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사도행전 0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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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사도들이... 말할 때에 - '말할 때에'로 번역된 헬라어 '랄룬톤'(* )은 부사적 분사 용법의 형태로서 '그들이 아직도 말하고 있는데'라는 뜻이다. 따라서 사도의 설교가 행해지고 있는 동안에 성전 가운데서 사태가 급변한 것을 소개하고 있다. 한편 본절에서 누가는 뵨음 전파에 대한 최초의 반대 셰력이 누구였던가를 밝히고 있다. 제사장들 - '호이 히에레이스'(* )라고 표현된 그들은 산헤드린에속한 권력자들로서 성전에서 모든 예배 의식을 집행하는 성직자들이었다. 이들은 이날 오후 예배를 맡은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당시 종교 체제로부터 아무런 합법적 권위도 받지 않은 자들이 성전에서 많은 군중을 모아 놓고 연설을 한다는 것은 그들의 권한을 침해하는 행위였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일에 앞장섰으며, 복음에 대하여 언제나 적대자 노릇을 하였다(마 26:3, 4). 이때도 사도들의 복음 전파를 방해하고자 나타난 것이다. 당시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은 로마 정부와의 협력하에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쥐고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현상 유지에 급급하였고 그들의 기득권을 침해할 것같은 사람들이 나타나면 거침없이 대적하였다. 성전 맡은 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스트라테고스 투 히에루'(* )는 문자적으로 '성전의 장'(Captain of the temple)이란 뜻이며 성전 수비대(守備隊)의 우두머리를 가리킨다. 어떤 학자는 성전 맡은 자는 안토니아 성에 주둔하는 로마 군대의 장교였다고 한다(Lightfoot). 그러나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제사장 가운데서 임명된 사두개파 출신이 맡고 있었다(5:24, 26)고 하며 어떤 학자는 성전수비대가 레위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Lenski). 렌스키의 견해를 따르면, 그 우두머리인 '성전 맡은 자'도 레위인이었을 것이고, 이는 율법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견해들을 종합해 볼 때 그들은 사두개파출신인 래위인들로 구성되었을 것이고, 로마 정부의 영향력을 크게 받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당시 '성전 맡은 자'(수비대장)는 대제사장다음가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며(Schuerer Bruce), 누가복음에서는 복수인 '스트라테고이(* )가 사용되었다(눅 22:4, 52). 사두개인들 - 하스몬 왕가의 후예들이었다. 하스몬 왕가의 사람들은 맛다디아와 유다와 요나단및 시므온(B.C. 168-134)을 메시야 시대의 개척자들로 보아왔으며, 그 열조들이 시작했던 바를 자신들이 이어
이미 마카비 시대의 영웅들에 의하여 시작되었으며, 또한 그 시대는 자기들의 감독하에서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는 중이라고 그들은 믿고있었기 때문이다. 곧 사두개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야란 하나의 이상(idea)이었을 뿐이며 어떤인격적 존재 자체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들은 정치적인 지도자들과 지배적인 지주들로서 마카비 통치 시대의 모든 정치적 경제적인 권력을 이양받았던 자들이었고, 또한 실세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로마와의 협력과 현상 유지를 강조했다. 그리고 당시 대부분의 제사장들은 사두개인적인 관념을 갖고있었다. 따라서 성전을 지키는 경비력은 완전히 레위 지파 사람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사두개파 사람들의 강세로 인해 대제사장이나 성전 수비대장은 언제나 고위 직급의 사두개인이 맡고 었었다. 이르러 - '에페스테산'(* )로 표현된 이 말은 어떤 사태를 진압하기 위하여 적의에 찬 마음을 가지고 급작스럽게 몰려왔다는 것을 뜻한다. 외견상으로는 이러한 그들의 행동이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는 매우 종교적인 것이었고 악하였다(눅 20: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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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을 가르침과...싫어하여 - '싫어하여'에 해당하는 혤라어 '디아포누메노이'(* )는 '심히 격노하고 크게 불안해 하였다'는 뜻이다. 종교 지도자들이 이러한 태도를 보인 이유는 (1) 사도들이 자기들의 교리와는 반대되는 혁신적인 가르침을 공공연하게 백성들에게 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던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위협적이었다. (1) 부활 교리를 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를 들어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를 전했다고 했는데 이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지 3일만에 부활한 역사적 사건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고,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토 예수'(* )는 '예수 안에서', '예수에 의해서', '예수를 기초로 하여'라는 뜻으로서 예수께서 그의잔에서 죽은 자들의 첫 열매로서 부활하셨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증거는 부활을 믿지않는 사두개인들과 예수를 계획적으로 죽인 제사장들에게 도전적이고 충격적인 선언이 아닐 수없었다.

=====4:3
저희를 잡으매 - 당시 산헤드린 공회는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기에 사회적으로 범죄한 사람에 대해서는 형을 집행할 권리를 갖고있지 않았지만, 성전의 거룩함을 더럽히는 등의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최고형까지 언도할 수 있었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 당시 랍비의 법에는 해가 지면 어떠한 심문이나 재판을 못하게 되어있었다. 그런고로 의회가 모일 수 없었고 어떤 송사도 제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재판에 회부(回附)하지 않고 감금시켜 놓은 것이다.

=====4:4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첫째는 '남자'의 헬라어 '안드론'(* , '남자들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의 문제이다. 이에 대하여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엄격히 말해서 여자와 구분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따라서 그때 개심한 사람 가운데 여자와 어린아이를 제외한 남자의 수만을 가리킨다(Mayer, Lenski, Robertson, Bruce, McGarvey). (2) 여자를 포함하여 개종한 모든 사람의 수로 생각한다(Spence, Hekiett). 이 가운데 (1)의 견해가 더욱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남자'(* , 아네르)라는 표현은 '사람'( * , 안드로포스)과는 달리 여자를 제외한 남자의 경우에만 한정되어 사용되기 때문이다(마 14:21). 둘째로 문제가 되는 것은 '오천명이 되었더라'는 숫자에 대한 것인데, 그 견해들을 살펴보면 (1) 바로 그때 믿게 된 수효를 가리킨다(Jerome). (2) 지금까지 믿게 된 예루살렘 신자들의 총수라 본다(Lenski, Joseph H. Mayfield). 여기서 (2)의 견해를 택하는것이 더욱 자연스러운 것은 '되었더라'의 원어 '에게네데'(* )가 부정 과거로서 단지 역사적인 사실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2:41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그날 믿은 수가 '삼천이나 더 하더라' 했는데 거기서 '더하더라'를 가리키는 헬라어 '프로세테데산'(* )은 미완료 동사로서 베드로의 설교 결과로서 일어나는 어떤 과정을 나타내준다. 따라서 삼천 명의 군중이 반드시 한꺼번에 믿었다고 보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본절의 오천 명이란숫자도 2:41에 나타난 삼천 명을 포함한 지금까지의 예루살롑 신자의 총수라고 보는 견해가 더 자연스럽다(6:7;16:5). 아무튼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박해 속에서도 게속 확장(擴張)되어가는 복음의 능력이다.

=====4:5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모였는데 - 산헤드린 공회의 구성원들을 가리킨다(23:14;막 14:53;눅 22:2). 산헤드린 공회는 그 당시 나라의 원로원이자 최고 법원으로서 극형을 제외한 모든 사건에 대하여 재판권을 가지고 있었다. 관원(* , 아르콘타스) - 이 말은 종종 대제사장이란 용어와 동의어로 쓰인다(23:5). 장로들(* , 프레스뷔테루스) - 장로들은 모세가 백성의 재판 처리를 위해 '덕과 경험을 지닌 자'를 세운데서 시작된 족속의 우두머리들로서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대표하여 의사 결정을 하던 집단이었다(출 3:16;4:29;민 11:16, 17). 서기관들(* , 그람마테이스) - 바리새인들로 구성된 율법 교사들로서 율법과 구약성경을 해석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자들이었다. 산헤드린 공회에 대한 자세한 것은 4:5-22 주제 강해 '산헤드린 공회'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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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사장 안나스 - 예수를 정죄하기 위한 재판 회부에 개입하였던 퇴임 원로이다. A.D. 7-15년까지 9년 동안 대제사장직에 있었으나 그는 그 후에도 계속하여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는 산헤드린 공회의 배후(背後)에서 실제적인 세력을 행사했던 인물로 나타난다(요 18:13-24). 가야바 - 안나스의 사위로서 A.D. 18-36년까지 18년 동안 대제사장직에 있었으며, 산헤드린 공의회 의장이었다. 따라서 대제사장의 실제적인 직무는 가야바에 의해 수행되었다. 요한과 알렉산더 - 이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알수가 없으나 서방 본문이 제시해 주는 바에 의하면, 요한은 기원후 36년에 가야바를 대신하여 대제사장직에 오른 안나스의 아들 요나단이라고 추측된다. 대제사장의 문중 - 사두개인의 가문으로 초기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를 주동하였다.대제사장의 가문이 여기에 언급된 것은 산헤드린공회에서 그들이 의사 결정권을 어느 정도 행사할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4: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의 재판 모습을 보여준다. 긴 옷을 입은 당대의 최고 권력자들이 높은 단상 위에 반원형으로 둥그렇게 앉았고, 피고는 낮은 마루 바닥위에 서서 심문을 받는 형태이다. 이것은 법정의 외적인 분위기로도 피고를 압도(壓倒)하려는 것임을 보여준다.
너희가(* , 휘메이스) - 이말은 헬라어 문장에서는 맨 끝에 나온다. 그뜻은 '너희 같은 백성'(people like you)으로서 무지하고 멸시받는 계층을 가리키는 경멸조의 표현이다.
무슨 권세 - '어떤 종류의 능력이냐'는 뜻으로서 사도들이 어떤 마술적인 주문을 통한 악령의 힘을 사용하여 이적을 행한 것(신 13:1-4)이라는 저의를 그들이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런 질문은 종교적으로 위법인 것을 암시하는 유도성을 가지고 있다. 뉘 이름으로 - 어떤 사람의 권위를 배경으로 위법을 행하고 있는지 심문하고 있다. 산헤드린에 있어서 예수의 이름은 지독히 불경스러운 이름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는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고, 이것은 신성 모독죄에 해당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사도들에게 올가미를 씌우려는 계략이었다. 만일 사도들이 '예수의 이름'이라고 한다면, 이단 사실을 퍼뜨리는 것이 되고,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대답을 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범죄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사도들이 어떻게 대답하든지 정죄하려는 악한 속셈을 가지고 간교한 질문을 한 것이다. 이들이 문제삼은 것은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낫게된 사실이 아니라 사도들이 그 일을 행했던 방범과 수단이 무엇이었느냐는 점이었다. 그 일이 하나님 나라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 일을 행한 방법과 수단을 가지고 시비하며 파헤치는 것은 시기심이 가득한 교권주의자들의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일찍이 예수께서도 대졔사장들로부터 이와 유사한 질문을 받았으나 그들의 간계를 미리 아시고 지혜릅게 대처한 바 있었다(마 21:23-27). 본절에서도 대적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사도들을 처치할 구실을 마련하기 위해 애매한 질문 공세를 폈다. 그러나 사도들은 심문당하는 자로서의 자세를 취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의 터무니없는 속섬을 은근히 책망함과 아울러(9절) 이를 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기회로 삼았다(10-12 절).

=====4:8
성령이 충만하여 - 주께서 약속하신대로 특별한 상황에서 주어진 것이다(마 10:9-20). '충만하여'를 가리키는 '플레스데이스'(* )는 특별한 순간의 영감을 가리키는 부정과거 수동태의 용법이다.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 이것은 당시의 권세자들을 인정하며 존경과 예의를 갖추고 있음을 보여준다. 성령 충만은 이처럼 지극히 정상적인 예의를 깨뜨리지 않고 위협적인 재판정에서라도 담대한 증거를 시작하게 하였다. 이 양자를 다 갖추기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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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일에 대하여...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 그들의 지위에 합당한 경의를 표하면서도 분명하고 단호하게 질문의 주지(主旨)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되묻는 베드로의 담대함을 본다. 여기서 '착한 일'로 번역된 혤라어 '유에르게시아'(* )는 '친절하고 선한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서 이 표현 속에 사도가 행했던일에 대한 변호가 포함되어 있고, '착한 일에 대하여' 심문하는 자들이 모순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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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너희 앞에 섰느니라 - 사도는 여기서 거부할수 없는 엄연한 사실 다섯 가지를 증거한다. (1) 너희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중대한 사실을 선포할 때마다 자주 쓰는 권위있는 명령형이다. 그 대상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는데, 이는 증거하는 내용의 중대성과 사실성을 암시한다. (2)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 사도는 여기서 '너희가' 그런 일을 행한 죄인들이라고 지적하고있다.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한 그들이 바로 죄인이라는것이다. 산헤드린은 모든 흉한 책략으로 저질렀던 만행을 은닉하려고 하지만, 사도는 그들의 면전에서 거침없이 폭로하며 힐책하고 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너회'가 죄인 취급하여 죽였지만 하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살리심으로 그를 죽인 자들을 심판했다는 것이다. 이 증거야말로 부활을 믿지 않은 사두개인들의 큰 반발을 일으킬 만한 것이었고, 그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공의회에 대한 정면 도전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사도는 그들 앞에서 하나님이 예수를 부활시키셨다고 담대히 확신에 차서 중거하였다. (4)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건강케 된 것을 증거했다. 이것은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했느냐'(7절)는 산헤드린의 질문에 대한 명확한 대답이다. 너희가 십자가에 죽였지만,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그예수께서 지금 살아계셔서 이 능력을 베푸셨다는 것이니 저들의 간담(肝膽)을 서늘하게 만드는 선포가 아닐 수 없다. (5) 건강하게 되어 너희앞에 섰느니라. 이상의 변론에 대한 명확한 증거를 제시한다. '섰느니라'의 헬라어 '파레스테켄'(* )은 현재 완료 능동태로서 '계속 서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사도들 옆에 서 있는 고침받은 자의 생생한 모습 때문에 저들은 힐책할 수도 없고, 그 사실을 부인할 수도없게 되었다. 우리는 이상의 증언을 통해 사도의 증언에는 위대한 복음 진리의 핵심이 담겨 있음을본다(2:14-36;3:15, 16).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 이것은 시 118:22의 인용으로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말씀이다. 전에 예수께서도 자신을 가리켜서 이 말씀을 인용하셨다(마 21:42;막 12:10;눅 20:17). 즉 건축자들에게는 쓸데없다고 버림받은 돌과 같이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멸시당하고 죽으셨으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사 자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승천하셔서 살아계시는, 구약성경이 예언한 그 메시야이심을 사도는 친히 목격하고 확신했던것이다. (2) 여기서 '구원'의 헬라어 '헤 소테리아'(* )는 단순히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고친 것과 같은 육적 구원 뿐만 아니라 죄와그 세력 그리고 죄의 형벌인 죽음과 영원한 심판으로부터 구원하는 전인격적인 구원을 의미한다. 즉 메시야로 말미암은 완전한 구원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람중에는 이 구원을 받지 않아도 될 대상은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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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 이것은 시 118:22의 인용으로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말씀이다. 전에 예수께서도 자신을 가리켜서 이 말씀을 인용하셨다(마 21:42;막 12:10;눅 20:17). 즉 건축자들에게는 쓸데없다고 버림받은 돌과 같이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멸시당하고 죽으셨으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사 자기 우편에 두시고, 권능과 영광을 홀로 차지하게 하셨으며 만민을 구원하는 기초로 삼았으니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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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로서는...주신일이 없음이니라 - 사도는 이제 예수 외에 그 어떤 이름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선포한다. 즉 산헤드린 공회원들 역시 예수에 의해서 구원을 받지 않으면 구원 얻을 길이 없음을 강조한 것이니 사도의 증거는 매우 혁신적이었다. 이 구절은 불변의 진리로서 다음의 두 가지 교훈을 제시향다. (1)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 무이한 구세주이시다는 사실이다. 예수 외에 사람의 죄를 대신해 줄 수 있는 의롭고 거룩한 신인(神人)은 없다. 오직 예수만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승천하셔서 살아계시는, 구약성경이 예언한 그 메시야이심을 사도는 친히 목격하고 확신했던것이다. (2) 여기서 '구원'의 헬라어 '헤 소테리아'(* )는 단순히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고친 것과 같은 육적 구원 뿐만 아니라 죄와그 세력 그리고 죄의 형벌인 죽음과 영원한 심판으로부터 구원하는 전인격적인 구원을 의미한다. 즉 메시야로 말미암은 완전한 구원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람중에는 이 구원을 받지 않아도 될 대상은 아무도 없다.

=====4:13
기탄없이 말함 - 헬라어로 이 말은 '모든'을 의미하는 '판'(* )과 '연설'을 뜻하는 '레시아'(* )의 합성어인 '파르레시안'(* )으로서 '모두 남김없이 자유롭고 대담하게 말하였다'는 뜻이다. 사도는 그태도와 말에 있어서 확신에 차서 이처럼 기탄없이 예수를 증거하였다. 공회원들은, 죄인으로 서 있으면서도 자신있게 변론하는 사도의 태도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학문 없는 범인 - 이는 랍비들의 학교에서 전문적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서,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평범한 사람을 의미향다.

=====4:14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 이 말은 그들이 사도의 증거에 대하여 반박할 만한 아무런 수단을 강구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13절과 본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1) 본래 학문 없는 범인이었던 사도들이 기탄없이 말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2) 예수와 함께 있던 예수의 제자들임을 알았기 매문이다. (3) 무엇보다도 이전에 앉은뱅이였던 자가사도가 말한 것들에 대한 산 증거로서 그들의 목전에 당당히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어찌할 수 없이 그들이 궁지에 몰려 할 말을 찾지 못한 것이다. 이는 일찍이 예수께서 하신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면박할 수 없는 구제와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리라"(눅 21:15)는 약속이 성취된 것이며 주께서 살아 계셔서 복음을 전하는 그 제자들과 함께 하시는 것을 보여준다(마 28:18-20).

=====4:15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 '공회'(* , 쉬네드리온)는 그 재판과 심문이 진행되었던 법정을 말한다. 공회원들은 사도의 변증에 대해 답변할 마땅한 고소거리를 찾지 못하여 그들끼리 의논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사도들을 밖으로 나가도록 명하였다. 서로 의논하여 - 공회가 심문하려 했던 피고들이 대담하고 확신에 차서 자신들의 무죄를 변론하고 증거를 내세우자, 이제 피고를 회의실에서 내보낸 후 심의(審議)에 들어간 모습이다. '의논하여'에 해당하는 혤라어 '쉬네발론'(* )은 미완료 과거 능동태이다. 따라서 공회원들이 주도적으로 회의를 따로 소집하여 계속해서 의논을 거듭했음을 보여준다. 즉 배심원들의 논리와 결정을 거쳐 판결을 내리는데 많은어려움이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4:16
유명한 표적...우리도 부인해 수 없는지라 - 그들이 곤경에 처하게 된 이유를 말해준다. '유명한 표적'에 해당하는 헬라어 '그노스톤 세메이온'(* )은 '알려진 표적'이란 뜻으로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고침받은 사건을 말한다. 예루살롑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표적이 나타난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4:17
증거가 있었으므로, 결국 법적으로 심문할 근거를 찾지 못한 그들이 택한 결정은 사도들을 위협하여 더이상 아무에게도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이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지 못한 것은 백성의 여른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권력의 자리에 앉은 자들은 민심의 동향에 민감하다. 예수께서 유일한 구주라는 것과 친히 살아 계심을 부인할 수 없도록 증거가 보여정고, 사도 베드로의 증언에 의해서 그런 예수를 죽인 죄가 그들에게 있음이 백일하에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결정은 자기들의 교세만을 고수하고자 하는 부당한 것이었다. 결국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얼마나 타락하고 그 양심이 마비되었는가를 시사해 준다.

=====4:18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가르치지도 말라 -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뿐 아니라, 오직 자기들의 교권(敎權)을 유지하기에만 급급한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의 완악함을 볼 수 있다.

=====4:19
하나님 앞에서...옳은가 판단하라 - 이스라엘의 최고 법정 산헤드린의 위협에 굴하지않고 공회의 결정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사도들의 단호한 태도는 실로 대담한 도전이다. 이런 태도를 취할 수 있었던 용기가 생긴 근거를 살펴보면, (1)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부터 나온것이었다. 사도들은 앉은뱅이가 일으킴을 받는 표적을 통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심을 직접 확인하였고, 또한 부활하신 주님께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있으리라"(마 28:20)고 하신 약속의 말씀을 믿었기에 이처럼 대담한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믿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였다(히 11:38). (2) '하나님 앞에서'(* , 에노피온 투 데우)라는 사도들의 선언에서 볼 수 있듯이 항상 하나님의 임재, 즉 하나님의 면전에 서 있다는 신전 의식에서 나온것이었다. 하나님의 임재를 믿고 확신하며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의식이 사도들에게 용기를 준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임재해 계시는 앞에서 과연 너희 말을 순종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옳은지 판단해보라고 한 것이다. '퍼단하다'의 헬라어 '크리노'(* )는 '분석하고 분별해 보다'는 뜻이다. 사도들은 공회원들의 양심에 호소하며, 그들이 '의'(* , 디카이온)를 떠나 불의하게 판결을 내리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4:20
우리는...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 타협할 수 없는 사도들의 확고 부동한 입장을 공회앞에 재천명하는 이 구절은 원어상으로 보면 두가지 강조 어법이 돋보인다. (1) 이중 부정으로 강력한 긍정을 표현하는 어법을 사용함으로 반드시 말해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시했다. (2) 동사와 주어를 뒤바꾸어 쓰면서, 지시대명사인 '우리는'(* , 헤메이스)을 사용하여 '우리'에 강조점을 두었다. 즉 목격자로서 보고 들은것을 증언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보고 들은 것'이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만에 살아나신 부활 사건을 의미향다. 이처럼 사도들은 인간의 권위와 하나님의 권위가 충돌할 때 자신들이 보고 듣고 확신하는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는 편을 택했다. 이것은 생명을 건 각오를 한 것이다.

=====4:21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다시 위협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 공회원들은 의회의 결정이 피고인들로부터 공개적으로 거부되고,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들은 속수 무책이되자 고작 우격다짐식으로 협박을 반복할 뿐이었다. 그들이 '벌할 도리를 찾지 못했다'는 것은 합리적으로 사도들을 징벌할 방도가 도무지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그래서 저들이 택한 것은 다시 위협하는 일뿐이었다. '다시 위협하였다'(* , 프로사페일레오)는 것은 '더욱더 위협하였다'는 의미인데, 공회의 일차경고가 무시되었기 때문에 재차 가중한 위협을하였음을 의미한다. 공회가 이런 방법을 택할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누가가 밝힌대로 '백성을 인하여'이다. 이는 기적이 가져온 효과를 보여준다. 즉 사도들이 행한 표적을 목격한 군중들의 열기는 대단했으니 나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에까지 이르렀다. 때문에 공회는 사도들을 처벌해야 하는 것과 백성의 반응 사이에서 전전긍긍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백성의 마음을 잃지 않고 환심(歡心)을 사기 위해 늘 애쓰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공회는 어쩔수 없이 사도들을 다시 위협하여 석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공회원들은 하나님과 진리보다는 자기들의 교권 유지를위해 대중을 더 무서워하는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4:22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 누가는 고침받은 앉은뱅이의 연령을 '사십 세이상'(* , 플레이오온 텟세라콘타)이라고 명시함으로써 고침받은 자가 날 때부터 만성적인 병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3:1)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오랫동안 앉은뱅이로서 정상적인 삶을 살지도 못하다가 전혀 기대하지도 못했던 기적이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발생하였기 때문에 모든백성은 놀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4:23
그 동류에게 가서 - 여기서 동류란 다른 사도들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복음 전파를 통해 더하여진 그 이외의 제자들을 포함하는 것인지 정확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이 무리가 오천 명이나 되는 믿는 자(4:4) 전체라기 보다는 좀더 작은 무리였으리라는 것이다(Marshall). 또 '프로스 투스 이디우스'(* )라는 말이 '그 자신의 사람들'(요 13:1), '자기 백성'(요 1:11)등으로 사용되고 있으며구약성경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실한무리'(말 3:16)등과 연관됨을 생각할 때 이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신앙의 공동체요 동질적인 유대(紐帶) 아래 맺어진 교회로 볼 수 있겠다.

=====4:24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 여기서는 기도의 방법에 있어서 몇 가지 문제가제기된다. (1) 무리가 영감을 받아 모두 한 목소리로 기도했는가? (2) 인도자의 기도를 따라서 반복했는가?(Alfold) (3) 이미 작성된 기도를 사용했는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은 확실치 않으니 '소리를'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넨'(* )이 복수가 아닌 단수로 사용되었다는 점과 일반적으로 공중 기도나 대표 기도가 전 회중을 대표하는 것을 볼때 이부분은 한 사람이 대표로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나머지 무리는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통해 한 마음으로 연합되어 그기도에 동의한 것으로 이해된다. 저자 누가도 그런 의미에서 핍박으로 인한 교회의 일치된 기도를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의 증거라고 강조한듯하다(Marshall, 1:14;15:25;롬 15:6). 대주재여 - 이의 헬라어 '데스포타'(* )는 '주'(Master)라는 뜻으로 70인역에는 25회 가량 사용되었으나 신약성경에는 자주 등장하지 않는 단어이다. 이는 아마도 이 말이 갖고있는 독단적이고 무력적인 의미 때문인 듯하나, 고대 헬라인들은 '통치자'나 '왕' 또는 주종 관계에서 '주인'을 말할 때 이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통치를 강조하는 '절대 통치자'의 의미가 강하다(눅 2:29;계 6:10).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칭호는 박해의 위기에 서 있는 교회가 첫째, 하나님을 천지를 지으시고 만유를 다스리시는 통치가로믿는 믿음을 가졌고 둘째, 그분의 통치 아래에있는 교회를 세상이 해치지 못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신앙으로 그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4:25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 본문은 사본상으로는 해석이 난해한 구절이다. 그 이유는 '의탁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을 통하여', '-에 의해서')가 어떤 사본에는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필사자에 의한 실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Robertson). 또한 특별히 이 말은 '입'(* , 스토마토스)과 관련해서 사용될 때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이 축자 영감적인 의미를 띠고 있음을 나타낸다. 결국 이 구절은 선지자 다윗을 통해 장차 일어날 큰 일을 예언케 하신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제자들의 확신을 보여준다. 어찌히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 시 2:1의 인용으로서 메시야에 대한 예언 말씀이다. 여기서 '열방'의 헬라어 '에드네'(* )는 복수로서 유대인들을 뺀 그 이외의 이방 나라를 의미하며, '족속'(* , 라오이)은 복수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한다. '분노하다'라는 동사의 헬라어 '에프뤼앝산'(* )은 부정과거 능동 직설법으로 '말'(horse)이 콧김을 내쉬듯 거만한 태도를 보이는 것'과 관련된 의미로서 그리스도를 소멸시키려는 이방인들의 꿈이 거만하고 헛된 것임을 보여준다. '경영하다'란 둥사의 헬라어 '에멜레테산'(* )은 '멜레테'(* , '신경쓰다')라고 하는 말에서 유래됐으며 '실행에 옮기다, 주의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4:26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 군왕은 헤롯왕을, 관원은 로마의 총독 빌라도를 지칭하는 듯하다. 여기서 '나서며'라고 하는 '파레스테산'(* )은 '정렬하여선'이란 뜻으로 진을 치고 대열을 지어 싸움일으킬 태세를 갖춘 상태를 말한다. 이는 '함께모여'라는 표현과 병행(竝行)해서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그 나라를 파괴하려는 큰 흑암의 세력이 연합하여 반역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4:27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합동하여 - 신약성경에는 여러 명의 헤롯 왕이 등장한다. 예수 탄생시 통치자인 헤롯 대왕(마 2:1;눅 1:5). (2) 헤롯 대왕의 아들로서 왕위를 게승해 유대 사마리아 등의 분봉왕이었던 아켈라오(마 2:22). (3) 아켈라오뒤에 왕이 되어서 교회를 박해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로 죽었던 헤롯 아그립바1세 등이다. 본문의 헤롯은 B.C. 4-A.D. 39년까지 갈릴리와 베뢰아를 통치하던 분봉왕으로 세례 요한을 목베어 죽인 헤롯 안티파스이다(마 14:3). 한편 눅 23:12에는 헤롯과 빌라도가 원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고 예수를 죽이는 데에 '친구가 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본절에서도 원수들간의 연합이 실제로 발생했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러한 연합은 이미 다윗의 입을 통해 예언된 바였다. 거룩한 종 예수를 - '종'의 헬라어 '파이스'(* )는 때때로 '아들', '어린 아이'(마 2:6;눅 2:43)등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주로 부자(父子) 관계에 중점을 둔 용어이다. 특히 '거룩한'이라는 형용사가 '종'을 수식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 '종'이 보통의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로서 신성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눅 1:35) 종으로 낮아져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충실히 감당하기 위해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야를 표현한다(사 42:1;52:13).

=====4:28
하나님의 권능 - '권능'에 사용된 헬라어 '케이르'(* , 손)는 두 가지 의미를갖는다. (1) 19:26에서처럼 '손으로 만들어진 신(神)'이라고 할 때의 '손'(hand)을 뜻하거나(마 12:10) (2) 주로 '하나님의 손'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날 때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 '권능'등을 의미한다(7:50;눅 1:66). 또한 (2)에 대해서도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그들의 계획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이루신다고 하는 그의 '역사하시는 손'으로의 의미와(Hammond) 둘째는 욥 13:26에서처럼 그의뜻과계획을 미리 기록해 놓았다는 '기록하시는 손'으로서의 의미이다(Matthew Henry). 앞뒤의 연관된 부분들을 블 때 두번째 해석 즉, '기록하시는 손'으로서의 해석이 지지되는데 이는 누가가 이 사건을 구약에 예언된 말씀의 성취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예정하신 - '미리 결정하다'란 뜻의 '프로오리센'(* )은 초월자로서 인생의 운명과 만물의 법칙을 제정하시고 그것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심을 보여준다. 이 단어는 누가와 바울에 의해서만 사용되기는 하지만, 베드로 역시 같은 사상을 갖고 있었음이 틀림없다(2:23;벧전 1:2, 20). 이는 성경의 전체 사상이 하나님의 예정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뒷받침해 준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누가는 주와 교회에대한 핍박이 오히려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며,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은 성취되어 간다는것을 증언하고 있다. 본문의 제자들 역시 대적들의 악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결국에 대적들은 패배하고 말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에 의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Marshall).

=====4:29
발생하는 상황예 관하여'라는 의미이다. 앞에서(24-28)는 그들이 처한 악한 형편과 상황들을 하나님께 고하고 나서, 본절예서는 그들 자신에게 적용하는 기도를 하고 있다. 이처럼 상황을 고하고 나서 구체적인 간구를 하는 형태의 기도는 초대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으며, 깊은 신앙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하감하옵시고 - 이에 해당하는 혤라어 '에피데'(* )는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본다'는 뜻이다. 특히 이 단어는 방해하거나 응분의 처벌을 내릴 목적으로 지켜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제자들이 당하는 위협에 대하여 하나님께 의탁(依託)하는 것은 결국 (1) 하나님께서 모든 역사의 섭리자요 감찰자이시며 (2) 교회는 그의 통치하심아래 있다는 것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주옵시며 - 이들은 처해 있는 위기의 상황에서 그 대적들이 망하게 되는 것보다는 오히려 핍박의 상황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면서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용기를 주시기를 기도하였다. 할편 '주옵소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스'(* )는 제2부정과거 능동태 명령법으로 '지금 즉시 주옵소서'라는 의미이며 아주 급박한 상황에서 절박하게 요구할때 사용되는 표현 형태이다. 이는 결국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있어서 그 말씀을 전하는 것을 어떤 일보다 중요시했음을 보여준다.

=====4:30
손을 내밀어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토 텐 케이라 에크테이네인'(* )은 누가의 관용적 표현으로 '그 손을 펴사' 또는 '그 손을 펴심으로서'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내밀어'라는 동사의 주어가 인격적이어야 하는 점을 고려할 때 적당한 해석은 '당신이 당신의 손을 내밀어'가 된다. 즉이 말은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눙력과 권능으로 당신의 손을 내밀 때에 이적이 행해짐을 나타낸다. 표적과 기사.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세메이아 카이 테라타'(* )는 '하나님의 능력(손)에 의해 되어지는 모든이적'을 뜻하는 것으로서 앞절의 '손을 내밀다'에 연결되는 종속 목적의 의미로 보는게 타당하다(Knowling, Page, Wendt). 병고침이나 예수의 이름으로 되어지는 모든 표적과 기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의해서만 나타나는 일임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특히 '표적과 기사'라는말에서 생각해야 할 중요점은 (1) 예수의 병고침이나 이적 자체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사건을 통해서 예수의 메시야되심과(요 10:25)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가 드러났다는 점과, (2) 사도들에게 주어진 '표적과 기사'를 그들의 사도권에 대해 인정하시는 표로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14:3)

=====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 기도가 끝나자마자 즉각 일이 발생하고 있다. '진동하더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살류데'(* )는 두 가지 뜻으로 쓰인다. (1) 바람에 의해 흔들리는 상태(마 11:7). (2) 지진에 동반된 진동 상태(16:26). 본문은 두번째 의미로 봄이 타당하다. 모인 곳이 지진이 일어날 때와같이 흔들린 것은 주로 구약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현현(顯現)에 대한 표징(사 6:4)일 뿐만아니라 하나님이 기도를 듣고 응답하시는 것을 나타낸다. 성령이 충만하여 - 신약에서는 주로 세가지 의미의 '성령 충만'을 언급한다. (1) 한 사람에게 특별한 임무를 부여하기 위한 일시적인 충만(8절;13:9). (2) 스데반이나 일곱 집사처럼 그 사람의 생애를 특정짓는 영구적인 의미(6:3). (3) 엡 5:18에서와 같은 계속적인 성령 충만. 여기서 '충만하다'라는 동사는 헬라어 '에플레스데산'(* )의 부정 과거 수동태로 (1)과 같은 의미로 특별 사역을 위한 일시적충만을 의미한다. 제자들은 성령 충만했기 때문에 위기에 처해서도 담대히 말씀을 증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

=====4:32
믿는 무리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투 플레두스 톤 피스튜산톤'(* )은 문자적으로 '믿는 자들의 그 무리'라는 뜻이다. 누가는 '무리'라는 용어를 두 가지로 사용하고 있다. (1) '무리' 또는 '거주민 전체'(2:6;14:1, 4). (2) 종교적 공동체(6:2). 여기서는 두번째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누가는 여기서 '믿는'(* , 피스튜산톤)이라는 과거 분사를 사용해서 이 무리가 같은 신앙을 갖고 있음을 강조한다. 뒤이어 나타나는 무리의 일치는 외적인것에 의함이 아니요, 바로 같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공동의 신앙에 의한 것이었다. 한 마움과 한 뜻이 되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카르디아 카이 푸쉬케 미아'(* )에서 '엔'(* )은 미완료 3인칭단수로 나타난다. 이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각각 이기보다는 막 12:30에서처럼 전인격적인 일치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머리로하여 한 몸을 이룬 교회가 그 신앙으로 말미암아 가지게 되는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통용하고 - '코이나'(* )는 풍부한 의미를 갖고 있다. 주로 '친교', '교류', '분배'등으로 번역되며, 여기서는 특별히 재물을 소유하는 면보다는 그것을 사용하는 면에서 통용(通用)했음을 시사한다. 각 사람이 자신의 재산을 갖고 있었으나 그것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고 공동체의 필요를 느꼈을 때 언제라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나라의 능력이었고 동시에 하나님 은혜의 결과였다. 누가는 여기서 교회가 갖는 교제의 독특성을 가르쳐 준다. 즉 먼저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여 그분과 거룩한 고통을 하게 되면 자연히 성도간에 사랑의 교제를 나누게 된다는 것이다.

=====4: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 '증거하다'의 헬라어 '아페디둔'(* )은 '돌려주다, 빚을 갚다'라는 의미이며 법적인 채무를 이행한다는 뜻이 있다.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한 것은 빚진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직무를 수행한 것이다(1:22). 한편 사도들이 전한 그리스도의 부활은 복음의 핵심이었고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죽인 그 예수가 바로 '오실 메시야'였음을 밝히는 것이었다. 사도들은 사두개인들과 산헤드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담대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증거했다.

=====4:34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 초대 교회의 구성원들이 각기 다른 신분과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태에 이른 것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중에는 빈곤한 자가 결코 없을 것이라는 구약의 약속(신 15:4)이 초대교회 내에서 실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팔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폴룬테스'(* )는 현재 능동태 분사형으로 계속되는 진행의 의미를 나타낸다. 이는 자신의 소유를 파는 행위가 교회의 궁핍한 자들이 생길 때마다 계속되었음을 보여준다.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있어 각 사람의 소유는 공동체의 필요를 위해 그것을 팔아야 할 필요를 느끼기 전까지만 자신에게 위임되어 있는 하나님의 것이었다. 즉 자신의 소유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소유요 따라서 이를 잘 관리해야 한다는 청지기 의식이 초대 교회성도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4:35
사도들의 발 앞에 - '발 앞에'의 헬라어 '파라 투스 포다스'(* )의 표현법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이 있다. (1) 사도들이 강단 위에 앉아 있다는 표현이다(Lenski, Weststein). (2) 세상 재물에 대한 경멸의 표현이다(Henry). (3) 이는 소유물에 발을 올려 놓으므로 그 소유나 처분권(處分權)을 획득한다는 법률적 용어이다(E. Haenchen, Marshall). 여기서는 세번째 해석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도들의 또다른 직무 중 하나는 그런 재물들을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분배해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4:36
바나바 - 본명은 요셉이었고 사도들로부터 '바나바'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아마도 이것은 그의 성격을 반영하는 듯하다. 그는 레위인으로서 구브로에 거주했는데 당시 구브로에는 유대인들이 소수로 모여 살았다(11:29). 본절에서 누가는 '바나바'란 이름의 뜻을 '권위자'즉 '휘오스 파라클레세오스'(* )로 말하고 있다. 그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1) 문자적으로 '예언자' 또는 '선지자의 아들'이란 뜻이다(고전 14:3). 바나바는 '선지자'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11:23;13:1). (2) '위로 혹은 권면의 아들'이란 뜻이다(Robertson, Mayfield). 이중 후자의 입장이 더욱 지지된다. 왜냐하면 '권위'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클레시스'(* )의 주된 개념은 '용기를 북돋움'(encouragemant)이라는 의미가 강하기 때문이다(9:31;13:15). 여기서 누가가 특별히 바나바의 이야기를 기록해 놓은 이유를 살펴보면, (1) 그의 소유를 팔아 교회 공동체에 내어 놓음에 있어서 아주 뛰어난 믿음의 행위를 보였기 때문이었고 (2) 계속된 교회의 발전에 있어서 그가 중 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며(11:24)) (3)믿음을 갖게 된 첫 레위인으로서 복음에 대해 유대인이 가진 편견(偏見)의 큰 벽을 허물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4:37
팔아 값을 가지고 - 여기서 '값'의 헬라어 '토 크레마'( )가 일반적으로 쓰이는 복수 형태로 되어 있지 않고 단수로 되어있는 이유는 이것이 그 돈의 총액을 의미하기 때문인 듯하다.



본서 1장이 성령에 대한 약속, 2장이 성령의 강림과 교회의 시작, 그리고 3장이 사
도들을 통한 성령의 활동상을 소개하고 있다고 볼 때 이러한 '성령의 증거'라는 주제
와 연관하여 본장의 내용은 '교회성장'이라는 주제로 초점이 모아진다 하겠다. 따라서
본장은 3장에서 계속되는 사건을 배경을 예루살렘 교회의 성장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첫장이 되거니와 본장을 상고함에 있어 먼저 전후 문맥적 흐름을 살펴본 다음 그 개괄
적인 내용을 분석하여 보기로 하자.
(1) 문맥상의 유의점. 본장은 3장에 수록된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을 매듭짓는 결
론부로(22절) 전후 문맥상 공통되는 바가 많다. 때문에 여기서는 가급적 중복 설명을
피하고 본장에서 두드러지는 사항만 고찰해 보기로 하자.
(가) 구원의 유일성. 3장에서와 마찬가지로 본장에서도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운
권능에 대해 선포하고 있다. 3장에서는 물론 그 대상이 일반 백성들이므로 상세하고도
일반적인 선포였지만, 본장에서는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대한 분명하고도 단호한 변증
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과감하고도 공격적인 변증 설교(5-12절)의 요점
과 취지는 간략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농축된 복음의 정수라 할 만하다.
한편 여기서 우리가 특히 유의할 것은 본장이 3장과 같이 철두 철미하게 그리스도가
중심된 구원의 은혜를 선포한 것이지만, 특히 12절에서 보는대로 물리적 치유와 영적
구원의 의미를 모두 포함하는 헬라어 동사 '소데나이'(* )를 사용하여
인류 구원에 관한 유일한 근거를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구원의 유일성은
23-31절에서도 기도라는 형식으로 더욱 확연하게 정형화되었다(30절).
(나) 핍박과 성장. 본장에는 앉은뱅이를 치유한 이후로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
타나 사도들에 대한 박해와 반대가 유대교 지도자들에 의해 시작된 장면이 부각되어
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의 행적 가운데서도 여실히 드러났던 것처럼 당시의 종
교적, 사회적 기득권들을 향유하고 있었던 세력들이 느끼고 있었던 기독교에 대한 적
대감을 그대로 보여준다. 여기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문단 강해에서 다루기도 하고 여
기서는 이러한 핍박의 기운이 교회의 외형적 성장(4절;2:41,47), 내적 성장과(32-37
절;5:12-16)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음을 밝혀 두고자 한다. 실로 본장에서 부각된 유
대교의 복음이 전파되는 역사적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본장은 '고조되는
핍박과 복음의 점진적 확산'이라는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교회의 성장'이라는 한부분
을 점하고 있다 하겠다.
(2) 내용 구성. 본장의 내용은 크게 1-31절과 32-37절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세부적으로는 6개의 소단락(1-4절;5-12절;13-22절;23-31절;32-35절;36-37절)으
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내용상 1-4절, 5-22절, 23-31절, 32-37절로 나누어
보기로 한다.
첫 단락(1-4절)은 이미 언급한대로 3장의 내용을 배경으로 사도들이 산헤드린 공회
에 출석하게 된 경위를 소개하고 있고, 둘째 단락(5-22절)은 산헤드린에서 심문과 협
박을 당한 사도들이 하나님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통로라는 사실을 담대히
증거한 내용이며 셋째 단락(23-31절)은 점점 심각한 양상을 띠는 적들의 움직임과 사
도들의 담대한 신앙이 극적으로 대조되고 있다. 마지막 넷째 단락은 다시 두 개의 작
은 단락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 바, 종말론적 단체로서 교리가 가져야 할 영적이고도
도덕적인 특징들을 묘사하는 부분(32-35절)과 이를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한 인물에 초
점을 맞춘 부분(36-37절)이 그것이다. 특히 마지막 소단락(36-37절)은 본장의 첫 단락
이 앞장의 내용을 열거하여 '핍박과 성장'이라는 주제를 형성해 가고 있듯이, 다음 장
에 전개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5:1-11)에 연결되어 있다.

1. 핍박의 배경(4:1-4)
본문은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성령이 충만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
이를 일으켜 세운 후 모인 무리에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던 중(3:11-26) 일어
난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본장의 서론이라고 할 수 있는 본문은 다음 단락들
을 이해하는 결정적 단서가 된다고 하겠다. 즉 1절에는 핍박자들의 정체가 거론되고,
2-3절에서는 핍박하는 이유와 핍박의 사실이 기록되어 본장의 둘째 단락(5-22절)에 연
결되고 있으며, 4절은 앞장의 기사를 끝맺는 단순한 서술일 뿐만 아니라 셋째 단락
(23-31절)과 넷째 단락(32-37절)을 전개하는 주요한 배경 설명으로서 '핍박과 성장'이
라는 본장의 주체가 암시되어 있다. 이에 여기서는 본문에 부각되는 다음 세 가지 주
제에 초점을 맞추어 보기로 하자.
(1) 핍박자들. 핍박의 주동 세력은 모두가 사두개파의 일원이었다. 따라서 사도들을
잡아 가둔 이면에는 영의 존재나 내세, 부활, 천사를 부인하는(23:8;마 22:23;막
12:28;눅 20:17) 교리적 측면에서 비롯된 반감과, 자신들의 지위를 위태롭게 하는 세
력에 대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자 않고 탄압하는 잔혹한 성향의 일단이 숨겨져 있
다(마 27:1;요 12:10). 이를 통하여 성도들은 그릇된 신앙을 소유하고도 하나님을 믿
는다고 하며 복음을 거부하는 이단들의 소행을 생각해 볼 수 있으며, 저들의 현혹과
조롱에 대해서 굳건히 말씀을 지켜 순종하는 것만이 저들을 이기는 첩경임을 삼가 유
의해야 할 것이다.
(2) 부당한 체포 이유. 사도들을 체포하였던 이유 중의 하나는 성전 앞뜰에서 종종
이루어지곤 하던 일반 풍속과도 같은 단순한 사건 때문이었다. 당시 사람을 가르치고
자신의 사상을 전하는 일에 따르는 열띤 토론과 다소의 소란은 묵인되는 것이 관례였
다. 그럼에도 유대교 지도자들이 사도들을 체포하게 되었던 중요한 원인은 자신들의
권력에 대하여 비난과 도전으로 비화될 위험성 때문이었다. 이렇게 부당한 탄압을 사
도들이(23-31절) 어떠한 자세로 이겨냈는가를 보면서 성도들은 당면한 문제들을 회피
하려고 하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기 보다는 하나님의 공의를 간구하며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구하는 성숙한 자세가 요구된다 하겠다.
(3) 개심한 사람의 수. 본문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믿은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
나'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남자'라는 지칭이
문자적으로 '남자'인지 '사람'의 뜻인지 확실하지 않은 점이고 둘째는 '약 오천'이라
는 수가 단 한번의 설교로 증가된 수인지 지금까지의 총수인지 하는 것이다. 그러나 2
장 41절에 나타나는 미완료 동사 '더하더라'가 설교의 결과 일어나는 어떤 과정을 나
타내 준다고 할 때, 동일한 설교에 군중의 무리가 한꺼번에 반응했다는 사실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결론적으로 오천 명이라는 숫자는 3장에 기록된 이적과 설교의 결과 회개의 과정을
통하여 개심한 이천 명과 앞의 삼천 명을 합한 숫자로 봄이 타당하다. 더 자세한 내용
은 해당 구절 주석을 참조하기로 하자. 아무튼 믿는 무리의 수가 날로 증대해 간 것은
하나님의 교리는 바로 말씀을 듣고 개심한 자들을 통하여 확장되어 나가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케 하는 성령의 활동은 어떠한 외부적인 압력에도 중단되지 않는다는 사실
을 암시한다(31절).

2. 구원의 유일성(4:5-22)
본장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한 쌍의 대조를 이루고 있는 두 개의 소단락
으로 구성된다(5-12절;13-22절). 특히 본문에서 강조되고 있는 사항은 구원의 유일성
과 이에 대한 신앙 고백으로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인간의 모든 육적, 영적인 문제를
치유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이요 이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전하는 것이야말로 하
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사실이다. 본문의 내용을 상고하기 위해 유대교 지도자들의 심
문과 이에 대한 사도들의 담대한 신앙 고백에 초점을 맞추어 보기로 하자.
(1) 심문의 의도와 변증 목표. 사도들이 선 재판정은 제사장, 서기관 등 70명의 율
법 전문가들로 구성되 유대 최고의 법정이었다. 본문의 전반부(5-12절)에서는 바로 여
기에서 있었던 심문과 그에 대한 사도들의 변증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타나고 있는 광경은 우리가 이미 복음서에서 보았던 예수께 대한 대제사장의 심문
과정과 흡사하다(마 26:57-68;막 14:53-65;눅 22:66-71). 예수께서도 당신을 처치할
구실을 마련키 위한 교활한 의도가 담긴 질문을 당하였듯이(마 21:23-27) 사도들도 애
매한 질문을 통하여(7절) 올무에 빠뜨리고자 하는 저들의 간계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유대교 지도자들의 술책을 알아차리고 지혜롭게 대처하신 것처럼 사도들도
터무니없는 저들의 속셈을 은근히 책망하여(9절) 오히려 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기회로 삼았다.
실로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으나 모든 민족이 하나가
되는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도록 작정되어 있었던 예수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일
한 통로라는 사실을 담대히 증거하는 것과 성령 충만이라 하겠다(8절).
(2) 핍박을 이긴 사도들의 거룩한 고백. 본문의 후반부(13-22절)는 앞에서 보았듯이
세상 권세자들이 성령의 능력을 입은 사도들 앞에서 그들의 담대함과 능력에 압도되어
결국 자신들의 의도대로 사도들을 처리할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비록 정식 교육의 혜
택을 받지 못한 사도들이었으나 성경에 대한 능숙한 논증은 가히 공회원들을 아연 실
색케 할 만큼 놀라운 것이었다(13절). 저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사도들의 증언 내
용이 진리냐 아니냐 하는 것을 문제삼기보다 협박과 공갈로 사도들을 위협하기에 급급
한 것이었지만, 지식의 근본이신 하나님(잠 1:7)을 참으로 만난 사도들은 올바른 지식
을 소유할 수 있었기에 저들의 음모와 간계를 물리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복음 증거를 적극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 학식이 없어 할 수 없다는 핑계보다는(딤후 2:21) 하나님
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전 의식'(神前意識)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
다(19,20절). 이것은 16세기 종교 개혁자들이 내걸었던 개혁 정신('하나님 앞에서',
Coram Deo)이기도 하다.

* 건축자들의 버린 돌. 베드로가 사용한 이 문구(11절)는 장래에 나타날 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시편 118:22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이 말
씀을 인용하여 이미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신 바 있다(마 21:42;막 12:10;눅
20:17). 곧 예수는 건축자들에게 쓸 데 없다고 버림받은 돌처럼 유대인들이 멸시하고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사 자기 우편에 두시고 영광과 권능을 홀로 차지하게
하셨으며 구원의 기초를 만들었으니 곧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셈이다. 결국 이 돌
은 이사야 28:16의 말씀을 베드로전서 2:6에서 인용한 것과 같은 '보배롭고 요긴한 모
퉁이 돌'이 되었다(롬 9:33;엡 2:20).
이와 같이 베드로는 '건축자의 버린 돌'에 대해 언급함에 있어 공회원들의 질문에
답변하는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기초가 되는 것을
밝히 설명하고자 하였다. 이는 이미 우리가 보았던 대로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2:14-36)의 핵심을 요약하고 있다. 우리들이 이웃에게 예수를 역사적 인물로 또는 선
한 선생으로만 소개하는 데 머물러서는 진정한 예수를 소개하였다고 할 수 없을 것이
다. 베드로처럼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사건의 참 의미를 설명해 주어야
만 한다(갈 6:14;엡 2:16:17).

* 산헤드린 공회. 이는 구약 시대(민 11:16)부터 예루살렘 멸망 때(A.D.70)까지 존
속한 유대인들의 최고 재판 기관이었다. 대제사장인 의장 한 명과 바리새인 및 서기관
신분의 70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이 산헤드린(Sanhedrin)은 의결 정족수만 모여도 회합
을 가질 수 있었다. 이들의 임무는 주로 모세의 율법과 장로들의 전승을 수호하며 이
를 어기는 자를 치리, 계도(啓導)하는 것이며 백성들의 민사 문제를 처리하는 권한도
아울러 갖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던 관계로 사형권
만은 산헤드린도 행사할 수 없었는데 그 같은 문제는 반드시 로마 정부로부터 파견된
유대 총독에게 상신(上申)하여야 했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다고 정죄한 대제사장(막 14:64)이 다시금 예수를 빌라도에게
고소한 까닭(막 15:1,3)이나,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사도 바울을 신성 모독죄요 민심
소란죄로 로마 총독 벧릭스에게 고소한 까닭(24:1-9)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아무튼 산
헤드린의 임무란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종교적, 사회적으로 바른 생황을 하도록 지
도하는 것이었다 하겠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형식적 율법주의에 사로잡힌 나
머지 오히려 갖은 술수를 부려 율법을 완전케 하러 오신 예수를 죽였으니 그 죄가 얼
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3. 성도의 자세(4:23-31)
본문은 앞에서 일어난 상황을 새롭게 전환하는 역할을 하는 바, 사도들의 석방과 그
로 인한 교회의 신앙적 반응을 보도하고 있다. 정당한 이유없이 사도들을 핍박한 공회
원들의 비겁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을 위시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이를 의
연히 대처하려는 자세와 각오를 공고히 했다. 모름지기 성도들은 이와 같이 악으로 악
을 갚지 말고(롬 12:17;살전 5:15;벧전 3:9) 선으로 악을 이기는(롬 12:21) 선한 싸움
을 싸워 예비된 의의 면류관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딤후 4:7,8). 본문에 부각되
는 다음 세 가지 주제를 살펴보도록 하자.
(1) 핍박의 의미. 공회에서 석방된 베드로와 요한은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믿음
의 형제들을 찾아가 위로를 받으며 새 힘을 공급받고자 했다. 이에 제사장들과 장로들
의 말을 다고한 후 임박한 환난을 예견하면서 피차 더욱 담대한 신앙으로 무장할 것을
격려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베드로와 요한을 환영한 초대 교회는 감사의 기도를 하나
님께 드렸고 성도간에 분열없이 하나되기를 힘썼다(24절). 결국 성도의 고난 가운데
외부적인 박해는 오히려 성도간의 단결을 강화시키고 믿음에 대한 열의를 더하는 요인
이 되어질 뿐인 것이다.
(2) 기도의 내용. 한차례의 핍박을 당한 후 사도들이 풀려나자 교회는 더욱더 합심
하여 기도하였다. 기도의 구성과 내용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그 기도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가) 이사야 37:15-20의 히스기야의
기도에서 인용한 하나님께 대한 찬미(24절). (나) 시편 2:1,2의 인용과 여기서 인용된
시편 말씀의 견지에서 본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언급(25-28절). (다) 자기들이
처한 현재의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능력 주실 것을 비는 간구(29,30절).
다음으로, 그 기도에는 세 가지 주목할 만한 내용이 담겨 있다. 첫째로, 인용된 시
편에 열거되고 있는 무리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데 동조했던 자들과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 예컨대 '세상의 군왕들'은 '헤롯 왕'과 '관원들'은 '로마 총독 빌라
도'와, '열방'은 '로마 제국'과, 그리고 '족속들'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각각 연결된
다. 둘째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
라는 사실은 신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롬 8:17;고전 12:27,16:17;골 1:24).
예수께서도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교회와 당신의 '하나'임을 친히 증거
하셨다(9:4). 셋째로, 핍박에 직면한 교회는 그 상황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식의 소극적
간구를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수 있는 능력을 간구하
였다.
(3) 기도의 응답. 일심으로 기도하던 믿음의 형제들이 기도를 끝마쳤을 때 그들은
두 가지 방법으로 응답을 받았다. 먼저 모인 곳이 진동하였는데 이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증거요, 기도가 응답된 증거였다(왕상 19:11;사 29:6;마 27:51,28:2). 또한 오순
절 성령 강림 때(2:1-4)와 같이 내적인 성령의 충만을 체험하였는데 그 결과로 더욱
힘있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담력을 얻게 되었다.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기도를 해야 할 것이며, 성령의 충만을 받은 후에는 영적으로 주린 사람들에게
더욱 담대히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이다(눅 4:18,19).

* 그리스도의 대적자들. 본문에서 인용된 시편(2:1,2)에 열거되고 있는 무리들은 직
접적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데 동조하였던 자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넓게는 예
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거나 그분에 대해 무관심한 모든 세력을 그리스도께 대항하는 세
력으로 보아야 한다. 사실상 예수께서는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
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 12:30;눅 11:23)고 말씀하심으
로써 대적의 범위를 외부적인 것과 내부적인 것 곧 영적인 범위에까지 확대시키신 바
있다. 더욱이 야고보는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
수되게 하는 것"(약 4:4)이라고까지 하였다. 그러므로 단지 하나님이 없다고 반박하는
자만이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요,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
기고자 하는, 두 마음을 품은 자들도 그와 같은 자임을 인식하여야 한다(왕하 17:33;
습 1:4,5;눅 16:13;고전 10:21;약 1:8,4:8). 예수께서는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노라고 단호히 말씀하셨다(눅 16:13).

* 성령 세례, 성령 충만, 성령의 은사. 성경에는 성령, 성령 세례, 성령 충만, 성령
의 은사 등 성령과 관계되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본 주제 강해에서는 이들의 의미와
관계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1) 성령 세례. '성령 세례'란 세례 요한의 물 세례와 구분되는 말로서 특별히 오순
절의 성령 강림 및 고넬료 집에서의 성령 강림과 연관되는 개념이다(1:5;11:15;막
1:8). 그러나 세례의 본래적 의미나 기능을 고려해 보건대(19:1-7 주제 강해 '물 세례
연구'참조), 우리는 물 세례와 성령 세례를 구분하여 생각해 볼 수는 있으나 양자를
엄격히 분리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세례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동참하는 의미를 내포하
고 있다고 한다면(막 10:38;롬 6:4;골 2:12), 물 세례와 성령 세례란 형식(상징)과 내
용(실상)이라고 하는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도 아
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행할 것을 명령하셨으며(마 28:19), 물과 성령
으로 거듭나야 할 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요 3:5). 요컨대, 성령 세례란 예수 그
리스도를 믿고 거듭날 때에 받는 것이므로 모든 신자는 이미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
이다.
(2) 성령 충만. '성령 충만'이란 성령 세례와는 별개의 개념으로서 성령의 능력이
강하게 역사하심으로 인해 성도의 심령이 감동하거나 강건해지는 상태(4:8;7:55), 혹
은 내주하시는 성령과의 깊은 영교(靈交)를 통해 전인적으로 성장한 영적 각성 상태
(11:24) 등을 뜻한다.
(3) 성령의 은사. '성령의 은사'라는 교회의 유익과 성장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여된 성령의 특별한 은총들(예언, 방언, 영 분별, 신유 등)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
로 성도들의 신앙 성장을 위해 주어지는 고귀한 은총들(가르침, 구제함, 다스림, 사랑
등)을 모두 포함한 말이다(롬 12:6;고전 12:10,28,30;요일 4:1).

4. 영적인 생활(4:32-37)
본문은 초대 교회의 정신과 면모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본장의 전반부에서
(1-31절) 보았던 대로 박해를 선동한 사람들의 의도와 기대와는(17절) 달리 그들의 핍
박은 초대 교회의 성도들을 신앙적, 물리적으로 더욱 밀접하게 결속시키는 요인이 됨
으로써 교리의 내적 성장을 이루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즉 그들은 신실한 마음으로
피차 사랑하고 그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된
삶을 구체적으로 실현하였던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세상 나라 사이의 알력, 즉 오는 세대
와 이 세대간의 긴장 상태를 전제로 하는 저자의 종말론적 관심사를 엿보게 되는데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 사이의 종말론적 단체로서의 교회가 가져야 할 영
적이고도 도덕적인 특징들이 부활에 관한 사도들의 메시지 선포와 연결되고 있음은 매
우 유의할 만한 사실이다(33절). 이에 다음의 두 가지 사실에 대해서 알아보자.
(1) 천국의 예표. 누가는 초대 교회의 공동 소유 제도에 관해 이미 설명한 바 있다
(2:44,45). 그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본문은 그 제도의 지속성을 강조하기 위해 언급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여기 나타나고 있는 공산(共産) 세계는 오늘날의 공산주의 사
회와는 판이하게 구별된다. 즉 사유 재산 처분, 무상 분배, 민족 무차별 등 그들이 행
동으로 보여준 생활 내용들은 마치 공산주의자들이 내거는 슬로건(slogan)과 흡사하지
만, 그것은 어떤 법제나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형제 사랑에 대한 일념으로 실
천되었다. 따라서 이 사랑의 공동체는 천국의 생활 모습을 예표하고 있다 하겠다.
(2) 성도의 삶. 본문은 또한 희생적 봉헌의 대표적인 실례로서 바나바를 소개하고 있다. '바나바'라는 별명은 천품이 온유하고 관대하며 많은 학식과 영적으로 큰 은사를 소유하고 있었던 요셉의 인격을 잘 묘사하고 있다. 바나바는 자신의 소유를 팔아 자발적으로 헌납함으로써 초대 교회 성도들의 유무 상통(有無相通)이 어떤 것인지 몸소 보여주었다. 이와 같이 모범적인 실천 신앙은 이기적인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 이웃의 어려움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려는 성도들에게 더더욱 요구되는 사항이라 하겠다(20:35;롬 15:1;고전 9:22;살전 5:14).

* 교회의 기능. 본문에는 초대 교회 성도들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32절)는 기록이 나온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기관일 뿐 아니라(엡 3:10;벧전 2:9) 인간들에게 기여하는 몇 가지 기능을 가진 공동체임을 알 수 있다. 즉 다음과 같은 기능이 교회 내에서 발휘되어야 한다.
첫째, 교회는 그 구성원들에게 교제의 기회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주심으로써 그들간에 대화와 친교의 장이 형성되었던 것처럼 성도들은 하나님 안에서 한형제 자매로 부르심을 받았느니 서로 교제하며 나아가 상부 상조할 수 있는 공동의 장을 갖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2:42-47).
둘째,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여야 한다. 사실 교회는 이 같은 목적에 입각하여 설립된 성도들의 연합체이다(1:8). 그러므로 교회 구성원인 성도들은 세상을 복음화시킬 사명을 부여받는 자들이라 하겠다(마 28:19,20). 사도 베드로나 바울처럼 먼 곳에까지 가서 복음을 증거하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셋째, 교회가 갖고 있는 또 다른 기능 중의 하나는 지역 사회에 봉사하는 것이다.
성도들이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듯이 우리도 사람들에게 아낌없는 긍휼을 베푸는 것이 기독교 사랑의 원리이다. 그러므로 주의 몸된 교회의 일원인 우리는 자기 교회의 부흥 발전에만 관심을 갖기보다는 지역 사회와 어려운 형제를 위해서도 봉사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여야 할 것이다(약 2: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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