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마가복음 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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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고난 주간 수요일 저녁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 제자 중 하나가 그를 선생이라고 호칭한 다음 놀라움과 감탄의 마음을 가지고 여러 뜰과 발코니, 콜로나레와 행각으로 된 성전의 거대한 돌들과 건물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의 호의를 얻고 헤롯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헤롯 왕조에 의해 건축되었다. 그것은 고대 세계의 놀라운 건축물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크고 흰 돌들과 광택이 있는 풍부한 금으로 장식하여 지은 것이었다. 그것은 옛 예루살렘 땅의 약 6분의 1을 차지하였다. 유대인들에게 성전만큼 장엄하고 굉장한 것은 없었다.

===========13:2
예수의 대답은 이 엄청난 큰 건물이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는 놀라운 예언이었다.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아니하고 무너질 것이다. 예수께서 강한 이중 부정을 두 번이나 사용한 것은 그의 말씀이 확실히 성취될 것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 불길한 예언은 성전을 잘못 사용한 데 대한 예수의 심판의 결과이다. 이 예언은 말 그대로 한 세대 내에 성취되었다. A. D. 70년 티투스는 성전을 불태우고 나서 전 도시를 파괴하고 그 건물을 완전히 파괴하라고 로마 군인들에게 명령하였다.

========13:3 - 4
기드론 골짜기를 가로질러 감람산 꼭대기에 이르러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성전을 마주 바라보며 앉았다. 감람산은 바다의 수면보다 약 2700피트 높이 솟아 있었지만 예루살렘보다는 약 100피트 정도밖에 높지 않았다. 감람산 서쪽에 성전과 예루살렘 시가 위치해 있었다. 제자들은 예언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말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들이 질문은 두 부분으로 표현될 수 있다. (1)이러한 일들이 언제 일어날 것인가? (2)그것들이 일어나려고 할 때 일어날 징조가 무엇인가? 제자들은 구약 성경의 예언의 관점만 가지고 있었음으로 그들은 성전의 파괴와 인자가 다시 재림하는 그 종말 시간 사이에 어떤 시간적 간격이 있다는 것을 더 이상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성전 멸망이 현 시대의 끝이 일어날 사건이며 그때에 비로소 메시야 왕국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13:5 - 6
주의하라 (플레페테, 조심하다, 경계하다)는 가르침 전반에 나타난 경계하라는 외침이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메시야의 이름을 사칭하며 다니는 자들을 주의하라고 경고하셨다. 위기 시기에는 많은 거짓 메시야들이 일어날 것이며,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여 내가 그로라 라고 주장할 것이다. 신성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 자신의 자기 계시의 형식 속에 표현되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할 것이다.

=========13:7 - 8
두 번째로 예수께서는 전쟁과 천재지변이 일어난다고 해서 종말이 왔다고 생각하는 잘못에 대해 경고하셨다. 전쟁에 대해서 그리고 전쟁의 소문이 멀리서 들을 때마다 놀라서 하던 일을 멈추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목적 아래서 일어나는데 이것들은 인간이 번역과 죄의 결과로서 허락된 전쟁을 포함하고 있다. 종말 이전에 얼마 동안의 기간이 지속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각 시대마다 각 시대의 전쟁과 천재지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일어난다. 인간이 역사는 새로운 메시야 시대의 출현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13:9
너희는 주의하라 라는 훈계로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박해 아래서 사악한 사람들을 대비하여 정신을 차리도록 경고하셨다. 그들은 재판을 받기 위하여 회당에서 열리는 지방 유대인의 법정인 공회(산헤드린)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공공연하게 회당에서 이교도들처럼 40에 하나 감한 매를 맞을 것이다. 그 외에 여러 가지 박해를 받으면서 복음을 증거한 그 증거가 하나님이 마지막 심판하실 때 그들을 박해한 자들의 고소하는 증거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13:10
복음이 반드시 먼저 모든 민족 즉 전 세계 민족들에게 전파되어야 한다. 복음을 선포하면서 제자들은 핍박을 받게 될 것이나 그들은 결코 실망하거나 포기해서는 안된다.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최우선 적으로 해야 될 일이며 또 그의 목적에 따라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이 것은 가 세대의 책임이다. 그러나 복음을 전 세계에 선포한다는 것이 곧 이 시대에 혹은 이 시대의 끝에 가서 복음을 전 세계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마25:31 - 46).

=======13:11
제자들이 체포되어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넘겨질 때에 변명하기 위해서 염려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순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말해야 한다. 그들이 두려워함에도 불구하고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것을 담대하게 말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 도움이 꼭 석방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13:12 - 13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대한 반대가 공공연하게 일어날 것이며, 또한 가까운 자기의 친척들을 통하여 일어날 것이다. 이러한 반대는 매우 심각하여 가족들이 서로 대적자들에게 넘겨 줄 것이고 그로 인하여 기독교인들이 처형당하게 될 것이다. 경고에 관한 이러한 말씀은 예수를 위한 충성 때문에 박해로 고통 당하는 로마에 잇는 마가의 독자들에게 적절한 것이었다. 고통을 전 세계적인 복음 전도와 변호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맥락 속에서 보게 될 때 더 한층 그 고통을 쉽게 참을 수 있게 된다.

=========13:14
가증한 것 이란 말은 원래 이교도의 우상 숭배와 가증스러운 일들 을 가리켰다. 멸망의 가증한 것 이란 표현은 우상 숭배하는 자들이나 그 대상이 너무 가증하여 성전을 버리게 하고 황폐케 한다는 것을 언급한 것이다. 예수께서 사용하신 멸망의 가증한 것 이라는 말은 그 예언이 또 한 번 성취될 것을, 즉 A. D. 70년의 성전 모독과 파괴를 언급한 것이었다. 그의 제자들 즉 예수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나 미래의 사람들이 이같은 성전 모독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그것은 유대에 있는 사람들은 베뢰아 요단강을 건너 산으로 도망하라는 신호이다. 요세프스는 A. D. 67 - 68년에 유대 열심당들이 성전을 모독하고 성전을 점령한 사건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들은 성전을 점령하고 침략자 파니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가증한 것 이 어떤 물건이 아니라 서 있지 못할 곳에 서 있는 장래의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13:15 - 18
이러한 위기가 일어날 때에 자기 집의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무엇을 가지려고 결코 집안으로 들어가서는 안된다. 밭에서 일하고 있던 자들도 추운 밤 공기를 막아 주는 겉옷을 가지려고 다른 밭이나 집으로 가서는 안된다. 예수는 그러한 어려운 상황하에서 도망가야만 하는 아이 밴 여자와 젖먹이는 어머니들에게 동정을 나타낸다.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런 일이 강물이 많이 불어 건너기 어렵게 될 우기인 겨울철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권고하셨다.

========13:19
그들이 급하게 도망해야 하는 이유는 또 다행히도 도망하는 데 방해를 받지 않을 것인데 그 이유는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이런 재난의 날들이 없었고 결코 또다시 똑같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전례 없는 재난은 예루살렘의 멸망에도 해당되지만 거기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예루살렘 멸망을 넘어서 재림에 앞서 있을 마지막 대환란 이기도 한 것이다.

==========13:20
만약 주께서 그이 구언 계획 속에서 이미 결정된 그날들을 감하지 않으면 아무도 살아 남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13:13과는 대조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택하신 그 택한 자들 때문에 마지막 때 환난 기간을 감하였다. 이 모든 것들이 A. D. 70년에 간접적으로 증명이 되었다. 그리고 이 구절은 마지막 때의 대환란인 심판 속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신다는 것을 암시한다.

===========13:21 - 22
그 때에 즉 심한 고통과 도망하는 그날 중에 만약 누가 그리스도가 여기에 혹은 저기에 있다고 주장하여도 예수의 제자들은 이것을 믿지 말고 계속해서 피할 곳을 찾아야 한다. 거짓 그리스도의 목적은 선택받은 자들을 유혹하는 것이다. 그러나 할 수만 있다면 이라는 구절은 그들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13:23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위기의 날에 거짓 함정에 바지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다시 교훈 하셨다.

=====13:24 - 25
그러나 라는 말이 기적적인 이적들을 베푸는 거짓 메시야의 출현과 재난 이후의 때에 참 메시야의 극적인 오심 사이에 뚜렷한 대조를 가져오고 있다. 이 표현은 14 - 23절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가리킨다. 해와 달 그리고 별들과 관련되는 여러 가지 우주적인 무질서가 바로 재림보다 먼저 일어날 것이다. 예수는 정확하게 어느 한 편의 구절만 인용하지 않고 이사야 13:10과 34:4 둘 다를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이것은 물리적인 우주 속에 나타나는 눈에 보이는 천체 변화를 언급하신 것이다.

===========13:26
방금 언급한 우주적인 사건이 발생한 그 때에 지상에 사는 사람들은 구름을 타고 다시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은 신이 나타날 것을 의미한다. 그는 큰 권능을 행하실 것이며 하늘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다.

========13:27
또 그때에 인자는 그의 천사들을 보내어 사방에서 그의 택한 자들을 모을 것이다. 사방이란 세계 모든 사람들과 관련된 모든 방향으로부터를 의미한다. 택함을 받은 자는 한 사람도 버림을 받지 않을 것이다. 비록 언급은 없지만 이 말은 구약 시대의 성도들과 대환란 동안 순교한 신자들이 부활을 언급하는 것 같다. 여기에는 선택받지 못한 자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13:28
제자들이 첫 번째 질문은 이러한 일들이 언제 일어나겠느냐? 는 것이었다. 이에 예수께서는 무화과 나무로부터 교훈을 얻으라고 그들에게 충고하셨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이스라엘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예수는 여기에서 그런 의미를 의도하지는 않았다.

======13:29
이 절은 28절의 교훈을 응용하고 있다. 다른 사람과 달리 너희 제자들은 14 - 23절에 언급한 이러한 일들을 볼 때마다 너희들은 임박한 위기가 가까이 온 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임박한 사건에 대한 일반적인 상징인 것이다. 만약 이런 사건들을 방심하지 않고 경계한다면 제자들은 그 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충분히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13:30 - 31
엄숙한 서론적인 말로 예수께서는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날 때까지 이 세상의 종말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예수의 주장은 그의 예언(30절)의 성취를 보증한다. 현재의 우주는 대변동으로 종말이 올 것이나 이 예언들을 포함하여 예수의 말씀들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의 말씀은 영원히 정당성을 가질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예수의 말씀과 같다. 왜냐하면 예수는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13:32
비록 위기가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은 식별해 낼 수 있으나 다가오는 그 날과 그 시의 정확한 시간은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심지어 천사들이나 아들조차도 알지 못한다. 이러한 예수의 지식의 한계는 그가 인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성육신 속에서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여 예수는 자발적으로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였다.

======13:33
그 때 즉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정한 때가 언제 올지 아무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라고 거듭 훈계하셨다.

==========13:34 - 37
마가복음에 나오는 독특한 타국에 나간 집주인의 비유는 계속해서 깨어 있을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깨어 있다는 것은 맡은 일에 충실한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예수는 비유를 이 비유를 문지기와 다른 종들 사이의 구분 없이 그의 제자들에게 적용하셨다. 그들은 모두 영적인 위험과 기회들에 대해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책임이 있다.



본장의 강화 역시 12장과 마찬가지로 수난 주간 중 화요일에 주어진 말씀으로서 묵시 문학적 특성으로 인해 해석상 어려움이 따른다. 본 강화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다음 두 사항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1) 인내에 관한 교훈. 이는 본서 전체에 걸쳐 일관되게 강조되며, 특히 예수의 공생애의 마감 시점이 가까울수록 더욱 부각되는 주제인 '제자 훈련'(discipleship training)의 측면에서 고찰될 수 있는 사항이다. 아울러 이 교훈은 말세의 때를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것이기도 하다.
이 강화가 성격상 묵시 문학적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이 강화가 주어진 가장 큰 목적은 장래사에 대한 호기심을 만족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윤리적인 교훈을 주려는 데 있었다. 이에 대한 단적인 증거로서 본 강화에서는 '. . . 하라'는 명령내지는 권면의 말씀이 여러 차례에 걸쳐 나타난다.
따라서 이 말씀은, 무릇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핍박이 따르며 이 핍박은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더 심해진다는 사실을 깨우친다. 그리고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겪으신 후에 비로소 부활의 영광에 이르셨듯이 성도들도 영광에 들어가기 위해 고난을 견뎌내야 함을 가르친다.
(2) 종말에 관한 예언. 본 강화는 또한 역사의 마지막 때 곧 종말에 일어날 일들을 예언한 내용이기도 하다. 특히 이는 본문이 묵시 문학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끄는 사항이다. 묵시 문학 형태는 1C경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것이었으며, 성경 전체 중에서 '묵시적'인 내용의 책은 다니엘, 요엘, 아모스, 스가랴, 말라기, 요한 계시록 등이며 본장과 마 24장에 수록된 감람산 강화와 살전 4:13이하 내용도 묵시 문학적이다. 이런 책들은 정경(Canon)에 포함되지 않은 묵시문학(apocalytic literature)과 마찬가지로 상상적인 이미지로 가득 차 있으며, 역시 종말에 관한 지식을 알려주는 데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한편 본문의 내용은 네 문단으로 나누어지는데, 각 문단에서는 종말에 관한 예언 및 종말을 준비하는 자세에 관한 교훈이 교차적으로 반복된다. 다시 말해서, 1-8절은 종말에 나타날 징조에 관한 예언이며 9-13절은 종말시의 핍박에 직면했을 때 굳센 믿음으로 인내하라는 교훈이다. 그리고 14-27절은 대환난과 주의 재림에 관한 보다 구체적인 예언이며, 28-37절은 항상 종말론적 긴장을 늦추지 않고 경성할 것에 대한 교훈의 내용이다.

* 종말론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 종말론(eschatology)에 관한 학자들간의 다양한 견해는 다음과 같다.
(1) 정통주의 신학자들의 견해: 그들은 성서에 기록된 종말에 관한 예언들을 분석, 종합하면 말세지말(末世之末)에 일어날 일들을 어느 정도 상세히 추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신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활발하게 논란이 되었던 문제들 중의 하나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 왕국 간의 연관성에 관한 것이다. 소위 후천년설(postmillennialism)은 천년 왕국 후 짧은 배교의 시기, 즉 선과 악의 세력간의 극심한 싸움의 시기를 거쳐 마침내 그리스도의 재림이 도래한다는 견해로서 어거스틴(A. Augustinus), 핫지(Charles Hodge), 워필드(B. B. Warfield)등이 주장했다. 반면에 랑게(J. P. Lange), 알포드(H. Alford)등의 견해인 전천년설(premillennialism)은 천년 왕국 전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먼저 임한다고 본다. 그리고 무천년설(ammillennialism)
은 천년 왕국을 상징적 의미로 해석하여 재림 전까지 그리스도께서 성도들과 더불어 이 세상에서 통치하는 전 기간을 바로 천년 왕국 시기로 이해하며, 이 학설의 대변자는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게할더스 보스(Gerhardus Vos)등이다.
(2) 슈바이처의 견해 : 슈바이처(A. Schweitzer)의 '철저적 종말론'에 의하면, 예수는 세상의 임박한 천재지변적 종국과 묵시적인 하나님 나라의 급작스런 도래는 선포하는 데 전적으로 사역의 초점을 집중시켰던 한 유대인 묵시주의자였다고 한다. 예수는 곧 세상의 마지막이 도래하리라고 믿고 설교하였으나 결국 그러한 확신은 잘못된 환상에 불과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말론적 천국은 철저히 미래적인 소망으로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3) 도드의 견해 : 도드(C. H. Dodd)는 슈바이처와는 정반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적으로 이미 도래하였다고 보는 '실현된 종말론'을 주장했다. 즉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러한 현재적, 종말론적 위기 상황을 기술할 때 사용한 묵시적 언어들은 역사를 넘어 항상 현존하고 있는 것은 상징적 표현에 불과하였으며, 이러한 초역사적이며 절대적인 영역이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시간과 공간 속으로 이미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현된 종말론에 의하면 세상의 끝에 별도의 종말론적 사건들이 일어나지는 않는 셈이다.
(4) 볼트만의 견해 : 볼트만(R. Bultamnn)은 성경상의 종말론을 실존주의적으로 이해하였다. 그에게 있어 종말에 관한 예언들은 신화에 불과하며 종말론적 시각이란 강렬한 신인식(神認識)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요구에 직면했을 때 책임있는 결단으로써 응답하는 자는 종말론적 실존에로 돌입한다고 생각했다.
한편 오늘날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많은 학자들은 '철저적 종말론'과 '실현된 종말론'에는 둘다 진리의 일면이 내포되어 있다고 본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이미 도래하였으되(already), 다만 그 완성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not yet) 미래의 사실이라고 보는 것이다(마태복음 24장 주제 강해 "성경은 종말론의 관심과 그 해석상의 문제점" 참조)

1. 종말의 징조들과 성도의 인내(13:1-13)
감람산 강화는 성전의 화려한 웅장한 외양에 감탄하는 제자들의 아둔한 모습을 묘사하는(1절) 내용으로부터 도입되고 있다. 그들은 방금 전에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위선을 책망하는 예수의 호된 경고를(12:38-40)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중심으로 한 저들의 가식과 부패상을 깨닫지 못하고 성전의 외면적 아름다움에 취해 있었다. 예수는 제자들의 이러한 영적 암매(暗昧) 상태를 꿰뚫어 보시고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셨으며,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그 때의 징조를 묻자 예수의 감람산 강화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본문을 특히 제자 훈련 내지는 모든 성도들에 대한 교훈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고찰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몇 경고 사항들에 주목하게 된다.
(1) 종교적 형식주의. 성전 숙정 사건(11:15-18)과 마찬가지로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2절) 또한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에게서 특히 뚜렷이 나타났던 형식주의와 위선에 대한 심판 선고라 할 수 있었다.
(2) 거짓 메시야. 말세에는 미혹하는 영들이 많이 출현하며 스스로 메시양인양 가장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실족시킨다는 경고이다(6절). 사도행전에 나오는 드다(Theudas)(행 5:36)와 갈릴리 유다(행 5:37) 및 마술사 시몬(행 8:9) 등도 메시야로 자처한 듯하며, 현재 우리나라에도 자칭 메시야를 따르는 이단 종파가 있다.
(3) 세계의 격변에 따른 동요, 말세지말이 가까와 음에 따라 전쟁과 지진 그리고 기근(饑饉)등이 빈발하게 될 것이지만, 성도들은 두려움에 떨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역사의 최종적인 도달처는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실현되는 곳이며, 본문에 예언된 난리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도달하기 이전에 거처야 하는 하나의 단계일 뿐이기 때문이다(히 12:26).
(4) 핍박으로 인한 실족. 본문 중 무려 절반 가까이에 해당하는 내용이 핍박을 대비하라는 경계의 말씀이다(-913절). 이는 감람산 강화의 주목적인 어디에 있는지를 암시하는 단적 실례라 하겠다.
이와 같은 경계의 말씀은 당시 예수의 강화를 듣고 있었던 제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설사 본문에 기록된 말세지말의 징조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러한 징조에 버금가는 현상들이 세계 도처에서 빈발하고 있기 때문에 영적 무장을 게을리하는 성도들은 세상의 유혹이나 위협 앞에 무릎을 꿇고 말 가능성이 다분하다. 요컨대 예수의 조속한 재림을 대망하며 늘 종말론적 긴장 가운데 깨어 기도함으로썸나 죄악된 세상 가운데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엡 6:18;딤후 2:26).

* 교회사에 나타난 이단들. 이단은 이미 초대교회 당시부터 대두하였으며(벧후 2:1) 교회사의 진전과 더불어 수많은 이단들이 출몰하였다. 여기서는 편의상 초대교회 이후로부터 중세 시대 이전까지 출몰했던 이단 사상들 및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창궐(猖獗)하고 있는 이단 종파들 중 대표적인 것들만 대략적으로 지적해 보는 데에 그치기로 하자. '이단'의 개념 및 특성에 관해서는 요일 4:1-6의 주제 강해 '이단의 개념'을 참조하라.
(1) 중세 초엽까지의 이단들 중 대표적인 이단은 다음과 같다.
(까) 영지주의(Gnosticism). 신앙보다 지식을 우위에 두었고, 그노시스(지식)야말로 구원의 필수 조건이라고 내세웠다. 그리고 육체를 포함한 물질은 모두 약하다고 생각했으며,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고 가현설(Docetism)을 주장했다(요일 4:1-6, 주제 강해 '영지주의' 참조).
(다) 오리게네스주의(Origenism). 일종의 기독교적 영지주의라 하겠으며, 성자를 신격으로 간주하되 성부께 종속시켰다. 그리고 만물이 그 근원인 가장 지고한 존재, 곧 하나님께로 돌아가므로 사단마저도 하나님께로 회복된다고 주장했다.
(따) 마르키온주의(Marcionism). 하나님이 두 분 계시며,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서로 대립되어 있다고 했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모두 폐지하였고, 열 개의 바울서신과 누가복음의 일부만을 정경을 간주했다.
(마) 몬타누스주의(Montanism). 몬타누스는 요 14장에 약속된 보혜사 성령이 자기에게서 나타났으며, 자신에게 특별한 예언의 말씀이 임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종말이 박두하였음을 외치면서 혼인을 대체로 반대하고 엄격한 금식 생활을 권했다.
(바) 모나키아니즘(Monarchianism:군주신론). 이 이단 학설은 예수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들이워진 인간이었다는 양자설(養子設), 혹은 그리스도는 단순한 인간 이상의 존재로서 그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구원할 능력을 지녔다고 보는 영성론 등 두 가지 주장으로 대별된다.
(빠) 마니교(Manichaeism). 악의 실체성과 영원성을 긍정하고, 사단과 하나님에 의해 각각 다스려지고 있는 어둠의 왕국과 빛의 왕국기 끊임없이 투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싸) 아리우스주의(Arianism). 인간을 영, 육, 이성으로 삼분하고, 그리스도는 이성 대신 로고스(Logos)로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높이긴 하였으나 그분의 진정한 인성을 거부한 셈이다.
(짜) 네스토리우스주의(Nestorianism). 그리스도 안에는 인성과 신성이 병존해 있고 또한 서로 협동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만, 이 두 속성은 결코 하나로 융합되거나 서로 유통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카)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 인간의 자유 의지를 강조하여 원죄의 영향력을 부인하였다.
(2) 현대의 이단 종파들은 성경의 절대성을 부정, 교주의 신격화, 행위 주권등을 주장하며 범람해 있는데 그 대표적인 실례는 다음과 같다.
(까) 통일교(Unification church). 교주인 문선명은 성경이 진리를 표현하는 한 방법일 뿐이고 진리 자체는 아니라고 보았으며 하나님을 남성과 여성의 중화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천사 루시퍼와 성관계를 가진 것을 의미하고 이것을 영적 타락이라 규정했다. 예수는 영적 구원만 이루었을 뿐이며, 육적 구원은 재림주인 문선명 자신을 통해 성취된다고 주장했다.
(다) 제 7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Seventh Day Advenist).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구속 사업이 시작되었으나 완성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1844년 10월 22일을 그리스도의 재림일로 예언했다가 그 예언이 빗나가자 그날 예수께서 지성소에 들어가 대제사장의 사역을 감당하고 계시다고 주장한다.
(따) 여호와의 증인(Jehovah's Witnesses). 창시자인 럿셀은 1914년 10월에 종말이 올 것을 예언했다가 그 예언이 빗나가자 이를 수정하여 천국이 현재는 공중에 임해 있으며, 여화와의 중인들에게만 그 문이 열려 있다고 주장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첫 피조물인 인간으로 단정하며, 성령의 인격서을 부인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부인하고 지옥의 존재 또한 부인한다. 또한 교회 제도의 기원이 마귀에게 있다고 보며, 인간의 부활을 영적인 측면에서만 인정한다.
(마) 몰몬교(Mormonism: 말일 성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다신론적이며, 신들도 성이 있어 결혼하고 그 결과 자녀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아담 또한 신들의 육체적 결합에 의해 태어났기 때문에 신이라고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만인 구원을 믿으며, 일부다처를 권장했다.
(바) 크리스챤 사이언스(Christian Science). 미국의 메리 베이커 에디 부인에 의해 창시되었다. 에디는 기독교가 상실해버린 치료 법칙이 자신에게 계시되었다고 주장했다. 외관상으로는 성경에 궁극적 권위를 둔다고 말하나 크리스챤 사이언스의 실제적 권위는 성경이 아니라 에디 부인의 책들이다. 에디가 본 하나님은 범신론적인 하나님이며, 그녀는 예수와 그리스도를 이원론적으로 분리시켰다. 그리고 죄나 악이란 단지 착각내지 환상에서 비롯된 개념일 뿐이라고 단정한다.
이상으로 우리는 여러 이단들에게 관해 지극히 개략적인 한도 내에서 고찰하였다. 이단은 인간적 야욕을 종교적 허울을빌어 성취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진리를 미혹시키는 데서 생겨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열의에도 불구하고 편협하고 왜곡된 성경 이해에서 생겨나는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매 성경 구절마다에 담긴 심오한 진리를 미시적(微視的)으로 분석할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의 맥을 잇는 통전적(通典的) 의미에 유의하여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으며(신 17:11), 오직 성경이 가는 곳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 데서 멈출 수 있어야 하겠다. 아울러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나타나 성경 진리를 왜곡시키는 사단의 세력을 분별할 수 있도록 성령 안에서 늘 깨어 있어야 하겠다.

2. 대환난과 재림에 관한 예언(13:14-27)
본문은 계시록에 언급된 종말론적 대환난과 예수의 재림에 관한 예언(계 6-19장)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이 중 14-23절의 내용은 종말론적 대환난의 때와 A. 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의 때를 동시에 예언하는 예언적 단축법(prophetic foreshortening)을 보여 준다. 이 예언에 관한 구성상의 특징이나 내용상의 강조점에 대해서는 마 24:15-28, 29-31의 강해에서 상세히 설명하였다. 따라서 여기서는 예언된 사건 자체 보다는 이 예언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신 예수의 교훈이라는 측면에 주안점을 두기로 하자.
(1) 환난에 대한 인내. 앞 문단에서와 마찬가지로 본문에서도, 환난을 당하여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주의 재림을 기다리며 인내할 것을 가르친다. 따라서 본문 또한 부활과 재림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전에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예수의 제자 훈련의 일환으로 이해될 수 있다.
14-23절의 내용 자체는 대환난의 불가피성과 심각성을 전면에 부각시키고 있지만, 전후 문맥상으로 미루어 볼 때 이 환난을 대하는 성도의 자세에 관한 교훈 또한 매우 강조되고 있다 하겠다. 마지막 때를 당하여 성도들은 불신 세력에 의해 핍박을 당할 뿐만 아니라 우주적인 천재지변과 범세계적인 환난 또한 맞게 된다. 하지만 본문은 택한 자들을 위해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시고'라고 예언한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성도들로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고전 10:13).
따라서 말세지말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필연적으로 도래하기로 작정된 대환난 자체를 부정하거나 회피하려들 것이 아니라, 이 모든 환난을 극복케 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도록 매진(邁進)하여야겠다.
(2) 재림에 대한 소망. 주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대환난을 견디어 낸 모든 성도들을 세계각처로부터 불러모으시리나는 24-27절의 예언은 말세의 현실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더없이 큰 위로와 용기를 준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로마의 극심한 핍박을 당했을 때, 굴복하여 배고(背道)의 길을 걷기보다는 차라리 순교의 길을 택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재림의 약속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재림하실 예수의 모습은 초림 때와는 전혀 다르다. 예수께서 초림 때에는 고난받는 종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극히 초라한 모습으로 오사(눅 2:7) 죄인들을 대신하여 저주를 당하셨지만(갈 3:13), 재림 때에는 모든 죄악의 세력을 굴복시키는 정복자로서 그리고 온세상을 다스리는 왕으로서 영광 가운데 임하실 것이다. 예수의 재림 사건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초자연적 현상으로 나타날 것이므로, 인간 이성을 최선의 판단 기준으로 삼고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치 않는 사람들은 이 재림의 예언을 미신이나 공상의 산물로 간주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이 엄연한 역사상의 사건이었듯이, 주의 재림 또한 역사의 마지막에 가까운 한 시점에서 분명히 이루어질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이와 같은 재림을 대망하는 굳건한 믿음으로써 모든 선한 일을 경주할 뿐만 아니라 세상의 악한 유혹이나 위협을 능히 극복할 수 있어야 하겠다.
한편 역사의 한 정점에 이르러 세상의 마지막이 임한다고 하는 이 예언의 메시지를 통해, 우리는 기독교적 역사관의 특징을 고찰해 볼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 기독교적 역사관. 기독교적 역사관이란 인간 역사의 과정을 이해함에 있어서 이단과 하나님과의 관계 혹은 시간과 영원과의 관계에서 해석하는 역사관을 의미한다. 이제 이러한 역사관의 몇 가지 특징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역사의 진행 과정을 직선형으로 본다. 원형과 같이 무한히 반복 윤회(輪廻)한다는 불교적 시간관이나 나선형으로 무한히 발전해 간다는 토인비(Arnold J. Toynbee, 1889-1975, 영국의 역사가)의 역사관과는 달리, 성경은 공간과 마찬가지로 시간 또한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것으로서 처음과 끝이 일직선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가르친다.
다시 말해서 천지창조와 더불어 시작된 시간의 흐름은 재림주이신 예수의 백보좌 심판을 끝으로 하여 멈춰지며, 그 이후에는 시간을 초월한 영원한 천국과 지옥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2) 역사의 진행 과정이 목적 지향적이라고 본다. 인류와 우주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서 진행되며, 하나님은 역사의 주(主)로서 역사를 통해 영원전부터 계획하신 당신의 선하신 목적과 뜻을 이루어 가신다. 그 목적 가운데 으뜸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함 받은 무리들을 당신의 나라로 부르시는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성도는 역사의 주역으로서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동참해야 함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3) 그리스도를 역사의 중심으로 본다.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이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이며, 역사에 궁극적 의미를 부여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O. Cullmann). 그리스도를 통해 무한하고 영원한 구속선(球贖線)이 일반사를 꿰뚫고 들어왔으며,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은 영원한 세계와 만나게 된다.

3. 경성(警醒)에 관한 교훈(13:28-37)
본문은 감람산 강화의 결론에 해당하며, 두 가지 비유를 통해 항상 종말론적 긴장을늦추지 말고 깨어서 주님 오실 날에 대비하라는 교훈이다. 이 중 무화과나무의 비유(28-33절)는 이제까지 본장에 묘사된 종말의 여러 징조들에 대한 결론으로서 내용상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깨어있는 문지기 비유는(34-37절) 이 결론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내용이다.
한편 마태는 본문에 해당하는 내용을 마 24:32-25:46에서 여러 비유들을 통해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본문의 두 비유들에서 공통적으로 강조된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종말의 임박성. '이 세대'(30절)라는 표현이 주는 어감과 '홀연히'(36절)라는 말 등에서 종말의 임박성이 강조된다. 특히 '이 세대'라는 말은 모든 인류를 뜻하기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 당시의 세대를 가리키기도 한다. 어쨌든 주께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기 때문에(벧후 3:8), 우린 정확한 재림 날짜에 지나친 관심을 나타낼 필요는 없으며, 다만 항상 종말론적 긴장과 재림에 관한 소망을 가지고서 부단히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2) 경성(警醒)을 촉구함. 33, 34, 35, 37절 등에는 '깨어 있으라'(keep, watch, NIV)는 말씀이 거듭 반복되고 있어 본 강화의 결론이 무엇인지를 확연히 드러낸다. 날이 갈수록 세상은 점점 더 약해지고 진리의 말씀으로부터 더욱 멀어져만 가는데, 많은 성도들은 영혼의 깊은 잠에 빠져 깨어날 생각을 않고 있다. 죄악된 세상의 거대한 흐름에 자포자기 상태로 자신을 내어 맡기는 자들은 주께서 홀연히 임하시는 날에 책망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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