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데오빌로여(* , 오 데오필레) -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 또는 `하나님의 친구'(`데오스'<* >와 `필로스'<* >의 합성어)라는 뜻이 있다. 누가는 이미 그의 첫번째 저서에서도 수신자가 데오빌로라는 것을 밝힌 바 있다(눅 1:3). 다만 차이가 있다면 누가복음에서는 `각하'라는 존칭이 그에게 붙여져 있다는 것이다. 데오빌로의 신분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說)이 있다.(1) 데오빌로라는 이름의 의미가 시사하는 바대로 그는 어떤 특정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 독자를 가르킨다는 추측이다(Bruce). 그러나 이러한 추측은 `각하'(눅 1:3)라는 존칭을 사용한 것을 볼 때 그 신빙성이 적어진다. 왜냐하면 실재의 인물이 아닌 사람에게 그러한 존칭을 사용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 (2) 데오빌로가 실재했던 인물이라면 그는 `각하'라고 불릴 만큼 높은 관직에 있던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따라서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그는 적어도 총독 이상의 직위를 가진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에 유대 지방의 총독들인 벧릭스(23:26;24:3)나 베스도(25:1;26:25)가 바로 데오빌로였을 것이라는 말이 된다(B. H. Streeter).그러나 `각하'라는 존칭이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기 위한 전문 용어였는지 아니면 단순히 예의를 위한 존칭이었는지 분명히 알 수가 없다.(3) 또 다른 추측은 도미티안(Domitian) 황제의 조카인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스(Titus Flavius Clemens)가 신자가 된 후에 그리스도인의 이름으로 고쳐 부른 이름이 데오빌로였을 것이라는 추측이다(B. H. Streeter). (4) 어떤 사람은 37-41년 사이에 유대인 제사장 가운데 데오빌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데오빌로가 그 사람일거라고 추측한다(R. Eisler). 그러나 데로빌로가 위에 언급된 사람 중에 누구라고 확실하게 꼬집어서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당시에 책을 저술하여 누구에게 증정하는 관례가 유행되고 있었던 점으로 볼 때 `데오빌로'라는 수신자는 분명히 역사적인 한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누가복음 서두의 내용(눅 1:3, 4)을 볼 때 그는 상당한 지식 수준에 있는 사람으로 이미 기독교에 대해서 이해와 관심을 가진 사람이다.
내가 먼저 쓴 글에는(* , 톤 프로톤 로곤) - 정관사 `톤'(* )은 선행(先行)된 어떤 기록을 지적하는데 그것은 누가복음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형용사를 문자적으로 취하여(`첫째'라는 의미임) 누가가 누가복음과 본서에 이어 또 한권의 책을 쓰고자 했다는 주장을 하는 학자들이 있다(Zahn, Ramsay). 그러나 이 말이 두 종류만을 비교하는 데 쓰였던 예들(요 1:15;20:4)을 볼 때 오히려 `먼저'(* , 프로테로스)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유력하다.
=====1:2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 `택하신'(* , 여셀려사토)은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맨 처음 택하실 때 사용된 것과 같은 동사이다(눅 6:13). `사도들'은 때로 넓은 의미에서 사도들을 도와주는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말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예수의 최후의 명령을 받은 열 한 사도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성령으로 명하시고 -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마 28:18-20; 막 16:15-18;눅 24:44-49)에 성령으로 명하셨다는 내용은 없다. 그러나 예수는 그의 생애에서 줄곧 성령의 인도를 받으셨다(10:38;눅 4:1, 18). 세례를 받을 때부터(눅3:21) 부활(1:4)승천하실 때까지 그의 모든 사역이 성령의 인도에 의해 이루어졌다.따라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명하신 것도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아울러 성령으로 명하셨다는 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셔서(요 20:22) 복음 증인으로 삼으실 것을 약속하신 사실을 말하기도 한다.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 `시작하심부터'(1절)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은 예수의 모든 지상 사역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승천하다'는 원래 `어떤 것을 들어 올리다'(* , 아날람바노)는 뜻을 지닌 동사인데 본 구절에서는 하늘로 올라가신 것 즉 `승천'의 의미로 사용된다. 이 동사가 비록 `하늘로'라는 어구가 없이 사용됐다 할지라도 여러 곳에서 예수께서 하늘로 올리우신 것과 관련하여 사용되어졌기 때문에(1:11, 21;막 16:19;딤전 3:16) 여기에서도 자연스럽게 `승천'(昇天)의 의미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이 70인역에서는 엘리야의 승천을 묘사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왕하 2:11).
=====1:3
해 받으신 후에 - `해'(害)란 그리스도의 고난을 의미하며(3:18;26:23)이 `고난'에는 그의 죽음까지 포함된다(히 2:9은 `죽음의 고난'이라고 말하고 있다).
확실한 많은 증거 - 눅 24:13이하의 사건들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하다(요 20:16-18;21:1).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승천하실 때까지 40일 동안 세상에 계셨다. 그 사이에 제자들에게 열 번 나타나셔서 그의 육체적 부활을 증거하셨다(마 28:1-19;막 16:9-18;눅 24:13-50;요 20:11-23,26-29;21:1-23;고전 15:5-8).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 `하나님 나라의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부활 후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당신의 공생애 동안 일어났던 사건들의 의미를 설명해 주셨으리라 짐작된다(눅 24:45-47). 한편 `하나님 나라'(* ,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는 예수께서 가르치신 중심 주제일 뿐 아니라 신 구약 성경의 주제이기도 하다. 신 구약 성경의 내용을 살펴볼 때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하나님 나라는 구약의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되었다(사 9:1-7;11:6-8;29:17-24;35:5-10;단 2:44 등). (2) 하나님 나라는 예수께서 오심으로 이미 시작되었다(마 12:28;눅 17:20,21 등).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아직 절정에 이르지 아니하였다.(3)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재림때에 절정에 이르러 완성(完成)을 보게 될 것이다(마 25:34;요 18:36). (4)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는 나라이다(시 103:19). 하나님 나라에서 `나라'는 영역(realm)을 가리키기도 하나 일차적으로는 통치, 주권, 왕권과 관련된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으로서 주권을 행하시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막 1:14-20 주제 강해 `하나님 나라의 개념'참조).
=====1:4
같이 모이사(* , 쉬날리조메노스) - 이 동사를 헬라어 `쉰'(* , `함께')과 `할레스'(* , `붐비는')에서 온 합성어로 추정하여 지금까지 `함께 모이사'로 번역해 왔다(Calvin, Bruce, NASB). 이에 반하여 이 동사가 `쉰'(* )과 `할스'(* , `소금')에서 온 합성어로 보고 `함께 절인 것을 나누는 동안' 혹은 `함께 식사하는 동안'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Chrysostom, Jerome, Meyer, Vulgate, RSV, NIV). 이러한 번역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그들 앞에서 음식을 잡수신 사실(눅 24:42, 43;행 10:41)을 고려할 때 그 타당성을 지닌다. 그러나 이 동사의 어원에 있어서 이렇다할 만한 뚜렷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이 역시 하나의 추정일 뿐이다. 그러므로 위의 두 견해 중 어느 것을 택해도 무방하리라 본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 예루살렘은 솔로몬 왕이 성전을 건축한 장소였다(대하 3:1). 그는 예루살렘의 모리아산에다 성전을 건축했는데 그곳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위해 갔던 산이다(창 22:2,14). 이처럼 예루살렘은 구속사적(救贖史的)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 곳이다. 이삭의 번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미리 보여주신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친 그곳에다 성전을 짓도록 섭리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리라!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말씀이 나올 곳으로 예언된 것이며(사 2:3;미 4:2)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곳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은 진리의 중심지로서, 신약의 터전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주님께서는 바로 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분부하신 것이다. 그곳으로부터 진리 운동이 일어나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 `아버지의 약속'은 요 14:16,17,26;15:26;16:7-14에 나타난 것같이 주님께서 마지막 날 밤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내용이 중심 주제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곧 보혜사 성령에 관한 약속인 바(5절;욜 2:28-32;눅 24:49) 약속된 성령께서 하실 일은 무엇보다 복음의 비밀을 깨닫게 하는 것이요 또한 능력있게 복음을 전하게 하는 것이다.
=====1:5
본절은 세례 요한이 이미 예언한 것으로(마 3:11;막 1:8;눅 3:16) 요한의 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승천 후에 부어주실 성령 강림의 예표였다. 상세한 내용은 눅 3:1-20 주제 강해 `세례 요한의 세례'를 보라.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 분명한 시일이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날은 그때부터 약 열흘 후 였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 구약의 예언에 의하면 성취의 날에는 하나님의 영이 모든 육체에 부어질 것이라고 하였다(욜 2:28).이제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이루시고 승천하심으로 죄를 회개하고 믿음을 고백한 모든 신약의 백성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성령의 세례와 앞서 말한 요한의 물세례와의 차이점에 관해서는 1:1-5 주제 강해 `성령 세례'를 참조하라.
=====1:6
저희가 모였을 때 - 원문에는 `멘 운'(* ,`그래서')이라는 일종의 연결어(連結語)가 있으나 한글 개역 성경에는 빠져 있다. 여기에서 `저희'는 사도들을 말하고(2절) 그들이 모인 곳은 예루살렘에서 동편에 있는 감람원(the Mount of Olives, NIV)이라 하는 산이었다(12절).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 `묻자와'(* , 에로톤)는 미완료 과거형으로 제자들이 반복하여 질문했음을 암시한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 사도들이 예수께서 `약속하신 것'(4절)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예수의 지상 사역 기간 동안 줄곧 그들은 이스라엘의 만족적인 독립과 회복을 통하여 실현되어질 하나님 나라를 보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라가 회복되면 자신들이 권력의 자리에 앉게 될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막 10:35-45;눅 22:24-32).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더불어 그들의 기대는 산산이 부숴졌지만, 이제 부활하신 주를 보고서 다시금 정치적 회복에 관한 기대가 되살아나게 된 것이다.
=====1:7
때와 기한은(* , 크로누스 에 카이루스) - 이 두 단어는 각각 보다 긴 시간과 보다 짧은 시간을 가리킨다(G. Miligan). 그러나 더 엄밀하게 말하면 전자는 시간의 지속(duration)을 가리키고 후자는 정해진 한 순간을 의미한다(살전 5:1).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 예수는 `때'를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6절) 직접적으로 `아니다'라고 답하시지 않았다. 대신 그는 제자들의 관심을 장차 그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에로 돌리셨다(8절). 이미 예수는 자신도 그의 재림의 날과 시를 알지 못하며 오직 하나님만 그것을 알고 계신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마 24:36;막 13:32;살전 5:1, 2;벧후 3:10).
=====1:8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그들이 하늘의 능력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시키셨다. 그 능력(* , 뒤나민)이란 그들의 증인으로서의 사역을 수행하는데 필요로 하는 모든 능력을 말한다.예수 자신이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던 것처럼(10:38;마 3:16;막 1:10;눅 3:21, 22) 이제 제자들도 그와 똑같이 기름부음을 받아 사역을 수행할 수 있어야 했다. 증인(證人)으로서의 사역은 본서 전체에 걸쳐 두루 나타나는 주요 주제이다(2:32;3:15;5:32;10:39;13:31;22:15).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이 제사장 나라로서의 증인의 사역에 이어 제자들의 사역을 통해 완수해 나가야 될 과제로 남겨졌다. 여기에서 `성령이 임한다'는 것은 5절에서 언급된 성령의 세례를 의미한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들이 앞으로 감당해야 할 사역의 영역을 요약하고 있다. 이 지리적인 명칭들은 마치 본서의 목차와 같은 구실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F.F. Bruce). 즉, 본서의 기록에 의하면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1-7장)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8:1-11:18) 온 세계에로 확장되어 갔던 것이다(11:19-28:31). 누가복음에서는 복음 사역의 지리적 이동 상황이 갈릴리로부터 베레아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이어져 가는데 본서의 경우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로마까지 퍼져 나간다.
내 증인이 되리라 - 영어의 순교자(martyr)라는 말이 `증인'(* , 마르튀스)이라는 헬라어에서 유래했다. 이는 증인은 순교적(殉敎的) 자세를 가지고(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보고 들은 것을(요일 1:1) 증거해야 함을 암시한다. `내 증인'이란 `나(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나를 위해서, 나에 관한 모든 것을 증거하는 것'을 말한다(R.C.H.Lenski). 그리고 `내 증인이 되리라'는 미래 시제는 성령 강림의 약속의 실현과 더불어 제자들이 본격적으로 증인의 사역을 감당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
=====1:9
보는 데서 - `보는 데서'(* , 블레폰톤)는 현재 분사로 그들이 예수를 직접 계속해여 보고 있었음을 강조한다.
올리워 가시니 - 이는 2절과 눅 24:51에서 승천에 관해사용된 두 동사(* , 에파이로)와 같은 말이다.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영광을 가시적(可視的)인 형태로 표현하는 상징적인 의미로 볼 수 있다. 광야에서 구름이 장막에 충만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시적인 증표로서 이스라엘 백성위에 임한 것이었다(출 40:34). 또한 그러한 구름은 변화산상에서도 예수와 제자들을 에워쌌었는데(마 17:5;눅 9:34, 35)그것 역시 하나님의 임재를 알리는 가시적인 표시였다. 뿐만아니라 감람산에서 예수께서 그의 재림을 묘사할 때에도(마 24:30;막 13:26;눅 21:27)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고 하였다.
=====1: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 `자세히 보다'(* 아테니조)는 `긴장한채 열중하여 보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에서는 미완료형이 사용되어 행동의 계속성을 암시한다.
=====1:11
갈릴리 사람들아 - 제자들은 주님께서 부르시기 이전에는 한갓 갈릴리 사람, 즉 어부, 세리에 불과했다. 또한 그곳 갈릴리는 요 7:52에 의하면 선지자가 나지 못한다고 할 정도로 도외시되던 곳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보잘것없는 곳 출신의 그들이 성령의 능력을 받아 담대한 복음의 증인들이 되었던 것이다.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 이 말은 어정쩡한 태도로 계속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에 대한 일종의 책망이라 할 수 있다(I. Howard Marshall). 제자들은 과거 변화산상에서의 경험을 상기하면서(마 17:1-8) 구름이 걷히고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게 되리라는 기대에 빠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예수의 승천에 관한 말씀을 들었으며(요 6:62;20:17) 또한 향후에 감당해야 할 사명을 명령받은 바 있음에도 불구하고(8절) 이 상황에서는 그것을 잊어버린채 단지 예수와 함께 있으려는 데에만 집착하였다.
너희 가운데서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 예수의 재림 사실에 대해서 그 방법까지도 강조하여 묘사하고 있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사실은 당신의 재림을 확신시키는 보증(保證)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 재림의 약속은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를 증거하는 사역에 매진할 수 있게 하는 동력과 근거의 역할을 한다.
=====1:12
감람원이라 하는 산 - 감람산(마 21:1;24:3;26:30)은 예루살렘 동남쪽에 있는 길게 뻗은 산이다. 이 산에는 감람나무가 많이 있어서 이 이름을 가진 듯하다. 이 산 서편의 감람나무 숲이 우거진 기슭에 예수께서 최후의 기도를 드린 `겟세마네' 동산이 있다.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 미쉬나(Mishnaah)에 의하면 안식일의 여행거리는 최대한 2천 규빗으로 제한되었다. 이 거리는 NIV의 난외주에도 나타나듯이 약 1.1Km정도에 해당될 것이다. 한편 본문은 예수의 승천이 안식일에 있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강조점은 그 사건이 예루살렘 근방에서 일어났다는 데에 있다. 눅 24:50에 의하면, 예수는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을 데리고 `베다니'까지 가신 것으로 되어 있다.
=====1:13
들어가 -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간 것을 뜻한다.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 원문에서 `다락'(* , 토 휘페로온)에 정관사를 사용하여 `그 다락' 혹은 `그 방'이라고 한 것을 볼 때 이 다락은 이미 잘 알려진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다락방은 비록 뚜렷하게 입증되지는 않지만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에 그의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먼찬을 드셨던 방인 것 같으며(막 14:12-16;Zahn, Bruce) 또한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 중 몇 사람에게 나타나셨던 적이 있는 바로 그 방이었을 것이다(눅 24:33-43;요 20:19-26). 다락방은 초대교회의 터전이기도 했던 마가의 다락방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베드로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 공관복음서에 제자들의 명단이 제시되었으나(마 10:2-4;막 3:16-19;눅 6:13-16)본서에서도 그 명단을 기록하고 있다. 이 목록에서 누가가 의도하는 바는 사도의 무리가 그 수에 있어서 불완전하며 따라서 맛디아를 선택함으로써 그 결원(缺員)을 보충하는 기사에 대한 준비 단계를 마련하고자 함이다. 본서와 공관복음에 기록된 열 두 사도의 명단의 비교는 마 10:1-4 주제 강해 도표를 참조하고, 열 두 사도의 행적에 관해서는 막 6:7-13 주제 강해의 도표를 참조하라.
=====1:14
여자들과 - 예수의 사역 기간 동안 그리고 심지어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지낼 때까지 계속 따라 다니던 여인들을 가리킨다(눅 23:49;24:10;요 19:25). 베자 본문(Codex Bezae)에는 `그리고 어린이들'이란 문장이 첨가되어 있다.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 누가는 복음서에서부터(눅 1장) 마리아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보여왔는데 여기서는 여자들 중 유일하게 그 이름을 거론하고 있다. 이것은 그녀가 초대 교회내에서 어떤 지도적 위치에 있었음을 짐작케 해주는 구절이다. 그러나 그녀를 숭배의 대상으로 나타내지는 않았다.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 예수의 아우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마 13:55;막 6:3)인데 그들은 한때 예수를 믿지 않았다(요 7:2-10). 그러나 그들은 예수의 부활 이후에 예수의 제자들이 되었다. 그 중에 야고보는 이들 중 가장 두드러진 인물로서(12:17;15:13 이하)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방문했던 사람 중 하나였고(고전 15:7) 야고보의 저자로 믿어진다.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 그들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위하여 응답이 올 때까지 기도에 전념하였다. 예수께서는 교회를 인도하고 강화시킬 하나님의 선물로서 성령을 약속하셨거니와, 이 약속에 대한 성도들의 반응은 기도로 나타나야 했다. 다시 말해서 초대 교회가 성령을 받은 것은 기도할 때였다. 따라서 누가가 본서 시작부분에서 지속적이고 합심(合心)된 기도로써 성령 강림을 기다리는 제자들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
=====1:15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 명이나 되더라 - 고전 15:6에 의하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500여 형제들에게 일시에 나타나셨다고 한다. 그렇다면 본문의 120명 외에도 더 많은 제자들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여기서 특별히 120이라는 숫자는, 자체 내에 공회(council)를 갖춘 한 공동체를 설립하는데 필요한 최소 인원수를 120으로 규정한 유대법의 규례를 염두에 둔 것으로 추측된다(I.H.Marshall). 곧 유대교적 견지에서도 제자들의 수는 새로운 한 공동체를 형성하기에 충분한 숫자였다.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 가운데 일어서서 가로되 - 복음서에서도 베드로는 열두 제자들 중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묘사되었다(마 16:17-19). 여기서도 그는 대표자의 자격으로 모임을 주도하고 있다. 베자 사본(Codex Bezae)에는 베드로가 `그 제자들' 가운데 서서 그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을 `형제'라 지칭한 경우를 여기서 처음 보게 된다. 한슨(Hanson)에 의하면 이 말은 교회의 구성원들을 가리키는 최초의 명칭이었다고 한다(6:3;7:2;13:15,26,38;15:7,13;22:1;23:1,6; 28:17).
=====1:16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 이 말은 성경의 영감에 있어서 `성령'은 배후의 역사자요 `다윗의 입'은 도구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따라서 베드로는 모든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음을 믿었다 하겠다(딤후 3:16). 한편 베드로는 가룟 유다와 관련된 성경 말씀이 성취되었고 또 성취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자신의 연설을 시작하고 있다. 원래 가룟 유다는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으로서 나름대로 그에게 할당되어진 사역 혹은 봉사의 몫을 담당했었다.이제 그가 없어졌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에 의해 그 공백이 메워져야 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20절).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 `指路(지로)한' 이란 `안내자(* , 호데구)가 된'(guide, KJV) 것을 말한다(마 26:47,48;막 14:43,44;눅 22:47,48;요 18:2, 3).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 여기서 `성경'이란 20절에 인용된 시 69:25;109:8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마땅하도다 - `반드시 될 일'을 가리키는데 이는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눅 24:44)는 말씀과 상통한다(요 10:35).
=====1:17
이 직무의 한 부분 - 가룟 유다는 예수 일행의 회계일을 맡았다(요 12:6). 이 직무는 그가 대단한 신임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그는 이렇듯 중요한 위치에서 큰 신임을 얻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욕심을 따라 결국 예수를 배신하는 중죄(重罪)를 범하고 말았다. `직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코니아'(* )는 일반적으로 `섬김', `봉사'를 뜻하며(고전 12:5;엡 4:12;히 1:14) 특별히 사도의 직분을 지칭하기도 한다(롬 11:13;고후 4:1;딤전 1:12).
=====1:18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 원문에는 아무런 구분이 없지만 우리 성경에는 본절과 다음 절을 괄호 안에 두고 있다. 이 부분을 베드로의 계속된 설교의 일부라고 보눈 견해도 있다(Meyer). 하지만 19절에서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이라는 3인칭이 사용된 점으로 볼 때 베드로의 설교라고 보기는 힘들다(I.H.Marshall). 따라서 이 부분은 베드로가 한 이야기라기보다는 당시 예루살렘에서 들리던 이야기를 누가가 기록한 것으로 봄이 무난하다. 한편 이 괄호 부분의 내용은 마 27:5-7과 차이가 있다. (1) 마태복음에는 대제사장이 밭을 산 것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유다가 밭을 샀다고 한다. 아마 실제로 밭을 산 사람은 대제사장이었지만 이것은 결국 유다가 산 것이나 다름없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2) 마태는 `아겔다마' 곧 `피밭'이라는 말의 기원(起原)이 예수의 `무죄한 피'를 판 것(마 27:4)에서 유래되었다고 설명하는 반면 누가는 이 말이 유다의 피에서 유래한다고 밝힌다(Lenski).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서로 모순된다기보다는 두 의미 모두 자연스럽게 수용될 수 있다. 이와 유사한 예로, `브엘세바'라는 지명의 기원에 대해서도 창 21:31과 창 26:32,33에서 각기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 마태는 유다가 홀로 목매어 죽었다고 말한다(마 27:5). 그러나 여기에서는 더 세밀하게 말하고 있다. 그의 죽음에 관해서 여러 이야기들이 있다. 그가 나무에 목을 매고 달려 죽은 뒤에 노끈이 끊어져서 몸이 땅에 떨어져 배가 터졌다는 이야기, 흰놈의 골짜기 절벽의 나무에 목을 매었으나 그 줄이 끊어져서 바위에 부딪혀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 나왔다는 이야기 등이 있다. 또 파피아스(Papias)의 글에 의하면 유다는 병에 걸려 몸이 엄청나게 부었으며 결국 수레에 치어 죽었다고 한다.
=====1:19
본방언 - `본방언'이란 아람어를 말한다. 이 아람어의 뜻을 풀어 설명한 것은 본절이 베드로의 설교의 일부가 아님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단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람어는 당시 유대인에게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1:20
시편에 기롯하였으되 - 헬라어 `게르라프타이'(* , `기록하였으되')는 성경을 인용할 때 관용어적으로 사용되는 완료 수동태로서 `기록된 상태에 있다'는 의미이다.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 이 구절은 시 69:25의 인용인데 시편 기자의 원수들이 거하는 거처를 황폐케 해 달라는 간구이다. 시편에서 이 구절은 경건한 자들을 박해하는 무리의 말로(末路)를 가리켰으나 베드로는 이를 유다에게 적용시킨다. 시 69편은 초대 교회 성도들간에 고난당하는 메시야에 관한 예언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C.H.Dodd). 따라서 본 구절이 예수를 배신한 자의 말로에 관한 예언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었을 것이다(I.Howard Marshall). 시 69:25에서의 `저희'가 여기서는 `그의'라는 표현으로 바뀌어 적용되고 있다. 그리고 `거처'란 유다가 산 밭을 가리키는 듯아다. 마태가 전하듯이(마 27:7) 이곳은 공동묘지로 사용되어 시편의 예언대로 `거하는 자가 없게'되었다.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 이 구절은 시 109:8의 인용으로 원수가 제 명(命)을 다하지 못하고 일찍 죽어 그 원수가 맡았던 막중한 임무를 타인이 취하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베드로는 이를 유다에게 적용시켜서 유다의 계승자를 임명하는데 대한 보증으로 삼는다. 예수께서는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의 12지파에 맞게 12사도를 임명하신 바 있다(마 19:28;눅 22:30 참조).
=====1:21,22
가룟 유다 대신 사도로 선출될 자의 자격을 명시한 구절이다.
이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가룟 유다의 자리를 메울 인물을 뽑고자 했던 이유는 단지 구약 예언의 성취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사도들에세 맡겨진 직무의 성격상 증거 사역이 효과적으로 진행되기 위해서 반드시 충원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사도의 자격은 (1)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보고 (2) 예수의 증거자로서의 사명을 받는 것이었다(고전 9:1,2;15:8-10;갈 1:16,17). 그런데 특별히 여기서 예수의 공생애 기간 동안 함께 생활했던 자라고 국한시킨 것은 (1) 열 두 사도 중 한 명을 선택하고자 했기 때문이며 또한 (2) 열 두 사도의 사역 범위가 주로 유대인들과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요한의 세례로부터 - 예수는 요한의 세례를 받으시고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셨다(마 3:13-17;막 1:1-11). 따라서 이 말은 예수의 공생애 시초부터라는 말이다.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 이는 극히 친밀하고도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아니하는 관계를 나타내는 일종의 셈어적 관용구이다(9:28;신 31:2;삼하 3:25;시 121:8).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도들의 메시지의 초점이었고 본서에서도 핵심되는 주제이다(2:24,31,32;3:15;4:2,10;10:40,41; 13:30,34; 17:3, 18;23:6;24:15).
=====1:23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 바사바와 요셉은 히브리식 이름으로 바사바는 `안식일의 아들'이란 뜻이며 요셉은 유대인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이름이다. 또 유스도는 `정의'를 뜻하는 로마식 이름이다.
하나는 맛디아라 - `맡다디아스'(* )의 약칭으로 `여호와의 선물' 이란 뜻이다. 유세비우스(Eusebius)의 추측에 의하면 그는 눅 10:1에 나오는 70인 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Ecclesiastical History).
=====1:24
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 - 그들은 먼저 사도의 자격 요건에 합당한 두 사람을 선택하였다. 히브리적인 사고 방식에 의하면 이러한 경우에는 제비를 뽑는 것이 일반적인 통례였다. 똑같은 둘 중에서 하나를 결정하는데 있어서는 매우 합리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그 투표를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기를 기도한 것이다(잠 16:33).
믓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 이 기도 가운데 나오는 `주'(* , 퀴리에)라는 호격어가 아버지 하나님을 가리키는지(Meyer) 아니면 예수를 가리키는지(Bengel, Alford) 분명하지 않으나 본분의 문맥상 이 명칭은 21절의 `주 예수'와 동일하게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또한 본 구절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며(대상 28:9;시 7:9;44:21;렘 17:10;23:24;암 9:3;습 1:12;롬 8:27)모든 사람의 운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롬 9:22,23) 보여준다.
주의 택하신 바 되어 - `택하다'(* , 에클레고마이)는 말은 2절에서 사용된 동사와 같은 말이다. 이것은 지금 선택될 사도의 후계자(後繼者)가 자신들처럼 동등한 사도권을 주님으로부터 부여받게 됨을 암시한다.
=====1:25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 `제 곳'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어떤 장소를 지칭하기보다는 직무를 뜻한다고 보고, 가룟 유다가 예수를 믿고 따르던 것을 버리고 과거에 자신이 행하던 길로 돌아섰음을 나타낸다고 해석하는 경해(Alexander, Meyer, Vincent). 이 중 우리는 문맥의 흐름이나 가룟 유다의 비참한 종국(18절)등을 고려하건대 후자의 견해를 취함이 더 나을 것 같다(시 9:17;마 25:41).
=====1:26
제비 뽑아 - 제비를 뽑는 방법은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서 많이 사용되었다(레 16:7-10;수 18:10). 사도들도 당시까지 사용되던 제비뽑기 방식에 따라 결원된 한 명의 사도를 선출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성경에는 이러한 방식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누가복음에서 저자는 예수의 지상 사역을 증거하였거니와 본서에는 예수께서 승천하
신 후 성령의 강림으로 인하여 시작된 초대 교회의 성장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
다. 본장은 본서의 서론 부분으로서 앞으로 복음 사역이 어떠한 방향으로 진행될 것인
지를 암시해 주고 있다. 본장의 의미를 상고하기 위하여 다음 세 가지 사항을 주의깊
게 살펴보기로 하자.
(1) 누가복음과의 연관성. 본서는 누가복음의 후속(後續)으로서 예수의 승천 이후부
터 복음을 전파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즉 누가복음은 예수께서 탄생하신 장면부터
시작하여 그의 공생의 죽음, 부활, 그리고 성령께서 통치하시는 새 시대의 예고(豫告)
로서 일단락되었다. 이어서 본서는 성령의 강림에 대한 예수의 약속이 성취되고 복음
이 예루살렘에서 로마에 도달하는 성령의 역사(役事)를 묘사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구
원사(救援史)를 그린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누가복음과 본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 예컨데, 저자
누가는 여행을 주제로 하여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을 표현하였던 바, 누가복음에서는
팔레스틴을 중심으로 한 예수의 전도 여행, 본서에서는 로마를 목표로 한 바울의 전도
여행을 그리고 있다. 또한 예수와 제자들이 복음 사역을 수행함에 있어서 성령이 함께
하셨다는 사실(2:1-4;눅 3:21,22)을 통하여 성령의 활동을 강조하고 있다. 누가복음과
본서의 연관성 및 연속성에 관하여는 앞으로 계속될 장 강해와 문단 강해에서 깊이 다
루어질 것이다.
(2) 본장의 위치. 본장은 본서 전체의 요약이라 할 수 있다. 즉 본장은 본서의 주제
(主題)라고 할 수 있는 예수의 최후의 지상 명령(The Great Commandment)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명령에 따라 본서의 내용은 전개된다. 본서를 누가복음의 속편(續篇)으로
이해할 때에 본장은 새로운 전환점(轉換點)을 이루고 있는 바, 본장을 기점으로 하여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교회의 역사가 시작된다고 하겠다. 예수의 승천으로 인하여 그
의 지상 사역은 막을 내리고 본장에서는 성령을 통한 제자들의 사역이 예비되고 있으
며 복음이 예루살렘을 떠나 세계 전역(全域)으로 확산될 것이라는 약속이 명시(明示)
되어 있다.
그러므로 본장은 본서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복음이 이방 세계로 뻗어 나가
는 것은 예수의 약속과 명령에 의한 것임을 본장은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에
본서는 본장에 예시(豫示)되어 있는 예수의 약속과 명령에 의거하여 전개되며 하나님
의 구원 역사가 성취되어가는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3) 저자의 기록 의도. 예수의 임박한 재림을 기다리면서 환난을 참고 이겨 나가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결국 유대 나라의 멸망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그리고 재림
의 지연(遲延) 등으로 인하여 낙심하는 자들이 많이 생겼다. 그러나 복음은 어려운 상
황 속에서도 소멸되지 않고 점점 왕성하여져서 이방 지역에 널리 확산되어 갔으니 이
는 분명히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었다. 누가는 교회가 예루살렘에 머물지 않고 세계를
향하여 전진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이며,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교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확신 아래 본서를 기록하게 된 것이다.
본서에 나타난 바람직한 교회상(敎會像)은 예수와 베드로, 스데반, 바울, 그리고 예
루살렘 초대 교회와 안디옥 교회를 본받아 선교하는 교회이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 가
운데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이제 본서에서는 그 후반부가 시
작되고 있는 바, 예수의 재림 때까지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의 우주적 사업에 동참하여
야 하는가를 교훈하고 있다. 즉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순종하여 땅 끝까지 이
르어 예수의 증인이 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본장의 내용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고찰해 볼 수 있다. 본서의 머리말로서 첫
째 단락에서는 예수의 부활 현현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으며(1-5절), 둘째 단락에서는
예수의 승천과 최후의 지상 명령을 다루고 있고(6-11절), 마지막 단락에서는 가룟 유
다의 최후(最後) 및 제비를 뽑아 사도를 보충하는 장면이 언급되어 있다(12-26절).
1. 머리말(1:1-5)
본문은 본장의 서두로서 누가복음의 핵심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고 있으며 예수의 부
활 현현(顯現) 40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본문의 기록은 사복음서에는 없는 누가
만의 독특한 기록이다. 다음 항목들을 통하여 본문을 상고해 보기로 하자.
(1) 사복음서와의 차이점.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간 지상(地上)에 계셨다는 이
야기는 본서에만 기록되어 있는 누가의 자료이며, 이 기간 동안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
라의 일들을 가르치신 것으로 나타난다. 요한복음에서는 현현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
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면서 성령을 주시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요 20:22) 누가
복음과 본서에는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야 비로서 성령이 주어질 것이라는 약속이 언
급되고 있다(4,5절;눅 24:49).
이러한 사실들을 통하여 누가는 하나의 일관된 관점(觀點)을 가지고 누가복음과 본
서를 기록하였음을 알 수 있다. 누가는 예수의 사역이 그의 승천으로 인하여 끝을 맺
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역사하시는 교회를 통하여 예수의 사역이 계속됨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2) 부활 후의 예수의 사역.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지상에서의 마지막 사역에 관하
여는 사복음서가 모두 언급되고 있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무덤에 찾아온 여인들
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셨으며(마 28:9;막 16:9)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 나타
나셨으며(막 16:12;눅 24:13-35) 예수의 죽음으로 인하여 낙심하던 열 한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시며 용기를 주셨다(막 16:14;요 20:19;21:1-13). 또한
예수께서는 천국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도록 명령하심으로 당신의 사역을 제자들에
게 계승(繼承)하셨다.
이와 같이 예수의 삶은 시종 일관(始終一貫)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었으며 부활하신
후 승천하기까지 40일간을 줄곧 구원을 선포하셨다. 이러한 예수의 사역을 종합하여
표현하면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3절)라는 한 마디로 압축될 수 있다. 예수
의 이 지상 사역 당시에는 제자들조차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였으나 부활
후에야 비로서 진리를 깨닫게 되었으니 부활 후 40일간의 예수의 사역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이 기간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사역을 준비하는 기간
이 된 것이다.
(3) 성령에 대한 약속. 본문에는 성령을 주시겠다고 하는 예수의 약속이 명시(明示)
되어 있는 바, 이 약속은 누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다. 먼저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 것을 당부하셨으나(눅 24:49) 이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진리의 운동이 일어나
야 하므로 제자들이 성령을 받기 전에는 이곳을 떠나지 말 것을 당부하신 말씀이다.
또한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말씀, 즉 예루살렘으로부터 복된 소식이
나올 것이라는 예언(사 2:3;미 4:2)을 이루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그 예언은
성취되어 예루살렘에 성령의 강림이 이루어졌으며 최초의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또한 예수께서는 성령의 세례를 받을 것을 약속하심으로 요한의 물 세례와 구분하여
말씀하셨다. 요한의 물 세례는 죄를 씻는 외적인 의식(儀式)인 반면(마 3:11;막 1:8)
예수의 성령 세례는 내적으로 회개하고 구원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역사(役
事)로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 장에 나타날 성림 강
림의 현장에서 증명될 것이다. 성령 세례를 통해서만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
날 것이요(요 3:5) 예수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제자들
은 성령 세례를 통하여 완전히 변화되어 완악한 심령들을 회개시키는 담대한 복음의
사역자들이 되었다.
* 성령 세례. '성령 세례'는 이미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거니와(겔 36:26;욜
2:28-32) 그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하여 완벽하게 성취되었다(2:1-13). 이를 누가
복음 3:16에서는 '불 세례'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이 때 '불'은 죄악을 태워 없앤다
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한편 세례 요한은 자신이 베푼 '물 세례'와 '성령 세례'를
뚜렷이 대조시킨 바 있다(마 3:11). 이런 점에서 '성령 세례'에 관해 구체적으로 살펴
보기로 하자.
(1) 시기와 의미. 성령 세례는 우리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시인하는 순간에 이루어진다. 따라서 회개 없는 성령 세례는 있을 수 없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성령 세례를 통해 성도들의 심령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는(고전 3:16) 구원에 대한 보증으로서 그리고 영원하신 보혜사로서 늘 성도들과 함께
하시는 것이다(요 14:6;고후 1:22). 따라서 중생한 성도는 누구나 성령 세례를 체험하
였다고 하겠다.
한편 성령 세례를 극적인 감정적 황홀경 또는 방언, 신체의 진동 등과 같은 특별한
외적 체험과 동일시하려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데 이런 특수 체험 등은 물론 오늘날에
도 가능하기는 하나 주로 성령에 대한 계시가 확실히 주어지지 않았던 초대 교회 시대
에 성령의 강림과 사역의 증거로서 나타나는 현상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성령 자체보
다는 표적과 기적을 요구하는 심정으로 이런 특수 체험들을 요구하는 것은 건전하지
못하다. 예수를 주(主)로 시인하는 자는 이미 성령 세례를 받은 것이다. 왜냐하면 성
경에서도 말하고 있는 바, 성령의 도움 없이 타락한 우리의 본성만으로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할 수 없기 때문이다(마 16:16,17;고전 12:3;요일 4:15).
(2) 시행자. 성령 세례는 삼위 일체의 협력하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시행되며(고전
6:11), 여타의 어떤 인위적 의식에 의해서도 대치될 수 없다.
(3) 대상. 성령 세례는 구원을 위한 필수적 요소로서 모든 성도들에게 약속되어 있
다(10:44;15:7-9;요 7:37-39). 한편 성령 세례가 모든 성도에게 있어서 단회적 사건으
로 국한되는 것인 반면, 성령 충만은 영적 진보를 위해서 늘 간구되어야 할 기도 제목
이다.
(4) 결과. 물 세례가 상징적 의식에 해당하는 것인 반면, 성령 세례는 예수 그리스
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동참하는 신비적 연합에 실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롬 6:3,4;
골 2:12). 따라서 성령 세례를 받은 자는 구원의 인침을 받은 자이며(고후 1:22;엡
4:30) 동시에 그리스도 교회의 자체가 된 자들이다(고전 12:26,27).
2. 최후의 지상 명령과 승천 이후(1:6-14)
본문에는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하신 위임(委任) 명령과 승천의 상
황 및 승천 후 제자들의 행동이 묘사되어 있다. 본문의 내용을 고찰함에 있어서 다음
항목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최후의 명령. 예루살렘에서 성령을 받은 후 예수의 증인이 되어 땅 끝까지 복음
을 전파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의 명령이다. 당시 제자들 중에는 예수를 정치적인 메시
야로 착각하여 부활하신 예수께서 혹시 로마 제국으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킬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예수의 공생애 기간 동안 누누이 강
조하셨거니와 지상 천국을 건설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영혼을 구원하시러 오셨다는 사
실을 밝히셨다.
본문에서도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어긋난 질문에 대하여 오직 한 가지만을 명령하셨
으니 곧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라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구원의 복된 소
식은 예수의 재림 때까지 세계 만방으로 퍼져나가야 할 것이며 예수의 제자들이 구원
사역의 주역(主役)들이 되어야 함을 일깨워주신 말씀이었다.
이로써 언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하나님 나라의 신
비로운 비밀로 남게 되었으며 성도는 그 날이 올 때까지 오로지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제자들은 성령 강림 후 예수의 지상 명령에 따라 예루살렘을
넘고 사마리아를 거쳐 소아시아, 유럽, 그리고 로마에까지 복음을 증거하였다.
(2) 예수의 승천. 예수의 승천에 관한 기록은 마가복음 16:19에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을 뿐 누가복음과 본서에만 나오는데(9-11절;눅 24:50-53), 누가복음과 본서의 두
승천 기록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점들이 나타난다.
첫째, 누가복음에는 예수께서 부활절 저녁에 승천하신 것으로 되어 있으나 본서에는
부활 후 40일만에 승천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둘째, 누가복음에는 베다니에서 승천하
신 것으로 되어 있으나 본서에는 감람산으로 되어 있다. 세째, 누가복음에서는 예수께
서 승천하실 때에 두 사람이 등장하지 않으나 본서에서는 등장한다. 이 두 사람은 빈
무덤에서의 두 사람(눅 24:4)과 변화산에서의 두 사람(눅 9:30) 즉 모세와 엘리야를
상기시킨다.
아무튼 이러한 차이점들은 단순히 승천 상황에 있어서 그 강조점을 달리 한 것으로
보인다. 본문에는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에 구름에 가리워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묘사
하고 있거니와 구약성경에서 구름은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출
13:21;16:10;왕상 8:10;단 7:13). 예수께서는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실 때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으나 사역을 마치시고 승천하실 때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가셨으며, 재
림시 심판주로 오실 때에도 그와 같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오실 것으로 예고하셨다.
예수의 승천이 가지는 의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는 바,
그의 수난과 죽음으로 인하여 예수께서는 성육신(incarnation) 이전보다 더 큰 영광을
지니게 되었다.
(3) 제자들의 합심 기도. 제자들은 감람산에서 예수의 승천을 목격한 후 예수의 명
령대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함께 기도하였다. 본문의 기록은
누가복음과 약안의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 바, 누가복음에서는 예수의 승천 후 제자들
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한 것으로 되어 있다(눅 24:52,53).
그러나 이 두 기록 모두 제자들이 흩어지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에는 공통점
을 지닌다.
제자들과 더불어 함께 기도한 자들은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여인들, 그리고 예수의
아우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에 힘썼으니 그 결과 예수의 승
천 후 10여일이 못되어 성령 세례를 체험하였다. 제자들의 합심 기도가 성령의 역사를
불러 일으킨 것이다. 마음을 같이 한(2:46;4:24) 뜨거운 합심는 초대 교회 건설의 원
동력이 되었으며 교회 성장의 주춧돌이 되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모여서 기도하는
일에 열심이었거니와(2:42;6:4) 그러한 기도가 밑거름이 되어 환난과 박해에도 불구하
고 복음이 세계 곳곳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유다의 최후와 사도의 보충(1:15-26)
본문에는 예수를 배신한 가룟 유다의 최후(最後)에 관한 기록과 결원(缺員)된 사도
를 보충하기 위하여 제비뽑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를 통하여 사도직(使徒職)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거니와 사도의 보결(補缺)은 앞으로 진행될 복음 사역을 위한
만반의 준비 태세였다. 다음 사항들을 통하여 본문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1) 배신자의 운명. 신약성경에는 가룟 유다의 죽음에 관한 기록이 두 군데에만 나
타나며(18-20절;마 27:3-10), 두 기록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유다
가 목매달아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본문에는 배가 터져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며,
밭을 산 사람과 피 밭이라고 부른 이유가 다르게 기록되 있다. 또한 마태복음에서는
유다가 자신의 잘못을 후회한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본문은 그러한 언급이 없으며, 마
태는 배반한 돈의 용도와 관련하여 스가랴서의 말씀(슥 11:12)을 인용하고 있는 반면
누가는 맛디아의 선택과 관련된 시편의 말씀(시 109:8)을 인용하고 있다.
여기에서 마태와 누가의 공통점은 유다의 배신과 죽음을 예언과 성취의 관점에서 이
해하였다는 점이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유다의 행실이 성령께서 다윗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성경을 응하게 하는 것이라 하였으니 이는 유다의 행동이 결과적으로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게 한 것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것
임을 표명(表明)하고 있는 바, 앞으로 본서 전체를 통하여 예언과 성취의 맥락 속에서
모든 구원 사건이 이해되어질 것이다. 가룟 유다의 죽음에 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본문 주제 강해를 참조하기로 하자.
(2) 사도의 자격과 본분. 본문에는 초대 교회에서 말하는 사도의 자격과 본분이 명
시되어 있다. 사도란 요한의 세례로부터 예수의 승천하신 날까지 예수와 함께 다니며
예수의 모든 사역을 목격한 자를 의미한다. 즉 사도의 자격은 예수의 공생애 기간 동
안 직접 그의 가르침을 받은 자여야 한다는 점이다. 또한 본문에 나타나 있는 사도의
본분은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며(22절) 봉사(奉仕)하는 일이다(25절). 이로써 초대 교
회 사도들의 중심 메시지는 예수의 부활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본서에 수록되어
있는 사도들의 설교들을 통하여 증명된다.
한편 예수의 가르침을 받고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자만이 참 사도라 불리웠으나 예
외의 경우도 있었다. 바울의 경우에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 사도라 할 수 없으나 예수
의 직접적 부르심을 받고 소명을 받았으니 넓은 의미에서 사도가 된 것이다. 그는 자
신이 예수께로부터 이방 선교의 소명을 받은 사도임을 본서와 서신들을 통하여 수차례
강조하였다. 오늘날도 예수의 부활을 확신하고 증거하는 모든 자들은 광의(廣義)의 의
미에서 사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 사도의 보결(補缺). 예수의 열 두 제자는 열 지파를 상징하는 것으로 한 명의
결원(缺員)은 반드시 보결을 필요로 하였다. 가룟 유다 대신 사도의 후보에 오른 두 사람은 요셉과 맛디아였으니 이들은 예수의 공생애 동안 제자들과 더불어 예수를 따라다니던 신실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사도들은 이 두 사람을 추천한 뒤 하나님께 기도하며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선정(選定)하였다. 항아리 속에 이름을 적은 돌멩이 둘을 넣어 먼저 뽑히는 사람이 선택되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제비뽑기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계시적인 방법으로 생각하여 많이 사용하였다(수 18:10;잠 16:33;욘 1:7). 제비를 뽑은 방식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역사로 자신의 섭리를 펴고 계심을 믿는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며 인간적인 판단을 포기하고 모두 선택권을 하나님께 의뢰하는 행위였다. 이러한 제비뽑기의 방식은 성령 강림 이후에는 성경에 나타나고 있지 않거니와 그 후에는 성령의 인도 하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 가룟 유다의 죽음에 관하여. 가룟 유다의 죽음에 관하여는 다소 상이한 두 개의
기사(18-20절;마 27:3-10)가 있으며 이 두 이야기를 조화시키려는 노력들도 있거니와 본 주제 강해에서는 이 두 기록을 근거로 하여 유다의 죽음을 조명해 보기로 하자.
유다의 비참한 최후에 관하여 혹자는 예루살렘 성벽 남동쪽 아겔다마 근처에 있는 기드론 계곡을 뻗어 있는 나무가지를 찾아 이것이 바로 유다가 목매달은 나무가지인데 밧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몸이 계곡으로 떨어져 몸이 곤두박질치면서 창자가 터져 나와 죽은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창자'가 히브리어 용법에서 '감정의 자리'를 의미하기 때문에 유다는 심령이 상하여 죽은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유다의 죽음에 관한 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해 보면 그는 자살로서 자신의 최후를 마친 것으로 보인다. 유다가 아겔다마라는 밭을 샀느냐 대제사장의 샀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밭의 값이 배반자에게 지불된 은 30이었다는 점과 그 밭의 한 모퉁이에서 유다가 목을 매어 자살했다는 점만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아겔다마, 즉 '피밭'은 유다의 배반과 비참한 최후를 계속 상기시켜 줄 것이다.
본문에서 사도들은 유다를 가리켜 '사도직을 버리고 제 곳으로 간 자'(25절)로 표현하였다. 유다는 초대 교회에서 진리를 저버린 자의 이름으로 기억되었고 지금까지도 배신자의 대명사로 불리워지고 있는 것이다.
데오빌로여(* , 오 데오필레) -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 또는 `하나님의 친구'(`데오스'<* >와 `필로스'<* >의 합성어)라는 뜻이 있다. 누가는 이미 그의 첫번째 저서에서도 수신자가 데오빌로라는 것을 밝힌 바 있다(눅 1:3). 다만 차이가 있다면 누가복음에서는 `각하'라는 존칭이 그에게 붙여져 있다는 것이다. 데오빌로의 신분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說)이 있다.(1) 데오빌로라는 이름의 의미가 시사하는 바대로 그는 어떤 특정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 독자를 가르킨다는 추측이다(Bruce). 그러나 이러한 추측은 `각하'(눅 1:3)라는 존칭을 사용한 것을 볼 때 그 신빙성이 적어진다. 왜냐하면 실재의 인물이 아닌 사람에게 그러한 존칭을 사용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 (2) 데오빌로가 실재했던 인물이라면 그는 `각하'라고 불릴 만큼 높은 관직에 있던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따라서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그는 적어도 총독 이상의 직위를 가진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에 유대 지방의 총독들인 벧릭스(23:26;24:3)나 베스도(25:1;26:25)가 바로 데오빌로였을 것이라는 말이 된다(B. H. Streeter).그러나 `각하'라는 존칭이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기 위한 전문 용어였는지 아니면 단순히 예의를 위한 존칭이었는지 분명히 알 수가 없다.(3) 또 다른 추측은 도미티안(Domitian) 황제의 조카인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스(Titus Flavius Clemens)가 신자가 된 후에 그리스도인의 이름으로 고쳐 부른 이름이 데오빌로였을 것이라는 추측이다(B. H. Streeter). (4) 어떤 사람은 37-41년 사이에 유대인 제사장 가운데 데오빌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데오빌로가 그 사람일거라고 추측한다(R. Eisler). 그러나 데로빌로가 위에 언급된 사람 중에 누구라고 확실하게 꼬집어서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당시에 책을 저술하여 누구에게 증정하는 관례가 유행되고 있었던 점으로 볼 때 `데오빌로'라는 수신자는 분명히 역사적인 한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누가복음 서두의 내용(눅 1:3, 4)을 볼 때 그는 상당한 지식 수준에 있는 사람으로 이미 기독교에 대해서 이해와 관심을 가진 사람이다.
내가 먼저 쓴 글에는(* , 톤 프로톤 로곤) - 정관사 `톤'(* )은 선행(先行)된 어떤 기록을 지적하는데 그것은 누가복음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형용사를 문자적으로 취하여(`첫째'라는 의미임) 누가가 누가복음과 본서에 이어 또 한권의 책을 쓰고자 했다는 주장을 하는 학자들이 있다(Zahn, Ramsay). 그러나 이 말이 두 종류만을 비교하는 데 쓰였던 예들(요 1:15;20:4)을 볼 때 오히려 `먼저'(* , 프로테로스)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유력하다.
=====1:2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 `택하신'(* , 여셀려사토)은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맨 처음 택하실 때 사용된 것과 같은 동사이다(눅 6:13). `사도들'은 때로 넓은 의미에서 사도들을 도와주는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말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예수의 최후의 명령을 받은 열 한 사도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성령으로 명하시고 -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마 28:18-20; 막 16:15-18;눅 24:44-49)에 성령으로 명하셨다는 내용은 없다. 그러나 예수는 그의 생애에서 줄곧 성령의 인도를 받으셨다(10:38;눅 4:1, 18). 세례를 받을 때부터(눅3:21) 부활(1:4)승천하실 때까지 그의 모든 사역이 성령의 인도에 의해 이루어졌다.따라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명하신 것도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아울러 성령으로 명하셨다는 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셔서(요 20:22) 복음 증인으로 삼으실 것을 약속하신 사실을 말하기도 한다.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 `시작하심부터'(1절)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은 예수의 모든 지상 사역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승천하다'는 원래 `어떤 것을 들어 올리다'(* , 아날람바노)는 뜻을 지닌 동사인데 본 구절에서는 하늘로 올라가신 것 즉 `승천'의 의미로 사용된다. 이 동사가 비록 `하늘로'라는 어구가 없이 사용됐다 할지라도 여러 곳에서 예수께서 하늘로 올리우신 것과 관련하여 사용되어졌기 때문에(1:11, 21;막 16:19;딤전 3:16) 여기에서도 자연스럽게 `승천'(昇天)의 의미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이 70인역에서는 엘리야의 승천을 묘사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왕하 2:11).
=====1:3
해 받으신 후에 - `해'(害)란 그리스도의 고난을 의미하며(3:18;26:23)이 `고난'에는 그의 죽음까지 포함된다(히 2:9은 `죽음의 고난'이라고 말하고 있다).
확실한 많은 증거 - 눅 24:13이하의 사건들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하다(요 20:16-18;21:1).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승천하실 때까지 40일 동안 세상에 계셨다. 그 사이에 제자들에게 열 번 나타나셔서 그의 육체적 부활을 증거하셨다(마 28:1-19;막 16:9-18;눅 24:13-50;요 20:11-23,26-29;21:1-23;고전 15:5-8).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 `하나님 나라의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부활 후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당신의 공생애 동안 일어났던 사건들의 의미를 설명해 주셨으리라 짐작된다(눅 24:45-47). 한편 `하나님 나라'(* ,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는 예수께서 가르치신 중심 주제일 뿐 아니라 신 구약 성경의 주제이기도 하다. 신 구약 성경의 내용을 살펴볼 때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하나님 나라는 구약의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되었다(사 9:1-7;11:6-8;29:17-24;35:5-10;단 2:44 등). (2) 하나님 나라는 예수께서 오심으로 이미 시작되었다(마 12:28;눅 17:20,21 등).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아직 절정에 이르지 아니하였다.(3)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재림때에 절정에 이르러 완성(完成)을 보게 될 것이다(마 25:34;요 18:36). (4)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는 나라이다(시 103:19). 하나님 나라에서 `나라'는 영역(realm)을 가리키기도 하나 일차적으로는 통치, 주권, 왕권과 관련된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으로서 주권을 행하시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막 1:14-20 주제 강해 `하나님 나라의 개념'참조).
=====1:4
같이 모이사(* , 쉬날리조메노스) - 이 동사를 헬라어 `쉰'(* , `함께')과 `할레스'(* , `붐비는')에서 온 합성어로 추정하여 지금까지 `함께 모이사'로 번역해 왔다(Calvin, Bruce, NASB). 이에 반하여 이 동사가 `쉰'(* )과 `할스'(* , `소금')에서 온 합성어로 보고 `함께 절인 것을 나누는 동안' 혹은 `함께 식사하는 동안'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Chrysostom, Jerome, Meyer, Vulgate, RSV, NIV). 이러한 번역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그들 앞에서 음식을 잡수신 사실(눅 24:42, 43;행 10:41)을 고려할 때 그 타당성을 지닌다. 그러나 이 동사의 어원에 있어서 이렇다할 만한 뚜렷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이 역시 하나의 추정일 뿐이다. 그러므로 위의 두 견해 중 어느 것을 택해도 무방하리라 본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 예루살렘은 솔로몬 왕이 성전을 건축한 장소였다(대하 3:1). 그는 예루살렘의 모리아산에다 성전을 건축했는데 그곳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위해 갔던 산이다(창 22:2,14). 이처럼 예루살렘은 구속사적(救贖史的)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 곳이다. 이삭의 번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미리 보여주신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친 그곳에다 성전을 짓도록 섭리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리라!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말씀이 나올 곳으로 예언된 것이며(사 2:3;미 4:2)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곳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은 진리의 중심지로서, 신약의 터전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주님께서는 바로 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분부하신 것이다. 그곳으로부터 진리 운동이 일어나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 `아버지의 약속'은 요 14:16,17,26;15:26;16:7-14에 나타난 것같이 주님께서 마지막 날 밤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내용이 중심 주제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곧 보혜사 성령에 관한 약속인 바(5절;욜 2:28-32;눅 24:49) 약속된 성령께서 하실 일은 무엇보다 복음의 비밀을 깨닫게 하는 것이요 또한 능력있게 복음을 전하게 하는 것이다.
=====1:5
본절은 세례 요한이 이미 예언한 것으로(마 3:11;막 1:8;눅 3:16) 요한의 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승천 후에 부어주실 성령 강림의 예표였다. 상세한 내용은 눅 3:1-20 주제 강해 `세례 요한의 세례'를 보라.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 분명한 시일이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날은 그때부터 약 열흘 후 였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 구약의 예언에 의하면 성취의 날에는 하나님의 영이 모든 육체에 부어질 것이라고 하였다(욜 2:28).이제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이루시고 승천하심으로 죄를 회개하고 믿음을 고백한 모든 신약의 백성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성령의 세례와 앞서 말한 요한의 물세례와의 차이점에 관해서는 1:1-5 주제 강해 `성령 세례'를 참조하라.
=====1:6
저희가 모였을 때 - 원문에는 `멘 운'(* ,`그래서')이라는 일종의 연결어(連結語)가 있으나 한글 개역 성경에는 빠져 있다. 여기에서 `저희'는 사도들을 말하고(2절) 그들이 모인 곳은 예루살렘에서 동편에 있는 감람원(the Mount of Olives, NIV)이라 하는 산이었다(12절).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 `묻자와'(* , 에로톤)는 미완료 과거형으로 제자들이 반복하여 질문했음을 암시한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 사도들이 예수께서 `약속하신 것'(4절)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예수의 지상 사역 기간 동안 줄곧 그들은 이스라엘의 만족적인 독립과 회복을 통하여 실현되어질 하나님 나라를 보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라가 회복되면 자신들이 권력의 자리에 앉게 될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막 10:35-45;눅 22:24-32).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더불어 그들의 기대는 산산이 부숴졌지만, 이제 부활하신 주를 보고서 다시금 정치적 회복에 관한 기대가 되살아나게 된 것이다.
=====1:7
때와 기한은(* , 크로누스 에 카이루스) - 이 두 단어는 각각 보다 긴 시간과 보다 짧은 시간을 가리킨다(G. Miligan). 그러나 더 엄밀하게 말하면 전자는 시간의 지속(duration)을 가리키고 후자는 정해진 한 순간을 의미한다(살전 5:1).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 예수는 `때'를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6절) 직접적으로 `아니다'라고 답하시지 않았다. 대신 그는 제자들의 관심을 장차 그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에로 돌리셨다(8절). 이미 예수는 자신도 그의 재림의 날과 시를 알지 못하며 오직 하나님만 그것을 알고 계신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마 24:36;막 13:32;살전 5:1, 2;벧후 3:10).
=====1:8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그들이 하늘의 능력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시키셨다. 그 능력(* , 뒤나민)이란 그들의 증인으로서의 사역을 수행하는데 필요로 하는 모든 능력을 말한다.예수 자신이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던 것처럼(10:38;마 3:16;막 1:10;눅 3:21, 22) 이제 제자들도 그와 똑같이 기름부음을 받아 사역을 수행할 수 있어야 했다. 증인(證人)으로서의 사역은 본서 전체에 걸쳐 두루 나타나는 주요 주제이다(2:32;3:15;5:32;10:39;13:31;22:15).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이 제사장 나라로서의 증인의 사역에 이어 제자들의 사역을 통해 완수해 나가야 될 과제로 남겨졌다. 여기에서 `성령이 임한다'는 것은 5절에서 언급된 성령의 세례를 의미한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들이 앞으로 감당해야 할 사역의 영역을 요약하고 있다. 이 지리적인 명칭들은 마치 본서의 목차와 같은 구실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F.F. Bruce). 즉, 본서의 기록에 의하면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1-7장)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8:1-11:18) 온 세계에로 확장되어 갔던 것이다(11:19-28:31). 누가복음에서는 복음 사역의 지리적 이동 상황이 갈릴리로부터 베레아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이어져 가는데 본서의 경우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로마까지 퍼져 나간다.
내 증인이 되리라 - 영어의 순교자(martyr)라는 말이 `증인'(* , 마르튀스)이라는 헬라어에서 유래했다. 이는 증인은 순교적(殉敎的) 자세를 가지고(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보고 들은 것을(요일 1:1) 증거해야 함을 암시한다. `내 증인'이란 `나(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나를 위해서, 나에 관한 모든 것을 증거하는 것'을 말한다(R.C.H.Lenski). 그리고 `내 증인이 되리라'는 미래 시제는 성령 강림의 약속의 실현과 더불어 제자들이 본격적으로 증인의 사역을 감당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
=====1:9
보는 데서 - `보는 데서'(* , 블레폰톤)는 현재 분사로 그들이 예수를 직접 계속해여 보고 있었음을 강조한다.
올리워 가시니 - 이는 2절과 눅 24:51에서 승천에 관해사용된 두 동사(* , 에파이로)와 같은 말이다.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영광을 가시적(可視的)인 형태로 표현하는 상징적인 의미로 볼 수 있다. 광야에서 구름이 장막에 충만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시적인 증표로서 이스라엘 백성위에 임한 것이었다(출 40:34). 또한 그러한 구름은 변화산상에서도 예수와 제자들을 에워쌌었는데(마 17:5;눅 9:34, 35)그것 역시 하나님의 임재를 알리는 가시적인 표시였다. 뿐만아니라 감람산에서 예수께서 그의 재림을 묘사할 때에도(마 24:30;막 13:26;눅 21:27)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고 하였다.
=====1: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 `자세히 보다'(* 아테니조)는 `긴장한채 열중하여 보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에서는 미완료형이 사용되어 행동의 계속성을 암시한다.
=====1:11
갈릴리 사람들아 - 제자들은 주님께서 부르시기 이전에는 한갓 갈릴리 사람, 즉 어부, 세리에 불과했다. 또한 그곳 갈릴리는 요 7:52에 의하면 선지자가 나지 못한다고 할 정도로 도외시되던 곳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보잘것없는 곳 출신의 그들이 성령의 능력을 받아 담대한 복음의 증인들이 되었던 것이다.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 이 말은 어정쩡한 태도로 계속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에 대한 일종의 책망이라 할 수 있다(I. Howard Marshall). 제자들은 과거 변화산상에서의 경험을 상기하면서(마 17:1-8) 구름이 걷히고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게 되리라는 기대에 빠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예수의 승천에 관한 말씀을 들었으며(요 6:62;20:17) 또한 향후에 감당해야 할 사명을 명령받은 바 있음에도 불구하고(8절) 이 상황에서는 그것을 잊어버린채 단지 예수와 함께 있으려는 데에만 집착하였다.
너희 가운데서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 예수의 재림 사실에 대해서 그 방법까지도 강조하여 묘사하고 있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사실은 당신의 재림을 확신시키는 보증(保證)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 재림의 약속은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를 증거하는 사역에 매진할 수 있게 하는 동력과 근거의 역할을 한다.
=====1:12
감람원이라 하는 산 - 감람산(마 21:1;24:3;26:30)은 예루살렘 동남쪽에 있는 길게 뻗은 산이다. 이 산에는 감람나무가 많이 있어서 이 이름을 가진 듯하다. 이 산 서편의 감람나무 숲이 우거진 기슭에 예수께서 최후의 기도를 드린 `겟세마네' 동산이 있다.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 미쉬나(Mishnaah)에 의하면 안식일의 여행거리는 최대한 2천 규빗으로 제한되었다. 이 거리는 NIV의 난외주에도 나타나듯이 약 1.1Km정도에 해당될 것이다. 한편 본문은 예수의 승천이 안식일에 있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강조점은 그 사건이 예루살렘 근방에서 일어났다는 데에 있다. 눅 24:50에 의하면, 예수는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을 데리고 `베다니'까지 가신 것으로 되어 있다.
=====1:13
들어가 -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간 것을 뜻한다.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 원문에서 `다락'(* , 토 휘페로온)에 정관사를 사용하여 `그 다락' 혹은 `그 방'이라고 한 것을 볼 때 이 다락은 이미 잘 알려진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다락방은 비록 뚜렷하게 입증되지는 않지만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에 그의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먼찬을 드셨던 방인 것 같으며(막 14:12-16;Zahn, Bruce) 또한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 중 몇 사람에게 나타나셨던 적이 있는 바로 그 방이었을 것이다(눅 24:33-43;요 20:19-26). 다락방은 초대교회의 터전이기도 했던 마가의 다락방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베드로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 공관복음서에 제자들의 명단이 제시되었으나(마 10:2-4;막 3:16-19;눅 6:13-16)본서에서도 그 명단을 기록하고 있다. 이 목록에서 누가가 의도하는 바는 사도의 무리가 그 수에 있어서 불완전하며 따라서 맛디아를 선택함으로써 그 결원(缺員)을 보충하는 기사에 대한 준비 단계를 마련하고자 함이다. 본서와 공관복음에 기록된 열 두 사도의 명단의 비교는 마 10:1-4 주제 강해 도표를 참조하고, 열 두 사도의 행적에 관해서는 막 6:7-13 주제 강해의 도표를 참조하라.
=====1:14
여자들과 - 예수의 사역 기간 동안 그리고 심지어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지낼 때까지 계속 따라 다니던 여인들을 가리킨다(눅 23:49;24:10;요 19:25). 베자 본문(Codex Bezae)에는 `그리고 어린이들'이란 문장이 첨가되어 있다.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 누가는 복음서에서부터(눅 1장) 마리아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보여왔는데 여기서는 여자들 중 유일하게 그 이름을 거론하고 있다. 이것은 그녀가 초대 교회내에서 어떤 지도적 위치에 있었음을 짐작케 해주는 구절이다. 그러나 그녀를 숭배의 대상으로 나타내지는 않았다.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 예수의 아우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마 13:55;막 6:3)인데 그들은 한때 예수를 믿지 않았다(요 7:2-10). 그러나 그들은 예수의 부활 이후에 예수의 제자들이 되었다. 그 중에 야고보는 이들 중 가장 두드러진 인물로서(12:17;15:13 이하)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방문했던 사람 중 하나였고(고전 15:7) 야고보의 저자로 믿어진다.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 그들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위하여 응답이 올 때까지 기도에 전념하였다. 예수께서는 교회를 인도하고 강화시킬 하나님의 선물로서 성령을 약속하셨거니와, 이 약속에 대한 성도들의 반응은 기도로 나타나야 했다. 다시 말해서 초대 교회가 성령을 받은 것은 기도할 때였다. 따라서 누가가 본서 시작부분에서 지속적이고 합심(合心)된 기도로써 성령 강림을 기다리는 제자들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
=====1:15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 명이나 되더라 - 고전 15:6에 의하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500여 형제들에게 일시에 나타나셨다고 한다. 그렇다면 본문의 120명 외에도 더 많은 제자들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여기서 특별히 120이라는 숫자는, 자체 내에 공회(council)를 갖춘 한 공동체를 설립하는데 필요한 최소 인원수를 120으로 규정한 유대법의 규례를 염두에 둔 것으로 추측된다(I.H.Marshall). 곧 유대교적 견지에서도 제자들의 수는 새로운 한 공동체를 형성하기에 충분한 숫자였다.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 가운데 일어서서 가로되 - 복음서에서도 베드로는 열두 제자들 중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묘사되었다(마 16:17-19). 여기서도 그는 대표자의 자격으로 모임을 주도하고 있다. 베자 사본(Codex Bezae)에는 베드로가 `그 제자들' 가운데 서서 그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을 `형제'라 지칭한 경우를 여기서 처음 보게 된다. 한슨(Hanson)에 의하면 이 말은 교회의 구성원들을 가리키는 최초의 명칭이었다고 한다(6:3;7:2;13:15,26,38;15:7,13;22:1;23:1,6; 28:17).
=====1:16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 이 말은 성경의 영감에 있어서 `성령'은 배후의 역사자요 `다윗의 입'은 도구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따라서 베드로는 모든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음을 믿었다 하겠다(딤후 3:16). 한편 베드로는 가룟 유다와 관련된 성경 말씀이 성취되었고 또 성취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자신의 연설을 시작하고 있다. 원래 가룟 유다는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으로서 나름대로 그에게 할당되어진 사역 혹은 봉사의 몫을 담당했었다.이제 그가 없어졌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에 의해 그 공백이 메워져야 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20절).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 `指路(지로)한' 이란 `안내자(* , 호데구)가 된'(guide, KJV) 것을 말한다(마 26:47,48;막 14:43,44;눅 22:47,48;요 18:2, 3).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 여기서 `성경'이란 20절에 인용된 시 69:25;109:8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마땅하도다 - `반드시 될 일'을 가리키는데 이는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눅 24:44)는 말씀과 상통한다(요 10:35).
=====1:17
이 직무의 한 부분 - 가룟 유다는 예수 일행의 회계일을 맡았다(요 12:6). 이 직무는 그가 대단한 신임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그는 이렇듯 중요한 위치에서 큰 신임을 얻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욕심을 따라 결국 예수를 배신하는 중죄(重罪)를 범하고 말았다. `직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코니아'(* )는 일반적으로 `섬김', `봉사'를 뜻하며(고전 12:5;엡 4:12;히 1:14) 특별히 사도의 직분을 지칭하기도 한다(롬 11:13;고후 4:1;딤전 1:12).
=====1:18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 원문에는 아무런 구분이 없지만 우리 성경에는 본절과 다음 절을 괄호 안에 두고 있다. 이 부분을 베드로의 계속된 설교의 일부라고 보눈 견해도 있다(Meyer). 하지만 19절에서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이라는 3인칭이 사용된 점으로 볼 때 베드로의 설교라고 보기는 힘들다(I.H.Marshall). 따라서 이 부분은 베드로가 한 이야기라기보다는 당시 예루살렘에서 들리던 이야기를 누가가 기록한 것으로 봄이 무난하다. 한편 이 괄호 부분의 내용은 마 27:5-7과 차이가 있다. (1) 마태복음에는 대제사장이 밭을 산 것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유다가 밭을 샀다고 한다. 아마 실제로 밭을 산 사람은 대제사장이었지만 이것은 결국 유다가 산 것이나 다름없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2) 마태는 `아겔다마' 곧 `피밭'이라는 말의 기원(起原)이 예수의 `무죄한 피'를 판 것(마 27:4)에서 유래되었다고 설명하는 반면 누가는 이 말이 유다의 피에서 유래한다고 밝힌다(Lenski).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서로 모순된다기보다는 두 의미 모두 자연스럽게 수용될 수 있다. 이와 유사한 예로, `브엘세바'라는 지명의 기원에 대해서도 창 21:31과 창 26:32,33에서 각기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 마태는 유다가 홀로 목매어 죽었다고 말한다(마 27:5). 그러나 여기에서는 더 세밀하게 말하고 있다. 그의 죽음에 관해서 여러 이야기들이 있다. 그가 나무에 목을 매고 달려 죽은 뒤에 노끈이 끊어져서 몸이 땅에 떨어져 배가 터졌다는 이야기, 흰놈의 골짜기 절벽의 나무에 목을 매었으나 그 줄이 끊어져서 바위에 부딪혀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 나왔다는 이야기 등이 있다. 또 파피아스(Papias)의 글에 의하면 유다는 병에 걸려 몸이 엄청나게 부었으며 결국 수레에 치어 죽었다고 한다.
=====1:19
본방언 - `본방언'이란 아람어를 말한다. 이 아람어의 뜻을 풀어 설명한 것은 본절이 베드로의 설교의 일부가 아님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단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람어는 당시 유대인에게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1:20
시편에 기롯하였으되 - 헬라어 `게르라프타이'(* , `기록하였으되')는 성경을 인용할 때 관용어적으로 사용되는 완료 수동태로서 `기록된 상태에 있다'는 의미이다.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 이 구절은 시 69:25의 인용인데 시편 기자의 원수들이 거하는 거처를 황폐케 해 달라는 간구이다. 시편에서 이 구절은 경건한 자들을 박해하는 무리의 말로(末路)를 가리켰으나 베드로는 이를 유다에게 적용시킨다. 시 69편은 초대 교회 성도들간에 고난당하는 메시야에 관한 예언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C.H.Dodd). 따라서 본 구절이 예수를 배신한 자의 말로에 관한 예언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었을 것이다(I.Howard Marshall). 시 69:25에서의 `저희'가 여기서는 `그의'라는 표현으로 바뀌어 적용되고 있다. 그리고 `거처'란 유다가 산 밭을 가리키는 듯아다. 마태가 전하듯이(마 27:7) 이곳은 공동묘지로 사용되어 시편의 예언대로 `거하는 자가 없게'되었다.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 이 구절은 시 109:8의 인용으로 원수가 제 명(命)을 다하지 못하고 일찍 죽어 그 원수가 맡았던 막중한 임무를 타인이 취하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베드로는 이를 유다에게 적용시켜서 유다의 계승자를 임명하는데 대한 보증으로 삼는다. 예수께서는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의 12지파에 맞게 12사도를 임명하신 바 있다(마 19:28;눅 22:30 참조).
=====1:21,22
가룟 유다 대신 사도로 선출될 자의 자격을 명시한 구절이다.
이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가룟 유다의 자리를 메울 인물을 뽑고자 했던 이유는 단지 구약 예언의 성취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사도들에세 맡겨진 직무의 성격상 증거 사역이 효과적으로 진행되기 위해서 반드시 충원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사도의 자격은 (1)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보고 (2) 예수의 증거자로서의 사명을 받는 것이었다(고전 9:1,2;15:8-10;갈 1:16,17). 그런데 특별히 여기서 예수의 공생애 기간 동안 함께 생활했던 자라고 국한시킨 것은 (1) 열 두 사도 중 한 명을 선택하고자 했기 때문이며 또한 (2) 열 두 사도의 사역 범위가 주로 유대인들과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요한의 세례로부터 - 예수는 요한의 세례를 받으시고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셨다(마 3:13-17;막 1:1-11). 따라서 이 말은 예수의 공생애 시초부터라는 말이다.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 이는 극히 친밀하고도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아니하는 관계를 나타내는 일종의 셈어적 관용구이다(9:28;신 31:2;삼하 3:25;시 121:8).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도들의 메시지의 초점이었고 본서에서도 핵심되는 주제이다(2:24,31,32;3:15;4:2,10;10:40,41; 13:30,34; 17:3, 18;23:6;24:15).
=====1:23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 바사바와 요셉은 히브리식 이름으로 바사바는 `안식일의 아들'이란 뜻이며 요셉은 유대인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이름이다. 또 유스도는 `정의'를 뜻하는 로마식 이름이다.
하나는 맛디아라 - `맡다디아스'(* )의 약칭으로 `여호와의 선물' 이란 뜻이다. 유세비우스(Eusebius)의 추측에 의하면 그는 눅 10:1에 나오는 70인 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Ecclesiastical History).
=====1:24
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 - 그들은 먼저 사도의 자격 요건에 합당한 두 사람을 선택하였다. 히브리적인 사고 방식에 의하면 이러한 경우에는 제비를 뽑는 것이 일반적인 통례였다. 똑같은 둘 중에서 하나를 결정하는데 있어서는 매우 합리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그 투표를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기를 기도한 것이다(잠 16:33).
믓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 이 기도 가운데 나오는 `주'(* , 퀴리에)라는 호격어가 아버지 하나님을 가리키는지(Meyer) 아니면 예수를 가리키는지(Bengel, Alford) 분명하지 않으나 본분의 문맥상 이 명칭은 21절의 `주 예수'와 동일하게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또한 본 구절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며(대상 28:9;시 7:9;44:21;렘 17:10;23:24;암 9:3;습 1:12;롬 8:27)모든 사람의 운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롬 9:22,23) 보여준다.
주의 택하신 바 되어 - `택하다'(* , 에클레고마이)는 말은 2절에서 사용된 동사와 같은 말이다. 이것은 지금 선택될 사도의 후계자(後繼者)가 자신들처럼 동등한 사도권을 주님으로부터 부여받게 됨을 암시한다.
=====1:25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 `제 곳'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어떤 장소를 지칭하기보다는 직무를 뜻한다고 보고, 가룟 유다가 예수를 믿고 따르던 것을 버리고 과거에 자신이 행하던 길로 돌아섰음을 나타낸다고 해석하는 경해(Alexander, Meyer, Vincent). 이 중 우리는 문맥의 흐름이나 가룟 유다의 비참한 종국(18절)등을 고려하건대 후자의 견해를 취함이 더 나을 것 같다(시 9:17;마 25:41).
=====1:26
제비 뽑아 - 제비를 뽑는 방법은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서 많이 사용되었다(레 16:7-10;수 18:10). 사도들도 당시까지 사용되던 제비뽑기 방식에 따라 결원된 한 명의 사도를 선출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성경에는 이러한 방식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누가복음에서 저자는 예수의 지상 사역을 증거하였거니와 본서에는 예수께서 승천하
신 후 성령의 강림으로 인하여 시작된 초대 교회의 성장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
다. 본장은 본서의 서론 부분으로서 앞으로 복음 사역이 어떠한 방향으로 진행될 것인
지를 암시해 주고 있다. 본장의 의미를 상고하기 위하여 다음 세 가지 사항을 주의깊
게 살펴보기로 하자.
(1) 누가복음과의 연관성. 본서는 누가복음의 후속(後續)으로서 예수의 승천 이후부
터 복음을 전파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즉 누가복음은 예수께서 탄생하신 장면부터
시작하여 그의 공생의 죽음, 부활, 그리고 성령께서 통치하시는 새 시대의 예고(豫告)
로서 일단락되었다. 이어서 본서는 성령의 강림에 대한 예수의 약속이 성취되고 복음
이 예루살렘에서 로마에 도달하는 성령의 역사(役事)를 묘사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구
원사(救援史)를 그린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누가복음과 본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 예컨데, 저자
누가는 여행을 주제로 하여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을 표현하였던 바, 누가복음에서는
팔레스틴을 중심으로 한 예수의 전도 여행, 본서에서는 로마를 목표로 한 바울의 전도
여행을 그리고 있다. 또한 예수와 제자들이 복음 사역을 수행함에 있어서 성령이 함께
하셨다는 사실(2:1-4;눅 3:21,22)을 통하여 성령의 활동을 강조하고 있다. 누가복음과
본서의 연관성 및 연속성에 관하여는 앞으로 계속될 장 강해와 문단 강해에서 깊이 다
루어질 것이다.
(2) 본장의 위치. 본장은 본서 전체의 요약이라 할 수 있다. 즉 본장은 본서의 주제
(主題)라고 할 수 있는 예수의 최후의 지상 명령(The Great Commandment)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명령에 따라 본서의 내용은 전개된다. 본서를 누가복음의 속편(續篇)으로
이해할 때에 본장은 새로운 전환점(轉換點)을 이루고 있는 바, 본장을 기점으로 하여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교회의 역사가 시작된다고 하겠다. 예수의 승천으로 인하여 그
의 지상 사역은 막을 내리고 본장에서는 성령을 통한 제자들의 사역이 예비되고 있으
며 복음이 예루살렘을 떠나 세계 전역(全域)으로 확산될 것이라는 약속이 명시(明示)
되어 있다.
그러므로 본장은 본서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복음이 이방 세계로 뻗어 나가
는 것은 예수의 약속과 명령에 의한 것임을 본장은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에
본서는 본장에 예시(豫示)되어 있는 예수의 약속과 명령에 의거하여 전개되며 하나님
의 구원 역사가 성취되어가는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3) 저자의 기록 의도. 예수의 임박한 재림을 기다리면서 환난을 참고 이겨 나가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결국 유대 나라의 멸망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그리고 재림
의 지연(遲延) 등으로 인하여 낙심하는 자들이 많이 생겼다. 그러나 복음은 어려운 상
황 속에서도 소멸되지 않고 점점 왕성하여져서 이방 지역에 널리 확산되어 갔으니 이
는 분명히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었다. 누가는 교회가 예루살렘에 머물지 않고 세계를
향하여 전진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이며,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교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확신 아래 본서를 기록하게 된 것이다.
본서에 나타난 바람직한 교회상(敎會像)은 예수와 베드로, 스데반, 바울, 그리고 예
루살렘 초대 교회와 안디옥 교회를 본받아 선교하는 교회이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 가
운데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이제 본서에서는 그 후반부가 시
작되고 있는 바, 예수의 재림 때까지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의 우주적 사업에 동참하여
야 하는가를 교훈하고 있다. 즉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순종하여 땅 끝까지 이
르어 예수의 증인이 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본장의 내용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고찰해 볼 수 있다. 본서의 머리말로서 첫
째 단락에서는 예수의 부활 현현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으며(1-5절), 둘째 단락에서는
예수의 승천과 최후의 지상 명령을 다루고 있고(6-11절), 마지막 단락에서는 가룟 유
다의 최후(最後) 및 제비를 뽑아 사도를 보충하는 장면이 언급되어 있다(12-26절).
1. 머리말(1:1-5)
본문은 본장의 서두로서 누가복음의 핵심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고 있으며 예수의 부
활 현현(顯現) 40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본문의 기록은 사복음서에는 없는 누가
만의 독특한 기록이다. 다음 항목들을 통하여 본문을 상고해 보기로 하자.
(1) 사복음서와의 차이점.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간 지상(地上)에 계셨다는 이
야기는 본서에만 기록되어 있는 누가의 자료이며, 이 기간 동안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
라의 일들을 가르치신 것으로 나타난다. 요한복음에서는 현현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
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면서 성령을 주시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요 20:22) 누가
복음과 본서에는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야 비로서 성령이 주어질 것이라는 약속이 언
급되고 있다(4,5절;눅 24:49).
이러한 사실들을 통하여 누가는 하나의 일관된 관점(觀點)을 가지고 누가복음과 본
서를 기록하였음을 알 수 있다. 누가는 예수의 사역이 그의 승천으로 인하여 끝을 맺
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역사하시는 교회를 통하여 예수의 사역이 계속됨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2) 부활 후의 예수의 사역.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지상에서의 마지막 사역에 관하
여는 사복음서가 모두 언급되고 있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무덤에 찾아온 여인들
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셨으며(마 28:9;막 16:9)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 나타
나셨으며(막 16:12;눅 24:13-35) 예수의 죽음으로 인하여 낙심하던 열 한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시며 용기를 주셨다(막 16:14;요 20:19;21:1-13). 또한
예수께서는 천국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도록 명령하심으로 당신의 사역을 제자들에
게 계승(繼承)하셨다.
이와 같이 예수의 삶은 시종 일관(始終一貫)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었으며 부활하신
후 승천하기까지 40일간을 줄곧 구원을 선포하셨다. 이러한 예수의 사역을 종합하여
표현하면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3절)라는 한 마디로 압축될 수 있다. 예수
의 이 지상 사역 당시에는 제자들조차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였으나 부활
후에야 비로서 진리를 깨닫게 되었으니 부활 후 40일간의 예수의 사역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이 기간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사역을 준비하는 기간
이 된 것이다.
(3) 성령에 대한 약속. 본문에는 성령을 주시겠다고 하는 예수의 약속이 명시(明示)
되어 있는 바, 이 약속은 누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다. 먼저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 것을 당부하셨으나(눅 24:49) 이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진리의 운동이 일어나
야 하므로 제자들이 성령을 받기 전에는 이곳을 떠나지 말 것을 당부하신 말씀이다.
또한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말씀, 즉 예루살렘으로부터 복된 소식이
나올 것이라는 예언(사 2:3;미 4:2)을 이루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그 예언은
성취되어 예루살렘에 성령의 강림이 이루어졌으며 최초의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또한 예수께서는 성령의 세례를 받을 것을 약속하심으로 요한의 물 세례와 구분하여
말씀하셨다. 요한의 물 세례는 죄를 씻는 외적인 의식(儀式)인 반면(마 3:11;막 1:8)
예수의 성령 세례는 내적으로 회개하고 구원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역사(役
事)로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 장에 나타날 성림 강
림의 현장에서 증명될 것이다. 성령 세례를 통해서만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
날 것이요(요 3:5) 예수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제자들
은 성령 세례를 통하여 완전히 변화되어 완악한 심령들을 회개시키는 담대한 복음의
사역자들이 되었다.
* 성령 세례. '성령 세례'는 이미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거니와(겔 36:26;욜
2:28-32) 그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하여 완벽하게 성취되었다(2:1-13). 이를 누가
복음 3:16에서는 '불 세례'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이 때 '불'은 죄악을 태워 없앤다
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한편 세례 요한은 자신이 베푼 '물 세례'와 '성령 세례'를
뚜렷이 대조시킨 바 있다(마 3:11). 이런 점에서 '성령 세례'에 관해 구체적으로 살펴
보기로 하자.
(1) 시기와 의미. 성령 세례는 우리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시인하는 순간에 이루어진다. 따라서 회개 없는 성령 세례는 있을 수 없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성령 세례를 통해 성도들의 심령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는(고전 3:16) 구원에 대한 보증으로서 그리고 영원하신 보혜사로서 늘 성도들과 함께
하시는 것이다(요 14:6;고후 1:22). 따라서 중생한 성도는 누구나 성령 세례를 체험하
였다고 하겠다.
한편 성령 세례를 극적인 감정적 황홀경 또는 방언, 신체의 진동 등과 같은 특별한
외적 체험과 동일시하려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데 이런 특수 체험 등은 물론 오늘날에
도 가능하기는 하나 주로 성령에 대한 계시가 확실히 주어지지 않았던 초대 교회 시대
에 성령의 강림과 사역의 증거로서 나타나는 현상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성령 자체보
다는 표적과 기적을 요구하는 심정으로 이런 특수 체험들을 요구하는 것은 건전하지
못하다. 예수를 주(主)로 시인하는 자는 이미 성령 세례를 받은 것이다. 왜냐하면 성
경에서도 말하고 있는 바, 성령의 도움 없이 타락한 우리의 본성만으로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할 수 없기 때문이다(마 16:16,17;고전 12:3;요일 4:15).
(2) 시행자. 성령 세례는 삼위 일체의 협력하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시행되며(고전
6:11), 여타의 어떤 인위적 의식에 의해서도 대치될 수 없다.
(3) 대상. 성령 세례는 구원을 위한 필수적 요소로서 모든 성도들에게 약속되어 있
다(10:44;15:7-9;요 7:37-39). 한편 성령 세례가 모든 성도에게 있어서 단회적 사건으
로 국한되는 것인 반면, 성령 충만은 영적 진보를 위해서 늘 간구되어야 할 기도 제목
이다.
(4) 결과. 물 세례가 상징적 의식에 해당하는 것인 반면, 성령 세례는 예수 그리스
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동참하는 신비적 연합에 실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롬 6:3,4;
골 2:12). 따라서 성령 세례를 받은 자는 구원의 인침을 받은 자이며(고후 1:22;엡
4:30) 동시에 그리스도 교회의 자체가 된 자들이다(고전 12:26,27).
2. 최후의 지상 명령과 승천 이후(1:6-14)
본문에는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하신 위임(委任) 명령과 승천의 상
황 및 승천 후 제자들의 행동이 묘사되어 있다. 본문의 내용을 고찰함에 있어서 다음
항목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최후의 명령. 예루살렘에서 성령을 받은 후 예수의 증인이 되어 땅 끝까지 복음
을 전파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의 명령이다. 당시 제자들 중에는 예수를 정치적인 메시
야로 착각하여 부활하신 예수께서 혹시 로마 제국으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킬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예수의 공생애 기간 동안 누누이 강
조하셨거니와 지상 천국을 건설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영혼을 구원하시러 오셨다는 사
실을 밝히셨다.
본문에서도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어긋난 질문에 대하여 오직 한 가지만을 명령하셨
으니 곧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라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구원의 복된 소
식은 예수의 재림 때까지 세계 만방으로 퍼져나가야 할 것이며 예수의 제자들이 구원
사역의 주역(主役)들이 되어야 함을 일깨워주신 말씀이었다.
이로써 언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하나님 나라의 신
비로운 비밀로 남게 되었으며 성도는 그 날이 올 때까지 오로지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제자들은 성령 강림 후 예수의 지상 명령에 따라 예루살렘을
넘고 사마리아를 거쳐 소아시아, 유럽, 그리고 로마에까지 복음을 증거하였다.
(2) 예수의 승천. 예수의 승천에 관한 기록은 마가복음 16:19에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을 뿐 누가복음과 본서에만 나오는데(9-11절;눅 24:50-53), 누가복음과 본서의 두
승천 기록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점들이 나타난다.
첫째, 누가복음에는 예수께서 부활절 저녁에 승천하신 것으로 되어 있으나 본서에는
부활 후 40일만에 승천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둘째, 누가복음에는 베다니에서 승천하
신 것으로 되어 있으나 본서에는 감람산으로 되어 있다. 세째, 누가복음에서는 예수께
서 승천하실 때에 두 사람이 등장하지 않으나 본서에서는 등장한다. 이 두 사람은 빈
무덤에서의 두 사람(눅 24:4)과 변화산에서의 두 사람(눅 9:30) 즉 모세와 엘리야를
상기시킨다.
아무튼 이러한 차이점들은 단순히 승천 상황에 있어서 그 강조점을 달리 한 것으로
보인다. 본문에는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에 구름에 가리워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묘사
하고 있거니와 구약성경에서 구름은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출
13:21;16:10;왕상 8:10;단 7:13). 예수께서는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실 때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으나 사역을 마치시고 승천하실 때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가셨으며, 재
림시 심판주로 오실 때에도 그와 같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오실 것으로 예고하셨다.
예수의 승천이 가지는 의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는 바,
그의 수난과 죽음으로 인하여 예수께서는 성육신(incarnation) 이전보다 더 큰 영광을
지니게 되었다.
(3) 제자들의 합심 기도. 제자들은 감람산에서 예수의 승천을 목격한 후 예수의 명
령대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함께 기도하였다. 본문의 기록은
누가복음과 약안의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 바, 누가복음에서는 예수의 승천 후 제자들
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한 것으로 되어 있다(눅 24:52,53).
그러나 이 두 기록 모두 제자들이 흩어지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에는 공통점
을 지닌다.
제자들과 더불어 함께 기도한 자들은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여인들, 그리고 예수의
아우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에 힘썼으니 그 결과 예수의 승
천 후 10여일이 못되어 성령 세례를 체험하였다. 제자들의 합심 기도가 성령의 역사를
불러 일으킨 것이다. 마음을 같이 한(2:46;4:24) 뜨거운 합심는 초대 교회 건설의 원
동력이 되었으며 교회 성장의 주춧돌이 되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모여서 기도하는
일에 열심이었거니와(2:42;6:4) 그러한 기도가 밑거름이 되어 환난과 박해에도 불구하
고 복음이 세계 곳곳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유다의 최후와 사도의 보충(1:15-26)
본문에는 예수를 배신한 가룟 유다의 최후(最後)에 관한 기록과 결원(缺員)된 사도
를 보충하기 위하여 제비뽑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를 통하여 사도직(使徒職)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거니와 사도의 보결(補缺)은 앞으로 진행될 복음 사역을 위한
만반의 준비 태세였다. 다음 사항들을 통하여 본문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1) 배신자의 운명. 신약성경에는 가룟 유다의 죽음에 관한 기록이 두 군데에만 나
타나며(18-20절;마 27:3-10), 두 기록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유다
가 목매달아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본문에는 배가 터져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며,
밭을 산 사람과 피 밭이라고 부른 이유가 다르게 기록되 있다. 또한 마태복음에서는
유다가 자신의 잘못을 후회한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본문은 그러한 언급이 없으며, 마
태는 배반한 돈의 용도와 관련하여 스가랴서의 말씀(슥 11:12)을 인용하고 있는 반면
누가는 맛디아의 선택과 관련된 시편의 말씀(시 109:8)을 인용하고 있다.
여기에서 마태와 누가의 공통점은 유다의 배신과 죽음을 예언과 성취의 관점에서 이
해하였다는 점이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유다의 행실이 성령께서 다윗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성경을 응하게 하는 것이라 하였으니 이는 유다의 행동이 결과적으로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게 한 것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것
임을 표명(表明)하고 있는 바, 앞으로 본서 전체를 통하여 예언과 성취의 맥락 속에서
모든 구원 사건이 이해되어질 것이다. 가룟 유다의 죽음에 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본문 주제 강해를 참조하기로 하자.
(2) 사도의 자격과 본분. 본문에는 초대 교회에서 말하는 사도의 자격과 본분이 명
시되어 있다. 사도란 요한의 세례로부터 예수의 승천하신 날까지 예수와 함께 다니며
예수의 모든 사역을 목격한 자를 의미한다. 즉 사도의 자격은 예수의 공생애 기간 동
안 직접 그의 가르침을 받은 자여야 한다는 점이다. 또한 본문에 나타나 있는 사도의
본분은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며(22절) 봉사(奉仕)하는 일이다(25절). 이로써 초대 교
회 사도들의 중심 메시지는 예수의 부활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본서에 수록되어
있는 사도들의 설교들을 통하여 증명된다.
한편 예수의 가르침을 받고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자만이 참 사도라 불리웠으나 예
외의 경우도 있었다. 바울의 경우에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 사도라 할 수 없으나 예수
의 직접적 부르심을 받고 소명을 받았으니 넓은 의미에서 사도가 된 것이다. 그는 자
신이 예수께로부터 이방 선교의 소명을 받은 사도임을 본서와 서신들을 통하여 수차례
강조하였다. 오늘날도 예수의 부활을 확신하고 증거하는 모든 자들은 광의(廣義)의 의
미에서 사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 사도의 보결(補缺). 예수의 열 두 제자는 열 지파를 상징하는 것으로 한 명의
결원(缺員)은 반드시 보결을 필요로 하였다. 가룟 유다 대신 사도의 후보에 오른 두 사람은 요셉과 맛디아였으니 이들은 예수의 공생애 동안 제자들과 더불어 예수를 따라다니던 신실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사도들은 이 두 사람을 추천한 뒤 하나님께 기도하며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선정(選定)하였다. 항아리 속에 이름을 적은 돌멩이 둘을 넣어 먼저 뽑히는 사람이 선택되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제비뽑기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계시적인 방법으로 생각하여 많이 사용하였다(수 18:10;잠 16:33;욘 1:7). 제비를 뽑은 방식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역사로 자신의 섭리를 펴고 계심을 믿는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며 인간적인 판단을 포기하고 모두 선택권을 하나님께 의뢰하는 행위였다. 이러한 제비뽑기의 방식은 성령 강림 이후에는 성경에 나타나고 있지 않거니와 그 후에는 성령의 인도 하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 가룟 유다의 죽음에 관하여. 가룟 유다의 죽음에 관하여는 다소 상이한 두 개의
기사(18-20절;마 27:3-10)가 있으며 이 두 이야기를 조화시키려는 노력들도 있거니와 본 주제 강해에서는 이 두 기록을 근거로 하여 유다의 죽음을 조명해 보기로 하자.
유다의 비참한 최후에 관하여 혹자는 예루살렘 성벽 남동쪽 아겔다마 근처에 있는 기드론 계곡을 뻗어 있는 나무가지를 찾아 이것이 바로 유다가 목매달은 나무가지인데 밧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몸이 계곡으로 떨어져 몸이 곤두박질치면서 창자가 터져 나와 죽은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창자'가 히브리어 용법에서 '감정의 자리'를 의미하기 때문에 유다는 심령이 상하여 죽은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유다의 죽음에 관한 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해 보면 그는 자살로서 자신의 최후를 마친 것으로 보인다. 유다가 아겔다마라는 밭을 샀느냐 대제사장의 샀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밭의 값이 배반자에게 지불된 은 30이었다는 점과 그 밭의 한 모퉁이에서 유다가 목을 매어 자살했다는 점만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아겔다마, 즉 '피밭'은 유다의 배반과 비참한 최후를 계속 상기시켜 줄 것이다.
본문에서 사도들은 유다를 가리켜 '사도직을 버리고 제 곳으로 간 자'(25절)로 표현하였다. 유다는 초대 교회에서 진리를 저버린 자의 이름으로 기억되었고 지금까지도 배신자의 대명사로 불리워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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