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마가복음 0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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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바리새인들. . . 예루살렘에서 와서 - 본절은 시간. 장소의 배경 설명에 충실한 마가의 독특한 문장 기법과는 조금 예외적으로 전장(6장)과의 아무런 관련성도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또 이야기의 배경인 장소에 대한 언급도 없다. 다만 예루살렘으로부터 내려온 중앙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중 몇 사람이 예수를 찾아옴으로써 본 사건이 시작되는 것으로 기록한다. 그런데 여기서 장소는 갈릴리의 가버나옴지방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왜냐하면 그곳이 예수의 주(主)활동 무대였고 또 중앙에서 내려온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쉽게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문은 갈릴리선교 기간 중에 발생한 것이라 단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중앙에서 지방까지 예수를 찾아왔는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된다. (1) 중앙에서 그들이 내려온 것은 지방의 율법학자들이 요청한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유는 예수의 열성적인 활동과 민중들 사이에 폭발적으로 높아가는 예수의 인기에 대한 불안 때문에 중앙의 권위 있는 학자들을 초청해 예수에 대한 열기를 식혀 보려는 목적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2) 예루살렘에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독자적 판단에 따라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의 활동은 사회 . 정치적으로든, 종교적으로든 굉장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고 특히 기적의 행위나 죄사함을 선언하는 행위는 종교적 전통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루살렘에서 소문으로 전해오는 예수의 도전적 행위를 직접 살피고 확인하여 대책을 세우기 위하여 몇 사람의 대표를 파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 앞에 언급한 두 가지의 가능성 모두 수용하는 것이다. 즉 갈릴리 지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예수의 활동에 대한 파문이 그들의전통과 종교적 질서까지 위협한다고 판단하여 그 대책으로서 증앙의 권위 있는 학자를 파견하여 조사하고 예수와의 직접적인 논쟁을 통해 파문을 진정시키려 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들을 미루어 짐작해 볼 때 증앙에서 파견된 그들의 소임은 단순히 예수의 활동에 대한 피상적인 조사였다기 보다 오히려 예수의 권위와 인기를 일구에 무너뜨릴 수 있는 모함(謀陷)의 구실을 마련하는 것이었다고 보겠다. 사실 당시 전통적인 유대주의와 예수 사이에는 심각한 갈등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따라서 본문의 조사 단원들은 편견과 적의로 가득 찬 눈으로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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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한 손. . .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 중앙에서 내려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에게 온 뒤 약간의 시간이 경과된 것 같다. 왜냐하면 앞 절에서 '모였다가'로 문장이 끝나 시간 차의 여운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와 제자들의 활동을 관찰하다가 문제가 될 수 있는 결정적 증거를 이제 포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문제의 초점은 '부정한 손. 곧 씻지 않은 손으로 떡을 먹는 행위'였다. 여기서 '부정한 손' 과 '씻지 않은 손'이 동등한 의미로서 표현되고 있는데, 후자는 전자의 설명적 첨가어라 할 수 있다. 이는 이방인(로마)를 위해 복음서를 기록했던 마가의 독자들에 대한 친절한 배려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부정하다'라는 말은 종교적인 의미에서 의식적(意識的)부정(不淨)을 말하는 것이고 '씻지 않은 손'은 그 부정한 이유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들 조상이 정한 결례 의식을 거치지 않아 성결에 이르지못한 '부정한'( * , 코이나이스, '보통', '일반'을 의미) 일반 세상의 손을 가리킨다. 사실 중근동 지방의 식사 예법은 주로 손사용하며 음식을 먹었기 때문에 식사 전에 손을씻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받은 이스라엘에서는 이 손 씻는 일이 단지 위생적 측면에서 보다 오히려 의식적 측면에서 더욱 강조되었다. 한편 이스라엘에 있어서 위생적 부결이 종교적 부정으로 공식 율법화된 것은 출애굽 당시의 일이었다('월경하는 여인'. 레 15:19 - 31;'시체를 만지는 것', 레 21:11;민 19:13;'문등병자', 레 13:3, 44 - 46;14:44 - 57 등). 이와 같은 구분은사람, 짐숭, 물건, 일 등에있어서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이분법적 종교 의식 속에서 나온 것이다. 특히 본문에 언급된 떡을 먹을 때 손을 씻는 관습은 모세의 율법에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제사장의 제의적 관례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미쉬나(Mishnah)의 한부분 전체가(Tohoroth, 'cleanness') 바로 이 '정결'의 문제를 논하고 있음을 볼 때 유대인들의 의식적 정결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지대했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점에서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결례를 행하지 않고 식사를 한 것을 가만히 주시하면서 그들을 부정한 자로 단죄한 것이었다. 한편 혹자(Swete)에 따르면 이때 제자들이 먹었던 음식은 지난 번 벱새다 율리아스에서 5병 2어의 기적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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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호안에 묶여 있는 3, 4절은 유대인들의 전통과 관례에 전혀 생소한 이방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마가가 친절히 설명해 놓은 해설구이다.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 여기서 먼저 '모든 유대인들'이란 특정 계층의 종교 지도자들을 제외한 일반 유대 백성들을 가리킨다. 한편 종교걱 특권을 누리며 남다른 우월 의식을 지니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일반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종교적 규범준수와 각종 규제 조항들을 가르치며, 지키게 하는등의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었다.
장로들의 유전(遺傳) - 마가는 제자들이 손을 씻지않고 식사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에 대해, 그것이 유대적 전통 속에서 전승되어온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장로' 혤라어로 '프레스뷔테로스'(* )인데, '나이 많은 사람' 또는 '조상' 등의 의미와 함께 당시 유대인들의 지도자인 지방의회 의원(눅 7:3)이나 '산헤드린'이라고 불리우는 '예루살렘' 최고회의 회원을 지칭하는 뚱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또는 권위 있는 율법교사와 종교 지도자를 지칭하기도 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공동번역 성서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조상'으로 번역하여 이해하는 것이 문맥상 적절하다고 본다. 그리고 '유전'(* , 텐 파라도)이란 말은 '. . . 로부터 손으로 건네주다'는 뜻의 '파라디도미'(* )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는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문 율법(토라)뿐 아니라 구전 율법을 함께 전해 주셨는데, 그 구전 율법이 하나님에게서 모세, 그리고 아론, 기타 자손들에게 순서대로 전해졌다고 믿는 유대인들의 신앙을 반영한 말이다. 결론적으로 이'유전'은 유대인들의 조상 때부터 구두로 전승되어온 행위법 내지는 각종 판례법을 가리킨다고 보겠다. 사실 유대인들의 관습은 이러한 구전율법과 긴밀한 관계 속에 놓여 있다. 그런데 이 조상의 전통에 관한 깊은 관심과 구체적인 체계화 작업은 바벧론 포로 시대를 거치면서 산헤드린의 모체였던 대 회당(Great Synagogue)과 더불어 점차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 전통들은 후대에 서기관들에 의
해서 법적인 권위로 높여졌고 '구전 율법'이라는 말처럼 성문화된 율법의 권위와 맞먹을 정도로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강조되었다. 이것은 A. D. 200년 경에 일차 집대성 작업이 이뤄졌으며 그러한 작업은 A. D. 800년까지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실제작업은 B. C. 300 - A. D. 800년 사이의 긴 기간이 소요됨). 따라서 예수 당시에는 이러한 유전들이 대개 구전의 형태로 존속되어오고 있었다. 이 유전의 목적은 인간 생활의 유익에 관심두기보다는 인간을 규제, 억압하는데 더 큰 관심을 두었다. 실로 성문 율법은 원칙론적 입장에 서서 특수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듯하지만 유전은 구체적이고 특수한 문제들에게까지 분명한 지침을 내려주었다. 그리고 위대한 랍비들이 만들어 반포했던 수많은 유전들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지면서 더 큰 권위와 함께 좀더 강력한 구속력을 지니게 되었고 심지어는 성경의 권위를 능가하기도 하였다. 한편 '장로들의 유전'에 관한 좀더 자세한 내용은 본장 주제 강해 '탈무드의 이해'란과 마 15 :2의 주석을 참조하라.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 여기서 '부지런히'라는 말은 휄라어 '퓌그메'(* )의 번역인데 해석하기 매우 어려워 어떤 영역본(RSV)에서는 번역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한 번역으로서 '꼭 쥔주먹'. '팔뚝까지의 손으로', '펼쳤다 접었다 하는 손', '물을 손으로 잔뜩 움켜쥔 상태' 등의 다양한 견해가 있다. 뿐만 아니라 본문의 읽기를 아예 '퓌크나'(* ) 또는 '퓌크노스'(* ) 둥으로 변경하며 '가끔', '더 자주'란 뚱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사실 라틴 벌게잇(Vulgate)역에서 이러한 변형을 따르고 있다(crebro, '빈번히'란 뜻).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글 개역성경의 번역과 같이 '부지런히'로 해석한 데도 있다(Syriac Peshito Version). 어째든 이러한 여러 견해들을 통해 추론해 볼 때 유대인들의 결례로서 행하는 손씻음은 양손을 주먹으로 꽉 뀌었다 폈다 하면서 팔꿈치까지를 물로 씻어내거나 양손을 부지런히 잽싼 동작으로 부벼대어 씻는 장면을 연상할 수 있다. 특히 주먹을 꽉 쥐는 행위는 어떤 굳은 의지와 힘과 활발함올 암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Pulpit Commentary). 실로 그들에게는 식사 때마다 꼬박꼬박 부지런히 씻되 매우 깨끗하게 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있음을 볼 수있다.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먹지 아니하며'라는 말로 보아 그들이 얼마나 그 관습을 철저하게 지켰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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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서 돌아와서는 - 여기서는 그들의 생활 습관 속에 있는 정결에 관한 의식(儀式)을 보여 주고 있는데, 그들에게 있어서 '시장'은 부정한 곳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시장이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이고 혼잡한 곳에서 부정한 여러 사람들과 접촉 가능한 대중적 장소이기 때문에 불결해지기 쉽다는 이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즉 유대인들 시장에서 이방인들이나 심지어는 율법 규정을 준수하지 않은 유대인들과 흑시 접촉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의식적 정결에 힘썼던 것이다.
물을 뿌리지 않으면 - 이 말은 '배티손타이'(* )라는 훼라어의 번역인데, '씻다', '적시다'라는 뜻인 '배티조'(* )의 복수 3인칭 중간태로서 번역하면 '그들 자신을 씻다'가 된다. 때문에 '물을 뿌린다'는 것을 목욕을 하거나 물에 몸을 잠그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즉 '배티조'(* )는 물에 담그고 적신다는 뜻과 씻는다는 뜻을 갖고 있으므로 오히려 목욕하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물론 이것을 세례와 침례의 차이를 판가름하는 기준으로 삼아야 할 필요는 없다. 어쨌든 혹자(Meyer)는 본문의 점층법적 표현을 강조하면서 '유대인은 먹기 전에 항상 손을 씻었다. 그리고 그들은 시장에서 돌아와서 먹기 전에는 항상 몸을 씻었다'고 그 의미를 명확히 표현했다. 물론 이 모든 행위늘 그들이 종교적 부정을 탈피하기위한 의식적 행동이었다. 실로 그들은 전인격적인 거듭남이나 내면적 자기 성찰보다 이러한 겉으로 드러난 의식적 정결에 더 큰 종교적 가치를 두었던 것이다.
잔과 주발(周鉢)과 놋그룻을 씻음이러라 - 마간는 음식먹을 때 사용하는 식기들까지 씻는 철거한 관습을 소개하면서 그들의 정결 관습에 대한 철저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여기서 '잔'(* , 포테리온)은 음료를 마시는 그릇을, '주발'(* , 크세테스)이란 로마인들의 액체를 재는 도구 또는 작은 그릇, 항아리 등을 뜻하며, '놋그릇'(* , 칼키온)은 구리로 제작된 각종 용기들로서 주로 취사 도구를 가리킨다. 그런데 탈무드(Talmud)에 따르면 이러한 도구들은 주로 이방인들에게 구입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정결례가 요구된다고 한다. 한편 수리아사본 등에서는 위의 세 종류 이외에 '침상'(* , 클리논)이라는 말을 첨가하고 있다. 만약 이러한 첨가가 마가의 본 의도를 그르치기 않는다면 '씻는다'는 뜻의 훼라어 '배티스무스'(* )의 활용도는 상당히 광범위하게 된다. 즉 여기 '씻는다'는 말은 물에 완전히 잠그다는 뜻 외에 단순히 잠그지 않고 '씻어낸다', '닦는다'는 등의 의미로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의 정결례는 다양하게 이뤄졌음을 짐작해 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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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 묻되 - 여기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문제 제기가 시작된다. 문제의 내용은 예수의 제자들이 '장로들의 유전', 즉 조상들의 전통에 따른 정결례를 어겼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들이 묻는 것은 이유를 알고 싶어 묻는 것이 아니고 이미 제자들의 행위가 중대한 잘못을 범했다는 전제아래 제자들의 행위에 대혜 정죄하고 그 책임을 예수에게 추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첫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정결 관습을 철저하게 지킨다는 자부심과 아울러 자신들이 그 전통적 관례의 파수꾼임을 자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예수를 집중 공격함으로, 제자들의 부정한 행위가 종교적이건 비종교적이건 모두 스승에게 그 책임이 물어져야 함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사실 그들은 제자들을 책잡기 위해 보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의 스승인 예수를 종교, 정치적으로 매장시키기 위해 보내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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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 . . 잘 예언하였도다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제기한 문제에 대하여 예수의 첫번째 응답은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고 있다(사 29:13). 실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 일행을 책잡기 위해 그들의 전통적 유전을 세웠지만 비수는 하나님의 권위있는 말씀으로 응대하셨다. 따라서 이러한 응대자체가 하나님의 법을 도외시하는 그들 유대 지도사들에 대한 정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예수는 그들을 향해 '외식(外食)하는 자'라고 부르고 있다. 외식한다는 말은 예수가 자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지칭하여 부르는 말로서 마 23장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뜻은 원래 휄라어 '휘포크리테스'(* )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자신의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고 무대에 서는 '연극 배우'라는뜻으로 결국 속과 겉이 다른, 이중 인격자 또는 위선자란 의미이다. 이것은 그들이 주장하고있는 주장과 현실적 행동 사이에 있는 객관적 불일치를 비판하는 말이다. 그리고 본문의 '잘 예언하였도다'에서 '잘'(* , 칼로스)이란'적확하다', '우수하다'는 뜻으로서, 9절에서도 한번 언급되는데, 그곳에서는 일종의 비아냥거림조로 사용되고 있다.
이 백성이. . .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 예수께서 인용하신 사 29:13은 70인역(LXX)의 기계적 인용이 아니라 당신의 의도에 따라 선별한 자의적 인용이다. 따라서 희브리 본문(맛소라 사본)과는 그 의미상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으나 본질적으로는 그 의미하는 바가 동일하다. 즉 그들은 비록 각종유전들과 전통들을 철저히 고수하지만 실은 진실과 경건의 내적 눙력이 결여된 위선자들이었다(딤후 3:5). 실로 그들의 외적인 경건은 거짓이었는데, 그 까닭은 '그들이 종교적 경건의 진정한 대상이신 분에게 그들의 삶 진체를 온전히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다'(Anderson). 실로 그들은 형식적 신앙 생활로 인해 B. C. 7C경 이사야에게서 책망받았던 그들 조상처럼 입술만의 신앙 고백과 위선적인 생활 및 참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채 거듭거듭 수행하던 형식 위주의 예배 의식 등으로 하나님의 뜻에서 점점멀어져 갔던 것이다. 한편 예수의 이 말씀은 이사야가 원래 그의 글을 기록할 때 A. D. 1C에 존재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사야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이사야의 비판이 예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에게도 해당된다는 의미이다(마 15:7 주석 참조).

=====7: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 여기서 예수는 소위 '구전 율법'이라고 하는 '장로들의 유전'을 사람이 만든 계명이라고 규정한다. 이'사람의 게명'은 8절에서도 '하나님의 계명'과 대조를 이루어 강조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렇게 강조하는 '장로들의 유전'은 사람이 작위적(作爲的)으로 만든 것으로서 그 권위에 절대성이 없음을 선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장로들의 유전이 생겨난 이유는 성경에 기록된 율법만으로는 방대하고 복잡한 인생 제반사에 대한 구체적 지침을 마련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 목적과 계명의 핵심에서 이탈된 개개의 구체적인 규범들은 맹목적 순종을 요구하는 허망한 것으로 변질될 소지가 다분하였으며, 특별히 조상들의 권위와 민족적 우월감에 도취되었던 유대인들의 심성으로는 그러한 위험에 필연적으로 빠질 수밖예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예수께서 지적하신 바 사람의 계명은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라는 말에 의해 그 권위가 완전히 부정된다. 즉 예수께서는 그들이 율법처럼 믿고 지켜 왔던 정결 의식이 결국 하나님 앞에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하는 헛된 것이 되었다는 것을 말함으로써(마 15 :9참조) 그것을 지키며 자랑하거나, 그것을 지킴으로써 거록하게 되었다는 그들의 그릇된 자만심을 철저히 해부(解剖)하셨던 깃이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그러한 자만심을 가지고, 정결 의식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을 느끼며 또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던 종교 지도자들의 행동과 그 권위 및 그 가르침의 내욤 등을 모조이 무시하고 거부하신것이다. 결국 이 말씀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대한 경배가 보이는 사람의 규범에 의해 무시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자신의 위선적인 종고 형태를 찬양하는 지도자에 대한 예수의 준엄한 심판이라 할 수 있다.

=====7:8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 앞절에서 언급한 '사람의 계명'과 대조되고 있으며, '버리고'와 다음에 나오는 '지키느니라'가 대비를 이루어 예수의 비판을 명료하게 보여 준다.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의 계명이란 인간들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직접적인 메시지로서, 이 메시지는 인간의 그 어떤 인위적 규범보다 우위에서며 또 모든 인간 활동은 그 메시지에 온전히 귀결(歸結)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순환관계를 무시한 일체의 규범과 판단은 철저히 인간 중심의 것이 될 수밖에 없으며, 거기에는 형식과 위선만이 남을 뿐이다.
한편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계명'은 19:18과 신 6:5 등에서 가장 잘 드러나고 있는데, 그것은 '네 마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뚱을 다하여 주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12:28 - 34). 결국 예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배척한 것으로 천명하면서 오히려 그들이 종교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법을 어긴 자들임을 밝히고 계신 것이다. 당시 그들이 갖고있던 철저한 하나님 신앙과 종교적 율법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이 같은 표현이 체제 도전적인 발언으로 들려지기에 충분할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예수는 단순한 체제 도전적인 저항을 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율법적인 관습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한 봉사가 되어야 함을 천명하심과 아울러 그러한 관습이나 율법들이 도리어 하나님에 대한 배신이나 이웃에 대한 고통으로 나타날 때에는 단호하게 도전하고 맞서 싸운 것이다.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 앞에서 말한 하나님의 게명을 '버리고'와 대립되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계명보다 인간의 계명을 더 중요하게 여김을 비판하고 있다. 즉 그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지 못하고 오직 인간의 말과 인간의 칭찬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7:9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 여기서는 앞절에서 언급된 문장의 어순을 바꾸어 다시한 번 그들이 중요시하는 정결 관습이 사람이만든 것, 곧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지 못하는 것으로서 그렇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구속력을 가질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 관습이 하나님의 계명과 대립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유대인들의 유전은 원래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율법을 에워싸는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유전이 도리어 율법을 왜곡하고, 경화(硬化)시키며, 하나님의 뜻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한편 이 구절은 9 - 13절에서 말하고 있는 유전들과 하나님의 계명이 상충되는 구체적 예증 제시를 위한 문제제기라고 할수 있다. 여기서 예수는 단정적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행위를, 유전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잘 저버리는도다 - 이 구절은 6절에서 언급된 '잘 예언하였도다'와 대응되는 표현으로서 그릇된 종교라서 집착해 있는 유대 지도자들의 잘못을 비웃는 독설적 발언이다. 즉 이말은 그들이 너무 쉽게, 간단히 하나님의 게명을 포기향다는 뜻이다. 사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계명과 사람의 전통이 서로 충돌될 때에는 거침없이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따랐다. 그리고 심지어 하나님의 율법을 피해가는 수단으로서 사람의 전통이 동원되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은 사람 앞에 경건해지려는 위선자들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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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 예수는 앞절에서 언급한내용, 즉사람의 전통을 따르기 위해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언행을 구체적 예증을 통해서 반박하기 위해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믿고 있는 모세의 계명을 예로 들고 있다. 즉 예수는 그들의 주장에 내적 모순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들의 말과 그들의 믿음을 대비시키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구절은 출 20:12과 신 5:16에 나오는 십계명의 제 5계명으로서 예수는 70인역(LXX)과 히브리성경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이는 바로뒤에 이어지는 내용과 동일한 강조점을 두고있으나 후자가 효(孝)에 대한 소극적. 강압적 명령이라면 본문은 적극적이고 당위적인 명령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이 이르셨으되'(마 15:4)라고 본 내용의 초두를 장식하고 있어 본문의 '모세는. . . 하라하고'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차이는 원저자(하나님)와 그 저자의 뜻을 받들어 사람들에게 반포한 기자(모세)라는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 뿐 두 표현은 공히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라는 신적 권위를 내포한 말이라 할수 있다.
아비와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 이 구절은 제 5계명(출 20:12)을보충 설명한 규례로서 출 21:17에 나오는 '효'를 주제로 한 저주문이다. 이는 맛소라 사본과 거의 동일한 내용을 형성하고 있다. 본문은 앞에서 언급한 부모 공경에 대한 계명과 부모에 대한 불공경의 대가를 극명하게 대조시켜 강조하고 있다. 즉 비록 부모를 '훼방'(욕하고 저주하는 것)하는 것조차 하나님께서 극도로 싫어하시며 심지어 사형까지 시키도록 명하셨다는것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부모에 대한 범법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점을 강조하여 간접적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유전을 통한불효롤(11 - 13절) 죄로 평가하고 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부모 공경을 통해 보이지 않는 당신을 섬기는 법을 가르시고자 하셨던 것이다.

=====7:11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 - 직역하면 '나로 인해 당신이 유익을 얻게 될 그무엇'이란 뜻이다. 즉 자식이 부모에게 봉양하고자 할 때 그것이 그 부모에게 상당한 도움을 줄 수 있는어떤 선물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말은 부모를 농락하고 속이는 파렴치한 변명임을 곧 알게된다. 고르반(* , 코르반). 이 말은 히브리어 '코르반'(* )의 음역(音譯)으로서 구약 시대의 제사장 전승을 통해 그 뜻을 알수 있는데, 그 뜻은 '하나님께 드림' 곧 '하나님께 바치는 물건'을 가리키는 매우 신앙적 의미였었다(레 2:1, 4, 12). 마가는 본서의 이방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서 이러한 음역과 더불어 설명구까지 첨가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말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는 '도론'(* ), 즉'선물'이라는 뜻으로 표기한다. 또 본문 내용과 비슷한 시기의 것으로 보이는 유대인의 납골당(納骨堂)의 비문(碑文)에서 같은 형태의 용법이 발견되었다. 즉 '. . . 하나님께 드린 예물. . . '이라는 표현이다(J. A. Fitzmyer, Derrett). 물론 예수 당시의 이 말이 순전히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기위해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장로들의 유전'을 따르는 사람들이 부모에게 해야 할 봉양의무를 하나님께 대신했다는 변명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즉 장로들의 유전은 자식이 부모에게 드려야 하는 의무를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말하기만 하면 더 이상 부모에게 할 의무가 없어진다고 가르쳤다. 때문에 그들은 부모 공경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위한 구실로 장로들의 유전(遺傳)을 이용했다. 또 '고르반'은 일종의 맹세문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그들이 가진 물건올 하나님께 드릴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그 물건에 대한 소유권을 부모를 위시한 모든 타인으로부터 제한시킬 수가 있었다. 이 '고르반' 맹세는 비록 모세의 또다른 계명(부모 공경 둥)을 파기하는 일이 있어도 반드시 시행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 같은 '맹세'는 실제로 성전에 물건을 바쳐야 한다는 '강제 규정'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맹세자는 '고르반'된 물건을 일부만 성전에 헌납하고(아예 헌납치 않는 수도 있음)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해도 무방했던 것이다. 결국 장로들의 유전은 많은 재물을 갖고 있으면서도 부모에게 나누어주지 않으려는 불효자들의 기만적인 행위를 정당화 시켜주는 구실을 한 것이다. 한편 후대 랍비들은 이러한 규정의 불합리성을 지적하여 '미쉬나'(Mishnah)에 고르반을 빌미

=====7:12
제 아비나 어미에게. . . 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 이 구절은 10절에서 언급된 계명의 내용과 연결하여 생각해야 한다. 즉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모두가 꼭 지켜야 할 하나님의 계명으로 이해했을 때, 11절의 논증을 통해 그들이 모세가 준 계명을 어겼음이 명백함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 돌아갈 대가는 10절에서 언급한바처럼 반드시 죽게 될 것 뿐이다.

=====7:13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 여기서 먼저 '폐하며'(* , 아퀴룬테스)란 9절에 언급된 '저버리다'는 뜻보다 그 의미가 더욱 강하며 '파기하다'. '아예 무시하다' 등의 뜻을 지닌다. 실로 예수는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는 행위가 하나님의 말씀을 파기시키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이 말은 그들의 언행에 대한 결정적 모순을 지적하는 말인데, 즉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경배와 충성을 위해 만들어내고 지킨 율법적 관습이 결과적으로는 10 - 12절에서 논증된 바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화하여 파기시킨 것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이 사람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깨닫지 뭇했고 하나님의 뜻이 사람에 대한 사랑에 있음을 망각하여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는 구실로 사람을 희생시키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 다시 분명해지는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사람에 대한 사랑. 봉사와 분리되어 생각될 수 없다는 점이다. 예수가 율법주의자들의 언행을 비판한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 였다. 오늘날에도 교회 전통이나 교리 그리고 권위에 집착하여 교회가 실천해야 할 이웃 사랑, 사람에대한 봉사와 세상에 대한 봉사를 소홀히 하거나관심하지 않는 잘못을 범하는 교회들은 이러한 비판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위선되고 거짓된 종교 형태가 단지 부모 공경에 관한 제 5계명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 전반에 걸쳐 드러난다고 밝히신다. 특히 '행하느니라'(* , 포이에이테)는 말은 능동태 현재 시상으로서 그들의 행동이 습성화되고 중복되고 있음을, 즉 그들의 그릇된 신앙 행위가 거듭 노출되고 있음을 지적해 주고 있다.

=====7:14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 여기서 이야기의 대상이 바뀌고 있다.
즉 1 - 13절까지는 제자들의 식사 현장에 나타난 예루살렘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한 예수의 논박(論駁)을 다루었으나 여기서부터는 더이상 바리새인들을 향한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는 다시 청중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한편 이 이야기의 주제는 그 내용으로 볼 때 정결에 관한 주제가 계속되고 있으므로(5절에 제시된 바리새인들의 질문이 15절에 직접 답변되어짐) 연속적인 이야기로 보아도 좋다.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 이 말은 예언자적 발언으로서 각성을 촉구하는호소라고 할 수 있다. 즉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에서 논증된 바처럼 사람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어리석음으로부터 깨어나 올바른 신앙 실천을 촉구하는 호소문이다. 더욱이 이것은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예고문일 수도있다. 즉 이제까지는 잘못된 관습에 대한 비판이었지만 지금부터는 그 비판에 대한 답을 제시하려는 암시를 주고 있다. 그래서 예수는 청중들을 불러모으고 자신의 이야기 곧 내적 성결이라는 대주제를 설파하기 위해 경청하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7:15, 16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 여기서 언급되는 두 절은 원래 한 절로 구성된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즉 NIV에서는 16절이없고 15절의 하반부에 16절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알렉산드리아 사본에서 16절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본에는(모스코, 베자 등) 16절에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아마도 필사자들이 4:9이나 4:23의 모형에 따라 인용하여 첨가시킨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Metzger, Textual Commentary, p. 95). 공동 번역에서는 전자의것을 선택하여 16절을 생략하고 16절의 내용은 15절에 통합시키고 주(主)를 달아 후자에서 언급한 첨가문을 소개한다.
한편 여기서는 1 - 23절의 핵심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참으로 부정(不淨)한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표현기법은 물질적 부정과 도덕적 부정을 날카롭게대조시키는 대구법(對句法)형태로서 마가 특유의 어휘력이 구사되고 있다(V. Taylor, The Gospel According to St. Mark, p. 343). 즉 사람밖에 있는 어떤 것(물질)도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는 것과 사람안에서 나오는 것(심성을 대변하는 말, 생각, 의지, 영적 반응 등)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것이 날카롭게 대비되면서 딴절에서 다시 언급되는 것처럼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참으로 부정한 것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와 같은 표현은 종교 지도자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철저하게 지키던 정결 예식을 모조리 부인하는 결과적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부정한 음식, 부정한 물건, 또는 부정한 짐숭에 의해서 사람이 부정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기 때문에 그들이 지키는 정결 예식은 소용없게되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는 레위기 법전(레 11 - 15장)이 명하는 바 정 . 부정의 규례에 대한 새로운 해석, 곧 그 영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계신 것이다. 진정 예수가 말하는 참으로 부정한것은, 물로도 씻을 수 없는 부정의 근본 원인이되는 사람의 마음이다. 따라서 참으로 부정한것은 자기 안에 있으며, 부정한 것이 밖에 있는 양 정결 예법에만 관심하면서 자기가 갖고 있는 부정한 것을 은폐시키려하는 모든 위선적인 정결 예법은 부정한 것이다. 실로 예수는 여기서 철저한 자기 변혁, 자기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정결이라는 것은 가시적인 의식(儀式)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 곧 그사람의 인격과 양심과 영혼의 철저한 개혁을 통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마 15:11 주석 참조).

=====7:17
무리를 떠나. . .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 여기서도 역시 이야기의 장소적 배경이 바뀌고 있다. 이야기를 듣던 청중들과 헤어지고 제자들과 예수가 한 자리에 있을 때(가버나움의 베드로 집으로 추정) 제자들이 15, 16절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질문을 하고 있다. 이것은 마가가 즐겨 쓰는 묘사법으로서 마치 4:10의 장면을 보는 듯하다. 여기서는 '제자들'이질문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마태의 평행 본문에서는 베드로가 질문한 것으로 나온다(마 15:15). 마태는 특정한 제자 곧 베드로를 자주 내세워 부각시키는 반면 마가는 전체 제자를 등장시키면서 제자들의 무지를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도 제자들이 예수의 설명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어쩌면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하는데 중요한 증인 역할을 했던 베드로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간과해 버렸는지모른다. 한편 여기서 제자들이 질문한 것은'비유'에 대한 것이었는데, 예수가 한 이야기는'비유''라기 보다는 오히려 격언적인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7:18
너희도 이떻게 깨달음이 없느냐 - 이와 같은 표현은 마가의 특징적 의도와 결부되어있다. 즉 제자들의 무지를 강조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8:17에서도 같은 형태의 말로 예수가 직접 제자들에게 '깨닫지 못함'을 꾸짖고있다. 그 외에 간접적으로 제자들의 무지를 꾸짖는 경우로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4:13), 물위를 걸으신 기적(6:52) , 부활 예고에 대한의문(9:10) 등이 있다. 여기서 예수의 말 뜻을 제자들만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일반 청중들도 이해하지 못하였음을 '너희도'라는 표현을 통해 암시하고 있다. 즉 청중도 제자들도 모두 예수의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이 같은 몰이해에 대한 예수의 실망감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못함을 모르느냐'고 반문하면서 간접적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것은 특히 제자들에 대한 실망의 표시이다. 이와 같이 청중과 제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이 비유와 같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예수의 가르침이 당시의 모든 배경을 생각할때 너무나 과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즉 너무 뜻밖의 신인이기 때문에 고정 관념을 벗어나 이해하기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예수께서는 인간을 더럽게 하는 본질적(本質的)인 원인이 '밖에서 들어가는 것' 곧 '식물'이 아님을 역설적으로 강조하셨다.

=====7:19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 예수는 먹어서 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사람을 더럽히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그것은 먹은 음식이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이아니라 '위'와 '창자'로 소화되어 베설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사람이 먹어서 들어간 것은 배를 통해 다시 배설됨으로써 마음과는 아무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마음'은 인간활동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지. 정. 의'의 좌소(坐所)이며 비물질적인 내면의 인간을 가리킨다. 이에 비해 '배'는 순수히 물질적 개념을 나타내며, 또 인간 육체의 신진 대사를 이루게하는 전과정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현상적으로 볼 때에도 '마음'은 물질적인 것과는 무관하며 도덕적, 영적 측면에서만 더럽혀질 수 있는 것임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실로 예수께서는 인간의 소화 기능을 적나라하게 설명하심으로써 음식과 인간 부정 문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천명하셨다. 이로써 예수는 레 11장, 신14장 등에 언급된 식물의 정. 부정 관계법을 공식적으로 철회하시고 음식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하고 계신다.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하셨느니라 - 문자적으로는 '모든 식물을 깨끗이하면서'이다. 이 구절은 예수가 직접 한 말이 아니라 마가가 첨가시킨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In saying this, Jesus declared all foods "clean", NIV). 즉 예수의 말을 종합하여 결론적인 해석을 언급한 것이다. 초대 교회에서는 음식의 정결에 관한 논쟁이 많았다. 그것은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면서 유대인의 관습과 이방인들의 식사 관습과의 차이에 상호충돌이 생겼기 때문이다(롬 14장; 고전 8, 10장; 갈 2:11; 골 2 :16). 특히 이방 선교를 한 바울은 이 같은 문제에 부딪혀 그의 서신을 통해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같이 식사한 것 때문에 위신적 행동을 취하다가 바울에게 책망받은 적이 있다(갈 2:11 - 14). 이러한 논쟁에 결정적 쐐기를 박는 사건이 베드로의 욥바 체험이다.
즉 베드로는 욥바에서 환상중에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 된다(행 10:1 - 16). 그리고 곧 이방인 '고넬료'의 집을 방문함으로써 음식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더불어 이방인의삶과 구원에 대하여 긍정적 판단을 하게 된다. 아마도 마가 역시 이와 같은 초대 교회의 입장에 동의하면서 정결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이 결론적 핵심어로 '식물은 깨끗하다'는 선언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도 롬 14:13 - 17에서 무엇이든 더러운 것은 없고 더럽게 생각하는 마음이 문제이며, 음식 문제로 사람을 괴롭히지말라고 말하고 있으며, 롬 14:6에서 먹는 것도 주를 위해 먹으며 먹지 않는 것도 주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초대 교회의 입장은 정결에 관한 유대 전통을 거부한 것이 분명하다. 이는 허식에 짖눌려 있던 유대인과 더불어 이제 막 복음의 문을 들어선 이방인들에게 주어진 자유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Martin).

=====7:20 - 23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 청중과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한 수수께끼같은 말, 즉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어떻게 사람을 더럽히고, 또 더럽히는 것이 과연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사람' 또는 '사람 속'이라는 말은 곧'마음'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마음이란 사람의 감정이나 사상 또는 생각 등의 근저(近著)이며 그러한 것들을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인격의 중심부로 이해된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것의 대표격으로 악한 생각생각(evil thoughts)을지칭하신다. 여기 '악한 생각'은 인간의 모든 부정과 악한 사상과 음모가 곁들여진 의지적인 생각으로서 행동화된 죄악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즉 바로 이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악한 생각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를 12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이와 비슷한 언급이 롬 1:29 - 31;갈 5:19 - 21에서도 나온다. 평행 본문인 마 15:19에서는 6가지만 언급되고 있는데, 십게명의 제6. 7. 8. 9계명의 순으로 나열하고 있다. 반면 마가는 그러한 전통 계명의 순서와는 무관하게 나열하고 있다. 이를 재구성하여 살펴보면 음란, 간음, 음탕이다. 이 세 종류는 서로 비슷한내용을 표현하고 있는데, 십계명 중 제 7계명에 상당하는 죄악이다. 한편 그 각각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음란'(* , 포르네이아이)은 일반적으로 부정한 성관게를 뜻하는 말로서 윤리적 측면이 강조되고, '간음'(* , 모이케이아이)은 기혼자와 관계되는 성범죄이며, '음탕'(* , 아셀게이아)은 모든 사람들이 갖는 성적 본능을 자제없이 노출시키는 공개적이고도 부끄럼을 모르는 성범죄를 말한다. 살인, 악독, 흘기는 눈, 훼방, 교만, 광패(狂悖). 이러한 것들은 사람을 향한 파괴적 언어와 행동을 가리키는 말로서 제 6계명이 상관되는 '살인'이라는 말로 압축시킬 수있다. 여기서 '악독'(* , 포네리아이)이란 말은 노동, 아픔, 고통이란 뜻의 '포노스'(* )에서 나온 것이다. 즉 고되고 아프게 하는 요인이 될 행위를 말한다. '흘기는 눈'(* , 오프달모스 포네로스)은 악의적인 비읏음과 빈정거림으로 응시하거나 부러워하면서 시기한다는 셈어적 표현이다. '훼방'(* , 블라스페미아)은 신성모독적인 욕설과 험담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광패'(* , 아프로쉬네)는 도덕적 판단력이 결여된 사람의 어리석음을 뜻한다(foolishness;AV, RSV). 그리고 도덕질(* , 클로파이)은 제 8계명, 속임(* , 돌로스, '을가미', '덫'이란 뜻)은 제 9계명, 탐욕(* , 플레오%시아이), 곧 좀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은 제 10계명과 관련지어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이와 같이 사람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 십게명에 사람과 판련된 6가지의 계명 중 부모와의 관계만 빼고 5계명 모두 포함되어 있어 마가 역시 십계명을 염두에 두고 서술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모든 조항들이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부정한 것의 '모두'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사람을 더럽게 하는 모든 것이 인간이 품은 마음에 있음을, 그리고 모든 부정의 원천은 사람의 마음임을 강조하기 위해 대표적으로 예시된 것일 뿐이다. 본절은 이와 같은 뜻을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다. 요컨대 참으로 부정한 것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시작되기 때

=====7:24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 여기서 먼저 '거기를 떠나'란 문자적으로 '이곳에서 부터'(from here)가 된다. 그렇다면 '이곳'은 어디인가? 아마도 이곳은 '집'(17절) 또는 '게네사렛'(6:53) 아니면 그 밖의 다른 장소를 가리킬 것이다. 이중에서 '게네사렛'곧 갈릴리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 같다. 즉 서서히 고조되어가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반대에 직면하여 예수는 일단 갈릴리 활동을 증단하시고 그곳을 떠나 북쪽 두로 지경으로 그 거처를 옳기셨다. 이 같은 활동 무대의 이동은 벱새다율리아스 이후 두번째 경우이다. 한편 '두로'라는 도시는 갈릴리 북서쪽 지중해 해안 도시로서 '뵈니게'(Phoenicia)라는 지금의 레바논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그 도시는 원양 항해술과 예술이 발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수가 왜 그곳으로 갔는지, 그 지역에 얼마만큼 진입해 들어갔는지에 관해 본서는 침묵하고 있다. 혼히 마가는 이런 세부적인 사실들을 독자들의 상상력에 맡기는 경향이 있다(W. W. Wessel). 어쨌든 예수는 유대인들의 땅을 떠나 이방인들의 지경에 조용히 스며들어 가셨던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 여기서 예수가 왜 두로에 왔는지 그 이유를 추측할 수있는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즉 이곳에 올 때에 자기의 신분을 숨기고 왔음을 알 수 있는데, 그례다면 선교나 치병 활동 또는 가르침을 위한 공적인 목적에서가 아님이 분명하다. 따라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휴식과 새로운 활동을 위한 준비를 위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왜냐하면 그 이방 지역에서도 이미 예수 자신이 슴어지낼 수 없을 만큼 당신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눅6:17에 의하면 산상수훈 당시에 이미 두로와시돈 사람들이 예수를 만난 사실을 지적해 주고있다.
이와 같이 예수가 조용하게 피신하여 쉬려했으나 그 명성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치병과 선교 활동을 하게 된 사례가 이미 앞에서 여러 번 언급된 바 있다(6:30 - 34;53 - 56). 한편 본문에 제시된 '한 집'이란 그곳 원주민의 집인지, 유대인의 집인지 잘 알 수 없지만 짐작컨대 예수께 대해 상당한 호의를 가지고 있었던 집임이 분명하다(Meyer). 이러한 모호한 사실들과 더불어 또 한가지 여기서 분명치 않은것은 예수가 제자들과 동행한 것인지 아니면 혼자서 두로까지 왔는지이다. 이에 대한 답이될 만한 근거를 이 이야기 속에서 전혀 발견할수 없다. 그러나 평행 본문인 마 15:23에서 제자들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 제자들도 예수와 동행하였다고 단정할 수있다. 다만 마가는 이 여행에서 제자들의 역할이주목할 만한 것이 못되었다고 판단되어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7:25, 26
더러운 귀신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 - 예수를 찾아왔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이방인 여인에 대한 배경 설명이다. 확실히 그녀는 예수께 대한 소문, 그중에서도 그분의 탁월한 신유의 은사에 관한 소문을 듣고 찻아왔을 것이다. 그녀는 예수의 오신소문을 듣자 마자 '곧'(* , 유뒤스)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겸손과 절대 신뢰의 자세를 취했다. 한편 그 여인의 딸은 '더러운 귀신'에 들렸는데(1 :23;5:2 주석 참조). 평행 본문인 마 15:22에서는 '흉악한 귀신'이 들렸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공동번역에서는 '악령'과 '마귀'로 표현하고 있다. 이 병은 육체적 압밖과 두려움을 동반한 심한 정신적(精神的) 질환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러한 딸을 두고 있던 그 여인의 한숨과 눈물, 그리고 고통은 말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을 것이다. 마가는 그 여인은 헬라인(a Greek)이면서 수로보니게 족속임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당시의 역사적 상황으로 보아 그녀의 국적이 분명 헬라 곧 그리이스가 아닌 점을 생각할 때 여기서'헬라인'(Greek)은 유대인콰 구별되는 의미에서의 '이방인'(Gentile) 에 해당하는 말이거나, '헬라어를 상용하는'(Greek - Speaking) 사람이라는 의미일 것이다(행 18:4;롬 3:9;10:12). 한편 그녀는 '수로보니게' 출신이었는데, 여기서 '수로보니게'는 '수로' 지방의 '보니게'라는 뜻이다. 즉 지금의 '시리아'에 야한 '뵈니게'(Phoemicia)지방을 말한다(24절 주석 참조). 당시 '뵈니게'는 행정상 시리아에 복속되어 있었다.
어쨌든 마가는 아프리카에 있는 '리비오 보니게'(Liobyo - Phoemicia)와 혼돈을 피하기 위해 '수로'라는 지방 이름을 붙여 '수로 보니게인'(SyroPhoemicia)이라이름하였을 것이다. 실로 여기 언급된 여인은 분명 헬라화된 이방사람 이었다. 당시 이들 이방인들은 민족적 우월성에 도취되어 있던 유대인들에게 심한 적대감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Josephus). 간구하거늘(* , 에로타). 미완료 시제로서 그 어미가 자기 딸의 치유를 소망하며 예수께 거듭거듭 호소하고 있는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하고있다. 실로 그녀는 오직 딸의 구원을 위해 민족적 반감이나 개인적 자존심을 모두 팽개치고 예수께 매어달리고 있는 것이다.

=====7:27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 . 개들에게 - 예수는 은유적인 표현을 빌어 유대민족과 이방인을 구별하고 있다. 여기서 '자녀'(* , 테크논)란 하나님의 선민(選民) 곧 유대인을 가리키며. '배불리 먹게 하다'는 말은 본 상황에서 '유대인 환자를 먼저 치료해야 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고, 좀더 포괄적으로는 복음 또는 하나님이 구원의 시혜에 관한한 유대인에케 우선권이 있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이것은 결코 배타적인 선민 의식에서 비롯된것은 아니다. 그들은 오직 전 인류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달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우선 선택된 것일 뿐이었다(창 12:2, 3). 이러한 특수한 유대인의 선민적 위치에 대해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선교 여행의 지침을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언급하신적이 있고(마 10:5), 사도 바울 역시 이러한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롬 2:9 ff). 한편 본문에 언급된 '개'는 주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경멸할 때(시 59:6), 또는 자신을 비하시킬 때와 악한 존개를 상징할 때 사용하던 말이다. 그런데 본문의 '개'를 뜻하는 헬라어'퀴나리온'(* ) 야생의 들개가 아닌 가정에서 기른 애완용 또늘 귀여운 강아지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 그 의미하는 바가 조금은 부드러운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다(마 15:26) 그러나 '개'라는 사실 그 자체는 본질상 비천하고 속된 경향을 띨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이 같은 '자녀'와 '개'의 대비(對比)를 통해 신적 특권에 있어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사이의 극명한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영구한 숙명론적 차이로 볼 수는 없다. 그에 대한 증거로서 마틴(Martin)은 본문의'먼저'(* , 프로톤)라는 말에 주의를환기시고 있다. 즉 그는 13:10 주석에서처럼 이 말에 종말론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다음과같은 독특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프로톤)'이 삽입된 것은 이스라엘의 배타적 특권이 한 때뿐임을 가리킨다. 예루살렘 교회가 생긴 직후의 기간까지는 자녀들(이스라옐)이 '(먼저)' 배불리 먹을 수 있었으나. 이 특권이 영원히 유대인에게만 속하는 배타적인 특권일 수만은 없었다. '후에는'(* , 휘스테론) 이방인 개들 도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이여인에 관련하여 사용된 '후에는' (이 말은 성경 본문에는 없는 것이며 임의로 붙인 것임)이라는 시간은 이미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이미 그녀를 불쌍히 여겨 그녀의 간구에 응답하고 게시기 때문이다".

=====7:28
주여 옳소이다마는 - 본서에서 예수가'주'로 불리운 곳은 이곳 밖에 없다. 여기 언급된 '주여'란 단순히 상대방에 대한 존칭이지만 그 이면에는 예수의 절대적인 주권과 능력을 인정하는 참신앙이 마음에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옳소이다마는'이라는 말은 상대의 말을 일단은 인정하나 그 말에 대한 또다른 자기 이견(異見)을 피력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일종의 반의 접속사라고 할 수 있다. 실로 그녀는 예수께서 언급하신 바 유대인의 우선권과 특수한권리를 인정하는 동시에 비천한 자신의 존재('개')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신분상의 차이 때문에 자신이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제외되는 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이 같은 불굴의 답변은 그녀에게 내재된 강한믿음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 수로보니게 여인은 재치있게 예수의 말을 받았다. 즉 그녀는 마치 상 아래서 꼬리를 혼들고 주인의 호의를 기다리는 귀여운 강아지를 연상시키면서 적어도 자신과 자신의 딸도 그러한 입장에서 당신의 호의를 기다리고 있다고 간청한 것이다. 실로 그녀가 간청한 것은 유대인에게 특별히 허락된은혜와 축복의 '부스러기'에 블과했다. 이 말은 앞절에서 언급한뒤 유대인들의 배타적 우월감과 편견에 대해 극한 대조를 보여 주고 있다. '개'라는 말로 자신을 지칭할 때 받는 인격적 모멸감과 훼손된 자존심을 개의치 않고 주의 은총을 간청하는 모습은 극한 겸손(謙遜)의 표시이다. 이 같은 겸손과 유대인의 오만한 우월의식이 대비되어 이방 여인의 믿음이 높여진다. 마가는 이 이야기 속에서도 역시 유대인들의잘못된 전통을 무효화하고 이방인의 모습 속에서 겸손하게 복음을 수용하는 모델을 제공하며 예수의 언행에 대해 사사 건건 시비를 거는 유대인들을 간접적으로 공격하고자 한다.

=====7:29
이 말을 하였으니 - 예수께서는 그 여인의 대답에 매우 만족하셨다. 즉 예수는 그 여인의 입을 통해 전해진 말로써 그녀의 내면에 깃든 독특한 믿음을 간파하셨던 것이다. 마태는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평행본문에 '네 믿음이 크도다'(마 15:28)라고 기록하고 있다.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 이제 이방 여인이 안고 시름해했던 최대의 문제가 순식간에 해결된다. 예수는 순수하고 끈질긴 그녀의 믿음에 충분히 만족하시고 이제'돌아가라'(you may go, NIV)고 말한다. 이것은 치병 기적을 행한 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어투로서 완전한 회복을 전제한 말이다. 즉 육체적, 정신적 소명 뿐 니라 가정 복귀 또는 사회복귀를 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는 선언을 통해 그녀의 믿음에 확실히 응답하셨다. 특히 여기 '나갔느니라'는 말은 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어 그선언과 동시에 이미 귀신이 그 딸에게서 떨어져 나갔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처럼 예수께서 원거리에 있는 병자를 고치신 경우는 본서에서 이곳이 유일하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예수가 어떤 특별한 명령이나 외침 없이 당신의 거룩한 의지로 치병 기적을 이뤄냈다는 것은 그분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신적 권능을 보여 준것이라 하겠다.

=====7:30
집에 돌아가 본즉. . . 귀신이 나갔더라 - 예수께서는 그녀의 집에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선사하셨다. 그녀는 자기 집으로 돌아와 예수께서 허락하신 선물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마가는 아무런 설명 없이 그녀의 딸이 침상에 누워 있었다고 증언하는데, 이는 아마도 귀신이 그 딸에게서 나오면서 최후의 발악을 함으로써 그 딸을 기진 맥진하게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9:26, W. W. Wessel). 이와 더불어 마가는'귀신이 나갔더라'(* , 다이모니온 여세레뤼도스)는 말을 완료 능동태 분사로 기록하여 그 딸에게서 귀신의 존재가 완전히 떨어져나가 매우 깨끗한 정신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7:31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 물론 이'갈릴리 호수'는 이방 지역에 속한 땅을 지칭한다. 사실 본문에 제시된 예수의 여행로를 지리적으로 상세히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아마 예수는 두로 지경에서 북쪽으로 약40km 올라기시돈 지역의 이방인 거주지를 통과하며 레온테스 강(the Leontes)을 건넌 후 다시 남동쪽으로 내려가 헤롯 빌립의 영토를 통과하여 갈릴리호수의 동쪽에 이르러 데가볼리(Decapolis) 지역으로 들어가셨을 것이다(가이사랴, 알럭산드리아, 서방 사본 등. ) 이 여행을 하는 동안 예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에 관해서 마가는 전혀 기록하고 있지 않다. 어쨌든 예수는 지금 이방인 구역에 거하고 계신다. 여기 언급된 데가볼리(10개의 헬라 도시들의 연합체 및 그 영토)에는 대부분 이방인들이 거주했으나 상당수의 유대인들도 함께 살고 있었다.

=====7:32
귀먹고 어눌한 자 - 사람들이 예수앞에 데리고 온 환자는 귀먹고 말을 하기 곤란한사람인데 귀머거리는 자연히 말하기 곤란해지거나 아예 무의미한 소리만 지을 줄 아는 벙어리가 되는 것이 상례이다. 그런데 본문에 사용된 '어눌하다'(* , 모기랄로스)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이곳 한 곳에만 나오며 70인역(LXX)에서도 단 한 곳에만 제시되있다. 특히 70인역의 상황은 본 기사와 깊은 상관관계를 맺는다. 즉70인역의 사 35:6은 메시아시대를 제시한 것으로 '그 때에 저는 사나 사슴같이 살 것이며 벙어리('모기랄로스')의 혀는 노래하리니'라고 시적으로 묘사하고 있듯이, 마가는 이 같은 사실을 분명 염두에 두고 본 사건을 기록했을 것이다.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 이미 5:20주석에서 언급된 바처럼 이 지방에 예수의 치병 기적이 널리 알려져있다. 그리고 안수하는 것 역시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는 치병 행위였다(5:23;6:5).

=====7:33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 환자를 따로 데리고 무리를 피해간 이유로는 다음 두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 36절에서 언급한 바처럼 군중들의 흥분된 분위기를 잠재우기 위해 병고치는 기적을 비밀로 하려 했기때문이다. (2) 예수가 한자와 긴밀한 인격적 관계를 갖기 원하셨기 때문이다. 즉 그 환자는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온 피동적 인물이었고 자신의 치유 의지가 거의 없던 상태였을 것이다. 이에 예수는 그 무감각하고 피동적인 인격에게 당신의 존재 본질을 분명히 드러내시고 그로하여금 믿음의 반응을 보이게 하시려 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5:40에서 회당장 야이로의딸을 살릴 때도 이러한 은밀함을 요구하신 바있다.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 이와 같이 환자의 취부에 직접 접촉하면서 침사용하는 치료법은 당시 일반 백성들 사이의 민간요법으로 많이 활용되었던 것 같으며 특히 침이 치유의 효과와 화를 막아주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이와 같은 형태로 치병 활동을 했다는 고대 기록들이 남아있는데 로마의 황제 베스파시안(A. D. 69 - 79)이 소경에게 침을 눈에 발라 치료호다는 기록도 전해지고(Tacitus, Hist, iv. 81) 그외 플리니우스(Plinius), 슈톤(Sueton)등의 기록에도 나온다. 따라서 이러한 형태의 치유 행위는 당시 혤라와 유대인 의사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한 방법으로볼 수 있다(Taylor).
그런데 왜 예수께서는 환자에게 전혀 손을 대지 않고도 능히 치유하실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게셨음에도(2:3 - 12;3:5)이러한 행동, 그것도 미신적 행위로 오해받을 수 있는 치유법을 선택하셨을까? 이는참으로 신비한 장면으로서 다만 추측하건대, (1) 예수는 귀먹고 어눌한 자에게 직접 접촉하심으로써 당신의 뜨거운 사랑을 표시하셨고, (2) 그를위해 당신께서 지금 힘쓰고 게신다는 사실행동으로 보뗘 주셨으며, (3) 귀먹고 어눌한 자가 능동적으로 믿음을 지닐 수 있게 도와 주시기 위해 이 같은 행동 언어를 취했을 것이라 본다. 여기서 양 귀에 손가락을 넣은 것은 그의 귀가 열릴 것을 암시하며. 혀에 손을 대신 것은 그의 혀가 정상으로 회복될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7: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 이 같은 행동은 기도하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는데, 6:41에서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면서 하늘을 우러러 축사한 모습이 언급되고 있다. 여기서 '탄식'이라는 말은 거의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의미한다. 이와같이 하늘을 바라보며 신음 소리를 나타내는 행위는 고대의 기적 설화에서 초인적인 힘을 끌어들이는 형식적 표현으로 많이 나타나는데, 본너(Bonner)는 능력있는 발언이나 기적능력을 나타내기 전에 예언자나 기적행위자가 하는 준비 동작으로 알려져 있다고 말한다. 물론 마가가 이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예수의 행위를 이해했을 리는 없을 깃이다. 오히려 그는 이 인간을 깊이 사랑하시고 그 고통마저 동참하기를 원하시는 예수의 애정의 탄식으로 보았을 것이다. 물론 예수가 하늘을 보며(요 11:41;17:1) 탄식한 것은 단순히 당신의 감정을 표출한 것이 아니라 단식으로 간구한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 탄식은 환자의 고통뿐만 아니라 인류의 아픔을 탄식하는 당신의 지극한 애정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혹자(Van der Loos)에 따르면 '예수의 탄식은 기도의 탄식이었으며 성부와 성자 예수의 감추어진 교제에 따르는 탄식이었다. 예수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한 것이 늘상 예수의 기도 방법이었다면 초대교회도 역시 이런 기도의 자세로 병을 치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단지(예수의 이름으로) 치료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라고 이 장면에 관해 언급한 바있다.
에바다(* , 여파다) - 이 말은 아람어의 음역으로서 마가는 그 뜻을 열리라(* , 디아노이크데티)로 밝히고 있다. 즉 마가는 자신의 이방 독자들에 대한 친절한 노력 으로서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아람어를 언급한 후 그뒤에 헬라어로 설명구를 덧붙이고 있다(5:41). 그런데 이 '열리라'는 말이 단지 닫혀진 귀에만 관련된 말이 아니라 혀에도 그영향이 미치는 명령어로 보아야 한다. 어떻든예수의 이 같은 명렁은 그 환자의 심령 뿐 아니라 그 닫혀진 귀를 뚫고 들려졌다. 이는 메시아의 시대를 예언한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다'는 사 35:5 말씀의 완전한 성취로서 지상에 돌입한 메시아 왕국의 현존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7:35
귀가 열리고. . . 곧 풀려 - '열리라''는 명령과 함께 즉시 귀가 열리고 말문이 열리게 된다. 여기서 '말이 분명하더라'(* , 엘라레이 오르도스)는 그가 적어도 완전한 벙어리가 아니었으며(그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단지 언어에 장애(障碍)가 있었을 뿐임을 시사한다. 그리고 여기 사용된 동사가 미완료시제로서 그의 말의 호전된 상태가 점점 구체적으로 또렷해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7:36
경계하사 아무에게라도 이르지 말라 - 이렇게 치병 기적에 대하여 비밀로 침묵하라는 명령은 마가가 자주 묘사하는 내용이다(1:43, 44;3:12;5:43). 침묵을 요구한 대상은 환자자신에게만 아니라 그 환자를 데리고 온 사람과 그 자리에 함께 한 모든 사람 들에게 명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명성이 치병 기적과 함께 널리 퍼지게 됨으로써 문제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5:43 주석 참조). 특히 여기서 '경계하사'(* , 디에스테이라토)란 당신의 금지의사가 매우 적극적이었음을 반영한다. 사실 예수는 그들이 당신의 명령을 어길 것이라는것을 잘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적어도 그들이 흥분된 상태로 당신에 관한 소문을 퍼뜨리는 것보다 오히려 조용히 그들 스스로가 예수의 명령에 순복(順服) 하고 또 그들 각자가 당신을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만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경계하실수록 저희가 더욱 널리 전파하니 - 이 구절 역시 마가의 공통된 언급으로서 침묵 요청 다음에 목격자들은 침묵으로 비밀을 지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널리 소문을 내어 전파시켰다고 소개하고 있다(1:45). 이 같은 언급은 침묵 명령과, 그 명령을 어기고 전파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감격적 기적의 체험을 잘 대비시켜 그들의 후분된 환호가 지닌 부정적인 모습을 은연중에 제시해주고 있다. 사실 그들은 막상 예수께서 로마세력에 의해 체포, 처형 당하실 때 극한 조롱으로 그 환호를 대신했던 것이다. (마 27:22, 23). 이는 인간적 판단과 기대가 하나님의 생각과 배치(背馳)되고 만다는 사실을 보여 준 단적인 예라 하겠다.

=====7:37
심히 놀라. . . 그가 다 잘 하였도다 - 예수의 치병 기적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놀라 경탄하는 것이다. 여기서 '심히'(* , 휘페르페리쏘스)는 헬라어 문헌들에서 단 한번 나오는 단어로서 '심히 이상의', 곧 '극도로', '측량할수 없이'란 뜻이다. 이것은 적어도 그 이방지역의 주민들이 예수의 존재와 능력을 충격적일 만큼 크게 느꼈고 또 그 모든 것을 긍정적 으로 평가했음을 보여 준다고 본다. 이와 함께 마가는 사람들이 예수의 행위를 '그가 다 잘했다'고 하는 말로 칭찬하며, 또 그분을 신뢰하게 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평행 본문인 마 15:31에서는 그 감격의 표현을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로 하면서 그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간접 묘사하고 있다. 한편 '그가 다 잘하였도다'란 말은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는 말씀을 기억나게 한다. 왜냐하면 깊은 의미에서 예수의 이 같은 기적은 메시야 왕국의 현존을 알리는 메시지일(사 35:5, 6)뿐 아니라 하나님의 '새 창조'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가에게 있어서 이 사건은 예수의 메시야적 활동의 분명한 표시임과 동시에 이방인 거주지에서도 주의 복음과 주의 나라가 폭발적으로 확장(擴張)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사건은 예수의 메시야적 활 灼堀표시임과 동시에 이방인 거주지에서도 주의 복음과 주의 나라가 폭발적으로 확장(擴張)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앞장에서는 예수의 갈릴리 전도 사역이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는 가운데 있었던 여러 가지 사건들이 언급되었다. 이어서 본장은 예수께서 갈릴리를 떠나기 직전부터 시작하여 수개월간에 걸쳐 두로와 시돈을 거쳐 다시 남동쪽으로 내려가 갈릴리 호수의 동쪽 데가볼리 지역에 이르기까지의 기간 동안 발생했던 몇 가지 중요한 사건들을 소개한다. 각 단락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상고하기에 앞서, 다음 세 가지 사항에 초점을 맞추어 본 내용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1) 핍박과 복음 사역의 공존. 종에 대한 핍박과 종의 일관된 복음 사역은 본서 전체에 걸쳐 교차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본장에서도 현저히 그러하다. 전장은 예수께서 게네사렛 땅에서 많은 병자들을 치유해 주신 기사로 끝나거니와, 본장은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올무에 빠뜨리기 위해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내용으로 시작된다(1-5절). 예수의 소문이 유대 전역에로 퍼져나감에 따라, 이에 위협을 느낀 유대교 지도자들의 핍박 또한 더욱 계획적이며 노골적인 양상을 띠어갔다. 하지만 이어지는 이적적 치유 기사(24절 ff. )는 대적들의 간계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거룩하신 사역을 결코 중단되지 않음을 보여 준다. 예수는 당신의 은혜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자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으며,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구속 사명을 완수하기까지는 당신의 일을 멈추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
(2) 이방인 구원의 비전. 본장 내용의 초점은 이방인인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이 치유받은 사건(24-30절)에 맞추어져 있다 해도 대과(大過)는 없을것이다. 그리고 1-23절의 유전(遺傳) 논쟁은 이하 내용의 서론격이라 할 만하다. 다시 말해서 본문에서 예수는 유대인들의 인본주의적이며 형식주의적인 폐단을 지적하면서 나아가 독선적인 민족적 특권 의식을 책망하고 복음의 보편성을 넌지시 가르치고 계신 것이다. 또한 31-37절 내용은 타 복음서에서는 누락되었으나 본장에서는 앞내용과의 연관성을 강조할 목적으로 수록된 듯하다. 이방인을 포함한 온 인류에 대한 복음의 개방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와 계획 가운데 있었던 것이다(눅 3:6;딤전 2:4;딛 2:11, 12). 구약성경에도 드물기는 하나 이방인으로서 구원의 반열에 든 자들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물론 본격적인 이방 전도는 예수의 부활 이후 그 제자들, 특히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에 의해 수행되었으며, 초대 교회 당시 복음 전파의 순서가 먼저 유대인에게였고 그 다음이 이방인에게였다(롬 2:9, 10).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신령한 특권을 곡해하여 독선적 배타주의로 일관하였으며, 이방인들과 교제하는 것조차 불결하게 생각하였다. 따라서 본장에서 예수는 1-23절과 24-37절의 대비를 통해 유대인의 자의적 복음 거부와 그에 따른 이방인에로의 복음 전달 과정을 시사하고 계신다 하겠다(마 8:1-17, 주제 강해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원 관계' 참조).
(3) 제자화 훈련의 일환. 이는 전후 문맥의 흐름과 관련하여 또 한 가지 빠뜨릴 수 없는 사항이다. 예수께서 갈릴리를 떠나 수개월간 이방 땅을 두루 순회하신 중요한 이유들 중 하나는, 다소 한적한 가운데서 열 두 제자들과 좀더 개별적인 교제를 나눌 기회를 갖고자 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날로 살벌해져가는 대적들의 음모와 세상적 욕심에 가득 찬 군중들의 환호를 피해, 예수는 열 두 제자들에게 장차 진행될 일을 조용히 준비시키는 기회를 갖고자 하셨을 것이다. 주님의 공생애에 있어 일대 전환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된 베드로의 신앙 고백 및 메시야의 자기 공개(公開)도 (8:27-31) 이 기간 중에 행해졌다 할 수 있다.
이러한 개괄적인 사항을 염두에 두고 본장의 구체적 내용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상고해 보기로 하자.

1. 유전 논쟁(7:1-23)
씻지 않은 손으로 식사하는 것을 빌미로 예수를 다그치는 대적들에 대한 예수의 반박과 교훈을 실은 내용이다. 본문이 이방인 구원에의 비전을 시사하는 24절 이하 내용에 대한 서론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예수는 대적들의 핍박이 본격화 되어가며 또한 공개적으로 당신의 메시야 신분과 사역을 계시하기 직전의 이 시점에서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의 위선에 대해 정면으로 논박하신다. 물론 앞에서도 금식이나(2:18-22), 안식일에 (2:23-28) 관한 논쟁이 있었지만, 그때에는 주께서 비유 형식으로 논쟁하시거나 당신의 입장과 정당성을 변호하는 데에 그쳤다. 반면, 여기서는 변호의 차원을 넘어서 대적들의 근본적 폐단을 적극적으로 지적하고 계신 것이다. 나아가 마 23:13-39에서는 외식주의자들에 대한 경고가 더욱 신랄하다.
평행 기사인 마 15:1-20의 문단 강해에서 본 논쟁의 성격과 여기 수록된 예수의 교훈의 의의에 대해 설명하였으니 참조하기 바라며, 여기서는 본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예수의 논쟁 방식을 먼저 살펴보고, 이어 예수의 교훈의 의미를 보다 상세히 상고하기로 하자.
(1) 논쟁 방식. 예수께서는 성경 말씀을 근거로 하여 대적들이 들고 나온 문제의 역논리를 제시하심으로써 그들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까지 당신의 훈계와 경계를 제시하셨다.
(가) 예수는 성경 말씀을 논증으로 근거로 삼으셨다. 본문의 대적들이 집착하였던 소위 '장로들의 유전'은 원래 성경 말씀을 더 구체적이고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적용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지만,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그와 같은 경건한 기도와 정신이 사라지고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예수는 출 20:12;21:17 등을 인용하사 대적들의 성경에 대한 곡해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실례로 삼으신 것이다. 이처럼 예수께서 성경 말씀으로써 유대교 지도자들의 그릇된 성경 이해를 반박하신 경우는 10:1-12에도 잘 나타나 있다.
(나) 예수는 대적들이 트집거리로 삼은 문제 자체를 해명하거나 변호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서 그들로 진리를 대적하게끔 만든 본질적이며 궁극적인 원인을 문제시하여 밝혀내셨다. 본문에서 대적들은 식사 전에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한다는 한 가지 의식상의 규례에 집착하여 예수의 제자들을 비난하였지만, 주님은 그들의 신앙을 뿌리채 화석화시키고만 종교적 형식주의와 위선에 대해 책망하신 것이다(사 1:13;29:13;호 6:6;딤후 3:5).
(다) 예수는 먼저 대적들이 들고 나온 전제에서 출발하여 그것과 정반대되는 역논리를 제시함으로써 스스로 자기 모순에 직면하게끔 유도하셨다. 이러한 방법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문제로 예수를 올무에 빠뜨리려 했던 자들에게 주께서 요한의 세례의 출처를 묻는 역질문으로써 그들을 침묵시키셨던 경우에도 사용된 바 있다.
(라) 예수는 그 말씀의 대상을 적대자들->무리들->제자들의 순으로 바꾸어가심으로써 본문의 말씀이 궁극적으로는 제자화 훈련을 염두에 둔 것이었음을 시사하셨다. 한편, 여기 대적들은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자들로서 어찌하든 예수 일행을 모함할 구실만 찾고 있었으므로, 예수께서는 그들과 더불어 진위를 가리는 객관적 논증을 계속하는 것이 구차스러울 뿐임을 잘 알고 계셨다. 따라서 본문의 논쟁은 문자 그대로 논쟁이라기보다는 대적들에게는 주님의 일방적 질책이었고, 제자들에게는 주님의 훈계와 경계의 메시지였다고 봄이 타당하다.
(2) 본 교훈의 의미. 본문에서 예수는 먼저 '하나님의 계명'과 '사람의 유전'을 대조하여 대적들을 공박하신 후에, 형식적 의식(儀式)과 실질적 내면 상태를 대조시켜 정(淨), 부정(不淨)에 관한 새로운 인식을 무리들과 제자들에게 심어주고자 하셨다.
(가) 하나님의 계명과 사람의 유전. (1) 항에서도 설명하였듯이 애초에 '장로들의 유전'이 마련된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보다 상세히 이해하고 일상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적용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본래적 의도와는 달리 적용 과정에서 갖가지 인간적 요소가 개입되어 이 유전들이 하나님의 계명과 동등한 권위를 갖기에 이르고 나아가 실질상으로는 오히려 성경 말씀보다 더 우위의 절대적 구속력을 갖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리하여 성경에 내포된 하나님의 뜻과 진정한 생명과 사랑의 정신이 고갈되고 형식화, 화석화된 죽은 의식절차만 중요시되는 지경에 도달했던 것이다.
그리고 소위 율법 선생이라 자부하는 자들은 약대는 삼키고 하루살이는 걸러내는 거짓되고 모순된 형태를 반복하였다(마 23:24).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예수를 정죄한 것이나(3:1-6),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면서 율법의 더 중한 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버리는 것(마 23:23)등이 바로 '사람의 유전'에 집착한 데서 연유한 오류였다. 당시 일반 백성들은 소위 율법의 선생이요, 해석자로 자처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권위에 압도당해 있었기 때문에, 과연 '장로들의 유전'이 참된 전통인지 혹은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에 대해 누구 한 사람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따라서 유대교 지도자들의 위선과 형식주의를 통렬히 논박하신 본문의 말씀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가히 충격적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계명보다 사람의 유전을 우위에 두는 그러한 폐습은 오늘날에도 반복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따라서 성도는 살아 역사하시는 성령님과의 인격적인 영교(靈交)를 통해 생명력 있는 신앙을 유지하도록 힘써야겠다.
(나) 실질적 내면과 형식적 의식(儀式). 인간적 전통에 연연해 하는 대적들의 허상을 통렬히 공박하신 후, 예수는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무리들과 제자들을 향해 보다 근원적인 문제를 제시하신다. 결과보다는 동기를 그리고 인간의 외양보다는 중심을 중요시하시는 예수의 말씀은 여러 곳에서 강조되고 있다. 특히 예수의 핵심적 교훈들을 집약하고 있는 산상수훈 가운데 마 5:17-48은 성도들이 도달해야 할 높은 의(義)의 수준을 갈파하며, 마 6:1-18에서는 신앙 생활의 내면적 순수성이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가르침은 예배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적용된다. 일요일마다 교회에 출석하며 근엄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고 형식적으로 아멘을 화답하는 것이 예배의 실체가 아니라,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의뢰하며 오직 순종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온 삶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열납되는 영적 예배이다(롬 12:1).
한편, 정(淨), 부정(不淨)에 관한 본문의 새 교훈은 이방인 구원에 관한 메시지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24절 ff. ). 베드로도 이방 사역에 대해 주저하고 있던 차에, 환상을 통해 음식에 관한 정, 부정의 관념을 극복한 연후에야 비로소 이방인인 백부장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였다(행 10:1 ff. ).
예수께서는 당신의 생애 및 죽음과 부활을 통해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성취하시고 옛시대에 속한 의식상의 규례들을 철폐하셨다. 그러므로 성도는 구약의 율법이 예수께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임을 깨달아(갈 3:24) 보다 높고 신령한 차원의 삶의 기준을 제시하는 생명의 성령의 법에 따라 살아가야 할 것이다(롬 8:2).

* 탈무드의 이해.
유대인들이 율법 이외에도 여러 구전 율법이 있다고 생각하여 이를 세부적으로 규정하고 명시해 놓은 탈무드에 대해 그 기원 및 정의, 구성, 한계, 영향 등의 순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기원 및 정의. 유대인들은 오경에 기록된 율법 이외에도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으로 주신 구전 율법이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율법은 원리만을 가르치기 때문에 세세하고 복잡한 현실 생활에 구체적으로 적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상세한 세부 규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문서화된 율법 규례를 해석하고 그 적용 범위를 한정해야 할 필요성도 제기되었다. 더욱이 말라기 선지자를 끝으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점차 단절되어가고 이스라엘 안팎으로 보다 새롭고 복잡한 여러 가지 사회적 관계들이 발전하게 됨에 따라 모세 율법 해석에 관련하여 지속적이고도 점진적인 손질이 요구되었다. 탈무드란 B. C. 300-A. D. 800년 사이에 여러 구전 율법을 집대성하여 문서화한 것을 가리킨다.
(2) 구성. 탈무드는 제 1부인 미쉬나(Mishna, '반복'이란 뜻)와 제 2부인 게마라(Gemara, '보완'이란 뜻)로 구성되었다. 미쉬나는 오경 이외에 구전되어온 율법 규정들을 집성하여 성문화한 것이다. 그리고 게마라는 미쉬나의 보완집으로서 미쉬나에 대한 랍비적 해석을 싣고 있으며, 그 내용은 주로 교훈적 풀이이다. 탈무드는 사상 혹은 문체의 측면에서 학가다(Haggada)와 할라카(Halachah)로 구분되는데, 전자는 지혜와 훈계를 담은 이야기 형태에, 후자는 법규 형태에 해당한다. 한편, 미쉬나와 더불어 탈무드의 원조로서 지적되어야 할 것으로 미드라쉬가 있다. 미드라쉬(Midrash, '구하다', '설명하다'란 뜻)는 구두 율법을 가르치기 위해 최초로 등장한 형식으로서, 오경을 위시한 정경의 주석서에 해당한다. 즉, 성경에는 문자적 의미 이상의 더 깊은 의미가 내포된 것이라 보고 성경 본문에 대한 연속적인 주석을 가한 것이 바로 미드라쉬인데, B. C. 3-9C에 걸쳐 집성되었다.
(3) 한계성. 탈무드가 여호와 신앙이란 전제 하에서 성경을 생활과 좀더 밀착시키기 위한 경건한 의도에 따라 집성된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탈무드는 인간적 판단 기준으로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키거나 복잡한 형식적 규정에 얽매여 율법의 참다운 정신을 망각하게 하는 등 유대교적 한계성을 노출시킬 소지를 다분히 내포하고 있었다. 이러한 한계성은 예수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에게서 여실히 드러났으며, 그들은 소위 사람의 유전(遺傳)으로써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13절) 결국 복음의 장애물이 되게끔 하는 오류에 빠지고 말았다.
(4) 영향. 탈무드는 유대교가 모든 시대와 장소마다 적응하고 모든 사회 상황과 문명의 제단계에 적응하게끔 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발휘해 왔다. 특히 흩어진 유대인들을 민족적, 종교적으로 결집시켜 보존시키는 데에도 큰 공헌을 했다. 오늘날에도 탈무드는 특히 유대민족에게 있어 성경 다음으로 중요한 영적, 도덕적 힘으로 남아 있다. 현재 유명한 탈무드로는 팔레스틴 탈무드와 예루살렘 탈무드 등 두 역본이 있는데, 그 주제와 언어, 형식 등에 있어 많은 차이점을 보여 준다.

2.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치심(7:24-30)
본문은, 예수께서 갈릴리를 떠나 이방 땅 두로에 이르러 이방 여인의 딸을 고치신 내용이다. 계속해서 예수는 시돈과 가이사랴 빌립보 및 데가볼리 등지를 거쳐 다시 갈릴리로 돌아오셨다(지도 '예수의 이방 전도 여행' 참조). 주께서 유대와 갈릴리를 떠나 이처럼 이방 땅으로 여행하신 것은 공생애의 일대 전환점을 앞두고 휴식을 취하며 새로운 준비를 도모하기 위함이었지만, 전후 문맥으로 미루어 볼 때 이방인 구원의 비전을 제시하기 위함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 중점적으로 고찰되어야 할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이방 선교에의 비전.
본문이 본장에서 중심되는 내용이라는 사실은 장 강해에서 언급한 바 있다. 특히 문맥적 견지에서 본문은 앞 단락의 유전 논쟁(1-23절)에 대한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유대교 지도자들과의 논쟁을 통해 의식적 정결에 관한 법을 폐하신 예수께서 본문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민족적 장벽(障壁)을 허물고 계시기 때문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선민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던 관계로 이방인들과는 상종조차 않고 부정시했다. 그들은 선민으로서의 특권을 자랑하였지만, 오만과 편견에 빠져 그 특권을 곡해하여 오히려 복음을 적극적으로 배척하였다. 따라서 예수는 당신의 복음 안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전혀 없음을 밝혀 보이시고자 한 것이다. 물론 예수의 사역의 제 1차적 대상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이었지만, 주께서 궁극적으로는 온 인류의 구세주로 였다(요 1:29). 한편 이방인 선교에 대한 암시는, 예수께서 제 2차 갈릴리 사역 초반에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하인을 치유하신 사실에서 잘 나타났다(마 8:5-13). 또한 더 일찍이로는 예수께서 제 1차 갈릴리 사역 당시 당신의 고향인 나사렛에서 처음 배척당하실 때에도 이방 선교에의 계획을 암시하셨다(눅 4:16-30). 즉, 나사렛 거민들의 배척을 받으신 직후에, 예수는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와 '수리아 사람 나아만'의 경우를 예화로 들어 당신의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될 것임을 암시하셨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주제에 관해서는 마 15:21-28강해에서도 다루었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2)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이 사항에 관해서도 마 15:21-28의 강해에서 상세히 다룬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자.
(3) 주의 크신 긍휼.
질병과 가난 그리고 영혼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온갖 어려움에 직면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사 그들을 위해 봉사하시는 종되신 예수의 사역이 본서 전체에 걸쳐 소개되어 있거니와 본문에서 또한 그러하다.
특히 우리는 주께서 이방 여인의 딸을 긍휼히 여기신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멸시, 천대하여 그야말로 개처럼 여겼지만, 예수는 그러한 독선적 차별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그 여인의 불쌍한 처지를 긍휼히 여기셨던 것이다. 이는 온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의 넓고도 깊으신 긍휼을 잘 보여 준다(마 9:36;14:14;20:34;눅 7:13;요 11:35, 36;히 4:15). 예수께서 긍휼과 자비에 풍성하신 분이라는 사실은, 당신이 주로 상대하셨던 자들의 신분이나 처지를 보면 더욱 명백히 드러난다. 예수는 앞에 나아온 자들은 당대의 권세가들이나 부유층들이 아니라 대부분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는 서민들이나 사회적으로 죄인 취급받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들을 물리치기는 커녕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들을 찾아가셔서 영육간의 아픔을 치유하시고 그 궁핍한 부분을 채워주셨던 것이다.
또한 주께서는 친히 인간의 연약한 육신을 입고서 온갖 고난을 몸소 겪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시고 긍휼히 여기신다(히 4:15). 따라서 우리가 육신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행여나 넘어질 경우에라도 낙심하지 않는 것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손길을 믿기 때문이다(시 37:24).
(4) 기도의 중요성.
신앙 생활에 있어 기도가 차지하는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내밀한 교제를 나누며 필요한 영적 양식을 수시로 공급받기 때문이다. 본문의 기사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첫째로 그녀의 간구는 너무도 간절했다. 자기 자신을 상 아래의 부스러기를 먹는 개에 비유할 정도로 그녀의 심령은 겸비했고 어떻게든 주의 도우심을 얻기 위해 집요하게 간구했다. 이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에 나오는 어느 과부의 간절하고도 집요한 간구를 연상시킨다(눅 18:2-8).
둘째로 그녀의 간구는 비록 자신의 딸이었기는 하나 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 기도의 일례였다. 성경에는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가 응답된 여러 사례들이 있다. 예컨대 본문은 자녀들을 위한 가장 귀한 선물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어머니의 눈물어린 기도의 후원으로써 위대한 신앙 인물이 탄생하게 된 경우를 우리는 기독교 역사상 많이 발견할 수 있다.
한편 예수의 이방 전도 여행 경로를 지도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3.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심(7:31-37)
예수께서 이방 땅을 두루 돌아, 다시 갈릴리 호수에 면(面)한 데가볼리에 이르렀을 때의 치유 기사를 소개하는 내용이다. 마 15:29-31에는 여러 병자들이 치유함받은 사례들이 소개되고 있으나, 본문은 그 중 대표적인 한 경우를 보여 준다. 31절에 짤막하게 언급된 여행 경로가 세부적으로 어떠했으며, 또한 그 여행 중에 어떤 일들이 발생했는지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다. 추측컨대, 이 여행 기간 중 예수는 비교적 한산한 가운데 열 두 제자와 더불어 많은 이야기를 나누시며 지난 일들을 점검하고 앞으로의 일들을 계획하셨을 것이다. 한편 본문의 구체적 내용을 상고함에 있어 그 치유의 방법과 의의의 순으로 살펴보자.
(1) 치유의 방법.
주께서 병자의 양 귀에 손가락을 넣고 침을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신 행위는 결코 주술적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는 원하신다면 단 한 마디의 말씀만으로도 그 병자의 귀와 입을 열리게 하실 수 있었다. 그럼에도 예수께서 이러한 행동을 취하신 것은, 그 치유 권능이 당신께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리기 위함이었으며, 또한 병자로 하여금 자신의 치유 부위를 자각케 하시기 위한 자상한 배려에서였다.
(2) 치유의 의의.
본 치유 사건의 발생 장소가 이방 땅 데가볼리였다는 점에서 본문 앞 단락과 함께 이방 선교에의 비전을 암시한다. 이 사항에 관해서는 장 강해에서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자. 뿐만 아니라 이 치유 사건은 메시야의 자기 계시라는 측면에서 유심히 상고될 필요가 있다. 물론 예수의 모든 이적적 권능들은 이적 그 자체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메시야적 신분을 증거하는 데에 그 일차적 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메시야적 활동의 표시라는 측면에서 본문을 특히 주목하는 이유는, 마가가 사람들의 반응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 말 때문이다(37절).
37절 후반절은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라는 사 35:5, 6의 말씀을 연상시킨다. 이 예언의 말씀은 장차 도래(到來)할 메시야 왕국에서 체험하게 될 놀라운 축복들을 시적으로 노래한 내용인 것이다. 그리고 '그가 다 잘하였도다'는 말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사실을 연상시킨다(창 1:31). 성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완전하였듯이,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곧 새 창조 사역 또한 완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치유 행위 결과 그 병자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해졌음에 유의하자. 이는 치유가 점진적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완벽하게 행해졌음을 가리킨다. 천지 창조시에 하나님의 한 마디 명령에 따라 그 즉시로 삼라 만상이 순서대로 창조되었듯이(창 1:3, 9, 15등), 예수의 치유 행위 또한 완벽하고 즉각적이었다. 마가가 이렇듯 본 치유 사건에 담긴 메시야적 의미를 부각시킨 것은 바야흐로 예수의 공생애에 있어 일대 전환점에 가까왔음을 알리기 위함이라 하겠다.
이제 8:27-31에서는 메시야의 신분과 그 사역의 본질이 공공연하게 계시되거니와 본사건은 바로 그러한 자기 공개를 미리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향후로 고난받는 종의 주제는 더욱 확연히 부각되어가며 예수의 사역 또한 열 두 제자들을 집중적으로 훈련시키는 일에 보다 큰 비중이 주어지게 된다. 부언컨대, 본문은 육신의 질병 뿐만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영적 질병가지도 치유하시는 전무후무한 의사이신 예수를 증거한다.

* 에바다의 영적 의미.
'에바다'는 '열리라'는 뜻의 아람어이다. 이외에도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아람어로는 '달리다굼'(5:41), '아바'(14:36),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15:34)등이다. 당시 팔레스틴 어디에서나 통용되던 말은 헬라어였고, 아람어는 갈릴리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가정에서 주로 사용되었다(신약서론 중 '신약의 언어'참조). 주님과 그 열 두 제자들은 데가볼리와 시리아 및 페니키아의 이방인들에게 둘러싸였던 갈릴리 지방 출신으로서 아람어가 모국어나 다름없었다. 본문에서처럼 아람어를 그대로 수록한 것은 예수의 표현을 실제 그대로 보존하려는 욕망과 치유 행위에서 나타난 초자연적 권능에 대한 감동을 증진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반영한다. 한편 예수께서 말씀 한 마디로 고치신 귀먹고 어눌한 자는 영적으로 볼때 심령의 귀와 양심의 혀가 각각 마비된 자를 생각하게 한다. 즉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을 듣지 못하는 심렴의 귀먹은 자와, 의와 진실을 말해야 함에도 자신의 안일을 위해 침묵하는 마비된 양심의 혀를 가진자가 연상된다. 실로 이와 같이 하나님의 조용한 음성을 외면하고 자기 위주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 곧 오늘 이 세상이 겪어야만 하는 비극과 불행의 원인이 된다. 그리고 비겁하게 침묵하는 혀가 많은 것이 곧 오늘 이 세상의 부정과 부패의 가장 큰 원인이 된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귀먹고 어눌한 자를 치유하신 그 예수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시사, 영적으로 닫힌 우리의 귀와 입을 여시기 위해 '에바다'를 명하신다는 점이다. 주께서는 세상일만 말하던 자를 치유하사 당신의 복음을 증거케 하실 수 있으며, 하나님을 대적하던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실 수 있다. 그리고 완악한 귀를 열어 복음의 비밀을 깨우치게 하실 수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일은 우리의 현재 영적 상태를 직시(直視)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닫혀진 귀와 입에 대해 절망할 것이 아니라, '에바다'라는 말씀 한 마디로 능히 치유하시는 주께 전폭적으로 자신을 내어 맡겨야 할 것이다(시 37:5;사 26:4;50:10;딤후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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