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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그러므로 - 이는 1장에서부터 4장, 특히 3:21부터 4:25까지의 내용에 대한 결론이요 그 적용이 새롭게 전개되기 시작함을 시사한다. 4장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또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구속된 자에게도 그 칭의의 혜택이 전가됨을 말하였다. 이제 5장에 들어가면서 '그러므로'( , 운)라고 말하는 것은 이신 칭의에 대한 결론뿐만 아니라 그 적용이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됨을 의미하는 것이니, 이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칭의의 열매들을 언급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 여기서 우리는 칭의의 결과에 대한 바울의 진술에 대하여 살펴보기에 앞서 '믿음' 자체에 대한 성격 규정이 필요하다. '믿음'에 대한 견해에 따라서 본서의 나머지 부분이 어떻게 해석되는지가 판가름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따른 선물이므로 칭의의 조건이 될 수 없고 다만 율법과 대치되는 개념으로만 생각되는 경향이 있다(Deissmann, Michaelis). 이는 믿음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인간의 행위가 될 수 없다는 입장에서 취해진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믿음이 순종과 동일시되며(히 3:18, 19), 본절에서처럼 '믿음으로'( , 에크 피스테오스)라는 말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 디카이오덴테스)이라는 동사의 조건이 되는 구절에 대해서는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없다(3:22, 30;갈 2:16;3:14;빌 3:9). 이와 관련하여 불트만(R. Bultmann)은 "공적에 대한 철저한 포기로서,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구원의 길에 공손하게 굴복하는 것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으로서 '믿음'( , 피스티스)은 옛 '자아' 대신 새로운 '자아'가 형성되는 순종의 자유로운 행위"라고 역설하였다(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 여기서 불트만은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기보다는 인간의 결단에 의해서 즉 '아래서 위로' 행하는 행위임을 설파하였다. 이러한 불트만의 주장에는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보수주의의 견해(Machen)를 부정하면서 '믿음'이라는 단어가 바울에게서 애매하게 사용된 것을 수정해 보려고 하는 시도가 엿보인다. 그렇지만 '믿음' 자체가 우리의 의지로 가능한 것인가 ? 불가능한 것을 바라고 믿는 그 '믿음'이 우리의 의지로 가능하다면, 합리적인 인간은 무엇을 근거로 불가능한 것을 믿는 신앙을 소유하게 되었는가 ? 불트만은 이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을 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믿음'에 대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순종'이 '믿음'과 동일시되는 것은 '믿음'이라는 심적(心的) 요소가 외부적으로 하나님 앞에 '순종'이라는 것으로 구체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믿음은 심적 요소로서 이 역시 하나님의 은사(恩賜)가 아니고는 믿음을 지니는 것이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응답할 수 있게끔 인간의 심성으로 하여금 '믿음'을 향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이 없이는 인간은 '믿음'을 갖을 수가 없다. 따라서 '믿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된 인간과 의로우신 하나님 간에 평화의 관계를 맺게 해주는 주체이시다. 여기서 바울이 '화평'( , 에이레네)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은 죄인된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으나(1:18;2:5)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진노의 문제가 해결 되었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그리고 또한 이 용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이 칭의를 얻게 된 결과를 설명하기 위하여 채택되었다. 그런데 혹자는 본절의 '화평'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화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흐르는 평안 상태를 가리킨다고 본다(Shedd). 그러나 본절의 문맥을 고려할 때 그리고 기타 바울 서신에 나타난 '화평'이란 단어의 사용을 감안할 때 그와 같은 주장은 지지를 얻지 못한다. 즉 본절의 '화평' 앞에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라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대한 언급이 나오므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대한 언급이 나오므로,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사랑하는 호의적 관계로 진전되었다는 맥락에서 화평이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골 1:20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셨다는 사실이 강조되었고 엡 2:14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자의 화평이 되신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으므로, '화평'이란 단어는 진노 아래 있던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케 되었다는 견지에서 이해될 수 있다. 결국 '화평'은 인간 내부의 인격적 변화를 말하기보다는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이 회복의 관계로 진전된 점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과의 우호적 관계라는 사실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샘물처럼 끊임없이 흐르는 하나님의 평화를 내적으로 누리게 된다.

=====5:2
 그로 말미암아 -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해 다시 반복하여 말하고 있다. 이는 베드로가 이스라엘의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 앞에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행 4;12)라고 하면서 구원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뿐이라고 역설한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 초기의 동방 사본들과 서방 사본들에는 '믿음으로'라는 문구가 없으며 현대의 일부 영역본에도 이 말이 생략되어 있다(NEB, RV, RSV). 그러나 이 말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본절의 문맥상 그 의미가 함축되어 있으므로 이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편 엡 2:18에서 바울은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선언했는데, 이것은 본절과 내용상 같은 의미이다. 성도가 '믿음으로 서 있게'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사역에 의한 것이며 '은혜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본절에서 암시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약속하신 그 은혜 속으로 우리가 스스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들어감을 얻는' 것이다. 여기서 '들어감'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사고겐'( )은 '접근'(access), '인도', '채용' 등으로 번역될 수 있으나 여기서는 '인도'의 의미로 봄이 가장 적절하다. '프로사고겐'은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나 신앞에 인도되거나 소개되는 특권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F.F. Bruce). 성도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를 구원주로 믿고 그의 자녀가 되었으며 그분에 의해 존귀하심과 영광중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인도함을 받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는 1:23 주석을 참조하라. 본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우코메다 에프 엘피디 테스 돝세스'( )는 직역하면 '하나님의 영광의소망 가운데 우리가 자랑하느니라'가 된다. 여기서는 개역 성경의 '즐거워하느니라'에 해당하는 동사 '카우코메다'( )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1) 일반적으로는 '자랑하다'란 의미를 지니지만 이는 유대인이 율법을 자랑하는 것과 유사한 어감이 풍기기에 오히려 '즐거워하다'(rejoice, KJV, NIV, RSV)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많다(Hendriksen, Black). 그리고 혹자는 '영광스러워하다', '영광을 돌리다'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Lenski). 그렇지만 본절에서는 '자랑하다'든지 '영광스러워하다'든지 또는 '즐거워하다'든지 어느 번역을 취하든 의미상 별 차이가 없다. 바울이 지금 진술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 가운데 있는 성도의 내적인 변화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머레이(Murray)는 '최고로 기뻐하고 자랑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2) '카우코메다'가 1절의 '소유하다', '취하다'를 의미하는 '에코멘'( 혹은 )의 해석과 같이 청유형(請誘形)으로 '즐거워하자'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3절과 본절의 문자 구조를 비교해 볼 때 청유형보다는 평서문의 문장이 더 자연스럽고 3절과도 조화가 잘 된다(3절 주석 참조). 그러면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며 즐거워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 첫째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은 곧 성도들의 영광이 된다고 그리스도께서 논증하셨기 때문이며(요 14:3;17:24) 둘째로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며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 계획이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다(히 2:10;벧전 5:4).

=====5:3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 '환난'으로 번역된 헬라어 '들마세신'( )은 동사 '들리보'( )의 여성 명사형이다. 원래 '들리보'는 포도즙 틀에서 포도즙을 짜내듯이 피와 땀과 눈물과 고통을 '짜낸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즐거워하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우코메다'( )는 동사 '카우카오마이'( )의 1인칭 복수 현재형으로 '기뻐 날뛰다', '의기양양해 하다', 또는 '자랑하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바울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게 된 즐거움이 복음으로 인해 받게 되는 핍박과 환난보다 훨씬 큼을 강조하고 있다. 성도가, 괴로움과 슬픔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환난을 극복하며 오히려 즐거움 가운데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세상의 즐거움과 고통은 잠깐 피었다 사라지는 안개처럼 가변적(可變的)이요 일시적인 반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즐거움과 기쁨은 불변하며 영원하기 때문이다(고후 4:18). 더더욱 성도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바, 영원한 세계에 대한 소망이 지대하고 극명하기 때문에(요 14:1-3) 현재의 모든 고난을 즐거움 가운데 상쇄(相殺)시킬 수 있다.
 환난은 인내를 - 복음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필연적으로 환난이 닥쳐오며 인내가 요구된다(마 13:20-22). '인내'로 번역된 헬라어 '휘포모네'( )는 동사 '휘포메노'( )에서 유래한 여성 명사이다. '휘포메노'에는 '최후까지 남는다', '참는다', '계속하다', '기다린다'는 의미가 있다. 성도들이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 때 극심한 핍박과 고난이 임하나 이 모든 환난에서 성령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참고 견디며 끝까지 살아 남을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성도의 인내는 성령의 사역의 결과로 주어지는 수동적 의미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성품과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의미까지 함축한다(W. Hendriksen).

=====5:4
 인내는 연단을 - '연단'(鍊鍛)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키메'( )는 '증명하다', '시련을 주다', '시험하다', '분별하다', '택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도키마조'( )에서 유래한 여성 명사로서 '연단' 외에 '인격', '증거', '문서', '자격'등의 의미를 지니며, 일반적으로 '엄격한 시험 또는 혹독한 시련을 통과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용광로에서 금이 여러번 단련됨으로써 정금과 순금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성도는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을 참고 견딤으로써 그 자신이 정화된다. 여기에는 성령의 사역이 함께하며 이 믿음의 시련을 통과한 성도는 금보다 더 귀한 신앙인으로 증명된다(벧전 1:7). 혹자는 '도키메'를 '체험'으로 번역한다(Calvin). 즉 그는 본절의 '도키메'를 '하나님의 확실한 보호하심에 대한 체험'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도의 삶에 있어서 환난을 당하고 그 가운데서 인내하는 이 모든 과정들이 체험이므로 본절에서는 이와 같은 포괄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 바울은 신앙에서 소망의 문제로 접근했다. 신약성경에서 성도의 소망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하지만 보다 구체적으로는 '부활의 소망'을 의미한다(행 28:20). 바울은 죽은 자가 다시 사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 성도의 신앙도 헛되다고 가르쳤다(고전 15:12-16). 이 말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임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본절의 '이루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르가제타이'( )는 '만들어내다', '행하다', '준비하다', '정복하다', '성취하다'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본절에서는 어떤 사건에서 어떤 결과를 '산출해 낸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성도는 불 시험과 같은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으며 이러한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부활에 대한 소망이 구체화되고, 그 소망만을 붙잡게 된다. 또한 본절의 '앎이로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도테스'( )는 '오이다'( )의 주격 남성 복수 분사이며, '오이다'는 '에이도'( )의 제 2 완료 분사이다. '에이도'는 '기노스코'( )가 주로 육적(肉的)인 앎을 의미하는데 반해 영적 체험을 통해 얻어지는 지식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에이도테스'는 분사 형태이므로 체험을 통해 획득한 영적 지식이 부단히 계속됨을 의미한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소망이 물리적 지식이 아니라 부단한 영적 지식을 통해 성도의 삶 속에 확고하게 자리잡게 됨을 시사하고 있다.

=====5:5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 바울은 연단을 통해 이루어진 소망이 부끄럽게 하지 않는 근거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성도 가운데 계시며 역사하시는 성령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성도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보증해 주시는(인쳐 주시는) 분이시기에 전신앙(全信仰)의 과정에 함께 계시고 보증하신 그 약속이 이루어지게 하신다. 한편 '성령으로 말미암아'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디아 프뉴마토스'( )이다. 이처럼 헬라어 전치사 '디아'( ) 다음에 목적격인 '프뉴마'( )가 오지 않고 소유격인 '프뉴마토스'( )가 온 것은 성령이 원인이나 결과가 아니라 하나의 수단 내지 방법이 됨을 암시한다. 본절 외에도 신약 성경 전체에서 '디아' 다음에 '프뉴마'가 온 경우는 단 한번도 없다. 다만 '엔 토 프뉴마티'( )처럼 여격이 와서 방법을 나타낼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자랑할 것이 되지 못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현재 자신이 성령으로 충만하다 하더라도 이것으로 장래의 구원까지 보장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은 구원에 이르는 방법이요 수단이므로 중요한 것은 성령 그 자체보다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가까이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가 아니면 하나님께로 갈 수 없는 것이다(요 14:6).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 성령께서 성도와 함께 계시는 결정적인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계심은 하나님의 사랑이 성도를 향해 물붓듯이 부어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바울은 8:39에서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고 선포할 수 있었다. 본절의 '부은 바 됨이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케퀴타이'( )는 3인칭 단수 완료 수동태 직설법으로 '쏟아 부은 바 되었다'는 의미이다(has been poured, RSV).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이 액체처럼 쏟아 부어졌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충분히 넘치게 부어졌을 뿐만 아니라 모이는 물처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성도들에게 베풀어졌다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하면서 그 사랑의 표현이 가장 절정에 이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 바울은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라고 언급함으로써 본절의 의미를 보충하며 더욱 명확하게 해주고 있다. 바울이 엡 2:3에서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진술하고 있듯이, '연약할 때에'는 믿음이 약한 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시점을 가리킨다. 이는 '연약할 때에'로 번역된 헬라어 '아스데논'( )의 의미를 살려볼 때 분명해진다. '아스데논'은 '아스데네스'( )의 제 2격 복수로서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소망이 없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자연인은 그 자신이 스스로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는 힘이나 소망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특히 바울이 '우리가 아직 연약하다'는 사실을 말한 것은 우리가 전혀 구원의 소망이나 그 길을 찾을 하등의 힘이 없었음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화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代贖)의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과 가치가 전혀 없었음을 강조하고자 함이었다.
 기약대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 카이론'( )은 '정해진 시기에' 또한 '적절한 때에'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경륜(經綸)이 세상 가운데에서 시행될 정확한 시점이 있음을 보여 준다(요 2;4;4:23).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일찍이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된 바이거니와(사 7:14;53:2) 하나님께서 일을 행하실 때에는 막연한 시기에 하는 것이 아니라 만세전(萬歲前)에 예정하신 계획에 따라 행하신다. 본절의 '기약대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때가 '적절한 시기' 즉 '인류에게 가장 소망이 없던 때'였음을 의미하는 바, 사건이 이루어진 때의 중요성을 강조함과 더불어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구약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께서 기약대로 이 땅에 오셨듯이, 재림도 기약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 24:42-44). 실로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로서 당신의 영원하신 계획대로 인류와 유주의 역사를 다스리시며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시다(민 23:19).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 경건치 않은 자는 8절의 '죄인'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sinners, LB). 곧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이 죄인이며 또한 경건치 않은 자이다. 한편 '...를 위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르'( )는 그 외에도 '...대신에', '...에 관하여'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불경건한 자들의 입장에서 이루어진 대속적인 사건이었음을 나타낸다.

=====5: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혹 있거니와 - 본절에서는 의인(a righteous man)과 선인(a good man)이 대조되어 있다. 혹자는 이 둘을 구분하여 '선한 사람은 의로운 사람보다 더 위대하다는 특징을 지닌다'고 진술한다(Lenski). 물론 문자적으로나 그 의미상 두 용어는 엄격하게 구분된다. 의인이 정의의 차원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선인은 사랑과 덕을 베푸는 사람이라는 어감을 지니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Lightfoot, Murray). 그러나 바울이 히브리인들이 시문학에서 즐겨 사용하는 평행 대구법(parallelism)을 이용하고 있으므로 본절은 평행된 두 구절이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나아가 서로의 의미를 보충해 주는 문장 구조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본절은 의롭고 선한 사람을 위해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가끔 죽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의미를 지닌다(Murray). 이와 같은 본절의 핵심은 인간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가끔 출현할 수 있다는데 있지 '의인'과 '선인'을 구별하는데 있지 않다. 더 나아가 본절은 의롭거나 선한 사람을 위해 죽는 희생적 행위 자체도 죄인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는 결코 견줄 수 없음을 함축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절대적 사랑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인간 세상의 보편적이고 통속적인 사랑을 소개하는 형식의 비교법을 사용하고 있는 본절은 8절의 내용의 서론격이다. 본절이 8절 내용에 대해 서론격이라함은 의인이나 선인을 위해 죽는 자는 혹시 있을 수 있으나, 죄인을 위해 죽는 자는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점에 있다. 결국 본절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절대적 우위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는 너무나도 무가치하고 자격이 없는 인간의 본질적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 본절에 이르러 바울은 요점에 봉착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인들'( , 하마르톨론)을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죄인'은 도덕적으로 의롭거나 선하지 않은 사람일 뿐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시작된 인간의 전적 타락성과 부패성으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J. Calvin). 이러한 의미는 9절에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이라는 대조적 표현이 나옴을 볼 때 분명하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대조적 표현은 희생된 생명의 무한한 가치와 그분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입은 사람의 무가치성의 대조를 극명하게 해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 이에 대한 바울의 표현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렸으니'(갈 1:4),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고후 8:9),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엡 5:2),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딛 2:14)등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으심에 대하여 풍부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한편 '...을 위하여'( , 휘페르)라는 표현이 6-8절에서 모두 네 번 나온다. 그는 본절에서 이 전치사 대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있어 대속적 측면을 강조하는 전치사 '안티'( , '때문에')를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까닭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함과 더불어 그밖의 다른 것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희생이 주는 대속적 특징 이외에 그리스도 안에 내재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따라 남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의미를 강조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휘페르'라는 단어의 사용은 매우 적절하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바울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관계,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과 세상과의 화목(고후 5:19) 그리고 영적으로 죽은자를 사랑으로 이끄시는 그리스도(요 15:12, 13) 등에 관하여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 중에서 바울이 두드러지게 나타낸 것은 특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이다. 그는 이것을 강조하여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라고 지적하였다. 여기서 '자기 자신의 사랑'이라고 말함은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이고 영원하며 참됨을 의미한다. 인간의 사랑은 자기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 모범을 따르는 사랑이요 배운 사랑이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사랑은 그 근원이 인간에게 있지 않고 그 사랑을 주신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요일 4:10, 19).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확고하고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드러내셨으니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게에서 죽게 하셨다. 한편 본절의 '확증하셨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슈니스테신'( )은 '추천하다', '드러내다'란 의미이다. 그래서 영역 성경을 '나타내 보여 주다'(demonstrate)로 번역하거나(NASB, NIV), 혹은 단순히 '보여 주다'(show)로 번역하기도 했다(RSV). 무엇보다 본절에서 주목되는 것은 바울이 동사의 시제로 현재성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헬라어의 현재 시제는 현재에 발생하는 단순한 사건을 기술하는 것 뿐 아니라 현재 진행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슈니스테신'을 보다 정확히 번역하자면 '나타내 보여주고 계시느니라'(is demonstrating)로 된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은 과거의 단 일회적 사건으로 끝이 났으나 하나님의 사랑은 바울이 본 서신을 쓰는 당시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도 끊임없이 부어지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5:9
 본절은 6절과 8절 내용의 연속이나 좀더 자세하고 진일보한 면을 갖는다. 즉 6절에서는 '우리가 연약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고 하셨고 8절에서는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셧다'고 하였다. 이제 본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신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운'( )은 주로 '그런즉' 또는 '그러므로'라고 개역 성경에 번역되었다(1절;4:9, 10, 16, 22). 본절에서는 앞절의 설명과 연결짓기 위해 유도된 접속사의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이 이유를 나타내는 분사 구문이기 때문이다. 또한 '운'은 앞에서 말한 바에서 한층 논리가 진전됨을 암시한다.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 4:25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칭의에 대한 설명이 있었으나 본절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대속(代贖)에 대한 설명이다. 즉 4:25은 부활을 통해 '생명을 주는 영'이 되신 그리스도가 칭의의 근원이라는 진술이며, 본절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으심이 칭의의 근거라는 진술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 피를 인하여'라는 표현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 문구는 헬라어로 '엔 토 하이마티 아우투'( )이며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의 피 안에서'이다. 여기서 바울이나 전치사 '디아'( )를 사용하지 않고 '엔'( )을 사용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디아'는 '....을 통하여'(throught)라는 방법, 수단의 의미를 지니나 '엔'은 '어떤 사물이나 사람의 상태, 조건'을 나타내는 포괄적 의미를 갖는다. 특히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 엔 크리스토), '주 안에서'( , 엔퀴리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 엔 크리스토 예수)등의 독특한 표현을 사용할 때 '디아'를 썼다. 본절에서 '디아'의 사용은, 그리스도의 보혈에는 대속적 능력이 있어 죄인들을 의롭게 하는 근원이 될 뿐만 아니라 한번 의롭다 함을 얻은 자들을 계속 다스리시고 역사하시는 권세와 능력이 있음을 함축한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으며 이후에도 그리스도의 피의 권세와 능력의 작용을 받아 계속하여 성화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한편 본절의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은 1절의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이라는 표현과 비교가 된다. 두 구절은 상호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즉 1절에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음에 있어 인간 편의 책임과 의무로서의 믿음이 강조되었고 본절에서는 의인(義認)의 근거로서의 하나님의 대속적 피흘림이 강조된 것이다.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한 진노하심에서의 구원이 칭의를 위한 연결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여기서의 '칭의'는 재판관에 의해 무죄 선고를 받아 벌을 면하게 되는 법정적인 차원의 '의'라고 단정지을 수 있다. 따라서 본절에서는 그리스도가 죄인된 인간과 진노하시는 하나님 사이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 뜨리는 '화목 제물'(propitiation)이 되셨다는 의미가 강하게 부각되고 있다. 한편 '더욱'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폴로 말론'( )으로서 비교법 강조의 의미를 지닌다. 즉 본절에서 '폴로 말론'은 단순히 '더욱'이란 의미가 아니라 '훨씬 더', '더욱더'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피흘림이 칭의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다는 뜻이다.

=====5:10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 이 표현은 '우리가 연약할 때에'(6절), 또는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8절)란 의미보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에 형성되는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를 보다 명확하고 적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심을 이루는 단어 '원수'( , 에크드로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즉 '하나님을 향해 적개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능동적 의미를 갖는다는 견해(Lightfoot)와 '하나님이 원수로 여기는 사람'이라는 수동적 의미를 갖는다는 견해가 있다(Murray, Harrison). 두 가지 견해는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며 모두 일면 타당성을 갖는다고 본다. 그러나 어느 한쪽만을 주장한다면 다른 일면을 소홀히 하는 자가 당착(自家 撞着)에 빠지게 된다. 다시 말해서 '원수'를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범죄성의 측면에서만 이해한다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놓쳐버리게 되며, 또한 '원수'를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하심에서만 이해한다면 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간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자의 견해를 모두 포괄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원수하였을 때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드로이 온테스'( )의 '온테스'가 능동이나 수동의 의미가 아니라 현재 분사로서 다만 어떤 상태나 조건을 나타낼 따름이라는 점에서도 분명해진다.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 하나님과 죄인된 인간이 화목(和睦)될 수 있었던 근거는 물론 '칭의'이다. '칭의'가 없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은 있을 수 없다.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의 상태에 머무르는 자에게는 진노의 채찍을 내리시나,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에게는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은혜를 내리신다. 바울이 이처럼 화목을 강조하는 것은 '화목' 자체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바울이 고후 5:18에서 언급하기를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화목케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할 때에, 이 직책이란 물론 죄악된 세상과 하나님을 화목케 하는 제사장적 직분(벧전 2:9)이지만 좀더 포괄적인 의미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선전하는 직책'이다.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 상반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화목에 대하여 진술한 반면, 본 구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화목에 대하여 진술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죽음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죄인된 인간의 구원과 화목에 있어 더욱 확실한 보증이 됨을 역설하고 있다. 그 이유는 (1) 그의 부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따르는 무리에게 부활을 확증시켜 주셨으며, (2) 그의 부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 , 조에)이 그를 믿는 성도들에게 공급되므로 성도는 그 생명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고 하나님의 후사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고전 15장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보다 부활을 더욱 강조하게 된 것이다. 한편 본절의 '화목된'과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각각 '카탈라겐테스'( )와 '소데소메다'( )이며 이 둘은 모두 1인칭 복수 수동태이다. 이는 하나님과 죄인된 인간과의 화목을 이루는 주체가 하나님이시며 또한 구원을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드러낸다. 칭의와 화목 그리고 구원은 인간의 공로나 업적과는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은 것이다(3:25-28).

=====5:11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화목을 얻게 하신'이란 표현은 지금까지 바울 자신이 설명했던 '칭의', '진노하심에서의 구원', 그리고 '구원'을 포함하는 의미로 해석해도 별 무리가 없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모든 과정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 여기서의 '즐거워하다'( , 카우코메노이)란 말은 2, 3절에서 언급된 동사인 '카우코메다'( )의 분사형에 대한 해석이다. 본절에서도 이 동사는 '자랑하면서 즐거워하다'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exalt, MB). 그러면 본절에서 의미하는 '즐거움'은 구체적으로 어떤 즐거움인가 ? 이에 대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구속(救贖)의 은혜를 입은 자들의 즐거움이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지심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으며 영생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둘째로, 영원한 소망을 바라는 즐거움이다. 바울은 2절에서 이 즐거움을 언급했으며 본서의 다른 구절과 고린도후서에서도 수차례 언급하고 있다. 8:18에서는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하였고 8:24에서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하였으며, 고후 5;1에서는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하였다. 셋째는, 참된 즐거움이다. 현재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누리는 즐거움은 일시적이요 가변적이며 또한 거짓되고 기만적이나 그 근원과 이유를 하나님께 둔 즐거움은 영원한 즐거움이요 보증이 있는 즐거움이기에 참되다.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만물의 근원이요 축복 그 자체이시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함으로써 아무것도 부족할 것이 없는 행복을 누리게 된다'라고 하였다.

=====5:12
 이러므로 - 이는 헬라어 '디아 투토'( )의 번역으로 어떤 학자는 이 접속사가 6-11절과 12-21절 내용을 하나로 연결해 주고 있다고 보지만 (Lenski), 본절에서 이 접속사의 사용은 매우 부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진술과 본절부터 진술될 내용은 직접적으로 어떤 상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디아 투토'를 별 의미 없이 다른 주제로 전환하기 위해 사용된 단순 접속사로 이해해야 한다. 이는 히브리식 문장 전개 방법임을 이미 2:1의 주석에서 설명한 바 있다. 한 사람으로...
들어오고 - 바울은 그리스도로 인해 새시대(new aeon)가 시작됨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 옛 창조의 시작에 대한 설명을 시작한다.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가 오염되었음을 가리킴과 동시에 '죄의 세력'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하셨던 명령을 염두에 두었음이 분명하다. 죄와 사망은 불가피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여기서 '사망'은 (1) 육체적인 죽음, (2)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엡 2:1;5:14;골 2:13;딤전 5:6;계 3:1), (3) 지옥의 형벌로 영원한 죽음을 의미한다(계 21:8). 본절에서는 두번째와 세번째 사망의 개념이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지만 6:23은 마지막 영생과 사망이 대조되어 있으므로 세번째 사망의 개념이 더욱 타당하다. 자세한 것은 6:23 주석을 참조하라.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 바울은 한 사람에 의해 세상에 들어온 죄가 보편성을 지님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그 죄의 보편성에 대해 증명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이미 1:18-3:19에서 이미 설명을 했기 때문이다.
 이르렀느니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엘덴'( )은 일반적으로 '통과하다', '퍼져가다'를 의미한다. 그래서 몇몇 영역 성경은 문자적으로 '퍼져가다'(spread to)로 번역하기도 한다(RSV, NASB). 그렇지만 또 어떤 영역 성경은 개역 성경과 같이 '이르렀다'(came to)로 번역하기도 한다(NIV). 어떤 번역을 취하든지 본절의 의미를 손상시키지는 않는다.

=====5: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 본절은 삽입구로서 반론(反論)을 염두에 두고 기록한 내용으로 보인다. 그 반론이란 '모세 율법이 있기 전까지 과연 죄가 존재했던가'라는 물음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답변하기를 하나님께서 비록 기록된 율법으로 죄를 심판하지 않으셨으나 인류는 모태에 있을 때부터 저주 아래 있었다고 한다. 즉 율법이 공포되지 않았을 때의 범죄자들 또한 결코 죄의 형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모세 율법이 주어지기 전까지의 기간 동안 죄의 결과로 생기는 사망이 인류를 지배했다는 점에서 증명된다(14절). 또한 이 같은 사실은 모세 율법이 적용되기 이전의 시대에 아우를 죽인 가인이 하나님께 형벌을 받은 사실(창 4:9-15), 죄악이 관영했던 노아 당시의 사람들이 홍수로 심판을 받은 사실(창 6:1-7), 바벧탑 사건(창 11:1-9), 음란한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창 19:23-29)등 구약성경에 기록된 구체적인 여러 실례들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결론적으로 죄는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14절) 기간에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구절에는 죄의 (1) 역사성(歷史性)과 (2) 보편성(普遍性)이 시사되어 있다. 율법이 없을 때에는...
아니하느니라 - 모세 율법 전에도 각 나라마다 비록 원시적이긴 하지만, 사회를 통치해 나가는 불문률(不文律)과 법률 및 도덕적 관습이 있었으며 사람들은 그것들의 지배를 받아왔었다(Ur-Nammu Code, Eshnunna Code, Lipit-Ishta Code, Hammurabi Code, Hittite Code). 그러므로 율법 이전에도 '죄에 대한 정죄'가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왜 본절과 같은 진술을 하였는가 ? 바울은 단순히 법에 저촉되는 '죄'에 대하여 진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죄, 곧 하나님과 분리되고 하나님을 반역하는 삶 그 자체를 죄로 규정하고 있다. 율법이 있기 전에 사람들은 죄를 윤리적인 것으로만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었으며,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분리되고 하나님을 반역하던 삶이 죄라는 사실을 몰랐으므로 그러한 것을 죄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는 하나님 앞에서의 죄 의식이 결여 되었다는 것이다. 역으로 모세 율법이 공포되었을 때 인류는 진정한 의미에서 죄를 죄로 인식하게 되었다.

=====5:14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 아담과 범죄는 (1)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며, (2) 하나님과 같이 되어 보려고 하는 교만이었다. 그리고 모세 이전 사람들이 이와 동일한 범죄를 짓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죄인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담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거역하는 본성을 이어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호세아 선지자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호 6:7)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인간의 범죄가 단순히 자범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파생된 근본적인 죄임을 선포하고 있다.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 본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바실류센호 다나토스' ( )는 '사망이 왕권을 잡았다'로 번역된다 이 말은 세상이 죄악으로 충만했다는 의미이며, 보다 적극적으로는 죄악의 세력이 꺾을 수 없을 만큼 강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말에 대조 되는 것으로 바울은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21절)라고 표현했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 이렇게 아담을 그리스도의 표상(表象)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상하게 생각될 수 있다. 두 사람은 신분이나 인류에게 미친 영향면에서 판이하게 다르기 대문이다. 그러면 아담이 그리스도의 표상이 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 (1) 아담이 옛 시대의 시조인 것처럼 그리스도는 새 시대의 시조이다. (2) 아담의 범죄가 모든 사람에게 미치듯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義)도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고전 15:22;고후 5:14, 15). 즉 아담이 범죄의 시조라면 그리스도는 의의 시조이시다.
 이 두 가지 의미에서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형'( 튀포스)이 될 수 있다 (type, RSV=====5:15
 그러나( , 알라) - 이는 앞에서 말한 내용과 반대되는 뜻의 내용이 전개될 것임을 암시한다. 앞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아담의 유사점을 말하였으나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와 아담의 차이점을 말하고자 한다.
 이 은사 - 이는 언급된 사실과 관계있는 것이 아니라 본절에 언급된 '은혜'와 관계된다.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 '그 범죄'라 함은 '아담의 범죄'와 '아담의 범죄외의 다른 범죄', 즉 '모든 범죄'를 지칭할 수 있다. 그러나 본절 하반절은 아담의 범죄와 그리스도의 은혜를 비교하고 있으므로 대표적으로 '아담의 범죄'라고 해석하는 편이 타당하다. 그리고 헬라어 본문에서 '범죄'( , 파랖토마)가 단수형이라는 사실도 이 견해를 지지한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사'( , 카리스마)와 아담에서 비롯된 '인간의 보편적인 범죄'를 대조시키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부각시키는 논리를 전개시키고 있다. 한 사람의...
죽었은즉 - 12절에서 바울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와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했으나, 본절에서는 '모든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두 용어 사이에는 의미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 대표 단수를 사용하든지 단순히 복수를 사용하든지 헬라어 문법에서는 '모든'을 의미할 수 있다. 물론 영어 문법에서는 '모든'을 의미할 수 있다. 물론 영어 문법도 이와 같다. 인간의 부분적 타락을 주장하기 위해 이러한 사실을 무시해 버리려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나, 이것은 바울이 앞에서 '모든'이라는 총칭 형용사를 사용한 것과 비교할 때 전혀 근거가 없다.
 더욱 - 이 단어는 9절에서와 같이 단순한 비교가 아니라 비교급 강조의 의미를 갖는다(much more, KJV). 아담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사망에 처하게 되었으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와 사망의 권세는 무너지고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은 소망과 기쁨 가운데 넘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Lenski).
 하나님의 은혜 -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선물'과 동일하다.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서만 모든 사람에게 미치기 때문이다.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 앞에서 이미 바울은 '한 사람의 범죄'를 언급했으나 지금은 '한 사람의 은혜'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범죄가 한 사람 아담으로부터 시작되었듯이 은혜도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로써 상반절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해진다.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 여기서 '많은 사람'은 앞에 언급된 '많은 사람'과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넘쳤으리라'는 동사는 14절의 '왕노릇하였나니'라는 동사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한편 '넘쳤으리라'로 번역된 헬라어 '에페릿슈센'( )은 '물이 그릇에서 넘쳤다', '강물이 둑에서 넘쳤다'는 뜻으로 그리스도의 은혜가 인류를 구원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넘치며 모든 믿는 자에게 구별없이 풍성하게 부여된다는 문맥상의 의미를 갖는다. 또한 동사 '에페리스슈센'은 목적어로서 '에이스 투스 폴루스'( , '많은 사람에게'), 즉 4격을 취한다. 헬라어에 있어 4격은 3격과 같이 단순 목적의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을 꿰둠고', '...을 관통하여'라는 의미도 내포한다. 즉 그리스도의 은혜가 개인의 전인격을 철저히 변화시키며 죄악을 씻고 거듭나게 한다는 것이다.

=====5:16
 본절에서 바울은 범죄와 은혜의 기원(起原)과 그 위력(威力)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 한다. 즉 범죄는 한 사람에서부터 시작되었으나 은혜는 사망이 왕노릇하는 데서, 또는 범죄가 만연되어 있는 데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은혜'의 기원과 위력이 '범죄'보다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선물( , 도레마) - 이는 15절에서 언급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을 가리킨다. 15절에서 '은사'( , 카리스마)가 '범죄'( , 파랖토마)와 비교되었고 본절에서는 '은사'가 '심판' ( , 크리마)과 비교되었다. 은사는 값없이 주는 용서이며 심판은 엄격한 공의로서 모두 하나님이 주체이시다. 만일 하나님께서 공의로 심판하신다면 우리는 모두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고 값없이 우리를 의롭다 하셨다. 본절은 바로 이 칭의의 선물이 심판의 효능보다 우월함을 선언하고 있다.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 '의롭다 하심'( , 디카이오마), 곧 칭의(稱義)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하심으로 죄인들을 사면해 주시고 의로운 자들이라 칭하신 것으로서 이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주신 선물이요 은사이다. 또한 18절의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를 보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구원을 얻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의롭다 하심이 없이는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죄와 사망의 세력 아래 놓인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에서 회복되어 구원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5:17
 사망이...왕노릇하였은즉 - 본절은 12, 14절의 말씀을 요약 반복하고 있다. 즉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가 선하게 창조된 세상에 들어와 온 세상을 오염시켰고 그 가운데서 통치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로써 본래 하나님을 최고의 통치자로 삼고, 그의 대리자로 인간, 그리고 인간의 지배를 받는 만물 순의 질서 체계가 죄의 지배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대신에 죄(사단)가 최고 통치자로 군림하게 되어 하나님의 존재가 완전히 무시되어 버림과 동시에 인간도 아무 주체 의식 없이 죄의 종노릇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질서 내지 통치권의 변화는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시는 장면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마 4:8, 9). 마귀는 천하 만국을 자기의 것인양 자랑하면서 예수로 하여금 자기에게 경배할 것을 요구하였다. 여기서 '경배하라'는 사단의 요구는 최고의 통치자로서 마땅히 받아야만 하는 예배행위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세상의 지배권을 행사할 권리를 부여하셨는가 ? 결코 그렇지 않다. 마 28:18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 자신이 친히 하나님으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음을 가르쳤다. 만일 그러한 권세가 없다면 예수는 세상의 구주 또는 주인(Lord)이 될 수 없다. 다만 사단은 자신이 그러한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인 양 속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실제로 사단이 죄로 세상을 오염시켰다는 의미에서는 그 역시 세상의 지배자로서 자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 - 본장에서 바울이 즐겨 사용했다. 자세한 것은 9절 주석을 참조하라.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 여기서 '은혜'와 '의의 선물'은 별개의 개념이 아니라 동일한 의미에 대한 서로 다른 표현으로서 저자가 주장하려는 논지의 의미를 분명히 밝혀 주는 구실을 한다.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왕노릇하리로다 - 상반절과 비교할 때 대조와 구분이 완전해지려면 본 구절은 '생명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왕노릇하리로다'라고 구성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본절에서는 '왕노릇하다'의 주어가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다. 이것은 분명히 바울의 의도적인 변형이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바울은 분명히 성도가 '하나님의 후사(後嗣)'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성도가 '하나님의 후사'라는 것은 단순히 '유업을 잇는 자'(갈 3:29)만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갖는 영광된 신분을 강조하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실제로 계 22:5에서는 성도가 영원 무궁토록 '왕 노릇할'것이 언급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성도의 신분을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이라고 했다. 그리고 '왕노릇'이란 말은 '죄의 종'되었던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위치가 정반대로 바뀌게 됨을 보여주고 있다(21절).

=====5:18
 바울은 다시 12절부터 지금까지 진술했던 것을 요약하여 말하고 있다(Murray). 그러면서 그는 죄인된 인간이 생명에 이르게 된 과정을 설명한다. 즉 (1) 한사람(아담)의 범죄로 -> (2)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으며 -> (3) 예수그리스도의 의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 (4)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 (5) 생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과정에 바울이 그동안 진술했던 '믿음'과 '화목'을 삽입해 보면, '믿음'은 (3)과 (4) 사이에 그리고 '화목'은 (4)와 (5) 사이에 삽입될 수 있다.
 그런즉( , 아라 운) - 12절에서부터 17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는 결론이 시작됨을 나타낸다. 죄와 율법에 관한 13, 14절 내용과 구원의 은혜와 범죄에 대한 심판을 대조시킨 15-17절 내용으로 중단되었던 아담과 그리스도 간의 비교가 12절에 이어 다시 본절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12절에 천명된 결론이 본절에서 다시 언급되고 있다.
 한 범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 헤노스 파랖토마토스'( )는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즉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이 '한 범죄'로 해석하거나 영역 성경이나(the offence of one, KJV;one man's trespass, RSV) 독일어 성경처럼(eines Sunde, Luther Bible) '한 사람의 범죄'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어느 경우를 취하든지 전후 문맥상의 의미에 있어서 별다른 차이를 초래하지 않으나 후자의 해석이 지배적이다. 헬라어사본들 중의 가장 유력한 사본들 중 하나인 알렙 사본( )을 위시하여 고대 라틴어 사본들은 본문의 '헤노스' 다음에 '안드로포스' ( , '사람')을 첨가하고 있으며 많은 역본들이 이를 따르고 있다. 그리고 15-17절에 '한 사람'이란 표현이 일관되게 반복 사용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서도 '한 사람'이 원문에 충실한 듯하다. 아무튼 본 문구는 '한 사람 아담의 범죄'를 가리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정조에 이른 것같이 - '많은 사람'으로 번역된 헬라어 '판타스 안드로푸스'( )는 '모든 사람'(all men, KJV, RSV)을 의미한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는 세상에 사망의 권세를 가져왔고 전인류는 이 사망의 권세에 눌려 종노릇을 하게 되었다.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본문( , 디 헤노스 디카이오마토스)은 '한 사람의 의로운 행동으로 말미암아'라는 뜻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우신 행동을 가리킨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은 여기서 '의로운 행동' 즉 '디카이오마토스'( )를 '칭의의 행동'으로 해석한다(Meyer, Gedet). 그러나 '디카이오마토스'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없다고 여기시는 행위', 곧 '하나님의 칭의 행위'란 뜻을 지닌 '디카이오시스'( )와 구별되므로 '의로운 행동'(one man's act of righteousness, RSV)으로 해석됨이 무방하다(Murray, Holsten 등).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동이란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행하신 모든 행동, 즉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행하신 모든 행동, 즉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행하신 사역들을 총칭한다. 물론 이 구원사역은 십자가 사건에서 최절정을 이룬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고 구원을 얻는 근거는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 이 헬라어 본문 '에이스 판타스 안드로푸스 에이스 디카이오신 조에스'( )를 번역하면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칭의가 이르렀다'이다(KJV, Modern Language Bible). 헬라어 본문은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함이 아니라 '생명의 칭의'(justification of life)곧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 자체가 이미 '생명'에 이른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한편 '모든 사람이 생명의 칭의에 이르렀다'함은 만인 구원론(Universalism)을 뜻함이 아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리스도를 믿고 구주로 섬기는 자들에게 구원이 임함을 밝히고 있다(요 3:16;14:6).

=====5:19
 본절은 앞절 내용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앞절에서 바울은 일반적으로 범죄와 의를 대조시켰으나 본절에서는 그 범죄와 의의 본질적 성격을 설명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 대한 아담의 범죄는 그 자신의 자발적인 불순종에 그 뿌리가 있으며 그리스도의 의는 하나님께 대한 그분의 자발적이고 절대적인 복종에 근거한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 아담의 범죄, 곧 원죄(原罪)를 말한다. 아담이 범죄한 내용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이다. 에덴 동산의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아담이 거스린 것은(창 3:1-6) 순간적이요 단순하게 보일지 모르나 이는 창조주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고자 마음 먹었던 교만한 행위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의 행위였다.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 12절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선포했으나 15절에서는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진술했으며, 18절에서는 다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다'고 선언했다. 한편 '죄인된 것같이'에서 '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스타데산'( )은 단순 과거 수동형으로 '제정되었다', '설립되었다'는 의미이다. 이는 KJV와 RSV가 번역한 것처럼 단순히 '만들어진 바 되었다'(were made)는 의미가 아니라 '법적 판결을 받았다'(were constituted)는 의미이다(NIV). 한 사람의...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 '순종'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바울은 죄인된 것을 불순종에 대한 인간의 책임과 연관짓고 있다. '순종'이라는 용어에는 인간의 책임 문제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히 3:18, 19;4:2, 6). 무엇보다 '순종'이라는 단어는 '아담의 불순종'과 '그리스도의 순종'(사 53:12;요 6:38, 39;10:17, 18;17:4, 5;빌 2:7, 8;히 5:8, 9), 특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순종'에 대한 대조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Murray). 그리고 성도의 순종은 그리스도의 순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데(히 5:8, 9),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자'에게 죽기까지 순종하셨던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결과를 아무 대가 없이 은혜로 주시기 때문이다. 한편 '의인이 되리라'에서 '되리라'로 번역된 헬라어 '카타스타데손타이'( )는 미래 수동형으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제정(制定)될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혹자는 이 단어가 미래 시제임을 생각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성도들이 받을 영광을 언급하고 있다고 말한다(Meyer). 그러나 이보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과거와 현재및 장래를 포함하는 모든 시대에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 무난하리라고 본다(Murray, Sanday).

=====5:20
 헬라어 성경 본문에는 본절 초두에 '데'( )가 언급되고 있으나 한글 개역 성경은 이 접속사를 번역하지 않았다. KJV는 이를 '더욱이'(Moreover)로, Modern Language Bible은 '그러나'(But)로 번역하고 있다. 아무튼 '데'는 본절에서 새로운 개념, 곧 '율법'에 관해 이야기를 하려고 유도된 것이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 본 구절은 인간에게 모세 율법이 부여되었음을 말하나 이는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이 최초로 사람들에게 주어진 법이 아니라 그 이전에 법이 선재(先在)함을 나타낸다. 이는 '가입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레이셀덴'( )이 단지 '들어왔다'라기 보다는 '곁에 들어오다'(came in beside, Green), '미끄러져 들어오다'(slipped in, Modern Language Bible)를 뜻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모세이전 아브라함이나 야곱 등과 같은 족장들은 그들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믿음의 길을 걸었고 모세 시대에는 성문화된 율법이 부여된 것이다.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 이 말은 율법이 세상에 들어옴으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죄를 짓도록 동기를 유발시켰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죄를 증가시켰다는 말이 된다. 헨드릭슨(Hendriksen)은 본 구절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즉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증가하게 만들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사랑의 요구에 비추어 보아(마 22:37-40;막 12:29-31;눅 10:27) 인간으로 하여금 죄의식에 예민해지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었음을 의미한다. 율법은 모든 죄의 가증함과 그 결과가 드러나도록 한다"(3:20;7:7, 13;갈 3:19). 또한 혹자는 "범죄를 더하게 하는 것은 율법의 우선적인 목적이 아니라 부차적인 목적이다"라고 설명한다(Black). 이러한 주장에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동의한다. 바울의 의도는 무엇보다 율법이 옴으로써 그 전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던 것을 확실히 죄로 인식하게 되었다(13절)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었다. 혹자는 딤전 1:9-11을 본절과 연관지어 율법이 죄를 억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Herrison). 그러나 분명히 성도들이 인식해야 할 사실은 율법 자체가 죄를 억제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딤전 1:9-11에서는 이러한 암시가 전혀 없다. 오히려 딤전 1:9-11은 율법의 정죄 기능, 즉 사람이 자신의 행위가 옳은가 그렇지 않은가를 율법을 통해서 정죄받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 이 말은 율법이 주어짐으로써 범죄의 사실이 더욱더 드러나 인간이 깊은 정죄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면 될수록 인간을 향해 쏟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더욱 풍성하게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바꾸어 생각하면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곳에서는 죄사함도 없으므로 용서에 대한 은혜를 깨닫는 일도 없다. 다만 죄가 죄로서 정죄되는 곳에서는 그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더욱 풍성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사실은 '죄가 더한 곳에'의 '더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플레오나센'( )이 '넘치다'라는 의미를 지니며, 반면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의 '더욱 넘쳤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레페릿슈센'( )이 최상급의 최상급, 즉 강조 최상급으로 '넘침보다도 더욱 넘쳤다'는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Murray). 다시 말해 은혜의 세력은 죄의 세력을 휠씬 능가할 뿐만 아니라 완전히 말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상처입고 병들어 죽어가는 자를 완전히 소생케 한다.

=====5:21
 본절에는 바울이 그동안 논의해 왔던 중요한 개념들이(죄, 사망, 왕노릇, 은혜, 의, 예수 그리스도, 영생) 종합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을 '너무도 아름다운 끝 맺음'이라고 극찬하였고(Hendriksen) 송영과 같은 가치를 지녔다고 말하기도 했다(Denney).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같이 - '사망 안에서'란 표현은 '생명 안에서'(17절 하반절)란 표현과는 정반대의 개념으로서 죄가 역사하는 한계를 의미한다. 죄의 결과로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다(12, 14절; 6:23). 따라서 죄는 '사망 선고를 받은 자들' 곧 '사망의 세력 아래에 있는 자들'에 한해서 왕노릇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의(稱義)의 은혜를 받은 자들에게는 결코 죄가 왕 노릇할 수 없다(Lloyd Jones). 바울은 6장에서 이것을 '죄의 종'과 '의의 종'의 개념으로 대조시켜 설명하고 있다.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 앞 구절과 완전한 대조를 이루기 위해서 본 구절의 '왕노릇하여' 앞에 '생명 안에서'라는 말을 삽입시켜 이해하면 된다. 이와 같은 대조를 통해서 우리는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 즉 '사망 안에서 종 노릇하는 사람'과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는 사람'(17절)이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분명한 구분은 예수의말씀 중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라는 선포 가운데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앞장에서 칭의의 구약적 근거로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증(認證)하고 믿음의 본질을
설명한 바울은 이제 본장에서 의로 인정받는 것의 결과를 말하고 있다. 믿음으로 의롭
게 괸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된다
는 것이 본장에서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한편 본장은 3-4장 부분과 6-8장 내용을 연결시키는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즉  본
장은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곧 '칭의'에 대해 설파하고  있는  대문단
(3:21-5:21)의 결론부이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삶 곧 '성화'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대문단(6-8장)의 서론부가 된다. 이제 본장의 내용을 상고하기 위해 본장 전체에
부각되어 있는 중심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 보기로 하자.
  (1) 하나님의 의의 결과. 바울은 지금까지 죄와 하나님의 진노, 그리고 칭의에 관하
여 논의해 왔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는 실제적으로 믿는자의 현실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 인간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가? 여기에 대하여 바울은  자신의  경험에
기초한 확고한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을 죄와 죽음의  세력으로부
터 해방시키며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로 이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을  죄와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시키며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로 이끈다는 것이다. 하나님 안
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자유와 평화야말로 칭의의 결과이다.
  바울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 역점을 두고 있다. 인간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
다 함을 얻기 전에는 하나님과 진노의 관계에 있었으나 의롭다 함을 얻은 후에는 하나
님과 화평의 관계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죄로 인한 관계의 단절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로 인하여 정상화되었다(엡 2:13-16). 구약성경에서 죄란 근본적으로 하나
님과의 적대 관계를 의미하는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죄가  해결되고
의인(義認)케 되었다는 것이 곧 하나님과의 평화로운 관계, 즉 화해(和解)를 의미한다
(골 1:20).
  일찍이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왕으로 불리어졌다(사 9:6;엡 2:14). 바울이 말하는
평화는 양심이나 마음의 내적 감정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삶에 유일하게 의미
를 주는 하나님의 의지이다. 불의한 자는 세상과 화평을 가지나 의로운 자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 그가 의롭게 된 것은 행함으로가 아니라 믿음, 곧 하나님의  신실하심
으로 된 거이기 때문에 세상에 대하여는 평화를 얻지 못할 지라도 하나님께  대하여는
평화를 얻는다는 것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을 믿는  자에게는
영원한 평화가 주어진다는 것이 바울의 증거이다. 구원의 결국은  하나님과의  평화이
다. 이러한 맥락에서 구원은 미래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일 뿐만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지
상 영역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평화'야말로 칭의함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이누리는  현
재(現在)의 축복이요 구원의 증표인 것이다.
  (2) 그리스도인의 삶의 성격. 칭의에 의하여 시작된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은 역설
적 성격을 가진다. 인간은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으나(3:23)
친히 화목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인하여 다시 그 영광을 바라며 기뻐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니 그것은 이미 선취(先取)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
도로 말미암은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이미 도래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단이  지배
하는 옛 시대는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새 시대가 출현하는 장(場)이다. 그러므로  구원
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지상에 군림하는 세력으로부터 위협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이
것이 바로 종말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역설적(逆說的)인 측면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 가운데 계속될  세상
의 위협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가지게  되나  세상의
환난을 겪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 필연적인 고난을 이기고 오히려 환
난 가운데서 기뻐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의 다른 서신에서 그리스도인의 이 역
설적인 존재 양태를 누누이 강조하였다(빌 1:29;4:14). 세상이 주는 환난까지도  자랑
하는 삶이 곧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다. 고난은 기쁨을 제거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승케 하며 자랑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생의 절정(絶頂)을 희망으로 보았다. 그것은 종말론적인  희망
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현재의 환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이다. 그는 현재의 고난을  통하
여 장래의 영광을 바라본다(약 1:12). 희망은 그리스도인의 열려진 미래인 것이다. 본
장에 나타난 바울의 논점을 다시 한번 정리하념, 칭의함을 받아 하나님과  평화스러운
관계에 들어간 그리스도인은 이미 새로운 시대를 경험하고 있지만 아직 옛 시대에  거
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이 주는 고난을 피할 수가 없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미 주어진 희망은 인내로부터 연단을 거쳐 장차 큰 영광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바울
이 말하는 신앙은 어떤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매우 역동적인 것으로서 현실과  직면하
며 미래를 향하여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이다.
  (3) 마지막 아담의 통치. 바울은 본장에서 의롭다 함을 받은 인간은 궁국적으로  마
지막 아담의 통치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마지막 아담이란 예수 그리스
도를 의마한다. 바울은 두 아담을 말하고 있거니와 첫번째 아담은 죄와 사망을 의미하
는 것으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라고 말하고 있다(고전 15:22). 모든  인
간은 첫번째 아담의 후예(後裔)로 태어나면서부터 죽은자요 타락한 자라는 것이다. 첫
번째 아담의 세계는 죄와 사망이 지배하고 다스리는 세계이다. 즉 그 세계는 하나님과
분리된 세계이며 사단이 들어와 대신 지배하는 세계이니 칭의함을 받기  이전의  모든
인간은 이러한 첫번째 아담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이다.
  첫번째 아담과 더불어 바울은 묵시 문학적(默示文學的) 관점에서 마지막  아담,  즉
메시야의 통치를 말하고 있다. 메시야의 통치는 첫번째 아담에 의해 비롯된 죄와 죽음
의 통치와는 대립되는 것으로서 그것을 상쇄시킨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은 자들은 메시야의 새로운 통치 아래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아담이
통치하는 세계한 어떤 곳인가? 첫번째 아담은 범죄한 자로서 그로 인하여 죄가 들어와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지만, 그리스도는 죄가 없는 분으로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모두
깨뜨려 승리하신 분이다. 또한 그는 완전한 의와 사랑을 완성하신분,  생명과  승리의
주가 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아담의 세계는 의와 생명의 세계이다. 아담  안
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의 지배를 받는 죄인이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생명
의 성령의 지배를 받는 의인인 것이다.
  바울이 '성화'의 장(6, 7, 8장)을 준비하면서 본장에서 분위기를 새롭게 바꾸어  강
조하고 있는 바와 그리스도인의 영생으로 이르는 새로운 삶이다. 아담 안의 인간은 죄
인이요 죽은 자요 육에 속한 자요 죄의 지배를 받는 자이지만 이같은 죽은 자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새로운 지음을 받아 옛 사람은 그리스도
의 십자가와 함께 죽고 이제 그리스도 안의 새 사람이 되어 출생하는 것이다.
  그는 이제 영에 속한 자가 되어 성령의 지배를 받아 영생에 이르게 된다. 첫번째 아
담의 세계는 죄의 지배 아래 있어 사망이 왕노릇하지만 마지막 아담이 통치하는  세계
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지배하고 생명의 은혜가 왕노릇하게 된다는 것이 바울이  펼치
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세계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의함을  받는다는  것은
이처럼 새로운 영적 삶에로의 도약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죄와 율법의  굴
레에 갇혀있지 않다. 마지막 아담의 통치로 인하여 그는 사망의 법으로부터 자유를 맛
복 되는 것이다.
  한편 본장의 냉용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번째 문단은 칭의의 결과로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현재의 축복과 더불어 장래의 효과, 즉 마지막 구원에 대한 확신을  말
하고 있으며(1-11절), 두번째 문단에서는 예수 안에서의 새로운 삶을 옛 사람과  새사
람의 대조를 통하여 묘사하고 있으며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효력을 종말론적으로 묘
사하고 있다(12-21절).

  1. 칭의로부터 오는 구속의 확실성(5:1-11)
  지금까지 칭의에 관하여 충분히 논의한 바울은 본문에서 칭의의 결과가 신자의 삶에
나타나는 양상을 설명하고 있다. 이제 칭의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돌아가는 풍성한  축
복이라는 견지에서 고찰되고 있다. 먼저 바울은 하나님과의 화평, 소망, 기쁨 등 칭의
가 가져오는 축복의 결과를 묘사한후(1-5절) 그러한 축복의 근거인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구원의 확실성을 논한다(6-11절). 다음 세 가지 관점에서 본문을 상고해 보자.
  (1)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축복.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
이 누리게 되는 첫째 가는 축복을 '하나님과의 화평'이라고 말하고 있다. '화평'은 하
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느끼는 데서 오는  양심의  평정(平靜)을  뜻하나(14:17;엡
2:14;골 1:20).  그것은 생명의 근원인 절대자와 화목한 관계에 들어갔다고 하는 깨달
음에서 시작되는 것으로서 단순한 감정의 평온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얻어지는 양심의 평화를 뜻한다. 여기에서 평화의 의미는  본서  첫  부분
(1:18-3:18)에서 바울이 강조한 하나님의 진노의 개념과 대조를 이룬다. '진노'는  하
나님과 원수된 상태, 즉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는 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소원(疏
遠)한 관계를 말한다. 그러므로 그 반대의 개념인 '화평'은 하나님의 심판의  철회(撤
回)를 뜻하며 하나님과의 조화(調和)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하나님과의 화평'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 '화평'이라는  단어
를 메시야적 구원의 의미와 거의 같은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바울은 그의 서신  속
에서 하나님의 평화가 역사 가운데 어떻게 일어났는지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유대인
과 이방인 가운데 불화(不和)를 없애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
는 것과, 하나된 그들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화해시키려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에 들어간 그리스도인들은 생의 완전한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전에는 죄로 인해 불안과 공포 가운데 살았으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의 은혜
로 이 모든 분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었다. 그러니 이제는 그 은혜의 감격 속에서  하
늘의 평화를 누리고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사이
에 놓여 있던 장벽(障壁)이 무너지고 하나님과 매우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어 부자지간
의 화평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최고(最高)의 축복이다.
  한편 칭의함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두번째 축복은 '은혜에 들어감'을  얻는
것이다. 이는 예배하가 자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간다'는 뜻과  '인도함을  받느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표현은 하나님과의 화평의 상태를 다른 측면에서 묘사한 것으
로서 '은혜의 자리'는 예배의 근원적 동기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적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은혜의 자리에 나가게 된다. 그들은  하나
님께 가까이 나가 예배하며 그분의 영원한 인도함을 받게 된다. 율법에 의해 정죄함을
받은 자들은 그 누구도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 수 없으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의함을
받은 자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막론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대할 수 있는 축복을  얻
게 된다는 것이 바울의 복음 논리이다.
  (2) 환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 그러나 바울은 복음의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그 은혜의 감격에 도취하여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며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현실 생활에 관하여서도 권고하고 있다(빌 1:29).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들은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말하나. 그는 자기의 생애는 물론 다른 믿는
이의 생애까지 둘러싸고 있는 환난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 가운데
환희의 기쁨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 미래의 영광에 이르는 길에 도사리고 있는  고난과
핍박의 실재를 절실히 경험하였던 것이다. 이에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어려운
현실에 직면하는 비결을 제시하고 있다.
  환난에 대한 바울의 특이한 태도는 그것을 즐겁게 맞이하는 것이다. 즉 환난 중에도
기뻐하라는 것이다. 미래의 영광을 바라는 환희의 즐거움 때문에  환난까지도  기꺼이
맞을 수 있다. 바울의 태도는 현재를 미래의 영광르로부터 분리해 놓는 필연적인 시련
으로서의 환난에 단지 수동적으로 순응(順應)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
가는 것이다(행 5:41). 그는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며 다른  그리스도
인들도 자기와 연합하여 환난을 능히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고후 1:4, 5).
  그러면 바울이 말하는 환난의 정체는 무엇인가? 바울은 인간의 삶 속에 찾아드는 여
러가지 고충의 결과로서의 환난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환난은 독
특한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며(고후 2:10), 그러한 환난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은혜를 나타내는 기회를 주며(고후 12:9), 결국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유익
이 된다는 것이다(고후 1:4-6;골 1:24). 모든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은  이러한
특징을 가진다. 이러한 환난들은 인내의 결실을 가져오며 인내는 연단을, 연단을 소망
을 이루는 것이다(4절:고후 2:9;13:3;빌 2:22). 결론적으로 환난의 끝은 소망이다. 그
리스도인은 환난 가운데서 즐거워하거니와 그 이유는 환난은 소망을 향해 나아가는 과
정이기 때문이다. 소망으로 시작한 바울의 복음 원리는 소망으로 종결짓는다.  하나님
의 영광에 참여할 소망,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분의 영광의 세계를 보고 함께 누릴  소
망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은 지금부터 기뻐하며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는 것이다. 즉 신자들의 소망은 내세에 누릴 영광과 상급에 대한 약속을 바라보는  소
망이다. 그러므로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성결(聖潔)하게 지켜야
할 것이다(요일 3:2, 3).
  (3) 새 생명. 본서 앞부분에서 하나님의 의와 그리스도의 은총에 관하여 충분히  설
명한 바울은 본문에서 칭의의 결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새 생명에 관하여  진술
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이제  하나님
의 생명의 세계에서 그 생명을 만끽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하는 하나
님의 사랑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며 새 생명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부분(6-11
절)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전 15:3)는 고백문과도  같은  것이
다. 예수의 죽음은 인간의 일이 아니며 인간이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
님의 사랑으로 표시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울은 먼저 연약한 인간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에게 나타내신 사랑은 죄악에 대하여 연약하고  무능한
자들을 불쌍히 여겨 구원하신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강함과 대조되는 인간의  약
함은 자시늬 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기를 구원하지 못하는 상황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대로 방치해 둔다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처지이다.  하나니께서는  이처럼
연약한 인간을 위하여 기약대로 그리스도를 보대사 구원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작정된
때, 곧 만기(滿期)의 때에(갈 4:4) 인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은총을  나타내시고
새로운 소망과 생명을 얻게 하신 것이다.
  또한 바울은 죄인을 위하여 성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다. 이 세상
에는 의인을 위하여도 대신 즉겠다는 사람이 없거니와 더욱이 하나님이 없는 불경건한
자를 위하여 죽는 일은 없다(벧전 3:1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그리스도를  보
내사 타락하여 진노 가운데 있는 죄인을 위하여 죽게 하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
셨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이며 인간의 상식을 넘어서는 초월적 사랑인가? 무죄하고
성결하신 독생자 예수를 희생제물로 내어주셨다는 것을 죄인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파격적인 은혜요 가장 큰 특전(特典)이다. 의롭다 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무하내의 하나님의 사랑 안에 풍성히 거하게 된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 안에 들어온자들은 새생명을 누리게 된다. 그들은 의롭다  함을
얻어 진노에서 구원받았거니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여 옛 사람의  죽음과
함께 새 생명으로 중생하게 된 것이다. 칭의함을 받기 전에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
릇했으나 이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으리게 되었으니 사망에서 생명
으로 옮겨진 것이다(요 5:24). 하님의 진노 아래 있던 인간이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게 되며, 하나님과 원수 상태에 있던 인간이 이제는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이루게 되며, 죽은 상태에 있던 인간이 이제는 새생명을 받아 새로운 영적 삶을  영위
하게 된다는 것이 바울이 역설하는 그리스도인의 축복의 모습이다.
  * 칭의(稱義)와 화해(和解). 본문에는 인간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실을  표현
하는 '화해', '화평', 또는 '화목'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등장한다.  지금까지  바울은
믿는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인정받는다는 칭의에 관하여 설명하였거니와 본 주제
강해에서는 칭의와 화해가 개념적으로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1) 개념적 이해. 칭의와 화해의 개념은 같은 사실, 즉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
복을 의미하는데 서로 일치한다. 단지 칭의는 법적(法的) 용어로서  재판의  자리에서
나온 용어이고 화해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사용되는 용어이다.  칭의는  하나님의
의로써 사람이 의롭다 인정받는 구속 사건이며 화해는 하나님의 진노가 사라지고 하나
님과 평화로운 관계를 회복하는 사거니다. 결국 이 둘은 같은 개념으로서 하나님과 인
간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을 의미한다. 화해는 칭의에서 실현되었고 칭의는 곧  화해를
의미하는 것이다.
  (2) 대상(대상)의 문제. 그러면 칭의와 화해의 대상은 누구인가? 여기서 그  대상이
개인이냐 공동체냐 하는 문제가 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는 집단적인 단체로서  기독
교적 사회를 지향한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즉 칭의와 화해의 대상을 사회적 집단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 근거로 구약성경에서 재물들이 주로 공동체를  위한  것들이었던
점(출 12:43-47;레 16:16, 21)과 신약성경에서 교회라는 공동체를 위한 그리스도의 희
생의 개념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엡 5:25;골 1:14;요일 2:2;계 1:5)는 점을 들 수  있
다. 그러나 칭의의 대상은 공동체이기 이전에 개인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개인
이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문제를 해결받고 의롭다 인정받으며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으
심에 인격적으로 응답하지 않고는 공동체의 구원이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
해서 개인의 변화없이 공동체의 변화란 있을 수 없다. 앞장에서도 고찰해  보았거니와
아브라함의 개인의 인격에서 믿음의 본질이 입증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한  공동체
없이는 개인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므로 칭의와 화해의 개념 속에 있는 단체적 의미도
배제(排除)할 수 없다. 아브라함은 그를 따르는 믿는 자들의 공동체의 조상이 되었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는 개인과 공동체에 동일하게 효력을 가지며 개인
의 변화와 아울러 나아가 공동체의 변화까지도 기대하는 사건이었다.
  * 성도의 견인(堅忍).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계획에 의하여 구원의 길로 들어선 성도
는 성령의 지속적인 보호로 인하여 결코 구원의 대열에서 이탈할 수 없음을 밝히는 교
리가 본문에 나타난다.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는 세상의  환난
에 대하여 참고 견디면서 천국의 도래와 장차 올 영광을 확신있게 기다린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한마디로 '성도의 견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본
주제 강해에서는 바울 서신을 비롯한 신약성경 전반에 나타난 성도의  견인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1) 공관복음서에서의 견인. 예수께서는 이 용어를 3회  사용하셨다.  '견인'이라는
말의 헬라어는 '귿건히 견디어 내다'라는 뜻을 가진 '휘포모네'(*                )로
서 참 성도의 특성을 결정해 주는 중요한 개념이며(눅 8:15)성도의 열매을 맺게  하는
적극적인 힘이 된다. 구원을 얻으려면 마지막 때의 시험을 참고 견디는 것이 필요하다
는 것이다(막 13:13;눅 21:19).
  (2) 바울 서신에서의 견인. 바울은 '견인'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의 본질적 생활  태
도라고 강조하고 있다. 먼저 인내는 믿음과 소망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서(8:25) 악하
고 불의한 현 시대에서의 견딤을 의미한다(4절;12:2). 또한 견인은 능동적으로는 영생
을 만들어내며(2:7), 수동적으로는 고난을 참아낸다(살후 1:4;벧전  2:20).  성도들은
자신들이 고난을 위해 부르심을 입었으며(행 14:22) 모든 환난을  견딤으로써  믿음을
나타내 보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딤후 2:10).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3, 4절). 이 인내는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며(15:5), 믿음 및  사
랑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딤전 6:11;딤후 3:10). 즉 바울은 믿음, 사랑과 더불어 인
내를 세 가지 덕으로 언급하였다(딛 2:2). 여기서 소망이 미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면 인내, 즉 견인은 고통당하는 현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현재의  고난을  참고
견디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고 그와 함께  왕노릇  하리라는  것이다(딤후  2:11,
12).
  (3) 히브리서에서의 견인. 핍박당하는 교회를 향해 씌어진 히브리서는 성도의  견인
을 강력히 권면하고 있다(히 10:32, 36;12:1).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고난을  참으
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하며(히 12:2), 시험을 참고 견디는 것은 하나님의  훈련이
된다는 것이다(히 12:7).
  (4) 야고보서에서의 견인. 야고보 역시 시련이 믿음을 굳게 하고  인내를  강화하여
온전함에 이르게 한다고 증거한다(1:3, 4). 욥을 그에 관한 훌륭한 예로 제시하고  있
다. 만일 신자들이 굳게 인내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실  것이
라는 권면을 한다(1:12;5:11).
  (5) 계시록에서의 견인. 순교하는 교회를 묘사한 요한계시록은  견인이  성도들에게
꼭 필요7한 덕목이라고 격찬한다. 이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며(계 1:9;3:10)  고
난과 박해를 참는 것이다(계 2:2, 3, 19). 최후의 싸움은 가장 큰 시험이  될  것이며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큰  인내가   필요하다(계
13:10;14:10).
  지금까지 성도의 견인에 관하여 간략히 고찰해 보았다. 칭의함을 받는 성도들은  인
내로써 구원을 계속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이 주요 논점이며,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이
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되어진다는 것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
총으로 말미암아 현재의 고난을 참고 견디어 나감으로 장래의 소망을 누릴 수 있다.

  2. 옛 사람과 새 사람(5:12-21)
  바울은 앞 문단에서 설명한 화해자 예수의 사역을 본문에서 계속해서 부연 설명하고
있다. 그 방법으로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비(對比)시키고 있으며 이로써 죄악의 보편성
과 아울러 구원의 보편성을 역설하나.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역사의 큰  전환점으로서
아담과 대조적으로 인류에게 은홍과 생명을 가져왔다. 본문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바
울의 사상 전개(1:8-5:21)에 있어서 핵심 부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세밀한 논리와 특
수한 문체로 이루어져 있다. 앞 문단(1-11절)은 '우리'라는 문체로 되어 있으나  본문
은 명상적(冥想的)인 문체로서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인류 구속사를 전개하나. 다음
세 가지 주제를 통해 본문의 내용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1) 인간 타락의 역사. 바울은 먼저 본문에서 타락의 문제를 다루고 있거니와  그는
죄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간다. 죄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인간의 타락은 창세기에
있는 첫 인간의 타락과 결부된다. 이미 태초에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온 인류가 죄
의 종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 사람으로 인해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에 의해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다는 것이 타락의 근원에 대한 바울의 논리이다. 바울은 인간을  개별적
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 다만 그는 죄의 운명에 대하여 한 인간이 범한  죄의  효력과
그 결과가 지니는 심각성을 말한다(2:17;3:19). 한 인간이 범죄한 결과로 죽음이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밀려들어온 것이다.
  아담은 최초의 인간인 동시에 모든 우주 만물의 대표자로 창조된 자였다. 즉 하나님
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전형(典刑)이었다. 그런데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아담 자신은
물론 다른 모든 피조물까지 죄의 형벌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아담  이후
실제로 행위의 죄를 짓기 시작하였다. 즉 하나님께 대한 반역의 죄의 힘이  인간사(人
間史)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각 개인이 주체적으로 범죄하고 있었으니 모두가 같은  운
명에 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죄의 연대성(連帶性)을 의미하며 모든 인간이  죽는
다는 사실에서 이것이 입증된다.
  지금까지 바울이 설명한 것과 같이 당시 유대교에서는 죽음이 아담의  범죄로  인해
모든   인류에게   전가된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에스드라     3:7;바룩서
17:3;23:4;48:42;54:15). 바울은 본문에서 아담을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묘사하고
있다(14절). 그가 유대교의 사상과 일치되게끔 처음 인간 아담을 들어 죄와 타락의 역
사를 설명한 것은 오실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효력, 즉 인류에게 미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효력을 나타내 보이기 위함이다. 한 사람 아담의 범죄 행위가 인류에
게 미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행위로 인해 전인류가 구원을 받게 되었음을 강
조하고 있다.
  (2) 율법과 죄, 그리고 은혜. 바울은 본문에서 율법과 죄의 관계, 또한 죄와 은혜를
대조하여 설명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은혜의 풍성함을 부각시키고 있다. 모세의  율법이
있기 전, 즉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는 죄가 세상에 있었으나 유죄로 인정되지 않았다.
그 때는 아직 율법이 없었으므로 죄가 범죄의 의미로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때부터 계속 죽음이 지배해 왔다는 점으로 보아 죄가 당시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
다. 그때는 율법이 없었으나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니미 심판이 노아의 홍수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등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죄는 인간을 굴복시키고  지배하는  힘으로서
늘 존재한다. 죄의 현실은 인간을 지배하고 하나님의 심판은 시시각각 내린다.
  모세의 율법과는 상관없이 인간은 누구나 아담 이후 죄의 지배 아래  있었다는  것,
이 증거로 죽음의 세력을 들어 논증한 바울은 이와 대조하여 그리스도에 의하여  죽음
대신 생명이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죄의 역사적 논리와 구원의 역사
적 논리는 병행되며 후자는 전자로부터 유추(類推)하여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런 의미에서 아담은 그리스도의 표상(表象)이다.
  그러나 바울은 아담의 행위가 인류에게 미친 효과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인
류에게 미친 효과가 더욱 강력함을 설명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구속의 효력은 아담
의 타락의 효력을 능가하며 더욱 확고하고 영원한 효력이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비
교할 수 없는 힘이 있다. 바울은 유비(類比)와 능가의 두 형식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아담을 극복하나. 범죄가 죽음을 불러들였거니와 이것을 극복하는 것은 은
총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은혜를 주셨다.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로서 그 결과는 의롭다 함을 주시는 것이다. 모세의 율법으로 인하여 죄
가 최고조에 달하였으나 그리스도를 인하여 은혜가 차고 넘치게 되었다. 은총은  면죄
행위이며 치유 행위이다. 그것은 하나님 차원의 일이지 결코 인간 차원의  일은  아닌
것이다. 여기에 바로 복음의 신비가 있다.
  (3) 그리스도의 새 시대. 이제 바울이 외치는 역사적인 사실은 첫 아담의  타락으로
온인류가 죄의 종이 되었던 것같이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인류가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구약과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아니 전인류의
역사에서 해결되지 않았던 문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되었다. 이로써  옛
시대와 새 시대의 확연한 구별이 생기게 된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옛 시대의 특징은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하는 것이다.  죄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지배하니 인간은 정죄와 심판을 받아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죄가 회심의 미소를 띠고 승리의 개가를  부르며  왕노릇하는
시대는 바로 옛 시대였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인간이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시대
가 도래했다고 선포하나. 이 새 시대는 역사의 큰 전환점을 이루며 종말을 향하여  돌
진한다. 새 시대는 낡은 시대를 삼키고 새로운 인간성을 창조해낸다. 낡은 시대의  지
배적 개념은 죄, 율법, 죽음이었으나 새 시대의 지배적 개념은 의,  은총,  생명이다.
그리스도의 새 시대의 사람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으니  그
에게는 심판이 없다. 그에게는 오직 영생의 축복이 있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지
배하는 시대, 사랑의 법이 율법을 완성하는 시대, 구 시대의 낡은 인간성을  벗어버리
고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는 시대(고후 5:17)가 바로 새 시대의 특징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의 중심도 바로 이 새 시대, 즉 하나님이  지배하는  시대였
다. 예수께서는 사단 시대의 종말을 선언하셨고 누구든지 믿는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아 새 시대의 백성이 될 수 있음을 외치셨다. 그리스도의 사도된 바울  역
시 그의 메시지의 초점을 새 시대의 새로운 인간에 두고 있으니 그는 서신들을 통하여
새 시대의 성격과 아울어 그리스도인들이 이 새 시대를 과연 어떻게 영위해 나가햐 할
것인지 그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 원죄설(原罪說)에 관하여. 본문에는 한 사람 아담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인류  개
인에게 죄가 전해지고 그 결고로서 죽음도 내려졌다는 이른바 원죄설이 등장하나.  이
원죄설에 대하여는 그동안 많은 견해가 있어 왔다. 본 주제 강해에서는 원죄설에 대한
반대 이론과 그 신학적 타당성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로, 원죄설을 반박하는 자들에 의하면 한 인가느 행위가 만인에게 미친다는  것
자체가 과학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비난은 오늘날 생물학적
으로 유전(遺傳)의 법칙이 연구되어 조상이 한 행위의효과가 만인에게 미친다는  사실
이 분면히 밝혀졌으며, 사회학적으로는 사회 연대(連帶) 개념이 발달되어  한  사람의
행위가 사회 전체에 대해 영호가을 미친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어 그 타당성을 잃게 되
었다.
  둘째로, 원죄설에 대한 또 다른 비난은 만일 아담의 행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죄가
미치고 있다면 책임은 아담에게 있는 것이고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즉 아담의 죄
때문에 전인류가 벌을 받는다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는 것이다. 원죄설에 의하면  개인
의 행위의 책임이 확립됴지 않고 도덕의 기초가 무너지지 않느냐는  윤리상의  비난이
다. 그러나 먼저 아담이 자유 의지로 죄를 범하여 죽음을 초래한 것처럼 인류도  자유
의지로 죄를 범하여 죽음을 초래한 것이다. 죄는 인류적인 것인 동시에 개인적인 것이
다. 그러므로 원죄설이 개인의 책임을 간과하는 일은 없다고 하겠다.
  셋째로, 인류의 기원에 관한 학설에서 오는 반대가 있다. 그것은 창세기에 있는  인
류는 한 사람의 아담으로부터 배출된 것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인류의 발생은 처음부터
군생적(群生的)이었다는 것이다. 즉 동시에 많은 사람이 발생하였다고 한다면  전인류
의 죄가 한 사람의 조상으로부터 발생했다고 하는 원죄설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
다. 그러나 이러한 반대 이론도 인류학이나 고고학의 발달로 확실하게 증명되고  있지
않다. 설사 인류의 발생이 군생적이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인간을 종(種)으로 지으신
것이기 때문에, 즉 같은 성향으로 지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례는 모두
가 같다. 원래 아담이라는 말은 '인간'이라는 의미의 보통 명사로서 어떤 특정한 개인
을 가리키는 고유 명사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모든 인간이 죄를  범했다고  생각해도
무방한 것이다.
  많은 반대 이론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원죄설은 유전학이나 사회학, 인류학,  그리고
고고학 등에 의해서 확인되어 가고 있는 추세이다. 현대 과학을 동원하지 얻더라도 원
죄설은 바울 시대의 낡은 인식이 아니라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불변의  진리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인류는 모두 죄 아래 있고 이로써 평화를 얻지  못하며  결국
종말로 달려가고 있다. 인간의 죄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 그리스도와 아담, 유형론적 해석. 본문에 등장하는 인간 역사의  두  전환점(轉換
點)으로서의 아담-그리스도론은 바울이 앞에서 역설한 칭의의 원리 및 그리스도의  죽
음의 의의와 직접적으로 관련있는 중요한 주제가 된다. 여기서는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립에 대한 바울 논술의 특징과 유형론적(類型論的) 사고의 전형이라는 관점네서  고
찰해보기로 하자.
  (1) 아담-그리스도론의 기본 사상. 바울이 아담-그리스도론을 통하여 발전시키고 있
는 족특한 사상은 다음과 같다. 아담은 불순종과 죄의 창시자,  죽음을  처음  가져온
자, 심판을 끌어들인 자이다. 반면에 그리스도는 순종한자, 생명과 은혜를 가져온  자
라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에도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조가 나오고 있거니와 아담은
땅에서 난자, 육제적 인간이며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난자, 영적인 인간이다. 그리스도
는 땅의 인간인 아담과 대립되는 하늘로부터 출생한 자이다.
  바울이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립시켜 묘사한 이유는 인류에게 끼틴 그리스도의  사역
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아담은 인간을 큰 불행으로 이끌고 감으로써 역사의 전환을 가
져온 자이며 그리스도는 새 시대의 전환을 가져온 분이다. 아담과 그리스도는  이러한
면에서 전인류를 지배하는 대립되는 결정적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담은  그리스
도와 대립을 이루기는 하나 결국은 그리스도에게 포섭된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극복한
것이 무엇인가를 확신시키고자 한따.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 이저늬 것들,  즉  죄,
타락, 불순종, 죽음 등을 회복하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다. 그는 하늘에서부터  오신
분으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죄와 사망에서 인류를 해방시키시며 자유케
하신다. 그리스도는 창조의 완성이며 인류의 회복인 것이다. 우리는 바울의 아담-그리
스도론을 통하여 그가 어떻게 인류 역사를 이해하는지 알 수 있다.
  (2) 유형론(typology)적 해석. 바울은 본문에서 '아담은 장차 올 자의  표상'(14절)
이라는  헬라적   유대교인들이   쓰던   술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구속사
(Heilsgeschichte)에서 아담과 그리스도는 같은 형식의 구속 사건임을 인증하는  것으
로서 바울의 유형론적 사고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이 '장차 올 자의  표상'이라
고 할 때의 '표상'(*          , 튀포스)은 원형, 전형, 모델이라는  뜻이다.  아담을
역사적으로 선행(先行)한 자로 보고 그리스도의 원형으로서의 아담을  지시하는  것이
다.
  구약과 신약에서는 구속사적인 의미에서 전에 일어난 일이 후에 일어날 일과 동일한 성격을 가질 때 유형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신약에는 유형론적 사고가 많이  등장한다. 즉 마태복음이 그리스도의 생애의 사건 하나하나에 구약의 원형을 찾는것, 요한복음이 천지창조, 광야의 만나, 어린양의 제사 등에서 성육신의  의미를  해명하는것, 바울이 그리스도의 영적 생활이 구약 가운데 예시되었다고 하는점(5:1-4;고전  5:6-8, 10-1;고후 4:6;갈 4:24) 등이 그것이다. 신약의 유형론은 알레고리적  요소들을  많이 가지면서도 역사적, 구속사적 유형론이며 예언과 성취라는 주제의 논증에 사용되었다. 그것은 예수의 생애와 죽음이 약속의 성취요 구약의 완성이라는 확신에서 생겨난 사고이다.
  한편 유형론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illo)를 비롯한 중세 교부들 사이에서  사용되던 전통적인 성경 해석 방법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빛 아래서 하나님의 구속 행위로서의 구약의 사건을 본다는 점에서 일면 타당한 성경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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