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 하더라 - 빌라도는 이렇게 예수님을 채찍질함으로써 사형을 대신하게 하여, 예수님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만족케 하여 보려고 꾀한 것이다. 이것은, 빌라도의 나약하고 야비한 수단이다. 이 채찍질은 로마 형법에 의한 것인데, 외국인들이나 종들에게 주는 형벌이다. 이런 형벌을 할 때에는 죄수를 벌거벗겨서 기둥 같은데 매고 채찍으로 마구 때린 것이다. 이렇게 매 맞는 자들이 그 자리에서 죽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사 53:5에 말하기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하였다. 그가 이렇게 매를 맞으신 것은 아무런 법적 정죄 없이 당하신 것이다. 그가 이렇게 불법 취급을 받으심으로, 그를 믿는 우리에게 하늘의 의(義)를 입혀 주신 것이다.
====19:2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 (1) 가시는, 인류의 범죄의 결과나(창 3:18), 그가 가시 면류관을 쓰시게 된 것은, 그가 인류의 죄 값을 대신 받으신다는 표이다. 그가 이러한 고통의 면류관을 머리에 쓰신 이유는, 인류가 사상적(思想的)으로 많은 죄를 범하기 때문이다. (2) 군병들의 이 행동은 예수님의 왕이심을 조롱함이니, 참된 왕을 부인하는 악행의 극단이다. (3) 빌라도가 군병들의 이 행동을 허락해 둔 목적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것을 보고 만족을 얻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유대인들을 만족시키고 예수님을 놓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불의한 수단이요, 나약하고 비루한 타협이다. 진리는 진리로만 세워지고, 불의한 수단이나 나약한 타협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자색 옷을 입히고 - "자색(紫色)옷"은 왕이 입은 옷인데, 이런 옷을 예수님께 입히는 것은 예수님의 왕 되심을 조롱하는 악행이다. 마태 복음에는, 그들이 예수님의 손에 갈대를 들리었다고 한다(마 27:29). 그것은, 갈대로 왕의 홀을 대신하게 하여 그를 조롱함이다. 그리고 다시 마태 복음에는 이 점에 대하여 더욱 자세한 기록이 있으니, 곧,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밸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에 치더라"고 하였다(마 27:29-30). 그들이 예수님에게 "평안할지어다"하고 거짓되이 인사한 끝에 때렸으니, 이것은 극악한 조롱이다. 거짓된 인사도 큰 조롱인데, 그런 인사를 하면서 때린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악행이다.
====19:3
앞에 와서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 예수님은 진정한 왕이시다. 그런데 그가, 군병들로 말미암아 왕권에 대한 조롱을 당하셨다. 그것은, 참되신 왕이 도리어 가짜 왕 취급을 당하심이다. 그것은, 가장 가슴 아픈 멸시와 천대였던 것이다.
=====19:4,5
빌라도는, 매 맞아 비참한 모양을 이루신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구경 거리로 보여 주었다. 4 절에 "보라"는 말(* )이 있고, 5 절에도 "보라"고 한 말이 있다. 예수님을 때린 것도 그에게 대한 극단의 모욕인데, 그렇게 모욕 당하신 그의 모습을 구경 거리로 만드는 행위는 극단적 모욕의 이중인 것이다. 빌라도가, 매 맞아 상처 입으신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구경시킨 목적은, 예수님에게 대한 그들의 동정을 얻어서 진리를 세우려는 모순이요, 이 세상의 도움을 구하여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려는 모순이다. 이렇게 빌라도는 나약한 타협을 문제 해결의 최고 방법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일의 열쇠가 하나님을 바라보는데 있다고 보신 것이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11 절)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빌라도의 그릇된 사상을 책망하심이다.
====19:6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두 번씩이나 말한 것은, 예수님에게 대한 그들의 지독한 미움을 표시한다. 무죄하신 예수님을 때려서 유대인들을 만족시키므로 문제 해결을 보려던 빌라도의 악한 타협주의는, 이렇게 그 기대에 어긋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진리를 위한다는 자가 비진리와 타협하면, 언제나 진리를 세우지 못하고 도리어 진리를 무너뜨린다.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 이 말도 빌라도가 결단의 취지로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 말로써 한 번 더 나약의 태도를 나타낸 것 뿐이다. 그것은, 다음 귀절에 유대인들의 태도가 빌라도의 약점을 알고 굳세어짐을 보아서 알 수 있다.
====19:7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 이것은 빌라도에게 대한 그들의 협박이다. 그들은 이제 빌라도의 나약함을 알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법이 있다" 함은, 하나님을 훼방한 자나 거짓 선지자를 죽일 수 있는 종교적 법이었다(레 24:16; 신 18:20). 그들은, 참된 하나님의 아들을 모르고 이렇게 악한 죄인으로 여겼다. 이 때에 예수님의 고통은 무한히 컸을 것이다. 진리는, 사람들이 불신앙하는 그 때에 가장 큰 고통을 당한다. 사 1:12-14 참조.
====19:8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 이 말씀은, 빌라도가 이 재판에 있어서 무리를 두려워하는 나약한 마음으로 인하여 의리대로 결단하지 못하는 약한 태도를 지적한다. 빌라도는 이 재판에 있어서 줄곧,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점에 이르러서는 "더욱 두려워"하였다고, 이 귀절은 말한다. 그가 더욱 두려워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1) 유대인들의 태도가 강경하여 재판건에 그를 의뢰하지 않을 듯한 기세를 보인 까닭이며(7절 상반), 또 (2) 빌라도는,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다는 유대인들의 말(7절 하반)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가, 그의 그릇된 종교적 관념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이 어떤 신(神)에 대한 칭호인 줄로 짐작은 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죽이도록 내어주는 일도 그에게는 큰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재판에 단안을 내리지 못하고 다시 예수님에게 가서 심문한 것이다.
====19:9
너는 어디로서냐 - 이것은, 빌라도가 예수님의 내력을 물음이다. 곧, 이것은, 그가 유대인들의 말("저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나이다"라고 한 말)을 듣고 겁이 나서, 예수님이 누구이심을 알아 보려는 질문이다. 이것은, 그가 예수님을 믿으려는 진실한 질문은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벌써 빌라도에게 분명히 증거하신 바 있는데(18:33-37), 또 다시 질문하는 것은 공연한 일이었다. 예수님은, 이런 불신실한 질문에 대하여는 대답하시지 않았다.
10-11 - 이 두 귀절은, 최고의 권리가 자기에게 있는 줄 아는 빌라도의 인본주의와, 모든 권세의 근원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예수님의 신본주의를 대조시킨다.
====19:10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 빌라도는 이 말로써 자기의 무식과 교만을 나타낸 것이다. 그는, 인간인 자기가 최후 단안을 내릴 수 있는 권세의 소유자라고 자처한다. 그것은, 모든 권세의 주재(主宰)이신 하나님을 모르는 무식이다. 이런 무식은 그에게 교만을 낳아 주었다. 언제나 교만은 무식의 아들이다. 진리를 아는 자는 겸손해지는 법이다.
====19:1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 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 이것은, 하나님께서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해할 권세를 주지 아니하셨더면 그는 예수님을 해하지 못하였으리라는 말씀이다. 빌라도는 사람만 보고 모든 것을 그릇되게 판단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만 보시고 진리대로 판단하신다. 정치적 권세도 하나님이 주시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은 몇 가지 있다. (1)빌라도의 정권은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도 불구하고 대제사장들이 그것을 하나님 아들 예수님을 죽이는데 사용했으니, 그 죄가 더욱 크다는 뜻이라고 함(Calvin). (2) 슐라텔(Schlatter)은 말하기를, "빌라도가 자기에게 주어진 권력을 잘못 사용한 것은 죄악이다. 그러나 그 죄는, 받은 권세 없이, 또는 예수님을 잡도록 강요된 일도 없이 행동한 자들(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죄보다는 가벼운 것이다"라고 하였다(Pilatus Missbraucht die ihm gegebene Macht und das ist Schuld; sie ist geringer als did Schuld dessen, der ohne * handelte, den also nichts notigte, sich an Jesus Zu vergreifen.- Der Evangelist Johannes, p. 345). 예수님을 잡아서 빌라도에게 넘겨 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정권을 가진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죄악은 더 크다. 이 해석이 더 유력하다. 이 말씀을 보면, 부패한 시대에 옳지 않은 교역자들이 정권에 붙어서 하나님의 진실한 종들을 핍박함이, 무엇보다 큰 죄악임을 알 수 있다.
====19:12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빌라도는, 공포심에 끌려서 그를 넣으려고 다시 애쓴 것이다. 빌라도는, 한편 예수님을 두려워하는 듯한 태도를 가진 것이다.
====19:13
빌라도가...박석이란 곳에서 재판석에 앉았더라 - "박석"은 "돌로 깔은 곳"이란 의미를 가진다. 그 때 유대인들이 쓰던 말로는 가바다(* )라고 하는데 언덕을 의미한다. 이곳은 아마도 돌을 깔아 놓은 높은 장소를 가리킨 듯하다.
====19:14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 여기 이른바 "유월절의 예비일"이란 말은, 얼른 보면 모순된 듯하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벌써 유월절 만찬을 잡수시지 않았는가? 이것은 문제될 듯하다. 이 "유월절의 예비일"이란 말에 대하여 두 가지 해석이 있다. 곧, (1) "참 유월절"의 준비일 곧, "참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이 되는 날이라는 뜻이라 하고(Grosheide), (2) 유월절 주간의 안식일의 예비일 곧, 금요일을 의미한 것이라고 한다(Lenski). 이 둘째 해석이 옳다(마 27:62; 막 15:42; 눅 23:54). "때는 제 육시라." 이것은,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 받으신 시각이다. 막 14:25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간을 "제 삼시"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요한은 예수님의 재판 받으신 시간을 "제 육시"라고 하였다. 여기 이 두사건에 있어서 시간상 선후가 맞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해결된다. 곧, 요한은 로마의 시간 계산법대로 말한 것이다. 로마의 시간 계산법(오늘날 우리의 시간 계산법과 같음)대로 오전 6시에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판결을 받으시고(요 19:14-16)(마 27:1-2 참조), 골고다까지 끌려 가시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눅 23:26-31). 그 후에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간은 오전 9시 였다. 오전 9시는 유대의 시간 계산법대로 "제 삼시"이다(막 14:25). 요한은, 예수님이 빌라도에게서 최후 판결을 받으신 시간을 말하였고, 마가는, 예수님이 십자게에 못 박히신 시간을 말하였으니, 그 두 기록이 시간 문제에 있어서 서로 다를 수 밖에 없다.
====19:15
저희가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 "저희"란 말은 일반 유대인들, 곧, 군중을 가리킨 것이다(12절). 군중은 저렇게 대제사장들이나 기타 종교 지도자들의 선전에 넘어가 그들의 수족 노릇을 한다. 군중들이 예수님의 선한 일들을 본 적도 있었으련만, 그들은 그것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저렇게 부화 뇌동하여 대제사장들의 시키는대로 악하게 움직인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대제사장들은 간교하게도 저렇게 마음에 없는 말을 한다. 그들이 로마 황제 가이사를 사랑하여 저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가이사를 미워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가장 미워하는 것 만큼, 다른 미운 사람들은 모두 다 저희에게 한편처럼 느껴진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은 흔히 도의(道義)나 양심이 없는 세계에서 되어지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개인의 이해 관계만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들에게는 진리나 도덕의 일정한표준이 없다.
====19:16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 주니라 - 빌라도는, 자기로서 책임 지지 않기를 원하면서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주고야 말았다. 그러므로 그에게 책임이 있으니, 그것은 그가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17-37
- 이 부분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을 말한다. (1) 누가 복음에 있는대로, 예루살렘의 여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려고 나아가시는 예수님을 뒤따르면서 운 것은, 예수님의 괴로움을 위로하는 효과를 못 냈다. 그들은 예수님을 불행한 자로 알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불행한 자가 아니었다. 예수님은 마른 나무(자기 죄로 인하여 망할 수 밖에 없는 악인)가 아니었고 "푸는 나무"였다. 그는, 생명 나무 곧, 의로우신 중보자(中保者) 되시는 주님이시다(눅 23:28, 31). (2) "해골이라 하는 곳"은 예루살렘 성 밖에 있었는데, 두드러진 언덕이었으며, 큰 길가에 있어서 행인들이 익히 보며 지나던 곳이다. 이곳은 지형으로 보아 예수님의 죽으실 장소로서 적합하였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온 천하에 공포되어야 할 속죄의 죽음이었다. 이 죽음은, 높은 데서 전파되어야 하겠고, 큰 길 가에서 선포되어야 할 것이었다. 그것은 은밀히 감추일 것이 아니었고 얼마든지 드러내어 선포될 일이었다. (3) 또 다시 누가 복음에 있는대로 예수님이 두 강도들 가운데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니 그것도 뜻이 있다. 그것은,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가장 악한 죄인처럼 취급 받으신 사건이다(눅 23:33). (4)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이 그의 옷을 벗기었다(23-24). 그것은 그에게 큰 수치를 끼침이었다. 그가 벌거벗은 수치를 당하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은 의(義)의 옷을 입게 하신다. (5)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사람들이 그로 하여금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하시려고 쓸개 탄 포도주를 드렸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맛보시고 마시지 않으셨다(막 27:34). 그가 그것을 마시지 않은 이유는, 그가 그 가장 중요한 속죄 제물을 드리는 그 시간에 최후까지 깨어 있고자 하신 까닭이었다. 그 시간은 중보 역사의 가장 중요한 때니 만큼, 마취제로 취함이 되어서는 안될 때였다. 그는, 십자가의 고통을 무감각하게 당하시려고 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다 받으시려고 깨어 계시기 원하셨다. (6)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은 두 가지 뜻을 나타낸다. 첫째는, 그의 죽으심이 높이 들리시어 모든 사람들이 바라볼 수 있게 됨을 의미하고, 둘째는, 그의 죽으심이 우리를 대신하신 저주의 죽으심을 의미한다. 구약에 말한대로 나무에 달려 죽음은 저주의 죽음이었다(신 21:23). 그가 우리를 대신하셔서 저주를 받으신고로 우리는 생명의 축복을 받게 된다. (7) 마가 복음에 있는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동안이 여섯 시간이었는데(막 15:25, 34, 37). 세 시간 동안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있었다(막 15:33; 마 27:45). 그것은 인류의 대표 되신 그리스도 예수님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였다. 빛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첫 선물로 주신 것이었으니, 그것이야말로 자연에 있어서 가장 좋은 선물이며 축복이다. 그런데, 이제 빛이 없는 세계는 하나님의 진노로 충만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셨으므로 우리가 마땅히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영원한 진노는 없어졌다.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 하더라 - 빌라도는 이렇게 예수님을 채찍질함으로써 사형을 대신하게 하여, 예수님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만족케 하여 보려고 꾀한 것이다. 이것은, 빌라도의 나약하고 야비한 수단이다. 이 채찍질은 로마 형법에 의한 것인데, 외국인들이나 종들에게 주는 형벌이다. 이런 형벌을 할 때에는 죄수를 벌거벗겨서 기둥 같은데 매고 채찍으로 마구 때린 것이다. 이렇게 매 맞는 자들이 그 자리에서 죽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사 53:5에 말하기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하였다. 그가 이렇게 매를 맞으신 것은 아무런 법적 정죄 없이 당하신 것이다. 그가 이렇게 불법 취급을 받으심으로, 그를 믿는 우리에게 하늘의 의(義)를 입혀 주신 것이다.
====19:2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 (1) 가시는, 인류의 범죄의 결과나(창 3:18), 그가 가시 면류관을 쓰시게 된 것은, 그가 인류의 죄 값을 대신 받으신다는 표이다. 그가 이러한 고통의 면류관을 머리에 쓰신 이유는, 인류가 사상적(思想的)으로 많은 죄를 범하기 때문이다. (2) 군병들의 이 행동은 예수님의 왕이심을 조롱함이니, 참된 왕을 부인하는 악행의 극단이다. (3) 빌라도가 군병들의 이 행동을 허락해 둔 목적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것을 보고 만족을 얻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유대인들을 만족시키고 예수님을 놓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불의한 수단이요, 나약하고 비루한 타협이다. 진리는 진리로만 세워지고, 불의한 수단이나 나약한 타협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자색 옷을 입히고 - "자색(紫色)옷"은 왕이 입은 옷인데, 이런 옷을 예수님께 입히는 것은 예수님의 왕 되심을 조롱하는 악행이다. 마태 복음에는, 그들이 예수님의 손에 갈대를 들리었다고 한다(마 27:29). 그것은, 갈대로 왕의 홀을 대신하게 하여 그를 조롱함이다. 그리고 다시 마태 복음에는 이 점에 대하여 더욱 자세한 기록이 있으니, 곧,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밸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에 치더라"고 하였다(마 27:29-30). 그들이 예수님에게 "평안할지어다"하고 거짓되이 인사한 끝에 때렸으니, 이것은 극악한 조롱이다. 거짓된 인사도 큰 조롱인데, 그런 인사를 하면서 때린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악행이다.
====19:3
앞에 와서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 예수님은 진정한 왕이시다. 그런데 그가, 군병들로 말미암아 왕권에 대한 조롱을 당하셨다. 그것은, 참되신 왕이 도리어 가짜 왕 취급을 당하심이다. 그것은, 가장 가슴 아픈 멸시와 천대였던 것이다.
=====19:4,5
빌라도는, 매 맞아 비참한 모양을 이루신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구경 거리로 보여 주었다. 4 절에 "보라"는 말(* )이 있고, 5 절에도 "보라"고 한 말이 있다. 예수님을 때린 것도 그에게 대한 극단의 모욕인데, 그렇게 모욕 당하신 그의 모습을 구경 거리로 만드는 행위는 극단적 모욕의 이중인 것이다. 빌라도가, 매 맞아 상처 입으신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구경시킨 목적은, 예수님에게 대한 그들의 동정을 얻어서 진리를 세우려는 모순이요, 이 세상의 도움을 구하여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려는 모순이다. 이렇게 빌라도는 나약한 타협을 문제 해결의 최고 방법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일의 열쇠가 하나님을 바라보는데 있다고 보신 것이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11 절)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빌라도의 그릇된 사상을 책망하심이다.
====19:6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두 번씩이나 말한 것은, 예수님에게 대한 그들의 지독한 미움을 표시한다. 무죄하신 예수님을 때려서 유대인들을 만족시키므로 문제 해결을 보려던 빌라도의 악한 타협주의는, 이렇게 그 기대에 어긋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진리를 위한다는 자가 비진리와 타협하면, 언제나 진리를 세우지 못하고 도리어 진리를 무너뜨린다.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 이 말도 빌라도가 결단의 취지로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 말로써 한 번 더 나약의 태도를 나타낸 것 뿐이다. 그것은, 다음 귀절에 유대인들의 태도가 빌라도의 약점을 알고 굳세어짐을 보아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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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 이것은 빌라도에게 대한 그들의 협박이다. 그들은 이제 빌라도의 나약함을 알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법이 있다" 함은, 하나님을 훼방한 자나 거짓 선지자를 죽일 수 있는 종교적 법이었다(레 24:16; 신 18:20). 그들은, 참된 하나님의 아들을 모르고 이렇게 악한 죄인으로 여겼다. 이 때에 예수님의 고통은 무한히 컸을 것이다. 진리는, 사람들이 불신앙하는 그 때에 가장 큰 고통을 당한다. 사 1:12-14 참조.
====19:8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 이 말씀은, 빌라도가 이 재판에 있어서 무리를 두려워하는 나약한 마음으로 인하여 의리대로 결단하지 못하는 약한 태도를 지적한다. 빌라도는 이 재판에 있어서 줄곧,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점에 이르러서는 "더욱 두려워"하였다고, 이 귀절은 말한다. 그가 더욱 두려워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1) 유대인들의 태도가 강경하여 재판건에 그를 의뢰하지 않을 듯한 기세를 보인 까닭이며(7절 상반), 또 (2) 빌라도는,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다는 유대인들의 말(7절 하반)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가, 그의 그릇된 종교적 관념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이 어떤 신(神)에 대한 칭호인 줄로 짐작은 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죽이도록 내어주는 일도 그에게는 큰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재판에 단안을 내리지 못하고 다시 예수님에게 가서 심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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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어디로서냐 - 이것은, 빌라도가 예수님의 내력을 물음이다. 곧, 이것은, 그가 유대인들의 말("저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나이다"라고 한 말)을 듣고 겁이 나서, 예수님이 누구이심을 알아 보려는 질문이다. 이것은, 그가 예수님을 믿으려는 진실한 질문은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벌써 빌라도에게 분명히 증거하신 바 있는데(18:33-37), 또 다시 질문하는 것은 공연한 일이었다. 예수님은, 이런 불신실한 질문에 대하여는 대답하시지 않았다.
10-11 - 이 두 귀절은, 최고의 권리가 자기에게 있는 줄 아는 빌라도의 인본주의와, 모든 권세의 근원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예수님의 신본주의를 대조시킨다.
====19:10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 빌라도는 이 말로써 자기의 무식과 교만을 나타낸 것이다. 그는, 인간인 자기가 최후 단안을 내릴 수 있는 권세의 소유자라고 자처한다. 그것은, 모든 권세의 주재(主宰)이신 하나님을 모르는 무식이다. 이런 무식은 그에게 교만을 낳아 주었다. 언제나 교만은 무식의 아들이다. 진리를 아는 자는 겸손해지는 법이다.
====19:1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 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 이것은, 하나님께서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해할 권세를 주지 아니하셨더면 그는 예수님을 해하지 못하였으리라는 말씀이다. 빌라도는 사람만 보고 모든 것을 그릇되게 판단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만 보시고 진리대로 판단하신다. 정치적 권세도 하나님이 주시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은 몇 가지 있다. (1)빌라도의 정권은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도 불구하고 대제사장들이 그것을 하나님 아들 예수님을 죽이는데 사용했으니, 그 죄가 더욱 크다는 뜻이라고 함(Calvin). (2) 슐라텔(Schlatter)은 말하기를, "빌라도가 자기에게 주어진 권력을 잘못 사용한 것은 죄악이다. 그러나 그 죄는, 받은 권세 없이, 또는 예수님을 잡도록 강요된 일도 없이 행동한 자들(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죄보다는 가벼운 것이다"라고 하였다(Pilatus Missbraucht die ihm gegebene Macht und das ist Schuld; sie ist geringer als did Schuld dessen, der ohne * handelte, den also nichts notigte, sich an Jesus Zu vergreifen.- Der Evangelist Johannes, p. 345). 예수님을 잡아서 빌라도에게 넘겨 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정권을 가진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죄악은 더 크다. 이 해석이 더 유력하다. 이 말씀을 보면, 부패한 시대에 옳지 않은 교역자들이 정권에 붙어서 하나님의 진실한 종들을 핍박함이, 무엇보다 큰 죄악임을 알 수 있다.
====19:12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빌라도는, 공포심에 끌려서 그를 넣으려고 다시 애쓴 것이다. 빌라도는, 한편 예수님을 두려워하는 듯한 태도를 가진 것이다.
====19:13
빌라도가...박석이란 곳에서 재판석에 앉았더라 - "박석"은 "돌로 깔은 곳"이란 의미를 가진다. 그 때 유대인들이 쓰던 말로는 가바다(* )라고 하는데 언덕을 의미한다. 이곳은 아마도 돌을 깔아 놓은 높은 장소를 가리킨 듯하다.
====19:14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 여기 이른바 "유월절의 예비일"이란 말은, 얼른 보면 모순된 듯하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벌써 유월절 만찬을 잡수시지 않았는가? 이것은 문제될 듯하다. 이 "유월절의 예비일"이란 말에 대하여 두 가지 해석이 있다. 곧, (1) "참 유월절"의 준비일 곧, "참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이 되는 날이라는 뜻이라 하고(Grosheide), (2) 유월절 주간의 안식일의 예비일 곧, 금요일을 의미한 것이라고 한다(Lenski). 이 둘째 해석이 옳다(마 27:62; 막 15:42; 눅 23:54). "때는 제 육시라." 이것은,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 받으신 시각이다. 막 14:25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간을 "제 삼시"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요한은 예수님의 재판 받으신 시간을 "제 육시"라고 하였다. 여기 이 두사건에 있어서 시간상 선후가 맞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해결된다. 곧, 요한은 로마의 시간 계산법대로 말한 것이다. 로마의 시간 계산법(오늘날 우리의 시간 계산법과 같음)대로 오전 6시에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판결을 받으시고(요 19:14-16)(마 27:1-2 참조), 골고다까지 끌려 가시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눅 23:26-31). 그 후에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간은 오전 9시 였다. 오전 9시는 유대의 시간 계산법대로 "제 삼시"이다(막 14:25). 요한은, 예수님이 빌라도에게서 최후 판결을 받으신 시간을 말하였고, 마가는, 예수님이 십자게에 못 박히신 시간을 말하였으니, 그 두 기록이 시간 문제에 있어서 서로 다를 수 밖에 없다.
====19:15
저희가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 "저희"란 말은 일반 유대인들, 곧, 군중을 가리킨 것이다(12절). 군중은 저렇게 대제사장들이나 기타 종교 지도자들의 선전에 넘어가 그들의 수족 노릇을 한다. 군중들이 예수님의 선한 일들을 본 적도 있었으련만, 그들은 그것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저렇게 부화 뇌동하여 대제사장들의 시키는대로 악하게 움직인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대제사장들은 간교하게도 저렇게 마음에 없는 말을 한다. 그들이 로마 황제 가이사를 사랑하여 저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가이사를 미워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가장 미워하는 것 만큼, 다른 미운 사람들은 모두 다 저희에게 한편처럼 느껴진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은 흔히 도의(道義)나 양심이 없는 세계에서 되어지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개인의 이해 관계만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들에게는 진리나 도덕의 일정한표준이 없다.
====19:16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 주니라 - 빌라도는, 자기로서 책임 지지 않기를 원하면서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주고야 말았다. 그러므로 그에게 책임이 있으니, 그것은 그가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17-37
- 이 부분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을 말한다. (1) 누가 복음에 있는대로, 예루살렘의 여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려고 나아가시는 예수님을 뒤따르면서 운 것은, 예수님의 괴로움을 위로하는 효과를 못 냈다. 그들은 예수님을 불행한 자로 알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불행한 자가 아니었다. 예수님은 마른 나무(자기 죄로 인하여 망할 수 밖에 없는 악인)가 아니었고 "푸는 나무"였다. 그는, 생명 나무 곧, 의로우신 중보자(中保者) 되시는 주님이시다(눅 23:28, 31). (2) "해골이라 하는 곳"은 예루살렘 성 밖에 있었는데, 두드러진 언덕이었으며, 큰 길가에 있어서 행인들이 익히 보며 지나던 곳이다. 이곳은 지형으로 보아 예수님의 죽으실 장소로서 적합하였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온 천하에 공포되어야 할 속죄의 죽음이었다. 이 죽음은, 높은 데서 전파되어야 하겠고, 큰 길 가에서 선포되어야 할 것이었다. 그것은 은밀히 감추일 것이 아니었고 얼마든지 드러내어 선포될 일이었다. (3) 또 다시 누가 복음에 있는대로 예수님이 두 강도들 가운데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니 그것도 뜻이 있다. 그것은,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가장 악한 죄인처럼 취급 받으신 사건이다(눅 23:33). (4)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이 그의 옷을 벗기었다(23-24). 그것은 그에게 큰 수치를 끼침이었다. 그가 벌거벗은 수치를 당하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은 의(義)의 옷을 입게 하신다. (5)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사람들이 그로 하여금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하시려고 쓸개 탄 포도주를 드렸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맛보시고 마시지 않으셨다(막 27:34). 그가 그것을 마시지 않은 이유는, 그가 그 가장 중요한 속죄 제물을 드리는 그 시간에 최후까지 깨어 있고자 하신 까닭이었다. 그 시간은 중보 역사의 가장 중요한 때니 만큼, 마취제로 취함이 되어서는 안될 때였다. 그는, 십자가의 고통을 무감각하게 당하시려고 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다 받으시려고 깨어 계시기 원하셨다. (6)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은 두 가지 뜻을 나타낸다. 첫째는, 그의 죽으심이 높이 들리시어 모든 사람들이 바라볼 수 있게 됨을 의미하고, 둘째는, 그의 죽으심이 우리를 대신하신 저주의 죽으심을 의미한다. 구약에 말한대로 나무에 달려 죽음은 저주의 죽음이었다(신 21:23). 그가 우리를 대신하셔서 저주를 받으신고로 우리는 생명의 축복을 받게 된다. (7) 마가 복음에 있는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동안이 여섯 시간이었는데(막 15:25, 34, 37). 세 시간 동안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있었다(막 15:33; 마 27:45). 그것은 인류의 대표 되신 그리스도 예수님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였다. 빛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첫 선물로 주신 것이었으니, 그것이야말로 자연에 있어서 가장 좋은 선물이며 축복이다. 그런데, 이제 빛이 없는 세계는 하나님의 진노로 충만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셨으므로 우리가 마땅히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영원한 진노는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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