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요한복음 0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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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 여기 이른 바 "유대인의 명절" 이란 말은 어느 명절을 가리킨 것인가? 사건의 순서를 따져 본다면,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지나서 유대를 떠나셨고, 도중에 사마리아에서 전도를 하시던 때는 추수하기 4개월 전(?)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때는 오순절인 듯하다(Calvin). 오순절은, 유월절 둘째날 부터 7주를 계수하여 제 50일을 말함이다(신 16:9-12). 칼빈(Calvin)은 그렇게 보았어도, 많은 정통 학자들은 이 절기를 유월절이라고 해석하여, 2:13 과 6:4과의 사이에 유월절 하나를 더 둔다. 그리하여야 예수님의 공생애(公生涯)가 3년이 넉넉하다. 예수님께서 이런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목적은, 그런 절기에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이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기 원하셨다.

=====5: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 여기 "양문"을 영국 왕역(A.V.)은 "양의 시장"(Sheep market)이라고 하였으나, "양문"이란 번역이 채택된다. 느 3:32, 12:39에도 양문이란 성문이 있다. "행각"은 현관식으로 지은 시설을 가리킨다.

====5:3,4
그 안에 많은 병자,소경,절뚝발이,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 유력한 사본들(* , B, C, D)에는 3절 끝의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란 문구부터 4절까지의 말씀이 없고, 이것이, 보다 열등(劣等)한 사본들(A,C )에 나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것이 논쟁건이 되어 있다. (1) 어떤 학자들은 이 괄호 안의 말이 사도적 원본은 아닐 것이라고 한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참으로 이것의 사본상 권위는 무겁지 않다"고 하였고(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 1950,PP.342-343), 고데이(Godet)는, "이것이 일반 민중의 전설이었는데, 후에 어떤 사본에 기입되므로 이렇게 전승되었다"고 하였고, 헨드릭센(Hendriksen)은 말하기를, "이 문구에 대한 사본 증거가 무겁지 못한 사실을 보아서, 그곳에 물의 동함이 초자연적 능력으로 되었다는 것이 저자 요한의 소신(所信)도 아니었을 것이고, 성령님의 교훈도 아니었을 것이고, 아마도 그 병자의 신념이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W.Hendriksen, New Testament Commentary, The Gospel of John, P.191). (1) 옛날 터툴리안(Tertullian, 145-220 A.D.)이, 이 부분 말씀을 사용한 실례가 있다(On Baptism V). 칼빈(Calvin)은, 이 부분의 사본 문제를 전연 취급하지 않고, 이것을 사도적 원본으로 그저 받아 들인 태도로 말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으니, 곧, "물이 동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물질을 자유로이 사용하신다는 증표이다. 그 뿐 아니라, 그 것은, 그 때에 병자들의 치료된 원인이 오로지 직접적으로 하나님에게 있음을 알려주는 증표이기도 하다"라고 하였다(Calvin's Commentaries, John's Gospel I,1847, P.189).

=====5:5
거기 삼십 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 "삼십 팔 년"이란 연수는 어떤 상징적 의미를 가짐이 아니다. 어떤 학자는,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38년 동안 광야에서 유리하며 고생한 사실(신 2:14)을 연상하면서, 고난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왜 40년이란 연수를 채용하지 않았으랴? 성경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이 40년 동안이라고 더욱 많이 말한다. 여기 38년이란 연수는, 그 병자가 실제로 앓고 있었던 기간일 것이다. 그 연수는, 그 때 예수님의 연령보다 많으니 그 치료가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 암시된다(A.Marack).

=====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정지를 한 번 보시고 정확히 아신다. 그는 그 병자가 절망 상태에 빠진 것도 아셨다. 그러나 그는 절망 한 자에게 살 길을 주신다. 곧, (1) 그의 마음 속에 소망을 일으키시며, (2) 고쳐 주시기를 약속하시는 의미에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그 물으심은 그 병자에게 믿음을 일으킬 만한 적당한 말씀이었다. 믿음은, 소망과 약속에서 생긴다. 주님께서는, 긍휼에 의하여 병자를 고쳐 주시고 그 병자 자신의 심리 상태의 어떠함을 알아보시지 않은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종종 사람의 몸보다도 심령을 살리기 위하여, 죽은 심령에 생기를 주시려고 힘쓰신다. 그러므로 그는, 절망한 자에게 소망을 일으키시며, 거기에 믿음을 건설하시려고 하신다.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그곳에 병자들이 많았는데 하필 그 38년 앓던 병자 한 사람만 고쳐 주셨을까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그렇게 되었다(눅 4:25-27).그리스도의 구원 실시가 하나님의 주권대로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와 같은 구원을 받는 사람들은 항상 감사할 처지에 있다. 그 이유는,그들은 유달리 저런 놀라운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 가나이다 - 이 말씀을 보면, 그때 예루살렘의 인심이 무정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디나 언제나 인심은 이렇게 무정하다. 가장 불쌍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내버림이 되는 일들이 너무 많다. 그들은 세상이 모르게 죽을 지경의 고생을 당하다가 남 모르게 죽는다.

=====5:8,9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 가라 하시니 - 예수님께서 이 명령을 내리심이, 동시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 능력이 되었다. 주님의 명령하시는 말씀은 동시에 능력이 되는 법이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 "곧 나아서"란 말은 예수님의 말씀의 비상 능력을 보여 준다. 주님의 병 고치시는 능력의 역사(役事)는 저렇게 완전하여 그 병자를 즉각적으로, 또는 완전히 고쳐 주셨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그것이 그렇게 된 것은 예수님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하며, 또한 그의 전도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님께서 병 고치신 날은 안식일이었다.

=====5: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 안식일에 짐을 지는 것은 성경에 금지되었다(느 13:19; 렘 17:21-22). 그러나 그 말씀은 영업과 관계된 운반을 금지시킨 것이고, 부득이한 휴대품을 운반하는 것까지 금지시킨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 때에 바리새인들은, 머리털을 쪼개 듯이 번쇄하게 사람들의 행동을 정죄하는 일에 율법을 오용하였다.

=====5: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 가라 하더라 한대 - 이것은, 그가 예수님께 책임을 돌리고 자기는 발뺌을 하려고 말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의 권위를 승복하고 그에게 의지하는 생각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난치병에서 건져 주신 이의 말을, 그로서는 복종할 만하였다. 9:11; 행3:9-10 참조.

=====5:12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 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 그 때 유대인들이 강퍅하였던 것이 여기 드러난다. 그들은, 그 불쌍한 병자의 고침 받은 반가운 사실을 묵살시키고,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게 한 사실만을 추궁한다. (1) 그들은 죽을 사람을 살린 긍휼보다, 사람들의 헛된 유전을 중대시 하였으며(마 15:2, 9), (2)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사람을 헛되이 정죄하여 죽이는 것을 유쾌하게 여겼던 것이다.

=====5:13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 예수님이 그 병자를 고치신 뒤에, 많은 병자들이 고침 받기를 원하여 그에게로 모여들 우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 자리를 피하셨다. 그는 병 고쳐 주심보다 복음 전하기를 원하신 것이다. 사람들이 병 고침 받고 믿는 것보다 말씀을 듣고 믿는 것을, 그는 더욱 원하신 것이다.

=====5:14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 이 귀절에 대하여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1) 그 고침 받은 자의 병들었던 원인이 그의 어떤 특별한 범죄에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죄를 다시 범치 말라는 뜻이라고 한다(Luther). 이 해석에는 난제가 있으니, 그것은, 성경말씀이 한편, 어떤 질병의 원인을 특수한 죄악에 돌리지 않은 사실이다(요 9:1-3). 그러나 성경은 다른 한편, 어떤 질병의 원인이 사람의 특수한 죄악이라고 하므로(민 16:46), 우리는 이 해석을 옳게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보다는 다음 해석을 더욱 적합하다고 본다. (2) 여기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의 헬라 원어(* )는, "이 이상 더 범죄를 계속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필 그의 38년 전의 범죄(처음에 그가 병든 원인)를 염두에 두신 것이 아니고, 38년 동안 병 중에서도 계속 범죄 하던 것을 염두에 두신 것이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것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지 않는 그의 죄악을 가리킨다고한다(Maar de man leefde nu in zonde, had zich niet aan den Heiland gegeben.-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P.352). 그렇다면, 여기 "더 심한 것"은 영적 형벌을 가리켰을 것이다. 마 12:43-45 참조. 위의 예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중대한 뜻을 보여준다. (1) 예수님께서 친히 38년 된 병자의 과거의 죄악들을 모두 다 용서하여 주신 사실, (2)그가 그 고침 받은 자의 성화(聖化)를 요구하신다는 사실, (3)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성화를 힘쓰지 않는자는, 더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히 2:2-3). 그러므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의미심장하다. 그 고침 받은 자는 그 말씀에서 살아야 되며, 그 한 마디 말씀이 늘 그의 심령에 살아 있어야 된다. 루터(Luther)는 말하기를,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은,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것을 권장한다. 곧, 사람이 마땅히 그리스도의 충족성을 믿어야 된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dass man an die Genugtuung Christi glauben soll.-Evangeliem Auslegung, 4,P.206).

=====5:15,16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 그 병 고침 받은 자가 저렇게 보고한 것은 예수님을 배반하는 의미가 아니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공적으로 핍박하기는 여기 이 사건에서부터이다(Bernard). "핍박하게 된지라." 이 말은 헬라원어로 미완료 시상(未完了時相)에 속하는 동사(* )인데, 핍박하기를 계속한다는 뜻이다. 이 사건에서도 예수님은, 남들을 대신하셔서 항상 고난을 받으신 분으로 드러난다. 그는 병자를 고쳐 주셨고, 그 자신은 그 일 때문에 고난을 받으신다.

=====5: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 하나님 아버지께서 천지 만물 창조를 마치시고 안식하셨다는 것은(창 2:2-3), 결코 하나님의 무활동을 의미하지 않고, 그의 창조 역사에서 쉬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대로 그가 계속하여 만물유지와 구원과 심판의 역사를 하신다. 그와 같이, 예수님도 구원과 심판의 역사를 하신다는 것이, 5:17,19-30에 나타난 변론이다. 그가 이와같은 일을 하신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등되신 증표이다. 예수님의 이 변론(5:17)을 들은 유대인들 자신도 그의 변론을 가리켜, 그가 하나님과 동등이란 의미의 변론이라고 하였다(18절). 예수님의 하신 일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이신 그로서 안식일에 오히려 하실 만한 것이었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안식에 속하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안식은 사람의 활동 능력을 정지시킴이 아니고, 보다 참된 일로 돌림이다"라고 하였다(Asleep in Jesus, P.55).

=====5: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 "이를 인하여" 란 말은, 위의 17절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유로 함을 가리킨다. 곧,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신것과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므로 자기도 일하신다는(하나님과 자기는 동등이라는 의미) 말씀을 이유로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은혜로운 계시(啓示)를 보여 주신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것 때문에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가장 요긴한 점을 반대한 셈이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 것은, 특수한 의미에서 아들이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만이 저런 특수한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내 아버지" 라고 하셨고, "우리 아버지" 라고는 하지 않으셨다(Zahn). 그런데, 예수님의 신자격(神子格) 을 다른 뜻으로 오해한 학설들이 있다. (1) 성령적 신자설(聖靈的神子設). 이 학설이 성립된다면, "하나님 아들" 이라는 이름은,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아들이라기보다도 순 인간으로서 성령과 함께 한다는 의미의 하나님 아들일 것이다. 곧, 뤼트겔트(Lutgert)의 이론에 의하면, 요한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하늘의 일들을 문견(聞見)하신다는 어귀들에 하나님 아들이란 칭호가 많이 나오는데, 이 천적(天的) 문견은 현세에 있어서 성령을 통하여 되는 일일 것이라고 하며, 이렇게 성령을 충만히 받으신 의미에서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학설의 관계 장절들을 연구하면,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신고로 하나님 아들이 되셨다는 것이 아니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성령을 받으셨다는 것이다(요 1:33-34). 그 뿐 아니라, 하늘 일에 대한 문견이, 그의 현세적 경험에 국한한 것이 아니고 그의 화육(化肉) 이전의 것도 있다. 예를 들면, 3:32의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이가 없도다"란 어귀의 그 문견에 관한 동사는 완료 시상이다. 그것은 그의 화육 이전의 경험을 말함이다. 그 이유는, 그 윗절에 있는 그의 화육 사실은 "위로부터 오시는 이"라고 하는 현재 사상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2) 종교 윤리적 신자설(宗敎倫理的神子設). 하르낙(Harnack)은 이 학설의 대표자이다. 그는 말하기를, 요한 복음에 있어서 예수님은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역사적 신자설을 지지할 수 있을까? 독생자란 말(* )은, 예수님의 화육(化肉) 사실을 의미한 것이라기보다 차라리 영원 자존의 신자격을 가리킨다. 3:16, 18; 요일 4:9 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독생자 되도록 보내신 것이 아니고, 독생자를(화육 전에도 이미 독생자였음) 보내셨다고 한 까닭이다. 독생자가 독생자 되심은, 역사상의 어떤 사건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고 우리로서 측량하기 어려운 영원(永遠)에 속한 일이다.

=====5:19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 여기 이른 바 "본다"는 말은 현재사로서 부자 일체(父子一體)에서 보는 것을 말함이니, 불현계(不現界)에서 되는 일이다. 그것은 시간적 선후(先後)를 가져오는 모방적 행위를 말함이 아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시는 아들의 종속적 의지 행위(從屬的意志行爲)를 말함이다. 그 행사는 부자(父子)의 중복(重複) 행위를 말함이 아니고, 부자의 일체적(一體的) 행위를 가리킨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의 일이 실행됨을 말함이다.

=====5: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 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 여기 "사랑하사"란 말은, 헬라 원어로 필레오 - (* )니,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 본질적 관계에 나타난 사랑을 가리킨다(Bauer). "보이시고"란 말은 계시한다는 말인데, 그것이 미래사로 된 것은 그 보이는 행위가 현재 뿐 아니라, 언제나 그렇게 계속함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역(中保役)을 통하여 계시하시며 행하신다(마 3:17, 11:27). "그보다 더 큰 일" 이란 말을 헬라 원어에서 직역하면, "이 일들보다 더 큰 일"이란 뜻이니,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가리킨다. 그것은 죽은 자들을 부활시키실 큰 일을 가리킨다.

=====5: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 헬라 원문에는 이 귀절 초두에 "왜 그런고 하면"이란 말(* )이 있다. 그러므로 이 귀절은 앞절의 "더 큰 일"이란 말을 설명하는 것임이 확실하다. "일으키심"이란 말은 영적, 또는 육체적 부활을 겸하여 가리킨다(Grosheide). "같이"란 말의 헬라 원어(* )가 여기서는 일체 동행(一體同行)의 뜻을 가졌고, 시간을 서로 달리하는 중복된 행위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통하여 이루시는 일을 가리킨다.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한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원하시는 대로 살릴 자를 살리신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그의 심판 권위에 대하여 말씀한 것인데, 다음 귀절들(22,23)이 이사실을 자세히 해설한다. 즈안(Zahn)은, 이 귀절 말씀이 단지 대종말에 나타날 몸의 부활을 가리킨다고 하지만, "죽은 자"(* )란 말, "일으켜"(* )란 말, "살리심"(* )이란 말들이 현재 영적 관계로 사용될 수도 있다. 그 뿐 아니라, 여기 "일으켜(* )란 동사(動詞)와, "살리심" 이란 동사(* )가 모두 현재사니 만큼, 이 귀절 말씀을 대종말에 나타날 부활에 국한하여 생각할 수 없다. 스밀데(E.Smilde)는 말하기를, "21절의 말씀은 살리는 운동의 일반적 관설이고, 24-25절은, 현재 신약 시대에 신자들이 내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영적 생명을 가리키고, 26절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생명이 있음을 말하는 신학적 진술이고, 29절은, 그리스도 재림 때에 신자들이 받을 몸의 부활을 가리킨다"고 하였다(Leven in de Johanneische Geschriften, P.37).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 이 귀절은 헬라 원어에서 "왜 그런고 하면"(* )이란 이유 접속사로 시작한다. 그것은 이 귀절이 윗귀절의 설명 문구인 사실을 보여 준다. "심판"이란 말은,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람은 살리시고 어떤 사람은 그 본래 정죄된대로 두시는 그의 행위를 가리킨다.

=====5: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 곧, 아버지를 공경하는 일은 그 아들을 공경하는 데서 실현된다는 뜻이다. 이 뜻은 하반절에 밝히 나타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중보자 되신 처지를 가리킨다. 24-29. 이 귀절들은, (1) 그리스도께서 현세에 그 복음에 의하여 사람들을 영적(靈的)으로 중생하게 하심과(24-25), (2)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께서 생명 주시는 원리와(26-27), (3) 내세(來世)에 신자들에게 육체의 부활을 주실 것을 가리킨다(28-29).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내 말을 듣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순종함을 의미하는 것이고, 단지 귀로만 듣는 것을 말함이 아니다. 그리고 여기 "내 말을 듣고 ... 영생을 얻는다"는 어귀는, 말씀이 생명력(生命力)을 마술적으로 전달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부셋트(Boussett)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말씀의 작용을 마술적인 것으로 간취하고, 그것을 헬라의 비지적 오묘(秘智的奧妙)란 것 (Geheimnisvolles mysterien wort)과 동일하게 보았으니(Kyrios Christos, 1926, S.170) 잘못이다. 여기 "듣는다"함은, 헬라 신비주의의 범신론 사상(汎神論思想)이 가르친 마술적인 생명 전달이 아니다. 그 들음은, "나 보내신 이"를 믿는데 이르게 하는 지석 요소를 가진 동시에, 신자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결과로 가져온다. 이것은, 지식성과 인격성이 제외된 마술적 작용과는 청양지차로 다르다.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곧, 신자가 현세에서부터 벌써 영생을 소유했다는 뜻이다. 이런 사상은, 성경 다른 부분에서도 가르친다(눅 17:21; 고후 5:17; 골 3:3; 벧전 1:23). 스밀데(E.Smilde)는, 이 점에 있어서 요한의 사상이 바울의 칭의론(稱義論)과 원리상으로 같다고 하였다. 곧, 신자가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는 말씀은, 벌써 옳다 함이 되도록 현세에서부터 심판 보장의 칭의를 받았다는 의미이다(Leven in de Johanneische Geschriften, P.44).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 "듣는 자는 살아 나리라." 이 말은 현세에서 복음을 듣는 자들이 영적으로 중생하게 될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즈안(Zahn)은, 이 귀절 말씀이 주님의 재림 때에 신자들의 육체가 부활할 것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그 때에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곧 이 때라"고 하신 말씀(25절 하반)은 현재 신약 시대를 가리킨 것이 분명하다. 불트만(Bultmann)은, 이 귀절의 사상이 노시스 신화인 만데안(Mandean) 문헌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Johannes Evangelium, P.194).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오데벌키(Odeberg)가 수집한 만데안(Mandean) 문집에서 몇 개의 문구들을 실제로 보여 준다. (1) "생명의 음성이 부르짖는다. 깨어 있는 귀는 듣는다. 어떤 자들은 듣고 살아나고 어떤 자들은 계속하여 잔다"(Ginza Left 596,9)라고 한 말, (2) "생명의 소리를 듣고 그것을 믿고 그것의 교훈을 받아 죽음을 미워하고 생명을 얻는다"(Ginza Righe 12)라고 한 말, (3) "혈육으로 된 자들의 영들이 생명의 소리를 듣고 믿으면 생명의 집에서 존전에 거하게 되리라"(Ginza Right 12)고 한 말이다. 그러나 여기 소개된 바 만데안(Mandean)문헌의 내용은, 사도 요한의 사상과 아주 다르다. (1) 만데안(Mandean) 문헌에서는, 사람의 영혼에게 외치는 자가 역사적 인물이 아니고 가상적인 우주적 실존이라고 한 반면에, 사도 요한은, 인간성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강조한다. 사도 요한은, 인간성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강조한다. 사도 요한이 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역사적 인물이다(1:14, 2:1,12, 4:6, 5:27, 7:1, 8:59). (2) 만데안(Mandean)문헌에서는 성령을 가리켜 흑암의 신(神)이라 하였고, 예수님을 가리켜 거짓 메시야라고 하였으니(C.H. Dodd,The Fourth Gospel 1953, P.119). 어떻게 사도 요한이 이런 괴이한 문헌 중에 어떤 부분이 그리스도 이전 것으로 생각되나, 거기 포함된 사상은 파사의 이원론과 관련되어 있다. 이런 사상은 성경을 위반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이 그런 사상을 섭취하지 않았을 것은 명백하다. (4) 만데안(Mandean) 문헌이 말하는 구원론은 영혼이 세상을 떠남이라고 하나, 사도 요한의 구원론은 신자들의 부활을 구원의 완성으로 본다. 이렇게 이 둘은 서로 다르다.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 여기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란 말은 아들에게는 없던 생명을 주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 "주어"란 것은 시간적 사건이 아니다. 이것은 다만 영원한 시간을 말함이니, 아버지께서 아들을 중보자로 세워 택한 백성에게 생명 주는 역사(役事)를 하게 하신 것을 가리킨다, 여기 이른 바, 아버지와 아들의 소유하신 "생명"은 그들만이 독점하신 절대적 생명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류를 구원하시는 생명 운동의 근원이다(요 1:4).

=====5:27
또 인자 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은 몇 가지 있다. (1) 그리스도께서 인자(곧, 사람)의 형상을 입도록 낮아지셨으니 만큼,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장으로 높이셨다는 것(빌 2:7-10). (2) 칼빈(Calvin)은 이 말씀을 윗절에 연락시켜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곧,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인자(곧, 인성)되신 방면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계시하시어 믿는 자들에게 주신다는 뜻이라고 한다.(3) 구속 사업 전체를 인성(人性) 소유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실행하시는 것인 만큼, 구속의 일부분되는 심판도 그가 하신다는것(Meyer). (4) 심판은 하나님 아버지께 경배를 드리는 의미의 행위인 것인 만큼, 사람들 측에서 할 일이며 그것을 실행할 이는 이상적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 해야 된다는 것(Godet). (5)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시니 만큼 누구를 정죄하시지 않는다. 다만 인간들이 구주를 배척하므로 자정죄(自定罪)하는 것 뿐이다. 그들이 인간성으로 오신 성자(聖子)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넘어진다. 곧, 그들은, 성자 예수님께서 인간의 형태로 나타나신 사실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걸려 넘어진다. 그러나 그의 인간성은 그의 사랑을 구체화 한 것이었다. 그것에 걸려 넘어지는 것은, 실상 그것에게서 심판을 받음과 같다. 곧, 그것은 그들의 자정죄이다. (Beyschlag, Neutest, Theol. 1,P.290). (6) 헨드릭센(Hendriksen)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이 귀절의 '인자'(* )란 말이 관사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이 다만 인간 성품을 의미하고 메시야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하나,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관사의 유무를 가지고 지나치게 일정한 구분을 할 필요는 없다. 어떤 때에는 직명(職名)이 관사를 가지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인자'란 말이 보통으로는 메시야의 직명인데, 하필 여기 와서 인간 성품만을 의미하였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그러므로 이 귀절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시기 때문에 심판의 권세를 받으셨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7)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여기'인자'란 말은 인간성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이 부분에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세우시고(26절), 또 다시 그의 인간성을 내세우신다(27절). 이렇게 그는 신성과 인성을 가지시어 심판의 권세를 받을 자격을 가지셨다. 그가 인간성을 가지신 자격으로써도 심판하실 수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인간성에게 그런 권세를
(12:31, 16:11). 이 심판은 예수님이 그 인간성으로 죽으심에 의하여 성립시키셨다고 하였다(Das Hauptstuck des Gerichts ist das Gericht am Satan, 12:31, 16:11, und dieses bewirkt Jesus durch seinen Tod.- Der Evangelist Johannes, P.151). 위의 여덟가지 해석 중 우리는 첫째 해석을 택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섯째 해석을 취하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5: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 이것은 별세하였던 신자들이,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몸으로 부활할 것을 가리킨다.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 "선한 일"이란 말은 예수님을 믿으므로 나타낸 선한 열매를 가리키고, 일반 도의적 선을 말함이 아니다(3:19-21). 여기 "선한 일을 행한"이란 말의 "행한"이란 자는 헬라 원어로 포이에-산테스(* )니, 반드시 상습적으로 완전히 행함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러나 "악한 일을 행한"이란 어귀에 있어서 "행한"의 헬라어 원형은 프라쏘(* )이니, 상습적으로 행한것, 혹은 일생의 행습(行習)을 말함이다. 악을 행하기는 이렇게 쉽고 상습적이다. 이 귀절이 말한 두 가지 부활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될 것이다. 이런 두 가지 부활에 대하여 성경은 종종 말하였다(행24:15; 고후5:10; 계20:12, 13; 단12:2). 이 말씀은, 명백하게도 세계 종말에 있을 대심판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불트만(Bultmann)은, 이 부분 말씀을 본래의 원본으로 생각지 않고 후대인의 삽입구라고 한다(Johannes Evangelium, pp. 196-197). 그러나 불트만(Bultmann)의 이같은 주장은 억측에 불과하다. (1) 이 귀절들에 대하여 사본상 일치하지 않는 것은 전연 없다. 이 점에 있어서, 사본들이 다 함께 같은 내용을 가졌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 내용이 저작자의 기록 그대로인 사실을 확증하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권위있는 신약 학자들은, 이 부분(5:28-29)말씀이 문맥상으로도 본래의 원본인 사실을 알려준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 부분 말씀보다 앞서 벌써 27절이 미래의 심판을 말한다고 하며, 이 부분 말씀은 그것의 연속이라고 하였다. 그 뿐 아니라, 슐라델(Schlatter)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5:19이하의 말씀은, 예수님의 살리시는 역사롸 심판하시는 일이 현세에 벌써 실행된다고 강조하는데, 그와 같은 역사(役事)의 권세는, 곧바로 28-29절에 기록된 그의 장차 행하실 심판 권세와 같은 것이라는 의미로 말하였다(Der Evangelist Johannes, p. 152). (2)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예수님이 5:28-29에서 두 가지 사상의 병립을 보여주셨다고 생각한다. 곧, 영생(또는 심판)의 현재적 실시와 및 세상 끝날의 실시를 병립시키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병립 사상은, 특별히 요한 복음 저자의 사고 방식이다. 6:40에도 이와 같은 취급이 나타나 있다. 거기 말하기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고
판과 같은 종말관적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은 종말관적 성격 있는 최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알려진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의 심판 성격은 현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세상 끝날에도 그러하다는 사실이 알려진다.

=====5:30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 이 말씀은 19절의 내용을 결론적으로 재설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행사, 곧, 안식일에도 병자를 고치신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변증하신 말씀이다. 그의 행사가 정당한 이유는, 그가 자행자지 하시는 것이 아니고 순전히 그를 보내신 이, 곧,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듣는대로) 실행하시기 때문이다. "심판한다"는 말(* )이 여기서는 그의 재림시의 종말적인 것을 가리키지 않고, 그의 복음을 통하여 살릴 자를 살리시는 주권행위를 가리킨다(3:18).

=====5:31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 이 말씀은 유대인들을 표준하여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증거하신다면, 그들은 멋모르고 그것을 잘 받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실상 예수님의 자증(自證)은 오히려 당연하다고도 생각되는 것이다. 8:14에 말하기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들은 누구든지 자율적(自律的)으로는 그에게 대하여 증인이 될 수 없다. 그들도 성령을 받아야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다. 그들의 증거도 저렇게 그리스도께서 성립시킨 것이니만큼, 그리스도의 자증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스키페르스(R. Schippers)는, 성경에 있는 "증거"란 말은 법정 술어의 의미가 있는 말이라고 한다. 그는, 이 점에 있어서 또 다음과 같이 말하여 요한 복음의 특색을 나타내어 보여준다. 곧, "요한 복음은 하늘과 세상, 신자들과 불신자들의 대립의 기세를 보여준다. 이 대립의 기세는 소송의 광경으로 결정적으로 나타낸다. 특별히 유대인들이 미망(迷妄)에 빠져 스스로 재판장인 체하나, 실상은 하나님의 재판정에 있어서는 피고(被告)였던 사실이 드러난다"라고 하였다(Getuigen van Jezus Christus in Het Nieuwe Testament, pp. 159-160)

=====5:32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계시다고 한 말씀은, 크리소스톰(Chrysostom)이나 대다수의 헬라 주석가들의 의견과 반대로 알렉산드리아의 시릴(Cyril)과 라틴 주석가들에 의하면, 아버지의 증거를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독일 학자 뷕셀(F. Buchsel)은, 이것이 세례 요한의 증거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스키페르스(Schippers)도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증거를 가리키지 않고 세례 요한의 증거를 의미한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곧, "예수님께서 자기의 증거와 남의 증거를 관설하는 이 문맥에서,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염두에 둔 말이라고 하기에는 도무지 근거를 가지지 못한다"라고 하였다(Getuigen van Jezus Christus in het nieuwe Testament, p. 162).

=====5: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 - 유대인들이 세례 요한에게 심문자들을 보낸 것은, 1:19-28에 기록되어 있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표준이었다. 그는 진리 (眞理)대로 말한 증인이었다. 그러므로 10:41-42에는 말하기를,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고 하였다. "증거하였느니라." 이 말의 헬라 원어(* )는 현재 완료 동사로서, 과거에 행한 일의 결과가 아직 남아 있음을 표시하는 시형(時形)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세례 요한의 증거한 바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때에도 아직 효과적이고 살아 있음을 의미한다(Grosheide).

=====5:34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 곧, 요한의 증거는, 예수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유대인들의 회개를 위한 것 뿐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자증적(自證的)으로 진리이시며 빛이시다. 그의 참되심의 성립은 어두운 인간에게 의존하시지 않는다. 빛은 그 자체의 증거로 알려질 뿐이고 어두움의 증거를 요구하지 않는다. 밝히 비추고 있는 태양의 존재를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가 촛불을 켤 필요는 없다. 태양은 그 자체를 자증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여기 세례 요한의 증거에 대하여 말씀하신 목적은, 세례 요한의 증거 목적이 그들의 구원을 위한 것인 만큼, 그것을 그들에게 기억시켜 그들로 하여금 믿어 구원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5:35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 "비취는 등불"은 일시적으로 좁은 범위에 빛을 비추는 것이다. 그것은 세례 요한의 증거에 대하여 적당한 비유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빛 자체이시고, 온 세상을 비추신다.

=====5: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 "나의 하는 그 역사"는 그의 이적들을 가리킨다. 그 역사는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신 사실을 밝히 보여 주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란 말은 그가 메시야로 오셨다는 뜻이다. 불트만(Bultmann)은, 이 귀절의 "그 역사"란 말이 그리스도의 살리시는 일과 심판하시는 일(21-29절이 가르친 것)을 가리킨다고 하였으나, "그 역사"란 말이 그런 특수한 일들만 가리킨다고 할 수 없다. 10:25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5:37,38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 함이니라 -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하셨다. 그런데도 예수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그 증거의 음성을 듣지 못한 것처럼 강퍅했다. 그들은 그 증거의 형태("형용")를 전연 모르는 자와 일반이었다. 그 이유는 이렇다. 곧, 그들이, 구약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자처하며 그의 형용을 보았다고도 자처하나,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한, 그 자처하는 생각은 망상에 불과한 것이다.

=====5:39,40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 이 말씀은, 윗 귀절들(37-38)의 정당성을 증거한다. 곧, 구약 성경은 영생을 주는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는데, 유대인들이 그 성경을 상고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그와 같은 행동은 성경을 바로 앎이 아니다. 곧,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것과 같다.

=====5:41-44
이 귀절들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유를 말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지 않으시고 다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신다(41,43). 그러나 유대인들은 실상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하지 않았다. 그러니 만큼 그리스도와 그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

=====5:45-47
이 귀절들은, 다시 39-40절 말씀에 연속하여 구약 성경(모세)에 대한 유대인들의 무식, 혹은 불신의 태도를 책망한다. 그들이 구약 성경을 믿었더면 예수님을 믿었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것은 구약을 배척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들을 정죄할 자는 구약 성경이다.



5: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 비록 복음서 저자가 이것이 무슨 명절이었는지는
밝히고 있지 않지만, 여기에 기록된 사건이 그리스도께서 갈릴리에 들어오신 직후에
일어난 것이라면, 그 명절이 오순절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유월절 이후 얼마 되지 않
아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떠나셨다. 그 후 사마리아을 지나가시는 동안 주님은 추
수할 때까지 넉달이 지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갈릴리에 들어오셨을
때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셨다. 복음서 저자는 이 명절이 이 모든 일에 있은 다음
에 있었다고 부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시간적인 순서를 볼 때 우리는 이 명절을 오순
절로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이 있다해도 나는 이
에 대해 논쟁하고 싶지 않다. 그리스도께서는 명절 때에 예루살렘에 큰 무리의 사람들
이 운집할 것이기 때문에 복음을 더 널리 전파할 기회라 생각하시고 명절을 기해 예루
살렘에 들어오셨다. 우리 모두를 율법의 굴레에서 구속하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율법에
순종하실 필요가 있었다. 이에 대하여는 다른 곳에서 설명한 바 있다.

5:2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 복음서 저자는 일이 일어
났던 곳을 밝히고 있다. 이에서 우리는 이 기적이 비밀이 아니었으며 또 소수에게만
알려진 것이 아님을 추리할 수 있다. 행각 다섯이 있었다는 것은 그 장소가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임을 암시해 준다. 이것은 양문이 성전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는 사실
로도 증명된다. 뿐만 아니라 갖가지 병을 가진 병자들이 거기 누워있었다고 직접적으
로 말하고 있다. 지명의 의미에 대하여는, 학식이 있는 사람들을 베데스다 대신에 베
데더(Betheder)라고 보는 제롬(Jerome)의 억측을 거부한다. 그는 그리고 이 집을 양무
리의 집이라고 번역한다. 못은 양시장(羊市場) 가가이 있었던 것으로 여기에 언급되어
있다. 이 장소를 벧세다(Bethesda), 즉 '물고기의 곳'이라고 읽는 사람들은 아무런 근
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부음(pouring)의 장소라고 이곳을 설명하는 사람들의 의견에
더 큰 가능성이 있다. 히브리어 * (에쉐드)는 흘러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
나 복음서 저자는 당시의 습관대로 Esda라는 아랍어 발음을 쓰고 있다. 나는 물이 제
사장들이 길을 수 있도록 도관(道管)을 통하여 그 곳에 전달되었다고 생각한다. 아마
파이프를 통하여 물이 흘러 들어왔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웠는지도 모른다. 내 의견에
는 제물로 바쳐질 짐승이 그 곳에서 취한 바 되었기 때문에 양문(sheep gate;羊門)으
로 불렸다고 생각한다.


5:3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 병자들은 예배하러
성전으로 가는 사람들이 지나갈 때 구걸하기 위하여 행각 안에 누워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제물로 드릴 짐승을 대개 이곳에서 사게 되어 있었다. 각 명절 때마다 하나님
께서 몇 사람씩 고쳐 주심으로, 율법에 명시한 예배와 성전의 거룩함을 선포하셨다.
그러나 종교가 전성기에 있었을 때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는 말씀을 읽을 수 없고 선지
자의 시대에까지 기사가 보통 행해지지 않았는데, 모든 것이 부패하고 거의 황폐되었
을 때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기사와 표적을 통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것은 조
금은 모순처럼 보일 수도 있다. 나는 여기에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선지자
들 안에 내재하시던 성령님은 하나님의 임재를 완전히 증거해 주셨기 때문에, 그때에
는 종교에 다른 확증이 필요하지 않았다. 율법은 완전히 적절한 표적에 의하여 확증되
었고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명령한 예배를 수많은 증거로 승인하시는 일을 그치지 않았
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출현했을 때는 그들에게 선지자가 없었고 그들의 상태는 참
으로 처참한 것이었다. 그리고 사방에서 갖가지 유혹이 그들을 억압하고 있었기 때문
에, 그들에겐 하나님께서 그들을 완전히 버렸다고 낙망해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이
와 같은 비상조치를 취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말라기가 선지자 중 마지막 선지자라고
알고 있다. 그러므로 말라기는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말4:4) 모
세가 전해 준 율법을 기억하라고 당부함으로써 그의 가르침을 끝맺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로부터 선지자를 빼앗아 한동안 불타도록 하여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더욱
큰 경외심으로 그를 맞이하도록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성전
과 제사와 예배의 증인으로서 세상의 구원이 그들로부터 유래되도록 계획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직 그들에게 병고침의 은사를 남겨 두심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른 열방
으로부터 헛되이 구분해 두신 것이 아님을 인식하도록 하셨다. 병자를 고쳐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마치 하늘에서 손을 뻗쳐 보여주신 것처럼, 그들이 율법의 명령대로 행
하는 예배를 인정하신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보여주셨다. 그 다음으로 나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표적으로 구속의 때가 가까이 옴을 일깨우기 위해 이미 가까이 와 계심을 경고
했다고 믿는다. 나는 이 시대에는 표적에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유대인들로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심을 알게 하여 그들로 율법을 순종하는 가운데
서게하려 함이요, 둘째는 그들도 새롭고 비상한 관심으로 그를 바라보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소령,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주님께서 고쳐주신 병은 그저 평범한 병이 아니
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복음서 저자는 여기에 그들이 어떠한 병자들이었는가를 소개
하고 있다. 인간적인 치료법으로는 소경과 절뚝발이와 혈기 마른 자를 온전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의 무리 가운데서 그와 같은 많은 종류의 병신들
을 보는 것은 참으로 처참한 광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은 크고 잘
정돈된 군대 내에서 보다 거기에서 더 밝게 빛났다. 하나님의 비상한 능력이 자연의
결함을 시정하고 회복시켜 줄 때보다 더 장엄한 것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
님께서 그의 무한하신 자비 가운데 사람의 고통을 덜어 주실 때보다 더 아름답고 더
즐거운 일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이 장소가 내국인 뿐 아니라 외국인들
까지도 하나님의 위엄을 볼 수 있는 무대가 되기를 원하셨다. 이미 암시한 대로, 하나
님께서 그의 임재하심을 자기의 손을 펼쳐서 분명히 보여주시는 것은 성전의 영광과
경사가 아닐 수 없다.

5:4
이는 천사가 - 병자를 고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
은 천사들의 손을 쓰는데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천사를 명하여 이 임무를 수행하게 하
셨다. 그래서 천사들은 '권세' 또는 '권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
기 능력을 천사들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하늘에서 놀며 앉아 계시다는 말이 아니고,천
사들을 통하여 강력하게 역사하심으로 주님께서는 그의 능력을 우리에게 높이 선포하
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천사들 스스로가 무슨 능력을 소유하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
를 중재하는 존재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악하고 편벽된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천사
들을 통해서 나타내시는 것이 그의 목적인데,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 천
사들의 목적이라도 되는 듯 그들을 높이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
가 너무 멀기 때문에 천사들이 우리를 위해 은혜를 구매해 주지 아니하면 하나님께 이
를 수 없다고 한 플라톤의 어리석은 변론을 경계해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직접 그리
스도에게 나아가, 주님의 인도와 보호와 명령에 따라 천사들을 우리의 구원의 사역자
와 일군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가끔 -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한꺼번에 그리고 단번에 모두 고쳐줄 수 있었다. 그러
나 그의 기적에는 목적이 있었던 만큼 거기에는 또한 한계가 필요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상기시켜 말씀하시기를 엘리사 시대에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오직 한 아이가 살
림을 받았고(왕하4:32) 그리고 가물었을 때에 많은 과부가 기근으로 고생했지만 오직
한 과부만이 엘리야의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왕상17:9, 눅4:25). 그래서 주님께서는
몇 사람의 병자에 관해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증거해 주면 족하다고 생각하셨던 것이
다. 그러나 여기에 기록된 치유방법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생각으로 판단
하는 것보다 더 어이없는 일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물이 동한다 해도 거
기서 무슨 치료나 도움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이와같은 방법을 쓰심으로 주
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의 태도를 바로잡아 믿음의 순종으로 이끌기를 원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일지라도 우리의 이성에 맞는 것이면 따르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로 순종케 하기 위하여 우리 앞에 이성에 상치되고 모순되는 것
을 가끔 보여주신다. 우리는 우리에게 무가치한 것으로 보일지라도 우리의 눈을 감고
말씀만을 따를 때에 참으로 가르치심을 받을 자세가 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아람사람 나아만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왕하5:10). 선지자는 그의 문둥병을 치유시키
기 위해 그를 요단강으로 보낸다. 처음에 나아만은 이를 어리석은 짓이라고 일축해 버
린다. 그러나 후에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이성과 상치되게 일하심으로 우리를 실망
시키거나 희롱하는 분이 아니심을 알게된다.
물을 동하게 한 것은 하나님께서 원소(elements)를 자기가 원하는 뜻에 따라 자유로
이용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증명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일의 결과를 자신에
게 돌린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께 속하는 것을 피조물에게 돌리는 것은 인
간이 흔히 범하는 잘못이다. 동하는 물에서 치유의 원인을 구하는 것은 극히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외적인 상징을 통하여, 병자들이 상징을 봄으로 은혜의 원천
이 되시는 분을 바라보도록 하셨던 것이다.

5:5
거기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더라 - 복음서 저자는 이 기적이 확실함을 입증할 만
한 여러가지 내용을 수집했다. 병이 너무 오램으로 병자는 치유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
고 있었다. 이 사람은 치유하는 물에 자신이 접근할 수 없음을 불평한다. 그는 종종
물 속에 들어가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아무도 그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늘
허사로 끝났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은 더욱 더 밝게 빛난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한 것은 그가 오직 그리스도의 축복에 의해서 고침을 받았다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 주자는 데 그 의의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갑자기 과거에 무기
력하던 지체를 힘있고 건강하게 움직일 때, 이와 같은 갑작스런 변화는 보는 이들의
마음을 더욱 일깨워 줄 것이기 때문이다.

5:6
네가 낫고자 하느냐 - 주님은 병자가 참으로 낫기를 원하는지를 의심해서가 아니
라 자기가 그에게 내릴 은혜에 대한 욕망을 불붙일 목적으로, 그리고 다른 데 마음을
두고 있어 표적을 보지 못했을 환자들의 시선을 끌 목적으로 이 질문을 던졌다. 갑작
스런 행동이 있을 때 우리는 흔히 다른 데 마음을 쓰다가 이를 놓치기가 쉬운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이유로 인해서 준비가 필요했던 것이다.

5:7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 이 병자는 우리가 거의 다 범하
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도움을 자기 자신의 견해에 따라 제한하고 있
으며 자기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그이상의 기대를 자신 스스로 갖지 못하고 있는 것
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의 연악함을 용서해 주는 데서 우리는 우리가 눈 앞에
있는 방법에 몰두할 때 매일 경험하는 주님의 인자하심을 비쳐볼 수 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희망에 반해서 숨은 곳에서 그의 손을 뻗치셨다. 주님께서는 그의 인자하
심이 우리의 편협한 믿음을 얼마나 능가하는가를 보여주고 계시다. 뿐만 아니라 이 본
보기는 우리에게 인내를 가르쳐 준다. 38년은 주님께서 그의 축복을 지연시킨 기간으
로는 긴 기간이 아닐 수 없다. 주님은 처음부터 이 사람에게 축복을 내리기로 작정하
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아무리 오래동안 우리로 기다리게 하신다 할
지라도, 우리가 고통과 신음하는 중에도 그 시간의 지루함에 지쳐 기진맥진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우리의 고통과 고난이 끝없이 계속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하나
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모든 장애물을 쉽게 부셔버리는 놀라운 구원자가 되심을 믿어야
할 것이다.

5:9
이 날은 안식일이니 -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이 그 병자가 짐을 지고 활보하는
것을 볼 때에 큰 죄목을 들고 나설 것을 잘 알고 계셨다. 율법은 안식일에 어떠한 짐
도 지지 못하도록 엄금하고 있기 때문이다(렘17:21).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위험을 무시하고 두 가지 이유로 이러한 사건을 일으키셨다. 첫째는 그 표적이 더욱
널리 알려지도록 하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그가 곧 이어 행하셨던 놀라운 설교를 할
수 있도록-말하자면-계기를 만들려 함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표적에 대하여 아는 것
은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거침이 되는 것은 대담하게 간과해야 했다. 또
한 약한 자들에 의하여 아직 받아 들여지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에게는 정당한 변명이
준비되어 있었다. 주님께서 그들의 중상모략을 넉넉히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전
세계가 분노로 들끓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일을 선포한다는 원칙을
지켜야겠다. 내가 언급한 목표를 지키기만 한다면 일의 결과가 잘못된다 하더라도 우
리가 걱정하고 실망해서는 안될 것이다.

5:10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 안식일은 모든 사람에
의하여 준수되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 사람을 정당하게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한 변명이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하자 그들 자신이 오류를 범하기 시작했
다. 이유가 알려졌을 때 그는 무죄선고를 받았어야 했다. 우리가 이미 말한 대로, 안
식일에 짐을 지는 것은 율법을 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의 어깨에 짐
을 지워주셨고 그의 권위로 그를 밀어 주셨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에서 우리는 성급한
판단을 경계하고 각 행동의 원인이 충분히 알려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교훈을 얻
게 된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은 가차없이 정죄되어 마땅하다. 그
러나 이에 대해 분별없이 많은 말이 오르내리기 때문에 우리의 질문과 결정은 건전하
고 신중해야 한다. 유대인들은 완악한 견해로 편견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신중히 알아
볼 만한 끈기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분별과 중용에 대한 가능성을 닫아 버렸다.
만일 그들이 스스로 배울 마음의 준비를 갖추었더라면, 그들의 과오도 제거되었을 것
이고 나아가 그들은 복음을 알 수 있도록 인도함을 받았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유대
인들이 타당하고 분별있는 해명을 받아들이지 아니함으로 얼마나 큰 오류를 범했는가
를 알 수 있다. 변명은 고침을 받은 사람이 아무 것도 자의로 하지 않고 다만 명령할
권세를 가진 분의 명령에 따라 행동한 것 뿐이라는 대답이었다. 비록 그는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그는 그분이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임을 확
신했다. 그는 그의 능력을 경험했으며 그로부터 그리스도께서 권위를 위임받은 분임을
알았고 반드시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표적이 그로 하여금 율
법을 순종치 못하게 한 것은 비난을 받아 마땅한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 고침을 받은
병자가 그들의 비난에 강력하게 논박하지 못한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도 이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특별한 표적이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은 것과 말씀으로 무장된 하나
님의 선지자의 말을 들을 때까지 그들의 판단을 미루지 아니했다는 점에서, 이중으로
잘못을 범했다.


5:13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 그리스도께서는 분명 그와 같이
위대한 기적의 영광이 헛되이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표적의
주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도 전에 그 표적이 널리 알려지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주님
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외모와 관게없이 그 사실 자체를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
하여 잠시 뒤로 물러 나셨다. 이로써 우리는 사람의 믿음때문에 병이 나은 것이 아님
을 알 수 있다. 그사람은 병고침을 받은 후에도 자기를 고쳐준 의원이 누구인지를 모
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말에 그는 자리를 들고 걸어갔
다. 그리고 이것은 믿음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해진 것처럼 보인다. 나 자신으로서는,
그 사람 안에 어떤 보이지 않는 믿음의 동작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지만, 문맥
상으로 보아 그에게 확고한 교리나 분명한 빛이 없었음이 분명하다.


5: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인자하심에 대한 기억이 사람들의 마음에서 사라지도록 잠시 자신을 숨긴 것이
아님을 더욱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주님께서 이제 자의에 따라 공중석상에 나타나셨
기 때문이다. 그는 다만 그 표적이 먼저 알려지고 난 후에 자신이 그 기적을 행한 장
본인임을 알리려고 의도했을 뿐이다. 이제 이 말씀은 아주 유용한 교훈을 포함하고 있
다. 그리스도께서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실 때, 그는 우리가 감사할 줄을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선물을 함부
로 남용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그에게 베푼 은혜
를 내세우지도 않고 다만 그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평생토록 구세주 하나님을 예배
하도록 그가 나음을 입었음을 그에게 상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채찍질하심으로 회개하도록 가르치시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주님은 그의 인자
와 관용으로 우리를 회개토록 인도하시는 것이다. 과연 우리를 구속한 목적과 하나님
의 은사의 목적은 우리를 전적으로 주님께 헌신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심판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며, 용서를 받은 사람이 평생
토록 주님의 사랑을 묵상하지 않는다면 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 권고는 또한 우리가
당하는 모든 병고는 우리의 죄에 그 원인이 있는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인간이 당
하는 고통은 우연한 것이 아니고 우리를 채찍질하기 위한 수많은 채찍이다. 그렇다면
우선 우리는, 우리를 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며 우리
의 불행이 어떤 맹목적인 운명의 장난이라고 상상해서는 안된다. 다음으로 우리는 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인자한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우
리의 고통받는 것을 기뻐하지도 않으며, 따라서 우리의 죄를 미워하시는 경우가 아니
면 우리를 가혹하게 징계하시지 않는다. 주님께서 그 사람에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고 명하실 때 그는 모든 죄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
께서는 다만 그의 이전 생황에 비추어서 더 죄를 범치 말라고 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
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정신을 차리고 그전과 같은 상태에 머물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 만일 하나님께서 아주 친절한 아버지가 온화하게 자식
을 징계하는 것처럼 우리를 다루는 데에도 우리에게 진전이 없다면 그는 새로운, 말하
자면 낯선 성격을 지닌 하나님으로 나타나는 수 밖에 없다. 주님께서는 율법에서 경고
하고 있는 것처럼(레 26:114, 신 28:15, 시 32:9), 우리의 완악함을 길들이기 위하여
채찍을 잡으신다. 사실 성경 전체를 통하여 이와 같은 말씀은 수없이 나오고 있다. 그
러므로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이 계속 우리를 억압한다면, 우리의 완악함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루기 힘든 말이나 노새와 같을 뿐만 아니라 길들이지 않은 야
생동물과도 같다. 작은 처벌이 효용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 말하자면, 어떤 극심한 처
벌로 우리를 부서뜨린다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시정받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꺽어
버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처벌은 앞으로 우리를 보다 더 조심스럽게
만드는 데 쓰이는 것이다. 만일 한두 번 맞았을 때에 우리가 완악한 마음을 고집한다
면 하나님께서는 일곱 배는 더 심하게 때릴 것이다. 우리가 잠시 회개의 징후를 보이
다가 다시 옛 성품으로 돌아 간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게으르고 변덕스러운 경박성
을 더욱 날카롭게 때릴 것이다.
우리는 이 사람에게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관용으로 참으시는가를 볼 수 있
다. 이 사람이 노년에 들어섰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 경우 그는 아주 젊은 청년기에
병이 들었거나 어린 유아기부터 병고에 시달렸을 것이다. 이제 이와 같이 여러 해 계
속되는 처벌이 그에게 얼마나 쓰라리고 괴로왔을까를 생각해 보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반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이 사람을 그와 같이 오랫동안 쇠약하게 버려두었다고 해
서, 하나님이 너무하셨다고 책망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보다 더 가벼운 처
벌을 받을 때에, 그것은 주님께서 그의 무한한 자비 가운데 그의 처벌의 손길을 절제
하시기 때문임을 알자.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받는 처벌은 더욱 더 엄해질 수 있
다는 것을 배우자. 사태가 더 이상 악화될 수 없다고 불평을 늘어 놓음으로 불행한 사
람들이 자신에게 무섭고 혹독한 고통을 자초할 때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주님께서는 "이것이 내게 쌓이고 곳간에 봉하여 있지 아니한가?
(신32:34)"라고 묻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채찍에서 유익을 얻는 속도
가 느림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권고가 그냥 목적없이 하신 말씀이 아니라면,
이는 그 사람의 영혼이 모든 죄로부터 완전히 씻음을 받지 않았음을 암시해주는 것이
다. 악의 뿌리는 우리 속에 너무나 깊이 박혀 있어서 하루 이틀 동안에 이를 뿌리뽑을
수는 없는 것이다. 영혼의 병을 치유하는 것도 단기 치료로 쉽게 이루어질 수는 없다.


5: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이는 예수라 하니라 - 그가 그리스도를
대적한다는 느낌을 밝혀 준다는 것보다는, 그 사람의 마음속이 그런 느낌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귀절은 그가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격분하여 날뛸
염려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의도는 선하였다. 그 이유는 그가
자기를 고쳐준 그리스도에게 마땅히 영광을 돌려드리기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
인들은 예수님에게 원한을 가지고 안식일을 범한다고 힐난할 뿐만 아니라 이를 인하여
그에게 지독한 공격을 퍼붓고 극단적인 비난을 가하였다.

5:17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자신의 일을 변
호하고 있는가에 유의해야 한다. 그는 안식일에 대한 율법은 임시적인 것이어서 이제
폐한 바되었다고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는 율법을 범하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
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나타나심으로 그림자적
인 의식을 끝낸 것은 사실이다. 바울도 골로새서 2장 16절에서 이를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현재 문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인간은 자신의 하던 일에서 안식하
라고 명령을 받았다. 그러므로 사람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인 할례는 안식일에 어
긋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장하는 바는 하나님의 일은 모세의 율법이 명한 거룩한 안식을 해치
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주님께서는 자신의 행동만을 변호할 뿐 아
니라 그 사람이 자리를 들고 걸어간 것도 변호하고 있다. 자리를 들고 간 것은 보충적
인 것이었으며 말하자면 기적의 일부분이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송축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로 간주된다면, 손과 발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것이
안식일을 더럽히는 일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주로 자기 자신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다. 유대인들이 그에게 더 많은 적개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께
서는 자기가 병자에게 회복시켜 준 건강이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
신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시며, 자기는 아버지와 같이 행하신다
고 주장하고 계시다.
나는 지금 안식일의 용도와 안식일이 명해진 이유를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에서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거나 어지럽힌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일에 자리를 내어주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족하다. 그렇지 않으
면 율법이 왜 사람으로 그의 일을 멈추라고 말하고 그의 모든 지각을 하나님의 일을
상고하는 데에 자유롭게 사용하라고 일러주겠는가? 그러므로 안식일에 하나님의 일이
자유롭게 이루어지지 못하게 방해하는 자는 안식일을 의곡하고 거짓되이 풀이하는 것
이다.
하나님의 본을 보이심은 사람으로 일곱째 날에 쉬게 하려 함이 아니냐고 반문한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사람은 쉬는 날을 지킴으로 하나님을 닮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
람은 세상의 혼동된 일에서 손을 멈추고 하늘에 속한 안식을 추구할 때 하나님을 닮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안식은 활동의 정지(靜止)가 아니고 잔잔한 평안의
상태를 동반하는 본질적인 완성이다. 그리고모세가 말한 내용은, 즉 하나님께서 만드
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다고 한 것은(창2:2) 이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시는 일을 마치시고,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하
신 일을 묵상하면서 보내도록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능력으로 친히 만든 세상을 붙드시고, 그의 지혜로 세상을 지배하
시고, 그의 자비로 세상을 지키시고, 그의 뜻에 따라 땅과 하늘에 있는 만물을 관장하
는 일을 멈추신 것이 아니다. 세상을 창조하는 일은 육일 동안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세상을 다스리는 정사는 계속되는 것이며 하나님은 세상의 질서 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일하고 계신다. 이는 바울이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17:28)
고 가르친 것과 같다. 다윗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갔다"(시104:29)고 말하고 있다. 주님께서 친히
창조하신 자연을 유지하는 것은 일반적인 섭리에 의한것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께서 각 부분의 질서를 유지하고 관장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특별히 주님께서 자기의
돌보심과 보호 아래 취해들인 성도들을 하나님께서는 지키고 보호해 주신다.
나도 일한다 하시매 -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본 사건을 변호하는 일을 멈추시고 기적
을 행하신 목적을 설명하신다. 주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에 알리는 방법
으로 기적을 행하셨다. 그의 모든 행위와 말씀 이면에는 자기가 구원의 주인임을 나타
내려는 목적이 있었다. 이제 그가 스스로 주장하는 바는 그의 신성(神性)에 관계되는
것이다. 사도의 말을 빌리자면,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히1:3)계신
다. 주님께서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시는 이유는 육신으로 나타나신 자신이 그리
스도의 직분을 수행하려 함에 있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주로 자기가 세상에
내려온 목적을 알리기 위하여 하늘로 부터 세상에 오셨음을 확인하고 계시다.

5: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 그의 변명은 유대인들의 분
노를 잔잔케 한 것이 아니라 더욱 자극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강철
같은 고지보가 악의에 찬 적개심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다만 그의 첫째 목표는 우
선 거기에 있던 자신에게 속한 자 몇몇을 도와주고 그 후에 유대인들의 고질적인 악의
를 만천하에 공개하려는 것이었다. 주님께서는 이와 같이 본을 보여주심으로, 비록 온
세상이 우리를 비난하여 물리치려 한다 할지라도, 악인의 분노에 굴복할 것이 아니라
필요할때는 하나님의 진리를 변호해야 한다고 우리를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
의 종들이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혜택을 주지 못한다 해서 낙망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이 일에 성공하지 못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만큼, 사단이 더욱 광분한다 할지라도 전혀 놀랄
것이 못된다.
복음서 저자가 이 귀절 앞부분에서 유대인들이 주님께서 안식일 범했다고 그를 적대
시하였음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그 자신의 관점에서 그러했다는 것이다. 나는 주님께
서 안식일을 범하지 아니하셨음을 이미 앞에서 설명했다. 그들이 분개한 첫째 이유는
주님께서 하나님을 자기의 아버지라고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시한 데 있었다. 그
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보통 사람과 구별된 위치에 있음을 주지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한 의미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되심을 알리려 한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일하
시니 나도 일한다 하심으로 그는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시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를
부인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이를 더욱 더 분명하게 확증하고 있다.


5:19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
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 우리는, 내
가 앞에서 말한 대로,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의 비난과 고소에서 벗어나려고 어떤 변
명을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비난하는 내용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나섰음을 보게
된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트집을 잡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주장
하고 있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하나님께로 돌리려 하지 않는
다면 하나님께 정면으로 대항하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함이었다. 예전
에는 이 말씀이 정통파 신부들과 아리우스파 사이에 여러가지로 공방의 대상이 되었었
다. 아리우스파는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아들은 아버지보다 못하다고 유추했다. 그러나 신부들은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께서 아
버지로 말미암았으나 행동의 잠재적 능력마저 박탈당한 것은 아님을 알게 하기 위하여
위격(位格)의 구분만이 암시되어 있을 뿐이라고 반대했다. 그러나 이들 양측이 모두
그릇된 견해를 내세웠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신성 여부를 따지고 있지 않
으며 우리가 곧 듣게될 말씀은 전혀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을 지칭해서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다만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
러므로 우리의 구속주가 되시기 위하여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그대로의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시선을 보내자.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에게서 인간의 성품 이상의 것을 보지 않
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병자를 낫게 한 것은 자신의 인성(人性)이 아니고 그
의 외부적인 육신 밑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주장하셨던 것이다. 문제는 여
기에서 맴돌고 있다. 그들은 육신의 모양을 보고 그리스도를 멸시했다. 그래서 주님께
서는 눈을 조금 더 높이 뜨고 하나님을 보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이 상대하고
있는 분은 죽을 수 밖에 없는 하나의 인생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참으로 하
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두고 그리스도를 고소함으로써 크게 빗나갔다는 사실에 모든 문
제의 초점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이 일에 있어서 자신은 아버지와 조
금도 차이가 없다고 강력하게 선언하고 있다.


5: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 옛날
주석가들의 해석이 얼마나 억지가 많았는가를 우리는 여기서 엿볼 수 있다. 그들은 하
나님께서 아들을 통해서 자신을 사랑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육신을 입으신 그
리스도와 너무나 아르답게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다. 그러나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천사와 사람에게서 구분된 것은 "이는 내 사
랑하는 아들이요"(마3:17)라고 하신 으뜸되는 칭호 때문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
는 하나님의 모든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 그 사랑이 넘치는 샘에서 흐르는 물
과 같이 우리에게 흘러오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택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기 때문에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사랑이 아버지께서 그의 손을 빌어 모든 일을 행하시는 이유라고 보여주고 있다.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라고 말씀하실 때, 이 말씀은 상호 의사
소통을 암시하는 것처럼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이렇게 말씀하신
것과 같다. "아버지께서 그의 마음과 그의 능력을 내 위에 부으셨다. 이는 나의 하는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게 하려 함이다. 그리고 사람이 나를 떠나서는 어
떠한 하나님의 일도 발견하지 못하게 하려고 아버지께서는 그의 모든 능력을 내 위에
부으신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를 떠나서 하나님의 능력을 찾는 것은 헛된 짓이다.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자기가 병자를 고침으로
보여준 기적은 아버지께서 그에게 명한 일 중에 제일 큰 일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왜
냐하면 병자를 고치는 기적을 통해서는 그가 베풀 은혜 즉 세상에 생명을 회복시켜 주
는 은혜를 맛보여 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고 계속해서 말씀하실 때, 그는 하나님의
능력이 찬란하게 전시된 것을 보고도 이를 멸시하는 그들의 배은망덕을 간접적으로 송
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마치 "비록 너희가 어리석고 둔하다 하더라도, 앞으로 하나
님께서 나로 말미암아 행하실 기사를 본다면 너희는 싫더라도 감탄할 수 밖에 없을 것
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것이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빛에 대해 눈이 멀어 있는 것을 이사야가 지적한 것처럼(사6:9)
그들은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여기서 그들의 태
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후에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다는 사실
을 어떻게 나타내실 것인가를 기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5: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
니라 - 여기서 주님은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직분의 성격이 어떤 것인가를 종합
하고 있다. 비록 주님이 한 가지 양상만을 지적해서 말씀한 것같이 보이지만, 사실 이
것은 주님께서 생명의 주인이 되신다는 일반적인 교리이다. 그러나 생명은 의(義)와
성령의 모든 은사와 우리의 구원에 따르는 모든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기
적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특별히 증거함으로 이와 같은 일반적 열매를-즉 복음의 문을
열어주는 실과를 맺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내
려주시는 방법에 유의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
문에 부활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두 낱말을 함께 쓴 것은 불
필요한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생명이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
다.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에게 생명을 준다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이 귀
절에서 그는 특별히 택한 자들, 즉 일정한 사람들에게만 이 은혜로 영광스럽게 해 준
다고 말씀하고 있다.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 주님께
서는 이제 아버지께성 아들의 인격을 통하여 세상을 다스리시고 아들의 손으로 그의
구너능을 행사하신다는 일반적인 진리를 더욱 분명히 표현하고 있다. 복음서 저자는
히브리의 숙어을 따라 '심판'을 '나라과 권세'라는 의미로 쓰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아버지께서 나라를 아들에게 맡기셔서 아들의 뜻
을 따라 하늘과 땅을 다스리도록 하셨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통치권을 아들에게 넘겨
주고 할 일 없이 하늘에 쉬고 계시다는 것도 아주 우스운 말처럼 들린다. 대답은 용이
하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인간에 동시에 관계되는 말씀이다.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천지의 주와 만왕의 왕으로 임명했을 때 아버지 안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왜냐하
면 아버지께서 친히 아들 안에 계시고 아들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지각이 하나님에게까지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보이지 않는 하나
님을 볼 수 있는 형상으로 우리 눈앞에 나타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
도라는 인격을 통하여 자신을 가까이 보여 주심으로 우리의 약점을 보충해 주시는데,
하늘의 비밀을 헛되이 추구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모든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알고, 세상의 정세나 우리 자신의 상태 또는 우리의 구원의 확증에 대하여 관
심이 있을 때는 언제나 그리스도 한 분만을 보도록 하자. 왜냐하면 우리에게서 감추인
바 되었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이
다. 그렇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위엄의 무한한 광채가 우리를 삼켜버렸을 것이다.

5: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하심이라 -
이 귀절은 내가 위에서 말한 내용을 충분히 확인시켜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
도의 인격을 통하여 다스리고 자기 자신은 할 일 없는 왕처럼 하늘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아들 안에 나타내시고 스스로를 그리스도
안에 계시하신다. 그렇지 않다면 "이는 모든 사람으로......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
심이라"고 하신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는가? 이 말씀은 분명히 아버지께서 아들
을 통하여 알려지고 예배를 받기 원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
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구해야 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곧 이어 하시는 말씀에,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들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
다. 모든 사람은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고 인정한다.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
는 이 자연스런 감정은, 아무도 하나님에 대한 공경심을 완전히 부인하지 못하도록 우
리 마음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의 마음은 엉뚱한 데서 하나님을
찾는 가운데 쇠잔해 가고 있다. 따라서수많은 사람들이 신적인 존재로 자신을 위장하
고 나섰으며, 이에 따라 그만큼 많은 편벽된 예배가 생겨났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
스도를 떠나서는 절대로 참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다. 그리고 다윗이 말하는 대로(시
2:12)"아들에게 입맞추지"아니하고 하나님을 바로 예배할 수 없는 것이다. 요한이 다
른 곳에서 선언하고 있는 것처럼, "아들을 부인하는 자기에게는 또한 아버지도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요일2:23).
터키인과 유대인은 그들이 섬기는 신(神)을 아름답고 거창한 칭호로 단장한다. 그러
나 우리는 그리스도와 분리되어 있는 하나님의 이름은 헛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참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를
외면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율법 아래 살았던 조상들의 상태도 다를 바가 없었다. 비
록 그들이 그림자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희미하게 바라보았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
도를 떠나서 자신을 제시하신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나타
나시고 우리를 다스릴 왕으로 임명되셨기 때문에, 온 세상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하
여 그리스도에게 머리를 숙여야 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자기의 우편에 앉
도록 명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없이 하나님만을 상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반을 절감
하는 것과 같다.


5:24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 이 말씀은 아무도 그리스도를 공경
하는 방법이 어떤 외적인 의식이나 사소한 예식에 있다고 생각지 못하도록, 하나님을
공경하는 방법과 길을 기술하고 있다. 복음의 가르침은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을 다스리
는 그의 홀(笏)과도 같은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믿는 자들을 아들에게 맡기셨다. 이와
같은 정의는 특별히 유의할 가치가 있다. 기독교인으로 거짓되게 고백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적대적인 원수라고 할 수 있는 가톨릭 교도들까지도
자기들이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주제넘은 자랑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여
기서 우리가 그의 복음에 순종하는 것 이상으로 달리 자기를 공경할 수 없다고 주장하
고 있다. 따라서 위선자들이 그리스도께 드리는 모든 공경은 자기의 주를 배반했던 가
롯 유다의 입맞춤에 불과한 것이다. 비록 그들이 그리스도를 왕이라고 수백 번 선언한
다 할지라도, 그들은 복음을 믿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에게 나라와 권세를 빼앗기고
말것이다.
그는 또한 "영생을 가졌나니"라고 할 때 순종의 열매를 추천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더욱 자진해서 순종함으로 영생을 누리게 하려고 하신 말씀이다. 영생이 상으로 주어
지는 데에 기꺼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복하지 아니할 정도로 완악한 사람이 누가 있
겠는가? 그런데 이와 같이 위대한 선에 감격하여 영생을 소유하는 사람은 그히 소수가
아니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에게 순종하여 그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는 것보다 스스
로 자멸하는 것은 우리의 완악함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우
리에게 요구하시는 진지한 예배와 우리를 생명으로 회복시키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하
고 계신다. 왜냐하면 우리를 생명으로 회복시키는 법을 알지 못하고, 그가 전에 가르
쳤던 대로, 죽은 자를 살리려고 세상에 임하셨다고만 말한다면 부족했을 것이기 때문
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씀을 들음으로 영생을 얻는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
가 곧 말하고 있는 대로, '듣는 것'은 믿음을 뜻한다. 그러나 믿음은 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믿음의 위대한 힘의 원천에 대하여는 우리가 이미 다
른 곳에서 지적한 바 있다. 우리는 복음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바를 항상 묵상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그의 모든 공로와 함께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과 화목될 뿐만 아니
라 사망의 심판에서 면제된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성령의 인치심을
받는 자는 하늘의 의로 옷입고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되는(롬6:4)것이다.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이라는 삽입구는 복음의 권위를 한층 더 높여주는 말
이다. 그리스도께서 복음이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이며 인간이 조작한 것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 말씀은 그가 다른 곳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14:10)고 하신 것과
같다.
심판에 이르지 아니 하나니 - 여기에 우리 모두가 나면서부터 지고 있는 죄의 짐과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누리는 죄사함의 은혜가 암시적으로 대조되어 있다. 심판이
모든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심판에서 제외시
키는 은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그리스
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사망의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셔서
새 생명 가운데로 인도하시지만, 여기에 특별히 언급되어 있는 것은 우리의 죄를 거저
용서해 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에 인간의 참된 행복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
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 우리는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죄를 용서하시지
않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실 수 있겠는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어떤 라틴어 번역 성경은 미래 시제를 써서 이를
'옮길 것이니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사람이 복음서 저자의 주장하
는 내용을 무분별하게 취급한 무지에서 일어난 잘못으로, 그가 마땅히 행사할 수 있는
재량 이상으로 자유를 행사한 데 원인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헬라어에는 조금도 모
호한 점이 없기 때문이다. 사망에서 생명으로의 전환이 이미 일어났다고 말하는 데는
조금도 잘못이 없다. 썩지 아니하는 생명의 씨앗이 그들이 소망으로 부르심을 받은 시
간부터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뿌려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망에 따라 하나님의 자
녀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영광 중에 앉힌 바 되고, 저희 안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것이다(눅17:21,골3:3). 그들의 생명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이 믿음
으로 생명을 획득하는 것을 막지 못하며, 사방에서 죽음이 에워싸고 공포를 준다해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평안을 막을 수는 없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보호 아래 안전
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신자들은 이제 생명 안
에 있지만 항상 죽음의 형상을 짊어지고 다닌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은 생명이 되시기 때문에 끝내 사망의 잔재를 없애
버릴 것이다. 맨 나중에 명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라고 한 바울의 말은 사실이다(고전
15:26). 사실 이 귀절의 말씀은 죽음을 완전히 멸망시키는 문제나 생명의 근본적인 계
시를 논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생명이 우리 안에 시작된 이상, 믿는 자들은 생명을
획득할 것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사망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그리스도께서 말씀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조금도 놀라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믿는 자는 꺼
지지 아니하는 생명의 원천이 되시는 분에게 접붙인 바 되었기 때문이다.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 복음서 저자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구원에 관
해서 그와 같이 자주 엄숙한 선언을 할때마다 이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에
서, 우리는 첫째로 우리에 대한 주님의 관심이 얼마나 극진한 것인가를 보게 되고, 둘
째로 복음에 대한 믿음을 철저하고 확고하게 정착시키고 확인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알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고 있는 믿음의 결과를 말할 때 사실 여기게
기록된 말씀은 믿어지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복음의 음성은 생명력이 있
기 때문에 죽은 자를 살릴 만한 능력이 있다고 맹세로써 확인하고 있다. 여기서 주님
은 영적인 죽음을 말씀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이치에 맞다. 그리고 이를 나사로와 나
인성 과부의 아들에 관련시켜 말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본문의 문맥 자체에서 부인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첫째로 그가 우리를 살리기 전에는 우리가 모두 죽어 있다고 말
씀하신다. 그러므로 인간의 성품이 구원에 무엇을 기여할 수 있는지는 자명한 것이다.
가톨릭 교도들은 그들의 자유의지를 내세우고 싶을 때, 강도들이 거의 죽게 만들어서
길가에 버려 두었던 사마리아인에게 이를 비유한다. 마치 비유의 연막을 침으로써 그
리스도께서 분명히 우리를 죽었다고 선고한 말씀을 모호하게 하는 것이 타당한 일이라
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우리는 모두 죄로 말미암아 하
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영원한 멸망의 위협 아래 놓여 있음을 인
정하지 않는 모든 이들은 텅빈 헛소리로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사람의 영혼에 생명의 잔재가 어느 정도 남아 있음을 쾌히 인정한다. 명철과
판단과 의지 그리고 기타 모든 지각은 생명의 여러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중
에 하늘의 생명을 갈구하는 부분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한, 모든 인간
을 온전히 죽은 것으로 간주해도 놀라울 것이 없다. 바울은 이 죽음을 에베소서 2장 1
절과 4장 17절, 18절에서 보다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우리가 건전하고 순수한
총명과 이성(理性)에서 떠나 있으며,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로서 그의 의를 대적하고
있으며, 우리가 어두움 가운데 눈먼 채로 방황하고 있으며 자신을 방탕함과 악한 정욕
에 방임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부패한 성품에 의를 갈구할 힘이 있을 리 없
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은 우리 안에 꺼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의 은혜가 죽은 자 가운데서 참된 부활이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은혜는 복음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이 말은 외부의 소리에 그와 같은 힘이 있다는 말이 아니
다. 외부의 음성은 대개 사람의 귀에 울려 퍼지고 헛되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내적으로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호소하기 때문에 우리에
게 베풀어진 생명을 믿음으로 받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아무 구
분없이 모든 죽은 자들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지 않다. 다만 주님은 택한 자들, 즉 하
나님께서 그 귀를 열어 그들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도록 해주신 자들
을 가리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
을 들을 때가 오나니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에게 이중(二重)은혜
를 베풀고 계시다. 죽은 자들이 들을 뿐 아니라, 그들이 떠났던 생명으로 다시 회복된
다는 것은 자연적인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하나님의 숨은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주님께서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고 말씀하실 때, 그는 이것은 그 때
까지 없었던 희귀한 일처럼 말씀하고 있다. 과연 복음이 전파된 것은 세상이 새롭게
갑자기 부활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인
간에게 생명을 허락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용이하다. 율법과 선지자가 하
나님의 백성에게 말씀을 전했을 때, 거기에는 그들을 죽음으로 부터 회복시키자는 것
보다도 하나님의 자녀를 생명 가운데 보전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
지 않았다. 전에 하나님의 나라의 외인이었고 하나님을 떠나 있던 사람들이 생명의 고
제 가운데로 초대를 받은 것이다.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 주님께서는 그 자신의 음성의 효능을
근본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자기가 생명의 원천이며 자기의 음성으로 말미암아 그 생
명을 인간에게 부어 주신다는 말씀이다. 생명의 원인과 원천이 그분 안에 있지 않다면
생명은 우리에게 흘러 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안에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고 언급되어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에 의하여 살아 계실 뿐
만 아니라 자신 안에 생명의 충만함을 품고 있으며 만물을 살리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 한 분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이다.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시36:9). 그러나 우리에게서 멀리 떠나 있는 하나님의 위엄은 감추어진 샘과 같기 때
문에,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스스로를 계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는 손을
뻗쳐 물을 길을 수 있는 샘이 열려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이 뜻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숨겨두거나, 말하자면, 자기 안에 매장시켜 두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 생
명을 자기 아들에게 불어 넣어 우리에게 흘러 나오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
리는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셨기 때문에 이 칭호가 그리스도에게 바로
적용된다고 인정한다.

5;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 주님은 아버지께서 그에게 하
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완전히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주셨다고 되풀이해서 말하고 있
다. 심판은 통치와 정치라는 뜻으로 쓰였다. 그러므로 주님은 사실상 아버지께서 아들
을 세상을 통치하고 아버지의 권세를 행사할 수 있는 만왕의 왕으로 임명하셨다고 말
하고 있는 것이다.
"인자됨을 인하여" 이 원인은 특별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것은 그가 아버지
께로부터 받은 것을 인간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그와 같이 완전한 권세를 입으시고 인
간에게 오셨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이 바울이 빌립보
서 2장 7절에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
으로 나타나셨으며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고 말한 내용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를 좀더 확대시켜,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시는 만큼, 아버지
께서 그를 생명의 주인으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멀리서 찾아 헤메지 않도록 하려함이
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필요하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그의 부요함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려고 그러한 이름을 받았던
것이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던 것이 인간 그리스도 안에 계시
되었다. 어떤 이는 이 말씀을 문맥 밖으로 떼어내어 다음 구절에 연결시키려 하나 이
는 억지이며 그리스도의 의도와 상치되는 것이다.


5: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 주님의 논리는 전혀 합당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주
님께서는 자기가 방금 하신 말씀을 확증하는 데 마지막 부활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
다. 영혼을 살리는 것만큼 육체를 살리는 것도 큰 일이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것을
비교해서 말한 것은 어떤 사물의 실제 상태에 관해 언급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어
떤 사물에 대하여 생각하는 정도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육적이기 때문에 외
적으로 보이는 것만을 흠모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혼의 부활은 가볍게 넘
겨 버리고 육체의 부활에 더 큰 관심을 보인다. 이와 같이 크나큰 우리의 어리석음의
결과는 눈으로 보고 인식한 것이 믿음만으로 이해한 것보다 믿음을 성장시키는 데에
더 강력한 효력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주님은 마지막 날에 대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에
곧 이 때라고 다시 제한시키는 문귀를 쓰지 않고 다만 '때가 온다'고만 말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또 하나의 반대에 직면하게 된다. 비록 신자들은 그들의 육체가 부활할
것을 바라보지만, 이 지식에 의지해서 육체가 어느 날인가 무덤에서 부활할 것이기 때
문에 영혼은 이제 사망에서 해방된 것이라고 결론 지을 수는 없다. 그리고 믿지 않는
자들 사이에 더욱 숨겨진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평범한 문귀를 사용하는 것보다 더
어처구니 없는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나는 그리스도께서 이 귀절에서 만물을 완전히
회복시키는 것은 아버지께서 그에게 맡기신 일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하여 버림받
은 자들에 대한 그의 권세를 선언하고 있다고 대답한다. 그는 "내가 이제 말한 바를
나는 시작했다. 나는 언젠가 너희가 보는 앞에서 이를 완성시킬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복음의 소리로 멸망을 향해 내닫고 있는
영혼을 살리실 때 그것은 마지막 부활에 대한 일종의 전주곡이다. 뿐만 아니라 이는
전 인류를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은 여기서 택한 자와 버림받은 자를 구분하고
있다. 이는 버림받은 인간들이 지금 그리스도의 음성에 의하여 심판으로 소환되고 있
는 것처럼, 같은 음성에 의하여 후일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끌려갈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해난(海難)사고를 당해 사망했든, 맹수에게 먹힌 바
되었든, 또는 불에 타 재로 화했든, 부활에 참예하지 못할 것처럼 왜 무덤 속에 있는
자들만을 언급하는 것일까? 그러나 죽은 사람은 보통 매장되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에,
주님은 대유법에 의하여 이미 죽은 모든 사람들을 포함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그저 '죽은 자들'이라고만 한것보다 더 강력한 표현이다. 누구든지 죽으면 그사
람의 영과 빛이 무덤에서 떠나가는-말하자면-이 세상에서 옮겨진다는 것이다.
그의 음성을 - 그리스도의 명령과 권능에 의해서 울려퍼질 나팔소리를 뜻한다(마
24:31, 고전15:52, 살전4:16). 비록 천사가 전령이나 대리 역할을 한다 해도, 이것이
재판관의 권한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막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
라 - 주님께서 다른 곳에서 나무는 그 열매를 보아 안다고 말씀하신 것처럼(마7:16)
그들의 선행으로 믿는 자를 알아 본다고 말씀하고 있다. 주님은 그들이 부름을 받았을
때 시작됐던 그들의 선행을 칭찬하고 있다. 주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영생을 약속했던
그 강도는 평생 범죄 속에서 세월을 보냈지만 마지막 순간에 선을 행하기를 갈망했다.
그리고 그가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 죄의 종이 의의 종으로 변함에 따라 하나님께서
는 그의 과거사 전체를 전혀 계산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신자들이 매일같이 죄책을
느끼는 죄(sins) 자체도 하나님께서는 죄과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는다. 죄사함을 받지
못하고 잘 산 것으로 간주되었던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
께서 그 죄성(罪性)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행위도 완전히 선하다 할 것이 없다.
모든 것은 불완전하고 부패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라고 불렀던(딛2:14) 그런 사람들을 선행을 행한 사람으로 부르고 있다. 그러
나 이러한 평가는 거절당해 마땅한 것을 거저 용납해 주시는 하나님의 아버지다운 사
랑에 기인하는 것이다. 영생은 선행에 대한 보상이라고 이 말씀을 하고 있다. 우리를
의롭게 하는 믿음은 의롭게 살려는 욕망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하지 않
는다. 우리의 확신은, 하나님의 자비를 떠나 다른 곳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이
다.


5: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영원한 시선에 관
한 한,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논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일 것이다.주님
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궤변과 학설로 분주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
이다. 결국, 옛날 글쓴 이들이 그와 같이 애써서 아리우스의 그릇된 주장을 논박할 필
요가 없었다. 그 무가치한 친구는 주님께서 아무것도 스스로 행할 수 없기 때문에, 아
들은 아버지와 통일하지 않다는 헛소리를 하였다. 거룩한 성도들은 성자 하나님께서
자기가 받은 모든 것을 아버지께 돌리고 있다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위격에 관한 한,
아들은 아버지께로서 보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 귀절에서 자신의 신성(神性)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육신으로 옷입었다고 해서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우리를 가르치고 있다
는 점이다. 주님은 인간보다 차원이 높은 신성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
리는 주님께서 누구와 상대해서 말씀하고 있는가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
과 자기 자신을 대조하려고 노력하고 있던 유대인들을 논박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
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신의 안내자와 주관자로서 자기 안에 내주하고 계신 하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아무 것도 인간적으로 행하는 것이 없음을 확언하고 있다. 그리스
도께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마다 인간에게 적절한 것만 말씀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은 그리스도가 단지 보통 사람 가운데 한 분
에 불과하다고 악랄한 말을 하던 유대인들에게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인해서, 주님은 무엇이든지 인간보다 높은 것은 아버지께로 돌리고 있다.
'심판'은 엄격히 말해서 그의 가르침을 지칭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다스리
는 전 영역을 취급하려고 의도하고 있다. 그는 매사에 아버지께서 자기를 밀어주고 있
으며, 아버지의 뜻은 자기의 원하는 원칙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 주님은 자기의 뜻과 아버지의 뜻이 충돌하도록
결코 허용하고 있지 않다. 주님은 다만 그들이 거짓되게 상상했던것, 다시 말해서 주
님이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동기에 의해서 행동하
고 있다고 상상했던 그들의 추측을 공박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기에게 아버지
의 명령과 관계없는 자기 특유의 성격이 따로 있지 않다는 점을 재확인하고 있는 것이
다.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 주님은 아버지의 지시와 명령을 떠나서는 어떠한 일도 행하
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과 말씀은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
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옳다는 말씀은 논쟁거리가 될
수 없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위한 경건의 첫째 원칙은 하나님의 말씀과 일에
대한 경외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름만이 그 언행의 의로움을 증명하기게 족하
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로우시다는 것을 기꺼이 수긍하고 인정하는 사람들은 극히 소
수에 불과하지 않은가! 사실 나는 경험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의로움을 우리에
게 보여주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의 육신의 인식에만 국한시켜 우리
자신의 마음이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라고 믿는 것은 아주 악한 불경건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로 난 것은 옳고 진실되다는 결론을 확고부동하
게 해두도록 하자.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되지 않고 그의 모든 행적이 옳지 않다는 것
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을 확실히 해두도록 하자. 우리는 또한 옳은 언행이란
오로지 하나님의 감독과 지시에 의해서 행하는 것이라는 원칙을 상기하게 된다. 만일
이후에 온 세계가 우리를 향해 들고 일어난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따르는 자는 결코
곁길로 나가지 않는다는 이 불굴의 신앙의 방패로 대처하도록 하자.


5:31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 주님께서는 자신의 증거의 권위를 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자신의 증거의 권위를 강조하고 있는 데 비하여
이곳에서는 약간의 양보를 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든 자기 자신에 대하여 말하
는 것은 확실하고 진실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비록 다른 면에서 우리가 자신
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옳을 때가 있지만, 자기 자신을 올바로 증거하는 사람은 아무
도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을 이러한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부당한 것이지만,
주님은 하나님의 권위에 의하여 원수들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길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5: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 - 하나님의
증거를 내세우기 전에, 주님은 그들에게 그들이 쉽게 지나쳐 버릴 수 없는 요한의 대
답을 제시하고 있다. 요한이 하는 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면 요한에게
사람을 보낸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사람들을 요한에게 보냈을 때, 그들은 그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보았고 그의 말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으로 받을 생각이었다.
이제 이는 또 하나의 양보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공개적으로 그들이 악하기 때
문에 믿지 못하는 것이라고 그들을 송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어, 마치 무엇을 원했던 것처럼, 메시아가 누구냐고 그에게 물었으나 그가
한 대답에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사실의 요점을 잘 지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34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 하노라 -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무
목적이 없이 요한을 택하여 그의 증인으로 세웠던 것이 아니며, 또 그리스도께서도 친
히 제자들이 자기를 증거하는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행1:8). 나는 그리스도
께서 요한의 증거를 언급하는 것은, 그의 증거가 필요해서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의
증거가 우리의 확신을 확증하는데 유익하기 때문에 이를 언급한 것이라고 대답한다.
사람들은 서로 증거를 주고 받는다. 이러한 증거의 도움이 없이 사람들은 서로를 인정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경우는 다르다. 만일 철학자들이
덕(德)은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면, 사람 안에 하나님의 진리를 보
강해 줄 무엇이 있겠는가?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인해서 요한의 증거를 내세
운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주님께서 복음의 증인을 일으켜 세우시는 것은 자기 자신보
다는 그들을 위해서임을 보여 주셨다. 이들복음의 사자들을 통하여 주님은 자기의 뜻
에 대해 우리에게 증거하시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인하여 모든 것을 배려
해 주심은 여기에 주님의 놀라운 인자하심이 빛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구원
하기 위한 주님의 관심이 헛되지 아니하도록 우리는 우리대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5:35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 요한을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고 부름으로써 주님
은 그들의 배은망덕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의 눈 앞
에서 하나님의 등불이 비취었지만 그들이 자기들의 뜻만을 내세우는 데에 급급하여 주
님의 빛에 눈이 멀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다음의 의미
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곁길로 나가는 것을 원치 않으셔서 요한을 임
명하여 주님의 빛으로 너희를 안내하는 등불을 삼으셨다. 그러므로 너희가 나를 하나
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계획적인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눈을 감아 그들
에게 제시된 빛을 소홀히 했을 뿐만 아니라 고의적으로 그리스도를 억압하는데 이를
오용했다. 그들이 요한을 그의 마땅한 위치 이상으로 높이려고 했던 것은 하나님의 아
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대우하지 않으려는 악의적이고 배신적인 계획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부터 말미암은 빛을 이와 같이 악용한 것을 방탕에 비유하고
있다. 이는 마치 집주인이 하인들에게 명한 일을 그들이 수행할 수 있도록 밤에 하인
들을 위해 등불을 켜주었는데 이를 방탕하고 연락하는데 이용한 것과 같다. 뿐만 아니
라,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이리저리 방황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임명하신 신실한 종들을 오용하지 않도록, 유대인을 책망
하고 나아가서는 우리 모두를 경고하고 계신다. 모든 시대를 통해서 이 경고가 얼마나
적절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그들의 최종 목적지까지 일생
을 통하여 달려가도록 계획하시고, 그들의 안내자가 되도록 그의 선지자들을 보내신
다. 그러나 앞으로 전진해 나아가는 것보다 한 자리에 머물러 거만스럽게 우쭐대는 것
은 인간의 방탕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일관성이 없고 변덕스럽기
때문에, 주님의 계속적인 인도를 멸시하고 그들의 갑작스런 정욕대로 끌려가는 것이
다. 그러므로 주님은 '일시' 또는 '잠시동안'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일시'라는 말에
의하여 그들의 일시적인 완악함이 하나님의 영원한 빛을 끌 수 있다고 생각한 그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가톨릭 교도들은, 마치 등불을 바라봄으로
그들의 눈이 현혹을 당하도록 의도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비취는 등불로서 그의 교
회에 주셨던 그 신령한 하나님의 종들을 하나님의 본래 의도와는 반대로 오용하고 있
다. 그들은 이 등불들을 하나님의 빛을 끄는 데 남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복음의
순수한 교훈을 요란스럽게 논박하고 있는가 하면, 그들의 모순을 영광스럽게 가장할
때처럼, 어두움 가운데서 즐거워한다. 그리스도께서 이곳에서 요한에 대하여 선언하고
있는 것은 모든 신자에게도 공통된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모든 성도는 생명의 말씀
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세상에서 빛들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빌2:15). 그러나 그
리스도께서는 복음의 사도들과 목사들이 나머지 성도들을 위한 안내자가 되도록 하셨
다고 말씀하고 있다. 비록 우리는 눈이 먼 채로 어두움 가운데 거하고 있지만, 하나님
은 그의 말씀의 빛으로 우리 위를 비추신다. 그러나 여기서 주님은 요한에게 켜서 비
취는 등불이라는 칭호를 입혀주셨다. 이는 요한의 사역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 위
에 더욱 밝게 비추셨기 때문이다.


5: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요한을 보
고도 하나님의 선물을 악하게 배척했음을 보여준 후, 무엇인가 스스로는 부족하다는
듯이, 자기에게는 사람의 증거가 필요치 않다고 이미 했던 말을 두번째 반복하고 있
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를 멸시하는 것을 본 주님께서는 그가 늘 하던 대로 그들을 아
버지 하나님께로 안내하고 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 주님께서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심
을 증거하는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아버지께서 기적을 통하여 내가 하나님
의 아들임을 증거하신다. 내게 세상에 오기 전에도 아버지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나를
충분히 증거해 주셨다"고 말한다. 주님이 목적하는 바를 항상 기억하도록 하자.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로 인정되기를 원하셨다. 그리함으로 사람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기를 바랬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에서 선포하고 있는 대로
이제 메시아로 나타난 바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과연 기적이 그
의 메시아됨을 증거하기에 충분한 것인가를 의문시할지도 모른다. 비슷한 기적을 이미
선지자들이 행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나는, 선지자들의 손을 빌어 행하셨
던 표적들을 그들이 의도했던 목적만을-즉 기적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그들의 권위
를 세울 수 없었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사역자임을 보여주기 위하여-수행했을 뿐이라
고 대답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더욱 높이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와 같은 목적은 기적의 의도하는 바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악의
에 차서 고의적으로 그들의 눈을 닫아버리지만 않았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기적을
통하여 쉽게 자신의 신분을 그들에게 알릴 수 있었다.

5:37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 이 말씀을 주님
께서 세례받을 때에 들렸던 음성에 국한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그는 과거 시제를 써
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가 알려지지 않은 어떤 무명한 자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를 증거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오히려 아버지께서는 오
래 전에 율법과 선지자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특징을 밝혀 주셨기에 주님께서 그러한
특성을 지니고 나타나심으로 사람들이 알아 볼 수 있도록 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서 옛날 그의 백성에게 구원의 소망을 제시할 때마다, 그리고 이스라엘
나라의 완전한 회복을 약속할 때마다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
한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나타나기 전에 이미 메시아가 어떠
한 분이라는 윤곽을 알고 있었다.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있을 때 그를 멸시하고 끝내
거절함으로써 그들은 울법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함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리
스도께서는 이에 대해 그들을 책망하고 계신다.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하나님의 품 안
에서 양육을 받은 것처럼 율법에 대해 자랑했다.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의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 그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그들에게
불평의 말씀을 하신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완악함을 더욱 날카롭게 공격하고
있다. "아무 때에도 그의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다"고 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데 너무나 소외되어 있음을 간단하게 보여주기 위하여 쓴 은유적인 표현이다. 사람을 그의 외모와 말씨를 보고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그의 선지자들의 음성을 통하여 자기 음성을 우리에게 들려 주신다. 그리고 성만찬을 통하여, 말하자면, 볼 수 있는 형태를 입으심으로써 우리의 작은 능력으로 그를 알아볼 수 있게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살아있는 형상을 통하여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는 자는 그 사실 자체가 그가 예배하는 유일한 신(神)이 자기가 스스로 만들어낸 신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눈에 수건이 가리어서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고후3:15).

5:38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뿌리를 내리고 그 말씀이 우리 마음에 새겨진 바 되면 우리는 참으로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천국 교훈에 대해서 말씀 하실 때 여러 지방에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 하셨는데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지 않으므로 유대인들 가운데는 주님이 있을 자리가 없다고 책망하신 것은 그가 정당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하여 헛되고 목적없이 말씀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은 모세의 제자가 아니라는 것이 자명해진다. 또한 생명 그자체를 배척하는 자안에 생명의 말씀이 어떻게 거할 수 있겠는가? 율법의 영혼을 파괴하는 자가 율법의 가르침을 어떻게 지킬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없는 율법은 공허한 것이며 내용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얼마나 친밀하게 아는가가 곧 우리의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정도를 말해 주는 것이다.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 우리가 이미 밝
힌 대로,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자기의 증인이 되신다고 말씀하신 것은
모세가 선지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경이 스스로 증거한다고 말씀하
실 때 더욱 분명한 설명이 따르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다시 그들의 어리석은 자랑을
책망하고 있다. 그들이 성경에 생명이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죽은 문자만을 붙들고 있
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들이 성경에서 영생을 추구한다고 해서 그들을 나무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땅히 그러한 목적으로 성경을 상고하고 성경을 활용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성경 그 자체가 생명을 공급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실제에 있어서는 성경의 참된 의미에 대해 무지했으며 그 안에 담
겨있는 생명의 빛을 끄고 있었다. 그리스도만이 율법에 생기를 불어 넣으실 수 있는
분인데, 율법이 그리스도를 배제하고 어떻게 생명을 공급할 수 있겠는가?
다음으로 우리는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성경에서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자기 마음에 드는 것만을 상상하는 자들
은 결국 그리스도 대신에 그림자와 같은 유령을 섬기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 우
리가 확실히 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는 성경 이외의 다른 곳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다
는 점이다. 그리고이것이 사실이라면 성경은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목적으로
읽혀져야 할 것이다. 이 목표에서 이탈되는 자는, 그가 학문을 하면서 일생의 정력을
바쳤다 해도, 절대로 진리를 아는 지식에 이를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를
떠나서 우리가 어떻게 지혜를 얻을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성경에서 그리
스도를 구하도록 명령을 받고 있는 것처럼, 주님께서는 이 말씀에서 아버지께서 성경
을 통하여 너무나 확실하게, 의심할 여지없이 그의 아들에 대해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노역은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을 방해
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성경을 보되 그저 지나가는 말씀으로 읽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은 최대한으로 적용될 필요가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이 감추어진 보배를 부
지런히 찾으라고 그들을 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을 항상 그들의 손에 붙들고 있으
면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느끼는 혐오감은 그들의 게으름에 그원인이 있는 것
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모세의 율법에 분명히 비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수건으로 그 광채를 가리기를 원했다. 물론 여기에 말씀하신 성경은 구
약을 뜻한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난 것은 복음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율법과
선지자들이 증거했던 분이 복음에 공개적으로 계시되었다.


5;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 주님께서
는 다시 한번 그들이 성경에 제시되어 있는 생명을 취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의 악의
에 기인한다고 그들을 책망하고 있다. 주님께서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말
씀할 때, 그는 그들의 무지와 완악함의 원인을 그들의 고집과 타락에 돌리고 있다. 주
님께서는 자신을 그들에게 극히 친절하게 내어주셨던 것에 비추어 볼 때, 유대인들은
의도적으로 눈이 멀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들이 고의적으로 빛으로부터 도망하고, 불
신의 어두움으로 태양을 막으려는 것을 보신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더욱 엄하게 꾸짖
고 있다.


5:41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 주님은 그의 책망을 계속하고 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변호한다고 오해하지 않도록, 주님은 사람의 영광이 자
기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미리 말씀하신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를 멸시해도 스스
로 유감스럽게 여기지 아니하며 걱정하지도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과연 주님은 사람의
의견에 의하여 좌우되기에는 너무나 위대한 분이시다. 온 세상의 악의(惡意)가 다 덤
벼도 그분에게 빼앗아 갈 것이 없으며 그분의 위대함을 한 치도 감소시킬 수 없기 때
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굽히지 않고 그들의 중상과 모략을 논박하면서 사람 이상으로
자신을 높이고 있다. 주님께서는 이후에 그들을 자유로이 공박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증오와 멸시로 그들을 책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보다 훨씬 더 낮은 처지에
있지만, 우리는 대담하게 사람의 비뚤어진 의견을 경멸해야 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 경멸이 우리를 분노로 유도하지 않도록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땅한 영예가 하나님께 돌려지지 않을 때에만 화를 내도록 연습해야 할 것이다. 우리
가 하나님을 거부할 정도로 배은망덕한 것을 목격할 때마다 이 거룩한 질투가 우리를
불태우도록 하자.

5: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 여기에 '하나님의 사
랑'이란 말은 모두 경건한 경향과 성질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아무도 하나님을 공
경하고 전적으로 그에게 순복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면에 하나님의 사랑이 다스리지 않는 곳에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
은 욕망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모세는 "너희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율법을 요약했던 것이다.

5: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이 거짓 선지자들을
열심히 영접하면서도 하나님께 순복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내세워, 그들이 하나님을 사
랑하지도 않으며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는다고 증거하고 있다. 주님은 사람들이 진리
를 무시하고 거짓말에 기꺼이 귀를 기울일 때 그것은 타락하고 불경건한 마음의 증상
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격언처럼 말씀하고 있다. 만일 이것은 악의 때문이라기 보다 무
지에서 오는 것이라고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어떤 괴퍅하고 비뚤
어진 성품으로 인하여 진리보다 거짓을 더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도 사단의 궤
휼에 빠질 리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의에서 돌이켜 스스로 악을 갈망하는 것이 아
니라면, 어찌하여 사단이 말할 때는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는 귀가 멀어
버리는가? 하나님께서 구원의 참된 길을 지킬 수 있도록 유대인들에게 율법의 가르침
을 받는 특권을 부여 하셨듯이, 그리스도께서는 특별히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신 사람
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오직 기만을 당하기 원
하기 때문에 거짓선생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모세는 거짓 선지
자들이 일어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지의 여부를 시험하
시는 것이라고말하고 있다(신13:3). 사실 많은 사람들에게 순진한 단순함이 있는 것처
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눈은 그들의 마음에 잠재해 있는 위선과 허위에 의하여 눈
이 멀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문을 닫지 아니하시며 열심히 그를
찾는 사람들을 결코 실망시키지 아니하시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기만하는 힘이 사단에게 허락된 것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기인한다고 말한 것은 타당
한 것이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며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살후2:9,10). 이와 같은 방법으로 교황의 불경건
한 미신에 정신이 팔려 복음을 대적하며 독한 분노를 발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위선
이 폭로되는 것이다. 만일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다
면, 그 경외심은 또한 순종을 유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는 거짓 선지자들이 이 칭호를 자랑하는 것이 사실이다. 오
늘날도 가톨릭 교황은 자기가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그의 입으로 내뱉고 있다. 그리
고 마찬가지 가면을 쓰고 사단은 처음부터 많은 불행한 사람들을 기만해 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기서 허위를 가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지적하고 있다. 그리
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그를 세상에 보내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충실히 아버지의 명
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왔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특징에 의하여 교회의 정당한 교사들을 거짓된 사이비
교사로부터 구별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귀절에서는 스스로를 높이고 자기 자신을 위
하여 영혼을 농락하는 모든 사람들을 대답하게 거부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종으로 헤아림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은 주님을 떠나서 어떠한 것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황의 모든 가르침을 면밀히 살펴 본다면, 눈먼 장
님이라도 교황이 자기 이름으로 왔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5:44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 어릴 때부터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가르침을 받은 사
람들을 보고 진리의 원수라고 정죄하고 그들의 무지함을 판단하는 것은 좀 심하게 보
일지 모른다. 그리고 심지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야망이 그들에게서 건전한 마음을 앗아가 버렸다고 그들을 믿지 못하
게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주님게서는 여기서 제사장과 서기관들에
게 말씀하고 있는데, 그들은 교만으로 마음이 부풀어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하나님께
순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귀절은 세상의 영광에 대한 허영으로 마음이 들떠 있는
사람들에게 믿음의 문이 닫혀 있음을 가르쳐 주는 놀라운 귀절이다. 세상에서 무엇이
되고자 하는 자는 허영에 들떠 방황할 수 밖에 없으며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을 향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은 그의 생애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일이
라고 확신할 때에만 하늘로부터 온 가르침에 순종할 각오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위선자들이 하나님의 존전에서 스스로를 높이는 편벽된 확신은 세상적인 야
망보다도 더 큰 장애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서기관들이 역시 이병으로 고생하고 있었
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대답은 용이하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무지한 자들을 기
만하는 데 쓰고 있던 거짓된 경건의 말을 그들에게서 벗겨버리기를 원하셨다. 그러므
로 그리스도께서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듯이 그들의 악덕을 지적하여 줌으로써, 그들이
인정받기를 원하는 내용과 그들의 실제 상태는 매우 차이가 있었음을 명백히 하고 있
다. 또한 위선이란 스스로를 영광스럽게 함으로 하나님께 대적하고 있지만,세상에서
그리고 사람 앞에서의 위선은 항상 야망에 차 있는 것이다. 과연 거짓된 억측으로 우
리를 부풀게 만드는 것은 허영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허영에 차 있을 때 하나님의
판단보다 우리 자신의 판단과 다른 사람의 판단에 더 의존하게 된다. 참으로 자신의
재판관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러내 놓는 사람은 반드시 통회하는 심령으로
낮아질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 한 분으로부터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부
끄러움과 수치심에 싸여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의 품으로 도피할 수 밖에 없다. 하나
님을 바라보는 자들은 자신이 정죄되고 잃어진 상태에 있으며 그리스도의 은혜밖에 자
랑할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을 찾는 순수한 욕망은 언제나 겸
손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이 귀절의 말씀에 관한 한,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복음의 가르침을 받아들
일 준비를 갖추는 길은 스스로의 생각을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여 그들이 상
대해야 할 분은 하나님 자신임을 심각하게 숙고하도록 함으로써 스스로를 기만시키는
일상적인 아첨의 말은 잊어버리고 그들의 양심을 직시하는 길 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야망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이리저리로 유인하고 있는 이 때에, 복음의 가르
침을 받을 준비를 갖춘 사람들이 극히 적은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복음 전파를 게을리 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허영에
들떠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의 눈에 낮아지게 되고 멸시를 받는
다 해도 우리는 더욱 더 이 한 가지 일에 열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내적인 곤핍함
을 겪게 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여김을 받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5:45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 완악하고 고집이 센 사람들이 애정
어린 경고와 가르침에서 유익을 얻지 못할 때 하나님의 심판대로 소환되지 않으면 안
된다.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비웃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실제적으로 원수시하는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호의적이라고 상상하며 안전하다는 듯이
빈 아첨의 말로 농담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의 복음을 짓밟아버리
는 우리의 원수들은 마치 자기들이 하나님의 가장 귀한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교만하
게 행세하고 있다. 왜냐하면 가톨릭 교도들에게 기독교는 그들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
이 아니라고 설득시킬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리스도와 지금 논쟁을 벌이고
있는 서기관들이 그와 똑같은 자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을 경멸하는 자들이면
서도 당당하게 모세를 자랑하고 그리스도를 대항하는 방패로서 모세를 내세우기를 주
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게서는 자기가 그들이 당해낼 수 없는 강력한 원수가 된
것이라고 그들을 협박했다면 그것은 완전히 경멸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주
님게서는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라고 그들에게 통
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직분과 모세의 직분의 차이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율법의 특성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송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도께서는 그것을 의도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이 모세에 대한 존경심을 거짓되이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외식하는 자들의 확신을 흔들어 놓았을 뿐이다. 이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교황에게 가톨릭 교인들이 거짓되이 그들 편에 속한다고 내세우고 있는
교회의 거룩한 사도들보다 그들에게 더 적대적인 원수는 없을 것이라고 반문하는 것과
같다. 나아가서 우리는 이에서 그릇된 이유로 성경을 자랑하지 않도록 배워야 할 것이
다. 우리가 참된 믿음으로 순종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을 예배하지 않는다면, 하나
님께서 그의 증인으로 세우신 모든 사람들이 마지막 날 일어나서 우리를 송사할 것이
다. 주님께서 그들이 '바라는 바 모세'라고 말씀하실 때 그는 유대인들의 미신을 송사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주님은 그들의 완악한 고집으로 모세를 자기들 편에 모
셔 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하여 모세의 도움에 의지하는 것은 잘못된 일임을 보여
주고 있다.

5:46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 주
님은 모세가 그들의 송사자가 될 이유를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모세의 가르
침을 거절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종들이 말씀을 전할 때 그 말씀을 멸시하는
것보다 그들에게 더 큰 모욕은 없다. 주님께서 그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로 인치신
사람들은 또한 말씀을 지키는 변호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의 모든
선지자들에게 두 가지 명령을 내리셨다. 첫째는 경건한 자들의 구원을 위해 교사가 되
는 것이고, 둘째는 그들의 증거로 패역한 자들의 마음을 찌르는 일이다. 모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다고 한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며 율법의 혼임
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긴 증명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이 점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 말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 싶어한다면, 나는 그에게 히브리서를 자
세히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의 설교가 이와 일치하고 있는
데, 거기에 인용되고 있는 구약의 내용에 유의할 것을 또한 권하고 싶다. 물론 나는
모세가 터놓고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있는 곳이 별로 많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
나 성막과 제물과 예식이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보여준 첫번째 모형과 일치하는 그림
자가 아니었다면 그 요점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없다면 모세의 모든
사역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만다. 우리는 여기서 모세가 계속해서 백성을 그리스도
안에서 확인된 조상들의 언약으로 상기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
를 언약의 우두머리와 원천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언제나
중재자를 찾고 있던 거룩한 조상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이에 대해 더
깊게 부연하는 것은 내가 목적하는 간결함에 어긋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5:47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 그리스도는 여기서
자기 자신보다 모세의 말에 더 권위를 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복으므이 소리에 의하여 천지가 진동한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을 듣는 대상에 따라 그의 말씀을 조절하고 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의 권위는 논쟁할 여지가 없이 거룩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모세보다 열등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같은 목적으로 '그의 글'과 '내 말'을 대조시켜서 말씀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말하자면 탁자 위에 써 놓은것과 같은 하나님의 진리가 그들에게 아무런 귀위를 지니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믿지 않는 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