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태초에 - 온 우주 창조의 시작을 선포하는 창 1:1을 연상시키는 본 구절을 매개로하여, 저자 요한은 구약과 일관된 흐름으로 신약의 복음서를 쓰고 있다. 즉 계시의 시작인 천지 창조의 기사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에 이르러 계시가 완성된다고 볼때,본 구절은 이 복음서의 서두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태초'(*, 아르케)라는 용어는 원래 '시간과 공간의 시초'를 의미한다. 따라서 고대 그리이스의 자연철학자들은 '만물의 시초(始初)'라는 뜻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여기서는 처음 시간의 특별한 한 시험 뿐만 아니라 초(超) 시간적인 영원을 나타내는말로 사용되었다(1:1-18 주제 강해 '베레쉬트와 엔아르케의 의미' 참조).
말씀이 - 원어상 '말씀(* , 로고스)은 '수집', '계산', '목록', '말' 등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용어는 철학적인 의미로서 (1) 어떤 법칙, 의미, 구조의 내용, (2) 형이상학적 실재나 사물을 이해할 수 있는 법척, (3) 우주론적인 실재들을 표상하는 개념 등으로 사용되었다. 이 용어를 신학적 의미로 전환시킨 사람은 플라톤 철학에 심취했던 1세기의 유대인 철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a)였다. 그는 '하나님의 로고스'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과 세상을 연결하며,인간을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중재자(즉 대변자거나 제사장)로 부각시키는 것이라고하였다. 즉 로고스란 하나님의 창조 늪력의 총화(總和)이자 이 세상을 질서있게 다스리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성경 전반에 걸쳐서 '로고스'는 주로 하나님의 권능(시 147:15;148:8;히 4:12)과 계시(사 2:1;렘 26:1;딤전 5:17)를 의미한다. 특히 요한은 본절에서 '로고스'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Deity)을 부각시킴으로써, '로고스'가 바로 계시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임을 보여준다. 본절에서와 마찬가지로 14절에서의 '말씀'에서도 '로고스'의 인격성이 뚜렷이 표현되고 있다. 본서에서 '믿다'(*, 피스튜오), '사랑'(* , 아가페)과 더불어 주요 개념으로 쓰인 이 용어(로고스)는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강화(講和)로 구성되어 있는 본서의 특성까지도잘 드러내고 있다(1:1-18 주제 강해 '로고스 개념의 배경과 그 의미' 참조).
계시니라 - 존재를 나타내는 동사 '에이미'(* )의 3인칭 단수 미완료형 '엔'(* )을 사용함으로써 요한은 (1) '로고스'가 태초의 어느 시점에서 창조된 것이아니라 계속하여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보여줌과 아울러 (2)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과 영원성을 드러낸다. 따라서 당시의 이방 철학의 인본주의적 경향과 유대교적 신관(神觀)의 오류를 분쇄하고, 세상의 시초 이전에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존재하였다는, 그리고 지금도 존재하고 계시다는 엄연한 사실을 선포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동등하게 선재하신 그리스도의 초시간적 영원성을 무시하고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라고 주장한 아리우스는 니케아 종교 회의(A.D. 325)에서 이단으로규정되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 '하나님과 함께'(* ,프로스 톤 데온)에서 전치사 '프로스'(* ) '...와 함께'란 뜻의 전치사들(*, 엔;* , 메타;* , 파라;* , 쉰)과 의미상 유사하다. 그러나 후자인 여러 전치사들이 주로 정적(靜的)인 공존(共存)을 나타낸다면, 전자인 '프로스'는동적(動的) 공존을 나타낸다. 따라서 후자는 같은 시간에 동일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며, 전자는 서로간의 친밀하고도 부단한 인격적 관계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 전치사는 '서로 마주 대하는'이라고도 해석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전치사를통하여 우리는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셨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와 하나님 사이의 영화로우신 '친교'(Robertson)를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삼위 일체 교리의 근간'이 되고 있다(Calvin).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혹자는 본문에서 '하나님'(* , 데오스) 앞에 관사 '호'(* )가 없기 때문에 말씀이 절대적인 신성을 지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그렇게 볼 경우 '말씀'은 단지 종교적 신성(神性)을 지니고 있는 막연한 존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당시 로마 제국 내에서 풍미하던 영지주의(마태복음 신약서론,'이방 종교' 참조)의 학설대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된 존재로서 하나님보다는 하등의 신으로 전락할 위험성도 내포할 수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씀'이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표현된 것은 헬라어 문법상의 특성을 관찰하면 잘 알 수 있다. 헬라어 문장은 주어와 술어의 어순(語順)을 바꾸어 쓸 수 있다. 따라서 헬라어에서는 주어와 술어의 구분을 어순으로 결정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헬라어에서 주어와 술어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관사이다. 따라서 주어는 관사를 가지고있고, 술어는 주어와의 구분을 밝히기 위해 관사를 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문 '카이 데오스 엔 호 로고스'(* )에서 '말씀(로고스)이주어, '하나님'(데오스)이 술어임을 알 수 있다. 결국 본문은 성자 하나님의 신성에대한 간결하고도 명확한 선포이다. 이러한 성자 하나님의 참 모습은 20:28의 도마의고백에서 확실하게 밝혀진다. 한편 3개의 문장으로 기술된 본절은 원문 구조상 '말씀이 계시니라'(* ...호 로고스 엔...)는 주어와 동사를 중심으로 (1)말씀의 선재성과 영원성, (2) 인격성 그리고 (3)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드러낸다.이러한 선언은 요한복음 전체의 기독론(Christology)을 대변한다. 따라서 본절은 그리스도에 관한 심오한 내용을 단 세 문장으로 간결하게 함축한 것으로서 복음서 문장 양식 중 백미(白眉)라고 하겠다.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 1절의 앞 두 문장의 내용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반복은 내용을 강조하기 위한 전형적인 히브리적 표현 방법이다. 예로부터 유대인들은 자녀 교육시 반복을 통해 기억시키는 학습법을 흔히 사용했다(출 13:9). 특히 시편의 반복적 찬양시들(시118편;136편)과 잠언의 반복적 교훈들(잠1:8;4:1-4;6:20;13:1)은 이스라엘의 반복 교육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반복 교육은 내용을 강조하고 그것을 상대방(피교육자)에게 선명하게 주입시키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따라서 어려서부터 히브리적 교육을 받았던 저자 사도 요한은 율법의 완성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철저히 전파하고 교육시키기 위하여 반복적인 문장을 자주 소개했다(3절;3:3, 5, 11등). 특히 '진실로 진실로'(* , 아멘 아멘)라는 표현이 다른복음서에서는 단 한번도 사용되지 않았는데 반해서 요한 복음에는 무려 25회나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사도 요한의 교육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요한일서도 사랑을주제로 한 문장의 반복을 심층적으로 구사하면서 과거의 성도들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사랑의 중요성을 마음속 깊숙이 심어준다. 전설에 의하면 요한은무척 늙어서 강대상에 올라 갈 수 없었을 때, 제자들이 그를 의자에 앉히고 강대상에올려 줄 때마다 '어린 아들들아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늘 동일한 말씀을 전했다.같은 말만을 반복하자 제자들이 그 이유를 여쭈었다. 그때마다 요한은 '이것이 주님의교훈이니 이것만 실천하면 족하다'고 하였다고 전한다(Jerome). 이렇듯 복음서와 서신의 집필 그리고 죽을 때까지 주의 말씀을 꾸준하게 반복적으로 선포한 사도 요한의 자세에서 말씀에의 사랑과 말씀전파의 숭고성을 볼수 있다. 끊임없이 말씀을 상고(詳考)하고 배우는 자세는 구약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말씀과 더불어 살아가는 성도들의 참다운 태도이다(시 119:9, 105;살전 2:13).
=====1:3
만물이 - 원문상 '만물'(* , 판타)에서 관사가 없다. 따라서 '만물'이란현재의 시점에 국한된 전 우주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에 존재하는전 우주를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이 용어는 역사와 더불어 존재하는 만물을 의미한다. 이와는 다른 관점에서 사도 바울은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골 1:16)이라고 공간적인 의미로서 만물을 정의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 이것의 헬라어 '디 아우트'(* )라는 표현은 '말씀을 통하여'(공동번역)라고 번역하는 것이 의미 전달상 명확하다. 이러한 표현은 '만물이 주로 말미암고'(롬 11:36)라고 표현한 바울의 말씀과 일맥 상통한다. '...말미암아'에 해당하는 전치사 '디아'(* )는 성경 전반에 걸쳐 사용된 것으로서 주로 (1)창조(히 2:10)와 (2) 구원(10:9;롬 5:1, 21) 사역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적역할을 잘 드러낸다. 본절에서 이 전치사는 창조시의 그리스도의 사역을 가리킨다. 1절에서 언급한대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고려한다면, 창조시그리스도의 사역은 성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수단으로서의 사역이 아니라 '우리의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창 1:26)라는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대등한 인격적 친교를 바탕으로 한 사역이었던 것이다.
지은바 되었으니 - 헬라어 '에게네토'(* )는 '...이(존재가) 되다'라는 뜻을 지닌 헬라어 '기노마이'(* )의 3인칭 단수 과거형이다. 이 동사는 '구성되어지다'(constructed)의 뜻이 아니라 '...이 되다'(become)는 의미를 지니는 바, 이는 그리스도께서 무(無)의 상태로부터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암시한다.그리고 이 동사는 1절의 '계시니라'(* , 엔)와 대조되어 그 의미를 명확하게 한다.즉 본절의 동사는 피조된 것을 1절의 동사는 존재성을 나타낸다. 또한 본절에서는 '만물'(all things, NIV)이 주어인데 반해서 1절에서는 '말씀'이 주어이다. 이로써 (1)말씀은 존재하고 있었으며, (2) 만물은 말씀을 통하여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만물이 하나님의 우주적 사역의 현장이며, 수단임에 비하여, 말씀은 하나님과더불어 항상 존재해 왔다.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 '생명'으로 번역된 헬라어 '조에'(* )는 '영원한'(* , 아이오니오스)이라는 형용사를 수반하여 '영생'이라는 용어로 자주등장한다(3:15, 16; 요일 5:12). 그런데 요한은 단지 '조에'라는 단어로써 영원한 생명을 묘사할 때도 많으며 본문의 경우도 그러하다. 한편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생명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시 36:9) 생명의 주인(시 104:29, 30)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구약성경의 생명관이 반영된 것이 본문의 '생명'9* , 조에)이다.따라서 저자 요한은 '생명'이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나타낸다.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고 있는 생명이 영원한 생명(영생)임을 명시한다(14:6;17:3). 따라서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영접하는 성도들에게는 영생이 부여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 본원적(本源的)으로 존재하고 있는 영생을 매개로 하여영원한 하늘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이다(엡 2:19).
사람들이 빛이라 - '빛'이라는 용어는 단순히 자연 현상인 빛을 가리키거나 빛과어두움을 절대적 차원에서 대치시키는 이원론적인 종교 사상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오히려 빛(the light, NIV)에 대한 개념은 구약성경의 맥락에서 발견할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1) 빛을 발하는 구름(욥 37:15)이나 불기둥(시 78:14) 가운데 현현하시는 분 (2) 감추인 것을 드러내시는(욥 12:22) 빛나는 분(사 42:16) (3) 빛과 어두움의 주(암 5:8) (4) 이스라엘의 영원한 빛(사 60:1, 2)으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요한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참되고 영원한 생명이 곧 인류에게 임할 참빛이라는 사실을피력하고 있다(1:9). 그리고 본절의 두개의 문장에서 '에이미'(* , '존재하다')의 3인칭 단수 미완료형인 '엔'(* )을 두 번 사용함으로써 이러한 생명과 빛은창조되었거나 형성된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삼위 일체 하나님 안에 존재하고 있었던것임을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본절은 성도들로 하여금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시 36:9)라는 기쁨의 찬양에 이르게한다.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 빛과 대조되어 나타나는 '어두움'(* , 스코티아)은 앞절에 비추어 볼 때, 생명을 가로막는 죽임의 세력, 즉 사단의 세력과 그 세력하에서 부단히 죽어가는 이 죄악된 세상을 상징한다. 원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그리고 빛이 어두움 안에서 비추고 있다'(* , 카이토 포스 엔 테 스 코티아 파이네이)라는 뜻이므로, 본문은이 죄악된 세상과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역사적인 성육신을 통하여 죄악된 세상인 이세상 안으로 임하셨다는 뜻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과 승천 후에 생명의 빛은소멸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요한은 '비추다'의 헬라어 '파이노'(* )의 3인칭 현재형을 구사함으로써 말씀의 빛이 쉼없이 비추고 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생명의 빛은 지금도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16:13) 성도들에게 비추이며 생명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빛의 군사로서 어둠의 세력과 끝까지 투쟁하는 능력을 공급하고 있다(딤전 1:18;6:12).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 '깨닫지'의 헬라어 '카테라벤'(* )의 원형 '카타람바노'(* )는 본래 '굳게 잡다'라는 뜻으로서 본문에서는 (1) '이해하다', (2) '이기다'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여기서는 '깨닫다','이해하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죄악된 세상 속으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처형했다는 것이 바로 본서의 전반적인 맥락이다.이러한 증거는 예수의 말씀에서 여러 차례 나타난다(4:5-26,31-38;5:10-47;6:25-65;7:14-36;8:12-59;9:39-10:18, 22-39;12:20-36;13:1-16:33). 따라서 저자 요한은 영적으로 무지하여 생명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한 이세상의 정체(正體)를 준열하게 드러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어두움의 세력에 휘말린세상이 이제 재림하실 그리스도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요한계시록에 기록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동사 '카테라벤'은 현실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1)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죄악된 세력의 실상을 깨우쳐 주며 (2) 이 죄악된 세력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빛의 세력을 궁극적으로는 '이길 수 없는'는 사실을 보여준다(히 11장).
=====1: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 1-4절까지 '말씀이신 그리스도'에대해 함축적으로 서술한 저자는 여기서 잠시 1세기 초반 팔레스틴에 영적인 쇄신을 일으키며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위해 터를 닦았던 한 인물을 소개하고 있다. 본문은 세가지 단어를 실마리로 하여 그 인물의 특성을 보여준다. (1)전치사 '파라'(* ,'...에게서')는 1절의 전치사 '프로스'가 서로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나타낸다면, '파라'는 친근하기는 하되 동등하지 않은 관계를 나타낸다. (2) '보내심을 받은'(* , 아페스탈메노스)은 '보내다', '파송하다'라는 뜻을 지닌 '아포스텔로'(* )의 주격 단수 남성 분사로서 70인역(LXX)에서는 메시지나임무를 위임받아 파송될 경우에 쓰였다. 이는 주로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보내실 때 썼던 용어이다(사 6:8). 이러한 사실은 이 인물이 남성이며,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그리스도의 선구자였음을 나타낸다(7, 8절). 그리고 '아포스텔로'의 완료 수동형을 사용함으로써 이 인물이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명대로 사역했던 사람임을 보여준다. (3) '났으니'(* ,에게네토)라는 부정 과거형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그 사람이 하나님과 동등하게 존재하는 말씀과는 달리 단지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였음을 보여준다.
이름은 요한이라 - 앞 문자에서 한 인물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공관 복음에서 '세례 요한'(마 3:1;막 6:14, 25; 눅 7:20)이라고 명시한 것과는 달리 그저 '요한'이라고만 명명한다(25, 19, 20, 26, 28절). 이는 공관 복음서 기자들이 독자들의이해를 위하여 세례 요한과 사도 요한을 구분할 필요가 있었던 반면에 사도 요한은 자신의 저작이므로 이를 구별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1:7
저가 증거하려 왔으니 - 본절에서는 '증거자'로서의 세례 요한의 사역이 간략하게요약되어 있다. '증거'(*, 마르튀리아)란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증언하다'라는뜻으로서, 요한의 사역이 예수의 사역처럼 획기적인 신기원(新紀元)을 이룬 것은 아님을 보여 준다. 이는 세례 요한 자신이 스스로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23절)로비유한 데서도 드러났다.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 증거자 세례 요한의 증거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빛'에대해서는 4절 주석을 참조하라.
모든 사람 - 세례 요한의 증거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될 대상들을 명시한 '모든 사람'이란 일차적으로 세례 요한의 증언을 들은 모든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그러나여기에서 '모든 사람'이란 유대 군중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마치 아벧이 비록 죽임을 당하였어도 오히려 믿음으로 증언한 말씀이 남아서(히 11:4) 그리스도를 증거하여영접케 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처럼, 그의 증거는 시공의 범위를 점점 더 확산하여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까지 미친다고 볼 수 있다.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 '자기를 인하여'의 헬라어 '디 아우투'(*)라는 표현은 3절의 '그로 말미암아'(* , 디 아우투)와 같은 단어이나각기 그 성격을 달리한다. 3절에서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창조시의 중보적 사역을나타낸다면,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예비하기 위한 중간 매개로서의 요한의사역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와 같은 요한의 사역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하려 함에 있었다. 비록 방식에 대해 일말의 의구심을 표했던 적이 있었을지라도(마 11:2, 3). 요한복음에 언급된 바대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증거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항상 그리스도의 영광을 찬양했던 사람이다(15, 26, 27, 29-34절;3:28-30).
=====1:8
그는 이 빛이 아니요...증거하러 온 자라 - 6, 7절에 나타난 요한의 본질적 특성과사역을 간략하게 요약한 본절은 전형적인 히브리적 표현 방법으로서(2절 주석 참조)요한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올바르게 정립(定立)하고 있다. 저자 요한이 세례 요한과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확실하게 명시했던 이유는 세례 요한의 사역의 참뜻을 알지 못하고, 그가 죽은 후 하나의 당파로 고착되어 버린 요한의 제자들을 깨우치기 위함이었다. 특히 저자 요한이 전도와 교육을 집중했던 에베소에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적지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행 19:2, 3).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 계시를 소유한 초대 교회로서는 요한의 제자들을 복음의 빛 안으로 인도하는 것이 하나의 과제였다.
=====1:9
참빛 - 6-8절에 걸친 세례 요한의 소개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던 4, 5절의 주제가본절에서부터 다시 이어지고 있다. '참빛'(the true light, NIV)으로 번역된 원문은'그는 참빛이시다'(* , 엔 토 포스 토 알레디논)이며, '말씀이 곧 참빛 이었다'(공동번역)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여기서'참'(* , 알레디논)은 사도 요한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로서 '거짓에 반대되는 참'(* , 알레데스)이 아니라 '불완전을 완전케 하는 참'(Calvin)을 의미한다.따라서 '참'(true, NIV)이란 용어는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둠의 세력에 대항하여싸우는 빛의 세력인 성도들(롬 12:13;엡 5:8;살전 5:5)의 참된 주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또한 참빛이신 주님께서는 말세에 어두움의 권세를 종식(終熄)시키고 빛의 왕국인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이다(계 21:9-27).
세상에 와서 - '세상'의 헬라어 '코스모스'(* )는 원래 질서와 연관된의미를 지닌 용어로서, '각부분들이 모여서 잘 구성되어 있는 것'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이 용어는 개인이나 단체 또는 국가 등이 질서있는 상태에 있을 때 사용될 수 있었다. 그후 헬라인들은 각각의 통일된 구성체들(* , 코스모이)이 질서와 조화로써 완전한 통일체를 형성한 우주를 '코스모스'라고 불렀다. 그리고 각각의 '코스모이'들이 '코스모스'로 되는 근본적인 규준(規準)이 바로 '로고스'(* )라고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이러한 개념을 도입하지 않았다. 즉 신약성경의 기자들은당시 헬라적 문화권에서 통용되는 헬라어로 성경을 기록하고 복음을 전파하였음에도불구하고 '코스모스'의 개념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사용하였다. 즉 신약성경에서 '코스모스'란 (1) 구약성경에서 사용한 '하늘과 땅'(출 20:11)과 동의어인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우주'(롬 1:20) (2) 인간 역사의 현장인 '지구'(롬 1:8) (3) 타락한 '인류'(1:29)등을 가리킨다. 따라서 성경적인 관점에서 본절의 '세상'이라는 개념을 요약한다면,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창조되었지만, 인간의 타락과 함께 부패된 곳, 다시 말해서 어두움의 세력인 사단의 권세가 지배하는 곳이다.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 각 사람(* , 판타안드로폰)이란 인류라는 집단 또는 어느 단체와는 무관한 개념으로서, 실존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개체적인 의미이다. 그리고 여기서 빛은 참빛이신 그리스도의 존재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비취는 빛')이라는 의미도 포함한다.따라서 참빛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각 개인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신다는 뜻이다.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이 구약 시대에서처럼 한 민족, 한 국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죄악된 세상에서 중생(born again,NIV)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성도들 개개인을 통하여 끊임없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이요 신부인 교회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서로 차별이 있을 수 없으며, 성도 하나 하나가 모두 귀한 형제 자매들임을 깨닫게 된다.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 엔 토 코스코 엔) - 1절에서는 영원전부터 그리스도가 계셨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면, 본문에서는 이세상에 오셨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 기간을 보여준다. 학자들은 본문에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계셨다는 사실을 두 가지로 해석한다. (1) 창조 이후 성육신하기 전까지 영(靈)으로서세상에 계신 것을 가리킨다는 견해(Godet, Westcott). (2) 성육신부터 승천하시기까지의 예수의 생애를 가리킨다는 견해. 전자는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는뒷 문장에 착안한 견해인 반면에 후자는 9절의 말씀과 연관시켜 해석하고 있다. 이에대한 올바른 해석을 취할 수 있는 방편은 본절의 문장을 중심으로 하고 9절과 11절의연관 관계를 살펴 보는데 있다. 주지하다시피 본절은 세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제의 본 문장을 일단 차치하고 본절의 전체 의미를 보면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으나 세상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11절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땅에 왔지만 자기의 소유들로부터 따돌림당했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10절과 11절은 문장의 전체 의미에 있어 일치한다. 그러므로 본절의 처음 문장은 이 세상에 참빛으로오신 그리스도를 묘사한 이 세상에 참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묘사한 9절과 연관된다.그러므로 앞의 두 학설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 세상의 창조주이자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실 그리스도에 대한 세상의 무지를 보여준다. 어둠에 잠긴 죄악된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는(1) 목수의 아들(마 13:55) (2) 귀신들린 자(마 12:24;막 3:22)에 불과하였다. 더구나예수를 따르던 군중들도 예수를 기적 행위자 내지는 정치적 메시야로 판단했다는 사실을 연상한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세상의 무지함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여기에서 '알지'(* , 에그노)는 '알다'(* , 기노스코)의 3인칭 단수로서 (1)감각적인 지각(* , 아이스다네서다이) (2) 사물들에 대한 지식(* , 도케인), (3) 선천적인 지식(* , 에이도)등을 나타내는 용어들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기노스코'는 후천적, 객관적 관찰로써 온갖 대상(사물, 인간, 불변하는 영원한 실재)에 대해 파악하는 지식까지도 포괄하는 용어이다. 특히 마1:25에서는 남녀간의 성적 관계를 의미하는 구약성경의 뉘앙스(창 4:1;민 31:17)를 살림으로써 이 용어가 인간 간의 긴밀한 관계를 통한 '앎'까지도 표현함을 알 수 있다.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서 이 용어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실히 아는 것이나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를 의미하는데 주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도 '앎'이며, 예수와 성도들의 관계도 역시 '앎'이다(10:14, 15). 그리고 성부와 성자께서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을 얻는 길이다(4절;5:26;17:3). 이러한 '앎'은 사랑에 의해 평가되고, 사랑을 매개로하여 계속 유지된다(요일 4:7-12). 결국 '알지못함'과 '앎'은 '미움, 다툼'과 '사랑', 그리고 '영원한 심판'과 '영생'으로 귀결된다.
=====1:11
자기 땅에 - 헬라어 '타 이디아'(* )는 '자기 자신의'(* ,이디오스)라는 형용사의 중성 복수형으로서 19:27에도 '자기 집'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용어는 '자기 소유의 거처'를 가리킨다. 세상은 말씀이신 그리스도의소유이며, 거처이다. 아무리 세상이 타락되었고 사단의 세력이 흥왕(興旺)할지라도 세상의 궁극적 소유권은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이다.
자기 백성 -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고(창 18:19;신32:9) 이 세상의 죄악을 감당하고 사단의 권세와 싸울 제사장 나라가 되는 특권을 부여받았다(출 19:6). 그러나 타락된 세상 속에 휘말려버린 이스라엘은 자신의 역할을수행하는데 실패하였다. 따라서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본래 그리스도의 소유인 선민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고배척하였을뿐만 아니라 극랄하게도 십자가 처형을 자행하였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결정적으로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영광스런 특권을 상실하였다. 이와 같은 '소유'(*, 타 이디아)라는 관점은 선민 이스라엘에서 예수의 제자들(13:1)로 넘어간 것이다.이 영광스런 특권은 영생과 아울러 영원한 것이다(계 20:6). 이렇듯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신앙은 가혹하고도 잔인한 로마 제국의 박해에서도 더욱더 성도들을 강건케 하였음을 볼 때, 현대의 물신주의(物神主義)와 기타 세속적 이데올로기(ideology)가 판을 치는 세상 속에서 복음의 군사로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소유'라는확신과 긍지를 소유함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 '영접하다'의 헬라어 '람바노'(* )가 주로 개인적인 영접을 의미하는 데 비해 본문의 '파랄람바노'(* )는 집단적 공동체적 영접을 나타낸다. 따라서 예수께서 '선민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환영받지 못했다는 본문의 내용은 예수의 공생애 기간, 특히 예수의 체포와 제자들의 도주(逃走), 유대 당국자들의 모의와 재판, 그리고 예수의 죽음을 요구하는 군중들의 함성,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군중들의 조롱이라는 역사적 상황을 연상케 한다. 한편 저자 요한은 '깨닫지 못하더라'(5절), '알지 못하였고'(10절), '영접지 아니하였더라'(본절)라는 세 구절을 통하여, 창조주이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배척한 이세상의죄악과 부조리(不條理)를 폭로하고 있다. 이는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 1:3)라는 과거 이스라엘의 실상과 대동소이한 현상이다. 따라서 예수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알탉이 그 새끼를 날개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37)라고 탄식했으며, 스스로 선민이라 자부하던 자들을 '마귀의 자식이라 선언하셨다(8:44).
=====1:12
영접하는 자 - 원문상으로는 역접 접속사 '데'(* ), '그러나'를 사용함으로써세상의 반응과 성도의 반응을 극명하게 대립시킨다(5, 10, 11절). 주지하다시피 11절의 '영접지 아니하였으나'가 집단적 공동체적 거부를 의미한다면, 본문에서 '람바노'의 3인칭 단수 부정 과거형인 '엘라본'(* )은 개인적인 영접을 시사한다.즉 구원이 하나님과 개인과의 단독적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저자 요한은보여준다. 그리고 '영접한다'는 것은 단순히 '신뢰하다'(trust)라는 의미보다 더 강력한 표현으로서, 한개인이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권세를 주셨으니 - 이 문장은 자체 내에 파격(破格)구문을 가지고 있다. 즉 '아우토이스'(* , '자들에게는')가 선행 관계적을서술하는 여격으로 쓰여져 있다. 이는 헬라어 문장에 아람어적 관용 어법이 침투한 경우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저자가 아람어 문화권과 헬라어 문화권의 양대 지류에 속한상황에서 살았기 때문에 자주(본서에서 27회) 발생하는 파격 구문인 것이다. 또한 '그이름을 믿는 자들'에서 그리스도를 '이름'으로 칭한 것도 히브리 전통에 입각한 아람어적 표현이다. 따라서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그 이름을 지닌 사람'을 믿는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믿는다'(* , 피스튜오)의 현재 능동태 분사 여격인 '피스튜우시'(* )을 사용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부터끊임없이 계속되는 강력한 신앙'을 나나낸다. 따라서 '그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역사적 생애와 그의 구원의 능력 그리고 그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믿는다는 단순한 사실을 뛰어넘어 그리스도를 '개인마다'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다는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한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테크나 데우 게네스다이)이란 표현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영접한 자의 신분 규정이다. 즉 '어두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의 놀라운 변화가 바로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음을 본문은 명시한다. 또한 여기서 '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네스다이'(* )는 '기노마이'(*)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던 것이 생겨나서 영원히 계속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역사적 시점에서의 신분의 변화가초역사적 지평에까지 열려져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자녀'에 해당하는 원문은 출생과직결되는 용어인 '테크논'(* )-이와 유사한 의미로서 사용되는 '휘오스'(*)는 '상속자'라는 뜻을 내포한다(갈 4:5, 6)-인바, 이는 죄악 세상에서 구원받을 성도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한 본질적인 변화를통해 자녀가 되는 길은 오직 중생으로만 가능하다(3:3-9;벧전 1:3, 23). 한편 그리스도를 믿고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곧 '권세'를 부여 받음이다. 여기에서 '권세'란 헬라어로 '여수시아'(* )이다. '여수시아'는 성경에서 주로(1)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눅 12:5;골 1:13), (2)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부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 앞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과정이 묘사되었다면,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의 출생(중생)의 근원이 나타나있다. 먼저 본문에서 저자는 부정사 '우크', '우데'(*, )를 사용하여 중생에 이를수 없는 부정적인(negative) 세 가지 요인 ((1)혈통, (2) 육정, (3) 사람의 뜻)을 나열한다. 첫째로, 혈통(* , 하이마톤)은 '피'나 '혈연'을 의미하는 '하이마'(* )의 복수 소유격으로서, 육체적인혈연 관계를 의미한다. 혈연 관계가 구원과 무관하다는 사실은 세례요한과 예수께서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부했던 유대인들을 규탄할 때 잘 드러난 바이다(8:39-44;마3:7-9). 둘째로, 육정(* , 델레마토스 사르코스)이란 '육체적인 욕망'(fleshly desire, NEB)이란 뜻으로 1차적으로는 성욕을 비롯한 인간의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가리킨다(엡 2:3). 더 나아가 2차적으로는 성령의뜻에 거슬리는 모든 육체적 욕구나 세상적 정욕을 통칭한다(고후 11:18;갈 5:16). 저자 요한이 타락한 세상을 어두움으로 정의했듯이, 빛이 없는 어두움 속에 처한 인간의육체적 욕구와 이로 인한 가치 체계(사회적 명망, 권력, 부)로써는 구원이 불가능함을보여준다. 셋째로, 사람의 뜻(* , 델레마토스 안드로스)이란 절대자에게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의 이성적(理性的) 노력이나 수양, 율법 준수 등을 통칭한다. 이러한 태도는 앞의 두 가지 요인보다 더 고상할지 모르지만 이도역시 구원에로 인도하지는 못한다(롬 3:19, 20;고전 1:20, 21). 따라서 위에 열거한세 가지 조건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무관한 것이다(고전 1:22-25).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타락한 세상에서 비롯된 인본주의적 구원의 욕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세상에서 육체를 따라 의롭다 여김을 받을 자는 하나도 없다(롬 3:20). 결국 저자는이 세계의 절망(어두움)을 묘사하며, 인간 스스로의 구원의 길이 근본적으로 막혀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죄악된 인간이 인간을 인도한다는 것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부조리이며(마 15:14), 그 인도자는 도둑이며, 삯꾼 목자에 지나지 않는다(10:10-13).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 원문에서 이 문장은 강한 반전(反轉)을 의미하는 접속사 '알라'(* )가 먼저 나타난다. 이 접속사는 8절에서 세례 요한(증거자)과 그리스도(빛)에 대한 본질적인 차이를 묘사하는 데 쓰였으며, 본문에서는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 구원 수단과 신본주의적(神本主義的) 구원 간의 대립을 극명하게보여주고 있다. 본문은 어둠 속에 빛이 비추듯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초자연적, 초역사적 성격을 보여줌으로써, 구원받은 성도로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케 하고 겸손하게 주의 뜻을 따르는 성도의 자세를 견지(堅持)케한다. 이러한 영적 출생의 비결에 대해서는 3:1-15절 주석을 참조하라.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 본문은 9절에 서술한 성육신 사건을 다시 언급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육신'(* , 사르크스)은 육체적 존재를 의미한다(갈 4:13). 따라서'그리스도가 인간으로 오신 것처럼 보였으나 육체로 오시지 않았으며 그의 수난도 하나의 가상(假像)이었다'고 주장했던 영지주의의 가현설(Docetism)을 본문은 '육신'이라는 한 단어로 여지없이 붕괴시킨다. 한편 '사르크스'는 일반적으로 '몸'을 의미하는'소마'(* )와는 다른 뉘앙스로 쓰였다. 즉 '사르크스'는 주로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신을 의미한다. 바울도 이 용어를 하늘이나 영의 영역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쓰고 있다(롬 1:3,4). 즉 하나님의 지혜와 육체의 지혜, 하나님의 권능과 육체의무기는 서로 반대되며 서로 대적한다(고전 1:24-31;고후 10:4).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육체'는 결코 부합 될 수 없다(롬 9:8). 그러나 이 용어가 그리스도에 대해 쓰일경우에는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체'를 의미하지 않으며(고후 5:21), 단지 인간적인 한계성과 연약성을 지닌 존재임을 나타낸다(히 4:15). 이는 그리스도의 완벽한성육신을 나타낸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증으로서 본서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잘 보여준다. (1) 피곤(4:6) (2) 갈증(4:7) (3) 하나님께 의존(5:19) (4) 슬퍼 눈물을 흘리심(11:35) (5) 분노하심(11:38) (6) 갈등(12:27) (7) 수난과 죽으심(18, 19장) 등.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우리 가운데'(* , 엔 헤민)라는 표현은 10절의 '그가 세상에'라는 말과 내용상 일치한다. 즉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졌으며, 우리 인간들 속에서 발생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천막을치다'란 뜻의 동사 '스케노오'(* )의 부정과거 능동태인 '에스케노센'(*)을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역사성을 실증한다. 따라서 본절은 마1:18-2:23과 죽 2:1-20의 성육신 기사를 함축적으로 요약한 말씀이다. 한편 '에스케노센'이란 표현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러한 해석은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의현현(顯現) 장면과 본문의 전후 내용을 비교해 볼 때 상당한 설득력을 제공해 준다.(1) 성육신하신 예수께서 '임시적으로' 이 땅에 계셨음을 가리킴. (2) '하나님의 임재'를 상기시킴.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방랑할 때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곳으로 정해진 곳이 바로 '장막'이었으며, 특히 요한이 곧이어 '영광'에 관해서 언급한 사실도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 왜냐하면 영광과 장막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출 40:34이하).
(3) 모세에게 주어졌던 계시가 예수에 의해 확연히 밝혀졌음을 보여줌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 '보니'에 해당하는 헬랑어는 '놀라운 광경을 보다'라는뜻의 '데아오마이'(* )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놀라운 상태에서 실제로 목격했다'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이는 아마도 저자 요한이 예수님의 변모*Transfiguration, 마 17:2-8;막 9:2-8;눅 9:28-36)에 대한 회상을 기초로 하여 사용한 용어인 것 같다. 그때 예수는 거룩한 광채와 함께 나타나 보이셨으며, 하나님의 사랑스런 아들이심을 나타내셨다. 이는 시편 기자의 '주의 영광를 저희 자선에게 나타내소서'(시 90:16)라는 간구를 연상테 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와부활은 그 자체로서 어둠 속에서 빛이 환하게 비치듯이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사건으로서 우리 성도들의 영광을 위하여 예정된 것이었다(고전 2:7;벧전 5:4).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 - 저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근원이 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에 있음을 재천명한다. 즉 1절에서 그리스도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나타냈듯이 본문에서도 '...같이', '...만큼'이란 뜻을 지닌 부사 '호스'(* )를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이 영원하신 성부 하나님의 영광과 대당함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독생자'(공동번역, '외아들')라고 번역된 '모노게누스'(*)는 '모노스'(* , '유일한')와 '게노스'(* , '종류', '혈족')의 합성어로서 누가 복음과 히브리서에서 '외아들'(눅 7:12;9:38;히 11:17) 또는 '외동딸'(눅 8:42)을 지칭한다. 그러나 요한에게 있어서 이 용어는 오직 그리스도를 가리키고있으며(3:16, 18;요일 4:9), 누가복음과 히브리서에서 보다 더 심오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1) 하나님의 자녀(12절 주석 참조)중 하나가 아니며, 오히려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서 중보자적 사역을 담당하시는 유일하신 분(3:17;갈3:26)이며, (2)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지니신 대등하신 분(1절 주석 참조;3:18;5:18;10:30;17:5, 24)이며, (3) 이 세상에 하나님을 완벽하게 계시하신 유일하신 분(14:9;빌 2:6, 7)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일부 학자들은 1:1-3절의 내용을 무시하고,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요일5:18의 내용을 증거로 하여 '그리스도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나타내기위해서 사용한 것일 뿐이다(요일 5:18 주석 참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은혜와 진리'(* ,카리스 카이 알레데이아)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용어로 쓰였다(삼하2:6). 사도 요한은 앞 문장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광이 대등하고 등질적(等質的)임을 묘사한 후에 곧 이어서 하나님의 성품인 은혜와 진리가 바로 말씀이신그리스도의 성품과 일치함을 보여준다. 이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그의 지상사역을통해서 하나님의 본성을 드러내셨음을 시사한다(10:30). 특히 기독교적 측면에서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이 인류 구속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신 그 일방적인 행위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다. 한편 '가득차서 넘치는'이란 뜻의 헬라어 서술적 형용사 '플레레스'(* )는 은혜와 진리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속한 은혜와 진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차고 넘치게 흘러 나와 성도들에게 임하여 역사(役事)한다는 것이다.
=====1:15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 사도 요한은 '마르튀레오'(* , '증거하다')의 3인칭 단수 현재 직설법인 '마르튀레이'(* )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세례 요한의 사역을 극적이고도 생생하게 재현시킨다. 그리고 그의 증거 사역이선지자 이사야의 예언과 일치됨을 분명하게 보여준다(사 40:3).
내가 전에 말하기를 - 원어상으로 본절은 '내가 전부터 그에 대하여 증거해 왔다'라고 번역될 수 있다. 따라서 이 표현은 혹자들의 이해대로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한저자 요한의 삽입적인 해석(Westcott, Hort)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세례 요한의 부단한 증언이라고 봄이 문맥상 타당하다.
나보다 앞선 - 앞에서 언급한 '내 뒤에'라는 표현과 대조된다. 즉 (1) 예수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보다 6개월 뒤에 태어나셨으며(눅 1:36), (2) 세례 요한의 사역의 시작뒤에 공생애를 시작하셨다(막 1:14, 15). 그러나 예수가 세례 요한보다 '앞선' 보다근본적인 이유는 (1) 세례 요한이 인간에 지나지 않는 반면에 예수는 창조 전부터 하나님과 더불어 선재하셨던 분으로서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시다(빌 2:6). (2) 따라서신분이나 권능에 있어서 당연히 세례 요한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특히 세례 요한은예수의 우월성을 당연하게 시인하였으며(3:22-30), 예수를 가리켜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눅 3:16), '하나님의 어린양'(29, 36절),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할 분'(막 1:7) 등으로 호칭하였다. 이처럼 세례 요한과 예수는 결코 비교할 수 없었음에도불구하고 여기서 세례 요한과 예수가 상호 비교되어 묘사되어 있는 것은 (1) 예수의공생애 직전 세례 요한의 추종자들이 많았다는 점과 (2) 그에 따라 세례 요한이 메시야로 오인(誤認)되었다는 점, 그리고 (3) 초대 교회의 선교 당시에도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상당수 존재했다는 점 등에서 기인한다. 즉 사도 요한은 이러한 비교를 통하여(1) 예수께서 참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2) 요한 사역의 핵심이 바로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함에 있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1:16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 '충만한'의 헬라어 '플레로마토스'(* )는 '플레로마'(* )의 소유격 단수로 '차고 넘치는 완전한 분량'을의미하며 14절의 '충만하더라'는 표현과 연관된다. 그러나 14절의 '충만하더라'가 그리스도의 본성과 관련하여 사용된 반면, 본문에서는 바로 그리스도의 충만하신 은혜가차고 넘쳐서 성도에게 미치는 상태를 의미한다. 한편 헤르마스 목자서(Shepherd ofHermas)는 '충만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하나님은 만유인 동시에 하나이다. 그것은 만유의 충만힘이 하나이며, 하나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범신론적 경향은 당시의 영지주의의 영향에 의한 결과이다. 즉 그리스도교적 영지주의자들은 '플레로마'를 최고의 영적 세계로 간주하고, 예수가 '플레로마'에서 이 세상으로 왔다고주장했다. 그러나 이에 반해서 사도 요한은 '충만함'이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것이며,성도들에게 은사로서 주어지는 것임을 명시함으로써 당시의 영지주의의 거짓된 학설을물리쳤다. 사도 바울의 말을 빌자면, 이 충만함은 '아버지께서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신' 것이며(골 1:9)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이다(엡 3:8). 그리고 루터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아무리 물을 퍼내어도 고갈되지 않는 샘'에 비유했다.
은혜 위에 은혜러라 - '...위에'라고 번역된 헬라어 '안티'(* )는 원래'...와 대조하여'라는 뜻이나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대신에'(눅 11:11)라는 뜻으로사용되었다. 따라서 '은혜 위에 은혜'(one blessing after another, NIV)라는 말씀은문자적으로 '은혜 대신에 은혜'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한 번 받은 은혜가 그 능력을다 발하고 나면 또 다른 은혜를 받게 된다'는 의미로서 '은총을 받고 또 받았다'(공동번역)라는 뜻으로 번역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은혜는 곧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이는넘쳐 흐르는 충만함으로 인하여 성도에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은혜임을 요한은 밝히고있다. 따라서 이제 성도는 성자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존재인 자신을 자각케 된다. 당시 유행했던 인본주의적 이방 종교와 이방 철학들 그리고 형식주의적 유대교라시 유행했던 인본주의적 유대교라는 어두움을 뚫고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구원의 빛과은혜를 성도들에게 끼치신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라고 선포하였다.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 6절부터 16절까지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를비교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육신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충만한 은혜를 묘사한저자는 이제 구약의 율법 시대와 신약의 은혜 시대의 대조를 통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도래하는 새 시대의 특성을 간략하고도 명확하게 밝혀준다. 먼저 사도 요한은 율법 시대의 대표자인 모세를 통하여 율법의 특성을 간명하게 규정한다. 즉 율법은 피조물인 인간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롬 3:20), '몽학 선생'(갈 3:24)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 율법에 대조되는 은혜와 진리란 단순한 은사의 차원보다 더 높은 것이다. 은혜와 진리의 근원응다 하나님의 속성에서 발견될 수 있고 이는 예수 안에서 구체화되었다. 어떤 면에서 예수 자신이 곧 은혜와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특히 본 구절에 사용된 동사 '온'이라는 말에 의해 강력히 뒷받침된다. 은혜와 진리는 율법의 경우처럼 수동적으로 주어질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과 선교(Mission) 가운데 임했던 것이다. 또 '온'의 헬라어 '엥게네토'(* )는 '발생하다'라는 뜻을 지닌 '기노마이'(* )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들에게 임함으로써 기독교가 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이는 바로 형식과 위선에 치우친 유대교의 근거를 뿌리채 뽑아버리는 말씀임과 아울러 교회의 근거를 확고한 참신앙의 반석 위에 세우는 말씀인 것이다.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 문자적으로는 '결코 보이신 적이 없는 하나님'이란 의미이다. 비록 모세가 여호와와 대면했다는 명성을 얻기는 했으나(출 33:11;신34:10) 그 역시 하나님의 본체를 본것은 아니었다(출 33:17-34:9). 왜냐하면 유한하고죄악된 인생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출 33:20).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내신데 대한 유대인들의반응이 예수를 죽이려고 할 정도로 격력하였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10:20-33).
아버지 품속에 있는 - 이 표현은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나타낸다. 즉 1절의 '이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라는 말씀과 동일한 의미를 전달하는 이 표현은 영원전부터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존재하고 계셨던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암시하며 또한 그리스도의 신성까지도 함유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 품속에 있는'이라는표현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구절이다.
독생하신 하나님 - 14절의 '아버지의 독생자'와 상호 연관되는 이 칭호는 바로 은혜와 진리의 부여자(附與者)이신 예수 그리스도(17절)를 가리킨다('득생자'에 대해서는 14절 주석을 참조하라).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의 본성인은혜와 진리로 교회를 형성하신 분이라는 의미를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 속에서 드러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와 같은 신앙은 기독교가 당시의 이방 철학이나 종교 그리고 율법 주의 및 로마 제국주의에 대항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源泉)이었다. 특히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시 성도들 사이에 암호로 통용된 물고기 그림에서 당시의 신앙을 발견할 수 있다. 헬라어로 '물고기'는 '잎뒤스'(* )로서,'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주'(에에수스 크리스토스, 데우 휘오스, 소텔, '*, , )라는 말의 약자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굳건한 신앙 고백을 토대로 교회가 온갖 박해를 이기고 어두움 속에 빛을 비추었듯이,오늘날의 물신주의와 이데올로기(ideology)의 와중에서도 교회가 설 수 있는 기반이바로 '독생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라는 사실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1:19
사도 요한은 다른 복음서들(마태복음, 누가복음)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에대해서 알고 있던 당시의 성도들에게 다시 반복해서 성육신 기사를 쓰지 않는다. 따라서 저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직전부터 복음서의 본문을 기술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공생애 직전의 상황을 세례 요한과 결부시키고 있다(19-36절).이는 세례 요한이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증거자임을 입증(立證)하기 위한 것이다(6, 7,15절). 당시 세례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회개의 촉구 그리고 세례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더구나 군중들 중에 일부는 세례 요한을 메시야로까지 간주하기도 하였다(눅 3:15;행 13:25). 이러한 현상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한 종교 지도자들의 민감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따라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공회인산헤드린은 요한의 정체를 탐지할 사람들을 파견했던 것이다. 모세 율법에 대한 해석을 주해한 미쉬나(Mishna)에 의하면 거짓 선지자에 대한 규가명과 재판이 산헤드린 공의회의 주요 직무 중 하나로 규정되어 있었다.
요한의 증거 - '증거'란 바로 요한의 사명이며(7절), 그의 사역은 말씀이며 구원의빛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의 역할이었다.
=====1:20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 원어상으로 볼 때 저자는 본절에서 헬라어 접속사 '카이'(* )를 무려 3회에 걸쳐 병렬적으로 기록하므로 진솔하고도 꾸준한증거자인 세례 요한의 태도를 암시하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표현은 세례 요한이 자신의 하고자 하는 답변의 심각성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하였던 의도를 보여준다. 특히'드러내어 말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고백하다', '확언하다'라는 뜻을 지닌 '호몰로게오'(* )의 부정 과거형으로서 요한의 증언이 믿음의 호가신으로말미암은 고백적 증언임을 보여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 산헤드린으로부터 파견된 자들의 입에서는 메시야에 관한 말이 전혀 나오지 않았으나, 세례 요한은 이미 그들의 의도를 정확히 읽고 있었다.그는 자신을 메시아로 오해할 수 있는 일체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단호한 어투로 말한다. 특히 세례 요한은 '나'라고 하는 1인칭 대명사를 사용하는 강조법으로써 예수의탁월성에 자기 자신을 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용법은 본장에서만도 여러 차례 반복된다(23, 26, 29, 30, 31, 33, 34절). 여기에서 세례 요한이 강력하게 부인했던 '그리스도'란 히브리어인 '메시야'와 같은 의미를 지닌 헬라어 표현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며 예서 언약을 완성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창조하실 분을 지칭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개념은 이스라엘의 선민 사상과 융합되어,식민지적 상황을 종식시켜 줄 정치적 메시야 사상으로 변질되었다. 즉 유대인들은 메시야 사상으로 변질되었다. 즉 유대인들은 메시야와 세속적인 왕을 동일시하는 오류에빠졌다. 따라서 세례 요한이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강력히 천명했던 것은 (1) 옛언약의 완성이자 새 언약의 창조자이신 그리스도의 증언자로서의 사명을 자각하였음과(2) 로마 제국으로 하여금 자신을 제국에 반대하는 정치적 모반자(謀叛者)로 오인하지않도록 하기 위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1:21
네가 엘리야나 - 이것은 당시 세례요한이 (1)약대 털옷을 입고,(2)금욕적인 식사를하고,(3)이스라엘을 향해서 회개를 선포하고, (4)헤롯의 비리를 꾸짖은 행동들이 구약의 엘리야를 연상케 한 점도 아울러 작용했던 질문이었다.
나는 아니라 -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엘리야라고 한 말씀(마 11:14;17:12)과 비교해 보면 본 증언은 오류로 보일 것이다. 또한 세례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아니한'(20절) 증언이 거짓으로 판명날 것이다. 또한 요한의 이러한 대답은 23절과도어긋나게 보인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의 질문의 배경을 자세히 분석하면, 요한의 대답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랍비들이 주로 이용한 자구적(字句的)성경 해석을 따랐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려면 먼저 하늘로 승천 했던 엘리야가 다시 와서 메시야의 도래를 준비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세례 요한이 바로 '구약의 엘리야인가?'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요한의 대답을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우크 에이미'(* )이다. 이는 20절의 '나는 아니다'(* , 우크 에이미 에고)와는 그 표현 강도가 다르다. 즉 여기에서 세례 요한의 대답은 20절의 강조형(* , 에고)를 취하지 않는다. 이는 세례 요한이 '결코 그리스도가 아니며, 당시 유대인들이 인식한 엘리야도 아님'을 잘 드러내는 표현이다. 한편 세례 요한을 엘리야로 비유한 예수의 말씀(마 11:14;17:12)도정당한 것이다. 즉 세례 요한은 실제 엘리야가 아니라 단지 선지자 말라기가 예언한엘리야적 사역 즉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사역을 수행하는 자'였다(말 4:5,6).
네가 그 선지자냐 - 요한의 두번째 대답과 사두개인들의 질문 사이에는 원문상으로접속사가 없는데 이는 사두개인들의 집요한 질문 공세로 발생하는 긴장 관계를 현장감있게 드러내는 문장 구성 양식이다. 본문에서 '그 선지자'(*' ,호 프로페테스)란 모세가 예언한 '나와 같은 한 선지자'(신 18:15)를 가리킨다. 따라서 공동번역은 '우리가 기다리던 그 예언자'라고 번역했다. 이는 '그 선지자'란 개념이 곧 메시야와 직결됨을 시사한다(7:40). 성령 강림(降臨)후에 사도들은 '그 선지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했으며 이를 선포했다(행3:22;7:37).
아니라 - 이것의 헬라어 '우'(* )는 본절의 맨 뒤에 위치해 있다. 이는 세례 요한이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아주 단정적으로 부정했음을 보여준다.
=====1:22
또 말하되 누구냐 - 산헤드린의 조사단이 짐작했던 요한의 정체는 그들의 예상을빗나가 버렸다. 그들의 질문에 대한 세례 요한의 세차례의 부정은 그들의 조사 활동을더욱 난감하게 하였을 것이다. '또'라고 번역된 헬라어 '운'(* )이 논쟁적 어감을 띠고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들의 심정은 더욱 조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 사두개인들의 난감함과 조급함의 원인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즉 그들은 진리를 찾는 자들이 아니라 기존 권위의 하수인(下手人)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사두개인들은 그들의 추측대로 요한에게 질문하지 않고 세례 요한의 자기 진술을 요청하게 된다. 따라서 이어지는 질문인 '너는 네게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는 말은 어떠한 암시도 전혀 개입되지 않은 질문 형태로서'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소?'(공동번역)라고 번역하는 것이 어감상 잘 부합된다..
=====1:23
가로되 - 본절에서는 '증언하다'라는 뜻을 지닌 헬라어 '페미'(* )의 부정과거 3인칭 단수형인 '에페'(* )가 문자의 맨 앞에 놓임으로써 요한의 증언을 극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 선지자 말라기가 예언했던 엘리야의 도래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불식(拂拭)시키고, 자신의 사역의 본질과 성격을 드러내기 위하여 세례요한은 이사야 40:3을 인용한다. 그리고 이러한 세례 요한의 생생한 자기 증언은 공관복음에서도 이사야 예언의 성취라는 관점에서 반영되어 있다(마 3:3;막 1:2-4;눅3:3-6). 주의 길을...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 앞길을 예비하는 선구자임을 밝히는 본 구절은 이사야의 예언을 단축한 형태로서, 이러한 어투는 대화체에 적합하며 이것이 직접 세례 요한의 입을 통해 나온 말임을 뒷받침한다. 이에 반해서 공관복음은 이사야의 예언을 직접 인용함으로써 세례 요한의 자기 증언을 예언 성취의 형식으로 제시하고 있다(마 3:3;막 1:3;눅 3:4). 결국 본문은 저자가 당시의 상황을 목격하고 그대고 재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본문에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는 표현은 '이사야의 말'이라는 표현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즉 이사야가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했듯이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였다. 그리고 이사야의 말은 그리스도를 증언한다는 점에서도 세례 요한의 소리와 서로 일치한다. 특히 '외치는 소리'의 헬라어 '포네 보온토스'(*)의 두 단어에 서로 관사가 없는 것은 히브리어 '콜 코레'(* , 사 40:3)를 헬라어 문장 양식으로 번역한 것으로서, 일종의 감탄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공적인 일을 선포하는 전령자(傳令者)라는 의미를 지닌 '보온토스'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이사야나 세례 요한의 '소리'(the voice, NIV)가 바로 이들을 파견하신 하나님의구원의 메시지임을 잘 드러낸다. 또한 이사야와 세례 요한의 이와 같은 대비를 잇는용어 '카도스'(* , '...같이')가 사용됨으로써 사도 요한의 문학적 재능이한결 돋보인다. 이는 본서가 주로 말씀과 강화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리스도가 '말씀'으로 나타난 점에서 볼 때, 언어 구사에 있어서 요한의 능수 능란함을 엿보게 한다.
=====1:24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 산헤드린 공의회의 양대 세력인 바리새파와사두개파 중에서 산헤드린의 조사단이 전자에 의해 보내진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그렇다면 당시에 산헤드린(Sanhedrin)의 의장이 사두개파의 영수인 대제사장이었다는사실을 감안한다면, (1)19절에서 언급한 유대인들이 산헤드린 공의회가 아니거나, (2)본절에서 '저희'가 '제사장들과 레위인'으로 (19절) 구성된 산헤드린의 진상 조사단이아닌 것으로 보여질는지도 모른다. 만일 후자가 맞다면 '저희'란 바리새인들이 파견한다른 진상 조사단을 지칭한다. 그러나 19-28절까지의 본문의 흐름상 여기에서 '저희'란 바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로 구성된 산헤드린의 진상 조사단이라고 봄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왜 본절에서는 사두개파의 영수(領袖)인 대제사장이 의장으로 있는 산헤드린 공의회와 바리새인을 일치시키고 있는가? 이는 당시 바리새인들이 대다수의 백성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당시의 상황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즉 산헤드린공의회의 의장이 대제사장이었을지라도, 산헤드린의 주도권은 바리새인들에게 있었다.따라서 당시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의 본의와는 다를지라도 바리새인들이 '만일 우리의의견을 따르지 아니하면 일반 민중이 가만히 있지 아니할 것'이라는 협박에 속수 무책이었다(Josephus). 이러한 정황에서 볼때, 본절에서 '저희'는 바로 산헤드린 공의회가파견한 '사두개인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은 28절까지 이어지는 세례 요한의 증언을 일관성있게 이어주고 있다.
=====1:25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자들이 이러한 질문을 던졌던 이유에 대해서는 그들이 세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던가에 따라 대략 다음 두 가지 견해로 요약될 수 있겠다. (1)이방인들이 개종과 관련시켜 이해했다고 보는 견해. 유대 사회에서 세례는,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경우 이방 세계에서 오염되었던 죄악을떨쳐버린다는 의미로 사용했던 공인된 의식이었다고 한다(Jeremias).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자들은, 세례 요한이 개종자들에게 베풀어야 마땅할 세례를 유대인들에게 실시한사실에 대해 질타(叱咤)하고 있다는 것이다. (2) 메시야의 사역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고 보는 견해. 겔 36:25;37:23;슥 13:1 등에서 물로 씻음 곧 세례 의식이메시야 대망과 관련되어 언급되어진다. 이와 같은 범민족적 차원의 정결과 성결은 오직 메시야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는 과업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본문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는 것이다.
=====1:26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 세례에 관한 물음에 대해 요한은 본 구절로써 대답하고 있다. '물로' 세례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마 3:11;막 1:8;눅 3:16).다시 말해서, 세례 요한의 물세례는 예수의 성령 세례를 전제로 할 때 비로소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물론 요한의 세례가 백성들을 그리스도께 이끌기 위해 그들의 심령을 깨끗하게 준비시키는 '회개의 세례'였기는 하나(눅 3:3) 본질적으로는 우리를 새생명으로 거듭나게 하는 성령 세례를 상징하는 의식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요(6-8절)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23절)인 세례 요한의 사역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즉 (1) 요한의 '하나님 나라 도래와 회개의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와 회개의 섶로'를 예비한 것이며, (2) 요한의 물세례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성령 세례를 예비(豫備)한 것이다. 또한 세례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까지도 그리스도에게 보내는 자였다. 이러한 요한의 사역은 자신보다도 그리스도를 족히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더 높이는 겸손에서 극치를 이룬다(27절).
너희가 알지 못하는 - 산헤드린 조사단이 요한을 메시야로 착각한 것은 그들의 영적 무지를 스스로 폭로한 것이다. 본 구절은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10절)라는말씀을 연상시키며 이 말은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이 실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 즉 세상에 속한 자들이요 마귀의 자식들이라는 사실까지도 내포하고 있다(8:44).따라서 세례 요한은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규탄했던 것이다(마 3:7;눅 3:7).
=====1:27
나는 그이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 '신들메'란 당시 유대인들이 도보여행시 착용하였던 신발(가죽 샌들)의 끈을 가리킨다. 유대 풍습에 의하면 주인은 초대한 손님이 방문하면 자기 집에서 가장 천한 종을시켜 손님의 신발끈을 풀고 발을 씻기게 하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세례 요한의 고백은 자신을 그리스도에비할 때 가장 비천한 종의 자격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다. 특히 이표현은 사복음서에서 공히 요한의 자기 진술형식으로 표현되고 있다(마 3:11;막 1:7;눅 3:16).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는 진상 조사단의 물음에 대해 세례 요한이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증거하는 형식으로 답한 것은, 자신의 사역을 메시야의 사역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곧 예수를 증거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요한 자신의 위치를 밝히 드러낼 수 있었다. 비록 메시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천한 존재였지만, 메시야의 앞길을 예비하는 선구자라는 직분은 그누구에게도 비길 수 없는 영광스럽고 기쁜 것임을 요한은 자부하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31절에서 설명되듯이, 세례요한 자신도 처음에는 예수가 진정 메시야라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아마 세례 요한은 평소에 예수에 관해 알고 있었고 나름대로의 확신을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진실로 예수를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로 분명히 인식하게 된것은 예수께 세례를 베풀 당시 성부와 성령의 충만한 계시를 받게 됨으로부터였다(눅3:21, 22).
=====1:28
이 일은...된 일이니라 - 저자 요한은 산헤드린 조사단이 세례 요한을 조사한 사실을 목격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이 '세례 요한의 자기 증언'의 장소를언급한 것은 단순한 부가적 설명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저자 요한은 당시 상황이 너무도 인상적이며 중요한 것이라 여겼으므로 그 생생한 기억을 여기 옮기고 있는 것이다. 본문에서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란 예루살렘 남동쪽으로 약 3km 지점에 있는 마을(11:18)이 아니라, 요단강 동쪽에 위치한 장소로서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푼 장소였다. 본서에서 '베다니'라는 두 개의 지명을 구분하여 사용된 것은 본서가 영지주의자인 어느 헬라인의 저작이 아니라 당시 유대의 상황과 지리에 익숙했던 사도 요한의 저작임을 입증하는 일례이다(본서의 서론 '저자'부분 참조).
=====1:29
나아오심을 보고 - 생동감을 느끼게 하는 현재 중간태 분사 '에르코메논'(* , '나아오다')을 사용함으로써, 본문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전달되는 효과를 연출한다.
보라 - 헬라어 '이데'(* )는 찬탄이 섞인 감탄사로서, 세례 요한의 적대자들이 떠나고, 그가 증거한 예수께서 밝은 빛처럼 찬연하게 다가오셨을 때에 그가 드러낸찬탄과 감격을 극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 본문은 '하나님의 어린 양, 곧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분'이라고 번역될 수 있다. 19-27절이 예수께 대한 요한의 간접증언의 성격을 띠는 반면에, 여기에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직접 증언한다. 세례요한의 사역에 대한 성격 규정(6-8절, 15절), 사두개인들과의 논쟁을 통한 그리스도에대한 간접 증언을 거쳐서 드디어 그리스도의 오심을 보고 감격과 놀라움에 떨리는 직접 증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원어상 본문에는 문장을 종결하거나 서술하는 동사가 없다. 그리고 '보라'는 감탄사에 이어 '하나님의 어린양'(the lamb of God, NIV) '세상 죄를 지고가는 분'이 동격으로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본문은 죄된 세상과 하나님 사이이 대립 관계를 보여주며, 이러한 관계를 화목케 할 존재를 부각시키고 어두움속에 빛이 비추어 세상을 밝게 하듯이(5절) 죄악에 빠져 헤매이는 이 세상을 은혜와진리의 세계로 변화시킬 그리스도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준다(17, 18절). 한편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역의 성격을 뚜렷이 반영한다. '어린양'에 해당하는 헬라어 '암노스'(* )는 신약성경에서 4회 사용되었는데,두 번은 본서의 본장에서(본절, 36절) 한 번은 행 8:32에서 그리고 또 한 번은 벧전1:19에서이다. 이 중 벧전 1:19는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야에 관한 예언의 일부인 사 53:7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신약성경의 몇몇 구절에서는 사 53장의 말씀을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적용시키고 있다(12:38;마 8:17;눅 22:37;행 8:32-35;벧전2:22-24). 또한 죄를 대속하는 '속죄양'에 관해서는 구약의 여러 부분에서도 나타난다(창 22:2-8;레 14:10-25;민 6:12).
=====1:30
내가 전에 말하기를...있는데 - 본문은 15절의 말씀을 다시 반복함으로써, 세례 요한에게 나아온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증거해야 할 사명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재차 환기시킨다. 특히 본문에서 '내뒤에 오는 사람'에서 '사람'의 헬라어 '아네르'(* )에 주의할 필요가 있는데 '아네르'는 일반적인 의미인 '인간'을가리키는 '안드로포스'(* )와는 달리 '남성'을 가리킨다. 특히 이 용어는결혼 관계에 있어 남성이 여성의 머리가 됨을 시사하는 용어이다(엡 5:23). 따라서 이용어는 예수그리스도께서 그를 따르는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머리가됨을 암시한다.
계심이라 - 이것의 헬라어 동사는 '에이미'(* )의 3인칭 단수 현재형인 '에스티'(* )로서 세례 요한에게 증언을 받는 현장에서의 그리스도를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또한 동사 '에스티'는 '계시니라'(1절)로 번역된 '에이미'의 3인칭 부정과거형인 '엔'(* )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즉 '엔'이 영원전부터 선재하고 계신 그리스도를 나타낸다면, '에스티'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성육신하시고 인류구속을 위하여 공생애를 시작한다는 현장감(現場感)을 느끼게 한다.
=====1: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 예수와 세례 요한은 친족 관계였다(눅 1:36). 따라서세례 요한이 예수를 모를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세례 요한의 진술은 바로 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이는 본문의 원문인 '카고우크 에데인 아우톤'(* )을 분석해보면 알수 있다. 먼저 '카고'란 일반 사람들이나 무지한 종교 지도자들처럼 '나 역시도'라는 뜻이다. 그리고 '알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데인'은 경험에 입각한 앎을 뜻하는 '기노스코'(* )와는 달리 '영적인 앎'(막1:24;고전2:2)을 주로 의미한다.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 본문은 세례 요한의 사역을 함축적으로 명시하고 있다.즉 세례 요한의 사역의 골자(骨子)는 메시야의 도래를 예비하여 죄사함을 받게 하는세례의 시행에 있었다(겔 36:25;슥 13:1). 당시의 세례는 기종자나 참회자를 물 속에완전히 잠갔다가 일으키는, 현대적 표현으로 하면 '침례'였다(3:23;행 8:36-38). 그러나 이와 같은 '침례형 세례'는 물이 부족한 지역이나 지역별 관습상의 차이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 (물뿌리기, 관수식, 침례)로 병행되어 왔다. 특히 세례에 관해 언급한최초의 문서인 [디다케]에보면, 물의 양이 충분하지 못할 경우 세사람이 함께 침례 의식을 받는 일과 물을 머리에 붓는 일도 허용되었다(the Didache 제7장). 이것은 기독교의 세례가 형식의 고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 본질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마 28:19;롬 6:4;골 2:11, 12).
=====1:32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 '하늘'(* , 우라노스)은 일반적으로 지상과 대칭되는 창공과 우주를 의미한다. 그리이스인들은 하늘을 신들의 거처인 올림푸스로 생각했다. 그러나 성경의 관점에서 볼때 '하늘'이란 (1)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창공(창 1:6-8;행 4:24) 혹은 (2)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전 5:2;마 5:16;막 11:25)을 의미한다. 하지만 위의 두 개념은 엄밀하게 말해서 서로 판이하다. 즉피조된 이 세상과 영원한 하나님의 거처인 하늘 나라는 동일하지 않다. 이런 맥락에서본문의 '하늘'은 후자를 가리킨다. 이는 그리스도가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듯 성령도 함께 계셨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여기서 성령의 강림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보증(保證)하며,그리스도의 사역을 돕기 위한 것이다. 특히 성령이 '불이 혀'(행2:3)로 상징된 것과는 달리 예수의 수세(受洗)시에 비둘기로 상징되어 강림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1) 죄에 대해서 순결하신 그리스도의 본성(마 10:16;히 4:15), (2) 온유하신 그리스도의 성품(마 11:29), (3) 하나님의 사랑과 총애를 받으시는그리스도의 사역(아 1:15;마 3:17;막 1:11;눅 3:22) 등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 임한 성령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세례 요한이 눈으로 볼 수 있게끔임하였음이 분명하다(33, 34절).
=====1:33
나에게 말씀하시되 - 앞 구절과 연관되어 세례 요한의 예언자적인 특성을 나타낸다.즉 이 표현 방식은 계시를 전달할 때 선지자들이 주로 사용한 양식이었다(사 1:2;25:8;렘 2:2;6:16;겔 3:24). 이는 세례 요한이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증언한 것처럼 자신이 구약의 선지자들과 같이 그리스도의 도래(到來)를 예언하고 준비하는 자라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성령이 내려서...
머무는 것을 보거든 - 32절의 반복적 증언으로서, 32절이 요한의목격에 근거를 두고 있다면 본문은 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에 근거한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 - 성령 세례란 성도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새 생명으로 함께 거듭나는 중생의 경험을 가리킨다. 이 근본적인 변화의 체험을 통해어두움의 자녀가 빛의 자녀로(12절;고후 5:17), 그리스도의 지체로 된다(고전 12:13,14, 27). 한편 여기서 물과 성령은 서로 대조적인 관계에서 언급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 설교한 모든 것이나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눅 3:3)는궁극적으로 모두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성령의 역사는 오순절 성령 강림 때까지(행 2:8) 제한성을 가졌다는 것 뿐이다. 결국 요한의 세례는 성령세례를 예표하고 준비시키는 의의를 지닌다는 점에서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다.
=====1:34
내가 보고...증거하였노라 - 세례 요한의 이러한 증언은 막연한 추측에 의한 것이아니라 하늘로부터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을 생생하게 반복한 것이다(막 1:11). 예수가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사복음서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주장이며(마 26:63, 64;막3:11;눅 4:41), 특히 본서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말씀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로부터시작하여(1-4절)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 관해 보다 심도있게 묘사하고 있다(3:18;5:26;17:5;19:7;20:31).
=====1:35
요한의 증거 바로 뒤에 이어지는 본절 이하에서는 예수와 첫 제자들 간의 대면이소개된다. 예수의 첫 제자들은 주로 세례 요한의 증거를 토대로 예수를 따랐던 자들이다. 저자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이 예수를 증거했던 사건과 예수께서 공생애를 처음시작하는 사건 전체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계속되는 일련의 사건으로 다루고 있다. 그첫 부분에서는 세례 요한의 예비 진술에 관해 다루고(19-34절) 둘째 부분에서는 예수와 제자들과의 초기 만남에 관해 다루었으며(35-51절) 셋째 부분에서는 예수의 능력을보여주고 동시에 제자들의 믿음을 확고하게 해준 이적 사건을 다루고 있다(2:1-11).
자기 제자 중 두 사람 - 여기서 한 사람은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였다(40절). 그러면 익명의 한 제자는 누구인가? 19-34절의 생생한 필치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당시 세례 요한의 제자로서 세례 요한과 사두개인들과의 논쟁과 세례 요한의 그리스도에 대한직접 증언을 목격한 자였음이 분명하다. 또한 본서가 사도 요한의 저작임에도 불구하고, 사도 요한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기입하기에 인색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그 익명의 제자는 바로 사도 요한 자신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세례 요한의 주요 메시지가하나님의 어린양을 증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의 전(全) 관심은 예수께집중되었을 것이다.
=====1:36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 바로 하루 전의 증언을 반복함으로써(29절) 세례 요한은 함께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확인시킨다. 제자들 역시 어제 일어났던 제반 상황과 요한의 증언을 상기했을 것이다. 요한이 그의 두 제자에게 예수를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선포한것은 그들을 예수에게로 보내고자 함이었다. 이는 그리스도 앞에서 겸손해진 세례 요한의 신앙자세를 잘 나타낸다(3:30). '하나님의 어린양'에 대해서는 29절 주석을 보라.
=====1: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 '듣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쿠산'(* )은 신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다는 뜻이다(막 4:24;요일 1:1). 그리스도의 말씀(복음)을 듣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임이며, 구원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이러한 '들음'은 수동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까지 내포하고 있다(롬1:5;10:17;살전 2:13). 따라서 '에쿠산'은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요한의 증언을 듣고 곧 그 말에 순종하여 예수를 따랐다는뜻이다.
예수를 좇거늘 - 말씀을 들음은 곧 순종을 동반했다. '좇거늘'의 헬라어 '에콜루데산'(* )은 원래 지적, 종교적, 도덕적인 입장을 받아들이고 추종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이 용어는 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1:43;마 8:19;19:27, 28;막 6:1;8:34 등). 그리스도를 '좇음'은 바로 그리스도를 향한 전적인 헌신을 동반한다. 따라서 제자가 된다는 것은 구원(8:12;막 10:17) 뿐만 아니라 고난(12:24;막 8:34)에 까지도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본문에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잠정적인 탐색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예수와운명을 같이하기 위해 결단의 주사위를 던진 것이다. 특히 우리는 이 장면에서 진리의실체이신 예수께로 자신의 제자들을 흔쾌히 인도하는 세례 요한의 거인적(巨人的) 면모를 엿볼 수 있다.
=====1:38
무엇을 구하느냐 - 여기에서 '구하느냐'의 헬라어 '제테이테'(* )는'찾아다니다', '구하다'라는 뜻이며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 구해야 할 것을 의미하는 동사로서(행 17:27;고전 1:22),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구원에 연관되어 사용되었다(마 18:12;눅19:10). 따라서 예수의 질문은 '너희가 궁극적으로 찾아 구하는 것이무엇이냐?'라는 뜻이다. 이는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를 따르는 동기를 확고히 상기시키는 말씀이다. 본서에서 예수의 말씀으로서는 최초로 나오는 이 문장은 죄악된 세상이 참으로 구해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궁극적인 가치와 숨겨진 보화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요일 2:16).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의 소중함을 깨닫는 자들은 모든 것을팔아서라도 그 보화를 살 것이다(마 13:44).
랍비여 - '랍비'(* )란 '나의 존경하는 분'이란 뜻을 지닌 아람어이다.초기 유대교에서 부터 이 용어는 (1)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나 상급자를 지칭하거나(2) 제자들이 선생을 칭할때 사용되었다. 그후 B.C. 2세기경부터 이 용어는 제자들이선생을 공손히 부를 때에만 주로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이 용어는 복음서에만 나온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는 서기관들을 비난하기 위해 이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데반해서(마 23:7), 마가복음에서는 베드로나 유다가 예수를 부르는 칭호로 사용되었다(막 9:5;11:21;14:45). 본문에서 이 칭호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단호한 결단과 아울러 그들의 영적 제한성(制限性)을 함께 시사한다. (1) 먼저 이 칭호는 그들이 예수를스승으로 모시고 어디든지 따르겠노라고 하는 의지를 보여준다(37절 주석 참조). (2)그러나 그들은 아직 예수의 신분이나 행하고자 하시는 일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이다. 바로 앞에서 이 두 사람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예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하나님의 어린양'(29절)이시며 또한 '하나님의 아들'(34절) 이시라는 말을 들었지만,진정 그들의 마음속에 신앙 고백적 차원의 깨달음이 없었기 때문에 스승을 일컫는 정중한 어투인 '랍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 계시오니이까 - 헬라어 '푸 메네이스'(* )란 문구는 '랍비'라는 호칭과함께 사용되었던 유대인의 관용적 표현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 교사들에게 대화를 요청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두 제자의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하며 또한 겸손하게 말씀을 듣고자 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번역하면 - '번역하다', '해석하다'라는 뜻의 동사 '레프메누오'(*)의 현재 수동태 분사가 사용되었다. 특히 이 용어는 그리이스의 신들 중에서 변론(辯論)과 전령(傳令)의 신인 '헤르메스'(* )에서 파생된 용어이다. 또는 신약성경은 같은 의미인 '메데르메뉴오'(* )라는 표현도 사용하며, 개역 성경에서는 이 두용어를 모두 '번역하면' 또는 '번역한즉'이라고 옮겼다. 이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마태복음에 1회(마 1:23), 마가복음에 3회(막 5:41;15:22, 34), 요한복음에 4회(본절, 41, 42절;9:7), 사도행전에 3회(행 4:36;9:36;13:8), 히브리서에 1회(히 7:2)쓰였다. 이러한 표현이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이유는 예수 당시 이스라엘에서 사용된 히브리적 용어나 아람어를 헬라어를 사용하는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함이었다. 특히 저자 사도 요한은 당시의 상황을 현장감있게 재현하기 위하여 아람어를사용했으며, 이 용어들이 헬라인들에게 이해될 수 있도록 번역을 첨부한 것이다.
=====1:39
와 보라 - 이 말은 워어상 '오다'(* , 에르코마이)의 현재 명령형과'보다'(* , 호라오)의 미래 직설법, 그리고 접속사 '카이'(* )로 구성되어 있는 짤막한 문장이다. 여기서 '오라'는 말은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오라는 초청의 말씀이며, '보라'는 말은 제자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을 확정하는 말씀이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는 자들을 향한 초대(超待)와 구원의보장(寶藏)이다. '와 보라'는 표현은 랍비들이 사용했던 권위있는 초청 표현형식으로서,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는 표현과 서로 상응한다. 즉 사도 요한은 본문에서 당시의 표현 어법을 재현하며,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과 그들을 초청하시는예수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 '와 보라'는 표현이 명령형과 미래중간태 직설법으로 표현된 데 반해 '가서...보고'는 두 동사 모두 부정 과거형을 사용함으로써, 제자들이 예수를 따른 것이 실제의 사실임을 명시한다. 또한 본문은 '와 보라'는 예수의말씀에 대한 순종을 표현하는 구절이다. 여기서 '계신 데'란 예수께서 가족과 함께 거처하시던 갈릴리 나사렛이 아니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베다니 근처의 어느 장소였을 것이다. 이처럼 구체적 장소를 명시하지 않고 단순히 '계신 곳'을 뜻하는 헬라어관용구로써 예수의 거처를 처리해버린 것은 그들이 추구해야 할 것이 어느거처나 장소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해서, 그리스도 자신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는 사실을 나타내려는 저자 요한의 의도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때가 제 십 시쯤 되었더라 - 이 내용은 부가적 기록인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 시각이 명시되어 있는 것은 그 만남이 역사적(歷史的) 사실임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심시'란 유대 시간법을 따라 오후 네 시라는 견해도 있으나, (1) 본서의 저자가 바로 현장을 목격한 사도 요한이라는 점과 (2) 본서가 에베소에서 헬라인들을 위하여 기록된점, (3) '번역하면'(38절)이란 표현이 신약성경 중에서 본서에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는 점등을 고려한다면 로마식 표기법을 따르는 것이더 타당하다. 그렇다면 제자들이예수를 만난 시간은 오전 10시에 해당한다. 이 시간은 (1) 예수 그리스도와 본서의 저자인 사도 요한이 만난 시점으로 추정됨과 아울러 (2) 인류 역사상 최초로 기독교 '공동체'가 탄생한 기념비적인 날이었다(Westcott).
=====1:40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 - 안드레가 시몬 베드로의 형제라는 말로 지칭된 것은주로 예수의 공생애 초기, 즉 제자들이 전도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였다(1:44;6:8;마4:18;10:2;막 1:16, 29; 눅 6:14). 그러나 제자들이 전도 여행을 떠난 이후로 안드레는 베드로와 결부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지칭되었다(12:22; 막 13:3;행 1:13). 한편 안드레가 베드로의 형제로 묘사된 것은 당시 베드로가 예루살렘 12사도의 수반(首班)으로서 활동했다는 사실을 초대 교인들이 잘 알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동시에 이 표현은사도 요한이 공관 복음서 뿐만 아니라 교회 역사상 희미해져가는 안드레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는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즉 안드레가 사도 요한과 함께예수의 첫 제자였으며, 자발적인 최초의 복음 전도자였다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사도 요한은 소상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1:41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 이름 좀더 정확하게 옮기면 '우리가(찾던) 메시야를 발견했다'(We have found the Messiah;KJV, RSV, Living Bible)로 된다. 그들은 조상 대대로 그토록 기다리던 대망의 메시야를 만나고서 그 놀라운 소식을 시몬에게 곧장 전하였던 것이다. '우리'란 구체적으로 안드레와 사도 요한 두 사람을 가리키는 듯하며,이는 재판정에서 증인의 최소 구성 인원인 2인을 상기시킨다(신 19:15). 이 두람의 동시적 증언(testimony)은 이를 듣는 시몬에게도 놀랍고도 확실한 소식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리스도 - '기름을 붓다', '기름을 바르다'라는 뜻의 헬라어 '크리오'(* )에서 파생된 용어이다. 본래 '크리스토스'(* )란 '기름을 발리워진'이라는 뜻의 형용사이며, 이 용어가 명사형인 '토크리스톤'(* )으로 쓰일 경우에는 '의료용 연료'를 가리켰다. 그러나 '크리오'는 헬라적 관점에서 보다는동양(근동)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규명에 도움이 될 것이다. 헬라인들에게 있어서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종교적, 정치적 의미보다는 일상 생활의 편의나 용도를 위함이었다. 그러나 근동에서는 '기름'을 붓는 것'이 정치적인 혹은종교적인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는 의식이었다. 특히 구약에서는 왕, 제사장, 선지자에게 기름을 부음으로써 그들이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의 대표자이며 책임자임을 명백히하였다(출 29:7-9;삼상 10:1;16:13;왕상 19:15, 16). 그런데 왕정 후기로 내려 오면서'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곧 '메시야'임을 의미하게 되었다(사 61:1;단 9:24). 그후바벧론 유수(幽囚) 이후에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이민족들의 침략하에 시달렸으며, 그속에서 이스라엘을 구할 메시야의 도래에 대한 사상이 점점 더 고조되었다. 특히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주(屬州)로 전락되고, 에돔 족속인 헤롯 왕가가 이스라엘의 통치권을장악하여 무자비한 권력을 행사하자 메시야 사상은 급진적 혁명 운동을 위한 신앙으로변질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왜곡된 메시야 사상은 결국 성전 파괴와 이스라엘의 멸망을 초래한 요인이 되었다. 신약성경은 예수를 '그리스도'라 칭한다. 이는 사도 베드로의 설교에서 명백히 제시되었으며(행 10:38), 초대 교회의 신앙 고백이 되었다. 그리고 이 고백은 예수께서 구약의 완성자요 새 언약의 중보자(the Mediator)라는 신앙에기인한다. 즉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의 지도자란 '기름부음 받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를 지칭했듯이, 예수는 이 세 가지 직분을 한 몸에 지니시고 죄에 빠진인류와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새 예루살렘 성도들의 머리가 되신다. 한편 메시야에 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막 8:27-38 주제 강해 '메시야 사상의 전개'와 막 10:35-45 주제 강해 '메시야 예언의 양대 조류'를 참조하라.
=====1:42
보시고 가라사대 - 원문은 '여블려사스 아우토...에이펜'(* ... )이다. 여기에서 '엠블려사스'는 '주목하다', '눈여겨 보다'라는 뜻의 헬라어 '엠블레포'(* )의 부정 과거 분사로서 예수께서 베드로의 성격이나 사람됨을 통찰하셨음을 시사한다. 즉 예수와 베드로의 첫 만남은 비록 단시간이었음에도 직접적이고도 진지한 만남이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 여기에서 '시몬'(Simon)과 '게바'(Cephas)가 서로 대조를 이룬다. '시몬'이란 베드로의 다른 이름으로서 이는 예수께서 베드로의 자연적 성품을 꿰뚫고 계심을 나타낸다. 즉 '요한의 아들'이란 표현에서 예수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 상태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시몬'은 '시므온'(* , 쉬메온)이라고도 불리었다(행 15:14). 그렇다면 '시몬' 이란 구약의 12지파 중 시므온 지파의 조상인 야곱의 둘째 아들 시므온(LXX)과 동일한 명칭이다. 시므온이 과격하고 성미가 급한 인물이었듯이(창 34:25-31). 변화되기이전의 시몬 베드로도 충동적이고 성미가 급한 사람이었다(18:10, 25-27;마 26:31-35;막 8:32, 33;14:27-31;눅 22:31-33). 이러한 시몬의 성격을 간파하신 예수는 시몬이장차 '게바'로 불리울 것을 예언하신다. '게바'(* , 케파)란 '반석'이란 뜻의 아람어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의 베드로의 성격을 잘 반영한다. 즉 '베바'라는 이름은 베드로가 교회를 위한 사도적인 터전을 구축(構築)한 여러 요긴한 반석 중의 하나가 된 사실을 상기케한다. 예수 공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 중에 베드로는 예수를 세차례나 거듭 부인하는 나약함을 보였고(마 26:34), 갈 2:11에서도 우리는 베드로의 흔들리는 모습과 오히려 사도 바울의 견고한 반석같은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인간적 약점들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극복하고 초대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소임을 충실히 감당하였다(행 1:15-25). 후에 베드로에게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신앙 고백으로 인해 '베드로'라는 칭호가 공식적으로 부여되었다(마16:16-19). 이는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여 '이스라엘'이 되었던 것처럼(창32:24-30), 요한의 자녀'인 시몬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중생하여 '하나님의 아들'인게바(베드로)로 되었음을 시사한다.
번역하면 - 헬라어 '헤르메뉴에타이'(* )는 '헤르메뉴오'(*)의 현재 직설법 수동태로서 자세한 것은 38절 주석을 참조하라.
=====1:43
이튿날 - 이 날은 빌립과 나다나엘을 제자로 부르신 날이다. 특히 이 날은 사도 요한과 안드레를 세례 요한을 통해 제자로 삼으신 것과는 달리 예수께서 직접 제자를 부르는 장면이 인상적으로 나타나는 말이다.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 당시 갈릴리는 헬레니즘 문화의 침투(浸透)가 극심한지역이었고, 예루살렘과는 달리 사회적으로 하층민들이 많이 거주했던 곳이다. 따라서갈릴리는 유다와 예루살렘인들에게 있어서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었다(46절). 그러나예수는 공생애 초기와 후기의 짧은 유대 사역을 제외하고는 주요 사역 무대를 갈릴리로 채택하셨다(단, 본서는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예수의 유대 사역에 관한 언급이 많다). 이렇듯 사회적으로 천대받고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는 갈릴리에서 메시야의 사역이시작되었다는 사실은 구약 예언의 성취라 하겠으며(사 9:1, 2;마 4:14-16), 하나님의뜻을 떠난 유대교를 파기하고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경륜(經綸)을 엿보게 한다(17장;21장;마 28:16-20;막 16:7, 15-20;눅 24:44-53;행1:3-14).
빌립을 만나 - '만나'의 헬라어 '휴리스케이'(* )는 3인칭 단수 현재 능동태로서, 예수와 빌립의 만남에 현장감과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제자들 간의 만남이 생생한 필치로 재현되고 있는 것은 저자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적으로 만난 실제 체험을 회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로 이 만남을 통해서 새 언약 공동체인 교회가 시작되었으며, 지금도 하나님 나라가 계속 확장되고 있다.
나를 좇으라 - 빌립을 향한 그리스도의 제자로의 부르심이다. '좇으라'의 헬라어'아콜루데이'(* )는 현재 명령형으로서, '만나'(* ,휴리스케이)와 '이르시되'(* , 레게이)라는 두 현재형 동사와 부합되어 예수의 부르심이 그 당시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유효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또한 예수의 부르심은 '바로 지금'의 현재적 시점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라는 신앙적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특히 이 동사가 예수께서 제자들을 모으실 때 자주 사용되었다는사실은 주목할 만하다(8:22;9:21;19:21;막 1:18;2:14;6:1;10:21, 52;눅5:27;9:59;18:22;요 21:19).
=====1:44
빌립은...벱새다 사람이라 - 사도 요한이 빌립의 출신지를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동네라고 표현한 것은 누가가 기록한 '벱새다 줄리어스'(눅 9:10)와 구분하기 위함이었다. 본서는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예수의 갈릴리 사역을 강조하지 않는데 이는 예수의 갈릴리 사역이 이미 성도들에게 알려졌다는 전제하에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사도요한은 본서에서 공관복음서에서 생략한 예수의 예루살렘 사역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벱새다라는 지명만 들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갈릴리 사역을 연상했을 것이다. 벱새다는 '사냥이나 고기잡이 하는 집'이라는 뜻의 지명이다. 이는 벱새다가 갈릴리 호수 근처의 벱새다임을 암시한다. 또한 안드레와 베드로가 출신지가 가버나움임에 비추어 볼 때(눅 4:31-39), 벱새다는 가버나움 근처에 있었음이 분명하다.따라서 요한은 '갈릴리의 벱새다'(12:21)라고 명명한다. 벱새다에서의 예수의 사역은(1) 오병이어의 이적의 베푸심(마 14:13-21;눅 9:10-17), (2) 사천 명을 먹이심(막 8:1-9), (3) 소경을 치유하심(막 8:22-26) 등이다. 이로 보건대 벱새다를 비롯한 갈릴리사람들이 예수를 많이 따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일용할 양식을 보고 예수를 추종하였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영안(靈眼)을 뜬 것은 아니었다(6:30-70).신앙보다는 육체적 욕구를 추종한 벱새다를 위시한 갈릴리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저주는주목할 만하다(마11:20-24;눅 13:16).
=====1:45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 '나다나엘'(* )이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이며 그의 이름은 오직 본서에만 나온다. 그는 예수를 만나기 전에 율법에 충실했던 사람이었다(46-48).그의 집은 갈릴리 가나였으며(21:2) 예수를 만날 때에는 아마도 벱새다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혹자는 나다나엘을 바돌로매와 동일인으로 본다(Zahn, Meyer). 왜냐하면공관복음서에 기록된 '바돌로매'란 명칭이 바-톨마이(Bar-Tolmai, '톨마이의 아들')이므로 이는 고유 명칭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시몬 베드로가 '바요나'(Bar-Jona)라고불리운 것과 동일한다(마 16:17). 혹자는 나다나엘이 '마태'와 동일인이라고 추정한다(Hanhart). 이는 마태란 명칭의 뜻이 '여호와의 선물'이므로, 나다나엘은 마태의 다른명칭이라는 것이다. 또한 마태가 그의 복음서에서 구약 율법의 성취라는 측면을 강조했다는 점이 나다나엘의 율법 연구와 유사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의 두가지 학설은 명확한 증거가 될 수 없으므로 단지 추정에 지나지 않는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한 그이름 - 빌립은 메시야에 대한 소식을 율법을 근거로 하여 말한다. 이는 율법에 충실한 나다나엘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한 빌립의 열정을 잘드러낸다. 본문은 빌립이 예수야말로 율법과 예언서로 대표되는 구약의 모든 말씀을성취하시는 메시야이심을 확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빌립은 세례 요한의 제자였을 가능성이 크며 이는 빌립의 친구들인 안드레,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는 점 및 43절에서 빌립이 예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했으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확신있게 전도했다는 점에서 뒷받침된다.
우리가 만났으니 - 이것의 헬라어 '휴레카멘'(* )은 '휴리스코'(*)의 1인칭 복수 완료 직설법 능동태로서 메시야를 만난 빌립의 감격과 확신에 찬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우리'에 대해서는 41절 주석을 참조하라.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 - 빌립이 만난 메시야의 인간적인 신분이 제시된다. 원래예수의 출생지는 베들레헴이지만 갈릴리 나사렛에서 성장하셨기 때문에 자칭, 타칭으로 '나사렛 예수'라 불리었다(마 2:23). 그리고 '요셉의 아들'이란 표현은 법적 차원에서 볼 때 옳은 것이기는 하지만 예수의 신적(神的) 기원과 본성에 대해서는 아무런시사도 주지 않는다. 따라서 빌립은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은 알았으나, 성육신하신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럼으로 결국 나다나엘의 반론을 야기시킨다.
=====1:46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 원문상 '나사렛'(* )으로끝난 빌립의 말(45절)은 나다나엘을 격분시켰다. 그는 율법을 연구하는 자였으므로 메시야가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을 알고 있었다(미 5:2). 또한 당시 나사렛은 갈릴리의 한 마을이므로 율법주의자의 입장에서 볼때 멸시당해 마땅한 지역이었다(7:52).그러므로 본문은 당시 율법주의자들이 갈릴리 지방을 조롱할 때 쓰던 관용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와 보라 - 나다나엘의 빈정거리는 말투와 그 말투에 내포된 논리적 타당성은 빌립의 말문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심한 모멸감(侮蔑感)까지 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은 나다나엘을 강권한다. 여기에서 '와 보라'의 헬라어는 '에르쿠카이 이데'(* )이다. '에르쿠'는 '오다'라는 뜻을 지닌 '에르코마이'(* )의 2인칭 단수 현재 명령형이며, '이데'는 '호라오'(* )의부정 과거 명령형으로서 '보라', '볼지어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빌립이 말한 '와 보라'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와 보라'(39절 주석 참조)와는 다른 어감을 가진다. 즉 빌립의 강권(强權)은 당시 랍비가 제자들을 초청하는 형식이 아니라 제자가 다른 한 제자를 랍비에게 소개하는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말은 율법적인 논리보다는역사적으로 성육신하신 메시야라는 실체를 목도(目睹)하여 보라는 말이다.
=====1:47
보라 이는...간사한 것이 없도다 - 나다나엘을 처음 대면하기 직전에 그의 인격을통찰하는 그리스도의 신성이 잘 나타난 구절이다. 특히 본문은 '참'(* , 알레도스)과 '간사한'(* ,돌로스)이라는 두 반의적 수식어를 통해서 나다나엘의 성품을 잘 반영한다. 여기서 '알레도스'는 '겉과 속의 일체'혹은 '진지성'을 뜻하는 말이며 반면 '돌로스'는 고기를 낚기 위한 '미끼', 트로이 전쟁시의 목마(木馬)등과 같이 '속임수'나 '간계'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특히 이 표현은 야곱의 '간교한'성격을 상기시키는 말로서(창 27:35), 나다나엘이 야곱처럼 간교한 자가 아니라 메시야 대망을 충실히 기다리며 율법을 연구하는 자였음을 시사한다. 시편 기자는 '마음에간사가 없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다(시 32:2).
=====1:48
너를 부르기 전에...보았노라 - '...전에'라는 말이 시간적 의미의 답변이라면 '무화과나무 아래'라는 표현은 공간적 의미로서의 답변이다. 무화과나무는 유대 민족의번영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될 정도로(왕상4:25;미 4:4) 팔레스틴에서 번식하였다.특히 무화과나무는 무성한 커다란 잎으로 그늘을 드리웠으므로 당시의 랍비들은 이를율법을 교육하거나 묵상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무화과나무 아래'라는 표현은 나다나엘이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율법을 묵상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또한 여기서 '보았노라'는 말은 단순히 '알았다'라는 예지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주목하고 있었다는 의지적(意志的)인 측면까지도 내포하는 용어이다. 이는 예수께서 이미 나다나엘을 당신의 제자로 지목하였다는 뜻이다.
=====1:49
대답하되 - 이것의 헬라어 '아페크리데'(* )는 '자력으로 판단하여결정적으로 대답하다'라는 뜻으로서 나다나엘이 예수의 답변에 대해 항거할 수 없는힘에 이끌리어 그분이 바로 메시야라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고백했다는 뜻이다. 바클레이(Barclay) 말을 빌면 나다나엘은 자신의 마음을 샅샅이 꿰뚫어 보고 만족시켜 주신 예수의 권위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랍비여 - 38절 주석을 참조하라. 당신은 하나님의...
임금이로소이다 - 비록 나다나엘은 이 고백 속에 담긴 진의를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을 터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 고백이 결코 겉치레인 것은 아니었다. 이 두존칭은 메시야의 도래를 예언한 시 2:6, 7에 그 근거를 둔 것으로 짐작되며,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도 직결된다(마 16:16). 이 중 '이스라엘의 임금'이란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세 곳에 등장한다. 먼저 마 27:42네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조롱하는 야유로 언급되며, 막 15:32에서는 '그리스도'와 동의어로서 나온다. 그리고본서 12:13에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당시 군중들의 찬양 가운데 언급된다. 한편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왕으로 인식되었으며(삿 *:22, 23;시 84:3) 신약 중간사 시대부터는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代理)하실 왕적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두루 퍼져있었다.
=====1:50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 '이보다'라는 표현에서 '이'가 지적하는 바는 나다나엘이 체험한 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지식을 가리킨다. 나다나엘로 하여금 예수를 메시야로 믿게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중에서 가장 작은 한 면에 지나지 않았다.실제로 예수는 공생애 기간 동안 수많은 이적과 권능들을 나타내사 많은 사람들의 곤경을 타개해 주셨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입증하셨다.
=====1:51
진실로 진실로 - '더 큰 일'에 대한 예수의 말씀의 서두이다. 주로 공관복음서에서는 '진실로'라고만 쓰여진데 반하여(마 5:18;6;5;막 3:28;8:12;눅 4:24;18:17), 본서에서는 '진실로 진실로'라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3:3-5;5:24, 25;6:47). 이는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강조하려는 요한의 의도를 반영한다(6:47 주석 참조).
하늘이 열리고 - '열리고'의 헬라어는 현재 완료 능동태 분사로서 '한 순간이라도닫힘이 없이 항상 열려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와 같이 하늘이 열린다는 표현은 야곱이 벧엘에서 꾼 굼과 연관되며(창 28:10-22),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재확립되는 징조를 상징한다(사 64장). 이러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늘이 열리고 그동안 죄로 인해 막혔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하늘이 열리고'라는 말을,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곧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보며 또한그 나라를 소유하게되는 축복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보리라 - '하나님의 사자'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천사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영적 존재로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매개자로 활동한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란 '열려진 하늘'이 상징하듯, 예수 그리스도가 야곱이 보았던 '사닥다리'(창 28:12),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the Mediator)가 되신다는 것이다. 한편 '인자'에 관해서는 8:21-59주제 강해 '인자칭호에 관하여'를 참조하라.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 요한은 이 머리말에서,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나타난
영원한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神性)을 선언하고 있다. 그의 목적은 인류의 회복은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능력을 통해서 모든 만물이 창조되었고 그분만이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과 활력을 불어 넣으실 수 있으며, 인간 그 자체 속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능력과 은혜에 대한 독특한 증거를 주셨으며 또 아담이 타락하고 실패한 이후에도 그의 후손들에게 은혜와 친절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이다. 이 교리에 대한 지식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생명과 구원을 도저히 구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인데, 이와 같은 가르침이 확고히 서지 못한 상태에서 어떻게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안주(安住)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복음서 저자는 이 말씀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유일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으며, 나아가 자연이 아직 타락하기 전에 생명의 원천과 근원이 되셨던 분의 사랑을 통하여 생명이 이제 죽은 자들에게 다시 주어진다고 강조하고 있다. 요한이 하나님의 아들을 '말씀'(Sermo)이라고 부른 것은, 첫째로, 그가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의 으뜸이 되시며, 둘째로 그 지혜이신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나타나셨다는 단순한 이유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람의 경우에도 말씀이 사고(思考)의 표현이라고 불리우는 것처럼 이것을 하나님께서 적용시켜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 또는 언어를 통하여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신다고 말하는 것도 부적합한 말은 아니라고 본다. * (호 로고스)의 다른 의미들은 별로 적당하지가 않다. 이 헬라어를 분명히 정의하면 이성(理性) 또는 계산(計算)을 뜻한다. 그러나 나는 나의 믿음의 한계를 지나쳐서 이에 대한 이론을 전개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이러한 철학적 논쟁을 전혀 긍정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와 변론하는 데 있어, 하나님의 침묵, 그 자체가 이와 같이 차원 높은 비밀(신비)를 이야기할 때 우리의 지식적인 접근이 얼마나
한심한 문제인가를 선언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는데 있어서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에, 그는 그전에는 자기를 스스로 숨겨둔 상태였다. 따라서 '말씀'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 이중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다.
저 무가치하고 교만하기 이를 데 없는 스페인 사람 셀베투스(Servetus)는 영원한 말씀이 등장한 것을 창조할 때 나타남으로써 비롯됐다고 상상한다. 마치 그의 능력이 그의 대외적인 움직임에 의해서 알려지기 전에는 그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복음서 저자는 여기서 '말씀'에 시간적인 시작을 부여하지 않고 그가 태초부터 계셨
다고 말함으로써 모든 시간을 초월하고 있다 ! 나는 그들이 개처럼 얼마나 잘 짓는지
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한때 아리안계 사람들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으
나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태초(beginning;시작)라는 말은 순
서를 가리키는 말로 영원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고 궤변을 늘어놓았던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는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말함으로써 위와 같
은 중상모략에 선제공격을 가했다. 만일 말씀이 시간적으로 시작이 있었다면, 그들은
또한 하나님 안에서 어떤 시간의 연속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과연 요한은 이
귀절을 통하여 주님(말씀)을 모든 피조물로부터 구분하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여러가
지 의문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실제로 어디에 있었는가? 말씀은 그의
능력을 어떻게 행사했는가? 그의 성품은 어떤 것이었는가? 어떻게 해서 그는 알려질
수 있었는가?
그러므로 요한은 그리스도가 세상과 피조물 가운데 고정되어 있었다는 낭설을 부인
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항상 하나님과 함께 계셨기 때문
이다. 그러면 태초를 천지창조와 관련짓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일반적인 세계 질서로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분명히 격리된 창조주가 아니었
던가? 이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만 모욕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아버지를 멸시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을 하나님의 지혜를 떠나서 별도로 생각하는
것이 그릇된 일이라면, 말씀의 근원도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를 떠나서 찾을 수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된다. 셀베투스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으로
대표되기 전에는 '말씀'도 구상(構想)할 수 없는 것이라고 반대 의사를 제기한다. 마
치 그가 공개적으로 세상에 나타나기 전에는 하나님 안에 그가 실존하지 않았던 것처
럼! 마치 그가 자기 자신을 외적으로 나타내기 전에는 내적으로 존재하지 않은 것처
럼! 그러나 복음서 저자는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무조건적으로 확언함으로써
위와 같은 억지나 궤변을 늘어놓을 수 있는 여지를 전혀 남겨 놓지 않았다. 요한은 우
리를 모든 임시적인 것으로부터 끌어 내었다. 동사(動詞)의 불완전 시제로부터 계속되
는 상태를 유추하는 사람들은 오해려 난처한 입장에 빠져있다. 이들은 요한이, 말씀이
"......계셨으니"(was)라고 한 것보다 "계셔왔으니"(was being)라고 하는 말이 계속적
인 연속을 나타내어 더 좋은 표현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항에는 더 신중
한 이유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우리는 내가 지금까지 제시한 바, 즉 요한이 우리를 하
나님의 영원한 처소로 이끌어 말씀이 세상을 외적으로 창조하면서 자신을 나타내기 이
전에는 말하자면 그곳에 숨겨져 있었다는 내용으로 만족해야겠다. 그러므로 어거스틴
(Augustine)이 여기서 언급한 태초(beginning)는 전혀 시작(geginning)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우리에게 상기시켰을 때, 그는 옳게 보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아버지 하나님
이 순서상으로 그의 지혜보다 앞에 있지만, 그가 그의 지혜보다 먼저 있었다고 말할
때 어떤 시점(時點)을 상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들은 하나님께로부터 그의 영광을
앗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분은 세상이 창조되기 영원 전부터 "하나님 안에 숨겨져
있었던"-내가 이런 말을 쓰는 것이 허용된다면-영원한 아들(generatio)로서, 그후 여
러해동안 율법 하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두호하게 윤곽을 드러내셨다가 시간이 차매 완
전한 모양을 입고 육신으로 나타내신 바된 분이시다. 나는 * (로고스)라
는 말을 라틴어 성경에서 verbum(word)으로 번역하는데 놀랄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차라리 말(* )의 번역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가능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Sermo(Speech;강연)가 훨씬 더 적절한 표현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은 에라스므스(Erasmus)가 쓴 단어를 더 좋은 말로 바꾸었을 때 그를 신
랄하게 헐뜯었던 신학자들의 가혹한 비난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 우리는 이미 하나니미 아들이 세상보다 높이
계시고 모든 피조물보다 높이 계시며 모든 시대보다 앞서 계신 분이라고 밝혔다. 그러
나 동시에 이 표현은 그에게 아버지와 다른 실체(hypostxsis)를 안겨준다. 복음서 저
자가 말씀이 항상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거나 하나님의 존전에 계셨다고 했다면 그것은
불합리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말씀은 하나님 안에 그의 확실한 실재를 갖고 있었기 때
문이다. 그러므로 이 귀절은 아들이 아버지와 분명히 다른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
에, 사벧리우스(Sabellius)의 오류를 논박하기에 충분하다. 나는 이미 앞에서이와 같
이 심오한 비밀(신비)은 신중한 사고를 요구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초대교회 저
자들은 당시의 이교도들의 모호한 궤변에 대항해서 다른 방법으로는 참되고 순수한 진
리를 변호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만을 표현할 수 있는 어휘를
만들어내야만 했다는 점에서 그들을 가히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의 단순한 하나
님의 본질(essence)안에 세 분의 인격(persons) 또는 세 분의 실체(hypostases)가 계
시다고 표현했다.
실체(hypostasis)라는 말은 히브리서 1장에서 이러한 인격의 뜻(Person)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힐라리(Hilary)가 썼듯이 라틴어의 서브스탄티아(substantia)라는 말과
상통한다. 이들은 * (타 프로소파) 또는 Persons(人格)이라는 말
을 "하나님 안에 계신 분리된 소유물(주)"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우리들의 묵상에 자신
을 맡겼다. 나찌안주스(Nazianzus)의 그레고리(Gregory)가 세분이 나의 주위를 둘러
비추는 것을 연상하지 않고 홀로 계신 하나님을 나는 생각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그리스도의 신성에 어떤 의심도 하지 못하도록, 그
는 분명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선언한다. 하나님은 한분이신 만큼,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같은 본질에 속한 분이시면서 어떤 면에서는 다른 데가 있는 분이심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두번째 귀절에 대해 논한 바 있다. 아리우스(Arius)는 하나
님의 본질은 하나라는 사실에 대해 극히 사악한 견해를 피력했다.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을 고백하게 되는 사태를 모면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일종의 피조물이라고 괴변을
떨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이 곧 하나님이었다고 했는데, 더 이상 그리스도의 영원성
을 부인할 여지가 없지 않은가?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 이미 우리에게 말씀한 내용을 더욱 깊이 우
리 마음 속에 확신시킬 생각으로, 요한은 앞에 나온 두 귀절을 "그가 항상 계셨으며,
그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하는 말로 간추리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태초(시
작)가 모든 시간보다 이전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 요한은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선언하
고 그의 하나님되신 속성을 선포한 후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works)을 통해서 그의 신
성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실제적인 지식 안에서 특별히 훈련 받을 필요
가 있다. 왜냐하면 단지 하나님의 이름을 그리스도에게 부여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우
리에게는 차거운 지식 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그가 과연 하나님이심을
느껴야 한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아들의 위격(位格)에 적절히 어울리는 선언을 하
고 있다. 바울은 한 마디로 말하기를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롬 11:36)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아들이 아버지와 비교될 때, 그는 보통 이 기준에 의해서 구분이 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아버지께서 아들로 말미암아 모든 사물을 만들었다. 만물이 아
들로 말미암아 아버지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평범한 화법(話法)을 쓰고 있다. 앞에서
내가 말한 것처럼, 요한의 계획은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이 세상이 창조된
직후에 외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셨음을 보여주자는 것이다. 전에는 그 속성을 도저히
파악할 수 없었으나, 이제 그의 능력의 결과에 의해서 공적으로 알려진 바 되었다. 심
지어 철학자들 중에도 하나님을 이 작품(천지를 가리킴)의 배후에 있는 지성(지혜)으
로 간주함으로 하나님을 세계의 건축자로 내세우는 이들이 있다. 이 철학자들은 사실
바로 본 것이다. 성경이 그들의 견해와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곧 일
고의 가치가 없는 추리 속으로 빠져 들기 때문에 그들의 증거를 받아들일 아무런 이유
가 없다. 오히려 우리는 이 하늘의 음성-요한의기록-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
면 성격은 우리의 마음이 감당하고 소화시킬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비록 이 귀절이 여러가지로 해석
되어 왔으나, 나는 "지어진 것이......하나도 없다"는 한 가지 뜻으로 받아 들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거의 모든 헬라어 원본이(아니면 적어도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원본들은) 이 말씀과 일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상식이 이를 요구하고 있다.
'지어진 것이'라는 문구를 그 앞의 귀절로부터 분리시켜 뒤에 따르는 문장과 연결시키
는 사람들은 "지어진 것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라는 억지 문장을 지어내지 않으
면 안된다. 그러나 이들은 이와 같은 화법이 피조물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보여 줄 수
가 없다. 자기 나름으로 극단적인 플라톤 학파에 속해 있던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 세
상을 지으시기 전에 자기 마음 속에 전체 작품의 형태에 대한 개념을 품으셨고, 나아
가 그리스도 안에서 세계의 창조가 명령된 이후로, 그 안에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만
물의 생명도 하나님께서 품고 계셨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이것이 복음서
저자 요한의 생각과 얼마나 거리가 먼 생각인가를 우리는 곧 알게 될 것이다. 이제 나
는 그 앞의 문장으로 돌아간다. 처음에는 이것이 같은 말의 되풀이처럼 느껴지겠지만
이것은 전혀 같은 문구의 반복이나 오류가 아니다. 사단이 우리의 시선을 그리스도로
부터 빼앗아 가기 위하여 온갖 힘을 경주하고 있기 때문에, 요한은 전혀 어떠한 사물
로 지어진 것에서 제외될 수 없음을 명백히 선언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 지금까지, 복음서 저자는 우리에게 모든 만물이 하나
님의 말씀에 의해서 창조되었음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이제 창조된 만물을 보전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맡겨져 있음을 말하고 있다. 세상을 창조할 때 그의 능력이
갑자기 나타났다가 곧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의 능력은 안정되고 고정된 자연의 질서
가 유지되고 있는 가운데 나타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히브리서 1장 3절에 그가 그
의 능력의 명령, 또는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뿐만 아니
라, 이 생명은 넓게 감정은 없으나 살아있는 무생물체를 지칭할 수도 있고 생물체 만
을 적용해서 말할 수도 있다. 생물체나 무생물체 중 어느 쪽을 택해도 별로 문제될 것
이 없다. 왜냐하면 이 귀절이 뜻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피조물의 생명의
원천이 되실 뿐만 아니라-존재하지 않던 것을 생겨나게 하시는 원동력이 되시고, 그의
생명을 주시는 힘(살려주는 힘)이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그들의 현상(現狀)유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주님의 계속적인 영감이 세상에 생명을 허락지 않는다면, 현재 번성
하고 있는 모든 물체가 쇠퇴하여 없어질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한 마디로 바울이
하나님께 대해 소개할 때,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고 있다(행17:28)고 말한
것을, 요한은 말씀의 축복에 의해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분은 영원한 말씀을 통하여 우
리에게 생명을 공급하신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 나는 요한이 뜻하는 바와 일치하지 않는 다른 해석들
을 의식적으로 무시한다. 나는 이것이 인간이 다른 생물체를 능가하는 생명의 부분이
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마치 인간에게 주어진 생명은 일반적인 생명이 아니라 이성(理
性)의 빛과 연합된 생명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을
다른 피조물로부터 분리시킨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먼 거리에서 바라봄
으로써 의식하기보다, 우리 자체 내에서 그 능력을 느낌으로써 그의 능력을 더 인식하
고 있기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사도행전 17장 27절에서 하나님을 멀리서 찾지 말라
고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자기를 계시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복음서 저자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에 더 가까이 시선을 돌리도록 설득할
목적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일반적으로 고려할 때, 요한은 그들에게 특별히 주어진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즉 인간은 동물과 같은 형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이성을 부여받은,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그의 빛으로 인간의 마음을 효과적으로 깨우쳐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특이한 축복의 주관자가 되심을 알게 할 목적으
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빛은 그빛의 원천인 '말씀'으로부터
우리에게 흘러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 빛은 말씀의 거룩한 능력을 더욱 명확하게 비추
어 볼 수 있는 거울과도 같은 것이다.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 성경 여러 곳에서 밝혀주고 있는 대로 인간이 눈이 어두
어졌다는 사실과, 그 어두움 때문에 인간의 정죄(定罪)받고 있는 너무나 잘 아려진 기
정 사실에 대하여 반기를 든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이들은 그들의 모든 사고활동 가
운데서 비참하게 사라져 간다. 인간들이 자신의 지각(知覺)에 의해서 헛되고 거짓된
것에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면 세상에 왜 이렇게도 많은 오류가 범람하겠는가? 그러나
인간 내부에 아무런 빛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요한의 이와 같은
증거는 파괴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인간의 생명 속에는 동
작과 호흡 이상의 훨씬 우수한 요소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복음서 저자는 애초
에 인간에게 주어졌던 빛은 현재의 상태에 의해서 측정되어서는 안된다고 즉시 경고함
으로써 이 질문을 미리 막고 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이 상하고 타락한 성품 속에서 빛
이 어두움으로 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성의 빛이 완전히 꺼졌다고는 말하
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두움이 가득한 인간의 마음 속에도 아직 저 밝음의 불꽃이 비
치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는 이제 이 문장 속에 두 가지 생각이 들어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는 인간이 애초에 부여받았던 건전한 성품과는 판이한 상태에 있음을, 즉
모든 부분에서 광채를 발해야 할 그들의 마음이 불행하게도 눈먼 상태로 빠져들게 되
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말하자면, 인간의 성품이 이와 같이 부패한 가운데 그리
스도의 영광이, 어두움에 묻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요한은 이와 같은 흑
암의 와중에도 어느 정도 그리스도의 신성과 능력을 보여주는 요소가 남아 있다고 말
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복음서 저자는 인간의 마음은 그 눈이 아주 멀었기 때문
에 어두움에 압도당한 것으로 간주해도 좋음을 시사하고 있다. 왜냐하면 요한이 더 부
드러운 단어를 써서, 빛이 흐리고 어두웠다고 말할 수 있었으나, 그는 첫사람 아담의
타락한 이후로 우리의 상태가 얼마나 부패해 있는가를 보여주기를 원했다. 빛이 어두
움에 비친다고 요한이 말한 것은 부패한 인간의 성품을 칭찬해서 한 말이 아니고 무지
한 인간들에게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서 그와 같은 표현을 썼던 것이다.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이 희
미한 빛을 통하여 우리 인간을 부르셨지만, 복음서 저자는 이것이 효과가 없었다고 말
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보면서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께로부
터 소외된 현재에 이와 같은 무식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에게 남아있는 빛은 효력
을 발휘하지 못하고 명맥을 겨우 유지하기에 이르렀다. 우리의 경험이 또한 매일같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靈)에 의해서 아직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
까지도 아직 이성(理性)을 행사함으로, 우리가 호흡을 하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을 뿐
아니라 지각을 가지고 이를 행사하도록 지어진 존재임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러나 이
들은 이성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을 가까이 찾거나 하나님께 접근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들의 지성(知性)은 헛될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새로운 도우심으로 돕지 않는
다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빛
을 인간들 위에 비취셨으나 어두움에 빠져있는 그들은 그 빛의 원천을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타락한 가운데 헛되고 비뚤어진 환상에 끌려 다니는 것이다. 부패한 성품 속에
남아 있는 그 빛 가운데는 두 가지 주요 부분이 있다.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종교의
씨가 뿌려져 있고, 또한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이 그들의 양심에 새겨져 있다. 그러
나 그 열매는 종교심이 수천가지의 미신을 산출(産出)하고 양심이 모든 판단을 흐려
미덕(美德)과 악덕(惡德)을 혼동시키는 것 외에 무엇이 있는가? 한 마디로 말해서 인
간의 타고난 이성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지 못한다. 그들이 인생을 살아 갈 지
혜를 부여받았으며 인문과학을 연구할 수 있도록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이 아무런 효력
이 없이 사라져 버린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복음서 저자가 타고난 재능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을 뿐, 아직 중생(重生)의 은혜를 다루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겠다.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두 가지 뚜렷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첫번째 능력은 세
상을 건축하신 것과 자연의 질서에 잘 나타나 있다. 두번째 능력에 의해서 그는 타락
한 인간의 성품을 새롭게 해서 회복시킨다. 그분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
래서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며 그는 권능에 의해서 만물이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특별히 인간은 지각(知覺)이라는 특유의 재능을 부여받았다. 비록 타
락에 의해서 인간이 지각의 빛을 상실한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아들의 은혜로 나
면서부터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완전히 파괴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아직
도 보고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의 우둔함과 완악함에 따라 그에게 아직 남
아있는 빛을 어둡게 가리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중개자(仲載者)의 새로운 직분을
담당하셔서 중생의 영을 통해서 잃어버린 인간을 개조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요한이 언급한 빛을, 복음과 구원의 도리에 연관시키는 사람들은 정반대의 입장으로 추측한다.
1:6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 저자는 요한의 소명(召命)을 확인하지 않고 다만
그것을 지나가는 말로 언급할 뿐이다. 이러한 확언은 자신을 내세워 "나는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라고 자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는, 나중에 이 증인에 대해 좀더 언급할 의향으로, 요한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보내심을 받았다고 한 마디 말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후에 자기의 전도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요한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깨달아야 할 것은 -내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요한에 대하여 저자가 언급한 내용이 교회의 모든 교사들에게도 요청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그들의 가르침이 권위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 위에 바탕을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야 된다는 사실이다. 복음서 저자인 사도 요한이 요한의 이름을 밝히는 것은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리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의 의미가 그에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그의 천사를 통하여 그가 태어나면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고 명령하셨을 때 주님께서는 요한을 위해 의도(예정)하신 직
분을 지칭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 (요-하넨-), 모든 사람
이 이를 인하여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사자(herald)임을 인식하도록 하
셨다.
사람이 났으니 - 복음서 저자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난 방법을 논하
기 시작한다. 아무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임을 의심치 못하게 하려
고, 요한은 세례 요한이라는 전령(傳令)에 의해,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공개적으로 선
포되셨는가를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인간에게 스스로 나타내셨을 뿐 아니
라 세례 요한의 전도와 증거에 의해서 알려지기를 원하셨다. 아니, 하나님 아버지께서
는 그리스도에 앞서서 이 증인을 보내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을 사람들이 보
다 쉽게 받을 수 있게 하셨다. 그러나 언뜻 보기에는 그리스도께서 무슨 증인이라도
필요한 것처럼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를 증거했다는 것이 어처구니 없게 보일 수도 있
다. 왜냐하면 주님은 사람의 증거를 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대답은 간단하고 분명하다. 이 증인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예정된 것이 아니라 바로 우
리를 위해서 증거한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인간의 증거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기에는 너무나 빈약한 것이라고 이견(異見)을 제시한다면, 그 대답
은 역시 간단하다. 세례 요한은 개인적인 증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를 부여받고,
인간이라기 보다는 사자(使者)의 몸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이 칭찬
을 받는 것은 그의 뛰어난 능력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사자(대사)였기
때문에 칭찬을 받는 것이다. 요한의 증거는 또한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하면서 자기
자신을 증거한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의 전령(傳令;使者)으로서의 요한
의 존재 이유는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의 시선을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기적으로 이끄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1:7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 복음서 저자는 요한이 부름을 받은 목적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면서, 그의 소명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교회를 준비시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
다. 그가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초대할 때, 그는 분명히 자기 자신의 뜻을 펴기
위해 온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요한은 추천을 받을 필요가 별로 없다, 복음서 저
자는, 따라서, 요한에게 돌려지는 조그마한 칭송이라도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게 될
것을 염려해서, 요한은 그 빛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요한에게
너무나 집착한 나머지 그리스도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새벽의 희미한 햇
살에 압도 당한 사람이 감히 태양을 쳐다보지 못한 것과 같았다. 이제 우리는 복음서
저자가 빛이라는 단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를 보기로 하자. 모든 성도들은,
성령님의 깨우침을 받아 자기 자신을 볼 뿐만 아니라 자신이 본을 보임으로 다른 사람
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한다는 의미에서, 그들은 '주 안에서 빛'(엡5:8)이라 하였다.
사도들은 그들을 '빛'이라고 불렀는데 그들은 복음의 횃불을 들고 세상의 어두움을 물
리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마5:14).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복음서 저자는 즉시 계
시의 원천인 영원하고 신비한 계시를 깨닫게 하려고 논의하고 있다.
1:8-9
참 빛......세상에 와서 - 복음서 저자는 참 빛과 거짓된 빛을 대조해서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천사나 인간과 공통으로 빛이라고 불리우는
요소를 가지고 계신다고 생각할 것을 우려해서,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어떠한 빛과도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를 원했다. 그 차이는 하늘과 땅에 있는 빛은 다만 파생된
광명일 뿐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을 통하여 온 세상에 밝히
비취는 빛이라는 점이다. 세상에 있는 빛(밝음)의 원천이나 근원은 다른 어느 곳에서
도 발견할 수 없다. 따라서 요한은 주님을 그 본성 자체가 빛이신 '참 빛'이라고 부르
고 있는 것이다.
각 사람에게 비취는 - 복음서 저자는 우리 각자가 스스로 자기 안에서 느끼는 결과
로부터 그리스도께서 빛이심을 알 수 있도록 이를 강조하고 있다. 그는 예수께서 영원
한 빛이시니 만큼, 근원적으로 빛이 되신다고 보다 더 정교한 논조를 전개할 수가 있
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신에 그는 우리 모두가 가졌던 경험을 회상하도록 우리를
권유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만이 우리로 하여금 그의 밝은 빛에 참예하게 하시는 분
이기 때문에, 그분에게만 빛이라고 불리우는 존귀한 권위가 어울림을 우리는 인정하여
야 할 것이다. 다른 이들에겐, 이 귀절이 두 가지로 설명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
보편적인 용어를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서 생명의 빛에 참예하게 된 성도들에게 국
한해서 쓰고 있다. 어거스틴은 학교 교장의 비유를 들면서, 어느 동네에 학교가 하나
뿐이라면 많은 사람이 그 학교에 다니지 않더라도 그 교장선생님은 온 동네의 교장으
로 불리우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 귀절을 상대적으로 보고 있
다.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마음의 깨우침(빛)을 받았다는 것은 주님의 은혜를 떠
나서 달리 생명의 빛을 받았다고 자랑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복음서 저자가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라고 일반적으로 말한 것처럼, 이 빛에서 나
가는 광선이 전 인류 위에 비친다고 하는 의미로 더 좋게 생각한다. 우리는 인간이 다
른 동물보다 뛰어나 이성과 지성을 부여받은 특이한 존재임을 알고 있으며 또 양심에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을 갖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영원한 빛에 대하여 아
무 것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광신자들은 이 귀절을 붙들고
계시의 은혜는 차별이 없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곡해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이 믿음(신앙)보다 훨씬 못한 일반적인 이성의 빛을 지칭하는 것임을
기억하자. 인간은 아무도 자기 마음의 명철과 지혜에 의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의 영만이 그의 택한 자들에게 하늘 문을 열어 주신다. 나아가, 우리
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나눠주신 이성(理性)의 빛이 죄로 너무나 어두워져 있기 때문
에 극히 작은 양의 섬광(閃光)이 아직 꺼지지 않고 이 극심한 암흑세계를, 아니 무서
운 무지와 허물로 꽉찬 인간의 마음 속을 비취고 있음을 기억해야겠다.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 인간은 그들이 향유하고 있는 빛이 어디에서 어떻게 생겨
난 것인지를 모를 정도로, 말하자면 스스로 눈이 멀었기 때문에, 복음서 저자는 인간
의 배은망덕함을 책망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시대나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께
서 육체로 나타나시기 전에도, 그는 여러가지로 그의 능력을 계시하셨다. 그러므로 우
리의 일상 생활에 나타나는 주님의 능력이 인간의 게으름을 시정해야 할 것이다. 흐르
는 물줄기에서 물은 길어 먹으면서도 그 물이 흘러나오는 샘(원천)을 한번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이치에 어긋나는 것인가?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나타나
시기 전에는 그리스도를 알 수 없었다고 세상 사람들이 핑계를 댄다 해도 그것은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없다. 이것은 그들 가운데 항상 존재해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그들의 나태함으로 일종의 악질적인 무지함으로 가리우는데에 기인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잘라 말하면 그리스도는 사람이 그의 빛에 비추임을 받지 못할 정도로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지 않은 적이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자연의 섭리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바라 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정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1:11
자기 땅에 오매 - 하나님의 아들이 볼 수 있게 육신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을 때 -
그리고 그것도 열방 가운데서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신 유대인들에게 계시하셨을 때-그를 알아보지도 않고 영접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극히 불쌍할 정도로 사악한 상태에 빠져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귀절도 또한 두 가지로 풀이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서 저자가 전 세계를 다 지칭해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세상 어느 부분도 하나님의 아들께서 자기 자신의 소유로 주장하지 못할 부분은 없다. 그러므로 이들의 해석을 따르자면,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오셨을 때, 그는 외국 땅에 들어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 인류가 그의 기업이기 때문에 곧, 자기 세상에 온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요한의 '자기 땅'이라는 말이 유대인만을 지칭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본의(本意)에 더 가깝다고 믿는다. 복음서 저자는 암시적(暗示的)인 대조를 통해서 인간의 배은망덕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이 거할 처소로 한 민족을 택하셨다. 그가 그곳에 나타나셨을 때, 그는
버림을 받았다. 이것은 인간의 완악함이 얼마나 극심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는 유대인들의 믿지 않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거침돌이 될 것을 알고 이 거침돌을 제거할 목적으로 이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자기들에게 특별히 약속된 구주가 오셨을 때 그를 멸시하고 배척했다면 누가 그를 이세상의 구속주(救贖主)라고 인정하겠는가? 우리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이 그와 같이 고민했던 것을 알고 있다. 나머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강조점이 동사와 명사에 놓여있을 뿐이다. 복음서 저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그가 전에 계시된 곳에 오셨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을 사람들이 보다 더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새롭고 특별한 형태의 임재(臨在)를 의도하고 있다. 요한이 '자기 땅에'(unto his own)라고 말할 때, 그는 유대 민족과 이방나라들을 비교하고 있다. 왜냐하면 유대 민족이 특이한 특권에 의해서 하나님의 권속으로 택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유대 민족이 자기 가족이기 때문에 그들의 권리에 따라 그의 나라에 속하기라도 한 것처럼, 먼저자신을 그들에게 제시하셨던 것이다. 이사야 1장 3절의 불평도 같은 양상을 띠고 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비록 주님께서는 전 세계를 지배하고 계시지만, 그는 특별히 이스라엘에 속하는 주님이 되신다. 이스라엘은, 말하자면 그의 거룩한 우리 안으로 모은 바 될 것이다.
1:12
영접하는 자 곧 - 복음서 저자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멸시하고 배척했다는 거
침돌에 아무도 걸려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그를 믿는 사람들을 하늘 높이 올려주고 있
다. 믿음의 결과는 하나님의 아들로 여김을 받을 수 있는 영광이라고 그는 말한다. -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이라는 보편적인 어휘는 대조법을 암시하고 있다.
유대민족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만 국한된 분인 것처럼 헛된 영광에 도취되어 있
었다. 그래서 복음서 저자는 그들의 운명이 바뀌었음을 선언한다. 이방인들이 바로 기
업을 빼앗긴 유대인들이 남겨놓은 자리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양
자의 권한을 나그네에게 이양한 것과도 같은 것이다. 바울이 말한대로 한나라의 넘어
짐이 온 세상의 생명(부요함)이 된 것이다(롬11:12). 말하자면, 복음이 유대인들로부
터 퍼져나왔을 때 그 복음은 세계 전역에 널리 전파되어 나가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
여 유대인들은 그들의 특별한 은총을 몰수당했다. 그러나 그들의 믿지 않음은 그리스
도에게 아무런 해를 미치지 못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다른 곳에 왕국의 보좌를 세
우시고 차별이 없이 전에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것처럼 보였던 이방 만민을 구원의 소
망으로 부르셨기 때문이다.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영접받아야 하는가의 문
제는 그를 믿음으로써 영접하는 것임을 간단히 보여주고 있다.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 이식(移植)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써 양자의 권리를 취득한다. 주님께서 유일
한 하나님의 아들, 즉, 독생자이신 만큼,이 영예는 우리가 식구가 되지 않는 한, 우리
에게 속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내용이 다시 '권세에 대한 허구'를 논박해 준다. 복음
서 저자는 이 권세가 믿는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선언하고 있으며 그들이 이미 하나님
의 자녀가 된 것이 확실하다. 믿음을 통해서 사람은 적어도 자기가 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데까지는 나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믿음(Faith)을 격하시키는 것
이다. 그들은 결정되지 않은 가능성으로 현재의 결과를 대치시키는 것이다. 이들의 모
순은 다음에 나오는 말씀에 의해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다음 귀절에서 믿는
자는 이미 하나님께로서 낳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
는 것은, 선택의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그 자체인 것이다. 비록, 히
브리어에서 가끔 '이름'이 '권세' 대신에 쓰이긴 하지만, 여기서는 복음을 전파하는
것, 즉, 복음의 도(道)를 지칭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전파될 때, 우리는 그
를 믿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보통 평범한 방법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은 주의깊게 살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게도 자기 나름
대로의 혼동된 믿음은 복음을 깨닫는 것(이해하는 것)과는 관계없는 믿음으로 조작해
내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도들 가운데 '믿는다'는 말보다 더 자주 쓰이는 말도 없지
만, 복음을 들음으로써 생기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없이 그냥 그대로 쓰이고 있
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통해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리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를 영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나는 여기에 쓰인 * (에크수
시아)라는 말을 존엄(dignitatem)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가톨릭 교도들의
헛소리를 반박하기 위해,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더 좋으리라고 본다. 이들은 이 귀절
의 뜻을 고약하게 변질시켜서, 우리는 선택의 자유, 즉 우리가 보기에 좋은대로 신용
할 특권만을 부여 받았다는 것이다. 이 말씀에서 자유의지라는 의미를 찾아내는 것은
물 속에서 불을 찾아내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언뜻 보기에는 그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를 하나님의 아들로 만드신다고 하지 않
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은혜가 우리에게 베풀어졌을 뿐이며 그 은혜를 활용하거나 거절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추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반적인 문맥을 살펴보면 한 단어에
대한 이 보잘 것 없는 궤변은 금새 무너지게 된다. 복음서 저자는 곧 이어서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부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믿음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다면 그리고 하
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믿음을 우리에게 불어 넣어 준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
시는 양자의 은혜는 분명히 잠재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다. 복음서 저자가 사
용한 완곡한 표현을 보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한
마디로 말한 것보다도 은혜의 우월성을 더 잘 나타내주고 있다. 여기서 요한은 더럽고
사악한 사람들, 영원한 수치를 받도록 정죄되어 사망의 암흑 속에 버려져 있는 사람들
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은 인간들에게 이런 영예를 부
여함으로써, 그들이 갑자기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다. 복음서 저자는 이 축복의 위대함을 드러내 말하고 있다. 바울도 에
베소서 2장 4절에서 같은 은혜를 말하고 있다. 설령 어떤 사람이 이 낱말의 일반적인
의미를 좋아한다 하더라도, 복음서 저자가 쓰고 있는 대로, 권세(power)라는 말은 완
전한 그리고 충만한 효과를 포함하고 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부정(不淨)하고 할
례받지 못한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긍휼을 베푸셨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무덤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를 일으키셨다는 사실은 믿을 수 없는 변화이다. '권세'라
고 하는 것은, 바울이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
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골로새서 1장 12절에서 말할 때에 *
(하카노레스)를 가리키는 것이다.
1:13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 나는 이것도 같은 의미라고 생각한다. 나는-어거스틴
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추정하듯이-육정(flesh)을 여자에게 해당시킬 이유를 발견치
못한다. 복음서 저자는 다른 표현으로 같은것을 반복하여 말함으로 이를 우리 마음에
더 깊이 새기려고 시도하고 있다. 비록 요한이 특별히 육신을 자랑했던 유대인들에 대
해 생각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귀절에서 일반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
것은 우리의 성품으로나 우리가 먼저 무엇을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주님께서 즉각적인 사랑, 즉 무조건적인 사랑에 의해, 자원해서 우리를 낳아주심
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믿음은 우리가 생산
해 내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중생(重生)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복음서 저자는 하나
님께로서 나지 않은 자는 아무도 믿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음
은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다. 뿐만 아니라 믿음은 차디 찬 지식이 아니다. 하나
님의 영에 의해서 다시 지음을 받기 전에는 아무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복음서 저
자는 여기서 믿음보다 중생을 더 앞에 놓음으로 앞뒤를 바꾸어 놓은 것 같다. 중생은
믿음의 결과이며 믿음을 따라 일어나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두 순서
가 완전히 일치된다고 대답한다. 믿음에 의해서 우리는 썩지 않는 생명의 씨앗을 잉태
하게 되며, 새롭고 거룩한 생명으로 거듭나게 되며 또한 믿음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러가지 의미에서, 믿
음은 우리의 중생(거듭남)의 일부분이며, 믿음에 따라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가, 하나님의 자녀의 일원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성령에 의해서 우리 마음이 깨우침
을 받는 것은 우리의 갱생(更生)의 삶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그 원천이
되는 중생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믿음에 의해서 우리는, 성령에 의
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양자의지위를
획득하는 시작이라고 부른다. 물론 우리는 이보다 더 분명하고 직선적인 구분을 할 수
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불어 넣으실 때 그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비밀스
런 방법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다. 그러나 일단 믿음이 주어졌을 때, 우리는 양자
됨의 은혜는 물론, 새 생명과 성령의 다른 은사를 생생하게 인식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말한 대로, 믿음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믿음은 우
리를 인도하여 그의 모든 축복을 소유하게 하신다. 따라서, 우리의 태도에 관한 한,
우리는 믿은 후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영생의 기업은 양자됨의
결과이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서 저자가 우리의 구원을 온전히 그리스도의 은혜로 돌
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과연 사람이 아무리 면밀히 자기 자신을 살핀다 할지라도, 우
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 것 이외에 다른 것으로서는, 하나님의 자녀
될 가치가 없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 나는 이말이 유대인들의주제넘은 생각을 간접적으로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이들과 동감한다. 그들의 혈통의 가치는 항상 그들의 입술에 오
르내렸다. 그들은 거룩한 조상에게서 났기 때문에 나면서 부터 거룩한 것처럼 행세했
다. 그들은 참된 자손으로서 타락하지 않았다면 육신적으로 난 것은 조금도 자랑스럽
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믿음은 모든 부정하던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로 믿어 하나님
의 자녀가 되는 것은 어머니 배안에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다시 창조함을 받
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혈통은 긴 족보의 서열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 말과 같다. 유대인들의 자랑거리 중 일부는 그들의 족보가 아브라함과 이
삭과 야곱까지 끊이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따져 올라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 요한은 이제 자기가 말해 온 그리스도께서 오신 성격에 대
해서, 즉 우리의 육신으로 옷입으시고 공적으로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셨음을 가르치고
있다. 비록 복음서 저자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으신 이 설명할 수 없는 신
비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고 있지만, 이 간명함이 또한 놀라운 것이다. 어떤 머리가 돈
사람들이 여기서 일고의 가치도 없는 궤변을 가지고 우리를 우롱하고 있는데,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하나의 정신적인 개념으로서 세상에 보
내셔서 사람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말씀이 무슨 미지수의 사상(思想)이라도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본성 안에서 순수한 인성의 실체
(hypostasis)를 표현하고 있음을 이미 보여준 바 있다. 육신이란 이 낱말은 요한이 말
한,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있게 그의 뜻을 전달하고 있다.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하여 지극히 높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얼마나 낮
고 비천한 상태에까지 내려왔는가를 보여주시기를 원했다. 성경이 인간을 경멸적으로
언급할 때, 그를 육신(Flesh)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말씀'의 신령한 영광과 썩는
냄세가 나는 우리의 육신 사이에는 얼마나 큰 거리가 있는가!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이와 같이 사악한 죄악에 물들어 있는 육신을 스스로 입는 데까지 자기 자신을 낮추셨
다고 이곳에서 말하는 '육신'은-바울이 말한-썩은 성품을 두고 한 말이 아니라,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을 가리켜 한 말이다. 육신은 그의 연약하고 일시적인 성품을 경멸
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사40:6)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낮은 부
분이 전체 인간을 포용한다는 수사적인 대유법임을 유의해야겠다. 그러므로 아폴리나
리스(Apollinaris)가 그리스도는 영혼이 없이 인간의 몸으로 옷입으셨다고 상상한 것
은 어리석은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수많은 귀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육신(몸)
뿐 아니라, 영혼을 부여받으셨음을 쉽게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사람을 육신이라고 부를 때, 영혼 없는 사람을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뜻하는 평범한 의미는 만세 전에 하나님께로 난 말씀, 즉 아버지와 항상 거
하셨던 아들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 중요한 믿음의 요소가 있다.
첫째로, 그리스도 안에서 두 성품이 한 인격 안에 융화되어 한분 그리스도께서 참 하
나님과 인간이 되신다는 사실이다. 둘째로, 그의 인격의 통일성이 그의 성품을 유지해
줌으로, 신성(神性)은 신성대로, 그리고 인성(人性)은 인간성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것
이다. 그러므로 사탄이 이단들을 통하여 갖가지 미친소리로 건전한 신학을 뒤엎으려할
때 그는 언제나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이 된 것을 혼동되
게 전하거나 다음은 육신으로 옷입은 그리스도는 두가지 별개의 인격이었다는 두 가지
오류 중에 하나를 끌어들였던 것이다. 그래서 네스토리우스(Nestorius)는 각 성품을
분명히 인정했지만 하나님이었던 그리스도와 인간이었던 그리스도를 별도로 상상했던
것이다. 반면 유드고(Eutyches)는 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이 되
심을 인정하지만, 두가지 다른 성품은 제쳐놓고 두 가지 성품이 섞여 있었다고 상상하
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오늘날 셀베투스(Servetus)와 재세례파(Anabaptists)는 마치
그리스도께서 신적인 인간이었던 것처럼, 이중 성품을 지닌 혼동된 복합체이신 그리스
도를 창안해 니었다. 그들은 분명히 말로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고 선언한다. 그러
나 그들의 건전치 못한 상상을 따른다면, 신성이 잠시 인성으로 변하고 이제 인성이
다시 신성으로 흡수되었다는 것이다. 복음서 저자는 이 두 가지 모독적인 망언을 논박
하고 있다. 요한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통일된 하나
의 인격을 유추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지금 인간이신 분이 항상 하나님이셨던 바로 그
분 이외에 다른 분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이 되었다고 언급된 분은 바로 하나님이
시기 때문이다. 요한이 인간 그리스도에게 '말씀'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을 보면 말
씀이 인간이 되셨을 때, 그리스도는 그가 전에 가졌던 본체에서 조금도 변한 것이 아
니고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의 본질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짧게 말
해서, 하나니므이 아들은 계속 영원한 말씀이 되시는 방법으로 인간이 되셨던 것이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육신은 그리스도에게 하나의 가정집과 같았다고 말하는 이
들은 복음서 저자의 생각을 포착하지 못한 것이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거처
를 우리와 같이 했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의 손님으로서 잠간 동안 우리 가운데 머무
르셨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가 쓰고 있는 * (에스케-노-센)라는
낱말은 장막(tabernacles)에서 파생된 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오셔서 그의 맡은 바 직분을 다 수행했는 동안 그는 잠시 동안 나타나셨을 뿐
아니라 인간 가운데 거하셨던 것이다. '우리 가운데'라는 글귀가 일반적으로 인간 가
운데 거하셨음을 뜻하는 것인지, 아니면, 요한 자신과 함께 그가 기록하고 있는 사진
의 목격자된 다른 제자들 사이에 거하셨음을 뜻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나는 후자의 설명이 옳다고 생각한다. 복음서 저자는 곧 이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 비록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있었지만, 그
영광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이 가리워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성
령께서 눈을 열어주신 몇몇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영광을 보았다. 이 귀절의 요지는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보다 위대하고 숭고한 것을 보여준 사람으로 인식되었다는 것
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이 육신을 옷입었다고 완전히 말살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영광은 육신의 비천함 아래 숨겨져 있었지만, 아직도 그 영광을 나타
냈던 것이다.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외아들이
시기 때문에 그를 독생자라고 부른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인간이나 천사들 보다 우위
(優位)에 두고 다른 피조물에게 속하지 않은 그 분 특유의 위치를 확정하기 원했던 것
이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이것은 최후 문장을 확정짓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위엄
은 분명히 다른 면에서도 나타났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는 우리를 추상적인 지식보다
는 그리스도에 대한 실제적인 지식으로 단련시키기 위하여 다른것 대신에 이 말씀을
본보기로 택하였다. 이것은 주의깊게 관찰해야 할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 맨발로 물
위를 걸으실 때나 귀신을 달아나게 하실때나 기타 다른 기적을 행함으로 그의 능력을
나타내실 때에, 그는 분명히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로 인식될 수 있었다. 그러나 복
음서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은혜와 진리의 무진장의 원천이 되신다고 선언함으로써, 믿
음이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열매를 얻게되는 그 증거(은혜)를 중심에 놓고 있다. 스데
반도 "성령(은혜)이 충만했다"(행7:55)고 하나 그것은 다른 의미에서 한 말이다. 왜냐
하면 은혜가 충만한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가 길어다 먹어야 할 샘물이 되시기 때문이
다. 이에 대해서는 곧 더 상세하게 이야기할 것이다. 이 말씀은 환치법(煥置法)에 따
라 '참된 은혜'(true grace)라고 풀이할 수도 있다. 아니면 하나의 설명으로, "그는
완전한 진리이며 은혜가 충만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곧 이어 같은 형태의 말씀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두군데 다
의미는 같은 것으로 각주한다. 이 은혜와 진리를 요한은 율법과 대조시키고 있다. 그
래서 나는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는 뜻으로 이
해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신령한 나라에 속하는 모든 것으로 충만하셨기 때문
이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일에 자신이 구속자가 되시며 메시아가 되심을
보여주셨다. 이것은 그분이 다른 모든 양상으로부터 구별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특징
이다.
1:15
요한이......증거하여 - 그는 이제 요한의 선포로 묘사하고 있다. 현제시제를 씀
으로써 저자는 계속적인 활동을 시사하고 있다. 요한의 음성이 계속 사람들의 귀에 울
려 퍼지듯이 이러한 전도는 계속 흥왕해야 할 것이다. 이와같은 이유로 사도요한은 세
례요한의 전도가 전혀 모호하거나, 흐릿하거나 소수의 사람들에게 수근거린 것이 아님
을 보여주기 위해서 '외쳤다'는 말을 쓰고 있다. 요한은 공개적으로, 그리고 큰 음성
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첫째 문장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보내심을 받은 요한을 말
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낮추고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
다.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 이 말씀에서 요한은 애초부터 자기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알리는 것이었
고 이것이 그의 전도 목표였음을 밝히고 있다. 자기의 제자들을 불러 그리스도에게 인
도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사신(대사)으로서의 그의 임무를 완수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요한이 그리스도보다 몇 달 앞서 태어난 것이 사실이지만,
요한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나이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공중 앞에 나타
나시기 전에 세례 요한은 이미 선지자의 직분을 이행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은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보다 시간적으로 앞에 놓고 있다. 그러므로 공중 전도에 대하여 말한
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의 뒤를 따랐던 것이다.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는 말씀은 문자 그대로 옮긴다면 "그분
은 나보다 앞서 오셨다" "그는 나의 주인(primus meus)이기 때문이다"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의 뜻하는 바는 그리스도께서 훨씬 월등하시고 뛰어나셨
기 때문에 요한보다 모름지기 앞섰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낮추어 순종했으며 격언에 나오는 말처럼 횃불을 그에게 넘겼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
스도께서 시간적으로 후에 오셨다고 해서, 이것이 주님께서 신분상의 가치로 보아 앞
서 계신 분이라고 하는 사실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요한은 경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사나 기타 영예에 있어서 뛰어난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 아래에서 자기
위치를 지켜야 한다.
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 복음서 저자는 이제 그리스도의 직분에 대
해 설파하기 시작한다.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축복이 풍성하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는
구원의 어떠한 부분도 찾아 볼 수가 없다. 과연 하나님 안에는 생명과 의와 능력과 지
혜의 원천이 있다. 그러나 이 샘은 우리에게 숨겨져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샘에 접
근할 수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안에서 이 모든 축복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축복을 찾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그에게 길
만 열어준다면 언제고 우리에게 흘러들어올 준비를 갖추고 있다. 요한은 우리가 그리
스도를 떠나서 어떠한 축복도 구해서는 안된다고 간단히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
장은 몇몇 귀절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로, 그는 우리가 모두 영적인 축복을 전혀 가지
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스도께서 부요하심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도
우시고, 우리의 가난을 채워주시고, 목마름과 배고픔을 채워주시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떠나는 순간, 선(善)을 찾으려는 어떠한 시도도 헛된 것임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선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만 거하도록 의도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사에 참예하려 한다
면, 천사와 인간은 앙상할 것이고, 하늘은 텅텅 비고, 지구는 폐허가 되어 만물이 무
가치한 것을 발견할 것이다. 셋째로,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충만한 데서 공급을 받
는 한, 어떠한 궁핍에도 염려할 필요가 없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면
에 완전 무결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에게서 다함이 없는 생명의 원천을 발견한다. 요
한은 겸손해서가 아니라 어떠한 사람도 이에 대해 예외일 수가 없음을 분명히 하기 위
하여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취급한다. 요한이 일반적으로 전 인류를 가리켜 말하
는 것인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나타나신 후에 그의 축복에 더 많이 참예했던 이들을
두고 말하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율법 아래 살았던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똑같은
이 충만함에서 공급함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나, 요한이 곧 시대상으로 구분하는 것을
보면, 나는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에 나타냈던 풍성한 축복을 특별히 찬양하
고 있다고 생각한다. 율법아래 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택을 약간 맛보았을 뿐이지
만,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계시된 후에는 우리가 만족할 만큼 축복의 샘이 터져 나왔
다. 이는 우리 가운데 누구도 성령의은사에 대해서 아브라함보다 더 풍성하게 받았다
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나는 하나님께서 일반적으로 그의 은혜를 분정하시는 방법과 양
식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그의 제자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기 위해 그들이 결핍을 느끼고 있는 모든 축복의 풍성한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 있
음을 선언한다. 그러나 누가 이 말씀의 뜻을 더 깊이 추구한다고 해도 그것은 억지가
아닐 것이다. 세상이 창조된 이래로 모든 믿음의 조상들은 그리스도에게서 그드르이
은사를 공급받았다. 비록 율법이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졌으나 그들이 은혜를 받은 것
은 모세를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좋아하는 설명이 어떤 것인지를
이미 보여주었다 - 요한은 여기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월등하게 뛰어남을 보여주기
위하여 우리를 구약의 조상들과 비교하고 있다.
은혜 위에 은혜러라 -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계속적으로 주어지는 모든 축복은,
그리고 나아가 영생(永生)은 우리에게 빚진 것을 갚기라도 하듯이 우리의 공로(공적)
에 대한 갚음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축복은 하나님께서 먼저 은혜로 상을 주시고 자
기의 선물로 우리에게 관 씌우시는 순수한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상과 같
은 어거스틴의 이 귀절에 대한 풀이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이것은 신령하고 현
명한 관찰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귀절과는 어울리지 않는 견해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위에 내려주시는 은혜는 어느 것이나 똑같이 이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했다면
의미는 더욱 간단했을 것이다. 이것은 또 최후 목적, 즉 하나님께서 마침내 은혜의 완
성인 구원의 사업을 완수하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그리스도 위에 쏟아진 은혜로 물을 마시고 있다고 말하는 이들의 의견을 존중한다. 이
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에게서 받는 것을 우리에게 거저주실
뿐만 아니라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흘러올 것을 그리스도에게 맡겨주셨기 때문이다. 이
것이 그가 우리를 그와 함께 기름부음에 참예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에게 풍성하게 쏟
아진 기름부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주님은 그리스도라 불리우고 우
리는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것이다.
1:17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 이 부언(附言)은 앞에 지나간 말을 아주 적절
하게 확인시켜 주고 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가 모든 축복에 참예하는 관문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기 때문
에, 우리가 모든 것을 그리스도로부터 찾아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이 교리적인 귀결
은 주의깊게 살펴야 한다. 우리는 각자가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을 소유하게 된다는 사실보다 분명한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믿음과
하나님을 아는 그릇은 우리가 가져와야 함을 깨닫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요한이 아무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고 말할 때, 육신의 눈으로 외모를 보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되겠다. 요한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사람이 가까이 할 수 없는 빛에
거하시기 때문에 그의 참 형상인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알 수 없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
다. 사람들은 보통 이 귀절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하나님의 위엄은 하나님 자
신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 제시하신 것을 떠나
서는 도저히 하나님을 알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은 옛날 믿음의 조상들에게도 그리스
도를 통해서만 알려졌다. 그러나 나는 복음서 저자가, 비밀스런 영광 속에 감추어 있
던 하나님께서 이제 자신을 볼 수 있게 제시하셨다는 의미에서 , 우리의 상태가 옛날
조상들의 처지보다 얼마나 더 좋은가를 대조해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그
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리울 때는, 신약의 특별한 축복을 지칭하는 것이
다. 그러므로 이 귀절에서 복음서 저자가 아버지 품 속에 계신 독생하신 아들이 감추
어 있던 것을 우리에게 나타내셨다고 말할 때, 그는 무엇인가 새롭고 신기한 것을 지
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계시를
찬양한다. 복음에 의해서 우리는 구약시대의 조상들보다 더 월등하게 구분이 되고 있
다. 바울은 이제 율법아래서 같이 없던 휘장이 가리워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얼굴 안
에서 하나님을 떳떳이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선언하면서 이 사실을 고린도후서 3장
과 4장에서 더 자세히 논하고 있다. 선지자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횃불을 넘겨 주었는
데 어떻게 조상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느냐고 반문한다면. 나는 우리에게 분정된 것
이 구약의 조상들에게 완전히 제한되었던 것이 아니라-사람들이 말하는 대로-주(主)와
종(從) 사이에 대조를 보여준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생명의 빛이 오늘
날 우리에게 환히 비치는 데 비해, 그들에게는 이 생명의 빛의 섬광이 약간 비쳤을 뿐
이기 때문이다. 만일 누가 그때에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고
이견(異見)을 제시한다면, 나는 그것이 우리가 보는 것과는 비교도 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때에는 모호하게 멀리서 자신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좀더 선명하게 나타남을 보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
들은 상대적으로 자신이 살던 시대를 두고 말했다. 그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겹겹이
쌓여있는 하나님을 보았을 뿐이다. 모세가 산 위에서 보았던(출33:23) 이상은 특별한
것이었고 다른 모든 환상보다 뛰어난 것이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고 직선적으로 선언하셨다. 이 비유의 말씀에서 하나
님께서는 완전하고 분명한 계시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했음을 보여준 것이다. 우리
는 또한 조상들까지도 하나님을 뵙고 싶을 때 언제나 그들의 눈을 그리스도에게 돌렸
던 것을 유의해야겠다. 그들이 영원한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묵상했을 뿐만 아니라 그
리스도의 약속된 출현을 향해 한결같이 마음을 다해 손을 뻗쳤다는 말이다. 이러한 이
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8장에서 "아브라함은 나의 때를 보았다"고 말씀하신 것이
다. 계승은 모순을 뜻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전에 인간이 볼 수 없던 하나님께서 이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셨다고 하는 사실은 분명한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품 속에'있었다고 말할 때, 요한은 인간적인 은유를 쓰고 있다.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비밀을 털어놓을 대상으로 품 속에 있는 사람을 말한다. 가슴은
의논의 장소다. 그래서 요한은 아들이 아버지의 가장 깊은 비밀까지 아셨다고 가르치
고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품이 활짝 열려 공개가 된 것이다.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 이 부언(附言)은 앞에 지나간 말을 아주 적절
하게 확인시켜 주고 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가 모든 축복에 참예하는 관문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기 때문
에, 우리가 모든 것을 그리스도로부터 찾아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이 교리적인 귀결
은 주의깊게 살펴야 한다. 우리는 각자가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을 소유하게 된다는 사실보다 분명한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믿음과
하나님을 아는 그릇은 우리가 가져와야 함을 깨닫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요한이 아무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고 말할 때, 육신의 눈으로 외모를 보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되겠다. 요한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사람이 가까이 할 수 없는 빛에
거하시기 때문에 그의 참 형상인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알 수 없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
다. 사람들은 보통 이 귀절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하나님의 위엄은 하나님 자
신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 제시하신 것을 떠나
서는 도저히 하나님을 알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은 옛날 믿음의 조상들에게도 그리스
도를 통해서만 알려졌다. 그러나 나는 복음서 저자가, 비밀스런 영광 속에 감추어 있
던 하나님께서 이제 자신을 볼 수 있게 제시하셨다는 의미에서 , 우리의 상태가 옛날
조상들의 처지보다 얼마나 더 좋은가를 대조해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그
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리울 때는, 신약의 특별한 축복을 지칭하는 것이
다. 그러므로 이 귀절에서 복음서 저자가 아버지 품 속에 계신 독생하신 아들이 감추
어 있던 것을 우리에게 나타내셨다고 말할 때, 그는 무엇인가 새롭고 신기한 것을 지
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계시를
찬양한다. 복음에 의해서 우리는 구약시대의 조상들보다 더 월등하게 구분이 되고 있
다. 바울은 이제 율법아래서 같이 없던 휘장이 가리워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얼굴 안
에서 하나님을 떳떳이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선언하면서 이 사실을 고린도후서 3장
과 4장에서 더 자세히 논하고 있다. 선지자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횃불을 넘겨 주었는
데 어떻게 조상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느냐고 반문한다면. 나는 우리에게 분정된 것
이 구약의 조상들에게 완전히 제한되었던 것이 아니라-사람들이 말하는 대로-주(主)와
종(從) 사이에 대조를 보여준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생명의 빛이 오늘
날 우리에게 환히 비치는 데 비해, 그들에게는 이 생명의 빛의 섬광이 약간 비쳤을 뿐
이기 때문이다. 만일 누가 그때에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고
이견(異見)을 제시한다면, 나는 그것이 우리가 보는 것과는 비교도 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때에는 모호하게 멀리서 자신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좀더 선명하게 나타남을 보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
들은 상대적으로 자신이 살던 시대를 두고 말했다. 그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겹겹이
쌓여있는 하나님을 보았을 뿐이다. 모세가 산 위에서 보았던(출33:23) 이상은 특별한
것이었고 다른 모든 환상보다 뛰어난 것이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고 직선적으로 선언하셨다. 이 비유의 말씀에서 하나
님께서는 완전하고 분명한 계시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했음을 보여준 것이다. 우리
는 또한 조상들까지도 하나님을 뵙고 싶을 때 언제나 그들의 눈을 그리스도에게 돌렸
던 것을 유의해야겠다. 그들이 영원한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묵상했을 뿐만 아니라 그
리스도의 약속된 출현을 향해 한결같이 마음을 다해 손을 뻗쳤다는 말이다. 이러한 이
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8장에서 "아브라함은 나의 때를 보았다"고 말씀하신 것이
다. 계승은 모순을 뜻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전에 인간이 볼 수 없던 하나님께서 이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셨다고 하는 사실은 분명한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품 속에'있었다고 말할 때, 요한은 인간적인 은유를 쓰고 있다.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비밀을 털어놓을 대상으로 품 속에 있는 사람을 말한다. 가슴은
의논의 장소다. 그래서 요한은 아들이 아버지의 가장 깊은 비밀까지 아셨다고 가르치
고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품이 활짝 열려 공개가 된 것이다.
1:19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 지금까지는 복음서 저자가 그리스도에 대한 요한의
일상적인 전도에 대하여 이야기 했다. 이제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의 전도 가운데 좀
더 두드러진 예를 들고 있다. 이 증거는 제사장들의 사신들이 듣고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요한이 하나님께 그를 보내신 이유를 공적으로 고
백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제사장들이 왜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심문(尋問)하
는지 그 이유를 묻게 된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추리는 제사장들이 그리스도를 미워한
나머지 요한에게 거짓된 영예를 부여했다는 것인데,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때까지 그들
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다른 이들은 요한이 제사장의 반렬에서 나왔기 때문에 제사장
들이 그를 더 좋아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도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그리
스도에게서 모든 형통을 바라던 그들이 스스로 거짓 그리스도를 만들어 낼 이유가 없
지 않은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들이 다른 이유로 마음이 움직인 것 같다. 오랫동안
이들은 선지자가 없이 지내왔다. 그런데 요한이 갑자기 예기치 않게 나타났다. 사람들
의 마음은 흥분되고 기대에 차 있었다. 더군다나 사람들은 모두 메시아의 임재가 가까
이 왔다고 믿고 있었다. 이와 같이 중요한 문제를 소홀히 하거나 가장함으로써 제사장
의 맡은 바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해서, 제사장들은 요한에게 그의 신분을 물었
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처음에는 제사장들이 악의에서 행동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속을 갈망하는 마음에서, 그들은 요한이 그리스도가 아닌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교회의 일반적인 질서를 변화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사장의
권한을 행사하려는 욕망이 그들에게 크게 작용하고 있었음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들에겐 그리스도의 영예를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준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들은
제사장의 직분에 어긋나게 행동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교회
정치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자신을 경솔하게 내세우지 못하도록 경계하고 새
로운 종파의 창시자가 일어나지 않나 살피고 백성 중에 믿음의 통일이 무너지지 않도
록 유의하고, 아무도 새로운 이방 예식을 도입하지 못하도록 돌볼 책임이 있었다. 그
러므로 요한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모든 이의 마음을 흥분케 했다. 그
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가운데 명령된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에 대한 증거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1: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 다시 말해서, 요한은 숨기거나 피하거
나 외식하는 기색이 없이 공개적으로 고백했다. 먼저 '드러내어 말하고'(confess)는 일반적으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한다는 뜻이다. 두번째 '드러내어 하는 말'은 그의 고백의 형태를 표현하기 위해 되풀이된 말이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힘주어 답변했을 것이다.
1:21
네가 엘리야냐 - 왜 사람들은 모세보다 엘리야를 언급하고 있는가? 그것은 메시
아가 일어날 때, 엘리야가 그의 새벽 별이 되리라는 것을 그들이 말라기 4장 5절에서
배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거짓된 전제 하에서 이 질문을 던졌다. 영혼의 회
귀를 믿는 그들은, 말라기 선지자가 엘리야가 보냄을 받으리라고 선언했을 때 아합의
치하에서 살았었던 그 엘리야가 다시 오리라고 상상했던 것이다. 따라서 요한은 자기
는 엘리야가 아니라고 뜻있는 말을 써서 적절하게 답변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요한
을 엘리야에 버금가는 참된 선지자로 풀이해서 설명하고 있다(마11:14).
네가 그 선지자냐 - 에라스므스는 선지자라는 말을 그리스도에게 국한시키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이 귀절에서 그 선지자라고 관형사를 쓴 것은 별 비중을 차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사장들의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 잠시 후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이 그리스
도가 아닌 다른 선지자를 뜻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 다
른 인격이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또 그 보냄을 받은 이들이 요
한에게 그가 옛날 선지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묻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
러한 해석도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 선지자라는 말을 할 때, 그들은 묻고
있는 것이다. 그가 자기는 선지자가 아니라고 부인할 때 그는 겸손한 마음에서 그리한
것이 아니라 솔직하고 진지하게 선지자들의 수에서 자신을 분리시키고 있다. 그러나
요한의 이러한 대답은 그리스도의 요한에 대한 묘사와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
도는 요한에게 선지자의 칭호를 부여하고 있으며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마
11:9)고 덧붙이고 있다. 위의 모든 말씀으로 주님께서는 요한의 가르침에 대한 권위와
신빙성을 높이고 동시에 요한에게 맡겨진 직분의 우월함을 찬양하고 있다. 그러나 이
귀절에서 세례요한은 자신은 개인적인 사명을 받은 바가 없으며 다만 그리스도의 전령
(herald)으로 임명을 받은 사람임을 보여줄 뜻을 갖고 있다. 이것은 은유에 의하여 더
욱 분명해질 것이다. 심지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로 보냄을 받는 대사(大使)도 개인
적인 사명을 띨 때는 대사의 이름과 권위를 부여 받는다. 특별한 예언의 말씀을 받았
던 모든 선지자들은 이와 같이 그들의 선지자적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굉장히 비중
이 큰 중요한 문제가 발생해서 두명의 대사가 파송된다고 가정하자. 둘 중 한 명의 대
사가 와서 곧 다른 대사가 전체적인 일을 타협하러 올 때, 그분은 모든 일을 처리할
사명을 띠고 있다고 선포한다. 그러면 이 먼저 온 대사가 나중에 파송될 대사의 일부
로 간주되지 않겠는가? 요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부터 그리스도를 위해 제자들을
예비하라는 사명을 받았을 뿐이었다. 이러한 의미는 이 문장의 전체적인 문맥에서 쉽
게 탐지해 낼 수 있다. 우리는 곧 이어 나오는 문장을 유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요한
은 "나는 선지자가 아니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말한다. 주의 일을 예비
하라고 외치는 소리는 특별히 자기만의 소명을 부여받은 특별한 선지자가 아니라, 말
하자면, 차관(次官)과 같은 신분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의 전도는 다른 선생의 말
에 귀를 기울이도록 유도하는 일종의 준비였다. 따라서 요한은 모든 선지자보다도 나
은 자였지만, 그 자신이 선지자는 아니었다.
1:23
외치는 자의 소리 - 사역이 주어지지 않았는데 가르치는 직분을 이행한다면 경솔
한 언동이 되기 때문에, 요한은 자기의 기능과 사명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이사야 40
장 3절의 증거로 이를 확인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 외에
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사야는 여기서 요한만을 이야기하고 있느
느 것이 아니다. 그는 교회의 회복을 약속하면서 주님을 위해서 길을 평탄케 하라고
명하는 즐거운 소리가 들릴 것을 예언하고 있다. 비록 그가 백성들을 바빌론의 포로
생활로부터 되돌아오게 하는 데 하나님의 관여하심이 있을 것을 예언하고 있지만 이
말씀이 참으로 이루어진 것은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
께서 가까이 오셨다고 알려준 전령들 가운데 요한이 으뜸이었다. 어떤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소리'(voice)라는 낱말을 가지고 철학적으로 왈가왈부하는 것은 가치가 없는
일이다. 요한의 임무는 외치는 것이었기 때문에, 요한은 소리라고 불리운다. 이사야는
비유적으로 교회의 황량한 폐허 상태를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을 막는 광야하고 불렀
다. 포로된 백성이 돌아올 길이 막혀 있는 것 같지만 주님께서 길이 나 있지 않은 광
야에 길을 찾아주시겠다고 말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요한이 나가서 설교했던 실제 그
광야는 아무런 구원의 소망이 보이지 않던 쓸쓸한 광야에 대한 비유이며 모형이었다.
여러분이 이 말씀을 대조하여 생각한다면,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이 의곡되지 않은 것
을 곧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불행에 처져 있는 백성들의 눈 앞에 예언의 거울
을 놓아주듯이 모든 것을 예비해 주셨던 것이다.
1:23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 복음서 저자는 그들이 그 당시 교회내에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바리새인들이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레위 족속 가운데 어떤
힘없는 존재가 아니라 권세를 부여받은 권력자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요한에게 그의
세례에 대해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보통 사역자들 같았으면 아무런 대답을 들어도 만
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사람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함부
로 새로운 예식(세례)를 소개하려고 한다고 그의 무모한 행동을 힐난했다.
1:24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 복음서 저자는 그들이 그 당시 교회내에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바리새인들이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레위 족속 가운데 어떤
힘없는 존재가 아니라 권세를 부여받은 권력자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요한에게 그의
세례에 대해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보통 사역자들 같았으면 아무런 대답을 들어도 만
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사람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함부
로 새로운 예식(세례)를 소개하려고 한다고 그의 무모한 행동을 힐난했다.
1:25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 그들이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
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라고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을 때, 바리새인들은 아주 날카
롭게 따진 것 같다. 누구나 세례의 예식을 설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권
한은 메시아의 수중에 있는 것이다. 앞으로 올 메시아에 대해서는, 그가 오면 나라와
교회를 회복하기 시작할 것이라는 견해를 당시 바리새인들은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직분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도 인정했다.
그러나 그들은 요한이 세례를 주는 것은 불법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왜냐하면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공개적인 직분을 부여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요한은 그들
이 꿈꾸고 있는 엘리야가 아닐지라도, 말라기 4장 5절에 언급되어 있는 엘리야를 요한
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잘못을 범했던 것이다.
1:26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 이는 그들의 잘못을 시정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가르침이 아무리 좋다 해도 귀가 먼 사람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요한이 그들을
그리스도에게 보내어 그리스도가 이미 그들 중에 계시다고 선언했을 때, 요한은 하나
님께서 임명하신 사역자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회복을 증거하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참 에리야임이 드러난다. 여기에는 대조(對照)가 완전히 나타나 있지 않다. 그리스도
의 신령한 세례가 요한의 외적인 세례와 분명히 대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의 세로 대한 언급이 곧이어 뒤따르고 있다. 과연 복음서 저자는 곧 그리스도의
세례를 말하고 있다.
이 대답에는 두 가지 요점이 들어 있다. 요한은 자기에게 합당한 것 이상의 것을 주
장하지 않는다. 그의 세례의 창시자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이 예식의 진리는 그리
스도에게 있다. 둘째로, 요한에게는 외적인 형상을 다스리는 것 밖에 권한이 없었다.
모든 능력과 효능은 그리스도 한 분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세례를
변호했다. 세례의 진리는 다른 분에게 있지만 그는 자기의 세례를 옹호했다. 그는 그
리스도의 가치를 높이 찬양함으로 사람들이 구분만을 바라보도록 유도하고 있다. 어떤
사역자가 스스로 주장하는 모든 권세를 그리스도에게서 빌려 쓰면서 모든 권한과 능력
을 그에게 돌릴 때 그것은 최상의 자제(自制)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는
우리의 세례와 다르다고 생각하는 극히 어리석은 실수가 범해져 왔다. 요한은 여기서
자기의 세례의 효용에 대해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만 자신의 역할과 그리
스도의 역할을 비교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세례에서 차지하는 우리
의 역할이 무엇이고 그리스도의 역할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만이 세
례가 뜻하는 바를 행하는 분이요 우리는 세례를 집행하는 데 그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성령은 이 예식에 대해서 두 가지 방법으로 말하고 있다. 때때로 성경
은 세례가 '중생의 놋 대야'(딛3:5)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거기서 우리의 죄가 씻음
을 받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인 바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옛 사람이 십자가
에 못박히고 새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 다시 살아난다. 이러한 예에서 세례는 그리스도
의 능력을 인간의 사역과 연합시키고 있다. 이때 세례를 베푸는 사역자는 그리스도의
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모양의 표현은 인간이 스스로 성취시킬 수 있는 것
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인간과 증거(세례)를 그의 도구로
써서 이룩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인간은 걸핏하면 미신에 빠지
고 그리고 내재적인 교만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탈취하여 자신이 그 영광을 누리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이 모독적인 교만을 꺽기 위해 이 귀절에서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와 사역자를 구분하여 사역자(minister;使役者)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너희 가운데......한 사람이 섰으니 - 요한은 그들이 특별히 유의했어야 할 그리스
도를 알지 못하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견책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항상 조심스럽게 사
람은 그의 사역의 근본이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나아오지 않으면 그의 사역에 대해 아
무 것도 알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다고 말
하여, 그들로 하여금 주님께 대하여 알고 싶은 마음이 생기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 말
을 요약하면,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받으셔야 할 그 귀한 영광을 잘못하여 자신이 극히
적은 부분이나마 받게 되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의 자기 비하(卑下)를 원하였다. 사람
들의 비뚤어진 의견에 의해서 자신이 정도 이상으로 칭찬을 받을 때 그는 자주 위의
말을 되풀이하였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1: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 그는 여기서 두가지 사실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
스도께서 시간적으로는 요한보다 후에 사람들 앞에 나타나셨으나 그러나 존업과 인격
의 정도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요한을 훨씬 능가하고 계신다.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그를 높이, 그리고 우선적인 위치에 두셨기 때문이다. 곧 이어서 그는 세번째 요소를
지적하는데,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보다 우선적으로 선재하신 것은 그가 다른 사람보
다 뛰어나다는 것이 정당하기 때문이다.
1:28
이 일은......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 - 장소를 언급한 것은 이 내용을 확실하게
할 목적뿐만 아니라 이러한 대답을 사람들이 운집(雲集)한 가운데서 했다고 우리에게
알려줄 목적이 있었다. 많은 사람이 요한의 세례를 받으러 나왔는데, 이곳은 그가 늘
세례를 베풀던 장소였다. 이곳은 또한 요단을 가로지르는 '통로'로도 생각된다. 사람
들은 이러한 뜻에서 이 지명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
때 요단 강 물 사이로 길을 열어 주셨으므로(수3:13) 백성들이 통과했던 그 유명한 통
로가 이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견을 택한다. 또 다른 이들은 이 지명은 '베다
바라'라고 읽어야 마땅하다고 한다.어떤 사람들이 이곳의 지명을 '베다니'라고 하나
그것은 실수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베다니가 예루살렘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음을
곧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형 학자들이 기술하고 있는 '베다바라'의 위치는 복음
서 저자의 표현과 제일 잘 일치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지명의 발음에 대하여 논쟁을
벌일 생각은 없다.
1;29
이튿날 - 요한이 전에도 그리스도의 출현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오셨을 때 그는 자기가 선포한 내용이 즉시 알려지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의 전도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가까이 왔다. 그것
은 해가 돋으면 즉시 새벽이 사라지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요한은 제사장들이 보낸
사람들에게 자기가 베푸는 세례의 진리와 능력을 대표할 분이 이미 백성들 가운데 생
활하고 있음을 증거할 때, 그 이튿날 그분을 공개적으로 알린다. 이 두가지 행동은 연
속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더 힘있게 역사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이 있는 곳에 나타나셨던 것이다.
보라......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 그리스도의 가장 중요한 직분이 간결하고 명확
하게 설명되었다. 자신을 죽음의 제물로 드려 세상 죄를 담당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
도께서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다른 축복을
내려 주신다. 그러나 다른 모든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제일 중요한 축복은 그리스도께
서 하나님의 진노를 그치게 하심으로 우리를 의롭고 깨끗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모든 축복의 근원은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
로 영접하는 것이다. 따라서 요한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기 위하여 우리가 그
리스도를 통해 받을 수 있는 죄사함으로 시작하고 있다.
어린 양은 옛날 율법의 제물에 대한 인유(引喩)에서 비롯되었다. 요한은 유대인을
상대로 말하고 있는데, 이들은 제물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에 자리자복
있는 제물을 드리지 않는 다른 방법으로 만족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제물에는 여
러 종류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대유법을 쓰고 있다. 요한은 이때 유대인들이 유월절
에 먹던 유월절 어린 양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요점은 요한이 유대인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가장 적절하고 힘이 있는 표현 양식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
가지로, 세례의 예식으로 인하여 우리는 우리의 허물과 죄로부터 씻음과 깨끗함을 얻
었다는 말을 들을 때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 용서함을 받았다는 말이 무엇을 뜻
하는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동시에 모든 유대인은 제사에 대해 한결같이 미신적
인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요한은 지나가는 말로, 그들이 바치는 제물이 무엇을
지시하는지를 상기시킴으로 그들의 잘못을 시정하고 있다. 외적으로 보이는 징조에 믿
음의 근거르 마두는 것은 제사를 매우 악하게 남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요한은, 그리
스도르 마내세우면서 그분이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이를 통해 요한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따라 바치는 어떠한 제물도 전허 죄를 속할 수 있는 힘이 없으며,
그런 것들은 그림자와 모형에 불과할 뿐 참 본질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었다고 말하
고 있다.
죄(sin) - 요한은 '죄'라는 말을 단수로 쓰고 있다. 하나님과 인간을 분리시키는 어
떠한 불의도 모두 그리스도께서 지고 가셨다는 뜻이다. 그리고 세례요한이 '세상 죄'
라고 말할 때, 유대인들이 이 구속주는 자기들에게만 보내심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못
하도록 이 은혜를 차별 없이 전 인류에게 베풀고 있는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전 세
계가 같은 정죄 아래 놓여 있으며 모든 사람이 예외없이 하나님 앞에 불의의 판결을
받고 있기 때문에 화해할 필요가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요한은 일반적인
세상 죄를 말함으로써 우리의 비참한 상태를 느끼고 그 해결책을 찾도록 우리를 권면
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에게 베풀어진 은혜를 받아들여야 한다. 각 사람은 믿음
으로 그리스도에게 나가기만 한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하지 못할 방해물이 전혀 없
음을 깨달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요한은 죄를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을 선포하고 있다. 우리는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사람들의 양심이 죄책을 느낄 때 모든 사람은 죄사함을 받기 위해 열심
히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수많은 화목제물을 바침으로 이들은 그 제물이
하나님의 진노를 쉬게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산발적으로 드렸던 모든 화목제가 거룩
한 태초에 시작되었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제사와 제물을 드리도록 인간에게 명령하셨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각자 하
나님의 진노르 마가라앉히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그러나 요한은 우리를 불러 그리스
도 한분에게로 유도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축복을 통해서만 우리와 화
목될 수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 한 분 만이 죄를 없게 하시기 때문이
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에게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는 길 이외의 다른 길을
남겨두지 않으셨다. 이런 식으로, 요한은 모든 인간적인 만족과 보상과 속죄 방법을
배격하고 있다. 그런 것들은 마귀의 간계에 의해서 조작된 불경건한 고안에 불과한 것
이기 때문이다.
'지고 가는'이란 말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억누르고 있
는 죄짐을,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나무에 달려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라고 한 것
처럼, 친히 자기 몸에 담당하시고 이사야 53장 5절에서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라고 말씀한 대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고 우리 죄를 용서해 주셨다. 그
러나 후자에 죄를 용서하셨다고 한 것은 전자의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는 사실에 근거
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기꺼이 두가지 뜻,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지심으로 우리
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비록 죄가 우리 안에 계속 거하고 있지
만, 하나님의 판단 아래에서는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죄는 그리스
도의 은혜에 의해서 소멸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우리에게 돌리시지 않
기 때문이다.
나는 크리소스톰(Chrysostom)이 나타내는 점이 동사가 현재 시제로 되어 있어 계속
되는 행동을 의미한다고 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한번 다 이루어진 것은 영원히 지
속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죄를 지고 가셨다고 말할 뿐 아니
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으신 선한 행위로 말미암아 우리와 화목케 하신 방법을
말하여 주고 있다. 이것이 요한이 어린 양이라는 말을 통해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
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으로 직접 나아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이 우리의 모든 죄를 제
거하시는 유일한 희생 제물임을 믿을 때,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
하게 된다는 사실을 배우자.
1;30
내가 전에 말하기를......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 요한은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고 그리스도를 선언할 때 그는
모든 것을 줄여서 종합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에서 우리는 요한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전령에 불과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로부터 또한 그리스도께서 메시아가
되심이 확실해진다. 세 가지가 여기에 언급되어 있다. 그가 내 뒤에 한 사람이 온다고
말할 때 그는 그 뒤에 오시는 분을 위해서 길을 예비하기 위해 시간적으로 그리스도보
다 먼저 있었음을 뜻한다. 요한은 "보라......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라고 한 말라기의 증거에 따라 주의 길을 예비하러 왔었던 것이다. 요한이 그리스도께
서 자기보다 앞섰다고 말할 때, 그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구속주의 임무를 수행토록 세
상에 보내실 때 아들에게 입혀주셨던 영광을 가리키고 있다. 끝으로 그리스도께서 영
광과 권위 면에서 세례 요한보다 우위에 계시다는 이유를 대고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
께서 그리스도에게 부여한 영광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고 그의 영원하신 영광의 마땅한
분복(分福)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가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
이라"고 한 표현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1: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 그의 증거가 호의나 우정으로 인한 것이 아님을 분
명히 하기 위해,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그에게 온 것 외에 그리스도에 대한 어떠한 지
식도 갖고 있지 않았다고 선언함으로써 위와 같은 의심을 미리 배제하고 있다. 이를
종합해서 말하자면 요한은 자기 자신의 깨달음에서 말한 것도 아니요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한 것도 아니며, 오직 성령님의 감화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말했다는 것이
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 라고 그는 말한다. 다시 말해, "나는 그리스도
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기 위해 이러한 직분에 부름을 받고 임명을 받았다."복음서 저
자는 이를 나중에 아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요한이 그
리스도를 알게 되었다고 간증할 때 이 사실을 요한은 확신한 것이다. "나는 세례를 주
러 왔다"고 여기에 있는 말씀 대신에, 그는 보내심을 받았다고 직설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교회의 정규적인 사역자를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 뿐이기 때문이다. 요청
을 받지도 않았는데 자기를 내세우는 자는 그가 아무리 학문에 능하고 웅변에 뛰어나
다 하더라도 아무런 권위를 주장할 수 없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한이 정기적으로 세례를 베풀기 위하여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야 했듯
이, 우리는 예식을 새로이 설정하거나 집행할 아무런 권리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
러한 권리는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의 세례를 증거하기 위하
여 다른 기회에 그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를 묻고 있다(마21:25)
1:32
내가 보내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 이것은
일방적이고 비유적인 표현이다. 아니면 무슨 눈으로 그가 성령을 보았을 것인가? 그러
나 비둘기는 성령의 임재에 대한 확실하고 분명한 표시이니만큼, 비둘기는 환유적으로
성령으로 불리운다. 비둘기가 실제로 성령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성령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상징주의는 성찬 예식에서 흔히 있
는 일이다. 왜 그리스도께서 떡을 자기 몸이라 부르시는가? 사물의 이름이 예식에 적
절히 이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 사물이 의미하는 것 그 자체가 우리에게 부여
된 것으로 그 상징(sign)이 확실하고 참된 보증이 될 때는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우리
는 하늘과 땅에 충만하신 성령님이 비둘기 아래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되겠
다. 성령님께서는 이러한 광경으로 그의 눈 앞에 보인 것이 헛된 일이 아님을 요한으
로 알게 하기 위하여 그의 능력으로 나타나셨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리스도
의 몸이 떡덩이에 매여있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참예함을
즐기는 것이다.
자, 그러면, 성령이 왜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나셨는가? 우리는 항상 여기에 상징과
실재 사이에 비유(比類)가 있음을 기억해야 겠다. 성령이 사도들에게 내렸을 때, 그들
은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을 보았다(행2:3). 복음의 도(道)는 전 세계 모든 방언
(tongues;혀)으로 전파되어야 하며, 불의 힘을 가지고 전파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러나 이 귀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42장 3절에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라고 찬양했던 그리스도의 온유함을 공적으로 드러내고 싶
으셨던 것이다. 이것은 성령이 그리스도 위에 내려진 것을 본 최초의 경험이었다. 그
렇다고 그 전에는 그리스도에게 성령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제 말
하자면 엄숙한 예식으로 거룩해지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30년 동안 하나의
개인으로 숨겨진 채 생활하셨음을 안다. 그가 출현할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했기 때문
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세상에 알리기를 원하셨을 때 그는 세례로 시작하
셨다. 그러므로 그가 이때 성령을 받은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 그의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모든 충만한 은사가 모두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을 우리로 알게 하기 위하여 눈에 보이기 임하셨던 것이다. 세
례 요한의 말에서우리는 이를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요한이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
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고 말할 때,
이는 그가 성령이 볼 수 있는 형태로 보였고 주님께서 그의 충만함으로 그의 백성들에
게 복을 내려 주기 위해 그리스도 위에 머물게 하였던 것이나 다름이 없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
로 효력을 발생케 하시고 그리함으로 그 예식이 헛되거나 타당성이 결여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그리스도께서는 이를 그의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신다.
1:33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 여기에 어려운 의문이 일어난다. 요한이 그
리스도를 알지 못했다면, 왜 그에게 세례 베풀기를 거절하였을까? 그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터인데"(마3:14)라고 말하지는 않았
을 것이다. 어떤 이는 요한이 그리스도를 특출한 선지자로 존경했지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 줄은 알지 못했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이것은 명확하지 못한 해답이다. 사람은
누구나 사람을 외모로 취함이 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야 한다. 인간의 어떠한
우수함이나 권위도 그것이 우리의 직분을 수행하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요한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면 그는 하나님과 그의
세례를 그르쳤을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그 이전부터 그리스도를 알고 있었다. 우
선, 우리는 이것이 가까이 서로 친숙하게 지내던 관계에서 생긴 앎이라는 것을 유지
(維持)해야겠다. 비록 요한이 그리스도를 보자마자 그를 알아보았지만 그들은 보통 인
간적인 우정의 관계에서 서로 안것이 아니다. 요한의 앎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 것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요한은 성령을
보는 것이 그를 알아볼 수 있는 신호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
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를 때에도 아직 성령을 보지 못했다. 성령이 그리스도에
게 비둘기 같이 내린 것은 확증을 위해서 추가된 것이며, 요한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의견에 기꺼이 동감한다. 물론 그것을 본 것
은 요한 혼자 뿐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우리를 위해서 본 것이다.
부우처(Bucer)는 출애굽기 3장 12절에서 모세가 한 말을 적절히 인용하고 있다. "사흘
길쯤 간 후에 이 산 위에서 제사를 드리라 이것이 너에게 증거가 되리라." 그들이 애
굽을 떠날 때 물론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말한 대로, 그후에 확증을 얻은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요한에게도 그
전에 주어졌던 계시에 첨가된 것이다.
1: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 이 내용에서 좀 의심스러운
것은 요한이 아무 것도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세상에 증거하실 일들에 대해 철저하고 심오한 지식 베풀기를 기뻐하셨다. 그리고 요
한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한 것은 유의할 만하다. 성령을 주신 분이
그리스도가 틀림없으며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영광과 직분은 다른 사람에게 속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36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 기 귀절에서 내가 이미 말한 바, 즉 요한이 자기
생애의 종말이 가까와오는 것을 느끼고 계속 영광의 횃불을 그리스도에게 넘겨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 더욱 분명히 드러나 있다. 그의 인내는 그의 증거에 큰 비중을
더해 준다. 그러나 요한은 날이면 날마다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일을 계속하면서, 이제
자기의 달려갈 길이 끝났음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여기서 교회의 시작
이 얼마나 미약한 것이었는가를 볼 수 있다. 요한은 과연 그리스도를 위해 제자들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 때까지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주님께
는 두명의 이름없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것까지도 그리스도
의 영광을 빛나게 하였다. 짧은 기간 내에 주님께서는 인간의 능력이나 많은 무리의
도움을 받지 아니하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방법으로 그의 나라를 확장하셨던 것
이다. 우리는 또한 요한이 사람을 어느 곳으로 인도하든지-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을
받을 수 있도록-를 특별히 살펴보아야 한다. 제자들이 자기에게 나아오도록 그리스도
께서 직접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제 그들이 왔을 때 그는 친절
하게 그들을 권하고 격려한다. 주님은 그들이 먼저 말할 때까지 기다리지 아니하시고
그들에게 "무엇을 구하느냐?"고 묻는다. 과거에 두사람에게 던졌던 주님의 이 친절하
고 마음을 사로잡는 초대의 말씀은 이제 모든 사람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가 그를 간절히 찾는 것은 보시기만 하면, 그리스도께서 쉽게 그에게 나
아갈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숨기거나 거절할리가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결코 주님은
우리를 저버리지 않는다. 주님은 우리의 갈구하는 노력을 돕기 위해 그의 손을 뻗치신
다.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멀리서 찾으시는 그분께서, 방황하는 죄인들을 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 자기에게 나오는 자들을 달려나가 맞아주시지 않는가?
1:38
랍비여 - 이 칭호는 높은 계층에 있는 사람이나 명예로운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보통으로 주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는 여기서 랍비에 대한 당시의 용법
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에 랍비는 하나님의 말씀의 교사(선생)들이나 해석자들을 가리
키는 말이었다. 비록 그들은 아직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유일한 선생이 되심을 몰랐지
만, 요한이 주님에 대하여 한 말에 감동을 받아, 그리스도를 선지자와 선생으로 간주
하고 있다.
어디 계시오니이까 - 이같은 보기에서 우리는 교회의 초창기부터 전진하고 싶은 욕
망을 불러 일으킬 그리스도를 향한 취지를 터득하도록 가르침을 받고 있다. 우리는 지
나치면서 한 번 본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자기의 손님으로 영접할
수 있도록, 그의 거처를 찾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먼 거리
에서 복음을 슬쩍 냄새만 맡고 그리스도를 갑자기 지나치게 한다면 그렇게 해서 그리
스도에 대하여 배운 것은 무엇이나 스쳐 지나가 버린다. 비록 이때 그들이 주님의 완
전한 제자가 되지 않았지만, 그날 밤 주님께서 그들에게 좀더 상세히 가르쳐 주실 것
은 틀림없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이 완전히 헌신적으로 그를 따르도록 인도하셨다.
1:39
때가 제 십시쯤 되었더라 - 다시 말해 해가 지기까지 두 시간 밖에 남지 않은 저
녁이었다는 말씀이다. 이 당시 하루 낮은 12시간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겨울에는 낮이
짧고 여름에는 낮이 길었다. 이 시간의 기록에서 우리는 그 두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에 비해 더 긴밀히 알기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하루 밤을 유숙하는
것을 개의치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따.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대부분이 이들과 다르
다. 우리는 주님께 대해 알아보는 일을 한없이 지연시킨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어려움이 많기 때문이다.
1:40
두 사람 중에 하나는......안드레라 - 이 복음서 저자가 이 장 마지막까지의 기록에서 목표하는 바는 제자들이 어떻게 한 명씩 그리스도에게 인도 되었는가를 알려 주자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후에 빌립과 나다나엘에 대한 소개를 덧붙이고 있다. 안드레가 즉시 그의 형제를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는 것은, 빛을 받은 후 이를 안에 숨겨두거나 소멸할 수 없는 믿음의 특징을 잘 표현하는 것이다. 믿음은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안드레는 겨우 조그만 빛을 받았을 뿐이다. 그런데 그는 즉시 그의 형제를 깨우친다. 안드레보다 더 많은 빛을 받은 우리가 다른 이로 같은 은혜에 참예케 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무관심에 화가 있지 않겠는가! 우리는 안드레에게서 이사야가 하나님의 자녀들로부터 요구하는 두가지를 유의할 수 있다(사2:3). 각 사람이 그 이웃의 손을 잡고, 그 이웃에게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그가 그 도를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안드레가 바로 이러한 목적으로 그 형제에게 손을 내밀어, 그리스도의 학교에 동료 학생이 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을 유의해야겠다. 그리스도는 안드레의 소개와 사역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있어 훨씬 더 유명하게 될 베드로를 원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월등하고 뛰어난다 할지라도 우리보다 열등하고 낮은 사람에게서 배우는 것을 거절해서는 안되겠다. 주님은 인간적인 멸시로 인해 그리스도에게 나아올 생각을 않는 강박하고 교만한 사람을 엄하게 심판하실 것이다.
1:41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 복음서 저자는 이 메시아라는 말을 헬라어로 번역하여
유대인의 비밀(신비)이었던 것을 전 세계에 전파되도록 하였다. 이 말은 기름부음을 받아 왕이 된 것처럼, 왕들에게 보통 붙는 칭호였다. 그러나 이들은 한 큰 항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아 자기들에게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 주리라고 바라고 있었다. 특별히 이들이 다윗의 지상 왕국이 영구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메시아를 구하게 되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갖가지 환난에 시달려 지쳐있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움직여 메시아를 바라게 했던 만큼,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의 오심이 임박했음을 더욱 분명히 보여 주셨다.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해서는 다니엘의 예언이 다른 것보다 더 분명하다(단9). 왜냐하면 다니엘은, 그 이전의 선지자들이 그리스도를 왕에게 관련시킨 것과 달리, 구속주 한 분에게만 관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속자와 메시아를 연관시키는 방법이 더 우세하여, 메시아나 그리스도가 언급될 때마다 그들은 그를 구속주로 이해했다. 그래서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자는 '메시아가 오면'이라고 말한다. 그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바라고 기다리던 분이 그와 같이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영접되었다는 것은 더욱 신기한 일이아닐 수 없다.
1:42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 그리스도는 시몬에게 이름을 주는데, 보통의 경우처
럼 지나간 과거에 기초해서나 주님께서 그 안에서 본 것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 그를
베드로로 만들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그는 "네가 요한의아들 시몬이니"라고
말한다. 그는 시몬의 아버지의 이름을 축소형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름이 외
국어로 번역될 때 흔히 있는 말이었다. 마지막 장(章)에서 시몬이 요한나(Johanna)나
요한(John)의 아들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지금 현재의 그가 앞으
로의 그와 매우 다르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으로 집약된다. 주님은 시몬의 아버지
가 높은 명망이 있어서 그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베드로는 사
람들에게 아무런 존경을 받지 못하는 무명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배경이 시몬을 '불굴의 의지'의 사나이로 만드는 것을 막지는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신
다. 복음서 저자는 따라서 시몬에게 새로운 이름이 주어질 것이라는 예언으로 기록하
고 있다. 나는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앞으로 베드로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주님께서 또 그에게 준다고 미리 말한 내용이 있기 때문에, 하나의 예언적인 말씀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이제 주님은 일종의 경구(警句)를 쓰면서, 주님은 자기가 후에 베드
로에게 주기로 작정한 은혜를 찬양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현재 이름이 아니
고, 앞으로 그의 이름이 될 것을 예언하셨다.
장차 게바라 하리라 -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
기 위하여 건축 자재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터를 닦은 모든 신령한 성도들, 즉 모든 베
드로에게 해당되는 말슴이다. 그러나 베드로의 우월함이 뛰어난 가운데 그만이 이렇게
불리운다. 그러나 가톨릭 교도들은 베드로가 다른 사람들처럼 그리스도 위에 터를 닦
지 않은 특별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를 교회의 기초로서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
히고 있다. 이것은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이 하나의 돌에서 머리를 만들어
내는 것을 생각하면 천주교인들은 두 배로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 그라티안
(Gratian)의 광상적인 문장 가운데, 이 헛소리에 의하면 히브리어 표현을 헬라어로 바
꾸고 * (케파레)를 게바(Cepha)와 혼동시킴으로, 베드로가 교회의 머리로
임명되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게바(Cepha)는 히브리어라기보다 아랍어였다. 그
러나 그것은 유대인들이 바빌론에서 돌아온 이후에 흔히 쓰던 발음이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에는 어떠한 모호성도 없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가 감히
기대할 수도 없는 것을 약속하심으로, 그의 이런 처지나 상태가 그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베드로에게 그의 은혜를 베푸셨다. 이 은혜는 모든 세대에 대대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 조그마한 그러나 괄목할 만한 칭호는 베드로가 새
사람이 되었음을 선언하고 있다.
1:43
나를 쫓으라 - 빌립의 마음은 이 한 마디 말씀을 들었을 때 그리스도를 따르고 싶
은 욕망으로 불이 붙었다. 이에서 우리는 말씀의 효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유추하게
된다. 그러나 말씀이 효능은 모든 사람 속에 똑같이 나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에게 강권하시지만 반응이 없다. 그들에겐 하나님께서 헛소리로 귓전을 울리
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외적으로 말씀을 전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는 열매가
없는 것이다. 그 말씀이 잃어진 영혼에 치명상을 입혀 그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변명
할 여지가 없이 만들 때가 아니면 하나님 말씀이 허공을 치는 수가 있다. 그러나 성령
의 숨은 은혜가 죽은 영혼을 깨우칠 때는 결국 모든 지각이 눈을 뜨게 되어 사람은 하
나님께서 어느 쪽으로 부르시든 그 지시하심을 따를 준비를 갖추게 된다. 그러므로 우
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같은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도록 그에게 간구해야 한다.
물론 빌립이 그리스도를 따른 것은 특별한 것이었다. 그는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나를
쫓으라'는 명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의 친밀한 동료로서, 떨어질 수 없는 동무로
서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인 부름의 한 형태인 것이다.
1:44
벱새다 사람이라 - 이 동네의 이름은 이 세 제자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더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 언급된 것 같다. 우리는 다른 성경 기록에서 그리스도께서 혹독
하게 이 동네를 저주하시고 경고하신 것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그와같이 불의하고 사
악한 부류의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의품에 영접되었다는 것은 그들
이 지옥에서 불려나온 것으로 간주해 마땅하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와 같은 무저
갱(無底坑)에서 구조된 죄인들을 사도로 임명할 정도로 귀한 영광으로 이끌어 주신 것
은 굉장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1;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 교만에 차 있는 자들이 교회의 시작을 아무리 멸시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처음부터 고상하고 장대했던 것보다, 이 초신자
들 안에서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조그마한 씨가 점
차 위대한 수확을 거두는 데까지 자라난 과정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안드레에게서
건축에 대한 열의를 보았다. 그런데 우리는 빌립에게서 똑같은 열심을 본다. 다른 사
람을 불러 만인의 공통된 선생으로부터 함께 배우자고 초청하는 그의 태도에는 또한
겸손이 나타나 있다.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 빌립의 믿음이 얼마나 연약한 것이었는가는 그가 그리스
도에 대해 네가지 사실을 말하는데 두 가지 실수를 한것에 잘 나타나 있다. 빌립은 주
님을 요셉의아들이라 부르고 있으며, 나사렛을 그의 고향으로 잘못 소개하고 있다. 그
러나 빌립은 참으로 자기 형제를 도와 그에게 그리스도를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하나
님께서는 그의 열심을 인정하시고 이를 성공시켜 주셨다. 과연 사람은 누구나 각자 자
신의영역을 지켜야한다. 복음서 저자는 여기서 그리스도에게 두번이나 불명예스러운
발언을 한 것이 칭찬할 만하다고 빌립을 언급한 것이 아니다.다만 복음서 저자는 그의
가르침에 흠과 오류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의 유일한 목표는 그리스도를
참으로 알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런대로 유용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빌립
은 어리석게도 예수를 요셉의 아들이라 부르고 무식하게도 그를 나사렛 사람으로 만들
었다. 그렇지만 결국 빌립은 나다나엘을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에게 인
도했다. 그는 거짓된 그리스도를 조작하지 않았으며 모세와 선지자들이 이야기 했던
그리스도를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빌립의 경험에서, 우리가 말씀을 전할 대
제일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의 말을 듣는 이들이 그리스도엑 나아 오도록
하는 것임을 배우게 된다.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날카로운 이론을 전개한다. 그러나 그들의 교묘하고
난해한 이론에 파묻힌 그리스도는 찾아볼 수가 없다. 이와 같이 가톨릭 교도들은 그리
스도가 요셉의 아들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의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그의 능력을 빼앗아
내고 그 대신에 유령을 만들어 낸다. 좀 어리석은 점이 있더라도 빌립과의 서투른 대
화를 통하여 참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현명하고 인상적인 언어를 나열하여 픽션
(虛構)을 지어내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그렇다. 오늘날 가난한 범인들로서, 말이
서툴고 기교를 부릴 줄 모르지만, 고매한 상상력과 이론을 가지고있는 교황의 모든 신
학자들보다 더 충실하게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므로 이 귀
절은 무식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정확하지 않게 전하는 것이 있
다 하더라도, 그들이 무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이라면 이를 멸시하고 비웃어
서는 안된다고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의 그릇된 상상과 혼동에 의하여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항상 율법과 선지자들로부터 그리
스도에 대한 순전한 지식을 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1:46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 나다나엘은 빌립이 제시한 그리스도의
출생지에 자극을 받아 이렇게 되묻는다. 그러나 나다나엘은 빌립의 경솔한 말에 속은
것이다. 빌립이 어리석게 생각했던 것을 나다나엘은 확실하게 받아들였다. 여기에 나
사렛에 대한 증오나 멸시감에서 나온 비판이 첨가되고 있다. 우리는 이 두가지 점을
주의깊게 살펴보아야겠다. 이 거룩한 사람은 자기 면전에서 그리스도께로 가는 문을
닫는 실수를 저지를 뻔 했다. 왜 그랬겠는가? 나다나엘은 빌립이 그리스도에 대해 그
릇되게 말한것을 너무 빨리 믿었으며, 그는 또한 어떠한 선한 것도 나사렛에서는 기대
할 수 없다는 선입관에 사로잡혀 있었다. 우리도 크게 조심하지 않는다면 같은 위험에
빠지게 된다. 사단은 이와같은 장애물을 놓음으로 매일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나아 가
는 것을 막고 있다. 사단은 많은 거짓을 유포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복음을 의심하고
싫어하게 만들기에 광분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우리로 복음을 더 알아보지 못하게 만
드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로 그리스도를 경멸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사단이 우리
앞에서 거두지 않는 또 하나의 거침돌이 있다. 우리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그의 지체
들 안에, 비천하고 낮은 십자가가 많은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는것을 본다. 그
러나 우리가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사단의 계략에 의해 공격을 받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무에 적어도 '와 보라'는 말을 기억하도록 하자. 나다나엘의 두 가지 오류는 빌립이
한 말에 의하여 시정되었다. 그러므로 그를 본받아, 우리 자신이 우선 배울 준비가 되
어 있고 적응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 주자.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를 괴
롭히는 의문을 풀어주려 하시는데, 우리가 구하는 일을 주저하지 말 것이다. 이 문장
을 보고 확신을 얻으려는 사람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이 얼마나 하찮은 일인가! 그리
고 우리는 그 당시 사람들이 나사렛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던 것을 알고 있다. 또
한 빌립이 '와 보라'고 한 대답은 주저와 불신을 완전히 밀어내고 있다.
1:47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 그리스도는 나다나엘 한사람을 보고 그를 칭찬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를 통하여 우리에게 일반적인 교훈을 주신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많은 사람들이 실은 불신자이기 때문에, 진짜 올바른
것과 거짓된 것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을 두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유대인들이 그
들의 조상 아브라함 안에서 얼마나 자랑하고 또 그의 후손됨을 자긍했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 중 백에 하나라도 타락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또 조상의 믿음에
낯설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러므로, 위선자들의 가면을 벗기기 위하여 그리스도께
서 참 이스라엘 사람이 무엇인가를 간단히 말하고, 동시에 백성의 완악함에서 곧 일어
나게 될 반발을 제거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
로 간주되기를 바랐던 그들은 곧 얼마가지 못하여 복음의 원수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
래서 거의 모든 계층의 유대인들에게 공통적으로 파급되어 있던 불경건과 불신앙이 아
무나 다 상심시키고 근심하게 할것을 염려하여,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이름
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 참된 이스라엘 사람은 극히 적은 숫자임을 경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기 귀절은 또한 기독교의 정의(定義)가 되느니 만큼, 우리는 성급하게
이 말씀을 지나쳐서는 안되겠다. 이제 그리스도의 말씀을 몇 마디로 요약하자면, 우리
는 '거짓과 기만'을 진실과 대조시켜 보아야겠다. 그리스도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 두
마음을 품은 자라고 부른 사람들을 간사한 사람 또는 기만적인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
다. 이 말씀은 사악한 줄 스스로 알면서 선하척 하는 사람들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죄에 눈이 멀어 다른 사람을 속일뿐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는 자들을 가리켜 말
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의 결백한 마음과 사람 앞에서의 정직이 그리스도인을 만든
다. 그리스도께서 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은 시편 32장 2절에서 말하고 있는 마음의 간
사함이다.
1:48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 주님은 비록 그에게 아첨할 의도가 없었지만, 새로운
질문을 얻어내기 위해 그가 자기 말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하셨다. 그질문에 답함으로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해 주었다. 나다나엘이 그리스도에게 "어떻게
나를 아셨나이까?"라고 물은 것도 이유없는 질문은 아니다. 모든 간사함으로부터 벗어
나기를 원하는 진실된 인간은 극히 드물고, 마음의 그 순결함을 아는 것도 하나님께만
속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답은 요점을 빗나간 것처럼 보인다. 나다
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본 것이 마음의 깊은 속을 꿰뚫어 보게 하지는 않았
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전혀 다른 것이다. 전에 보여진 적이 없는 인간을 아는 것도
하나님께 속한 일인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것도 하나님께 속한 일이다.
나다나엘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적으로 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눈으로 보셨음을 알았
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하나의 인간으로서 말씀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
다. 그러므로 증거는 비슷한 것에서 얻어진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범주에 있는 것
을 볼 자격도 있지만, 마음의 순수성 여부를 판단할 수도 있다. 우리는 또한 이 귀절
에서, 우리가 그리스도께 대해 생각도 않고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살피시며 우
리가 그를 떠나갈 때 우리를 다시 돌이키기 위하여 주님은 우리를 항상 살피시지 않으
면 안된다는 유용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49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 그가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면 나다나엘은 왜 그를 이스라엘의 임금이라 부르는가? 이
두가지는 서로 연관이 없는 것 같지만 나다나엘은 더 높이 보고 있다. 그는 이미 그리
스도께서 메시아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나다나엘은 이 믿음에다 자기에게 주어진
확신을 덧붙이고 있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아들은 먼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
임금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오시지 않는다는 또 하나의 원칙을 믿고 있다. 그러므로 나
다나엘은 하나님의 아들을 또한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정당하게 고백하고 있다. 과연
믿음은 그리스도의 본질만을 붙들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과 직분에도 주의을 기울
여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이 되기를 원하는지, 그리고 무슨 목적으
로 아버지께서 그를 보내셨는지를 알지 못하면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별로
유익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톨릭 교도들에게는 비전적(秘傳的)인 그리스
도 밖에 아는 것이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가톨릭 교인들은 그의 적나라한 본질을 아
는 데만 신경을 썼을 뿐 구원하는 주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그의 나라는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다나엘이 "주는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선언했을 때에
도, 그의 고백은 그의 믿음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나라는 땅 끝
까지 이르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까지 그가 온 세상을 다스릴 임금으로 보냄을 받으신
분임을 아는 데까지 나아오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세계 각처 사방으로부터 아
브라함의 자녀가 몰려들어, 온 세상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되리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나라의 범위가 어디까지 미치는지 계시를 받은 우리들은 그 좁은
한계를 초월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나다나엘을 본받아
말씀을 들어 마음을 얻고, 그 믿음을 묻어두는 데 그치지 말고 이를 고백으로 표현함으로써, 어떻게 해서든지 그 믿음을 굳게 하자.
1;5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이 너무나 남의 말을 쉽게 믿는다고 나무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믿음을 긍정하시면서 그와 모든 다른 사람에게 더 큰 확증을 약속하고 있다. 더군다나, 그가 멀리 안보이는 곳에 있는 무화과나무 밑에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보았다고 하는 것은 한 사람에게 특별한 일이다. 그러나 이제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경험이 될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마치 화제를 돌리는 것처럼, 한 사람에게서 모든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리신다.
1:51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 내가 생각하기에는, 나다나엘과 다른 이들이 하늘이 열린 것을 언제 어디서 보았는지를 캐어 묻는 이들은 크게 잘못되어 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여기서그의 나라에서 항상 있을 어떤 사실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물론 제자들이 때때로 오늘날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천사들을 보았던 것을 인정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리우셨을 때에 하늘의 영광이 나타났던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나타나는 영광과 다른 것을 또한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깊게 이를 되새겨 본다면 우리는 그때에 일어났던 일이 계속 살아 있음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한때 우리에게 닫혀있던 하나님의 나라가 과연 그리스도 안에서 열려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스데반과 산상의 세 제자 그리고 그리스도의 승천 당시 다른 제자들에게 볼 수 있게 나타난 예를 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는 자기 자신을 나타내시는 모든 증거는 이 '하늘이 열리는것'을 말하고 있다. 특히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이 되시기 위하여 그 자신과 우리가 교통할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천사들에 대한 귀절이 그 뒤에 따르고 있다. 하나님의 사자(천사)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전달할 심부름군이 되기 위하여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으로 말해지고 있다. 이와 같은 표현에 의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상호 교통이 언급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 혜택을 받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천사들이 우리를 친절하게 도와주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를 대적하는 원수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으로 말해지고 있다. 천사들이 주님에게만 수종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천사들이 온 교회를 다 돌보기 때문이다. 나는 또 주님께서 야곱의 꿈에 보였던 사다리를 암시하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창28:12). 그 환상이 보여준 내용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 말씀의 요지는, 비록 전 인류가 하나님의 나라 밖에 있다할지라도 하늘 문이 이제 우리에게 열림으로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 되었으며 천사의 동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지키는 파수군으로 보내심을 받은 천사들은 우리의 불행을 덜어주기 위해 그 복된 처지에서 내려 온다는 것이다.
태초에 - 온 우주 창조의 시작을 선포하는 창 1:1을 연상시키는 본 구절을 매개로하여, 저자 요한은 구약과 일관된 흐름으로 신약의 복음서를 쓰고 있다. 즉 계시의 시작인 천지 창조의 기사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에 이르러 계시가 완성된다고 볼때,본 구절은 이 복음서의 서두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태초'(*, 아르케)라는 용어는 원래 '시간과 공간의 시초'를 의미한다. 따라서 고대 그리이스의 자연철학자들은 '만물의 시초(始初)'라는 뜻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여기서는 처음 시간의 특별한 한 시험 뿐만 아니라 초(超) 시간적인 영원을 나타내는말로 사용되었다(1:1-18 주제 강해 '베레쉬트와 엔아르케의 의미' 참조).
말씀이 - 원어상 '말씀(* , 로고스)은 '수집', '계산', '목록', '말' 등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용어는 철학적인 의미로서 (1) 어떤 법칙, 의미, 구조의 내용, (2) 형이상학적 실재나 사물을 이해할 수 있는 법척, (3) 우주론적인 실재들을 표상하는 개념 등으로 사용되었다. 이 용어를 신학적 의미로 전환시킨 사람은 플라톤 철학에 심취했던 1세기의 유대인 철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a)였다. 그는 '하나님의 로고스'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과 세상을 연결하며,인간을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중재자(즉 대변자거나 제사장)로 부각시키는 것이라고하였다. 즉 로고스란 하나님의 창조 늪력의 총화(總和)이자 이 세상을 질서있게 다스리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성경 전반에 걸쳐서 '로고스'는 주로 하나님의 권능(시 147:15;148:8;히 4:12)과 계시(사 2:1;렘 26:1;딤전 5:17)를 의미한다. 특히 요한은 본절에서 '로고스'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Deity)을 부각시킴으로써, '로고스'가 바로 계시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임을 보여준다. 본절에서와 마찬가지로 14절에서의 '말씀'에서도 '로고스'의 인격성이 뚜렷이 표현되고 있다. 본서에서 '믿다'(*, 피스튜오), '사랑'(* , 아가페)과 더불어 주요 개념으로 쓰인 이 용어(로고스)는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강화(講和)로 구성되어 있는 본서의 특성까지도잘 드러내고 있다(1:1-18 주제 강해 '로고스 개념의 배경과 그 의미' 참조).
계시니라 - 존재를 나타내는 동사 '에이미'(* )의 3인칭 단수 미완료형 '엔'(* )을 사용함으로써 요한은 (1) '로고스'가 태초의 어느 시점에서 창조된 것이아니라 계속하여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보여줌과 아울러 (2)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과 영원성을 드러낸다. 따라서 당시의 이방 철학의 인본주의적 경향과 유대교적 신관(神觀)의 오류를 분쇄하고, 세상의 시초 이전에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존재하였다는, 그리고 지금도 존재하고 계시다는 엄연한 사실을 선포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동등하게 선재하신 그리스도의 초시간적 영원성을 무시하고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라고 주장한 아리우스는 니케아 종교 회의(A.D. 325)에서 이단으로규정되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 '하나님과 함께'(* ,프로스 톤 데온)에서 전치사 '프로스'(* ) '...와 함께'란 뜻의 전치사들(*, 엔;* , 메타;* , 파라;* , 쉰)과 의미상 유사하다. 그러나 후자인 여러 전치사들이 주로 정적(靜的)인 공존(共存)을 나타낸다면, 전자인 '프로스'는동적(動的) 공존을 나타낸다. 따라서 후자는 같은 시간에 동일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며, 전자는 서로간의 친밀하고도 부단한 인격적 관계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 전치사는 '서로 마주 대하는'이라고도 해석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전치사를통하여 우리는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셨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와 하나님 사이의 영화로우신 '친교'(Robertson)를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삼위 일체 교리의 근간'이 되고 있다(Calvin).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혹자는 본문에서 '하나님'(* , 데오스) 앞에 관사 '호'(* )가 없기 때문에 말씀이 절대적인 신성을 지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그렇게 볼 경우 '말씀'은 단지 종교적 신성(神性)을 지니고 있는 막연한 존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당시 로마 제국 내에서 풍미하던 영지주의(마태복음 신약서론,'이방 종교' 참조)의 학설대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된 존재로서 하나님보다는 하등의 신으로 전락할 위험성도 내포할 수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씀'이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표현된 것은 헬라어 문법상의 특성을 관찰하면 잘 알 수 있다. 헬라어 문장은 주어와 술어의 어순(語順)을 바꾸어 쓸 수 있다. 따라서 헬라어에서는 주어와 술어의 구분을 어순으로 결정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헬라어에서 주어와 술어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관사이다. 따라서 주어는 관사를 가지고있고, 술어는 주어와의 구분을 밝히기 위해 관사를 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문 '카이 데오스 엔 호 로고스'(* )에서 '말씀(로고스)이주어, '하나님'(데오스)이 술어임을 알 수 있다. 결국 본문은 성자 하나님의 신성에대한 간결하고도 명확한 선포이다. 이러한 성자 하나님의 참 모습은 20:28의 도마의고백에서 확실하게 밝혀진다. 한편 3개의 문장으로 기술된 본절은 원문 구조상 '말씀이 계시니라'(* ...호 로고스 엔...)는 주어와 동사를 중심으로 (1)말씀의 선재성과 영원성, (2) 인격성 그리고 (3)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드러낸다.이러한 선언은 요한복음 전체의 기독론(Christology)을 대변한다. 따라서 본절은 그리스도에 관한 심오한 내용을 단 세 문장으로 간결하게 함축한 것으로서 복음서 문장 양식 중 백미(白眉)라고 하겠다.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 1절의 앞 두 문장의 내용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반복은 내용을 강조하기 위한 전형적인 히브리적 표현 방법이다. 예로부터 유대인들은 자녀 교육시 반복을 통해 기억시키는 학습법을 흔히 사용했다(출 13:9). 특히 시편의 반복적 찬양시들(시118편;136편)과 잠언의 반복적 교훈들(잠1:8;4:1-4;6:20;13:1)은 이스라엘의 반복 교육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반복 교육은 내용을 강조하고 그것을 상대방(피교육자)에게 선명하게 주입시키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따라서 어려서부터 히브리적 교육을 받았던 저자 사도 요한은 율법의 완성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철저히 전파하고 교육시키기 위하여 반복적인 문장을 자주 소개했다(3절;3:3, 5, 11등). 특히 '진실로 진실로'(* , 아멘 아멘)라는 표현이 다른복음서에서는 단 한번도 사용되지 않았는데 반해서 요한 복음에는 무려 25회나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사도 요한의 교육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요한일서도 사랑을주제로 한 문장의 반복을 심층적으로 구사하면서 과거의 성도들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사랑의 중요성을 마음속 깊숙이 심어준다. 전설에 의하면 요한은무척 늙어서 강대상에 올라 갈 수 없었을 때, 제자들이 그를 의자에 앉히고 강대상에올려 줄 때마다 '어린 아들들아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늘 동일한 말씀을 전했다.같은 말만을 반복하자 제자들이 그 이유를 여쭈었다. 그때마다 요한은 '이것이 주님의교훈이니 이것만 실천하면 족하다'고 하였다고 전한다(Jerome). 이렇듯 복음서와 서신의 집필 그리고 죽을 때까지 주의 말씀을 꾸준하게 반복적으로 선포한 사도 요한의 자세에서 말씀에의 사랑과 말씀전파의 숭고성을 볼수 있다. 끊임없이 말씀을 상고(詳考)하고 배우는 자세는 구약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말씀과 더불어 살아가는 성도들의 참다운 태도이다(시 119:9, 105;살전 2:13).
=====1:3
만물이 - 원문상 '만물'(* , 판타)에서 관사가 없다. 따라서 '만물'이란현재의 시점에 국한된 전 우주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에 존재하는전 우주를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이 용어는 역사와 더불어 존재하는 만물을 의미한다. 이와는 다른 관점에서 사도 바울은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골 1:16)이라고 공간적인 의미로서 만물을 정의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 이것의 헬라어 '디 아우트'(* )라는 표현은 '말씀을 통하여'(공동번역)라고 번역하는 것이 의미 전달상 명확하다. 이러한 표현은 '만물이 주로 말미암고'(롬 11:36)라고 표현한 바울의 말씀과 일맥 상통한다. '...말미암아'에 해당하는 전치사 '디아'(* )는 성경 전반에 걸쳐 사용된 것으로서 주로 (1)창조(히 2:10)와 (2) 구원(10:9;롬 5:1, 21) 사역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적역할을 잘 드러낸다. 본절에서 이 전치사는 창조시의 그리스도의 사역을 가리킨다. 1절에서 언급한대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고려한다면, 창조시그리스도의 사역은 성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수단으로서의 사역이 아니라 '우리의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창 1:26)라는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대등한 인격적 친교를 바탕으로 한 사역이었던 것이다.
지은바 되었으니 - 헬라어 '에게네토'(* )는 '...이(존재가) 되다'라는 뜻을 지닌 헬라어 '기노마이'(* )의 3인칭 단수 과거형이다. 이 동사는 '구성되어지다'(constructed)의 뜻이 아니라 '...이 되다'(become)는 의미를 지니는 바, 이는 그리스도께서 무(無)의 상태로부터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암시한다.그리고 이 동사는 1절의 '계시니라'(* , 엔)와 대조되어 그 의미를 명확하게 한다.즉 본절의 동사는 피조된 것을 1절의 동사는 존재성을 나타낸다. 또한 본절에서는 '만물'(all things, NIV)이 주어인데 반해서 1절에서는 '말씀'이 주어이다. 이로써 (1)말씀은 존재하고 있었으며, (2) 만물은 말씀을 통하여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만물이 하나님의 우주적 사역의 현장이며, 수단임에 비하여, 말씀은 하나님과더불어 항상 존재해 왔다.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 '생명'으로 번역된 헬라어 '조에'(* )는 '영원한'(* , 아이오니오스)이라는 형용사를 수반하여 '영생'이라는 용어로 자주등장한다(3:15, 16; 요일 5:12). 그런데 요한은 단지 '조에'라는 단어로써 영원한 생명을 묘사할 때도 많으며 본문의 경우도 그러하다. 한편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생명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시 36:9) 생명의 주인(시 104:29, 30)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구약성경의 생명관이 반영된 것이 본문의 '생명'9* , 조에)이다.따라서 저자 요한은 '생명'이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나타낸다.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고 있는 생명이 영원한 생명(영생)임을 명시한다(14:6;17:3). 따라서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영접하는 성도들에게는 영생이 부여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 본원적(本源的)으로 존재하고 있는 영생을 매개로 하여영원한 하늘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이다(엡 2:19).
사람들이 빛이라 - '빛'이라는 용어는 단순히 자연 현상인 빛을 가리키거나 빛과어두움을 절대적 차원에서 대치시키는 이원론적인 종교 사상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오히려 빛(the light, NIV)에 대한 개념은 구약성경의 맥락에서 발견할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1) 빛을 발하는 구름(욥 37:15)이나 불기둥(시 78:14) 가운데 현현하시는 분 (2) 감추인 것을 드러내시는(욥 12:22) 빛나는 분(사 42:16) (3) 빛과 어두움의 주(암 5:8) (4) 이스라엘의 영원한 빛(사 60:1, 2)으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요한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참되고 영원한 생명이 곧 인류에게 임할 참빛이라는 사실을피력하고 있다(1:9). 그리고 본절의 두개의 문장에서 '에이미'(* , '존재하다')의 3인칭 단수 미완료형인 '엔'(* )을 두 번 사용함으로써 이러한 생명과 빛은창조되었거나 형성된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삼위 일체 하나님 안에 존재하고 있었던것임을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본절은 성도들로 하여금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시 36:9)라는 기쁨의 찬양에 이르게한다.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 빛과 대조되어 나타나는 '어두움'(* , 스코티아)은 앞절에 비추어 볼 때, 생명을 가로막는 죽임의 세력, 즉 사단의 세력과 그 세력하에서 부단히 죽어가는 이 죄악된 세상을 상징한다. 원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그리고 빛이 어두움 안에서 비추고 있다'(* , 카이토 포스 엔 테 스 코티아 파이네이)라는 뜻이므로, 본문은이 죄악된 세상과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역사적인 성육신을 통하여 죄악된 세상인 이세상 안으로 임하셨다는 뜻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과 승천 후에 생명의 빛은소멸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요한은 '비추다'의 헬라어 '파이노'(* )의 3인칭 현재형을 구사함으로써 말씀의 빛이 쉼없이 비추고 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생명의 빛은 지금도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16:13) 성도들에게 비추이며 생명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빛의 군사로서 어둠의 세력과 끝까지 투쟁하는 능력을 공급하고 있다(딤전 1:18;6:12).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 '깨닫지'의 헬라어 '카테라벤'(* )의 원형 '카타람바노'(* )는 본래 '굳게 잡다'라는 뜻으로서 본문에서는 (1) '이해하다', (2) '이기다'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여기서는 '깨닫다','이해하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죄악된 세상 속으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처형했다는 것이 바로 본서의 전반적인 맥락이다.이러한 증거는 예수의 말씀에서 여러 차례 나타난다(4:5-26,31-38;5:10-47;6:25-65;7:14-36;8:12-59;9:39-10:18, 22-39;12:20-36;13:1-16:33). 따라서 저자 요한은 영적으로 무지하여 생명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한 이세상의 정체(正體)를 준열하게 드러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어두움의 세력에 휘말린세상이 이제 재림하실 그리스도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요한계시록에 기록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동사 '카테라벤'은 현실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1)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죄악된 세력의 실상을 깨우쳐 주며 (2) 이 죄악된 세력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빛의 세력을 궁극적으로는 '이길 수 없는'는 사실을 보여준다(히 11장).
=====1: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 1-4절까지 '말씀이신 그리스도'에대해 함축적으로 서술한 저자는 여기서 잠시 1세기 초반 팔레스틴에 영적인 쇄신을 일으키며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위해 터를 닦았던 한 인물을 소개하고 있다. 본문은 세가지 단어를 실마리로 하여 그 인물의 특성을 보여준다. (1)전치사 '파라'(* ,'...에게서')는 1절의 전치사 '프로스'가 서로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나타낸다면, '파라'는 친근하기는 하되 동등하지 않은 관계를 나타낸다. (2) '보내심을 받은'(* , 아페스탈메노스)은 '보내다', '파송하다'라는 뜻을 지닌 '아포스텔로'(* )의 주격 단수 남성 분사로서 70인역(LXX)에서는 메시지나임무를 위임받아 파송될 경우에 쓰였다. 이는 주로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보내실 때 썼던 용어이다(사 6:8). 이러한 사실은 이 인물이 남성이며,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그리스도의 선구자였음을 나타낸다(7, 8절). 그리고 '아포스텔로'의 완료 수동형을 사용함으로써 이 인물이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명대로 사역했던 사람임을 보여준다. (3) '났으니'(* ,에게네토)라는 부정 과거형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그 사람이 하나님과 동등하게 존재하는 말씀과는 달리 단지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였음을 보여준다.
이름은 요한이라 - 앞 문자에서 한 인물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공관 복음에서 '세례 요한'(마 3:1;막 6:14, 25; 눅 7:20)이라고 명시한 것과는 달리 그저 '요한'이라고만 명명한다(25, 19, 20, 26, 28절). 이는 공관 복음서 기자들이 독자들의이해를 위하여 세례 요한과 사도 요한을 구분할 필요가 있었던 반면에 사도 요한은 자신의 저작이므로 이를 구별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1:7
저가 증거하려 왔으니 - 본절에서는 '증거자'로서의 세례 요한의 사역이 간략하게요약되어 있다. '증거'(*, 마르튀리아)란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증언하다'라는뜻으로서, 요한의 사역이 예수의 사역처럼 획기적인 신기원(新紀元)을 이룬 것은 아님을 보여 준다. 이는 세례 요한 자신이 스스로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23절)로비유한 데서도 드러났다.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 증거자 세례 요한의 증거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빛'에대해서는 4절 주석을 참조하라.
모든 사람 - 세례 요한의 증거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될 대상들을 명시한 '모든 사람'이란 일차적으로 세례 요한의 증언을 들은 모든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그러나여기에서 '모든 사람'이란 유대 군중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마치 아벧이 비록 죽임을 당하였어도 오히려 믿음으로 증언한 말씀이 남아서(히 11:4) 그리스도를 증거하여영접케 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처럼, 그의 증거는 시공의 범위를 점점 더 확산하여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까지 미친다고 볼 수 있다.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 '자기를 인하여'의 헬라어 '디 아우투'(*)라는 표현은 3절의 '그로 말미암아'(* , 디 아우투)와 같은 단어이나각기 그 성격을 달리한다. 3절에서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창조시의 중보적 사역을나타낸다면,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예비하기 위한 중간 매개로서의 요한의사역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와 같은 요한의 사역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하려 함에 있었다. 비록 방식에 대해 일말의 의구심을 표했던 적이 있었을지라도(마 11:2, 3). 요한복음에 언급된 바대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증거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항상 그리스도의 영광을 찬양했던 사람이다(15, 26, 27, 29-34절;3:28-30).
=====1:8
그는 이 빛이 아니요...증거하러 온 자라 - 6, 7절에 나타난 요한의 본질적 특성과사역을 간략하게 요약한 본절은 전형적인 히브리적 표현 방법으로서(2절 주석 참조)요한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올바르게 정립(定立)하고 있다. 저자 요한이 세례 요한과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확실하게 명시했던 이유는 세례 요한의 사역의 참뜻을 알지 못하고, 그가 죽은 후 하나의 당파로 고착되어 버린 요한의 제자들을 깨우치기 위함이었다. 특히 저자 요한이 전도와 교육을 집중했던 에베소에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적지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행 19:2, 3).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 계시를 소유한 초대 교회로서는 요한의 제자들을 복음의 빛 안으로 인도하는 것이 하나의 과제였다.
=====1:9
참빛 - 6-8절에 걸친 세례 요한의 소개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던 4, 5절의 주제가본절에서부터 다시 이어지고 있다. '참빛'(the true light, NIV)으로 번역된 원문은'그는 참빛이시다'(* , 엔 토 포스 토 알레디논)이며, '말씀이 곧 참빛 이었다'(공동번역)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여기서'참'(* , 알레디논)은 사도 요한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로서 '거짓에 반대되는 참'(* , 알레데스)이 아니라 '불완전을 완전케 하는 참'(Calvin)을 의미한다.따라서 '참'(true, NIV)이란 용어는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둠의 세력에 대항하여싸우는 빛의 세력인 성도들(롬 12:13;엡 5:8;살전 5:5)의 참된 주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또한 참빛이신 주님께서는 말세에 어두움의 권세를 종식(終熄)시키고 빛의 왕국인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이다(계 21:9-27).
세상에 와서 - '세상'의 헬라어 '코스모스'(* )는 원래 질서와 연관된의미를 지닌 용어로서, '각부분들이 모여서 잘 구성되어 있는 것'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이 용어는 개인이나 단체 또는 국가 등이 질서있는 상태에 있을 때 사용될 수 있었다. 그후 헬라인들은 각각의 통일된 구성체들(* , 코스모이)이 질서와 조화로써 완전한 통일체를 형성한 우주를 '코스모스'라고 불렀다. 그리고 각각의 '코스모이'들이 '코스모스'로 되는 근본적인 규준(規準)이 바로 '로고스'(* )라고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이러한 개념을 도입하지 않았다. 즉 신약성경의 기자들은당시 헬라적 문화권에서 통용되는 헬라어로 성경을 기록하고 복음을 전파하였음에도불구하고 '코스모스'의 개념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사용하였다. 즉 신약성경에서 '코스모스'란 (1) 구약성경에서 사용한 '하늘과 땅'(출 20:11)과 동의어인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우주'(롬 1:20) (2) 인간 역사의 현장인 '지구'(롬 1:8) (3) 타락한 '인류'(1:29)등을 가리킨다. 따라서 성경적인 관점에서 본절의 '세상'이라는 개념을 요약한다면,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창조되었지만, 인간의 타락과 함께 부패된 곳, 다시 말해서 어두움의 세력인 사단의 권세가 지배하는 곳이다.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 각 사람(* , 판타안드로폰)이란 인류라는 집단 또는 어느 단체와는 무관한 개념으로서, 실존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개체적인 의미이다. 그리고 여기서 빛은 참빛이신 그리스도의 존재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비취는 빛')이라는 의미도 포함한다.따라서 참빛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각 개인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신다는 뜻이다.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이 구약 시대에서처럼 한 민족, 한 국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죄악된 세상에서 중생(born again,NIV)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성도들 개개인을 통하여 끊임없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이요 신부인 교회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서로 차별이 있을 수 없으며, 성도 하나 하나가 모두 귀한 형제 자매들임을 깨닫게 된다.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 엔 토 코스코 엔) - 1절에서는 영원전부터 그리스도가 계셨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면, 본문에서는 이세상에 오셨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 기간을 보여준다. 학자들은 본문에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계셨다는 사실을 두 가지로 해석한다. (1) 창조 이후 성육신하기 전까지 영(靈)으로서세상에 계신 것을 가리킨다는 견해(Godet, Westcott). (2) 성육신부터 승천하시기까지의 예수의 생애를 가리킨다는 견해. 전자는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는뒷 문장에 착안한 견해인 반면에 후자는 9절의 말씀과 연관시켜 해석하고 있다. 이에대한 올바른 해석을 취할 수 있는 방편은 본절의 문장을 중심으로 하고 9절과 11절의연관 관계를 살펴 보는데 있다. 주지하다시피 본절은 세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제의 본 문장을 일단 차치하고 본절의 전체 의미를 보면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으나 세상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11절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땅에 왔지만 자기의 소유들로부터 따돌림당했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10절과 11절은 문장의 전체 의미에 있어 일치한다. 그러므로 본절의 처음 문장은 이 세상에 참빛으로오신 그리스도를 묘사한 이 세상에 참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묘사한 9절과 연관된다.그러므로 앞의 두 학설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 세상의 창조주이자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실 그리스도에 대한 세상의 무지를 보여준다. 어둠에 잠긴 죄악된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는(1) 목수의 아들(마 13:55) (2) 귀신들린 자(마 12:24;막 3:22)에 불과하였다. 더구나예수를 따르던 군중들도 예수를 기적 행위자 내지는 정치적 메시야로 판단했다는 사실을 연상한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세상의 무지함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여기에서 '알지'(* , 에그노)는 '알다'(* , 기노스코)의 3인칭 단수로서 (1)감각적인 지각(* , 아이스다네서다이) (2) 사물들에 대한 지식(* , 도케인), (3) 선천적인 지식(* , 에이도)등을 나타내는 용어들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기노스코'는 후천적, 객관적 관찰로써 온갖 대상(사물, 인간, 불변하는 영원한 실재)에 대해 파악하는 지식까지도 포괄하는 용어이다. 특히 마1:25에서는 남녀간의 성적 관계를 의미하는 구약성경의 뉘앙스(창 4:1;민 31:17)를 살림으로써 이 용어가 인간 간의 긴밀한 관계를 통한 '앎'까지도 표현함을 알 수 있다.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서 이 용어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실히 아는 것이나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를 의미하는데 주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도 '앎'이며, 예수와 성도들의 관계도 역시 '앎'이다(10:14, 15). 그리고 성부와 성자께서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을 얻는 길이다(4절;5:26;17:3). 이러한 '앎'은 사랑에 의해 평가되고, 사랑을 매개로하여 계속 유지된다(요일 4:7-12). 결국 '알지못함'과 '앎'은 '미움, 다툼'과 '사랑', 그리고 '영원한 심판'과 '영생'으로 귀결된다.
=====1:11
자기 땅에 - 헬라어 '타 이디아'(* )는 '자기 자신의'(* ,이디오스)라는 형용사의 중성 복수형으로서 19:27에도 '자기 집'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용어는 '자기 소유의 거처'를 가리킨다. 세상은 말씀이신 그리스도의소유이며, 거처이다. 아무리 세상이 타락되었고 사단의 세력이 흥왕(興旺)할지라도 세상의 궁극적 소유권은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이다.
자기 백성 -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고(창 18:19;신32:9) 이 세상의 죄악을 감당하고 사단의 권세와 싸울 제사장 나라가 되는 특권을 부여받았다(출 19:6). 그러나 타락된 세상 속에 휘말려버린 이스라엘은 자신의 역할을수행하는데 실패하였다. 따라서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본래 그리스도의 소유인 선민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고배척하였을뿐만 아니라 극랄하게도 십자가 처형을 자행하였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결정적으로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영광스런 특권을 상실하였다. 이와 같은 '소유'(*, 타 이디아)라는 관점은 선민 이스라엘에서 예수의 제자들(13:1)로 넘어간 것이다.이 영광스런 특권은 영생과 아울러 영원한 것이다(계 20:6). 이렇듯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신앙은 가혹하고도 잔인한 로마 제국의 박해에서도 더욱더 성도들을 강건케 하였음을 볼 때, 현대의 물신주의(物神主義)와 기타 세속적 이데올로기(ideology)가 판을 치는 세상 속에서 복음의 군사로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소유'라는확신과 긍지를 소유함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 '영접하다'의 헬라어 '람바노'(* )가 주로 개인적인 영접을 의미하는 데 비해 본문의 '파랄람바노'(* )는 집단적 공동체적 영접을 나타낸다. 따라서 예수께서 '선민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환영받지 못했다는 본문의 내용은 예수의 공생애 기간, 특히 예수의 체포와 제자들의 도주(逃走), 유대 당국자들의 모의와 재판, 그리고 예수의 죽음을 요구하는 군중들의 함성,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군중들의 조롱이라는 역사적 상황을 연상케 한다. 한편 저자 요한은 '깨닫지 못하더라'(5절), '알지 못하였고'(10절), '영접지 아니하였더라'(본절)라는 세 구절을 통하여, 창조주이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배척한 이세상의죄악과 부조리(不條理)를 폭로하고 있다. 이는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 1:3)라는 과거 이스라엘의 실상과 대동소이한 현상이다. 따라서 예수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알탉이 그 새끼를 날개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37)라고 탄식했으며, 스스로 선민이라 자부하던 자들을 '마귀의 자식이라 선언하셨다(8:44).
=====1:12
영접하는 자 - 원문상으로는 역접 접속사 '데'(* ), '그러나'를 사용함으로써세상의 반응과 성도의 반응을 극명하게 대립시킨다(5, 10, 11절). 주지하다시피 11절의 '영접지 아니하였으나'가 집단적 공동체적 거부를 의미한다면, 본문에서 '람바노'의 3인칭 단수 부정 과거형인 '엘라본'(* )은 개인적인 영접을 시사한다.즉 구원이 하나님과 개인과의 단독적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저자 요한은보여준다. 그리고 '영접한다'는 것은 단순히 '신뢰하다'(trust)라는 의미보다 더 강력한 표현으로서, 한개인이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권세를 주셨으니 - 이 문장은 자체 내에 파격(破格)구문을 가지고 있다. 즉 '아우토이스'(* , '자들에게는')가 선행 관계적을서술하는 여격으로 쓰여져 있다. 이는 헬라어 문장에 아람어적 관용 어법이 침투한 경우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저자가 아람어 문화권과 헬라어 문화권의 양대 지류에 속한상황에서 살았기 때문에 자주(본서에서 27회) 발생하는 파격 구문인 것이다. 또한 '그이름을 믿는 자들'에서 그리스도를 '이름'으로 칭한 것도 히브리 전통에 입각한 아람어적 표현이다. 따라서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그 이름을 지닌 사람'을 믿는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믿는다'(* , 피스튜오)의 현재 능동태 분사 여격인 '피스튜우시'(* )을 사용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부터끊임없이 계속되는 강력한 신앙'을 나나낸다. 따라서 '그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역사적 생애와 그의 구원의 능력 그리고 그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믿는다는 단순한 사실을 뛰어넘어 그리스도를 '개인마다'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다는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한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테크나 데우 게네스다이)이란 표현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영접한 자의 신분 규정이다. 즉 '어두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의 놀라운 변화가 바로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음을 본문은 명시한다. 또한 여기서 '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네스다이'(* )는 '기노마이'(*)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던 것이 생겨나서 영원히 계속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역사적 시점에서의 신분의 변화가초역사적 지평에까지 열려져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자녀'에 해당하는 원문은 출생과직결되는 용어인 '테크논'(* )-이와 유사한 의미로서 사용되는 '휘오스'(*)는 '상속자'라는 뜻을 내포한다(갈 4:5, 6)-인바, 이는 죄악 세상에서 구원받을 성도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한 본질적인 변화를통해 자녀가 되는 길은 오직 중생으로만 가능하다(3:3-9;벧전 1:3, 23). 한편 그리스도를 믿고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곧 '권세'를 부여 받음이다. 여기에서 '권세'란 헬라어로 '여수시아'(* )이다. '여수시아'는 성경에서 주로(1)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눅 12:5;골 1:13), (2)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부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 앞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과정이 묘사되었다면,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의 출생(중생)의 근원이 나타나있다. 먼저 본문에서 저자는 부정사 '우크', '우데'(*, )를 사용하여 중생에 이를수 없는 부정적인(negative) 세 가지 요인 ((1)혈통, (2) 육정, (3) 사람의 뜻)을 나열한다. 첫째로, 혈통(* , 하이마톤)은 '피'나 '혈연'을 의미하는 '하이마'(* )의 복수 소유격으로서, 육체적인혈연 관계를 의미한다. 혈연 관계가 구원과 무관하다는 사실은 세례요한과 예수께서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부했던 유대인들을 규탄할 때 잘 드러난 바이다(8:39-44;마3:7-9). 둘째로, 육정(* , 델레마토스 사르코스)이란 '육체적인 욕망'(fleshly desire, NEB)이란 뜻으로 1차적으로는 성욕을 비롯한 인간의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가리킨다(엡 2:3). 더 나아가 2차적으로는 성령의뜻에 거슬리는 모든 육체적 욕구나 세상적 정욕을 통칭한다(고후 11:18;갈 5:16). 저자 요한이 타락한 세상을 어두움으로 정의했듯이, 빛이 없는 어두움 속에 처한 인간의육체적 욕구와 이로 인한 가치 체계(사회적 명망, 권력, 부)로써는 구원이 불가능함을보여준다. 셋째로, 사람의 뜻(* , 델레마토스 안드로스)이란 절대자에게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의 이성적(理性的) 노력이나 수양, 율법 준수 등을 통칭한다. 이러한 태도는 앞의 두 가지 요인보다 더 고상할지 모르지만 이도역시 구원에로 인도하지는 못한다(롬 3:19, 20;고전 1:20, 21). 따라서 위에 열거한세 가지 조건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무관한 것이다(고전 1:22-25).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타락한 세상에서 비롯된 인본주의적 구원의 욕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세상에서 육체를 따라 의롭다 여김을 받을 자는 하나도 없다(롬 3:20). 결국 저자는이 세계의 절망(어두움)을 묘사하며, 인간 스스로의 구원의 길이 근본적으로 막혀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죄악된 인간이 인간을 인도한다는 것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부조리이며(마 15:14), 그 인도자는 도둑이며, 삯꾼 목자에 지나지 않는다(10:10-13).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 원문에서 이 문장은 강한 반전(反轉)을 의미하는 접속사 '알라'(* )가 먼저 나타난다. 이 접속사는 8절에서 세례 요한(증거자)과 그리스도(빛)에 대한 본질적인 차이를 묘사하는 데 쓰였으며, 본문에서는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 구원 수단과 신본주의적(神本主義的) 구원 간의 대립을 극명하게보여주고 있다. 본문은 어둠 속에 빛이 비추듯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초자연적, 초역사적 성격을 보여줌으로써, 구원받은 성도로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케 하고 겸손하게 주의 뜻을 따르는 성도의 자세를 견지(堅持)케한다. 이러한 영적 출생의 비결에 대해서는 3:1-15절 주석을 참조하라.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 본문은 9절에 서술한 성육신 사건을 다시 언급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육신'(* , 사르크스)은 육체적 존재를 의미한다(갈 4:13). 따라서'그리스도가 인간으로 오신 것처럼 보였으나 육체로 오시지 않았으며 그의 수난도 하나의 가상(假像)이었다'고 주장했던 영지주의의 가현설(Docetism)을 본문은 '육신'이라는 한 단어로 여지없이 붕괴시킨다. 한편 '사르크스'는 일반적으로 '몸'을 의미하는'소마'(* )와는 다른 뉘앙스로 쓰였다. 즉 '사르크스'는 주로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신을 의미한다. 바울도 이 용어를 하늘이나 영의 영역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쓰고 있다(롬 1:3,4). 즉 하나님의 지혜와 육체의 지혜, 하나님의 권능과 육체의무기는 서로 반대되며 서로 대적한다(고전 1:24-31;고후 10:4).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육체'는 결코 부합 될 수 없다(롬 9:8). 그러나 이 용어가 그리스도에 대해 쓰일경우에는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체'를 의미하지 않으며(고후 5:21), 단지 인간적인 한계성과 연약성을 지닌 존재임을 나타낸다(히 4:15). 이는 그리스도의 완벽한성육신을 나타낸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증으로서 본서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잘 보여준다. (1) 피곤(4:6) (2) 갈증(4:7) (3) 하나님께 의존(5:19) (4) 슬퍼 눈물을 흘리심(11:35) (5) 분노하심(11:38) (6) 갈등(12:27) (7) 수난과 죽으심(18, 19장) 등.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우리 가운데'(* , 엔 헤민)라는 표현은 10절의 '그가 세상에'라는 말과 내용상 일치한다. 즉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졌으며, 우리 인간들 속에서 발생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천막을치다'란 뜻의 동사 '스케노오'(* )의 부정과거 능동태인 '에스케노센'(*)을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역사성을 실증한다. 따라서 본절은 마1:18-2:23과 죽 2:1-20의 성육신 기사를 함축적으로 요약한 말씀이다. 한편 '에스케노센'이란 표현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러한 해석은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의현현(顯現) 장면과 본문의 전후 내용을 비교해 볼 때 상당한 설득력을 제공해 준다.(1) 성육신하신 예수께서 '임시적으로' 이 땅에 계셨음을 가리킴. (2) '하나님의 임재'를 상기시킴.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방랑할 때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곳으로 정해진 곳이 바로 '장막'이었으며, 특히 요한이 곧이어 '영광'에 관해서 언급한 사실도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 왜냐하면 영광과 장막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출 40:34이하).
(3) 모세에게 주어졌던 계시가 예수에 의해 확연히 밝혀졌음을 보여줌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 '보니'에 해당하는 헬랑어는 '놀라운 광경을 보다'라는뜻의 '데아오마이'(* )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놀라운 상태에서 실제로 목격했다'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이는 아마도 저자 요한이 예수님의 변모*Transfiguration, 마 17:2-8;막 9:2-8;눅 9:28-36)에 대한 회상을 기초로 하여 사용한 용어인 것 같다. 그때 예수는 거룩한 광채와 함께 나타나 보이셨으며, 하나님의 사랑스런 아들이심을 나타내셨다. 이는 시편 기자의 '주의 영광를 저희 자선에게 나타내소서'(시 90:16)라는 간구를 연상테 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와부활은 그 자체로서 어둠 속에서 빛이 환하게 비치듯이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사건으로서 우리 성도들의 영광을 위하여 예정된 것이었다(고전 2:7;벧전 5:4).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 - 저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근원이 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에 있음을 재천명한다. 즉 1절에서 그리스도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나타냈듯이 본문에서도 '...같이', '...만큼'이란 뜻을 지닌 부사 '호스'(* )를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이 영원하신 성부 하나님의 영광과 대당함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독생자'(공동번역, '외아들')라고 번역된 '모노게누스'(*)는 '모노스'(* , '유일한')와 '게노스'(* , '종류', '혈족')의 합성어로서 누가 복음과 히브리서에서 '외아들'(눅 7:12;9:38;히 11:17) 또는 '외동딸'(눅 8:42)을 지칭한다. 그러나 요한에게 있어서 이 용어는 오직 그리스도를 가리키고있으며(3:16, 18;요일 4:9), 누가복음과 히브리서에서 보다 더 심오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1) 하나님의 자녀(12절 주석 참조)중 하나가 아니며, 오히려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서 중보자적 사역을 담당하시는 유일하신 분(3:17;갈3:26)이며, (2)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지니신 대등하신 분(1절 주석 참조;3:18;5:18;10:30;17:5, 24)이며, (3) 이 세상에 하나님을 완벽하게 계시하신 유일하신 분(14:9;빌 2:6, 7)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일부 학자들은 1:1-3절의 내용을 무시하고,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요일5:18의 내용을 증거로 하여 '그리스도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나타내기위해서 사용한 것일 뿐이다(요일 5:18 주석 참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은혜와 진리'(* ,카리스 카이 알레데이아)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용어로 쓰였다(삼하2:6). 사도 요한은 앞 문장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광이 대등하고 등질적(等質的)임을 묘사한 후에 곧 이어서 하나님의 성품인 은혜와 진리가 바로 말씀이신그리스도의 성품과 일치함을 보여준다. 이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그의 지상사역을통해서 하나님의 본성을 드러내셨음을 시사한다(10:30). 특히 기독교적 측면에서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이 인류 구속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신 그 일방적인 행위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다. 한편 '가득차서 넘치는'이란 뜻의 헬라어 서술적 형용사 '플레레스'(* )는 은혜와 진리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속한 은혜와 진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차고 넘치게 흘러 나와 성도들에게 임하여 역사(役事)한다는 것이다.
=====1:15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 사도 요한은 '마르튀레오'(* , '증거하다')의 3인칭 단수 현재 직설법인 '마르튀레이'(* )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세례 요한의 사역을 극적이고도 생생하게 재현시킨다. 그리고 그의 증거 사역이선지자 이사야의 예언과 일치됨을 분명하게 보여준다(사 40:3).
내가 전에 말하기를 - 원어상으로 본절은 '내가 전부터 그에 대하여 증거해 왔다'라고 번역될 수 있다. 따라서 이 표현은 혹자들의 이해대로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한저자 요한의 삽입적인 해석(Westcott, Hort)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세례 요한의 부단한 증언이라고 봄이 문맥상 타당하다.
나보다 앞선 - 앞에서 언급한 '내 뒤에'라는 표현과 대조된다. 즉 (1) 예수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보다 6개월 뒤에 태어나셨으며(눅 1:36), (2) 세례 요한의 사역의 시작뒤에 공생애를 시작하셨다(막 1:14, 15). 그러나 예수가 세례 요한보다 '앞선' 보다근본적인 이유는 (1) 세례 요한이 인간에 지나지 않는 반면에 예수는 창조 전부터 하나님과 더불어 선재하셨던 분으로서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시다(빌 2:6). (2) 따라서신분이나 권능에 있어서 당연히 세례 요한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특히 세례 요한은예수의 우월성을 당연하게 시인하였으며(3:22-30), 예수를 가리켜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눅 3:16), '하나님의 어린양'(29, 36절),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할 분'(막 1:7) 등으로 호칭하였다. 이처럼 세례 요한과 예수는 결코 비교할 수 없었음에도불구하고 여기서 세례 요한과 예수가 상호 비교되어 묘사되어 있는 것은 (1) 예수의공생애 직전 세례 요한의 추종자들이 많았다는 점과 (2) 그에 따라 세례 요한이 메시야로 오인(誤認)되었다는 점, 그리고 (3) 초대 교회의 선교 당시에도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상당수 존재했다는 점 등에서 기인한다. 즉 사도 요한은 이러한 비교를 통하여(1) 예수께서 참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2) 요한 사역의 핵심이 바로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함에 있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1:16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 '충만한'의 헬라어 '플레로마토스'(* )는 '플레로마'(* )의 소유격 단수로 '차고 넘치는 완전한 분량'을의미하며 14절의 '충만하더라'는 표현과 연관된다. 그러나 14절의 '충만하더라'가 그리스도의 본성과 관련하여 사용된 반면, 본문에서는 바로 그리스도의 충만하신 은혜가차고 넘쳐서 성도에게 미치는 상태를 의미한다. 한편 헤르마스 목자서(Shepherd ofHermas)는 '충만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하나님은 만유인 동시에 하나이다. 그것은 만유의 충만힘이 하나이며, 하나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범신론적 경향은 당시의 영지주의의 영향에 의한 결과이다. 즉 그리스도교적 영지주의자들은 '플레로마'를 최고의 영적 세계로 간주하고, 예수가 '플레로마'에서 이 세상으로 왔다고주장했다. 그러나 이에 반해서 사도 요한은 '충만함'이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것이며,성도들에게 은사로서 주어지는 것임을 명시함으로써 당시의 영지주의의 거짓된 학설을물리쳤다. 사도 바울의 말을 빌자면, 이 충만함은 '아버지께서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신' 것이며(골 1:9)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이다(엡 3:8). 그리고 루터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아무리 물을 퍼내어도 고갈되지 않는 샘'에 비유했다.
은혜 위에 은혜러라 - '...위에'라고 번역된 헬라어 '안티'(* )는 원래'...와 대조하여'라는 뜻이나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대신에'(눅 11:11)라는 뜻으로사용되었다. 따라서 '은혜 위에 은혜'(one blessing after another, NIV)라는 말씀은문자적으로 '은혜 대신에 은혜'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한 번 받은 은혜가 그 능력을다 발하고 나면 또 다른 은혜를 받게 된다'는 의미로서 '은총을 받고 또 받았다'(공동번역)라는 뜻으로 번역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은혜는 곧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이는넘쳐 흐르는 충만함으로 인하여 성도에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은혜임을 요한은 밝히고있다. 따라서 이제 성도는 성자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존재인 자신을 자각케 된다. 당시 유행했던 인본주의적 이방 종교와 이방 철학들 그리고 형식주의적 유대교라시 유행했던 인본주의적 유대교라는 어두움을 뚫고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구원의 빛과은혜를 성도들에게 끼치신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라고 선포하였다.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 6절부터 16절까지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를비교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육신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충만한 은혜를 묘사한저자는 이제 구약의 율법 시대와 신약의 은혜 시대의 대조를 통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도래하는 새 시대의 특성을 간략하고도 명확하게 밝혀준다. 먼저 사도 요한은 율법 시대의 대표자인 모세를 통하여 율법의 특성을 간명하게 규정한다. 즉 율법은 피조물인 인간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롬 3:20), '몽학 선생'(갈 3:24)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 율법에 대조되는 은혜와 진리란 단순한 은사의 차원보다 더 높은 것이다. 은혜와 진리의 근원응다 하나님의 속성에서 발견될 수 있고 이는 예수 안에서 구체화되었다. 어떤 면에서 예수 자신이 곧 은혜와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특히 본 구절에 사용된 동사 '온'이라는 말에 의해 강력히 뒷받침된다. 은혜와 진리는 율법의 경우처럼 수동적으로 주어질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과 선교(Mission) 가운데 임했던 것이다. 또 '온'의 헬라어 '엥게네토'(* )는 '발생하다'라는 뜻을 지닌 '기노마이'(* )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들에게 임함으로써 기독교가 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이는 바로 형식과 위선에 치우친 유대교의 근거를 뿌리채 뽑아버리는 말씀임과 아울러 교회의 근거를 확고한 참신앙의 반석 위에 세우는 말씀인 것이다.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 문자적으로는 '결코 보이신 적이 없는 하나님'이란 의미이다. 비록 모세가 여호와와 대면했다는 명성을 얻기는 했으나(출 33:11;신34:10) 그 역시 하나님의 본체를 본것은 아니었다(출 33:17-34:9). 왜냐하면 유한하고죄악된 인생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출 33:20).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내신데 대한 유대인들의반응이 예수를 죽이려고 할 정도로 격력하였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10:20-33).
아버지 품속에 있는 - 이 표현은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나타낸다. 즉 1절의 '이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라는 말씀과 동일한 의미를 전달하는 이 표현은 영원전부터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존재하고 계셨던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암시하며 또한 그리스도의 신성까지도 함유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 품속에 있는'이라는표현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구절이다.
독생하신 하나님 - 14절의 '아버지의 독생자'와 상호 연관되는 이 칭호는 바로 은혜와 진리의 부여자(附與者)이신 예수 그리스도(17절)를 가리킨다('득생자'에 대해서는 14절 주석을 참조하라).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의 본성인은혜와 진리로 교회를 형성하신 분이라는 의미를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 속에서 드러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와 같은 신앙은 기독교가 당시의 이방 철학이나 종교 그리고 율법 주의 및 로마 제국주의에 대항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源泉)이었다. 특히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시 성도들 사이에 암호로 통용된 물고기 그림에서 당시의 신앙을 발견할 수 있다. 헬라어로 '물고기'는 '잎뒤스'(* )로서,'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주'(에에수스 크리스토스, 데우 휘오스, 소텔, '*, , )라는 말의 약자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굳건한 신앙 고백을 토대로 교회가 온갖 박해를 이기고 어두움 속에 빛을 비추었듯이,오늘날의 물신주의와 이데올로기(ideology)의 와중에서도 교회가 설 수 있는 기반이바로 '독생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라는 사실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1:19
사도 요한은 다른 복음서들(마태복음, 누가복음)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에대해서 알고 있던 당시의 성도들에게 다시 반복해서 성육신 기사를 쓰지 않는다. 따라서 저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직전부터 복음서의 본문을 기술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공생애 직전의 상황을 세례 요한과 결부시키고 있다(19-36절).이는 세례 요한이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증거자임을 입증(立證)하기 위한 것이다(6, 7,15절). 당시 세례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회개의 촉구 그리고 세례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더구나 군중들 중에 일부는 세례 요한을 메시야로까지 간주하기도 하였다(눅 3:15;행 13:25). 이러한 현상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한 종교 지도자들의 민감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따라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공회인산헤드린은 요한의 정체를 탐지할 사람들을 파견했던 것이다. 모세 율법에 대한 해석을 주해한 미쉬나(Mishna)에 의하면 거짓 선지자에 대한 규가명과 재판이 산헤드린 공의회의 주요 직무 중 하나로 규정되어 있었다.
요한의 증거 - '증거'란 바로 요한의 사명이며(7절), 그의 사역은 말씀이며 구원의빛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의 역할이었다.
=====1:20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 원어상으로 볼 때 저자는 본절에서 헬라어 접속사 '카이'(* )를 무려 3회에 걸쳐 병렬적으로 기록하므로 진솔하고도 꾸준한증거자인 세례 요한의 태도를 암시하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표현은 세례 요한이 자신의 하고자 하는 답변의 심각성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하였던 의도를 보여준다. 특히'드러내어 말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고백하다', '확언하다'라는 뜻을 지닌 '호몰로게오'(* )의 부정 과거형으로서 요한의 증언이 믿음의 호가신으로말미암은 고백적 증언임을 보여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 산헤드린으로부터 파견된 자들의 입에서는 메시야에 관한 말이 전혀 나오지 않았으나, 세례 요한은 이미 그들의 의도를 정확히 읽고 있었다.그는 자신을 메시아로 오해할 수 있는 일체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단호한 어투로 말한다. 특히 세례 요한은 '나'라고 하는 1인칭 대명사를 사용하는 강조법으로써 예수의탁월성에 자기 자신을 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용법은 본장에서만도 여러 차례 반복된다(23, 26, 29, 30, 31, 33, 34절). 여기에서 세례 요한이 강력하게 부인했던 '그리스도'란 히브리어인 '메시야'와 같은 의미를 지닌 헬라어 표현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며 예서 언약을 완성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창조하실 분을 지칭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개념은 이스라엘의 선민 사상과 융합되어,식민지적 상황을 종식시켜 줄 정치적 메시야 사상으로 변질되었다. 즉 유대인들은 메시야 사상으로 변질되었다. 즉 유대인들은 메시야와 세속적인 왕을 동일시하는 오류에빠졌다. 따라서 세례 요한이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강력히 천명했던 것은 (1) 옛언약의 완성이자 새 언약의 창조자이신 그리스도의 증언자로서의 사명을 자각하였음과(2) 로마 제국으로 하여금 자신을 제국에 반대하는 정치적 모반자(謀叛者)로 오인하지않도록 하기 위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1:21
네가 엘리야나 - 이것은 당시 세례요한이 (1)약대 털옷을 입고,(2)금욕적인 식사를하고,(3)이스라엘을 향해서 회개를 선포하고, (4)헤롯의 비리를 꾸짖은 행동들이 구약의 엘리야를 연상케 한 점도 아울러 작용했던 질문이었다.
나는 아니라 -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엘리야라고 한 말씀(마 11:14;17:12)과 비교해 보면 본 증언은 오류로 보일 것이다. 또한 세례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아니한'(20절) 증언이 거짓으로 판명날 것이다. 또한 요한의 이러한 대답은 23절과도어긋나게 보인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의 질문의 배경을 자세히 분석하면, 요한의 대답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랍비들이 주로 이용한 자구적(字句的)성경 해석을 따랐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려면 먼저 하늘로 승천 했던 엘리야가 다시 와서 메시야의 도래를 준비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세례 요한이 바로 '구약의 엘리야인가?'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요한의 대답을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우크 에이미'(* )이다. 이는 20절의 '나는 아니다'(* , 우크 에이미 에고)와는 그 표현 강도가 다르다. 즉 여기에서 세례 요한의 대답은 20절의 강조형(* , 에고)를 취하지 않는다. 이는 세례 요한이 '결코 그리스도가 아니며, 당시 유대인들이 인식한 엘리야도 아님'을 잘 드러내는 표현이다. 한편 세례 요한을 엘리야로 비유한 예수의 말씀(마 11:14;17:12)도정당한 것이다. 즉 세례 요한은 실제 엘리야가 아니라 단지 선지자 말라기가 예언한엘리야적 사역 즉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사역을 수행하는 자'였다(말 4:5,6).
네가 그 선지자냐 - 요한의 두번째 대답과 사두개인들의 질문 사이에는 원문상으로접속사가 없는데 이는 사두개인들의 집요한 질문 공세로 발생하는 긴장 관계를 현장감있게 드러내는 문장 구성 양식이다. 본문에서 '그 선지자'(*' ,호 프로페테스)란 모세가 예언한 '나와 같은 한 선지자'(신 18:15)를 가리킨다. 따라서 공동번역은 '우리가 기다리던 그 예언자'라고 번역했다. 이는 '그 선지자'란 개념이 곧 메시야와 직결됨을 시사한다(7:40). 성령 강림(降臨)후에 사도들은 '그 선지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했으며 이를 선포했다(행3:22;7:37).
아니라 - 이것의 헬라어 '우'(* )는 본절의 맨 뒤에 위치해 있다. 이는 세례 요한이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아주 단정적으로 부정했음을 보여준다.
=====1:22
또 말하되 누구냐 - 산헤드린의 조사단이 짐작했던 요한의 정체는 그들의 예상을빗나가 버렸다. 그들의 질문에 대한 세례 요한의 세차례의 부정은 그들의 조사 활동을더욱 난감하게 하였을 것이다. '또'라고 번역된 헬라어 '운'(* )이 논쟁적 어감을 띠고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들의 심정은 더욱 조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 사두개인들의 난감함과 조급함의 원인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즉 그들은 진리를 찾는 자들이 아니라 기존 권위의 하수인(下手人)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사두개인들은 그들의 추측대로 요한에게 질문하지 않고 세례 요한의 자기 진술을 요청하게 된다. 따라서 이어지는 질문인 '너는 네게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는 말은 어떠한 암시도 전혀 개입되지 않은 질문 형태로서'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소?'(공동번역)라고 번역하는 것이 어감상 잘 부합된다..
=====1:23
가로되 - 본절에서는 '증언하다'라는 뜻을 지닌 헬라어 '페미'(* )의 부정과거 3인칭 단수형인 '에페'(* )가 문자의 맨 앞에 놓임으로써 요한의 증언을 극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 선지자 말라기가 예언했던 엘리야의 도래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불식(拂拭)시키고, 자신의 사역의 본질과 성격을 드러내기 위하여 세례요한은 이사야 40:3을 인용한다. 그리고 이러한 세례 요한의 생생한 자기 증언은 공관복음에서도 이사야 예언의 성취라는 관점에서 반영되어 있다(마 3:3;막 1:2-4;눅3:3-6). 주의 길을...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 앞길을 예비하는 선구자임을 밝히는 본 구절은 이사야의 예언을 단축한 형태로서, 이러한 어투는 대화체에 적합하며 이것이 직접 세례 요한의 입을 통해 나온 말임을 뒷받침한다. 이에 반해서 공관복음은 이사야의 예언을 직접 인용함으로써 세례 요한의 자기 증언을 예언 성취의 형식으로 제시하고 있다(마 3:3;막 1:3;눅 3:4). 결국 본문은 저자가 당시의 상황을 목격하고 그대고 재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본문에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는 표현은 '이사야의 말'이라는 표현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즉 이사야가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했듯이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였다. 그리고 이사야의 말은 그리스도를 증언한다는 점에서도 세례 요한의 소리와 서로 일치한다. 특히 '외치는 소리'의 헬라어 '포네 보온토스'(*)의 두 단어에 서로 관사가 없는 것은 히브리어 '콜 코레'(* , 사 40:3)를 헬라어 문장 양식으로 번역한 것으로서, 일종의 감탄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공적인 일을 선포하는 전령자(傳令者)라는 의미를 지닌 '보온토스'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이사야나 세례 요한의 '소리'(the voice, NIV)가 바로 이들을 파견하신 하나님의구원의 메시지임을 잘 드러낸다. 또한 이사야와 세례 요한의 이와 같은 대비를 잇는용어 '카도스'(* , '...같이')가 사용됨으로써 사도 요한의 문학적 재능이한결 돋보인다. 이는 본서가 주로 말씀과 강화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리스도가 '말씀'으로 나타난 점에서 볼 때, 언어 구사에 있어서 요한의 능수 능란함을 엿보게 한다.
=====1:24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 산헤드린 공의회의 양대 세력인 바리새파와사두개파 중에서 산헤드린의 조사단이 전자에 의해 보내진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그렇다면 당시에 산헤드린(Sanhedrin)의 의장이 사두개파의 영수인 대제사장이었다는사실을 감안한다면, (1)19절에서 언급한 유대인들이 산헤드린 공의회가 아니거나, (2)본절에서 '저희'가 '제사장들과 레위인'으로 (19절) 구성된 산헤드린의 진상 조사단이아닌 것으로 보여질는지도 모른다. 만일 후자가 맞다면 '저희'란 바리새인들이 파견한다른 진상 조사단을 지칭한다. 그러나 19-28절까지의 본문의 흐름상 여기에서 '저희'란 바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로 구성된 산헤드린의 진상 조사단이라고 봄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왜 본절에서는 사두개파의 영수(領袖)인 대제사장이 의장으로 있는 산헤드린 공의회와 바리새인을 일치시키고 있는가? 이는 당시 바리새인들이 대다수의 백성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당시의 상황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즉 산헤드린공의회의 의장이 대제사장이었을지라도, 산헤드린의 주도권은 바리새인들에게 있었다.따라서 당시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의 본의와는 다를지라도 바리새인들이 '만일 우리의의견을 따르지 아니하면 일반 민중이 가만히 있지 아니할 것'이라는 협박에 속수 무책이었다(Josephus). 이러한 정황에서 볼때, 본절에서 '저희'는 바로 산헤드린 공의회가파견한 '사두개인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은 28절까지 이어지는 세례 요한의 증언을 일관성있게 이어주고 있다.
=====1:25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자들이 이러한 질문을 던졌던 이유에 대해서는 그들이 세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던가에 따라 대략 다음 두 가지 견해로 요약될 수 있겠다. (1)이방인들이 개종과 관련시켜 이해했다고 보는 견해. 유대 사회에서 세례는,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경우 이방 세계에서 오염되었던 죄악을떨쳐버린다는 의미로 사용했던 공인된 의식이었다고 한다(Jeremias).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자들은, 세례 요한이 개종자들에게 베풀어야 마땅할 세례를 유대인들에게 실시한사실에 대해 질타(叱咤)하고 있다는 것이다. (2) 메시야의 사역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고 보는 견해. 겔 36:25;37:23;슥 13:1 등에서 물로 씻음 곧 세례 의식이메시야 대망과 관련되어 언급되어진다. 이와 같은 범민족적 차원의 정결과 성결은 오직 메시야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는 과업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본문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는 것이다.
=====1:26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 세례에 관한 물음에 대해 요한은 본 구절로써 대답하고 있다. '물로' 세례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마 3:11;막 1:8;눅 3:16).다시 말해서, 세례 요한의 물세례는 예수의 성령 세례를 전제로 할 때 비로소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물론 요한의 세례가 백성들을 그리스도께 이끌기 위해 그들의 심령을 깨끗하게 준비시키는 '회개의 세례'였기는 하나(눅 3:3) 본질적으로는 우리를 새생명으로 거듭나게 하는 성령 세례를 상징하는 의식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요(6-8절)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23절)인 세례 요한의 사역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즉 (1) 요한의 '하나님 나라 도래와 회개의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와 회개의 섶로'를 예비한 것이며, (2) 요한의 물세례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성령 세례를 예비(豫備)한 것이다. 또한 세례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까지도 그리스도에게 보내는 자였다. 이러한 요한의 사역은 자신보다도 그리스도를 족히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더 높이는 겸손에서 극치를 이룬다(27절).
너희가 알지 못하는 - 산헤드린 조사단이 요한을 메시야로 착각한 것은 그들의 영적 무지를 스스로 폭로한 것이다. 본 구절은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10절)라는말씀을 연상시키며 이 말은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이 실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 즉 세상에 속한 자들이요 마귀의 자식들이라는 사실까지도 내포하고 있다(8:44).따라서 세례 요한은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규탄했던 것이다(마 3:7;눅 3:7).
=====1:27
나는 그이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 '신들메'란 당시 유대인들이 도보여행시 착용하였던 신발(가죽 샌들)의 끈을 가리킨다. 유대 풍습에 의하면 주인은 초대한 손님이 방문하면 자기 집에서 가장 천한 종을시켜 손님의 신발끈을 풀고 발을 씻기게 하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세례 요한의 고백은 자신을 그리스도에비할 때 가장 비천한 종의 자격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다. 특히 이표현은 사복음서에서 공히 요한의 자기 진술형식으로 표현되고 있다(마 3:11;막 1:7;눅 3:16).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는 진상 조사단의 물음에 대해 세례 요한이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증거하는 형식으로 답한 것은, 자신의 사역을 메시야의 사역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곧 예수를 증거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요한 자신의 위치를 밝히 드러낼 수 있었다. 비록 메시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천한 존재였지만, 메시야의 앞길을 예비하는 선구자라는 직분은 그누구에게도 비길 수 없는 영광스럽고 기쁜 것임을 요한은 자부하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31절에서 설명되듯이, 세례요한 자신도 처음에는 예수가 진정 메시야라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아마 세례 요한은 평소에 예수에 관해 알고 있었고 나름대로의 확신을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진실로 예수를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로 분명히 인식하게 된것은 예수께 세례를 베풀 당시 성부와 성령의 충만한 계시를 받게 됨으로부터였다(눅3:21, 22).
=====1:28
이 일은...된 일이니라 - 저자 요한은 산헤드린 조사단이 세례 요한을 조사한 사실을 목격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이 '세례 요한의 자기 증언'의 장소를언급한 것은 단순한 부가적 설명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저자 요한은 당시 상황이 너무도 인상적이며 중요한 것이라 여겼으므로 그 생생한 기억을 여기 옮기고 있는 것이다. 본문에서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란 예루살렘 남동쪽으로 약 3km 지점에 있는 마을(11:18)이 아니라, 요단강 동쪽에 위치한 장소로서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푼 장소였다. 본서에서 '베다니'라는 두 개의 지명을 구분하여 사용된 것은 본서가 영지주의자인 어느 헬라인의 저작이 아니라 당시 유대의 상황과 지리에 익숙했던 사도 요한의 저작임을 입증하는 일례이다(본서의 서론 '저자'부분 참조).
=====1:29
나아오심을 보고 - 생동감을 느끼게 하는 현재 중간태 분사 '에르코메논'(* , '나아오다')을 사용함으로써, 본문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전달되는 효과를 연출한다.
보라 - 헬라어 '이데'(* )는 찬탄이 섞인 감탄사로서, 세례 요한의 적대자들이 떠나고, 그가 증거한 예수께서 밝은 빛처럼 찬연하게 다가오셨을 때에 그가 드러낸찬탄과 감격을 극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 본문은 '하나님의 어린 양, 곧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분'이라고 번역될 수 있다. 19-27절이 예수께 대한 요한의 간접증언의 성격을 띠는 반면에, 여기에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직접 증언한다. 세례요한의 사역에 대한 성격 규정(6-8절, 15절), 사두개인들과의 논쟁을 통한 그리스도에대한 간접 증언을 거쳐서 드디어 그리스도의 오심을 보고 감격과 놀라움에 떨리는 직접 증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원어상 본문에는 문장을 종결하거나 서술하는 동사가 없다. 그리고 '보라'는 감탄사에 이어 '하나님의 어린양'(the lamb of God, NIV) '세상 죄를 지고가는 분'이 동격으로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본문은 죄된 세상과 하나님 사이이 대립 관계를 보여주며, 이러한 관계를 화목케 할 존재를 부각시키고 어두움속에 빛이 비추어 세상을 밝게 하듯이(5절) 죄악에 빠져 헤매이는 이 세상을 은혜와진리의 세계로 변화시킬 그리스도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준다(17, 18절). 한편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역의 성격을 뚜렷이 반영한다. '어린양'에 해당하는 헬라어 '암노스'(* )는 신약성경에서 4회 사용되었는데,두 번은 본서의 본장에서(본절, 36절) 한 번은 행 8:32에서 그리고 또 한 번은 벧전1:19에서이다. 이 중 벧전 1:19는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야에 관한 예언의 일부인 사 53:7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신약성경의 몇몇 구절에서는 사 53장의 말씀을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적용시키고 있다(12:38;마 8:17;눅 22:37;행 8:32-35;벧전2:22-24). 또한 죄를 대속하는 '속죄양'에 관해서는 구약의 여러 부분에서도 나타난다(창 22:2-8;레 14:10-25;민 6:12).
=====1:30
내가 전에 말하기를...있는데 - 본문은 15절의 말씀을 다시 반복함으로써, 세례 요한에게 나아온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증거해야 할 사명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재차 환기시킨다. 특히 본문에서 '내뒤에 오는 사람'에서 '사람'의 헬라어 '아네르'(* )에 주의할 필요가 있는데 '아네르'는 일반적인 의미인 '인간'을가리키는 '안드로포스'(* )와는 달리 '남성'을 가리킨다. 특히 이 용어는결혼 관계에 있어 남성이 여성의 머리가 됨을 시사하는 용어이다(엡 5:23). 따라서 이용어는 예수그리스도께서 그를 따르는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머리가됨을 암시한다.
계심이라 - 이것의 헬라어 동사는 '에이미'(* )의 3인칭 단수 현재형인 '에스티'(* )로서 세례 요한에게 증언을 받는 현장에서의 그리스도를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또한 동사 '에스티'는 '계시니라'(1절)로 번역된 '에이미'의 3인칭 부정과거형인 '엔'(* )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즉 '엔'이 영원전부터 선재하고 계신 그리스도를 나타낸다면, '에스티'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성육신하시고 인류구속을 위하여 공생애를 시작한다는 현장감(現場感)을 느끼게 한다.
=====1: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 예수와 세례 요한은 친족 관계였다(눅 1:36). 따라서세례 요한이 예수를 모를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세례 요한의 진술은 바로 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이는 본문의 원문인 '카고우크 에데인 아우톤'(* )을 분석해보면 알수 있다. 먼저 '카고'란 일반 사람들이나 무지한 종교 지도자들처럼 '나 역시도'라는 뜻이다. 그리고 '알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데인'은 경험에 입각한 앎을 뜻하는 '기노스코'(* )와는 달리 '영적인 앎'(막1:24;고전2:2)을 주로 의미한다.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 본문은 세례 요한의 사역을 함축적으로 명시하고 있다.즉 세례 요한의 사역의 골자(骨子)는 메시야의 도래를 예비하여 죄사함을 받게 하는세례의 시행에 있었다(겔 36:25;슥 13:1). 당시의 세례는 기종자나 참회자를 물 속에완전히 잠갔다가 일으키는, 현대적 표현으로 하면 '침례'였다(3:23;행 8:36-38). 그러나 이와 같은 '침례형 세례'는 물이 부족한 지역이나 지역별 관습상의 차이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 (물뿌리기, 관수식, 침례)로 병행되어 왔다. 특히 세례에 관해 언급한최초의 문서인 [디다케]에보면, 물의 양이 충분하지 못할 경우 세사람이 함께 침례 의식을 받는 일과 물을 머리에 붓는 일도 허용되었다(the Didache 제7장). 이것은 기독교의 세례가 형식의 고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 본질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마 28:19;롬 6:4;골 2:11, 12).
=====1:32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 '하늘'(* , 우라노스)은 일반적으로 지상과 대칭되는 창공과 우주를 의미한다. 그리이스인들은 하늘을 신들의 거처인 올림푸스로 생각했다. 그러나 성경의 관점에서 볼때 '하늘'이란 (1)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창공(창 1:6-8;행 4:24) 혹은 (2)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전 5:2;마 5:16;막 11:25)을 의미한다. 하지만 위의 두 개념은 엄밀하게 말해서 서로 판이하다. 즉피조된 이 세상과 영원한 하나님의 거처인 하늘 나라는 동일하지 않다. 이런 맥락에서본문의 '하늘'은 후자를 가리킨다. 이는 그리스도가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듯 성령도 함께 계셨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여기서 성령의 강림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보증(保證)하며,그리스도의 사역을 돕기 위한 것이다. 특히 성령이 '불이 혀'(행2:3)로 상징된 것과는 달리 예수의 수세(受洗)시에 비둘기로 상징되어 강림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1) 죄에 대해서 순결하신 그리스도의 본성(마 10:16;히 4:15), (2) 온유하신 그리스도의 성품(마 11:29), (3) 하나님의 사랑과 총애를 받으시는그리스도의 사역(아 1:15;마 3:17;막 1:11;눅 3:22) 등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 임한 성령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세례 요한이 눈으로 볼 수 있게끔임하였음이 분명하다(33, 34절).
=====1:33
나에게 말씀하시되 - 앞 구절과 연관되어 세례 요한의 예언자적인 특성을 나타낸다.즉 이 표현 방식은 계시를 전달할 때 선지자들이 주로 사용한 양식이었다(사 1:2;25:8;렘 2:2;6:16;겔 3:24). 이는 세례 요한이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증언한 것처럼 자신이 구약의 선지자들과 같이 그리스도의 도래(到來)를 예언하고 준비하는 자라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성령이 내려서...
머무는 것을 보거든 - 32절의 반복적 증언으로서, 32절이 요한의목격에 근거를 두고 있다면 본문은 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에 근거한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 - 성령 세례란 성도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새 생명으로 함께 거듭나는 중생의 경험을 가리킨다. 이 근본적인 변화의 체험을 통해어두움의 자녀가 빛의 자녀로(12절;고후 5:17), 그리스도의 지체로 된다(고전 12:13,14, 27). 한편 여기서 물과 성령은 서로 대조적인 관계에서 언급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 설교한 모든 것이나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눅 3:3)는궁극적으로 모두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성령의 역사는 오순절 성령 강림 때까지(행 2:8) 제한성을 가졌다는 것 뿐이다. 결국 요한의 세례는 성령세례를 예표하고 준비시키는 의의를 지닌다는 점에서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다.
=====1:34
내가 보고...증거하였노라 - 세례 요한의 이러한 증언은 막연한 추측에 의한 것이아니라 하늘로부터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을 생생하게 반복한 것이다(막 1:11). 예수가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사복음서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주장이며(마 26:63, 64;막3:11;눅 4:41), 특히 본서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말씀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로부터시작하여(1-4절)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 관해 보다 심도있게 묘사하고 있다(3:18;5:26;17:5;19:7;20:31).
=====1:35
요한의 증거 바로 뒤에 이어지는 본절 이하에서는 예수와 첫 제자들 간의 대면이소개된다. 예수의 첫 제자들은 주로 세례 요한의 증거를 토대로 예수를 따랐던 자들이다. 저자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이 예수를 증거했던 사건과 예수께서 공생애를 처음시작하는 사건 전체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계속되는 일련의 사건으로 다루고 있다. 그첫 부분에서는 세례 요한의 예비 진술에 관해 다루고(19-34절) 둘째 부분에서는 예수와 제자들과의 초기 만남에 관해 다루었으며(35-51절) 셋째 부분에서는 예수의 능력을보여주고 동시에 제자들의 믿음을 확고하게 해준 이적 사건을 다루고 있다(2:1-11).
자기 제자 중 두 사람 - 여기서 한 사람은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였다(40절). 그러면 익명의 한 제자는 누구인가? 19-34절의 생생한 필치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당시 세례 요한의 제자로서 세례 요한과 사두개인들과의 논쟁과 세례 요한의 그리스도에 대한직접 증언을 목격한 자였음이 분명하다. 또한 본서가 사도 요한의 저작임에도 불구하고, 사도 요한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기입하기에 인색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그 익명의 제자는 바로 사도 요한 자신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세례 요한의 주요 메시지가하나님의 어린양을 증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의 전(全) 관심은 예수께집중되었을 것이다.
=====1:36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 바로 하루 전의 증언을 반복함으로써(29절) 세례 요한은 함께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확인시킨다. 제자들 역시 어제 일어났던 제반 상황과 요한의 증언을 상기했을 것이다. 요한이 그의 두 제자에게 예수를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선포한것은 그들을 예수에게로 보내고자 함이었다. 이는 그리스도 앞에서 겸손해진 세례 요한의 신앙자세를 잘 나타낸다(3:30). '하나님의 어린양'에 대해서는 29절 주석을 보라.
=====1: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 '듣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쿠산'(* )은 신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다는 뜻이다(막 4:24;요일 1:1). 그리스도의 말씀(복음)을 듣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임이며, 구원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이러한 '들음'은 수동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까지 내포하고 있다(롬1:5;10:17;살전 2:13). 따라서 '에쿠산'은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요한의 증언을 듣고 곧 그 말에 순종하여 예수를 따랐다는뜻이다.
예수를 좇거늘 - 말씀을 들음은 곧 순종을 동반했다. '좇거늘'의 헬라어 '에콜루데산'(* )은 원래 지적, 종교적, 도덕적인 입장을 받아들이고 추종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이 용어는 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1:43;마 8:19;19:27, 28;막 6:1;8:34 등). 그리스도를 '좇음'은 바로 그리스도를 향한 전적인 헌신을 동반한다. 따라서 제자가 된다는 것은 구원(8:12;막 10:17) 뿐만 아니라 고난(12:24;막 8:34)에 까지도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본문에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잠정적인 탐색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예수와운명을 같이하기 위해 결단의 주사위를 던진 것이다. 특히 우리는 이 장면에서 진리의실체이신 예수께로 자신의 제자들을 흔쾌히 인도하는 세례 요한의 거인적(巨人的) 면모를 엿볼 수 있다.
=====1:38
무엇을 구하느냐 - 여기에서 '구하느냐'의 헬라어 '제테이테'(* )는'찾아다니다', '구하다'라는 뜻이며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 구해야 할 것을 의미하는 동사로서(행 17:27;고전 1:22),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구원에 연관되어 사용되었다(마 18:12;눅19:10). 따라서 예수의 질문은 '너희가 궁극적으로 찾아 구하는 것이무엇이냐?'라는 뜻이다. 이는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를 따르는 동기를 확고히 상기시키는 말씀이다. 본서에서 예수의 말씀으로서는 최초로 나오는 이 문장은 죄악된 세상이 참으로 구해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궁극적인 가치와 숨겨진 보화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요일 2:16).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의 소중함을 깨닫는 자들은 모든 것을팔아서라도 그 보화를 살 것이다(마 13:44).
랍비여 - '랍비'(* )란 '나의 존경하는 분'이란 뜻을 지닌 아람어이다.초기 유대교에서 부터 이 용어는 (1)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나 상급자를 지칭하거나(2) 제자들이 선생을 칭할때 사용되었다. 그후 B.C. 2세기경부터 이 용어는 제자들이선생을 공손히 부를 때에만 주로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이 용어는 복음서에만 나온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는 서기관들을 비난하기 위해 이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데반해서(마 23:7), 마가복음에서는 베드로나 유다가 예수를 부르는 칭호로 사용되었다(막 9:5;11:21;14:45). 본문에서 이 칭호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단호한 결단과 아울러 그들의 영적 제한성(制限性)을 함께 시사한다. (1) 먼저 이 칭호는 그들이 예수를스승으로 모시고 어디든지 따르겠노라고 하는 의지를 보여준다(37절 주석 참조). (2)그러나 그들은 아직 예수의 신분이나 행하고자 하시는 일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이다. 바로 앞에서 이 두 사람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예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하나님의 어린양'(29절)이시며 또한 '하나님의 아들'(34절) 이시라는 말을 들었지만,진정 그들의 마음속에 신앙 고백적 차원의 깨달음이 없었기 때문에 스승을 일컫는 정중한 어투인 '랍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 계시오니이까 - 헬라어 '푸 메네이스'(* )란 문구는 '랍비'라는 호칭과함께 사용되었던 유대인의 관용적 표현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 교사들에게 대화를 요청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두 제자의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하며 또한 겸손하게 말씀을 듣고자 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번역하면 - '번역하다', '해석하다'라는 뜻의 동사 '레프메누오'(*)의 현재 수동태 분사가 사용되었다. 특히 이 용어는 그리이스의 신들 중에서 변론(辯論)과 전령(傳令)의 신인 '헤르메스'(* )에서 파생된 용어이다. 또는 신약성경은 같은 의미인 '메데르메뉴오'(* )라는 표현도 사용하며, 개역 성경에서는 이 두용어를 모두 '번역하면' 또는 '번역한즉'이라고 옮겼다. 이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마태복음에 1회(마 1:23), 마가복음에 3회(막 5:41;15:22, 34), 요한복음에 4회(본절, 41, 42절;9:7), 사도행전에 3회(행 4:36;9:36;13:8), 히브리서에 1회(히 7:2)쓰였다. 이러한 표현이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이유는 예수 당시 이스라엘에서 사용된 히브리적 용어나 아람어를 헬라어를 사용하는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함이었다. 특히 저자 사도 요한은 당시의 상황을 현장감있게 재현하기 위하여 아람어를사용했으며, 이 용어들이 헬라인들에게 이해될 수 있도록 번역을 첨부한 것이다.
=====1:39
와 보라 - 이 말은 워어상 '오다'(* , 에르코마이)의 현재 명령형과'보다'(* , 호라오)의 미래 직설법, 그리고 접속사 '카이'(* )로 구성되어 있는 짤막한 문장이다. 여기서 '오라'는 말은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오라는 초청의 말씀이며, '보라'는 말은 제자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을 확정하는 말씀이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는 자들을 향한 초대(超待)와 구원의보장(寶藏)이다. '와 보라'는 표현은 랍비들이 사용했던 권위있는 초청 표현형식으로서,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는 표현과 서로 상응한다. 즉 사도 요한은 본문에서 당시의 표현 어법을 재현하며,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과 그들을 초청하시는예수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 '와 보라'는 표현이 명령형과 미래중간태 직설법으로 표현된 데 반해 '가서...보고'는 두 동사 모두 부정 과거형을 사용함으로써, 제자들이 예수를 따른 것이 실제의 사실임을 명시한다. 또한 본문은 '와 보라'는 예수의말씀에 대한 순종을 표현하는 구절이다. 여기서 '계신 데'란 예수께서 가족과 함께 거처하시던 갈릴리 나사렛이 아니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베다니 근처의 어느 장소였을 것이다. 이처럼 구체적 장소를 명시하지 않고 단순히 '계신 곳'을 뜻하는 헬라어관용구로써 예수의 거처를 처리해버린 것은 그들이 추구해야 할 것이 어느거처나 장소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해서, 그리스도 자신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는 사실을 나타내려는 저자 요한의 의도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때가 제 십 시쯤 되었더라 - 이 내용은 부가적 기록인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 시각이 명시되어 있는 것은 그 만남이 역사적(歷史的) 사실임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심시'란 유대 시간법을 따라 오후 네 시라는 견해도 있으나, (1) 본서의 저자가 바로 현장을 목격한 사도 요한이라는 점과 (2) 본서가 에베소에서 헬라인들을 위하여 기록된점, (3) '번역하면'(38절)이란 표현이 신약성경 중에서 본서에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는 점등을 고려한다면 로마식 표기법을 따르는 것이더 타당하다. 그렇다면 제자들이예수를 만난 시간은 오전 10시에 해당한다. 이 시간은 (1) 예수 그리스도와 본서의 저자인 사도 요한이 만난 시점으로 추정됨과 아울러 (2) 인류 역사상 최초로 기독교 '공동체'가 탄생한 기념비적인 날이었다(Westcott).
=====1:40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 - 안드레가 시몬 베드로의 형제라는 말로 지칭된 것은주로 예수의 공생애 초기, 즉 제자들이 전도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였다(1:44;6:8;마4:18;10:2;막 1:16, 29; 눅 6:14). 그러나 제자들이 전도 여행을 떠난 이후로 안드레는 베드로와 결부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지칭되었다(12:22; 막 13:3;행 1:13). 한편 안드레가 베드로의 형제로 묘사된 것은 당시 베드로가 예루살렘 12사도의 수반(首班)으로서 활동했다는 사실을 초대 교인들이 잘 알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동시에 이 표현은사도 요한이 공관 복음서 뿐만 아니라 교회 역사상 희미해져가는 안드레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는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즉 안드레가 사도 요한과 함께예수의 첫 제자였으며, 자발적인 최초의 복음 전도자였다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사도 요한은 소상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1:41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 이름 좀더 정확하게 옮기면 '우리가(찾던) 메시야를 발견했다'(We have found the Messiah;KJV, RSV, Living Bible)로 된다. 그들은 조상 대대로 그토록 기다리던 대망의 메시야를 만나고서 그 놀라운 소식을 시몬에게 곧장 전하였던 것이다. '우리'란 구체적으로 안드레와 사도 요한 두 사람을 가리키는 듯하며,이는 재판정에서 증인의 최소 구성 인원인 2인을 상기시킨다(신 19:15). 이 두람의 동시적 증언(testimony)은 이를 듣는 시몬에게도 놀랍고도 확실한 소식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리스도 - '기름을 붓다', '기름을 바르다'라는 뜻의 헬라어 '크리오'(* )에서 파생된 용어이다. 본래 '크리스토스'(* )란 '기름을 발리워진'이라는 뜻의 형용사이며, 이 용어가 명사형인 '토크리스톤'(* )으로 쓰일 경우에는 '의료용 연료'를 가리켰다. 그러나 '크리오'는 헬라적 관점에서 보다는동양(근동)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규명에 도움이 될 것이다. 헬라인들에게 있어서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종교적, 정치적 의미보다는 일상 생활의 편의나 용도를 위함이었다. 그러나 근동에서는 '기름'을 붓는 것'이 정치적인 혹은종교적인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는 의식이었다. 특히 구약에서는 왕, 제사장, 선지자에게 기름을 부음으로써 그들이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의 대표자이며 책임자임을 명백히하였다(출 29:7-9;삼상 10:1;16:13;왕상 19:15, 16). 그런데 왕정 후기로 내려 오면서'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곧 '메시야'임을 의미하게 되었다(사 61:1;단 9:24). 그후바벧론 유수(幽囚) 이후에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이민족들의 침략하에 시달렸으며, 그속에서 이스라엘을 구할 메시야의 도래에 대한 사상이 점점 더 고조되었다. 특히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주(屬州)로 전락되고, 에돔 족속인 헤롯 왕가가 이스라엘의 통치권을장악하여 무자비한 권력을 행사하자 메시야 사상은 급진적 혁명 운동을 위한 신앙으로변질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왜곡된 메시야 사상은 결국 성전 파괴와 이스라엘의 멸망을 초래한 요인이 되었다. 신약성경은 예수를 '그리스도'라 칭한다. 이는 사도 베드로의 설교에서 명백히 제시되었으며(행 10:38), 초대 교회의 신앙 고백이 되었다. 그리고 이 고백은 예수께서 구약의 완성자요 새 언약의 중보자(the Mediator)라는 신앙에기인한다. 즉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의 지도자란 '기름부음 받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를 지칭했듯이, 예수는 이 세 가지 직분을 한 몸에 지니시고 죄에 빠진인류와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새 예루살렘 성도들의 머리가 되신다. 한편 메시야에 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막 8:27-38 주제 강해 '메시야 사상의 전개'와 막 10:35-45 주제 강해 '메시야 예언의 양대 조류'를 참조하라.
=====1:42
보시고 가라사대 - 원문은 '여블려사스 아우토...에이펜'(* ... )이다. 여기에서 '엠블려사스'는 '주목하다', '눈여겨 보다'라는 뜻의 헬라어 '엠블레포'(* )의 부정 과거 분사로서 예수께서 베드로의 성격이나 사람됨을 통찰하셨음을 시사한다. 즉 예수와 베드로의 첫 만남은 비록 단시간이었음에도 직접적이고도 진지한 만남이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 여기에서 '시몬'(Simon)과 '게바'(Cephas)가 서로 대조를 이룬다. '시몬'이란 베드로의 다른 이름으로서 이는 예수께서 베드로의 자연적 성품을 꿰뚫고 계심을 나타낸다. 즉 '요한의 아들'이란 표현에서 예수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 상태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시몬'은 '시므온'(* , 쉬메온)이라고도 불리었다(행 15:14). 그렇다면 '시몬' 이란 구약의 12지파 중 시므온 지파의 조상인 야곱의 둘째 아들 시므온(LXX)과 동일한 명칭이다. 시므온이 과격하고 성미가 급한 인물이었듯이(창 34:25-31). 변화되기이전의 시몬 베드로도 충동적이고 성미가 급한 사람이었다(18:10, 25-27;마 26:31-35;막 8:32, 33;14:27-31;눅 22:31-33). 이러한 시몬의 성격을 간파하신 예수는 시몬이장차 '게바'로 불리울 것을 예언하신다. '게바'(* , 케파)란 '반석'이란 뜻의 아람어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의 베드로의 성격을 잘 반영한다. 즉 '베바'라는 이름은 베드로가 교회를 위한 사도적인 터전을 구축(構築)한 여러 요긴한 반석 중의 하나가 된 사실을 상기케한다. 예수 공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 중에 베드로는 예수를 세차례나 거듭 부인하는 나약함을 보였고(마 26:34), 갈 2:11에서도 우리는 베드로의 흔들리는 모습과 오히려 사도 바울의 견고한 반석같은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인간적 약점들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극복하고 초대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소임을 충실히 감당하였다(행 1:15-25). 후에 베드로에게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신앙 고백으로 인해 '베드로'라는 칭호가 공식적으로 부여되었다(마16:16-19). 이는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여 '이스라엘'이 되었던 것처럼(창32:24-30), 요한의 자녀'인 시몬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중생하여 '하나님의 아들'인게바(베드로)로 되었음을 시사한다.
번역하면 - 헬라어 '헤르메뉴에타이'(* )는 '헤르메뉴오'(*)의 현재 직설법 수동태로서 자세한 것은 38절 주석을 참조하라.
=====1:43
이튿날 - 이 날은 빌립과 나다나엘을 제자로 부르신 날이다. 특히 이 날은 사도 요한과 안드레를 세례 요한을 통해 제자로 삼으신 것과는 달리 예수께서 직접 제자를 부르는 장면이 인상적으로 나타나는 말이다.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 당시 갈릴리는 헬레니즘 문화의 침투(浸透)가 극심한지역이었고, 예루살렘과는 달리 사회적으로 하층민들이 많이 거주했던 곳이다. 따라서갈릴리는 유다와 예루살렘인들에게 있어서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었다(46절). 그러나예수는 공생애 초기와 후기의 짧은 유대 사역을 제외하고는 주요 사역 무대를 갈릴리로 채택하셨다(단, 본서는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예수의 유대 사역에 관한 언급이 많다). 이렇듯 사회적으로 천대받고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는 갈릴리에서 메시야의 사역이시작되었다는 사실은 구약 예언의 성취라 하겠으며(사 9:1, 2;마 4:14-16), 하나님의뜻을 떠난 유대교를 파기하고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경륜(經綸)을 엿보게 한다(17장;21장;마 28:16-20;막 16:7, 15-20;눅 24:44-53;행1:3-14).
빌립을 만나 - '만나'의 헬라어 '휴리스케이'(* )는 3인칭 단수 현재 능동태로서, 예수와 빌립의 만남에 현장감과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제자들 간의 만남이 생생한 필치로 재현되고 있는 것은 저자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적으로 만난 실제 체험을 회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로 이 만남을 통해서 새 언약 공동체인 교회가 시작되었으며, 지금도 하나님 나라가 계속 확장되고 있다.
나를 좇으라 - 빌립을 향한 그리스도의 제자로의 부르심이다. '좇으라'의 헬라어'아콜루데이'(* )는 현재 명령형으로서, '만나'(* ,휴리스케이)와 '이르시되'(* , 레게이)라는 두 현재형 동사와 부합되어 예수의 부르심이 그 당시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유효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또한 예수의 부르심은 '바로 지금'의 현재적 시점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라는 신앙적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특히 이 동사가 예수께서 제자들을 모으실 때 자주 사용되었다는사실은 주목할 만하다(8:22;9:21;19:21;막 1:18;2:14;6:1;10:21, 52;눅5:27;9:59;18:22;요 21:19).
=====1:44
빌립은...벱새다 사람이라 - 사도 요한이 빌립의 출신지를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동네라고 표현한 것은 누가가 기록한 '벱새다 줄리어스'(눅 9:10)와 구분하기 위함이었다. 본서는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예수의 갈릴리 사역을 강조하지 않는데 이는 예수의 갈릴리 사역이 이미 성도들에게 알려졌다는 전제하에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사도요한은 본서에서 공관복음서에서 생략한 예수의 예루살렘 사역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벱새다라는 지명만 들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갈릴리 사역을 연상했을 것이다. 벱새다는 '사냥이나 고기잡이 하는 집'이라는 뜻의 지명이다. 이는 벱새다가 갈릴리 호수 근처의 벱새다임을 암시한다. 또한 안드레와 베드로가 출신지가 가버나움임에 비추어 볼 때(눅 4:31-39), 벱새다는 가버나움 근처에 있었음이 분명하다.따라서 요한은 '갈릴리의 벱새다'(12:21)라고 명명한다. 벱새다에서의 예수의 사역은(1) 오병이어의 이적의 베푸심(마 14:13-21;눅 9:10-17), (2) 사천 명을 먹이심(막 8:1-9), (3) 소경을 치유하심(막 8:22-26) 등이다. 이로 보건대 벱새다를 비롯한 갈릴리사람들이 예수를 많이 따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일용할 양식을 보고 예수를 추종하였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영안(靈眼)을 뜬 것은 아니었다(6:30-70).신앙보다는 육체적 욕구를 추종한 벱새다를 위시한 갈릴리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저주는주목할 만하다(마11:20-24;눅 13:16).
=====1:45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 '나다나엘'(* )이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이며 그의 이름은 오직 본서에만 나온다. 그는 예수를 만나기 전에 율법에 충실했던 사람이었다(46-48).그의 집은 갈릴리 가나였으며(21:2) 예수를 만날 때에는 아마도 벱새다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혹자는 나다나엘을 바돌로매와 동일인으로 본다(Zahn, Meyer). 왜냐하면공관복음서에 기록된 '바돌로매'란 명칭이 바-톨마이(Bar-Tolmai, '톨마이의 아들')이므로 이는 고유 명칭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시몬 베드로가 '바요나'(Bar-Jona)라고불리운 것과 동일한다(마 16:17). 혹자는 나다나엘이 '마태'와 동일인이라고 추정한다(Hanhart). 이는 마태란 명칭의 뜻이 '여호와의 선물'이므로, 나다나엘은 마태의 다른명칭이라는 것이다. 또한 마태가 그의 복음서에서 구약 율법의 성취라는 측면을 강조했다는 점이 나다나엘의 율법 연구와 유사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의 두가지 학설은 명확한 증거가 될 수 없으므로 단지 추정에 지나지 않는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한 그이름 - 빌립은 메시야에 대한 소식을 율법을 근거로 하여 말한다. 이는 율법에 충실한 나다나엘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한 빌립의 열정을 잘드러낸다. 본문은 빌립이 예수야말로 율법과 예언서로 대표되는 구약의 모든 말씀을성취하시는 메시야이심을 확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빌립은 세례 요한의 제자였을 가능성이 크며 이는 빌립의 친구들인 안드레,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는 점 및 43절에서 빌립이 예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했으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확신있게 전도했다는 점에서 뒷받침된다.
우리가 만났으니 - 이것의 헬라어 '휴레카멘'(* )은 '휴리스코'(*)의 1인칭 복수 완료 직설법 능동태로서 메시야를 만난 빌립의 감격과 확신에 찬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우리'에 대해서는 41절 주석을 참조하라.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 - 빌립이 만난 메시야의 인간적인 신분이 제시된다. 원래예수의 출생지는 베들레헴이지만 갈릴리 나사렛에서 성장하셨기 때문에 자칭, 타칭으로 '나사렛 예수'라 불리었다(마 2:23). 그리고 '요셉의 아들'이란 표현은 법적 차원에서 볼 때 옳은 것이기는 하지만 예수의 신적(神的) 기원과 본성에 대해서는 아무런시사도 주지 않는다. 따라서 빌립은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은 알았으나, 성육신하신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럼으로 결국 나다나엘의 반론을 야기시킨다.
=====1:46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 원문상 '나사렛'(* )으로끝난 빌립의 말(45절)은 나다나엘을 격분시켰다. 그는 율법을 연구하는 자였으므로 메시야가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을 알고 있었다(미 5:2). 또한 당시 나사렛은 갈릴리의 한 마을이므로 율법주의자의 입장에서 볼때 멸시당해 마땅한 지역이었다(7:52).그러므로 본문은 당시 율법주의자들이 갈릴리 지방을 조롱할 때 쓰던 관용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와 보라 - 나다나엘의 빈정거리는 말투와 그 말투에 내포된 논리적 타당성은 빌립의 말문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심한 모멸감(侮蔑感)까지 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은 나다나엘을 강권한다. 여기에서 '와 보라'의 헬라어는 '에르쿠카이 이데'(* )이다. '에르쿠'는 '오다'라는 뜻을 지닌 '에르코마이'(* )의 2인칭 단수 현재 명령형이며, '이데'는 '호라오'(* )의부정 과거 명령형으로서 '보라', '볼지어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빌립이 말한 '와 보라'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와 보라'(39절 주석 참조)와는 다른 어감을 가진다. 즉 빌립의 강권(强權)은 당시 랍비가 제자들을 초청하는 형식이 아니라 제자가 다른 한 제자를 랍비에게 소개하는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말은 율법적인 논리보다는역사적으로 성육신하신 메시야라는 실체를 목도(目睹)하여 보라는 말이다.
=====1:47
보라 이는...간사한 것이 없도다 - 나다나엘을 처음 대면하기 직전에 그의 인격을통찰하는 그리스도의 신성이 잘 나타난 구절이다. 특히 본문은 '참'(* , 알레도스)과 '간사한'(* ,돌로스)이라는 두 반의적 수식어를 통해서 나다나엘의 성품을 잘 반영한다. 여기서 '알레도스'는 '겉과 속의 일체'혹은 '진지성'을 뜻하는 말이며 반면 '돌로스'는 고기를 낚기 위한 '미끼', 트로이 전쟁시의 목마(木馬)등과 같이 '속임수'나 '간계'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특히 이 표현은 야곱의 '간교한'성격을 상기시키는 말로서(창 27:35), 나다나엘이 야곱처럼 간교한 자가 아니라 메시야 대망을 충실히 기다리며 율법을 연구하는 자였음을 시사한다. 시편 기자는 '마음에간사가 없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다(시 32:2).
=====1:48
너를 부르기 전에...보았노라 - '...전에'라는 말이 시간적 의미의 답변이라면 '무화과나무 아래'라는 표현은 공간적 의미로서의 답변이다. 무화과나무는 유대 민족의번영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될 정도로(왕상4:25;미 4:4) 팔레스틴에서 번식하였다.특히 무화과나무는 무성한 커다란 잎으로 그늘을 드리웠으므로 당시의 랍비들은 이를율법을 교육하거나 묵상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무화과나무 아래'라는 표현은 나다나엘이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율법을 묵상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또한 여기서 '보았노라'는 말은 단순히 '알았다'라는 예지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주목하고 있었다는 의지적(意志的)인 측면까지도 내포하는 용어이다. 이는 예수께서 이미 나다나엘을 당신의 제자로 지목하였다는 뜻이다.
=====1:49
대답하되 - 이것의 헬라어 '아페크리데'(* )는 '자력으로 판단하여결정적으로 대답하다'라는 뜻으로서 나다나엘이 예수의 답변에 대해 항거할 수 없는힘에 이끌리어 그분이 바로 메시야라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고백했다는 뜻이다. 바클레이(Barclay) 말을 빌면 나다나엘은 자신의 마음을 샅샅이 꿰뚫어 보고 만족시켜 주신 예수의 권위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랍비여 - 38절 주석을 참조하라. 당신은 하나님의...
임금이로소이다 - 비록 나다나엘은 이 고백 속에 담긴 진의를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을 터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 고백이 결코 겉치레인 것은 아니었다. 이 두존칭은 메시야의 도래를 예언한 시 2:6, 7에 그 근거를 둔 것으로 짐작되며,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도 직결된다(마 16:16). 이 중 '이스라엘의 임금'이란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세 곳에 등장한다. 먼저 마 27:42네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조롱하는 야유로 언급되며, 막 15:32에서는 '그리스도'와 동의어로서 나온다. 그리고본서 12:13에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당시 군중들의 찬양 가운데 언급된다. 한편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왕으로 인식되었으며(삿 *:22, 23;시 84:3) 신약 중간사 시대부터는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代理)하실 왕적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두루 퍼져있었다.
=====1:50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 '이보다'라는 표현에서 '이'가 지적하는 바는 나다나엘이 체험한 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지식을 가리킨다. 나다나엘로 하여금 예수를 메시야로 믿게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중에서 가장 작은 한 면에 지나지 않았다.실제로 예수는 공생애 기간 동안 수많은 이적과 권능들을 나타내사 많은 사람들의 곤경을 타개해 주셨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입증하셨다.
=====1:51
진실로 진실로 - '더 큰 일'에 대한 예수의 말씀의 서두이다. 주로 공관복음서에서는 '진실로'라고만 쓰여진데 반하여(마 5:18;6;5;막 3:28;8:12;눅 4:24;18:17), 본서에서는 '진실로 진실로'라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3:3-5;5:24, 25;6:47). 이는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강조하려는 요한의 의도를 반영한다(6:47 주석 참조).
하늘이 열리고 - '열리고'의 헬라어는 현재 완료 능동태 분사로서 '한 순간이라도닫힘이 없이 항상 열려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와 같이 하늘이 열린다는 표현은 야곱이 벧엘에서 꾼 굼과 연관되며(창 28:10-22),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재확립되는 징조를 상징한다(사 64장). 이러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늘이 열리고 그동안 죄로 인해 막혔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하늘이 열리고'라는 말을,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곧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보며 또한그 나라를 소유하게되는 축복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보리라 - '하나님의 사자'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천사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영적 존재로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매개자로 활동한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란 '열려진 하늘'이 상징하듯, 예수 그리스도가 야곱이 보았던 '사닥다리'(창 28:12),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the Mediator)가 되신다는 것이다. 한편 '인자'에 관해서는 8:21-59주제 강해 '인자칭호에 관하여'를 참조하라.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 요한은 이 머리말에서,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나타난
영원한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神性)을 선언하고 있다. 그의 목적은 인류의 회복은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능력을 통해서 모든 만물이 창조되었고 그분만이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과 활력을 불어 넣으실 수 있으며, 인간 그 자체 속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능력과 은혜에 대한 독특한 증거를 주셨으며 또 아담이 타락하고 실패한 이후에도 그의 후손들에게 은혜와 친절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이다. 이 교리에 대한 지식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생명과 구원을 도저히 구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인데, 이와 같은 가르침이 확고히 서지 못한 상태에서 어떻게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안주(安住)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복음서 저자는 이 말씀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유일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으며, 나아가 자연이 아직 타락하기 전에 생명의 원천과 근원이 되셨던 분의 사랑을 통하여 생명이 이제 죽은 자들에게 다시 주어진다고 강조하고 있다. 요한이 하나님의 아들을 '말씀'(Sermo)이라고 부른 것은, 첫째로, 그가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의 으뜸이 되시며, 둘째로 그 지혜이신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나타나셨다는 단순한 이유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람의 경우에도 말씀이 사고(思考)의 표현이라고 불리우는 것처럼 이것을 하나님께서 적용시켜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 또는 언어를 통하여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신다고 말하는 것도 부적합한 말은 아니라고 본다. * (호 로고스)의 다른 의미들은 별로 적당하지가 않다. 이 헬라어를 분명히 정의하면 이성(理性) 또는 계산(計算)을 뜻한다. 그러나 나는 나의 믿음의 한계를 지나쳐서 이에 대한 이론을 전개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이러한 철학적 논쟁을 전혀 긍정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와 변론하는 데 있어, 하나님의 침묵, 그 자체가 이와 같이 차원 높은 비밀(신비)를 이야기할 때 우리의 지식적인 접근이 얼마나
한심한 문제인가를 선언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는데 있어서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에, 그는 그전에는 자기를 스스로 숨겨둔 상태였다. 따라서 '말씀'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 이중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다.
저 무가치하고 교만하기 이를 데 없는 스페인 사람 셀베투스(Servetus)는 영원한 말씀이 등장한 것을 창조할 때 나타남으로써 비롯됐다고 상상한다. 마치 그의 능력이 그의 대외적인 움직임에 의해서 알려지기 전에는 그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복음서 저자는 여기서 '말씀'에 시간적인 시작을 부여하지 않고 그가 태초부터 계셨
다고 말함으로써 모든 시간을 초월하고 있다 ! 나는 그들이 개처럼 얼마나 잘 짓는지
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한때 아리안계 사람들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으
나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태초(beginning;시작)라는 말은 순
서를 가리키는 말로 영원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고 궤변을 늘어놓았던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는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말함으로써 위와 같
은 중상모략에 선제공격을 가했다. 만일 말씀이 시간적으로 시작이 있었다면, 그들은
또한 하나님 안에서 어떤 시간의 연속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과연 요한은 이
귀절을 통하여 주님(말씀)을 모든 피조물로부터 구분하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여러가
지 의문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실제로 어디에 있었는가? 말씀은 그의
능력을 어떻게 행사했는가? 그의 성품은 어떤 것이었는가? 어떻게 해서 그는 알려질
수 있었는가?
그러므로 요한은 그리스도가 세상과 피조물 가운데 고정되어 있었다는 낭설을 부인
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항상 하나님과 함께 계셨기 때문
이다. 그러면 태초를 천지창조와 관련짓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일반적인 세계 질서로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분명히 격리된 창조주가 아니었
던가? 이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만 모욕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아버지를 멸시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을 하나님의 지혜를 떠나서 별도로 생각하는
것이 그릇된 일이라면, 말씀의 근원도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를 떠나서 찾을 수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된다. 셀베투스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으로
대표되기 전에는 '말씀'도 구상(構想)할 수 없는 것이라고 반대 의사를 제기한다. 마
치 그가 공개적으로 세상에 나타나기 전에는 하나님 안에 그가 실존하지 않았던 것처
럼! 마치 그가 자기 자신을 외적으로 나타내기 전에는 내적으로 존재하지 않은 것처
럼! 그러나 복음서 저자는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무조건적으로 확언함으로써
위와 같은 억지나 궤변을 늘어놓을 수 있는 여지를 전혀 남겨 놓지 않았다. 요한은 우
리를 모든 임시적인 것으로부터 끌어 내었다. 동사(動詞)의 불완전 시제로부터 계속되
는 상태를 유추하는 사람들은 오해려 난처한 입장에 빠져있다. 이들은 요한이, 말씀이
"......계셨으니"(was)라고 한 것보다 "계셔왔으니"(was being)라고 하는 말이 계속적
인 연속을 나타내어 더 좋은 표현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항에는 더 신중
한 이유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우리는 내가 지금까지 제시한 바, 즉 요한이 우리를 하
나님의 영원한 처소로 이끌어 말씀이 세상을 외적으로 창조하면서 자신을 나타내기 이
전에는 말하자면 그곳에 숨겨져 있었다는 내용으로 만족해야겠다. 그러므로 어거스틴
(Augustine)이 여기서 언급한 태초(beginning)는 전혀 시작(geginning)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우리에게 상기시켰을 때, 그는 옳게 보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아버지 하나님
이 순서상으로 그의 지혜보다 앞에 있지만, 그가 그의 지혜보다 먼저 있었다고 말할
때 어떤 시점(時點)을 상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들은 하나님께로부터 그의 영광을
앗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분은 세상이 창조되기 영원 전부터 "하나님 안에 숨겨져
있었던"-내가 이런 말을 쓰는 것이 허용된다면-영원한 아들(generatio)로서, 그후 여
러해동안 율법 하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두호하게 윤곽을 드러내셨다가 시간이 차매 완
전한 모양을 입고 육신으로 나타내신 바된 분이시다. 나는 * (로고스)라
는 말을 라틴어 성경에서 verbum(word)으로 번역하는데 놀랄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차라리 말(* )의 번역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가능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Sermo(Speech;강연)가 훨씬 더 적절한 표현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은 에라스므스(Erasmus)가 쓴 단어를 더 좋은 말로 바꾸었을 때 그를 신
랄하게 헐뜯었던 신학자들의 가혹한 비난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 우리는 이미 하나니미 아들이 세상보다 높이
계시고 모든 피조물보다 높이 계시며 모든 시대보다 앞서 계신 분이라고 밝혔다. 그러
나 동시에 이 표현은 그에게 아버지와 다른 실체(hypostxsis)를 안겨준다. 복음서 저
자가 말씀이 항상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거나 하나님의 존전에 계셨다고 했다면 그것은
불합리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말씀은 하나님 안에 그의 확실한 실재를 갖고 있었기 때
문이다. 그러므로 이 귀절은 아들이 아버지와 분명히 다른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
에, 사벧리우스(Sabellius)의 오류를 논박하기에 충분하다. 나는 이미 앞에서이와 같
이 심오한 비밀(신비)은 신중한 사고를 요구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초대교회 저
자들은 당시의 이교도들의 모호한 궤변에 대항해서 다른 방법으로는 참되고 순수한 진
리를 변호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만을 표현할 수 있는 어휘를
만들어내야만 했다는 점에서 그들을 가히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의 단순한 하나
님의 본질(essence)안에 세 분의 인격(persons) 또는 세 분의 실체(hypostases)가 계
시다고 표현했다.
실체(hypostasis)라는 말은 히브리서 1장에서 이러한 인격의 뜻(Person)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힐라리(Hilary)가 썼듯이 라틴어의 서브스탄티아(substantia)라는 말과
상통한다. 이들은 * (타 프로소파) 또는 Persons(人格)이라는 말
을 "하나님 안에 계신 분리된 소유물(주)"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우리들의 묵상에 자신
을 맡겼다. 나찌안주스(Nazianzus)의 그레고리(Gregory)가 세분이 나의 주위를 둘러
비추는 것을 연상하지 않고 홀로 계신 하나님을 나는 생각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그리스도의 신성에 어떤 의심도 하지 못하도록, 그
는 분명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선언한다. 하나님은 한분이신 만큼,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같은 본질에 속한 분이시면서 어떤 면에서는 다른 데가 있는 분이심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두번째 귀절에 대해 논한 바 있다. 아리우스(Arius)는 하나
님의 본질은 하나라는 사실에 대해 극히 사악한 견해를 피력했다.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을 고백하게 되는 사태를 모면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일종의 피조물이라고 괴변을
떨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이 곧 하나님이었다고 했는데, 더 이상 그리스도의 영원성
을 부인할 여지가 없지 않은가?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 이미 우리에게 말씀한 내용을 더욱 깊이 우
리 마음 속에 확신시킬 생각으로, 요한은 앞에 나온 두 귀절을 "그가 항상 계셨으며,
그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하는 말로 간추리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태초(시
작)가 모든 시간보다 이전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 요한은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선언하
고 그의 하나님되신 속성을 선포한 후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works)을 통해서 그의 신
성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실제적인 지식 안에서 특별히 훈련 받을 필요
가 있다. 왜냐하면 단지 하나님의 이름을 그리스도에게 부여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우
리에게는 차거운 지식 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그가 과연 하나님이심을
느껴야 한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아들의 위격(位格)에 적절히 어울리는 선언을 하
고 있다. 바울은 한 마디로 말하기를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롬 11:36)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아들이 아버지와 비교될 때, 그는 보통 이 기준에 의해서 구분이 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아버지께서 아들로 말미암아 모든 사물을 만들었다. 만물이 아
들로 말미암아 아버지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평범한 화법(話法)을 쓰고 있다. 앞에서
내가 말한 것처럼, 요한의 계획은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이 세상이 창조된
직후에 외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셨음을 보여주자는 것이다. 전에는 그 속성을 도저히
파악할 수 없었으나, 이제 그의 능력의 결과에 의해서 공적으로 알려진 바 되었다. 심
지어 철학자들 중에도 하나님을 이 작품(천지를 가리킴)의 배후에 있는 지성(지혜)으
로 간주함으로 하나님을 세계의 건축자로 내세우는 이들이 있다. 이 철학자들은 사실
바로 본 것이다. 성경이 그들의 견해와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곧 일
고의 가치가 없는 추리 속으로 빠져 들기 때문에 그들의 증거를 받아들일 아무런 이유
가 없다. 오히려 우리는 이 하늘의 음성-요한의기록-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
면 성격은 우리의 마음이 감당하고 소화시킬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비록 이 귀절이 여러가지로 해석
되어 왔으나, 나는 "지어진 것이......하나도 없다"는 한 가지 뜻으로 받아 들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거의 모든 헬라어 원본이(아니면 적어도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원본들은) 이 말씀과 일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상식이 이를 요구하고 있다.
'지어진 것이'라는 문구를 그 앞의 귀절로부터 분리시켜 뒤에 따르는 문장과 연결시키
는 사람들은 "지어진 것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라는 억지 문장을 지어내지 않으
면 안된다. 그러나 이들은 이와 같은 화법이 피조물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보여 줄 수
가 없다. 자기 나름으로 극단적인 플라톤 학파에 속해 있던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 세
상을 지으시기 전에 자기 마음 속에 전체 작품의 형태에 대한 개념을 품으셨고, 나아
가 그리스도 안에서 세계의 창조가 명령된 이후로, 그 안에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만
물의 생명도 하나님께서 품고 계셨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이것이 복음서
저자 요한의 생각과 얼마나 거리가 먼 생각인가를 우리는 곧 알게 될 것이다. 이제 나
는 그 앞의 문장으로 돌아간다. 처음에는 이것이 같은 말의 되풀이처럼 느껴지겠지만
이것은 전혀 같은 문구의 반복이나 오류가 아니다. 사단이 우리의 시선을 그리스도로
부터 빼앗아 가기 위하여 온갖 힘을 경주하고 있기 때문에, 요한은 전혀 어떠한 사물
로 지어진 것에서 제외될 수 없음을 명백히 선언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 지금까지, 복음서 저자는 우리에게 모든 만물이 하나
님의 말씀에 의해서 창조되었음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이제 창조된 만물을 보전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맡겨져 있음을 말하고 있다. 세상을 창조할 때 그의 능력이
갑자기 나타났다가 곧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의 능력은 안정되고 고정된 자연의 질서
가 유지되고 있는 가운데 나타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히브리서 1장 3절에 그가 그
의 능력의 명령, 또는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뿐만 아니
라, 이 생명은 넓게 감정은 없으나 살아있는 무생물체를 지칭할 수도 있고 생물체 만
을 적용해서 말할 수도 있다. 생물체나 무생물체 중 어느 쪽을 택해도 별로 문제될 것
이 없다. 왜냐하면 이 귀절이 뜻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피조물의 생명의
원천이 되실 뿐만 아니라-존재하지 않던 것을 생겨나게 하시는 원동력이 되시고, 그의
생명을 주시는 힘(살려주는 힘)이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그들의 현상(現狀)유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주님의 계속적인 영감이 세상에 생명을 허락지 않는다면, 현재 번성
하고 있는 모든 물체가 쇠퇴하여 없어질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한 마디로 바울이
하나님께 대해 소개할 때,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고 있다(행17:28)고 말한
것을, 요한은 말씀의 축복에 의해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분은 영원한 말씀을 통하여 우
리에게 생명을 공급하신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 나는 요한이 뜻하는 바와 일치하지 않는 다른 해석들
을 의식적으로 무시한다. 나는 이것이 인간이 다른 생물체를 능가하는 생명의 부분이
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마치 인간에게 주어진 생명은 일반적인 생명이 아니라 이성(理
性)의 빛과 연합된 생명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을
다른 피조물로부터 분리시킨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먼 거리에서 바라봄
으로써 의식하기보다, 우리 자체 내에서 그 능력을 느낌으로써 그의 능력을 더 인식하
고 있기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사도행전 17장 27절에서 하나님을 멀리서 찾지 말라
고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자기를 계시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복음서 저자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에 더 가까이 시선을 돌리도록 설득할
목적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일반적으로 고려할 때, 요한은 그들에게 특별히 주어진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즉 인간은 동물과 같은 형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이성을 부여받은,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그의 빛으로 인간의 마음을 효과적으로 깨우쳐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특이한 축복의 주관자가 되심을 알게 할 목적으
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빛은 그빛의 원천인 '말씀'으로부터
우리에게 흘러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 빛은 말씀의 거룩한 능력을 더욱 명확하게 비추
어 볼 수 있는 거울과도 같은 것이다.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 성경 여러 곳에서 밝혀주고 있는 대로 인간이 눈이 어두
어졌다는 사실과, 그 어두움 때문에 인간의 정죄(定罪)받고 있는 너무나 잘 아려진 기
정 사실에 대하여 반기를 든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이들은 그들의 모든 사고활동 가
운데서 비참하게 사라져 간다. 인간들이 자신의 지각(知覺)에 의해서 헛되고 거짓된
것에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면 세상에 왜 이렇게도 많은 오류가 범람하겠는가? 그러나
인간 내부에 아무런 빛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요한의 이와 같은
증거는 파괴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인간의 생명 속에는 동
작과 호흡 이상의 훨씬 우수한 요소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복음서 저자는 애초
에 인간에게 주어졌던 빛은 현재의 상태에 의해서 측정되어서는 안된다고 즉시 경고함
으로써 이 질문을 미리 막고 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이 상하고 타락한 성품 속에서 빛
이 어두움으로 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성의 빛이 완전히 꺼졌다고는 말하
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두움이 가득한 인간의 마음 속에도 아직 저 밝음의 불꽃이 비
치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는 이제 이 문장 속에 두 가지 생각이 들어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는 인간이 애초에 부여받았던 건전한 성품과는 판이한 상태에 있음을, 즉
모든 부분에서 광채를 발해야 할 그들의 마음이 불행하게도 눈먼 상태로 빠져들게 되
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말하자면, 인간의 성품이 이와 같이 부패한 가운데 그리
스도의 영광이, 어두움에 묻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요한은 이와 같은 흑
암의 와중에도 어느 정도 그리스도의 신성과 능력을 보여주는 요소가 남아 있다고 말
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복음서 저자는 인간의 마음은 그 눈이 아주 멀었기 때문
에 어두움에 압도당한 것으로 간주해도 좋음을 시사하고 있다. 왜냐하면 요한이 더 부
드러운 단어를 써서, 빛이 흐리고 어두웠다고 말할 수 있었으나, 그는 첫사람 아담의
타락한 이후로 우리의 상태가 얼마나 부패해 있는가를 보여주기를 원했다. 빛이 어두
움에 비친다고 요한이 말한 것은 부패한 인간의 성품을 칭찬해서 한 말이 아니고 무지
한 인간들에게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서 그와 같은 표현을 썼던 것이다.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이 희
미한 빛을 통하여 우리 인간을 부르셨지만, 복음서 저자는 이것이 효과가 없었다고 말
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보면서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께로부
터 소외된 현재에 이와 같은 무식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에게 남아있는 빛은 효력
을 발휘하지 못하고 명맥을 겨우 유지하기에 이르렀다. 우리의 경험이 또한 매일같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靈)에 의해서 아직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
까지도 아직 이성(理性)을 행사함으로, 우리가 호흡을 하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을 뿐
아니라 지각을 가지고 이를 행사하도록 지어진 존재임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러나 이
들은 이성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을 가까이 찾거나 하나님께 접근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들의 지성(知性)은 헛될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새로운 도우심으로 돕지 않는
다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빛
을 인간들 위에 비취셨으나 어두움에 빠져있는 그들은 그 빛의 원천을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타락한 가운데 헛되고 비뚤어진 환상에 끌려 다니는 것이다. 부패한 성품 속에
남아 있는 그 빛 가운데는 두 가지 주요 부분이 있다.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종교의
씨가 뿌려져 있고, 또한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이 그들의 양심에 새겨져 있다. 그러
나 그 열매는 종교심이 수천가지의 미신을 산출(産出)하고 양심이 모든 판단을 흐려
미덕(美德)과 악덕(惡德)을 혼동시키는 것 외에 무엇이 있는가? 한 마디로 말해서 인
간의 타고난 이성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지 못한다. 그들이 인생을 살아 갈 지
혜를 부여받았으며 인문과학을 연구할 수 있도록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이 아무런 효력
이 없이 사라져 버린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복음서 저자가 타고난 재능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을 뿐, 아직 중생(重生)의 은혜를 다루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겠다.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두 가지 뚜렷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첫번째 능력은 세
상을 건축하신 것과 자연의 질서에 잘 나타나 있다. 두번째 능력에 의해서 그는 타락
한 인간의 성품을 새롭게 해서 회복시킨다. 그분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
래서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며 그는 권능에 의해서 만물이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특별히 인간은 지각(知覺)이라는 특유의 재능을 부여받았다. 비록 타
락에 의해서 인간이 지각의 빛을 상실한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아들의 은혜로 나
면서부터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완전히 파괴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아직
도 보고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의 우둔함과 완악함에 따라 그에게 아직 남
아있는 빛을 어둡게 가리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중개자(仲載者)의 새로운 직분을
담당하셔서 중생의 영을 통해서 잃어버린 인간을 개조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요한이 언급한 빛을, 복음과 구원의 도리에 연관시키는 사람들은 정반대의 입장으로 추측한다.
1:6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 저자는 요한의 소명(召命)을 확인하지 않고 다만
그것을 지나가는 말로 언급할 뿐이다. 이러한 확언은 자신을 내세워 "나는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라고 자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는, 나중에 이 증인에 대해 좀더 언급할 의향으로, 요한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보내심을 받았다고 한 마디 말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후에 자기의 전도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요한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깨달아야 할 것은 -내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요한에 대하여 저자가 언급한 내용이 교회의 모든 교사들에게도 요청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그들의 가르침이 권위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 위에 바탕을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야 된다는 사실이다. 복음서 저자인 사도 요한이 요한의 이름을 밝히는 것은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리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의 의미가 그에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그의 천사를 통하여 그가 태어나면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고 명령하셨을 때 주님께서는 요한을 위해 의도(예정)하신 직
분을 지칭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 (요-하넨-), 모든 사람
이 이를 인하여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사자(herald)임을 인식하도록 하
셨다.
사람이 났으니 - 복음서 저자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난 방법을 논하
기 시작한다. 아무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임을 의심치 못하게 하려
고, 요한은 세례 요한이라는 전령(傳令)에 의해,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공개적으로 선
포되셨는가를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인간에게 스스로 나타내셨을 뿐 아니
라 세례 요한의 전도와 증거에 의해서 알려지기를 원하셨다. 아니, 하나님 아버지께서
는 그리스도에 앞서서 이 증인을 보내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을 사람들이 보
다 쉽게 받을 수 있게 하셨다. 그러나 언뜻 보기에는 그리스도께서 무슨 증인이라도
필요한 것처럼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를 증거했다는 것이 어처구니 없게 보일 수도 있
다. 왜냐하면 주님은 사람의 증거를 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대답은 간단하고 분명하다. 이 증인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예정된 것이 아니라 바로 우
리를 위해서 증거한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인간의 증거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기에는 너무나 빈약한 것이라고 이견(異見)을 제시한다면, 그 대답
은 역시 간단하다. 세례 요한은 개인적인 증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를 부여받고,
인간이라기 보다는 사자(使者)의 몸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이 칭찬
을 받는 것은 그의 뛰어난 능력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사자(대사)였기
때문에 칭찬을 받는 것이다. 요한의 증거는 또한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하면서 자기
자신을 증거한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의 전령(傳令;使者)으로서의 요한
의 존재 이유는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의 시선을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기적으로 이끄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1:7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 복음서 저자는 요한이 부름을 받은 목적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면서, 그의 소명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교회를 준비시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
다. 그가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초대할 때, 그는 분명히 자기 자신의 뜻을 펴기
위해 온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요한은 추천을 받을 필요가 별로 없다, 복음서 저
자는, 따라서, 요한에게 돌려지는 조그마한 칭송이라도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게 될
것을 염려해서, 요한은 그 빛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요한에게
너무나 집착한 나머지 그리스도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새벽의 희미한 햇
살에 압도 당한 사람이 감히 태양을 쳐다보지 못한 것과 같았다. 이제 우리는 복음서
저자가 빛이라는 단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를 보기로 하자. 모든 성도들은,
성령님의 깨우침을 받아 자기 자신을 볼 뿐만 아니라 자신이 본을 보임으로 다른 사람
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한다는 의미에서, 그들은 '주 안에서 빛'(엡5:8)이라 하였다.
사도들은 그들을 '빛'이라고 불렀는데 그들은 복음의 횃불을 들고 세상의 어두움을 물
리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마5:14).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복음서 저자는 즉시 계
시의 원천인 영원하고 신비한 계시를 깨닫게 하려고 논의하고 있다.
1:8-9
참 빛......세상에 와서 - 복음서 저자는 참 빛과 거짓된 빛을 대조해서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천사나 인간과 공통으로 빛이라고 불리우는
요소를 가지고 계신다고 생각할 것을 우려해서,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어떠한 빛과도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를 원했다. 그 차이는 하늘과 땅에 있는 빛은 다만 파생된
광명일 뿐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을 통하여 온 세상에 밝히
비취는 빛이라는 점이다. 세상에 있는 빛(밝음)의 원천이나 근원은 다른 어느 곳에서
도 발견할 수 없다. 따라서 요한은 주님을 그 본성 자체가 빛이신 '참 빛'이라고 부르
고 있는 것이다.
각 사람에게 비취는 - 복음서 저자는 우리 각자가 스스로 자기 안에서 느끼는 결과
로부터 그리스도께서 빛이심을 알 수 있도록 이를 강조하고 있다. 그는 예수께서 영원
한 빛이시니 만큼, 근원적으로 빛이 되신다고 보다 더 정교한 논조를 전개할 수가 있
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신에 그는 우리 모두가 가졌던 경험을 회상하도록 우리를
권유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만이 우리로 하여금 그의 밝은 빛에 참예하게 하시는 분
이기 때문에, 그분에게만 빛이라고 불리우는 존귀한 권위가 어울림을 우리는 인정하여
야 할 것이다. 다른 이들에겐, 이 귀절이 두 가지로 설명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
보편적인 용어를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서 생명의 빛에 참예하게 된 성도들에게 국
한해서 쓰고 있다. 어거스틴은 학교 교장의 비유를 들면서, 어느 동네에 학교가 하나
뿐이라면 많은 사람이 그 학교에 다니지 않더라도 그 교장선생님은 온 동네의 교장으
로 불리우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 귀절을 상대적으로 보고 있
다.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마음의 깨우침(빛)을 받았다는 것은 주님의 은혜를 떠
나서 달리 생명의 빛을 받았다고 자랑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복음서 저자가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라고 일반적으로 말한 것처럼, 이 빛에서 나
가는 광선이 전 인류 위에 비친다고 하는 의미로 더 좋게 생각한다. 우리는 인간이 다
른 동물보다 뛰어나 이성과 지성을 부여받은 특이한 존재임을 알고 있으며 또 양심에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을 갖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영원한 빛에 대하여 아
무 것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광신자들은 이 귀절을 붙들고
계시의 은혜는 차별이 없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곡해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이 믿음(신앙)보다 훨씬 못한 일반적인 이성의 빛을 지칭하는 것임을
기억하자. 인간은 아무도 자기 마음의 명철과 지혜에 의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의 영만이 그의 택한 자들에게 하늘 문을 열어 주신다. 나아가, 우리
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나눠주신 이성(理性)의 빛이 죄로 너무나 어두워져 있기 때문
에 극히 작은 양의 섬광(閃光)이 아직 꺼지지 않고 이 극심한 암흑세계를, 아니 무서
운 무지와 허물로 꽉찬 인간의 마음 속을 비취고 있음을 기억해야겠다.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 인간은 그들이 향유하고 있는 빛이 어디에서 어떻게 생겨
난 것인지를 모를 정도로, 말하자면 스스로 눈이 멀었기 때문에, 복음서 저자는 인간
의 배은망덕함을 책망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시대나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께
서 육체로 나타나시기 전에도, 그는 여러가지로 그의 능력을 계시하셨다. 그러므로 우
리의 일상 생활에 나타나는 주님의 능력이 인간의 게으름을 시정해야 할 것이다. 흐르
는 물줄기에서 물은 길어 먹으면서도 그 물이 흘러나오는 샘(원천)을 한번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이치에 어긋나는 것인가?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나타나
시기 전에는 그리스도를 알 수 없었다고 세상 사람들이 핑계를 댄다 해도 그것은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없다. 이것은 그들 가운데 항상 존재해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그들의 나태함으로 일종의 악질적인 무지함으로 가리우는데에 기인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잘라 말하면 그리스도는 사람이 그의 빛에 비추임을 받지 못할 정도로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지 않은 적이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자연의 섭리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바라 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정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1:11
자기 땅에 오매 - 하나님의 아들이 볼 수 있게 육신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을 때 -
그리고 그것도 열방 가운데서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신 유대인들에게 계시하셨을 때-그를 알아보지도 않고 영접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극히 불쌍할 정도로 사악한 상태에 빠져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귀절도 또한 두 가지로 풀이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서 저자가 전 세계를 다 지칭해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세상 어느 부분도 하나님의 아들께서 자기 자신의 소유로 주장하지 못할 부분은 없다. 그러므로 이들의 해석을 따르자면,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오셨을 때, 그는 외국 땅에 들어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 인류가 그의 기업이기 때문에 곧, 자기 세상에 온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요한의 '자기 땅'이라는 말이 유대인만을 지칭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본의(本意)에 더 가깝다고 믿는다. 복음서 저자는 암시적(暗示的)인 대조를 통해서 인간의 배은망덕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이 거할 처소로 한 민족을 택하셨다. 그가 그곳에 나타나셨을 때, 그는
버림을 받았다. 이것은 인간의 완악함이 얼마나 극심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는 유대인들의 믿지 않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거침돌이 될 것을 알고 이 거침돌을 제거할 목적으로 이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자기들에게 특별히 약속된 구주가 오셨을 때 그를 멸시하고 배척했다면 누가 그를 이세상의 구속주(救贖主)라고 인정하겠는가? 우리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이 그와 같이 고민했던 것을 알고 있다. 나머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강조점이 동사와 명사에 놓여있을 뿐이다. 복음서 저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그가 전에 계시된 곳에 오셨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을 사람들이 보다 더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새롭고 특별한 형태의 임재(臨在)를 의도하고 있다. 요한이 '자기 땅에'(unto his own)라고 말할 때, 그는 유대 민족과 이방나라들을 비교하고 있다. 왜냐하면 유대 민족이 특이한 특권에 의해서 하나님의 권속으로 택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유대 민족이 자기 가족이기 때문에 그들의 권리에 따라 그의 나라에 속하기라도 한 것처럼, 먼저자신을 그들에게 제시하셨던 것이다. 이사야 1장 3절의 불평도 같은 양상을 띠고 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비록 주님께서는 전 세계를 지배하고 계시지만, 그는 특별히 이스라엘에 속하는 주님이 되신다. 이스라엘은, 말하자면 그의 거룩한 우리 안으로 모은 바 될 것이다.
1:12
영접하는 자 곧 - 복음서 저자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멸시하고 배척했다는 거
침돌에 아무도 걸려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그를 믿는 사람들을 하늘 높이 올려주고 있
다. 믿음의 결과는 하나님의 아들로 여김을 받을 수 있는 영광이라고 그는 말한다. -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이라는 보편적인 어휘는 대조법을 암시하고 있다.
유대민족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만 국한된 분인 것처럼 헛된 영광에 도취되어 있
었다. 그래서 복음서 저자는 그들의 운명이 바뀌었음을 선언한다. 이방인들이 바로 기
업을 빼앗긴 유대인들이 남겨놓은 자리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양
자의 권한을 나그네에게 이양한 것과도 같은 것이다. 바울이 말한대로 한나라의 넘어
짐이 온 세상의 생명(부요함)이 된 것이다(롬11:12). 말하자면, 복음이 유대인들로부
터 퍼져나왔을 때 그 복음은 세계 전역에 널리 전파되어 나가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
여 유대인들은 그들의 특별한 은총을 몰수당했다. 그러나 그들의 믿지 않음은 그리스
도에게 아무런 해를 미치지 못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다른 곳에 왕국의 보좌를 세
우시고 차별이 없이 전에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것처럼 보였던 이방 만민을 구원의 소
망으로 부르셨기 때문이다.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영접받아야 하는가의 문
제는 그를 믿음으로써 영접하는 것임을 간단히 보여주고 있다.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 이식(移植)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써 양자의 권리를 취득한다. 주님께서 유일
한 하나님의 아들, 즉, 독생자이신 만큼,이 영예는 우리가 식구가 되지 않는 한, 우리
에게 속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내용이 다시 '권세에 대한 허구'를 논박해 준다. 복음
서 저자는 이 권세가 믿는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선언하고 있으며 그들이 이미 하나님
의 자녀가 된 것이 확실하다. 믿음을 통해서 사람은 적어도 자기가 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데까지는 나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믿음(Faith)을 격하시키는 것
이다. 그들은 결정되지 않은 가능성으로 현재의 결과를 대치시키는 것이다. 이들의 모
순은 다음에 나오는 말씀에 의해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다음 귀절에서 믿는
자는 이미 하나님께로서 낳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
는 것은, 선택의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그 자체인 것이다. 비록, 히
브리어에서 가끔 '이름'이 '권세' 대신에 쓰이긴 하지만, 여기서는 복음을 전파하는
것, 즉, 복음의 도(道)를 지칭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전파될 때, 우리는 그
를 믿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보통 평범한 방법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은 주의깊게 살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게도 자기 나름
대로의 혼동된 믿음은 복음을 깨닫는 것(이해하는 것)과는 관계없는 믿음으로 조작해
내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도들 가운데 '믿는다'는 말보다 더 자주 쓰이는 말도 없지
만, 복음을 들음으로써 생기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없이 그냥 그대로 쓰이고 있
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통해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리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를 영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나는 여기에 쓰인 * (에크수
시아)라는 말을 존엄(dignitatem)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가톨릭 교도들의
헛소리를 반박하기 위해,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더 좋으리라고 본다. 이들은 이 귀절
의 뜻을 고약하게 변질시켜서, 우리는 선택의 자유, 즉 우리가 보기에 좋은대로 신용
할 특권만을 부여 받았다는 것이다. 이 말씀에서 자유의지라는 의미를 찾아내는 것은
물 속에서 불을 찾아내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언뜻 보기에는 그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를 하나님의 아들로 만드신다고 하지 않
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은혜가 우리에게 베풀어졌을 뿐이며 그 은혜를 활용하거나 거절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추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반적인 문맥을 살펴보면 한 단어에
대한 이 보잘 것 없는 궤변은 금새 무너지게 된다. 복음서 저자는 곧 이어서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부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믿음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다면 그리고 하
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믿음을 우리에게 불어 넣어 준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
시는 양자의 은혜는 분명히 잠재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다. 복음서 저자가 사
용한 완곡한 표현을 보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한
마디로 말한 것보다도 은혜의 우월성을 더 잘 나타내주고 있다. 여기서 요한은 더럽고
사악한 사람들, 영원한 수치를 받도록 정죄되어 사망의 암흑 속에 버려져 있는 사람들
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은 인간들에게 이런 영예를 부
여함으로써, 그들이 갑자기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다. 복음서 저자는 이 축복의 위대함을 드러내 말하고 있다. 바울도 에
베소서 2장 4절에서 같은 은혜를 말하고 있다. 설령 어떤 사람이 이 낱말의 일반적인
의미를 좋아한다 하더라도, 복음서 저자가 쓰고 있는 대로, 권세(power)라는 말은 완
전한 그리고 충만한 효과를 포함하고 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부정(不淨)하고 할
례받지 못한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긍휼을 베푸셨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무덤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를 일으키셨다는 사실은 믿을 수 없는 변화이다. '권세'라
고 하는 것은, 바울이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
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골로새서 1장 12절에서 말할 때에 *
(하카노레스)를 가리키는 것이다.
1:13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 나는 이것도 같은 의미라고 생각한다. 나는-어거스틴
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추정하듯이-육정(flesh)을 여자에게 해당시킬 이유를 발견치
못한다. 복음서 저자는 다른 표현으로 같은것을 반복하여 말함으로 이를 우리 마음에
더 깊이 새기려고 시도하고 있다. 비록 요한이 특별히 육신을 자랑했던 유대인들에 대
해 생각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귀절에서 일반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
것은 우리의 성품으로나 우리가 먼저 무엇을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주님께서 즉각적인 사랑, 즉 무조건적인 사랑에 의해, 자원해서 우리를 낳아주심
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믿음은 우리가 생산
해 내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중생(重生)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복음서 저자는 하나
님께로서 나지 않은 자는 아무도 믿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음
은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다. 뿐만 아니라 믿음은 차디 찬 지식이 아니다. 하나
님의 영에 의해서 다시 지음을 받기 전에는 아무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복음서 저
자는 여기서 믿음보다 중생을 더 앞에 놓음으로 앞뒤를 바꾸어 놓은 것 같다. 중생은
믿음의 결과이며 믿음을 따라 일어나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두 순서
가 완전히 일치된다고 대답한다. 믿음에 의해서 우리는 썩지 않는 생명의 씨앗을 잉태
하게 되며, 새롭고 거룩한 생명으로 거듭나게 되며 또한 믿음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러가지 의미에서, 믿
음은 우리의 중생(거듭남)의 일부분이며, 믿음에 따라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가, 하나님의 자녀의 일원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성령에 의해서 우리 마음이 깨우침
을 받는 것은 우리의 갱생(更生)의 삶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그 원천이
되는 중생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믿음에 의해서 우리는, 성령에 의
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양자의지위를
획득하는 시작이라고 부른다. 물론 우리는 이보다 더 분명하고 직선적인 구분을 할 수
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불어 넣으실 때 그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비밀스
런 방법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다. 그러나 일단 믿음이 주어졌을 때, 우리는 양자
됨의 은혜는 물론, 새 생명과 성령의 다른 은사를 생생하게 인식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말한 대로, 믿음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믿음은 우
리를 인도하여 그의 모든 축복을 소유하게 하신다. 따라서, 우리의 태도에 관한 한,
우리는 믿은 후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영생의 기업은 양자됨의
결과이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서 저자가 우리의 구원을 온전히 그리스도의 은혜로 돌
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과연 사람이 아무리 면밀히 자기 자신을 살핀다 할지라도, 우
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 것 이외에 다른 것으로서는, 하나님의 자녀
될 가치가 없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 나는 이말이 유대인들의주제넘은 생각을 간접적으로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이들과 동감한다. 그들의 혈통의 가치는 항상 그들의 입술에 오
르내렸다. 그들은 거룩한 조상에게서 났기 때문에 나면서 부터 거룩한 것처럼 행세했
다. 그들은 참된 자손으로서 타락하지 않았다면 육신적으로 난 것은 조금도 자랑스럽
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믿음은 모든 부정하던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로 믿어 하나님
의 자녀가 되는 것은 어머니 배안에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다시 창조함을 받
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혈통은 긴 족보의 서열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 말과 같다. 유대인들의 자랑거리 중 일부는 그들의 족보가 아브라함과 이
삭과 야곱까지 끊이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따져 올라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 요한은 이제 자기가 말해 온 그리스도께서 오신 성격에 대
해서, 즉 우리의 육신으로 옷입으시고 공적으로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셨음을 가르치고
있다. 비록 복음서 저자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으신 이 설명할 수 없는 신
비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고 있지만, 이 간명함이 또한 놀라운 것이다. 어떤 머리가 돈
사람들이 여기서 일고의 가치도 없는 궤변을 가지고 우리를 우롱하고 있는데,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하나의 정신적인 개념으로서 세상에 보
내셔서 사람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말씀이 무슨 미지수의 사상(思想)이라도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본성 안에서 순수한 인성의 실체
(hypostasis)를 표현하고 있음을 이미 보여준 바 있다. 육신이란 이 낱말은 요한이 말
한,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있게 그의 뜻을 전달하고 있다.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하여 지극히 높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얼마나 낮
고 비천한 상태에까지 내려왔는가를 보여주시기를 원했다. 성경이 인간을 경멸적으로
언급할 때, 그를 육신(Flesh)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말씀'의 신령한 영광과 썩는
냄세가 나는 우리의 육신 사이에는 얼마나 큰 거리가 있는가!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이와 같이 사악한 죄악에 물들어 있는 육신을 스스로 입는 데까지 자기 자신을 낮추셨
다고 이곳에서 말하는 '육신'은-바울이 말한-썩은 성품을 두고 한 말이 아니라,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을 가리켜 한 말이다. 육신은 그의 연약하고 일시적인 성품을 경멸
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사40:6)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낮은 부
분이 전체 인간을 포용한다는 수사적인 대유법임을 유의해야겠다. 그러므로 아폴리나
리스(Apollinaris)가 그리스도는 영혼이 없이 인간의 몸으로 옷입으셨다고 상상한 것
은 어리석은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수많은 귀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육신(몸)
뿐 아니라, 영혼을 부여받으셨음을 쉽게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사람을 육신이라고 부를 때, 영혼 없는 사람을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뜻하는 평범한 의미는 만세 전에 하나님께로 난 말씀, 즉 아버지와 항상 거
하셨던 아들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 중요한 믿음의 요소가 있다.
첫째로, 그리스도 안에서 두 성품이 한 인격 안에 융화되어 한분 그리스도께서 참 하
나님과 인간이 되신다는 사실이다. 둘째로, 그의 인격의 통일성이 그의 성품을 유지해
줌으로, 신성(神性)은 신성대로, 그리고 인성(人性)은 인간성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것
이다. 그러므로 사탄이 이단들을 통하여 갖가지 미친소리로 건전한 신학을 뒤엎으려할
때 그는 언제나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이 된 것을 혼동되
게 전하거나 다음은 육신으로 옷입은 그리스도는 두가지 별개의 인격이었다는 두 가지
오류 중에 하나를 끌어들였던 것이다. 그래서 네스토리우스(Nestorius)는 각 성품을
분명히 인정했지만 하나님이었던 그리스도와 인간이었던 그리스도를 별도로 상상했던
것이다. 반면 유드고(Eutyches)는 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이 되
심을 인정하지만, 두가지 다른 성품은 제쳐놓고 두 가지 성품이 섞여 있었다고 상상하
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오늘날 셀베투스(Servetus)와 재세례파(Anabaptists)는 마치
그리스도께서 신적인 인간이었던 것처럼, 이중 성품을 지닌 혼동된 복합체이신 그리스
도를 창안해 니었다. 그들은 분명히 말로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고 선언한다. 그러
나 그들의 건전치 못한 상상을 따른다면, 신성이 잠시 인성으로 변하고 이제 인성이
다시 신성으로 흡수되었다는 것이다. 복음서 저자는 이 두 가지 모독적인 망언을 논박
하고 있다. 요한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통일된 하나
의 인격을 유추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지금 인간이신 분이 항상 하나님이셨던 바로 그
분 이외에 다른 분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이 되었다고 언급된 분은 바로 하나님이
시기 때문이다. 요한이 인간 그리스도에게 '말씀'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을 보면 말
씀이 인간이 되셨을 때, 그리스도는 그가 전에 가졌던 본체에서 조금도 변한 것이 아
니고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의 본질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짧게 말
해서, 하나니므이 아들은 계속 영원한 말씀이 되시는 방법으로 인간이 되셨던 것이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육신은 그리스도에게 하나의 가정집과 같았다고 말하는 이
들은 복음서 저자의 생각을 포착하지 못한 것이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거처
를 우리와 같이 했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의 손님으로서 잠간 동안 우리 가운데 머무
르셨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가 쓰고 있는 * (에스케-노-센)라는
낱말은 장막(tabernacles)에서 파생된 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오셔서 그의 맡은 바 직분을 다 수행했는 동안 그는 잠시 동안 나타나셨을 뿐
아니라 인간 가운데 거하셨던 것이다. '우리 가운데'라는 글귀가 일반적으로 인간 가
운데 거하셨음을 뜻하는 것인지, 아니면, 요한 자신과 함께 그가 기록하고 있는 사진
의 목격자된 다른 제자들 사이에 거하셨음을 뜻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나는 후자의 설명이 옳다고 생각한다. 복음서 저자는 곧 이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 비록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있었지만, 그
영광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이 가리워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성
령께서 눈을 열어주신 몇몇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영광을 보았다. 이 귀절의 요지는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보다 위대하고 숭고한 것을 보여준 사람으로 인식되었다는 것
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이 육신을 옷입었다고 완전히 말살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영광은 육신의 비천함 아래 숨겨져 있었지만, 아직도 그 영광을 나타
냈던 것이다.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외아들이
시기 때문에 그를 독생자라고 부른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인간이나 천사들 보다 우위
(優位)에 두고 다른 피조물에게 속하지 않은 그 분 특유의 위치를 확정하기 원했던 것
이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이것은 최후 문장을 확정짓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위엄
은 분명히 다른 면에서도 나타났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는 우리를 추상적인 지식보다
는 그리스도에 대한 실제적인 지식으로 단련시키기 위하여 다른것 대신에 이 말씀을
본보기로 택하였다. 이것은 주의깊게 관찰해야 할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 맨발로 물
위를 걸으실 때나 귀신을 달아나게 하실때나 기타 다른 기적을 행함으로 그의 능력을
나타내실 때에, 그는 분명히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로 인식될 수 있었다. 그러나 복
음서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은혜와 진리의 무진장의 원천이 되신다고 선언함으로써, 믿
음이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열매를 얻게되는 그 증거(은혜)를 중심에 놓고 있다. 스데
반도 "성령(은혜)이 충만했다"(행7:55)고 하나 그것은 다른 의미에서 한 말이다. 왜냐
하면 은혜가 충만한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가 길어다 먹어야 할 샘물이 되시기 때문이
다. 이에 대해서는 곧 더 상세하게 이야기할 것이다. 이 말씀은 환치법(煥置法)에 따
라 '참된 은혜'(true grace)라고 풀이할 수도 있다. 아니면 하나의 설명으로, "그는
완전한 진리이며 은혜가 충만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곧 이어 같은 형태의 말씀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두군데 다
의미는 같은 것으로 각주한다. 이 은혜와 진리를 요한은 율법과 대조시키고 있다. 그
래서 나는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는 뜻으로 이
해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신령한 나라에 속하는 모든 것으로 충만하셨기 때문
이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일에 자신이 구속자가 되시며 메시아가 되심을
보여주셨다. 이것은 그분이 다른 모든 양상으로부터 구별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특징
이다.
1:15
요한이......증거하여 - 그는 이제 요한의 선포로 묘사하고 있다. 현제시제를 씀
으로써 저자는 계속적인 활동을 시사하고 있다. 요한의 음성이 계속 사람들의 귀에 울
려 퍼지듯이 이러한 전도는 계속 흥왕해야 할 것이다. 이와같은 이유로 사도요한은 세
례요한의 전도가 전혀 모호하거나, 흐릿하거나 소수의 사람들에게 수근거린 것이 아님
을 보여주기 위해서 '외쳤다'는 말을 쓰고 있다. 요한은 공개적으로, 그리고 큰 음성
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첫째 문장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보내심을 받은 요한을 말
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낮추고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
다.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 이 말씀에서 요한은 애초부터 자기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알리는 것이었
고 이것이 그의 전도 목표였음을 밝히고 있다. 자기의 제자들을 불러 그리스도에게 인
도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사신(대사)으로서의 그의 임무를 완수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요한이 그리스도보다 몇 달 앞서 태어난 것이 사실이지만,
요한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나이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공중 앞에 나타
나시기 전에 세례 요한은 이미 선지자의 직분을 이행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은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보다 시간적으로 앞에 놓고 있다. 그러므로 공중 전도에 대하여 말한
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의 뒤를 따랐던 것이다.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는 말씀은 문자 그대로 옮긴다면 "그분
은 나보다 앞서 오셨다" "그는 나의 주인(primus meus)이기 때문이다"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의 뜻하는 바는 그리스도께서 훨씬 월등하시고 뛰어나셨
기 때문에 요한보다 모름지기 앞섰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낮추어 순종했으며 격언에 나오는 말처럼 횃불을 그에게 넘겼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
스도께서 시간적으로 후에 오셨다고 해서, 이것이 주님께서 신분상의 가치로 보아 앞
서 계신 분이라고 하는 사실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요한은 경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사나 기타 영예에 있어서 뛰어난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 아래에서 자기
위치를 지켜야 한다.
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 복음서 저자는 이제 그리스도의 직분에 대
해 설파하기 시작한다.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축복이 풍성하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는
구원의 어떠한 부분도 찾아 볼 수가 없다. 과연 하나님 안에는 생명과 의와 능력과 지
혜의 원천이 있다. 그러나 이 샘은 우리에게 숨겨져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샘에 접
근할 수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안에서 이 모든 축복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축복을 찾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그에게 길
만 열어준다면 언제고 우리에게 흘러들어올 준비를 갖추고 있다. 요한은 우리가 그리
스도를 떠나서 어떠한 축복도 구해서는 안된다고 간단히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
장은 몇몇 귀절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로, 그는 우리가 모두 영적인 축복을 전혀 가지
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스도께서 부요하심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도
우시고, 우리의 가난을 채워주시고, 목마름과 배고픔을 채워주시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떠나는 순간, 선(善)을 찾으려는 어떠한 시도도 헛된 것임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선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만 거하도록 의도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사에 참예하려 한다
면, 천사와 인간은 앙상할 것이고, 하늘은 텅텅 비고, 지구는 폐허가 되어 만물이 무
가치한 것을 발견할 것이다. 셋째로,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충만한 데서 공급을 받
는 한, 어떠한 궁핍에도 염려할 필요가 없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면
에 완전 무결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에게서 다함이 없는 생명의 원천을 발견한다. 요
한은 겸손해서가 아니라 어떠한 사람도 이에 대해 예외일 수가 없음을 분명히 하기 위
하여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취급한다. 요한이 일반적으로 전 인류를 가리켜 말하
는 것인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나타나신 후에 그의 축복에 더 많이 참예했던 이들을
두고 말하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율법 아래 살았던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똑같은
이 충만함에서 공급함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나, 요한이 곧 시대상으로 구분하는 것을
보면, 나는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에 나타냈던 풍성한 축복을 특별히 찬양하
고 있다고 생각한다. 율법아래 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택을 약간 맛보았을 뿐이지
만,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계시된 후에는 우리가 만족할 만큼 축복의 샘이 터져 나왔
다. 이는 우리 가운데 누구도 성령의은사에 대해서 아브라함보다 더 풍성하게 받았다
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나는 하나님께서 일반적으로 그의 은혜를 분정하시는 방법과 양
식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그의 제자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기 위해 그들이 결핍을 느끼고 있는 모든 축복의 풍성한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 있
음을 선언한다. 그러나 누가 이 말씀의 뜻을 더 깊이 추구한다고 해도 그것은 억지가
아닐 것이다. 세상이 창조된 이래로 모든 믿음의 조상들은 그리스도에게서 그드르이
은사를 공급받았다. 비록 율법이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졌으나 그들이 은혜를 받은 것
은 모세를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좋아하는 설명이 어떤 것인지를
이미 보여주었다 - 요한은 여기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월등하게 뛰어남을 보여주기
위하여 우리를 구약의 조상들과 비교하고 있다.
은혜 위에 은혜러라 -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계속적으로 주어지는 모든 축복은,
그리고 나아가 영생(永生)은 우리에게 빚진 것을 갚기라도 하듯이 우리의 공로(공적)
에 대한 갚음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축복은 하나님께서 먼저 은혜로 상을 주시고 자
기의 선물로 우리에게 관 씌우시는 순수한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상과 같
은 어거스틴의 이 귀절에 대한 풀이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이것은 신령하고 현
명한 관찰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귀절과는 어울리지 않는 견해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위에 내려주시는 은혜는 어느 것이나 똑같이 이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했다면
의미는 더욱 간단했을 것이다. 이것은 또 최후 목적, 즉 하나님께서 마침내 은혜의 완
성인 구원의 사업을 완수하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그리스도 위에 쏟아진 은혜로 물을 마시고 있다고 말하는 이들의 의견을 존중한다. 이
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에게서 받는 것을 우리에게 거저주실
뿐만 아니라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흘러올 것을 그리스도에게 맡겨주셨기 때문이다. 이
것이 그가 우리를 그와 함께 기름부음에 참예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에게 풍성하게 쏟
아진 기름부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주님은 그리스도라 불리우고 우
리는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것이다.
1:17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 이 부언(附言)은 앞에 지나간 말을 아주 적절
하게 확인시켜 주고 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가 모든 축복에 참예하는 관문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기 때문
에, 우리가 모든 것을 그리스도로부터 찾아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이 교리적인 귀결
은 주의깊게 살펴야 한다. 우리는 각자가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을 소유하게 된다는 사실보다 분명한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믿음과
하나님을 아는 그릇은 우리가 가져와야 함을 깨닫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요한이 아무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고 말할 때, 육신의 눈으로 외모를 보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되겠다. 요한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사람이 가까이 할 수 없는 빛에
거하시기 때문에 그의 참 형상인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알 수 없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
다. 사람들은 보통 이 귀절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하나님의 위엄은 하나님 자
신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 제시하신 것을 떠나
서는 도저히 하나님을 알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은 옛날 믿음의 조상들에게도 그리스
도를 통해서만 알려졌다. 그러나 나는 복음서 저자가, 비밀스런 영광 속에 감추어 있
던 하나님께서 이제 자신을 볼 수 있게 제시하셨다는 의미에서 , 우리의 상태가 옛날
조상들의 처지보다 얼마나 더 좋은가를 대조해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그
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리울 때는, 신약의 특별한 축복을 지칭하는 것이
다. 그러므로 이 귀절에서 복음서 저자가 아버지 품 속에 계신 독생하신 아들이 감추
어 있던 것을 우리에게 나타내셨다고 말할 때, 그는 무엇인가 새롭고 신기한 것을 지
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계시를
찬양한다. 복음에 의해서 우리는 구약시대의 조상들보다 더 월등하게 구분이 되고 있
다. 바울은 이제 율법아래서 같이 없던 휘장이 가리워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얼굴 안
에서 하나님을 떳떳이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선언하면서 이 사실을 고린도후서 3장
과 4장에서 더 자세히 논하고 있다. 선지자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횃불을 넘겨 주었는
데 어떻게 조상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느냐고 반문한다면. 나는 우리에게 분정된 것
이 구약의 조상들에게 완전히 제한되었던 것이 아니라-사람들이 말하는 대로-주(主)와
종(從) 사이에 대조를 보여준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생명의 빛이 오늘
날 우리에게 환히 비치는 데 비해, 그들에게는 이 생명의 빛의 섬광이 약간 비쳤을 뿐
이기 때문이다. 만일 누가 그때에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고
이견(異見)을 제시한다면, 나는 그것이 우리가 보는 것과는 비교도 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때에는 모호하게 멀리서 자신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좀더 선명하게 나타남을 보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
들은 상대적으로 자신이 살던 시대를 두고 말했다. 그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겹겹이
쌓여있는 하나님을 보았을 뿐이다. 모세가 산 위에서 보았던(출33:23) 이상은 특별한
것이었고 다른 모든 환상보다 뛰어난 것이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고 직선적으로 선언하셨다. 이 비유의 말씀에서 하나
님께서는 완전하고 분명한 계시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했음을 보여준 것이다. 우리
는 또한 조상들까지도 하나님을 뵙고 싶을 때 언제나 그들의 눈을 그리스도에게 돌렸
던 것을 유의해야겠다. 그들이 영원한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묵상했을 뿐만 아니라 그
리스도의 약속된 출현을 향해 한결같이 마음을 다해 손을 뻗쳤다는 말이다. 이러한 이
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8장에서 "아브라함은 나의 때를 보았다"고 말씀하신 것이
다. 계승은 모순을 뜻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전에 인간이 볼 수 없던 하나님께서 이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셨다고 하는 사실은 분명한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품 속에'있었다고 말할 때, 요한은 인간적인 은유를 쓰고 있다.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비밀을 털어놓을 대상으로 품 속에 있는 사람을 말한다. 가슴은
의논의 장소다. 그래서 요한은 아들이 아버지의 가장 깊은 비밀까지 아셨다고 가르치
고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품이 활짝 열려 공개가 된 것이다.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 이 부언(附言)은 앞에 지나간 말을 아주 적절
하게 확인시켜 주고 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가 모든 축복에 참예하는 관문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기 때문
에, 우리가 모든 것을 그리스도로부터 찾아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이 교리적인 귀결
은 주의깊게 살펴야 한다. 우리는 각자가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을 소유하게 된다는 사실보다 분명한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믿음과
하나님을 아는 그릇은 우리가 가져와야 함을 깨닫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요한이 아무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고 말할 때, 육신의 눈으로 외모를 보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되겠다. 요한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사람이 가까이 할 수 없는 빛에
거하시기 때문에 그의 참 형상인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알 수 없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
다. 사람들은 보통 이 귀절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하나님의 위엄은 하나님 자
신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 제시하신 것을 떠나
서는 도저히 하나님을 알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은 옛날 믿음의 조상들에게도 그리스
도를 통해서만 알려졌다. 그러나 나는 복음서 저자가, 비밀스런 영광 속에 감추어 있
던 하나님께서 이제 자신을 볼 수 있게 제시하셨다는 의미에서 , 우리의 상태가 옛날
조상들의 처지보다 얼마나 더 좋은가를 대조해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그
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리울 때는, 신약의 특별한 축복을 지칭하는 것이
다. 그러므로 이 귀절에서 복음서 저자가 아버지 품 속에 계신 독생하신 아들이 감추
어 있던 것을 우리에게 나타내셨다고 말할 때, 그는 무엇인가 새롭고 신기한 것을 지
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계시를
찬양한다. 복음에 의해서 우리는 구약시대의 조상들보다 더 월등하게 구분이 되고 있
다. 바울은 이제 율법아래서 같이 없던 휘장이 가리워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얼굴 안
에서 하나님을 떳떳이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선언하면서 이 사실을 고린도후서 3장
과 4장에서 더 자세히 논하고 있다. 선지자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횃불을 넘겨 주었는
데 어떻게 조상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느냐고 반문한다면. 나는 우리에게 분정된 것
이 구약의 조상들에게 완전히 제한되었던 것이 아니라-사람들이 말하는 대로-주(主)와
종(從) 사이에 대조를 보여준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생명의 빛이 오늘
날 우리에게 환히 비치는 데 비해, 그들에게는 이 생명의 빛의 섬광이 약간 비쳤을 뿐
이기 때문이다. 만일 누가 그때에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고
이견(異見)을 제시한다면, 나는 그것이 우리가 보는 것과는 비교도 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때에는 모호하게 멀리서 자신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좀더 선명하게 나타남을 보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
들은 상대적으로 자신이 살던 시대를 두고 말했다. 그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겹겹이
쌓여있는 하나님을 보았을 뿐이다. 모세가 산 위에서 보았던(출33:23) 이상은 특별한
것이었고 다른 모든 환상보다 뛰어난 것이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고 직선적으로 선언하셨다. 이 비유의 말씀에서 하나
님께서는 완전하고 분명한 계시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했음을 보여준 것이다. 우리
는 또한 조상들까지도 하나님을 뵙고 싶을 때 언제나 그들의 눈을 그리스도에게 돌렸
던 것을 유의해야겠다. 그들이 영원한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묵상했을 뿐만 아니라 그
리스도의 약속된 출현을 향해 한결같이 마음을 다해 손을 뻗쳤다는 말이다. 이러한 이
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8장에서 "아브라함은 나의 때를 보았다"고 말씀하신 것이
다. 계승은 모순을 뜻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전에 인간이 볼 수 없던 하나님께서 이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셨다고 하는 사실은 분명한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품 속에'있었다고 말할 때, 요한은 인간적인 은유를 쓰고 있다.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비밀을 털어놓을 대상으로 품 속에 있는 사람을 말한다. 가슴은
의논의 장소다. 그래서 요한은 아들이 아버지의 가장 깊은 비밀까지 아셨다고 가르치
고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품이 활짝 열려 공개가 된 것이다.
1:19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 지금까지는 복음서 저자가 그리스도에 대한 요한의
일상적인 전도에 대하여 이야기 했다. 이제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의 전도 가운데 좀
더 두드러진 예를 들고 있다. 이 증거는 제사장들의 사신들이 듣고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요한이 하나님께 그를 보내신 이유를 공적으로 고
백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제사장들이 왜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심문(尋問)하
는지 그 이유를 묻게 된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추리는 제사장들이 그리스도를 미워한
나머지 요한에게 거짓된 영예를 부여했다는 것인데,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때까지 그들
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다른 이들은 요한이 제사장의 반렬에서 나왔기 때문에 제사장
들이 그를 더 좋아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도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그리
스도에게서 모든 형통을 바라던 그들이 스스로 거짓 그리스도를 만들어 낼 이유가 없
지 않은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들이 다른 이유로 마음이 움직인 것 같다. 오랫동안
이들은 선지자가 없이 지내왔다. 그런데 요한이 갑자기 예기치 않게 나타났다. 사람들
의 마음은 흥분되고 기대에 차 있었다. 더군다나 사람들은 모두 메시아의 임재가 가까
이 왔다고 믿고 있었다. 이와 같이 중요한 문제를 소홀히 하거나 가장함으로써 제사장
의 맡은 바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해서, 제사장들은 요한에게 그의 신분을 물었
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처음에는 제사장들이 악의에서 행동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속을 갈망하는 마음에서, 그들은 요한이 그리스도가 아닌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교회의 일반적인 질서를 변화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사장의
권한을 행사하려는 욕망이 그들에게 크게 작용하고 있었음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들에겐 그리스도의 영예를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준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들은
제사장의 직분에 어긋나게 행동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교회
정치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자신을 경솔하게 내세우지 못하도록 경계하고 새
로운 종파의 창시자가 일어나지 않나 살피고 백성 중에 믿음의 통일이 무너지지 않도
록 유의하고, 아무도 새로운 이방 예식을 도입하지 못하도록 돌볼 책임이 있었다. 그
러므로 요한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모든 이의 마음을 흥분케 했다. 그
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가운데 명령된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에 대한 증거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1: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 다시 말해서, 요한은 숨기거나 피하거
나 외식하는 기색이 없이 공개적으로 고백했다. 먼저 '드러내어 말하고'(confess)는 일반적으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한다는 뜻이다. 두번째 '드러내어 하는 말'은 그의 고백의 형태를 표현하기 위해 되풀이된 말이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힘주어 답변했을 것이다.
1:21
네가 엘리야냐 - 왜 사람들은 모세보다 엘리야를 언급하고 있는가? 그것은 메시
아가 일어날 때, 엘리야가 그의 새벽 별이 되리라는 것을 그들이 말라기 4장 5절에서
배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거짓된 전제 하에서 이 질문을 던졌다. 영혼의 회
귀를 믿는 그들은, 말라기 선지자가 엘리야가 보냄을 받으리라고 선언했을 때 아합의
치하에서 살았었던 그 엘리야가 다시 오리라고 상상했던 것이다. 따라서 요한은 자기
는 엘리야가 아니라고 뜻있는 말을 써서 적절하게 답변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요한
을 엘리야에 버금가는 참된 선지자로 풀이해서 설명하고 있다(마11:14).
네가 그 선지자냐 - 에라스므스는 선지자라는 말을 그리스도에게 국한시키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이 귀절에서 그 선지자라고 관형사를 쓴 것은 별 비중을 차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사장들의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 잠시 후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이 그리스
도가 아닌 다른 선지자를 뜻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 다
른 인격이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또 그 보냄을 받은 이들이 요
한에게 그가 옛날 선지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묻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
러한 해석도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 선지자라는 말을 할 때, 그들은 묻고
있는 것이다. 그가 자기는 선지자가 아니라고 부인할 때 그는 겸손한 마음에서 그리한
것이 아니라 솔직하고 진지하게 선지자들의 수에서 자신을 분리시키고 있다. 그러나
요한의 이러한 대답은 그리스도의 요한에 대한 묘사와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
도는 요한에게 선지자의 칭호를 부여하고 있으며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마
11:9)고 덧붙이고 있다. 위의 모든 말씀으로 주님께서는 요한의 가르침에 대한 권위와
신빙성을 높이고 동시에 요한에게 맡겨진 직분의 우월함을 찬양하고 있다. 그러나 이
귀절에서 세례요한은 자신은 개인적인 사명을 받은 바가 없으며 다만 그리스도의 전령
(herald)으로 임명을 받은 사람임을 보여줄 뜻을 갖고 있다. 이것은 은유에 의하여 더
욱 분명해질 것이다. 심지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로 보냄을 받는 대사(大使)도 개인
적인 사명을 띨 때는 대사의 이름과 권위를 부여 받는다. 특별한 예언의 말씀을 받았
던 모든 선지자들은 이와 같이 그들의 선지자적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굉장히 비중
이 큰 중요한 문제가 발생해서 두명의 대사가 파송된다고 가정하자. 둘 중 한 명의 대
사가 와서 곧 다른 대사가 전체적인 일을 타협하러 올 때, 그분은 모든 일을 처리할
사명을 띠고 있다고 선포한다. 그러면 이 먼저 온 대사가 나중에 파송될 대사의 일부
로 간주되지 않겠는가? 요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부터 그리스도를 위해 제자들을
예비하라는 사명을 받았을 뿐이었다. 이러한 의미는 이 문장의 전체적인 문맥에서 쉽
게 탐지해 낼 수 있다. 우리는 곧 이어 나오는 문장을 유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요한
은 "나는 선지자가 아니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말한다. 주의 일을 예비
하라고 외치는 소리는 특별히 자기만의 소명을 부여받은 특별한 선지자가 아니라, 말
하자면, 차관(次官)과 같은 신분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의 전도는 다른 선생의 말
에 귀를 기울이도록 유도하는 일종의 준비였다. 따라서 요한은 모든 선지자보다도 나
은 자였지만, 그 자신이 선지자는 아니었다.
1:23
외치는 자의 소리 - 사역이 주어지지 않았는데 가르치는 직분을 이행한다면 경솔
한 언동이 되기 때문에, 요한은 자기의 기능과 사명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이사야 40
장 3절의 증거로 이를 확인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 외에
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사야는 여기서 요한만을 이야기하고 있느
느 것이 아니다. 그는 교회의 회복을 약속하면서 주님을 위해서 길을 평탄케 하라고
명하는 즐거운 소리가 들릴 것을 예언하고 있다. 비록 그가 백성들을 바빌론의 포로
생활로부터 되돌아오게 하는 데 하나님의 관여하심이 있을 것을 예언하고 있지만 이
말씀이 참으로 이루어진 것은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
께서 가까이 오셨다고 알려준 전령들 가운데 요한이 으뜸이었다. 어떤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소리'(voice)라는 낱말을 가지고 철학적으로 왈가왈부하는 것은 가치가 없는
일이다. 요한의 임무는 외치는 것이었기 때문에, 요한은 소리라고 불리운다. 이사야는
비유적으로 교회의 황량한 폐허 상태를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을 막는 광야하고 불렀
다. 포로된 백성이 돌아올 길이 막혀 있는 것 같지만 주님께서 길이 나 있지 않은 광
야에 길을 찾아주시겠다고 말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요한이 나가서 설교했던 실제 그
광야는 아무런 구원의 소망이 보이지 않던 쓸쓸한 광야에 대한 비유이며 모형이었다.
여러분이 이 말씀을 대조하여 생각한다면,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이 의곡되지 않은 것
을 곧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불행에 처져 있는 백성들의 눈 앞에 예언의 거울
을 놓아주듯이 모든 것을 예비해 주셨던 것이다.
1:23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 복음서 저자는 그들이 그 당시 교회내에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바리새인들이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레위 족속 가운데 어떤
힘없는 존재가 아니라 권세를 부여받은 권력자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요한에게 그의
세례에 대해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보통 사역자들 같았으면 아무런 대답을 들어도 만
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사람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함부
로 새로운 예식(세례)를 소개하려고 한다고 그의 무모한 행동을 힐난했다.
1:24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 복음서 저자는 그들이 그 당시 교회내에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바리새인들이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레위 족속 가운데 어떤
힘없는 존재가 아니라 권세를 부여받은 권력자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요한에게 그의
세례에 대해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보통 사역자들 같았으면 아무런 대답을 들어도 만
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사람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함부
로 새로운 예식(세례)를 소개하려고 한다고 그의 무모한 행동을 힐난했다.
1:25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 그들이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
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라고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을 때, 바리새인들은 아주 날카
롭게 따진 것 같다. 누구나 세례의 예식을 설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권
한은 메시아의 수중에 있는 것이다. 앞으로 올 메시아에 대해서는, 그가 오면 나라와
교회를 회복하기 시작할 것이라는 견해를 당시 바리새인들은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직분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도 인정했다.
그러나 그들은 요한이 세례를 주는 것은 불법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왜냐하면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공개적인 직분을 부여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요한은 그들
이 꿈꾸고 있는 엘리야가 아닐지라도, 말라기 4장 5절에 언급되어 있는 엘리야를 요한
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잘못을 범했던 것이다.
1:26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 이는 그들의 잘못을 시정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가르침이 아무리 좋다 해도 귀가 먼 사람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요한이 그들을
그리스도에게 보내어 그리스도가 이미 그들 중에 계시다고 선언했을 때, 요한은 하나
님께서 임명하신 사역자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회복을 증거하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참 에리야임이 드러난다. 여기에는 대조(對照)가 완전히 나타나 있지 않다. 그리스도
의 신령한 세례가 요한의 외적인 세례와 분명히 대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의 세로 대한 언급이 곧이어 뒤따르고 있다. 과연 복음서 저자는 곧 그리스도의
세례를 말하고 있다.
이 대답에는 두 가지 요점이 들어 있다. 요한은 자기에게 합당한 것 이상의 것을 주
장하지 않는다. 그의 세례의 창시자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이 예식의 진리는 그리
스도에게 있다. 둘째로, 요한에게는 외적인 형상을 다스리는 것 밖에 권한이 없었다.
모든 능력과 효능은 그리스도 한 분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세례를
변호했다. 세례의 진리는 다른 분에게 있지만 그는 자기의 세례를 옹호했다. 그는 그
리스도의 가치를 높이 찬양함으로 사람들이 구분만을 바라보도록 유도하고 있다. 어떤
사역자가 스스로 주장하는 모든 권세를 그리스도에게서 빌려 쓰면서 모든 권한과 능력
을 그에게 돌릴 때 그것은 최상의 자제(自制)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는
우리의 세례와 다르다고 생각하는 극히 어리석은 실수가 범해져 왔다. 요한은 여기서
자기의 세례의 효용에 대해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만 자신의 역할과 그리
스도의 역할을 비교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세례에서 차지하는 우리
의 역할이 무엇이고 그리스도의 역할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만이 세
례가 뜻하는 바를 행하는 분이요 우리는 세례를 집행하는 데 그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성령은 이 예식에 대해서 두 가지 방법으로 말하고 있다. 때때로 성경
은 세례가 '중생의 놋 대야'(딛3:5)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거기서 우리의 죄가 씻음
을 받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인 바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옛 사람이 십자가
에 못박히고 새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 다시 살아난다. 이러한 예에서 세례는 그리스도
의 능력을 인간의 사역과 연합시키고 있다. 이때 세례를 베푸는 사역자는 그리스도의
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모양의 표현은 인간이 스스로 성취시킬 수 있는 것
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인간과 증거(세례)를 그의 도구로
써서 이룩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인간은 걸핏하면 미신에 빠지
고 그리고 내재적인 교만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탈취하여 자신이 그 영광을 누리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이 모독적인 교만을 꺽기 위해 이 귀절에서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와 사역자를 구분하여 사역자(minister;使役者)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너희 가운데......한 사람이 섰으니 - 요한은 그들이 특별히 유의했어야 할 그리스
도를 알지 못하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견책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항상 조심스럽게 사
람은 그의 사역의 근본이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나아오지 않으면 그의 사역에 대해 아
무 것도 알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다고 말
하여, 그들로 하여금 주님께 대하여 알고 싶은 마음이 생기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 말
을 요약하면,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받으셔야 할 그 귀한 영광을 잘못하여 자신이 극히
적은 부분이나마 받게 되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의 자기 비하(卑下)를 원하였다. 사람
들의 비뚤어진 의견에 의해서 자신이 정도 이상으로 칭찬을 받을 때 그는 자주 위의
말을 되풀이하였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1: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 그는 여기서 두가지 사실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
스도께서 시간적으로는 요한보다 후에 사람들 앞에 나타나셨으나 그러나 존업과 인격
의 정도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요한을 훨씬 능가하고 계신다.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그를 높이, 그리고 우선적인 위치에 두셨기 때문이다. 곧 이어서 그는 세번째 요소를
지적하는데,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보다 우선적으로 선재하신 것은 그가 다른 사람보
다 뛰어나다는 것이 정당하기 때문이다.
1:28
이 일은......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 - 장소를 언급한 것은 이 내용을 확실하게
할 목적뿐만 아니라 이러한 대답을 사람들이 운집(雲集)한 가운데서 했다고 우리에게
알려줄 목적이 있었다. 많은 사람이 요한의 세례를 받으러 나왔는데, 이곳은 그가 늘
세례를 베풀던 장소였다. 이곳은 또한 요단을 가로지르는 '통로'로도 생각된다. 사람
들은 이러한 뜻에서 이 지명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
때 요단 강 물 사이로 길을 열어 주셨으므로(수3:13) 백성들이 통과했던 그 유명한 통
로가 이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견을 택한다. 또 다른 이들은 이 지명은 '베다
바라'라고 읽어야 마땅하다고 한다.어떤 사람들이 이곳의 지명을 '베다니'라고 하나
그것은 실수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베다니가 예루살렘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음을
곧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형 학자들이 기술하고 있는 '베다바라'의 위치는 복음
서 저자의 표현과 제일 잘 일치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지명의 발음에 대하여 논쟁을
벌일 생각은 없다.
1;29
이튿날 - 요한이 전에도 그리스도의 출현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오셨을 때 그는 자기가 선포한 내용이 즉시 알려지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의 전도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가까이 왔다. 그것
은 해가 돋으면 즉시 새벽이 사라지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요한은 제사장들이 보낸
사람들에게 자기가 베푸는 세례의 진리와 능력을 대표할 분이 이미 백성들 가운데 생
활하고 있음을 증거할 때, 그 이튿날 그분을 공개적으로 알린다. 이 두가지 행동은 연
속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더 힘있게 역사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이 있는 곳에 나타나셨던 것이다.
보라......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 그리스도의 가장 중요한 직분이 간결하고 명확
하게 설명되었다. 자신을 죽음의 제물로 드려 세상 죄를 담당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
도께서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다른 축복을
내려 주신다. 그러나 다른 모든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제일 중요한 축복은 그리스도께
서 하나님의 진노를 그치게 하심으로 우리를 의롭고 깨끗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모든 축복의 근원은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
로 영접하는 것이다. 따라서 요한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기 위하여 우리가 그
리스도를 통해 받을 수 있는 죄사함으로 시작하고 있다.
어린 양은 옛날 율법의 제물에 대한 인유(引喩)에서 비롯되었다. 요한은 유대인을
상대로 말하고 있는데, 이들은 제물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에 자리자복
있는 제물을 드리지 않는 다른 방법으로 만족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제물에는 여
러 종류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대유법을 쓰고 있다. 요한은 이때 유대인들이 유월절
에 먹던 유월절 어린 양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요점은 요한이 유대인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가장 적절하고 힘이 있는 표현 양식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
가지로, 세례의 예식으로 인하여 우리는 우리의 허물과 죄로부터 씻음과 깨끗함을 얻
었다는 말을 들을 때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 용서함을 받았다는 말이 무엇을 뜻
하는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동시에 모든 유대인은 제사에 대해 한결같이 미신적
인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요한은 지나가는 말로, 그들이 바치는 제물이 무엇을
지시하는지를 상기시킴으로 그들의 잘못을 시정하고 있다. 외적으로 보이는 징조에 믿
음의 근거르 마두는 것은 제사를 매우 악하게 남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요한은, 그리
스도르 마내세우면서 그분이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이를 통해 요한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따라 바치는 어떠한 제물도 전허 죄를 속할 수 있는 힘이 없으며,
그런 것들은 그림자와 모형에 불과할 뿐 참 본질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었다고 말하
고 있다.
죄(sin) - 요한은 '죄'라는 말을 단수로 쓰고 있다. 하나님과 인간을 분리시키는 어
떠한 불의도 모두 그리스도께서 지고 가셨다는 뜻이다. 그리고 세례요한이 '세상 죄'
라고 말할 때, 유대인들이 이 구속주는 자기들에게만 보내심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못
하도록 이 은혜를 차별 없이 전 인류에게 베풀고 있는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전 세
계가 같은 정죄 아래 놓여 있으며 모든 사람이 예외없이 하나님 앞에 불의의 판결을
받고 있기 때문에 화해할 필요가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요한은 일반적인
세상 죄를 말함으로써 우리의 비참한 상태를 느끼고 그 해결책을 찾도록 우리를 권면
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에게 베풀어진 은혜를 받아들여야 한다. 각 사람은 믿음
으로 그리스도에게 나가기만 한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하지 못할 방해물이 전혀 없
음을 깨달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요한은 죄를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을 선포하고 있다. 우리는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사람들의 양심이 죄책을 느낄 때 모든 사람은 죄사함을 받기 위해 열심
히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수많은 화목제물을 바침으로 이들은 그 제물이
하나님의 진노를 쉬게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산발적으로 드렸던 모든 화목제가 거룩
한 태초에 시작되었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제사와 제물을 드리도록 인간에게 명령하셨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각자 하
나님의 진노르 마가라앉히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그러나 요한은 우리를 불러 그리스
도 한분에게로 유도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축복을 통해서만 우리와 화
목될 수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 한 분 만이 죄를 없게 하시기 때문이
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에게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는 길 이외의 다른 길을
남겨두지 않으셨다. 이런 식으로, 요한은 모든 인간적인 만족과 보상과 속죄 방법을
배격하고 있다. 그런 것들은 마귀의 간계에 의해서 조작된 불경건한 고안에 불과한 것
이기 때문이다.
'지고 가는'이란 말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억누르고 있
는 죄짐을,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나무에 달려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라고 한 것
처럼, 친히 자기 몸에 담당하시고 이사야 53장 5절에서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라고 말씀한 대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고 우리 죄를 용서해 주셨다. 그
러나 후자에 죄를 용서하셨다고 한 것은 전자의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는 사실에 근거
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기꺼이 두가지 뜻,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지심으로 우리
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비록 죄가 우리 안에 계속 거하고 있지
만, 하나님의 판단 아래에서는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죄는 그리스
도의 은혜에 의해서 소멸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우리에게 돌리시지 않
기 때문이다.
나는 크리소스톰(Chrysostom)이 나타내는 점이 동사가 현재 시제로 되어 있어 계속
되는 행동을 의미한다고 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한번 다 이루어진 것은 영원히 지
속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죄를 지고 가셨다고 말할 뿐 아니
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으신 선한 행위로 말미암아 우리와 화목케 하신 방법을
말하여 주고 있다. 이것이 요한이 어린 양이라는 말을 통해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
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으로 직접 나아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이 우리의 모든 죄를 제
거하시는 유일한 희생 제물임을 믿을 때,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
하게 된다는 사실을 배우자.
1;30
내가 전에 말하기를......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 요한은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고 그리스도를 선언할 때 그는
모든 것을 줄여서 종합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에서 우리는 요한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전령에 불과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로부터 또한 그리스도께서 메시아가
되심이 확실해진다. 세 가지가 여기에 언급되어 있다. 그가 내 뒤에 한 사람이 온다고
말할 때 그는 그 뒤에 오시는 분을 위해서 길을 예비하기 위해 시간적으로 그리스도보
다 먼저 있었음을 뜻한다. 요한은 "보라......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라고 한 말라기의 증거에 따라 주의 길을 예비하러 왔었던 것이다. 요한이 그리스도께
서 자기보다 앞섰다고 말할 때, 그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구속주의 임무를 수행토록 세
상에 보내실 때 아들에게 입혀주셨던 영광을 가리키고 있다. 끝으로 그리스도께서 영
광과 권위 면에서 세례 요한보다 우위에 계시다는 이유를 대고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
께서 그리스도에게 부여한 영광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고 그의 영원하신 영광의 마땅한
분복(分福)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가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
이라"고 한 표현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1: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 그의 증거가 호의나 우정으로 인한 것이 아님을 분
명히 하기 위해,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그에게 온 것 외에 그리스도에 대한 어떠한 지
식도 갖고 있지 않았다고 선언함으로써 위와 같은 의심을 미리 배제하고 있다. 이를
종합해서 말하자면 요한은 자기 자신의 깨달음에서 말한 것도 아니요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한 것도 아니며, 오직 성령님의 감화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말했다는 것이
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 라고 그는 말한다. 다시 말해, "나는 그리스도
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기 위해 이러한 직분에 부름을 받고 임명을 받았다."복음서 저
자는 이를 나중에 아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요한이 그
리스도를 알게 되었다고 간증할 때 이 사실을 요한은 확신한 것이다. "나는 세례를 주
러 왔다"고 여기에 있는 말씀 대신에, 그는 보내심을 받았다고 직설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교회의 정규적인 사역자를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 뿐이기 때문이다. 요청
을 받지도 않았는데 자기를 내세우는 자는 그가 아무리 학문에 능하고 웅변에 뛰어나
다 하더라도 아무런 권위를 주장할 수 없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한이 정기적으로 세례를 베풀기 위하여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야 했듯
이, 우리는 예식을 새로이 설정하거나 집행할 아무런 권리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
러한 권리는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의 세례를 증거하기 위하
여 다른 기회에 그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를 묻고 있다(마21:25)
1:32
내가 보내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 이것은
일방적이고 비유적인 표현이다. 아니면 무슨 눈으로 그가 성령을 보았을 것인가? 그러
나 비둘기는 성령의 임재에 대한 확실하고 분명한 표시이니만큼, 비둘기는 환유적으로
성령으로 불리운다. 비둘기가 실제로 성령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성령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상징주의는 성찬 예식에서 흔히 있
는 일이다. 왜 그리스도께서 떡을 자기 몸이라 부르시는가? 사물의 이름이 예식에 적
절히 이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 사물이 의미하는 것 그 자체가 우리에게 부여
된 것으로 그 상징(sign)이 확실하고 참된 보증이 될 때는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우리
는 하늘과 땅에 충만하신 성령님이 비둘기 아래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되겠
다. 성령님께서는 이러한 광경으로 그의 눈 앞에 보인 것이 헛된 일이 아님을 요한으
로 알게 하기 위하여 그의 능력으로 나타나셨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리스도
의 몸이 떡덩이에 매여있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참예함을
즐기는 것이다.
자, 그러면, 성령이 왜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나셨는가? 우리는 항상 여기에 상징과
실재 사이에 비유(比類)가 있음을 기억해야 겠다. 성령이 사도들에게 내렸을 때, 그들
은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을 보았다(행2:3). 복음의 도(道)는 전 세계 모든 방언
(tongues;혀)으로 전파되어야 하며, 불의 힘을 가지고 전파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러나 이 귀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42장 3절에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라고 찬양했던 그리스도의 온유함을 공적으로 드러내고 싶
으셨던 것이다. 이것은 성령이 그리스도 위에 내려진 것을 본 최초의 경험이었다. 그
렇다고 그 전에는 그리스도에게 성령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제 말
하자면 엄숙한 예식으로 거룩해지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30년 동안 하나의
개인으로 숨겨진 채 생활하셨음을 안다. 그가 출현할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했기 때문
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세상에 알리기를 원하셨을 때 그는 세례로 시작하
셨다. 그러므로 그가 이때 성령을 받은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 그의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모든 충만한 은사가 모두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을 우리로 알게 하기 위하여 눈에 보이기 임하셨던 것이다. 세
례 요한의 말에서우리는 이를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요한이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
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고 말할 때,
이는 그가 성령이 볼 수 있는 형태로 보였고 주님께서 그의 충만함으로 그의 백성들에
게 복을 내려 주기 위해 그리스도 위에 머물게 하였던 것이나 다름이 없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
로 효력을 발생케 하시고 그리함으로 그 예식이 헛되거나 타당성이 결여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그리스도께서는 이를 그의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신다.
1:33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 여기에 어려운 의문이 일어난다. 요한이 그
리스도를 알지 못했다면, 왜 그에게 세례 베풀기를 거절하였을까? 그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터인데"(마3:14)라고 말하지는 않았
을 것이다. 어떤 이는 요한이 그리스도를 특출한 선지자로 존경했지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 줄은 알지 못했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이것은 명확하지 못한 해답이다. 사람은
누구나 사람을 외모로 취함이 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야 한다. 인간의 어떠한
우수함이나 권위도 그것이 우리의 직분을 수행하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요한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면 그는 하나님과 그의
세례를 그르쳤을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그 이전부터 그리스도를 알고 있었다. 우
선, 우리는 이것이 가까이 서로 친숙하게 지내던 관계에서 생긴 앎이라는 것을 유지
(維持)해야겠다. 비록 요한이 그리스도를 보자마자 그를 알아보았지만 그들은 보통 인
간적인 우정의 관계에서 서로 안것이 아니다. 요한의 앎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 것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요한은 성령을
보는 것이 그를 알아볼 수 있는 신호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
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를 때에도 아직 성령을 보지 못했다. 성령이 그리스도에
게 비둘기 같이 내린 것은 확증을 위해서 추가된 것이며, 요한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의견에 기꺼이 동감한다. 물론 그것을 본 것
은 요한 혼자 뿐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우리를 위해서 본 것이다.
부우처(Bucer)는 출애굽기 3장 12절에서 모세가 한 말을 적절히 인용하고 있다. "사흘
길쯤 간 후에 이 산 위에서 제사를 드리라 이것이 너에게 증거가 되리라." 그들이 애
굽을 떠날 때 물론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말한 대로, 그후에 확증을 얻은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요한에게도 그
전에 주어졌던 계시에 첨가된 것이다.
1: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 이 내용에서 좀 의심스러운
것은 요한이 아무 것도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세상에 증거하실 일들에 대해 철저하고 심오한 지식 베풀기를 기뻐하셨다. 그리고 요
한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한 것은 유의할 만하다. 성령을 주신 분이
그리스도가 틀림없으며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영광과 직분은 다른 사람에게 속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36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 기 귀절에서 내가 이미 말한 바, 즉 요한이 자기
생애의 종말이 가까와오는 것을 느끼고 계속 영광의 횃불을 그리스도에게 넘겨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 더욱 분명히 드러나 있다. 그의 인내는 그의 증거에 큰 비중을
더해 준다. 그러나 요한은 날이면 날마다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일을 계속하면서, 이제
자기의 달려갈 길이 끝났음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여기서 교회의 시작
이 얼마나 미약한 것이었는가를 볼 수 있다. 요한은 과연 그리스도를 위해 제자들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 때까지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주님께
는 두명의 이름없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것까지도 그리스도
의 영광을 빛나게 하였다. 짧은 기간 내에 주님께서는 인간의 능력이나 많은 무리의
도움을 받지 아니하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방법으로 그의 나라를 확장하셨던 것
이다. 우리는 또한 요한이 사람을 어느 곳으로 인도하든지-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을
받을 수 있도록-를 특별히 살펴보아야 한다. 제자들이 자기에게 나아오도록 그리스도
께서 직접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제 그들이 왔을 때 그는 친절
하게 그들을 권하고 격려한다. 주님은 그들이 먼저 말할 때까지 기다리지 아니하시고
그들에게 "무엇을 구하느냐?"고 묻는다. 과거에 두사람에게 던졌던 주님의 이 친절하
고 마음을 사로잡는 초대의 말씀은 이제 모든 사람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가 그를 간절히 찾는 것은 보시기만 하면, 그리스도께서 쉽게 그에게 나
아갈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숨기거나 거절할리가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결코 주님은
우리를 저버리지 않는다. 주님은 우리의 갈구하는 노력을 돕기 위해 그의 손을 뻗치신
다.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멀리서 찾으시는 그분께서, 방황하는 죄인들을 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 자기에게 나오는 자들을 달려나가 맞아주시지 않는가?
1:38
랍비여 - 이 칭호는 높은 계층에 있는 사람이나 명예로운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보통으로 주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는 여기서 랍비에 대한 당시의 용법
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에 랍비는 하나님의 말씀의 교사(선생)들이나 해석자들을 가리
키는 말이었다. 비록 그들은 아직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유일한 선생이 되심을 몰랐지
만, 요한이 주님에 대하여 한 말에 감동을 받아, 그리스도를 선지자와 선생으로 간주
하고 있다.
어디 계시오니이까 - 이같은 보기에서 우리는 교회의 초창기부터 전진하고 싶은 욕
망을 불러 일으킬 그리스도를 향한 취지를 터득하도록 가르침을 받고 있다. 우리는 지
나치면서 한 번 본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자기의 손님으로 영접할
수 있도록, 그의 거처를 찾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먼 거리
에서 복음을 슬쩍 냄새만 맡고 그리스도를 갑자기 지나치게 한다면 그렇게 해서 그리
스도에 대하여 배운 것은 무엇이나 스쳐 지나가 버린다. 비록 이때 그들이 주님의 완
전한 제자가 되지 않았지만, 그날 밤 주님께서 그들에게 좀더 상세히 가르쳐 주실 것
은 틀림없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이 완전히 헌신적으로 그를 따르도록 인도하셨다.
1:39
때가 제 십시쯤 되었더라 - 다시 말해 해가 지기까지 두 시간 밖에 남지 않은 저
녁이었다는 말씀이다. 이 당시 하루 낮은 12시간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겨울에는 낮이
짧고 여름에는 낮이 길었다. 이 시간의 기록에서 우리는 그 두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에 비해 더 긴밀히 알기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하루 밤을 유숙하는
것을 개의치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따.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대부분이 이들과 다르
다. 우리는 주님께 대해 알아보는 일을 한없이 지연시킨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어려움이 많기 때문이다.
1:40
두 사람 중에 하나는......안드레라 - 이 복음서 저자가 이 장 마지막까지의 기록에서 목표하는 바는 제자들이 어떻게 한 명씩 그리스도에게 인도 되었는가를 알려 주자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후에 빌립과 나다나엘에 대한 소개를 덧붙이고 있다. 안드레가 즉시 그의 형제를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는 것은, 빛을 받은 후 이를 안에 숨겨두거나 소멸할 수 없는 믿음의 특징을 잘 표현하는 것이다. 믿음은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안드레는 겨우 조그만 빛을 받았을 뿐이다. 그런데 그는 즉시 그의 형제를 깨우친다. 안드레보다 더 많은 빛을 받은 우리가 다른 이로 같은 은혜에 참예케 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무관심에 화가 있지 않겠는가! 우리는 안드레에게서 이사야가 하나님의 자녀들로부터 요구하는 두가지를 유의할 수 있다(사2:3). 각 사람이 그 이웃의 손을 잡고, 그 이웃에게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그가 그 도를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안드레가 바로 이러한 목적으로 그 형제에게 손을 내밀어, 그리스도의 학교에 동료 학생이 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을 유의해야겠다. 그리스도는 안드레의 소개와 사역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있어 훨씬 더 유명하게 될 베드로를 원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월등하고 뛰어난다 할지라도 우리보다 열등하고 낮은 사람에게서 배우는 것을 거절해서는 안되겠다. 주님은 인간적인 멸시로 인해 그리스도에게 나아올 생각을 않는 강박하고 교만한 사람을 엄하게 심판하실 것이다.
1:41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 복음서 저자는 이 메시아라는 말을 헬라어로 번역하여
유대인의 비밀(신비)이었던 것을 전 세계에 전파되도록 하였다. 이 말은 기름부음을 받아 왕이 된 것처럼, 왕들에게 보통 붙는 칭호였다. 그러나 이들은 한 큰 항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아 자기들에게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 주리라고 바라고 있었다. 특별히 이들이 다윗의 지상 왕국이 영구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메시아를 구하게 되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갖가지 환난에 시달려 지쳐있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움직여 메시아를 바라게 했던 만큼,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의 오심이 임박했음을 더욱 분명히 보여 주셨다.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해서는 다니엘의 예언이 다른 것보다 더 분명하다(단9). 왜냐하면 다니엘은, 그 이전의 선지자들이 그리스도를 왕에게 관련시킨 것과 달리, 구속주 한 분에게만 관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속자와 메시아를 연관시키는 방법이 더 우세하여, 메시아나 그리스도가 언급될 때마다 그들은 그를 구속주로 이해했다. 그래서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자는 '메시아가 오면'이라고 말한다. 그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바라고 기다리던 분이 그와 같이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영접되었다는 것은 더욱 신기한 일이아닐 수 없다.
1:42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 그리스도는 시몬에게 이름을 주는데, 보통의 경우처
럼 지나간 과거에 기초해서나 주님께서 그 안에서 본 것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 그를
베드로로 만들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그는 "네가 요한의아들 시몬이니"라고
말한다. 그는 시몬의 아버지의 이름을 축소형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름이 외
국어로 번역될 때 흔히 있는 말이었다. 마지막 장(章)에서 시몬이 요한나(Johanna)나
요한(John)의 아들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지금 현재의 그가 앞으
로의 그와 매우 다르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으로 집약된다. 주님은 시몬의 아버지
가 높은 명망이 있어서 그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베드로는 사
람들에게 아무런 존경을 받지 못하는 무명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배경이 시몬을 '불굴의 의지'의 사나이로 만드는 것을 막지는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신
다. 복음서 저자는 따라서 시몬에게 새로운 이름이 주어질 것이라는 예언으로 기록하
고 있다. 나는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앞으로 베드로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주님께서 또 그에게 준다고 미리 말한 내용이 있기 때문에, 하나의 예언적인 말씀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이제 주님은 일종의 경구(警句)를 쓰면서, 주님은 자기가 후에 베드
로에게 주기로 작정한 은혜를 찬양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현재 이름이 아니
고, 앞으로 그의 이름이 될 것을 예언하셨다.
장차 게바라 하리라 -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
기 위하여 건축 자재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터를 닦은 모든 신령한 성도들, 즉 모든 베
드로에게 해당되는 말슴이다. 그러나 베드로의 우월함이 뛰어난 가운데 그만이 이렇게
불리운다. 그러나 가톨릭 교도들은 베드로가 다른 사람들처럼 그리스도 위에 터를 닦
지 않은 특별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를 교회의 기초로서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
히고 있다. 이것은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이 하나의 돌에서 머리를 만들어
내는 것을 생각하면 천주교인들은 두 배로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 그라티안
(Gratian)의 광상적인 문장 가운데, 이 헛소리에 의하면 히브리어 표현을 헬라어로 바
꾸고 * (케파레)를 게바(Cepha)와 혼동시킴으로, 베드로가 교회의 머리로
임명되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게바(Cepha)는 히브리어라기보다 아랍어였다. 그
러나 그것은 유대인들이 바빌론에서 돌아온 이후에 흔히 쓰던 발음이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에는 어떠한 모호성도 없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가 감히
기대할 수도 없는 것을 약속하심으로, 그의 이런 처지나 상태가 그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베드로에게 그의 은혜를 베푸셨다. 이 은혜는 모든 세대에 대대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 조그마한 그러나 괄목할 만한 칭호는 베드로가 새
사람이 되었음을 선언하고 있다.
1:43
나를 쫓으라 - 빌립의 마음은 이 한 마디 말씀을 들었을 때 그리스도를 따르고 싶
은 욕망으로 불이 붙었다. 이에서 우리는 말씀의 효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유추하게
된다. 그러나 말씀이 효능은 모든 사람 속에 똑같이 나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에게 강권하시지만 반응이 없다. 그들에겐 하나님께서 헛소리로 귓전을 울리
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외적으로 말씀을 전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는 열매가
없는 것이다. 그 말씀이 잃어진 영혼에 치명상을 입혀 그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변명
할 여지가 없이 만들 때가 아니면 하나님 말씀이 허공을 치는 수가 있다. 그러나 성령
의 숨은 은혜가 죽은 영혼을 깨우칠 때는 결국 모든 지각이 눈을 뜨게 되어 사람은 하
나님께서 어느 쪽으로 부르시든 그 지시하심을 따를 준비를 갖추게 된다. 그러므로 우
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같은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도록 그에게 간구해야 한다.
물론 빌립이 그리스도를 따른 것은 특별한 것이었다. 그는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나를
쫓으라'는 명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의 친밀한 동료로서, 떨어질 수 없는 동무로
서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인 부름의 한 형태인 것이다.
1:44
벱새다 사람이라 - 이 동네의 이름은 이 세 제자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더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 언급된 것 같다. 우리는 다른 성경 기록에서 그리스도께서 혹독
하게 이 동네를 저주하시고 경고하신 것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그와같이 불의하고 사
악한 부류의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의품에 영접되었다는 것은 그들
이 지옥에서 불려나온 것으로 간주해 마땅하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와 같은 무저
갱(無底坑)에서 구조된 죄인들을 사도로 임명할 정도로 귀한 영광으로 이끌어 주신 것
은 굉장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1;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 교만에 차 있는 자들이 교회의 시작을 아무리 멸시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처음부터 고상하고 장대했던 것보다, 이 초신자
들 안에서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조그마한 씨가 점
차 위대한 수확을 거두는 데까지 자라난 과정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안드레에게서
건축에 대한 열의를 보았다. 그런데 우리는 빌립에게서 똑같은 열심을 본다. 다른 사
람을 불러 만인의 공통된 선생으로부터 함께 배우자고 초청하는 그의 태도에는 또한
겸손이 나타나 있다.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 빌립의 믿음이 얼마나 연약한 것이었는가는 그가 그리스
도에 대해 네가지 사실을 말하는데 두 가지 실수를 한것에 잘 나타나 있다. 빌립은 주
님을 요셉의아들이라 부르고 있으며, 나사렛을 그의 고향으로 잘못 소개하고 있다. 그
러나 빌립은 참으로 자기 형제를 도와 그에게 그리스도를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하나
님께서는 그의 열심을 인정하시고 이를 성공시켜 주셨다. 과연 사람은 누구나 각자 자
신의영역을 지켜야한다. 복음서 저자는 여기서 그리스도에게 두번이나 불명예스러운
발언을 한 것이 칭찬할 만하다고 빌립을 언급한 것이 아니다.다만 복음서 저자는 그의
가르침에 흠과 오류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의 유일한 목표는 그리스도를
참으로 알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런대로 유용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빌립
은 어리석게도 예수를 요셉의 아들이라 부르고 무식하게도 그를 나사렛 사람으로 만들
었다. 그렇지만 결국 빌립은 나다나엘을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에게 인
도했다. 그는 거짓된 그리스도를 조작하지 않았으며 모세와 선지자들이 이야기 했던
그리스도를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빌립의 경험에서, 우리가 말씀을 전할 대
제일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의 말을 듣는 이들이 그리스도엑 나아 오도록
하는 것임을 배우게 된다.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날카로운 이론을 전개한다. 그러나 그들의 교묘하고
난해한 이론에 파묻힌 그리스도는 찾아볼 수가 없다. 이와 같이 가톨릭 교도들은 그리
스도가 요셉의 아들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의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그의 능력을 빼앗아
내고 그 대신에 유령을 만들어 낸다. 좀 어리석은 점이 있더라도 빌립과의 서투른 대
화를 통하여 참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현명하고 인상적인 언어를 나열하여 픽션
(虛構)을 지어내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그렇다. 오늘날 가난한 범인들로서, 말이
서툴고 기교를 부릴 줄 모르지만, 고매한 상상력과 이론을 가지고있는 교황의 모든 신
학자들보다 더 충실하게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므로 이 귀
절은 무식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정확하지 않게 전하는 것이 있
다 하더라도, 그들이 무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이라면 이를 멸시하고 비웃어
서는 안된다고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의 그릇된 상상과 혼동에 의하여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항상 율법과 선지자들로부터 그리
스도에 대한 순전한 지식을 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1:46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 나다나엘은 빌립이 제시한 그리스도의
출생지에 자극을 받아 이렇게 되묻는다. 그러나 나다나엘은 빌립의 경솔한 말에 속은
것이다. 빌립이 어리석게 생각했던 것을 나다나엘은 확실하게 받아들였다. 여기에 나
사렛에 대한 증오나 멸시감에서 나온 비판이 첨가되고 있다. 우리는 이 두가지 점을
주의깊게 살펴보아야겠다. 이 거룩한 사람은 자기 면전에서 그리스도께로 가는 문을
닫는 실수를 저지를 뻔 했다. 왜 그랬겠는가? 나다나엘은 빌립이 그리스도에 대해 그
릇되게 말한것을 너무 빨리 믿었으며, 그는 또한 어떠한 선한 것도 나사렛에서는 기대
할 수 없다는 선입관에 사로잡혀 있었다. 우리도 크게 조심하지 않는다면 같은 위험에
빠지게 된다. 사단은 이와같은 장애물을 놓음으로 매일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나아 가
는 것을 막고 있다. 사단은 많은 거짓을 유포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복음을 의심하고
싫어하게 만들기에 광분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우리로 복음을 더 알아보지 못하게 만
드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로 그리스도를 경멸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사단이 우리
앞에서 거두지 않는 또 하나의 거침돌이 있다. 우리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그의 지체
들 안에, 비천하고 낮은 십자가가 많은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는것을 본다. 그
러나 우리가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사단의 계략에 의해 공격을 받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무에 적어도 '와 보라'는 말을 기억하도록 하자. 나다나엘의 두 가지 오류는 빌립이
한 말에 의하여 시정되었다. 그러므로 그를 본받아, 우리 자신이 우선 배울 준비가 되
어 있고 적응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 주자.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를 괴
롭히는 의문을 풀어주려 하시는데, 우리가 구하는 일을 주저하지 말 것이다. 이 문장
을 보고 확신을 얻으려는 사람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이 얼마나 하찮은 일인가! 그리
고 우리는 그 당시 사람들이 나사렛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던 것을 알고 있다. 또
한 빌립이 '와 보라'고 한 대답은 주저와 불신을 완전히 밀어내고 있다.
1:47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 그리스도는 나다나엘 한사람을 보고 그를 칭찬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를 통하여 우리에게 일반적인 교훈을 주신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많은 사람들이 실은 불신자이기 때문에, 진짜 올바른
것과 거짓된 것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을 두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유대인들이 그
들의 조상 아브라함 안에서 얼마나 자랑하고 또 그의 후손됨을 자긍했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 중 백에 하나라도 타락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또 조상의 믿음에
낯설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러므로, 위선자들의 가면을 벗기기 위하여 그리스도께
서 참 이스라엘 사람이 무엇인가를 간단히 말하고, 동시에 백성의 완악함에서 곧 일어
나게 될 반발을 제거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
로 간주되기를 바랐던 그들은 곧 얼마가지 못하여 복음의 원수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
래서 거의 모든 계층의 유대인들에게 공통적으로 파급되어 있던 불경건과 불신앙이 아
무나 다 상심시키고 근심하게 할것을 염려하여,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이름
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 참된 이스라엘 사람은 극히 적은 숫자임을 경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기 귀절은 또한 기독교의 정의(定義)가 되느니 만큼, 우리는 성급하게
이 말씀을 지나쳐서는 안되겠다. 이제 그리스도의 말씀을 몇 마디로 요약하자면, 우리
는 '거짓과 기만'을 진실과 대조시켜 보아야겠다. 그리스도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 두
마음을 품은 자라고 부른 사람들을 간사한 사람 또는 기만적인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
다. 이 말씀은 사악한 줄 스스로 알면서 선하척 하는 사람들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죄에 눈이 멀어 다른 사람을 속일뿐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는 자들을 가리켜 말
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의 결백한 마음과 사람 앞에서의 정직이 그리스도인을 만든
다. 그리스도께서 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은 시편 32장 2절에서 말하고 있는 마음의 간
사함이다.
1:48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 주님은 비록 그에게 아첨할 의도가 없었지만, 새로운
질문을 얻어내기 위해 그가 자기 말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하셨다. 그질문에 답함으로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해 주었다. 나다나엘이 그리스도에게 "어떻게
나를 아셨나이까?"라고 물은 것도 이유없는 질문은 아니다. 모든 간사함으로부터 벗어
나기를 원하는 진실된 인간은 극히 드물고, 마음의 그 순결함을 아는 것도 하나님께만
속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답은 요점을 빗나간 것처럼 보인다. 나다
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본 것이 마음의 깊은 속을 꿰뚫어 보게 하지는 않았
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전혀 다른 것이다. 전에 보여진 적이 없는 인간을 아는 것도
하나님께 속한 일인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것도 하나님께 속한 일이다.
나다나엘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적으로 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눈으로 보셨음을 알았
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하나의 인간으로서 말씀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
다. 그러므로 증거는 비슷한 것에서 얻어진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범주에 있는 것
을 볼 자격도 있지만, 마음의 순수성 여부를 판단할 수도 있다. 우리는 또한 이 귀절
에서, 우리가 그리스도께 대해 생각도 않고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살피시며 우
리가 그를 떠나갈 때 우리를 다시 돌이키기 위하여 주님은 우리를 항상 살피시지 않으
면 안된다는 유용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49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 그가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면 나다나엘은 왜 그를 이스라엘의 임금이라 부르는가? 이
두가지는 서로 연관이 없는 것 같지만 나다나엘은 더 높이 보고 있다. 그는 이미 그리
스도께서 메시아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나다나엘은 이 믿음에다 자기에게 주어진
확신을 덧붙이고 있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아들은 먼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
임금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오시지 않는다는 또 하나의 원칙을 믿고 있다. 그러므로 나
다나엘은 하나님의 아들을 또한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정당하게 고백하고 있다. 과연
믿음은 그리스도의 본질만을 붙들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과 직분에도 주의을 기울
여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이 되기를 원하는지, 그리고 무슨 목적으
로 아버지께서 그를 보내셨는지를 알지 못하면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별로
유익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톨릭 교도들에게는 비전적(秘傳的)인 그리스
도 밖에 아는 것이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가톨릭 교인들은 그의 적나라한 본질을 아
는 데만 신경을 썼을 뿐 구원하는 주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그의 나라는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다나엘이 "주는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선언했을 때에
도, 그의 고백은 그의 믿음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나라는 땅 끝
까지 이르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까지 그가 온 세상을 다스릴 임금으로 보냄을 받으신
분임을 아는 데까지 나아오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세계 각처 사방으로부터 아
브라함의 자녀가 몰려들어, 온 세상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되리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나라의 범위가 어디까지 미치는지 계시를 받은 우리들은 그 좁은
한계를 초월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나다나엘을 본받아
말씀을 들어 마음을 얻고, 그 믿음을 묻어두는 데 그치지 말고 이를 고백으로 표현함으로써, 어떻게 해서든지 그 믿음을 굳게 하자.
1;5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이 너무나 남의 말을 쉽게 믿는다고 나무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믿음을 긍정하시면서 그와 모든 다른 사람에게 더 큰 확증을 약속하고 있다. 더군다나, 그가 멀리 안보이는 곳에 있는 무화과나무 밑에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보았다고 하는 것은 한 사람에게 특별한 일이다. 그러나 이제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경험이 될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마치 화제를 돌리는 것처럼, 한 사람에게서 모든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리신다.
1:51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 내가 생각하기에는, 나다나엘과 다른 이들이 하늘이 열린 것을 언제 어디서 보았는지를 캐어 묻는 이들은 크게 잘못되어 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여기서그의 나라에서 항상 있을 어떤 사실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물론 제자들이 때때로 오늘날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천사들을 보았던 것을 인정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리우셨을 때에 하늘의 영광이 나타났던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나타나는 영광과 다른 것을 또한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깊게 이를 되새겨 본다면 우리는 그때에 일어났던 일이 계속 살아 있음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한때 우리에게 닫혀있던 하나님의 나라가 과연 그리스도 안에서 열려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스데반과 산상의 세 제자 그리고 그리스도의 승천 당시 다른 제자들에게 볼 수 있게 나타난 예를 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는 자기 자신을 나타내시는 모든 증거는 이 '하늘이 열리는것'을 말하고 있다. 특히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이 되시기 위하여 그 자신과 우리가 교통할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천사들에 대한 귀절이 그 뒤에 따르고 있다. 하나님의 사자(천사)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전달할 심부름군이 되기 위하여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으로 말해지고 있다. 이와 같은 표현에 의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상호 교통이 언급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 혜택을 받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천사들이 우리를 친절하게 도와주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를 대적하는 원수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으로 말해지고 있다. 천사들이 주님에게만 수종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천사들이 온 교회를 다 돌보기 때문이다. 나는 또 주님께서 야곱의 꿈에 보였던 사다리를 암시하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창28:12). 그 환상이 보여준 내용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 말씀의 요지는, 비록 전 인류가 하나님의 나라 밖에 있다할지라도 하늘 문이 이제 우리에게 열림으로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 되었으며 천사의 동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지키는 파수군으로 보내심을 받은 천사들은 우리의 불행을 덜어주기 위해 그 복된 처지에서 내려 온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