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마가복음 0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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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 이 말은 8:38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인다. 즉 원문에 보면 등위 접속사 카이 가 있어서 앞절에 언급한 내용과 대등한 내용이 전개될 것을 시사해 준다. 사실 내용상으로 볼 때 8:38 과 본절의 내용이 서로 비슷하여 이 두 절이 자연 스럽게 연결된다. 그래서 본절을 8:28 - 38의 구조 속에 포함하여 이해 하는 것이 적걸하다.

==================9:2
엿새 후에 - 평행 본문 마 17:1과 함께 구체적인 날짜가 제시되는데 눅 9:28에서는 8일 쯤 이라고 약간 부정확한 듯한 표현을 하고 있다. 이는 수치에 있어 정확치 못하고 대체로 조금 느슨한 유대인들의 표현법에 근거한 것이라 본다.

=================9:3
그 옷이 관채가 . . . 희어졌더라 - 마가는 예수의 옷이 광채가 날 정도로 희어졌다고 하는데 비해마태는 예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옷이 빛같이 희어졌다고 묘사 하면서 얼굴과 옷이 동시에 변화된 것으로 말하고 있다.

==================9:4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 예수의 변형과 함께 구약성경의 두인물이 나타난다. 마태와 누가는 모세 와 엘리야 의 순서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본문의 엘리야 와 모세 라는 순서 보다 더 자연스런 표현일 것이다.

==================9:5
예수께 고하되 - 베드로가 예수에게 신비적 장면에 대한 즉각적 반응을 보이고 있는데 여기서 고하되 는 헬라어 아포그리데이스 를 번역한 것이다. 이 말은 대답하다 , 응답하다 으 뜻을 가진 아포크리노마이 의 제1 과거 수동형이다. 따라서 베드로의 행동은 주체적인 것이라기 보다 베드로가 목격한 변화된 예수와 엘리야와 모세의 모습에 의한 수동적 반응이라고 이해 할 수 있다.

==================9:6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 하므로 - 본문은 베드로의 어리석은 간청(5절)을 변호하는 표현으로서, 마가가 베드로에게 매우 사려깊게 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마가는 당시 베드로를 위시한 세 제자 모두 신적 현현 앞에 압도된 채 심한 공포에 짓눌려 있었기 때문에 올바른 이성적 판단이 불가능했으리라는 암시를 제공한다.

==================9:7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 여기서는 산상 변형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이 묘사되고 있다. 구름이 모려왔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시사하는 엄숙한 장면을 나타내 준다.

==================9:8
문득 둘러보니 -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마17:6) 이때 제자들은 공포에 휩싸여 땅에 엎드려 있었는데 예수께서 손을 대시어 그들을 일으키셨다고 한다. 그 순간 제자들이 고개를 들고 주변을 휘둘러 보았다. 이러한 순간 동작은 생동감 넘치는 문장을 구사하는 마가의 표현 기법에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9:9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 . 이르지 말라 - 산에서 내려오며 예수는 제자들에게 기적 사건 이후에는 언제나 그러하듯이 산 위에서 보았던 신비적 체험에 대해 비밀로 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9:10
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제자들이 침묵을 지시하는 예수의 말을 마음에 새겨두고 있음을 밝히고 있지만 제자들을 예수가 한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 진의를 알 수 없었다. 즉 예수 자신이 다시 부활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인데, 이는 일반적인 부활이 무엇인지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제자들이 믿을 수 없었던 것 같다.

===================9:11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 제자들은 인자의 부활에 관해 상당한 의구심을 품고 있었으나(10절)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예수께 직접 묻지 못하고 대신 엘리야와 관계되는 일반적인 종말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당시 서기관들이 가르쳤던 종말론의 내용인 말 3:1과 4:5, 6에는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올 것이라고 되어있다.

===================9:12
머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 예수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서기관들의 가르침에 대해서 동의를 하고 있다. 예수가 말하고 있는 회복하다 란 잘못된 것을 고치고 바로잡는 것을 뜻한다.

====================9:13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 예수께서는 당신의 절대적인 권위로 엘리야에 관한 당신의 판단을 피력하시고자 하셨다. 실로 엘리야에 관한 예수의 진술은 서기관들의 가르침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엘리야 왔으되 - 예수는 이미 앨리야가 왔었다고 말하는데 마태는 본 장면에서(마17:13)제자들이 엘리야를 세례요한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증언한다. 예수께서 메시야의 고난을 엘리야의 종말적 사역과 직접 관련시키고 있지는 않지만 12, 13절에 제시된 예수의 말씀은 엘리야가 인자(메시야)보다 먼저 와서 그의 종마론적 사역을 완수할지라도 인자는 고난받고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시사해 주고 있다. .

===================9:14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 여기서 이에 는 접속사 카이 를 번역한 것으로, 바로 앞의 산상변화 사건과 계속 연결된 이야기임을 보여 준다. 그런데 지금부터 전개되는 이야기와 앞절과의 시간적 차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본 장면에 관해 변화산 사건 이튿날 이라고 밝히고 산으로부터 내려 왔다는 사실도 언굽하고 있는 누가의 보고에 의하면(눅9:37)본문은 산상 변화 사건과 그렇게 큰 시간 차이가 없이 연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9:15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 . . 문안하거늘 - 군중들 속에 나타나는 예수의 모습을 마가만의 독특한 표현 방식으로 현장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마가는 예수의 출현에 모든 군중이 놀라와 한 이유에 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9:16
예수께서 물으시되 - 이 본문 역시 마태와 누가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마가는 같은 묘사를 하면서 누구에게 질문을 했는지에 대해서 밝히지 않고 다만 그 물음의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논쟁을 벌리는 이유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논쟁을 벌리는 사람들이 제자들과 서기관들이었다면(14절) 예수는 상식적으로 제자들을 향해 질문을 했을 가능성이 많다.
무엇을. . . 변론 하느냐 - 제자들은 서기관들의 빗발치는 비난과 야유에 대해 변명하기에 급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같은 무기력한 태도는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일단 복음의 권위를 무시하고 거부하는 자들과 더불어 언쟁을 하는것은 그것이 적극적 측면에서든 소극적 측면에서든 간에 헛된 일일 뿐이다(딛3:9). 진정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을 따름이다(고전4:20).

===================9:17
무리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 예수의 질문에 대해 선뜻 대답하는자가 없었다. 아마도 그곳에 모인 무리들이나 서기관들은 예수의 질문에 대답할
아무런 책임을 못느꼈기 때문일 수 있을 것이다. 이와는 별개로 제자들은 지금껏 다투어온 언쟁 과정을 예수께 소상히 보고하는 것은 곧 자신들의 영적 무기력과 무능력을 폭로 하는 것이었기에 침묵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침묵의 정황을 깨고 나선것은 바로 무리 중 가장 답답한 지경에 놓인 아들의 아버지였다. 그는 무리를 헤집고 달려나와 숨김없이 그간의 되어진 일을 설명하게 된다.

====================9:18
귀신이 어디서 든지. . . 파리하여 가는지라 - 그 아비는 자기 아들에게 대한 귀신의 만행을 그 아이를 사로잡아 넘어뜨리는 것으로 설명했다. 그의설명을 비추어 볼때 그 아이는 분명 간질병 질환에 고통당하고 있었다. 특히 그 각 증세를 살펴 보면 거꾸러져 란 부셔버리다 , 소리지르다 , 잡아 찢다 등의 뜻에서 파생된 말로서 괴성을 동반한 심한 경련과 뒤틀림을 의미한다.

====================9:19
믿음이 없는 세대여 - 제자들이 병을 고치지 못했다는 말에 대한 예수의 반응은 믿음 없음에대한 탄식이다. 여기서 믿음이 없다 는 말은 단순히 믿음이 약한 상태를 일컫는다. 그리고 세대 란 족속 자손 , 동시대 사람들 등의 다양한 의미가 들어 있다.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책망하신 대상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9:20
귀신이 예수를 보고. . .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 여기서도 역시 귀신은 1:24;5:7에서와 같이 예수가 자신을 정복하고 추방 시킬 분으로 알아차리고 환자에게 경련을 일으키게 한다. 이 같은 묘사는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을 구체적으로 밝힘으로써 그 원인 자인 악령의 실체를 규명해 주고 있다.

====================9:21
언제부터. . . 어릴 때부터 - 이 같은 표현은 환자의 상태가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어온 매우 심각한 것이라는 점과 환자에 대한 깊은 동정심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질문이다. 한편 그 아버지의 대답은 어릴 때부터 라고 했는데 이 말은 태어날 때 부터는 아니지만 그 아이의 지각이 발달하기 시작할 때부터, 즉 그의 지금까지의 생애 동안 계속되어 온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9:22
귀신이 죽이려고. . . 자주 던졌나이다 - 귀신의 본질은 인간성을 파괴하고 궁극적으로 한 인간의 영. 육을 죽이려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귀신이 한 아이의 정신을 지배하고 조종하여 그를 물과 불에 몰아넣어 파멸시키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특히 마가가 언급한 물 은 복수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아마도 물 이 연못이나 시내 등을 가리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주 란 말은 그 아이에 대한 귀신의 악한 영향력이 한 두 번에 그친것이 아니라 빈번히 지속되었음을 암시한다.

====================9:23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 이는 22절의 아비의 말 곧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을 받는 말로서, 그 아비가 강조한 . . . 있거든 이라는 표현에 특별한 주의를 환기시킴으로서 믿음의 결핍을 예리하게 꼬집고 있다. 믿는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 22절에서 아버지가 간청한 말과 정면으로 대립되는 구절인데 환자의 아버지는 예수의 능력을 의지하여 예수께 할 수 있다면 해 달라고 요청 했지만 예수는 전혀 반대로 예수 자신의 능력의 유무와는 별개로 환자 아버지의 예수께 대한 신뢰와 그 분의 능력에 대한 믿음에 치병이 달려 있음을 말하고 있다. 즉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모든것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실로 믿음은 병 고침을 받는데 필요한 조건이라기보다는 믿음 자체가 병을 고치는 능력을 발휘하는 능동적인 힘인 것이다.

====================9:24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 사건의 긴박성과 생동감을 더해 주는 곧 이란 부사로써 본문이 시작되고 있다(1:10). 시로 그 아비는 예수의 믿음 없음에 대한 질책을 듣자마자 그 즉시 격정적인 반응을 나타내었다. 여기서 소리를 질러 는 제 1 과거 분사 형태를 취하고 있어 그 외침은 마치 반항의 고함처럼 크고도 계속적으로 터져나왔음을 암시한다.

====================9:25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 이 구절은 15절의 내용과 모순되고 있는데 15절에서는 이미 그곳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이 예수에게로 달려나와 문안한 것으로 묘사된 반면 어기서 또다시 무리들이 달려온다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서로 모순이 되는 듯이 보인다. 여기서 모인 무리들은 15절에서 보여진 무리들과 함께 새로 모여든 또다른 무리들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9:26
귀신이 . . . 죽었다 하나 - 이 장면은 마가만이 언급하고 있는데 귀신이 그아이에게서 쫓겨나기 직전 최후 발악을 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귀신이 소리 질렀다는 표현은 구신이 도망치며 지르는 비명소리라고 볼 수 있으며 그 같은 귀신의 행동 때문에 환자는 크나큰 충격을 받아 다시 발작을 하였으며 마침내 죽은 듯이 기진맥진하여 누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이 환자가 처참한 모습으로 치료된것은 다른 치병 기적과 독특하게 다른 점이라고 볼 수 있다.

====================9:27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 사람들이 죽었다고 생각되어질 정도로 기진맥진한 환자를 예수가 직접 손을 잡아 일으키는 장면은 19절에서 묘사된 바 있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라는 말과 같이 예수의 깊은 동정심과 연대 의식이 넘치는 사랑과 권능에 찬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운 사실은 문맥상 새로운 인간의 탄생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9:28
우리는 어찌하여. . .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 제자들이 예수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는데 그 집이 누구의 집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이이야기는 군중들과 헤어져 예수와 제자들만 한적한 곳에서 대화하는 장면을 말해 주는 것인데, 본서에는 이와 같은 활동 후 집으로 들어가 제자들에게 보충 설명하는 장면이 자주 나타난다(4:10; 10:10;1:17은 집이 아니라 한적한 곳).

===================9:29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단호하고 분명한 것이었다. 즉 기도 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도란 어떤 초능력적 힘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게를 이루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촉구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9:30
그 곳을 떠나 가릴리 가운데로 - 여기서 말하는 그곳 이 어딘지 밝힐 수 있는 단서는 없지만 앞절과 무리없이 이야기가 연결된다면 산상 변화 사건과 그 산 아래에서의 치병 기적이 일어난 그 사건 현장으로부터 떠나 갈릴리 지역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9: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며 - 이 문장은 이유를 설명하는 접속사 가르 로 연결되는데, 앞절에서 언급된 이야기, 즉 아무에게도 자신의 여행을 알리지 않은 이유를 설명한다. 즉 그것은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동안 이 일에 거의 전념하시게 된다.

==================9:32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 10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마가는 제자들이 깨닫지 못했다고 언급하는데, 평행 본문 마 17:23에서는 제자들이 근심 했다고 말하며, 눅 9:45 에서는 예수가 일부러 어렵게 말하여 제자들이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 아무튼 마가의 표현은 제자들에게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왜냐하면 마가는 기회있을 때마다 제자들의 무지를 강조해 왔기 때문이다(10절; 4:13; 8:17 - 21등).

====================9:33
가버나움에 이르 집에 계실새 - 예수의 일행이 가버나움의 어떤 집에 들어가 후식을 취하셨는데, 30절에서 언급한 갈릴리 지역의 동쪽 호수 북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 가버나움은 베드로의 동리로서(1:21; 2:1), 머문 집은 베드로의 집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아마도 예수는 선교 활동의 거점이 되었던 곳을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에 들러보고 싶었을 것이 틀림 없다.

=====================9:34
저희가 잠잠하니 - 잠잠하니 란 말 역시 미완료 시제를 취하고 있어 계속적인 침묵을 넌지시 보여 주고 있다. 실로 예수의 질문은 단순히 어떤 사실을 알아보기 위함이라기보다 그들 내부에 깃든 어리석고 추악한 욕망을 여실히 파헤치고 지적하신 것이었기에 제자들은 당황과 수치로 뒤덤벅이된 채 침묵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누가 더 높은자인가 하는 논쟁은 제자들 사이에서 서열 문제가 분명하게 서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 본다.

=====================9:35
예수께서 앉으사 - 이런 자세는 유대교의 랍비가 흔히 취했던 것으로(마13:1;눅5:3; 요8:2), 이때 예수께서는 양쪽다리를 주욱 뻗으시고 앉으셨을 것이다.

=====================9:36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 에수 자신의 가르침을 구체적이면서도 상징적 으로 어린이를 통헤 가르치고 있다, 어린아이는 당시 헬라적 무화권내에서 미숙하고 유치한 존재로 이해됐고 유대 문화권 내에서도 어린아이를 방자하고 무분별하며 엄격한 교육을 필요로 하는 존재요, 전쟁이나 노역에 별가치가 없는 신분으로 이해하였다. 특히 마가는 어린아이를 상징적으로 가장 낮은 자로 이해했고 더욱이 낮고 작은 자를 강조하기 위해 하나 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가 섬김의 모델로서 어린아이를 내세운 것은, 그 시대에 그들이 가장 낮은 자로 평가 되었기 때문이다.

======================9:37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난를 영접하면 - 예수는 가장 낮고 천하며 약한자로 상징되는 어린아이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 즉 어린아이를 대하는 일이 곧 예수를 대하는 일이 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자기 자신과 가장 낮은 자를 동일시한 이야기는 마25:31 - 46에도 나오는데, 굶주리고 옥에 갇히고 헐벗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예수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가장 낮은 자에게는 마치 예수를 대하듯이 하라는 말이 되는데, 내 이름으로 라는 말이 그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9: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이 요한의 질문으로 시작되고 있는데, 요한의 질문은 앞에서 언급한 섬김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나타낸 반응으로 보인다. 즉 내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 를 영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반응이다. 요한이 우리 라는 복수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그 상황 에서 그가 모든 제자들을 대표해서 말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9:39
금하지 말라 - 예수의 대답이 간결하고 분명하게 언급되는데, 한 마디로 금하지 말라 는 것이다.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 사람을 방해하는 일을 중단하라 는 뜻이 된다. 즉 그가 비록 너희제자 집단에 소속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의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행위를 막지 말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사람은 예수의 치병기적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그리고 제자들의 치병활동에 대한 소식을 듣거나 직접 보았기 때문에 모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9: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자 - 예수께서 막지 말라 명령하신 두번째 근거는 반대하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를 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낸다는 것은 그 사람이 예수를 반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는것으로,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요 언젠가는 우리의편이 된다는 사실이다.

======================9:41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 본절은 39, 40절에 언급된 관용의 정신을 더욱 강조해주고 있다. 물론 본절은, 40절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40절은 반대하지 않는 사람이 같은 편이라는 소극적인 언급인 반면 여기서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이유로 물 한그릇을 대접한 사람은 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적극적인 의미로서 동조자라고 할 수 있다.

=======================9:42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 이 말은 우선 37절의 어린아이를 통한 교훈과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언급된 소자 는 분명 하나님께 대한 전폭적인 신뢰와 믿음을 지니고 있지만 연약하여 쉽게 깨어질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자, 세상에서 천시와 멸시를 받는 자, 무엇하나 떳떳이 내세울 것이라고는 없는 자(고전1:28)등을 의미 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본문에서 언급한 나를 믿는 이라는 단서 조항은 지금 예수 공동체에 속해 있거나, 또는 잠재적으로 예수를 믿을 가능성이 있는 미래의 신앙공동체까지를 포함한 포괄적인 문구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본문은 38절에서 요한에 의해서 언급된 질문을 연관시켜 생각할 수도 있다.

=======================9:43-48
여기서 부터는 42절에서 언급한 실족케 하는자의 징벌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좀더 발전적으로 생명, 곧 영원하면 서도 종말론적인 생명에 들어가는 일이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죄를 제하기 위해서는 철두 철미한 수단이 강구되어야 한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본절의 표현 방법과 그에 부과된 의미와, 또 예수께서 본문의 말씀을 하신 본질적인 의도 등에 대하여 대략 일곱 가지로 나누어 살펴 보겠다. 1) 이야기의 형태는 사람의 신체 중 제일 민감한 감각 기관인 손 과 발 그리고 눈 을 들어 사람의 범죄와 연결시키고 있다. 2) 이야기의 전개는 3단계로 진행되는데, 범죄 - 찍어버림 - 영생의길을 말하고있다. 다시 말하면 손이 범죄하면 손을 찍어버리고, 발이 범죄하면 발을 찍어버리며, 눈이 범죄하면 눈을 빼버려야 하는 것이 영생에 이르는 길이다. 3) 여기서 크게두가지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데 첫째는 범죄 요인이 되는 손, 발, 눈을 제거함으로써 영생을 얻는 길이다. 즉 철저한 회개를 통해 영생을 얻는 다는 말이 된다. 4) 여기서 말하는 영생이란 영원한 이라는 형용사 아이온 없이 단순한 조엔 이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직역하면 생명이된다. 물론 이 조엔 은 단순히 육체적인 생명 을 뜻하는 프쉬케 가 아니라 하나님과 연관된 영원한 특성을 지닌 초월적인 생명을 의미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은 옳다고 생각된다. 5)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 내리는 형벌로 지옥 이 등장하는데, 이와 같은 지옥의 개념은 당시 사람들에게 보편화된 개념이다. 6) 44절과 46절이 생략되었는데, 여러 후기 사본(알렉산드리아, 모스코, 베자 사본 및 벌게잇 역 등)에는 이 두 절이 각각 48절의 내용과 동일한 문구로 연결되어 있었다. 7) 이 이야기의 전체적인 내용은 사람의 행위에 대한 형벌과 심판이 중심을 차지한 듯 하지만 사실상 강조점은 사람의현재적 행동 윤리에 관심하는 것이다. 즉 저세상에 가서 편안하게살기 위한 도피적 암시가 아니라 현재의 삶에 대한 철저한 자기 책임성과 윤리적 철저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신채의 일부에 대한 잔혹스러운 표현, 즉 잘라버리고 빼어버리라는 말은 육체에 대한 무가치 또는 문자적 측면에서의 금욕주의를 말하는 것이 절대 아니고 회개의 철저성과 전인격의 경건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9:49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 본절과 50절은 본서 가운데 가장 난해한 구절 중 하나로 취급되며, 그런 까닭에 그 해석들도 구구하다. 그 해석들을 살펴보면 1)헬라어 개역 성경에 번역되지 아니한 가르 라는 접속사가 들어 있어 48절과 본절을 자연스레 연결시켜 주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불을 앞절에서 언급된 지옥의 꺼지지 않는 불이라고 해석하는 방법이다. 2) 재물에 뿌리는 소금을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의 상징으로 보는 방법이다(민18:19) 3)여기서의 불을 예수의 제자들이 겪는 시련과 박해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방법이다. 이상과 같은 세가지의 견해는 그 모두가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주목할 만한 것이라는 점에서 취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48절과 연결성을 고려한다면 1)의 견해를 가장 타당한 해석으로 볼 수 있다.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 이 마지막 절은 39 - 49절까지의 내용을 함축시켜, 격언구 형식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즉 이제까지의 가르침에 대한 의도와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소금은 사람에게 참 좋은 것이고 사람의 삶에 있어서 참맛을 내기 위해 반드시 소금을 쳐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소금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하는 문제가 남는다. 소금은 33- 42절까지의 내용을 생각해 볼때 어린아이와 같은 작고 미미한 사람을 섬기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섬김을 위한 자기 회생, 겸손, 사랑, 남을 자신보다 낫게 여김, 절제와 경건등으로 나타나는 삶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50절이 갖는 전체적 의미는 49절에서처럼 심판의 때에 불로 소금 치듯 당하지 않으려면 평소의 삶속에서 희생과 겸손 사랑의 소금을 치라는 것이다.



전장에서는 예수께서 최초로 메시야 신분 및 그 사역의 본질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신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제 본장에서는 전장에서 계시된 내용이 더욱 구체적이고도 확연하게 나타난다. 첫번째와 두번째 수난 예고 사이에 변화산 사건이 수록되어 있는 점이나 수난 예고가 먼저 있은 연후에 변화산 사건이 등장하는 순서의 의미 등의 문맥상의 유의 사항은 마태복음 평행 부분(17장)의 강해에서 상세히 다루었으므로 참조하기 바라며, 여기서는 본장의 중심 주제를 다음 두 가지의 사항에 초점을 맞추어 상고해 보기로 하자.
(1) 예수의 수난과 영광. 본장의 내용은 세 문단으로 나누어지며(1-13;14-32;33-50절). 이 가운데 첫번째와 두번째 문단은 각기 예수의 영광과 수난을 시사하는 두개의 소단락으로 구분될 수 있다. 즉, 1-8절은 베드로에 의해 고백되어진 바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보여 주는 반면에, 9-13절은 메시야로서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인 십자가 수난을 재차 예고하는 내용이다. 또한 14-29절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영광스러운 권능이 소개되는 반면, 30-32절에서는 바로 그 하나님의 아들이 감당해야 할 수난이 다시금 예고된다. 마가가 이처럼 그리스도의 영광과 수난에 관한 내용을 거듭 교차시킨 것은 첫째로, 앞장에서 계시된 메시야의 신분과 사역의 본질을 보다 확실히 드러내 보이기 위함이며, 둘째로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고난에 함축된 역설적 진리를 강조하여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2) 제자 훈련. 공생애를 결산하는 시점에 이르러 예수께서 열 두 제자들에게 집중적인 교육과 훈련을 시행하기 시작하셨다는 사실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본장에 수록된 사건들이 결론적 교훈 및 경계 부분인 세번째 문단(33-50절)은 물론이고 본장 전체는 예수의 제자화 훈련에 대한 의지를 뚜렷이 보여 준다. 하지만 당시 제자들은 주님의 의도와는 달리 당신의 이루고자 하신 일을 도무지 깨닫지 못했다(32절). 아마 그들은 예수의 변화된 일련의 태도와 행동들을 통해, 그들이 기대해왔던 시기가 바야흐로 도래하고 있음을 인식하였던 것 같다. 메시야로서의 자기 계시와 영광스러운 변화산 사건 이후에는 항상 예수의 수난 예고가 뒤따랐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의 영광과 관련된 사실에만 집착하고 수난에 관한 부분은 의도적으로 무시해버리거나 의아해 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예수께서 이적적 권능을 행사하사 정치적 메시야로 등장하리라는 기대에만 부푼 나머지, 정치적이고 지상적인 메시야 왕국이 도래했을 때를 전제한 자리 다툼에 열을 올렸던 것이다(34절). 그들의 관심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보다는 세상에로 집중되어 있었고 십자가 고통없이 면류관만 바라고 있었으므로, 예수의 영광과 수난이 동시에 함축되어 있는 역설적 진리를 깨달을 수 없었다. 이러한 제반 이유들로 말미암아 예수께서는 집중적인 제자 훈련을 시행하셨다.

1. 변화산 사건(9:1-13)
본문은 예수께서 당신의 메시야직의 비밀을 제자들에게 공개하신지 엿새 후에 세 제자 앞에서 영광스러운 형태로 변모하신 내용이다. 이 변모(Transfiguration) 사건은 성육신(Incarnation), 십자가 수난(Crucifixion), 부활(Resurrection) 및 승천(Ascension)과 더불어 예수 생애의 5대 사건에 해당하며, 공관 복음서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마 17:1-13;눅 9:28-36). 마 17:1-13 강해에서는 변화산 사건의 구체적 내용을 순서별로 하나하나 상세히 설명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이 사건의 목적 혹은 의의를 상고하는 데에 그치기로 하자.
(1) 메시야되신 예수를 증거함. 예수는 공생애를 시작하실 무렵에 세례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 선포받음 바 있거니와(1:11), 이제 공생애의 마감 시기에 즈음하여 다시 한번 하늘의 인정을 받고 있다(7절). 뿐만 아니라 본문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씀을 나누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데(4절), 이는 곧, 구약의 모든 율법과 예언이 예수를 메시야로 증거함을 암시한다. 또한 본문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누리게 될 영광을 예시하고 있기도 하다(골 3:4). 비록 고난받는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를 증거하는 본문은 8:29에 언급된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한 확증이기도 하다.
(2) 제자들을 위한 위로와 교훈. 본문은 또한 예수의 제자 훈련이란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향후 예수의 행동이나 메시지는 고난과 희생이라는 주제에로 더욱 집중될 것이었으며, 영적 무지의 늪을 벗어나지 못한 제자들에게는 이 주제가 감당하기 힘든 성질의 것이었다. 특히 불과 며칠 전에 예수는 자신의 수난을 처음으로 공공연하게 예고하셨거니와(8:31), 이 예고를들은 제자들은 한편으로 의아해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불안에 사로잡혔음직하다. 따라서 예수는 영광스럽게 변화된 모습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제자들의 불안과 동요를 가라앉힐 뿐만 아니라 그들로 장차 당신의 영광을 널리 증거하게끔 훈련시키고자 하셨다고 볼 수 있다.
제자 훈련이라는 관점에서 본문을 상고할 때, 우리는 예수의 거시안적(巨視眼的) 계획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모 광경을 보고서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곤경과 궁핍에 허덕이는 산 아래의 무리들(14절 ff. )을 도외시한 채 영광에만 집착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또한 예수를 모세나 엘리야와 동등한 위상(位相)에 두었다(5절). 이처럼 당시 제자들의 영적 상태는 실로 보잘 것 없었지만, 이 모든 체험들이 장래에는 그들을 교회의 지도자로서 봉사하게 하는 데에 큰 밑거름으로 작용할 것이었다.

2. 귀신 축사(逐邪)와 두번째 수난 예고(9:14-32)
본문은 변화산 사건 직후에 예수께서 귀신들린 아이를 치유하시고 이어 수난을 예고하신 사실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8장에 수록된 메시야의 자기 공개가 예수의 공생애에 있어 일대 전환점을 마련하는 사건이었음은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이러한 새로운 전환점이란 측면에서 본문의 치유 기사는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또한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받으신 후 처음으로 복음 사역을 개시하신 사실에 비견될 수 있다(1:14, 15).
이 사건은 공관 복음서에 모두 수록되어 있으며(마 17:14-20;눅 9:37;43b), 그 중에서 본서의 설명이 가장 상세하다. 마태는 이 사건을 비교적 간략하게 소개하면서 제자들의 불신 상태를 지적하려는 의도를 강력히 시사한다. 따라서 마 1:14-21의 강해에서는 이 '믿음'의 문제에다 초점을 맞추어 믿음의 보존과 진보 및 믿음의 본질과 능력 등을 상고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본문을 통해 뚜렷이 부각되는 두 가지 대조적인 사항에 관해 살펴보기로 하자. 그리고 예수의 두번째 수난 예고(30-32절)에 관한 강해는 본서에 수록된 예수의 세 차례의 수난 예고를 비교하는 주제 강해로 대신하고자 한다.
(1) 변화산 위와 산 아래. 라파엘로(Raffaello Santi, 1483-1520)라는 유명한 화가의 그림 중에는 변화산상의 영광스러운 광경과 산 아래의 참경(慘景)을 선명히 대조시킨 것이 있다. 이 그림에서 보여 주듯이 제자들은 영광의 광경을 목격하고 흥분과 환희에 도취되어 예수께서 감당하셔야 할 사역과 자신들이 해야할 일들을 잊은듯이 보인다. 그러나 예수는 당신의 영광 가운데 계속 함께 머무르고자 하는 제자들을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 오셨다. 주님은 변화산상에 계시면서도 자신이 필히 완수해야 할 고난받는 종의 사명과,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사 그들의 영육간의 궁핍함을 채우고자 하는 봉사의 삶을 결코 잊지 않으셨다.
변화산의 위와 아래의 대조적인 두 광경은 어거스틴(Augustine)의 말한 바 두 도성을 연상시킨다. 즉, 성도들이 위로는 영화롭고 이상적인 신천 신지(新天新地)에 대한 비전을 바라 보지만, 아래로는 온갖 부조리와 비극이 더불어 존재하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이 두 세계간의 관계를 어떻게 조화시켜 나가느냐 하는 문제야말로 신앙 생활의 큰 관건 중의 하나라 하겠다. 인간 상호간의 모든 수평적 관계를 건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수직적 관계에 충실해야 함이 당연하다. 따라서 하나님과 자신과의 내밀하고도 깊이 있는 영교(靈交)의 시간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 현실을 도외시하고 영원한 피안의 세계에만 머무르고자 하는 것은 바른 신앙 자세가 아니다. 묵상에서 실제적 활동(praxis)으로, 서재에서 구체적 삶의 터 (field)로, 밀실에서 가두(街頭)로 그리고 주님과의 내밀한 영교에서 사단과의 전투로 나아가는 신앙이어야말로 올바르고 생명력 있는 신앙이라 하겠다.
(2) 예수의 권능과 제자들을 불신. 또한 본문에서는 귀신을 제어하는 예수의 권능과 믿음이 없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는 제자들의 무기력함이 뚜렷이 대조를 이룬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의 권능을 수(數)없이 목격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도 예수의 이름을 믿음으로써 그 크신 권능을 나타낼 수 있다는 약속을 받았다(마 21:22;요 14: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잠시 예수와 떨어져 있는 사이에 믿음을 상실하고만 듯하다. 이제 십자가가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기 시작하는 이 긴박한 시점에 이르러, 예수의 제자들은 잠시 예수와 떨어져 있는 사이에 이르러, 예수의 제자 훈련이 집중적으로 강화되어갔음은 물론이거니와 제자들은 영적 무지와 불신에 대한 예수의 안타까움과 책망도 더 노골적으로 나타난다(41절).
불신으로 말미암아 은혜의 권능을 상실해 버린 이 모습은 오늘날의 우리들의 자화상일 수도 있다. 사단은 고통스러운 역경이나 달콤한 유혹 등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성도들을 은혜의 보좌로부터 멀어지게 하려 한다. 따라서 늘 기도에 힘쓰고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을 때에만 저러한 사단의 궤계를 물리칠 수 있다(고전 15:58;빌 4:8;딤전 4:7, 8;벧전 3:11).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영혼의 질병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사망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무수하다. 그리고 이들의 멸망을 방관하는 자는 주님 앞에 섰을 때에 그 책임을 반드시 추궁받을 것이다.

* 세 차례 수난 예고의 비교. 예수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수난당하시리라는 예고는 공생애 초기부터 당신의 여러 말씀들 속에 암시되어 왔다. 그러나 예수께서 본격적으로 그리고 공공연하게 수난을 예고하신 때는 메시야로서의 자기 공개 이후이다. 예수의 사역 면에서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한 이후로부터 당신의 십자가 수난을 집중적으로 예고 하심으로써, 예수는 메시야직의 본질적 의미를 확실히 표명함과 아울러 제자들도 고난과 희생에 내포된 심오한 진리를 깨닫고 당신의 뒤를 좇게끔 교육하고자 원하셨다. 세 차례에 걸친 예수의 공개적 수난 예고는 공관 복음서에 공통적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각 수난 예고의 시기는 메시야의 자기 공개 직후(8:31-9:1;마 16:21-28;눅 9:22, 23), 변화산 사건 직후(9:30-32;마 17:22;눅 9:43b-45)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무렵(10:32-34;마 20:17-19;눅 18:31-34)등이다. 그리고 공관 복음서 기자들 중 유독 마태만이 마 26:1-5에서 수난 예고를 한 차례 더 수록하고 있다. 세 차례에 걸친 공개적 수난 예고를 비교해 보면. 점차적으로 그 수난 과정과 수난 상황이 구체화 되어감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예고에는 한결같이 예수의 부활이 동시에 언급됨으로써, 주께서 잠시 고난을 당하나 마침내는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스의 영광을 회복하실 것이라는 종국적 승리가 제시되어 있다.
(1) 첫번째 예고는 수난의 전반적 측면 곧, 수난당하실 장소, 핍박의 주동 세력,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 등을 예시하며, 예수의 고난에 제자들도 동참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2) 두번째 예고는 예수께서 체포당하실 것을 묘사한다.
(3) 세번째 예고는 예수의 수난 장면을 가장 구체적으로 묘사하였다. 즉 예수께서 희롱과 능욕과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히시게 되는 과정들을 생생하게 예언한 것이다.
이처럼 예수는 자신 앞에 놓인 고난의 쓴 잔을 너무도 명백히 알고 있었지만, 그 잔을 회피하려고 하지 않고 묵묵히 감수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인류의 죄를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드리고자 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의 자발적이고도 완벽한 순종을 보게 된다(요 1:29).

* 귀신들림과 축사. 공관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예수께서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데에 공생애의 상당한 부분을 할애하셨다(1:34;마 4:24;눅 4:40). 특히 여기서는 귀신 축사(逐邪)에 관해 일고해 보기로 하자. 이 문제를 고찰함에 있어 우리는 먼저 귀신의 존재와 속성 및 활동에 관해 간략하게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분명 귀신의 존재를 명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성도들 중에도 귀신의 존재를 아예 부정하는 사람들의 있는가 하면 인정은 하되 귀신에 대한 비성경적 식견을 가진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1) 귀신의 속성과 활동. 귀신의 영적이며(9:25;마 17:18), 지적인 존재이며(딤전 4:1-4:15;마 13:25) 사단의 지배를 확장시키는 일에 주안점을 두고 전개된다.
(2) 귀신들림에 대하여. '귀신들렸다'는 것은 귀신이 어떤 사람 안에 거하면서 그 사람에게 직접적인 통제력과 영향력을 행사하여 정신이나(마 17:15;요 10:18-21) 몸을 (18절;마 4:24;9:32, 33;눅 11:14) 해(害)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 묘사된 바에 의하면, 귀신들린 자는 미쳐 날뛰기도 하고(5:5, 15) 각종 병에 걸리기도 한다(욥 2:7;눅 4:40, 41). 하지만 모든 병의 원인이 귀신에게 있는 것은 분명 아니다.
한편 그리스도인은 그 속에 성령께서 내주하시기 때문에 귀신에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성도라 할지라도 불순종에 빠져 성령의 도우심을 스스로 제한시켰을 경우에는 귀신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귀신들린 듯이 보이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3) 귀신 축사. 귀신은 하나님의 뜻을 훼방하고 인간을 파멸로 인도하기 위하여 활동하기 때문에 추방되어져야만 한다. 귀신은 초월적 존재이므로 인간보다 우월한 능력으로써 인간을 괴롭힐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성령 충만함 가운데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낼 수 있다(16:17). 축사함에 있어 그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능력이나 특별한 주술적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의 권능으로써 귀신을 쫓는다는 것이다. 한편, 귀신은 예수의 이름으로 쫓겨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모든 귀신이 사단과 더불어 불못에 던지움을 받게될 것이다(창 3:14;눅 10:18;계12:9;20:10).

3. 어린아이를 통한 교훈(9:33-37)
서로 높아지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혁신적인 가치관을 교훈하신 내용이다. 마태복음에서는 본문의 기사가 시작되기 전에, 물고기의 입에서 한 세겔(shekel)을 꺼내어 성전세를 내는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마 17:24-27). 마가는 그 이야기를 생략하고 본문의 기사를 막바로 연결시켜 이를 9:1-32에 대한 결론적 교훈으로 삼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문을 상고할 때 유념해 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제자들과 예수 사이의 내면적 괴리 상태. 제자들은 예수의 거듭되는 수난 예고를 듣고서도 그 뜻을 미처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른데 대한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보상을 강렬하게 기대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머리 속에는 머리 둘 곳도 없이 빈한(貧寒)하게 지내시며 병들고 가난한 무리들을 위해 수고하시는 종의 모습 보다는 이적적 권능을 행하며 영광 중에 거하는 승리자의 모습만이 인상깊게 남아있었을 것이다. 십자가 수난을 앞두고서 그 수난의 의미를 주지시키기 위해 애쓰시는 주님과 일시적이고 현세적인 영광에 더욱 집착해가는 제자들 간의 괴리감(乖離感)은 이후의 내용들에서 더욱 현저해져 간다. 그들은 외관상으로는 누구보다도 열렬하게 예수를 따랐지만, 참된 메시야관에 대해 무지하였고 신앙의 도리의 심오한 진면목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영적 측면에서는 갓난 아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2) 새로운 가치관. 겸손과 봉사 그리고 나아가 자기 희생을 강조하는 예수의 교훈은 세상적 가치관에 비할 때 실로 파격적이며 혁신적이라 할 만하다. 약육 강식의 힘의 논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상의 일반적 가치관을 지배해 왔다. 자연 세계에서 우리는 사슬식으로 연결된 먹고 먹히는 관계를 통해 생태계(生態系) 전체가 유지되는 것을 본다. 하지만 사람은 단순히 자연의 일부인 것이 아니라 자연을 다스리는 만물의 영장이요, 다른 사람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숭고한 차원의 윤리적 요구를 받은 존재이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일에 몰두하기를 좋아하며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기적 욕망들이 서로 충돌하면 소위 세상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장소로 전락되고 만다. 인간의 삶을 이런 관점에서만 파악하게 되면, 어떤 이기적 목적을 만족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돈과 권력으로 압축되는 세상적 힘을 얻지 못하면 심히 불안해 한다. 불행하게도 이 세상에는 날이 갈수록 약육 강식의 힘의 논리가 더 신봉되어가고 극단적 이기주의가 패배해 감에 따라, 예수께서 가르치신 숭고한 천국 시민의 윤리는 단지 허공에서만 맴도는 추상적 이상론에 불과한 것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그러나 악인의 영화(榮華)는 실로 덧없는 것이요(시 37:2, 10, 38;75:8;잠 14:2;벧후 2:17), 주님이 다스리는 공의와 사랑의 나라가 조만간 온 누리에 임하리라는 믿음을 확고히 가진 자는 본문의 교훈을 정금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며 또한 천군만만보다 더 강력한 힘으로 여길 것이다.

4. 제자들의 무지와 독선 및 범죄에 대한 경고(9:38-50)
앞 문단에 이어 본문에서도 제자들의 헛된 야욕과 무지 및 이를 교정시키고자 애쓰시는 주님의 교훈과 경고가 소개된다. 본문의 내용을 편의상 두 가지 주제로 나누어 상고하는 것이 좋겠다.
(1) 화목을 가르치심. 본문에 수록된 예수의 말씀은 요한을 위시한 제자들의 시기심과 파벌의식을 직접적 발달으로 하고 있다(38절).
이와 유사한 상황은 민 11:26-29에서도 나타난다. 즉, 여호수아(Joshua)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칠십인의 장로들 중에 피택된 엘닷(Eldad)과 메닷(Medad)이 이스라엘의 진 중에서 예언하자 이를 금하도록 모세에게 요청하였다. 아마도 여호수아는 엘닷과 메닷이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줄로만 알고 그러한 요청을 한 듯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영적 무지를 노출시킨 것에 불과하였다.
본문의 제자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세속적 야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주의 일꾼의 사역을 금지시켰다는 점에서 여호수아보다 훨씬 더 완악하고 무지하였다(38절). 앞 단락에서 제자들은 그들간에 서로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 불화를 일으켰거니와, 이제 여기서는 그들과 친분 관계가 없는 자들의 활동에 대해 공통적으로 시기하고 있다. 아마 당시 제자들은 지상적 메시야 왕국의 도래시에 자신들 외의 사람들이 요직(要職)을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염려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더구나 제자들의 기억 속에는 귀신들려 벙어리된 자를 치유하지 못했던 쓰라린 경험(14-18절)이 강렬하게 되살아났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세속적 권력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 상호간에는 물론이고 대외적으로도 이간과 경쟁 의식을 드러내 보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는 앞 단락에 이어 섬김의 도를 재차 강조하면서(41절) 화목을 추구할 것을 명령하셨다(50절;잠 3:30;20:3;빌 2:3;약 3:4). 그리고 배타적 편견과 독선적 특권 의식을 버리고 성령 안에서 하나될 것을 가르치셨다(33-37절). 본문에서 주님이 힘주어 경계하신 당파성과 분리주의는 초대 교회와(고전 1:12)향후의 교회사 전체를 통해 나타났던 가장 큰 병폐 중의 하나였다. 교회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적 실리에 집착한 나머지 다른 교파로 갈라서거나 새로운 군소 교단을 만들어 행세를 하려는 자들은 예수의 심판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2) 범죄에 대한 경고. 43-49절은 범죄에 대한 경고라 할 수 있다. 직접적 경고 대상은 (1)항에 설명한 배타적이고 세속적인 당파심이라 하겠지만 넓게는 제자들이 처한 전반적인 심령 상태,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영적 무지와 완악함에서 벗어나지 않는 모든 불신 세력까지 포함하고 있다.
특히 우리는 본문의 경고가 매우 신랄하고 엄격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예수께서 십자가의 엄청난 고난을 당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을 만큼 인류의 죄악이 심각한 성질의 것임을 시사함과 아울러 영생의 축복이야말로 그 어떤 희생을 지불해도 아까울 것이 없는 고귀한 것임을 상기시킨다(마 13:45, 46).
또한 본문에서 예수는 제자들의 연악함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으므로 당장에는 그들이 무지와 불신 가운데 크고 작은 실수를 연발하는 것을 용납하사 불쌍히 여기시며 사랑으로 훈계하셨지만 성숙한 믿음에 이르기 위해서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반드시 청산하지 않으면 안 될 죄악된 요소들이 있음을 분명히 천명하고 계신다.

* 지옥에 대하여. 여기서는 신구약 성경을 통하여 각기 다양하게 표현되는 지옥에 관하여 개괄적으로나마 살펴보기로 하겠다.
(1) 정의. 지옥이란 구속함 받지 못한 죄인들이 마지막 심판 후에 들어가게 될 형벌의 장소 혹은 고통의 상태를 의미하며, 사후의 중간 상태와는 구별되는 개념이다(눅 23:43 주제 강해 '사후의 중간기 상태' 참조).
(2) 구약 시대의 지옥관.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는' 끔찍한 상황에 대한 이사야의 진술(사 66:24)을 제외하면, 앞에서 정의한 바와 같은 영원한 형벌의 장소로서의 지옥에 관한 언급이 구약성경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음부'(* , 스올)라는 개념 속에 지옥의 개념이 어렴풋하게 내포되어 있을 뿐이다(사 14:15;겔 32:23등). 구약성경에서 음부는 어둡고 그늘진 장소이며(욥 10:21, 22;시 143:3), 침묵의 장소로서(시 94:17;115:17), 여기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을 뿐 아니라(시 6:5;88:10-12)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곳(욥 14:21;전 9:5-10)이라 묘사되었다. 결국 초기 구약 시대의 히브리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선인과 악인 사이에 약간의 구별이 있기는 하지만 두 부류의 사람이 함께 어두컴컴한 지하 세계에서 기거하게 된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3) 신구약 중간기의 지옥관. 선인과 악인간의 거처의 구별이 빈약한 구약 시대 히브리인들의 음부 개념은 신구약 중간기에 이르러 점차 선인과 악인을 분리하는 사상으로 발전되기 시작했고, 이와 더불어 비로서 지옥의 개념이 히브리인들의 의식 속에 지배적으로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4) 신약 시대의 지옥관. 신약 시대에 이를러 음부의 개념은 더욱 발전되어 의인의 영혼들이 부활과 백보좌 심판을 기다리며 임시 대기하는 장소인 낙원(낙 23:43)과 대치되는 개념. 즉 악인의 영혼들이 영원한 형벌에 처해지기 전에 임시 대기하는 장소를 의미하게 되었다(눅 16:23;계 20:13).
한편, 이와는 별도로 영원한 멸망의 처소인 지옥에 관한 개념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사실 또한 신약 시대의 특기할 만한 계시의 진전이다. 개역 성경의 '지옥'이란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엔나'(* )는 히브리어 '힌놈'(* , 힌놈의 골짜기)에서 유래하였다. 힌놈 골짜기는 몰렉(Molech) 우상에게 아이들을 인신 제사로 바쳤던 곳이며(대하 28:3;33:6), 요시야(Josiah)의 개혁 때에는 불결한 곳으로 선언되어 쓰레기 태우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예레미야(Jeremiah)에 의하면 그렇듯 가증스러운 인신 제사 관습이 여전히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예레미야는 그곳을 '살륙의 골짜기'라 칭하였다(렘 7:32;19:6). 이러한 개념을 확대되어서 나중에 힌놈의 골짜기는 모든 불경건한 자들이 저주와 형벌을 받게 될 곳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한편, 주목할 만한 사실은 '게엔나'라는 말이 약 3:6을 제외하면 공관 복음서에만 나오며, 공관 복음서에서도 예수에 의해서만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지옥에 대한 개념은 거의 전적으로 예수의 계시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예수는 지옥을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곳(48절), '풀무불'(마 13:50), '영원한 불'(마 25:41), '바깥 어두운 데'(마 8:12)등으로 묘사하였다. 기타 서신서나 요한계시록에는 지옥이란 말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내세에서의 혹심한 형벌이라는 의미에서 지옥과 동일한 개념을 시사하는 구절이 많이 발견된다(롬 2:3-9;살전 5:3;살후 1:6-9;히 10:27;벧후 2:4-9;계 14:11등).
이 모든 사실로 미루어 볼때, 예수는 지옥의 교리를 명백하게 그리고 강조하여 가르쳤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성경을 그대로만 해석하려는 극단주의자들을 제외한 모든 성도들은 지옥을 묘사하는 말들이 비유적 언어이기는 하지만 더할 수 없이 두려운 현실성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겠다. 지옥의 구체적 위치나 구조에 관한 언급은 없지만 불신자들에게 영원한 형벌이 엄연히 기다리고 있다는 점에 관해서는 분명히 언급된 만큼,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실행해야 할 긴급한 사명이 바로 전도임을 일깨워 준다(16:15;시 96:3;마 2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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