질에 대한 오해를 '메 게노이토'라고 두번이나 단호하게 자르고 있
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의 궁극적 구원을 선포하면서 바울 사도는 '메 게노이토' 용
법으로 선민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찬양하고 있다.
서신을 읽다가 자신도 모르게 빠져 들게 될 오해와 의문에 대해 '메 게노이토'라고
외치는 바울의 모습에서 우리는 복음에 대한 그의 뜨거운 열정과 자신의 소명에 대한
진지하고 치밀한 자세를 보게 되며, 이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명적 삶
에 태만한 스스로의 모습을 반성할 수 있다.
(2) 죄에 대한 의인화(擬人化) 표현. 본문에는 율법과 죄의 관계가 죄에 대한 의인
화 표현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죄가 기회를 탄다(8, 11절), 죄가 나를 속인
다(11절), 죄가 살아난다(9절), 죄가 내속에 거한다(17, 20절) 등의 표현이 그것이다.
이것은 콘첼만(H. Conzelmann)에 의하면, 에덴 동산 이야기에 나오는 뱀이야기의 잔재
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차치하고라도 죄에 대한 이런 표현은 죄를 우리의
삶 가까이에 존재하는 인격적 악의 세력으로 느끼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죄를 실
재(實在)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실존과 구원에 대해서도 무디기 쉬운데 이런
한 바울으 죄에 대한 의인화 표현은 우리로 하여금 죄의 추상성을 극복하도록 돕고 있
는 것이다.
(3) 율법과 죄의식을 설명하는 예로 열번째 계명을 든 이유. 종종 우리는 십계명의
각 계명들을 순서에 따라 중요성을 부여한다. 그래서 열번째 계명쯤은 그렇게 중요한
계명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왜 바울은 하필이면 율법과 죄의식
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열번째 계명을 예(例)로 들었을까? 열번째 계명도 똑같이 중요
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일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바울이 열번째 계명을
예로 든것은 그 순서 때문이 아니라 그 계명의 내용 때문이다. 열번째 계명은 살인이
나 간음 또는 도둑질 등 인간의 외적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내적인 마음가짐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열번째 계명은 다른 계명들과는 달리 인간의 보다 근본적
인 죄를 다루고 있다(마 5:28). 이런 사실은 마가복음 10:17-27에 나오는 부자 청년의
비유에서도 알 수 있다. 그 청년은 외적으로는 매우 도덕적이고 계명을 잘 지켰지만,
마지막 계명이 금하고 있는 '탐심'이 여전히 그의 마음속에 머물러 있었다. 예수께서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을 때 그는 크게 슬퍼하며 돌아갔다.
재물에 대한 탐심 때문에 그는 그 재물을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
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바울은 율법이 죄를 거울처럼 비추어 줄 때 죄의식을 느끼는
것으로 설명했다. 그리고 가장 깊이 숨겨진 인간 내면의 근본적 죄인 마지막 계명 '탐
심'을 예로 든 것이다.
(4) 율법을 통한 죄의 지배. 율법 자체는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 그러나 율법의
계명들은 사람들을 유혹하여 계명을 완성하면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부추
기기도 하나. 이와 같이 율법은 성취의 의미에서의 순중, 즉 성취를 목적으로 한 순종
을 요구한다. 그러나 바울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성취자로 보고 자신에게만 의존하려
는 것을 하나님을 대적하고 육체에 의존하려는 것이라고 본다. 바로 그런 자세가 죄의
본질이다. 따라서 율법에 대한 봉사는 죄에 대한 봉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 바울의 '율법'에 대한 이해. 지금까지 율법이라는 주제는 주로 소극적인 면에서
우리의 주목을 끌었다. 의는 율법을 행함이 없이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며, 율법
은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없다(1:18-3:31). 다라서 자칫하면 우리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율법 무용론이나 율법 폐기론에 젖게 된다.
그러나 바울은 구원사의 입장에서 율법에 접근한다. 그 접근은 율법 폐기론적 접근
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은 하나의 교리일 뿐 아니라 복음을 향한 적즉적 설명과 깨달음
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구원론과의 관계성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바울의 율법 이해에
대해 몇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살펴 보겠다. 이때 우리가 살피는 율법(* ,
노모스)은 구약성경의 율법 또는 율법으로 간주되는 모든 구약성경을 기리킨다. 왜냐
하면 바울은 헬라식으로 율법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성문법과 불문
법, 그리고 자연법과 율법을 대조하지 않으며 자연법의 개념을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
이다.
(1) 율법의 본성. 법의 본성은 주로 그 법의 입법자에 따라 좌우된다. 율법의 입법
자는 이사야 33:22;51:4;야고보서 4:12에서 밝혀진 대로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율법은
다음과 같은 본성을 지닌다.
(까) 율법은 하나님의 뜻이다. 모든 법은 입법한 자의 목적과 뜻에 준해 만들어지
나. 율법을 내신 이는 하나님이시므로 율법은 원래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다. 그래서
22, 25절에서는 율법을 '하나님의 법'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다)율법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12절).
첫째로, 율법은 거룩하다. '거룩'은 '구별하다', '다르다'는 뜻이다. 율법은 세상의
법이 아니고 사람의 법과는 구별된 하나님으 법이요, 하나님의 명령이요 하나님의 목
소리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일반적으로 그럴 뿐 아니라 세부적인 계명에 있어서도 거
룩하다. 왜냐하면 율법과 계명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세우시고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율법은 공의롭다. '의롭다'는 말의 근본적 의미는 인간과 하나님에게 그 권
리와 마땅히 드릴 바를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킨다
는 것은 그는 하나님과 인간들에게 바쳐야 할 모든 것을 드려야 하며 하나님과 인간에
게 완전한 관계 즉 의로운 관계를 맺어야 함을 말한다. 율법은 바로 그 의로움을 요구
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로, 율법은 선하다. 왜냐하면 율법은 사람을 선하게 하려고 제정(制定)되었고
그목적이 인간의 축복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은 인간 삶에서 죄를 만들
었고 죄를 드러나게 하였다.
하지(C. Hodge)는 이 세 가지를 설명하기를 '거룩'은 '순수함'을 의미하며, '의'는
'온당함'을 의미하고 '선'은 '자비'나 '행복'을 일으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따) 율법은 신령하다(14절). 이말은 율법이 영이신 하나님(요 4:24)께로 부터 온
것이므로 본질적으로 신령하다는 의미이며 아울러 율법이 '영적인 것'(공동번역)임을
알려준다. 여기서 율법이 '영적이다'라고 함은 그것이 인간의 외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인간의 내면적인 모습 곧 인간의 영적인 상태를 다루고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이후, 처음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을 때
그 율법은 인간의 외적인 행위에 강조점을 두고 있었다(출 19:1-24:18). 그러나 신명
기에서 선지자 모세가 다시 율법을 재론(再論)할 대에 그 율법은 인간의 마음과 관련
되는 영적인 면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영적인 면에 대한 강조는 하나님께 해한 사랑이
란 단어의 반복에서 볼 수 있다(신 4:37;6:4-6;10:12, 13;11:1;30:6-20). 뿐만 아니라
본 서신 13:10은 율법이 단순히 인간의 외적인 행위 면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 그리고 인간과 인간 상호 관계에 있어서 본질적인 면을 다루고 있음을 단적으
로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성도들은 율법을 대할 때 그것이 인간의 영적 상태에 대하
여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율법으로부터 큰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2) 율법의 목적과 기능.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이러한 율법을 주셨을까?
여기에는 '지키라고 주셨다'라는 평면적이고 일차원적인 목적보다는 훨씬 더 심오한
구원사적 목적이 있으며 복음으로 향해 나아가게 하는 율법의 목적은 율법의 실제적인
기능의 활성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까) 인간게게 율법을 주신 목적.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
기 위함이요(신 6:5;수 22:5)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을 '생명에 이르게'하고 축복의
길로 인도하기 위함이다(신 28:1-14;시 31:23).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
의 참된 의미를 망각하였기 때문에 도리어 사망에 빠지게 되었다(3:23). 그래서 율법
은 율법의 이 목적을 이루어가는 과정으로서 인간의 죄를 폭로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고백할 수 있게끔 이끄는 과정적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다) 율법의 기능. 율법의 기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악을
억제하는 일이다. 디모데전서 1:9, 10에서 바울은 이에 대해 언급하나. 칼빈도 "율법
의 한 가지 기능은 율법의 무서운 위협을 듣지 않는다면 선과 악에 대해 무관심하게
행동할 사람들이 어떤 행동에 대한 형벌을 두려워하며 자가을 억제시키게 하는 것이
다"라고 말하였다. 이때 율법은 마치 잡아매는 밧줄같아서 거친 파멸리 방향으로 사납
게 날뛰는 것을 억제한다. 또 다른 율법의 기능은 죄를 죄로서 그리고 죄인을 죄인으
로서 드러내는 것이다. 즉 율법은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인간
의 마음속에 숨겨진 위선을 벗겨버리고 그 부패함을 보여주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역할을 한다.
(a) 죄를 깨닫게 한다(3:20).
(b) 범죄를 더하게 한다(5:20).
(c) 죄를 알게 한다(7절).
(d) 사망에 이르도록 한다(9-11절).
(e) 죄를 드러낸다(13절).
이러한 다섯 가지 기능들은 모두 죄를 노출시키는 기능들이다. 곧은 자(尺)가 있어
야 구부러진 것을 발견하고, 거울이 있어야 우리 얼굴의 흉터와 더러움을 알 수 있듯
이 율법에 비춰 비교해 보아야 비로소 우리들은 무엇이 죄고,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
지, 내 생활 속에 어떤 죄가 냄새를 풍기고 있는 지를 발견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급기야 수렁에 깊이 빠져 드디어는 죽음밖에 달리 길이 없는 자신을 발견하도록 하는
것도 율법의 기능이다. 이것을 종합하면 죄의 성립 작용->탐심 작용->죄의 심화 작용
->우리를 사망시키는 작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은 율법의 본질과 율법의
참 목적을 잊지 않느나. 그래서 바울은 마지막으로 율법의 기능을 한 마디로 '몽학 선
생'이라고 갈라디아서 3:24에서 언급하는 것이다. 이 몽학 선생(蒙學先生)은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놀라며 비참해 하고 절망하며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생명의 그리
스도에게로 이끌어 준다. 그러나 율법이 우리의 몽학 선생을 담당하고 우리를 일깨워
이끄는 그 과정은 생각처럼 간단한 일도 쉬운 일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전인간의
실존의 운명을 건 치열한 투쟁이다. 어떤 행위를 이루어 내고 자신으 의를 증명해 내
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과 무능을 확인하고 인정한 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께로 온전히 되돌아가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따) 율법의 궁극적 목적. 앞에서 살펴본 율법의 여러 가지 기능에 의해 인간은 자
신이 서 있는 위치, 늑 하나님과 충돌하고(7절 이하) 자기 자신과도 충돌하는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았다. 그러나 율법의 궁극적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자
신의 악함에 대하여 알고 실망하는 자리에 이르도록 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의 죄악을 깨달음으로써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데 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하여 우리들의 죄를 밝히시는 일에 한층 심오한 목적이 있는
것이다. 바로 그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 죄로부터 깨끗해지기 위해 유일
한 길인 그리스도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우리 곁에 준비하신 율법
이란 거울은 사람들이 자신의 얼굴에 묻은 때와 더러움을 보고 그것을 씻어버리기 위
해 비누와 물을 찾아갈 수 있도록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그리스도께로
돌아섬'은 바로 율법의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참 생명과 축복이 이루어짐 이
기다하다.
(3)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그리스도. 율법에 대한 바울의 비판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율법시대의 끝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절정에 달한다(6:14;갈 3:13,25;4:5;5:1). 그러나
율법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사람들에게만 그 효력이 중단된
다(4:6;갈 2:19;골 2:20). 이처럼 죽고 부활하는 경험은 세례에서 상징화되었다(6장;
갈 2:20). 그러나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10:4)이란 말은 율법이 끝났다는 것을 의
미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 목적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는 율법이 지향한 목표였으며(3:21), 그리스도가 율법을 완성한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를 감추었던 베일인 율법은 벗기워졌다. 율법과 그리스도의 진정한 견줌은 다
음과 같다.
+-----+-----------+--------------------+---------------------------------------+
|구 분| 율 법 | 그리스도 | 관련 성구 |
+-----+-----------+--------------------+---------------------------------------+
| 능 | 무력 | 하나님의 | 3:20, 21, 27, 28;4:14;8:3, 4;9:31, 32;|
| 력 | | 능력 | 갈 2:16, 21;3:2, 5, 11, 19;5:4;빌 3:9 |
+-----+-----------+--------------------+---------------------------------------+
| | | 진노와 저주와 | 3:21-25;4:15;5:1-11, 20, 21;6:22;7:7- |
| 죄 | 정죄 | 죽음에서 구원 | 13;8:1-14;갈 1:3, 4;3:10, 13, 21, 22; |
| | | | 고전 1:30;3:7;15:25-27;고후 5:17-19 |
+-----+-----------+--------------------+---------------------------------------+
| 멍 | 속박 | 자유로운 봉사 | 6:18-22;8:2, 21;갈 3:23;4:1-7, 21-23; |
| 에 | | | 5:1-3 |
+-----+-----------+--------------------+---------------------------------------+
3. 성도와 죄와의 투쟁(7:14-25)
바울은 율법의 요구는 선함과 거룩함이지만 그 요구와는 정반대로 향하게 되는 자신
으 내면 세계를 투시하고서, 두 자아(自我)의 비유를 통해 마침내 죄와 진정한 자아를
구분시키기에 이른다. 비록 궁극적인 구원을 확신하지만, 육신의 제약하에 있는 이 모
든 갈등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 곧 생명의 성령의 법에 자신을 전적으로 의탁시킴으로
써 능히 극복되어질 수 있다고 하는 승리의 희망으로 귀결되어진다.
본장의 특징인 1인칭의 경험 서술과 '오호라' 고백에 대해서는 주제 강해를 참조하
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바울의 인간 이해와 프로이드(S. Freud)의 인간 이해를 간략히
비교한후, 속사람과 육의 투쟁, 본문에 나타난 바울으 갈등과 고민의 내용 및 그 의미
를 살펴보기로 하자.
(1) 바울과 프로이드의 인간 이해 비교. 바울과 프로이드(S. Freud)는 신학자와 일
반 심리학자라는 점에서 엄청나게 다르다. 즉 프로이드는 인간이 무의식과 본능을 더
많이 인식하면 할수록 자유로운 인간이 된다느 인본론에 기초하는 반면, 바울은 죄에
대한 인간의 연약함과 절대적 무능력을 전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주는
성령의 법만이 죄의 법을 극복한다고 분명하게 밝힌다(8:2). 그러면 바울과 프로이드
의 인간 이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까) 프로이드의 인간 이해. 프로이등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의식의 발견이
다. 그는 인간의 내면을 초자아(Super-ego), 자아(Ego), 본능(Id)으로 구분하였다. 그
에 의하면 초규범이라고 한다. 그리고 인간의 본능인 이드는 인간의 도리나 양심의 소
리와는 무관하게 타락과 야수적(野獸的)인 성향을 말하며 자아는 초자아와 본능을 오
가는 인간의 외면이다.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
| | |
| 자 | 초 자 아 |
| | |
| +- -- -- -- -- -- -- -- -- -+
| | |
| 아 | 본 능 |
| | |
+-------------+---------------------------+
그림에서 점선으로 표시했듯이 초자아와 본능의 경계는 표상되는 자아의 발현에 따
라서 유동적이다. 즉 자아가 초자아의 레이다에 걸리지 않을 최고의 본능적 쾌락으로
나아가면 짐승적이요 감정 지배적인 성향을 보이는 반면, 인간의 도덕이나 이성의 소
리인 초자아의 통제를 받을 때에는 본능을 극복하는 성향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
(다) 바울의 인간 이해. 본문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새생명을 얻은 성도가 성화
의 삶을 경주하는 내면적 과정을 묘사하고 있는 바울은 인간을 더욱 총체적이며 통찰
력있게 이해한다. 그는 인간을 지배하는 세 종류의 법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하나님의 법이다. 이 법은 의롭고 선하고 거룩하며 신령하다. 이 법은 우리
밖에 혹은 우리 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하나님의 법은 타락한 인간에게 여러
가지 요구와 의무를 만들어 그 타락된 사람을 드러낸다(7-11절).
둘째는, 마음의 법이다. 하나님의 법이 우리의 위와 밖에서 우리에게 요구를 하는
반면 마음의 법은 우리 안에 있다(22, 23절). 우리 안에 있는 이 법은 하나님의 법과
부합하고 그 요구에 반응하여 그 법을 지키려고 노력한다(18, 21, 22절).
셋째는, 죄와 사망의 법이다. 죄의 법은 우리의 타락된 몸인 육신의 지체 안에 있다
(17, 18, 20, 23절). 그 법은 언제든지 마음의 법과 싸워서 사람을 사로잡으려고 한다
(23절). 죄의 법은 마음의 법이 하나님의 법의 요구에 반응할 때는 가사(假死) 내지는
동면(冬眠) 상태이다. 그러다가 마음의 법이 하나님의 법에 반응하지 않으면 예외없이
죄의 법은 우리를 사로잡는다.
이상에서 우리는 바울과 프로이드의 인간 이해를 살펴보았다. 바울과 프로이드는 인
간의 존재 목적과 이에 따른 삶의 양식 면에서 근본적 차이를 지니기 때문에 사실상
양자의 '인간론'을 비교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살펴보는
것은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인간의 타락과 부패,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와
생명이라는 신학적 이해에서 진정한 인간의 이해가 얻어진다는 사실을 확고히 함에 있
다 하겠다.
(2) 속사람과 육의 투쟁. 흔히 본문의 내용을 영육간의 투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영 즉 속사람과 육의 투쟁이 아니라 속사람과 육에 깃든 죄와의
투쟁이다. 다시말해 그것은 신앙과 율법과의 투쟁도 아니고, 신앙과 율법에 의해 움직
이는 죄와의 투쟁이다. 이 관계를 그림으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뒷면 그림 참조>.
(3) 본문에 나타난 바울의 갈등과 그 의미. 이에 관한 신학적 배경, 경험시기, 여러
가지 교훈은 본문 주제 강해 '바울의 오호라 고백'을 참조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본
문 자체의 내용을 분석해 보기로 하자.
첫째로,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14절)라는 고민이다. 즉 아는 것 가지고는 해결되지 않는 고민, 바로 율법에 대해서
알기는 많이 알지만 죄의 노예가 된 육신으로는 아는대로 행할 수 없는 갈등이 바울에
게 있었다.
둘째로, "곧 원하는 이것은 행치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15절)라
는 고민이다. 소원대로 되지 않고 오히려 원치 않는대로 죄만 행할 뿐인 갈등이 바울
을 짓눌렀다. 원하는 바를 위해 노력하지만 우리의 삶은 오히려 죄투성이 이다. 이 얼
마나 절망스러운 갈등인가!
셋째로,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18절)라는 갈등이다. 알고 원하고 노력하나 능력이
한계에 부딪힌 고백이다.
결국 주제 강해에 나오는 대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외치
며 울어도 못하고, 힘써도 못하고, 참아도 못하며, 지식으로도 소원으로도 능력으로도
안 되는 '사망의 몸으로부터의 건짐'의 역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
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갈등 속에서 자신의 무능을 온전히 고백하고 구원의 손길
을 요철할 때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우리의 실존(實存)에서 우리를 구하신 찬송받으시
기에 합당한 분으로 우리 앞에 서 계신 것이다.
* 바울의 '오호라' 고백.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고백은 바울 내부의
극렬한 갈등을 절규하는 말이다. 이사야 6:5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의 죄를 깨달았
을 때 '오호라!'라고 절규하였다. 또한 계시록 3:17에서 라오디게아 교회의 환상을 묘
사하면서 요한 사도는 '곤고하다'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이 두
가지 비탄의 표현을 한꺼번에 사용하면서 자신을 '사망의 몸'이라고 절규하고 있다.
그러면 이극도의 절망과 고통은 바울에게 있어서 어느때의 경험일까? 또 성도들은
언제 이런 절규를 하게 될까? 그 시점에 따라 이 고백의 의미와 교훈은 달라진다. 이
문제를 살펴봄으로써 바울의 신학적 의도와 구원사적 의미를 발견하도록 하자.
(1) '오호라' 고백의 경험 시점. 이 고백이 일반적 사건이 아니라 바울 자신이 직접
겪음으로써 뼈 속 깊은 곳으로부터, 영혼의 심연으로부터 터져나오는 울부짖음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이 고백이 바울의 회심 이전인지, 아니면 회심 이후인지
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뉜다. 두 가지 이견을 살펴보도록 하자.
(까) 회심 이전의 경험이다. 초대 교회 당시부터 증세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학자들이 이 의견에 동의한다. 어거스틴(Augustine)도 초기엔 그렇게 주장했으며
불트만(R. Bultmann), 다드(C. H. Dodd), 큄멜(W. G. Kummel), 리델보스(H. R.
Ridderbos), 위트니스(Witness)등이 이 고백은 그리스도로부터 멀리 있던 사람, 즉 율
법 아래서 절망적인 투쟁을 벌이던 바울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들에 의하면 본서 6장에서 8장까지를 주의깊게 읽어보면 본장 특히 24절에 나오는 '오
호라' 고백이 바울의 구원받기 전의 경험임이 금방 발견되어진다고 한다. 바로 본서
8:1의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말씀이그것을 증명해 준다고 한다. '오호라' 고백은 그 당시 바울의 경험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다음 장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
죄함이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호라' 고백의 경험은 바울이 그리스도 안
에 있기 전 즉 구원받기 전의 경험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6장과 8장 사이에 자신의 구원받기 전의 경험을 기술했는가? 그
것은 바로 '우리가 더 이살 율법아래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 율법 아래에서 자기의 의를 찾으려고 노력하던 바울의 결론이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나는 사망의 몸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의
구원받기 전의 경험을 들려주면서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 없으니 율법을 지켜 자신의
의를 세우려 하기보다는 은혜의 자리로 나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만
날 것을 당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 회심 이후의 경험이다. 그러나 신앙에 들어선 자는 죄의 용서를 받았으므로
이런 심각한 죄와의 싸움은 없다고 주장하는 첫번째 의견은 두 가지 이유에서 반박되
고 있다.
첫째, 본서를 체계있는 논문으로 인정하는 바 논술의 순서로 보아서도 바울의 '오호
라' 고백을 구원받기 이전의 경험으로 보는 것은 타당치 않다. 왜냐하면 율법에 의하
지 않고 믿음에 의해 의로 인정되는 '이신 득의'는 5장에서 확립되었다. 6장부터는 의
로 인정함 받은 자가 현실에서 의롭게 살아가는 문제 즉 성화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다시 칭의 이전의 경험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논술의 순서로서 부자연스럽다.
둘째, 율법의 행위에 의하지 않고, 믿음에 의해서만 의로 인정받는다는 원칙을 입신
(入信)의 경험에만 국한시키고 입신 후에 생활과는 무관하다는 식의 해석은 지나치게
단편적이다. 물론 신앙에 의해 죄는 용서받는다. 그러나 육을 입고 살아가는 우리를
죄는 여전히 노리고 있다.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우리를 탈환(奪還)하여 다시 죄의 포
로로 만들기 위해서 죄는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리고 죄는 율법을 그 수단으로 계속
이용하는 것이다.
바울은 회심 이전에는 자신의 곤고함을 경험할 수 없었다. 오히려 영의 눈이 밝아져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깨달았을 때 그는 자신에게 절망하고 자신의 삶을 '오호라 곤고
하구나'라고 고백하며 영적 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의 '오호라' 고백은
회심한 이후의 성결해 가는 과정 속에서 율법을 이용하여 자신을 공격하는 죄와의 싸
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2) 성도에게 있어서 '오호라' 고백의 경험 시점. 물론 바울의 경험 시점과 우리의
경험 시점을 그대로 일치시켜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바울의 경험 시
점과 일반 성도들의 경험 시점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성도들 주에도 개
인차가 있을 수 있다. 실제로 위트니스(Witness)는 '오호라' 고백은 '바울의 경우 구원받기 전의 경험을 기술하지만, 그것은 또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구원받은 후의 경험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그 시점을 달리했다. 또한 미톤(C. L. Mitton), 로빈슨(John A. T. Robinson) 등은 '일종의 타협적인 주장 즉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간에 도덕적으로 열심인 어떤 사람의 체험에 대한 묘사이다'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이에 '오호라' 고백의 성도들의 경험 시점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까)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서의 고백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아래와 같다.
첫째로, 초대 교회의 희랍 교부들 사이의 일반적 견해이다. 둘째로, '오호라' 고백을 불러일으키는 '죄 아래 팔렸도다', '육신에 속하여'와 같은 표현들은 성도에 관한 묘사라기 보다는 구원받지 못한 자에 대한 묘사로 더욱 적절하다. 셋째로, 만약 8:1에 나오는 '이제'라는 말이 통상적인 뜻을 의미한다면 바울의 '오호라' 고백은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 대한 고찰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로, 구원받은 경험을 논하면 서 '오호라' 고백 이전의 서술 과정에 성령과 심지어 그리스도마저 빠져 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함 받기 이전의 상태에서 바울과 같이 자신의 의를 추구하다 지치고 무너진 채 '오호라' 고백을 하는 것이다.
(다)구원받은 성도의 성화 도중의 고백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를 살펴보자. 첫째로, 개혁 교회의 신학적 기초라 할 수 있는 어거스팅의 견해이다. 둘째로, 헬라어동사의 시제를 살펴보면, '오호라' 고백문에는 현재 시제가 사용된다. 즉 '오호라' 고백은 성도가 칭의 받은 후 지금부터 앞으로 지속될 고백임이 현재 시제를 통해 암시되고 있다. 셋째로, 본서 전체 문맥의 진행 과정을 살펴볼 때, '오호라' 고백이 속한 본장은 구원받지 못한 상태를 넘어서서 성화의 과정에 있는 성도들을 향한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오호라' 고백은 구원받았으나 이 땅에서 생명을 마칠 때까지 죄와 싸우며 살아가야 하는 성도의 끊임없는 고뇌를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성화란 결코 일정수준 이상이면 만족되는 그런 완성의 개념이나 삶이 아니라 끊임없는 과정이므로 '오호라' 고백은 구원 받은 성도가 세상 끝날까지 계속해서 감당해야 할 고뇌와 부르짖음이다.
이렇게 볼때 '오호라' 고백은 죄에 지고 말았다는 단순한 절망적 결과가 아니라 실로 죽음에까지 처하는 극한 적 영적 투쟁의 고뇌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결국 이런 고뇌의 목적은 보다 장성한 분량의 거룩한 삶을 이루어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오호라' 고백을 통해 표출되는 편재적 고뇌는 오늘을 사는 성도들의 고뇌이며 8장에 이어질 미래적 승리의 확신을 위한 서곡인 셈이다.
(3) '오호라' 고백의 의미와 교훈. 앞에서 살펴본 두 가지 상태는 반드시 흑백 논리로 한 가지를 버리고 다른 하나만을 취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실지로 '오호라' 고백의 출발점이나 그 고백의 기본 내용이란 언제나 궁극적인 존재자이며 우리의 구속주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완전 무능력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겐 자 자신을 의롭게 할 그 어떤 힘도 능력도 없습니다. 나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오호라' 고백은 칭의 받기 이전에도, 칭의 받은 후 성화되어가는 과정에서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겸손한 신앙 자세이다. 우리의 몸 안에 거하는 한 죄와의 싸움은 불가피하다. 인간에게 있어서 자기의 행위나 자기의 힘에 의해 자신이 성결해지는 일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 자기 자신에게 그런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이미 그만큼 신앙의 길에서 죄의 곁길로 들어선 셈이다.
이제 종합적으로 생각해 보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는 바울의 고백은 어떤 의미일까? 첫째로, 그것은 자신의 무능력을 알고 깨달아 외치는 외침이다. 둘째로, 자신의 죄로부터 헤어나올 수 있게하는 해방자를 갈망하는 외침이다. 둘째로, 자신의 죄로부터 헤어나올 수 있게 하는 해방자를 갈망하는 외침이다. 셋째로, 해방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 준비가 다 되었다는 신호이다. 이 경우 '오호라' 고백은 구원받기 이전의 상태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외침이다. 더 나아가 넷째로, 이 고백은 단순히 죄로 인한 정죄와 심판의 두려움에 대한 고통의 절규가 아니요 하나님의 법을 이루지 못한 고통의 부르짖음이며 간구이다. 이렇게 해서 이 '오호라' 고백은 또한 구원받은 성도가 성화의 부르짖음이며 간구이다. 이렇게 해서 이 '오호라' 고백은 또한 구원받은 성도가 성화의 과정에서 계속 주님을 가까이 모시고 의탁하는 외침이기도 하다. 거듭나기 전에 부르짖은 우리의 '오호라' 고백이 의의 세력을 누르는 죄의 세력에서 구원해 달라는 기도라면, 거듭난 이후의 '오호라' 고백은 죄의 세력을 누르고 지배하시는 성령님께 온전히 나 자신과 삶 전체를 맡긴다는 기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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