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요한복음 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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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 "병든 자"란 말이 이 기사(記事)의 초두에 나오게 됨은, 나사로란 사람보다 그의 질병이 여기서 화제거리이기 때문이다(Godet). "나사로"란 이름은 "엘르아살"이란 이름의 단축형이라고 한다.

====11: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 12:1-8 참조. 이 마리아는 눅 7:37-50에 관설된 여자와 동일시될 사람이 아니다. 사도 요한은 여기서 주님께 대한 마리아의 경건한 행위와 사랑이 어떻게 큰 사실을 기억한다.

====11: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 "병들었나이다"라고만 말하고 도와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청원에 있어서 고상한 성격을 드러낸다(Bengel). 이것은 짧은 기도이다. 우리는 길게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짧게라도 진실한 믿음으로 우리의 근심거리를 주님에게 고하면 주님은 그것을 들어 주신다. 특별히 그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기 기뻐하신다.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 이 말씀은 세 가지 큰 뜻을 보여 준다. (1) 예수님의 전지 전능하신 신성(神性)을 보여 주고, (2)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일체(一體)이신 사실을 보여 주고, (3) 또한 이 말씀은 나사로가 죽지않으리라는 것이 아니고, 그가 죽어도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곧, 그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게 됨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여기 있다.

=====11: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저 하심이었다(4 절). 그러나 거기에 따르는 동기가 여기 기록되어 있으니, 그것은 나사로와 그 형제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그가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을 위하여 특수한 이적을 행하시게 되었다.

====11: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의 위급한 사태를 아시고도 천천히 그들을 방문코저 하신 이유는, (1) 그 사태의 수습이 오직 자기에게 달린 까닭, (2) 천천히 시간을 잡는 것이 오히려 그 당사자들에게 유익한 까닭. 그가 지체하시는 동안 그 당사자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도록 준비된다. 그것은 슬픔과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기대하시는 바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천천히 오심을 사랑을 베푸시기 위한 지체이다.

=====11:7,8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 예수님께서 천천히 제자들의 신앙 수준을 올리셨으므로, 인제는 그들이 거정 없이 위험 지대인 유대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할 것이었다(Bengel). 그런데, 그들은 아직도 겁을 낸다. 그러므로 그들의 대답은 비관적이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 한 사건은 유대에서 여러 차례 있었다.
8:59, 10:31 참조

====11: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 예수님께서 병든 나사로를 고쳐 주시기 위하여 유대 땅으로 가시려 할 때에 제자들은 만류하였다.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주님의 신변을 위험하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말씀하시기를,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라고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신 기회가 남아 있으므로 그가 안심하고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이런 기회를 식별할 수 있을까? 물론 예수님은 그것을 식별하셨다.
그는 헤롯의 죽이려는 음모를 아시고도 말씀하시기를, "가서 저 여유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라고 하셨다(눅 13:32-33)

======11: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고로 실족하느니라 - 칼빈(Calvin)은, 윗절(9 절)의 "낮에 다닌다"는 말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혹은 그의 명령)대로 다님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밤"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과 말씀에 관게 없는 환경과 사정을 가리킨 것이겠다. 곧,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 없이 인간 자신의 심사(心思)에 따름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게 행하는 인간은 실족할 수 밖에에 없다. 그 이유는, 인간 자체 안에는 참다운 빛(진리)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밖에서(하나님에게서) 빛을 받아야만 된다(Grosheide). 예수님은 땅 위에서 하나님의 사명과 말씀 가운데서 행하시는 것인 만큼, 밤에 행하는 것과 같은 일은 전연 없으셨다.

=====11: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 "잠들었다"는 것은 성도의 죽음을 의미한다. 잠들었다가 깨는 것처럼, 성도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때가 온다. 벴겔(Bengel)은 말하기를, "경건한 자의 죽음은 하늘 나라의 방언으로는 잠듬이다"라고 하였다.

=====11:12,13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일반이다. 제자들의 오해는, 결국 모든 죄인들의 습성이 어떻다는 것을 보여준다(Grosheide).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보아서도, 잠들었다는 말이 보통 수면을 의미하지 않는 사실을, 그들은 왜 몰랐던가? 보통 수면이면 다른 사람들도 깨울 수 있지 않았으랴? 하필 예수님이 그것을 깨워야 될까?(Greijdanus).

======11: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 나사로의 죽은 사실에 대하여, 예수님은 잠들었다는 말로 비유하셨다(11 절). 그러나 이제는, 그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는 고로 밝히 해석하여 주신다. 처음에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신령한 지혜를 사용하여 보도록 하셔서 그들을 연단시키시기 위함이었다. 이제는 그들에게 명확히 그 말씀의 뜻을 알려 주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 방법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경륜은 아무런 노력 없이 수확이 있도록 하시지 않는다. 마침내 주시기는 하되, 인간으로 하여금 먼저 노력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11: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 가자 하신대 -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그 질병에거 건지시지 않았으므로 그가 죽었으니, 이제 나사로의 죽음의 문제를 하나님의 권능으로 해결하는 광경이 미구(未久)에 나타난다. 그것을 보는 제자들의 믿음은 더욱 굳세어질 것이다. 제자들의 신앙은 부절히 자라나야 할 것이었다. 새로운 난관은, 신앙이 새로이 장성할 기회이다. 신앙은 되어가는 것이고 된것이 아니다. 루터(Luther)는 말하기를, "다 되어있는 기독자는 기독자가 아니다"라고 하였다(He who is Christian is not a Christian).

======11:16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 이것은, 도마의 불신앙을 지적하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방금 신앙 연단(鍊鍛)을 위하여 난관과 시련의 필요를 역설(力說)하셨는데(15절 해석 참조), 그는 그 말씀 끝에 말하기를,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였다. 곧, 유대인들의 핍박이 심한 유대 땅(7-8절 참조)으로 같이 가는 것은 죽으러 가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난관과 역경 가운데라도 주님과 함께 가면 통과할 수 있다는 신앙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불신앙은 디두모(쌍동이라는 뜻)라고 하는 도마의 근성이다. 이때에 도마가 죽기로 작정하는 영웅주의는 가졌다. 그는 예루살렘에 가면 유대인들의 박해를 당할 줄 알면서도 예수님과 함께 가려는 모험심을 가졌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이 방금 말씀하신대로(9 절)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그는,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예수님의 능력을 알지도 못했다. 비록, 그의 태도는 용감스러웠으나 신앙은 아니었다. 그는 주님의 말씀(9,15)을 잊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에 저렇게 현실의 얕은 곳에서 잘못 움직였다. 우리는 생각하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잊을까! 아버지가 먼 곳에 갔을 때 그 아버지를 잊지 못하는 아이와 같이, 주님을 잊지 말아야 된다. 하나님 아버지를 못보는 대신 우리는 그의 말씀을 보는데, 어찌 그 말씀을 잊으랴?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기를 예사로이 한다. 분주하여 잊어버리고, 평안하여 잊어버리고, 곤난하여도 잊어버린다. 사람들은 흔히 어려움이 있을 때에만 하나님과 관계하려고 한다. 그것은 악한 일이다.

=====11: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라 - "나흘"이란 말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것이 얼마나 큰 권능이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하여 역사적 사실 그대로를 여기 지적한 것이다. 볼토만(Bultmann)은, 여기 "나흘"이란 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여기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라'고 기록한 의도는, 유대인의 관념에 죽은 자의 영혼이 죽은지 사흘 동안까지는 무덤에 가까이 있지만, 나흘이 되면 그렇지 못하니 생명으로 돌아올 소망이 없다고 하기 위함이다"라고 하였다(Das Evangelium des Johannes, p. 305). 볼토만(Bultmann)의 이 학설은, 예수님의 이적을 그대로 주장하는 것 같다. 그러나 결국 이 말은, 요한 복음 저자가 유대인의 미신 사상과 타협했다는 것이니 옳지 않다.

=====11: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리쯤 되매 - 이렇게 예루살렘에서 베다니로 가는 거리가 가까운 것을 말하는 이유는, 유대인들이 거기에 많이 오게 된 원인을 설명하려는데 있다.

=====11: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 그들은 위문차로 많이 왔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나사로 부활시키시는 예수님의 권능을 보게 하시려는 것이었다(Calvin).

=====11:20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 이 말씀을 보면, 마르다는 활동적이며 또 사업적이고, 마리아는 조용하고 사색적인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가 집에 앉아 있었음은 예수님을 사모하지 않았던 까닭이 아니다.

=====11:21,22
이 두 귀절은, 마르다의 태도가 신앙적인 듯하면서도 단순히 그렇지도 않은 사실을 보여 준다. 그가 단순히 신앙으로만 일관하였더라면, 거기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던 사실을 유감스럽게 생각했을 이유가 없다. 그 뿐 아니라, 그의 신앙은 변동성(變動性)이 있었다. 그가,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 아나이다"라고 말하고도(22 절), 다시 말하기를 나사로가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하였다(24 절). 그러면, 위에 말한 바와 같이, 그는 주님의 하시는 일에도 유감스러운 일이 있는 듯이 말하고, 또 그의 신앙 사상에 변동성을 가져왔다. 마르다의 이 태도는 확신을 가지지 못한 것이다. 신자에게 확신이 있어야 어려운 때에 쉽사리 동요하지 않는다. 촬스 다윈(Charles Darwin)의 말에 의하면, 대서양(大西洋)에는 200 척 깊은 바닥에 뿌리를 박고서 수면에까지 나와 있는 풀이 있는데, 파도가 일어도 그 풀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이 그렇게 굳센 이유는, 깊은 바다 밑에 고요히 뿌리 박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신자도 하나님 안에 고요히, 또 깊이 믿음을 가지면, 이 세상 파도 앞에서 동요하지 않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 자신의 위대하신 사실을 알 때에, 그를 의뢰함이 얼마나 든든한 줄 알 수 있다. 그는,우리를 반대하는 모든 자들보다 크시다. 하나님을 의뢰함이 얼마나 든든한 것을 성경이 증거한다. 또한 구름 같이 많은 증인들도 증거한다. 고래(古來)로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진실히 믿고 그의 도우심과 구원을 받았다. 우리는 그 사실을 생각하고 얼마든지 안심할 만하다. 어떤 사람이, 어름이 덮인 미시시피(Mississipi)강을 건널 때 어름이 깨질까 두려워서 기어서 절반을 건넜다. 그 때에 그는, 자기 뒤로 흑인이 석탄 수레를 끄는 네마리 말을 몰고 오면서 노래 부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제야 안심하고 확신을 가지고 건넜다고 한다. 우리가 이 세상을 건너 가기가 위태하나, 믿음으로 앞서 건너 간 성도들을 생각하고 용기와 확신을 가질 수 있다.


=====11:23,2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 예수님의 말씀은 이 세상 끝날의 부활을 의미하지 않고, 그 때 방금 행하시려는 이적에 따라서 나사로가 부활할 것을 가리켰다(43-44). 그러나 마르다는 그 말씀을 세상 끝날에 있을 부활 관계의 것으로 알았다. 유대인들은 이 세상 끝날에 부활이 있을 것을 믿었다. 그것은 단 12:2에 근거한 사상일 것이다. 마르다가 저렇게 유대인들의 믿는 교리는 기억하였다. 그러나 부활이 주인공이신 메시야께서 그 때에 현림하셨으니 만큼, 그 현재에도 사람의 부활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을, 그는 몰랐다. 그가 교리는 알면서도 예수님 자신을 충분히 몰랐던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곧바로 "부활"이신 것이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부활이란 것이 전연 없다. 예수님과 관계 없는 독자적인 부활은 없다. 세상 끝날의 부활도 예수님 때문에 성립될 것이고, 결코 독자적으로 성립될 것이 아니다.

=====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중대하고 비범하신 메시야 권위에 대하여 알려 주시는 자아 주장이다. 곧, 이것은 "나는 그 이"라는 장엄한 선포이다. 주경 신학자들이 이런 문투로 나온 말씀을 가리켜 예수님의 "자아 주장" 언사라고 한다. 하이트뮬러(Heitmuller)는 이 귀절에 대하여 말하기를, "여기 요 11:25의 말씀은, 요한 복음의 특징으로 나타난 자아 주장의 말씀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하고 장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Es ist das groste und erhabenste "Ich bin" in der Reihe der wirkungsvollen, "Ich bin", die den Jesus unseres Evangeliums Kenzeichen). 여기 "부활"이란 말과 "생명"이란 말에 각각 관사가 있어서 (* ), "그 부활이요 그 생명"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라는 관사는, 여기서 예수님 자신께서만 독일 무이(獨一無二)하신 부활이요 생명이신 사실을 밝혀 준다. 볼트만(R. Bultmann)은, 여기 이 말씀이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존재 형태를 말함이 아니고, 신자들에게 선물 주시는 그의 의의(Bedeutsamkeit)를 가리킨다고 하였다(Johannes Evangelium, p. 307). 그렇다면, 볼토만(Bultmann)의 이 말은, 부활과 생명이 예수님의 본질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영생 개념과 다른 사상이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과 예수님 자신만이 인간에게 영생이 된다고 말한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딤전 6:16), 그 자신이 바로 인생의 구원이 되신다고 한다(사 12:2). 인간은 영원을 사모하나니(전 3:11), 하나님 외에는 아무 다른 것도 그에게 만족을 줄 수 없다. 신자의 영생 얻는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선물과 그리스도 자신을 분리시킨 볼트만(Bultmann)의 사상은 그릇된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여기서 예수님은, 사람의 영생 얻는 방편이 믿음 밖에 없음을 강조하신다. 그가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영생이 하나님의 계약 체제(혹은 약속 체제)에 속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계약자는 그 상대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하는 법이다. 롬 4:16 참조. 은혜 계약은, 그것을 받은 첫 사람 아브라함에게서부터 인간 편의 믿음을 요구하였다.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통해지도록 하는 심리적 통로로 필요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그것이 신인 계약(神人契約)을 성립시키는 구성요
unmittelbar nach dem physischen Tode leben wird. - Theol., S. 440).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여기 이른바, "살아서...믿는 자"란 말(* )에 있어서 "살아서"란 말은, 육신의 생명을 가리킨 것(B. Weiss)이 아니고, 영적 생명 곧, 구원론적 생명을 의미한다. 그 이유로서는, (1) 요한 복음에 있어서 산다는 말이 일률적으로 구원론적이며(5:19 이하 참조), 특별히 11:25-26의 말씀이 그러하다는 것, (2) "살아서"란 말과 "믿는 자"란 말이, 함께 하나의 관사(* )로 결속되었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다신 산 자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 그러므로 "살아서 나를 믿는 자"란 말씀은, 성령으로 거듭 나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가리킨다. 위의 25-26절에 기록된 두 가지 말씀은, 각각 다른 것을 설명하지 않고 같은 말을 두 번 거듭하는 것 뿐이다. 25 절의 것("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죽음이 해하지 못한다는 뜻이고, 26절의 것("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은, 좀 더 사세한 말로써 위의 것을 재확인 한 것 뿐이다. 곧, 살아서(거듭나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산다는 것이다.

=====11:27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 마르다의 이 말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믿음의 완전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믿는다고 하고서 조금 후에는 약하여져서, 나사로의 죽음 문제를 예수님께서 해결하시지 못할 듯이 말한다(39 절).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에 대하여는, 고후 8:9; 빌 2:7을 참조하여라. 마르다는, 예수님에게 대한 합당한 신앙 고백이 있다면 무엇이나 다 고백하려는 열심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의 신앙 실력은 실제에 있어서 아직 그와 같은 내용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믿으려는 소원과 믿음의 실력이 서로 일치하지 못한 것이 기독 신자들 가운데 종종 있다. (1) 마르다의 신앙이 그 사상에 있어서 체계 정연하지 못하게 된 원인은, 그가 진리를 깊이 배우지 못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본래 체계 정연한 것이다. 그것은, 그 부분 부분에도 전체가 들어 있고 그 전체에도 부분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극히 정밀한 연구를 하는자들에게 알려진다. 성경 말씀은, 신령한 감동으로 알 수 있는 방면도 있고, 또한 배워야만 알 수 있는 방면도 많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깊이 배워야 된다. 사람이 진정한 학문을 무시하면 안된다. 그 이유는, 진정한 학문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무식은 거의 죄악에 가까운 것이라고, 지혜 있는 사람들은 말한다. 잠언을 보면, 미련한 자들이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기 때문에 정죄되었다. (2) 마르다의 신앙이 그 사상에 있어서 체계 정연하지 못한 원인은, 신앙 연단이 부족한 까닭이었다. 신앙 생활에는 연단이 필요하다. 벧전 1:7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보석도 잘 갈아야만 귀한 보석이 된다. 암스텔담(Amsterdam)에 금강석을 정제(精製)하는 공장이 있다. 거기서 금강석 한 점을 정제하는데 여러 달 걸린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보배로 여기시는고로 여러가지로 연단시키시기를 좋아하신다(신 32:10-12).

====11:28-30
마르다가 "가만히...마리아를 불러" - 낸 것은, 유대인 군중의 소동이 있을까 두려워한 까닭이다. 그 무리 가운데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들의 연루자(連累者)들이 섞였을지도 모른다.
마리아는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 는 소식을 듣고 급히 일어나서 예수님께로 나아갔다고 한다. 그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경외(敬畏)한 증표이다(Calvin).

====11:31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 가더니 - 유대인들이 이렇게 많이 따라 나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이적을 보지 못할 번 하였다.

=====11:32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하더라 - 이 말을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의 병 고치시는 권능은 믿었으나, 부활시키시는 권능은 믿지 못했던 것이 드러난다.

=====11: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을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 어떤 학자들은, "통분히 여긴다"는 말의 헬라 원어(* )를 다른 뜻으로 해석하였으니, 곧, "슬퍼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 뜻을 취하면, 그가 슬퍼하신 것은, 그 우는 자들을 동정하시는 체휼(體恤)의 슬픔이었을 것이다(Calvin). 이 말을 우리 한역대로 "통분히 여기시고"라고 한다면, 그것은 노하신다는 뜻으로 보아야 된다. 그러면, 그가 누구에게 대하여 노하셧단 말인가? 이에 대한 여러가지 학설이 있다. (1) 예수님의 신성(神性)이 그의 인성(人性)에게 대하여 노하셨다는 것. 곧, 나사로의 주검 앞에서 슬퍼하시는 예수님 자신의 인성의 약점에 대하여 그의 신성이 노하셧다는 것. (2) 유대인의 불신앙, 혹은 의식적 울음에 대하여 노하셨다는 것. (3) 사망의 세력, 혹은 마귀에게 대하여 노하셨다는 것. 이 해석이 가장 자연스럽다.

=====11:34-38
이 귀절들을 보면, 예수님께서 비애의 정서(情緖)를 많이 나타내셨다. 나사로의 죽은 사건을 둘러 싸고 왜 그는 슬퍼하셨을까? 그는 이제 나사로를 부활시키실 것을 내다보시고 계셨는데 왜 슬퍼하셨을까? 이 문제에 대하여 두 가지 이유를 말할 수 있다. 곧, (1) 그에게 대한 이 세상 사람들의 불신앙. 예수님을 존경하는 마르다와 마리아 같은 이들도 신앙이 부족하였고, 유대인들은 불신앙의 철면피였다. 그들은, 각각 자기들의 편견을 고집하고 앉아서 예수님을 냉혹히 논단하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가슴에 송곳을 꽂는 것 같은 아픔이었다. 진리이신 예수님은 사람들의 불신앙 앞에서 가장 큰 고통을 느끼신다. 그는 불신앙의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신 적도 있다(눅 19:41). (2) 예수님은 진리이시니, 진리 그것을 그대로 느끼심. 죽음이 비애라는 것은 천정의 진리이다. 그 누가 이것을 부인할 수 있을까? 죽음에 대하여 지나치게 슬퍼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죽음이 슬픈 것은 사실이다.

=====11: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부활시키심에 있어서, 거기 모인 사람들더러 그들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하라고 하신다(44절 참조). 그것은, (1)하나님께서 도와 주시는 일에도, 인간이 할 일은 인간이 해야 된다는 진리를 여기서도 가르치고, (2)거기 모여 있는 인간들이 예수님의 이적 역사(異蹟役事)에 수종들므로, 그들은 그 이적의 놀라운 사실을 좀 더 인상 깊이, 또는 밀접하게 체험하게 되어 확신에 이르게 된다.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 이것은 마르다의 불신앙을 표시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권능을, 인간의 냄새 맡는 표준으로 측량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러나 마르다의 이 말은, 그 이적의 위대를 다시금 뚜렷이 드러나게 했으니, 곧, 냄새 날 정도로 부패한 시체를 부활시키셨다는 사실이, 만대(萬代)에 전파될 수 밖에 없다.

=====11: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 예수님께서 여기 관설하신 말씀은, 25-26절 말씀이다. 그러면 여기서 예수님이 의미하신 바는, 마르다의 믿음이 나사로를 부활시키실 조건이란 뜻은 아니다. 다만 마르다가 불신앙하면, 그 나타날 부활의 이적을 영적 눈으로 보지 못하며 누리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이적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영광은, 오직 믿음으로만 느낄 수 있다. 불신앙하는 유대인들도 나사로의 부활한 사실을 보기는 보았으나, 거기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은 보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영광은 믿음으로만 보며 느낀다(Grosheide).

=====11:41,42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 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 예수님은, 자기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어떤 사건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하신다. 그는, 그것이 보통 사람들의 경우와 달라서 언제나 계속한다고 하여, 여기 "항상"이란 말을 사용하셨다. 그는, 이 말씀으로써 자기의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통은 끊임 없는 것임을 지적하신다. 그의 하나님 아버지와의 사이에 끊임 없는 교통이 있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이신 까닭이다. 그러므로 그는, 둘러 선 사람들이 다 듣도록 소리를 내어 그 사실을 기도로 발표하신 것이다. 그는, 언제나 사람들이 그를 메시야로 알기를 원하셔서 그 어느 기회에라도 가르치셨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그를 메시야로 바로 알아야만 그들이 구원을 받겠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남들의 구원 문제에만 관심을 가지셨다.

=====11: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 그는, 진리이시며 공명 정대하시다. 그는, 마술사들의 어물어물 하거나 중얼거리는 것과는 반대로 큰 소리로 명백히 말씀하신 것이다. 그는 죽은 자를 산 자 처럼 불러내신 것이다. 롬 4:17; 요 5:28 참조. 어떤 재미 있는 말이 있다. 곧, 만일 예수님께서 그 묘지에서 "나사로"란 이름을 부르시지 않고 그저 "나오라"고 하셨더라면, 묘지에 묻혔던 모든 시체들이 다 일어나 나왔을 것이라고 한다.

=====11: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 이것은, 그 살아 나오는 자가 나사로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만일 그에게 베로 동인 것이 없었다면, 무슨 유령이 아닌가 생각될지도 모를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 그 부활 이적의 역사에 무리들이 수종들므로 그들로 하여금 그 사실의 진실성을 살깊이 체험하게 하시려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하지 못하는 기적을 친히 이루시고도 그 일과 관련하여 사람들에게 일을 주신다. 그는 기적을 행하시지만, 그 기적 때문에 사람들이 태만하여지거나 무책임해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일을 하는 것이 인간의 존귀한 덕이다.

=====11:45,46
이 귀절들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부활시키신 이적의 결과 두가지를 말한다. 곧, 예수님을 신앙하는 무리가 있는 반면에, 그를 해하려고 바리새인들에게 고발한 자들도 있다는 것이다.

=====11:47,48
이 부분에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이적을 그대로 승인하고 걱정하는 내막이 나타났다. 불신앙도 가만히 있지 않고, 악한 방면으로 활동하는 법이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대중 운동이 일어남에 따라 로마정부가 유대인들을 탄압하는 일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염려였다.

=====11:49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 그 시대에 대제사장인 로마 정부의 계획에 의하여 해마다 변동되는 일이 있었으니 만큼, 가야바도 그 다음 해에는 그 직분을 내놓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이렇게 "그 해"라고 밝힌 것이다(Jos. Antiq. 18, 2, 2).

=====11: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 가야바의 이 말 뜻은 악한 것이었다. 곧,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 운동 때문에 로마 군대가 유대를 멸할 위험이 있으니, 예수 한 사람만 희생시키면 유대국은 안전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가야바의 이 말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전용되어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을 예언한 것이 되었다. 유대의 마지막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수님의 속죄 고난에 대하여 공직자(公職者)의 처지에서 예언한 것은 중대하다(49-52).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의 원수(가야바)까지도 예수님의 고난에 대하여 예언한 사실은, 참으로 그 속죄의 고난의 중대함과 믿을 만한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이것이 마치,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의 장래에 대하여 예언한 것과도 같고(민 24:17), 다윗의 원수 사울이 다윗의 일에 대하여 예언한 것과도 같다(삼상 26:25)

=====11;51,52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 가야바는 대제사장의 자격으로 그런 큰 예언을 하였다. 그의 본의는 예수님을 해하려는 악심으로 말한것이었으나, 그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언으로 이용된다는 뜻이다.

=====11:53,54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여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유하시니라 -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시는 생명의 구주님을 죽이려는 그들의 행동은 괴이하다. 그 행동은, 착한 일일수록 반대하는 마귀의 것이다. 예수님은 이기미를 아시고 깊은 광야의 한동네로 피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심은, 때가 이르기 전에 잡히는 것을 면하시려는데 있었다. 그는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순종하셨다.

=====11:55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케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서 예루살렘으로 오라갔더니 - 이것은 유월절 전의 결례(潔禮)를 가리킨다. 그것은, 머리를 깎거나 옷을 빠는 정도의 것이었다. 창 35:2; 출 19:10,11; 수 3:5; 대하 30:17; 행 21:24,26 참조.

=====11:56,57
이 귀절들은, 유대인들이 그 때에 예수님을 잡으려고 만반 준비를 하고 있었던 사실을 알려준다. 여기 예수님에게 대한 민중의 논단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잡힐 위기에 처한 줄 알고 냉정한 태도로 논단한 것 뿐이다.



11:1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 요한복음 저자는 이제 또 하나의 이야기, 곧 특별히 언
급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건에 관해서 기록하고 있다. 죽었던 나사로를 살려내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셨을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을 통하여 장차 성도들이 어떻게 부
활하게 될 것인지를 생생하게 예시하여 주신 것이다. 이는 주님께서 행하신 거의 최후
의 기적으로서, 당시 주님께서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계셨던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하
여 특별히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신 데는 이유가 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 속에
이번 사실이 깊은 감명을 주기를 원하셨으며, 이 기적이야말로 이전에 행하셨던 모든
기적을 총결산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과거에도 죽은 자 가
운데서 사람을 살리셨다. 그러나 이번에는 썩어 냄새나는 시체를 살려내신 것이다. 무
엇보다도 이 사건은 알맞은 때에 발생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나사로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고을인 베다니 사람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나
사로를 이와 같이 마리아나 마르다와 관련시켜 베다니 사람이라고 부른 이유는 당시
성도들에게 마리아와 마르다가 잘 알려진 이름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두 여인
은 경건한 사람으로 자기들 집에 종종 주님을 초대했던 사실을 미루어 보아 생각할 수
있다(눅10:38). 따라서 베다니-카시텔룰(castellum;작은고을)-를 성스러운 고을로 생
각하여 성지로 삼으려 했던 승려들이나 가톨릭 교황청의 노력은 잘못된 것이었다. 이
들은 또한 나사로의 누이인 마리아를 누가복음 7장 37절에 언급된 '죄인'이었던 여인
과 혼동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서로 다른 장소에서 다른 시점에 기름부음을 받으
셨던 것이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죄인인 '여인'은 예루살렘에서 향유를 부었고, 그녀
는 예루살렘 여인이었다. 그러나 베다니의 마리아는 후에 자기 고을에서 주님께 향유
를 부었던 것이다. 복음서 저자가 사용한 시제 역시 사건이 일어났던 어느 시점을 가
르켰다기 보다는 그글을 기록한 당시를 얘기한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말하는 마리아
는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마26:7)할 때 나오는 여인을 가리킨다.


11:3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 이 귀절은 간단한 내용의 말이다. 그
러나 이 말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마리아와 마르다가 마음 속으로 뜻하는 바를 쉽게 파
악할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간결한 그들의 말 속에는 주님께서 도와 주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도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긴 내용의 기도를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염려와 고민거리를 하나님의 장중에 맡겨 주심으
로 하여금 해결책을 공급해 주시도록 하는 것이다. 이 여인들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였
다. 그들의 문제거리를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고하고 하나님으로 부터 해답을 구
한 것이다. 또 하나 특기할 만한 사실은 그들은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께서 사랑으로
그들의 바라는 바를 들어주실 것을 믿었던 것이다. 참된 기도의 속성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구원의 길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동시에 저버리시지 않는다.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
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라고 대답하심으로 주님께서는 제
자들이 걱정을 잊고 주님의 사랑하시는 자가 죽을 위험에 처했을 때 돌아보지도 않는
다고 생각치 않도록 하게 하셨다. 제자들이 나사로의 생명을 염려하지 않도록 하게 하
기 위해서,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다. 더우기 나사로는 실제 죽은 지 오래되었으나, 곧 주님께서 생명을 희생시켜 주셨
으며 주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염려하여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 - 이 귀절은 앞 귀절과 상반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이
들은 상호 연결되는 논리를 이룬다. 마치, 하나님의 영광이 경건한 자의 구원에서나
타락한 자의 멸망의 양면에서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예
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의 사역에 관련시켜 적절히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은 두려움이 아니
고 온유하며 자비로우심이다. 나사로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았다고 말하심은
주님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심에 있어서 주님은 어떠한 목적 하에 보내심을 받았다
는 사실을 밝혀주기 위한 것이다. 곧 멸망시키러 오신 것이 아니고 구원하기 위해 오
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하신 것은 매우 의미가 깊
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영광이나 자기에게 돌아올 내용의 것은 모조리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5장 23절에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 하느니라"라고 말슴하셨다.
터키인이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체 하지만, 그리스도인 아들에 대해서는 무례
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는 곧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분리하여 별 개체로 간주하려는
시도에 불과한 것이다.


11: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사랑하시더니 - 언뜻 보기에 주님께서는 모순을 범
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요단 강 건너편에서 이틀을 더 유하시다가 가셨고, 나사로의
생명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면서도 주님은 나사로와 마르
다와 그 동생을 사랑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만일 주님이 그
들을 사랑하신다면 즉시 나사로가 있는곳으로 서둘러 갔어야 한다. 그러나 주님은 하
나님의 은혜를 나타내시는 거울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지체하신 데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으며, 여기에서 보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조급하게 현재의 상태를 가
지고 속단해서는 안된다고 믿는다. 주님께서는 도움의 요청을 받으시고도 종종 지체하
셨다. 이는 분명히 우리의 기도를 더욱 간절하게 하실 목적이거나 우리에게 인내의 연
단을 베풀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결국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미덕을 배울 수 있게 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그들의 간구가 더디게
응답된다고 생각될 때는 인내심을 가지고 갈급한 심정으로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때
까지 계속 기도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혹시 더디게 응답하실지라도 결코 주무시지 않
으시며, 또한 자기 성도들을 망각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하나
님의 모든 사람들이 구원 받기를 원하신다.


11;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 제자들이 주님께서 나사로를 망각하고 계신다고
단정할 수 밖에 없을 무렵에, 아니면 최소한 나사로의 생명보다 다른 것을 더 중요시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을 때에, 정작 나사로를 생각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 주셨
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요단 강을 건너 유대 땅으로 가자고 말씀하신 것이다.


11;8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 제자들은 예수님을 두렵게 하여
유대로 가시려는 것을 만류하려 했다. 이는 주님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실제로 자기들
의 안전을 위한 간언이었다. 제자들은 모두 두려워하고 있었으며 위험을 의식하고 있
었다. 따라서 다가올 위험의 십자가를 회피하고, 그 십자가를 고백하는 수치를 당하기
가 싫어서 주님의 안전을 위하여 말하는 것처럼 가식을 하였던 것이다. 사실 우리 생
활 중에서 이와 같은 일은 허다하게 많다. 단순히 십자가를 지기 싫어하면서 이를 피
한다는 수치를 모면하기 위하여 온갖 구실을 찾아 헤매는 일이 많은 것이다. 정당한
이유없이 자기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는 인상을 받지 않으려고 다른 핑계를 대는 것이
다.

11:9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 - 이 귀절에 관해서는 해석이 여러가지다. 어떤 사람이 인
간의 마음이 변화무쌍하여 하루에도 열 두번씩이나 변하며 매시간마다 서로 다른 목적
을 가지게 됨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이러한 해석은 그리스도께서 뜻하는 내용과 거리
가 멀다. 이러한 해석이 너무 일반화하여 문제시 됨으로 여기에서 명백히 하고자 한
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뜻하신 진정한 의미를 알아야 한다.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밤
과 낮을 비유로 사용하신다. 밤에 여행을 한다면 당연히 더듬거리며 길을 잃고 넘어지
기도 한다. 그러나 낮에는 태양 빛의 도움으로 밝은 길을 가며 거기에는 위험이 없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태양과 같아서, 성도들이 잘못하거나 넘어지지 않도록 돌보신다.
따라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떠나 불순종의 길로 가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을 인도자로 의지하고 천국의 인도를 받아 믿음을 바탕으로 과
감하고 안전한 길을 가게 된다. 시편 91장 11절에서 말씀하셨듯이 누구든지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자는 천사의 인도를 받게 되며 천사의 인도를 받는 한 안전한 길을 가게
되며 그리하여 걸림돌에 부딪쳐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도 두
려워하지 않고 과감하게 유대를 향해 가실 것을 원하셨고, 하나님 아버지를 힘입어 돌
로 치는 일을 없을 것을 믿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태양과 같이 우리 길을 밝혀주실
때, 그리고 인도하실 때 우리는 결코 길을 잃거나 방황할 위험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
에서 한 가지 교훈을 볼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리 자신의 힘을 의지하
면서 자기의 길을 갈 때, 그의 전 생애는 방황과 헤매임 속에서 허덕이는 생애가 된다
는 것이다. 또한 자기 나름대로는 현명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하나님의 존전에서 인
도하심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령이 가르치심을 도외시하는 사람은 눈먼 자이며,
어두움 속에서 방황하기 마련이다. 가장 좋은 길은 항상 하나님을 안내자로 모시고 그
의 이도하심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인생을 올바로 설계하는 자는 바로 이러한 생애를
살아가는 사람이며 그의 인생은 항상 하나님께서 주인 역할을 하는 인생이 된다. 이와
같은 진리를 체득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따르려는 성도의 노
력 배후에는 예외없이 사단의 간교한 획책이 뒤따르고, 사단은 온갖 장애물과 유혹을
이용하여 우리가 주님의 길을 걷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님께서 주님의
등불을 켜시고 우리를 인도하실 때, 우리는 당대한 마음으로 모든 죽음의 위험을 무릅
쓰고 따라야한다. 주님은 우리를 인도하실 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신다. 우리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결국은 반드시 복되고 행복한 결과를 가져다 준다. 이는 우리
가 달려야 할 경주인 것이다. 이 경주에 참여하는 자는 결단코 피곤하여 넘어지지 않
는다. 결코 도중하차할 수 없는 것이다. 도중에 놓인 장애물이 제 아무리 험난하더라
도 주님의 날개로 무장한 이상, 마지막 최후의 승리를 맛볼 때까지 헤치고 갈 방법이
있는 것이다. 성도라고 신앙생활에서 어려움을 겪지 말라는 법은 없다. 다만 이러한
어려움들이 디딤돌 역할을 하여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해
서, 주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자는 항상 주님의 보호의 눈길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이 주님의 말씀을 경시하거나 무시하고 자기생각을 의지하고 살아갈 때
그의 전 생애는 저주받은 생애이며, 이에 대한 복수의 화살은 그를 겨냥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낮을 열 두 시간으로 나누고 계신다. 이는 당시 유대인의
관례를 따라 말씀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여름과 겨울철에 따라 낮과 밤의 길이는 다
르지만, 어쨌든 낮과 밤을 갈라 이야기할 때는 밤과 낮을 각각 열 두시간으로 나누어
말하기 때문이다.


11;11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 앞에서 주님께서는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제자들이 예기치 않던 죽음에 충격을 입지 않도록 하
기 위해서 나사로가 죽었다고 밝히셨다. 그리고 죽은 나사로에게 부활의 희망이 있음
을 시사해 주셨다. 그러나 그들의 무지로 제자들은 주님의 첫 말씀을 오해하고 나사로
가 단순히 잠들어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그 참뜻을 파악했어야 했다.

11:12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
말 저변에는 간접적으로 그리스도를 그곳에 가지 못하도록 만류한 내용이 들어 있었
다. 이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교활하게 자기들의 소욕대로 이용한 것은 아닐지라도, 주
님께서 '잠잔다'는 내용을 언급하셨을 때, 제자들은 기꺼이 기회를 포착하여 기대되는
위협으로 부터 모면코자 했던 것이다. 어거스틴(Augustine)과 그후 많은 사람들은 '잠
잔다'라는 단어를 특이하게 이해했다. 그들은 잠잔다는 말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고,
단지 죽음에 비유한 것으로 본다. 죽음에 비유한 것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잠에서 깨우는 것과 같이 쉬운 일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자주 쓰이는
이 '잠 잔다'라는 말의 문맥을 고찰해보면 이러한 해석과는 거리가 멀다. 어디까지나
'잠잔다'는 것은 죽은 상태를 나타내는 비유법으로, 이러한 비유는 세속 작가들의 작
품에서도 흔히 사용되는 비유이다. 죽음을 잠에 비유한 것은, 생명없는 시체가 마치
깊이 잠들어 있는 몸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수면'이 '죽음의 현상'으로 불리우는 것
도 그 때문이다. 그리스의 서사 시인 호머(Homer)는 그것을 가르켜 *
(카실네고스 다나곤) 곧 '죽음의 형제'라고 표현했다. 여기서
잠잔다 함은 오직 육체에만 적용되는 것이다. 이를 영혼(souls)에도 적용시킴은 큰 잘
못이다. 왜냐하면 영혼은 육체의 생사와 관련없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그리스도께서는 나사로를 일으키신다고 말씀하심으로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셨
다. 물론 잠잔다는 말의 표현으로는 부활의 가능성을 시사하지 않고 있지만, 죽은 자
를 다시 살려내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승리자라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11: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 이와 같은 제자들의 어리석음을 참으시는 주님의
인내는 경탄할 만하다.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잠시 지체하신 이유는 제자들의 유익을
위함이었다.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 제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주께서 거기 계시지 않았으며,
나사로를 뒤늦게 방문하여 살려내신 것이다. 왜냐하면 나사로를 즉시 살려 내셨더라면
주님의 능력을 제자들이 경시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기적이 자연의 법칙보
다 위대하므로 자연 법칙에 따른 우연한 사건 처럼 기적을 행하는 것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한다. 이와 같은 예는 우리 생활 중에서도 흔히 목격할 수 있다. 주께서
우리가 요구하는 즉시 우리를 어려움에서 건져내어 주신다면 우리는 주님의 손길을 의
식하지 못하고 자연적 또는 우연히 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마찬가지로 나사로의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은 참된 주님의 능력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사건의 지연은 여기에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인간의 방법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한계를 넘어선 후에
야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 전에도 언급했듯이 인성(人性)을 가지신 그리스도 안에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병으로 오랫동안 시달림을 받을 때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지체하여 고쳐주시는 경우도 있다. 물론 슬픔과 고통을 통해서 번민하
지만 주님의 손길을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신다"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기꺼이 고통을 제하여 주시기 때
문이다.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은 제자들의 최초의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아직 미약한 믿음을 확고히 하게 하려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손이 공
공연하게 기적을 행했을 때에야 비로소 그들은 믿음을 굳게 하는 것이다.


11;16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 지금까지는 제자들이 주님을 만류하려는 입장이었다. 이
제 도마가 일어나서 따라갈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도마는 용기를 가졌으나 참 믿음은
없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을 방패삼아 기꺼이 그리고 조용히 따르
려는 태도가 아니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 이 말은 절망의 표현이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생명
에 대해서만은 자신을 가졌어야 한다. "함께 죽으러 가자", 하는 태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함께 죽는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를 뜻한다고 봄이 타당하다. 도마는
주님과 함께 죽기를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제안은 생각이 깊지 못한 도마의 열심
에서 비롯하였다. 도마는 주님의 약속에 힘입어 각오를 굳게하고 마음을 같이 했어야
했다.


11;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리쯤 되매 - 복음서 저자(요한)은 주님의
행적에 관한 확실성을 나타내는 것은 무엇이나 자세하게 기록을 남겼다. 베다니가 예
루살렘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나 하는 것까지 기록했다. 거리가 가까와 많은 사람들이
와서 마리아와 마르다를 위로해 주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기적을 목격한 자가 많아
진 것이다. 그들은 단순히 이웃 친지라는 관계 때문에 초상집에 위로하려고 왔지만,
이는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나사로의 부활을 목격하는 자
가 가족에 국한되지 않고 문상하러 온 모든 사람도 이를 목격하게 된 것이다. 이 사건
을 목격하고, 마치 극장의 무대에 펼쳐지는 연극을 보듯이 수많은 군중과 모인 무리들
은 그것도 성문 곁에서 경탄해 마지 할 기적의 사실을 직접 보고 나서도 당시 사람들
은 언제 보았더냐 하는 식으로 곧 잊고 마는 것을 볼 수 있다. 유태인들은 일부러 눈
을 감은 양 그들 앞에 전개되는 사건을 보지 않으려 들었던 것이다. 끊임없이 기적을
목격하고 체험한 그들이건만 이것들을 망각해 버리는 것을 당연한 처사로 생각하고 생
각이 둔해진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베다니와 예루살렘은 거리가 약 오리쯤 되었다.
왜냐하면 stadium이란 말은 당시에 길이를 재는 단위로 약 600피트, 곧 로마식 야드로
125야드였기 때문이다.


11: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 유대인
들이 그곳에 온 이유는 바로 위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또 하나의
다른 목적을 가지고 계셨다. 문맥을 살펴보면 나사로와 그의 누이들이 사는 이 집은
주변에서 존경을 받고 널리 알려진 집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한 사람의 죽음이 그의
친족들에게 슬픔을 가져다 주는 이상, 이를 위로하기 위해서 주변에서 문상 온 것은
도리이며 규탄의 대상이 안된다. 다만 이곳에서 그들이 보여준 불신앙의 죄악이 위로
하러 온 동기마저 불순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11:20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 마르다는 동네 밖에까지 마중을 나갔다. 예
수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먼저 나간 것은 물론 주님에 대한 경외심에서 비롯했다. 그
러나 동시에 마르다는 좀더 비밀리에 주님을 만나 뵙고 싶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
께 가까와 온 위험이 마음 속에 괴로움이 되었고 주님을 원수로 여기는 자들이 있어,
비록 갈릴리로 떠날 때 조금은 잠잠해졌지만, 아직도 살기등등해 있으므로 그들이 예
수님의 도착함을 들으면 광분하여 다시 소동을 일으킬 것 같아 조용히 먼저 만나고자
했던 것이다.


11: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 마르다는 슬퍼하기부터 했다.
물론 애곡하는 말 속에는 은근한 기대도 섞여 있었다. 마르다의 의도하는 바는 "주께
서 조금만 더 일찍 와 계셨더라면 나의 오라비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 터인데 너무
늦게 오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가능하시다면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려내실 수 있
으리라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께 허락치 않는 것이 없으니까 말입니다"였을 것
이다. 마르다는 이와 같이 말함으로써 믿음으로 따르지 못하고, 자기의 감정을 더 중
요시 한 셈이 되었다. 물론 마르다도 어느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 한 말이긴 하다. 그
러나 감정이 섞여 있었으며, 자제 하지를 못했다. 믿음이 있었더라면 "주께서 계셨더
라면"이란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의탁하지 않고 자신의 바라
는 바 소망에 붙잡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능력과 초인적 힘을 구한 것은 믿음이
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 이상으로 자신을 설득시키려는 것은 믿음이라고 생
각할 수 없다. 우리는 항상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이 상호 일치되도록 해야 한다. 아니
면 그 믿음은 말씀과 서로 충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마르다는 그리스도의 영
적인 능력보다는 육신적인 주님의 참석을 더 중요시 한 것 같다. 따라서 믿음 위에 비
정상적인 감정을 혼합하여 조금은 미신(superstition)적인 경지에 이를 정도로 되었
다. 그녀의 태도는 빛을 보지 못했다. 따라서 약간의 서광만이 보일 뿐이다.


11: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 그리스도의 사랑은 참으로 놀라울
정도다. 주님은 마르다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신다. 그리고 자신의 뜻을 따라 마르다가
요청한 것 이상의 것을 약속하신다. 곧 다시 살게된다고 말씀 해 주신 것이다.


11:24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 여기에서 우리는 마르다의 지나친 소심성을 볼 수
있다. 마르다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를 약화시킨다. 자기 자신의 생각에 희망을
걸고 기다리는 것은 자기 권한 밖의 일을 한 것이다. 이제 그녀는 경고를 받은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손을 적극적으로 펴셨을 때 오히려 주춤하고 조용히 서있는 오류에 빠진
다. 우리는 이 양자를 모두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헛되고 바
람과 같은 희망을 품어서는 안된다. 또한 주님께서 약속하실 때 우리의 마음을 너무
꼭 닫아서도 안된다. 다시 말하면, 마르다는 그리스도의 말씀하신 것 이상의 기대를
가졌었다. 그녀는 심중에, "주님께서 마지막 부활을 의미하신다면 이해합니다. 물론
저의 오라비가 마지막 날 다시 살게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로
마음의 위안을 삼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이상의 무엇을 말씀하시고 계신지 모
르겠습니다"하고 말한 것이다.


11: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자기가 부활이며 생명이신 것을
선포하신다. 다음 주님께서는 말씀의 각 귀절을 하나하나 분명하게 설명하신다. 제일
먼저 자신을 가리켜 부활이라 칭하신다. 왜냐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회복하는 것이
부활의 대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모든 인류는 사망에 빠져 있다. 그러므로 어떠한 사
람도 먼저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살리움을 받기 전에는 결코 생명을 소유할 수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생명의 근원이라고 가르치고 계신다. 후에 주님께서는
생명의 지속도 역시 주님의 은혜에 속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다음 설명에 의하면 주님은 영혼의 생명을 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그렇다면, 어떠한 면에서 그리스도께서 부활이 되시는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이방인이었던 아담의 자손들을 자기 영으로 중생시키심으로
써 부활이 되신다. 그리하여 그들이 새 생명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5장 21절과 24절에서 더욱 자세히 다루었다. 에베소서 5장5절과 5
장 8절에 나타나는 바울의 가르침은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자연의 법칙에 따라 인
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저절로 받을 수 있도록 예정되어 있다는 생각은 그릇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죽은 자가 걷는다는 것과 마찬가지의 논리이다. 사람의 신체나 기능 중
어느 한 면도 부패하지 않은 부분이 없고 올바른 것에서 떠나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지각을 가지고 이해력과 의지력을 바탕으로 호흡하며 살고 있지만 사실은 파멸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망이 지배하지 않는 곳이 없다. 사망은 곧 하나님
과의 격리를 뜻한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비록 전에는 죽어 있었으나 다시
살게 된다. 믿음은 영혼을 소생시키는 부활을 낳게하고, 영혼을 살게하여 하나님을 향
하여 살게 한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죽
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이
는 믿음의 고귀함을 찬양한 귀절로서, 믿음은 실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을 불어
넣어 주며, 우리를 사망에서 해방시킨다.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 주님께서 생명이 되신 사
실에 관해서 계속해 설명해 주고 있다. 주님께서 한번 주신 생명은 결코 상실될 수 없
다. 주님께서 이를 끝까지 지켜 주신다. 연약한 육신을 지닌 인간으로서 한번 생명을
받은 후 그 후에는 혼자 상태로 버리워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따라서 생명의 보전은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능력위에 유지되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한번 시작하신 일을 끝까
지 이루신다.
신자들은 결코 죽지 아니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썩지 아니할 씨로 거듭난 그들의 영
혼 속에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며 그 안에서 항상 생명이 되시기 때문이다. 죄로 인
하여 육신은 사망할 수 밖에 없지만, 영은 의를 인하여 살게 된다(롬8:10). 우리의 겉
사람은 날로 후패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롭게 된다(고후4:16). 실로, 죽음은
일종의 사망의 멍에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방시키는 일을 한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 언뜻 보기에는 그리스도께서 마르다에게 신령한 것에 관해 이
야기하여, 마르다의 생각을 지금의 육신적인 욕망에서 떠나게 하려는 것 같다. 마르다
는 자기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기를 원했다. 그리스도께서는 대답하되 그리스도는 더
좋은 생명의 창조자(Author of life)라고 대답하신다. 그는 하늘의 능력으로 믿는 자
들의 영혼을 살리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두가지의 은혜를 의도하신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말씀하셨고, 그가 주는 영적인 생명은 영혼의 소생이지
만 동시에 곧 죽은 나사로의 육신을 일으키실 것을 시사하셨다.


11:27
주여 그러하외다 - 주님께서 부활이시며 생명이신 사실을 믿고 있다는 것을 나타
내기 위해서 마르다는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한다. 이러한 고백은
모든 축복을 약속한다. 왜냐하면 메시아가 오신 목적과 선지자들이 가리켜 말한 그리
스도의 하실 일은 곧 생명과 부활이기 때문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하고 고백한 마르다는 옛 선지자들의 예언을 굳
게 믿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회복과 완전한 행복은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비롯된
다. 그리스도는 참되고 완전한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키 위해 보내심을 입은 것이다.


11:28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 그리스도께서 동네 밖에 계시며 동네 안,
사람이 많이 모인 곳으로 오시지 않은 것은 마르다의 간청에 의한 것인지도 모른다.
마르다는 두려웠던 것이다. 왜냐하면 최근 얼마 전에도 주님께서 가까스로 죽음을 면
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르다는 자기 형제인 마리아에게 조용히 말한다.
이리하여 그리스도의 오신 사실이 소문나지 않도록 한 것이다.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 '선생님이'란 단어는 마르다가 예수님을 경배하는
의미에서 사용한 단어다. 지금까지 마르다와 마리아는 마땅히 받을 수 있는 분복 이하
의 복을 누렸지만 하여간 주님에 대한 신뢰감은 상당했고 충실한 제자중 하나였다. 마
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로 간 것을 보면 그녀가 주님을 경배하고 있
음을 알 수 있다.


11: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을 - 마르다를 집으로 돌려보내어 마
리아를 불러오게 한 주님은 또 하나의 목적을 가지시고 그렇게 하셨다. 그것은 함께
있던 유대인들이 그가 행할 기적의 목격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물론 거기 있던 유대
인들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의도를 알 수가 없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면서
하나님의 의도하는 바대로 행동하는 수가 흔하다. 유대인들은 마리아가 급히 집안에서
나가는 것을 보고 저가 무덤으로 가는 줄 알았다. 당시 이 관례가 그러했듯이 문상하
러 온 사람들에게 슬픔을 자극시키기 위해서 무덤으로 가는 줄 알았던 것이다. 당시의
관례에 따르면 아내를 잃은 남편이나, 자식을 잃은 부모나, 남편을 잃은 아내나, 부모
를 잃은 자식은 또는 친척이나 친구들 잃었을 적에 그들은 으례히 슬픔을 자극시킬 만
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등장시키는 것이었다. 때로는 이러한 목적으로 갖가지 방
법을 고안해 내기도 한다. 사람들의 감정은 이미 슬픔으로 고조되어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에 대한 새로운 어떤 자극으로 더 흥분하게 될 것이다. 문상객들
은 마리아가 무덤을 향해 달려가면 제어할 수 없는 슬픔에 더욱 몸부림치리라 생각하
여 마리아를 만류해야 옳았다. 그러나 그토록 강요하여 만류하지는 않고 뒤따라 감으
로 슬픔에 동참하고자 하였고, 이렇게 하는 것이 그들의 생각엔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드럽게 위로하는 이런 방법은 때때로 큰 도움을 주지
못할 때가 있다.

11: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 마리아가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렸다는 사실은 예
수님께 대한 특별한 경배심을 나타낸다. 왕이나 지도자들 앞에서 땅에 엎드리는 경우
가 있기는 하지만, 그리스도는 당시 그의 육신적인 면을 생각하면 전혀 왕족이나 찬양
할 만한 것이 없었다. 따라서 마리아가 엎드려 경배한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그녀
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엎드려 경배하였던
것이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 여기에서도 마리아는 경배하듯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
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마리아는 자기 말로 주님의 능력을 제한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
다. 주님의 능력은 하늘과 땅에 가득한데 이를 육체를 가진 예수의 몸에 국한시킨 것
이다.


11:33
예수께서...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불행에 대해서 긍휼을
갖지 않으셨더라면, 냉정한 태도를 보이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동정심을 보이
셨고 민망히 여기셔서 눈물까지 흘리셨다. 예수께서 마리아와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
는 것을 보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셨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외에도 인간의 공통적인
운명인 가련한 인간의 삶을 보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입은 주님은
그가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목적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곧 인생들의 병고의 슬픔
에서 해방시키러 오신 것이다. 바로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셨고, 열심과 긍휼로 행하시
는 것을 보이시기를 원하신 것이다. 따라서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에 먼저 심령으로 민
망히 여기시고 슬픔을 나타내시며 눈물까지 흘리시므로 우리 인간들의 질병에 대한 관
심을 표명하시기를 자신이 고통당하시는 것처럼 하셨다. 그러나 심령으로 통분히 여기
시고 마음에 민망한 것이 어떻게 하나님 아들의 속성이 될 수 있는가? 그리스도께서도
우리 인간처럼 감정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말하는 사람
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
니라, 필요할 때 비밀의 경륜을 따라 자신에게 그러한 감정을 끌어 들임으로써 슬픔이
나 기쁨을 나타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거스틴(Augustine)이 주장하는 것은 예수께서
는 스스로 민망해 하셨고, 다른 사람들은 그러한 감정에 사로잡혀 마음을 제어할 수
없어 감정의 노예가 된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의 생각에 의한다면 그리스도는 모
든 인간의 감정을 초월해 계시지만 자의로 이러한 슬픔과 민망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
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의 견해로서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
에 오실 때, 죄인이 아닌 것을 제외하고는 우리 인간과 똑같은 감정을 가진 사람의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지
상에 오신 것은 그리스도의 선택에 의한 것으로 보며, 이는 오로지 우리를 위해 선택
하신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영광에 조금도 손상을 입히는 요소가 아니다. 더우기 그리
스도께서는 처음부터 유순하였고 순종하셨다.이는 그가 감정이 없는 하나님이라고 생
각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이점에서 주님은 우리의 형제임을 입증
하여 주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대번인이 되고, 인간이 경험하는 동일한 내용을 경
험하여 우리를 변호하시며 우리의 약점을 옹호하는 일을 기꺼이 담당하실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일, 누가 사람의 감정은 죄에 물들어 있으므로 이러한 감정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가질 수 없다고 한다면, 나는 그에게 우리들과 그리스도 사이에는 큰 차
이가 있음을 지적해 주고 싶다. 우리는 절제하지 못하며 중용을 지키지 못하여 우리의
감정은 죄에 물들어 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의 경우에는 이러한 감정들이 정돈되고
통제되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되므로 죄에서 떠나 있다.사람의 감정은 실로 두가
지 측면에서 악하다고 본다. 첫째는 혼란한 상태에 감정이 정돈되지 못하고 또한 중용
의 덕에 의해 지배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합법적인 동기, 아니면 최소한 합
법적인 목적을 지향하지 않은 감정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감정은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정도를 넘어 기뻐하거나 슬퍼한다. 때로는 억제의 굴
레를 송두리째 벗어버리기로 한다. 우리의 마음은 세상에 너무나 집착해 있으므로, 사
소한 것에도 슬퍼하고, 때로는 전혀 아무 것도 아닌 것까지 문제시한다. 그리스도에게
는 전혀 이런 것이 있을 수 없다. 주님의 감정표현은 한계를 초월해 본적이 없다. 그
리스도의 감정은 올바른 이성과 판단에 근거를 두고 올바르지 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
다.
이 문제를 좀더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창조될 당시의 인성(人性)과 후에
죄를 물들고 타락된 인간성을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그는 사람에게 감정(emorions)을 불어 넣으셨다. 그러나 당시의 감정은
이성에 합당한 순수한 감정이었다. 이러한 감정이 후에 무질서 해지고 타락한 것은 우
연한 사고에서 빚어지는 오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속성인 감정을 가지셨지만
이러한 * (아타크시아)가 없는 감정이었다. 왜냐하면 사람의 감정
(passions)에 노예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이 심히 민망하셨고 통분히 여기셨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뜻에 위반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감정과 우리 사람의 감정을 비유하여 설명한다면, 그들은 마치 유유히 흐르는 강에 깨끗하고 청결한 물과 흙탕에 거품나는 물과의 차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그리스도의 예 하나만으로 스토익파(stoics) 금욕주의자들의 굽힐 줄 모르는 강인함을 물리치기에 족하다. 그렇지 않다면 최상의 완전에 대한 기준을 그리스도를 떠나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아담의 죄로 인하여 우리의 감정 가운데 내재해 있는 완고함을 시정하고 길들이도록 노력해야겠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지도자로 따를 수 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바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도 우리에게 돌처럼 굳어질 것을 요구하지 않고 적당하게 슬퍼하되 소망없는 불신자들처럼 우리 자신을 슬픔에 내던지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다(살전4:13).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의 감정을 절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능력으로 우리 감정속에 있는 죄를 제어할 수 있게 하셨다.

11;36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 요한은 여기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두 가지 다른
판단을 우리에게 기술해 보이고 있다.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라고 말한 첫
째 사람들은 인간적인 면만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시켰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별로 귀히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나사로를 죽음에서 구하지 않았다고 악의에 차서 그리
스도를 비난했던 다른 사람들보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더 솔직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
비록 그들이 그리스도의 능력을 칭찬하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은 주님을 비방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이 그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음
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감사할 줄 모르는 마음은 훨씬 더 저속한 것이
어서, 이 한번의 경우에 계시지 않았다 하여 불평을 터뜨린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이
와 같이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며, 오늘날도 계속 배은망덕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만족시켜 주지 않으면 우리는 즉시 불평을 토로한다.
"주님은 지금까지 나를 잘 도와 주셨는데 이제와서 왜 나를 버리시고 나를 실망케 하
실까?" 여기에 이중의 병이 있다. 우리는 별 생각이 없이 우리에게 덕이 되지 않는 것
을 요구하고 하나님께 우리 육신의 비뚤어진 욕망을 채워주도록 강요하려고 한다. 그
리고 우리는 때를 기다리지 않고 답을 강요하며 우리의 참지 못하는 조바심이 지나치
게 우리를 서두르게 만든다.

11;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여기시며 - 그리스도께서는 한가한 방관자로서
무덤에 나아 오지 않고 싸움을 위하여 준비하고 있는 씨름선수와 같이 무덤에 나아갔
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속으로 다시 통분히 여기신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가 정
복해야만 하는 사망의 사나운 횡포가 그의 눈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이 통분히 여기심이 우리가 이미 언급한 불신(不信) 즉 믿지 아니함에 대
한 의분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또 하나의 이유가 나에게는 더 적절하
게 보인다.-그리스도께서는 주위 사람들보다 사건 그 자체를 생각하고 계셨다는 것이
다. 나사로를 살리는 데 있어서 그리스도의 능력을 더 풍성하게 나타내는 여러가지 내
용이 뒤따른다. 그것은 무덤을 돌로 막아 놓은지가 나흘이 되었는데 그리스도께서 모
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하셨던 것이다.


11;39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 이것은 불신이 표시였다.
마르다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하여 자신이 기대할 수 있는 능력 이하로 주님을 대하
고 있는 것이다. 악의 뿌리는 그녀가 하나님의 무한하고 측량할 수 없는 능력을 자신
이 육적인 감각에 의하여 헤아렸다는 점에 있다. 죽은 오빠가 이미 부패하여 악취가
나기 때문에 더 이상 마르다는 고칠 대책이 없다고 유추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마
음이 잘못된 생각에 의하여 지배될 때, 우리는주님을 우리 마음에서 추방하여 주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실 일을 이루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녀의 오라비가 영원히 무덤속에
놓여 있지 않은 것은 마르다 덕분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마르다는 사실 그의 오라비
가 살아날 수 있는 희망을 끊어 버리고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그를 살리는 일도 방해했
기 때문이다. 물론 마르다의 마음은 정반대였지만 믿음의 연약함이 이를 초래했던 것
이다. 이쪽 저쪽으로 끌려 다니며 우리는 우리 자신과 싸우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한쪽 손을 뻗쳐 하나님으로 부터 도움을 청하는 반면에 다른 손으로는 이미 우리에게
베풀어지고 있는 도움을 밀어내기가 일쑤다. 물론 마르다가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
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말할 때 마르다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혼돈되고 불투명한 믿음은 우리가 구체적인 상황에 이르렀을 때
이를 활용하지 않는다면 별로 유익이 없는 것이다.
나아가서 우리는 마르다에게서 최상의 사람들의 믿음에도 많은 결함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녀는 그리스도에게 달려나와 그를 맞은 첫번째 사람이었다. 이
것은 보통 이상의 믿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 주님의 길에 어려움을 제기한
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까지 미칠 수 있도록 우리의 감각이 포착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능력을 하나님께 돌릴 줄 알아야겠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의 한
가지 약속이 우리에게 까지 미칠 수 있도록 우리의 감각이 포착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능력을 하나님께 돌릴 줄 알아야겠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의 한 가지 약속이 우
리에게 충분한 증거가 되지 못한다면, 어쨋든 하나님께서 두번 세번 확증해 주실 때는
마르다처럼 묵묵히 따르도록 하자


11;40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 주님은 마르다
가 들었던 약속에서 충분한 희망을 걸지 못한 점을 들어 그녀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고
있다. 이 말씀에서 요한이 말로 표현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으리
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미 앞에서 예시한 대로, 주님께서 "내가 부활이요 생
명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이를 의미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기대
하지 않았음을 인하여 마르다는 책망을 받았다.
네가 믿으면 - 이 말씀은, 믿음이 우리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일 가운
데 비치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과 선
하심이 우리에게 나타나도록 그 길을 평탄케 해 주기 때문에, 언급되었다. 그것은 마
치 시편 81편 10절에 "네 입을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리고 불
신은 하나님의 길을 가로막는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손을 묶어 놓는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다른 곳에서 예수께서는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마13:58)고 언급되어 있다.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의 뜻에 의하여 구속
을 받는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의 악의(惡意)가 하나님의 능력을 저항하고 반대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는 종종 이러한 장애를 극복하신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의 손을 멈추시고 믿지 않는
자에게 도움을 보류하실 때는, 그들이 불신의 장벽에 갇혀 있어서 주님의 손길이 뻗칠
길을 열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 주의하여 볼 것 같으면 기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불리
우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통하여 그의 손의 능력을 나타내시며 그의 이름을 영
화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마르다는 그리스도의 두번째 선언에 만족하여 돌이 옮겨지는
것을 허락했다. 그녀는 아직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이 명령
을 내리시는 것을 보았을 때 마르다는 기꺼이 주님의 명령에 의존한다.


11:41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 참으로 기도를 위해 준비된 마음의 표현이
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바로 부르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연합 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우
리가 지상에서 들려 하늘에 오르기 전에는 될 수 없다. 물론 이것은 항상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깊은 육신의 더러움에 빠져 있는 위선자들은 그들의 심각한 표정에 의하
여 하늘을 끌어내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위선자들이 하
는 척하는 것을 하나님의 자녀들은 진심으로 해야 한다. 그러나 그의 눈으로 하늘을
우러러보는 자는 정신적으로 하나님을 하늘에 가두어 두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어디
에나 편만하여 계신 분으로서 천지에 충만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 세
상을 떠나 천상으로 들리기 전에는 하나님께 대하여 지나치고 세상적인 생각과 상상을
계속하기 때문에 성경은 인간의 마음을 하나님의 보좌라고 부르고 그렇게 선언하고 있
다.
눈을 들어 우러러 보는 것에 관한 한,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기도가 합당하지 않
다고 할 수 있는 영속적인 예식이 아니다. 세리는 그의 얼굴을 들지 못하고 땅을 향하
여 머리를 숙이고 기도했지만 그의 기도는 믿음으로 하늘에 상달되었다. 그러나 하늘
을 우러러보는 것은 유익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사람은 하나님을 찾을 마음이 생기
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기도의 열성은 때때로 우리의 몸에 영향을 미쳐 몸은 모르
는 사이에 저절로 마음을 따르게 마련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을 우러러 보셨을 때 그
는 특별한 열의를 가지고 기도했기 때문에 마음이 하늘로 따라갔을 것이라는 것은 의
심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그는 완전히 아버지와 하나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다
른 사람들을 자신과 함께 하나님께로 데려가기를 원하셨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 비록 주님은 아무 것도 구하시지 않
았지만 감사함으로 기도를 시작하고 있다. 사실 복음서 저자가 주님께서 형식적인 말
씀으로 기도했다고 기록하지는 않고 있지만, 그전에 기도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
렇지 않다면 기도가 응답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마 주님은 복음서 저자가 언급한
대로 통분히 여기는 심령으로 기도했을 것이다. 주님께서 바보처럼 스스로 흥분했으리
라는 것은 전혀 그 이야기에 일치되지 않은 말이기 때문이다. 나사로의 생명을 얻은
주님은 이제 아버지께 감사한다. 주님께서는 이 능력을 아버지께로서 받았다고 말하고
스스로 능력을 주장하지 아니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대행자임을 인정하고 있을 뿐
이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인간의 능력에 적응시킴으로써 때로는 신성을 주장하고 하나
님께 속한 것을 스스로 주장하지만 또 경우에 따라서는 인간의 성격을 입는 것으로 만
족해 하시고 신성의 모든 영광을 아버지께 돌리기도 하신다. 복음서 저자는 아버지께
서 그리스도의 말을 들으셨다고 한 한마디 말씀 안에 이 두 가지 면을 놀랍게 표현하
고 있다. 그리고 복음서저자는 주님께서 사람들로 아버지께서 자기를 보낸 것을 알고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하게 하기 위하여 감사를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
스도의 높은 위엄을 사람들이 그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육신에 나타
난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의 비천하고 둔갑한 인간의 지각을 점진적으로 그러한 경지에
까지 끌어올렸다. 주님은 전적으로 우리의 것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주님께서 여
러 모양으로 우리와 같이 낮추신다 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 심지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비어 비천한 자리까지 자신을 낮추셨다고 말씀하셔도 그것은 조금도 틀
린 말이 아니다.


11;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 이 말씀은 주님께서 원하는 만큼
많은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은혜를 아버지로부터 받지 못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
들을 미리 경고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자기 자신과 아버지 사이에 완전
한 일치가 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그에게 아무 것도 거절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만을 행하시기 때문에
기도할 필요도 없다고 까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들로 이일
이 참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일이라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하여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셨
다. 만일 누가 "그러면 주님께서 왜 죽은 자들을 모두 살리시지 않았느냐?"고 반문한
다면 그 대답은 용이하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기적은 복음을 확증하는데 충
분하다고 주님께서 판단하시는 한도 내에서 행하시기 때문이다.


11: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 주님의 거룩한 능력은
주님께서 나사로를 손으로 만지시지 아니하고 그의 음성으로만 외치셨다는 사실에 의
하여 더 잘 나타나 있다.동시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의 말씀의 놀라운 능력으 마나
타내고 있다. 주님께서는 그의 말씀으로 어떻게 죽은 자에게 생명을 회복시켜 주셨는
가?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나사로를 살리시는 가운데 우리가 매일 같이 믿음의 지각을
통하여 경험하는 주님의 신령한 은혜를 눈으로 볼 수 있는 표적으로 나타내신 것이다.
주님은 그의음성에 죽은 생명을 살리는 힘이 내재해 있음을 보여 주셨다.


11: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 복음서 저자는 나사로가 무덤 속에
안장되었던 그대로 나왔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수족을 동였던 베를 언급
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의 매장은 아직도 유대인들이 사용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베로
몸을 동이고 머리는 머리수건으로 별도로 동인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 기적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이 할일은 그들이
친히 자기들 눈으로 본 일을 손으로 만져 보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나사로를 동이
고 있는 수의를 흔들어 놓았거나 저절로 수의가 벗겨지도록 해놓았는지도 모르기 때문
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증인으로 옆에서 보고 있던 방관자들의 손을 이용하기를 원
하셨다. 그런데 가톨릭 교도들은 여기서 엉뚱하게도 비밀 고해(告解)를 유추해 내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는 나사로를 생명으로 회복시켰을 때 제자들이 나사로를
풀어 놓아 주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교회가 우리의 죄를 사해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가톨릭 교도들은 나사로를
풀어 놓아다니게 하라는 말을 들은 사람들이 제자들이었다고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
가? 오히려 우리는 그 명령이 유대인들의 의심을 송두리째 제거하기 위하여 유대인들
에게 주어졌던 것으로 분별한다.


11;45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행한 기적이 열매없이 지
나가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 기적을 통하여 몇몇 사람을 믿음으로 이끌었다. 우
리는 기적에 두가지 용도가 있음을 알아야겠다. 기적은 우리를 믿도록 준비시키든가,
우리를 믿음 안에서 굳게 해 주든가 두가지 역할을 한다. 복음서 저자는 여기서 전자
를 지적하고 있다. 주님께서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능력을 공
경하고 존귀히 여겼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자신을 주님께 바쳤다고 요한은 말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기적만으로는 믿음을 자아내기에 부족했다. 그러므
로 우리는 여기에 사용된 '믿었다'(believe)는 말에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교훈을 받
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를 송사하는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경건치 못한 자들의 눈먼 상태와, 미친
상태를 드러내는 무서운 분노와 경거망동이 나타나 있는 자들이라도 나사로의 부활은
분명히 돌과 같은 마음이라도 부드럽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건치 못한 상태에
서 그 쓴 독으로 하나님의 일을 침식하고 부패케 한다. 그래서 사람이 기적에서 유익
을 얻을 수 있기 전에 먼저 그 마음이 정결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나
두려움을 갖지 않는 사람들은 설령 천지가 한데 어울리는 것을 목격한다 해도 항상 건
전한 교훈을 거절할 것이다. 오늘날도 우리는 많은 하나님의 원수들이 하나님의 능력
있는 섭리와 손길에 대항해서 미친듯이 싸우는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들의 목적은
그들이 완악한 괴물과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 주자는 것 뿐이다. 그리스도의 하
신 일은 바리새인들에게 보고되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외식에 정비례해서 복음을
반대하는 일에 더 열성적이었기 때문이다. 복음서 저자가 그들의 공회 소집에 대한 내
용을 기록할 때에 그 이유가 더욱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 그들은 제사장들의 일부분
이었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이 말하자면 온 공회의 분노에 불을 붙이는 풀무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특별히 그들을 언급하고 있다.


11: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대제사장
들의 눈먼 상태는 아주 심각하다. 만일 그들이 그처럼 어리석고 야수적인 상태만 아니
었다면, 하나님의 능력이 기적을 통하여 그와 같이 놀랍게 증거된 이후에 적어도 그리
스도에 대한 경외심을 약간이라도 느꼈을 것이다. 이제 그들은 자기들이 보고 놀랄 수
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영광을 매장시킬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모였다. 그들이 공개적으
로 하나님에 대항하여 싸운다고 자랑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의 능력을 뒤옆어버리지 아니하고는 그리스도를 매장시킬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주
제넘은 신성모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을 대항하여 싸우고 있다. 믿지 않는 자
는 언제나 교만하고 하나님을 멸시하지만, 그렇다고 언제나 하나님과 정멸 충돌을 하
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대항하여 오랫동안 다툴 때, 그들의 최후 행
동은 조금도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이 하늘 위에까지 오르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깨서 많은 표적을 행하신 것을 인정한다. 그의 위대한 능력이 어디로서 온 것
인가? 그러므로 이들은 공개적으로 그리스도의 기적에 빛나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짓밟을 준비를 갖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작정 참으시는 분이 아니다. 비록 그들
의 행동을 잠시동안 묵인하실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진노의 때가 올 때까지 그들
의 어리석은 오만을 비웃으신다. 시편 2편 12절의 말씀을 보라.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 그리스도께서 점차 그의 능력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마치
그들의 활동 부족 때문이었던 것처럼, 그들은 이러한 말로 자기들의 나태함을 꾸짖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한다면 그리스도의 발전을 막을 수 있다고 생
각했던 것이다. 모든 것을 스스로 주장하고 마치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
는 권한이 자기들 수중에 있고,일의 결과까지도 자기들의 뜻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악인의 확신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인간적인 자신의 최선을 기울여 노
력한다면 하나님보다도 더 강하게 나타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11;48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 만일 그들이 주님을 그대로 두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대로, 그들 자신이 주님께 대항하여 열심히 싸우면 반드시
그리스도의 길을 막고 그의 발전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사기군이었다면, 그들은 그가 양떼를 주의 우리에서 멀리 유인해 가지 못하도록 그를
간섭했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의 기적을 인정할 때에도, 그들은 하나님
의 능력을 경멸하고 전혀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하고 있다.
로마인들이 와서 - 공공의 선(善)을 위하여라는 그럴듯한 가면이 그들의 완악함을
가리고 있었다. 그들의 가장 큰 걱정과 두려움은 그들의 아성이 무너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성전과 하나님께 대한 예배에 대하여, 그리고 국가의 명성과 백성들의
상태에 대하여 걱정하는 척 행동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위하여 왜 하는 것
이었을까? 그들은 이러한 핑계와 구실을 누구를 속일 목적으로 추구한 것이 아니다.
이들은 백성을 향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끼리 마음을 드러내는 중이었
다. 그들은 모두가 자기들 사이에 공통적으로 깔려있는 배신 행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 그들은 왜 자기들의 계획과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않은 것일까? 불경건은
천박하며 분명하기 때문에 거의 언제나 외식 즉 위선이 수반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의
경건치 아니한 상태는 미덕이라는 가면 밑에 간접적인 암시와 회피를 통해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의 주된 목적은 다른 사람들을 기만하기 위해서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일을 처리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핍박할 만한 정
당한 이유를 찾은 것처럼 행동할 때, 그들의 허황된 가면술에 스스로 속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외식하는 자들은 내적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낄지라도 나중에는 그 헛된 상상
에 의하여 스스로 도취되어 죄를 범할 때도 순진한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스
스로 모순에 빠진다. 처음에는 이들이 그리스도께서 기적을 행하셨다고 고백했다. 그
런데 이제 그들은 주님의 표적에 하나님의 능력이 완연히 나타났는데도 그 능력으로는
충분한 안전과 보호가 되지 않을 것처럼 로마인들을 두려워 하고 있다.
복음서 저자는 그들의 심각한 의논의 주요 목적이 그들에게 위협이 되는 위험을 경
계하는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만일 로마인들이 우리의 공공생활에 어떤 변
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들이 군대를 보내어 우리나라를 성전과 하나님
께 대한 예배와 함께 쳐부수러 오지 않겠는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바
른 길에서 떠나기로 결심만하면 피할 수 있는 그런 위험에 대한 방어책에 급급하는 것
은 약한 일이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고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해
야 한다. 우리에게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다 주더라도 주님의 뜻은 확고히 서야 한
다. 우리에게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다 주더라도 주님의 뜻은 확고히 서야 한다. 그
런데 오히려 이 사람들은 주님께서 시작하신 것을 세속하도록 그대로 버려둔다면 후환
이 따를 것이니 그리스도를 제거할 각오를 세운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
람이라면 어데게 될까? 로마인들과 화평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선지자를 배척해야만 하
는가? 이러한 생각 들은 참으로 진지하게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들의 착상인
것이다. 이들은 옳고 합당한 것에는 무관심하다. 그들은 다만 결과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신령하고 거룩하게 고려해보는 유일한 길은 이것이다. 우리는 먼저 하
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를 구해야 한다.그리고 나서우리는 주님께서 명령한
것을 담대히 따라야 할 것이며, 우리가 수천 번 죽음 앞에 직면한다 하더라도 두려움
으로 낙담해서는 안되겠다. 우리의 행동은 언제나 돌풍에 의하여 좌우될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방향을 잡아야 할 것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아니 적어
도 위험에 대한 공포를 딛고 일어나서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결국 성공하게
마련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말씀에 기초를 둔 꾸준한 행동을 축복하시기 때문이
다. 반면에 믿지 않는 자들은 그들이 신중함으로 유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소심하면
소심할수록 더 많은 올무에 걸려들게 되는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는 우리 시대의 양상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다. 신중하고 항상 주위
환경에 세심하게 마음을 쓰는 사람으로 간주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공중의 안녕질서
에 대하여 염려한다는 노래를 부르고 다니면서 우리가 시도하고 있는 개혁에는 많은
위험이 따를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대하여 불공평한 비난과 예고를 한 후
에, 소요를 진정시키는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매장시키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을 발전
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들은 마치 구원의 복음을 말살시킬 수 있는 처방만을 찾아낼
수 있다면 이와같이 경건치 못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멸시하는 것이 성공을 거
두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오히려 경건치 못한 자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이루어지고
말것이다. 비록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는다해도, 그것은 하나님을 거스림으로써 세상
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극히 가치없는 보상이 될 것이다.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 성전인지 그들의 영토
를 말함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들은 자기들의 구원이 성전과 땅 이 두 가지에 좌우된
다고 생각했다. 만일 성전이 파괴된다면 제사와 하나님께 대한 공적인 예배 그리고 하
나님의 성호를 부르는 것이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관심의 표현
으로 그들은 성전에 대하여 염려치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다시 이방에 끌려가지
않는 것은 교회유지를 위해서 그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들은 아직도 하나님
의 극심한 진노와 따라 바빌론에 끌려가 포로생활을 해야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들의 땅에서 내어 쫓으신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
는 것이라는 공통된 격언을 그들은 율법 책에서 종종 읽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를 멸하지 않고서는 교회가 안전할 수 없다고 그들은 결론을 내렸다.


11:49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 그들의 논의는 잠게 끝났다. 가야
바가 그들이 오랫동안 주저하고 지체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안전을
확보하는 유일한 길로 죄없는 한사람을 죽이는 것을 제안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
한 아무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육신의 판단을 따라서 계획할 때, 그리
고 모든 선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허락치 않는 것이 그들에게 선이 된다고 확신할
때 사람들은 얼마나 심한 죄악으로 뛰어들게 하는가! 가야바는 마치 그들이 잘되고 번
성하려면 하나님의 진노를 자극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용한 것과 합당한 것을 절대로 구분하지 않도록 하자. 하나님의 축
복을 떠나서는 선이나 기쁘게 할 것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
복은 경건치 않은 자들과 반항하는 자들 즉 마귀의 도움을 청하는 자들에게 약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되게 주님의 길로 행하는 믿는 자에게 약속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논리는 그럴듯한 데가 있다. 왜냐하면 공공의 유익이 먼저 강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말한 대로, 우리가 사람의 목을 찌르고 참으로 그의 배
를 찌를 때 그의 전신이 보전되었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의 민족이 죄없는 선인
의 부당한 죽음에 의해서 보전될 수는 없는 것이다.


11:50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 요한은 그의 직책이 연례적인 것이기 때문에 가야바를
그 해의 대제사장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제사장직은 돈을 주고 살수 있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에 반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전승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께서는 이 제사장직은 그 제사장이 죽음으로써 다음 제사장에게 계승될 수 있는 것이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사태가 불안하고 혼란할 때 로마인들은 마음대로 제사장을
바꾸었다.
복음서 저자가 "가야바가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라"고 했을 때, 그는 가야바가
미친 사람이나 광신자처럼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을 말했다고 한것이 아니다. 가야바
는 자기의 의견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 저자는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이 그의
혀를 자극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가야바의 마음에 떠오른 것보다도
더 높은 차원의 말씀을 그의 입을 통하여 증거하려고 의도하셨기 때문이다. 가야바는
이 당시에 말하자면 두가지의 말을 하는 자였다. 그는 자기의 마음에 품고 있었던 간
계대로 그리스도를 죽이는 잔인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혀를 다
른 목적으로 돌리심으로 모호한 표현을 통하여 동시에 예언을 선포하도록 하셨다. 하
나님께서는 하늘에 속한 말씀이 대제사장의 자리로부터 흘러나가도록 하심으로 유대인
들이 핑계할 수 없도록 하셨다. 비록 전 회중에 아무도 그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았
지만 후에 그들은 그들의 무감각이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
고 가야바의 완악함이 그의 혀가 성령의 도구가 되는 것을 막을 수도 없었다. 하나님
께서는 자신이 세운 제사장 직분을 이 사람의 인격보다 더 귀하게 여기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본인이 앞에서 암시한 이유이다. 높은 지위에서 한 발언은 더 분
명히 경청되고 더 큰 비중과 권위를 지닌다는 것이다. 마찬가지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는 발람에게 예언의 영을 주셔서 그의 입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축복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가톨릭 교도들이 이 말씀을 근거로 로마 교황이 선포하는 것은 무엇이나 하
나님이 말씀을 대언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유추하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억측이
다. 첫째로 대제사장은 언제나 선지자라고 가정한다 하더라도(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가톨릭 교도들은 로마 교황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창설되었음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제사장직은 한 사람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없어졌으며, 하나님께서 그 후에 한
사람으로 온 교회를 지배하게 하셨다는 말씀을 우리는 성경 어느 곳에서도 읽을 수 없
기 때문이다. 둘째로 대제사장의 권한과 영예가 로마의 교황에게로 이전되었다고 가정
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제사장들이 가야바의 예언을 받아들임으로 그들에게 무슨 유익
을 가져다 주었는지를 알아보지 않으면 안된다. 가야바의 판단에 공감한 그들은 이제
그리스도를 죽음에 넘기울 것을 공모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을 부인하는 무서운
배도(背道)로 몰고가는 그런 종류의 순종은 멀리해야 할 것이다. 한 목소리로 가야바
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동시에 예언도 했다. 그의 선언을 따르는 자들은 예
언을 멸시하고 하나님 훼방하는 것을 택한다. 우리는 로마의 가야바의 음성을 듣지 않
도록 똑같이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겠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비교에는 결함이 있
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묻고 싶다. 대제사장의 입에서 한번 예언의 말이 나왔
다고 해서 그의 말을 항상 예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는 곧 이어서 우리의 믿음의
대주재가 되시고 가장 큰 대제사장이신 분을 참람되게 정죄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서 저자가 여기에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 특별한 것임을 인정하며 이것을 하나의
본보기로 취급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확언한다.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 첫째로 복음서 저자는 우리의 구원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의 우리 안으로 불러주시는 데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주님께서 우리
를 생명의 원천이 되시는 아버지와 화목케 하는 것은 그에 의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로부터 인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들의 머리되신 그리스도 안에 모여 하나
가 되기까지는 하나님으로 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통은 영생을 위한 준비이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모으지 않는 자들은 사망에
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17장에서 다시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서 1장 10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통일되게 하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의해서 온 구원을 즐
기기 위해서 우리는 역시 그들과 불화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하나님과 천사들과 우리
들 사이에서 하나가 되어야겠다. 이 통일과 단합의 원인과 보증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다. 주님께서는 그의 죽음으로 모든 만물을 자기에게 통일되게 하시고 우리는 매일같
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우리 안으로 모여들게 되는 것이다.


11;51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 요한은 그의 직책이 연례적인 것이기 때문에 가야바를
그 해의 대제사장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제사장직은 돈을 주고 살수 있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에 반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전승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께서는 이 제사장직은 그 제사장이 죽음으로써 다음 제사장에게 계승될 수 있는 것이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사태가 불안하고 혼란할 때 로마인들은 마음대로 제사장을
바꾸었다.
복음서 저자가 "가야바가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라"고 했을 때, 그는 가야바가
미친 사람이나 광신자처럼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을 말했다고 한것이 아니다. 가야바
는 자기의 의견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 저자는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이 그의
혀를 자극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가야바의 마음에 떠오른 것보다도
더 높은 차원의 말씀을 그의 입을 통하여 증거하려고 의도하셨기 때문이다. 가야바는
이 당시에 말하자면 두가지의 말을 하는 자였다. 그는 자기의 마음에 품고 있었던 간
계대로 그리스도를 죽이는 잔인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혀를 다
른 목적으로 돌리심으로 모호한 표현을 통하여 동시에 예언을 선포하도록 하셨다. 하
나님께서는 하늘에 속한 말씀이 대제사장의 자리로부터 흘러나가도록 하심으로 유대인
들이 핑계할 수 없도록 하셨다. 비록 전 회중에 아무도 그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았
지만 후에 그들은 그들의 무감각이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
고 가야바의 완악함이 그의 혀가 성령의 도구가 되는 것을 막을 수도 없었다. 하나님
께서는 자신이 세운 제사장 직분을 이 사람의 인격보다 더 귀하게 여기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본인이 앞에서 암시한 이유이다. 높은 지위에서 한 발언은 더 분
명히 경청되고 더 큰 비중과 권위를 지닌다는 것이다. 마찬가지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는 발람에게 예언의 영을 주셔서 그의 입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축복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가톨릭 교도들이 이 말씀을 근거로 로마 교황이 선포하는 것은 무엇이나 하
나님이 말씀을 대언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유추하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억측이
다. 첫째로 대제사장은 언제나 선지자라고 가정한다 하더라도(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가톨릭 교도들은 로마 교황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창설되었음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제사장직은 한 사람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없어졌으며, 하나님께서 그 후에 한
사람으로 온 교회를 지배하게 하셨다는 말씀을 우리는 성경 어느 곳에서도 읽을 수 없
기 때문이다. 둘째로 대제사장의 권한과 영예가 로마의 교황에게로 이전되었다고 가정
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제사장들이 가야바의 예언을 받아들임으로 그들에게 무슨 유익
을 가져다 주었는지를 알아보지 않으면 안된다. 가야바의 판단에 공감한 그들은 이제
그리스도를 죽음에 넘기울 것을 공모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을 부인하는 무서운
배도(背道)로 몰고가는 그런 종류의 순종은 멀리해야 할 것이다. 한 목소리로 가야바
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동시에 예언도 했다. 그의 선언을 따르는 자들은 예
언을 멸시하고 하나님 훼방하는 것을 택한다. 우리는 로마의 가야바의 음성을 듣지 않
도록 똑같이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겠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비교에는 결함이 있
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묻고 싶다. 대제사장의 입에서 한번 예언의 말이 나왔
다고 해서 그의 말을 항상 예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는 곧 이어서 우리의 믿음의
대주재가 되시고 가장 큰 대제사장이신 분을 참람되게 정죄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서 저자가 여기에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 특별한 것임을 인정하며 이것을 하나의
본보기로 취급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확언한다.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 첫째로 복음서 저자는 우리의 구원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의 우리 안으로 불러주시는 데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주님께서 우리
를 생명의 원천이 되시는 아버지와 화목케 하는 것은 그에 의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로부터 인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들의 머리되신 그리스도 안에 모여 하나
가 되기까지는 하나님으로 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통은 영생을 위한 준비이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모으지 않는 자들은 사망에
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17장에서 다시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서 1장 10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통일되게 하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의해서 온 구원을 즐
기기 위해서 우리는 역시 그들과 불화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하나님과 천사들과 우리
들 사이에서 하나가 되어야겠다. 이 통일과 단합의 원인과 보증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다. 주님께서는 그의 죽음으로 모든 만물을 자기에게 통일되게 하시고 우리는 매일같
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우리 안으로 모여들게 되는 것이다.


11:52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셴라 - 복음서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이룩해 주신 화해는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미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멀리 비참하
게 흩어져 방황하던 하나님의 원수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울 수 있는가?
이미 앞서 말한 대로, 나는 하나님의 심중에 방황하고 잃어진 양이 있었다. 아니 전혀
양이 아닌 이리와 맹수가 있었다고 대답한다. 그러므로 부름을 받기도 전에 하나님의
자녀라고 간주되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드디어 자신과 타인에게 하나님의 자녀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11:53
이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 복음서 저자는 원수들이 분노
중에 그를 찾으리라는 것을 알면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피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아버지의 맡기신 직분을 피하기 위해서도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겠다. 주님의 유일한 의도는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에 자발적인 죽음을 죽기 위해서 자신을 바치는 것이었다. 복음서 저자가 언급하고 있는 모의는 그리스도를 죽이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리스도를 추락시키는 방법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를 제거하기로 작정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그들의 결의를 어떻게 실행에 옮기느냐 하는 것이었다.

11:54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 우리가 여기서 읽는 동네 이름에 관해서는, 나는 그것이 잘못 발음되었거나 아니면 아주 새로운 동네 이름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바빌론 포로 이후에 언어가 얼마나 많이 바뀌었으며 또 그 나라가 얼마나 다르게 보였을 것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옛날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지명이 언급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들은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늘 같은 집에 생활하던 주님의 제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11:55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가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케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 유월절 제사를 드리기 전에 스스로를 성결케 해야 한다는 특별한 명령은 없었다. 그래서 복음서 저자는 전부를 말하지 않고 많은 사람이 왔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부정한 자는 아무도 그것을 먹도록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 성결과정이 자발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행해졌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명절 전에 성결예식에 의하여 준비되지 않았는데도 유월절에 먹는 것이 허락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복음서 저자의 목적은 그리스도가 유대 전역에 얼마나 잘 알려져 있었는가를 보여주자는 데 있었다. 성전에 모여든 사람들은 어느 곳에서 왔든지 주로 그리스도를 찾고 그에 대하여 자기들끼리 논쟁을 벌이자는 데 관심이 있었다. 그들이 인간적으로 주님을 찾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찾음으로써 그리스도가 공개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은 대제사장의 횡포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