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본절은 본장이 은혜와 죄의 관계를 설명하는 5:20, 21 내용을 이어 받고 있음을 나타낸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 5장에서 바울이 주장한 내용은 '죄에 거하는 문제'가 아니라 '죄를 깨닫는 문제'였다. 율법을 통하여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죄가 드러나게 됨에 따라 인간의 회개는 더욱 깊어지며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느끼게 된다. 그 당시 이러한 바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죄에 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으며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자들은 기독교 진리의 깊은 내면을 깨닫지 못하고 다만 '수박 겉핥기'식의 표면적 지식을 가지고 애매하고 오해하기 쉬운 문제에 관심을 쏟는다. 여기서 '죄에 거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에피메노멘 테 하마르티아'(* )는 두 가지로 분석된다. 첫째, 이 문구가 현재 능동태 가정법을 띤 것은 그 내용이 실현 가능성이 없음을 나타낸다. 둘째, 이 문구는 '죄와 더불어 산다'는 의미로 죄와 더불어 전혀 투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러한 상태에 빠진 자들은 자기 욕구 충족을 위해 그리스도를 섬기는 체하는 자들이다. 다시 말해 이런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色慾)거리로 바꾸는 자들(유 1:4)이다. 사실상 칭의의 교리 자체를 조금이라도 오해한다면 그것은 죄에 대한 저항(抵抗)을 약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구원의 전과정이 인간의 행위를 배제시키고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강조하게 됨으로 구원 교리도 역시 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약화시킨다. 이러한 이유로 성도는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어 부도덕이 판을 쳐도 교리적으로 그것을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고전 5, 6장).

=====6:2
 그럴 수 없느니라 -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라는 1절의 가상적인 질문에 대한 단호한 부정의 대답이다. 바울은 악을 그리스도의 은혜로 가장하고자 하는 사악한 생각이 매우 모순됨을 경고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죄를 허용하는 면허장이 아니라 성도의 의를 회복시키는 특허장이다. 한편 바울은 이와 다소 다른 문맥에서(3:8, 9) 본문과 비슷한 어투로 대적들의 주장을 공박한 바 있다. 바울이 칭의론(稱義論)을 가르치던 당시, 그의 가르침이 율법의 윤리적 요구에 대한 무관심을 조장함으로써 자유 방임 사상을 만연시키지나 않을까 하고 우려했던 사람들이 때때로 그러한 종류의 반론을 제기했던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바울의 답변은 짧은 기간에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수년간의 깊은 명상 끝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본다. 죄에 대하여...
더 살리요 - 바울은 이제 성도의 편에서 논증을 전개한다. 죄에 대하여 죽은 성도는 더 이상 죄의 세력에 지배받지 않는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흘리셨고 이 속죄로 말미암아 성도는 하나님과 화목(和睦)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거룩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만일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에 죄가 더욱 왕성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전도(顚倒)시키는 행위이다(Calvin). 혹자는 본절의 '죄에 대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 하마르티아'(* )를 '죄로 인하여'(on account of sin)로 해석한다(Michaelis, Cramer, Storr, Flatt, Nitzsch). 그러나 이는 타당하지 않다. 그러한 해석은 본절의 문맥상 바울이 의도하는 주장과 정반대되는 것이다. '죄로 인하여 죽었다'함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고 죄와 더불어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이요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악된 삶을 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交通)하는 삶을 산다는 의미인 것이다. 한편 바울은 본절에서처럼 성도가 '죽었다'는 선포를 종종한다(11절 ;7:4, 6;갈 2:19;골 2:20;3:3). 이러한 성도의 죽음은 죄에 대한 죽음이요, 율법에 대한 죽음인데 실제적으로 죄의 종이었던 우리 옛 사람의 죽음이다. 이에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갈 2;20)라고 고백했다. 이와 같은 체험적 고백이야 말로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와 동시성을 갖는 것이다. 성도가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의 신분을 갖고 있으면서 또 죄에게 종노릇한다는 것은 분명히 모순이다. 그러나 여기서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해서 죄의 세력을 전혀 의식하지 않게 되거나 죄를 결코 범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7장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죄와 투쟁하게 된다는 사실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의 세력권을 벗어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가 초래하는 엄청난 불행들에 대하여 죽었으며 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이다(6, 14, 16, 17절 주석 참조).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바울은 여기서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을 세례받음과 결부시키고 있다. 여기에 언급된 세례는 단순한 의식(儀式)이나 성례전(聖禮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하는 은유적 의미를 갖는다. 세례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은 다른 구절에서도 본절과 비슷한 연관성을 지닌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예컨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 것을 계기로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게 된 경우가 그러하다(고전 10:2). 그들은 처음으로 모세와 연합하였고, 모세의 지도권을 인정하였으며, 또한 그들이 모세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스도께 속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것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함께 죽었다는 의미이며, 함께 죽었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죽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세례 자체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만 가능하며(고전 12:13), 이것은 성도의 신령한 체험이라느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세례와 성찬 자체에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이 있는 것처럼 가르침으로써 교리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성도들이 그의 죽으심에 세례받아 연합되었다는 것은 성도들 역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의미이다.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더불어 함께 죽은 자된 성도들은 죄에 종노릇하던 옛사람이 죽었으므로 계속 죄에서 종노릇하는 신분에 머물려고 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례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부각시킴으로써 바울은 많은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더욱 처절하게 회개하게 되며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깊이 느끼게 된다고 하는 가르침의 잘못을 지적해 주고 있다.

=====6:4
 그러므로 - 이 접속사는 1-3절까지의 진술에 대한 결론을 유도해 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특히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도 연합한 자들이라는 3절의 진술을 본절에서 더욱 진전시키고 있음을 암시한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함께 장사되었나니 - 침례교도들은 본 구절이 물에 잠기게 되는 침례에 대한 영적 의미를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본절은 고전 15:3, 4과 같이 침례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이 갖는 영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에 대한 증거는 5절 이하에서 계속되는 바울의 설명에서 더욱 분명하게 밝혀진다. 따라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 그리고 부활하심을 '세례'라는 용어와 결부시킨 것은 성도와 그리스도의 영적인 연합과 인격적인 연합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Murray). 그러나 분명히 인식해야 할 점은 세례받음 자체가 그리스도와의 생동적인 연합을 성취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비록 잠깐 동안의 일이지만 세례를 받을 때 물속에 몸을 잠그는 일을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葬事)되는 일로 묘사하였다. 여기서 '장사된다'(* , 쉬네타페멘)함은 자연적인 출생으로 맺어지는 아담과의 관계에 의해 지배되던 옛 사람(엡 4:22;골 3:9)의 종말을 상징한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활을 하기 이전의 거듭나지 못한 본성과 행동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의미한다(갈 5:24;골 2:12).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 어떤 사람들은 '영광'을 '장엄한 권능'으로 해석한다(Hendriksen, Harrison, Barmby, Calvin, Black, Phillips, Erdman, Stott).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의 전능하심'(Omnipotence)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란 용어를 '하나님의 장엄한 권능' 정도로 해석하는 것은 '영광'이란 단어가 지닌 의미를 만족스럽게 드러내었다고 볼 수 없다. 본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가 새 새명 가운데 사는 것에 대한 수단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가 새 생명 가운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근거가 된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영광'이란 용어 자체가 지닌 포괄적인 뜻을 드러낼 수 없게 된다.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 바울은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이 '죄에 대하여 죽는 것'만이 아니라 나아가 '새 생명 가운데 사는 것'까지 포함됨을 가르치고 있다. 이 말은 성도가 단순히 죄의 영역에서 벗어난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의(義)의 영역에서 살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씀과(요 10:10) 잘 조화를 이룬다. 그리고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한다'는 말은 '새 생명의 원리에 의해 지배를 받으며 그 가운데서 산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은혜를 더하게 하기 위해 죄가운데 거하자'라고 가르치는 자들은 분명히 바울의 복음을 오해한 자들이다.

=====6:5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 블랙(Black)은 본 구절을 '그리스도인 들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같이 희생적인 삶을 살 수 있을 만큼 성장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공유하게 된다'고 해석한다. 머레이(Murray)도 이 해석에 동의한다. 이 해석은 '연합한'이라는 형용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쉽퓌토이'(* )가 '함께 심겨진' 또는 '함께 자라난'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나 본장 어느 곳에서도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이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삶에까지 자라난다는 의미를 암시하고 있는 구절은 없다. 따라서 본절의 '쉼퓌토이'는 이미 바울이 앞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성도가 세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었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해 주는 용어일 뿐이다(Hendriksen, Barmby).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 '되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소메다'(* )가 미래 시제인 것은(shall be, KJV) 본절에서 바울이 장래에 일어날 성도들의 신체상의 부활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많은 학자들은 생각한다(Tertullian, Chrysostom, Ambrosiaster). 헬라어의 미래 시상은 앞으로 일어날 어떤 일을 언급하는 것이지만, 그 외에도 경우에 따라서는 논리적으로 또는 불가피하게 일어날 현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후자(後者)의 의미를 살려 '에소메다'를 RSV는 '확실히 되리라'(shall certainly be)고 해석하였다. 또한 몇몇 주석가들은 본절의 미래 시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함으로써 당연히 초래되는 결과적 사실을 암시한다고 주장한다(Murray, Meyer). 따라서 본절은 이상에서 언급한 두 가지 견해를 모두 포괄한다고 봄이 타당하다. 그러나 심사 숙고해야 할 사항은 바로 앞절에서 언급된 그리스도의 부활이 몸의 부활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가 부활했던 것과 똑같이 우리도 그렇게 부활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에게 속한 자들에게 허락되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과 연관시켰다. 그 삶은 장래 뿐만 아니라 현재에 속한 것이다.

=====6:6
 우리가 알거니와 - 여기서 '우리'는 바울과 유대인이 아니라 바울 자신과 그의 복음을 들은 자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그의 복음을 들은 자들을 단순히 로마에 있는 성도들만으로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 즉 바울은 진술하고자 하는 대상으로 복음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가진 자들 모두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우리 옛 사람 - 바울은 '사람'을 두 종류로 구분하여 '옛 사람'과 '새 사람'이라고 칭한다. '옛 사람'은 영적인 죽음 아래서 신음하며(엡 2:1;골 2:13) 본질적으로 마음이 악하여 죄에게 종 노릇하는 사람이며(6절), 하나님에게서 떠난 사람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 즉 '새 사람'에 대해서 바울은 이미 1:18-3:18에서 자세하게 언급하였다. '옛 사람'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죄를 지어도 그 죄로 인해 아무런 갈등을 느끼지 않으며, 바람에 밀려 다니는 돛단배와 같이 죄의 세력에 따라 이리 저리 끌려다닌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 이 표현은 3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합하였다는 뜻이다. 동시에 이 말은 우리가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낡은 질서에서 떠나 의와 평안이 있는 새로운 삶의 영역으로 들어갔다는 의미도 된다(갈 2:20). 결국 이 말씀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더 이상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생활하는 삶의 변화를 가리킨다(고후 4:11;골 2:20).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 옛 사람이 죽은 것과 죄의 몸이 멸하는 것은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이러한 체험을 한 사람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한다. 비록 성도가 현재의 삶 속에서 죄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나 신분상으로 이미 죄의 몸은 죽은 상태에 놓여 있다.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건은 반복적인 사건이 아니라 성도에게 단일회적인(once for all)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엡 4:22)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고 권면한 것은 무슨 의미인가 ?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 생명을 소유하게 되는 연합의 체험으로 '거룩한 백성'으로 불릴 수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성도의 현재적 삶은 항상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 속에 머무르고 있다. 이에 바울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고 권면했던 것이다. 이 권면은 한 마디로 신분에 걸맞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라는 의미가 된다.

=====6:7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 여기서 하나의 난제(難題)가 있다. '죽은 자'가 그리스도를 지칭하는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믿고 그와 함께 십자가의 죽음을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비록 본절이 단수로 언급되었으나 그리스도가 죄에서 벗어날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또 다른 근거는 본 구절이 일종의 일반 명제로서 할라카(Halakah)에 언급된 랍비적 가르침이라는 사실이다. 바울이 유명한 유대인 교법사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교육받았고(행 22:3) 랍비의 지식과 유대인 전통에 정통(正統)했던 점을 미루어 보아 본절이 어떤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기보다는 일반적인 명제로 언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유사하게 베드로도 일반 명제 형식을 빌어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벧전 4;1)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실제적인 예로 스코틀랜드에서는 사형 집행을 받은 사람은 '의롭게 되었다'고 선언한다고 한다. 한편 '죽은 자'와 연관해서 혹자는 '성도'는 죄를 지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이미 죽으신 그리스도와 같이 성도는 모든 죄와의 관계에 있어서 죽었으므로 죄에 대해 무감각한 상태에 있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Vaughan, Liddon). 그러나 그리스도나 성도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무감각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의 세력, 죄의 영역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 본절은 칭의의 순서적 과정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의 죄씻음이 이루어짐을 믿고 회개하는 자에게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이 이루어지고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다. 칼빈(John Calvin)은 본절이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한다고 지적하면서 재판관의 판결로 사면(赦免)을 받은 죄수가 그 순간 기소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듯이 성도가 죄의 노예 상태에서 자유의 몸이 되는 것도 매우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설명하였다. 한편 유대인들은 본절을 '사람이 육체적으로 죽으면 그것으로 율법의 의무에서 해방을 받는다'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날에 자기의 죄를 책임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벧후 2:10).

=====6:8
 본절은 내용상으로는 3절과 5절의 내용을 반복한 것이지만 무엇보다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이 인격적이고 생명적인 연합일 뿐 아니라 영원한 연합임을 보여주고 있다(Murray).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3절에 언급된 바,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을 가리킨다. 바울이 여기서 다시 이 말씀을 반복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성화(聖化)의 생활이 부과됨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 여기서 '살 줄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제소멘'(* )은 1인칭 복수 미래형으로서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우리가 살 것이다'(we shall live;KJV, RSV)이다. 이는 5절 주석에서 언급한 것처럼 단순히 장래적인 소망 곧 부활의 소망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한 성도는 또한 그리스도의 살으심과 연합하여 반드시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예하게 된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곧 성도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 생명을 얻게 되니 이 땅에서 소유케 된 생명(* , 조에)은 장래에 일어난 구속 사건의 모든 결과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쉰제소멘'은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시 일어날 성도의 부활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죽은 성도가 이 땅에서 영원한 나라의 생명을 소유하며 산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영원한 생명은 그리스도의 재림시 부활 생명과 긴밀한 연관을 맺는다. 한편 본절에 '믿노니'로 번역된 헬라어 '피스튜오멘'(* )은 1인칭 복수 현재 직설법으로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확실성 있는 견고한 믿음을 가리킨다. 이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정(情)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성도는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살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함을 나타낸다.

=====6:9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 '다시...아니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케티'(* )는 '절대로...아니다'는 의미로서 부정을 나타내는 헬라어 단어로서는 가장 강력한 의미를 내포한다. 이러한 의미를 살려 KJV는 '우케티'를 '더이상...않다'(no more)로 RSV는 '결코...아니다'(never)로 번역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은 자의적(自意的)이며 절대적인 일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아무런 흠과 티가 없으셨으나 인류 구원을 위한 성업(聖業)을 이루시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지셨고 또 다시 살아나셨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타의에 의해 죽으시고 살아나셨다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도, 능력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죽지 아니하시는', 즉 '결코 죽지 아니하시는'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의 보장이 되신다.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신 후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망이 그를 주장한다면 성도의 신앙은 진실로 헛된 것을 좇는 꼴이 될 것이다(고전 15:12-17).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으나 부활하심으로 사망 권세를 이기신 사건에 있다. 이 사건이 참이어야만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의 연합을 하여 살게 된다는 확신이 참이 될 수 있다. 사망이 그리스도를 주장하지 못한다면 그와 연합한 자들에게도 역시 주장하지 못한다. 이러한 주장이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일반 명제에 대한 근거가 된다. 한편 본절이 자칫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었다는 어감을 줄 수 있다. 본래 그리스도의 신성 자체는 결코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8:3) 사망의 세력권 안에서 활동하게 되셨다. 그리고 죄인이 되시어 사망의 원리를 따라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지셨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본절에서 이미 그리스도께서 한번 사망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처럼 '다시'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

=====6: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 본절의 '죄에 대하여'(* , 테 하마르티아)란 표현은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자신의 죄로 인한 필연적인 죽음(창 2:17)이 아니다. 그는 성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짐지우신 자기 백성의 죄와 허물을 위해 죽으셨다(사 53:4-6). 또한 본절의 '단번에' (* , 에파팥스)란 표현은 구약의 속죄 제사 규례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구약 시대에는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 일 년에 한 번씩 제사를 드렸으며 백성들은 죄를 범할 때마다 희생 제물을 가져왔으니 그 제사는 반복적이었다. 그러나 대제사장되신 그리스도는 구약 시대에 대제사장들이 반복적(反復的)으로 드려왔던 그 제사 대신 자기 몸을 제물로 바쳐 '오직 한번만'(once for all, RSV) 드림으로써 구약의 제사를 완성하셨다(히 7:27;9:12;10:10).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어 십자가에 피흘리신 제사는 구약의 모든 피제사의 최종적 제사요, 완전하고 영원한 제사이기에 제사를 또 드리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다시 죽으실 필요가 없다.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 '하나님께 대하여'란 표현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throught God), 혹은 '하나님 안에서'(in God)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으나(Calvin, Chrysostom) 이보다는 '하나님을 위하여' 혹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해석하는 것이 합당한 듯하다(Murray, Meyer, Hendriksen). 우선 본절의 '하나님께 대하여'란 표현은 '죄에 대하여'와 대조되어 있다. 따라서 이 문구의 해석은 '죄에 대하여'란 표현에 대한 해석과 문맥적 일치를 요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하여'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해석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온전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권고한 12-14절 내용과도 조화된다. 뿐만 아니라 바울 사도는 그의 서신에서 여러 차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함을 강조한 바있다(3:8, 14).

=====6:11
 본절에 대해 스토트(John Stott)는 다음과 같이 매우 논리적이면서 간략하게 설명했다. "만약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죄에 대한 죽으심이었으면, 그의 살으심이 하나님에 대해 살으심이고, 그리고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살으심 안에서 그와 연합되었다면, 우리 자신은 죄에 대하여는 죽었으며(have deied) 하나님에 대하여는 살았다(have risen). 그리고 우리는 그와 같이 여겨야 한다.
"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 2절 주석에서 언급했듯이 죄의 세력으로부터 놓임을 받아 자유를 누림을 말한다.칼빈(Calvin)은 이에 대해 말하기를,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성도는 영적 자유를 얻은만큼 다시는 죄의 종이 되지 않기 위해 날마다 육체의 소욕(所欲)을 제어하는 성화의 삶을 살도록 분투해야 한다. 이것은 죄에서 완전히 끊어져 거룩함과 의 가운데 온전히 거할 때가지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 엔 크리스토 예수) - 본절에서 이 문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와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라는 전 후의 문구에 동일하게 연결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떠나서는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생각할 수 없고 생명의 부활도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커다란 건축물의 초석(礎石)과도 같은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바울은 이 표현을 그의 서신에서 자주 사용하였던 바, 성도와 그리스도간의 관계성을 함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에 대한 보다 상세한 내용에 관해서는 본장 주제 강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참조하라.
 여길지어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기제스데'(* )는 현재 명령형 복수 2인칭으로 '권고'로 해석해도 되며 '명령'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12절과 13절에 사용된 동사가 명백히 명령형으로 해석되므로 본절도 권고형보다는 명령형으로 해석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즉 성도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어진 사건은 성도들을 그러한 신분으로 만든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다'는 말은 실재가 아닌 사건을 실재인 것처럼 생각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실재적인 사건을 파악하여 그것을 굳게 붙잡는다는 의미이다.

=====6:12
 그러므로 - 바울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할 수 없다(1, 2a 절)는 자신의 주장을 설명하기 위해 교리적으로 피력했던 진술들을(2b-11절)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본 접속사를 사용했다.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 바울은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가 성도들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 바울이 논리적인 모순을 범하고 있는가 ? 그렇지 않다. 바울은 다시 14절에서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라고 언급함으로써 죄에 대한 성도의 죽음을 다시 한번 더 강조한다. 이것은 죄에 대한 성도의 죽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실재적으로 발생했던 사건에 대한 진술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죄가 성도들에게 왕노릇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은 보장되어 있다. 다만 죄가 연약한 인간의 몸을 통해서 역사하고 있고 이것 역시 현실이다. 그러나 죄가 이전과 같이 성도들에게 왕노릇할 수는 없다. 성도들에게는 오직 그리스도만 주인이다. 그런데도 죄는 성도들의 연약한 몸을 통하여 역사하면서 자신이 주인인 체 할 수 있다. 이러한 거짓된 가장(假裝)조차 허용하지 않기 위해 바울은 본절과 같은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 성도는 의인이요 거룩한 자의 신분을 가지고 있으나, '죽을 몸'을 지닌 현재는 아직 죄와 투쟁하는 신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죽을 몸'의 '죽을'은 헬라어로 '드네토'(* )이며 이는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인간의 원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벌로써 내려진 필연적인 죽음을 가리킨다(mortal;KJV, RSV). 아담은 하나님께 범죄하기 전에 죽지 아니하는 '생령'(生靈)을 가졌었다(창 2:7). 그러나 그가 범죄한 후부터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고 이 사망의 진노는 모든 인간에게 그대로 내려졌다. 그러나 사망의 진노는 구속함을 받은 성도에게는 더 이상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렇지만 동시에 성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면서 타락한 세상과 부딪히게 된다. 그렇기에 바울은 더 이상 죄의 유혹에 빠지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에 부끄럽지 않게 살도록 지속적으로 애쓸 것을 당부하고 있다.
 몸의 사욕(私慾)을 순종치 말고 - 죄는 우리 죽을 몸을 통해서 역사한다. 그 몸에서 죄를 짓게 하는 욕구가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몸의 욕구대로 행하게 되면 죄에 대하여 죽은 성도는 도전(挑戰)을 받게 된다. 성도라면 당연히 죄와 투쟁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또한 투쟁해야 한다. 비록 죄에게 패배할 때가 많을지라도, 성도는 이미 죄에 대한 승리를 보장받은 신분이므로 염려할 필요는 없다. 한편 '순종치 말고'라는 말은 난폭하고 불같은 정욕대로 행할 것을 사단이 강요한다는 암시를 함축한다. 사단의 세력은 성도가 단순히 죄와 연합하는 것을 지나 죄에게 순종할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죄의 심각성과 타격적인 지배성을 상기할 수 있다. 일찍이 사단은 그리스도께도 '내게 엎드려 경배하라'는 조건을 내걸은바 있다(마 4:9).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유혹을 이기시고 꾸짖은 것처럼 성도는 죄악의 곁에 가지 말며 죄의 유혹을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6:13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 '지체'라는말은 12절의 '죽을 몸'이라는 말과 내용상으로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불의의 병기'(* , 호플라 아디키아스)란 표현은 각각의 지체가 죄의 종이 되어 불의를 행하는 도구가 됨을 나타낸다. 특히 바울은 '병기'란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단순히 각 지체가 불의를 행함에 있어서 도구적인 의미보다 더 적극적인 수단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상 성도라 할지라도 자기 몸의 지체를 제어(制御)하지 않으면 이미 그의 몸은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오직 너희 자신을...하나님께 드리며 - '너희 자신'은 '너희 죽을 몸'(12절)과 '너희 지체'와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란 표현은 11절 내용의 반복으로, 성도가 의와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자의 신분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로서, 새 생명을 소유한 신분으로 자기의 지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마땅하다. 그 이유는 성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며(고전 6:15),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며(고전 6:19), 값으로 산 것(고전 6:20)이 되었기 때문이다.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 혹자는 바울이 몸의 지체를 악에 대항하고 의를 위해 전쟁하는데 사용되는 무기로 생각하게 된 것이 그의 선생들이나 스토아 철학자들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한다(Black). 그러나 이에 대한 근거는 매우 희박하다. 오히려 바울은 구약의 '거룩한 전쟁'(holy war)에 대한 개념을 영적 전쟁에 적용하고 있을 뿐이다. 바울은 성도의 삶을 군사적 삶에 비유하는 표현법을 즐겨 사용했다(고전 9:7;고후 6:7;엡 6:10-20;살전 5:8;딤후 2:3). 거듭난 성도는 자신의 몸을 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죄와 투쟁하기 위한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성도가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싫어할 때, 이미 그는 자기의 몸이 불의의 병기로 사용되고 있으며 어떠한 의의 열매도 맺지 못하게 됨을 깨달아야 한다.

=====6: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 성도가 자기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죄와 완전히 분리된 삶을 살 수 없다. 그렇지만 자기 몸을 하나님께 바치는 삶을 살고자 애쓰는 그 사람에게 죄가 왕노릇할 수는 없다. 한편 '주관치 못하리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 퀴리유세이'(* )는 미래 능동태 직설법이다. 여기서 이 단어가 미래 시제인 것은 단순히 장래에 되어질 일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죄가 주관치 못한다는 내용을 강력하게 확증(確證)한다. 즉 죄가 성도를 주관치 못하는 것은 장래뿐만 아니라 현재에 있어서도 확실히 그렇다는 것이다. 이 강력하고 확실성 있는 보증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으로 말미암는다.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 본절에서 '법'(* , 노모스)이 '은혜'(* , 카리스)와 대비되어 있으므로 이 '법'은 '법칙'이나 '세상적인 법'이 아니라 '율법'을 의미한다. 바울이 '율법'과 '은혜'를 대비시킨 것은 죄가 성도를 주관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즉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율법의 종이 되어 그리스도와는 관계없이 죄의 문제만으로 고민하여 항상 율법에 의해 정죄를 받게 되니, 그 사람은 죄의 종이다. 그러나 은혜의 원리에 따르는 자는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확신과 함께 죄의 문제가 해결된 상태에 거하게 되므로 결코 죄가 그에게 왕노릇할 수 없다. 이 사실은 8:1, 2에서 바울이 선포했듯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을 뿐 아니라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6:15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 이 질문은 1절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본절은 1절과 같은 질문이지만, 1절은 문제의 제기이며 본절은 제기된 문제를 풀기 위해 그 동안 진술했던 내용을 재확증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면서 또 다른 주제로의 전환을 위한 예비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한 강조점의 차이로 1절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해도 좋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며, 본절은 '죄에서 해방되어 은혜 아래 있으므로 계속 죄를 지어도 좋지 않겠느냐'고 주장하는 자에 대한 반론이다. 한편 '죄를 지으리요'라는 표현도 역시 1절의 '죄에 거하겠느뇨'라는 표현과 같은 의미로 해석된다. 자세한 것은 1절 주석을 참조하라.
 그럴 수 없느니라(* , 메 게노이토) - 바울은 자신이 스스로 질문한 사항에 대해 강한 부정의 대답을 하고 있다. KJV는 이 문구의 헬라어 '메 게노이토'가 지닌 강력한 부정의 뜻을 살려 '하나님이 금하신다'(Good forbid)라고 해석하였고 RSV는 '결코 그렇지 않다'(By no means !)라고 해석하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성도는 당연히 방종한 마음과 생활을 거부하고 은혜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한다.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 '종'에 해당하는 헬라어 '둘로스'(* )는 '청지기' 또는 '집사'를 가리키는 '디아코노스'(* )와는 달리 철저히 주인에게 예속된 '노예'를 가리킨다(slave;RSV, NIV). 어떤 사람이 자기 몸을 노예로 바치면 이미 그는 자기 몸에 대한 주권을 포기해야 한다. 오직 주인에 대한 철저한 복종만 있을 뿐이다. 죄의 종으로 사망에...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 영적인 차원에서 사람은 '죄의 종'이든지 '순종의 종'이든지 어느 한 편에 속하게 되어 있다. 물론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하니한'(계 3:15) 미지근한 상태에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미지근한 상태에 있는 사람도 엄격한 의미에서 '죄의 종'에 속한다. 한편 본절에서는 '죄의 종'과 '순종의 종'이 대조되어 언급되고 있다. 여기서 '죄의 종'은 '불순종의 종'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이는 곧 '불순종의 아들들'(엡 5:6)로도 이해된다. 그리고 이들은 벧리알의 자손들로(신 13:13;삿 19:22) '불법의 사람'이요, '멸망의 사람'이다(살후 2:3). 그리고 또 다른 대조로서 '사망'과 '의'가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들은 '죄의 종'과 '순종의 종'에게 각각 주어지는 열매다. 23절 말씀과 연관지어 볼 때 본절의 '사망'은 '영원한 멸망'을 의미한다(살후 1:9). 반면에 '의'는 '사망'과 반대되는 의미를 지닌 '영생'으로 대치해도 무난하다.

=====6: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 혹자는 본절에 대해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가 하나님께로 돌아온 일로 찬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오늘날의 상태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고 주석했다(Hendriksen). 이 말은 바울이 로마 교회가 성화(聖化)된 모습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본절 이하에 계속된 바울의 진술은 성화의 진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과 믿은 후의 변화된 신분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 사망이 한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했으므로(5:17) 그의 생명에 동참한 모든 사람은 죄의 종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본 구절은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지니고 있던 사람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 성화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키지 않는다.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 - 혹자는 본 구절이 딤후 1:13의 '바른 말'과 딤전 1:10의 '바른교훈'(딤후 4:3;딛 1:9;2:1)과 같이 복음 중에서 윤리적인 부분에 대한 설명에 속한다고 단언한다(Murray). 그러나 만일 이 주장을 따르면 곧이어 언급되는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8절)는 선언이 믿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본을 순종함으로써 주어진 결과임을 의미하게 된다. 이것은 결국 기독교를 다시 율법주의로 되돌려 놓는 결과를 초래하며 반(反)복음적인 가르침이다. 따라서 '교훈의 본'은 복음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마음으로 순종하여 - 이 표현은 바울이 10:10에서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라고 언급했던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 또한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과 '순종'을 동일 선상에서 설명한다(히 3:18, 19;4:2, 6). 따라서 본 구절은 '마음으로 받아들여' 또는 '마음으로 믿어'라고 번역해도 무방하다. 본절에서 '순종'이라는 단어에 너무 치중하면 인간 행위가 강조되며 바울이 그동안 강조했던 '믿음'과는 별개(別個)인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6:18
 죄에게서 해방되어 - 성도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 죄의 몸이 멸하여졌으며(6절), 동시에 죄에 대하여 죽은 그는 죄에서 벗어났다(7절).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8:1).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 '종이 되었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둘로데테'(* )는 단순 과거 시제를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단순과거 시제는 어떤 동작이 불확정직임을 나타낸다. 즉 동작의 결과가 완료되었음을 나타내지 않는다. 바울은 성도가 '의에게 종이 된'것을 단순과거 시제로 표현함으로써 7절의 '교훈의 본', 곧 복음을 믿은 결과 성도가 죄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의 종이 된 상태가 현재에도 계속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 '육신'(* , 사르크스)은 새로운 피조물로 옮겨질 수 있는 '몸'(* , 소마)과는 달리 이 세상의 존재 양식에 속하여 있고 이 세상과 더불어 멸망당할 자로서의 인간을 지칭한다. 그리고 이 '육신'은 '영'(성령)과 대립을 이루면서 연약함과 허무 가운데 있는 인간성을 의미한다(Ridderbos). 따라서 본절은 본 서신을 받아보게 될 로마교회가 영적인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무르고 있음을 지적한다.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 영적 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일반적인 예를 들었음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 종에 대한 예를 가리킨다. 바울은 성도의 신분이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라는 진리를 설명함에 있어서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종과 주인과의 관계성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한편 바울은 본절과 같이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라는 표현을 갈 3:15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전에 너희가...불법에 이른 것같이- 본 구절은 1:18에서 3:18까지 바울이 언급한 인간의 타락한 상태에 대한 요약 설명으로 이해된다. 바울은 여기서 로마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의 상태를 지적하고 있다.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 '거룩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아스모스'(* )가 '성화'를 의미하는지 '성결'(holiness)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견해가 학자마다 다르다. 혹자는 고전 1:30;살전 4:3, 4, 7;살후 2:13;딤전 2:15;히 12:14;벧전 1:2 등을 근거로 '하기아스모스'가 과정적인 의미를 지닌 '성화'(sanctification)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상태를 가리키는 '거룩' 또는 '성별'을 뜻한다고 이해한다(Murray, Barmby). 그러나 앞에서 언급된 구절들 중에 살전 4:3, 4, 7과 딤전 2:15은 단순히 '성결'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그밖의 것들은 그렇지 않다. 렌스키(Lenski)에 따르면 '하기아스모스'의 접미사 '모스'(* )는 '활동'을 의미하는데, 이 '활동'은 우리 자신의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그리고 고전 1:30;6:11에서 '하기아스모스'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거룩'을 의미하며 이 '거룩'함이 '의'와 '구속'과 마찬가지로 성도에게 전가됨을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본절에서 '하기아스모스'를 '거룩' 또는 '성별'로 해석하든지 '성화'로 해석하든지 상관없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들을 위해서 성취하신 것이다. 그러면 왜 바울은 거룩함에 '이르라'고 권면하고 있는가 ?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의'와 '구속'과 '거룩'(성화)을 믿음으로 전가받았으나 아직 연약한 육신에 매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몸의 구속'을 기대한다고도 했으며(8:23) 우리 몸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듯이(13절) 당연히 '거룩함에 이르라'고 권면할 수 있었다. 따라서 본절에 언급된 바울의 권면은 '거룩'(성화)이 구원의 조건이기 때문이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이 마땅히 수행해야 할 사실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6: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 이 표현은 19절의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에는 사람이 인간적인 선행을 행할 때도 있으나 그 사람이 인간적인 선행을 행할 때도 있으나 그 사람의 신분은 '죄의 종'이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聯合)하여 자기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힌 체험이 없기 때문이다.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에 사람은 '죄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으므로 그 의를 행해야 할 의무도 책임도 없었다. 비록 자연인은 본성이 율법의 행위를 할 수 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2:14, 15). 그래서 칼빈(Calvin)은 "육체의 자유는 단지 하나님을 순종하는 데서 우리를 자유케 하여 마귀에게 얽매이게 할 뿐이다"라고 진술했던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진술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마 6:24)라고 말씀하신 예수의 교훈과도 일맥 상통한다.

=====6:21
 그 때에(* , 토테) - 바로 앞절에서 언급한 '죄의 종이 되었던 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죄의 종이 되었던 때를 가리킨다.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 성경은 '열매'(* , 카르폰)에 대해 말할 때 '선한 열매'(마 3:8;요 4:36;갈 5:22;빌 1:11;약 3:17)와 '악한 열매'(22절;7:5)를 구분한다. 혹자는 여기서 바울이 '선한 열매'를 의미한다고 단언한다(Murray, Barmby). 그리고 본절의 질문에 대하여 '전혀 없었다'란 대답이 암시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해석은 그다지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르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때'란 표현이 죄의 종이었던 때를 의미하므로 '열매'를 달리 해석하지 않고 '열매'란 표현 그 자체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러면 본절은 "너희가 죄의 종이었을 때에 무슨 열매를 맺었느냐 ?"가 된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는 열매가 아니었던가 ?"일 것이다.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 이 표현은 17절에서 20절까지의 진술이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면서 '은혜를 더하게 하려면 죄에 거하자'(1절)고 주장하는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 상태의 로마 교회 성도들에 대한 것임을 보여준다. 성도가 하나님을 모르던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힘써 대적했었으나 하나님을 알면서부터 의에게 종이 되었으므로 그는 지난 날의 일들을 부끄러워하게 된다.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 죄의 종이 된 결과는 오직 '사망'만 있을 뿐이다. 혹자는 이 '사망'이 '영원한 사망'을 가리키는지 확실치 않다고 주장하지만(Barmby), (1) '사망'이 '영생'과 대조되어 언급되고 있는 점(22, 23절), 그리고 (2)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종말론적 사건인 대심판에 대한 암시라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본절의 '사망'은 '영원한 죽음' 곧 지옥의 형벌을 의미한다.

=====6:22
 그러나 이제는 - 이 표현은 극적인 전환을 보여주기 위해 바울이 즐겨 사용하는 것이다(3:21 주석 참조). 지금까지 바울은 죄에게 종된 상태에 있는 인간의 실존과 그 결말에 대해 설명했으나 본절에서는 그와 정반대의 내용으로 전환(轉換)시키고자 이 같은 접속사를 사용하게 되었다.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 18절의 내용을 반복한다. 그리고 성도가 죄에서 해방된 근거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옛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에 있다(6절).
 하나님께 종이 되어 - 하나님께 종이 된 사람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를 행해야 한다. 이 '의'는 (1)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도에게 이루어졌지만, (2) 연약한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성도가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실천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비록 바울이 18절에서는 '의에게'라고 언급했고 본절에서는 '하나님께'라고 언급했을 뿐이지 그 두 단어는 본질상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 여기에 언급된 '거룩함'도 19절에서와 마찬가지로 '하기아스모스'(* )이다. 이 '거룩'은 인간의 순수한 노력만으로 성취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셨던 '성화'(sanctfication)를 의미한다. 그리고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는 해석상 애매한 표현이지만 구체화시키자면 '거룩함의 열매' 또는 '성화의 열매'로 해석될 수 있다. 바울은 이 '성화의 열매'를 성도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왜냐하면 '얻었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케테'(* )의 시제가 개역성경과는 달리 현재형이기 때문이다. 이 시제는 본절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바울은 '성화의 열매'를 미래에 이루어질 것으로 말하지 않고 성도가 현재 소유하고 있다는 점을 진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 표현은 19절의 '거룩함(성화)에 이르라'는 권면과 함께 종합적으로 해석되어야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다. 본절과 19절을 종합해 볼 때 성도는 '성화의 열매'를 그리스도로부터 받았으면서도(고전 1:30;6:11) 동시에 '성화'를 수행해야 할 의무를 지닌 신분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화' 자체도 '의'와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성도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져야 할 것이 아니라, 이미 성취된 것을 바라보면서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그것이 드러나도록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 예수의 가르침대로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요 5:24;6:47, 54). 그렇지만 완전한 의미의 영생은 마지막 부활 때에 거룩함의 열매를 소유한 자에게 주어진다.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영생이니라 -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은 죄에 계속 거하는 자에게 지불되는 대가가 사망이라는 의미이다. '삯'에 해당하는 헬라어 '와소니아'(* )는 흔히 '병사들의 급료'의 의미로 사용된다(Hendriksen, Murray, Calvin, Barmby, Black). 비록 '와소니아'가 딤전 5:18에서는 단순히 노동자가 일한 것에 대한 대가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을지라도 나머지 구절들(눅 3:14;고전 9:7)에서는 군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울은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일꾼과는 달리 군인들이 철저하게 군사적인 의무에 매여있음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처럼, 사람이 '죄의 종'으로서 죄에게 충성함으로 '사망'이라는 대가를 받게 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 '와소니아'는 그 다음에 언급되는 은사(* , 카리스마)와 대조되고 있다. 이 '은사'는 '일한 것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4:6) 것에 대하여 적용될 수 있는 적절한 용어다. 그리고 이 '은사'는 성도가 죄에서 해방되어(18, 22a절) 거룩의 열매를 얻게 된(22b절) 사실을 지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성도는 구원의 전과정에 있어서 자신이 노력한 대가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사로 값없이 '의', '성화', 그리고 '구원'을 받게 되므로 결코 자랑할 수 없다.

 

 

  단순한 편지글이라기보다는 체계적이며 논리적인 신학 논문으로 평가되고 있는 로마
서는 6장에 접어들면서 보다 더 밀도있게 본서의 대주제인 '하나님의 의(義)'에  접근
하고 있다. 본장의 전반적 이해를 돕기 위해 '하나님의 의'라는 로마서  중심  주제의
진행 과정, 본장의 신학적 위치, 집중적으로 논의되는 주제. 그 주제에  따른  본장의
구조 등을 살펴보기로 하자.
  (1) '하나님의 의'의 진행과정. 지금까지 바울은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1:18-3:20)과 이 죄를 벗어난 칭의(稱義), 즉 구원의 선언을 받는 일에  행
위와 그 결과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다. 이방이늬 죄, 유대인의 죄 나아가서는  타락한
폭로가 시도되는가? 이 시도는 단순히 정죄와 비난을 위한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본서
전체의 주제인 '하나님의 의'와늬 연관성 속에서 이것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어지는 3장 21절부터 5장까지의 말씀을 보면 이해가 용이하다. 이곳에서 선포되는
'칭의의 복된 소식'이야말로 바울이 전해야 할 참 메시지였다. 결국 바울은  인간들의
죄된 행위를 폭로하고 정죄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필요로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적 정황을 이해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행위와 무관하며(4:1-8)  할
례와도 무관할 뿐아니라(4:9-12) 율법과도 무관하다(4:13-15). '하나님의 의'는  하나
님의 은혜로 거저 주어진 것이다(3:24). 우리와 '하나님의 의'가 관계성을 갖게  되는
경우는 단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를 전가 받아 의롭다고 일컬어질 때뿐이
다(4:16-25).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를 전가받아 의롭다고 여겨진 사람들 즉 아브
라함의 후손들은 이제 비로소 자기 스스로 만들고 그 안에 갇혀 방황하던 죄의 터널에
서 인도되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5:1,2) 환난 중에서도 기쁨을 나누고(5:3-8)  하
나님의 진노에서 구출되는(5:9-11) 눈부신 생명의 빛 속에 거하게 된 것이다. 죄의 터
널, 죽음의 늪에 빠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은혜로 거저 주는 '하나님의 의'를  오직
믿음으로 전가(轉嫁)받는 일뿐이다.
  이제 바울은 방향을 바꾸어 인간의 행위 대신 인간의 인격과 그 인격이 풀어놓은 인
간자의 삶 자체로 접근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모두 타락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의'를
누리는 은혜의 자리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1-5장을 거쳐 '하나님의 의'의 필요성이 제
기되고 그 '의'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믿음으로 우리에게 전가된 바 본장부터 8장
까지에서는 '하나님의 의'가 은혜의 자리로 옮겨진 인간들의 인격과 전삶을 통해 어떻
게 나타나는가를 보여주며 9-11장에서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변론이 제기되고  나머지
장(章)들에서는 '하나님의 의'의 적용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뿐만 아니라 오늘 이자
리를 사는(here & now) 우리들에게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2) 본장의 신학적 위치. 본장을 포함한 세장(6-8장)은 본서의 핵심 장으로 불린다.
이곳엔 의롭다 함을 받은 후 성도들이 걸아야 할 길이 제시되어 있다. 즉 예수의 가르
침을 따라 그 형상을 닮아가는 성도는 죄로부터(6장), 율법으로부터(7장), 그리고  죽
음으로부터(8장) 자유를 얻어 영적인 삶을 이 지구상에서 구현해야 한다. 이를  '성도
의 성화(Sanctification)'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성도의 성화(聖化)는  '하나님의
의'를 성도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내 보여 주는 것이다. 실로 바울이 본서를 통
해 나타내려고 하는 '하나님의 의'라는 개념은 본장에서 8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명
료하고 가시적인 형태로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다 하겠다. 따라서 이 부분이 본서 전체
의 핵심이란 사릴은 이론(異論)으 여지가 없다.
  한편 칭의가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믿고 고백할 때 경험되
는 것이라면, 성화는 하나님과 이웃과 자신 앞에서 '하나님의 의'를 삶으로  고백하고
증거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 하겠다. 특별히 본장을 성화의 원리  내지
는 당연성에 대해 설명한다. 즉 죄에 대하여 죽은 자에게는 새삶이 요구되는데 그  삶
은 하나니메 대하여 산 자의 삶이다(11절;갈 2:20). 다라서 성화와 칭의는 동시  불가
분적이라 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칭의는 일회적 선언으로 그 효력이  영구히  미치는
선언인데 비해 성화는 의인으로 선포된 성도의 전생애에 걸쳐 일어나는 과정이다.  그
러므로 성화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도들의 끊임없는 자기 개혁을 반영한다.
  (3) 본장의 주제 : '성화와 죄'. 개혁자 요한 칼빈(John Calvin)은 그의 [기독교 강
요] 제 3권 제 14장 [칭의의 기원과 그 계속적 전진]에서 '칭의와 네 종류의  사람들'
에 관하여 언급하였거니와 그 구체적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하나님께 관한 지식을 받지 못한 채 우상 숭배에 빠져있는 자들이다.
  둘째는, 말씀과 성례전을 받으면서도 생활이 불경건해서 입술로는 고백하나  행동으
로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로서 명목상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는 자들이다.
  셋째는, 외식하는 자들로서 자신의 심중의 악함을 공허한 가면으로 감추고 있는  자
들이다.
  넷째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중생함을 받고, 참 성결을 목표로 하여  힘쓰는  자들이
다.
  우리들은 모두 타락한 죄의 상태, 죽음의 상태에서 은혜의 자리, 생명의 자리로  옮
겨졌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상태와 위치의 변화이다. 즉 영적인  상태는  바뀌었지만
사람 자신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중에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자처하지만 그리스도의 피와 하나님의 은혜를 전적으로 의뢰하지
못하고 실패많은 자기의 삶을 보고 자신은 정말 구원을 받았는가 의심하고 마음의  평
안을 상실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에 바울은 이미 칭의받은 자가 이땅에 살면서  취
해야 할 삶의 구체적 자세를 성화와 성별이라는 관점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죄인
들의 요구가 있기 이전에 먼저 우리 죄인들을 찾아와 주신 예수께서도 우리에게  구원
의 복음을 주시는 동시에 그 복음의 실천을 아울러 요구하셨다.
  칭의받은 순간 하나님의 자녀들은 죄의 노예로부터 해방이 된다. 하지만 그들은  육
신을 따라 오는 번뇌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완전한 자유를 얻는 것은 아니다.  성도들
은 아직도 정욕이라는 질병에 묶여 있으며 이 정욕이 때로는 육욕(肉慾)에로,  때로는
야욕(野慾)에로, 때로는 다른 죄악에로 번져 유혹하고 선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
여야 한다. 예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6절) 죄의 법이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서
폐지되었지만(8:2) 그래도 죄의 흔적은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죄가 우리들을  지배
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을 의식함으로 더욱 겸손한 자가 되며, 연단 가운데
서 더 깊이 깨달으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녀로 자라게 하기 위함이다.
  (4) 주제별 내용 분석. 본장이 '그리스도인의 성화'라는 주제하에 전개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이늬 성화를 언급하기 전에 그 전단계로서 죄에  대
하여 죽은 성도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하고 있다. 단계별 설명을 구체적으로  살
펴보기로 하자.
   (까) 첫번째 단계 : 죄에 대하여 죽음.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
은 사람은 죄의 대가를 지불했으므로 죄가 더 이상 그를 고발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실례로 스코틀랜드에서는 처형을 당한 사람을 '의롭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그가
법적인 요구를 충족시켰으므로 더 이상 그 죄와는 관계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죄에 대하여 죽음'이라는 단계는 우리가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낡은 질서와 아무  상
관이 없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 두번째 단계 : 그리스오와의 연합. 바울은 비록 잠깐 동안의 일이지만 세례를
받을 때 물 속에 몸을 담그는 일을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葬事)되는일로 묘사한다. 여
기서 '장사된다' 함은 자연적인 출행으로 맺어지는 아담과의 관계에서 지배되던 옛 사
람의 종말, 즉 옛 상태와의 관계 단절을 상징한다. 또한 바울은 세례를 받을 때 물 속
에 잠기었던 몸이 다시 나오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으셨다가  삼
일만에 부활하신 것같이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은 후 그
리스가의 부활의 능력 안에서 새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된 것이라 했다. 첫번째  단계
와 두번째 단계는 시간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의미상의 구분임에 주목해야  한
다.
   (따) 세번째 단계 : 성화의 생활. 새 생활 곧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이 보여
주는 생활의 특징은 '거룩함'이다. 이는 헬라어로 '하기아스모스'(*                )
에 해당하며 이 단어의 어미인 '아스모스'(*          )로 끝나는 단어는  어떤  일이
완성된 상태에 있음을 말하지 않고 진행되어 가는 과정에 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성
화의 새로운 생활은 하나의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죄에 대하여 죽음과 동시에  그리스
도와의 연합이 시작되어 계속 거룩해져가는 과정을 가리킨다.
  한편 본장의 내용을 자세히 구분하면 다섯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즉  '죄에
대하여 죽은 성도'(1-5절), '성도를 주관하지 못할 죄의 권세'(6-11절),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12-14절),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된 성도'(15-18
절), 그리고 '영생을 얻은 성도의 생활'(19-23절)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지만 '하나
님의 의'라는 본서 전체의 주제와 '그리스도인의 성화'라는 본장의 주제를 염두에  두
면 크게 두 부분으로 본장을 나눌 수 있다. '성화의 근거'(1-11절)와  '성화의  실천'
(12-23절)이 그것이다.

  1. 성화의 근거(6:1-11)
  지금까지 바울은 하나님의 전적 은혜로 말미암는 단회적 사건인 칭의에 관해 논하였
거니와, 이제부터는 이미 의롭다 함을 얻은 자들이 죄악된 세상을 어떻게  극복해나갈
것인가 하는 성화(聖化)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한다. 특히 본문은  이신득의(以信得義)
의 원리를 율법 폐기론적 방탕주의로 곡해하는 경우에 대해 강력히 경고하고 있다. 아
울러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다고 하는 연합의 원리에서  출발하는  성화의
당위성을 주장하나. 특별히 본문에서 이해되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대속적일  뿐
아니라 인류 구원의 전형적(典型的) 사건이다. 즉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고후 5:14)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들
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죄의 권세를 깨뜨리신 그리스도를  따라
다시는 죄로 하여금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제 성화의  문제가  제기된
배경, 성화의 필연성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유추 논법에 화룡된 비유들과 그 의미,
성화의 원리릉 통해 발견된 새로운 삶의 방법들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1) 성화의 문제가 제기된 배경. 2장 강해에서 언급한 바 있거니와, 바울은 '디아트
리베'(*                , '가정')의 서술법에 의해 가상의 질문을 제기하고 이에  답
변하고 있다.
   (까) 문제되는 질문. "칭의론의 논리에 따른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가능한 한  많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는 계속 죄를 지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는  질문이  전장(前
章)의 결론 부분인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5:20)라는 구절에서  유래
되었다. 즉 본 서신의 독자인 로마 교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오해하여 이 말씀을 죄를 허용하는 면허장과 같이  여기고
그와 같이 질문한 것이다.
   (다) 바울의 주장.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그럴 수  없느니라'(2
절)고 잘라 말하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은 성도들이 계속 죄를 지을  수
는 없다고 공박(攻駁)하였다. 따라서 바울이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성도들이 결코  범
죄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피조물로서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는 생활을 계속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부분에 나타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악용하여 죄를 짓기 위
한 구실을 만들며 또 그 죄를 합리화하려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러한 일은  실
로 어리석고 비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 성화의 필연성과 세 가지 비유. 우리는 아직 완전한 거룩함을 얻고 있지  않다.
그러나 믿음에 의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의 생활은 그 방향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
다.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이  방향  전환이다.
비록 현재는 불완전해도 생활자의 목적과 방향이 바뀌었으니 이 방향 전환만 되어  있
으면 우리는 애써 탈선하지 않는 한, 성령에 인도되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다.
이제 바울은 성화의 근거요 기본 원리가 되는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
데 더 살리요'(2절)라는 이 방향 전환의 주장을 세 가지 비유로 증명해내고 있다.
   (까) 세례의 비유(3, 4절).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만난다는 것, 즉  죽
음에서 그리스도와 합쳐진다는 상징이다. 또한 세례는 두 가지 면에서 그리스도의  부
활과 우리를 일치시킨다. 첫째는 그는 부활하셔서 다시는 죽지 않으신다는 것과의  일
치이며(9절), 둘째는 그가 하나님께 대하여 살기 위해 부활하셨다는 것과 일치되는 것
이다(10절). 특히 3절과 4절에 나오는 '합하여'의 원어 '에이스'(*      )는 '안에 들
어간다', 즉 '예수 속에 들어가는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결합 또는 일치를  의미하되
바깥에서 접촉하는 외적 결합이 아니라, 하나가 다른 것 속에 들어가는 내적인 결합이
다. 세례를 받은 우리는 죄에 대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의에 대하여 새로운 생
명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죄 안에 머문다면  그것
은 마치 세례를 받고 물 속에서 올라온 자가 여전히 물 속에 머무는 것과 같은 넌센스
가 아닐 수 없다.
   (다) 접목(接木)의 비유(5, 6절). 우리는 죄의 줄기에 있던 가지였다.  그때는  죄
속에서 죄에 의해 살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죄에  붙어  있던
우리의 가지는 잘라져 그리스도의 줄기에 접붙임이 되었다. 접붙임을 받았으므로 줄기
에서 오는 영양분을 받아 줄기와 함께 새롭게 살아간다.
   (따) 형사 소송의 비유(7-9절). 이것은 또 다른 비유이다. '죄에서 벗어났다'는 말
은 법률사의 용어이며, 죽은 자는 그 생전에 행한 범죄에 대하여는 추소(追訴)되지 않
는다. 아무리 큰 죄를 범한 자라도 고발하기 전에 또는 재판이 끝나기 전에  죽어버리
면 유죄 판결을 받지 않느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것은 기정  사
실이다. 그리고 한번 죽은 자는 다시 죽는 일이 없다. 그리스도는 한 번 죽었다가  이
미 부활하였으므로 다시 죽지 않으며 죽음에 대한 그의 승리는 절대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자석에  결합되는  것이며
이 자석과 같은 자기(磁氣)를 우리도 띠게 되는 것이다.
  (3) 새로운 삶의 방법.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짓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이유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교제에 계속해서 머물지 않음으로써  부주의하게도
죄가 육신을 자극하도록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둘째 이유는 자기가 율법을 지켜 실행
할 힘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율법주의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로 계속하여 인정되는 방
법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첫째로, 세속주의를 거절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보다  긴밀하게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교제에 결합되어 있을 때 우리는 더욱더 하늘의 것을 구하게 된다.
  둘째로, 자기 힘으로 의를 행하려는 율법우의에서 해방되고 성령에 의한 자유를  기
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함과 은혜의 풍성함을 알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
다. 자신의 모든 지체(肢體)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주지 않고 하나님께  드려  의를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당신의 도구로 삼으신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사
용하시어 압제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셨고(출 12:31-33),  다윗을
사용하셔서 불레셋 족속을 물리치셨으며(삼상 17:32-54), 복음을  만인에게  전파하기
위하여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다(행 9:15).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이 계획하신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우리들을 죄로부터 자유케 하셔서  하나님
을 향해 달리는 기차 위로 옮겨 태우셨다.
  * 성화(Canctification). 처름으로 예수를 구세주로 믿을 때, 대부분의 우리들은 큰
기쁨과 함께 우리의 구원에 대해 감사한다. 이러한 감사하는 마음과 동시에 우리는 또
한 모든 것이 변화되었음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죄로부터 해방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의 본질적인 성향과 특성 그리고  행동에
있어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전에 우리는 악한 습관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악한 습관들과 잘못된  행동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것이 마땅한가?  그렇지는
않다. 우리가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 자신들의 불완전함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사역이 시작되었다는 증거이다. 낙담과 의혹을 품는
대신에 우리는 우리가 모든 것을 변화시키게 될 새로운 삶으로 들어서게 되었다는  것
을 깨달아야 한다. 더불어 성화를 이 세상에서는 결코 완성되지 못하는 과정이라는 이
유 때문에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중생', '칭의', '양자로 받아들여짐' 등
과 마찬가지로 구원에 있어서 중요하고 필요한 요소이다. 성화의 의미와 특징, 그  교
훈과 수단 등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성화의 의미. 한마디로 말해서 성화란 죄의 오염에서 해방된  인간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 곧 그리스도의 모습을 점진적으로 닮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화
는 소극적으로는 인간의 죄악된 성향을 제거하는 것이고(6절;갈 2:20;5:24), 적극적으
로는 거룩하여져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11절;갈  2:19).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그의 로마서 6장 주석에서 성화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첫째, 죽는 일 곧 옛 사람을 벗는 일로서 그것은 과거의 사람, 과거으 행실을 더 이
상 계속하지 않는 것(2절), 죄가 지배하지 않는 몸이 되도록 마음에서 죄악의  우상을
내쫓는 것(6절), '골치 아픈 주인'(quondam)인 죄에 대하여 죽어서 죄와 관계를  끊는
것(11절), 죄에게 왕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는 것(12절), 우리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바치지 않는 것(13절)이다.
  둘째, 살리는 일 곧 의에 대하여 사는 것으로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것(4절),
모든 애정과 바램이 하나님을 상대로 살아 있는 것(11절), 우리 자신을 죽은 자  가운
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13절), 우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13절)이다.
  (2) 성화의 특징. 성화의 과정, 영향, 결과, 완성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자.
   (까)성화의 과정. 죄의 오염에서 해방되어(6절)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점점 나아가기로(6-11절) 작정한 성도는 필연적으로 육신의 법과 하나님의  법
사이에서 겪는 심각한 내적 갈등에 봉착하게 되는데(7:23, 24) 그러한 때에  하나님의
성령의 법에 온전히 의탁하여야만 비로소 이 갈등은 해소되고(8:1-10) 성화에의  진전
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성도가 거룩하여지는 것은 원칙적으로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
사로 가능하다(빌 1:6;살전 5:23). 그러나 이는 중생과 같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성령
이 단독적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 속에서 인간과 협력하여  이루어진
다(12:9, 16, 17;갈 6:7, 8, 15).
   (다) 성화의 영향. 성화는 인간의 영혼과 육체 그리고 지, 정, 의를  포함한  전인
(全人)에게 영향을 미친다(12절;고전 6:20;살전 5:23).
   (따) 성화의 결과. 성화는 칭의나 양자(養子)같이 법적 지위 또는 신분상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불안, 공포, 절망 등을 몰아내고 기쁨, 소망, 평강을  증진시
키는 현실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마) 성화의 완성 시기. 완전한 성화는 현세에 완성되지 않으며(3:10;왕상 8:46;잠
20:9;약 3:2;요일 1:8). 개인의 종말과 세상의 종말 때 완성된다(히 12:23;계 14:15).
  (3) 성화의 교훈. 출애굽의 감격을 쉽게 잊어버리고 광야 여정 동안 불순종을  거듭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성도들 중에는 구원의 뜨거운 감격과  주님과의  첫사랑의
희열을 망각한 채(계 2:4) 광야 같은 세상을 방황하는 자들이 허다하다. 한 순간에 예
수께 자신의 전부를 의탁하고 헌신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것은 오히려 쉽다. 참으로 어
렵고도 숭고한 길은 '늘'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내어맡기는 성화의  길이라  하겠
다.
  (4). 성화의 수단들, 확신과 성경 공부, 성례 및 기도와 묵상 등이 있다.
   (까) 확신. 확신은 성화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확신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또한 그가 진정 우리 안에 구원의  사역을  시작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터(Luther)는 확신이 없는 마음은 흔들리는  그릇
과 같아서 원하는 것을 담기가 힘들 뿐 아니라 그릇 안의 것나지 쏟아버릴 위험이  있
다고 경고했다.
   (다) 성경 공부. 그리스도인의 성장에 있어 중요한 초석이 되는 성경은 확신과  지
식을 제공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 활동의 동기와 목적 및 행동  방향을  제시하는
거룩한 생활의 객관적 표준이다.
   (따) 성례(聖禮). 하나님의 말씀의 가시적(可視的) 상징인 성례는  성화에  도움을
준다. 종교적 경험을 단순히 수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
이다. 토레이(Reuben A. Torrey)는 기도란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며 실제로 구분의 현
존 안에서 그분께 요청하고 받은 것으로서 그리시도인의 의무가 아닌 특권" 이라고 말
함으로써 기도가 성화의 효율적인 수단이 됨을 지적하고 있다.
  * 그리스도와의  연합.  자연인을  아담과  연합되어  있으나(5:12-19;창  5:3;고전
15:49)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 성경에서, 특히 바울의 서신들에는  이러
한 내용이 '그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로  164번
씩이나 언급되었다.
  존 머레이(John Murray)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구원의 전체 교리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 진리'라고 말했으며 요한 칼빈(John Calvin)은 '이 연합이 예수가 구세주임을 보
증해 주는 유일한 것'이라고 보았고 아더핑크(A. W. Pink)는 '영적 연합은 성경에  나
타난 내용들 중 가장 중요하며 가장 축복받은 내용'이라고 강조하였다. 연합의  성격,
연합의 광범위성, 연합의 신비에 대한 성경의 예증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연합의 성격. 여섯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요한복음 15:5;고린도전서 6:15-19;에베소서 1:22, 23;4:15, 16에 의하면  그
리스도와의 연합이란 그리스도가 성도 안에 계시고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봉사하는
유기적 연합이다.
  둘째, 에베소서 2:1;갈라디아서 2:20;요한일서 5:12에서 확인되는 바,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죄와 허물로 죽었으나 영적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게 하는 생명적 연합이다.
  셋째, 요한복음 3:5을 살펴보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성령께서  중재(仲裁)하시나.
그러므로 이 성경적 주제는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한 유익들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
시키는 일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을 이해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것이라 하겠다.
  넷째, 요한복음 14:23;요한계시록 3:20에 의하면 중생의 역사는 하나님의 단독 사역
이지만, 신앙 생활은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으로 이루어진다.
  다섯째, 요한복음 14:20;고린도후서 5:17;갈라디아서 2:20;에베소서  3:17,  18에서
강조되는바, 싸자도 각 개인과 그리스도가 직접 연합되어 있다.
  여섯째, 빌립보서 3:21;골로새러 3:10에 의하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해  타락
수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이 다시 회복된다.
  (2) 연합의 광범위성. 하나님의 특별 은총으로 가능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구원 영
역 전체, 즉 선택으로부터 영화(靈化)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친다. 다시 말하면 그리
스도와 성도들의 연합은 매우 광범위한 개념으로서, 그것은 예수에 대한 우리의  경험
을 다루고 있는 것일 뿐 아니라 불멸의 과거와 무한한 미래의  세계에까지   확장되고
있다는 것이다.
   (까) 과거. 과거를 살펴보면 구원의 근거는 에베소서 1:3, 4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
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각 개인들이 영원한 선택을 받은 것에서  시
작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원하신 선택에 대한 완전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
할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포함한 하나님의 뜻을  과거의
일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는 있다.
   (다) 현재. 현재에 우리는 우리의 중생과 신생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
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으신 순간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
문에, 죄로부터의 구속 역시 우리에게 확실해졌으며 우리는 모든 죄로부터 의롭게  되
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으셨을 때, 구원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와 연합된 우
리들 역시도 우리 죄의 형벌이 내려진 한에서 그와 함께 죽었다.  성부께서는  성자를
처형하셨다. 그러기에 우리들도 그리스도와 연합된 의미에서 처형당한 것이다. 이  점
에 있어서, 우리는 죄의 형벌을 받았기에 그것에 대해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 뿐
만아니라 우리는 또한 삶 속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함 안
에서 성장하게 된다.
   (따) 미래. 미래의 일로서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은 우리의 마지막 부활과(5절;고
전 15:22) 영광을(8:17) 확신케 해준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결
국에는 그와같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우리는 결코 그로부터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요한일서 3:2 나타난 바와 같이 우리는 항상 그와 함께 있게 될 것이다.
  (3) 연합의 신비에 대한 성경의 예증들. 우리들으 궁금증을 가질 수도 있다.  "내가
어떻게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는가?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내가 실지로 그와 함께 죽
었다는 것인가?" 그러나 성경은 이미 우리들의 질문들에 대해 많은 예증을 들어  답을
제공해 주고 있다.
  (까) 예증 1. 결호네 있어서 남편과 아내의 연합이다(엡 5장). 결혼 생활을 예로 들
어 마음과 몸과 영혼의 연합을 생각하는 것을 가능한 일이다. 한 남자와 결혼한  여자
에게 성(姓)의 변화, 법률적 변화, 사회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연합
한 사람은 죄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될 뿐 아니라 우리의  신실한
남편인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 때문에 초래되는 형벌을 대신 담당해 줌으로써 공포로부
터 평강의 상태로 변화되며, 나아가 우리의 삶과 존재의 중심이 그리스도로  변화되는
것이다.
   (다) 예증 2. 머리와 몸의 연합이다(고전 12:12-27;엡 1:22, 23;골 1:18). 이 예증
은 살아 있음으로 해서 성장하는 머리와 몸의 연합,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강조하는 연
합, 그리고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은 마찬가지로 다른 이들과의 연합이라는 것을  말
해주고 있다.
   (따) 예증 3. 요한복음 15:1-17에 나오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연합이다. 이것은  그
리스도와 믿는 자들의 연합이 어떤 목적, 즉 우리로 하여금 열매를 맺도록 하고 이 세
상에서 하나님께 해해 유용한 존재들이 될 수있도록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마) 예증 4. 그리스도께서 많은 벽돌들로 세워진 신령한 전에 모퉁이 돌이 되신다
는 것이다. 에베소서 2:20-22에 나타나는 이 예증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영속
성이다. 예수께서는 터가 되시고 불변하시므로 그 위에 세워진 모든 것은 또한 영원히
남을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만이 세상 끝날까지 생명을  누
리게 될 것이다.
  * 세례에 관하여. 세례 자체가 본서 6:1-7:6의 주제는 아니다. 그러나 바울은  본장
1정에서 제기된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라는 질문에 대해  그리스도
인들간에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져서 시행되고 있는 세례를 가지고 대답한다. 따라서 세
례는 본서 6장에서 핵심 소재를 이루고 있다. 몇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세례의 의미와
세례에 대한 바울의 해석 등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세례의 의미. 세례에는 '씻음'과 '연합'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즉 과거의
죄를 씻고 새 존재로서 새삶을 살며 새 공동체에 가입한다는 의미이다. 특히 세례로써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할 때 그것은 흔히 신비주의(mysticism)에서 말하는  인간과
예수 그리스도간의 조재론적 합일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이것은 세례를  통
해서 그리스도와 성도가 법적 연합을 함으로써 성도의 법적 지위, 즉 그리스도 공동체
의 일원이 될 자격이 획득됨을 의미한다. 이처럼 성도가 세례를 통하여 법적으로 공동
체의 일원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법적으로 동참하게 되는 것은 구약 시대에 인
간의 죄를 대신 진 것, 즉 양이 죽음으로써 인간의 죄가 법적 해결을 받은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이해되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구속사의 유일한 방법이다.
  (2) 물 세례와 성령 세례.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4:16, 17과 사도행전 1:5에서 약속
하신대로 오순절에 다락방에 모인 자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다.  이로써  세례
요한의 물 세례를 그리스도께서 성령 세례로 완성하신 것이다. 성령 세례는 예수를 주
로 진실되게 믿는 참 성도가 되는 순간에 주어지는데 중생 혹은 회개와 동시에 이루어
딘다. 따라서 성령 세례를 통해 성도들에게 임하시는 성령은 구원의 보증이시며  성화
의 근원이시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는 물 세례보다 선행될 수 있다. 물  세례는  성령
세례를 받은 것에 대한 보증이자 표시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물 세례는 씻음과  연합
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즉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과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여 죄와 세상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을 공적으로 고백하는 의식
이다. 따라서 물 세례는 구원받은 자에게만 베풀어지며, 이것을 받은 자는 교회의  참
된 지체로서 영접된다 하겠다.
  (3) 세례에 대한 바울의 신학적 해석. 다음 네 가지 사항으로 나누어 고찰해 보기로
하자.
   (까) 과거 시제로서의 세례.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는일이
'이미' 일어난 사건이라고 말한다. 이와 동일하게 세례 그 자체도 그가 되돌아 볼  수
있는 과거의 어떤 시점에 있었던 일로 설명한다. 이와 같은 경우들에  있어서  동사의
시제는 모두 부정 과거이거나 완료 시제(과거 시제)이다. 예컨대, 본장 2, 8절에 나타
나는 '아페다노멘'(*                  , '우리는 죽었다'), 3절에 나타나는  '에배트
스데멘'(*                        , '우리는 세례를 받았다'), 4절에 나타나는 '쉬네
타페멘'(*                      , '우리는 묻혔다'), 그리고 5절에  나오는  '게고나
멘'(*                  , '우리는 묻히었다') 등이 그러하다. 이렇게 동사의  시제가
과거로 나타나 있는 것은 죄에 대한 죽음의 효과도 역시 과거에 일어났음을  의미하는
데 우리는 본장 7절의 '데디카이오타이'(*                      , '벗어났다')와 18,
22절의 '엘류데로덴테스'(*                            , '해방되었다')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바울에 의하면 죄로부터의 해방은 가능성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현실적 사건이다.
   (다) 죄의 죽음이 아닌 죄인의 죽음. 바울은 어느 곳에서도 죄가 폐기되었다고  말
하지 않는다. 죽은 것은 죄가 아니라 죄인이다(2, 11절). '죄로부터  벗어났다'는  말
속에는 죄인이 지금은 죄에 대해 죽어 더 이상 죄의 지베 밑에 있지 아니한 것이며 죄
는 여전히 그를 노예로 삼으려 하고 있음이 암시되어 있다. 동일한  이야기가  죽음에
대해서도 가능하다. 그리스도는 실제로 죽음을 이겼으므로 죽음이 더 이상 지배할  수
없다고 해서 죽음이 사라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죽음의 권좌(權座)는 무너졌다.  그러
나 죽음에 대한 최종적인 승리는 아직 미래의 일이다.
   (따) 구원 사건의 한 단면으로서의 세례. 세례 그 자체는 '구원의 사건'이 아니다.
죄의 권세는 세례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그의 순종과  의
에 의해서 부숴졌다(5:18, 19). 세례는 항상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는 것이며 우리를
위한 그의 죽으심과 합하는 것이다(3절) 여기에서 우선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를 통하여 성취하신 한 단면만을 나타내 줄 뿐이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는다는 말은 '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갈 3:27)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마) 세례의 종말론적 차원.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죽으심(10절)과 마찬가지
로 세례도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유일회적인 사건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뒤돌아보는
사건이다. 하지만 바울의 모든 주요 주제들처럼 세례도 또한 중요한 종말론적  의미를 지니나. 1절 이하에 보면 세례는 그리스가의 죽으심뿐만 아니라, 그의 부활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으심에로, 아울러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의 소망에로 들어가는 것이다. 세례 그 자체는 항상  그리스도인의 과거 삶의 사건이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인이 미래 생의 완전한 구원 소망을 받았음을 상징한다. 본장 5절과 8절에 나오는 '에소메다'(*              , '우리는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와 '쉬제소멘'(*                  ,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라')이 그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를 확증된 약속을  받는 것, 구원자의 첫 열매에 동참하는 것, 종말론적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는 것 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2. 성화의 실천(6:12-23)
  앞 단락에서 바울은 성화의 당위성과 그 근거를 이야기했다. 이제 본문에서는  성화
의 기본적 실천 과정인 자신과의 싸움 그리고 성화에의 권면이 다루어진다.
  먼저, 12-14절은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다는 믿음을  지닌  자들에게
이제 하나님의 은혜에 온전히 순종함으로 모든 죄악을 퇴치하고 정복해 나가는 그리스
도의 위대한 영적 군사로서 일어설 것을 촉구하는 말씀이다. 모든 성도가 삶의 과정에
서 선한 싸움을 싸워가야 할 일차적인 장(場)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이다. 그러
기에 세상 현인들도 '네 자신을 알라', '극기의 덕' 등을 말하였던 것이다.
  본문에서 보여주는 자신과의 싸움은 죄로부터 해방된 새로운 피조물의 책임과  의무
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주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
의 수단을 가지고 정욕과 현세의 악한 세력과 선한 싸움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본문의 주장이다.
  다음으로, 바울은 15-23절에서 은혜를 핑계삼아 죄악을 옹호하려는  율법  폐기론적
태도를 다시 한번 경고한다. 그리고 단지 죄로부터 해방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
님께 적극적으로 순종함으로 고귀한 성령의 열매들을 실제적인 삶 속에서  맺을  것을
간곡히 권면한다. 이러한 성화(聖化)에의 노력은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서가 아니
라 구원을 확신하는 자가 행하게 되는 당연한 결과이다. 왜냐하면 노예의  옛  주인은
그 노예가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될 경우 더 이상 그를 지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도들은 죄를 섬기던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로 옮겨졌기 때문에 이
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만을 해야지 죄가 명령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즉  죄로
부터 완전히 해방된 하나님의 종으로서만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본 단락에서 성화의 실천을 특별히 노예제도(종살이)의 비유로 설명한다. 따
라서 본문의 내용을 신학적으로 분석하면서 상고하기 위해서는 종살이의 비유를  사용
한 목적, 종살이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자 하는 개념인 '순종', 순종의 출발점과  도
달점인 '의, 순동의 방법으로 제시된 '드림과 거절함', 순종의 결과로 우리가  경험하
게 될 '과거와 이제의 대조' 등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1) 두 가지 종살이의 비유. 비유의 목적과 비유를 사용한 이유로 나누어 살펴보자.
   (까) 비유의 사용 목적. 앞 단락에서 바울은 세례의 비유와 접목된 나뭇가지의  비
유, 형사소송의 비유를 들어 성화의 근거와 당위성은 죄로부터의 해방된 삶이라고  설
명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해방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허공 속으로의 내던
져짐이나 방종에로의 풀어짐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 뒤에  맞
게 되는 '함께 살음'이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 성화의 근거
라면 이제 성화의 실천 원리는 무엇일까? 바울은 은혜 아래 있으므로 거룩한 삶을  살
도록 요구받는 우리의 자리 옮김을 종살이의 비유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 비유는 단순
히 자리옮김을 설명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새 의자나 이사의 비유 등도  가
능했을 것이다. 바울이 성화의 실천 원리로 주장한 것은 바로  '순종'의  개념이었다.
옛날의 복종 의무에서 해방되고, 또다른 복종 의무가 발생하는 것을  노예  제도(종살
이)보다 더 잘 설명해주는 비유가 어디 있을까? 바로 이러한 순종의 개념을 성화의 실
천 원리로 보여주기 위해 바울이 노예 제도(종살이)의 비유를 선택한 것이다.  본문을
통해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는 바로 '믿는자는 종이 주인의 자유 재량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것과 같이 철저하고도 순종적으로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맡겨야 한다'는  것
이다.
   (다) 종살이 비유를 사용한 배경. 바울 당시 로마의 인구 중 3분의 1은 자유인이었
고 3분의 2는 노예(종)였다. 그러므로 로마 교회의 성도들은 노예 제도를  이해하기가
가장 쉬웠다. 또한 그 당시 로마의 노예들은 절대적으로 주인에게 순종해야 하는 신분
이었으며 매매가 가능했다. 이렇게 볼 때 종살이의 비유는 '주인의 바뀜', '철저한 복
종'이라는 주제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소재였다 하겠다.
   (따) 비유에서 발견되는 변화. 본문에서 바울은 '죄의 종'과 '의의 종'에 대해  말
한다. 인간은 누구나 죄의 종이거나 의의 종 둘 중의 하나이다. 중간을  선택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우리 모두는 죄의 종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으로  바뀌었다.
그 은총과 사랑을 믿기만 하면 누구나 의의 종이 된다. 이제 믿는 자들은  모두  의의
종답게 살아야 한다. 그러면 과연 의의 종이 된 우리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
다음의 도표를 살표보자.

                           < 두 종살이의 비교 >
+-----------+--------------------------------+---------------------------------+
| 비교 내용 |           죄의   종            |            의의   종            |
+-----------+--------------------------------+---------------------------------+
|   주 인   | 죄(사망의 직접 원인)           | 의(하나님)                      |
+-----------+--------------------------------+---------------------------------+
|   신 분   | 부정하고 불법한자              | 깨끗하고 합법한 자              |
+-----------+--------------------------------+---------------------------------+
|   보 수   | 파멸                           | 사랑                            |
+-----------+--------------------------------+---------------------------------+
| 얻는 기쁨 | 단명하다                       | 영원하다                        |
+-----------+--------------------------------+---------------------------------+
|결과적 인격| 품위 하락, 나약한 인간성       | 고상한 품위, 강건한 인간성      |
+-----------+--------------------------------+---------------------------------+
|최종적 열매| 수치와 죽음                    | 광휘와 생명                     |
+-----------+--------------------------------+---------------------------------+

  (2) 순조의 출발점이자 도달점 : '의'(義). 바울이 사용하는 '의'라는 말에는  특수
한 의미가 있다. 즉 거기엔 하나님 자신의 실체적인 의와, 하나님 앞에서 의로 인정받
는다는 명목상의 의라는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 의롭지 못한 자가  의
롭다고 인정받는 것 사이에는 논리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아무런 간격이 없다. 믿음  자
체를 즉시 의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체적인 의를 얻는 것은 명목적인 의를 얻는 것과 동일하지  않다.  믿음에
의해 의로 인정 되는 것은 실체적인 의를 얻는 출발점이다. 실체적인 의를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좌우되지 않느나. 다만 믿음을 주인으로 하여 일생 하나님을 섬기면 실
체적인 의에 도달하게 된다. 바울은 그것을 '순조의 종으로 의에 이른다'(16절)고  말
하고 이싸. 믿음에 의해 명목적(名目的)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가 같은 믿음에 의
해 실체적(實體的)으로 의로와지는 과정이 바로 '성화'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신앙 생
활은 믿음으로 명목상 의를 획득한 속에서 출발해 실체적 의를 얻도록 '거룩함에 이르
라'(19절)는 명령에 부단히 순종하는 삶의 연속이라 하겠다.
  (3) 순종의 방법 : '드림과 거절함'. 바울은 본 단락에서 성화의 원리 및  자세로서
순종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로
여길 때(11절), 우리는 우리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13절).  이
때 '드린다'는 것은 무엇의 소속원으로 헌신한다는 뜻이다.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
님께 드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의무이다. 이러한 드림은 영적인 의미에서  볼
때 세상의 악과 사단의 세력을 향한 전투적인 신앙인의 모습을 반영한 것이며  현실적
의미로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하여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죄를 거절해야 한다(12절). 죄가 우리에게 와서 어떤 모의를  제의할
때 우리는 "죄야, 내게서 물러나라. 나는 너와 아무 관계가 없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죄가 우리를 주관치 못하게(14절) 거절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죄를 거
절하는 데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라면 우리는 죄에게 사기당하고 속게 될 것이다.  다만
죄를 거절하고 우리 삶의 전체를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과 합력해야 한다. 홀로 온전히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순종과 충성을 기뻐하시며 우리를  거룩하게
하실 것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내적이고도 인격적인 변화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 인간의 두 가지 자유.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말은 제퍼슨뿐 아니라 인간
이라면 누구나가 본능적으로 갈구하는 명제이다. 성경의 인물들도 이 자유에 대해  여
러 가지 형태의 탐구를 계속해 왔다. 창세기부터 역사서와 예언서, 복음서와 서신들에
나타나는 '자유'는 언제나 상반된 두 가지 본질을 지닌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1) 죄의 종이 누리는 자유. 그리스도를 안기전, 죄의 종이 된  상태의  인간은  의
(義)에 대하여 자유롭다. 어떤 이는 물질주의자가 되어 돈이 곧 자유라고 여기며,  어
떤 이들은 무엇에든 헌신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자유를 획득했다고 믿으며, 또  어떤
이들은 과거를 거부하는 것이 자유라고 말하며, 또 어떤 이들은 모든 권위를 거부하는
것이 자유라고 말하며 이들 모두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자유를 위해 노력하며, 그 자유
를 즐긴다. 그러나 이 자유는 참 자유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자유
내지는 죄를 지을 가능성을 제공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자유일 뿐이다. 왜냐하면  일단 죄의 종이 되어버린 사람은 점점 더 죄의 굴레 속에 깊이 빠져 들어가게 되며  결국은 옳은 일을 행하려고 해도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고후 6:14-16).
  그 한 예로 누가복음 15:11-24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는 그와 같은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 머물면서 자유가 필요하다고 결정을 내렸고 그리하여 집을 떠나 먼 곳에서 일시적으로 자유로운 생활을 즐기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를 떠난 그의 자유는 다만 그를 또 다른 노예 상태로 이끌어 가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다. 즉 그는 그릇된 욕망으 유혹에 빠져 마침내는 노예로 전락해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참된 자유를 발견한 것은 후에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께 순종했을 때였다.
  위의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기를 포기한 자유는 결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유익한 열매를 맺을 수가 없으며 다만 쓰라린 죄의  흔적만을  남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2)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 그리스도인은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의  종살이에서 (5:12;8:13)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는 의의 종이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단순히 죄에서의 해방에 그치는 주인없는 자유가 아니다. 오히려 이 자유의  의미를  이전 주인의 주인의 지배를 벗어나서 새 주인을 섬기며 사는 것, 즉 새 주인에게  순종하며 사는 생활이다(11절). 그러므로 자유는 내주하는 그리스도의 새로운 본성으로부터  오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우리가 율법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억지로 그렇게 해야 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우기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기을 원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 신앙인이라고 하지만 교회 내에서 그리고 개인 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도덕과 윤리를 무시하고 무질서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참된 자유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자유란 바로 순종의 자유, 섬김의 자유, 헌신의 자유인 것이다.


  1. 호크마 주석과 강해

    read more
  2. 호크마 주석, 로마서 01장

    Category로마서
    Read More
  3. 호크마 주석, 로마서 02장

    Category로마서
    Read More
  4. 호크마 주석, 로마서 03장

    Category로마서
    Read More
  5. 호크마 주석, 로마서 04장

    Category로마서
    Read More
  6. 호크마 주석, 로마서 05장

    Category로마서
    Read More
  7. 호크마 주석, 로마서 06장

    Category로마서
    Read More
  8. 호크마 주석, 로마서 07장

    Category로마서
    Read More
  9. 호크마 주석, 로마서 08장

    Category로마서
    Read More
  10. 호크마 주석, 로마서 09장

    Category로마서
    Read More
  11. 호크마 주석, 로마서 10장

    Category로마서
    Read More
  12. 호크마 주석, 로마서 11장

    Category로마서
    Read More
  13. 호크마 주석, 로마서 12장

    Category로마서
    Read More
  14. 호크마 주석, 로마서 13장

    Category로마서
    Read More
  15. 호크마 주석, 로마서 14장

    Category로마서
    Read More
  16. 호크마 주석, 로마서 15장

    Category로마서
    Read More
  17. 호크마 주석, 로마서 16장

    Category로마서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

All the Bibles, Commentaries and Dictionaries here have their own rights.
All rights are reserved for them, not for us. Thanks! Praise our great God, Christ Jesus!

HANGL Lingua Franca 한글 링구아 프랑카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